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끌려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 점심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 1만원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 옵션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 리필드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2,805
  • ‘稅風’ 사건 법대로 간다

    ◎朴 법무 “물증 확보 의원 3명 반드시 소환’/야선 체포동의안 처리 물리적 대응 시사 ‘세풍(稅風)사건’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여야의 ‘입씨름’ 단계에서 ‘법대로’ 국면으로 전환되는 조짐이다. 9일 정부의 吳世應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 요구서 제출이 신호탄이다.세풍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徐相穆 의원의 체포동의서가 도착되는 대로 법적처리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여권은 金大中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가 전달되면서 이미 ‘퇴로’를 끊은 상태다.더 이상 소모적인 공방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지도 보인다. 여기엔 검찰이 지난 대선 당시 국세청 개입의 확실한 물증을 잡고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정치탄압이나 표적사정이 아닌 만큼 주저하거나 꺼릴 것이 없다는 의미도 된다.朴相千 법무장관도 “범법 행위가 명확한 徐의원 등 한나라당 3인 의원들을 반드시 소환할 방침”이라는 의지를 굳히고 있다. 하지만 여권의 고민도 적지않다.동의안 처리 때문이다.우선 본회의 상정부터 만만치 않다.총무간 합의가 실패할 경우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이 불가피하다.새로운 국회상을 표방하고 있는 朴浚圭 의장이 선뜻 동의할지 미지수다. 표대결도 쉽지 않다.현재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석을 합쳐 과반수를 겨우 3석 넘긴 153석이다.동료 의원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 심적 부담이 적지않다. 야당이 ‘극렬 저지’로 나올 경우 뾰족한 대응책을 찾기 어렵다.한나라당 朴熺太 총무도 “과거 야당이 했던 방식으로 대응하겠다”며 물리적 대응을 시사했다. 이 때문에 여권은 내심 정치적 해결도 기대하는 눈치다.徐의원의 정책위의장 사임을 주시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선택의 갈림길에 놓인 여권의 결단이 주목된다.
  • 민주열사 열전:6/尹祥源 5·18시민군 대변인(정직한역사되찾기)

    ◎‘폭동’ 아닌 ‘민중항쟁’ 자리매김 큰몫/은행원서 노동운동가로… 광주야학 주도/5·18 鬪士 회보 제작·배포… 막힌 언로 틔워 80년 5월28일자 미국 일간지‘ 볼티모어 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있었지만,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80년 5월26일 있었던 광주도청에서의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의 모습을 마틴 브래들리 기자는 이렇게 그렸다.기사에서의 ‘그’는 항쟁지도 부인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尹祥源이었다.그는 다음날 아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반신이 불탄 시신으로 공개됐다.계엄군은 그를 성명불상자로 처리했지만 주머니에서 나온 10여개의 외신기자 명함은 그가 대변인 尹祥源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尹祥源은 5월 항쟁이 터지자 ‘분노한 시민들의 민주화의지를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어떻게 조직화하고 가속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그리고 그가 이끌던 ‘들불야학’ 강학(교사)들과 함께 각종 유인물을 대량 제작해 뿌렸다.19일 항쟁관련 첫 호소문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9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제작·배포를 밤을 새워 지휘했다.언론이 눈을 감고 있던 당시 투사회보는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됐다.시민들은 항쟁의 의미를 깨달았고 투쟁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무기반납을 주장하며 투항적 자세를 보여온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견제하기 위해 도청앞 광장에서 매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이끈 이도 그였다.그는 각계 각층이 참가한 광주항쟁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이것은 당시 신군부와 얼어붙은 언론에 의해 규정된 ‘폭동’이 ‘민중항쟁’으로 새로 자리매김되는데 실마리가 됐다. 대변인 尹祥源은 26일 밤 총을 달라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설득했다.“우리들이 싸울테니 집으로 돌아가라.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마틴브래들리 기자는 이때의 尹祥源 모습에서 “세계 어느 무장조직에서도 볼수 없었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투사의 진면목을 발견했다”고 회고했다.그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던 이양현씨의 말대로 그는 “광주항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민주투사’란 수식어가 의아스러울 정도로 尹祥源 열사는 지극히 평범한 학교생활을 했다.어려운 살림에 중학교때부터 광주시내에서 하숙을 했지만 부모님 기대에 부응치 못했고 고등학교때는 ‘에덴클럽’이라는 질이 안좋은 서클에 가입해 술과 담배를 하기도 했다.삼수끝에 전남대 정외과에 입학,공부보다는 연극활동과 친구들 사귀는데 1학년을 보내고 군에 입대했다. 그의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한 선배를 만나고부터였다.복학후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친구 소개로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받았던 전남대 2년 선배 金相允(50·하실의료기상사 대표)을 만났다.그때부터 尹祥源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대학인의 정당한 삶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金相允과 학습모임을 꾸려가며 한국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재정리했다.“5·18이 터지자 마자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후 상무대 영창에서 상원의 죽음을 알았어요.그후 오랫동안 祥源이가 도청옥상에서 총을 맞고 저를 부르며 죽어가는 환시현상을 겪었습니다” 金相允씨의 회고다. 졸업후 현실에 떠밀려 주택은행에 입사해 서울서 근무하던 은행원 尹祥源은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자신만을 바라보던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그는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실을 좌시할 수 없어 그만두려 하니 용서해 주십시요”란 편지를 부모님께 썼다.그리고 광주 한남플라스틱공장에 일용노동자로 취업하고 광주 광천공단 지역 야학인 ‘들불야학’에 적극 참여하면서 한 사람의 완숙한 노동운동가가 된다. 들불팀은 야학 운영 외에도 광천공단의 노동자 실태를 조사해 언론을 통해 폭로하기도 했으며 지역 주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그리고 이들은 5·18이 터지자 항쟁 내내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는역사적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尹祥源 열사는 들불에서 후일 천상(天上)의 부부가 될 박기순씨와의 운명적 만남을 이룬다.전남대 휴학생이던 그녀는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토대를 마련해보고자 들불야학을 연 당찬 여학생이었다.그와 함께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로 불리기도 한다.그러나 박기순씨는 선배 尹祥源이 들불의 중심이 될 무렵 연탄가스 중독으로 78년 12월 꽃다운 청춘을 마감한다.몇군데가 얼룩져 있는 12월 27일 일기장에 尹祥源은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아무리 쳐다보아도 넌 아직 살아 있을 뿐이다…”라고 기순에 대한 애타는 추모의 마음을 적어놓았다. 82년 2월,5·18 항쟁에서 살아남은 후배들은 유족들과 함께 尹祥源 열사와 박기순씨의 영혼을 불러 혼례의 예식을 치렀다.이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굿 ‘넋풀이’가 만들어졌고 그 마지막 소품에 黃晳暎씨가 노랫말을 붙였다.그것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이 노래와 함께 두 젊은 넋은 80년대 이후 노도와 같은 민주화투쟁 현장에 언제나 있었다. ◎그의 가족들/공장다니며 학비 대던 동생들 모두 출가/맏아들 가슴에 묻고 부모님만 생가 지켜 尹祥源 열사는 역사적 영광을 얻었지만 그의 죽음은 육친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570­1번지(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에서 87년 광주광역시로 편입됨) 尹열사 생가.그가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자란 이곳에는 부모님이 2남4녀의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아드님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물음에 어머니 金仁淑씨(67)는 그저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아버지 尹錫同씨(72)도 몇차례나 재촉한 끝에 말문을 열었다. “은행을 그만두고 내려오자 기가 막혔지요.동생들은 형을 공부시키기 위해 낮에 공장에 다니며 야간고를 다녔는데 노동운동이라니….자식취급을 안하겠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돈을 벌어 남을 도우면 되지 않느냐고 달래기도 했지요.그랬더니 ‘그래서 몇사람이나도와주겠느냐.구조적 모순을 고쳐야한다’고 하더군요” 尹씨는 “오히려 동생들이 공장에 다니며 터무니없는 착취를 당하는 모습이 祥源이를 부채질한 것 같다”고 했다. 尹열사 대학 시절 광주시내에서 함께 자취를 했던 남동생 정원씨는 “형은 제 갈길을 훌륭히 갔다”고 담담히 말했다.역시 같이 자취를 했던 여동생 현희씨는 “늦게나마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위안이 된다”고 했다.정원씨는 당시 조대부고 야간부에 다니며 낮에는 자전거 배달을 했고 현희씨는 야간상고에 다니며 맥주안주 공장에서 돈을 벌었다.이들은 대학생인 祥源에게 용돈까지 주고 밤을 새워가며 시위 유인물 제작을 돕기도 한 착한 동생들이었다. ◎들불야학 동료 林洛平씨/“독재 뿌리뽑는게 산자들의 참된 의무” “도망갔던 사람이 무슨…” 林洛平씨(41·광주 전남 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는 아주 겸연쩍어 했다. 들불야학 때부터 尹祥源 열사와 고락을 같이했던 그지만 항쟁이 터지던 80년 5월18일 광주 인근 친구집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그는 尹열사의 평전 ‘들불의 초상’을 정리했다.“18일 공수부대가 들어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시내를 장악하자 사실 모든 상황이 끝난 것으로 보았지요.27일까지 거기 있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林씨는 尹열사를 비롯한 들불팀이 5·18이 ‘사태’나 ‘폭동’이 아닌 ‘항쟁’ 이게끔 계기를 만든 사람들이라고 했다.항쟁초기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조직적인 홍보·선전활동은 간접적인 지도부가 됐고 너나 없이 무기를 든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尹열사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그는 “민중적 품성이 물씬 풍기는 사람”이라고 평했다.원칙을 존중하는 그였지만 누구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화력이 돋보였다고.“방년 29세 尹祥源입니다”란 첫 인사로 7·8세나 어린 들불 강학들에게 스스럼 없이 녹아들어 이내 그들과 혼연일체가 됐다고 한다.그가 뽑아대는 현대판 판소리 ‘소리내력’의 구성진 가락은 모든 이들의 넋을 빼놓았다고 했다. “祥源이형은 5·18이 부마항쟁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결과를 뻔히 예측하면서도역사적 사건의 마지막 증거로 남기를 바랐던 겁니다” 林씨는 그가 남긴 역사적 증거를 토대로 다시는 독재가 발을 못붙이게 하고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것이 산자들의 참된 의무라고 했다. ◎尹祥源 열사 연보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에서 출생 ▲63년 임곡초등학교 졸업 ▲69년 광주 사레지오고 졸업 ▲71년 전남대 정외과 입학 ▲72년 군입대.상주에서 일반하사로 복무 ▲75년 복학 ▲78년 주택은행 입사.6개월만에 그만두고 광주 광천공단내 한남플라스틱공장 취업.들불야학 참여. ▲80년 4월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위원 피선 ▲80년 5월19일 들불야학팀들과 함께 항쟁 호소 유인물 제작·배포 시작 ▲80년 5월25일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에서 계엄군에 항전중 사망
  • 정계 개편 개혁 가속 轉機로(사설)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이 29일 전격적으로 통합했다. 金大中 총재와 李萬燮 총재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두 당이 통합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두당의 극적인 통합은 앞으로 정치권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해준다. 오늘 있을 한나라당 전당대회 결과와 눈앞에 닥친 정치인비리 수사가 서로 맞물려 대대적인 정계개편이 이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 국민들은 여권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에 끌려다니는 데 큰 불만이었다. ‘여소야대’ 국회로는 개혁도,경제회생도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여권은 야당을 흔들어 의원들을 빼내오려 한다는 비난만 받을 뿐 신통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두 당의 통합으로 국민회의는 94∼95석,자민련은 50석을 확보하게 되어 여권은 의석 과반수 150석에서 불과 5∼6석만 남겨놓았다. 게다가 여권의 안정의석 확보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여권,특히 국민회의쪽에 당부할 말이 있다. 가능한 한개혁적인 인사를 영입해서 국민의 공감을 얻으라는 것이다. 국민들의 입장에서 두 당의 통합을 환영하는 이유는 아주 간명하다. 여권이 안정의석을 하루빨리 확보해서 개혁과 경제회생을 강력하게 추진하라는 것이다. 두 당의 통합은 金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연합’의 기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뿐만 아니라 李仁濟 고문과 張乙炳 의원 등 새로 합류한 인적자원이 개혁을 가속화하는 데 적잖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두 당의 통합목적이 국난극복에 있는 만큼,두 당 인사들은 물리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으로 통합의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기 바란다. 국민회의쪽에서 보면,이번 통합으로 국정의 중심에 서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고,徐錫宰 의원 등 부산출신 의원들의 합류로 영남에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지역당의 이미지를 벗어나게 되었다. 망국적인 지역갈등을 해소하고 동서화합을 이룰 수 있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국민신당쪽에서 보더라도,어정쩡한 야당으로 밖에서 대안을 제시하느니보다 집권세력에 합류하여 개혁에 동참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문제는 한나라당 대응이다. 전당대회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위기의식에 몰린 한나라당은 강성 야당으로 전열을 정비하여 대여 강경투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멀지않아 정기국회가 열리는데,각종 민생법안과 정치개혁등 회기중에 처리할 안건들이 산적해 있다. 그러므로 여권은 야당의 공세는 그것대로 대응하면서,굳건한 자세로 국회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기 바란다. 여야 공방은 결국 국민들이 심판하는데,국민들은 개혁쪽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 공공부문 개혁 미진 ‘자성론’

