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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거대화산 폭발 가능성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최고봉인 후지산(3776m)이 10만년에 걸쳐 흘려보냈던 양 정도의 용암을 한꺼번에 분출하는 ‘재앙적인 폭발(분화)’이 일본열도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8일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이같은 슈퍼 볼캐이노(거대화산)가 일본에서 파국적인 폭발을 일으킬 경우 일본 침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엄청난 피해가 우려된다며 종합적인 지질 조사 및 예측 등의 연구에 착수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신문에 따르면 일본 알프스의 연봉(連峰)들은 과거 최대급의 거대화산이었다. 신슈대 연구진에 따르면 175만∼176만년전 당시 평지였던 이 지역에서 ‘거대폭발’이 일어나면서 동서 6㎞, 남북 16㎞, 깊이 3㎞의 함몰이 생겼다. 화산재 등 분출물은 400㎢의 면적에 걸쳐 흘러내렸다. 지난 1991년 44명의 희생자를 냈던 나가사키현 분화의 분출물이 흘러내려 퍼진 면적이 0.2㎢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거대 폭발이 미칠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폭발했던 알프스 일대는 80만년전 융기, 이후 서서히 침식이 진행되면서 오늘의 거봉들을 만들어냈다. 주위의 생물이 전멸하고, 화산재가 1000㎞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 파멸적인 인명·재산피해를 발생시킨다고 해 이른바 ‘파국의 분화’라고 불리는 거대분화는 통계적으로 1만년에 1차례 꼴로 일어난다. 일본 연구자들은 야리가다케, 호다카다케 등 알프스 연봉이 당장 분출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12만년전 100㎢가량의 분출물을 발생시켰던 홋카이도나 규슈, 도호쿠 지방의 봉우리들이 향후 ‘파국적 폭발’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후지산은 파국적 폭발 가능성이 있는 거대화산 후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taein@seoul.co.kr
  • 냉전 때보다 오히려 5배↑

    |도쿄 이춘규특파원|미국 해군 원자력잠수함의 일본 기항이 냉전시대가 끝난 1990년대 이후 크게 늘었다고 아사히신문이 26일 전했다. 원자력잠수함이 기항하는 일본 내 기지 3곳 중 나가사키현 사세보와 오키나와현 화이트비치 기항이 특히 많이 늘어 가나가와현 요코스카기지와 맞먹는 횟수를 기록했다. 2000∼2005년 평균 기항 횟수는 냉전말기인 1980년대에 비해 사세보항이 약 6배, 화이트비치는 5배 정도 늘었다. 미 해군은 중국의 해군력 증강과 북한의 탄도미사일 개발 등을 염두에 두고 동해와 동중국해에서의 정보수집과 정찰을 강화하는 일환으로 원자력잠수함의 일본 기항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신문은 분석했다. 일본내 미 원자력잠수함의 기항은 1980년대가 연평균 28회,90년대 48회,2000년대가 49회로 냉전종식 이후에 증가하고 있다. 사세보항은 80년대가 연평균 3회였으나 90년대 10회,2000년대 18회로 급증했다. 화이트비치도 각각 3회,11회,14회로 증가했다. 이에 비해 요코스카항은 1980년대는 연평균 22회였고,90년대는 27회로 증가했지만,2000년대는 연 18회로 줄어 들었다. 미해군 원자력잠수함의 요코스카항 기항은 80년대는 일본내 전체의 약 80%를 차지했으나 90년대는 약 60%대로 줄었다. 이후 2000년대는 40%대 초반으로 줄었다.taein@seoul.co.kr
  • 美 이지스함 동해에 배치

    美 이지스함 동해에 배치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도쿄 이춘규특파원·서울 김상연기자|미국과 일본은 북한이 ‘대포동 2호’를 발사할 경우 즉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제재하기로 하는 등 주변국가들의 움직임이 긴박해지고 있다. 일본 교도통신은 18일 복수의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뉴욕발로 미국과 일본의 안보리 대처방침을 보도했다.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은 16일(현지시간) “우리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상황을 모니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적 수단들을 갖고있다.”면서 “자위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미국이 미사일을 요격할 것인지가 주목된다.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은 18일 후지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움직임과 관련,“법률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제도는 끝냈으며 이를 발동하게 될 상황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미사일이 일본에 떨어지면 공격으로 간주된다.”며 “미사일이 일본에 떨어질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움직임과 관련, 주일미군은 미사일관측함 ‘옵저베이션 아일랜드호’를 나가사키현 사세보 해군기지에 배치하고 전자정찰기 ‘RC135S’를 미 본토에서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로 이동, 투입하는 등 감시체제를 강화했다. 동해에 이지스함을 배치했다는 정보도 있다. 자위대도 이지스함 ‘초카이’를 사세보 기지에서 동해로 파견했다. 전자전 정보수집기 ‘FP3’와 전자정찰기를 배치, 정보수집과 추적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산케이신문은 “북한 지도부가 주민들에게 18일 오후 2시 국기를 게양하고 저녁에는 TV 등을 통한 대(對)국민 메시지를 볼 것을 지시했다.”고 일본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미 정부관계자는 중앙정보국(CIA) 등의 정보라면서 ‘북한이 미사일 발사에 필요한 액체연료 주입을 시작한 것 같다.’고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가 임박했다는 관측들이 외국 언론들을 통해 잇따라 흘러나옴에 따라 휴일인 이날 안보 관련 부처 당국자들이 전원 출근, 북측 동향을 주시했다. 정부는 상황의 전개 단계에 따라 대응책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dawn@seoul.co.kr
  • 태풍 나비 日서남부 상륙 1600㎜ 폭우 22만명 대피

    |도쿄 이춘규특파원|대형 태풍 ‘나비’가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채 6일 오후 2시쯤 일본 서남부 규슈 나가사키현에 상륙, 오후 11시 현재 서일본지역에서 5명이 숨지고,15명이 실종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22만여명은 하천범람 등을 우려, 일시대피했다. 부상자도 40명 정도로 시간이 지날수록 인명피해 규모는 늘 것이라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피해범위가 광범위하고, 통신이 두절된 곳이 많아 피해집계가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야자키현 일부 지역에서는 최근 3일간 무려 1300㎜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이는 우리나라의 연평균 강우량과 비슷한 양이다. 일본 기상청은 규슈 남부의 경우 4일부터의 누적강우량이 1600㎜를 넘는 곳도 있을 것으로 보고 도로와 토사붕괴, 산사태 등에 신속히 대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나비는 상륙후 속도가 빨라진 채 진로를 북동쪽으로 바꿔 7일 중 일본열도를 따라 동해를 빠져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미야자키현은 미처 피신하지 못한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위대에 재해긴급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자위대 선발대를 피해지역에 파견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산요신칸센 히로시마∼하카다(후쿠오카) 구간 상·하행선 운행이 중단된 것을 비롯,JR규슈,JR시코쿠가 정오까지 모든 열차운행을 중단해 철도가 마비됐다. 규슈와 다른 지역을 잇는 항공기와 배 등 하늘과 바다의 교통편도 끊겼다. 또 규슈에서 2만 7000가구, 시코쿠에서 2만가구가 각각 정전됐다고 현지 전력회사가 밝혔다.taein@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7) 대마도에서 이키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7) 대마도에서 이키까지

