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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2인극 ‘해일’로 한무대 서는 유지태·오달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를 본 이들이라면 대번에 눈치 챌 것이다.영화배우 유지태(28)와 연극배우 오달수(36)가 출연하는 2인극 ‘해일’(4월21일∼5월2일 대학로 행복한극장)에 왜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지를.어느 영화보다 배우의 역할이 컸던 ‘올드보이’에서 가둔 자 우진역의 유지태와 갇힌 자를 감시하는 간수역의 오달수,두 연기자는 주연인 최민식 못지않게 강렬한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처음 대본 연습하던 날 너무 행복했어요” ‘올드보이’가 데뷔 7년차인 유지태에게 배우로서의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했다면 대학로에서 잔뼈가 굵은 오달수에겐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그리고 한가지 더.영화를 찍으며 ‘형 아우’하는 사이로 친해진 이들을 단 둘만 등장하는 2인극 무대로 이끌었다.대학때부터 ‘연극이 꿈이었다’는 유지태가 오달수의 연기에 매료돼 같이 연극을 하자고 졸랐던 것. “처음 대본 연습하던 날 너무 행복했어요.학교(단국대 연극영화과)다닐 때 제가 직접 희곡을 써서 공연한 기억도 새롭고요.”서울 혜화동 연습실에서 만난 유지태는 연극의 매력에 흠뻑 빠진 듯했다.인터뷰 내내 ‘행복하다’는 말을 여러번 반복했다. 옆에 있던 오달수가 거든다.“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저만 보면 연습하자고 어찌나 조르는지 별명이 ‘하고재비’예요.(웃음)” ●총알받이 된 두 인민군 병사의 이야기 연극 ‘해일’(이해제 작·연출)은 6·25전쟁 당시 연합군의 반격으로 퇴각하던 인민군이 시간을 벌기 위해 적진에 총알받이로 남겨 둔 인민군 병사 하현과 만필의 이야기다.족쇄에 묶여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극중 두 인물은 극히 대조적이다.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도쿄 유학생 출신의 미술학도 하현이 ‘인민해방’을 목적으로 자원해서 전쟁에 뛰어든 반면 만필은 전쟁의 명분이 뭔지도 모른 채 거리 장터에서 강제징집돼 전장에 끌려온 순박한 채삼꾼이다.유지태는 하현을,오달수는 만필을 연기한다. “하현이란 인물에게서 과연 이데올로기란 뭘까,전쟁이란 뭘까 하는 것들을 많이 떠올려요.” 유지태는 요즘 ‘공산당선언’같은 사상서를 읽는 중이란다.극중 하현의 대사를 가슴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다.연극하는 두달 동안은 다른 스케줄을 잡지 않고 한가지에 몰입하는 그의 집요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배우로서 긴장되는 2인극 매력 있어” 반면 오달수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중인 ‘남자충동’에 출연하느라 시간을 쪼개서 ‘해일’연습을 하고 있다.‘남자충동’은 89년 부산 ‘연희단거리패’에서 연극을 시작한 그가 97년 대학로 무대에 입성하면서 처음 출연했던 작품이라 의미가 남다르다.그의 능청스러운 코믹연기에 객석은 자주 웃음바다가 된다. 숱한 연극에서 경험을 쌓아온 그이지만 2인극은 처음.그는 “여러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과 달리 2인극은 잠시라도 호흡을 놓치면 금방 들킨다.때문에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지만 그런 만큼 배우로서 팽팽한 긴장감을 맛보는 매력도 크다.”고 말했다.학생때 무대에서 대사를 잊어버려 아찔했던 경험이 있는 유지태는 “아직도 무대공포증이 남아 있지만 든든한 선배가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며 웃었다. 유지태는 “영화 ‘올드보이’의 첫 대본 연습때 형의 연기에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다 넘어졌다.”면서 “촬영이 없는 날도 늘 현장에 나와 지켜보는 성실함에 끌렸다.”고 오달수를 치켜세웠다. 오달수도 “언제나 겸손하고 선후배에게 예의를 지키는 동생”이라고 화답했다.의좋은 형제처럼 서로를 챙기는 두 사람이 연극 ‘해일’에서 펼쳐보일 콤비 연기가 기대를 모은다.(02)747-2090.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손원천기자 angler@˝
  • 광주시청 상무시대 ‘활짝’

    광주시청 계림동시대가 35년 만에 막을 내리고 상무시대가 활짝 열렸다. 시는 지난 20일 동구 계림동 청사에서 서구 치평동 상무지구 새 청사로 이사를 마쳤다. 지난 98년 착공된 신청사의 부지는 2만 8000여평.1600억원으로 5년간 공사 끝에 의회동(5층)과 행정동(18층) 등으로 구성된 연면적 2만 6000평의 건물을 완공했다. 의회와 행정동의 층수가 5·18을 상징함을 엿볼 수 있다.신청사는 동서남북으로 무등·어등·화방·불태산 등이 보이고,제2순환도로와 지하철 1호선이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들어섰다.또 1400대에 이르는 주차 공간을 확보하고,노약자나 장애인들이 어느곳에서나 휠체어로 접근이 가능하도록 곳곳에 전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계림동 청사는 지난 69년 경양방죽으로 불리던 습지에 세워졌다.인근 태봉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거기서 나온 흙으로 경양방죽을 메워 건립한 데 대해 당시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로 평가됐으나,35년이 지난 지금은 수변·녹지공간을 없애버린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의견이 많다. 또 80년 5·18민주항쟁 당시 전남도청이 시민군의 항쟁 본거지 역할을 할 때 계림동 청사는 진압군에 끌려온 시민들이 고초를 겪는 치욕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22일 TV 하이라이트]

    ●한민족리포트(밤 12시) 일본 NHK의 ‘안녕하십니까?’를 진행하면서 뮤지컬 ‘엘리자베스’의 루돌프 황태자 역을 맡은 박동하.한국 대표 미남으로 비상을 꿈꾸는 그에게 이런 활동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닥치는 어려움은 젊음이란 빛으로 태워버린다.일본 무대의 정상에서 타오를 그의 밝은 빛을 기대해본다. ●포토에세이 사람(오전 10시50분)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 한시간 반 거리에 있는 탄광촌 브이코프.한인들의 눈물과 한이 마르지 않은 통한의 땅이다.93세의 김옥지 할머니는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끌려왔다.한인 1세 광부들과 탄광의 중심축으로 살아가는 2세들의 삶을 통해 사할린 한인들의 애환을 짚어본다. ●사이언스+(오전 8시30분)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젊은 과학자 상’을 받은 서울대 약대 생화학 연구실의 과학자들.그러나 이들은 미래가 불안하다고 외친다.‘젊은 과학자상’을 5년 연속 수상한 천경수 박사도 “열악한 연구 환경이 유능한 과학자들을 해외로 떠나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이공계의 위기에 대안은 없는가. ●하나뿐인 지구(오후 10시20분) 경기도 의왕시의 한 중학교는 지붕에서 물탱크로 관을 이어 빗물을 저장한다.화단이나 화장실 등 식수말고는 모두 빗물을 이용한다. 아이들은 빗물을 재활용하는 모습을 보며 물 절약 정신을 배우고,학교는 경제적 이득을 얻고 있는 현장을 찾아간다. ●경찰24시(오후 10시50분) 경기 경찰청 202호 폭력계 형사들이 월곶과 동해로 출발했다. 폭력과 협박에 시달린다는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이다.검거해야 할 혐의자는 무려 20여명.평범한 시민들을 끊임없는 감금과 협박,납치의 공포에 떨게 만드는 이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을까? ●야심만만(오후 11시5분) 이동건 김수로 공형진 신이가 ‘이런 스타일의 여자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를 주제로 이야기한다.도도하고 콧대 높은 여자,너무 순진해서 답답한 여자,청순하게 생겼는데 술 잘 먹는 여자 등 다양한 답변을 들어본다.‘남자가 봐도 정말 꼴불견인 남자들의 연애 행태’도 알아본다. ●백설공주(오후 9시50분) 면접을 볼 때마다 예쁜 여자들에게 밀리는 영희에게 희원은 진우의 곁을 떠나라고 속을 뒤집는다.분한 마음에 영희와 주리는 생일파티를 가장해 성형수술을 한 희원의 옛날 사진을 진우에게 보여준다.영희는 아버지에게 잡혀 들어갔다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선우가 싫지만은 않다. ˝
  • [책꽂이]