    ◎진념 위원장 출범 6개월 스스로 채찍/정부조직 개편 미흡 등 어려움 토로 정부가 공공부문 개혁의 미진함에 스스로 채찍을 들었다.그것도 주무장관인 陳稔 기획예산위원장이 국민의 정부 출범 6개월을 맞아 ‘자성론’을 펴 눈길을 끌었다.공공부문 개혁의 고충을 나름대로 진단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陳위원장은 24일 “공기업 등 정부분야 경영혁신 작업이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 이유로 5가지를 꼽았다. 우선적으로 지난 2월 이후 6개월동안 진행된 일련의 공공분야 개혁작업이 국민의 눈에 차지 않는 단초는 정부조직의 개편이 미흡한 데서 비롯된다.당초 정치권의 이해에 따라 기획예산위원회가 청와대 직속기구로 분류되고,인사위원회가 설치되지 못한 점을 두고 한 말이다.두 기관의 처리는 정기국회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다음은 노사정위원회에 발목이 잡혔다는 지적이다.陳위원장은 공기업 경영혁신 방안이 마련됐음에도 노동계의 반발을 우려,발표가 지연되는 등 끌려간 점이 국민의 눈에 개혁이 지지부진하게 비쳐졌다고 설명했다. 세째는 공기업 개혁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이는 단기적으로 퇴출이 이뤄진 은행,기업 등 민간부문과의 차별성에 기인하고 있다.발표는 해놓고도 이를 유보하거나 내년 예산에 반영한다는 등의 조치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실질적으로 달라진 게 뭐냐’는 비판이 뒤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진위원장 또 “공공부문은 철밥통”이라는 국민의 잠재적 저항감이 개혁이 미흡하다고 바라보는 근인(近因)이 되고 있다고 털어놨다.“당장 깨지는 게 없지 않느냐”는 국민의 정서를 일컫고 있다. 끝으로 전문지식인의 비판이다.앞으로 2∼3년이 걸리는 공공부문 개혁이라면 ‘과거와 다를 게 뭐 있느냐’는 불신감이 장애요인이라고 덧붙였다. 陳위원장은 “계획한대로 실천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공공부문 개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 생존 위안부 기록 첫 발견/方善柱 교수 美 기록보관소서