    너무 가까우면 상대를 깊게 알 수도 있지만 뜻밖에 전혀 모를 수도 있다. 대마도(‘쓰시마’라는 현지 표기 대신 용어의 역사성을 고려해 대마도로 쓴다.)와 한국의 관계가 그렇다. 누구나 아침 6시 서울역에서 KTX를 타면 8시40분에 부산역에 내려 10시30분에 출발하는 대마도행 페리를 탈 수 있다. 불과 1시간30분이면 하타가쓰항에 도착해 점심을 먹을 수 있으니 서울에서 흑산도 가는 것보다도 빠르다. 날씨만 맑으면 당연히 대마도가 육안으로 보이며, 반대로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에서는 불야성을 이룬 한국의 남해안이 지척에 보인다. 거리만 가까운 것일까? 역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대마도는 우리와 ‘하나’가 아닐까. ●부산서 1시간30분… 너무도 가까운 섬 많은 사람들이 대마도는 알지만 이키(壹岐)에 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이키는 한반도에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가는 징검다리였으며, 일본 입장에서 보자면 한반도는 물론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문화의 흔적이 강력하게 남아 있는 섬들임에도 두 섬의 정체성이 어쩌면 이리도 다른지! 대마도가 한반도에 밀착되어 있다면 이키는 보다 일본적인 곳이다. 대마도 스스로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모두 걸친 속국, 혹은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른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화사적으로 대마도가 비일본적이라는 사실은 역사적 정체성이 한반도에도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마도에서 한반도 문화를 모두 걸러낸다면 남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대마도가 오늘처럼 확고하게 일본 본토에 속하게 된 것은 메이지 정부가 대한(對韓)외교권을 중앙 정부로 가져가 이를 일본 정부에 편입시킨 결과일 뿐이다. 대마도는 국제법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일본 땅이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나 심정적으로는 우리와 더욱 가깝다. 대마도 서쪽 해안은 가히 한국 쓰레기들의 종합 전시장이다. 우리나라의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가 이곳 서쪽으로 모인다는 사실은 옛적 표류민 표착의 단서가 된다. 한반도 동남부에서 표류를 해도 자연스럽게 대마도에 닿곤 했으니 신라인 박제상이 이곳에서 죽은 것도 실은 이같은 교류사의 내역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백제나 신라식 산성이 존재함은 대마도의 선주민들 다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부터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조선에서는 대마도가 우리 주권 하에 복속된 섬은 아닐지라도 조선 영토의 일부로 보기도 했다. 지방에 내려보내는 경차관을 대마도에 파견했는가 하면 대마도 사람들이 수직왜인이 되어 조선의 벼슬과 녹봉도 받았다. 일찍이 고려 조정은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 즉 변방과 수상교통의 요충지를 책임진 관직을 내렸다. ●주민들 다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가 일본 본토인들 입장에서는 대마도가 한반도에 가깝다는 주장에 대해 거북스러움을 느낄 터이지만, 정작 역사시대의 일본인들 스스로가 대마도를 별종의 섬으로 간주하여 본토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보았다. 오늘날도 대마도는 ‘국경의 섬’식으로 인식돼 대륙에 맞서는 자위대 기지가 곳곳에 위치하는 전략적 가치만 인정받을 뿐 대단히 낙후되어 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가사키현에 붙어서 소외받을 바에는 차라리 부산시 영도구에 붙어서 잘 살아보자는 농담도 나온다. 그 농담이 농담으로만 여겨지지 않음은 웬일일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이키 관광상품을 개척한 범주항공의 신우진 차장은 “이키에는 주로 후쿠오카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만 대마도는 일본인보다 한국인 관광객들로 생계를 꾸려 간다.”고 통계 수치까지 제시한다. 대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어 기본 단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이는 근래의 일이 아니다. 대마도 역사자료관에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본격 한국어 교재가 있다. 한국문화를 흡수하기 위한 방책으로 한국어를 전문적으로 학습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증거다. 대마도는 남북이 81㎞에 이른다. 작은 섬이라고 여기는 일반의 인식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미국 밑에 쿠바가 있듯이 한반도 코밑에 거대한 섬이 버티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한·일간 절묘한 곳에 자리잡은 대마도에 왜구가 득실거리기라도 할라치면 한반도는 밤잠을 못이루었던 것이다. ●만성적 식량부족으로 왜구들 극성 대마도는 한마디로 ‘먹고살기 힘든 섬’이다. 북쪽 히타카쓰항에서 남쪽 이즈하라까지 근 2시간여 거리를 달려 보지만 보이는 것은 산뿐이다. 섬이라기보다는 그냥 바다에 산들이 떠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배고픈 사람들이라 눈 앞에 건너다 보이는 조선을 바라보며 해적질을 꿈꾸었던 게 무리는 아니다. 대마도의 이름난 사찰마다 조선에서 얻어온, 정확하게 말해 약탈해 온 불상이나 범종들이 한두 개씩은 놓여 있다. 이키의 안국사에는 한반도에서 전래한 팔만대장경 초판본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약탈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섬이라는 고립된 조건 속에서 고귀한 문화유산들이 멸실되지 않고 남아 전하는 것이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 일정한 식량을 공급하고, 무역을 허락하며, 왜관을 열어 회유함으로써 왜구의 고통을 덜고자 했다. 대마도는 부족한 식량을 조선을 통해 해결하는 반면 일본 본토와 조선 사이에서 조정능력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유지했다. 오랫동안 대마도는 에도 바쿠후를 대리하여 대한 외교를 수행했다. 대리인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막중한 권한을 가지고 바쿠후와 한반도 사이에서 능수능란한 중재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다. 일종의 생존전략인바, 그들은 양자 사이의 중개무역으로 이윤을 냈으며, 그 수입으로 먹고살았다. 이런 탓에 임진왜란 이후에 일시적으로 한·일간 국교가 단절되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이들도 대마도민들이었다. 현재 나가사키현에 속한 대마도와 이키는 히라도(平戶)와 더불어 왜구의 본거지였다. 태종 때 대마도정벌에 나선 이종무 장군의 아소만 소탕작전도 왜구를 청소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소만을 바라보니 왜 이 장군이 한달여 동안 그토록 많은 피해를 입어가면서도 왜구를 소탕하지 못했던가가 자명해진다.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다. 섬들이 은하수의 별처럼 흩어져 있어 섬 사이로 신출귀몰한다면 강력한 대군도 왜구 몇을 감당하기 어려운 요충지다. 이키와 히라도에서 출발한 왜구들은 이곳 대마도 왜구와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하며 끊임없이 한반도의 해안을 침탈해 댔으니 고려와 명나라가 왜구 때문에 망했다는 말도 절반은 진실에 가깝다. ●전쟁과 평화 교차하는 ‘국경의 섬´ 그런데 일본의 후소샤판 교과서에는 ‘왜구란 조선반도 및 중국 대륙 연안에 출몰했던 해적집단을 뜻한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 외에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왜곡하고 있다. 왜구는 대마도, 이키제도와 히라도 등을 포함해 세토나이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해적 및 악당들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최근 들어 왜구의 구성을 국적이나 민족을 넘어선 차원의 인간집단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은 당시의 현실과 동떨어진 가공된 역사상일 뿐이다. 여기에는 왜구 근거지는 북규슈 지역의 도서 연안이고, 발생 원인도 일본 내의 정치적 혼란에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왜구의 시대에 이어 이번에는 임진왜란의 주역으로 다시금 대마도와 이키가 등장한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이번 전란의 꼬투리는 대마도주 소오(宗義智)의 수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고니시 유키나카(少西行長)의 딸 마리아가 바로 이 소오의 아내였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 된 고니시의 출병에는 조선말을 잘하는 대마도 사람 8000여명이 동원된다. 웬만한 남자들은 전부 동원됐다.‘전쟁이 끝나자 남자는 없고 과부들만 들끓어 대를 이을 수 없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이키도 대규모 병사를 내어 한반도에 출병했다. 과거의 왜구들이 왜군으로 변신한 것이다. ●조선통신사 맞이하는 기착지… 친선의 가교로 전쟁이 끝나고 조선통신사의 왕래가 재개되자 다시금 대마도와 이키는 한반도에서 오는 귀한 문화사절단을 맞이하는 기착지로 변신한다. 수백명에 이르는 조선통신사는 그 자체가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전하는 통로였다. 조선정부는 성심성의껏 사신을 조직하였으며, 대마도와 이키 등지의 번주들도 최선을 다해 이들을 맞았다. 대마도와 이키는 조선통신사를 통한 친선과 교류의 장이었지만 때로는 왜구의 본거지로 역사의 굴절을 계속했다. 이키의 아름다운 ‘원숭이바위’가 있는 곳에는 2차대전 당시의 포대가 있으며, 대마도에도 거대한 지하포대가 있다.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아소만 일대에 군함을 잠복시켜 놓고 반세키(万關)운하를 통해 러시아함대를 기습·괴멸시켰다. 근래 대마도에서는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한답시고 곳곳에 러일 친선을 기원하는 전승비를 세웠다. 명분은 친선이겠지만 본래 목적은 딴 곳에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니 이처럼 일본은 대마도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마도를 자국 본토와는 달리 오로지 ‘국경의 섬’으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대마도와 이키는 한·일 간의 친선을 돋우는 징검다리도, 침략의 가교도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최익현 선생이 단식 끝에 절명했을 때, 대마도 사람들은 선생의 유해를 지극정성으로 이즈하라의 슈젠지(修善寺)에 모셨다. 이키에는 해방되던 해, 꿈에 그리던 조국을 향해 귀환선에 몸을 실었다가 집단 수장된 우리 동포 160명을 애도하는 비가 한국쪽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또 와니우라 포구의 팔각정 형태의 한국 전망대에는 1703년 무려 112명의 역관사들이 조난당해 생을 마친 사실을 기록한 비석도 서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딛고 바다가 국제교류의 장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진실된 한일교류의 징검다리되어야 17세기 대(代)의 외교관으로 한국말에 능통했던 아메노모리 효슈의 말처럼 대마도와 이키는 진정한 ‘친선교류’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한반도의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고, 문화재가 불타 버렸지만, 강제 동원되어 이 전쟁에 참가해야 했던 대마도나 이키의 백성들도 운명은 비슷했다. 조선통신사가 오고 갔듯이 이제 한·일간의 해양 네트워크는 더이상 침탈의 역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러일전쟁 100주년,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국을 꺾었다.’는 자부심과 승리의 기분을 지금껏 향유하려고 드는 한 국제사회에서 그들이 ‘소인배’라는 비난과 지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1년 전인 1984년. 당시 서울신문사에서 대마도와 이키의 역사·고고·미술·민속·언어·물질문화 등을 망라한 보고서를 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바다를 통해 일본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목적의 대마도·이키 답사가 21년 만에 다시 서울신문 지면에서 재현된 셈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러일전쟁 승전 100주년 기념의 해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을사늑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친선의 바다인가, 침탈의 바다인가.’ 그 난해한 화두를 대마도와 이키에서 다시 곱씹어 본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5)다네가시마에서 임진왜란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5)다네가시마에서 임진왜란까지

