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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시대]쌍방향 대인관계의 리더십/최정아 새로움닷컴 인터내셔널 대표

    [글로벌 시대]쌍방향 대인관계의 리더십/최정아 새로움닷컴 인터내셔널 대표

    외국계 금융회사에 다니는 박모(39) 부장은 요즘 만날 때마다 부하직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어떻게 관리를 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하소연을 털어놓는다. 업무 지시를 할 때마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꼬치꼬치 따지는 것은 다반사이고, 상사로서 이미 내린 결정에도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힘든 것은 회의할 때 상사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CEO나 임원들을 만나 보면 회사 업무 자체보다도 직원들 눈치 보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사회 전 분야에서 관리자의 권위는 더 이상 설 곳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21세기의 가장 큰 트렌드가 탈권위주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변화 또한 거스르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다른 형태의 리더십을 발휘해 나갈 궁리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예전에는 강한 리더십을 가진 CEO나 관리자가 많았는데 점점 관리자의 리더십이 약해지고 있는가. 즉 리더십이 강한 관리자들이 회사를 떠나서가 아니라 기존의 관리자가 발휘하고 있는 리더십의 유형들, 즉 본인의 직위에서 얻는 권위를 이용해 자연스레 직원들에게 나를 무조건 따르라고 하는 권위적 리더십, 혹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하는 속담처럼 물리적인 힘이나 권력을 작용하여 남을 이끌어 가장 신속하게 결과를 이끌어내는 강압적 리더십이나 또는 ‘사탕 줄 테니 심부름 좀 해라.’ 식의 경제적 보상만을 가지고 조직을 이끌려는 실리적 리더십 등이 더 이상 예전처럼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IMF 이후로 경영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인재의 유형과 성향도 달라지면서 조직이 변화하고 있다면 그에 따라 관리자의 리더십도 변해야 한다. 피터 드러커도 ‘미래경영’에서 지식시대에서는 기업 내에서 상사와 부하의 구분도 없어지며, 지시와 감독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지금 지식시대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시대 관리자들은 어떤 유형의 리더십을 보여야 할까. 요즘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즉 대인관계 리더십이다. 지시나 통보 등의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는 쌍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려면 우선 관리자가 마음을 열고 직원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고 관리자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자신의 생각이 항상 옳다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한다. 모든 대화의 단절은 자신과 유형이 다른 사람을 틀렸다고 규정하는 오만과 독선에서 시작된다. 실제로도 머리가 좋거나 업무수행 능력이 좋은 직원일수록 그런 고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해 좋은 관리자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각자의 전문분야가 다르고 경험이 다른 환경에서 관리자의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귀를 열게 되고 오픈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다. 이제는 리더가 부하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부하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기존의 리더십 패러다임에서 항상 대화와 설득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부하들을 위해서 헌신하며 부하들의 리더십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즉 이제 리더는 스스로를 밝히기보다는 부하직원들이 빛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밝혀주는 등대 같은 존재인 것이다. 기업의 성패와 조직의 발전은 관리자의 리더십 역량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1세기 치열한 글로벌 경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관리자에게 업무능력과 추진력 외에 달라진 현실에 맞는 변화된 리더십을 교육, 훈련시키고, 충분한 역량을 지닌 리더들을 많이 발굴해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최정아 새로움닷컴 인터내셔널 대표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1) 애완견과 개장국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1) 애완견과 개장국

    개가 나오는 풍속화는 여럿이 있다. 그런데 개가 주인공이 된 경우는 드물다. 그림(1)과 (2)는 확실히 생활 현실 속에서의 개를 그렸다는 점에서 여느 개 그림과는 다르다. 그림(1)은 신광현의 ‘강아지와 놀기’다. 어린아이가 앞서 달리며 강아지를 부르고 강아지는 열심히 쫓아간다. 이처럼 어린이가 좋아하는, 어린이와 어울려 노는 강아지는 애완견이다. 하지만 김준근의 ‘개백정’(그림2)을 보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사내, 곧 개백정이 개를 끌고 있고 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앞발로 줄을 잡아당기고 있다. 불쌍한 생각이 왈칵 든다. 이 경우 개는 개장국의 재료일 뿐이다. 애완견과 식용견의 구분은 있지만, 그 선은 명확하지 않다. 인간의 태도에 따라 애완견이 식용견이 되기도 하고, 식용견이 애완견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림(1)의 애완견은 언제 그림(2)의 식용견이 될지 모른다. 애완견의 역사는 오래다. 동아시아의 정치교과서인 ‘서경’에는 개에 관한 글 한 편이 실려 있다.‘여오’라는 글이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장악하자 사방에서 공물을 바친다.‘여족’이 보낸 것은 큰 개(‘오’는 개란 뜻이다)였다. 여족이 바친 개는 식용이 아니고, 애완의 대상이었음은 물론이다. 여족의 개를 보고 소공이 무왕에게 이렇게 충고한다.“개와 말은 지금 이곳의 풍토에 맞지 않으면 기르지 마시고,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왕이 애완동물에 빠져서 국정을 게을리 하고 또 이런 것들을 구하느라 백성을 괴롭힐까 하여 하는 소리다. 어쨌거나 ‘여오’를 보면 애완견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시장에서도 개장국 많이 팔아 조선시대 문헌에 애완견의 존재를 찾기란 어렵다. 다만 연암 박지원의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쓴 글’에서 개를 ‘애완’하는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어느 여름 날 밤 박지원은 박제도(박제가의 형)·이희경·이희명·원유진·이덕무·서유린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운종가 종각 아래를 걷는다. 직접 읽어 보자. “이때 3경 4점이 벌써 지나 달빛이 더욱 훤하게 비치고, 사람 그림자는 모두 열 발이나 늘어났다. 돌아보니 오싹하여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길거리에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댄다. 큰 개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왔는데 희고 수척했다. 여럿이 둘러 앉아 쓰다듬으니, 좋아서 꼬리를 흔들고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연암은 이어서 이 개가 몽골 원산이라는 것, 말처럼 크고 사나워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 중국에 들어간 것은 작은 종자이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 작은 종자라는 것, 하지만 우리나라 개보다는 그래도 크다는 것, 중국에 간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온다는 것 등 이 개에 대한 정보를 늘어 놓는다. 재미있는 것은 개의 이름이다. 보통 이 개를 호백(胡白)이라 하고, 그 중에서 작은 종자를 ‘발발이’라고 한다는 것이다.‘발바리’란 애완견은 아마도 이 개를 지칭하는 것일 터이다. 다시 더 읽어보자. 무관(이덕무의 자)이 취하여 개에게 ‘호백(豪伯)’이란 자를 지어 주었는데,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없다. 무관이 서운하여 동쪽을 향해 서서 흡사 오래된 친구를 부르듯 ‘호백이!’ 하고 세 번을 불렀고, 일행이 한바탕 껄껄 웃었다. 그러자 길거리에 개떼가 마구 달리며 더욱 큰 소리로 짖기 시작하였다. 어떤가. 개에게 자까지 지어 주었으니, 이덕무가 개를 가장 ‘애완’했던 모양이다. 호백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애완’은 그날로 끝나고 개장국이 되지 않았을까? 이제 개장국 이야기를 해 보자. 정조 때 문헌인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의하면 개장국을 먹는 것은 복날 풍속이다.“개고기를 총백(파의 밑동)과 섞어 푹 찐다. 닭고기나 죽순을 넣으면 맛이 더욱 좋다. 이것을 ‘개장(狗醬)’이라 부른다. 혹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려 흰 쌀밥을 말아서 먹기도 한다. 이것을 먹고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충할 수 있다.” 유득공은 “‘사기’에 진(秦)나라 덕공 2년 처음으로 복날 제사를 지냈다. 사대문에서 개를 잡아 충재(蟲災)를 막았다.”고 한 것을 복날에 개를 잡아먹는 풍습의 시초로 보고 있다.‘예기-내칙’에도 개고기에는 차조가 잘 어울린다고 하고 있으니, 아마도 개는 가축이 되면서부터 식용이 되었을 것이다. 유득공의 기록에 의하면 개장은 원래 개고기를 찐 것이었고, 지금의 국을 말아 먹는 스타일과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개고기를 푹 찐다.”는 부분의 원문은 ‘훈증(燻蒸)’이다. 찐다는 의미의 ‘증(蒸)’ 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다시 국을 만든다.”(又作羹)라고 하고 있으니, 원래 개장은 찌는 요리였던 것이다. 순조 때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도 개장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경도잡지’의 것과 동일하다. 다만 “시장에서도 많이 판다.”는 부분만 추가되어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개장국은 조선후기 시장에서도 많이 파는 음식이었던 모양이다.‘개백정’ 그림 역시 영업용 개장국을 끓이기 위해 개장수가 개를 끌고 가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서울 시내에 개장국을 파는 집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정조실록’ 1년(1777)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던 일당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개장국 이야기가 나온다. 정흥문이란 자의 자술서에 “7월 28일에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서 강용휘와 제가 개장국을 사 먹은 뒤 같이 대궐로 들어갔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곧 서울에 개장국을 상시적으로 파는 가게가 있었던 것이다. ●손꼽히는 개고기 마니아는 중종때 권신 김안로 개고기는 서울 시내에서 팔기까지 한 전통 식품이지만, 개고기는 먹는 사람, 안 먹거나 못 먹거나, 먹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뚜렷이 갈린다. 근대 이후에 와서 분화된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에도 그랬다.19세기 문헌인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실린 ‘정승이 개장국을 즐겨 먹은 일’이란 글에는 북경에 가서까지 개고기를 삶아 대령하라고 해서 먹은 심상규와 남의 집 잔치에 나온 개장국을 보고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이 아니라며 먹지 않았던 이종성의 일화가 나란히 소개되어 있다. 개고기 마니아와 개고기를 혐오식품으로 보는 시각은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개고기 마니아를 꼽자면 중종 때 권신 김안로가 있다. 이팽수란 자는 김안로의 비위를 맞추느라 봉상시 참봉이 되자, 크고 살진 개를 골라 사다가 요리해 김안로에게 올렸고, 김안로는 이팽수의 개고기 구이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팽수는 그 공으로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승정원 벼슬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청직이다. 이팽수는 개고기로 주서가 되었으므로 ‘가장주서(家獐注書)’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가장이란 ‘집노루’란 뜻인데, 개고기를 가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초복날 성균관 유생들에게 인기 있던 별미 개고기는 또 성균관 유생들에게 공급하는 별미이기도 하였다.19세기 초반의 윤기란 문인은 성균관에서 오랫동안 학생으로 있었는데, 그가 성균관의 풍속을 노래한 한시에 개고기에 관한 부분이 있다. 학생들에게 주는 특식을 ‘별미’라 하는데, 매달 1일 6일이 드는 날 아침에 대별미를 제공한다. 고직이는 그 날이 되기 전에 미리 유생들에게 물어보고 요구하는 것을 구해 올린다.3일 8일이 되는 날은 소별미날이다. 이 날은 생선을 올린다. 국을 끓이거나 구워서 올리는데 양이 적어서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그 외 명절 등의 별식이 있는 날이 있는데, 복날도 거기에 들어간다. 초복에는 개고기를 주었고, 중복에는 참외 2개, 말복에는 수박 1통을 주었다고 한다. 윤기는 초복의 개고기가 사소한 것 같지만, 중복의 참외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 국립대학에서 초복에 주는 보신탕이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개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논쟁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자리에 끼면 마지못해 수저를 들지만, 일부러 찾아다니며 먹지는 않는다. 집에 강아지를 키우고 난 뒤로 그렇다. 이제 아주 안 먹으려 한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프로야구]롯데 ‘야구는 9회부터’