    ◎45년 5월 마닐라 ‘빌리비드 감옥’서 작성/얼굴·직업 등 기재… “진상규명 귀중한 자료” 자매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사실을 입증하는 미군 포로수용소의 기록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한국정신대연구소는 21일 44년 4월 필리핀 마닐라로 끌려가 7∼8개월동안 위안부생활을 한 뒤 미군 포로수용소로 넘겨진 金영숙(가명·작고)·성숙(72·가명·경기도 거주) 자매에 대해 수용소가 작성한 개인 신상기록카드 2부를 공개했다. 작성 일시와 장소가 45년 5월21일 마닐라의 ‘빌리비드 감옥’으로 명기된 이들의 신상기록카드는 方善柱 한림대 객원교수가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냈다. 16절지 크기의 카드에는 이들 자매의 앞 얼굴과 옆 얼굴 사진이 부착돼 있으며,이름난에는 언니와 동생이 각각 창씨 개명한 이름인 ‘Sonoda Kindan’(소노다 긴단),‘Sonoda Soran’(소노다 소란)으로 적혀 있다.직업란에는 각각 ‘Entertainer’(접대부 의미인 듯),‘Housekeeper’ 등으로 기재돼 있고 주소는 똑같이 ‘군위군…,Korea’ 등으로,나이는 각각 28,19세로 기록돼 있다. 한국정신대연구소 관계자는 “위안부 생존자 기록이 처음으로 공개됐다는 점에서 위안부문제 진상규명에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외교통상부(계약직 공무원 실태:上)

    ◎박사급 12명 첫 채용 對美협상 투입/美 대표 “철저한 준비에 진땀” 실토 공직사회에도 계약직 바람이 거세다. 계약직은 경직된 공직사회에 전문가들을 즉각 수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곧바로 대처하는 안전판 역할이다. 하지만 밥그릇 챙기기에 골몰한 공직사회의 이기주의와 텃세에 밀려 계약직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계약직의 현황과 개선책을 점검한다. 행정 사이드에서 민간 전문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분야를 꼽으려면 우선 외교통상 파트를 떠올리게 된다.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는 지난 6월 정부 부처로는 처음으로 박사급 민간 전문가 12명을 공개채용했다. 계약직 공무원 신분을 갖게 된 이들은 실무에 투입된지 아직 두달도 되지않았다. 하지만 성과는 만만찮다는 평가다. 최근 열렸던 한·미 투자협정 회담이 끝난 뒤 미국대표단은 이례적으로 협상 상대인 우리 측을 추켜세웠다. “한국대표들이 미국법과 다자간 규범,미국과 외국간의 회담 사례를 철저히 분석해 오는 바람에 협상 내내 진땀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미국 변호사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짜여진 우리 민간 전문가팀의 진가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특히 국회 통상 전문직 출신의 孫基允 박사(38)는 기존 공무원들을 제치고 ‘한·EU 합성필라멘트사(絲) 상계관세 사전회담’의 수석대표로 결정돼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동안 법률·회계법인에 외주를 줘야했던 통상관련 질의서의 타당성 검토와 답변서 작성도 이제 민간 전문가들에 의해 자체 처리할 수 있게 됐다. 吳相式 통상교섭본부 법률팀장은 “국제통상이 다자관계로 복잡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이번에 전문가를 영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또 “그동안 선진국의 이해에 따라 만들어진 틀에 끌려다니기만 했지만 이제는 우리도 민간 전문가들을 활용해 능동적으로 국제규범을 만드는데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민간 전문가들의 약점도 노출되고 있다. 서열위주의 공무원 사회에서 처신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관계부처 협조나 공문 기안 등의 행정능력에 있어서 기존 공무원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수 있는 성격이라는 게 통상교섭본부의 설명이다. 일단 성공작으로 평가 받은 통상교섭본부의 민간 전문가 채용은 고시라는 구태의연한 방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우리 공무원 수급구조에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 조촐한 ‘생환 25돌’(청와대 취재수첩)

    金大中 대통령은 다섯번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자주한다. 6·25때 북한군에 끌려가 잡혀 있다가 탈옥한 것에서부터 71년 대선뒤 트럭사고,두차례 죽음을 면한 73년 도쿄 납치사건,80년 사형선고 등이다. 金대통령은 이를 차례대로 설명하면서 “남들은 살기가 어렵다는데,김대중은 죽기가 어려운 사람”이라고 유머를 곁들였지만,목소리에는 언제나 비감함이 묻어있다. 이 가운데 73년 납치사건이 金대통령에게 가장 힘들었던 고난의 기억으로 남는 것 같다.해마다 8월13일이 되면 생환기념 미사와 오·만찬 행사를 거르지 않았다. 金대통령은 그 이유로 “물에 던져지기 직전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그의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도 한 장을 할애,그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올 기념행사는 유난히 소박하다.金대통령 스스로도 밝혔듯이 ‘4반세기가 되는’ 25주년인데도,야당총재때보다 오히려 조촐하다.세종로성당 기념미사에 부인 李姬鎬 여사와 함께 참석한 것을 빼면 아무런 행사가 없다.다른날과 마찬가지로 조지프 프뤼어 미 태평양사령관 접견 등 6개의 공식일정을 가졌다.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金大中 선생 납치사건 기록 사진전’에는 李姬鎬 여사만이 참석했을 뿐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수해 등으로 나라가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이제는 새로운 쓰임을 위해 대통령이 되지 않았느냐”는 반문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이날 세종로성당 미사에서 安秉鐵 주임신부 소개로 제대(祭臺)에 오른 金대통령은 “나라가 가장 어려운 때 대통령이 됐다”고 예의 ‘고생하라는 팔자탓’을 했다.그러면서도 “죽을 고비를 넘기며 대통령을 만들어준 것은 국민을 위해,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큰 일을 하라는 뜻”이라고 생환의 의미를 되새겼다. 金대통령 내외(李姬鎬 여사는 개신교도)는 미사가 끝나자 참석자들에게 볼펜을 선물하고,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손들을 잡으며 “누가 눈도장 찍으러 왔는지,확인을 해야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하자 제단 앞에 앉은 安신부는 물론 참석자 모두가 소리내어 웃었다.
  • 민주열사 열전:2/全泰壹(정직한 역사 되찾기)

