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나도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30초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비밀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비리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4,561
  • ‘이혼 아픔 견뎌낸’ 박해미 “20대로 돌아간다면 죽어라 연애”

    ‘이혼 아픔 견뎌낸’ 박해미 “20대로 돌아간다면 죽어라 연애”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뮤지컬은 물론 영화, 드라마까지 종횡무진 활약 중인 개성 만점 배우 박해미가 찾아온다. 12일 방송되는 KBS 2TV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서는 자매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박해미의 과거사 외에도 다양한 사연이 공개된다. 박해미는 최근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자매들의 집을 찾았다. 큰언니 박원숙이 과거의 이혼의 아픔을 딛고 일어난 박해미를 친정엄마의 마음으로 보듬기 위해 초대한 것. “많이 괜찮아졌고, 지금은 정말 행복하다”는 박해미의 말에 박원숙은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것을 하고 싶냐”고 물었고, 박해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죽어라 연애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추가 발언으로 자매들을 놀라게 했다. 연애고수일 것만 같던 박해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박해미는 이어 자매들이 “취미가 뭐냐”고 묻자 “잠자는 게 취미”라며 별다른 취미가 없다고 밝혔다. 이어 박해미가 “아들이 골프가 재밌다고 해서 같이 치려고 한다”고 말하자, 박원숙은 “나도 아들과 골프 하려고 골프채를 사주고 차에 싣고 그 다음 주에 사고가 났다”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박해미가 출연한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이날 오후 8시30분 방송된다.
  • 아베 저격범과 통일교 연관성, 일본 내 혐한 빌미 될 수 없다

    아베 저격범과 통일교 연관성, 일본 내 혐한 빌미 될 수 없다

    기자는 지난 10일 오후 6시쯤 통일교 관계자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무척 긴장하며 걱정하는 눈치였다. 지난 8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를 나라 시에서 저격 살해한 야마가미 데쓰야(41)의 범행 동기와 관련해 일본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없는지 궁금해 했다. 그러곤 야마가미의 어머니가 과거 통일교 신도였지만 지금은 관계를 끊은 것으로 일본 통일교 쪽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관계자와 전화를 끊고 몇 시간 뒤 국내 언론에서도 야마가미의 모친이 통일교 신도였다는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통일교가 발빠르게 야마가미의 모친이 과거 신도였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그만큼 불필요한 정보가 범람해 결과적으로 통일교에 대해 좋지 않은 보도나 주장이 판치는 일을 막겠다는 의도로 풀이됐다. 통일교 일본 지부는 11일에야 공식적으로 야마가미의 모친이 통일교 신도라고 공식 발표했다고 AP 통신이 전했다. 국내 관계자의 설명과 달리 지금도 신자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재산 헌납에 분노해 아베를 저격하기에 이르렀다는 언론의 의혹 제기에 대해 수사 중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이 직접 통일교를 거명하지는 않았다. 풍문이 나도는 기관에 쌓인 울분이 저격으로 이어졌다는 식으로만 발표했다. 일본 언론은 종교 집단이라면서 그의 어머니가 가산을 탕진했던 것이 범행 동기로 거론된다고 전했다. 다나카 도미히로 일본 통일교 대표는 기자회견 도중 야마가미의 모친이 통일교도라고 인정하면서도 수사가 진행 중이라 그녀가 얼마 만큼의 재산을 헌납했는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몇몇 사람이 관대한 기부를 하지만 절대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해명했다. 나아가 언론 보도는 의혹에 불과하며 범행 동기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나카는 “어떻게 그런 증오심이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완전 당혹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물론 아베 전 총리는 이 교회 신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나카는 연결된 집단이 개최한 몇몇 행사에 그가 초대돼 연설했을 수는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회견을 시작, “종교 지도자로서 난 이 사안을 굉장히 심각하게 보고 있다. 절대 일어나선 안되는 일이며 난 깊은 분노를 느낀다. 일본이 사랑받고 존경받는 지도자를 잃은 사실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AP는 이런 절 인사가 일본인이 유감을 표하는 의례적인 동작일 뿐 죄책감을 드러낸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다나카에 따르면 야마가미의 모친은 1990년대 말 통일교에 합류했으며 교회 행사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참여했다. 간혹 몇년 동안 교회에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기부와 관련해 추문이 일어 상응하는 조치가 2009년에 취해져 그 뒤로는 대형 사고는 없었다는 것이 다나카의 주장이다. 그는 “기부금 액수는 개인의 의사에 달렸다. 우리는 많은 금액을 기부한 이들에게 감사해 한다. 하지만 강요하는 것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야마가미의 모친은 2002년에 파산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다나카는 20년 전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파산을 둘러싼 구체적인 일들은 알려지지 않았다. 야마가미는 구금돼 어떤 코멘트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 문선명 교주가 1954년 설립한 통일교는 수백개 기업과 병원, 대학, 신문, 발레단까지 거느리고 있다. 다른 나라 신도들을 점지하듯 집단 결혼해 다문화 종교세계를 구축하려 한다는 것 때문에 많은 논란을 낳는다. 일본에서는 유명 여배우들과 정치인들이 막강한 교단의 영향력 때문에 친밀한 관계를 쌓는다. 일본 통일교는 1959년 창립됐으며 안호열 대변인에 따르면 일본 신도는 30만명으로 한국의 15만~20만명보다 많다. 교파의 믿음은 하느님이 세계평화와 조화를 원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일본인 다수는 그러나 토속 신앙인 신도와 불교가 뒤섞인 믿음이 주류를 이룬다고 AP는 지적했다. 마이니치 신문은 11일 수사 관계자를 인용해 “야마가미의 집을 압수수색 하는 과정에 어머니가 활동한 특정 종교단체에 대한 원한이 적혀 있는 노트를 확보했다”며 “야마가미가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며 범행 동기를 뒷받침하는 물증으로 보고 경찰이 정밀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총기 다섯 정과 컴퓨터 등도 압수했다고 했다. 야마가미는 “우리 집을 망친 종교단체를 일본에 초대한 사람이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그래서 그의 외손자 아베를 노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NHK 방송과 교도통신 등에 따르면 야마가미의 가정은 부유한 편이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재산을 물려받은 어머니가 특정 종교에 돈을 많이 쓰며 가세가 기울었다. 주간 분?(文春)은 수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삼남매의 삶이 어려워졌으며 명문 고등학교에 다녔던 야마가미는 (일반 대학 대신) 전문학교에 가게 됐다”고 보도했다. 야마가미는 전문학교를 자퇴한 뒤 해상 자위대에 자원해 2005년까지 복무했다. 이 와중에 병을 앓고 있던 형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수사 관계자는 “(형의 극단적 선택이) 야마가미에게 충격을 준 것 같다”며 “야마가미도 자위대 시절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풍비박산 난 집안 형편이 한 인간을 저격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보지 않는다. 특정 종교에 대한 울분이 마찬가지 명분이 될 수도 없다. 이런 두 가지 불충분한 이유로 행해진 암살이 정당화될 수 없듯 일본의 보수 우익이 이를 빌미 삼아 혐한 감정을 부추기는 일이 정당화될 수도, 그래서도 안된다.
  • ‘동탄 아파트에 워터파크’ 입주민, 결국 사과 “명예 실추시켜… 선처 부탁”

    ‘동탄 아파트에 워터파크’ 입주민, 결국 사과 “명예 실추시켜… 선처 부탁”