    손에 땀을 쥐는 4위 싸움을 벌이는 롯데와 삼성,KIA가 나란히 연승 행진을 벌여 이들의 혈투가 갈수록 처절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롯데는 삼성과 함께 승률 5할을 찍으며 공동 4위에 올랐고,KIA는 1.5경기차로 6위를 지켰다. 롯데는 29일 잠실에서 열린 프로야구 두산과의 경기에서 연장 10회 혈투 끝에 4-3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며 2연승을 내달렸다.2위 두산은 다잡은 승리를 눈앞에서 날리며 올시즌 팀 최다와 타이인 6연패로 몰렸고,3위 한화에 1경기차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특히 롯데는 무서운 뒷심을 발휘했다.8회까지 안타 2개의 빈타에 허덕이며 0-3으로 끌려가던 9회,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1사 2,3루에서 카림 가르시아의 적시 2타점 안타에 이어 대주자 서정호가 상대 투수 저스틴 레이어의 1루 견제구가 빠진 틈을 타 3루로 내달렸고, 강민호의 희생플라이로 동점을 이뤘다.10회 1사 1,2루에선 김주찬의 역전 1타점 2루타가 터져 극적인 승리에 마침표를 찍었다. 삼성은 대구에서 선발 배영수가 5와3분의1이닝 동안 삼진 4개를 잡아내며 3안타(1홈런) 1실점으로 역투하고, 최형우가 3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의 맹타를 터뜨려 SK를 6-3으로 누르고 4연승했다. 배영수는 7승(6패)째. 삼성 마무리 오승환은 9회 2사 1루에서 나와 타자 1명을 뜬공으로 잡고 26세이브(1승1패)째를 챙기며 한화 브래드 토마스를 1개차로 제치고 이 부문 단독 1위로 나섰다.SK 선발 김광현은 3이닝 동안 4안타(1홈런) 2실점으로 부진,4패(11승)째를 안았다. KIA는 광주에서 선발 케인 토마스 데이비스가 8이닝 동안 삼진 6개를 잡아내며 1안타 무실점으로 쾌투한 덕에 LG를 5-0으로 완파,2연승했다. 데이비스는 2승(1패)째.KIA 이재주는 3-0으로 앞선 5회 말 무사 1루에서 홈런을 날려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한화는 목동에서 우리 히어로즈를 10-6으로 물리쳤다. 히어로즈 클리프 브룸바는 40일 만에 시즌 13호를, 전준호는 마수걸이 홈런을 날렸지만 팀 패배로 빛이 바랬다. 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 [집중인터뷰] 정세균 민주당 대표에게 묻다