    1534년 8월25일,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괴선박이 바람에 떠밀리듯 일본 규슈의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서도 한참 떨어진 다네가시마(種字島)의 가도쿠라곶(門倉串)으로 다가왔다. 다네가시마는 일본 규슈의 최남단에 딸린 작은 섬. 난파선이 분명했다. 이 배는 중국인 오봉(五峯)의 배였다. 오봉은 왜구 왕직(王直)을 말한다. 이 ‘중국 왜구’의 배에서 남만인(南蠻人)이 무려 110여명이나 내렸다. 이들은 인근의 유서깊은 시온지(慈遠寺)로 안내받아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 시온지는 예부터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나 학승, 상인들이 머무는 숙방(宿房)이 있던 절. 배를 수리하고 다시 출항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생각되어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파선 주인 오봉은 중국인 왜구 왕직 섬의 도주가 긴 쇠막대기를 보고서 “무슨 물건이냐.”고 묻자 남만국 사내는 그 물건을 곧추세웠다. 남만인은 막대기에 검은 가루와 둥근 구슬을 넣어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한 조개가 단박에 산산조각이 났다.‘꽝’소리가 나면서 도주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 놀라 자빠졌다. 직감적으로 무기임을 간파한 도주는 직접 실험을 하고 싶어 했다. 도주 자신이 막대기에 검은 화약가루와 쇠구슬을 넣고는 방아쇠를 당겨 보았다. 총이었다. 위력이 대단했다. 이런 무기는 듣기도 처음이요, 보기도 처음이었다. 도주에게는 그들이 남만인인지, 중국인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드디어 총이란 물건이 일본에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비싼 값을 치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엔(1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2정을 사들였다. 도주는 즉시 명을 내린다.“즉각,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와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내라.”고. 이 이야기는 총이 일본에 전래된 순간을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한 것이다. 일본의 총이 포르투갈에서 모두 수입된 것으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앞의 2정을 모델로 똑같은 복제품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낸다. 총을 만들라는 도주의 명령을 무모하다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다네가시마 모래에서는 사철이 생산되고 있었고, 덩달아 대장간 수공업이 대단히 발달해 있었다. 지금도 이 섬의 대장간에서 만드는 가위는 일본 최고의 명품으로 친다. ●조총 기술 배우려 대장장이 딸 국제결혼시켜 도키타카의 명을 받은 철장(鐵匠) 야이타 긴베이(八板金兵衛)는 밤잠도 못 자고 움직였다. 형태는 대충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어떤 물건이라도 한번 보면 그대로 만들어내는 감탄할 만한 재주를 지닌 유능한 대장장이였지만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총열 안쪽의 복잡한 나사홈을 깎는 일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절에 머물고 있는 남만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대가를 요구했다. 기술을 넘겨주는 대신 대장장이의 딸 와카사를 부인으로 넘겨달라고 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딸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망설이던 끝에 스스로 결단했다.16세의 딸이 아버지를 위하여 이 낯선 이국인과의 혼인을 자청한 것이다.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총이 완성된다. 이로써 일본의 ‘국제결혼 제1호’와 ‘총 제1호’가 동시에 탄생했다. 바야흐로 일본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한다. 총을 들고 나타난 남만인들은 아시아에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인과 에스파냐인이었으며, 이후에 들어온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고모(洪毛)’라고 불렸다. 남만인들이 가도쿠라곶에 당도한 1534년보다 24년이나 앞선 1510년, 포르투갈 함대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해 동방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다.1511년에는 말레이시아반도 남단의 요충지 말라카해협, 그리고 1517년에는 중국 남부의 마카오까지 진출한다. 고아와 말라카해협을 점령함으로써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무역권을 장악한 포르투칼은 이내 중국 남부를 오가면서 아시아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해 들였다. 이들이 규슈 남단에 출현하는 것은 사실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16세기 초, 명나라는 해금정책을 쓰긴 했지만 남부 광저우(廣州)는 이미 아시아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30여개 국과 무역을 할 정도로 해상교역이 번성했다. 물론 이러한 교역은 명나라로부터 통제받는 국가주도형 무역이었다. 해금책은 서구로부터 들어오는 해양 침략자를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개인들이 비밀리에 행하는 사상(私商) 무역까지 금단하기란 쉽지 않았다. 해금이 강한 만큼 장사 이윤도 보장된다는 논리인 바, 돈벌이 욕구를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 정부가 왕직 회유 뒤 처형 그런데 정작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남만인과 같이 타고 온 중국인들의 정체다. 왜 남만인들은 중국인 오봉의 배를 타고 왔을까. 오봉은 당시 고토(五島) 열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의 대두목 왕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도대체 왕직은 누구일까.2005년 2월5일 아사히신문은 재미있는 기사를 실었다.16세기 명나라 정부에 의해 처형된 중국인 출신 왜구 두목 왕직의 묘에 세워진 기념비를 훼손한 사건이 그것이다. 안후이(安徵)성 황산(黃山)시에 소재한 왕직의 묘비 가운데 인명 등 일부 내용이 2005년 1월31일 밤 난징(南京)의 한 대학 교수와 그의 친구에 의해 지워진다. 그는 “민족 배신자의 묘를 일본인이 정비하고 비석을 세운 것은 중국인을 우습게 보는 것”이라는 훼손 동기를 언론에 밝혔다.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는 논쟁이 불붙었다.‘후련하다.’는 찬성론부터,‘왕직의 해상 무역이 명나라 자본주의의 싹을 틔운 측면을 무시한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반대론이 치열하게 맞섰다. 왕직은 일본 나가사키현 후쿠에(福江)항을 근거로 생사, 유황 등을 밀무역하면서 왜구를 이끌고 포르투갈과도 결탁하여 약탈도 하고 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명나라 정부는 “투항하면 공식 무역 허가를 내주겠다.”고 회유하여 그를 귀국시킨 뒤에 끝내 약속을 어기고 그를 처형한다. 말하자면 그는 ‘중국인 왜구’였던 셈이다. 그동안 왜구는 일본인들만의 조직이란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사실이다. ●다네가시마 사람들 총을 종교처럼 신성시 철포 전래의 흔적은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는 총의 위력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네가시마에서는 ‘철포 마쯔리’를 열어 매년 6월말에 포르투갈 배의 도착을 기린다.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무래도 이 ‘철포 마쯔리’는 계속될 것 같다. 다네가시마 사람들에게 총은 무기 이전에 일종의 ‘종교’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총을 ‘종교’로 믿는 사람들, 그렇게 불러도 그들은 허락할 것 같다. 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이 머나먼 다네가시마의 총 이야기를 왜 하고 있을까. 이 총이 한반도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처음 시작된 서양 총이 일본에 퍼지면서 결국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힘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불나방 행위를 일컫는 ‘무데뽀’란 일본말이 한국인에게까지 전달되어 있다. 그 뜻인 즉 무철포(無鐵砲)인 바,‘총도 없이 덤비는 놈’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다. 어느 결에 전쟁은 칼·활·창으로만 하던 시절에서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총(鳥銃)’이 없이는 그야말로 ‘무데뽀’가 될 수밖에 없는 전쟁으로 바뀌고 있었다. ●철포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 침략 철포는 즉각 실전에 활용된다. 전국의 봉건 제후들은 경쟁적으로 철포를 입수하기에 혈안이 된다. 철포 전래 10년도 채 안되어 일본 열도에 확산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천하통일의 판세를 가르는 전투에서 철포대를 들이밀어 승리를 거둔다. 철포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에까지 이어진다. 생고쿠(戰國)시절, 피비린내 나는 전투경험을 쌓은 일본군은 조총부대를 앞장세워 파죽지세로 조선을 치고 올라갔다. 당시 왜군은 조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유럽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던 창과 활을 병용한 적절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실제로 임란 초기에 이러한 화기 전술에 연패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왜군 전원이 조총을 소지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총은 대단히 비싼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총이라는 신무기를 통하여 기대 이상의 월등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평양까지 짓쳐 올라가 선조는 의주까지 피란을 가야 했다. 조총의 위력은 대단하여 한마디로 조선군은 ‘총에 녹았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병의 보급로를 차단, 끝내는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내내 조총은 조선군을 고통스럽게 했다. 총을 들고 한반도를 침략한 왜병의 침략성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아시아의 평화를 깨는 중대한 ‘전쟁범죄’였다. 그러나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 단 두정의 총을 받아들여 이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최선을 다하여 복제하고 대량 생산에 돌입하는 집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바다를 통한 문물교류를 십분 활용하고 적극적으로 생활에 응용함으로써 부국강병의 길을 걸었다. 수십명이 표류한 하멜의 경우에서 보여지듯, 그들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않고, 얻어내려고도 하지 않았던 우리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비교되지 않는가. 바다를 통한 문명교류의 파장을 체감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페이지를 새롭게 써나간 해양 부국의 사례에서 우리는 감고계훈의 역사를 다시 배운다.
  • [韓·日 교과서 전쟁] (3) 한·일 양심세력에 듣는다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파문을 지켜보는 우리나라 시민운동가들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의 일부 ‘양심세력’들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지난 2001년 1차 교과서 파동 이후 한·중·일 시민사회단체들은 일본의 전후 처리방식과 역사왜곡에 저항하며 힘겹게 공동 연대를 구축해오던 터에 파문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올바른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중인 한·일 양국의 대표적인 시민운동가 김은식(35) 태평양전쟁 희생자 보상 추진위원회 사무국장과 후쿠도메 노리야키(55) ‘일본의 전후책임을 생각하는 히로시마 모임’사무국장은 이번 파문을 계기로 양국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교류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후쿠도메 사무국장은 “4년 전 처음 교과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보다 일본 사회 전체가 우경화됐다.”면서 “특히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가 사회화되면서 언론도 하루종일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전달하고 있다.”며 현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일본이 양국의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며 아쉬움을 지적했다. 독도의 경우 “일본인들은 독도가 1905년 전후 한국을 지배하기 이전부터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을 뿐, 역사적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많다.”며 ‘이해’를 구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와 자매결연한 일본 지자체간에 친선을 넘어선 도움이 절실하다고 요청했다. 후쿠도메 사무국장은 80년대 중반 대구 계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 유골봉환 문제 등 한·일 과거사에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최근 일본에서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와 ‘교과서 네트워크’를 구성해 ‘왜곡 교과서 불채택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시민운동가다. 지난달 18일에는 일제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1945년 발생한 일본 나가사키현 이키 지역의 ‘조선인 귀국선 해난사고 및 희생자 유골문제’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청했다. 김 사무국장은 “일본에서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새역모’의 핵심멤버들이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은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며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면서 한·중·일 연대를 강화해 범 아시아적인 가치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도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는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어 자칫 잘못 문제를 제기할 경우 ‘비국민’으로 매도당하는 분위기라 시민단체들도 독도문제를 전면화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일 관계의 갈등과 대결구도가 어려워질수록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활성화시켜 일본 사회의 여론이 일방적인 흐름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김 국장은 제안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휴일 전국 지진공포…주민들 한때 대피소동