    ◎개발독재 분신 항거… 노동운동 물꼬 터/피복공장 근로자로 허울뿐인 노동법에 분노/인간 부품화 거부… 사용자·독재와 죽음의 투쟁/‘YH사건’ 등 70·80년대 노동운동 정신적 지주로 개발독재가 한창 무르익던 70년 11월 13일 하오 1시30분.동대문 평화시장 건물에서 시뻘건 불덩이 하나가 뛰쳐나오며 피끓는 절규를 뱉어냈다.“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불길에 휩싸여 쓰러져 있으면서도 그는 외쳤다.“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 옆에는 ‘근로기준법’ 책이 불타고 있었다.허울좋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다. 21살의 청년 全泰壹은 그렇게 젊은 생을 마감했다.그는 이름없는 한 노동자였다.동대문시장 일대 재단사들의 모임인 삼동회 회장일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그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이란 말들이 입에 올려지기 시작하고 크고 작은 노동운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그때까지 입에 재갈이 물린 것 같던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그해 11월청주에서 여공 50명이 상경,체불노임 청산 등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감히’ 농성을 벌였다.의정부 외기노조원 21명은 노조운동 방해에 항의해 전원 분신자살을 기도,사용자와 경찰을 떨게 만들었다.수많은 지식인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모두 전례가 없던 일들이었다.사건 당시 삼동회 회원이던 崔鍾寅씨(51·청우회 회장)는 “태일의 분신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용기로 다가왔습니다.우리는 곧 그의 외침을 혈서로 써들고 거리로 나섰죠.경찰들에게 머리가 깨지며 끌려가면서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습니다”라고 회고했다. 全泰壹의 노동운동은 ‘全泰壹 사상’으로 승화되며 70,80년대 군사독재시절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원풍모방사건’이나 ‘YH사건’,인천의 ‘동일방직사건’등 굵직굵직한 노동운동은 바로 全泰壹 열사가 지펴놓은 노동운동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그것은 어떤 저명한 노동학자의 ‘노동운동론’보다도 위대한 ‘全泰壹 정신’의 실천이었다. 全泰壹 정신의 핵심은 ‘인간선언’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 그의 분신은 불의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은 노예일 수 없다는 진실의 증언이었다.다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한 평에 4명이 끼어 앉아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한다고 생각해보라.그렇게 일하고도 항상 배고픈 사람들이 바로 평화시장 일대 피복공장 노동자들이었다. 全泰壹 열사는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찾아주려고 했다.업주들에게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했고,시청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싸움을 벌여나갔다.그러나 사용주와 권력은 결국 한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그 거대한 억압의 틀을 깨려고 했다.그는 죽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 생애 못굴린 덩이를,덩이를/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굴리는데,굴리는데,도울 수만 있다면/이룰 수만 있다면….”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全泰壹 열사는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새겨지고 있는가.대답은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IMF시대에 全泰壹은 분명 살아 있어야 한다.경제제일주의에 의한 인간의 부품화,노동자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한 경제회생 논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그리고 IMF체제의 극복을 위해서 그는 반드시 우뚝 서 있어야 한다. ◎일기에 나타난 전태일 정신/“연소자를 부자들 기름으로 쓰는 세상”/시대모순 한탄·뜨거운 민중 사랑 절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全泰壹 열사지만 그는 일기와 낙서,소설 초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여기에는 시대적 모순과 그의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인간의 본질을 해치는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1969년 12월 어느날의 일기) “선생님,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그것도 미생물이 아닌,짐승도 아닌,인간이 있습니다.인간,부(富)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부한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1970년의 소설 초고) ◎전태일씨 가족들/꺾이지 않는 투쟁 의지 모친 통해 부활/이소선 여사 수차례 구속 민주투사로 70년 11월 13일 全泰壹 열사는 몸을 불살라 죽었다.그러나 그순간 그는 부활했다.그것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69)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담대해지세요….어머니,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아들이 죽어가며 손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그 순간부터 李여사는 ‘이소선’이 아닌 ‘전태일’이 되어 있었다.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그녀는 시신 인수도 거부한 채 아들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8개조항(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려는 내용)의 이행만을 요구했다.파장을 우려한 당국이 3천만원(지금 돈으로 약 5억여원)이라는 거액으로 회유하려 했으나 어머니의,아니 부활한 전태일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여론이 진정되고 당국이 설립된 노조에 탄압을 가해오자 그녀는 청계노조 간부들과 석유통을 쌓아놓고 분신위협으로 맞섰다.그렇게 노조를 지켜냈다. 또 시국재판에서 판사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로 1년간 복역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구속을 당하는 등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태일이는 비록 죽었지만,태일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땅의 억압받는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 태일이를 위하는 길이요,태일이를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장남인 전태일 열사 밑으로 남동생 태삼씨(48·봉제업)와 여동생 순옥(45·영국 유학)·순덕씨(38·주부)가 있다.어릴적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실직, 사망 등으로 모두 학교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했다.순옥씨만이 늦게나마 몇몇 뜻있는 단체의 후원을 받아 영국 워릭대학에서 못이룬 형제들의 학업의 꿈을 대신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 연보 ▲1948=경북 대구시남산동에서 전상수·이소선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63=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1965=평화시장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1967=한미사 재단사가 됨. ▲1969.6=평화시장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조직. ▲1970.9=왕성사 재단사로 취직.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이 됨. ▲1970.10=평화시장 노동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삼동회 대표들이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노조결성 지원 등 8개항 요구. ▲1970.10.24=근로조건 개선 시위 기도했으나 실패. ▲1970.11.13=‘근로기준법 화형식’ 거행하며 분신.성모병원에서 숨짐. ◎인터뷰/분신 당시 집회 참가 李承喆씨/“내 죽음울 헛되이 말라” 목소리 쟁쟁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자던 태일의 결의에 찬 눈빛이 눈에 선합니다” 全泰壹 열사의 분신 당시 삼동회 회원으로 집회에 참가해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李承喆씨(49·자영업).그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뛴다”고 했다. “태일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키겠다고 했을때 우리들은 순간 긴장했지요.그러나 설마 분신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李씨는 全泰壹 열사가 온몸에 화기가 올라 숨이 콱콱 막히는 지경에서도 모여든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다고 했다.죽기전 병상에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꼭 이루어 달라”고 했고,대답이 없자 “왜 대답하지 않는가”라고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했다고.그러자 친구들은 그를 붙잡고 “네 말대로 하겠다.맹세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다. 李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결국 달포뒤 노조를 결성해 全泰壹 열사와의 약속지키기에 나섰다.그리고 노동자 교육을 위한 ‘노동교실’ 설립,근로시간 단축,다락방 철거 등 많은 것을 쟁취했다.많은 동료들이 감옥을 들락거리며 싸워 얻어낸 성과였다. 李씨는 최근 일부 언론에서 개발독재의 상징인 朴正熙 전대통령이 우리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처럼 비쳐지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그는 “우리 경제는 60,70년대 노동자들의 뼈빠진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 민주열사 열전:1­2/張俊河 선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체제 맞서 ‘불굴의 투쟁’/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 항일운동/해방후 ‘사상계’ 창간 반독재투쟁 선도/朴正熙정권 끝내 부정… 의문의 추락사 “오늘의 헌법(유신헌법)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이에 우리 국민은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1973년 12월23일 상오 10시 서울 YMCA회관 회의실.통일당 張俊河 최고위원이 준비된 성명서를 읽어내려가는 순간 수십명의 보도진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咸錫憲·白樂濬·金壽煥·白基玩·桂勳梯·兪鎭午씨 등 각계 지도급 인사 30여명이 함께한 가운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순간이었던 것이다.이 일로 張俊河 선생은 白基玩씨와 더불어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다. 일제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張俊河 선생.그는 정부수립 이후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골짜기에서 불귀의 객이 될때까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있었다.5·16쿠데타 때까지는 월간잡지 ‘사상계’를 무기로,그 이후에는 직접 몸을 던져 독재와 싸웠다.金俊燁 사회과학원 이사장(78)은 張俊河 선생을 ‘애국자·혁명가·인격자이며 권모술수와 배금주의를 배척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고 그의 죽음을 서러워했다. ‘사상계’를 빼놓고는 그의 반독재투쟁사를 말하기 어렵다.그의 손아래 동서로 사상계에서 편집부장을 지낸 劉庚煥씨(61·전 문화일보 논설실장)는 “張俊河 선생은 자신이 발행하던 사상계에 신앙에 가까운 애착을 보였다”고 했다.사상계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자 오히려 반독재 정론지로써의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59년 2월호에는 ‘무엇을 말하랴,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란 제목으로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을 냈다.58년 12월 자유당 정권이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을 개악시켜 통과시킨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쿠데타 이후에도 張俊河 선생은 61년 7월호에 실린 咸錫憲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란 제목의 글로 중앙정보부장 앞에 불려가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빨리 민정이양할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또 각종 집회연설을 통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밀수왕초’,‘매혈자’등으로 몰아부치고 국가원수모독죄 등으로 구속된다.이러한 투쟁은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과 반유신 개헌 백만인 청원운동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의 반독재투쟁에 대해 白基玩 통일문제연구소장(65)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분단체제로 몰아가려는 반통일세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했다.劉庚煥씨는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면서 반공주의자였다.일본군 장교로 독립군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朴正熙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또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쿠데타는 후세에 좋지 않다는 신념으로 朴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다”고 회고했다. 張俊河 선생의 일생을 지배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가 광복군 대위 시절 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겨레의 가슴마다 피빛으로/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조국의 역사 속에 피빛으로.◎張俊河와 朴正熙/광복군대위­일본군중위 출신부터 달라/남로당관련 등 박정희 약점 과감히 들춰 5·16 쿠데타 이후 張俊河 선생이 숨질 때까지 ‘張俊河는 朴正熙의 천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그만큼 앞뒤 안가리고 朴대통령에게 모멸감을 주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1966년 삼성계열의 한국비료가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하자 재벌밀수규탄대회에 초청된 그는 朴대통령에게 ‘밀수왕초’란 이름을 선물했고,3개월간 옥고를 겪는다.67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그해 4월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朴대통령에게 ‘매혈자’란 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베트남전 참전을 두고 한 말이었다.이로 인해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되나 오히려 6월 총선에서 옥중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또 “朴正熙는 과거 남로당 조직책으로 조직원 동료를 팔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로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인물” 등 朴대통령의 최대 약점들을 과감하게 들추어냈다. 張俊河 선생의 이런 행태에 대해 평전 ‘재야의 빛 장준하’를 썼던 朴敬洙씨(68)는 “張俊河 선생의 朴正熙관은 애초부터 멸시와 경멸이었던 것 같다. 상대가 일본군 중위일때 그는 우국충정의 광복군 대위였다는 자부심을 항상 갖고 있었고,朴正熙의 갖은 폭력을 겪으면서도 분노에 앞서 그 인격 자체를 대단치 않게 본 것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개헌을 위한 백만인 청원운동으로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던 張俊河 선생은 출감하자 75년 1월 朴대통령에게 ‘박정희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고 민주헌정의 회복을 촉구한다. ◎유족들의 생활/결벽중에 가까운 청빈으로 가족들 큰 고통/문상객도 자기먹을 쌀 가져올 정도로 궁핍 “월급 봉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17살때 시집왔다는 張俊河 선생의 미망인 金熙淑 여사(71)의 말이다.사상계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張俊河 선생이 생을 마감했을 때 남은 것은 20만원짜리 월세방과 쌀 한 됫박뿐이었다고 전해진다.한 문상객이 미망인의 손을 붙들고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거냐”며울자 망연자실해 있던 金여사는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가져온 적 있나요”라고 남의 얘기 하듯 했다고 한다. 白基玩씨는 “문상올 사람들에게 자기 먹을 쌀을 가져오라고 연락을 했었다”며 “당시 부의금에 약간의 돈을 보태 전셋집을 구해주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이렇게 지나칠 만큼의 청빈에 대한 그의 결벽증은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일 수 밖에 없었다.사상계에 대한 탄압으로 항상 빚에 쪼들렸던 것도 이유가 됐다. 3남2녀중 장·차남인 호권·호성씨는 대학 문턱도 못 밟아봤으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세 아들중 호준씨는 아버지의 모교인 한신대를 나와 목사로 있다.딸들은 이대를 졸업했으며 미국과 제주도에 각각 살고 있다. ◎비극의 수수께끼/추락사한 유해 겨드랑이 피멍자국/17m 벼랑에서 떨어진 안경은 말짱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張俊河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張俊河 선생이 숨져 누워있던약사봉 골짜기의 이 표석문의 ‘멋 훗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당시 검찰의 ‘추락사’발표는 실로 의혹투성이였다.그때 徐燉洋 의정부지청 당직검사는,張俊河 선생은 벼랑에서 떨어져 귀밑 부분이 함몰돼 뇌진탕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그는 등산 도중 일행과 떨어져 金龍煥씨(중학강사)와 같이 하산하는 도중 경사가 급해 소나무를 잡고 발을 딛는 순간 나무가 휘어지면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것이다. 徐검사는 사고 다음날 새벽 1시경 현장에 도착,캄캄한 상태에서 현장조사를 마쳤다.그리고 그날 낮 金龍煥씨를 검찰로 불러 조사기록을 작성했을 뿐이었다.이때문에 당시 ‘재야대통령’이라고 불리던 張선생의 사인을 서둘러 추락사로 발표한 의혹을 샀다. “집에 도착한 고인의 유해를 보니 겨드랑이 밑 양쪽 팔에 피멍이 있었어요. 엉덩이와 팔 두군데 주사기로 찔린 듯한 자국도 있었고요.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사체가 너무 깨끗했습니다.순간 양쪽 팔을 붙들린 채 끌려갔다고 직감했지요” 서울 상봉동 셋집에서 장례 대소사를 떠맡았던 劉庚煥씨의 증언이다.또 金龍煥씨가 말한 하산코스가 등산장비 없이는 도저히 내려오기 어려운 벼랑이어서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 코스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張俊河 선생이 갖고 있던 커피보온병과 끼고 있던 안경이 17m 높이의 벼랑에서 돌밭으로 떨어져 말짱했다는 불가사의한 의혹 등도 나왔다. 劉庚煥씨는 또“소나무가 휘어진 자국이라며 金龍煥이 말한 부분에 동그랗게 껍질이 벗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칼로 벗겨낸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張俊河 선생 연보 ▲1918 평북 의주에서 아버지 張錫仁 목사와 어머니 金京文 여사의 4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남 ▲1932년 평양 숭실중 입학 ▲1940년 일본신학교 입학 ▲1944년 1월 金熙淑 여사와 결혼,20일 후 학도병으로 입대 ▲1944년 7월 일본군 탈출,중국군 가담 ▲1945년 1월 중국 중경의 광복군에 편입 ▲1945년 11월 金九 선생과 함께 입국,비서로 활동 ▲1948년 한신대 졸업 ▲1953년 월간 ‘사상계’ 발행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 상 수상 ▲1971년 일본군 탈출과 광복군 시절을 담은 저서 ‘돌베개’ 출간 ▲1972년 7·4 공동성명 지지 ▲19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1975년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수많은 의혹을 남긴채 숨짐
  • 여야 국회의장 선출 필승전략/與 “완벽공조” 野 “반란없다”