    [집중인터뷰] 정세균 민주당 대표에게 묻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2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0년 전 사고를 오늘의 사고로 바꿔야 한다.”며 이명박 정부의 남북·외교·교육·언론 정책 기조를 전방위적으로 비판했다. 정 대표는 “사실을 국민에게 잘 전달하려면 언론이 살아 있어야 한다.”면서 “무리하게 언론을 장악하려고 기도하면 결국 불행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명박(MB)정부가 적잖은 시행 착오를 겪고 있다. 실용 외교를 표방했다가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정책 혼선도 빚고 있다. 야당 대표로서 어떻게 진단하는지, 바로잡기 위한 제언을 해달라. -정권은 유한하고 국가는 무한하다. 과거 정권들이 한 것을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되는 것도 아니고 쓸 만한 것은 챙겨놓고 잘못된 것을 갈아 끼워야지, 쓸 만한 것까지 한꺼번에 아웃시키려고 하니까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니냐. 세상이 달라지고 국민이 달라졌으니까 거기에 맞는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MB정부,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모든 분들이 10년 전 사고를 오늘의 사고로 바꾸고, 국정 철학이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구체적으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가 어떤 부분을 계승해야 하고, 어떤 부분을 고치고 버려야 하나. -‘관치 만능주의’를 버리고 국민을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남북 문제에 관련해서 냉전 시대 인식을 버려야 한다. 냉전 시대에 국력을 낭비한 것을 다시 하는 바보 천치가 어디 있나.10년,20년 전에는 자주 외교라는 말이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코리아도 ‘노(no)’ 할 수 있는 상황이 됐는데도 스스로가 상황을 옛날로 가져가고 있다. 미국과 일본에 따질 건 따져야 한다. 교육정책도 10년,20년 전으로 되돌리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경제 규모가 자꾸 커지면 수출에만 의존하는 경제는 안 되고 내수 기반이 있어야 되는 건데, 오히려 10년,20년 전의 수출 주도형 성장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려워진 것 아니냐. ▶지난 정부가 잘못한 부분, 정권을 잃은 원인에 대해 지적할 게 있다면. -여당은 전체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 된다. 야당은 자기 지지세력 중심으로 한다. 그런데 전체 국민을 상대로 잘못한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정책의 혼선 같은 게 있었다. 국민들과 소통 문제, 허물들이 많이 있었다. 일부는 언론 정책도 잘못한 게 있다고 본다. 국민 소통에서 중요한 통로가 언론인데 그게 뒤틀려서 막혀서 소통이 안 된 부분이 있다. 과거에 부족했던 것은 다 청산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외교·안보라인 인책이 필요하다고 보나. -당연하다. 내각 총사퇴를 했었는데 정말 낯이 두꺼운 분들이다. 내각 총사퇴했던 분들이 국회에 와서 답변하는 것 보면 완전히 잊어버린 거다. 떵떵거리는데 기가 막히다. 확실히 실정·책임 있는 사람이라도 빨리 정리해 줘야 한다. 경제쪽, 방송통신위원장, 경찰청장, 외교 안보라인도 다 바꿔야 한다. ▶유명환 장관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완전 실패가 아니다, 그런 지적·수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후안무치한 얘기다. ▶현실적으로 독도는 난제 중의 난제이다. 민주당이 집권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면 이것을 원상 회복할 수 있을지, 효율적인 대처 방법이 있나. -일본은 아주 잘 기획된, 장기적 음모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이) 도발하면 한번 흥분하고 끝내서야 되겠냐. 정부만 갖고는 안 된다. 시민사회나 네티즌이나 전체 국민들이 심지어 해외 동포들까지 전부 나서서 그 자리에서 전방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일본은 50년 100년 후 상황을 바꾸려는 것이다. 일본보다 더 집요하고 잘 준비된 기획된 그런 전방위적 노력을 해야 한다. ▶쇠고기 문제, 국정 조사가 증인 채택도 못하고 겉돌고 있다. 야당으로서 일정 부분 양보할 게 있다면 양보하고 또 여당의 양보를 받아내는 게 필요하다. 과감하게 양보할 부분이 있나. -신의를 지켜야 한다. 원래 이건 쇠고기 청문회 아니냐. 쇠고기 청문회를 언론 청문회로 바꾸면 되나. 그렇게 안 하기로 해놓고 언론 청문회로 둔갑 기도, 기획하는 것 아니냐. 우리가 그런 것에 말려들 사람들이 아니다. ▶참여정부 책임론 얘기를 하는데. -웃기는 거다. 아이큐가 한 자리인 것 같다. 다른 건 참여정부 것을 부정하면서 쇠고기 문제는 참여정부 (것을) 승계했나? ▶민주당이 이슈 주도력이 없다는 평가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저 사람들이 친박연대를 흡수하면서 태도가 돌변했다.170석 넘으니까 보이는 게 없는 것이다. 사고 칠 줄 알았다. 이런 자세면 또 사고가 난다. 우리는 그냥 170석에 눌려서 아무 소리 못하고 그냥 끌려갈 것이냐, 천만의 말씀이다. 한나라당의 일방 독주를 지지하는 국민이 20%밖에 안 된다. 다수결 원리만 갖고는 나머지 80% 국민의 뜻을 대변할 수 없어서, 우리는 국민과 함께할 것이다. 원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필요하면 언제든 밖에 나가 국민과 함께하고 시민사회와 연대하고, 국민을 등에 업고 한나라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제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번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대북 특사 얘기를 했다. -특사든 물밑 대화든 모든 가능한 노력을 해서 남북 대화를 복원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특사를 보내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기본적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의 남북문제 기조를 바꿔야 한다. 비핵 개방 3000이라는 기조를 유지하는 한 남북 문제는 안 풀린다. 거기에서 벗어나서 6·15공동선언을 존중하고 10·4정상회담을 인정해야 한다. 강경정책에서 벗어나 현실적으로 돌아와야 한다. ▶남북문제에 있어 여야간 가장 큰 인식차가 상호주의 문제다. -기계적 상호주의는 비현실적이라 안 된다. 개인 관계도 그렇고 국가 관계도 그렇고 모든 관계에서 상호주의가 완벽히 배제되는 관계가 있을 수 있나. 롱텀(장기적)으로 보면, 결국은 서로 작용하는 것 아니냐.5년,10년,50년이 될지 모르지만 롱텀으로 보면 상호적으로 작용하니까 민족문제를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여야정 원탁회의를 제안했는데 한나라당은 박희태 대표 등이 청와대는 빼는 게 좋다고 한다. -청와대를 뺀다면 국회에서 하지 뭐하러 원탁회의를 하나. 청와대가 없으면 안 된다. ▶부드러운 온건 이미지를 갖고 있다. 거여에 맞서는 강력한 야당 지도자 리더십에서 부족하다는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이 사람을 만들지 않나. 한나라당이 잘해주면 그냥 그렇게 점잖고 소프트하게 남아 있을 것이고, 우리가 강경하고 투쟁적인 역량을 갖추지 않으면 국민 뜻을 받들 수 없는 상황으로 한나라당에서 몰고가면 거기에 맞게 투사로 변신할 수밖에 없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나는 수비수였다. 공을 서서 막는 자세와 골을 넣기 위해 달려가는 자세는 완전히 다르지 않겠나. ▶개헌에 대한 의견은. -지금 타이밍이 적절치 않다. 국가적으로 난리인데 한가하게 개헌할 때가 아니다. 원 구성도 못하고 있으면서 무슨 개헌이냐. 국회 구성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이에 대한 보정장치가 없으면 안 된다. 정치권이 개헌문제를 먼저 들고 나가면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학계·시민사회·언론에서 잘해서 끌고 나가면 정당은 조용하게, 스스로 연구만 하고 있으면 된다고 본다. 국민적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정리되면, 그 뜻을 받들어 정치권이 해결하면 된다.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 달라. -대기업은 귀찮게 안 하면 된다. 세계 무대에서 자유롭게 경쟁하고 국내에서 자유롭게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다르다. 중소기업·대기업이 상생협력되게 해야 한다. 협력업체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다. 대기업은 그래도 지금 견딜 만하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오늘 내일 하는 기업이 한두 개가 아니다. ▶최고위원 지명직 인선이 지연되고 있다. 추미애 의원은 고려 대상이 아닌가. -영남 대표가 우리 당에 없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영남 지역에서 구하겠다, 다음 지방 선거에 나설 사람이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으로 물색하고 있다. 추미애 의원은 대표 경선을 했는데 지명직 최고위원은 적절한 예우가 아니라고 본다. 대선 후보군, 스타 5∼7명 양성하는 ‘스타프로젝트’가 있다. 거기에 참여하는 게 좋겠다. ▶스타군에 정 대표도 포함되나.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원이나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정리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의용수비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독도 의용수비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