    휴일 전국 지진공포…주민들 한때 대피소동

    |도쿄 이춘규특파원·서울 홍희경기자| 일요일 오전 일본 후쿠오카 앞바다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경기 북부 일부 지역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진동이 감지돼 시민들이 한때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이날 지진은 지난 1978년 충남 홍성에서 일어난 규모 5.0도의 지진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진동이 감지된 이래 가장 범위가 넓었던 것으로 기록됐다. 20일 오전 10시53분쯤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북서쪽 45㎞ 해역의 해저 9㎞ 지점에서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했다. 이어 이날 오후 7시 52분 등 세차례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진도 4.5도 규모의 여진이 있었다. 지진의 여파로 부산과 광주·서울을 비롯한 대다수 지역에서 건물과 창문 등이 흔들리거나 화재가 발생하고 일부 시민이 대피하는 등 소동이 빚어졌다. 기상청은 “지진이 부산에서 165㎞ 떨어진 대마도와 후쿠오카 사이 바다에서 발생했다.”면서 “부산에서는 4∼5도의 진동이, 서울에서는 민감한 사람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인 2도의 진동이 감지됐다.”고 발표했다. 기상청은 오전 11시20분에 남해안과 동해안, 제주도에 지진해일주의보를 내렸으나,1시간10분 만인 낮 12시30분 해제했다. 기상청은 “이번 해저지진이 지각의 수평 움직임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에 다행히 지진해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기상청은 “우리나라 최북단 지진계측기가 있는 철원에도 지진파가 전달됐지만,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면서 “경기 북부 일부 지역과 북한에서는 진동이 감지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지진해일 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1996년 2월17일 이후 9년 만이다. 한편 일본 기상청은 지진 발생후 5분이 지난 오전 10시58분 후쿠오카시 해안과 나가사키현 이키, 쓰시마 일대 해안에 쓰나미(지진 해일) 주의보를 발령했다가 정오쯤 해제했다. 이날 지진으로 규슈 전역의 열차 운행이 일시 중단됐으며 후쿠오카현에서 75세 할머니가 무너진 벽에 깔려 숨지고, 최소한 45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taein@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3)하멜의 여정-­제주서 나가사키까지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3)하멜의 여정-­제주서 나가사키까지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지만,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해양을 통한 제국 건설에 몰두하면서 서세동점의 기세로 밀어닥친 그 때 우리가 좀 더 잘 했더라면, 조금만 생각을 고쳐 먹었더라면 하는 일말의 아쉬움은 지금도 남는다. 하멜표류의 교훈도 그 중의 하나이다. 1628년, 일본 나가사키(長岐)로 향하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 일행 3명이 부산 근처에 표착했으니, 이 중 1명이 훗날 조선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살던 박연이다. 박연 표착 25년 뒤, 같은 네덜란드인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한다.1653년(효종 3년) 암스테르담을 출발한 스페르웨르호가 바타비아와 타이완을 거쳐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폭풍에 밀려 이 해 8월15일 제주도에서 파선한 것. ●조선에 표류한 하멜일행 탈출 성공 선원 64명 중 28명이 익사하고 36명이 표류한다. 이듬해 이들은 서울로 호송되었다가 2년 뒤인 1654년에 다시 전라도로 분리, 이송된다. 그동안 사망자가 14인이었으며 생존자는 22인이었다.1666년 9월에 전라좌수영 소속의 하멜 이하 8인이 읍성을 탈출하여 작은 배를 타고서 극적으로 ‘조선 탈출’에 성공한다. 나가사키를 경유한 이들은 1688년 7월 네덜란드로 귀국함으로써 13년의 조선생활을 끝낸다. 바로 이들에 의해 하멜표류기가 출간되면서 ‘금단의 땅 조선’이 서구에 널리 알려진다. 이 하멜 표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이들 집단을 통하여 어떤 구체적인 서양 과학기술을 알려고 했거나 이들의 정보를 역추적하여 세계정세를 탐구하려 했다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군부대에 배속된 하멜 일행이 약간의 전투술 전수에 참여한 것으로 짐작되나 세계정세 판단을 위한 조선 조정의 관심은 확인되지 않는다. 서양인 대집단을 13년간이나 데리고 있었으나 그들로부터 세계동향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세계인식이 아닐 수 없다. 하멜은 조사 과정에서 조선 조정이 파견한 박연을 만나며, 이후에 여수 좌수영 등으로 분산되기 전까지 계속 박연이 통역을 담당했다. 이로 미뤄 박연을 통해 충분히 서양의 지식정보를 빼낼 수 있었음에도 그러한 시도는 아예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중국 사신이 하멜 일행을 접하는 일은 극도로 경계하였으며, 이들을 훈련도감 소속 군인으로 배치한 것으로 미뤄 북벌에 대비한 군사적 대응으로 활용하려 한 인상은 준다. 박연과 하멜은 암스테르담에서 바타이유를 거쳐서 나가사키로 향하다 표류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멜 일행은 조선 체류 중 끊임없이 일본행을 꿈꾼다. 결국은 배를 구하여 규슈의 히라도(平戶)를 거쳐 나카사키로 들어가는데 일본인들은 그들이 네덜란드인임을 금세 알아차리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이들을 체포해 13년간이나 하릴없이 억류했던 조선과는 대비되는 조치였다. 이들이 나가사키에 당도했을 무렵 만에는 네덜란드배 다섯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들은 곧장 네덜란드 상관(商館)에 당도, 지휘관 빌렘 볼거에게 안내된다. 그리하여 꼭 13년 28일 만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서방을 향해 열려진 창구였다. 하멜의 조선표착 시점보다 훨씬 이른 1543년에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도착했으며,1549년에는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엘이 가고시마(鹿兒島)에 발을 내딛는다. 이후 100여년 간 무역과 가톨릭 포교가 이루어지나,17세기 중엽 도쿠가와 바쿠후(德川 幕府)에 의하여 기독교가 탄압받는 쇄국이 단행된다. 