    경기도 동탄의 한 아파트 공용 공간에 대형 에어바운스 수영장을 무단 설치했던 입주민이 논란이 불거진 지 이틀 만에 결국 사과문을 올렸다. 해당 입주민은 11일 게재한 사과문에서 “관리사무소 직원 및 관리소장, 동대표님들께서 철거를 여러 번 요청했지만 공용시설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던 무지한 생각으로 이런 사태를 발생시켰다”고 밝혔다. 이어 “한 부모의 무지한 행동으로 인해 전국 인터넷 카페, 포털사이트에 불명예스러운 내용으로 게시돼 입주민의 공분을 산 점, 아파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점에 대해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면서 “부모의 잘못된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큰 상처가 됐고 학교 등교를 무서워 할 정도로 아이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해당 입주민은 “입주민 여러분,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선처 부탁드린다. 아파트 게시판에 저의 무례한 댓글로 상처받으신 분들께도 사죄드린다”며 “아파트 공용 부분 잔디, 배수구 관련 제반된 문제들은 원래대로 복원할 수 있도록 관리소장님 외 입주자대표회의와 소통해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앞서 지난 9일 해당 아파트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공용 공간에 무단으로 설치된 에어바운스 사진과 함께 이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글에 ‘저녁에 바비큐도 할 사이즈’ 등 지적하는 댓글이 이어지자 문제의 입주민은 “적당히 했음 좀 그만합시다. 6시에 나도 접을 거니까”라는 답글을 달며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캐머런 디아즈 “무명 시절 나도 모른 채 마약 운반한 듯”

    캐머런 디아즈 “무명 시절 나도 모른 채 마약 운반한 듯”

    할리우드 스타 캐머런 디아즈(50)가 팟캐스트 인터뷰를 통해 무명 시절 자신도 모르게 마약을 운반했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10일(현지시간)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1990년대 초 디아즈는 모델 경력을 쌓기 위해 미국에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뒤 일년 내내 마땅한 일을 구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 어떤 일을 하나 하게 됐는데 지금 생각하자면 모로코로 마약을 운반하는 일같은 것이었다”고 팟캐스트 ‘세컨드 라이프’에 고백했다. 디아즈는 “다시 말해 내 ‘옷’이 든 잠긴 가방을 받았다”며 “모로코 공항에 도착해 (공항 세관에서) 그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을 때 비로소 ‘제기랄, 이 가방 안에 뭐가 든 거지?’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는 찢어진 청바지에 통굽 부츠를 신는 철없는 시절이었다면서 “(공항 세관에) 내 가방이 아니며 누구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곤 공항을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가디언은 “디아즈로선 운 좋게도 당시 공항은 지금처럼 보안 조처가 엄격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디아즈는 “그 일(가방 운반)이 내가 파리에서 얻은 유일한 일이었다”고도 돌아봤다. 이 일 직후 그는 스물한 살에 척 러셀 감독의 영화 ‘마스크’(1994)로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 뒤 ‘존 말코비치 되기’(2000년), ‘슈렉’(2001년) 등 다양한 작품으로 경력을 쌓다가 2014년 ‘애니’를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멈췄고, 2018년 은퇴를 선언했던 디아즈는 다음달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영화 ‘백 인 액션’(Back In Action)으로 복귀한다. 상대 역은 제이미 폭스.
  • 오은영, 또 새 예능… 직접 밝힌 다작 이유 “코로나19 힘든 시기, 내면 치유 돕고파”

    오은영, 또 새 예능… 직접 밝힌 다작 이유 “코로나19 힘든 시기, 내면 치유 돕고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가 다수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이유를 직접 밝혔다. 오은영은 1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글래드호텔에서 진행된 KBS2 새 예능 ‘오케이? 오케이!’ 제작발표회에 참석했다. 그는 현재 채널A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와 MBC ‘오은영 리포트 - 결혼 지옥’ 등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다. 오은영은 방송 출연이 과하게 잦은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했는지 이날 직접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코로나19 시대, 누구나 위기라고 하는 시기를 겪으면서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며 “주변에 있는 귀중한 사람들의 삶을 되짚어보기를 바랐다. 내면을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오은영은 “삶의 소중함과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과정에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다면 제가 나서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제가 출연한다면 저 또한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오은영은 그러면서 “사실 아쉬운 점이 있었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시간적·경제적인 이유로 (상담소를) 찾아오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찾아가는 콘셉트의 ‘오케이? 오케이’에 출연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이어 “그분들을 찾아가는 것은 그분들의 삶에 대한 존경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터전에서 그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열정을 가지고 살아왔는가를 우리는 현장에 찾아가 볼 것”이라고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했다.오은영은 또한 “저는 전문 방송인, 연예인이 아니다”라면서 “감히 말씀드린다면 이런 류의 방송은 언제나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KBS만큼은 순기능을 많이 담아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소신도 밝혔다. 오은영은 이어 “어제도 촬영을 한다고 23시간 깨어 있었다. 그게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저희들에게 용기를 주시는 수많은 열심히 사시는 분들을 통해 가슴 뿌듯함을 많이 느꼈다”며 “이런 진심이 프로그램 안에 잘 녹아들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편 KBS2 새 예능 ‘오케이? 오케이!’는 전국 방방곡곡의 사연자들을 찾아가 고민을 상담해 주는 힐링 토크 프로그램이다. 오은영이 직접 사연자들을 만나 고민을 듣고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오은영과 코미디언 양세형 등이 출연한다.
  • [여기는 중국] “내 아들 아니야”…친자 검사 후 中 유치원에 버려진 5세 아이

    [여기는 중국] “내 아들 아니야”…친자 검사 후 中 유치원에 버려진 5세 아이

    중국 유치원에 버려져 4일째 무작정 방치된 5세 어린이의 안타까운 사연이 공개됐다. 평소처럼 다니고 있던 유치원에 등원한 직후 수일째 아이를 찾지 않은 아버지는 친자 검사 결과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아이를 찾아갈 이유가 없다며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이고 있는 상태다. 중국 매체 극목신문 등 다수의 언론은 지난 7일 등원한 이후 이날까지 무려 4일째 유치원 시설 안에 그대로 방치된 채 부모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사연의 샤오루이 군을 11일 소개했다. 지난 7일 광시성 난닝의 한 유치원에 평소와 같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등원했던 샤오루이 군이었지만 이날 만큼은 아이에게 가장 최악의 날이 됐다. 그의 아버지인 루이 씨가 돌연 하원 시간이 지나도록 아이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원 시간이 한참 지나고 다른 원생들은 모두 저마다의 부모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샤오루이 군은 벌써 4일째 누구도 찾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돼 있는 상태다. 이날부터 담당 교사는 아이의 부모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누구도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튿날에도 이와 같은 상황은 계속됐다. 급기야 샤오루이 군의 부모와 전혀 연락이 닿지 않자 유치원 교사들은 곧장 아이의 거주지인 인근 임대 주택을 찾았으나 이날도 그의 가족들 누구도 직접 만나지 못했다. 마치 계획적으로 샤오루이 군을 등원시킨 뒤 유치원에 버린 것처럼 느껴진 담당 교사는 이후에도 수차례 그의 가족들에게 전화와 문자 메시지 등을 남기기를 수일 째 반복했다.그렇게 한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샤오루이의 부친은 담당 교사와 한 차례 전화 통화를 하며 “최근 친자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 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아이에 대한 후속 처리 방침은 유치원에서 알아서 하라”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상태다. 이어 교사들은 샤오루이 군의 친할아버지와 삼촌 등에게 급히 연락했으나, 그들 역시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완고한 입장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홀로 유치원에 남아 있던 샤오루이 군의 안타까운 사연은 현지 매체와 지역주민위원회 등에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담당 교사들은 “샤오루이 군이 여전히 유치원에 남아 있는 상황이며 가족들 누구도 아이를 찾지 않고 있다”면서 “다만 인근 주민위원회와 관할 지역 사회에서 아이의 옷과 식재료 등의 도움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샤오루이 군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이 현지 매체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확산되자 그의 친모라고 밝힌 한 여성이 연락해 자신은 현재 해외 출장 중이며 3일 내에 아이를 찾아갈 것이라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 7세 아들에 “여탕 갈 마지막 기회” 떠민 父…“범죄 가르친 것”

