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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잔금 못 낸 에디슨모터스… 쌍용차, 다시 매각·청산 기로에

    결국 잔금 못 낸 에디슨모터스… 쌍용차, 다시 매각·청산 기로에

    “경영여건 개선… 새 주인 찾을 것”에디슨측 “지위보전 가처분 신청”계약금 반환 놓고 소송전 가능성 산은 “채권단은 결정권 없어” 침묵공적자금 투입 등 尹정부 과제로쌍용자동차를 품고 국내를 대표하는 종합 모빌리티 기업으로 도약하려던 강영권 에디슨모터스 회장의 꿈이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쌍용차는 28일 에디슨모터스 컨소시엄과의 인수합병(M&A) 계약을 공식적으로 해제한다고 밝혔다. 에디슨모터스 측이 2700억원 규모의 인수대금 잔금을 기한 내 마련하지 못해서다. 에디슨모터스 컨소시엄은 지난 1월 쌍용차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쌍용차와 함께 마련한 회생계획안을 심사받을 관계인 집회가 다음달 1일로 정해진 가운데 에디슨모터스는 5영업일 전인 지난 25일까지 잔금 2743억원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기한을 지키지 못했고, M&A 절차는 최종 무산됐다. 쌍용차가 시장에 매물로 나온 것은 2020년 6월이다. 회사의 경영난이 심화되는 가운데 기존 대주주였던 인도 마힌드라가 신규 투자를 거부하고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새 주인 찾기가 시작됐다. 미국 자동차 유통업체 ‘HAAH오토모티브홀딩스’ 등이 관심을 보였으나, 최종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7월 전기버스 생산 전문업체 에디슨모터스가 혜성처럼 등장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에디슨모터스를 이끌던 강 회장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쌍용차를 10년 내 테슬라 이상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며 강한 인수 의지를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것’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부채 7000억원을 안고 있는 쌍용차를 정상화하려면 약 1조 5000억원까지 필요하다는 예측이 나돌았다. 연매출 900억원 남짓인 중소기업 수준의 에디슨모터스가 품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재무적투자자(FI)를 유치해 자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복안이 있었지만, 인수에 동참키로 했던 사모펀드 키스톤PE와 KCGI도 투자에서 손을 떼면서 ‘돈줄’이 꽉 막혔다. 에디슨모터스는 잔금 납입 기한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쌍용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쌍용차는 “이 사안은 이미 공시나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익히 알려졌던 만큼 인수인(에디슨모터스)은 이를 감안해 투자자 모집을 준비했어야 한다”면서 “향후 재매각 추진 등 새로운 회생 방안을 찾을 기회까지 잃어버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쌍용차는 새 인수자를 찾아 신속하게 재매각에 나설 방침이다. 최근 신차 ‘J100’ 출시 일정도 확정하는 등 경영 여건이 크게 개선됐다며 자신감을 보인다. 하지만 에디슨모터스만큼 강한 의지를 보이는 원매자가 시장에 없는 상황에서 쌍용차의 새 주인 찾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이에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산은은 그동안 에디슨모터스의 추가 지원 요구를 거부하고 빌려준 돈에 대한 원금 회수를 강조해 왔다. 다만 이날 산은 관계자는 “계약 주체가 아니라 채권단의 입장이라 매각 결정권이 없다”며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향후 에디슨모터스와 쌍용차가 계약금 반환 등을 두고 소송전을 벌일 가능성도 나온다. 에디슨모터스는 법원에 계약자 지위 보전을 위한 가처분신청을 내겠다고 밝혔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추가 공적자금 투입 여부 등 쌍용차 문제가 윤석열 정부가 맞이하는 첫 번째 대형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 일장춘몽으로 끝난 강영권 회장의 꿈…쌍용차 “에디슨모터스와 M&A 계약해제”