    무엇이 연약한 여인의 마음을 이토록 ‘단디’ 묶었을까. 지난 55년 동안 오로지 ‘독도’라는 두 단어로 다부지게 살아왔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모든 정신과 생각, 추억이 여전히 ‘독도’로 모아진다. 박영희(74) 여사. 학창시절 ‘선생님’이 꿈이었던 그는 열아홉 나이에 당시 울릉도에 사는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만나 결혼하면서 독도지킴이로 나섰다. 할아버지(홍재현)-아버지(종욱)-손자(순칠) 등으로 이어지는 3대째 독도지킴이 집안에 시집을 왔으니 그야말로 ‘독도는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1953년 4월 남편이 동료 33명 등과 함께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자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담당하는 후방 병참대원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애국심이 투철한 ‘여전사’로 변했다. 뿐만 아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고(故) 홍 전 대장의 조카와 딸 등이 독도연구원과 독도지킴이로 활동하고 있으니 4대째 그 집안내력을 잇고 있다. 독도에 대한 박 여사의 내조와 정신무장이 어떠한지 새삼 짐작이 간다. 지난주 경북 울릉군청으로 전화를 걸었다.“아, 예 홍 대장의 미망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박 여사의 연락처를 아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울러 홍 전 대장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들 10여명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도 전해들었다. 경기도 구리시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박 여사를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였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목소리까지 우렁찼다. 소파 뒤쪽 벽에 걸린 ‘독도사랑 대한의 얼’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폈더니 ‘고 홍순칠 선생님의 독도사랑을 기리며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뜻에 따라 이천육년봄 아무개 삼가씀’이라는 작은 글씨도 보였다. 그는 “2년 전 손 지사가 직접 들고 왔다.”고 귀띔했다. 독도 사진도 바로 옆에 있었다. 남편이 생전에 쓴 육필원고와 독도의용수비대 사진집을 펼친다.20여년 전 남편을 여의고 비록 혼자 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50년 전부터 우리가 정부에 수차례 건의했던 내용들을 이제 와서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거 아닙니까.”하면서 볼멘소리를 높인다.1969년 당시 청와대에 건의했던 독도개발계획서를 직접 보여준다.‘어민 20가구 거주, 동도∼서도 매립, 어항구축, 냉동 및 제빙시설 등을 갖추게 해달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면서 “시할아버지는 평소 ‘천지신명이시여, 이 섬은 하늘이 주신 우리의 땅이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포의 생활의 터전이기에 우리 동포가 아끼고, 또 지켜나갑니다. 오늘도 30여명의 우리 동포는 돌섬의 수호신으로 이 섬을 지키고자 합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회고했다. 대를 이어 독도지킴이로 평생을 살게 했던 철학으로 가슴에 새겼다. ▶가족들은 어디에 살고 있나요. -“제가 딸 셋,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딸 연숙이는 사이버 독도해양청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독도가족협의회를 발족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카는 지금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독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지요.”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제 고향은 대구입니다. 학교선생이 되려고 안동사범학교에 다닐 때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아홉살이었지요. 그런데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독도에 들어가는 바람에 과부 아닌 과부가 됐습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운명이려니 하고 남편일을 열심히 도와야지요.” 결혼할 때 4살 연상인 남편과 독도에 일생을 바치자는 언약도 했단다. 이후 남편은 독도수비대장으로 대원을 이끌면서 일본 순시선과 전투에 가담했고 박 여사는 한달에 한번씩 어선을 통해 옷과 식량보급 등을 담당하느라 달콤한 신혼사랑을 나눌 겨를이 없었다. 실제로 일본 순시선과 전투를 치렀느냐는 질문에 1954년부터 독도에 본격적으로 상주하면서 50여차례 조우를 했다고 대답했다. 또한 1954년 11월에는 일본 함정 3척을 물리친 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른바 ‘독도대첩’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생겨났다. ▶독도수비대는 어떻게 해서 조직하게 됐습니까. -“제가 결혼해서 울릉도에 갔더니 대원들 일부가 모여들고 있었어요. 아마 그때 일본 순시선이 독도에 들러 죽도(竹島·다케시마)라는 간판을 세웠나봐요. 울릉도에 사는 한 어부가 그걸 들고와 울릉군청 앞마당에 내동댕이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독도수비대를 조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지요.” ▶자금이 필요했을 텐데요. -“할아버지가 울릉도를 개척하면서 소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걸 베어서 독도에 막사를 짓고 일부는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지요. 기관총 등 무기는 주로 부산에서 구했습니다.” 당시 할아버지가 모은 재산 가운데 2000만원을 털었으며 처음에는 기후나 물공급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전마선 2척을 만들어 여러 차례 독도에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독도의용수비대는 국가가 시키기 전에 무보수로 민간인 스스로가 독도를 지켰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며 바로 한민족의 정기가 아니냐.”고 강조했다.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적도 있다던데. -“한·일협상 무렵 방송에 나가 독도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우물을 파고 나무도 심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또 북한방송에서 홍 아무개가 독도를 지키는 훌륭한 일을 했다고 떠들어대곤 했으니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지요. 고문도 당하고 그후 몸이 많이 허약해졌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뭐, 식당운영도 했고…. 남편이 몸이 안좋게 되자 울릉도에서 서울로 나와 병원엘 다녔지요. 그때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인 1985년도인가 그래요. 처음에 송파쪽에 살았는데 1997년 구리에 우연히 들렀다가 지금까지 살게 됐습니다. 생활비는 자식들한테 얻어 쓰고 그럭저럭….” ▶그동안 나라에서 받은 혜택 같은 것은 없었나요. -“박정희 정권 때 여러 차례 건의를 했더니 대원 11명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주더군요.1996년 딸이 대통령에게 청원을 해서 33명 전원이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얼마전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국가유공자가 됐지요. 남편은 대원과 가족에게 죄책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고생만 잔뜩 시키고…. 돌아가시면서 대원들이 꼭 국가 유공자가 돼야 한다고 유언했지요.”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팔순 다 된 나이에 뭘 하겠느냐.”며 남편이 남긴 것 중 책 한권 분량의 독도 관련 원고가 있어 이를 출간할 생각이라고 했다. 아울러 “정부의 지시도 없이 스스로 독도를 지키고자 했던 독도수비대원들의 활동을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4년 대구 출생 ▲51년 안동사범학교 강서과 1년 수료(준교사 자격증) ▲52년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과 결혼, 울릉도 거주 ▲53년 독도의용수비대 후방지원대 역할을 맡아 56년 12월까지 병참지원 활동 ▲61년 울릉도 사동초등학교 교사 ▲68년 울릉도에서 음식점경영 ▲69년 독도개발계획 등을 정부에 여러차례 건의 ▲85년 서울로 이사 ▲86년 남편 홍순칠 대장 작고 ▲97년∼현재 경기도 구리 거주 # 특이사항 할아버지(홍재현)-아버지(종욱)-손자(순칠)-조카와 딸 등으로 이어지는 4대째 독도지킴이 활동에 앞장
  • 100여가지 꽃에 담은 사랑 이별 그리움

    수백년 역사의 환청에 이끌려 지난해 연작 서사시집 ‘왕릉’을 발표했던 시인 이오장(56)씨가 이번에는 꽃에 취해 꽃밭을 헤매었다. 시인은 최근 발표한 여섯번째 시집 ‘꽃의 단상’(시문학사 펴냄)에서 모두 100여종의 꽃에 담긴 다양한 세계와 가치, 논리와 관념을 노래했다. “보름달빛에 피어난 꽃송이//뒤뜰 훤히 밝히는데//길 떠난 낭군은//머나먼 강 잘도 건넜는지//바느질 하는 아낙네 소맷자락//호롱불에 어른어른//어느새 동녘이 밝았네”(‘밤꽃’ 전문) “사막의 나라로/아버지는 돈벌러 나가고/취직한 어머니는/새벽녘에야 돌아와/얼굴 잊혀져갔다/…/아무도 없는 집 담장위로/꽃송이 피어오르던 날/기나긴 장마가 시작되었다”(‘부용화’ 가운데) 시인은 장미, 국화, 동백 등 화려하고 요란한 꽃뿐 아니라 죽도화, 말발돌이, 불두화, 솜다리, 보춘화, 상사화, 참나리, 광릉요강꽃 등 왜소하면서도 이름도 생소한 우리 산하의 각종 꽃과 뻔질나게 마주했다.100여종의 각기 다른 꽃은 시인의 손과 머리를 거쳐 각각의 눈으로, 이야기로, 설화로, 일상으로 풀어내졌다. 예술원 회원인 문덕수 시인은 “모든 작품에서 이미지와 설화의 두 갈래가 공존하고 있고, 작품에 따라 어느 한 특징이 두드러져 보인다.”고 평했다. 그는 또 “큰 담론이 아니라 사랑, 이별, 만남, 그리움 같은, 인륜적인 작은 서정적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설화조로 시작하는 시 ‘부용화’는 딸의 시점에서 불행한 가정의 이산 이야기를 담고 있다.7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스테이트팜클래식] ‘박세리 키드’ 오지영 대역전 드라마

    [스테이트팜클래식] ‘박세리 키드’ 오지영 대역전 드라마

    또 다른 ‘박세리 키드’ 오지영(20·에머슨퍼시픽)이 미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생애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오지영은 21일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팬더크리크골프장(파72·6608야드)에서 끝난 LPGA 투어 스테이트팜클래식 4라운드에서 3타를 줄인 최종합계 18언더파 270타로 쳉야니(타이완)와 동타를 이룬 뒤 연장 첫 홀에서 천금 같은 파를 잡아내 우승했다.18번홀(파4)에서 열린 연장전에서 오지영은 두 번째 샷이 그린을 넘었지만 칩샷을 핀 20㎝에 붙인 뒤 가볍게 파로 세이브했다. 반면 정규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보기를 범해 연장전으로 끌려 들어갔던 LPGA챔피언십 챔피언 쳉야니는 같은 홀에서 치러진 연장승부에서 또 보기를 범해 다 잡았던 우승을 놓쳤다. 연장 첫 홀에서 그린을 놓친 뒤 1.8m 거리의 파퍼트에 실패,2승째를 놓친 쳉야니는 “한국선수들과 경기하는 게 너무 싫다.”고 입맛을 다셨다. 오지영 역시 박세리(31)가 LPGA 투어에 등장했을 때 골프채를 잡은 ‘1988년생 용띠’ 그룹의 멤버.US여자오픈을 제패한 동갑내기 박인비(SK텔레콤)의 바통을 한 대회 건너뛰어 이어받은 오지영은 이로써 LPGA ‘코리안 파워’의 ‘젊은 피’로 자리매김했다. 오지영의 이날 우승으로 한국 선수들의 올 시즌 승수는 모두 5승으로 늘어났다. 선두 쳉야니에 3타 뒤진 공동 3위로 출발한 오지영은 전반 쳉야니가 2타를 잃는 사이 추격의 불을 댕겼고 13번홀까지 버디 4개를 곁들이며 2타 차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쳉야니는 15∼16번홀 연속 버디로 응수하며 오지영과 동타를 이뤘고, 오지영이 1타를 잃은 17번홀(파3)에서 파를 지켜 다시 1타차 선두로 나섰다. 오지영은 18번홀을 파로 홀아웃, 패색이 짙었지만 쳉야니가 두 번째 샷을 그린 뒤로 넘기는 실수로 1타를 잃는 바람에 승부는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쳉야니와 신인왕 경쟁을 벌이고 있는 최나연(21·SK텔레콤)은 이날 4타를 줄이는 등 나흘 내내 60대 타수를 적어내며 17언더파 271타를 쳤지만 연장전에 합류하지 못하고 3위에 그쳤다. 전날 대회 최저스코어인 11언더파 61타를 쳤던 한희원(30·휠라코리아)은 1타를 줄여 공동 4위(16언더파 272타)에 올랐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작가-독자 만남도 톡톡 튀네