    ●파코(파울라 카르바예이라 글,조진주 옮김,작은 책방 펴냄) 달이 맛있는 치즈 덩어리로 만들어졌다는 얘기에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로 온 용감한 쥐 ‘파코’의 모험담을 담은 그림책.5∼8세.8500원. ●킹카주 너구리 비슈이(폴 뒤 부셰 글,이경혜 옮김,어린이디자인하우스 펴냄) 아마존에 살던 야생 킹카주 너구리 ‘비슈이’가 도시로 끌려와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인간과 맺는 가슴 따뜻한 우정.초등 저학년용.9000원. ●돌아온 래시(에릭 나이트 원작,정회성 옮김,동쪽나라 펴냄) 1970년대 외화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모았던 충견 래시의 이야기.미국 학부모가 선정한 ‘페어런츠 초이스 어워드’를 수상했다.7800원. ●꽃의 전설(패트리샤 흐루비 파월 글,오영나 옮김,어린이작가정신 펴냄) 장미,민들레 등 14가지 꽃에 얽힌 세계의 민담을 모은 그림책.5세 이상.8000원.˝
  • 정범진·이수영 예비부부 방송 출연

    ‘선영아 사랑해’로 화제가 된 여성 벤처 기업가 이수영(39·전 마이클럽닷컴 사장)씨와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장애를 딛고 미국 뉴욕시 강력부 부장검사가 된 정범진(미국명 알렉스 정·37)씨가 오는 10월 결혼을 앞두고 그들만의 알콩달콩한 사연들을 털어놨다. 이들 예비부부는 지난 16일 KBS KOREA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방송 녹화에서 처음 만난 뒤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갈등과 숨겨진 사연들을 밝혔다.‘김동건의‘은 두 사람의 만남에 징검다리 역할을 한 프로그램.정씨는 지난 2002년 8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이 쓴 책 ‘밥 잘 먹고 힘센 여자를 찾습니다’를 소개하고 “가족을 갖고 싶다.”며 한국의 모든 미혼 여성에게 공개 구혼했다.이 장면을 보게 된 이씨는 정씨의 솔직한 이야기와 선한 인상에 끌려 호감을 갖게 됐다.이씨는 이후 김동건 아나운서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고,김 아나운서가 주선을 해 정씨와 처음 연락이 닿았다.이들은 특히 지난해 5월 한 스포츠지에 ‘벤처 미녀 갑부인 이씨가 정씨를 이상형으로 생각한다.’는 보도가 나온 뒤,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믿음을 쌓아갔다. 결국 지난해 8월 이씨가 뉴욕으로 건너가 정씨를 만났고,첫 데이트를 했다.이후 매달 이씨가 미국을 방문해 사랑을 키워갔고,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때 정씨가 이씨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프러포즈를 해 결혼에 골인하게 됐다.가족계획을 묻는 질문엔 “최소 5명은 낳을 것”이라고 정씨가 답했다.이들은 오는 10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뉴욕에 신혼살림을 차릴 계획이다.이 프로그램은 위성채널인 KBS KOREA를 통해 22일 오후 2시에 먼저 방송되며 KBS 1TV에서 26일 오후 4시에 다시 볼 수 있다. 이영표기자 tomcat@˝
  • [盧탄핵안가결-국정운영] 본회의장 시간대별 상황

    ●12일 새벽 3시50분 탄핵안 가결의 단초는 새벽에 마련됐다.3시50분쯤,한나라당 홍사덕,민주당 유용태 총무는 ‘와’ 소리와 함께 소속 의원 20여명을 이끌고 본회의장으로 돌진했다.의장석 주변에서 모포 등을 깔고 자고 있던 여당의원 20여명을 제치고 의장석 주변 자리의 절반을 차지했다.잠에서 깨어난 우리당 의원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곳곳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6시 불안을 느낀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를 찾아 “대통령에게 사과를 요구할테니 탄핵안을 철회해 달라.”라고 요청했다.최 대표는 “이미 시한이 지났다.”라고 거절했다. ●9시5분 청와대 이병완 홍보수석이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11시5분 박관용 의장이 정문을 통해 본회의장에 등장했다.질서유지권을 발동,경위들을 대동했다.동시에 본회의장 쪽문으로 다른 20여명의 경위들이 입장했다.순간 의장석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경위 3명은 의원 1명을 담당했다.이해찬,임채정,김덕배 의원 등이 속속 본회의장 밖으로 끌려나왔다. 이종걸,유시민 의원에게는 최대 7명이 동원됐다.김희선 의원은 휴대전화 카메라에 이 장면들을 담다가 단상 아래로 옮겨졌다. ●11시20분 이때부터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맡았던 제안설명은 유인물로 대체됐다.박 의장은 바로 투표를 선언했고,야당 의원들은 줄지어 기표소에서 향했다.여당의원들은 야당의원들이 2겹으로 쳐놓은 ‘인간 바리케이드’에 봉쇄됐다.여당 의원들은 책상에 올라가 기자들을 향해 “쿠데타를 중지시켜달라.국민은 거리로 나와달라.”라고 외쳤다. ●11시50분 박 의장이 투표 종료를 선언했다.이에 3∼4분 앞서 종료를 하려 했으나 야당쪽에서 투표점검을 마치지 못해 이를 말렸다.5분쯤 개표작업이 끝나고 결과를 보고받은 박 의장은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은 가결됐습니다.”라고 선언했다.한편 몸싸움 와중에 누군가가 던진 구두는 본회의장 전면에 새겨진 대형 ‘국(國)’자를 때렸고,태극기봉은 몇차례 넘어졌다 다시 세워졌다. 이지운 박정경기자 jj@˝
  • [최홍운칼럼] 국민 역량 보여줄 때다/최홍운 논설위원실장