    7세 아들에 “여탕 갈 마지막 기회” 떠민 父…“범죄 가르친 것”

    7세로 추정되는 아들에게 “초등학생 되면 들어가고 싶어도 못 간다”며 여탕 출입을 부추긴 한 아버지의 사연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10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아이한테 범죄 가르치는 애 아빠 봤다’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다. 글쓴이 A씨는 “찜질방 갔다가 목욕탕에서 씻고 나오는데 문 열고 나오니까 10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A씨는 아이에게 “엄마 기다려? 엄마 불러줄까?”라고 말을 걸었으나 아이는 카운터 쪽에 있던 자신의 아빠에게로 도망갔다. A씨에 따르면 아빠는 아이에게 “넌 괜찮다니까. 아빠가 여탕 들어가면 아빠는 경찰한테 잡혀간다”며 “빨리 들어가서 엄마 데리고 나와. 너 초등학생 되면 여탕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 마지막 기회야. 빨리 다녀와”라고 말했다. 해당 발언을 보아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직전인 7세로 추정된다. 아이 아빠는 등을 떠밀었으나 아이는 쭈뼛거리며 여탕에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A씨는 아이의 아빠가 분실물 보관함에 있던 장난감을 갖고 놀게 했다고도 전했다. 찜질방 구석에는 분실물 보관함이 있었고 아이는 이곳에 있던 공룡 인형을 보더니 “나도 공룡 좋아하는데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 아빠는 “괜찮아. 가지고 와. 아빠 말 좀 믿어. 분실물은 누가 잃어버린 거야. 너도 전에 물건 잃어버렸을 때 못 찾았지? 잃어버린 물건은 가져가는 사람이 주인인 거야”라며 아이를 떠밀었다고. 이에 아이는 공룡 장난감을 분실물 보관함에서 꺼내 가지고 놀았다. A씨는 카운터에 이를 알렸으나 찜질방 측은 “분실물에 대해 언제, 어디에, 누가 두고 간 건지 하나하나 알 수가 없어서 본인 거라 우기시면 저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A씨는 “분실물을 아무나 가져가라고 방치하는 태도였다”며 “카운터에 말하고 오니까 그새 애 엄마가 나왔는지 아무도 없었다”고 전했다. A씨는 해당 아이 아빠를 향해 “저기요. 애한테 참 좋은 거 가르치십니다. 애가 어떻게 자랄지”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공중위생관리법 시행규칙’ 일부 개정령을 지난달 22일부터 시행했다. 시행규칙 개정으로 목욕장 남녀 동반 출입 제한 연령은 기존의 만 5세 이상에서 만 4세(48개월) 이상으로 낮아졌다. 이에 따라 만 4세 이상 남자아이는 엄마를 따라 여탕 목욕실과 탈의실에 입장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만 4세 이상 여자아이는 아빠를 따라 남탕에 갈 수 없다. 해당 아이의 아빠는 자신의 아이에게 불법을 부추긴 셈이다.
  • [우버 파일 1] 마크롱, 프랑스 상륙 돕고 정치적 입지 넓혀

    [우버 파일 1] 마크롱, 프랑스 상륙 돕고 정치적 입지 넓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닐리 크로스 전 유럽이사회 의장 등이 우버 창업을 물밑에서 열심히 도왔다고 누출된 다량의 파일이 폭로했다. 이 택시 회사의 전직 보스는 경찰이 회사를 압수수색해 컴퓨터에 접근하는 일을 막기 위해 “킬 스위치“란 기술을 가능한 한 빨리 사용하라고 명령한 정황도 담겨 있다. 우버 파일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작성된 12만 4000개가 넘는 문서이며 이 가운데 8만 3000개가 이메일, 1000개는 대화와 관련된 파일들이다. 파일들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넘겨졌는데 국제탐사저널리즘협회에 공유됐다. BBC 방송은 이 파일들을 분석해 11일 오후 8시(현지시간) 2채널의 파노라마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우버의 해명은 단순하다. “과거 행동은 현재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 지금은 다른 회사다.” 그런데 이 회사는 일년 로비와 홍보 비용으로 9000만 달러를 썼고 각국의 친한 정치인들이 유럽의 택시업계를 붕괴시키는 캠페인에 자발적으로 돕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택시 기사들이 우버 반대 시위를 벌이다 폭력을 행사하곤 했을 때 마크롱(당시 경제산업부 장관)은 우버의 말썽많은 총수 트래비스 캘러닉에게 회사 입맛에 맞게 법을 개정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우버의 가차 없는 사업 방식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 파일들은 그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철저했는지 들여다보게 만든다. EU의 디지털 커미셔너였던 크로스는 임기가 끝나기 전 우버에 합류하기로 얘기하면서 EU의 윤리 규정을 위반했고, 우버를 위해 비밀리에 로비를 했다. 당시 우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였을 뿐만 아니라 법원 소송, 성희롱 추문, 데이터 위반 스캔들에 골치를 앓았다. 결국 주주들은 2017년 캘러닉을 내쫓고 다라 코스로샤히에게 개혁 임무를 맡겼다. 파리는 우버가 유럽에 첫발을 디딘 도시였다. 강한 반발이 있었고 폭력 시위로 점철됐다. 2014년 8월 야심 넘치는 은행가였던 마크롱이 경제산업부 장관에 취임했다. 그는 우버를 성장의 원천, 지독하게 필요했던 새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보고 적극 도왔다. 같은 해 10월 마크롱은 캘러닉을 비롯한 임원들, 로비스트들과 만났다. 그 뒤 그는 정부 안에 회사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데 앞장섰지만 거의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로비스트 마크 맥간은 그날 만남이 “굉장했다. 일찍이 못 보던 일이다. 우리는 곧 춤을 출 것”이라고 메모를 남길 정도로 감격적이었다. 마크롱과 캘러닉은 서로 이름만 부를 정도로 가까워졌고 적어도 네 차례, 파리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 등에서 만났다. 다보스에서의 만남은 이전에 보도된 적이 있다. 마크롱은 “극히 감사한 일”. “우리가 받은 환영은 정부와 기업 관계에서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2014년 택시 기사들은 우버팝 서비스가 면허를 받지도 않은 운전자들이 훨씬 싼 값에 손님을 태울 수 있게 하자 거칠게 반발했다. 법원과 의회는 금지시켰지만 우버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계속 서비스를 운영했다. 마크롱은 우버팝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른 서비스를 관장하는 프랑스 법률을 개정하는 일을 우버와 함께 하는 데 동의했다.이듬해 6월 25일 시위가 폭력으로 치닫자 일주일 뒤 마크롱은 칼라닉에게 문자를 보내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같은 날 우버는 우버팝 서비스를 프랑스에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몇 달 뒤 마크롱은 우버 운잔자의 면허 발급 요건을 완화하는 칙령에 서명했다. 마크롱의 대변인은 이메일을 통해 어쩔 수 없이 서비스 부문의 급격한 변화에 발맞춰 행정적, 규제의 장애를 벗어나도록 도움을 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우버는 쉽게 말해 득 본 것 하나도 없다는 입장이다. “우버팝을 중단했는데도 우호적인 규제는 더 이상 없었다. (2018년 더 엄격한 규제를 채택한 법률이 발효돼) 우버에 득 될 게 하나도 없었다.” 우버 파일 2 보러 가기 우버 파일 3 보러 가기
  • 장윤정도 놀랐다…김연자 ‘15억짜리 옷방’ 공개

