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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5) 오산 궐리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5) 오산 궐리사 은행나무

    나무의 생명력은 놀랍다. 나무 종류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살아가는 힘은 신비의 경지에 닿아 있다. 그 가운데 은행나무의 생명력은 더 경이롭다. 3억 년 전 이 땅에 처음 뿌리를 내린 은행나무는 빙하기와 같은 멸종의 위기까지 다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화석식물’이라 일컫는 근거다. 심지어 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의 폭격을 받은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피폭 반경 2㎞ 지역에서 자라던 은행나무 가운데 여섯 그루가 이듬해 봄에 언제 그런 위기가 있었느냐는 듯 푸른 싹을 틔우기까지 했다. 불과 100년을 채 못 사는 사람으로서 3억 년을 이어온 은행나무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불손한 일인지 모르겠다. ●궐리사의 역사와 함께 한 나무 경기도 오산시에는 죽은 지 250년이 지난 뒤에 다시 소생한 은행나무가 있다. 현대 과학에서는 250년 동안 죽어 있던 나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과연 과학만으로 나무의 신비를 가름하는 게 가당한 일인가. “긴 세월 동안 죽어 있던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는 걸 우리조차 믿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우리 조상이 모두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경기도 오산시 궐리사를 지키는 은행나무 이야기다. 신비로운 은행나무 너른 그늘 아래 근사하게 들어앉은 부속건물인 양현재 마루에서 얼마 전까지 궐리사 도유사(都有司·향교나 서원의 우두머리)를 지냈고, 지금은 한문, 논어, 서예 등을 강의하는 임대호(82) 원로위원이 나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은행나무를 빼놓고는 궐리사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도 없고, 궐리사의 모든 가르침을 이야기한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요. 그만큼 저 은행나무 한 그루는 우리 궐리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 셈입니다.” 죽음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새로이 생명을 일으켰다는 은행나무 이야기를 하려면 하릴없이 궐리사의 역사를 짚어보아야 한다. 궐리사의 역사는 조선 중종 때 승지, 대사헌 등을 지낸 공자의 64대손 공서린(孔瑞麟, 1483~1541)이 기묘사화에 연루돼 낙향하여 이곳에 강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데에서 시작한다. 공서린은 강당을 지은 뒤, 잘 자란 은행나무를 골라 강당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나뭇가지에 북을 매달고, 학동을 불러 모으거나 면학을 독려하는 수단으로 썼다.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에서 가르침을 베푼 것과 마찬가지로 공서린에게도 은행나무는 후학 양성에 꼭 필요했던 상징이었다. ●생명의 신비로운 소생으로 궐리사 복원 그러나 그는 후계 양성에 내로라할 만한 업적을 내놓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그의 강당과 주변은 폐허로 변했고, 나무도 주인의 운명을 따라 고사(枯死)하고 말았다. 학문 연마의 소임을 이끌어 줄 주인을 잃고 생명의 끈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로부터 250년쯤 뒤인 1792년, 죽음에 들었던 은행나무가 기적처럼 소생의 기운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정조 즉위 16년 즈음의 일이다. 당시 정조는 부모인 사도세자의 묘를 모신 화성(현재의 수원)을 자주 찾았는데, 한양에서 화성을 가려면 궐리사 앞을 거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하들에게 이 마을이 공자의 후손인 공씨 집성촌이며, 마을 안에는 중종 때의 선비 공서린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었던 강당 터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기적처럼 소생한 은행나무가 무척 빠르게 자랐다고 해요. 한두 해만에 주변에 너른 그늘을 드리울 정도의 큰 나무로 자라났지요. 그러자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몰락했던 공씨네가 다시 부흥하려는 조짐이라고 했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정조는 수원 화성을 쌓고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이 은행나무를 발견했고 나무에 얽힌 신비로운 이야기도 들었다. 아울러 원래 이 자리가 공서린의 강당터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정조는 경기감사에게 이 자리에 옛 사람들의 뜻을 되살릴 수 있는 흔적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공자의 사당을 지으라는 이야기였다. 임금의 지시에 따라 착공된 공자의 사당이 완공되자 정조는 ‘궐리사’라는 이름의 사액을 손수 내려 보냈으며, 마을 이름도 공자의 고향인 중국 곡부현 궐리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서 ‘궐리’로 고쳐 부르라고 했다. ●민족정신 자산으로 지켜야 할 문화유산 처음에는 공자의 사당을 지었지만, 차츰 교육 기능이 보태지면서 궐리사는 마을의 중심이 됐는데, 그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 철퇴를 맞는 화근이 됐다. 지금의 궐리사는 그로부터 얼마 뒤인 1892년 전후에 마을 선비들의 성금으로 복원한 건물들이다. “예전에는 우리 궐리사 사람들이 애지중지 키웠지요. 하긴 워낙 성성한 나무여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건강하게 잘 자랍니다. 게다가 보호수로 지정된 1982년부터는 굳이 우리가 돌보지 않아도 관계기관에서 잘 보호해줍니다.” 죽음의 곡절을 딛고 다시 융융하게 일어선 궐리사 은행나무는 처음 이곳에 뿌리를 내린 때부터 500년 세월 동안 공자 정신의 상징이자 화두로 살아왔다. 곡절 속에서도 나무는 17m까지 제 키를 키워 올렸고, 줄기 둘레는 5m 가까이에 이른다. 굵은 줄기가 솟아오르면서 모두 15개의 크고 작은 가지로 나뉘어 솟구친 나무의 모습은 여느 노거수 못지않게 장한 자태다.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일으켜 세운 건 필경 나무에게도 뜻이 있어서일 게다. 아마도 이 땅에 뿌리내린 한 생명으로 이 민족 정신사의 한 축을 오래 지켜야 한다는, 그를 심은 사람의 뜻을 이어가려는 나무의 갸륵한 뜻이지 싶다. 글 사진 오산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기 오산시 궐1동 147. 경부고속국도의 오산나들목으로 나가서 직진하여 운암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우회전한다. 600m쯤 간 뒤 좌회전하여 1㎞ 남짓 가면 남촌오거리가 나온다. 오산대학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다시 1㎞쯤 가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이 즈음에는 도로 안내판에 ‘궐리사’ 표시가 나오니, 주의를 기울이면 찾아갈 수 있다. 이 길을 천천히 가면 오른쪽으로 궐리사가 보인다. 200m 못 미처쯤에서 궐리사 앞 주차장이 나온다. 나무는 궐리사 담장 바깥에서도 건물보다 먼저 훤히 보인다.
  • 지금 절정… 봉평 메밀꽃밭

    지금 절정… 봉평 메밀꽃밭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구절입니다. 해마다 메밀꽃 필 때면 여기저기서 간단없이 흘러나오는 문구지요. 달 뜬 밤, 메밀꽃밭을 거닐자면 이효석의 묘사가 얼마나 정확하고 또 아름다웠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달빛 받은 메밀꽃이 별처럼 반짝이는 풍경, 상상이 되시나요. 그 메밀꽃이 지금 강원 봉평에 가득합니다. 전국에 메밀밭은 많습니다. 하지만 문학의 향기가 깃든 메밀밭은 봉평이 유일할 겁니다. 메밀은 희다. 반면 껍질은 검다. 예전엔 맷돌에 그냥 갈았다. 껍질과 알곡을 함께 빻았으니 메밀가루도 거무스름할 수밖에. 요즘엔 도정 방식이 개량됐다. 껍질 가운데를 잘라 메밀만 쏙 빼낸다. 그래서 요즘 메밀은 희다. 하지만 뜻밖에 사람들은 흰 메밀을 믿지 않는다. 빛깔도 탁하고, 맛도 덜한 옛것만 찾는단다. 구황식물이었던 메밀이 볼거리가 될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너른 들녘이며, 비탈진 산허리, 심지어 집 텃밭까지 흰 메밀꽃 천지다. 봉평의 메밀 재배면적은 66만㎡(약 20만평)에 이른다고 한다. 과장을 좀 보태면, 봉평 땅 전체에 메밀꽃 하얀 융단이 깔린 듯하다. 가산 이효석(1907∼1942)이 읊조렸던 그 문장에 가장 걸맞은 풍경을 품은 곳은 봉평면 창동리의 ‘효석 문학의 숲’이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줄거리를 재현한 숲속문화 체험공간이다. 전체 면적은 52㏊에 이른다. 장돌뱅이 허 생원이 나귀 몰아 향했던 봉평장터, 동이와 허 생원이 상봉한 주막집인 충주집, 허 생원이 성씨 처녀를 통해 일생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된 물레방앗간 등이 조성됐다. 주변엔 자작나무와 소나무 등을 심어 운치를 더했다. 500m의 소설길과 2.7㎞의 등산로 등을 조성하고, 돌배나무와 벌개미취 등도 식재했다. 메밀꽃밭은 문학의 숲 초입과 산자락 중턱 등 두 곳에 조성됐다. 거추장스러운 부대시설 없이 자연 그대로의 수수한 메밀꽃밭과 마주할 수 있다. 특히 산허리에 조성된 메밀밭이 장관이다. 멀리 회령봉 등 1000m가 넘는 고산준령들이 아련하고, 그 안쪽의 산촌마을 위로 메밀꽃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문학의 숲은 오후 6시가 넘으면 문을 닫는다. 봉평은 이효석이 나고 자란 곳이자, 그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된 곳이다. 소설의 무대였던 현장들도 재현되어 있다. 봉평면소재지에서 남안교를 건너면 효석문화마을이다. 공원에 세워진 이효석 동상 뒤로 충주집이 보인다. 장돌뱅이들이 술추렴을 하던 주막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오래전 실재했던 충주집은 이효석이 학창시절에 도시락을 맡겨놓았다가 점심을 먹곤 했던 곳이라 전해진다. 실제 집터는 봉평장터 옆 주택가에 표지석으로만 남았다. 남안교 옆은 물레방앗간이다. 손으로 돌리던 재래식 탈곡기와 먼지가 내려앉은 방아가 여행객을 맞고 있다. 효석문화마을 산자락엔 복원된 이효석의 생가와 그가 평양에서 살던 푸른집 등도 조성되어 있다. 언덕 위의 이효석 문학관엔 그의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소설의 향기 좇아 걷는 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장돌뱅이 허 생원은 흥정천을 따라 밤길을 걸었다. 봉평에서 장평을 거쳐 대화에 이르는 팔십 리 길이다. 이효석이 생전 걸었던 길도 그와 닮았다. 봉평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대처였던 평창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필경 평창에서 하숙을 했을 텐데, 일요일이나 방학 때면 허 생원이 다녔던 그 길을 따라 평창과 봉평을 오갔을 게다. 대화는 봉평과 평창 사이에 있다. 평창군에서 ‘효석문학 100리길’을 조성하고 있다. 이효석과 허 생원이 걸었던 봉평에서 평창까지 49.2㎞에 이르는 길이다. 현재는 5개 코스 가운데 제1구간인 ‘문학의 길’(7.8㎞)만 열렸다. 봉평관광안내센터를 출발해 흥정천교~팔석정~백옥포마을∼용평여울목까지, 소설의 향훈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길이다. 난이도는 높지 않다. 자박자박 걸어도 채 3시간이 안 걸린다. 이 길에서 만나는 뜻밖의 풍경이 팔석정이다. 강릉부사 양사언이 빼어난 경치에 반해 정사를 멀리한 채 8일간 노닐었다는 곳이다. 바위 여덟 곳에 석대투간(石臺投竿·낚시하기 좋은 바위) 등의 글을 새겨 놓아 팔석정이라 불린다. 맑은 흥정천이 적송이 어우러진 팔석정을 휩쓸며 흘러가는 모양새가 제법 도도하다. 평창효석문화제(www.hyoseok.com)가 오는 16일까지 봉평면 효석문화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효석문학 100리길 걷기’ ‘효석백일장’ 등 다채로운 문학행사가 줄을 잇는다. 이효석문학관에서는 1968년 제작된 영화 ‘메밀꽃 필 무렵’을 감상할 수 있다. 마당놀이·인형극 등 풍성한 공연도 마련된다. ●봉평장에서 만나는 넉넉한 풍경들 봉평장을 둘러봐도 좋겠다. 봉평장은 매달 2, 7일로 끝나는 날에 선다. 여느 재래시장과 달리 ‘신식’ 건물로 지붕을 이지 않아 흐릿하게나마 옛 정취가 살아 있다. 봉평장은 예부터 대화, 진부장 등 보다 규모가 크기로 유명했다. 요즘엔 메밀축제나 스키 시즌에 외지인들이 놓치지 않고 들르는 관광지가 됐다. 봉평에 전을 차린 상인들은 내일이면 진부, 모레는 대화, 글피에는 평창이나 둔내에 같은 전을 다시 펼친단다. 수수 부꾸미 하나 입에 넣고 장터를 기웃댄다. 메밀 모주와 막걸리를 거푸 들이켜 불콰해진 어르신이며, 메밀 전병과 메밀전을 앞에 놓고 자지러지게 웃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모습들을 보자니 시간이 옛날로 회귀한 느낌이다. 장터에 각설이 노래판이 빠지랴. 이들이 해학 넘치는 ‘트로트 메들리’를 이어갈 때면 손님들의 입가엔 웃음꽃이 매달린다. 장터에서 가장 많은 건 역시 메밀 관련 제품들이다. 삼천포 왕쥐포, 계절의 진미 전어 등 갯것들도 눈에 띈다. 봉평장에선 ‘글로벌리즘’도 유효하다. 제법 너른 좌판을 깐 외국인들이 눈에 띈다. 케냐에서 왔다는 모자는 다양한 목각 소품들을 전시했고, 터키에서 온 남정네는 연신 ‘형제의 나라’를 강조하며 케밥을 ‘강매’하고 있다. 수수 부꾸미로 배를 채웠고, 주전부리로 산 옥수수 알들은 입안에서 청포도처럼 터지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없다. 글 사진 평창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수도권에서 승용차로 출발한다면 영동고속도로 장평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좋다. 구불구불 옛 국도를 따라 천천히 가겠다면 면온나들목도 좋다. 평창군청 문화관광과 330-2771. 우리테마투어(www.wrtour.com)는 23일까지 매주 금~일요일 서울에서 봉평, 대관령 양떼목장 등을 다녀오는 당일 여행상품을 판매한다. 3만 3900원. 맛집:봉평 읍내 미가연(335-8805)은 메밀음식 특허를 3개나 보유한 식당. 메밀싹 육회 비빔밥·쓴메밀 국수·메밀싹 주스 등 별미를 맛볼 수 있다. 평창한우마을(334-9777)에서는 30% 이상 싸게 한우숯불구이를 즐길 수 있다. 상차림비 4000원은 별도다. 잘 곳:평창 북쪽에 용평리조트(1588-0009), 휘닉스파크(1588-2828) 등 대형 리조트가 있다. 봉평 쪽에서는 W모텔(333-2004)이 깨끗하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4) 상주 용포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4) 상주 용포리 느티나무