    우리는 다시 위기 때마다 슬기를 발휘하는 국민의 힘을 확인한다.정치권이 자초해 떠넘긴 분열상을 앞에 둔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나라의 주인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돼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사태가 여기까지 이르게된 데 대한 책임은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 모두가 져야 함은 물론이다.마지막까지 대화를 통한 해결을 모색하지 않고 벼랑끝 대치를 벌이다 동반 추락을 자초한 꼴이다.국회의장의 질서유지권 발동으로 의사당 안으로 들어온 국회 경위들에게 끌려나가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바라본 국민들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다.그 누구도 민의의 전당에서 선량(選良)들이 쫓겨나가고 대통령의 직무가 중단되는 이 상황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국민들은 탄핵안이 발의된 뒤 가진 노무현 대통령의 11일 기자회견에서 ‘결자해지(結者解之)’의 ‘큰 정치’를 보여줄 것을 기대했다.탄핵안 발의 자체가 요건을 충분히 갖추지 않았지만 파탄지경에 이른 정국을 수습하기 위한 지혜를 발휘해주길 소망했다.그 기대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물론 ‘사과하면 철회할 탄핵안’이어서 야당의 행태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그렇다 하더라도 이 지경에까지 이른 정치혼란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에게 있다.그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하는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크다. 12일 홍보수석을 통해 밝힌 사과는 이미 너무 늦었다.그 사이 남상국 대우건설 전 사장은 한강에 뛰어들었고 노사모 회원은 국회 앞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했으며 또 의사당을 향해 승용차를 돌진한 뒤 방화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지고 말았다.대통령으로부터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준,좋은 학교 나오고 크게 성공한 분’이라고 지목받은 남 전 사장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투신자살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과 안상영 전 부산시장에 이어 남 전 사장까지 정치로 인해 목숨을 끊은 이같은 일이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되어야 하는가.국민을 잘 살게 하는 정치는 언제쯤이나 볼 수 있을지 암담하다.이제 누구를 믿어야 하나.믿을 데는 국민밖에 없는 것 같다.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된 뒤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자세는 그나마 안도의 숨을 쉬게 한다.국민들의 분노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 분을 삭이고 차분히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정치권과 이쪽저쪽으로 갈라져 끝간 데 모르게 싸우고 있는 일부 광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혼돈을 최소화하는데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우리 국민들이다.헌정사상 처음있는 이 사태를 바라보는 외국의 시선과 반응은 오히려 우리보다 더 놀라며 흥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우리 국민들은 위기 때마다 슬기롭게 대처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가까이로는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들 수 있다.공동개최국인 일본은 이미 오래전에 전용구장 건설 등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우리는 너무 뒤처진 듯했다.막상 대회가 시작되면 외국 관광객은 모두 일본으로 몰려가고 우리는 빚더미에 앉을 것이라 했다.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던가.세계가 놀란 ‘붉은 악마’의 등장과 함께 일치단결된 모습을 과시하지 않았던가.IMF 외환위기 때는 고사리손의 어린아이에서부터 시골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구하는 ‘금모으기 운동’에 한마음으로 나서지 않았나. 오늘 우리는 다시 위기 때마다 슬기를 발휘하는 국민의 힘을 확인한다.정치권이 자초해 떠넘긴 분열상을 앞에 둔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나라의 주인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국민단결이야말로 이 시점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다.위대한 국민의 역량을 다시 보여주자. 논설위원실장 hwc77017@˝
  • 夜한 인간, 朝신한 인간