    장윤정도 놀랐다…김연자 ‘15억짜리 옷방’ 공개

    가수 김연자가 남다른 스케일의 옷방을 공개했다. 지난 10일 방송된 KBS 2TV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이하 ‘당나귀 귀’)에서는 장윤정이 후배들과 함께 김연자의 집을 방문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장윤정은 후배들을 데리고 김연자의 옷방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 자리한 옷방에는 화려한 무대 의상으로 꽉 차 있었다. 김연자의 옷방을 본 김숙은 박수치며 “대박”이라고 외쳤고, 전현무는 “평범한 옷이 하나도 없다”고 감탄했다. 총 300벌 이상의 무대 의상들은 평균 옷값만 500만원에 달했다. 이를 계산해 보면 약 15억 원 상당이다. 장윤정은 옷방을 둘러보며 “나도 이런 건 처음 본다”고 소리쳐 웃음을 자아냈다.
  • [김택규의 문화 잠망경] 내 친구의 50대/번역가

    [김택규의 문화 잠망경] 내 친구의 50대/번역가

    1971년생 고교 문예부 삼총사가 모처럼 제주도에서 뭉쳐 렌터카 여행을 했다. 정치학 박사인 친구 A는 뒤늦게 얻은 외동아들 얘기를 하느라 바빴으며 제주에 눌러앉은 지 7년째인 친구 B도 오랜만에 말 상대를 만났다고 수다가 끝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화제가 고교 동창 C에게로 옮겨갔다. 미술부였지만 우리 문예부와 친했던 C는 얼마 전 잡지사 편집장을 곧 관두고 탐사보도 매체를 세우겠다고 내게 밝혔다. “초기 비용도 변변히 없잖아. 수익모델은 또 있고?”라고 B가 걱정을 했다. 나는 두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평생의 꿈이라잖아. 오십 넘어 마지막 모험을 해 보는 거지 뭐.” 이때 차를 몰던 A가 감탄을 하며 말했다. “걔 참 멋있네. 걔가 고등학교 때도 그렇게 멋있었나?” 우리 셋은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철에 한 번 갈아입을까 말까 한 옷차림, 누가 짓궂게 건드려도 해죽대기만 하는 표정,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텅 빈 눈동자까지 C는 그림을 조금 잘 그리는 것을 빼고는 전혀 두드러지는 게 없는 열등생이었다. “졸업 후 3년 만에 시내에서 우연히 걔를 봤다”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술 화구통을 메고 여학생 서너 명과 활개 치며 걸어가고 있었어. 예전의 그 싱거운 녀석이 아니더라고.” 졸업 후 육체노동과 군 복무를 했던 C는 1년간의 피나는 입시 공부 끝에 당시 미대에 입학한 상태였다. “나도 우연히 C를 시내에서 본 적이 있어. 너보다 10년쯤 뒤에 보긴 했지만…”이라고 A가 이어서 말했다. “한 여자랑 나란히 가고 있었는데 표정이 어둡고 힘이 없어 보이더라고. 얼마 전에 만났을 때 그 여자가 누구였냐고 물어보니까 그러더라. 잡지사 다니기 시작했을 때 자기를 정말 힘들게 한 애인이니 말도 꺼내지 말라고.” 마지막 차례는 B였다. “나는 우연히 본 건 아니고 내가 하던 커피숍으로 C가 가족을 데려왔어. 아마 10년쯤 됐지? 제수씨가 한 애는 업고 두 애는 양손으로 잡고 왔는데 너무 밝은 사람이어서 보기가 좋더라고.” 나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 삼총사는 최근에 부쩍 C와 자주 만나기는 하지만 그 전에는 오랫동안 격조했다. 하지만 고교 졸업 후 돌아가며 한 번씩 마주친 것만으로도 C의 곡절 많은 인생을 함께 증언할 수 있었다. 열정적인 미대생과 화가로 보낸 20대, 미술계에 회의를 느껴 잡지사 기자로 전업하고 연애에 홍역을 치른 30대 그리고 애 셋을 줄줄이 낳고 아내에게 꽉 쥐여살기 시작한 40대까지. 제주 바다를 바라보다가 나는 “다음에 올 때는 C도 데려오자”고 소리쳤다. B가 씩 웃으며 답했다. “그 전에 올걸. 10월에 귤 선과장이 열리거든. 퇴직 후 돈도 벌고 사업 구상도 한다고 내려온다고 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리는 C의 50대까지 목격하게 될 것 같다. 그것도 예전보다 훨씬 더 섬세한 눈초리로. 부디 그의 50대가 꿈꾸던 것 이상으로 행복하고 스릴 넘치기를.
  •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충무공 흉탄 맞자 대신 함대 지휘…진중 온갖 일 논의 참모 중의 참모[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방답진첨절제사 이순신(李純信)의 부임 인사를 받은 것은 1592년 1월 10일이다. 그런데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병선(兵船)을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의 군관과 관리에게 곤장을 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훗날의 충무공(忠武公)이 역시 무의공(武毅公)이 되는 신임 첨사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모양새다. 무의공은 이후 충무공의 가장 충실한 참모가 되어 모든 해전의 선봉에 섰고, 노량에서 충무공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대신 수군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태종의 세자이자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의 6대손이니 조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친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우리말 이름이 같지만 무의공은 전주, 충무공은 덕수로 본관부터 다르다. ●임기 초 긴장관계 빠른 시간에 극복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이름이 아닌 자(字)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 무의공의 자는 입부(立夫)다. ‘난중일기’에는 ‘이(李)입부가 다녀갔다’거나 ‘입부와 무엇무엇을 했다’는 글귀가 140차례나 나온다. 무의공이 임기 초의 긴장관계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충무공의 ‘측근 중 측근’으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경기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무의공의 무덤은 KTX가 서는 광명역에서 가깝다. 입부의 집안은 양녕대군의 3대손인 증조할아버지 이윤의 때부터 당시의 시흥땅에 살았다. 입부는 아버지 이진과 어머니 복주 김씨 사이 다섯 아들의 막내로 태어났다. 입부 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이순인·이순의·이순례·이순지·이순신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덕(德)이라 지칭한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믿음을 뜻하는 신(信)을 보탠 것이다. 입부의 넷째 형 비변랑 이순지는 충무공이 한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 옥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의공도 거쳐 간 비변랑(備邊郞)은 비변사의 종6품 무관이다. 입부의 두 아들 이탁과 이숙도 1603년 계묘 정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입부의 묘갈(墓碣)에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 을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무의공도 처음에는 문과 급제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자 무과로 선회한 것 같다. 무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무의공의 둘째 아들 이숙이 아버지만큼이나 충무공의 측근이었던 흥양현감 배흥립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수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충무공의 리더십에 무의공과 효숙공 같은 참모진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면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효숙(孝肅)은 배흥립의 시호다. 무의공은 충무공보다 아홉 살이 적다. 충무공은 31세이던 1576년(선조 9), 무의공은 24세이던 1577년(선조 10) 각각 무과에 급제했다.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부임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우후 이몽구가 방답에서 돌아왔는데, 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후(虞侯)는 수군절도사나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2월 19~27일 전라좌수사 휘하의 순천·광양·낙안·보성·흥양과 방답진·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에 대한 검열에 나섰다.방답진 검열은 5관 5포 가운데 마지막으로 26~27일 이루어졌다. 충무공은 ‘장편전(長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선(戰船)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장편전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을 가리키니 ‘화살 준비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표현이다. 충무공은 검열을 마치고 북봉(北峯)에 올라 진성 안팎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하랴’고 했다. 한 달 전 부임한 첨사가 진성의 방어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은 충무공도 잘 알고 있었다. 방답진은 여수 앞바다 돌산도에 있었다. 방답진성 자리는 이제 어항(漁港)이자 여수시의 돌산읍 소재지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다만 방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옛 진성 주변은 군내리로 불린다. 그러니 동헌과 군관청, 비석 등이 남아 있는 방답진의 흔적을 둘러보려면 내비게이션에 ‘군내리’를 입력해야 한다. 미수의 묘갈에는 ‘공은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 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명하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라고 했다. 학봉 김성일이라면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왜란 발발 이후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경상도초유사로 전란 수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참모장으로 충무공 출정명령 하달 그해 4월 13일 왜군선이 부산포 앞바다에 몰려오면서 무의공의 존재는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출정 직전인 5월 1일자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수령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분하여 격동했으며, 자기 한 몸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과연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하다’고 했다. 행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참모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침내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과의 대화에서 결심을 굳힌 충무공은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정한다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토록 한다. 중위장(中衛長)이라면 참모장이다. 당시는 순천도호부사 권준이 전라좌수영의 중위장이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무의공이 대신한 것이다. 도호부사와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품계는 같지만 순천부사는 광양·낙안·보성·흥양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만큼 전라좌수영에서는 선임이었던 듯하다.무의공은 옥포·합포·적진포로 향한 1차 출전에서 왜적의 대선(大船) 1척씩 모두 3척을 깨뜨리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사천·당포·당항포로 2차 출전한 5월 29일에는 권준이 중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무의공은 전부장(前部將)으로 나선다. 6월 5일 당항포해전에서 조선수군은 26척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를 공격해 25척을 가라앉혔다. 무의공은 남은 한 척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다음날 새벽 잠복하고 있다가 적선을 침몰시키고 100명 남짓한 왜적을 몰살시켰다. 무의공은 직접 활을 쏘아 왜장을 사살했다. 무과 시험장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충무공을 앞섰다. 7월 6일 3차 출전은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충무공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군의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데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쫓아가서 일시에 불살랐다’고 썼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 곧 수급의 숫자였다. 그런데 충무공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분멸(焚滅)하는 데 초점을 맞추되 공로를 인정받고자 무리하게 접근해 적의 머리를 베는 데 급급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무의공은 충무공이 제시한 전투 원칙에도 가장 충실한 장수였다. 무의공은 1594년 4월 충청수사에 오른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로 줄곧 충무공을 지원한 이억기와 더불어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무의공이 서·남해 방비를 책임지는 지휘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지휘 체계를 깨뜨린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하는 사실이다. 무의공은 통제사에 복귀한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두 달 남짓 지난 1597년 11월 다시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작됐다. 통제사 이순신을 잃었지만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200척 남짓한 적선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뒀다. 무의공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올랐고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시절 군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 아베 피살 직후 “나도 총통 쏴 죽이고 싶다” 댓글…20대 대만 청년 체포