    일장춘몽으로 끝난 강영권 회장의 꿈…쌍용차 “에디슨모터스와 M&A 계약해제”

    쌍용자동차를 품고 국내를 대표하는 종합 모빌리티 기업으로 도약하려던 강영권 에디슨모터스 회장의 꿈이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쌍용차는 28일 에디슨모터스 컨소시엄과의 인수합병(M&A) 계약을 공식적으로 해제한다고 밝혔다. 에디슨모터스 측이 2700억원 규모의 인수대금 잔금을 기한 내 마련하지 못해서다. 에디슨모터스 컨소시엄은 지난 1월 쌍용차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쌍용차와 함께 마련한 회생계획안을 심사받을 관계인 집회가 다음달 1일로 정해진 가운데 에디슨모터스는 5영업일 전인 지난 25일까지 잔금 2743억원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기한을 지키지 못했고, M&A 절차는 최종 무산됐다. 쌍용차가 시장에 매물로 나온 것은 2020년 6월이다. 회사의 경영난이 심화되는 가운데 기존 대주주였던 인도 마힌드라가 신규 투자를 거부하고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새 주인 찾기가 시작됐다. 미국 자동차 유통업체 ‘HAAH오토모티브홀딩스’ 등이 관심을 보였으나, 최종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7월 전기버스 생산 전문업체 에디슨모터스가 혜성처럼 등장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송사 프로듀서 출신으로 에디슨모터스를 이끌던 강 회장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쌍용차를 10년 내 테슬라 이상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며 강한 인수 의지를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것’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부채 7000억원을 안고 있는 쌍용차를 정상화하려면 약 1조 5000억원까지 필요하다는 예측이 나돌았다. 연매출 900억원 남짓인 중소기업 수준의 에디슨모터스가 품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재무적투자자(FI)를 유치해 자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복안이 있었지만, 인수에 동참키로 했던 사모펀드 키스톤PE와 KCGI도 투자에서 손을 떼면서 ‘돈줄’이 꽉 막혔다. 여기에 쌍용차 안팎에서 지속적인 마찰도 빚어졌다. 쌍용차 협력업체로 구성된 상거래 채권단과 노조가 M&A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에디슨모터스는 잔금 납입 기한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쌍용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쌍용차는 “이 사안은 이미 공시나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익히 알려졌던 만큼 인수인(에디슨모터스)은 이를 감안해 투자자 모집을 준비했어야 한다”면서 “향후 재매각 추진 등 새로운 회생 방안을 찾을 기회까지 잃어버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쌍용차는 새 인수자를 찾아 신속하게 재매각에 나설 방침이다. 최근 신차 ‘J100’ 출시 일정도 확정하는 등 경영 여건이 크게 개선됐다며 자신감을 보인다. 하지만 에디슨모터스만큼 강한 의지를 보이는 원매자가 시장에 없는 상황에서 쌍용차의 새 주인 찾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이에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산은은 그동안 에디슨모터스의 추가 지원 요구를 거부하고 빌려준 돈에 대한 원금 회수를 강조해 왔다. 다만 이날 산은 관계자는 “계약 주체가 아니라 채권단의 입장이라 매각 결정권이 없다”며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향후 에디슨모터스와 쌍용차가 계약금 반환 등을 두고 소송전을 벌일 가능성도 나온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쌍용차가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기업이 청산되는 쪽으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면서 “추가 공적자금 투입 여부 등 쌍용차 문제가 윤석열 정부가 맞이하는 첫 번째 대형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 대구시장 선거 판커진다-김재원 수성을로 방향 변경하나?

    대구시장 선거 판커진다-김재원 수성을로 방향 변경하나?