    작가-독자 만남도 톡톡 튀네

    작가와 독자들의 만남 형태가 ‘진화’하고 있다. 단순한 낭독회나 사인회가 아니라 스킨십도 갖고, 놀이도 즐기는가 하면 때로는 작품의 배경이 된 장소를 여행하면서 작품과 문학을 이야기하는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 베스트셀러 ‘하악하악’(해냄출판사 펴냄)으로 ‘이외수 신드롬’을 몰고온 소설가 이외수씨는 19일 독자 30명을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이번 행사에서 그는 작가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탁구대회, 바비큐 파티 등도 준비했다. 특히 점심식사와 저녁 바비큐 파티는 미스 강원 출신의 부인과 함께 직접 마련했다. 같은 날 문학서비스단체인 문학사랑(이사장 김주영)은 교보문고, 옥천문화원과 함께 독자 350명을 충북 옥천으로 초대한다. 시인 도종환씨가 함께 하는 이번 문학기행에서는 시인의 대표작인 ‘접시꽃 당신’의 무대인 충북 옥천 인차리와 정지용 시인의 생가, 정지용 문학관 등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지역축제인 ‘포도축제’에 참석,2㎏의 포도를 따갈 수 있는 특전도 덤으로 주어진다. 특별열차 안에서의 프로그램도 다채롭다. 가수 김원중이 우정출연하고, 시인의 시에 그림을 그린 송필용 화가의 서화전도 열린다. 한국관광공사, 인터넷교보문고, 아우라출판사는 25∼26일 이틀간 역사소설 ‘신의 그릇’을 펴낸 도예가 신한균씨와 함께 독자들을 소설의 배경이 된 양산 통도사와 김해 죽도왜성, 신어산 일대로 초대한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독자들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잊혀진 조선도공(사기장)의 이야기를 작가와 함께 더듬어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통도사 템플스테이, 도자체험, 다도체험 등의 풍부한 체험기회도 마련된다. 참가 신청은 20일까지 관광공사 홈페이지(www.visitkorea.co.kr) 또는 인터넷교보문고(www.kyobobook.co.kr)를 통해서 하면 된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세대를 말하다] 민주투쟁의 장 → 축제·소통의 마당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세대를 말하다] 민주투쟁의 장 → 축제·소통의 마당

    ■ 광장 “인간은 광장을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중략)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최인훈의 ‘광장’ 중에서 우리 민족과 사회를 가장 잘 상징할 수 있는 공간을 고르라면 단연 ‘광장’을 꼽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함께 어울려 놀기 좋아하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어깨를 맞대고 푸는 것이 사람 살아가는 섭리라고 믿는 우리에게 광장은 곧 삶이 진행되는 ‘무대’였다. 이에 일찍이 작가 최인훈은 그의 대표작 ‘광장’에서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광장에 대한 기억은 세대별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20세기는 실로 ‘광장의 세기’로 남아 있다.20세기의 광장에는 독립을 위한, 민주화를 위한 결사항쟁의 외침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20세기는 독립·민주화의 광장 “라디오에서 해방됐다는 이야기가 들리자마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지. 죄다 뛰어나가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어. 왜정 때 군인으로 끌려간 영감 기다리던 나도 영등포역 앞에 나갔는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지.” 80살 김부식 할머니는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민족과 함께 다시 살아난 광장을 기억했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과 얼싸안고 거리 곳곳을 누비는데도 실감이 안 났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김기영(43)씨는 광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른다.1987년의 민주항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김씨는 “그해 6월 우리는 모두가 동지였고, 가는 곳은 모두 민주화의 광장이었고, 우리가 치른 것은 성전이었다.”라면서 “고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광장에 모였던 백만 군중은 항쟁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새로운 민주화 사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새천년 들어 광장에는 자긍심이 깃든 우렁찬 함성소리가 넘쳐났다.“지금도 2002년 월드컵을 생각하면 심장이 뛰어요. 취업준비에 한창이던 대학교 4학년 때인데 우리와 이탈리아전이 기말고사 전날이었어요. 짜릿한 역전승에 밤새 놀다가 다음날 오전 전공시험에 지각했는데, 저처럼 늦는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더라고요. 함께 그곳에 있었다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죠.” 28살 이지영씨가 광장과 함께 떠올린 기억이다. 이씨는 “함께했던 기성세대에게는 ‘레드 콤플렉스’ 없이 마음껏 붉은 광장을 바라본 첫 기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광장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2002년 붉은악마… 2008년 촛불 당시 추모집회에 참석했던 김지은(37·여)씨는 “동생 같은 아이들이 처참하게 숨졌는데 공식적으로 항의도 못하는 현실에 자존심이 상했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거리로 나갔다.”면서 “‘진혼 촛불’로 가득찬 광장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엄숙하고도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듬해 광장은 다시금 촛불로 가득 찼다.2004년 3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촉발된 촛불집회였다. 2008년의 광장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개념으로 ‘진화’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을 계기로 온라인 광장에서 시작된 논의는 그대로 컴퓨터 화면 밖으로 뛰쳐나와 현실 세계의 광장으로 이어졌다. 박민서(15)양은 “이전에도 크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가는 것을 봤었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나도 시청 앞 광장에 나갔다.”고 말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골넣는 수비수’ 김근환의 재발견

    ‘골넣는 수비수’ 김근환의 재발견

    세 킬러 후보가 펼친 ‘룰렛게임’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대신 ‘골넣는 수비수’ 김근환(22·경희대)이 안산 와∼스타디움을 찾은 1만 9000여 관중의 속을 시원하게 뚫어줬다. 김근환은 베이징올림픽 개막을 23일 앞둔 16일, 올림픽대표팀이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4위인 과테말라 국가대표팀을 불러들여 치른 첫 번째 평가전에서 동점골을 이끌어내 21일 발표될 최종 엔트리 승선 가능성을 높였다.0-1로 끌려가던 후반 11분, 김승용이 오른쪽에서 올려준 코너킥이 수비벽 뒤로 빠져 자기 앞에 이르자 가슴으로 떨군 뒤 오른발로 강하게 차넣어 골키퍼가 손쓸 틈도 없이 골문 왼쪽 구석에 꽂아넣었다. 올림픽대표팀은 후반 36분 이근호의 역전골을 묶어 2-1로 역전승을 거두며 세 경기 연속 무득점 무승부의 부진에서 벗어났다. 192㎝,84㎏로 올림픽대표 중 가장 ‘꺽다리’인 김근환은 한국축구에 가장 부족한 장신 센터백 자원이자 어떤 포지션이든 소화하는 멀티플레이어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5일 자체 청백전에서도 날카로운 슈팅 감각을 선보여 2004년 아테네대회에서 끊긴 아마추어 출신의 명맥을 살릴 재목이란 찬사를 들어왔다. 그러나 박주영(서울)과 이근호(대구) 외에 최전방 공격수 한 자리를 찾으려는 박성화 감독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전반 초반 할발한 몸놀림을 선보인 양동현(울산)은 서너 차례 기회를 무산시킨 뒤 전반 30분쯤 왼발목 염좌로 물러나 사흘 정도 치료를 받아야 하고 신영록(수원)도 두 세 차례 결정적인 찬스를 날렸다. 양동현과 교체돼 들어간 서동현(수원)과 신영록 대신 투입된 박주영이 호흡을 맞추고 ‘단짝’ 김승용(광주)이 뒤를 받치면서 박성화호의 공격력이 살아났다. 이청용(서울)과 교체투입된 이근호는 들어간 지 1분만에 역시 김승용이 올려준 코너킥을 넘어지면서 오른발로 살짝 건드렸고, 동료 두 명이 골키퍼 시야를 가려주는 행운까지 겹쳐 역전골의 주인공이 됐다. 박 감독은 전후반 8명의 선수를 교체 투입해 시험할 수 있는 카드를 모두 써봤다. 또 다음달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과테말라의 이웃나라 온두라스와 베이징올림픽 본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 위한 최적의 예방주사를 맞은 셈이었다. 박 감독은 “오늘 최초의 평가전이자 최종 엔트리를 정하는 경기였다.”면서 “골고루 교체해 경기를 치렀는데 생각보다 잘했다.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고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최종엔트리에 대해서는 “70∼80%는 윤곽이 나왔으나 당초 판단과는 달리 1∼2명 정도는 기존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고민이 계속되고 있음을 내비쳤다. 안산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이명박 정부 ‘실용 외교’ 위기 봉착