    아베 피살 직후 “나도 총통 쏴 죽이고 싶다” 댓글…20대 대만 청년 체포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선거 유세 중 총격을 받고 사망한 가운데 대만에서는 차이잉원 총통을 암살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게재한 20대 청년이 경찰에 붙잡혔다. 중국 관영매체 관찰자망은 지난 8일 소셜미디어에 “나도 차이(총통)을 총살하고 싶다”는 글을 올린 21세 첸 모군이 경찰에 붙잡혀 공갈 협박 혐의로 구금된 상태라고 10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첸 군은 지난 8일 아베 전 일본 총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대만의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인 PTT에 이 같은 내용의 댓글을 게재했다. 대만 먀오위현 경찰서는 해당 댓글이 게재된 이튿날인 지난 9일 오후 2시경 사이버 수사대와 타이난시 경찰서 등과 협조해 본격 수사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졌다. 관할 경찰서 측은 첸 군이 게재한 댓글 IP주소를 토대로 수사를 벌였고, 그가 타이난시 융캉구 인근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해 댓글을 게재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관할 경찰서로부터 첸 군와 관련한 자료를 신속하게 넘겨받은 경찰들은 수사가 시작된 지 불과 5시간 만에 용의자 첸 군의 신변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첸 군이 거주했던 주택가에서 직접 그를 체포한 경찰들은 그의 집 안을 신속하게 수색했지만 집 안에서 권총이나 폭발물 등의 증거는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융캉구 주택가에서 체포된 첸 군은 경찰 수사 중 “댓글 내용은 진심이 아니었으며 단순한 장난에 불과했다”면서 “범죄 행위를 시도하지 않았다”고 범행 관련성을 일체 부인했다. 이와 관련해 대만 현지 언론들도 차이 총통과 관련한 암살을 의미하는 댓글에 큰 관심을 쏟는 분위기다. 현지 언론들은 경찰에 붙잡혀 송치된 첸 군의 정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그가 최근 대학을 졸업한 올해 21세의 청년이라는 개인 정보를 공개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융캉구에 거주 중이며 현재는 무직 상태로 알려졌다. 이처럼 첸 군에게서 어떠한 범행 동기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관할 경찰이 공갈 협박 혐의로 첸 군을 잡아들이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과잉 수사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타이난시 융캉구 경찰서는 “첸 군의 발언이 이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유돼 확산된 상태”라면서 “아베 전 일본 총리 피살 사건으로 경찰 당국의 치안에 대한 경계가 삼엄한 상황인데, 경찰들의 비위를 건드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편, 첸 군의 댓글 한 문장이 불러온 이번 사건은 융캉경찰서에서 수사를 지휘했으나 첸 군이 붙잡히자 그와 관련한 혐의 일체를 타이난 검찰로 송치해 추가 수사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다.
  •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로 ‘충무공의 최후’ 지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로 ‘충무공의 최후’ 지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방답진첨절제사 이순신(李純信)의 부임 인사를 받은 것은 1592년 1월 10일이다. 그런데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병선(兵船)을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의 군관과 관리에 곤장을 쳤다’는 내용이 보인다. 훗날의 충무공(忠武公)이 역시 무의공(武毅公)이 되는 신임 첨사의 군기를 단단히 잡은 모양새다. 무의공은 이후 충무공의 가장 충실한 참모가 되어 모든 해전의 선봉에 섰고, 노량에서 충무공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대신 수군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무의공 이순신(1554~1611)은 태종의 세자이자 세종대왕의 큰 형인 양녕대군의 6대손이니 조선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종친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과 우리말 이름이 같지만 무의공은 전주, 충무공은 덕수로 본관부터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이름이 아닌 자(字)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 무의공의 자는 입부(立夫)다. ‘난중일기’에는 ‘이(李)입부가 다녀갔다’거나 ‘입부와 무엇무엇을 했다’는 글귀가 140차례나 나온다. 무의공이 임기 초의 긴장관계를 빠른 시간에 극복하고 충무공의 ‘측근 중 측근’으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경기 광명시 일직동에 있는 무의공의 무덤은 KTX가 서는 광명역에서 가깝다. 입부의 집안은 양녕대군의 3대손인 증조할아버지 이윤의 때부터 당시의 시흥땅에 살았다. 입부는 아버지 이진과 어머니 복주 김씨 사이 다섯 아들의 막내로 태어났다. 입부 형제의 이름은 순서대로 이순인·이순의·이순례·이순지·이순신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네가지 덕(德)이라 지칭한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믿음을 뜻하는 신(信)을 보탠 것이다. 입부의 넷째 형 비변랑 이순지는 충무공이 한성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나왔을 때 옥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적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의공도 거쳐간 비변랑(備邊郞)은 비변사의 종6품 무관이다. 입부의 두 아들 이탁과 이숙도 1603년 계묘 정시에서 무과에 급제했다. 미수 허목(1595~1682)은 입부의 묘갈(墓碣)에 ‘공은 젊었을 때에 유학에 전념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25세에 알성시 을과에 급제했다’고 했다. 무의공도 처음에는 문과 급제를 꿈꿨지만 여의치 않자 무과로 선회한 것 같다. 무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까지는 양반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무의공의 둘째 아들 이숙이 아버지 만큼이나 충무공의 측근이었던 흥양현감 배흥립의 사위가 됐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을 정점으로하는 조선수군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는 충무공의 리더십에 무의공과 효숙공같은 참모진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면서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효숙(孝肅)은 배흥립의 시호다.  무의공은 충무공보다 9살이 적다. 충무공은 31세이던 1576년(선조 9), 무의공은 24세이던 1577년(선조10) 각각 무과에 급제했다. 두 사람의 ‘관계 개선’은 부임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2월 8일자 ‘난중일기’에는 ‘우후 이몽구가 방답에서 돌아왔는데, 첨사가 방비에 진력하더라고 극찬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우후(虞侯)는 수군절도사나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2월 19~27일 전라좌수사 휘하의 순천·광양·낙안·보성·흥양과 방답진·사도진·여도진·발포진·녹도진에 대한 검열에 나섰다. 방답진 검열은 5관 5포 가운데 마지막으로 26~27일 이루어졌다. 충무공은 ‘장편전(長片箭)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으나, 전선(戰船)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장편전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작은 화살인 편전(片箭)을 가리키니 ‘화살 준비가 매우 불충분하다’는 표현이다. 충무공은 검열을 마치고 북봉(北峯)에 올라 진성 안팎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외롭고 위태로운 섬이라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안의 연못 또한 지극히 엉성하여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애는 썼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하랴’고 했다. 한달 전 부임한 첨사가 진성의 방어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다는 것은 충무공도 잘 알고 있었다.  방답진은 여수앞바다 돌산도에 있었다. 방답진성 자리는 이제 어항(漁港)이자 여수시의 돌산읍 소재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방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옛 진성 주변은 군내리로 불린다. 그러니 동헌과 군관청, 비석 등이 남아있는 방답진의 흔적을 둘러보려면 내비게이션에 ‘군내리’를 입력해야 한다.  미수의 묘갈에는 ‘공은 처음에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 공이 한번 보고는 그의 현명하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을 알아 극력 추천한 것’이라고 했다. 학봉 김성일이라면 1590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해 왜란 발발 이후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 경상도초유사로 전란 수습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해 4월 13일 왜군선이 부산포앞바다에 몰려오면서 무의공의 존재는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출정 직전인 5월 1일자 ‘난중일기’에는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수령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렀다. 그들은 모두 매우 분하여 격동했으며, 자기 한 몸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과연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할 만 하다’고 했다. 행간에서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나가자고 재촉하는 참모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마침내 5월 3일 녹도만호 정운과 대화에서 결심을 굳힌 충무공은 중위장인 방답첨사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 출정한다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토록 한다.  중위장(中衛長)이라면 참모장이다. 당시는 순천도호부사 권준이 전라좌수영의 중위장이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호출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워 무의공이 대신한 것이다. 도호부사와 첨절제사는 종3품으로 품계는 같지만 순천부사는 광양·낙안·보성·흥양을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만큼 전라좌수영에서는 선임이었던 듯 하다.  무의공은 옥포·합포·적진포로 향한 1차 출전에서 왜적의 대선(大船) 1척씩 모두 3척을 깨뜨리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사천·당포·당항포로 2차 출전한 5월 29일에는 권준이 중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무의공은 전부장(前部將)으로 나선다. 6월 5일 당항포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26척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를 공격해 25척을 가라앉혔다. 무의공은 남은 한 척이 도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다음날 새벽 잠복하고 있다가 적선을 침몰시키고 100명 남짓한 왜적을 몰살시켰다. 무의공은 직접 활을 쏘아 왜장을 사살했다. 무과 시험장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그의 활쏘기 실력은 충무공을 앞섰다.  7월 6일 3차 출전은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충무공은 조정에 올리는 장계에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적의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사로잡아 왜군의 머리 4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데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2척을 쫒아가서 일시에 불살랐다’고 썼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 곧 수급의 숫자였다. 그런데 충무공은 적을 사살하고 적선을 분멸(焚滅)하는데 초점을 맞추되 공로를 인정받고자 무리하게 접근해 적의 머리를 베는데 급급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듯 무의공은 충무공이 제시한 전투 원칙에도 가장 충실한 장수였다. 무의공은 1594년 4월 충청수사에 오른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로 줄곧 충무공을 지원한 이억기와 더불어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무의공이 서·남해 방비를 책임지는 지휘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의 지휘 체계를 깨뜨린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한 것은 우리가 모두 안타까워하는 사실이다.  무의공은 통제사에 복귀한 충무공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두 달 남짓 지난 1597년 11월 다시 경상우수사에 임명됐다. 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시작됐다. 통제사 이순신을 잃었지만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200척 남짓한 적선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뒀다. 무의공은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올랐고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전라도병마절도사 시절 군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 인천공항서 확진된 외국인 절반, 열나도 신고 안 해