    대구시장 선거의 판이 커지고 있다. 잇따라 국민의힘에서 대구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면서 경쟁이 과열되는 양상이다. 홍준표 의원이 오는 31일 공식출마 선언할 예정이다. 여기에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예비후보등록을 마쳤다. 3선 입성을 공식화한 권영진 대구시장은 4월5일을 즈음해 경선전에 본격 뛰어든다는 입장이다. 이에 앞서 이진숙 전 대전MBC 사장이 지난 17일 가장 먼저 예비후보 등록을 했다. 28일에는 ‘대구를 아는 사람’을 기치로 권용범 전 대구경북벤처기업협회장이 시장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국민의힘 클린선거 전략본부 법률지원부단장을 맡은 정상환 변호사 역시 이르면 이번 주 중 출마를 공식화할 계획이다. 여기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측근 유영하 변호사의 대구시장 도전 여부도 새로운 변수다. 판이 커지면서 공천룰을 둘러싼 잡음도 나오고 있다. 당 최고위가 현역 의원(-10%)과 무소속 출마 경력자(-15%)에 대해 최대 25%를 감점하는 규정을 의결한 것이 시발점이다. 이 두 조항 모두에 해당하는 홍 의원은 해당 조항 표결에 참여한 김재원 최고위원과 각을 세우고 있다. 홍 의원은 김 최고위원도 대구시장 출마 의사를 밝힌 만큼 ‘관리자가 룰을 정한다’는 취지로 비판’하며 최고위원직 사퇴를 요구했다. 홍 의원은 지난 25일 자신의 SNS를 통해 “명색이 당 지도부 최고위원이라는 사람이 최고위에서 부당한 룰을 만들어 당원과 국민을 농락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방선거 출마 선언을 해놓고도 계속 최고위원 사퇴를 안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고 김 최고위원을 직격했다. 이에 대해 김재원 최고위원은 28일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공천룰’ 갈등문제는 “제 스스로 다 정리를 해야 될 상황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이 발언과 관련 김 최고위원이 대구시장 선거에서 방향을 바꿔 홍 의원 지역구인 수성을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홍 의원이 대구시장 선거를 위해 4월30일까지 국회의원을 사퇴할 경우 6월1일 지방선거와 동시에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지역 한 정치인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홍 의원이 김 최고위원보다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면서 “김 최고위원이 시장 경선보다 보궐선거가 더 승산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많다”고 예측했다. 유 변호사의 대구시장 출마설도 급부상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구 달성 사저 입주로 부각된 유 변호사가 대구 수성구로 이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출마설이 무르익고 있다. 유 변호사도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시장 출마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대구지역 일간지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 변호사는 “대구시장 출마설이 돌면서 조금 당혹스럽다. 그렇다고 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지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의 사저 입주 인사말도 유 변호사의 출마에 힘을 실어준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시민 여러분 제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했지만 이루지 못한 많은 꿈이 있다”며 “제가 못 이룬 꿈들은 이제 또 다른 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좋은 인재들이 저의 고향인 대구의 도약을 이루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저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한다”고도 했다. 지역 정가에서는 대구시장 선거가 관심을 끌기는 이례적이라고 밝혔다. 대구시장 선거는 국민의힘이 공천하면 거의 다 당선이 되기 때문에 그동안 지방선거에서 관심밖이었다는 것이다. 지역 정치권 유력 인사는 “국민의힘 후보가 결정되기까지 여러가지 변수가 있다”면서 “그때까지 대구시장 선거는 정치권에서 큰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 권총 겨눈 강도, 알고 보니 옛 제자...기막힌 사제 간 재회

    권총 겨눈 강도, 알고 보니 옛 제자...기막힌 사제 간 재회