주목할 것은 쇄국은 쇄국이되, 바늘 구멍은 열어놓은 쇄국이었으니 서방과의 대화는 어떤 식으로든지 계속 하고 있던 셈. ●日 바쿠후, 포교 금지하고 무역만 허용 오직 장사에만 종사하며 포교활동을 하지 않은 네덜란드인들만 일본 거류가 허용되어, 이른바 난학(蘭學)을 꽃피웠다. 서양 의술을 비롯하여 천문, 지리, 생물, 지리학 등 다양한 근대 학문체계들이 이 즈음 난학으로 정리된다. 젊은이들이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江戶), 심지어는 머나먼 동북지역에서도 몰려들어 ‘난학의 길’이 활짝 열린 것. 하멜이 일본에 거류하는 상관을 찾아 귀국할 수 있었음은 또한 이같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적어도 하멜을 통하여 서세동점의 긴급한 상황을 재빨리 읽었어야 옳았다. ‘하멜표류기’는 조선 땅에 남긴 서양인 최초의 족적이자, 조선을 세계에 알린 ‘스테디 셀러’였다. 표류인 하멜과 조선의 첫 만남, 첫 거래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얻은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음에 반해, 조선을 탈출한 하멜의 기록은 수백년간 서양인의 인구에 회자되면서 열강들이 입맛을 다시게 하는 근거자료로 보급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수많은 하멜들이 찾아들었던 나가사키는 당시 어떤 여건이었을까. 예쁜 전차가 오가는 나가사키 중심통에 데지마(出島)가 있다. 말이 섬이지 도심에 포위되어 있다. 유심히 보면 바다 수로가 데지마 옆으로 흐르고 있으며 그 수로는 가까운 바다로 연결된다. 데지마는 1636년 그리스도교의 포교 금지를 목적으로 만든 인공섬. 서방을 통하여 무역 등의 이득은 취해야겠고, 문을 열자니 기독교 포교가 두려워 궁여지책으로 만든 출구였다. 나가사키라고 쉽게 말하지만 고작 손바닥 크기만 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운동장 규모의 땅에 상관 건물을 짓고나서 다리를 놓았다. 바쿠후는 외국배가 들어올 때마다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네덜란드와 중국 상인에게 풍문보고서(風說書)를 내게 하고, 번역 내용을 바쿠후 중심 인물들이 돌려보았으니 세계 정세의 변화를 개괄적이나마 시시각각 첩보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 속의 불빛처럼 창구 하나만큼은 분명히 열어놓았던 셈. 어쩌면 일본이 서방을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닫지 않았던 그 ‘바늘구멍’이 일본이 아시아에서 선두 주자로 나서게 하는 결정적 기반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꽃피운 난학, 메이지유신 토대 돼 네덜란드인들의 종교와 무역의 분리는 바쿠후의 정책과 일치하였다. 오로지 무역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바쿠후로부터 독점권을 얻게 된다. 이후 200여년 동안 이곳은 일본 유일의 해외무역 창구가 된다. 나가사키를 둘러보면 주변에 국제도시다운 면모를 지닌 도시들이 즐비함을 알 수 있다. 히라도는 일본이 대륙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견수사(遣隋使)를 파견했을 때부터 중심지였으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국제무역거점항이었다. 히라도 남동쪽의 도자기로 유명한 아리타(有田) 북쪽에는 도자기 수출입항으로 명성을 얻었던 이마리가 있다. 이곳 도자기는 19세기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명성을 얻어 유럽 도자기문화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현해탄이 보이는 가라쓰(唐津)도 빼놓을 수 없다. 지명이 말해주듯 중국과의 교역으로 번영한 항구도시다. 나가사키현의 사세보는 일찍이 1886년 해군기지가 들어선 이래 군항도시로 번창했다. 지금도 일본 자위대와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으니 이래저래 외국과의 관계를 떼놓을 수 없는 곳.17세기 네덜란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100만평 규모의 하우스보텐스로 아시아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일본이 이미 많은 양의 정보를 직수입하여 서양을 이해하고 있었던 시절에도 우리의 서양을 향한 입장은 여전히 폐쇄적이었다. 훗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개화문명을 부르짖었음은, 비단 외국의 압력 때문만은 아니었다.‘난학’같이 장기간 축적된 서양문명의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해상 문물교류로 갈린 두 나라 명암 나가사키에서 외국과의 관계를 확인할수 있는 유적은 무수히 많다. 흡사 서양인 거리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라비엔, 영국 무기상인 토머스 글러버의 자택, 고색창연한 돌길인 오란자자카, 포르투갈인의 기술로 완성된 아름다운 다리인 메가네바시(眼鏡橋), 무역상사의 의사로 일본 여인과 결혼한 독일의사 시볼트기념관, 일본 최초의 무역상사를 세운 료마의 흔적, 일본 최초의 사진가인 우에노 히코마의 묘소, 그리고 수백년 전통을 자랑하는 나가사키 가스테라 등이 그것이다. 중국 무역항답게 중국의 흔적도 숱하게 흩어져 있으니, 나가사키짬뽕이나 푸젠성(福建城) 사람들이 세운 소후쿠지(崇福寺), 중국의 국부 손문의 유허지 등이 그것이다. 일본은 15세기부터 규슈 일대를 드나들던 포르투갈인에게 입수한 조총을 자체적으로 모방, 개발해 엄청난 무기체계로 발전시킨다. 그 조총을 손에 쥐고 자신만만하게 임진왜란을 일으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7년전쟁을 통하여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조총을 미워하기 전에 그 조총이 어떤 바닷길을 통하여 입수, 개발됐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어야 옳았다. 서방의 급격한 이입을 두려워한 바쿠후의 폐쇄정책은 1868년까지 계속된다. 그러면서도 데지마는 바늘구멍 같은 숨통으로 역사의 소명을 다하였다. 일본은 미국 페리의 강요에 의해 전면 개방되지만, 적어도 데지마 같은 바늘구멍을 오랫동안 열어두었고, 수백년 전통의 난학으로 대비해 왔기 때문에 서방문명에 대한 일정한 저항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흡사 숫처녀가 백주 대낮에 겁간 당하는 식의 급격한 개항을 강요당했던 우리와는 여러 모로 대비된다. 옛 데지마를 복원시켜 놓은 건물 앞에서 지난 수백년을 돌이켜보자니 느껴지는 바가 적지 않다. 일본은 정교한 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왜 선조들이 바다를 통한 문물교류에 집착했던가.’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역사에 흔적을 남긴 숱한 ‘하멜’들이 바로 데지마와 연관을 맺고 있음을 고려할 때, 바다를 통해 세계로 열린 천혜의 출구를 완벽하게 닫아버렸던 지난날 우리의 해양관을 어찌 비판하지 않을 것인가. 취재협조 학술진흥재단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 [골프소식]