    인천공항서 확진된 외국인 절반, 열나도 신고 안 해

    지난해 인천공항 검역단계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 3명 중 1명이 건강상태 질문서에 ‘무증상’으로 신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외국인 확진자 2명 중 1명은 열이 나는데도 증상 신고를 하지 않았다. 9일 질병관리청이 발간한 ‘주간 건강과 질병’에 따르면 지난해 국립인천공항검역의 검역 단계에서 확진된 해외 유입 확진자는 1287명이다. 이 가운데 입국 시 제출하는 건강상태 질문서에 ‘증상이 있다’고 신고한 확진자는 860명(66.8%), 무증상으로 신고했으나 검역대에서 발열이 확인된 사람은 261명(20.3%), 무증상 확진자는 166명(12.9%)으로 확인됐다. 확진자 3명 중 1명을 걸러내지 못한 셈이다. 내·외국인으로 구분해 보면 내국인 확진자 981명 중 검역 단계에서 증상을 신고한 사람은 782명(79.7%), 무증상으로 신고한 사람은 199명(20.3%)이었다. 이와 비교해 외국인의 경우 306명 중 79명(25.8%)만 증상을 신고했고 227명(74.2%)은 증상을 신고하지 않았다. 외국인 입국자가 증상을 자각했는데도 신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연구진은 “외국인 입국객의 경우 검역단계에서 조사 대상자 확인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최근 국내 코로나19 신규 입국자 격리 면제와 국제선 항공편 증설 이후 입국자가 늘면서 해외 유입 사례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보다 적극적인 검역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 유입 확진자는 지난달 24일 이후로 지난 8일까지 보름째 세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방역당국은 입국 감시를 강화하는 등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지 않다. 임숙영 중앙방역대책본부(방대본) 상황총괄단장은 최근 브리핑에서 “해외 유입 제한 정책은 일상 회복을 위한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결정하는 문제”라며 “큰 우려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당분간은 현행 체계를 유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尹 만난 박형준 시장 “2030부산세계엑스포는 가장 주요한 균형발전 전략”