    300년쯤 된 느티나무 한 그루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 조경 전문가라면 나무의 생김새나 규모를 보고 금세 값을 계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나무의 가치를 가늠하는 게 가능할까. 오래된 나무에는 필경 긴 세월의 풍진을 이겨낸 생명의 애옥살이는 물론이고, 나무를 심고 가꾸어온 조상들의 정신과 나무에 기대어 살아온 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그동안 나무로부터 얻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얻게 될 물리적 정신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당산나무, 정자나무 등으로 사람살이의 그늘이 되어,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나무라면, 그 값은 쉽게 매길 수 없다. ●15가구가 3300만원 모으기까지 “느티나무가 있다고 해서 당장에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나무가 해마다 풍년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고, 또 나무에 치성을 드린다고 해서 당장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경북 상주시 낙동면 용포리 평오마을의 이인희(54) 이장은 나무를 통해 큰 덕을 얻을 건 없다고 단언한다. 그 점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 어귀에 서 있는 한 쌍의 느티나무를 지키기 위해 가구당 200만원씩이라는 결코 작지 않은 돈을 선선히 내놓으면서까지 나무를 지켜냈다. 사건은 3년 전인 2009년 여름에 시작됐다. 마을 어귀에 다정하게 서 있는 한 쌍의 느티나무가 마을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나무 수집상에게 팔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무가 서 있는 땅 주인이 나무의 값을 매겨 내놓은 것이다. 창졸간에 300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나무가 사라지게 됐다. 평오마을 사람들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마을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나무를 지나쳐야 했기에 오랫동안 할배 할매처럼 친근하게 느껴온 생명체였다. 그를 그렇게 떠나보낼 수 없었다. 수심 속에 가을걷이를 끝낸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나무를 지킬 방도를 궁리했다. 오랜 궁리 끝에 먼저 각계에 탄원서부터 내기로 했다. ‘나무 이식 반대에 관한 주민 동의서’를 작성해 전체 주민의 동의를 받아 상주시청과 상주경찰서에 탄원서를 냈다. 주민들은 ‘할배 할매나무’라 부르는 한 쌍의 느티나무를 마을 역사의 산 증거이자 상징이라 했으며, 마을의 길흉화복을 같이하는 동반자이며 수호신이라 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는 나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탄원서 보내고 나무 수집상 설득하고 탄원서를 받은 상주시에서는 나무와 마을 환경을 조사했다. 나무는 이미 1997년에 보존 대상의 노거수로 지정된 바 있지만, 보다 치밀한 조사가 필요했다. 상주시는 전문가들의 조사를 거쳐 2010년 4월 27일에 나무를 보호수 10-08-01로 지정했다. 보호수 지정 절차는 마쳤으나, 그렇다고 상황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무 수집상은 이미 땅 임자에게 나무의 값, 1100만원을 치렀고, 나무 이식을 막는 주민들을 업무방해로 고소하고 손해배상까지 청구한 상태였다. 나무 수집상은 막무가내였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끝까지 나무를 지켜내기 위한 묘책을 강구했다. 나무 값을 치르더라도 나무만은 지키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가 돈이 어디 있겠어요. 한푼 두푼 모은 것과 대처에 나가 사는 자식들에게 돈을 좀 달라 해서 모았지요. 저 할배 할매나무 없이 우리가 어찌 살겠어요. 나무 없는 우리 마을 풍경은 상상이 안 돼요.”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임기수(66)씨의 이야기다. 나무 수집상에게 나무를 옮겨가지 않는다는 온전한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모두 3300만원이 필요했다. 모두 해야 15가구밖에 안 되는 마을에서 집집마다 200만원씩 내기로 했다. 농촌 마을에서 200만원이라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지만, 마을의 상징이자 분신처럼 여기는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흔쾌히 내놓겠다고 모두가 동의했다. 나무를 잃는 건 자신들을 낳아 키운 조상들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수굿이 돈을 모았다. 나무 수집상과의 합의는 마침내 2010년 7월, 한참 농사 일로 바쁜 철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지난 2011년 5월에는 경상북도에서 마을에 감사패를 수여했다. 각박한 현대 생활에서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애쓴 마을 사람들의 노고를 두고두고 치하한다는 뜻에서였다. ●마을의 역사를 담고 서 있는 큰 나무 조선시대 때는 이 마을이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마을에 관리들의 쉼터인 오리원과 마방을 세우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사라진 마을의 오랜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건 한 쌍의 느티나무뿐이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인근에서도 유명한 나무예요. 옛날에는 영남 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나그네들의 중요한 쉼터이기도 했고, 요즘은 이 근방 사람들이 만날 약속을 하는 아주 중요한 자리가 바로 우리 나무이죠.” 평오마을로 귀농한 지 8년째인 박성하(57)씨는 나무를 지켜낸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나무는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 지켜졌다. 도저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무의 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돈을 흔쾌히 내놓았다. 제 앞가림만으로도 허청대는 요즘 세상에서 평오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지켜낸 일은 흔치 않게 기억해야 할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 쌍의 느티나무를 지켜내고자 싸웠지만 정작 사람들이 지켜낸 건, 바로 사람살이의 안녕이었고, 조상들의 삶과 철학이 담긴 마을의 역사였다. 느티나무 앞에서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글 사진 상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북 상주시 낙동면 용포리 31. 중부내륙고속국도의 상주나들목으로 나가서 선산 방면으로 1.4㎞ 가면 헌신교차로가 나온다. 우회전해 1㎞쯤 간 뒤 오른쪽으로 난 성동리 방면 도로로 빠져나간다. 3㎞쯤에서 나오는 삼거리에서 화산리 방면으로 우회전해 2.2㎞ 직진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우회전해 2㎞ 남짓 가면 지방도로 916호선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좌회전해 4㎞쯤 가면 왼편으로 낙동초등학교 용포분교가 나오고 그 옆에 낙동농협 용포지소가 있다. 나무는 농협지소 뒤편 마을 어귀에 있다.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7) 충북 단양군 삼봉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17) 충북 단양군 삼봉로

    유장한 물줄기는 길을 따라 둥그렇게 굽이쳤다. 물줄기 곁에 새로 터를 잡은 마을을 복주머니 모양으로 감싸고 돌았다. 사람들은 충주호에 잠긴 땅을 떠나 새로 만들어진 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들은 변함없이 남한강에 그물을 던져 쏘가리, 메기 등속을 잡았고, 오랫동안 그래왔듯 매년 가을마다 육쪽 마늘밭을 일궜다. 충북 단양군 이야기다.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1342~1398)이 단양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와 최소한 이곳에서만큼은 사실(史實)로서 회자되고 있다. 또한 현대사 속 시대와 불화했던 비운의 시인이자 뛰어난 출판편집자인 신동문(1928~1993)이 문필을 꺾고 이곳으로 찾아들어 밭을 일구며 말년을 보냈다. 단양 사람들은 그의 시비를 만들어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 끼워 넣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삼봉로를 중심축 삼아 씨줄날줄로 얽혀 있다. 삼봉로에 기대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로명 주소는 꽤 친숙했다. 외지인이 흔히들 찾는 장다리식당(삼봉로 370)이며 돌집식당(중앙2로 11), 대교식당(중앙2로 9) 같은 제법 유명한 식당에 전화로 위치를 물어보니 “어디세요. 차 가지고 오시면 삼봉로 ×× 찍으시면 돼요.”라고 대뜸 도로명 주소를 얘기한다. 1985년 계획지구로 조성돼 길이 비교적 간명하게 만들어졌고 유서 깊은 옛이야기와 현대 문화사의 인물 등이 잘 버무려져 생활 속에 밀접하게 들어와 있는 덕분이다. 횡으로 늘어선 삼봉로에서 수변로, 중앙로, 도전로, 별곡로, 상진로가 종으로 삐져 나와 있다. 아무튼 삼봉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만나는 식당마다 순댓국도 마늘순댓국, 갈비탕도 마늘갈비탕, 밥도 마늘밥, 떡갈비도 마늘떡갈비 등 온통 마늘 음식 천지다. 여기에 대강양조장(대강로 60)에서 만든 소백산 막걸리를 곁들이면…. 그 맛을 기억하는 이들이 입가를 스윽 훔치며 즐겨 찾을 만한 길이다. 하지만 식도락만으로 만족하기에 삼봉로가 품고 있는 문화적, 역사적 함의는 너무도 크다. ●‘신동문 시비’ 소금정 공원에 위치 신동문이라는 이름은 어지간한 문학 딜레탕트에게도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신동엽, 김수영 등과 같은 1960년대 현실 참여시인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1960년 4·19혁명을 태평로 길 위에서 직접 봤고, 사회 변혁에 대한 확신을 총칼에 맞서는 청년의 거친 숨결 속에서 품는다. 그리고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群)들’이라는 108행에 이르는 격정의 장시를 써내려갔다. 신동문은 시인이면서 또한 기획력 번뜩이는 편집자이자 문단의 마당발이기도 했다. 잡지 ‘새벽’의 편집주간이던 그는 문예지도 아닌 그 잡지에 최인훈의 중편소설 ‘광장’을 게재한다. 이후에도 신구문화사, 사상계, 창작과비평사 등 진보적 문학주간지의 토대를 닦고 당대 시인, 문인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자임했다.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야 함은 남은 자의 당연한 몫. 중앙고속도로 단양나들목을 나와 5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면 상진대교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삼봉로가 시작된다. 차로 5분 남짓만 가면 대명리조트(삼봉로 187-17), 청소년수련관(삼봉로 187-18) 바로 길 맞은편에 소금정 공원이 있다. 남한강 기슭과 삼봉로 사이에 좁고 길게 위치한 공원이다. 주거하는 건물이 아니기에 도로명 주소는 따로 없다. 이 공원 입구에 바로 신동문 시비가 있다. 화강암 너럭바위에 새겨 놓은 시편은 ‘내 노동으로’의 마지막 세 번째 연이다. 그가 마지막 남긴 시다. 굳이 전문을 읽지 않더라도 그의 절절했던 고뇌가 스며온다. 신동문은 문득 절필한 뒤 1975년 서울을 등지고 단양으로 낙향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계속된 독재정권이 그를 낙담케 했음은 훗날 사람들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에서 포도밭을 가꿨고, 침술을 배웠다. 마지막 떠날 때까지 18년 동안 약 10만명에게 무료로 시술해 줬고, 일대에서는 그를 ‘신바이처’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경주 단양군 민원봉사과장은 “신동문 선생은 병원을 찾을 수도 없이 가난한 이들의 병을 침술로 치료해 준 뒤 치료비 걱정에 쭈뼛거리고 있으면 씩 웃으며 ‘노래나 한 자락 불러 봐라’하며 돌려보냈다고 들었다.”고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가 생전을 보낸 집은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빈집으로만 남아 있다. 옛 중앙선 철길을 따라 수양개 선사유물전시관 가는 길 왼쪽에 있지만 아무런 표지도 없어 쉬 찾기 어렵다. ●정도전의 지략 서린 도담삼봉 물론 단양 하면 소년 정도전의 지략과 담대함이 서린 도담삼봉을 빼놓을 수 없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과정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 사상가이자 지략가였다. 그에 앞서 낡은 체제를 바꾸고자 했던 혁명가였다. 비록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불운의 정도전이지만 단양땅에 와서는 민간설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의 호가 삼봉이라는 점, 아호가 종지라는 점 등을 가운데 놓고 얘기는 살을 붙이고 몸집을 키워 간다. 지현숙 단양군문화관광해설사협회장의 얘기인즉슨, 본래 강원도 정선에 있던 도담삼봉이 홍수로 떠내려 왔단다. 정선군에서 자꾸 도담삼봉에 대한 세금을 내라고 요구하자 그 지역 관아들이 쩔쩔 매고 있는데, 그때 소년 정도전이 나타나 “도담삼봉 때문에 오히려 물길이 막혀 홍수가 나니 도로 가져가라.”고 했단다. 모두 소년 정도전의 총명함에 고개를 주억거렸고…. 여기에 정도전의 아명인 종지(宗之)도 사실은 단양에서 가장 높은 양백산전망대인 종지봉에서 따왔다는 얘기가 덧붙여졌다. 종지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고 해서 종지봉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선후관계는 알 수 없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단양 사람들의 정도전에 대한 자부심이다. 뭐래도 좋다. 도담삼봉에 가려면 삼봉로를 따라 뱀허리처럼 굽이치는 남한강을 오른쪽에 끼고 돌아 상류로 거슬러 가야 한다. 도담삼봉 터널을 지나자마자 떡하니 모습을 드러낸다. 바위로 이뤄진 세 개의 봉우리에 각각 처봉, 남편봉, 첩봉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자욱한 아침 물안개가 피어 있는 모습이나 남한강이 흘러 돌아가는 풍경이 아름답다. 김홍도와 최북 등 조선 후기에 도담삼봉을 그림으로 그린 이들이나 당대의 문인들이 써내려간 한시(漢詩)가 100편이 넘는다 하니 도담삼봉 휴게소 건물(삼봉로 644-13)에 오르거나 10분 남짓의 발품을 팔아 석문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도담삼봉이 특히 멋지다. 글 사진 단양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18회는 광주 북구 민주로를 소개합니다.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넘실넘실 남한강 옆 도담삼봉… 꿈틀꿈틀 노송 앞 사인암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넘실넘실 남한강 옆 도담삼봉… 꿈틀꿈틀 노송 앞 사인암

    ‘도담삼봉, 석문, 옥순봉, 구담봉,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단양군이 자랑하는 단양팔경이다. 삼봉로를 따라가며 만날 수 있는 도담삼봉과 홍교 모양의 석문은 굽이치는 남한강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로 단양팔경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힌다. 특히 석문에서는 대지의 여신이자 대지의 어머니로 민간 신화 속에 등장하는 마고할미바위를 만날 수 있다. 술과 담배를 즐긴 호탕한 마고할미가 담뱃대를 물고 술병을 들고 있는 모양이라는 설명이다. 상봉로가 시작하는 들머리에서 상진대교를 지나면 단양로다. 단양 나들목 방향으로 따라가다가 대강면사무소 앞에서 우회전하면 사인암로다. 단양팔경의 사인암,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을 잇따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경치의 풍광 특색은 하나다. 기암괴석과 너른바위, 여울져 흐르는 계곡물이다. 까마득한 기암절벽의 장엄함과 노송의 고단함을 보려면 사인암, 큼지막한 바위 사이에서 때로는 뚫어가며, 때로는 돌아가는 선암계곡 물줄기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고자 한다면 하선암, 중선암을, 잔잔하면서도 평온한 계곡의 정취를 원한다면 상선암이다. 문경까지 이어지는 18㎞가 넘는 선암계곡로를 달리기만 해도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직 단양팔경 중 두 곳이 남았다. 하선암을 내려와 선암계곡로를 따라 왼쪽으로 계속 가면 월악로를 만난다. 제천, 충주 방향으로 10분 남짓 거리에서 구담봉과 옥순봉을 맞닥뜨릴 수 있다. 충주호 관광유람선의 거점이다. 뱃전에 서서 물에 비친 거북이 모양의 구담봉과 죽순 모양의 죽순봉을 찬찬히 둘러보며 물에 잠겨 떠난 실향민의 시름을 되새겨보는 한편 단양팔경 유람을 마친 자신의 노고를 치하하면 마무리된다. 단양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서울·경기 최고 200㎜ 폭우 ‘초비상’

    서울·경기 최고 200㎜ 폭우 ‘초비상’