    기막힌 사제 간의 만남이 아르헨티나에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현지 언론에 보도됐다.  아르헨티나 투쿠만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사 훌리오 페라리(사진)는 최근 죽을 고비를 넘겼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는 그는 퇴근길에 권총을 든 2인조 무장강도를 만났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내리려고 할 때 어디선가 출현한 2인조 무장강도는 권총을 겨누며 교사의 소지품과 오토바이를 강탈하려 했다.  백팩을 빼앗은 강도들은 오토바이마저 가져가려 했다. 교사가 저항하자 강도 중 1명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교사는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다. 틱 소리만 났을 뿐 권총이 불발하면서다.  교사 페라리는 인터뷰에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권총이 너무 오래된 것이라 불발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그때 일어났다. 권총이 불발하는 순간 교사는 방아쇠를 당긴 강도와 눈이 마주쳤다. 복면을 하고 있었지만 교사는 단번에 그를 알아봤다. 강도는 교사의 옛 제자였다.  교사는 "건장한 청년이었지만 눈가에는 어릴 때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면서 "옛 제자였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강도들은 권총이 불발하자 도주하기 시작했다. 교사는 "나 네 선생님이야. 네가 11살이었을 때부터 너를 아는 네 선생님이라고~"라고 소리면서 도망가는 강도들을 추격했다.  도주하던 강도들은 백팩을 길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쩌면 교사가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었던 아찔한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하지만 사연은 계속 이어졌다. 얼마 뒤 교사는 낯선 번호에서 발송한 2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발신자는 강도가 된 옛 제자였다.  정중한 인사로 메시지를 시작한 강도는 "선생님께 저지른 짓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를 구합니다. 저는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제 곰곰이 어릴 때를 돌이켜 보니 학교 다닐 때 제게 많은 도움을 주신 선생님이셨다는 게 기억납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도는 "많은 도움과 조언을 주신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사랑했습니다. 제 잘못에 용서를 구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라고 거듭 사죄했다.  사연이 알려지면서 현지 언론은 교사와 인터뷰를 했다. 교사 페라리는 "청년들이 얼마나 희망 없이 방황을 하면 범죄자가 되겠는가"라면서 "우리 사회의 책임"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국가와 언론의 역할이 특히 요구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청년들이 밝은 꿈을 꿀 수 있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타이거우즈보다 많이 번다…‘세계 1위’ 미녀골퍼 정체

    타이거우즈보다 많이 번다…‘세계 1위’ 미녀골퍼 정체

    세계에서 가장 팔로워가 많은 ‘미녀 골퍼’ 페이지 스피래닉(29·미국)의 SNS 수익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국 이센셜리 스포츠는 최근 “SNS 팔로워가 가장 많은 골프 관계자 스피래닉은 엄청난 돈을 벌고 있다”고 소개했다. 스피래닉은 SNS에 게시물 1개를 올릴 때마다 약 1만 4000달러(약 1700만 원)의 돈을 벌어들이고, 이는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47)보다 많은 금액이다. 우즈의 SNS 게시물 1개당 수익은 1만 1000달러(약 1340만 원) 수준인 것으로 전해졌다. SNS 팔로워가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스피래닉은 골프매체 골프매직이 발표한 세계 골프선수 팔로워 1위를 차지했다. 현재 스피래닉의 SNS 팔로워는 약 327만 명으로 우즈의 290만 명보다 40만 명 가까이 더 많다. 여자 선수는 스피래닉 말고 아무도 10위 안에 들지 못했다.