    尹 만난 박형준 시장 “2030부산세계엑스포는 가장 주요한 균형발전 전략”

    박형준 부산시장이 8일 윤석열 대통령과 만나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와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을 균형발전의 핵심 과제로 삼아달라고 건의했다. 박 시장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열린 민선 8기 시·도지사 간담회에 참석해 이같이 건의했다. 이 자리에는 윤 대통령, 시·도지사, 중앙부처 주요 간부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 시장은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가 가장 빠르고 주요한 지방 균형발전 전략이다”라며 “엑스포 유치의 전제조건인 가덕도 신공항 조기 건설, 북항 재개발 문제도 중앙부처 규제에 벗어나 부산시가 주도권을 가지고 처리해나도록 권한을 부여해 달라”고 제안했다. 또 산업은행 이전과 관련해서는 “산업은행 이전 추진에 따라 공공기관 이전을 통한 지역 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다”면서 “부산을 수도권에 버금가는 금융도시로 만들기 위해 대통령의 지속적인 관심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는 윤 대통령 취임 후 시·도 지사와 가진 첫 공식 회의다. 각 시·도 지사의 현안 건의와 함께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정부 경제정책 방향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방시대 추진전략을 발표했다.
  • 자베르 vs 리바키나, 누가 이겨도 윔블던의 새 역사

    자베르 vs 리바키나, 누가 이겨도 윔블던의 새 역사

    누가 되든 윔블던 여자 테니스의 새 역사다. 온스 자베르(튀니지)와 옐레나 리바키나(카자흐스탄) 얘기다.자베르는 8일(한국시간) 영국 올잉글랜드클럽에서 열린 윔블던 테니스대회 여자단식 4강전에서 ‘두 아이의 엄마’ 타티아나 마리아(독일)를 2-1(6-2 3-6 6-1)로 제쳤다. 이어진 또 다른 4강전에는 리바키나가 3년 만에 메이저 결승에 오른 시모나 할레프(루마니아)를 2-0(6-3 6-3)으로 완파했다. 자베르와 리바키나 중 누가 우승을 차지해도 새 역사가 쓰인다. 자베르가 리바키나를 꺾으면 남녀를 통틀어 아랍 선수로는 처음으로 테니스 메이저 단식 정상에 선다. 아랍 출신 선수가 메이저 단식에서 4강 이상의 성적을 낸 것부터 자베르가 최초다. 리바키나는 카자흐스탄 테니스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카자흐스탄 선수가 메이저 결승에 오른 것은 리바키나가 최초다. 리바키나도 자베르를 제압하면 사상 첫 카자흐스탄 출신의 메이저대회 단식 챔피언으로 탄생한다.자베르와 리바키나간 상대 전적은 자베르가 2승1패로 우위다. 마지막이었던 지난해 10월 시카고 대회에서는 자베르가 1세트를 따내고 2세트에 들어간 상태에서 리바키나가 기권했다. 올해 성적도 자베르의 우위가 확실하다. 그는 올해 무투아 마드리드오픈과 윔블던 직전에 열린 베를린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리바키나는 한 번도 투어 대회에서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올해 결승 진출 횟수에서도 자베르(4차례)가 리바키나(1차례)에 앞선다. 지난해 10월 아랍 남녀 선수 처음으로 단식 랭킹 10위에 진입한 자베르는 올해 30승9패의 상승세를 이어가며 2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윔블던 우승 경험이 있는 할레프를 꺾은 리바키나의 기세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는 올 시즌 다소 부진해 랭킹이 후퇴했을 뿐 2020년부터 연말 랭킹 20위권을 꾸준히 유지해온 선수다. 특히 리바키나의 시속 190㎞대 강서브가 이번 대회 들어 유독 매섭다는 평가가 나온다. 자베르의 서브는 시속 170㎞ 후반에 그친다.
  • 이수근, 이승기 폭로 “건방 떨었다…연락 안 해”

    이수근, 이승기 폭로 “건방 떨었다…연락 안 해”

    강호동 “나한테는 자주 연락” 개그맨 이수근이 가수 이승기에 대한 폭로와 함께 서운함을 토로했다. 이수근은 최근 공개된 네이버 나우 웹 예능 ‘걍나와’에 출연해 이승기를 떠올렸다. KBS2 ‘1박 2일’ 시즌1 함께 출연했던 강호동은 “당시 이승기의 인기가 대단했다”라고 운을 뗐다. 이수근은 “승기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사실 가끔 건방도 떨었다. 지금은 많이 내려놓은 것 같다”며 폭로를 시작했다. 이어 “가끔은 전화도 하고, 보고 싶다고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냉혈한이구나 싶었다”며 “그래도 가끔은 보고 싶을 텐데, 방송 관련된 게 아니면 절대로 연락을 안 한다. 나는 (동생이라고) 생각하는데, 동생은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싶다. 승기에게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싶었다”라고 토로했다. 이에 강호동은 “드라마 준비한다고 시간과 여유가 없었을 것 같다. 네가 좀 이해를 해줘야 한다”면서 “나한테는 사실 연락이 자주 온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그러자 이수근은 “더 이해가 안 된다. 호동이형 전화번호 한번 누를 때 내 번호도 한번 누를 수 있는 거 아니냐.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나.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나. 이건 내가 친하니까 할 수 있는 소리다”라고 말했다. 이수근은 “이런 식으로 하면 이승기가 방송에 나오지 않겠냐. 나와서 오해를 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고, 강호동은 “사실 승기에게도 말할 기회를 줘야한다”라고 공감을 표해 웃음을 안겼다. 끝으로 이수근은 “승기야. 나중에 네가 결혼하고 좋은 일 있고 그래 봐라. 누가 축하를 더 해줄지”라면서 “‘걍나와’에 한번 나와줘”라고 영상 편지를 남겨 다시 한번 모두를 폭소케 했다.이승기 “수근이 형 서운하셨어요?” 이승기는 7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수근이 형 서운하셨어요? 표정 왜 이렇게 억울하심”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게재했다. 공개된 사진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강호동, 이수근의 모습이 담긴 기사 내용이 캡처됐다. 이어진 사진에는 이승기가 이수근과 연락을 나눈 문자 내용이 공개됐다.이수근은 “호동 형이랑 같이 있어. 널 너무 사랑해서 방송에서 이용했어. 더 서운한 표정을 못해서 혼났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에 이승기는 “알죠”라며 “형 드라마 촬영 중이라 이거 끝나고 연락드릴게요”라고 답하며 훈훈한 케미를 자랑했다.
  • [열린세상] ‘동반자살’에 동정적인 사회/김세정 바르샤바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열린세상] ‘동반자살’에 동정적인 사회/김세정 바르샤바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아이 어머니와 결별한 남성이 어린 딸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영국 신문은 아버지의 사진을 크게 싣고 “이 자가 어린 딸의 살인자다”라고 보도했다. 이 냉정한 시각이 당시에는 낯설었다. 한국에서라면 일반적으로 ‘동반자살’이라고 일컫고 자살한 남성에 대한 동정적인 내용의 기사가 실렸을 것이다. ‘오죽하면 죽었겠냐’거나 ‘열심히 살 궁리를 해 보지’라거나. 여기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딸의 입장에 대한 고려는 없다. 딸의 처지에서 보자면 살해당했을 뿐이다. 10년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죽음에 대해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을 부모가 죽이는 사건에 대해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종종 본다. 자살은 스스로 죽기를 결심하는 행위다. 부모가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한 후 죽인 아이’가 죽음을 결정하고 동의를 했을까. 설령 엄마ㆍ아빠 죽으면 나도 죽을래라고 말했다 한들 그 죽겠다는 의사 표명을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니 동반 ‘자살’이 아니다. 자녀 살해이고 아동 살인이다. 더구나 부모란 아이를 우선적으로 보호할 것으로 기대되는 존재 아닌가. 그런 존재가 어린이를 죽인 것이니 오히려 더 끔찍한 범죄다. 부모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아이를 남아서 살게 두지 않고 죽여 버리는 살해 행위를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면서 그런 살인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정서란 부모가 아이만을 이 사회에 남겨 두고 갈 수는 없을 거라는 판단, 즉 아이가 친부모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경우 아이의 인생이 매우 험할 것이라는 판단을 공유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혼자 이 풍진 세상에 남겨 두고 가느니 데리고 가겠다 이런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친부모가 없는 아이를 누군가 다른 어른이 돌보아 주고 양육하고 교육을 하여 성인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한국 사회에는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런 위탁 양육 시스템을 영 믿지 못하는 것일 테다. 아이가 혼자라도 살아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부모와 같이 죽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이유를 밝히고 개선해야만 이와 같은 아동 살인 사건의 발생을 막을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인구 걱정을 많이 한다. 여성들이 결혼하지 아니하고 자식을 낳지 않아서 한국인이 소멸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단 생겨나고 태어난 아이는 더욱더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마음 편히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출산을 유인해야 하고, 태어난 아이들을 사회 공동체가 보듬어서 키워 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정상 가족이 아니거나 친부모가 없어도 말이다. 그러나 부모가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이를 죽여 버리는 것을 정서적으로 용인하고, 아이가 정상 가족의 형태 내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비난과 부담을 가하는 사회에서 아이가 많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한국의 친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지나치게 몰두하는 반면 남의 자식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보호구역을 지정해 지나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차량 속도를 낮추자는 법안에 반대하는 사나운 주장들을 볼 때 그렇다. 인구 유지가 그렇게나 중요하다면서 막상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하는 데는 인색한 것인데, 이렇게 자기 자식만을 아끼는 태도를 익히 보아서 남겨 두고 가지 못한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최근 부모가 자살하면서 아이를 살해한 사건과 관련해 코인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대책을 세우라는 논의를 종종 본다. 성인의 선택마저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선택할 수 없는 존재들은 더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닐까.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뒤처진 새/라이나 쿤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뒤처진 새/라이나 쿤제