    매미와 루사를 능가하는 초특급 태풍 볼라벤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 28일 오후 2~3시쯤 수도권에 근접할 것으로 보여 큰 피해가 우려된다. 볼라벤은 우리나라를 지나는 동안 중심기압 최대 950~960헥토파스칼(h㎩), 초속 40m의 위력을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강풍 반경도 400㎞를 넘어 서울과 수도권은 물론 전국이 볼라벤의 위력에 빠져들게 됐다. 특히 서·남해안에는 초속 50m 안팎의 강풍이 몰아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만조가 겹쳐 해일 가능성도 높다. 기상청은 28일 오전 7~8시 전남 완도에 최대 114.6㎝, 진도에 79.8㎝ 높이의 해일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도 내륙 쪽으로 서풍이 불면서 인천에 80.5㎝ 높이의 해일이 발생할 것으로 보여 침수 피해가 우려된다. 서울·경기·남부·중부 지역에도 50~200㎜의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보인다. 서해안 일대의 일부 고속도로도 통제될 전망이다. 한국도로공사는 상황에 따라 28일 서해안 고속도로의 서해대교 운행이 통제될 수 있다고 밝혔다. 도로공사 관계자는 “서해대교 운행이 통제되면 목포 방향 서평택나들목, 서울 방향으로는 송악나들목 지점이 통제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인천교통공사도 28일 출퇴근 시간대 시민 이동 편의를 위해 지하철 집중 배차 시간을 연장하고 열차 운행 횟수를 늘리기로 했다. 출근 시간대를 기존 오전 7~9시에서 오전 7~10시로, 퇴근 시간대는 오후 5~8시에서 오후 5~9시로 각각 1시간씩 연장한다. 서해안 연안 바닷길은 27일부터 배편이 끊겼고 항공편 결항도 속출했다. 각 가정에서는 태풍에 대비해야 한다. 창문은 빈틈없이 닫아야 하며 유리창에 엑스(X)자 형태로 청테이프를 붙이거나 젖은 신문지를 전면에 부착하면 강풍에 의한 파손을 막을 수 있다. 대피할 때는 수도와 가스밸브를 잠그고 전기차단기를 반드시 내려야 하며 전신주나 가로등, 신호등과는 멀리 떨어지는 것이 좋다. 또 농촌에서는 시설 피해가 없도록 조치하고 선박은 단단히 결박해 파도에 밀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태풍 볼라벤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27일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1시간 동안 11만 4058명이 기상청 홈페이지에 접속해 사상 최고 접속 기록을 갈아치웠다. 기상청은 사재기를 부추기는 등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을 통한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며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다. 김동현·신진호·명희진기자 sayho@seoul.co.kr
  • 현대百 14번째 점포 ‘충청점’ 24일 연다

    현대百 14번째 점포 ‘충청점’ 24일 연다

    현대백화점이 충북 청주시에 14번째 점포를 열고 충청권 공략에 나선다. 현대백화점은 2400억원을 들여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 대농지구에 세운 ‘충청점’을 24일 연다고 23일 밝혔다. 충청점은 2014년 통합시로 출범하는 청주시와 청원군을 비롯해 세종시, 증평군 등 광역상권을 아우르며 향후 순차적으로 개점하는 현대백화점 판교점, 광교점 등과 함께 현대백화점 미래성장 전략의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복합쇼핑몰 형태인 충청점은 현대백화점의 전국 14개점 가운데 세 번째로 큰 규모다. 지하 4층, 지상 7층, 영업면적 4만 3800㎡ 규모로 본관과 영패션전문관인 유플렉스(U-PLEX), 주차장(933대)으로 구성돼 있다. 1000여개의 패션·잡화 브랜드가 입점했으며 문화홀(500석)과 문화센터 등도 갖춰 지역민들의 쇼핑과 문화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킬 것으로 보인다. 충청점은 청주제2순환도로, 경부고속도로 청주나들목, 중부고속도로 서청주나들목과 인접해 있어 청주 전역은 물론 인근 청원군 오송, 오창, 세종시, 대전시, 천안시에서도 20~4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올 충청점 매출 목표는 1100억원이며 내년까지 3000억원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현대백화점 하병호 사장은 “청주 서부 핵심상권에 들어선 충청점은 쇼핑, 교육, 문화시설 등 도시문화 기능을 완비한 지역 최대 복합쇼핑몰”이라며 “지역 주민이 쇼핑과 오락을 원스톱으로 즐길 수 있도록 편의성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박치기왕’ 김일의 고향 전남 고흥 거금도

    ‘박치기왕’ 김일의 고향 전남 고흥 거금도

    남도에 가서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게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고흥에서 힘자랑 말라는 겁니다. 갯바람 맞고, 갯것 먹으며 자란 고흥 사내들의 골격이 하나같이 단단하고 힘 또한 장사라는 뜻일 테지요. 여기서 ‘고흥’은 구체적으로 거금도(居島)를 뜻한다는 게 현지인들의 대체적인 인식입니다.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김일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건장한 사내의 너른 가슴팍을 닮은 섬, 그곳에서 마주하는 풍경 또한 거칠고 호방합니다. ●‘전설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나고 자란 곳 전남 고흥이 장사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씨름으로 명성을 얻었던 배경이 깔려 있다. 고흥은 전북 완주의 봉동읍과 더불어 씨름으로 유명했다. 특히 거금도 출신의 사내들이 곧잘 돋보이는 성적을 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1960~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박치기왕’ 김일(1929~2006)이다. 184㎝의 거구였던 김일은 어렸을 때 부터 근동의 씨름판을 휩쓸었을 만큼 이름난 씨름꾼이었다고 한다. 거구의 씨름장사들이 즐비하니, 외지의 건달들이 고흥땅에서 기를 펴기도 쉽지 않았을 터. 고흥에서 힘자랑 말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게다. 이처럼 김일을 빼고 거금도를 말할 수는 없다. 김일의 제자인 백종호(65) 김일기념체육관장은 “전국의 섬 가운데 거금도에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것도 오로지 (김일) 선생님의 공”이라고 했다. 송강호 주연의 영화 ‘반칙왕’(2000년)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선생님을 불러 ‘임자의 희망이 뭐냐’고 물었는데, 거금도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라고 답했다.”며 “이후 ‘청와대 지령 8호’로 거금도에 전기 시설이 들어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거금도에 들면 우선 김일기념체육관에 들를 일이다. 그런데 기념관치고는 다소 옹색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 영웅에 대한 후세의 대접이 참 각박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김일이 누군가. 너나없이 곤궁했던 시절, 박치기 한 방으로 국민들의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줬던 인물이다. 하지만 기념체육관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흔적이란 동상 하나와 낡은 사진이 전부다. 그나마 동상은 6척 장신이었던 김일을 표현하기엔 턱없이 작고, 몇 장 남지 않은 사진조차 구겨지고 변색됐다. 백 관장은 “방송사 등이 보관하고 있는 경기 장면 등을 상영하려 해도 천문학적인 저작권료 때문에 엄두도 못낸다.”고 했다. 기념관에 영상 자료 등을 기부하는 것을 자본의 논리가 아닌, 사회 공헌 차원에서 바라보는 인식이 아쉽기만 한 대목이다. 김일기념체육관 바로 앞엔 김일의 생가와 그가 잠든 묘, 그리고 기념비 등이 어우러진 공간이 조성돼 있다. 그런데 이곳엔 뜻밖에도 김일이 아닌, 진돗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고흥군청의 마이수 관광기획계장은 “김일 선수가 박치기왕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준 개”라고 했다. 사연은 이렇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군인들의 겨울 방한복으로 흔히 개가죽이 쓰였다. 당시 김일 선수가 기르던 개도 일본 순사에 의해 공출로 끌려갔는데, 1시간여 만에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재회의 기쁨도 잠시, 곧바로 일본 순사가 들이닥쳤고,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일은 변변히 대항도 못하고(박치기로 일본 순사를 들이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애견을 빼앗겼다. 이때부터 그의 가슴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 올랐고, 일본으로 건너가 프로레슬러로 성장하는 동력이 됐다는 얘기다. 김일의 당시 심정은 그가 직접 썼다는 동상 비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거구의 사내 가슴속에 지켜주지 못한 진돗개 한 마리가 50년 넘게 들어 있었던 게다. ●늘씬한 거금대교 따라 느릿느릿 걸어볼까 거금도는 멀다. 전남의 끝자락 고흥에서도 몇 발짝 더 내려가야 한다. 지난해 거금대교가 놓여지면서 사실상 뭍이 됐다. 그 덕에 소요시간이 상당히 줄긴 했으나, 그래도 예닐곱 시간은 족히 걸린다. 거금도에 이르는 첫 관문은 거금대교다. 소록대교와 소록도를 딛고 나면 곧바로 만난다. 개통 이후 거금도의 최고 명물 자리를 단단히 꿰찬 다리다. 거금대교는 늘씬하다. 높이 168m의 주탑 두 개가 케이블로 상판을 받친 형태를 하고 있다. 총연장은 6.67㎞. 육상 구간을 빼면 바다를 건너는 교각 구간은 2㎞ 남짓 된다. 거금대교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인도교가 따로 마련돼 있다는 거다. 다리 상판이 2층으로 돼 있는데, 차량들은 위층의 도로를 내달리고, 아래층은 보행자와 자전거가 느릿느릿 지난다. 다리를 통째로 차지하고 걷는 맛이 각별하다. 다리를 걷다 보면 양쪽의 바다가 죄다 눈에 들어 온다. 거북섬 너머로 고깃배들이 지나고, 상·하화도 앞바다엔 물비늘이 현란하다. 다리가 놓여지지 않았다면 절대 엿볼 수 없을 풍경들이다. 다리를 왕복하는 데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자전거를 빌려 타면 시간은 더 줄어 든다. 다리 끝자락, 그러니까 거금도 초입에서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 준다. 마이수 관광기획계장은 “현재 자전거가 30대가량 운용되고 있는데, 올 10월쯤 추가로 20대를 더 들여올 예정”이라고 전했다. ●걸개그림 같은 풍경을 내건 해안도로 거금도에 들면 먼저 섬을 한 바퀴 도는 해안일주도로에 오르는 게 순서다. 해안도로를 따라 가는 여정은 다도해의 풍광과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이 구간을 현지에선 ‘고흥 해안 풍경구간’이라 부른다. 이 길에 들면 그네들 표현처럼 ‘미쳐불 만한’ 풍경이 이어진다. 굽이도는 길 따라 파란 바다와 섬 풍경이 번갈아 펼쳐진다. 구간의 들머리인 옥룡마을 버스 정류장은 반드시 들를 것. 발 아래로 너른 남쪽 바다가 풍경화처럼 매달린다. 전국의 버스 정류장 가운데 이만한 경치를 가진 곳도 드물지 싶다. 이 구간의 절정은 오천항이다. 27번 국도의 종점인 포구다. 제법 큰 갯마을과 그 앞에 떠 있는 섬들이 어우러져 넉넉한 섬 풍경을 그려낸다. 오천항 초입엔 ‘공룡알 해변’이 있다. 수박만 한 크기의 갯돌들이 뒹구는 해안이다. 둥근 갯돌을 흔히 ‘몽돌’이라 부르는데, 거금도 사람들은 이를 ‘공룡알’이라 부른다. 섬을 가로지르는 도로도 있다. 용두봉(418m)과 적대봉(592m) 사이를 지나는 지방도로다. 이곳에서 마주하는 풍경 또한 ‘미쳐불’ 정도다. 파성재에서 송광암 이정표를 따라 산자락을 타고 가면 거금도와 고흥반도의 남쪽 해안, 그리고 완도의 금당도 등이 한데 어우러지는데, 딱 걸개그림이다. 거금도 가운데 우뚝 솟은 적대봉은 최고의 풍경 전망대로 꼽힌다. 해발 592m로 제법 높지만, 주차장이 있는 파성재에서 출발하면 왕복 2시간에 돌아볼 수 있다. ‘섬 속의 섬’ 연홍도도 가볼 만하다. 거금도에서 배로 5분이면 닿는다. 글 사진 고흥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익산 갈림목에서 익산~포항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완주에서 다시 완주~순천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순천에 내려서서 여수박람회장 이정표를 따라 가다 새로 난 영암~순천 고속도로에 올라선다. 벌교 나들목으로 나와 고흥방면으로 가다 녹동·거금대교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다소 복잡하지만 고속도로 표지판이 잘돼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다. →잘 곳 거금도 한옥민박(282-5327)은 너른 바다를 마당 삼은 집. 공룡알 해변이 코앞인 하얀파도 펜션(844-1232)과 익금해변 쪽 아마존모텔(842-4117)도 깔끔한 편이다. →맛집 녹동항 내 영성횟집은 장어통탕을 잘한다. 835-5303. 도화면 중앙식당은 한정식으로 이름났다. 굴을 껍질째 삶은 피굴 등 토속음식이 곁들여진다. 832-7757.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이 너그러운 그늘이 소산댁 할머니에겐 또 하나의 친정입니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이 너그러운 그늘이 소산댁 할머니에겐 또 하나의 친정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명실상부한 정자나무로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으려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그리는 어린 시절 풍경에 오롯이 떠오르는 나무여야 한다. 나무는 먼 길을 휘휘 달려서 다다른 고향 마을의 면사무소 앞 조붓한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가는 길 곁에 있으면 좋다. 면사무소 울타리를 따라 소방소 파출소를 지나고, 빨간색 표지판이 반기는 우체국에 들러 도시에 남겨둔 벗들에게 고향 소식을 담은 손편지를 쓸 수 있는 곳이라면 금상첨화다. 우체통에 편지를 접어 넣은 뒤, 가만가만 마을 안으로 돌아들면, 우뚝 서서 반기는 큰 나무, 그 아래 평상에서 늙은 어머니가 집 떠난 자식들을 기다리며 앉아 있다면, 고향 정자나무의 풍경은 비로소 완성된다. ●열여섯 각시 설움부터 여든 노인 푸념까지 품어 전남 담양 무정면 봉안리 술지마을의 정자나무 풍경이 꼭 그랬다. 나무를 찾아 무정면사무소 앞에 자동차를 세우고 천천히 골목길을 돌아드는데, 반갑게 나선 건 아담한 우체국이었다. 편지 한 장 쓰지 않고서는 지나치기 어려울 듯한 시골 우체국이다. 우체국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오른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길을 막아선다. 그 우람한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반듯한 평상 위에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우리네 어머니 한 분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이 나무 그늘이 제일 시원해. 우리 집은 저 위에 있는데, 더워 견딜 수가 없으면 여기로 나오지.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여기는 시원하거든.” 열여섯에 이 마을로 시집 와서 산다는 소산댁(80) 할머니는 긴 무더위에 대한 푸념을 그렇게 털어놓았다.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82호인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다. 천연기념물이라고는 하지만, 봉안리 은행나무는 여느 천연기념물처럼 가까이 하기 어려운 위엄을 갖추었다거나 독불장군처럼 홀로 우쭐대지 않는다. 그저 여느 시골 마을이라면 있음직한, 그렇고 그런 큰 나무다. 누구라도 품어 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갖춘 외할머니 품처럼 편안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나무가 작아서 하찮아 보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무는 한눈에도 늠름한 위용을 갖추었다. 키는 15m나 되고, 줄기 둘레는 8m를 넘는다. 새로 돋은 맹아지 하나가 줄기 곁에 바짝 붙어서 자라났다. 맹아지는 얼핏 봐서 또 하나의 다른 가지로 보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줄기에 난 굴곡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바짝 붙어있다. 그 덕에 나무의 줄기는 실제보다 더 굵고 우람하게 다가온다. ●지금도 정월대보름 마을사람들 모여 당산제 “은행이 무지하게 많이 맺혀. 좀 지나 가을 되면 하도 많이 떨어져서 냄새도 심하지만, 이 옆을 지날 때에는 조심해야 해. 은행 열매의 독이 오를 수도 있거든. 옛날에는 열매를 주워서 동네 자금을 만들어 썼는데, 요즘은 그냥 두더라고. 아무나 와서 주워가도 되지만, 독 오르니까 조심해야 해.” 자식들을 모두 대처로 내보내고 홀로 시골 집을 지키고 있는 소산댁 할머니는 마을 일에 무관심한 듯, 마치 남의 일처럼 이야기한다. 자신의 몸 간수만으로도 살기 힘든데, 마을에서 은행을 줍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투다. “안 아픈 데가 없어. 이 나이 되면 다 그렇겠지만, 온몸이 다 쑤시고 아파. 나무야 나보다 많이 살았지만, 저리 튼튼해 보이잖아. 하긴 나무가 아픈지 아닌지 내가 어찌 알겠어?” 건강 체질로 보이는 노인이지만, 할머니는 그 나이쯤의 노인들에게 자연스레 찾아오는 잔병 치레로 고생이 많은 모양이다. 허리도 꼿꼿하고, 음성도 강렬하고, 귀나 눈도 전혀 어둡지 않다. 그리고 가만히 나무를 쳐다보며 마치 ‘나무는 아프지 않아 좋겠다.’고 말을 건네는 듯하다. 봉안리 은행나무는 500살을 넘긴 늙은 나무다. 나무라고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어디 아픔이 없었을까만, 겉으로는 소산댁 할머니처럼 건강해 보인다. 나무는 때때로 통곡의 울음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가 아파했던 것은 대개의 큰 나무들이 그런 것처럼 임진왜란이나 6·25전쟁처럼 나라에 큰 일이 벌어지던 때였다. 나무 그늘에서 자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 일어나는 불길한 일을 나무도 아파했다는 이야기다. 나무는 오랫동안 마을의 당산나무로 살아왔다. 지금도 정월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정성껏 당산제를 지낸다. 모두 합하면 150가구 정도 되는 비교적 큰 마을이어서, 당산제를 올릴 때면 나무 앞의 작은 길과 나무 옆의 공터가 사람들로 가득 메워진다고 한다. ●500년 사람살이 흔적을 담다 나무가 그저 크기만 하다고 해서 푸근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큰 나무는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제압해 주눅이 들게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정작 나무가 푸근하게 느껴지는 건 어떻게 우리와 더불어 살아왔는지에 대한 흔적에 달려있지 싶다. 봉안리 은행나무는 지난 500년 동안 마을 어귀에서 마을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평안한 쉼터로 살아왔다. 봄이면 어김없이 연초록의 잎을 내고 꽃을 피웠으며, 여름 되면 푸른 잎으로 수굿이 빛과 바람을 모아 열매를 무성히 맺어 마을 살림살이를 보탰다. 마을 사람들이나 그들의 오두막집이 바뀌어도 나무는 언제나 고향 마을 지킴이로 그 자리를 똑같이 지켰다. 팔십 평생을 살아온 늙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이마에 흐른 땀을 가만가만 식혀주며 나무는 사람살이의 안녕을 기원했고, 이 땅에 평화가 깨질 때마다 큰 울음을 울었다.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맨 앞에 떠오르는 나무가 아닐 수 없다. 글 사진 담양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전남 담양군 무정면 봉안리 1043-3 술지마을. 88올림픽고속도로의 담양나들목으로 나가면 담양공고 교차로가 나온다. 1㎞ 쯤 직진하면 담양경찰서 앞 백동사거리에 이른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옥과 방면으로 5.2㎞ 남짓 가면 왼쪽으로 무정면사무소가 나오고 면사무소 뒤편으로 농공단지와 마을이 이어진다. 비교적 큰 마을이다. 봉안리 은행나무를 찾아가려면 면사무소 앞에 마련한 조붓한 주차 공간에 자동차를 세우고, 예쁜 우체국이 있는 마을 길을 따라 100m 쯤 걸어가야 한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1) 담양 대치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1) 담양 대치리 느티나무