    이명박 정부의 ‘실용외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 ‘쇠고기 파동’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다소 껄끄러워진 상황에서 14일 발표된 일본 정부의 교과서 독도 영유권 명기 방침 발표로 한일관계마저 급속히 냉각되면서 ‘4강외교’가 중대 고비를 맞고 있는 것. 특히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으로 남북관계 역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 이 대통령의 실용외교가 전반적으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대통령은 그간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세계 어느 나라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달려가겠다는 실용의 원칙에 따라 취임후 2개월이 채 못된 지난 4월 중순 미국과 일본을 잇따라 방문,양국 정상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졌다. 또 이달 초 일본에서 열린 G8(선진8개국) 확대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자리를 빌려 조지 부시 미 대통령,후쿠다 야스오 일 총리와 또 한차례 간이 정상회담을 갖고 우의를 돈독히 했다. 이 대통령의 실용외교는 성과를 거두는 듯했다.미국과는 21세기 전략적 동맹관계를,일본과는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는데 각각 합의했다. 5월 말 중국 방문때는 양국 관계를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기로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주변 4강 정상들과 자주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고 실질적 성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대통령의 실용외교 덕분”이라고 평가해 왔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관계는 ‘쇠고기 파동’으로 인해 오히려 더 소원해 진 부분이 없지 않고,일본과의 관계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계기로 급속히 냉각되는 분위기다. 중국이 5월 정상회담기간 한미 동맹관계를 폄하하면서 한중관계도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일관계는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서로 노력하자’는 한일 두 정상 간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일본 정부가 독도 문제를 걸고 넘어지고,이에 우리 정부가 강경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다시 한번 큰 고비를 맞고 있는 양상이다. 새 정부의 4강 외교가 전체적으로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여기에다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는 것도 새 정부의 실용외교에 큰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서조차 실용에 기반한 상호주의를 적용해 “북한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겠다.”,“할 말은 하겠다.”는 등의 강경기조를 유지해 왔다. 이는 곧 북한의 심기를 건드렸고,그 결과 한국과의 대화를 전면 중단한 채 미국과의 소통에만 올인하는 북한의 이른바 ‘통미봉남’ 정책은 더욱 노골화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은 상황을 더욱 꼬이게 만들고 있다. 북한은 피격 사망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다.”며 우리측의 현장조사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한 것은 물론 이 대통령이 11일 개원연설을 통해 제안한 남북간 전면적 대화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아예 대화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근 것이다. 이같은 새 정부의 외교안보 난맥상에 대해 야당 일각에선 “이 대통령의 무원칙한 대북정책과 저자세 실용외교가 화를 자초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전체적으로 외교안보 문제,특히 남북관계 및 한일관계가 잘 안 풀리는 느낌”이라면서 “지금으로서는 원칙을 갖고 차근차근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씨줄날줄] 40년만의 화해/임태순 논설위원

    1894년 12월 전남 장흥군 석대뜰앞. 한때 기세등등하던 동학농민군들이 이 곳까지 밀려와 정부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변변한 무기도 없던 농민군은 신식총을 가진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다 전멸당했다. 농민군들은 앞서 장흥성을 점령하면서 부사와 관리, 주민 등 97명을 죽였다. 농민군이건 관군이건 후손들의 입장에선 조상들이 죽었다는 점에선 서로가 피해자였다. 후손들은 각각 ‘의(義)’와 ‘충(忠)’을 내세우며 서먹서먹하게 지내다 지난 2004년 8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서로 화해했다.110년 만이다. 특별법으로 농민군과 그 후손들의 명예가 회복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태영호 간첩단’사건에 연루됐던 전북 위도 주민들이 오늘 40년 만에 화해의 시간을 갖는다. 이들이 다시 손을 잡게 된 것은 ‘간첩’과 ‘밀고자’라는 누명이 벗겨졌기 때문. 전주지법 정읍지원은 어제 1968년 태영호에 승선, 강제 납북됐다 풀려난 뒤 간첩으로 몰린 선원들과, 강압에 의해 허위자백을 한 이웃 주민들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고문과 가혹행위에 의해 조작된 인권유린사건이라고 조사한 것을 근거로 했다. 이 사건 연루 주민들 역시 서로가 피해자였다. 선원들은 북으로 끌려간 것도 억울한데 ‘빨갱이’로 손가락질 받았다. 허위진술을 한 주민들도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한 것에 치를 떨었다고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말했다. 27년간 복역했던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1994년 대통령이 된 뒤 과거의 범죄를 고백하면 처벌하지 않는 화해의 정치를 펼쳤다. 가해자였던 백인들도 인종차별정책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마음의 평화만 깨질 뿐”이라며 “용서해야 평화를 찾고 행복에 이른다.”고 했다. 태영호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법정에서 “상부의 지시로 수사했으나 피해자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어두웠던 시대와 화해하기 위해선 이제 위에서 지시한 사람들의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간첩 사건이 갈라놓은’ 위도 40년만에 화해의 손 맞잡다

    ‘간첩 사건이 갈라놓은’ 위도 40년만에 화해의 손 맞잡다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철천지 원수로 갈라섰던 섬 주민들이 40년 만에 마음의 문을 열고 화해한다. 전북 부안군 위도면 주민들은 10일 위도중·고등학교 체육관에서 ‘납북 귀환어부 간첩조작 의혹 사건’과 관련해 화해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서 태영호 간첩단 사건이 고문과 가혹행위에 의해 조작된 인권유린 사건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납북돼 곤혹을 치렀던 선주 강대광(67)씨 등 8명 가운데 생존해 있는 4명과 간첩단사건 증인 50명 중 생존자 30여명은 이날 서로 한자리에서 만나 ‘화해의 손’을 잡을 예정이다. 간첩단 조작 사건은 40년 전인 1968년 7월3일 발생한 태영호 납북 사건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당시 경기 옹진군 연평도 근해에서 병어잡이를 하던 태영호 선주 강씨 등 8명은 북한 경비정에 강제 납북됐다가 4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선원들은 군사분계선을 월선하고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는 이유로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1971년 3월부터 1975년 4월 사이에 징역 1∼1년6개월, 집행유예 2∼3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수괴로 몰린 강씨는 옥중에서 10년을 보냈다. 강씨 어머니는 옥중에 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 실명이 돼 숨졌다. 그러나 이들은 수사 과정에서의 고문과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허위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드러났다. 마을 주민 50여명도 줄줄이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이들이 북한을 찬양·고무한 사실이 있다고 허위로 진술했다. 이 때문에 납북 선원들과 마을 주민들 사이에 필설로 다하지 못할 응어리가 맺혔다. 납북 어부들은 마을 주민들의 기피와 승선 거부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평생을 고통속에 살아왔다. 주민들도 이들 때문에 억울하게 고문을 당했다며 등을 돌리고 지냈다. 이 사건은 40여년이 지나서야 누명을 벗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수사과정에서 불법감금 및 가혹행위, 증거제출 의무 위반, 증거재판주의 위반 등에 대해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했다. 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부안경찰서 정보과 형사들도 지난달 25일 전주지법 정읍지원에서 열린 재심공판에서 ‘모든 것이 잘못됐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위에서 지시해 진실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수사했으나 이 자리에 서보니 피해자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법원도 9일 강씨 등이 청구한 재심에 대해 무죄를 선고할 예정이다. 부안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친조카의 칼맞은 정구파(精九派)스님