    다음 달 3일 국회의장 선출을 앞두고 여야의 ‘벼랑끝 대결’이 점입가경이다. 여야는 저마다 승리를 장담하면서 내부표 단속에 돌입했다. 반란표 이탈을 겨냥한 맨투맨 설득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2與 “137+α 있다”/여­여 핫라인 구축 “한나라 10표 빼온다”/국민신당엔 ‘상임위원장 배정’ 당근 준비 ‘137표+α전략’에 승부수를 띄웠다. 국민회의(88석)와 자민련(49석)의 콘크리트 공조에다 국민신당,무소속,한나라당의 반란표를 엮어 과반수를 돌파한다는 전략이다. 최우선 과제는 여여(與與)공조다. 양당은 30일 의원총회를 열어 내부결속에 치중했다. 朴浚圭 의장후보는 인사말을 통해 “더 이상 국회가 개혁의 걸림돌이 돼서는 안된다”며 집권당의 승리를 강조했다. 충청권의 李麟求 李元範 의원 등은 “우리가 국회를 장악하지 못하면 패잔병인 한나라당에 끌려다녀야 한다”며 이탈 방지를 호소했다. ‘+α전략’도 진행 중이다. 한나라당의 수도권 의원과 의장후보 선출에서 상처를 입은 민주계 인사가 주요대상이다. 韓和甲 총무 薛勳의원 등 동교동계는 의원영입 과정에서 구축된 ‘핫라인’을 풀가동하고 있다. 南宮鎭 의원은 “적어도 3∼5표 차로 우리가 이길 것”이라며 승리를 자신했다. ‘최소한 10표’의 한나라당 반란을 기대하는 눈치다. 캐스팅 보트를 쥔 국민신당(8석) 공략전도 치열하다. 자민련 具天書·국민회의 韓총무는 국민신당 李龍三 총무를 창구로 집단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상임위 배정을 ‘당근’으로 제시했다는 후문이다. ◎한나라 “굳히면 이긴다”/의장선거 패배하면 정계개편 속수무책/“149명 모두 참석” 지역별 결속모임 강화 ‘吳世應 의장 당선’을 위한 올코트 프레싱에 여념이 없다. 당초 일정을 하루 앞당겨 30일 총재단과 당 3역,시·도지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확대전략회의를 개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 지도부는 지역별 결속모임을 잇따라 연뒤 다음 달 1일쯤 확대전략회의를 다시 한번 열 계획이다. 투표 당일에는 본회의 참석에 앞서 의원총회를 열어 마지막 표점검을 한다는 복안이다. 이날 주요당직자회의와원내총무단회의에서도 국회의장 선거의 필승전략을 논의했다. 여권 단일후보인 朴浚圭 자민련최고고문의 도덕성에 초점을 맞춰 대변인단 논평이나 성명을 통해 융단 폭격을 가할 방침이다. 내부적으론 당내 경선에서 辛相佑 의원을 지지했던 민주계 등 반(反) 吳世應 세력에 대해서도 “국회의장 선거에서 패배하면 여권의 정계개편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며 이탈표 방지에 주력하고 있다. 吳의원이 다소 결점이 있지만 朴고문보다 낫다는 ‘비교론’도 곁들인다. 나아가 어차피 이번 선거는 두 후보간의 인물 대결이라기보다 자존심을 건 여야대결로 치달을 공산이 큰 만큼 단합과 결속만이 최대의 전략이란 생각이다. 한편 151명의 전체 의원 중 와병중인 崔炯佑 의원과 중국 장기체류중인 盧承禹 의원을 뺀 149명의 의원들은 모두 참석할 것으로 지도부는 판단하고 있다.
  • 병무비리 이후 달라진 병무청/민원은 커녕 안부전화도 “뚝”