    ●국내 최대의 골프전문매장인 롯데마트 골프는 KTX와 제휴를 맺고 KTX무료승차권 및 할인권 증정 등 다양한 사은행사를 오는 15일부터 연말까지 펼친다. 우선 롯데마트 골프에서 풀세트를 구매하는 고객은 구간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는 KTX무료승차권을 받을 수 있다(100장 한정). 특히 160만원대의 테일러메이드 200시리즈 남성용 아이언세트는 81만원에, 캐디백이 포함된 나이키 풀세트는 190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 또 10만원 이상 구매시 롯데마트 고객명단에 등록만 하면 KTX 30% 할인권을 선착순 500명에게 제공하며, 구입금액의 1%를 적립, 누적 금액에 따라 언제든지 현금처럼 쓸 수 있는 마일리지 현금 환원제도도 실시한다.(02)566-8932. ●한화그룹 계열사인 한화국토개발은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공항CC의 경영권을 인수,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나가사키공항CC는 철저히 일본 현지 위주로 영업할 방침이며, 기존의 노후화된 시설 및 일부 홀에 대한 보수를 마친 뒤 내년 중 새로운 브랜드로 재개장될 예정이다.(02)729-1177. ●광릉 골프장이 주중회원을 모집한다. 입회금은 5000만원이며 직계가족 1인에게 회원대우를 보장해 준다.2년 만기의 반환형으로 회원권 시장에서는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번에 모집하는 회원의 경우 단순한 회원수의 증가가 아닌 결원계좌에 대한 입회다.(02)730-5165.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日사교육 “승리조 가자” 유치원부터 경쟁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日사교육 “승리조 가자” 유치원부터 경쟁

    일본의 사교육 열풍이 뜨겁다.자녀수가 적어지는 이른바 소자화(少子化)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자녀교육에 ‘총력투자’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특히 사회 전반에 ‘승리조’ ‘패배조’로 가르는 ‘2대8의 편가르기’가 심화되면서 ‘부익부 빈익빈’식인 교육혜택의 양분화도 위험수위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자기 처지를 불만 없이 수긍하는 일본의 전통 때문에 아직 집단적인 반발로 이어지지 않고 있으나,문제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이 장기불황의 끝이 보이지 않으면서 교육총력투자가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무리해서라도 자녀교육에 투자,좋은 직장이나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란 해석이다. 일부 명문 사립대학은 유치원에서부터 부속 초·중·고교가 있어 한번 들어가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경우에는 해당 대학에 특별 전형되는 특혜가 주어져 경쟁이 치열하다.비용은 공립에 다닐 때보다 2∼3배 많이 든다. ●“승리조에 반드시 끼어라” 자녀가 유명 사립중·고교에 다니고 있을 경우 직장의 해외 근무명령도 포기할 정도다.귀국해 다시 해당 학교로 복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일본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자녀를 계속 사립학교에서 교육받게 하고,계열 대학까지 보내기 위해 해외발령도 기피하는 사례가 있다.”고 소개했다. 승리조에 끼기 위한 경쟁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다.올초 명문 사립대학 부속 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해 일부 학부모들이 수백만엔의 기부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며 문제가 됐다.초등(소)학교는 사립의 비율이 0.8%여서 큰 이슈는 되지 않고 있다. ●12세 어린이의 입시 강박감 중학교 입시경쟁은 뜨겁다.전체 중학교의 6.3%인 사립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과외교육 열기가 뜨겁다.초등 6년인 12세부터 승리조 끼기 경쟁이 시작돼 ‘12세의 충격’이란 말도 생겼다. 최근 한 조사에서 도쿄도 내에서 사립학교에 가기를 바라는 초등학교 5,6년생(12세) 중 70% 이상이 여름방학 때 과외학원을 다닌 것으로 드러났다. 고교도 사립 비율이 24.2%로 비교적 적다.중학생들 사이에서도 1학년 때부터 사립고교나 명문 도립고에 가기 위한 ‘과외열풍’이 뜨겁다.도쿄 도심의 한 공립중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생이 수학과 영어 등 과외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나타났다.비용도 한 과목당 3개월에 7만엔 정도로 만만치 않다.사립 중·고교에서도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과외교육은 예외가 아니다. ●주쿠(塾),기숙학교 우후죽순 일본의 과외학원이 우후죽순격이다.명문 대학생 가정교사에서부터 기업형 1대1 학원까지 다양하다.종합반 과외학원비는 월 6만∼7만엔 수준이다.명문대생의 과외비는 시간당 2000∼3000엔.기숙사가 달린,과외수요까지 해결하는 고교의 교육비는 연간 200만∼300만엔이다. 아들을 사립고,명문 사립대를 졸업시킨 고마요지는 “공립학교는 수준차가 있고,그에 따라서 이지메 문제도 있고 해서 약간 무리를 해서 사립학교에 보냈다.”며 “놀랄지도 모르지만 학비가 고교 1년에 300만엔까지 들었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부작용도 속출,미래가 더 걱정 자녀 과외교육을 위해 시간제 등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증가하고 있다.결혼 뒤에도 양가 부모들로부터 지원도 받는다.연간 1000만엔 이상까지 드는 의과대를 보내거나,600만엔 안팎이 드는 미국 등 해외 유명 사립대학에 유학시키기 위해서다. 일본 월급쟁이들의 연평균 소득은 400만엔대로 혼자 벌어 사립교육을 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래서 30∼40대의 직장인 중에서도 올해 설치된 법과대학원에 다시 가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초등생들도 고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수험 전쟁을 치르느라 수면부족과 피로를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지난 여름 나가사키현 초등 6학년 여학생의 동급생 살해사건도 가해 여학생의 학교 성적에 대한 고민이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뒤 나가사키현 청소년대책긴급회의가 현내 도·시부의 초등학생 5,6학년과 중학생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43.2%가 공부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응답할 정도로 초등학교부터 공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고 있는 상태다. 우치다(50·여)는 “어른들이 승리조,패배조로 가르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일 것”이라면서 “행복은 각자의 분수에 맞는 역할을 찾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며 과잉 교육경쟁을 걱정했다. ●명문대 입학,출세의 보증수표인가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되는 사법시험 합격자의 명문대 집중현상은 심하다.2003년도 시험에서 도쿄대 201명,와세다대 174명,게이오대 123명,교토대 116명,주오대 104명 등이었다.전년에도 추세는 비슷했다. 국가공무원 채용 1종시험도 도쿄대 488명,교토대 200명,와세다대 118명,게이오대 82명,도후쿠대 75명 등이었다.또 명문대학은 일류기업 취업률도 높아 명문대 추구 현상을 강화시키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교육 총력투자가 성공을 보장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사회구조가 다양해졌고,세계적인 경쟁이 가열되고 있어 ‘명문대 출신=출세보장’이란 등식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taein@seoul.co.kr
  • [국제플러스] 세계최대 美항공모함 日입항

    |도쿄 이춘규특파원|세계 최대의 원자력 항공모함인 미 해군의 존 C 스테니스호(10만 2000t,승무원 약 4500명)가 21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항에 입항했다.스테니스호의 일본 입항은 이번이 처음이며 원자력항공모함의 일본 기항은 지난 2002년 8월 에이브러햄 링컨호 이래 2년만이고,통산 6번째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미 해군은 6∼8월 항공모함 7척을 중심으로 공격부대가 세계 5개 해역에서 동시에 훈련하는 ‘서머 펄스 2004’를 실시중이며,스테니스는 요코스카 기지에 배치돼 있는 항모 키티호크 및 오키나와주둔 미 해병대와 공군이 참여하는 공동훈련을 실시했다.
  • 이어도 해상과학기지 건설 주역 심재설 해양연구원 박사