    친조카의 칼맞은 정구파(精九派)스님

    대처승이 조카 자식을 상대로 8년동안 「호모·섹스」를 강요하다 마침내 그 조카 칼에 맞아 피투성이가 됐다. 16살에 고아가 되어 삼촌인 그 대처승에게 맡겨져 밤마다 시달려 오던 끝에 칼을 휘둘렀다는 조카가 경찰에서 털어놓은 사연은-. “떠들면 쫓아내 버릴테다” 한밤중에 온 작은아버지 9월12일 하오 1시쯤 서울시내 영등포 봉천동 ○○사 법당에서 주지스님 하(河)준정씨(40·가명)가 피를 흘리며 뒹굴었다. 겨드랑이와 등허리, 손바닥등 모두 7군데에 칼을 맞고 중상을 입은 하스님은 곧 이웃 H의원으로 옮겨졌고 가해자로 조카 하모군(23)이 잡혀 노량진경찰서에 구속됐다. 『죽이려고 그랬읍니다. 그런 놈은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군은 취조관에게 거침없이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하군은 하스님의 친조카인데다 천애고아로 하스님이 부모나 다름없이 길러온 처지. 취조관앞에서 털어놓은 하군의 범행사연은- 하군의 고향은 충북(忠北) 괴산(槐山). 3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16살때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다.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인 하군은 유산이라곤 땅 1마지기도 이어받지 못했다. 별수 없이 작은 아버지인 하스님이 그의 양육을 떠맡을 수밖에. 친척가운데 가장 가까운 일가이기도 했고, 주지스님이어서 비교적 살림이 윤택했던 때문. 당시 하스님은 충북 괴산에 있는 ○○사의 주지스님. 『절의 잔심부름을 해주고 얻어먹고 살게 됐어요. 절 밖에 있는 살림집에는 방이 2간이었어요. 저 혼자 사랑채에서 자곤 했지요』 며칠이 지난 어느날 깊이 잠든 하군은 야릇한 움직임에 눈을 떴다. 누군가 어둠속에서 그를 발가벗겨 놓고, 그의 「심벌」을 잔뜩 움켜 쥐고 있었다. 엉겁결에 놀라 일어나려 하자 우악스런 손이 입을 틀어 막았다. 『조용히 있어. 떠들면 쫓아버릴테야. 그러면 거지가 되고 마는 거야』-작은 아버지의 위협에 하군은 힘을 잃고 말았다. 그의 큰손이 이윽고 하군의 손을 잡아 당겨 자기의 사타구니로 끌고갔다. 하군은 미처 자위행위도 모르는 어린 소년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손을 놀렸다. 『처음엔 멋모르고 시키는대로 했는데 갈수록 더욱 이상해 져요. 전신을 만지게 하고 정말 죽기보다 싫었어요』 차차 하군은 작은 아버지가 징그러운 짐승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밤이되면 사형장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으로 견딜 수 없었다. 『초저녁부터 다투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실랑이를 벌일때가 하루 건너 한번씩 있었어요. 밤새도록 저를 벗기려는 작은 아버지와 싫다고 피하는 저는 죽자하고 싸웠지요』 도망쳤다간 또 잡혀오고 7년동안을 생지옥 생활 결국 견디다 못한 그는 18살 되던 1962년 봄, 산으로 나무하러 가는체하고 절을 뛰쳐나와 천안의 외가로 줄행랑. 그러나 그의 행방을 쫓던 스님에게 불과 두달만에 잡히고 말았다. 『그때 외할머니에게 저의 사정을 얘기했으면 될텐데. 저는 만약 제가 그런 소리를 하면 작은 아버지 체면도 있고 친척들이 소동을 일으킬까봐 말을 못하고 끌려 갔어요』 하스님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기가 공부시켜 주려했는데, 공부를 싫어해 집을 뛰쳐 나왔다고 둘러댔다는 것. 그러나 그해 겨울, 하군은 다시 절을 도망쳐 무작정 상경, 남대문 근처에서 구두닦이로 벌어 먹었다. 『63년 봄에 우연히 길가에서 사촌형을 만났지요. 사촌형도 제가 공부하기 싫어서 나온줄 알고 작은 아비지에게 연락을 했어요』 그때 하스님은 청주시 수동의 ○○사로 옮긴뒤였다. 연락을 받은 즉시 상경한 그는 『책임지고 공부시킨다』며 하군을 다시 데려갔다. 이번에는「호모·섹스」의 방식이 진일보, 더욱 하군을 못살게 굴었다. 그달도 채못가 견디다못한 하군은 ○○사를 탈출, 서울의 영등포구 구로동 외삼촌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 처음으로 외삼촌에게 제가 당한 고역을 고백했읍니다. 외삼촌은 그럴 수 없다면서 모두 때려 부수겠다고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 싸웠죠』 그러나 작은 아버지는 『조카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 공부하기 싫으니 되레 뒤집어 씌운다』고 펄쩍뛰더라는 것. “고아된 몸 키워줬다지만 이젠 죽어도 더는 못참아” 『그러면 그렇지 그럴수가 있나』라고 생각한 외삼촌에게 실컷 꾸중만 들은 하군은 또다시 작은 아버지에게 맡겨졌다. 그후에도 공주 갑사로 도망치기도 했고, 부산으로 도망치기도 했으며, 청주의 매형에게도 가있었다. 그때마다 작은 아버지는 끈덕지게 수소문해서 하군의 거처를 알아내고 악착같이 그를 데려갔다. 이러는 동안 친척들이 모두 내용을 알게됐고 작은 어머니 마저도 사실을 알게됐다. 『충주 매형에게 있으면서 자동차학원에 들어가 운전기술을 배웠어요.화물차 조수로 취직해서 그런대로 생활을 했는데, 작년에 작은 아버지가 저의 숨어있는 곳을 알아내고 찾아 왔읍니다』 하스님은 매형에게 정중히 사과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맹세까지 했다. 스님의 정성스러운 태도에 넘어간 매형이 하군을 『작은 아버님이 마음을 잡았으니까 돌아가라』고 권했다. 결국 매형의 권유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 『여전했읍니다. 그러나 이젠 다 컸으니까 만만하게 응하지 않았지요. 1주일만에 뛰쳐 나와 다시 충주에서 취직했읍니다』 사건이 나기 1주일전, 매형집에 들렀다가 작은 아버지가 편지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선량한 매형까지 괴롭히려는 작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결심한 것은 이때였다고. 그래서 지난 6월12일 아침 충주를 떠나 서울에 와 칼을 사들고 봉천동 ○○사에 뛰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게 짐승이지 사람입니까? 16살때부터 그렇게 악착같이 저의 뒤를 쫓아다니며 추악한 짓을 해온 작은아버지가…』 삿대질까지 하며 지긋지긋한 악몽의 7년을 연상하는 듯 그는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이러한 경우 법은 그에게 과연 어떤 형벌을 내릴것인가? <식(植)> [선데이서울 71년 9월 26일호 제4권 38호 통권 제 155호]
  • [女談餘談] 할머니의 결혼 기념일/유지혜 사회부 기자

    [女談餘談] 할머니의 결혼 기념일/유지혜 사회부 기자

    지난 5월 외국 출장중인 아버지가 이메일을 보냈다.‘집안일’이라며 부탁을 하나 하셨다. “29일이 아빠 결혼 기념일인데 내가 여기 있게 되니 지혜가 할 일이 있다. 그날 31송이의 백합을 엄마에게 아침에 배달시켜라. 그래야 오후에 수다 떨지.” 아버지의 ‘지령’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어머니에게 보낼 문구도 특정해 보냈다. “현희야, 더 큰 사랑을 보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부모님의 로맨스라는 것 자체가 좀 어색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안일 지령’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혹시 할머니 결혼기념일을 기억하시나 여쭤봐라. 자식이 이렇게 무심하니, 더 늦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갑자기 아버지는 왜 할머니의 결혼기념일이 궁금하셨던 걸까.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가서 할머니는 거의 새색시 때부터 혼자였다. 난 “결혼기념일 안 챙긴 지가 벌써 50년도 넘었는데 그걸 기억하시겠어?”라고 심드렁한 답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할머니에게 역시 심드렁하게 여쭤봤다. “할머니, 결혼기념일 기억 못하지?” 그런데 왠걸, 할머니는 바로 “왜 기억을 못해, 음력 3월18일이야. 갑자기 그건 왜?”라고 말씀하셨다. 난 좀 놀랍기도 하고 멍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할머니의 추억을 폄하한 것 같아 죄송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동안 결혼기념일은 두 사람이 부부가 된 것을 축하해 주는 날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사라져서 부부라는 관계도 사라지면 더 이상 큰 의미는 없는 날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결혼기념일은 감사해야 하는 날이다. 아버지 말씀대로 더 늦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고, 내년 음력 3월18일에는 할머니께 꼭 말씀드려야겠다. 할아버지와 만나서 아버지를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전쟁의 암흑기에 어려운 시절을 여자 홀몸으로 굳세게 견뎌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태어나 펜을 잡고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이다. 유지혜 사회부 기자 wisepen@seoul.co.kr
  • [깔깔깔]

    ●학생들이 싸울 때 선생님들이 하는 말 국어:주제도 모르고…. 수학:분수를 알아라. 경제: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반평균이 깎이는 거야. 국사:조상님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니? 지리:다른 지역 학생들도 그러지는 않겠다. 음악:말리지는 못할망정 서로 장단 맞추냐. 윤리:서로 배려하고 타협할 줄 알아야지. 문법:싸우지 말아야지. 그리고 말버릇들이 그게 뭐니? 독서:반성문 100장은 써야 정신을 차리겠구먼. 진로담당:너희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니? 양호:또 다쳤니? 담임:부모님 모셔와.●난센스 퀴즈 1. 우리나라가 ‘쇼트트랙’에 강한 이유는? 새치기를 잘하기 때문. 2. 보신탕 집으로 끌려가는 개의 가장 큰 소원은? 다음 세상에서는 식인종으로 태어나는 것.
  • [건국 60주년] 민단 ‘참정권 찾기’ 몸부림