    ◎122명 물갈이 인사/“비리척결 최대과제” 병무청이 달라지고 있다.병무비리를 계기로 거듭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변화의 움직임은 바깥쪽에서 먼저 시작됐다.우선 하루에도 수십통씩 걸려오던 민원성 전화가 뚝 끊겼다.입대날짜 확인 등 각종 민원성 전화는 물론 안부전화도 잘 걸려오지 않는다고 한다.병무비리 이후 나타난 신풍속도다.이같은 현상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게 병무청 직원들의 바람이다. 직원들의 의식도 전과 같지 않다.사소한 정에 이끌려 ‘무리한 부탁’을 하던 관행을 스스로 없애려 애쓰고 있다.민원성 전화는 딱부러지게 거절하고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에게도 ‘부탁하지 말라’는 부탁(?)을 하는 입장이 됐다. 李相浩 청장의 의지도 한몫하고 있다.李청장은 최근 병무비리와 관련된 부탁이나 민원은 ‘무조건 NO’라고 말하라고 직원들에 엄명을 내렸다.적발되면 엄중문책하겠다는 경고도 포함됐다. 환부를 도려내기 위한 물갈이도 병행했다.서기관·사무관급 직원 42명과 6급 75명 등 122명의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병무비리의 진원지였던 부서가 그 대상이었다.감독소홀을 물어 감사담당관실의 사무관 이상 4명이 유례없이 전원 교체됐고 서울지방청 역시 사무관급 이상 징병·징모 관련 직원 16명이 대거 바뀌었다.앞으로도 계속 순환보직을 실시할 계획이다. 李청장은 “의식전환을 통해 올바른 공직자상이 설 때 병무비리는 근절될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비리근절을 최대 과제로 정해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가족과 떠나는 미술·박물관 휴가

    ◎마이크로 월드전 등 볼만한 전시회 5선 여름방학을 맞아 각 박물관과 미술관이 청소년을 동반한 가족나들이 객을 위해 다양한 전시회를 열고 있다. IMF시대 온가족이 휴가 삼아 가볼만한 전시회들을 소개한다. ◇중국문화대전­63앵콜전 29일부터 9월6일까지 여의도 63빌딩 별관 1층 특별전시장 및 옥외전시장에서 열린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5천년 중국문화를 한눈에 볼수 있다. 지난 1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려 4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수준높은 전시. 진시황 동마차,병마용,갑골문,월왕구천검 등 시대별 핵심작 500점과 함께 중국의 기인과 예인이 보여주는 갖가지 이벤트가 마련된다. 초등학생 4천원,중고생 6천원,일반 8천원. ◇볼 수 없던 세계,마이크로 월드전 오는 8월6일까지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열린다.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진기한 마이크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사진전시회이다. 인체,생활,자연,시간,빛 등을 주제로 1천여점의 마이크로 세계 사진과 동영상이 관람객을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5,200배로 확대한 혀,날아가는 총알을 찍은 사진,산호초처럼 생긴 남성호르몬,이탈리아 토리노성당의 성수의(聖壽衣)등이 특히 눈길을 끈다. 유치원생 4천원,초중고생 6천원,성인 8천원. ◇400년만의 귀향­일본속에 꽃피운 심수관가 도예전 8월10일까지 광화문 일민미술관(구동아일보)에서 열린다.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가 조선도예를 전해주고 ‘사쓰마야키’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를 일구어낸 초대 심당길로 부터 14대 심수관에 이르기까지 제작된 140여점이 선보인다. 주요작품으로 조선의 흙과 유약에 불만 일본의 것을 빌렸다는 초대 심당길의 ‘불만 빌린 그릇’(원명:히바카리다완),8대 심당원의 ‘사자승 관음상’,14대 심수관의 ‘금칠보설륜문대화병’등이 있다.청소년 2천원,일반 3천원. ◇우리 호랑이 특별전 8월1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호랑이해를 맞아 조상들이 남긴 호랑이 관련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회. 조선시대 ‘산신도’를 비롯,단원 김홍도 임희지 합작의 ‘죽하맹호도’,호랑이무늬 방망이,호랑이가 그려진 ‘청화백자철화송호문필통’,목제 호랑이상,영천 은해사의 ‘산신탱’,승주 선암사의 ‘목조 산신상’등 200점 전시되고 있다. 초중고생 무료,대학생 300원,일반 900원. ◇우리네 여름이야기 특별전 8월31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다. 옛 선인들의 여름나기 풍습과 생활의 지혜를 엿볼수 있는 전시회다. 여름의 대표적인 놀이인 천렵을 묘사한 풍속화를 비롯,시원한 그늘에서 부채질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겸제 정선의 ‘유음납량도(柳陰納凉圖)’,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탁족도(濁足圖)’등 현대인들이 쉽게 볼수 없는 여름관련 옛그림과 고문헌을 모았다. 이밖에 죽부인만들기,화문석짜기,감물들이기 등 여름용품 제작과정을 보여주고 입장객에게 부채를 나눠준다. 또 31일에는 입장하는 어린이들에게 봉숭아물을 들여주며 단오 유두 음식인 유두국수 등 각종 여름음식도 제공한다. 초중고생 무료,성인 700원.
  • 햇볕정책의 시련/李孝成 성균관대 교수·언론학(서울광장)

    지금까지 남한의 대북정책이나 북한의 대남정책은 강경론이 주류였다. 일시적으로 온건론이 세를 얻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내 다시 강경론이 주도권을 잡곤하였다. 그 결과로 남북한간에는 해가 갈수록 불신과 적대감이 더 커져왔다. 그래서 분단된 지 반세기가 넘었건만 아직도 남북한은 일반인들이 서로 편지 한통,전화 한통 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남북한이 상대를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 동족으로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 할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강경정책이 주류를 이루어온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 현상의 변화를 꾀하고 통일로 나아가려면 강경정책이 아닌 온건정책이 기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남북한 보수세력 협공 다행히도 국민의 정부는 과거 남한정권들의 대북정책 기조였던 강경정책을 버리고 온건정책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바로 북한을 개방과 변화로 이끌려는 이른바 햇볕정책이다. 햇볕정책은 북한과의 적대적 관계를 정권적 차원에서 이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 의존관계를 청산하려는 온정주의적 정책이다. 이 정책은 남한의 적대성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들볶고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북한의 보수세력으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고약한 정책이다. 마찬가지로 북한과의 적대적 관계를 이용하여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기득권을 보호해 왔던 남한의 보수세력에게도 심히 못마땅한 정책이다. 따라서 햇볕정책은 현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북한과 남한의 보수세력의 협공을 당할 수밖에 없다. 햇볕정책의 성공여부는 이들의 협공을 어떻게 잘 견디어 내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북한의 보수세력은 남한이 햇볕정책을 포기하고 강경정책을 채택하도록 갖가지 도발을 벌이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남한의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을 공격하며 강경대응책을 요구할 것이다. 북한과 남한의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을 공격하는 데서 또 다시 적대적 의존관계를 맺게 되는 셈이다. 북한의 최근 잇따른 동해안 침투사건과 그를 빌미로 한 남한 보수세력의 햇볕정책에 대한 공격이 바로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만일 햇볕정책이 이런 협공에 밀리면 통일은 커녕 북한의 개방이나 변화도 유도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실향민의 고통의 연장이요 남북한 분단의 고착화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동서독 관계는 참고할 만하다. 통독 전 동독은 서독에서 사민당의 집권을,사민당 집권후에는 동방정책을 기를 쓰고 막으려 했다. 왜냐하면,사민당은 기민당과는 달리 동독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동방정책을 표방한 까닭에 사민당이 지배하는 서독을 대상으로 국민들에게 적대감을 일으키고 국민들을 닦달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민당은 결국 집권하였고 동독과 소련에 대한 헷볕정책이라 할 수 있는 동방정책을 추진하였다. 동방정책은 그 추진과정에서 많은 훼방과 시련을 맞기도 했지만 의연히 추진된 결과로 동독과 그 종주국인 소련을 개방과 변화로 이끌어 독일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서독의 사민당 정책 교훈 우리의 햇볕정책도 북한의 개방과 변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남한의 보수세력의 협공에 굴하지 않는 의연한 추진이 필요하다. 그들은 햇볕정책이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당하기 때문에 더욱더 거세게 헷볕정책에 저항할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이런 저항을 예상하고 대비함으로써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 개표일 각당 표정