    ■ 夜한 인간들의 반란-난, 저녁에 피어난다. “아침시간보다 저녁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성공의 열쇠이다.” 새해부터 불기 시작한 ‘아침형 인간’에 대항하는 ‘저녁형 인간’들의 조용한 반란이 시작됐다.사회적인 분위기와 책,언론에서조차 새벽부터 일어나 활동을 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면 마치 사회의 ‘낙오자’인 것처럼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남들보다 하루를 늘려 쓰려면 새벽이 중요하다.’,‘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많이 잡는다.’,‘사회의 지도층은 모두 아침형 인간이다.’,‘성공하고 싶으면 아침형 인간이 되라.’….‘성공한 인간 = 아침형 인간’이란 공식이 당연시되고 있다.하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회사일을 마치는 저녁6,7시 이후가 매우 중요하다.대인관계를 위한 약속,자기계발을 위한 공부와 운동,취미 활동을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아침에 다소 늦잠을 자더라도 밤 시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냐가 ‘성공의 열쇠’인 셈이다.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늦잠을 즐기는 저녁형 인간이다.한번 몰두하면 끝장을 보는 그의 성격 탓이다.바둑도 한번 잡으면 밤을 새도록 즐기고 폭탄주도 한번 돌리기 시작하면 10여잔을 돌려야 한다.“무엇이든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일찍 일어나는 생활습관과 무관하다.”면서 요즘 다시 공직생활을 시작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한다.유명한 건축가 김진애 박사 또한 대표적인 저녁형 인간이다.그는 “주로 낮 시간은 사람을 만나거나 낮잠을 즐기고 밤에 주로 작업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저녁형 인간이 되버렸어요.”라며 웃었다. 서울 서대문구 명지대 앞에서 라이브카페를 운영하는 김도현(30)씨는 “몇십년을 살면서 스스로 체득한 라이프 스타일을 ‘붐,신드롬’에 이끌려 바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잘라 말한다.보통 일이 새벽 2∼3시쯤 끝나면 기상시간은 오전 9∼10시,새벽 5시에 잠들면 정오에 눈을 뜬다는 그 역시 아침형 인간의 생활패턴인 ‘수면 6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직접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잠을 자야합니다.목을 보호하기 위해서죠.그래도 하루의 4분의 1이상을 잠으로 보내는 것은 아까워요.노래연습도 해야하고,친구도 만나야하고….” 밤 11시에 잠들고 새벽 5시에 일어난다는 방식은 저녁 시간을 그만큼 활용하지 못한다는 말인데,인간관계는 ‘저녁 식사와 곁들이는 술 한잔’으로 더욱 돈독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개인주의가 팽배한 요즘 세태에 맞게 사람 덜 만나고 남은 돈으로 자기 계발을 위해 쓰자는 뜻으로 아침형 인간이라는 말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경력 8년의 클럽 DJ 최용섭(31)씨.밤이 되면 정신이 번쩍 깨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다.그가 말하는 저녁형 인간은 ‘삶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이다.폭설이 내린 지난 5일 새벽 그는 퇴근 후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했다.“아침형 인간들은 수면 시간이 1시간 정도 줄면 다음날 컨디션이 달라진다.”며 “하지만 저녁형 인간은 수면 시간이 좀 줄어도 다음날 몸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밤 대신 낮 시간에 잠을 자면 개운하지 않다는 아침형 인간 우월론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셈이다. 저녁형 인간으로 새로운 삶을 찾았다는 홍봉균(37)씨.그는 완전한 저녁형 인간으로 변신한 이후 사는 것이 신난다.평생을 ‘지각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던 그가 1년전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대학을 졸업하고 몇 차례 회사에 다녔으나 ‘출근시간 엄수’라는 규율을 지키지 못해 결국 오류역에 가방 가게를 열었다. “아침에 도저히 눈이 떠지지않아요.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않으니 어떻게 합니까.”“직장이요.몇군데 다녔지요.매일 지각을 한다는 상사들의 구박에 못 이겨 결국에는 사표를 쓰고 이제 제 사업을 해요.” 그의 가방 가게는 오후 1시에 문을 열고 막차가 지나가는 새벽 1시쯤 문을 닫는다.“요즘은 너무 행복해요.주로 가게문을 닫고 책보고 놀다가 새벽 잠들고 점심때쯤 일어나도 되고요.이게 저에게 딱 맞는 라이프스타일이에요.”라며 “돈은 적게 벌어도 저의 신체리듬에 맞는 생활을 하니까 더욱 건강해지고 하는 일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그리고 지각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도 없어졌구요”라고 이야기한다. 광고대행사 TBWA의 김여상 대리(31)는 공식적인 출근 시간인 오전 9시에 회사에 있어 본 적이 없다.게을러서가 아니라 자정이 돼서야 끝나는 작업이 많아 야근을 밥먹듯이 하기 때문이다.당연히 출근은 10시를 넘긴다. “아침형 인간이 대세라지만 아침형 인간보다 시간 활용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아침형 인간이 되려고 아등바등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우리는 저녁 시간을 더욱 잘 활용하는 것이지 게으른 것이 아니다.”라고 김 대리는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한준규 최여경 나길회기자 hihi@ ■朝신한 인간들의 음모 아침형 인간이 열풍이다.왜 갑자기 아침형 인간이 마치 신의 계시처럼 떠받들여지고 있는가.아침형 인간이 이렇게까지 우리 사회에서 추종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명쾌하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가 아침형 인간을 내세워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는 ‘아침형 인간 음모론’도 떠돌고 있다.다양한 음모론,재미로 읽어보시라.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머리 아파지니까. ●고도화된 기업경영전략이다 1990년대 중반 S그룹이 도입한 ‘7·4제’를 기억하는가.아침 7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해 남은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자는 의도였지만 실제 4시 퇴근은 꿈도 꾸지 못했다.의무적으로 오후 4시에 회사를 떠나 회사 근처에서 한두시간 배회하다 꾸물꾸물 회사로 들어갔다.회사에서 퇴근하라는 데 왜 들어가냐고 물으면 직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할 일이 태산인데 어딜 가나.”“다른 사람들은 그 시간에 다 일하는 데 일 안하고 있으니 불안해요.”“들어가면 차장 부장 다 자리에 앉아있는데 어떻게 그냥 퇴근합니까.” 결국 출근시간이 앞당겨지고 퇴근시간은 그대로여서 노동시간만 늘어났다. ‘아침형 인간’은 이 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첫번째 음모론이다.‘주5일 근무제’로 노동시간이 현격히 줄어드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아침형 인간’을 추천 덕목으로 꼽으면서 아침 일찍 나와 가열차게 일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외계인이 조종하는거라고 그동안 UFO로 정찰을 하던 외계인이 드디어 야심작을 내놓았다.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인간이 갑자기 아침형 인간으로 습관을 바꿔 비몽사몽 상태가 되는 것을 노렸다. 그 결과 아침형 인간의 원조국인 일본에서 무리하게 아침형 인간이 된 고이즈미 총리는 독도가 자기네 것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여댔고,한국과 일본간 사이버 대란이 일어났다.좀더 심하면 전쟁까지 일어날수 있다. 아침형 인간이 되겠다고 잠을 줄인 사람들이 출근·등교길에 깜빡 졸아 지각을 하거나,근무·수업 중에 하품을 하면서 직장이나 학교에서 잔소리를 듣는다.이 잔소리로 스트레스가 쌓여 결국은 암의 원인이 된다는데…. 외계인의 아침형 인간 프로젝트는 원시시대 때부터 시도됐다.외계인은 만만한 닭을 납치해 이렇게 세뇌시켰다.“인간들 꼭 깨워!아침에 꼭 깨워!꼭!꼭!꼭깨워!” 그래서 닭은 아직도 이렇게 외친다.“꼭끼오!꼭,꼭,꼭 꼭깨워∼”-오늘의 유머(www.todayhumor.co.kr)에서 ●네가 게으르니 그렇지 원조격인 음모론으로 사이쇼 히로시나 다카이 노부오 등 일본의 자기경영전문가가 그들이 내놓은 책을 판매하기 위한 언론플레이라는 말도 있다.앞서가지 못하면 금세 뒤쳐진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자기계발에 대한 책을 보여줌으로써 곧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점을 들어 설명한다. 경기불황 속에서 회사의 상황이 더 이상 좋아지지 않자 이를 종업원들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려는 경영자들의 책임전가용이라는 둥,이미 아침형 인간화한 지도층 인사들이 자신이 쌓아놓은 기반을 고수하기 위해 어거지로 강조하는 것이라는 둥 소수설도 있다. 최여경기자 kid@ ■ 사상의학으로 본 아침·저녁형 사상의학에서는 아침형인간과 저녁형인간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주로 양인(陽人)은 아침형 인간,음인(陰人)은 저녁형 인간으로 구분한다. 태양인과 소양인 등 주로 양인의 체질을 가진 사람은 아침에 눈뜨기가 비교적 편하다고 한다.몸에 양기가 많은 사람들은 햇빛의 기운을 잘 받아들이기 때문에 해 뜨는 새벽부터 활기가 넘친다.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새벽이나 아침시간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중요한 약속이나 집중력이 필요한 업무를 오전에 잡는 것이 성공의 열쇠. 태음인과 소음인 등 음인의 체질을 가진 사람은 양기가 강한 아침에 힘을 쓰지 못한다.유난히 아침잠이 많고 일을 하더라도 아침에는 머리의 회전이나 집중력이 상당히 떨어진다.이런 체질은 주로 정오를 넘어야 몸의 상태가 정상적으로 돌아오므로 주로 오후 시간을 이용해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이런 사람이 아침형 인간이 되겠다고 새벽부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면 오후 내내 피로가 쌓여 일을 망치게 된다. 제일경희 한의원 강기원(39) 원장은 “아침형 인간이 유행이라고 모두 아침형 인간이 될 수는 없다.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이다.”며 “한방에서는 아침형 인간에 적합한 체질이 있고 그렇지 않은 체질이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고 했다.그는 “아침형 인간이 유행이라고 무조건 유행을 따르다간 건강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준규기자 hihi@ ■Q&A 아침형일까 저녁형일까 사람들은 각자의 체질이나 습관으로 ‘아침형’인지 ‘저녁형’인지가 구분된다고 한다.이를 구분하는 설문조사를 요약해 소개한다. 1.아침에 일어날 때는 어떤 상태인가? (1)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출근할 준비가 된다.(2)일어난 지 10분 이상 지나거나 커피를 마시면 잠이 깬다.(3)최악이다. 2.중요한 시험의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언제로 하고 싶은가? (1)오전 8시에서 정오 사이 (2) 늦은 아침시간(오전 10시∼정오) (3)초저녁 3.휴일에는 언제 일어나는가? (1)평소처럼 일찍 일어난다.(2)평소보다 1∼2시간 늦게 깬다 (3) 점심 때쯤 눈을 뜬다. 4.모임이나 파티는 언제,어떤 형태를 좋아하는가? (1)오후의 티파티 형식 (2)저녁 시간에 술 몇 잔 하는 형태.(단,오전 1시 전까지는 꼭 귀가한다.) (3)저녁 늦게 시작해서 새벽까지 이어지는 모임.(날을 새야 파티는 제 멋이다.) 5.수업이 오전 5시에 시작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1)일어나서 수업을 들으러 간다. (2)나중에 녹화 테이프를 본다. (3)전날 밤을 새웠다가 곧장 수업을 들으러 간다. 6.언제 가장 졸리는가? (1)점심식사 후 (2)오후 10시 이후 (3)아침 내내 7.내일은 쉬는 날이라면 오늘 몇 시에 잠자리에 들겠는가 ? (1)평소처럼 (2)평소보다 1∼2시간 늦게 (3)지쳐 쓰러질 때까지 안 잔다. 8.아침식사는 무엇으로 하는가? (1)무엇이든 반드시 먹는다 (2)시리얼이나 토스트 (3)거의 먹지 않거나 커피 한 잔 ●결 과 답변(1)이 가장 많은 경우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사이가 가장 기분이 좋고,오후 2시반 께 가장 활발히 활동하며 아침 식사는 반드시 챙겨 먹어야 하는 ‘아침형’이다. 답변(2)가 가장 많은 경우 때에 따라 ‘아침형’ 또는 ‘저녁형’으로 변신할 수 있는 사람이다.일정한 수면과 기상 패턴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써야 한다.오후에 피곤해지기 쉬우므로 점심을 되도록 가볍게 먹은 뒤 약10분 운동한다. 답변(3)이 가장 많은 경우 오후 8시부터 10시 사이 기분이 가장 좋고,저녁식사를 가장 잘 챙겨먹는 ‘ 올빼미형’.지적이거나 예술적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많다. (영국 ‘스코티시 데일리 레코드’에서 발췌)˝
  • [종하랑 선영이의 배낭메고 60개국](7) 라오스 북부 방비엥