    [건국 60주년] 민단 ‘참정권 찾기’ 몸부림

    |도쿄 박홍기특파원|건국 60주년은 곧 재일 교포들의 역사다. 교포들의 삶 자체가 질곡의 세월이다. 일본의 차별과 냉대를 몸으로 이겨내며 지금에 서 있다. 남북 분단이란 현실에서 이념의 대리전도 치러야 했다. 재일 교포사회를 단순하게 도식화하기란 쉽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징용·징병 등 강제로 끌려온 세대들이 있는가 하면 1965년 한·일 협정 이후 스스로 일본 땅을 밟은 세대도 뒤섞였다. 때문에 세대간의 틈뿐만 아니라 정착 과정에서의 보이지 않는 감정의 골도 없지 않다. 교민 1세대인 김모(77)씨는 “망국의 설움을 안은 채 사는 1세대와 이후 세대의 삶을 한데 묶어 조명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두들 구구한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어서다.”라고 말했다. ●특별영주자엔 북한 국적도 포함 일본 법무성의 2006년 통계에 따르면 재일 교포는 59만 8219명에 달했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일본 땅을 밟아야 했던 한국인들 가운데 지난 1965년 한·일 협정에 의거, 특별 영주권을 받은 교포는 43만 8974명, 일반 영주권자 및 일본인의 배우자 등은 7만 2760명, 장기 체류자는 8만 6485명이다. 특별영주자에는 북한 국적의 교포도 포함됐다. 일본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탓에 별도로 집계를 내지 않는다. 대체로 재일본대한민국단(민단) 소속은 33만∼34만명,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소속은 9만∼10만명가량으로 추산될 뿐이다. 일본의 ‘귀화 권장정책’에 따라 국적을 바꾸는 교포도 많다.2006년 귀화한 교포는 8541명이다. 교포 1세들의 직업군은 일본 기업의 취직문이 닫혀 있었던 탓에 자영업이 주류를 이뤘다. 파친코, 식당, 운송업, 건축업이 비교적 많다. 교포 사회에서 민단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다. 정치적 색채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분명 맥을 같이하는 까닭에서다. 민단은 1946년 10월 재일본조선거류민단으로 출범했다.1966∼71년 한·일 협정에 의한 영주권신청운동을 전개했다.83년 일본의 외국인등록법 지문날인제를 폐지시키는 등 차별을 막는 데 앞장섰다. 배철은 민단 선전국장은 “최대 현안은 94년부터 추진한 지방참정권의 획득이다. 영주권을 가진 교포들을 외국인이 아닌 주민으로 인정해 달라는 정당한 주장이다.”고 밝혔다. ●교포 권익보호 힘쓰는 민단 교포 사회의 한 축은 조총련이다. 현재 북한과의 뒤틀린 관계 때문에 일본의 조총련 활동에 대한 제재는 만만찮다. 조총련은 일본 사회에서 ‘민족교육’에 치중했다. 교육기관만 조선대학교를 비롯, 전국에 초·중·고 120개교를 갖고 있다. 일본으로부터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한다. 조총련 간부는 “남과 북은 겨레요 동포다. 일본의 강경 대북정책은 전체 교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또 한·일 협정 이전에 정착한 교포들과 구별되는 ‘뉴 커머(New comer)´들이 있다.2001년 5월 ‘재일본한국인연합회(한인회)’를 결성했다. 새 터전을 찾아온 만큼 무역·정보통신·경영투자 등 직업군도 다양하다. 조옥제 한인회장은 “동포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자발적 조직”이라면서 “자녀들의 정체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hkpark@seoul.co.kr
  • 한나라 최고위원 3인 면면

    업무 추진력 뛰어난 친박계 좌장 ■허태열 최고위원 1970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충북도지사, 한국산업단지공단 이사장 등을 지낸 행정관료 출신으로 16∼18대 연속으로 당선된 중진 의원이다.16대 총선에서 정계에 입문한 뒤 당 지방자치위원장과 기획위원장, 국회 행정구역개편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박근혜 전 대표 시절인 2006년 당 사무총장을 지내며,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과 뛰어난 업무추진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대선 때 박 전 대표 선대위 직능총괄본부장으로 일한 그는 친박계 내부에서 온건파로 분류된다. 청와대에 끌려가지 않는 당당한 여당상을 내걸고 경선에 나선 허 최고위원은 “국민의 작은 목소리까지 제일 먼저 감지하는 민심의 불침번 역할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부인 서영슬씨와 2녀. ▲부산(63)▲부산고, 성균관대 법학과 ▲충북도지사 ▲16·17·18대 의원 ▲한나라당 사무총장 ▲박근혜 대선경선후보 총괄본부장 ▲한나라당 대선 선대위 직능총괄본부장 합리적 성향의 친이계 ‘정책통’ ■공성진 최고위원 미래학을 전공한 한양대 행정대학원 교수 출신 재선 의원이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를 자임하지만,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대통령 정신건강 모니터링제’ 도입을 주장하는 등 이따금 튀는 행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16대 대선 때 이회창 후보 정책 공약 자문그룹인 ‘북악포럼’을 이끌었다.17대 초선 시절에는 이재오 전 의원 등 3선들이 주축이 된 연구모임인 국가발전전략연구회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지난해 당시 3선인 홍준표 의원 등 경쟁자를 물리치고 경선없이 서울시당위원장으로 입성했다. 공 최고위원은 당선 소감을 통해 “제가 최고위원이 되기를 스스로 원했다기보다는 한 몸 바쳐 봉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한걸음씩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몸을 한껏 낮췄다. 부인 최영혜씨와 1남. ▲서울(55)▲경기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한양대 교수 ▲17·18대 의원 ▲한나라당 서울시당위원장 ▲대선·총선 서울시선대본부장 경기도의원 출신의 ‘열혈 정치가’ ■박순자 최고위원 경기도의원 출신으로 재선에 성공한 데 이어 최고위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1989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경기도 교육위원, 경기도의회 의원을 거쳐 17대 비례대표로 첫 배지를 달았다.18대에는 경기도 안산 단원을에 출마, 당선됐다.10여년 만에 이 지역에서 한나라당 당선자가 배출된 것이다. 선거운동 기간 맹장수술 사흘 만에 유세에 나서는 ‘붕대투혼’을 발휘했다.17대 때 산업자원위 국정감사에서 오염된 강원도 도암댐 물과 폭파 위험이 있는 고압가스 용기 등을 국감장에 등장시킨 ‘열혈파’이기도 하다. 박 최고위원은 “여성 대의원이 50%가 넘는데 500표밖에 못받았다.”면서 “이 부분을 바꿔가도록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남편 양경호씨와 1남1녀. ▲경북 군위(50) ▲고려대 경제학과 ▲경기도의원 ▲여성과 지방자치연구소 이사장 ▲17·18대 의원 ▲한나라당 부대변인 ▲한나라당 원내부대표 ▲한나라당 중앙여성위원장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경찰청장 고소사태

    “다친 전투경찰을 치료하다 되레 전경들에게 집단 구타당했습니다.” 경기도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정모(33)씨는 지난달 29일 새벽 2시 의료봉사단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다음 아고라를 통해 만난 의사·간호사로 이뤄진 의료봉사단은 집회 현장에서 다친 시민과 경찰을 응급 치료해주는 모임이다. 정씨는 이날 서울 태평로 코리아나호텔 근처에서 한 전경이 시민들에게 끌려나와 구타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동료 서너명과 달려간 정씨는 시민들을 제지하고 다친 전경의 옆에 앉아 치료에 나섰다. 순간 뒤쪽에서 한 무리의 전경이 그를 덮쳤다. “의료봉사단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도, 어떤 전경은 방패로 찍고 돌아섰다가 다시 돌아와 군홧발로 짓밟았습니다.” 정씨는 구타를 당한 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조금전 돌보려 했던 전경을 다시 치료할 수 있었다. 다른 전경들이 그를 부축해 정씨에게 응급치료를 부탁한 것이다. 다음날 정씨는 국립의료원에서 뇌진탕과 뇌부종, 전신타박상 등 상해를 입은 것으로 진단받았다. “안전 헬멧을 썼는데도 이렇게 다쳤으니….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새 고생했다고 담배와 물, 사탕을 전경들에게 건네준 게 잘못인지, 약을 주고 전경을 치료해준 게 잘못인지.” 정씨는 2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도움을 받아 어청수 경찰청장 등을 의료법 위반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고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경찰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회사원 장모(25·여)씨와 민변 소속 ‘인권침해감시단’으로 활동하다 전경이 휘두른 방패에 머리를 맞아 이마를 14바늘 꿰맨 이준형 변호사도 어 청장 등을 살인미수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한편 민변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이 민변을 ‘폭력시위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세력’으로 왜곡보도하고 있다며 가능한 한 모든 법적 대응을 동원해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서울시 여성상’ 대상 길원옥씨

    1998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피해를 당한 사실을 고백한 이후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서 온 길원옥(81)할머니가 2일 ‘제5회 서울특별시 여성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길 할머니는 과거의 피해로 인해 육체적인 질병을 얻었지만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린 뒤에는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길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 각국을 순방하며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문제 해결에 함께 나서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지난해 11월에는 네덜란드·벨기에·독일·영국 등 유럽 4개국을 순방하며 네덜란드와 유럽연방 의회가 일본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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