    7·21 재·보궐선거 개표가 진행되면서 여야 모두 당초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오자 긴장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사태추이를 예의 주시했다. ◎국민회의/수원팔달 패색… 상황실 침묵 개표초반 선거사령탑인 鄭均桓 사무총장,韓和甲 총무,韓光玉 부총재가 “구도대로 잘 갈 것”이라며 비교적 느긋한 표정으로 TV 개표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개표가 진전되면서 수원 팔달 등 후보를 낸 3곳 모든 지역이 상대후보와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계속하자 “안도할 수 없다”며 초조한 기색을 띠기도 했다. 특히 당초 무난히 당선될 것으로 예상됐된 수원 팔달의 朴旺植 후보가 한나라당 南景弼 후보에게 끌려가자 3층 기자실에 임시로 마련된 상황실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鄭총장은 측근에게 “수원 팔달을 연결해보라”고 지시했고 수원 팔달 선거본부측으로부터 “개표되지 않은 지역은 대부분 친여(親與)지역” “승리할 것이 확실시된다”고 하자 비로소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자민련/“1승 목표 달성” 분위기 들떠 투표자 출구조사 결과에 이어 개표 초반부터후보를 낸 3곳에서 ‘1승 이상’ 목표가 현실화되자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朴泰俊 총재는 하오 6시 투표 종료에 맞춰 朴浚圭 최고고문,金龍煥 수석부총재 등과 중앙당 상황실에서 TV3사의 출구조사 결과보도를 시청하며 후보별 예상 득표율을 점검했다. 특히 부산 해운대·기장을에서 金東周 후보가 1위를 달리자 고무된 표정이었다. 한 당직자는 “아스팔트에 씨앗을 심어 열매를 거뒀다”며 승리를 기정사실화했다. 서울 서초갑에서는 朴俊炳 후보가 한나라당 朴源弘 후보와 엎치락 뒷치락하는 것으로 집계되자 애간장을 태우며 개표 추이를 지켜봤다. 특히 하오 8시30분쯤 朴俊炳 후보가 朴源弘 후보를 한때 앞지르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나라당/‘텃밭 패배’ 예상 방송에 허탈 방송3사 투표자 출구조사 결과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여의도 당사는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李漢東 총재권한대행과 徐淸源 사무총장 등 당 지도부는 당사 2층에 마련된 종합상황실에 들러 무거운 표정으로 방송을 지켜봤다. 특히 지도부는 당초 기대를 모았던 경기광명을과 수원 팔달에서 완패(完敗)하고 ‘텃밭’인 부산의 해운대·기장을도 여당 후보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나타나자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난한 승리를 예상했던 서울 서초갑마저 朴源弘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고전하는 것으로 드러나자 충격이 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초갑 朴源弘 후보가 자민련 朴俊炳 후보와의 표차를 벌리고 수원 팔달 南景弼 후보가 선두로 치고 올라가자 당초 목표치인 4승을 건질 수 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기도 했다.
  • 院구성 순탄하게 이뤄질까/임시국회 소집 총무접촉 일정부터 이견

    ◎常委증설·위원장 배분·의장단 선출 난제 국회 정상화의 길이 보인다. 정치 복원의 첫 단추다. 빠르면 여야는 선거가 끝난 직후인 22일쯤부터 절충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여권은 7월말이나 8월초에 원구성을 마치고,광복절인 8월15일 이전에는 주요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세부 계획을 마련했다. 야당도 조속한 원구성 원칙에는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가 정상궤도에 진입하기까지는 어려움도 적지않을 전망이다. 자유투표라는 국회의장 선출방식에는 합의했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의장단 선출 등 원구성과 국회법개정을 다룰 임시국회 소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이번만은 여야 합의로 임시국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보할 것을 모두 양보한 마당에 더 이상 끌려 갈 수 없다는 계산이다. 이를위해 3당 총무회담 전에 여여 의견조율을 거치기로 했다. 한나라당은 여야합의에 의한 국회소집에는 동의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단독으로 국회를 소집한다는 방침이다. 총무회담 일정을 놓고도 신경전이 치열하다. 여권은 24일 이후,야당은 재·보궐선거 이후인 22일쯤을 적기로 생각하고 있다. 국회의장 당적이탈,복수 상임위제도 등 여야가 의견을 조율한 부분도 있지만 상임위 증설,상임위원장 배분 문제도 만만찮은 쟁점이다. 국회정상화 일정을 불투명하게 할 수도 있다. 의장단 선출 문제도 만만찮다. 국민회의는 투표방식에 관계없이 여권출신 의장을 염두에 두고있다. 韓和甲 총무는 “자유투표를 하더라도 여권에서 국회의장을 낼 수 있다”며 자심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자민련은 동상이몽이다. 총리인준 문제만 잘 풀리면 야당 국회의장도 수용할 수 있다는 방침이다. 한나라 당의 사정도 복잡하기는 비슷하다. 단일 후보 선출을 놓고 홍역을 치를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7·21재·보궐 선거의 흑색·금품 선거 시비도 원구성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회의는 한나라당 李漢東 총재권한 대행을 검찰에 이미 고발한 상태다. 대통령의 비자금과 아태재단 후원금이 선거자금으로 유입됐다는 요지의 발언과 관련해서다. 꼬일대로 꼬여 있는 국회정상화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 목성위성 가니메데에 바다 흔적/분화구 13개도 발견… 학계 주목

    【로스앤젤레스 AP 연합】 목성 최대 위성인 가니메데에서 바다가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흔적과 함께 13개 분화구 형태의 구멍이 확인됐다. 미 국립항공우주국(NASA)이 16일 이를 증명하는 가니메데 근접 촬영사진을 공개했다. 근접 촬영사진에서 드러난 분화구형태의 구멍은 혜성이 중력에 이끌려 목성과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이 분화구들에선 지구의 화산과 달리 용암이 아닌 물이 분출됐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실제 천문학자들은 위성의 표면밑에 바다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중이다. 브라운대 행성학자 제임스 헤드는 열,액체형 물, 운석의 충격으로 생기는 유기물 등은 생명존재의 요건이 될 수 있으나 “아직 생명이 존재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태양계 위성중 가장 큰 가니메데는 직경 5,230㎞로 수성보다 크고 화성의 4분의 3 규모이다.
  • 햇볕정책 是非(林春雄 칼럼)