    고향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마을 어귀에 우뚝 서 있는 둥구나무를 연상하기 십상인 것처럼, 어린 시절의 학교를 떠올릴 때에도 대개는 학교 안의 나무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딱히 시골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에서도 웬만한 학교에는 크고 작은 나무가 학교의 상징처럼 서 있게 마련이다. 학교마다 교목(校木)이나 교화(校花)를 지정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게다. 교목, 교화의 의미를 강렬하게 남기기 위해 학교에서는 그 나무를 교정 앞 화단이나 울타리에 줄지어 심어 키운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며 매일 나무를 쳐다볼 때에는 나무를 그리 대수로이 여기지 못한다. 나무가 오롯이 떠오르는 건 필경 학교를 떠난 뒤 어린 시절의 풍경을 추억할 때다. ●한재초등학교의 상징이자 자랑 전남 담양 대전면 대치리, 한재초등학교에는 그러나 지금 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조차 매우 특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무 한 그루가 교정 안에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이들로서 나무 없는 학교를 떠올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그만큼 나무가 크고 아름다운 까닭이다. 한재초등학교 교정 한편에 서 있는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8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담양 대치리 느티나무’다. 우리나라의 느티나무 가운데서는 키가 가장 큰 것으로 기록된 이 나무의 키는 무려 34m나 된다. 도시의 일반적인 건축물에 견주면 무려 12층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나무다. 사람의 가슴높이에서 잰 나무의 줄기 둘레도 8.78m라는 엄청난 수치를 나타낸다. 초등학교 아이들이라면 예닐곱 명이 둘러싸야 겨우 손을 맞잡을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다. 규모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 몇 그루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교정을 가득 채울 듯 치솟은 나무의 융융한 높이 탓에 학교 건물이 실제보다 더 낮아 보일 수밖에 없다. “동문들 누구라도 학교를 이야기할 때면 이 나무를 먼저 떠올리지요. 느티나무 없이 우리 학교는 그려지지 않아요.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며 살더라도 느티나무는 우리 마음의 기둥이에요. 동창회 때면 모두 나무 그늘부터 찾지요. 한결같은 우리 학교의 상징이자 자랑이니까요.” 한재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인 이봉근 칠성건설 대표는 총동창회의 주요 행사는 운동장에서 시작한다 하더라도 기본 행사만 마치면 동창들 누구나 느티나무 그늘부터 찾아든다고 한다. 동창회 기념 사진의 배경에 반드시 느티나무가 등장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손수 심은 나무 동창회뿐 아니라, 한재초등학교 교장실을 비롯한 곳곳에 걸린 학교 풍경 그림이나 사진에는 어김없이 느티나무가 등장한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나무가 이 학교의 상징임은 금세 알 수 있다. 하긴 이만큼 크고 아름다운 나무라면, 굳이 이 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을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싶다. 물론 학교 이웃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대치리 느티나무는 마을의 자랑이며 상징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대치리 느티나무는 크기뿐 아니라, 전해 오는 유래까지 남다르다. 나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손수 심었다고 한다. 고려 말의 명장이던 이성계가 조선 건국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이 자리에 들러 치성을 드리고 심은 나무라는 이야기다. 이야기대로라면 나무의 나이는 620살을 조금 넘는다. 이만큼 오래 살아온 나무치고는 생육 상태가 무척 건강한 편이다. 오래 전에 학교 운동장을 정비하던 때에 나무가 있는 자리를 조금 높여 나무 뿌리 부분에 복토를 한 흔적이 뚜렷하지만, 생육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대치리 느티나무 외에 이성계가 심은 것으로 전하는 나무는 한 그루 더 있다. 전북 진안 마이산의 아늑한 절집 ‘은수사’ 경내에 서 있는 청실배나무다. 은수사 청실배나무는 이성계가 건국의 기원을 다지기 위해 백일기도를 올린 뒤 손수 심은 씨앗이 싹을 틔운 나무라고 한다. 오래전부터 한재초등학교 아이들은 나무 앞에서 이 나라의 역사를 배우면서, 태조 이성계가 심은 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나무에 대한 혹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키웠을 것이다. 나무는 그냥 그늘만 드리운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이 나라 역사에 대한 자긍심까지 불어넣은 것이다. ●여전히 방과후 수업의 교실로 활용 “한국전쟁 때 우리 학교가 완전히 불에 타서 무너진 적이 있었어. 그래도 학교는 계속 유지됐는데, 교실이 죄다 불에 탔으니 당장에 공부할 자리가 없잖아. 그때 아이들이 모여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가 바로 이 나무 그늘이었어. 그래서 선생님들은 이 그늘을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경쟁하듯이 서두르곤 했지.” 한재초등학교 졸업생인 정정수(89) 어르신은 당시 이 학교에서 가장 좋은 천연의 교실이 바로 느티나무 그늘이었다고 강조한다. 전쟁 통에 교실을 잃고 느티나무 그늘을 찾아 공부했던 때와는 다르지만 요즘도 느티나무 그늘은 아이들에게 좋은 교실로 활용된다. 이즈음처럼 무더운 날, 느티나무 그늘은 자연과 어우러진 더없이 좋은 교실인 까닭이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삶과 역사를 배우고, 지금 이곳의 문화를 이뤄가는 아이들의 삶이 아름답기만 하다. 나무가 키워내는 사람살이의 현장이다. 글 사진 담양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787-1 한재초등학교 내. 서해안고속국도와 호남고속국도를 연결하는 고창~담양 간 고속국도를 이용하면 담양 지역을 빠르게 갈 수 있다. 북광주나들목의 요금소를 나가서 우회전하여 1㎞쯤 간 뒤, 대전면 대치리 마을로 들어서는 오른쪽 도로로 빠져나간다. 곧바로 좌회전하여 도로 아래로 난 길로 들어선다. 1.2㎞를 직진하면 대치사거리가 나오고 한편에 한재초등학교가 있다. 사거리 모퉁이의 농협 뒤편에 공용주차장이 있다. 나무는 한재초등학교 교정 안에 있다.
  • 서남해 랜드마크 목포대교 ‘자살대교’ 되나

    서남해 랜드마크 목포대교 ‘자살대교’ 되나

    서남해안권 랜드마크로 기대를 모으는 목포대교가 자살대교란 오명을 받을까 지역민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목포대교는 목포 신외항과 서해안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목포의 관문으로 지난 6월 29일 개통됐다. 서해안고속도로 종점인 목포 북항에서 고하도를 연결하는 목포대교는 총 연장 4129m로 왕복 4차선 자동차전용도로다. 목포대교는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나들목에서 고하도 신항까지 60여분 소요시간이 20분으로 40여분 단축되고, 영산강 하구둑 등의 상습교통체증이 해소되는 등 서남권 발전에 큰 획을 그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개통한 지 한달 보름여 만에 잇따른 투신사고가 발생해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개통 5일 만인 지난달 4일 곽모(34·목포시)씨가 다리 가운데에서 바다로 투신해 숨졌다. 지난달 15일에는 최모(40·광주광역시)씨가, 지난 3일엔 김모(여·34·무안군)씨가 투신해 숨졌다. 이달 들어 지난 10일엔 50대 남성이 난간에 올라 뛰어내리려는 것을 경찰이 구조한 사건도 발생했다. 지난 14일 오전 7시 25분쯤에는 목포대교에서 정모(33·광주시)씨의 차량이 발견돼 해경이 경비정 5대를 동원 이틀째 인근 해역을 수색하고 있지만 아직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목포시와 목포경찰서 등은 지난달부터 매시간 순찰차를 동원하는 등 대책을 강구 중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익산지방국토관리청 관계자는 “난간 설치 규정이 1m 10㎝이지만 이보다 높은 1m 20㎝로 건설돼 규정상 문제가 없고, 다리 경관이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철조망 증설은 하지 않겠다.”며 “20여억원을 확보해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목포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옛 선비들의 ‘즐겨찾기’… 충북 괴산 화양구곡·수옥폭포