    뒤처진 새/라이나 쿤제 철새 떼가, 남쪽에서날아오며도나우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뒤처진 새를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나도 심하게 뒤처진 새였다. 태어나고 자랄 무렵 내 곁에 뒤처진 새들이 참 많았다. 그러니 뒤처졌다고 불행하지 않았다. 앞서 날아간 새, 누구였을까. 생각나지 않는다. 불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만이 아는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다. 살면서 부끄러운 시간들은 더 쌓여 갔다. 삶이란 부끄러움을 쌓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세월이 흘러 부끄러움을 조금씩 닦아 가는 것이 삶이라고 비로소 생각하게 되었을 때 지푸라기를 붙드는 느낌이 있었다. 제일 늦게 날아가지만 결국은 산맥을 넘어가는 새.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새. 인쇄소에서 막 나온 원고지의 첫 줄 같은 그 영혼에 향기 있기를! 곽재구 시인
  • 마룬5는 지웠지만…‘무지 탓’ 욱일기 사용,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나 [클로저]

    마룬5는 지웠지만…‘무지 탓’ 욱일기 사용, 앞으로 어떻게 대응하나 [클로저]

    “항의할 때마다 무지 느껴”“사실 설명하는 수밖에”“사례집 만들어 빨리 받아들이도록”“항의메일 보낼 때마다 느끼는 건 무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예요.” 서경덕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는 7일 오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 교수는 이날 오전 페이스북을 통해 “큰 논란이 됐던 마룬5(Maroon5· 마룬파이브) 홈페이지의 욱일기가 사라졌다”며 “전날 홈페이지 상단에 그려졌던 욱일기 문양이 없어지고 마룬5 멤버들 이미지로 대체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는 11월 내한 공연을 앞뒀던 미국 록밴드 마룬5는 홈페이지에 욱일기를 게재한 사실이 지난 5일 알려져 국내 여론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지난 3월 말부터 월드 투어를 이어가고 있는 이들은 추가 공연 일정을 공개하면서 배경 사진에 욱일기 문양을 추가로 넣은 것이라 더 비난받았죠. 지난 2019년에도 국내 네티즌과 욱일기 관련해 온라인서 이른바 ‘기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더욱 비판받았죠. 서 교수는 이날 “마룬5 측에 지속적인 항의를 함께 해주시고 욱일기 문제의 큰 여론이 형성되다 보니 내한 공연 주최 측에서 마룬5 측에 우려를 전달했고 모든 것들이 맞아떨어져 욱일기를 없앨 수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엔 이렇게 욱일기를 지웠지만 앞으로 또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네티즌과 협업해 문제 해결 지난 2018년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예고 영상에 욱일기가 등장했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엄브렐러 아카데미’ 시즌3에도 등장한 사실이 지난달 알려지기도 했죠.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는 게 서 교수의 설명입니다. 매 사건마다 파악 후 메일을 보내지만 무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죠. 서 교수는 과거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네티즌과 협업해 항의 메일을 통해 문제를 고쳐나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늘 강조했던 건 화내고 분노만 하는 게 아니라 잘 모르는 것이기에 제대로 알려서 다음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무지에 의한 소비, 어떻게 막나 서 교수가 항의 메일을 보내 욱일기 사용에 대해 문제점을 알린 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일각에선 욱일기 디자인에 대해 가운데에 집중되는 강력한 이미지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이 전후 욱일기를 전범기로 알리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인 것처럼 홍보한 것도 영향을 끼쳤죠. 일본은 지난 상반기에도 욱일기에 대한 홍보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광고로 올리면서 전범기 이야기는 하나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서 교수는 “화내거나 분노하지 않고 지금처럼 차분하게 사실만 전하는 네티즌들의 활동이 활발하다”며 “무지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제대로 알려서 다음에 쓰지 못하도록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 사례집으로 계속 설명하는 수밖에 서 교수는 현실적인 대응책으로 지속적인 마케팅을 꼽습니다. 사안이 발생하면 분노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광고 캠페인을 벌이면서 대응하자는 설명입니다. 상반기 일본 측의 욱일기 홍보 영상에 반박하는 광고를 낸 것도 그러한 관점의 일입니다. 또한 오는 여름을 목표로 욱일기 사례집을 만들 예정입니다. 앞으로 유사한 일이 생겼을 때 특정 아티스트 등 주체에게 이전에 개선됐던 사례를 전달해 효과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설명이죠. 무지 탓으로 욱일기를 쓰고 논란에 당황하지 않도록 이전에도 개선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구체 증거로 제시해 빨리 대처할 수 있게 돕겠다는 설명입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부각할 수 있는 홍보 영상을 계속 만들거나 세계적인 여론을 만들어갈 수 있는 홍보력을 키우는 게 현실적인 방법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특히 음악·스포츠계 문제가 심각하다”며 “욱일기를 홍보할 수 있는 문화적인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도 좋다. 광고 캠페인을 만들어 계속 대응해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