    라오스 북부의 작은 마을 방비엥은 여행자들의 당초 여행계획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곳이다.하루를 계획하고 온 사람은 이틀을,이틀을 생각했던 이는 나흘을 머물다 간다.특히 서양 배낭여행자들은 한달 이상 장기체류하는 경우도 많다.전부 도는 데 걸어서 10분밖에 안 걸리는 이 작은 마을의 무엇에 사람들은 그렇게 끌려서 떠나지 못하는 걸까. 방비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쏭강에서 튜브 타기,카약 투어에 참여하기,고산족 마을 방문하기,그리고 마을 구경하기 정도.이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노천시장을 구경하며 먹을거리를 사는 것도 일과중 하나이다. 시장 뒤쪽으로 늘어서 있는 집들은 대부분 나무판자나 대나무로 지어져있다.따로 기술자나 건축업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각자 알아서 짓는다.집 짓는 날은 온가족이 나와서 한가지씩 거든다고 한다.각자 지은 농산물을 가져다 사고파는 이곳 장터는 꼭 우리나라 옛날 시골 모습같다.그런데 이색적인 것은 여기서 파는 야생동물들이 가지각색이라는 점.야생쥐부터 야생너구리,박쥐까지 참 다양하다.요리법은 잘 모르겠지만 현지인들에게는 나름대로 맛있는 별식이라니,으∼(별식 좋아하는 한국 아저씨들이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방비엥에 있는 동안 날마다 이 신기한 시장구경을 하면서 우리도 다양한 과일을 흥정해서 사먹곤 했다.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다른 동남아 국가와 달리 외지인들에게 바가지를 잘 못 씌운다.아주 조금씩 가격을 더 불러놓고는 ‘500낍(60원 정도) 더 불렀는데,1000낍 더 불렀는데‘하는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들통날까 초조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다.비싸다고 돌아설 듯 어깨만 살짝 틀어도 가격은 곧 내려가고,덤 없냐고 하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몇개를 더 얹어준다.(라오스에서도 똑같이 ‘덤’이라고 한다.) 초저녁에 개울가로 내려가면 자기들이 잡은 물고기구이 파티에 초대하고,마을을 산책하다 눈이 마주치면 조용히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바로 이런 순수한 사람들 때문에 여행자들은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 같다.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곳 역시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몇년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한 평화롭고 조용하던 작은 마을이 이제는 거리마다 여행자들이 넘쳐나고,각종 투어 프로그램에 게스트하우스며 외국인 입맛에 맞는 수십개의 레스토랑이 생겨나 마을의 모습도 신흥 관광지처럼 변해가고 있다. 태국여행을 할 때 북부 산악지대 치앙마이에서 고산족 방문이 포함된 트레킹에 참여한 적이 있다.그들만의 세계에서 오롯이 살아가고 있는 고산족을 만나길 기대했지만 실망스럽게도 어린이들은 피카추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전통의상 차림의 주민들도 관광객들을 위해 형식적으로 갖춰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함께 트레킹을 했던 스웨덴 친구는 “순수한 지역민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너무 상업화한 나머지 고산족도 패키지 상품의 일부처럼 느껴진다.”고 아쉬워했다.요즘 치앙마이 트레킹 투어를 주선하는 에이전트들은 앞다투어 ‘새로 개발한,아직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지 않은 고산족 방문’이라는 문구를 프로그램 소개에 일률적으로 넣고 있다.라오스의 방비엥도,태국의 치앙마이도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관광코스가 됐지만 그 사람들만의 평온한 행복,오롯한 평화가 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게스트하우스 운영 김혜자씨 동남아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인사가 된 ‘김치 아줌마’ 김혜자(63)씨.예순이 넘은 나이에 라오스를 처음 찾았던 그녀는 라오스가 좋아서,라오스의 순수한 사람들이 좋아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라오스엔 어떻게 오게 됐나요. -지난 99년 건강이 악화돼 38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 동료교사 넷과 함께 딸에게 가이드를 부탁해 한달간 인도차이나로 자유여행을 떠났어요.태국과 라오스를 거쳐 캄보디아에 이르는 코스였는데 나이도 잊은 채 아주 즐겁게 여행했지요.특히 라오스 북부여행에서 만난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은 내 유년시절과 똑같아 발을 뗄 수가 없었어요. 인터넷 배낭여행 동호회에서 유명하던데. -처음엔 조금씩 메모를 한 것을 딸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곤 했는데,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읽고 격려해주어서 적극적으로 연재를 하게 되었지요. ‘김치 아줌마’라는 애칭은 어떻게 생겼나요. -여행하면서 제일 힘든 게 음식이잖아요.더욱이 한국사람들은 김치를 먹어야 힘이 나지요.그래서 처음엔 우리가 묵었던 한국인 게스트하우스부터 김치를 담가주기 시작했죠.그러다 보니 여행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나봐요.난 내 이름보다 그 별명이 더 좋아요.사람들이 기억하기 쉽고,정감도 있고. 라오스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하시죠. -오랫동안 초등학교에 있었기 때문에 여행하면서도 어린이들 교육이나 학교시설에 관심이 많았어요.그래서 방문하는 마을마다 학교는 꼭 갔었죠.그런데 학교시설이 정말 엉망이었어요.학용품도 거의 없고.그래서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학용품을 수집해 전해줬죠.지금은 친한 교장선생님 한분이 자비로 라오스 시골에 학교를 하나 지어주려고 하는데 쉽지만은 않네요.˝
  • [MLB] 최희섭 뉴욕메츠 시범경기 첫 홈런

    ‘빅초이’ 최희섭(25·플로리다 말린스)이 시범경기 첫 홈런을 폭발시키며 팀의 5연승을 이끌었다. 최희섭은 10일 플로리다주 포트세인트루시에서 벌어진 미국 프로야구 뉴욕 메츠와의 시범경기에 1루수 겸 4번타자로 선발 출장,0-1로 뒤진 6회 무사 2루에서 오른쪽 담장을 넘는 역전 2점포를 뿜어냈다. 이날 홈런 등 3타수 1안타 2타점 1득점을 올린 최희섭은 이로써 시범 4경기 연속 선발 출장해 15타수 3안타로 타율을 .200으로 올렸다.4경기 통산 1홈런 3타점 2득점. 또 최희섭은 전날 2루타에 이어 이날 홈런을 터뜨려 처음 4번타자로 기용한 잭 매키언 감독의 기대에도 한껏 부응,1루 주전 가능성을 높였다.지난 시즌 챔피언 플로리다는 최희섭의 홈런을 발판 삼아 9-3으로 승리,5연승을 내달렸다. 최희섭은 “감독이 최근 부진한 나를 믿고 밀어줬기 때문에 좋은 타격을 할 수 있었다.”면서 “새 팀에서 첫 4번타자로 첫 홈런을 날려 의미가 큰 데다 바뀐 스윙폼이 조금씩 몸에 익어가면서 타격감이 상승세에 있다.”며 만족해했다. 최희섭은 이날 2회 첫 타석에서 상대 선발 좌완 알 라이터의 공을 때렸지만 방망이가 부러지면서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고,4회에는 아쉽게 삼진을 당했다. 그러나 0-1로 끌려가던 6회 미겔 카브레라가 2루타를 치고 나간 뒤 타석에 들어선 최희섭은 메츠의 세 번째 투수인 좌완 페드로 펠리시아노의 몸쪽으로 파고드는 직구를 통타,120m짜리 2점 홈런으로 단숨에 승부를 뒤집었다. 최희섭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활약이 돋보였다.2회와 4회 각각 멋진 병살플레이에 동참한 최희섭은 4회 빅토르 디아스의 파울성 타구를 불펜 근처 철망까지 쫓아간 뒤 잡아내 박수를 받았다.최희섭은 7회 수비때 래리 수튼과 교체됐고,11일 주피터에서 열리는 LA 다저스와의 경기에 출장할 예정이다. 한편 서재응(뉴욕 메츠)과 김병현(보스턴 레드삭스) 등 코리안 빅리거들이 지난 7일에 이어 11일 대거 나서며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는 12일 배리 본즈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에 시범 두 번째 등판한다. 최병규기자 cbk91065@˝
  • [V-Tour 2004] 상무 역시 불사조