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 출신 스피래닉은 2015년 프로골프에 입문한 뒤 2016년 LPGA 무대를 밟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2016년 미니투어인 캑터스 투어에서는 프로 데뷔 첫 승을 거머쥐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스피래닉은 프로 데뷔 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지만 빼어난 외모로 골프팬들로부터 ‘미녀골퍼’, ‘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한 골프선수’ 등으로 불렸다. 스피래닉은 2015년과 2016년 유럽여자프로골프 투어 오메가 두바이 레이디스 마스터스에 초청선수로 출전했다가 ‘실력이 없는데 예쁜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초청선수 자격을 얻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2017년 유명 골프 용품업체 홍보대사에 선정됐을 때도 ‘내로라하는 여자 선수들을 제치고, 스피래닉이 홍보대사가 된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비난을 받았다. 스피래닉은 “남성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들의 성적 괴롭힘도 문제”라며 “사람들은 내가 골프장에서 몸에 딱 붙는 옷을 즐겨 입는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나쁜 사람, 난잡한 사람으로 몰아갔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스피래닉은 2018년 미국 유명 스포츠 전문 매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가 발간하는 수영복 특집판 모델로 나섰다. 스피래닉은 “SI 수영복 모델이 되는 것은 내 마음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없애는 계기가 됐다”라며 수영복 모델이 자신의 꿈 중 하나였다고 고백했다. 스피래닉은 현재 SNS, 유튜브 등을 통해 골프 팬들과 소통하며 자신의 골프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 [씨줄날줄] 강경화 낙선 교훈/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강경화 낙선 교훈/박록삼 논설위원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의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직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 지난 25일(현지시간) 열린 ILO 이사회에서 강 전 장관은 1차 투표를 통과했지만, 2차 투표에서 56표 중 단 2표를 얻는 데 그치며 낙선했다. 아프리카 토고 출신의 질베르 웅보 세계농업기구 사무총장이 당선됐다. 아시아, 여성 최초의 ILO 사무총장 꿈은 사라졌다. 강 전 장관 개인의 아쉬움을 떠나 한국의 안타까움이 크다. 한국은 지금까지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전 사무총장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해 국제형사재판소(ICC) 송상현 소장, 세계은행 김용 총재, 국제해사기구(IMO) 임기택 사무총장,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 이회성 의장,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김종양 총재 등 굵직한 국제기구 수장을 배출해 왔다. 그 배경에는 개인의 전문성 및 역량과 함께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외교력이 있었다. ILO 사무총장 도전은 사실상 처음부터 무모한 도전의 측면이 컸다. 전략과 전술 측면에서 정교한 준비와 노력 또한 부족했다. ILO는 국제기구 중 유일한 노·사·정 3자 기구다. 그에 맞게 28개국 정부 대표와 노사 대표 각 14명 등 총 56명의 이사가 참여한다. 노동 특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을 뜻한다. 지난해 10월 강 전 장관이 공식 도전 의사를 밝히던 당시 민주노총에서는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한국은 지난해 4월 기본협약 3개를 뒤늦게 비준했을 정도로 ‘노동 후진국’으로 꼽혀 왔다. 여기에 아프리카와 유럽 중심의 공고한 결속을 깨기 위한 어떠한 노동의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고용노동부, 외교부 등이 범정부 TF를 꾸리며 지원에 나섰지만 국내 노동계의 외면 속에 국제 노동계의 지지를 받기는 쉽지 않음이 명백했다. 게다가 강 전 장관 개인이 노동과 관련해 내세울 어떠한 업무 이력도 갖지 못한 것은 또 다른 큰 취약점이었다. 하다못해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내지도 않았으니 ILO 사무총장으로서 경쟁력을 갖춘 후보가 아니었다. 전략도 부족했고, 전술도 없었고, 욕심은 과했다.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국제기구 수장 도전에 강 전 장관의 낙선은 교훈이 돼야 한다.