    옛 선비들의 ‘즐겨찾기’… 충북 괴산 화양구곡·수옥폭포

    지난달 23일 충북 괴산군 칠성면에 작은 경사가 있었습니다. 면내 인구가 감소하다 2005년 이후 7년여만에 다시 3000명을 넘어선 겁니다. 괴산군에서 새 입주민들에게 기념품을 전달하는 등 소박한 잔치를 벌였다지요. 수십, 수백만명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대도시 사람들로선 외려 3000명이란 얼마나 적은 숫자인가 가늠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괴산은 그만큼 오지입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습니다. 공해시설이 드무니 물 맑은 거야 당연하겠습니다. 그처럼 맑은 땅이 수도권에서 2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면 믿기시겠습니까. 말복을 지나며 더위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낮의 폭염은 땅이라도 녹일 기세입니다. 때늦은 피서를 계획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괴산을 첫 줄에 올려놓는 건 어떻겠습니까. 괴산은 전형적인 산악 지형이다. 군자산 등 소박하면서도 거친 산들이 사방을 둘러쳤다. 그 사이로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과 쌍천, 성환천, 음성천 등이 흘러간다. 말 그대로, 둘러보니 청산이요 굽어보니 벽계수다. 산이 깊고 물이 많으니 계곡과 폭포가 발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괴산의 계곡과 폭포는 칠성면에서부터 청천면 화양리에 이르는 구간에 집중돼 있다. 위로는 경북 문경의 새재(鳥嶺), 아래로는 경북 상주의 대야산 등 거친 산들과 등을 맞댄 지역이다. 1957년 이 일대의 계곡을 막아 괴산호를 만드는 통에 다소 옛멋을 잃긴 했으나 조선시대부터 여러 구곡(九曲)이 있었을 만큼 경치가 빼어난 구간이었다. 선유(仙遊)와 쌍곡(雙谷), 갈은(葛隱), 고산(孤山), 연하(煙霞), 풍계(豊溪), 그리고 화양구곡(華陽九曲) 등이 대표적인 계곡들이다. 이 가운데 연하구곡은 괴산호 아래에 잠겼고 풍계구곡은 문헌상으로만 남아 있다. ●선비들의 유토피아 구곡… 우암 송시열 자취 서려 구곡이란 선비의 유토피아다. 몸을 정갈하게 하고 마음을 씻는 곳이다. 옛 선비들이 ‘즐겨찾기’ 해뒀던 곳인데 후세인들 다를까. 괴산 내 구곡 가운데 가장 앞줄에 서는 건 화양구곡이다. 속한 행정구역명부터 독특하다. 청천면이다. 푸를 청(靑)에 개울 천(川)을 쓴다. 계곡의 푸른 기운이 담긴 물이 흘러가는 고을이라는 뜻이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화양동 하면 ‘전국구’ 관광 명소였다. 여름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피서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요즘 주가가 다소 떨어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사람이 정한 이름값에 따라 풍경의 깊이가 달라질 리는 없다. 가파르게 솟은 기암이 하늘을 떠받친 듯하다는 경천벽과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는 운영담,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다는 첨성대 등 경승지들이 줄줄이 늘어서 객들을 기다린다.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곳은 금사담이다. 맑은 물 아래로 금싸라기 같은 모래가 흐른다는 곳. 너른 바위와 못으로 이뤄져 물놀이를 즐기기에 맞춤하다. 화양구곡은 조선 후기 정치계를 호령했던 우암 송시열의 자취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읍궁암(3곡)은 북벌을 꿈꿨던 효종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것을 슬퍼한 우암이 매일 새벽 활처럼 엎드려 통곡했다는 바위다. 그가 말년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했다는 암서재와 화양서원, 만동묘 등도 볼거리를 더한다. 선유구곡은 화양구곡과 인접해 있다. 예부터 화양구곡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긴 했으나 풍경의 아름다움으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신선들이 금단을 만들어 먹었다는 연단로와 40m는 족히 넘는 너럭바위 위로 물이 부서지는 와룡폭, 신선들이 바둑을 두며 더위를 씻었다는 기국암 등 볼거리가 널렸다. 뜻밖의 놀라운 풍경을 선사하는 곳은 쌍곡구곡이다. 군자산과 보배산, 칠보산, 비학산 등의 준봉을 끼고 흐르는 계곡이다. 모래 한 알까지 보일 만큼 맑은 계곡물과 계곡 따라 이어진 기암절벽이 울창한 숲과 잘 어우러져 있다. 계곡물은 내곡천과 외곡천의 두 줄기로 흘러가는데 ‘쌍곡’이란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퇴계 이황 등 유학자와 문인들이 즐겨 찾아 ‘쌍계’(雙溪)라고도 불린다. 1984년 속리산 국립공원에 편입됐다. 쌍곡구곡의 길이는 약 11㎞에 이른다. 그런데도 계곡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지방도로 옆에 푹 꺼져 있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간혹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곳이 제2곡 소금강이다. 쌍곡 입구에서 2.3㎞쯤 떨어진 곳으로 옹골찬 바위산들이 남성적인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제5곡 쌍벽도 볼 만하다. 계곡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 솟은 10여m의 바위들이 5m 남짓 거리를 두고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빼어난 절경… 사극 촬영지로 명성 높아 괴산엔 용추, 쌍곡, 대왕, 와룡 등 이름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폭포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수옥(漱玉)폭포는 그중 앞줄에 선다. 괴산과 문경 사이의 새재 3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해 흘러내리던 계류가 20m 절벽 아래로 떨어지며 형성된 3단 폭포다. 연풍면 원풍리에 조성된 수옥정 관광지 안에 있다. 수옥폭포의 빼어남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이 증명한다. 지난해 인기를 얻었던 TV 드라마 ‘계백’과 ‘공주의 남자’ 등이 수옥폭포에서 촬영됐고 ‘왕건’ ‘여인천하’ ‘다모’ ‘주몽’ ‘선덕여왕’ ‘동이’ ‘전설의 고향’ 등의 사극에서도 배경 화면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속화가로 꼽히는 김홍도는 연풍현감을 지내는 동안 수옥폭포와 그 아래 수옥정을 소재로 ‘모정풍류’를 남겼다. 괴산군청에 따르면 김홍도는 정조의 초상화를 그린 공로로 당시 중인 신분으로는 파격적으로 정6품 벼슬에 해당하는 현감을 하사받아 1791년 12월~1795년 1월 지금의 괴산군 연풍면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한양으로 올라가 도화원에서만 근무했으니 현감 노릇을 한 것은 연풍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수옥폭포 상류엔 수옥정 물놀이장이 있다. 계곡물을 이용해 조성한 수영장이다.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청소년 2500원, 어린이 2000원이다. 쌍곡폭포는 쌍곡구곡의 본류에서 벗어나 있다. 군내버스 종점인 절말에서 살구나무골을 따라 700m쯤 오르면 닿는다. 8m 남짓한 크기의 반석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아낙네의 치마폭처럼 펼쳐져 여성적인 향취가 물씬 풍긴다. 폭포 아래로는 넓고 깊은 웅덩이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이마의 땀을 말리는 풍경이다. 청천면 사담리의 공림사 일대를 흔히 사담동천(沙潭洞天)이라 부른다. 사담은 고운 모래밭과 깊은 못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고 동천은 산과 내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곳이란 뜻이다. 공주폭포와 대왕폭포는 바로 이 사담동천 내에 숨어 있다. 집 몇 채가 고작인 사담리 중대방래에서 대왕봉 쪽 계곡 길로 30분 거리에 있는 공주폭포는 새색시처럼 단아하면서 조형미가 빼어나다. 흡사 공주의 속살을 훔쳐보는 듯한 은밀한 느낌을 자아낸다. 공주폭포 위쪽의 대왕폭포는 거대한 암벽을 타고 내리는 30여m의 물줄기가 일품이다.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으면 수량이 적어 그저 거대한 바윗덩어리로 보일 수도 있다. 자태로만 보자면 가장 빼어난 폭포는 청천면 사기막리의 용추폭포다. 사기막리 마을에서 1.5㎞쯤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 있을 만큼 외진 곳에 숨어 있다. 폭포는 2단 구조다. 너럭바위를 연상시키는 암반 사이로 떨어진 폭포수가 깊은 소를 만들고 곧이어 경사 완만한 폭포를 이룬 뒤 계곡 아래로 흘러간다. 글 사진 괴산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3) ▲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증평나들목으로 나와 34번 국도를 타는 게 일반적이긴 하나 다소 돌더라도 교통량 적고 주변 풍경도 빼어난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혹은 연풍나들목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 ▲맛집 강이 많은 지역 특성상 민물고기 매운탕으로 유명한 집들이 많다. 괴강매운탕 본가할머니집(832-2974)과 충북 향토음식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우리매운탕(834-0005)이 그중 알려졌다. 둘 다 괴산읍에 있다. 얼음골식당(833-9117)은 쌉싸름한 지칭개 등의 약초에 오리를 넣은 지칭개약초오리백숙으로 유명하다. ▲잘 곳 쌍곡, 화양동 등 계곡 주변에 펜션이 많다. 괴산펜션넷(www.goesanps.com) 참조.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9) 화순 야사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9) 화순 야사리 느티나무

    속도와 풍경은 언제나 서로를 배반한다. 속도를 잡으면 풍경을 놓치고, 풍경에 몰입하면 속도를 잃을 수밖에 없다. 십 년 쯤 전의 어느 날, 천천히 시골 길을 가던 중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처럼 견디기 힘들 만큼 무덥던 여름 날이었다. 어쩌면 무더위에 지쳐 걸음이 느려진 것인지 모른다. 지친 발걸음 앞에 화들짝 다가선 느티나무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속도를 버리자 다가온 풍경이었다. 전남 화순군 동면중학교 이서분교의 느티나무다. 분교라고 하기에는 교사(校舍)도 크고, 운동장도 널따란 제법 큼지막한 시골 학교였다. 학교 안으로 들어서자,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교문 반대편에 쪼르르 줄지어 앉아 있었다. ●풍경을 더 살갑게 그려주는 마을의 중심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둔 아이들의 미술 시간이었다. 처음 만난 나무였지만, 운동장 가장자리에 모여 앉은 아이들의 풍경이 귀여워서 나무보다 먼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저마다 서로 다른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의 대상은 모두 똑같았다. 느티나무였다. 그때 아이들은 선생님이 나무를 그리라고 한 게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한 아이는 ‘우리는 그림을 그리면 무조건 느티나무만 그린다.’고까지 했다. 돌아보니 느티나무를 빼놓고는 이 학교 풍경을 이야기할 수도, 그릴 수도 없을 듯하다.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 그만큼 압도적인 까닭이다. “그 아이들이 이제 스무 살이 조금 넘었어요. 도시에 나가서 대학에 다니지만, 부모님들이 여전히 우리 마을에 살고 있어서 방학하면 옵니다. 느티나무는 언제나 그 아이들이 모이는 장소예요. 어릴 때부터 소중하게 여기던 나무이니까요.” 화순군 이서면 야사1구 이순준(57) 이장은 50가구 남짓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이 마을 출신으로 서울의 일류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아마 호남 지역 최고일 거라는 자랑도 덧붙인다. 학교 담장을 빠르게 지나면서 설핏 바라보면 야사리 느티나무는 그저 크고 잘생긴 한 그루의 느티나무로 보인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학교 안으로 들어서서 바라보면 두 그루의 나무가 바짝 붙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그루로서는 이루기 힘들 만큼 너른 수관 폭을 가진 장엄한 위용의 느티나무로 보이는 건 자연스럽다. ●세 그루의 당산나무 가운데 하나 줄기가 북쪽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오른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제가끔 키 25m, 줄기 둘레 7m 쯤 되는 400살 된 늙은 나무다. 두 그루 중 남쪽의 나무는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자리에서 굵은 가지를 제 키 보다 더 길게 뻗어냈고, 북쪽의 나무는 꼿꼿하게 서서 나무의 중심을 잡았다. 두 그루 모두 마주 바라본 방향으로는 가지를 뻗지 않고 위로만 솟아올랐다. 서로의 자람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게다. 한 쌍의 느티나무가 펼친 그늘의 폭은 사방으로 30m를 훌쩍 넘는다. 전교생이라 해봐야 고작 여남은 명이던 아이들을 모두 품고도 남을 만큼 너른 그늘이다. 운동장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나무는 아무래도 이 학교 아이들에게 성가신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축구를 하더라도 아이들은 직선으로 내달리지 못하고, 나무 주위를 마치 숨바꼭질하듯 에돌아야 한다. 하지만 선생님이나 아이들 누구도 나무에 불평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마을의 안녕을 지켜온 당산나무인 까닭이다. “우리 마을에는 당산나무가 세 그루 있어요. 이 느티나무 외에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은행나무와 마을 앞논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나무가 모두 당산나무예요. 지금도 정월대보름 전날 밤에는 세 곳에서 차례대로 당산제를 올리지요.” 이장 이씨가 말한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3호로 지정된 500살 된 나무로, 키가 27m나 되는 장한 나무다. 최근 전라남도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된 야사리 느티나무에 비해 나이나 규모에서 앞선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규모나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똑같이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고마운 나무일 뿐이다. 당산나무가 있었고 도담도담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기에 언제나 마을의 중심이었던 학교는 지난 2008년 2월에 ‘마지막 졸업식’을 치렀다. 일곱 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아름다운 시골 학교는 교문을 닫았다. 아이들 떠난 교정은 썰렁했다. 교문을 닫자 아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에는 온갖 풀들이 무릎까지 키를 키우며,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묵정밭 꼴을 했고, 아이들과 학교를 잃은 사람들의 마음은 허전했다. 나무 홀로 옛 추억만 되새기는 쓸쓸한 풍경이 됐다. ●풍경과 속도의 이율배반을 가르칠 채비 “다른 곳에서처럼 미술관이나 자연 박물관으로 활용할 방도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학교 건물을 ‘농촌 체험관’을 비롯해 농촌에 꼭 필요한 시설로 리모델링한다는 계획이 통과되었고, 그에 맞는 지원금도 나왔어요.” 교정에 남은 나무에게서 화색이 도는 듯한 느낌을 받은 건 나무가 새로 맞이할 아이들에 대한 기대로 달뜬 탓이리라. 굵은 빗줄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자, 이장은 논에 물을 대야 한다며, 스쿠터를 타고 서둘러 나무 곁을 떠났다. 농촌 아이들을 키우던 운동장의 나무는 이제 도시 아이들에게 농촌의 자연을 가르치는 초록 그늘로 바뀔 것이다. 더 빠른 속도의 컴퓨터로 첨단 게임을 즐기던 도시 아이들은 이제 수백년 동안 똑같은 모습으로 한자리를 지켜온 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속도와 풍경의 이율배반을 깨달을 것이다. 폐교 운동장에 남아 옛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는 한 쌍의 느티나무가 고마운 이유다. 글 사진 화순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197번지. 호남고속국도의 창평나들목으로 나가서 우회전하여 지방도로 60호선을 타고 담양군 고서면까지 간다. 고서면사무소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지방도로 887호선으로 무등산 방면으로 16㎞ 쯤 간다. 담양 남면 구산리 향원당 앞의 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4.5㎞쯤 가면 이서면 야사리에 이른다. 나무는 폐교한 동면중학교 이서분교장 운동장 한가운데 있는데, 도로에서도 잘 보인다. 자동차는 학교 근처의 도로변 빈자리에 세우면 된다.
  • 한여름 환상의 삼중주 ‘전남 장흥’

    한여름 환상의 삼중주 ‘전남 장흥’