    ‘불사조’ 상무가 ‘꼴찌’ 한국전력에 첫 플레이오프 탈락의 쓴잔을 안겼다.상무는 9일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벌어진 배구 V-투어 6차대회 B조 경기에서 한전을 3-0(25-16 25-20 25-19)으로 완파,지난 4·5차대회에서 당한 연패를 설욕하며 남은 삼성화재와의 경기에 관계없이 준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남자부 6개팀 가운데 4위를 지키며 LG화재(승점 8) 한전(승점 7) 등과 사실상 한장 남은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다투고 있는 상무(승점 9)는 고비에서 1승을 챙겨 4강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승점에서 상무에 1점 뒤진 LG는 결승까지 진출하고 상무가 준결승에서 탈락하지 않는 한 플레이오프 티켓을 놓치게 된다. 지난 3차(인천)대회 이후 첫 출전한 신경수(12점)가 가세한 상무는 초반부터 한전의 코트를 휘저었다.김기성(16점)과 박석윤(13점)이 좌우에서 맹폭하고 5개의 블로킹까지 쏟아내며 한때 9점차까지 점수를 벌리는 등 쉽게 1세트를 따냈다.기세가 오른 상무는 2세트 초반 이병희(19점)를 앞세운 한전에 잠시 끌려갔지만 신경수의 한뼘 높은 블로킹으로 13-13 동점을 만든 뒤 박석윤과 이인석(9점)이 다시 한 세트를 보태고,마지막 세트 신경수의 타점 높은 마무리 공격으로 낙승했다. 최병규기자 cbk91065@˝
  • 50여년만에 돌아온 국군포로

    6·25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다가 지난해 말 중국으로 탈출한 국군포로 김기종(72)씨가 4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50여년 만에 고향땅을 밟았다. 김씨는 이날 오후 1시45분(이하 한국시간)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중국 지린성 옌지공항을 출발,오후 3시54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김씨는 지난해 12월 초 중국으로 탈출했지만 올 1월초 옌지의 한 민가에서 형기상(75)씨 등 남한에서 건너간 가족들을 만나다 중국 공안에 체포돼 50여일 동안 억류돼 있었다. 160㎝도 안돼 보이는 단구에 깡마른 체격의 김씨는 공항 도착 후 “늘 고향에 오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뜻밖의 일에 감사하고 기쁘다.”며 “드디어 소원이 이뤄졌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씨는 수도사단 출신으로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입대,이듬해 7월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포로가 됐으며 같은 해 6월 사망처리돼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이화현대시연구회 ‘행복한 시인의 사회‘

    빼어난 시들이 쏟아지고 사랑받았던 때문일까.흔히 지난 80년대는 ‘시의 시대’로 평가받는다.신군부 세력의 등장과 ‘광주 항쟁’,노동해방을 향한 열기,중산층 가두 시위로 이어지는 역동 상황은 현상 너머의 시대 본질을 꿰뚫는 시인의 본능을 자극했을 것이다.물론 시인들의 ‘노래 방식’은 달랐다.변혁에 대한 직접 화법,알레고리와 상징으로 호흡 가다듬기 등 다양한 ‘시적 몸짓’이 그것이다. 이화현대시연구회가 펴낸 ‘행복한 시인의 사회’(소명출판)는 그 80년대의 시를 본격 분석한다.이화여대에서 현대시를 전공한 저자들은 일단 3가지 주제로 나눈다. 1부 ‘해체와 실험’에서는 오규원·이성복·김혜순·황지우의 시를 들여다본다.이들은 시의 전통적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는 데 주력했다.그들은 “타락한 현실에서 더 이상 기존의 시적 규범으로는 세계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광고 언어 등을 차용하면서 새로운 형식과 방법론으로 물신 숭배현상의 산업사회를 비판”(오규원)하거나 “근대의 외상인 광주의 흔적이 새겨져 있고,그 죽음의 시간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파괴의 열정”(황지우)에 몰두한다. 이들이 형식 파괴를 통해 자본주의의 물신성과 지배 권력의 야만성을 폭로했다면, 2부 ‘민중과 서정’에 나오는 시인들의 노래는 더 적극적이다.연구자들은 고정희에게서 “부정과 불의의 현실에 침묵하는 신 대신에 새로운 신의 모습을 찾으며 현실과 대결한 치열한 시정신”(고정희)을 살피거나 노동 해방을 통한 인간해방에의 염원을 노래한 박노해에 주목한다.혹은 “슬픔으로 총칭되는 현실에 더 절실하게 몸을 담그고 슬픔의 뿌리를 만지는 서정성”(정호승)이나 떠낢의 정서(곽재구)를 노래한다. 3부 ‘일상과 문명’에서는 90년대와 21세기의 단초를 보인 일상시의 시인들을 살펴본다.“광주 민주화 항쟁이 가져온 내면적 고통과 죽음의식을 양산하는 사회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의 구체적 현상들에 대한 본능적 추구”를 통해 ‘자연’의 세계로 향한 정현종의 시,“굵직한/의무의/간섭의/통제의/밧줄에 끌려다니는 무거운 발걸음./기차가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터널 속처럼 불안한 시대”로 80년대를 읽고 상징과 은유의 알레고리적 수법으로 탈출을 시도한 최승호의 세계를 설명한다. 저자들이 ‘시의 황금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복고적이지 않다.주체적인 근대 지향성이 도드라진 80년대에 제기된 과제와 물음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데 인식의 뿌리가 닿아있다.김현자 교수의 문답은 이를 절실하게 보여준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후기 자본주의적 메커니즘 속에서(…)문학은 상품화 되고 상품성이 문학적 척도가 되기도 하는 상황 속에서,저 기억 속에 묻힌 80년대 문학을 불러내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문학사란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재구성되어야 하고,과거란 현재로 소환되어 끝없이 현재를 변혁시켜야 한다.” 이종수기자 vielee@˝
  • [씨줄날줄]아이티 政變/이기동논설위원

    아프리카 중서부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서 여객선을 타고 30분 나가면 그리 크지 않은 고레섬에 도착한다.좁은 골목길을 따라 10분을 걸어가면 나타나는 ‘노예의 집’.16세기부터 아프리카 전역에서 노예사냥꾼들에게 잡혀온 흑인들이 신대륙으로 실려가기 전 집결지였다.선착장으로 난 장방형의 문은 그들이 자유와의 영원한 이별을 고하던 ‘돌아오지 않는 문’.300여년에 걸쳐 이렇게 끌려간 흑인이 2000만명.그중 600만명은 도중에 대서양의 상어밥이 됐으니 이보다 더 추악한 인류의 역사가 또 있을까. 아이티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이라며 첫발을 내디딘 곳.이후 ‘노예의 집’을 나서 끌려간 아프리카 노예들이 천신만고 끝에 세운 나라이기도 하다.아이티,브라질,쿠바,자메이카 등 카리브해 일대의 사탕수수 식민지를 새로 찾은 유럽 정복자들은 수백만명의 노동력이 새로 필요했고 이를 아프리카 노예들로 충당했다.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가 앞장섰다.그러나 독립심 강한 아이티 노예들은 백인지배에 끊임없이 반발,1804년 1월 이곳에 세계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 독립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무자비한 독재,남녀 평균수명 50세 미만,연간 1인당 국민소득 480달러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그동안 이들이 걸어온 독립의 역사는 처절하다.이번에 물러나 망명길에 오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아이티 역사상 최초로 합법적 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된 인물.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는 국민들을 상대로 ‘마음에 평화,배(腹)에도 평화’를 구호로 내걸어 한때는 열광적 지지를 받던 가톨릭 사제였다.‘파파 독’‘베이비 독’으로 불리던 뒤발리에 부자의 수십년 학정에 시달린 시민들은 그가 당선된 날 수도 포르토프랭스 거리로 몰려나와 환호했다. 이미 30번이 넘는 쿠데타 기록을 보유한 아이티는 이번 그의 축출로 안타까운 기록 한번을 더 추가한 셈이 됐다.1994년 쿠데타가 일어나자 해병대를 보내 그를 구했던 미국도 이번에는 그를 구하지 못했다.정치적 무능함에 겹친 독선적인 성격에 등돌린 민심을 이웃 나라가 어떻게 해볼 수는 없는 일.무정부상태로 빠진 치안을 바로잡기 위해 미군과 과거 ‘주인 나라’군대로 구성된 다국적군이 진주하게 됐으니 안타까운 일이다.하루빨리 이 나라가 최초의 노예 독립국 이름에 걸맞은 나라를 갖게 되도록 바랄 뿐이다. 이기동논설위원 yeekd@˝
  • [기고] ‘친일 규명법’ 왜 머뭇거리나/박유철 전 독립기념관 관장