    이어도 해상과학기지 건설 주역 심재설 해양연구원 박사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노 저을 때 내는 여음)/우리 배는 잘도 간다 솔솔 가는 건 솔남(소나무)의 배여/잘잘 가는 건 잡남(잣나무)의 배여 어서 가자 어서 어서/목적지에 들여 나가자(들어가자) 우리 인생 한번 죽어지면/다시 전생(환생) 못하나니라 원(관원)의 아들 원자랑 마라/신의 아들 신자랑 마라 한 베개에 한잠을 자난(혼자 잠자는)/원도 신도 저은(두려울) 데 없다 원수님은 외나무 다리….’ ●제주 아낙네들의 ‘환상의 섬’ 이어도 제주 해녀들이 ‘물질’할 때 즐겨 부르는 구전 민요다.반어법과 문답법을 적절하게 구사하면서 님과 이별없는 이상향을 그리워 하는 일종의 한많은 ‘노동요’인 셈이다. 옛날 제주 아낙네들은 전설의 섬 ‘이어도’에 남편을 영영 보낸 뒤 억세게 살아가자며 이 노래를 불렀다.지금도 40대 이상의 제주도민들은 이 노래를 얘기하면 잠시 어머니와 할머니를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인다.아버지,할아버지와 이별한 뒤 억척스럽게 살아가기 위해 ‘인생의 덧없음’으로 애써 위안을 찾는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제주도민들에게 이어도는 살아서는 못가는 섬,그러나 한번 가면 못 돌아오는 환상과 애증이 사무친 곳이다.사실 이어도는 육지섬이 아니다.평균 수심은 50m,남북길이 1800m,동서 1400m인 11만 5000여평의 수중섬(水中島)이다.평소 정상봉은 해수면 아래 4.6m에 있다.섬 정상은 파도가 심한 날이면 수면 밖으로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때문에 ‘환상의 섬’이라고 한다.부산 앞바다의 ‘오륙도’ 노래에 나오는 ‘맑은 날 흐린 날 다섯 섬인지,여섯 섬인지 나도 몰라라.’하는 구절처럼. 지난 주말 경기도 안산시에 위치한 한국해양연구원을 찾았다.이 건물 2층 이어도해양과학기지 운영상황실.이어도 주변의 기상상황이 적도 3만 6000㎞ 상공에 떠 있는 무궁화2호 위성을 통해 실시간 수신되고 있었다.온도 28.38℃,습도 78.80%….연구원 바깥 온도 33℃와는 사뭇 딴판이었다.위도상 제주에서 215㎞ 남단에 위치해 있지만 해풍으로 오히려 온도는 더 내려가 있었다.이곳에서 보내온 기상상황은 곧장 기상청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이어도는 최남단 마라도에서 서남쪽으로 149㎞ 떨어진 동중국해에 있다.중국령 퉁타오(童島)에서 245㎞,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도리시마(鳥島)에서 276㎞ 거리에 위치해 있는 해상 생태계의 세계적 보고다.연평균 25만여척의 배가 이곳을 지난다. 한국해양연구원의 심재설(46) 박사는 국내 유일의 ‘이어도 박사’로 통한다.지금까지 이어도를 30여차례나 다녀왔다.‘살아서는 한번도 못가는 곳’을 연상하면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다.평균 3개월에 두 번꼴로 다닌 셈이다. ●400평 인공섬 위에 해상과학기지 세워 지난달에도 15일부터 6일간 망망대해의 이어도기지에서 낮과 밤을 지냈다.그러다보니 정이 ‘흠뻑’ 들었다.앉으나 서나 이어도기지 생각이다.특히 심 박사는 지난해 6월 부표만 둥실 떠 있던 이어도 해상에 세계 최대의 첨단 해양기지를 완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다시 말해 400평 규모의 인공섬을 만들어냈던 것.그래서 이어도기지는 막내 아들처럼 누구보다 애정이 각별하다. 우선 이어도 바다 속이 궁금해졌다.그는 “고기들은 암초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이어도 주변에는 볼락,돌돔,붉바리 등 고급어종의 산란 장소로 알려져 있다.”고 대답했다.여기에서 산란한 고기들은 남해안으로 기어올라와 풍부한 어장을 형성한단다.그래서인지 봄,가을에는 기지 주위에 중국 어선들로 불야성을 이룬다고 말했다. 이어도기지가 완성되기까지는 8년 세월이 걸렸다.계획과 설계 등 대부분 심 박사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공사는 현대중공업이 맡았다.암초에 깊이 60m의 기초파일을 8개 박고 수심 40m의 바다에 높이 76m,무게 3400t짜리 구조물을 해상크레인으로 설치하는 작업이었다.기지에는 해류,풍향,풍속,수심,강우량,수질염도 등을 측정하는 30여개의 관측장비와 헬기 이·착륙장이 있다.8명이 2주일 동안 외부의 지원없이 숙식할 수 있으며 인터넷도 할 수 있다.비상 발전기가 있지만 평소에는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한 발전 시스템이 24시간 가동된다. ●태풍경로 정확히 제공… 기상정보 선진화 “루사와 매미 등 한반도를 통과하는 태풍의 절반가량은 이어도 기지주변을 지나지요.흔히 태풍예보의 정확도와 시간성을 5%포인트만 올려도 피해액의 1%를 줄일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태풍 매미 피해액이 2조원이라고 할 때 200억원을 줄였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기지건설 비용이 212억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벌써 본전은 뽑았다는 계산이 나온다.태풍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이동경로를 시뮬레이션을 통해 기상청에 제공,피해를 줄이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심 박사는 “태풍의 강도가 높아지는 수온 때문에 위력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면서 태풍이 지나간 직후에는 15명의 연구원들이 현지에 투입돼 파손 여부를 정밀검사한다고 말했다.충남 당진 출신인 그는 어릴 적부터 바다를 좋아해 해양학자의 꿈을 키웠다.대전고와 연세대 토목공학과를 나온 그는 85년 해양연구원에 들어갔다.91년 이어도에 처음 가본 후 본격적으로 ‘이어도사업’에 참여했다.이같은 공로로 지난해에는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어도는 우리나라를 기상정보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렸습니다.아울러 해상교통 안전에도 크게 기여하고,특히 제주 남단 수역에 대한 한·중·일 영유권 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됐지요.” 김문기자 km@seoul.co.kr
  • 日 초등6년 동급생 살해

    |도쿄 이춘규특파원|초등학교 6학년 여자 어린이가 ‘인터넷 채팅 갈등’ 때문이라며 동급생 친구를 문구용 칼로 목을 찔러 숨지게 한 엽기적 살인사건이 일본에서 발생,열도가 충격에 빠져 재발방지책 마련에 분주하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1일 낮 12시30분쯤 일본 남부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 있는 시립 오쿠보초등학교 3층 자습실에서 6학년 미다라이 사토미(12)가 피투성이가 돼 쓰러져 있는 것을 담임교사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과다출혈로 숨져 있었고,양손엔 반항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사 결과 미다라이는 동급생 친구 ㄱ양(11)이 길이 10㎝ 정도의 문구용 칼로 목 오른쪽 경동맥을 잘라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ㄱ양은 경찰·학교조사에서 인터넷에 글을 써넣는 문제 때문에 살해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 봄까지 같은 학교 농구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고,다른 친구 1명 등 3명이 최근까지 인터넷 채팅을 자주 했던 것으로 알려진 ㄱ양은 경찰 조사에서 “내 홈페이지에 미다라이가 들어와 재미없게 하는 내용을 남겨 갈등이 생겼다.”면서 “죽일 작정으로 불러냈다.”고 사전에 계획된 살인이었음을 시사했다. taein@seoul.co.kr˝
  • 뉴스 플러스 / 사세보 駐日미군 원정공격대 신설

    |도쿄 황성기특파원|미 해군은 일본 나가사키현 사세보 기지에 순항미사일 ‘토마호크’를 탑재한 이지스함 등으로 구성된 ‘원정공격대’를 신설할 방침이라고 마이니치(每日)신문이 5일 보도했다. 미 해군은 상륙작전 임무를 맡고 있는 사세보 기지의 ‘강습양륙(强襲揚陸)부대’가 공격 능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원정공격대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대마도서 4·3 수장위령제 봉행

    제주4·3유족회(회장 이성찬) 등 제주4·3관련 단체는 26일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쓰시마섬(對馬島)에서 4·3사건과 관련해 수장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제주4·3 수장 위령제’를 봉행한다. 이성찬 회장을 비롯,김영훈 제주도의회 의장,강원철 도의회 4·3특위 위원장,임기옥 도의회 4·3특위 위원,김창후 4·3연구소 부소장 등 30여명은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 25일 오전 일본으로 떠났다. 이들은 위령제를 전후해 당시 쓰시마지역 신문 기자들과 시신 인양자들을 만나 증언을 듣는 한편 조선 역사관 조난비 등을 견학하고 일본 해상보안청과 군청,경찰 등을 방문,관련 자료를 수집해 자료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제주도민 수장 사건은 지난 50년 당시 예비검속을 전후해 4·3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군·경에 끌려간 도민들이 제주항 앞바다 등에 수장,학살된 사건으로,4·3관련 단체들은 이들의 사체 가운데 상당수가 대마도로 표류해 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부산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조선과 일본 도쿠가와 정권의 평화적 우호 교린을 담당했던 사절단인 조선통신사행렬이 ‘2002 FIFA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를 계기로 5일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재현됐다.7일에는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섬 이즈하라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이 펼쳐지며,8일에는 이즈하라 문화회관에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국제학술심포지엄’ 학술행사가 열린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
  • 나가사키현 하우스텐보스/ 일본속 네덜란드 이색풍광에 시간을 잊는다