    전남 장흥은 놀라운 땅입니다. 겉모습은 불퉁한 사내를 닮았으되, 갈무리한 풍경의 깊이와 다양함은 고운 여인의 뺨을 칠 정도지요. 천관산 등 우람한 산들이 사위를 둘러쳤고, 그 사이로 탐진강이 장흥 땅 이곳저곳을 적시며 흘러갑니다. 곧추선 편백나무들이 수직 세상을 이루는가 하면, 드넓은 득량만에서 쏟아져 나오는 갯것들로 철마다 먹거리가 달라집니다. 숲과 강, 그리고 바다가 어우러진 보기 드문 여행지라고 보면 딱 맞겠습니다.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돌아서면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겁니다. 우드랜드 편백숲 장흥은 기세 좋은 산들이 감싼 고을이다. 천관산(723m)과 제암산(807m)이 듬직하고, 사자산(666m)과 부용산(609m)의 산세도 범상치 않다. 고운 여인의 치마폭을 연상케 한다는 억불산(518m)도 장흥의 대표 아이콘 가운데 하나. 삼림욕을 겸한 산림휴양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우드랜드도 억불산 아래 있다. 우드랜드엔 40~50년 넘은 아름드리 편백나무가 100㏊에 걸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정확히는 편백나무가 70%로 주종을 이루고, 삼나무가 30%가량 뒤섞여 있다. 장흥군청의 안병진 관광진흥 계장은 “1969년부터 우목리 등 인근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노동력을 보태 우드랜드를 조성했다.”고 전했다. 주민들의 울력으로 만들어진 숲인 셈이다. 우드랜드에 들면 높지거니 솟은 수직 세상의 기세에 우선 놀란다. 편백나무들이다. 한낮에도 어둡게 느껴지는 숲에서는 나무의 정령들이 날아다닐 것만 같다. 숲에 들면 나무의 향기와 청량한 공기가 동시에 밀려든다. 피톤치드 때문이다. 나무에서 방출돼 병원균 등 미생물 따위를 죽이는 작용을 하는 물질로, 삼림욕 효과의 근원이다. 장흥군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편백나무는 전나무 등 다른 침엽수에 견줘 몇 배 많은 피톤치드를 발산한다. ‘편백나무 피톤치드의 효과 실험’이란 제목의 자료는 편백나무에서 발산되는 피톤치드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감소시키고, 집 진드기 등에 대한 강력한 기피 효과를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편백나무 숲 주변에 조성된 산책로엔 편백나무 톱밥이 깔려 있다. 한 걸음에 푹신한 느낌이, 또 한 걸음엔 나무의 향기가 물씬 전해진다. 황토 흙집과 음이온 발생 폭포 등 친환경 시설도 군데군데 설치해 뒀다. 우드랜드엔 명소가 두 군데 있다. 지난해 누드 삼림욕장으로 인터넷 검색창을 뜨겁게 달궜던 ‘비비 에코토피아’와 ‘말레길’이다. 비비 에코토피아는 편백숲 안에 조성된 별도의 풍욕장(風浴場)이다. 2㏊ 풍욕장 안에 토굴, 벤치 등의 시설을 갖췄다. 체험객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풍욕장 주변에 대나무로 차폐막을 설치해 밖에선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다. 요즘도 간혹 “옷을 어디까지 벗어야 하느냐.”는 문의가 온다고 하는데, 사실 옷을 벗지는 않고 부직포로 된 얇은 종이 옷을 걸친다. 입장료(3000원)를 내면 종이 옷은 무료다. 말레길은 우드랜드와 억불산 정상을 잇는 등산로다. ‘말레’는 호남 지역에 전해오는 옛말로, ‘대청마루’를 뜻한다. 한옥에서 방과 방을 연결하는 큰 마루가 말레이니, 이해와 소통을 기원하는 길이라고 보면 틀림없겠다. 길이는 약 4㎞. 무엇보다 목재 데크가 인상적이다. 이른바 ‘무장애 데크’로, 등산로 들머리부터 억불산 정상까지 편평하게 목재 데크를 깔아 장애인이나 노약자도 오를 수 있게 했다. 남해 보물 득량만 장흥의 동남쪽은 갯것들로 가득 찬 ‘남해의 보물’ 득량만이다. 이청준(1939~2008)과 한승원 등 장흥 출신의 문인들에겐 문학적 영감을, 주민들에겐 넉넉한 갯살림을 제공한 바로 그 바다다. 득량만이 품은 해변 가운데 해수욕객들의 발걸음이 가장 잦은 곳은 수문해변이다. 수심이 완만하고 모래가 고와 피서지로 제격이다. 수문해변 한편엔 한승원의 시비 30개가 세워진 ‘한승원 문학 산책로’도 조성돼 있다. 해변 끝엔 물놀이 시설과 숙박시설을 갖춘 옥섬워터파크가 있다. 수도권의 대형 워터파크와 크기를 견줄 수는 없지만, 바다를 보며 물놀이와 일광욕을 즐기는 맛이 각별하다. 수문해변 남쪽의 남포마을을 찾는 것도 좋겠다. 소나무 몇 그루가 뿌리를 내린 소등섬 덕에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소등섬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일출·월출 명소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1996)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득량만 저편으로 물러났던 바닷물이 서서히 갯벌을 점령하면 남포마을과 소등섬을 연결한 노두(頭)만 남는다. 바닷물이 발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릴 때 노두에 서서 사진 한 장 찍어 보시라. 그대로 그림이 된다. 청잣빛 바다와 만나려면 회진면으로 가야 한다. 뻘과 모래가 뒤섞여 있어 장흥 내 다른 지역에 견줘 유난히 물색이 곱다. 회진 앞바다 끝자락의 정남진 해양낚시공원도 장흥의 명소다. 다도해의 절경을 바라보며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게 장점. 숙식이 가능한 바다 위 숙박시설과 안전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는 부잔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정남진 물축제’ 탐진강 탐진강은 영암군 금정면에서 발원해 장흥을 적신 뒤 강진을 거쳐 남해로 흘러드는 총 55㎞의 물길이다. 오래전 탐라국(제주도의 옛 이름)의 배가 신라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강진의 구강포로 드나들었는데, 탐라국과 강진의 앞뒤 글자를 따 탐진강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탐진강은 강의 원형이 잘 살아 있다. 수변생태공원에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놓여 있고, 사이사이 다양한 수초가 무성하다. 강어귀마다 돌다리도 놓여 있다. 소나기라도 한바탕 퍼부은 뒤엔 되살아난 수초들의 푸른 빛과 맑은 공기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빚어낸다. 탐진강에서 27일~8월 2일 ‘2012 대한민국 정남진 물축제’가 열린다. 올해 5회째로, 한국소비자브랜드위원회가 4년 연속 ‘올해의 브랜드 대상’으로 선정했을 만큼 강변 물놀이 축제 가운데 정평이 나 있다. 무엇보다 맑고 차가운 물이 인기 비결이다. 안병진 계장은 “해마다 물축제 기간에만 탐진강 상류 탐진호의 수문을 연다.”며 “수문을 나설 때 약 16도였던 차가운 물이 햇빛을 받으며 7㎞ 정도 장흥 읍내까지 흘러가는 동안 22~23도의 시원한 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물축제의 대표 프로그램은 ‘천연무지개풀장’이다. 편백나무와 녹차, 꽃양귀비 등 7가지 천연성분이 녹아 있는 색색의 탕이다. 각각의 탕마다 특색 있는 이벤트가 진행된다. 물싸움과 물썰매도 주목할 프로그램이다. 편을 갈라 물총과 물풍선을 쏘고 던지는 가족형 이벤트다. 장어, 메기 등을 잡는 맨손물고기잡기는 매일 오후 2시부터 한 시간 동안 진행된다. 줄배타기, 카약 등의 체험프로그램과 남미라틴콘서트, 세미누드촬영대회, 전국동네밴드경연대회 등의 공연도 축제기간 내내 펼쳐진다. 홈페이지(www.jhwater.kr) 참조.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의 문흥나들목으로 나와 29번 국도를 타고 곧장 가면 된다. 서해안 고속도로→목포광양간 고속도로→장흥나들목 순으로 가도 된다. 장흥군 문화관광과 860-0224. ●맛 집 여름철 된장 물회가 진미다. 어린 농어나 돔의 속살을 시큼한 열무김치와 된장, 매실, 막걸리를 숙성시킨 식초 등과 버무려 내놓는데 새콤달콤한 게 입맛을 돋운다. 2만 5000~3만 5000원. 보양식이라면 하모(갯장어) 샤부샤부가 좋겠다. 4만~5만원. 싱싱회 마을(863-8555)이 이름났다. 한우와 표고버섯, 키조개를 함께 먹는 ‘장흥 삼합’은 만나숯불갈비(864-1818)가 잘한다. ●잘 곳 크라운호텔(863-0777)이 깨끗하다. 읍내에 있다. 득량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옥섬 워터파크(862-2100)도 좋다. 글 사진 장흥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8)소록도 중앙공원 솔송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8)소록도 중앙공원 솔송나무

    셸 실버스타인의 그림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나무는 소년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준다.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아무래도 멀리 떠났던 소년이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뒤가 아닐까 싶다. 힘없이 나무에게 돌아온 소년에게 나무는 자신이 더 내어줄 게 없어 안타깝다면서, 그루터기만 남은 자신의 몸 위에 편히 앉아 쉬라고 한다. 이제 늙은 노인이 된 소년은 그루터기에 앉았고,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고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나무가 사람에게 주는 것의 그 끝이 어디일까. 나무가 감동을 주는 건 물질적인 이유만이 아니다. 나무로부터 정신적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 참으로 나무를 가까이 하게 되는 이유이지 싶다. ●확인되지 않은 헛소문만 무성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닌 데다, 보시다시피 예쁘잖아요.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말들을 만들어낸 모양이에요. 하지만 실제로 확인된 사실은 없어요.” 한센병 환자이며, 시와 수필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며 살아가는 강창석(60) 시인은 소록도 중앙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나무인 솔송나무에 얽힌 갖가지 이야기들이 대부분 헛소문이라고 단언했다. 나무의 값이 2억원이나 된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5억원을 웃돈다고도 했다. 그러나 강 시인에 따르면 나무를 조경 전문가들에게 감정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대개는 말 좋아하는 관광 가이드들이 나무의 아름다움을 놓고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나무의 값어치뿐 아니다. 이 나무를 어떤 권세가 혹은 부유한 가문의 누군가가 값을 지불하고 캐 가려 했지만, 소록도에서 살아가는 한센병 환자들이 몸으로 막아내 가져가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졌다. 한데 이 역시 근거 없는 이야기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돈 있는 사람들이 이 나무 한 그루를 가져가려고 마음먹었다면 그게 뭐 그리 힘들었겠어요. 우리 환자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걸 막겠어요. 할 수 없이 보냈겠지요.” 자연 속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나무의 자연미를 탐하는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정원수를 가꾸는 호사가들이라면 탐을 낼 수 있을 만큼 소록도 중앙공원의 솔송나무는 조경수로 매우 잘생긴 나무다. 한눈에도 오랫동안 누군가의 세심한 손길을 타고 자란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울릉도에서만 사는 토종 나무 솔송나무는 강 시인의 이야기대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일본이나 북아메리카에서는 대형 목조 건축의 주요 재료로 쓰기 위해 널리 키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에서만 볼 수 있다. 그나마 군락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고, 한두 그루씩 띄엄띄엄 자랄 뿐이다. 울릉도 태하령 부근의 솔송나무 군락지도 천연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되긴 했으나 섬잣나무, 너도밤나무의 무리 안에서 몇 그루가 발견되는 정도다. 소나무과에 속하는 솔송나무는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늘푸른 바늘잎나무인데, 잘 자라면 30m 높이까지 자라는 큰 키의 나무다. 잎이 소나무에 비해 짧고 납작하며, 솔방울은 소나무에 비해 작다는 특징을 가진 우리 토종 나무다. 소록도 중앙공원 가장자리에서 자라난 솔송나무는 키가 8m를 조금 넘고, 줄기 둘레는 1.2m밖에 안 된다. 30m까지 자라는 솔송나무의 본성을 생각하면 아직 한참 더 자라야 할 나무다. 한센병 치료 전문 병원인 자혜의원이 설립된 1916년 즈음에 심어졌다는 걸 감안하면, 나이도 고작해야 100살 미만인 어린나무다. 소록도 솔송나무의 생김새는 저절로 자라는 솔송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자연 상태에서 솔송나무는 나뭇가지가 수평으로 펼쳐지며 전체적으로 원뿔형으로 자란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나무나 구상나무에 가까운 수형이다. 그러나 소록도 솔송나무는 반원형의 우산을 덮어놓은 듯 단아하다. 나뭇가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느다란 바늘잎 하나하나를 일일이 다듬어낸 듯한 흔적이 엿보인다. 숙련된 조경사의 빼어난 솜씨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를 목숨을 걸고 키워낸 치열한 수고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모습이다. 돌아보면 솔송나무뿐 아니라, 중앙공원의 모든 나무들에 소록도 사람들의 지극한 정성이 배어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위로와 평안 아낌없이 주는 나무 “소록도 주민들의 말로 다 못할 고난을 누구도 달래주지 않았어요. 홀로 삭이며 살아야 했죠. 중앙공원의 나무들은 주민들에게 큰 위안이었지요. 나무를 보듬어 안으며 끝내 지워지지 않는 천형의 고통을 씹어 삼켰다고 해야겠지요.” 중앙공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국립 소록도 병원에서 관리하게 돼 있지만 그동안 조경 관리라든가, 나무 관리 담당자가 배정된 적이 없었다. 고난의 세월을 살아가는 소록도 주민들의 눈에 나무가 들어왔기에 다가섰고, 나무는 고통 속에 살아가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나누어 준 것이다. “중앙공원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는 한센병 환자들의 썩어 문드러진 입술을 타고 저절로 흘러내린 침으로 키워낸 겁니다. 돈 몇 푼으로 값을 매길 수 없지요.” 옅은 미소를 띤 채 고난의 세월을 이야기하는 강 시인의 몇 마디 남지 않은 뭉툭한 손은 여느 한센병 환자의 그것처럼 서늘하리만큼 차가웠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생명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이 땅의 모든 생명에게 평안과 위로를 아낌없이 건네주는 나무와 함께 한 긴 세월이 있었음이리라. 글 사진 소록도(고흥)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336-7. 목포~광양 간 고속국도의 벌교나들목으로 나가 1.5㎞쯤 가면 나오는 벌교교차로에서 고흥 방면으로 난 국도 15호선으로 우회전한다. 32㎞쯤 남쪽으로 가면 고흥고등학교 앞의 호형교차로에 닿는다. 직진하여 국도 27호선을 타고 서남쪽으로 18㎞쯤 더 가면 국도 77호선과 만나는 차경사거리가 나온다. 소록도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2㎞ 남짓 가면 소록대교가 나온다. 대교를 건너서 곧바로 나오는 안내소에서 안내를 받으면 중앙공원에 갈 수 있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7)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7)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