    3·1절 85돌을 맞은 지금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할 일은,과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라기보다 광복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 잘못된 과거사에 책임을 물은 일도,물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당시 일제에 빌붙었던 당사자들에 대한 처벌은 고사하고,그들 스스로가 반성도 사죄도 없고,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오만과 뻔뻔스러움을 대물림까지 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우리나라 꼴이 이 모양이니 잘못된 한·일 관계의 과거사야 들춰내 무엇하겠는가.친일파가 득세하는 세태에서 과거사가 청산될 리 없다.이 과거사를 정리하지 않고 어찌 이 나라에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겠는가.과거사를 반드시 정리하고 청산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과거의 채권·채무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어찌 새로운 거래가 이루어지겠는가. 일본이 툭하면 제기하는 식민지 시혜론과 신사참배,교과서 왜곡 등의 행위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한·일 관계와 비슷한 독·불 관계를 보면 독일의 적극적인 사죄와 반성으로 과거사를 깨끗하게 청산해 어느때보다 원만한 관계가 정립되었다.프랑스는 종전 60년이 가까운 지금도 나치 부역행위를 가차없이 처벌한다.부역행위를 숨기고 경찰국장과 장관까지 지낸 자가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끌려나와 10년 징역형을 받은 기사를 보았다.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 사회가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역사에 대해 경외심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사회적 환경이다.역사에 대해 경외심이 없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나치 부역자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오늘날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프랑스에서는 진정한 과거 청산이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 국가의 진로를 바르게 설정하고,건전하고 정의가 살아 있는 국가로 국제사회에서 떳떳하게 행세하고 있지 않는가. 16대 국회에서 과거청산 관련 4대 법안의 발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역사의 진보를 확인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비록 불법 정치자금 수사에 묻혀 일반은 물론 언론에서조차 큰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이 법안이야말로 엄청난 역사의 변화요,사회환경의 변화였다.그런데 이 4대 법안 중 친일관련법과 6·25 전쟁 휴전 이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이른바 6·25 통합 특별법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이로써 제16대 국회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란 수치보다 더 부끄러운 모습을 민족과 역사 앞에 노출한 것이다. 더구나 친일규명 관련법은 국회 법사위에서 당초 법안에 수정을 거듭하여 친일행위의 죄상을 규명하고 단죄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있으나마나 한 법으로 변질되고 말았다.그것조차 본회의 상정이 보류된다니 민족정기와 사회정의가 통째로 사라지는 느낌이다.그런다고 친일행위를 한 그들의 과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결국 이를 계속 감춰 국민을 기만하고 역사를 경시하는 행위는 그 자신들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친일행위자들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대한 심판을 면했을는지 모르나 용서받을 기회까지 잃은 셈이다.우리는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또 한번 꺾이게 되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화합은 철저한 과거 청산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항일했던 사람,친일했던 사람,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던 사람들 사이에 맺혀 있는 갈등,…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안목으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지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밝힌 것은 전적으로 옳다.국회의원들은 역사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그래야 16대 국회도 살고 우리 민족도 자존심을 찾게 될 것이다. 박유철 전 독립기념관 관장˝
  • 유관순열사 지하독방 첫 공개… 6개월 고문받다 순국

    “이렇게 좁고 험한 곳에서 한국 여성들이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니….일본인으로서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제85주년 3·1절을 맞아 일반에 첫 공개된 서울 독립공원내 옛 서대문형무소 여성전용 지하감옥을 찾은 시민과 외국인 등 3만5000여명은 참혹한 현장에 말을 잇지 못했다.유관순 열사가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 여성 옥사의 투옥자들과 함께 옥중 시위를 벌이다 격리 투옥된 이 감옥은 높이 1.4m에 가로,세로 각 1m의 독방 4개로 이뤄져 있다.유 열사는 그해 9월 28일 숨지기까지 6개월 남짓 좁고 음습한 지하감옥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았고,또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시민·외국인 3만5000여명 발길 일본인 모리시타 히로무(73)와 후미즈코 소라(73·여)는 “가해자인 일본은 한국에 강력하게 사죄하게 해야 한다.”고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히로시마 원폭피해자들의 모임인 ‘월드 프렌드쉽 센터’ 소속인 이들은 지난달 27일 한·일 평화교육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뒤 천안 독립기념관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쉼터인 ‘나눔의 집’을 방문한데 이어 지하감옥 공개 소식을 듣고 이곳을 찾았다. 지하감옥을 살펴보던 이들은 “뭐라고 할 수 없이 비참하고 가슴이 아프다.”고 가슴을 쳤다.이어 “‘일본 제국주의가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동안 이야기도 듣고 역사도 배웠지만 이렇게까지 한 줄 몰랐다가 현장을 보니 더욱 반성의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이들은 2시간 남짓 감옥과 고문실을 꼼꼼하게 돌아보면서 안내인의 설명을 일일이 받아 적었다.유 열사가 숨진 감옥을 살펴보던 모리시타는 “국가를 떠나서 피압박과 가해는 인간에게 일어나서는 절대 안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면서 “피해자들에게 개인적으로라도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후미즈코는 “원폭이 떨어졌던 히로시마 평화박물관과 서대문형무소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평화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영어학원 강사인 영국인 마크 브라이언트(29)는 “어떻게 저렇게 작은 방에서 생활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아주 끔찍하다.”면서 “역사적으로 늘 영국도 침략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고 밝혔다. ●수감복 입고 감옥 체험 관람객들은 직접 수감복을 입고 감옥을 체험하는 행사에 참여,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손기화(84·서울 은평구 불광동)씨는 “예전에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압박하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면서 “유 열사와 독립운동가들이 좁은 공간에서 고통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김성지(9·초등학교 3년)군은 “감옥에 들어가보니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고 애국지사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노대통령 日총리 비난 발언 ‘후련’ 이날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를 통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강행을 비판한 것에 대해 형무소를 찾은 시민들은 대체로 ‘속이 시원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해방 전 일본 오사카에 있는 토요타 조립공장에서 13년 동안 일하다 징병돼 동남아시아 전역에 끌려 다녔다는 박성천(86)씨는 “아주 후련하다.”면서 “사실 이제까지 제대로 목소리를 낸 대통령이 어디 있느냐.”고 주장했다.두 아들과 함께 이 곳을 찾은 김창범(40·인천시 중구 운서동)씨는 “대통령으로서 당연한 말을 한 것”이라면서 “특히 3·1절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소식을 들으니 더욱 반갑다.”고 말했다. 장택동 이재훈기자 taecks@˝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8)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하)