  • 소외계층 청소년에 ‘음악 DNA’… 문화도시 서초 ‘꿈나무 프로젝트’

    소외계층 청소년에 ‘음악 DNA’… 문화도시 서초 ‘꿈나무 프로젝트’

    “멀게만 느껴졌던 바이올린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 같이 합주하는 재미도 있어 수업시간이 기다려졌어요.” 지난해 서울 서초구를 통해 바이올린을 기증받아 전문가에게 배운 장모(14)양은 27일 ‘서초음악꿈나무 악기 나눔사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바이올린을 처음 잡은 지난해 여름에는 연주가 영 서툴렀지만 연말 수료식 즈음엔 비올라, 첼로를 연주하는 친구들과 합을 맞출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서초음악꿈나무 악기 나눔사업은 사용하지 않거나 고장 난 악기를 기증받아 수리·조율한 뒤에 문화소외계층 청소년들에게 전달하고 음악 교육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다. 구는 클래식 악기에 관심은 있지만, 악기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문턱을 낮추고 예술 활동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20년부터 이 사업을 펼치고 있다. 구는 지난 2년간 총 108점의 악기를 기증받아 100명의 문화소외계층 청소년들에게 전달했다.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구 관계자는 “악기를 기증하는 시민들의 ‘나눔’과 클래식 악기거리 내 공방 장인, 연주가들의 ‘재능기부’, 혜택을 보는 ‘문화 취약 청소년’까지 더해 문화예술 공공서비스의 모델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구는 올해도 나눔사업을 추진한다. 우선 다음달 16일까지 가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악기들을 기증받는다. 대상 악기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등 현악기이다. 기증을 원하면 서리풀 청년아트센터 등에 접수하면 된다. 기증받은 악기는 서초음악문화지구로 지정된 서리풀 악기거리의 악기공방 장인들이 수리정비한다. 모든 악기는 오는 7월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소독과정 등을 거쳐 문화소외계층 청소년에게 전달된다. 악기를 기증받은 청소년들은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 서초교향악단 소속 연주자들에게 악기교육을 받게 된다. 이후 구는 서초음악꿈나무 공연 연주회를 열어 청소년들이 그간 연습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줄 계획이다. 이와 함께 구는 서초구립 한우리정보문화센터 소속 발달장애 청년작가와 연계해 수리하기 어려운 기증 악기를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시킬 예정이다. 또 악기 순회 전시회를 개최해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일정은 ▲5~6월 구립반포도서관 ▲7~8월 구립양재도서관 ▲9~11월 구립내곡도서관에서 진행된다. 천정욱 서초구청장 권한대행은 “앞으로도 미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클래식 악기를 다양하게 접하는 기회를 마련해 음악 DNA를 심어 주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자본·지위·인맥 없어도 괜찮아… ‘자급자족’ 예술인의 길 걷는다[청춘기록]

    자본·지위·인맥 없어도 괜찮아… ‘자급자족’ 예술인의 길 걷는다[청춘기록]

    예술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청년이 있다. 기획부터 준비, 실행까지 전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 독립 예술인 청년 이야기다. 자본, 사회적 지위, 인맥 등 기성 예술계의 높은 진입장벽에 맞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청년 예술인 3명의 삶을 들여다봤다.●창작 연극, 독립출판 도전하는 동아리 지난 2월 대학을 졸업한 이유진(25)씨는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모여 만든 창작 연극 집단 ‘245㎐’의 연출을 맡고 있다. 이씨는 27일 “대학에서 듣던 연극 수업이 의무적으로 단순 반복되는 작업처럼 지겹게 느껴졌다”면서 “20대로서 직접 겪고 느낀 청춘의 이야기로 직접 관객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고 245㎐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기획부터 연출까지 모두 맡은 첫 창작극 ‘RE;SET’에는 학교를 벗어나 첫 도약을 준비하는 20대 청년 4명의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맨땅에 헤딩’으로 도전한 창작극에 가장 큰 장벽은 비용이었다. 연극을 올리고 무대에 서기 위해 필요한 극장 대관비와 무대 제작비 등을 20대 초반 청년만의 힘으로 모두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245㎐가 프로젝트 홍보 및 지원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단순히 필요한 돈을 모은다는 차원을 넘어 245㎐의 취지에 공감하는 후원자에게 지지와 응원을 받는다는 의미도 컸기 때문이다. 이씨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대관비와 제작비, 인건비 등 커다란 비용 문제를 해결했고 단원들끼리 학교 의상실과 소품실을 뒤지거나 직접 의상과 소품을 만들면서 극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구체화했다”고 말했다. 지난 6일 두 번째 공연 ‘벨기에 물고기’를 마친 245㎐는 앞으로도 계속 활동을 이어 갈 예정이다. 이씨는 “연극의 매력은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 연극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이라며 “앞으로도 ‘우리가 왜, 지금 여기서 이 연극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독립출판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모여서 자신만의 글을 쓰는 청년도 있다. 