    생명은 한순간도 정체되지 않고 성장과 소멸을 거듭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매한가지다. 한 부분이 수굿이 성장하여 죽음을 맞이하면, 그의 뿌리는 또 하나의 새 생명을 일으킨다. 새로 태어나는 세포와 죽어가는 세포가 하나의 몸에 공존한다. 삶과 죽음은 결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죽음을, 죽음은 삶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생명의 원리다. 무릇 모든 생명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간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의 경우는 더 그렇다. 줄기가 부러진 뒤에도 나무는 새로 난 줄기로 그의 생명을 이끌어간다. 천년을 살아온 나무에서 태어나던 때의 세포를 찾는 건 그래서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나이를 측정하는 것도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강원도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의 나이는 1500살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그러나 비슷한 연륜의 다른 은행나무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중심 줄기가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지고 죽은 줄기 곁에서 촘촘히 돋아난 여러 개의 맹아지(萌芽枝)가 수백 년을 자라서 새로운 모습으로 20m의 높이까지 솟구쳐 올랐다. 새로 태어난 삶이 죽음을 에워싸고 하늘을 우러러 큰 생명을 이룬 것이다. 맹아지는 줄기나 가지에서 불규칙하게 솟아나는 새 가지로 대부분의 나무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유독 은행나무의 맹아지는 기존의 줄기와 가지 못지않은 크기로 발달하는 특징을 가졌다. 1500년 전에 뿌리를 내린 늑구리 은행나무의 줄기는 죽어 없어졌고, 그 곁에서 새로 돋은 10여개의 크고 작은 맹아지가 우람하게 자랐다. 수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굵은 맹아지에서부터 고작해야 10여년쯤 돼 보이는 가늣한 맹아지까지 다양한 연륜과 크기의 맹아지가 서로 어울렸다. 이처럼 다양한 맹아지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돋아났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다. 새로 자란 맹아지들은 줄기가 있던 텅 빈 가운데 자리를 촘촘히 메웠다. 자연히 나무 전체의 생김새도 애당초 이 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여겨진다. 꽤 어지러워 보이는 나무의 생김새는 한 그루가 지어낸 결과가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크기의 은행나무가 사람의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위에 외따로 서 있다는 것도 이 나무의 특이한 점이다. 은행나무는 저절로 번식하지 않고, 사람의 마을에서 사람의 손을 타고 자라는 나무라는 이유에서다. 나무 곁에서 오래된 사람살이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고작해야 몇십년도 안 돼 보이는 낮은 지붕의 살림채가 하나 있을 뿐이다. ●절집 자리에서 스님들이 심어 키운 나무 “30년 전에 딸아이가 산 아래의 소달초등학교에 들어갔지. 읍내에 살았는데, 학교가 멀어서 아이가 힘들어했어. 그때 마침 이곳에 친척이 살다 떠나려던 집이 있어서, 맞춤하다 싶어 들어와 살게 됐지.” 나무 앞에서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김명환(70) 노인은 이 외딴 집에서 나무를 바라보며 일곱 남매를 키웠다. 자식들을 모두 대처로 내보내고 지금은 노부부만 남았지만, 김 노인은 ‘신령스러운 나무가 지켜주는 든든한 집’이라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어서 ‘은행정’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 이 마을을 ‘절골’이라고 불렀대. 나무에 스님들과 관계된 전설이 있다고도 하지만 연유는 몰라. 절골이라면 절이 있었다는 이야긴데, 그런 흔적이 없거든.” 절집의 흔적도 없는 자리에서 1500년을 자란 나무에 얽힌 오래된 전설을 톺아보면, 늑구리 은행나무는 절집 마당에서 스님들이 정성껏 심어 키우던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예전에 한 동자승이 이 나무 줄기에 기어오르기를 좋아했다. 어린 동자승은 줄기에 기어오르다 떨어져 다치는 일이 잦았다. 동자승을 돌보던 큰스님은 동자승이 아예 나무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나무줄기를 반들반들하게 깎아내려 했다. 스님이 나무의 몸집에 날카로운 칼을 밀어넣는 순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줄기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놀란 스님은 법당으로 뛰어들어가 부처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때 불상에서 “나무의 피를 받아 마셔라.”라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스님은 뛰어나와 나무가 흘리는 피를 받아마셨다. 그러자 스님은 창졸간에 커다란 구렁이로 변해서 나무 줄기 가운데에 똬리를 틀고 나무를 지키는 지킴이가 됐다.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변증의 생명체 나무를 신성하게 잘 지키려는 의도에서 지어낸 이야기가 틀림없겠지만, 이야기에 굳이 스님과 동자승을 등장시킨 건 아무래도 이 나무가 절집과 관계 있는 나무임을 보여 주는 증거로 생각된다. 김 노인의 말처럼 절집의 흔적은 없지만 나무는 필경 절집의 나무였던 것이다. “예전에 개를 키웠던 적이 있어. 그런데 이 나무의 신령한 기운을 개도 알았는지 신통하게도 이 나무 아래에서는 절대로 똥을 싸지 않더군. 그뿐이 아냐. 이 산에 뱀이 많았지만 우리 은행나무 그늘에는 뱀이 다가오질 못 했어.” 가늠할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온 생명체 앞에서 과학의 잣대로 노인이 건네는 이야기의 진위를 따지는 건 애당초 옳지 않다. 나무 곁에서 30년 동안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에 의지해 살아온 산골 농부의 나무 자랑이고 자연 사랑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인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는 그렇게 과학 그 너머의 세계에서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변증의 생명체로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 나무의 유장한 생명력에 가만히 고개 숙일 따름이다. 글 사진 삼척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강원 삼척시 도계읍 늑구리 210-2. 영동고속국도의 강릉교차로에서 동해고속국도로 갈아탄 뒤 동해고속국도의 개통구간 중 남단인 동해나들목으로 나간다. 국도 7호선을 타고 삼척 방면으로 4.4㎞ 가면 국도 38호선과 이어지는 단봉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28㎞ 쯤 남하한다. 영동선 철도의 고사리역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오십천을 건너는늑구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선 뒤, 고사리역 안으로 들어간다. 역 가장자리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1㎞ 쯤 가면 언덕 위에서 나무를 만날 수 있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6)삼척 도계리 긴잎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6)삼척 도계리 긴잎느티나무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로 관심을 모은 건축가 고 정기영 선생은 생전에 펴낸 책 ‘서울 이야기’(현실문화 펴냄)에서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고 했다. 집을 소유의 의미로가 아니라, 삶을 누리는 공간, 혹은 시선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또 자주 찾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명륜동 성균관 앞 마당을 꼽으며, 그곳을 자신의 정원이라고 했다. 성균관 앞마당은 자신만큼 아끼는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 홀로 즐기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향유하는 정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건축물에 삶의 향기, 시간의 풍진, 자연의 생명을 담으려 애쓴 그는 자연이 지은 풍경을 해치지 않고, 자연에 기대어 지은 집이어야 건강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무 앞의 공원은 아이들의 정원 “나무 앞의 공원이 바로 우리 아이들의 정원이에요. 세상에 이만큼 좋은 정원이 어디 있겠어요. 그야말로 최고의 느티나무 그늘이잖아요.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아이들이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며 노는 걸 바라보는 게 제일 큰 행복이죠. 하늘이 지어준 정원에서 사람을 짓는다고 할까요.” 강원 삼척 도계읍 도계리, 우리나라의 느티나무 가운데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나무 앞에 나지막이 자리 잡은 파란 슬레이트 지붕의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보살피는 시설장 이이순(62)씨는 서슴없이 나무를 ‘우리 나무’ 나무 앞의 공원을 ‘우리 정원’이라고 말한다. 20년 째 자원봉사활동을 이어온 이씨가 나무 바로 앞에 지역아동센터를 건축한 건 2004년, 처음 자리 잡을 때부터 큰 나무가 있는 곳이어서 아이들을 건강하게 보살피기 위해서는 더 없이 좋은 위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도계리 느티나무에는 ‘긴잎’이라는 접두사가 붙어있다. 느티나무는 잎의 생김새에 따라 긴잎느티나무와 둥근잎느티나무로 나누기도 한다. 속리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비교적 동그란 잎의 나무는 둥근잎느티나무로, 강원과 경남 지역에서 발견되는 좁고 길쭉한 잎을 가진 나무를 긴잎느티나무라고 구분한 이름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들의 구별은 쉽지 않다. 도계리 느티나무를 처음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일제 식민지 때의 조사에서는, 긴잎느티나무를 ‘조선의 특산’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생육 환경에 따른 약간의 차이로, 굳이 이를 나누지 않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산림청의 국가식물표준목록에서도 긴잎느티나무, 둥근잎느티나무를 모두 느티나무 동일종으로 취급했다. ●키 20m·줄기둘레 9m 국내 最大·最古 느티나무 키 20m, 줄기둘레 9m라는 거대한 덩치의 도계리 긴잎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에 속한다. 1988년 태풍을 맞아 나무 줄기의 윗 부분이 부러져 수형의 균형이 흐트러지고, 키도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가장 큰 키의 느티나무다. 1910년대에 이 나무를 조사한 일본인 연구자들은 당시 나무의 키를 26m로 기록에 남겼다. 땅에서 4m쯤 올라온 자리에서 일곱 개로 나뉜 가지는 동서로 25m, 남북으로 24m를 펼치며 넓은 그늘을 드리웠다. 보호 울타리가 있어서 그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설 수야 없지만, 울타리 바깥에서도 나무그늘은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태양의 방향에 따라 주변에 골고루 삽상한 그늘을 드리우며 나무는 찾아오는 모두를 품어 안는다. 나이는 무려 1000년을 넘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느티나무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라는 이야기다. 줄기 곳곳에 두드러지게 드러낸 혹과 몇 차례에 걸친 외과수술 흔적에는 나무가 겪어온 세월의 풍진이 고스란히 담겼다. 나이를 거꾸로 계산해보면 고려 말, 조선 건국 즈음에도 이미 400살 가까이 된 큰 나무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건국 당시 정치적 혼란을 피해 고려의 선비들은 이 나무를 은신처로 삼아 훗날을 기약하며, 자손과 후학을 양성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맥락에 닿는다. 학문 도야의 현장이었다는 이야기 탓에 예전에는 입시 철만 되면 학부모들이 찾아와 치성을 올리는 나무였다고도 한다. 물론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풍습이다. 마을의 평안을 지켜주는 서낭당 나무로서 살아오던 나무였는데, 한때에는 이 자리에 도계중학교가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서낭제를 올리는 데에 적잖이 불편함을 느끼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다른 나무로 서낭당을 옮기려고 했다. 그때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며 노여움을 표시하는 바람에 서낭당은 그대로 두고 나중에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나무의 기를 받아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할 때도 있어요. 특별히 주제를 지정해 주지 않으면 우리 나무를 주제로 글을 쓰는 아이들이 많아요. 아이들은 ‘느티나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늘이 되는 너그러운 사람’이라든가, ‘우리 느티나무처럼 크고 뜸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많이 써요.” 느티나무 그늘에 들어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자신의 정원처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느티나무의 너그러움과 생명력이 자연스레 닿은 결과이지 싶다. ‘받은 만큼 베푼다’는 삶의 이치가 아이들의 글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자연의 큰 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아이들이어서인지, 심성이 고운데다 마음 씀씀이가 참 너그러워요.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도 느티나무의 기운을 받은 탓 아니겠어요.” 이씨는 비가 새는 허름한 집에서 아이들의 잠자리 걱정으로 날을 새워야 하지만, 느티나무 정원에서 도담도담 자라나는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것은 더 없이 즐거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하늘이 지은 천상의 느티나무 정원에서 펼치는 생명 예찬이다. 글 사진 삼척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강원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 287-2. 중앙고속국도의 제천나들목으로 나가서 영월 태백 방면으로 간다. 태백시의 황지교사거리에서 국도 38호선을 이용해 14㎞ 가면 도계읍에 닿는다. 도계삼거리에서 도계강교를 건너서 도계역 앞에서 좌회전하여 400m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난 다리를 이용해 개울을 건넌 뒤 우회전한다. 다시 400m 가면 오른쪽으로 도계전산정보고등학교가 나오고, 학교 맞은편의 마을 공원에 나무가 있다. 자동차는 도로변의 노견주차장에 세우면 된다.
  • 경주 남산의 재발견…신라 1000년의 미소와 만나는 길

    경주 남산의 재발견…신라 1000년의 미소와 만나는 길

    남북 8㎞, 동서 4㎞. 경북 경주의 진산, 남산(495m)의 체격입니다. 산 치고는 작고 야트막한 편이지요. 한데 덩치는 작아도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깊이는 깊고 또 넓습니다. 과장 좀 보탤까요. 딱 ‘나무 반 유물 반’입니다. 확인된 절터만 150곳이고 불상은 129기, 탑은 99기에 달한다고 합니다. 전체 문화유적은 694개소이고요. 고(古)신라부터 통일신라 이후, 심지어 고려시대 유물까지 빼곡합니다. 산 전체가 절집이자 지붕 없는 박물관인 셈입니다. 그러니 국립공원으로 지정(1968년)된 건 당연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00년)된 것도 어색할 게 없지요. 여름방학을 앞두고 아이들과 경주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남산을 프로그램에 넣는 걸 잊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경주 남산(南山)은 옛 월성 왕궁의 ‘남’(南)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산의 이름도 이 같은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됐다. 대릉원 등 문화재가 밀집한 도심이나, 불국사가 깃든 토함산 등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은 지역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남산이 늘 관광객들의 시선에서 한발짝 비켜 섰던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산엔 신라의 모든 것이 새겨져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를 품은 우물 나정(井)과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종말을 고한 포석정이 각각 남산 자락에 있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고 끝난 곳’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화산으로 치자면 남산은 활화산이다.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문화재가 발굴되고 있다. 2007년에도 남산 열암곡에서 대형 마애석불이 발견됐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발견될지 모르니 ‘남산에선 구르는 돌 하나도 문화재급’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겠다. ●절터 150곳·불상 129기·탑 99기…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남산을 둘러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정표도 두 가지 종류로 세워져 있다. 노란색 글씨는 문화재 탐방 코스, 흰색은 단순 산행 코스다. 가장 일반적인 건 삼릉~용장골 코스다. 바둑바위와 금오산 정상을 찍고 용장계곡으로 내려온다. 이 코스에선 ‘신라 1000년의 미소와 만나는 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양한 문화재와 만날 수 있다. 단순 산행이라면 3시간 남짓 걸리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 문화재를 들여다보자면 예닐곱 시간은 족히 걸린다. 들머리는 삼릉이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잠든 봉분 셋이 연달아 솟아 있다. 삼릉을 찾게 하는 건 주변의 솔숲이다.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들이 빼곡해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솔숲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불상은 석조여래좌상이다. 남산 일대 상당수의 불상들이 그렇듯, 이 불상도 목과 얼굴 부분이 없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의 희생양이었을 거란 게 유력한 추정이다. 인근 계곡에 쳐박혀 있던 것을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얼굴은 잃었지만, 불상의 자태는 당당하다. 넓은 어깨와 가슴, 선명한 옷 매듭 무늬 등에선 기백이 넘친다. 경주남산연구소의 김구석 소장은 “7~8세기 신라 초기의 불상들은 이처럼 가슴이 넓고, 목 주름 등이 박력 있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라며 “통일신라 후기로 갈수록 허리 부분이 잘록해지고 가슴의 윤곽도 좁아지는 등 미려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설명했다. 석조여래좌상 위엔 아담한 크기의 마애관음보살이 서 있다. ‘미스 신라’라고 불리는 불상이다. 키 154㎝로 아담하고, 입술은 루즈를 바른 듯 붉다. 신라 석공이 붉은 빛 도는 돌 부분에 부러 입술을 새겼다니, 선인들의 해학에 설핏 웃음이 새어나온다. ●일곱 부처와 비승비속의 신선을 만나다 큰 바위에 아미타부처 여섯 분을 새긴 선각육존불을 지나면 선각여래좌상이다. 고려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산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어린’ 마애불상인 셈. 코는 두리뭉실하고 입술은 썰면 반근은 족히 나올 만큼 두툼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은 실실 웃고 있다. 부둥켜 안고 있는 바로 옆의 부부바위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계신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남산에서 얼굴이 가장 잘생겼다는 삼릉계 석불좌상과 기골이 장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을 지나면 바둑바위에 닿는다. 대릉원 등 경주의 주요 문화유적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 포인트다. 남산에 들면 최소한 두 번은 놀란다. 그 작은 산에 유물이 빼곡한 것에 놀라고, 암릉이 많은 것에 또 한 번 놀란다. 선 굵은 바위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데,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믿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불상과 탑들이 이 같은 풍경과 기막히게 잘 어우러져 있다는 거다. 하나하나가 ‘있을 만한 곳에 있’다. 다리쉼을 하려는 고갯마루, 한 굽이 돌아 시선이 닿는 암벽마다 어김없이 유물들이 세워져 있다. 이는 유물들을 가까이서 보는 것도 좋지만, 몇 발짝 떨어져서 완상하는 게 더 낫다는 뜻과 맥이 닿는다. 금오산(468m) 정상을 찍고 용장계곡으로 향한다. 골이 깊어질수록 풍경도 속도를 낸다. 하산길의 으뜸 명소는 용장사곡 삼층석탑이다. 높이는 4.5m. 경주사람들은 이 탑을 ‘한국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부른다. 남산 자체를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원래 탑을 세울 때 기단을 쌓는데 이 석탑은 별도의 기단을 세우지 않았다.”며 “해발 380m만큼의 산을 기단 삼았으니 국내 최고 높이의 탑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산길에 가끔 뒤를 돌아보시라. 늘 이 석탑이 보일 만큼 풍경의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한다. 삼층석탑 아래 삼륜대좌불도 인상적이다. 원반 모양의 세 돌받침(삼륜대좌) 위에 부처를 모신 특이한 구조다. 삼륜대좌불 아래는 매월당 김시습의 발자취가 서린 용장사터다. 김시습은 용장사에 7년간 머물며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돌아봐도 나무랄 데 없다. 한데 기왕 나선 길, 봉화골의 칠불암까지는 다녀오는 게 좋겠다. 남산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 가운데 유일한 국보(312호)다. 다만 남산 동쪽의 통일전이 들머리여서 서쪽의 삼릉~용장골 코스와 하나로 묶자면 체력이 달릴 수 있다. 통일전에서 왕복 3시간 남짓 걸린다. 칠불암 바로 위는 신선암 마애불이다. 결가부좌를 튼 대부분의 불상과 달리 구름 위에 한 쪽 발을 떠억하니 담그고 있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호방한 형상이다. ●신라의 건국 신화와 함께… ‘삼릉 가는 길’ 삼릉~용장골 코스가 산행을 겸한 답사길이라면 ‘삼릉 가는 길’은 남산 아래 자락을 따라 걷는 트레킹 길이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나정 등을 끼고 있어 신라의 건국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복원 공사 중인 월정교에서 삼릉까지 약 8㎞ 거리지만 코스의 중간쯤인 나정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담긴 우물터다. 박씨 문중의 제각을 수리하려고 땅을 파다 팔각건물지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발견됐다. 경주사람들은 나정이 박혁거세의 신궁(神宮)터라고 믿고 있다. 박혁거세 신화 또한 이 대목에서 역사로 굳어진다. 신궁의 실체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길은 1980년대까지 실제 사용됐던 남간 마을의 신라 시대 우물과 신라의 첫 왕궁터 창림사지, 배리 석불입상, 포석정 등을 거쳐 삼릉에서 끝난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가는 길: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나와 35번 국도를 타고 곧장 가면 삼릉이다. KTX는 서울역에서 신경주역까지 2시간 10여분이 소요된다. 경주남산연구소(www.kjnamsan.org)는 다양한 남산 답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모두 무료. 777-7142. ▶맛집:삼미정은 직접 빚은 동동주와 두부가 맛있는 집이다. 삼릉 초입에 있다. 745-8761. 고두반은 지역 농산물로 상을 내는 농가맛집. 담백하고 정갈한 맛이 일품이다. 748-7489. ▶잘 곳:가족 단위 여행객이라면 보문단지 내 한화, 대명리조트 등이 좋겠다. 최근 문을 연 블루원 리조트도 깔끔하다. 한옥 펜션인 야선미술관은 단체가 묵기 좋다. 자체 생산한 농산물로 차려낸 밥상도 맛있다. 010-9215-1618. 글 사진 경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5) 대전 괴곡동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5) 대전 괴곡동 느티나무