    문:중국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徐:당시 청나라는 계속된 전쟁으로 만주족의 인구가 크게 감소되었지요.대부분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살다 보니 농사 지을 일손이 부족하여 토지가 황폐해졌지요.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기만큼이나 양식이 필요했는데,그 농사를 짓기 위해 포로가 필요했지요. 그 포로들을 농장 노예로 만들어 중노동을 시켰는데,조선인들은 주로 심양 부근인 동주보(東州保),둔소(屯所),안산(鞍山),흥경,청룡,풍윤(豊閏) 지역에 집중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조선인 노예들은 뒷날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徐:민족동화 과정을 거쳐 만주적(滿洲籍)에 편입되어 귀화인이 되었는데,만주씨족통보(滿洲氏族通譜)에 올라 만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청나라 포로가 된 조선인은 모두 노예가 되었을까요? 徐:소수지만 군인,지도층에 편입된 흔적도 있지만 대개는 농장노예,만주족 귀족의 노비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조선인 포로를 분산시키거나 나누어 가졌다는 말인데,혹 인신매매도 있었을까요? 徐:‘심관록’에 그런 기록이 남아 있어요.이 문헌은 심양으로 끌려 온 조선의 두 왕자가 청나라 군인들에게 포위된 채 살았던 처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조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었거나 포로 가족이 돈을 가져 와서 주고 데려가는 속환(贖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문:노예라면 상품으로 매매,양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고대 오리엔트,고대 그리스·로마,식민지시대 아메리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지요.노예무역선,노예사냥,미국의 흑인노예라는 말이 그 증거지요.그런데 조선인 전쟁포로가 노예로 매매되었으며,그들이 조선족의 원류이고,오늘날 한국에 노동자로 와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 속에 그런 비극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퍽 충격적인 일입니다. 徐:심관록 기록을 그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포로가 된 사람들을 매매하려고 모여들었다.성문 밖에는 포로가 된 남녀 수만 명이 있었다.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상봉하였거나 형제끼리 서로 만나 끌어 안고 통곡하는 데 울음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잡혀간 사람을 돈을 주고 찾아가기 위하여 날마다 성문 밖에 모였다.포로가 되어 있는 자의 부모나 아내 또는 자식들이 와서 얼마면 데려갈 수 있겠느냐고 가격을 흥정하는데,값이 비싼 경우는 백냥 또는 천냥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값이 너무 높아 어이없어 통곡하면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데리러 올 친척이 없어 홀로 있는 사람은 세자(世子) 관소(館所)에 찾아와서 속환시켜 달라고 울고 있으니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문:세자라면 누구를 말합니까? 徐:조선 인조대왕의 큰아들 이조(소현세자),둘째아들 이호(봉림대군,효종)입니다.병자호란 때 치욕적인 패배를 한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데려왔거든요.노예로 매매당할 가혹한 운명에 놓여진 조선인들이 왕자들의 처소 울타리 밖에서 살려 달라고 호소했지요.두 왕자는 노예로 팔려가는 조선인들의 절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도움도 못주는 자신들의 처지를 아파하면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오늘날 중국 조선족 역사에는 이같은 노예 역사의 슬픔이 숨겨져 있습니다. 문:그렇다면 조선인의 중국 이민사를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여기는 견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徐:18세기 후반 이전에 중국으로 온 조선인들 대부분이 중국으로 귀화해 버렸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부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문:귀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徐: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만주족이 급격하게 감소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인구를 증가시키고,군인이 될 인원을 보충하며,노예 농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런 나머지 만주인 호적에 편입될 사람을 모집하는 정책을 발표하며,편입자 숫자대로 상을 주는 제도가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초기에는 조선인들에게 강압적으로 귀화를 시켰지요.그런 연후에 조선인들은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스스로 귀화하고 만주호적자 모집에 순응하는 자연적 귀화과정을 밟았지요. 헤이룽장조선민족이란 문헌에는 청나라 초기에 만주적에 가입한 조선인의 성씨가 42개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이들의 선조는 대부분 천총(天聰) 연간인 1627∼1635년에 청나라로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문:그러니까 17세기 초·중엽에 이미 조선인들은 국적을 바꾸어 청나라 사람이 되고 만주 씨족에 올라 만주인이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徐:설혹 그런 식으로 귀화를 하지 않고 버틴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조선인이 다른 민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고,이같은 통혼을 기초로 하여 혈연관계와 친척관계를 맺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민족에게 겹겹으로 포위되어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 조선족의 처지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북성 청룡현 박씨(朴氏) 조선족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이 박씨들의 조상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 중국으로 왔는데 동성동본 불혼 제도를 대대로 이어받았다 합니다. 문:한족,몽골족,만주족으로 국적을 바꾼 사람들은 그 뒤로 조선족으로의 회복이 영영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徐:아닙니다.심리적으로는 자신들이 조선인이라는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게 존속되어 왔습니다.그러다가 1982년부터 조선족으로 고쳐서 조상이 남겨 둔 민족성을 회복한 사람이 많습니다. 조선 말에서 20세기 일제 때 중국으로 와서 조선족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조선은 아직도 그리운 고향입니다.참,마음이 아픕니다. 문:일제 때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 중에서도 해방 후 고향으로 가지 못한 채 조선족이 된 사람도 있습니까? 徐:아주 많습니다.우리 민족을 갈라 놓은 것은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일왕(日王)정권이었지요.한반도의 남과 북은 통일이 되면 그날로 하나가 되겠지만 중국 조선족은 다르겠지요.그러니 일제의 식민통치는 중국 조선족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원한의 상처지요. 문: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인 카레이츠들의 삶을 둘러 볼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의 지방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 같은 도시의 장마당이라 부르는 난전에서 조선족 장사꾼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그들은 국경의 세관에서 비자를 받고 러시아로 오는데,주로 옷장사를 하더군요.하지만 한달간씩 머물며 장사를 해도 체재비를 빼면 남는 것이 없거나 손해를 보기 십상이라 했습니다.그런 그들이 한결같이 꿈꾸는 것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만,요즘 한국에 온 조선족들의 처지가 참 어렵습니다. 러시아의 카레이츠들보다 중국의 조선족 운명이 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둘 다 우리 민족이 안고 사는 슬픔의 뿌리인데…. 徐:한국이 잘 살게 되어야 합니다.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잘 살게 되어야만 이 아픔의 역사가 통한과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조선족,러시아의 카레이츠,일본의 조센징은 모두 350만명 정도라고 한다.이들의 삶을 생각하기 위하여 ‘동북아평화연대’등의 모임이 생겨나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조선족,고려인들은 사는 데 어려움이 크다. 그 어려움의 한 원인이 일본의 식민통치가 저지른 잘못이며,식민통치가 옳았다는 발언을 하는 일본의 정치지도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친일파 지식인들이 숭배되기도 한다.˝
  • MBC 3·1절 다큐 ‘조선사기장‘

    일본은 왜 조선의 도공들을 끌고 가지 못해 안달이 났던 걸까.또 끌려간 도공들은 일본의 도자기 문화에 어떤 기여를 했으며,지금의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되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MBC는 1일 오전 11시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조선사기장과 도자기전쟁’을 방영한다.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의 도공들과 그 후손을 찾아 이들이 현지에서 일궈낸 세계 최고의 도자기 문화를 살펴본다.또 상대적으로 침체된 한국 도자기 문화와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들을 집중 조명한다.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솜씨를 자랑한 우리의 도자기는 수백년에 걸쳐 일본으로 유입됐다.일본 전국시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다이묘(大名·독립 영지를 소유한 영주)들은 다도(茶道)의 발전과 더불어 차를 담는 그릇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특히 조선에서 건너간 막사발을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 이름 짓고 가보로 모실 정도였다.조선의 도자기에 심취한 일본은 우수한 다기를 만드는 한국 도공을 원하게 됐고,결국 이것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여러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다이묘 밑에서 노역을 하면서 규슈의 6대 가마를 열었고,일본을 도자기 강국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제작진은 경남 사천이 고향인 사기장 존계(尊階)가 호소카와 산사이 영주 밑에서 열어놓은 아가노(上野)가마 등 세 개의 가마를 취재,이들 가마가 일본 도자기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보여준다.또 존계의 11대 직계 후손이자 일본 도자기계의 거목인 아가노 사이스케(82)씨를 통해 아직도 남아 있는 조선 도자기의 예술혼과,아직 끝나지 않은 한·일 양국간의 도자기 전쟁도 소개한다. 이영표기자 tom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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