차령(21)씨와 부원 8명으로 이뤄진 대학생 독립출판 동아리 ‘몽글몽글(夢글夢글)’이다. 개인별로, 팀별로 지금까지 5권 이상의 책을 출판한 내실 있는 독립 출판사다. 부원 개인이 단독으로 책을 출판한 경우도 있고 동아리 내부에서 팀을 꾸려 공동출판을 하기도 한다. 부원들의 단편소설을 엮은 ‘그럼에도 반짝이는 것들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가 대표작이다. 교정, 교열부터 내지 및 표지 디자인 등의 전 과정을 부원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텀블벅을 통해 출판 비용을 후원받은 ‘몽글몽글’은 마케팅의 일환으로 얼리버드(판매 초기에 구매하는 사람) 후원자에게 돌아가며 편지를 쓰는 ‘롤링페이퍼’를 진행했다. 7명의 부원이 카페에 모여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후원자에게 편지를 썼다.인쇄소에서 100권이 넘는 책을 들고 나와 일일이 포장한 뒤 우체국까지 책을 짊어지고 가 후원자에게 택배를 보냈다. 동아리 부회장 김민호(25)씨는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책의 무게도 어마어마했지만 이걸 독자에게 보여 줘도 괜찮을지에 관한 심리적 무게도 상당했다”고 말했다. 정해진 주제나 정형화된 틀이 존재하지 않아 비교적 자유롭고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평가하거나 심사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이들을 사로잡았다. 차씨는 “굳어진 기존 문학성을 깬 신선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담은 글을 쓰고 다른 부원과 의견을 나눠 출판까지 할 수 있는 독립출판은 저만이 할 수 있는 주체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음악시장에 구애받지 않는 인디 가수 싱어송라이터(작곡·작사·노래를 모두 하는 가수) 안재윤(23)씨는 고교생 시절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자취를 하며 버스킹을 하는 인디 가수의 공연을 처음 접했다. 가수와 관객이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마주 보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안씨를 인디 음악으로 이끌었다. 그때부터 안씨는 인디 가수로서 관객과 직접 만나겠다는 꿈을 꿨다. 안씨는 “작업에 필요한 장비나 녹음실을 빌리는 비용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모았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시행하는 창작준비금지원사업에 신청해 지원금을 받으며 마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완성된 음악을 관객 앞에서 연주하기 위해서는 무대가 필요했다. 안씨는 인디 아티스트를 위해 대관료 없이도 공연할 수 있는 오픈마이크 공연장을 검색해 찾아다니며 관객을 만났다.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가 지금까지 발매했던 음원이 나온다. 안씨는 “대형 기획사에서는 상품성을 기준으로 음악을 판단한다”면서 “나의 생각과 감정을 음악과 무대에 그대로 나타낼 수 있는 인디 가수의 자유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로 공연장이 폐업하며 인디 가수들이 다들 정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며 “힘든 일이 많아도 각자의 감정을 음악으로 풀어내며 서로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응원의 말을 전했다. 김하진(경제학과 2년) 권수빈(경영학과 2년) 성대신문 기자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서울신문은 2013년 5월 ‘명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인물탐구 기획 코너를 통해 고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2회에서 걸쳐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고인은 당시에도 만 80세 고령이었지만, 스트레이트로 5시간에 걸친 짧지 않은 인터뷰를 정력적으로 소화해 냈다. 자신의 인생을 채워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명사가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해방·전쟁·좌우 분열… 격동의 시대, ‘책벌레 소년’ 헌법에 눈을 뜨다유신헌법 참여 협박에도 정치권 러브콜에도… 학자의 양심 지켰다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유복한 친구 둔 덕에 책 실컷 읽고...극렬한 좌우 대립 지켜보며 성장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시력 나빠 전쟁터 끌려가지 않아...대학 입학 천막 강의실 공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내’ 전혜린과 캠퍼스 커플...뮌헨대 유학중 결혼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이혼 1년 뒤 전혜린 작가 스스로 목숨 끊어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교 교사와 재혼...꼬박꼬박 ‘그 사람’ 제사 챙기는 아내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 15년 10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잘살아보세~”라는 한목소리 외의 다른 의견과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다. ‘지성인의 전당’인 대학에는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교수와 학생들을 감시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에도 대학과 언론의 비판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적어도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2년부터 3년간 서울대 학생과장...