    잘 자란 느티나무 한 그루에는 무려 500만 장의 잎사귀가 돋아난다. 느티나무 그늘은 그냥 시원한 게 아니다. 500만 장의 잎이 모였다 흩어지며 그늘을 지었다가 햇살을 담기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느티나무 그늘은 살아 춤추는 생명의 보금자리다. 세상 일에 지친 누구라도 품어 안고 나무는 사람들을 평화의 길로, 혹은 안식의 길로 이끈다. 지친 몸뿐 아니라, 나무는 번잡한 마음까지 평안에 들게 한다. ‘힐링’ ‘치유’가 화두로 떠오르는 이즈음, 느티나무 그늘이야말로 원초적 생명을 회복시키는 생명의 치유자다. 우리 사는 세상에 느티나무 그늘이 절실한 이유다. 너른 벌판 가장자리에 홀로 우뚝 선 느티나무 그늘로 중년의 부부가 하이킹용 자전거를 세우고 들어선다. 널따란 평상 위에 도시락을 풀었다. 마치 안가의 대청마루처럼 몸도 마음도 편안해 보인다. 하이킹에 나선 부부가 더위에 지친 몸을 풀고, 모자란 기력을 보충할 요량이다. ●대전 최고령 거목… 키 26m·가지 26m 국내 최대 대전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로 알려진 괴곡동 느티나무다. 대전의 남쪽 외곽에 위치한 괴곡동은 도시 근교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오래된 농촌마을의 풍경을 가졌다. 마을 풍경의 중심에 느티나무가 있다. 나무는 너른 들이 내다보이는 새뜸마을 어귀에서 이곳을 지나는 누구라도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운 자태로 서 있다. “여기 시집와서 지금까지 이 집에서 살았죠. 나무의 나이를 우리가 어찌 알겠어요.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나무는 벌써 저만큼 큰 나무였다고 옛날 어른들이 이야기한 걸 생각하면, 1000년도 더 됐을 거예요” 멀리 펼친 나뭇가지 끝에 닿을 듯한 자리의 집 앞 텃밭에서 굽은 허리에 뙤약볕을 잔뜩 이고 마늘을 캐던 이경애(72) 할머니가 땀을 식히려 나무 그늘로 들어섰다. 정자로 쓰는 느티나무야 곳곳에 많이 있겠지만, 괴곡동 느티나무만큼 좋은 나무는 없을 것이라는 자랑이 이어진다. “점심 때가 지나면 마을 사람들이 마치 약속한 것처럼 나무 그늘로 모여요. 열 가구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어서 이 평상 두 개면 다 올라와 앉을 수 있지요. 잠깐만 밭에 나가면 힘들어 죽는다 하다가도 나무 그늘에만 들어오면 신기하게도 모두가 편안해져요. 원체 시원한 그늘이니까 그런가봐요. 누가 막걸리라도 가져오는 날이면 나무 그늘이 근사한 잔치판이 되지요.” 괴곡동 느티나무 주변은 비교적 세심하게 관리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이태 전에는 나무 뿌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단정한 울타리와 데크를 새로 설치하고, 평상도 다시 놓았다. 대전시를 대표할 만한 나무임은 분명하지만, 나무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대전 시민들 가운데에도 이처럼 좋은 나무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부근을 지나는 사람들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나무는 크고 아름답다. 나무는 키가 26m쯤 되고, 줄기 둘레는 9m에 가깝다. 게다가 나뭇가지도 그의 키와 같은 길이인 26m까지 사방으로 고르게 펼쳤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느티나무 가운데에서는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천연기념물 지정 청원… 해마다 칠석날 동제 올려 나이도 그렇다. 마을 사람들은 1000년 전에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갑천이라는 이름의 개울로 떠내려오던 어린 느티나무가 이곳에 뿌리내렸다고 한다. 느티나무를 뜻하는 괴(槐)자를 마을 이름에 붙인 것도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다. 하지만 1982년에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할 때의 조사에 따르면 나무의 나이는 650살로 추정했다. 지금으로 보면 680살이 된 셈이다. 대전문화연대와 대전충남생명의숲은 지난해 여름, 대전 지역의 노거수를 두루 조사하고, 여러 노거수 가운데 괴곡동 느티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달라고 청원했다고 한다. 대전시에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 즉 문화재급으로 지정된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상황에서 대전을 대표할 만한 자연 문화재로 이 나무를 꼽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칠월칠석에 괴곡동 느티나무에서 동제를 올린다. 이때에는 나무 바로 앞의 새뜸마을뿐 아니라, 주변 마을의 주민들도 찾아온다. 비교적 크게 벌이는 이 동제는 소원을 하늘에 올려 보내는 당산제와 달리 삼복의 무더위를 들녘에서 보내며 지친 농부들의 몸을 치유하는 대동굿 성격으로 진행된다. ●“그늘서 쉬면 찌뿌드드한 몸·마음 상쾌해져” 나무 그늘에 새 손님이 찾아왔다. 매우 다정해 보이는 노부부는 휴대용 라디오와 돗자리를 따로 준비했다. 지나다 들른 것이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이 나무를 찾아온 것이다. “자동차로 10분 쯤 걸리는 구봉마을에서 왔어요. 집 근처에도 둥구나무가 있지만, 짬만 되면 일부러 여기 와서 쉽니다. 대전 시내에 이만큼 시원한 곳이 없어요. 두어 시간씩 쉬고 돌아가면 찌뿌드드했던 몸과 마음이 몰라보게 상쾌해져요.” 젊은 시절에 육군본부 소속의 사이클 선수 생활을 했다는 이무성(74) 노인이다. 건강에 자신이 있었던 그는 최근에 중풍이 찾아와, 말도 어눌해지고 행동도 불편해졌다고 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환중에도 나무가 있어 유쾌하게 지낼 수 있다며 그는 나무 줄기를 그윽히 바라본다. 나무를 바라보고 평생을 살아온 마을 노인에서부터 스쳐 지나는 중년의 하이킹족 부부,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병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누구라도 품어 안는다. 무더운 여름 한낮, 대전 괴곡동 느티나무는 원초적 평안을 불러오는 치유의 생명체였다. 글 사진 대전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대전 서구 괴곡동 503번지. 호남고속국도의 지선에서 연결되는 대전남부순환고속국도의 서대전나들목을 이용하면 괴곡동에 빠르게 갈 수 있다. 나들목을 나가서 대전역 방면으로 1.6㎞ 가서 관저지하차도로 진입하여 다시 2㎞쯤 간다. 가수원네거리가 나오면 우회전하여 다시 1.8㎞ 간 뒤 오른쪽으로 난 마을길로 나가서 200m쯤 앞에서 좌회전한다. 철로 변을 따라 200m 남짓 가서 좌회전하여 철길 건너편으로 돌아들면 괴곡동이다. 나무는 마을 입구에 있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4)대전 중촌동 왕버들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4)대전 중촌동 왕버들

    60년도 더 지났건만 이 땅에 전쟁이 남긴 상처는 채 씻어지지 않았다. 전쟁 발발일이 들어 있는 유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하고, 갖가지 요란한 행사를 치르지만, 평화를 향한 걸음걸이는 여전히 제자리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사는 곳이 다르다는 턱없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역사의 상흔은 안타깝게도 아직 아물지 않았다. 누구라도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그곳을 찾아가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가 이토록 깊은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게 내려놓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다. 앞으로 얼마나 더 먼 길을 걸어야 참 평화가 살아 있는 세상에 다다를 수 있을지 곰곰 생각하게 되는 계절이다. ●좌익과 우익을 번갈아 학살한 현장 “잊어서는 안 될 아픈 상처이기에 더 보듬어 안아야 해요. 감춘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증거를 생생히 보전하고 바라보는 것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는 첫걸음 아니겠어요.” 풀뿌리여성 마을숲 공동대표 민양운(49)씨는 토요일이면 마을 중학생들과 함께 ‘평화의 나무’라는 입간판이 서 있는 나무 주변의 공터를 청소한다. 시민들 스스로 ‘평화공원’이라 이름 붙인 공터 주변이다. 그러나 ‘평화공원’은 이곳 대전 중촌동 주민들에게조차 낯선 이름이다. 평화공원이나 평화의 나무는 지역 행정의 공식 명칭이 아니다. ‘그루터기’라는 이름으로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마을 역사 탐험대가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다시는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다짐으로 붙인 이름이다. 한켠에 전쟁 희생자 위령탑이 높지거니 솟아 있지만 공원이라 부르기에는 초라한 아파트 옆 공터다. 이 자리에서의 참혹한 비극은 일제 식민지 때부터 시작됐다. 1919년에 일제가 이 자리에 ‘대전 감옥’을 짓고, 독립운동가들을 투옥한 게 그것이다. 이어 한국전쟁 때는 이곳에 수감됐던 좌익 인사들이 죄 없는 양민과 함께 남쪽의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다. 바로 1800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전 산내 학살사건이다. 비극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산내 학살사건 직후 대전 지역을 점령한 북쪽의 군인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북으로 퇴각하면서 수감 중이던 우익 인사 학살로 앙갚음했다.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생명을 짓밟은 최악의 비극이었다.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건만 당시의 흔적이라고는 한 개의 우물과 망루가 전부다. 그나마 다른 건물들 틈에 파묻혀 찾기도 쉽지 않다. ●마을 사람들 스스로 이름 붙인 나무 “제대로 남은 게 없어요. 당시의 자취를 지켜야 했는데, 좀 늦었어요. 마을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안타까워하던 중 찾게 된 것이 바로 이 나무였죠.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았던 살아 있는 생명체로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지요.” 민씨는 마을 사람들과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지역에 남은 전쟁의 상처가 생각보다 우심하다는 걸 알았고, 이를 극복하는 게 곧 이 시대의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옛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은 대부분 사라진 뒤였지만 다행히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을 한 그루의 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침내 나무를 ‘평화의 나무’로, 그 주변 지역을 ‘평화공원’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어 나무를 오래 지키기 위해 관계 기관에 보호수로 지정해 달라는 청을 넣었으나, 부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래서 정성껏 추렴하여 나무가 겪은 옛일을 기록한 안내판을 세웠다. 평화공원 왕버들은 키가 9m를 넘고, 사방으로 고르게 14m까지 나뭇가지를 펼쳤다.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어 난 잎사귀의 싱그러움은 청년기 왕버들의 전형적인 건강함을 보여 준다. 비스듬히 올라온 중심 줄기는 썩어 문드러지면서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나무의 규모를 이야기할 때에 흔히 이야기하는 사람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값은 그래서 의미가 없다. 줄기가 잘 썩는 왕버들임을 감안하면,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여느 나무에 비해 자람이 빠른 왕버들이지만, 현재 나무 줄기의 상태와 전체적인 규모로 보아 대략 100세 정도로 보인다.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일제가 대전 감옥을 짓고, 감옥 주변의 연못 가장자리에 풍치수로 심었던 여러 그루의 나무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평화는 밥 짓듯 스스로 조금씩 익혀 가는 것 대전 감옥 주변의 학살 참사를 고스란히 목격한 왕버들은 감옥도 연못도 심지어 나란히 서 있던 다른 나무들조차 모두 사라진 뒤에 홀로 남았다. 그야말로 폐허의 터에 욕처럼 살아남은 목숨이다. 옛 비극의 흔적을 갈아엎고, 고층아파트를 짓고, 번잡한 시장이 들어서며 모두가 잊으려 하는 기억을 홀로 붙들어 안고 서 있는 목숨이어서 더 치욕스럽다.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다. “모든 비극을 고스란히 바라보았을 나무가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옛일을 잊으려고만 했지 묻지는 않아요. 이제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게 평화에 다가서는 길이에요.” “평화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밥을 짓듯이 우리 스스로가 조금씩 익혀 가는 것”이라고 덧붙인 민씨의 어깨 위에 ‘평화의 나무’ 가지에서 살랑이는 잎새의 초록 향기가 살풋 내려앉는다. ‘호국보훈의 달’이 저물어 간다. 이제 전쟁의 상처를 씻어 내고 유월을 ‘평화의 달’로 바꾸어 부를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할 때다. 전쟁의 현장에서 ‘호국’보다 ‘평화’의 이름을 얻은 한 그루의 왕버들이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는 간절한 아우성이다. 글 사진 대전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대전 중구 중촌동 16-11 자유회관. 경부고속국도의 대전나들목으로 나가서 2㎞ 남짓 직진하면 고가도로가 나온다. 고가도로를 이용해 다시 1.2㎞쯤 직진한다. 대전 시내를 흐르는 대전천을 건너자마자 우회전한다. 곧바로 나오는 대전중·고등학교를 끼고 좌회전해 450m쯤 간 뒤 우회전하면 곧바로 대전 선병원이 나오고, 그 맞은편의 자유회관 가장자리가 평화공원이다. 나무는 자유회관 마당 한켠에 있는데, 주변의 주차 사정이 좋지 않다. 도로변의 공영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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