    ○“북 도발 초래”잇단 비난 북한의 잠수정 사건이 또 일어나고 무장간첩 침투사건이 터지면서 새 정부의 이른바 햇볕정책이 도마위에 올라있다. 정부는 15일 이례적으로 국가안보회의 전체회의까지 열어 북한측에 사과등 우리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아울러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 위에 교류,협력추진이라는 병행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다행한 일이다.그러나 이번 사태로 새 정부의 햇볕정책에 얼마간 흠집이난 것만은 사실이다.사건이 터지자 한나라당은 즉각 정부의 햇볕정책이 북한의 연속적인 무장침투 도발을 초래했다고 비난하고 햇볕정책의 재검토를 촉구했다.자민련도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햇볕정책의 조정을 요구했다. 정부는 햇볕정책에 변함이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는 햇볕정책이 정부의 생각만큼 결코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사태는 또한 우리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의도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개연성(蓋然性)을 떠올리게 한다.북한이 금강산 개발을 수용하면 햇볕정책이 되고 무장간첩을 보내면 강풍정책이 될 가능성이다. 국가정책에도 상대가 있을 것이다.하지만 한 국가의 정책에는 철학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더구나 우리의 통일 정책이 북한의 작위적(作爲的)공작에 놀아나는 것같은 모양세는 좋지 않다. ○정책과 공작은 구별돼야 정책과 공작은 구별돼야 한다.남북은한 핏줄이지만 군사적으로는 적대관계에 있다.따라서 남북간에는 적의 동태를 탐지하고 적의 작전을 교란하기위한 공작이 수없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안기부가 북한의 黃長燁을 끌어내는 공작을 하듯 북한도 남한의 군사동태를 살피고 민심을 교란하는 공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공작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국가정책이 정보기관의 공작에 끌려 다닌다거나 혼선을 빚어서는 곤란하다. 한나라당은 햇볕정책이 북한의 무장침투를 초래했다고 하나 그렇다면 강풍정책을 계속했던 지난 반세기 동안에는 무장간첩 침투사건이 없었는가. 햇볕정책이 못마땅한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정책을 쓰든 북한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북한이 변하지 않고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북한이 91년 한국과 함께 유엔에 동시 가입한 것도 큰 변화이고 4자회담을 수용한 것도,鄭周永씨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한 것도 북한으로서는 엄청난 변화다. 우리는 북한이 어떻게 나오든 북한 스스로 문을 여는 날이 올때까지 지속적인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관된 햇볕정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성급한 기대는 금물이다. ○대북정책의 혼선 경계 정부가 이번 사태에 예상보다 강경한 반응을 보인 것은 국내 보수파들의 반격을 의식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국내문제 때문에 햇볕정책 자체가 훼손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정부가 바로 전정권이 범했던 대북정책의 혼선을 되풀이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그러나 벌써부터 햇볕정책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간첩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국방을 튼튼히 하는 것과 햇볕정책과는 별개의 것이다.햇볕정책은 간첩사건 같은 미미한 군사적 문제로부터자유로워야 한다.그리고 무엇보다 햇볕정책이 성공을 거두려면 국내 수구세력들의 저항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 “北 도발 반드시 책임추궁”/金 대통령 안보회의 주재

    ◎軍 경계·韓美 안보협력 강화 金大中 대통령은 15일 “북한의 도발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모든 수단을 다해 책임을 추궁할 것이며,재발 방지를 끝까지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취임후 처음으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이같이 말하고 북한의 대남 침투시인 및 사과,관련자 처벌·재발방지 약속 등 납득 할만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고 회의에 배석한 朴智元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金대통령은 특히 “우리의 햇볕론이 북한을 이롭게 한다면 金正日등 북한 지도층이 왜 햇볕론을 비난하고 잠수정을 침투시켜 남한의 대북정책을 강경으로 이끌려고 하겠는가”라고 반문한뒤 “일부에서는 햇볕론때문에 이번 사태가 일어났다고 하지만,햇볕론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는 북한의 일거수 일투족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되며,대북 3원칙은 하나 하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묶어 추진되는 것”이라고 햇볕론에 기초한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계속 유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와함께 북한의 대남침투 도발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군의 대북군사태세와 한미 안보협력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군의 해상 및 해안경계태세 보강 ▲한미 군사협력 강화 ▲통합방위협의회 운영 활성화와 주민신고체제 확립 및 안보의식 고취 등의 후속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 재미 언론학자 장원호 교수 ‘미국 신문의 위기와 미래’ 펴내

    ◎미국 신문의 살아남기 전략/편집권 위기·체인 소유제 등 문제점 지적/한국의 신문도 조직단순화 등 서둘러야 1704년 미국의 첫 신문인 ‘보스턴 뉴스레터’가 발행된 이래 미국신문은 3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1830년대에는 페니 프레스(penny press)의 출현과 함께 대중신문의 시대를 맞았다.이러한 상업주의 언론은 허스트와 퓰리처간의 황색신문 전쟁으로 발전했으며,결국 1920년대에는 처음으로 보도 윤리강령을 만들게 됐다.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언론은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황금시대로 접어들었지만,경제가 어려워진 80년대 초부터 도산위기를 맞고 있다. 재미 언론학자 장원호 미주리대 석좌교수(60)가 미국신문의 역사적 배경과 위기의 뿌리를 진단한 연구서 ‘미국신문의 위기와 미래’(나남출판)를 펴냈다.장교수는 이 책에서 미국신문들이 경제·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게 됐는가를 살핀다.아울러 21세기 한국신문의 과제도 짚어본다. ㄹ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는 1,530개의 신문이 있다.이중 90% 이상이 인구 10만이 못되는 도시에서 발행되는 지방신문이다.이 신문들의 독립경영이 어려워지자 신문재벌의 일종인 이른바 ‘체인 소유제’가 성행하고 있다.‘가넷’체인은 150개 이상의 신문사와 방송사를 거느리고 있다.마치 식료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슈퍼마켓처럼 신문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그런 맥락에서 미국신문들은 ‘슈퍼마켓 저널리즘’ 또는 ‘마케팅 저널리즘’이라는 달갑지 않은 말을 듣고 있다.이같은 경영 우선의 신문운영은 편집권의 위기를 부를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언론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또다른 유형으로 독자로부터의 압력을 든다.미국신문은 사회를 이끌기 보다는 독자들에게 끌려 다니고 있다는 것이 장교수의 지적.그는 그러한 예로 ‘USA투데이’를 꼽는다.미국내에는 30%가 넘는 잠재적 문맹자들이 있어 복잡한 해설기사 보다는 짧막한 글,화려한 사진과 그림을 위주로 하는 신문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장교수는 이 신문을 ‘초등학생용 시사잡지’라고 비판한다. 미국의 신문산업은 지난 20여년 동안 위기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형신문들을 포함한 200개 이상의 신문들이 도산했다.미국 신문산업계가 경험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지난 81년 수도 워싱턴을 140년이나 지켜오던 일간지 ‘워싱턴 스타’가 문닫은 일이었다.또 서부지역 최대의 신문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60년대 50여개에 달했던 해외지사를 현재는 불과 몇명의 해외 특파원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미국신문의 살아남기 전략의 예를 들면서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는 우리 신문의 현실을 분석한다.우리 신문이 나아갈 방향으로 먼저 신문사 조직의 단순화를 주문한다.각 신문들이 팀제를 도입하고 미국식 방법을 부분적으로 시도했지만 근본적인 직제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진단이다.미국신문들은 주로 편집국장과 담당부장 사이에서 거의 모든 일이 처리되며 일반기자들이 거쳐야 할 다른 직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도 이렇게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 遺家協 ‘이유’ 있는 빗속 시위

    ◎“의문사 규명” 경찰청장 면담 집단요구에/“신고않고 시위했다”… 전원 즉심에 넘겨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원 10여명은 9일 하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앞길에서 경찰이 회원들을 강제로 연행해 즉심에 넘긴 데 항의,8일째 시위를 했다. 이들은 “지난달 26일 회원 12명이 경찰청사를 방문,金世鈺 경찰청장과의 집단면담을 요구하다가 신고를 하지 않고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모두 경찰서로 끌려가 밤샘 조사를 받았다”면서 “결국 즉심에 넘겨져 벌금 3만원씩을 내고 풀려났다”고 말했다. 경찰청장을 만나려 한 것은 군사정권 때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후신인 보안수사대의 해체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시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경찰청장을 만나러 왔으며 아침에 팩시밀리로 면담요청서를 보냈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흥분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고 朴鍾哲씨의 아버지 朴正基씨와 고 李韓烈씨의 어머니 裵恩深씨 등으로 “자식 죽음 진상규명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청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들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 독재권력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한 300여명의 명예회복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면서 “하지만 현 정부도 공권력으로 민의를 가로막는 등 과거 군사독재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