    유럽의 도시와 일본의 풍광을 한꺼번에 즐기면 어떨까. 비행기와 보트를 이용해 인천국제공항에서 두시간 남짓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그런 곳이 있다. 일본 나가사키(長崎)현의 하우스텐보스는 모방의 천재 일본인들이 진짜보다 더 그럴싸하게 왕궁과 건물,거리 등을 재현해놓은 네덜란드 마을이다. 50만평에 달하는 일본 최대의 테마파크로 도쿄 디즈니랜드의 2배 크기. 6㎞ 길이의 해안선을 따라 유럽 호텔,호텔 덴하그 등 5개의 호텔과 160여채의 주택,가로등,네덜란드 택시,운하와 풍차등 17세기 네덜란드 풍 건물과 외관으로 꾸며져 있다. 네덜란드어로 ‘숲속의 집’이란 뜻에 걸맞게 하우스텐보스에는 40만 그루의 나무와 30만 송이의 튤립 등 꽃들이 운하를 따라 장식돼 있다.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곳중의 하나는 미술관으로 쓰이는‘팰리스 하우스텐보스’.꼭대기에 왕관이 있는 이 건물은네덜란드 여왕이 살고 있는 궁전과 똑같다.아니 오히려 더낫다.네덜란드 여왕궁에는 전쟁,비용 등의 문제로 정원이 만들어지지 못했지만 이곳에는 나무터널까지 갖춘 바로크 양식의 정원이 뒤뜰에 붙어있다. 건축물들을 둘러보면 이곳이 일본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가없다.15세기 네덜란드 건축물인 하우다 시청사를 그대로 베낀 유리박물관,독일 샤를로텐부르크의 도자기 방을 본뜬 포르세레인 뮤지엄,150m에 이르는 네덜란드 최고의 교회탑을모방해 만든 돔투른 등 유명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호텔까지도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중앙에 있는 유럽호텔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있는 유럽호텔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다.호텔 주변에 운하를 파서 배를 타고 호텔로 들어올 수 있게 돼 있다. 바닷물 위에는 백조가 유유히 헤엄쳐 다닌다.일본인들이 백조의 호수를 흉내내기 위해 바다에 살지 않는 백조가 짠물에 적응할 수있도록 훈련시켰단다. 공원 수로를 따라 한 바퀴 도는 캐널크루저도 인기다.배를타고 수로를 따라가면 빙빙 돌고 있는 풍차 날개들이 이국적으로 비쳐지는 가운데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회원용 별장이보인다.집앞마다 설치된 간이선착장에는 요트도 정박해 있다.일반인이 이용할 수 없는 회원용 숙소로지난해 조성민·최진실 커플이 야외 웨딩 사진을 찍어 화제가 됐던 곳이기도하다. 매일 밤 8시 45분 오렌지 광장에서는 신비한 음향과 함께레이저쇼가 펼쳐진다.곧 이어 9시에는 불꽃놀이가 밤하늘을아름답게 뒤덮으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하우스텐보스는 자녀를 동반한 가족들이나 연인,단체관광객들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여행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국내의 하우스텐보스 전문 여행사인 퍼스트클라스는 인천∼나가사키를 운행하는 대한항공을 이용하는 3일 여행상품을내놓았다.하우스텐보스외에 사세보 전망대,나가사키 평화공원을 둘러보고 운젠 국립공원에서 온천욕을 한다.49만5,000원∼54만5,000원.(02)365-5445나가사키(일본) 유상덕특파원 youni@. ■관광객용 골프클럽도. 나가사키는 골프를 즐기기에도 좋다. 골프를 좋아하는 관광객이라면 해안을 끼고 있으면서 한겨울에도 10도 안팎인 에어포트 컨트리 클럽과 하우스텐보스 컨트리 클럽에서 라운딩하면 된다. 에어포트 컨트리 클럽은 18개홀 가운데 16개 홀이 해안을끼고 있다. 섬으로티샷을 해야하는 175야드의 파3인 11번 홀은 바닷물이 골퍼들에게 상당히 부담을 주지만 도전해 볼만하다.티샷후 3억엔의 공사비로 기네스북에 올라가 있는 금문교를 건너가 퍼팅을 하게 돼 있다.에어포트 컨트리 클럽은 페어웨이가 좁고 굴곡이 심해 평소보다 점수가 적게 나온다.잭 니클로스가 설계한 하우스텐보스 컨트리 클럽은 해발 250m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마운틴 코스.사세보 항과 오무라 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네덜란드 고성을 본뜬 클럽하우스에는 휴게실과 탈의실을 각 팀별로 만들어 놓았다.회원제로 운영되지만 하우스텐보스 투숙객은 라운딩이 가능하다.여행사 퍼스트클래스는 2박3일에 3번 라운딩하는 여행상품을 99만원에 내놓고있다. ■인근에 가볼만한 곳. 하우스텐보스에서 10여분 떨어진 ‘미카와치 도자미술관’을 들러보면 일본 도자기 역사가 보인다.나가사키현 사세보(佐世保) 시 동쪽에 있는 미카와치(三川內)는 4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예지이다. 미술관에는 17세기말 에도시대 중기부터 메이지 초기에이르는 미카와치 도자기 미술 작품들과 현대 도예가들의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미카와치 도자기공업협동조합의 시부에(涉江) 전무는 “초기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흙을 한국의 경남 진해에서 구했다”면서 “나중에 인근의 아리타(有田)에서 도자기용흙인 고령토를 발견할 때까지 한국산 흙을 수입했다”고말했다. 이곳에는 800여점이 전시돼 있으며 비싼 것은 가격이 500만∼600만엔(5,000만∼6,000만원원).미카와치에서는 도자기를 잘 만들기 위해 도공이 만든 물건이 수출되면 월급을 올려주는 정책을 썼다는 게 시부에 전무의 설명이었다. 도자기 관람이 끝나면 사세보로 이동해 사이카이 펄 시리조트를 관람하고 사세보 해상국립공원을 둘러보면 좋다. 사이카이 펄 시 리조트에는 수족관,선박전시관,아이맥스돔 극장 등이 있다. 일본판 ‘한려수도’로 불리는 해상국립공원은 경관이 아름답다.배를 타고 50분 동안 경관을 감상하는 크루징은 상쾌한 느낌을 준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후나코시 전망대나 이시다케 전망대에 올라 해상공원과 시가지를 살피거나 아열대 동·식물원에 들러 기린,코끼리,사자 등을 보고 아열대 식물들과 꽃들을 감상해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나가사키/ 유상덕특파원.
  • 日, 연일 한국어선 나포

    일본 수산청은 13일 한국 어선 1척을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불법 어로작업을 한 혐의로 나포하는 한편 선장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수산청 나가사키현 사무소는 300t급 어류운반선인 이 배가나가사키현 쓰시마에서 약 35㎞ 떨어진 일본의 배타수역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고,선장 김동상씨(60)는 어획량을 거짓기록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수산청은 이에 앞서 지난 12일 이 배와 함께 작업을 하던82t급 어선을 일본 정부의 허가 없이 어로작업을 한 혐의로나포하고 선장을 체포했다. 이 어선들은 한국 부산에 있는어업회사 소속으로 각 배의 선원은 어류운반선이 10명,소형어선이 7명이다. 이에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후쿠오카 총영사관 및 해양수산부와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며“일본 해상보안청이 지나치게 무리한 수색작업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韓·日 공예품 수록 책 발간

    전남도와 일본 후쿠오카현은 25일 한일해협 연안 8개 시·도와 현에서 생산되는 전통공예품을 국내외에 소개하는 소책자를 펴냈다. 188쪽 분량의 이 책자는 부산시,경남·전남·제주도와 야마구치·후쿠오카·사가·나가사키현의 대표적인 공예품 152종을 컬러사진과 함께 양국어로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전남의 대나무제품과 강진청자,경남의 나전칠기와 고려은장도,부산의 탈과벼루공예,제주 돌하르방,갓 등이 소개됐다.일본 4개 현에서 생산되는 각종도자기와 비단,염직물,탈,연 등도 함께 실렸다. 광주 임송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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