‘중정’과 맞서“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무급 조교로 일하다가 1962년 9월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학생과장을 맡았어요. 요즘 같으면 학생담당 부학장쯤 되는데 그걸 만 3년 했어요. 3년 동안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이랑 참 많이도 싸웠었죠. 학교에 출입하던 중정 사람 중 훗날 안기부(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장까지 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어요. 그때 중정의 한 간부가 ‘당신에 대한 기록이 엄청 쌓여 있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학생들 선동하는 걸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죠. 하긴 그땐 법대 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데모했고, 그 학생들에게 우리 법이 잘못됐다고 가르친 것도 나였으니….” 교수들로부터 정의와 바른 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김 교수의 말대로 당시 서울대에서는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조직됐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법대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실장을 지낸 정정길(71)씨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합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한일기본 협정 반대 시위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을 추진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 외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시위 세력은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해 ‘6·3 사태’가 터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선봉 고려대 이명박-서울대 정정길 박 대통령은 6월 3일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시위대 선봉에서 정정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나선 인물이 이명박 고려대 상대 회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단과대 회장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학교 총학생회장은 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는데 어찌 보면 거꾸로 된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인연이죠. 노태우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13~15대 국회의원)도 시위단 사이에서 격문 쓰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라며 웃어 보였다. 학생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바른 정치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굳은 의지였지만, 중정에 끌려간 그들을 빼오는 것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6·3사태로 정정길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대생들이 중정과 경찰 등에 잡혀갔다. 법대 학장이 학생들에 대한 보증서를 써 주고 김 교수 등이 중정 등을 찾아가 사정해 수감된 학생들을 빼왔다. “그땐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시위만 했다 하면 학생들이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중앙청(현 경복궁 자리)으로 가곤 했죠. 저는 학생 관리도 제 일이었으니까 관리 차원에서 같이 중앙청으로 따라가고 하면서 치안국 보안과장과 서울 정보분실장과도 자주 마주쳤죠. 한 놈은 중학교 동기고 또 한 놈은 대학 동기였는데 그놈들이 저한테 ‘너는 학생 과장이라면서 왜 학생 선도도 못하냐’고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저는 ‘니들이나 똑바로 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요.” 정보요원이 수업을 감시하고 학생들이 중정과 경찰서 유치장 등을 드나들었어도 김 교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에 몇 없었던 ‘낭만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했다.창경궁 통째로 빌려 이대생들과 미팅 주선 “그때라고 해서 학생들이 시위만 하고 돌 던지고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하루는 총학생회장 정정길이 우리가 종합대학이니까 종합대 축제를 하자면서 서울대생 전원과 이화여대생 전원 미팅을 제안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청춘 남녀들에게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제가 창경원(현 창경궁)을 빌려볼 생각으로 창경원장을 찾아갔어요. 창경원장도 학교 선배였거든요. 창경원장도 암울한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승낙하면서 날을 잡아 ‘창경원 오후 휴원’이라고 걸어놓고 두 학교 학생들만 무료 입장시켰죠. 지금 보면 대규모 미팅 같은 것인데 순 남학생 판에 여학생은 몇 없고 그런 모습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래도 훗날 그 만남을 계기로 결혼한 사람이 10쌍도 넘더라고요. 우리한텐 재미고 낭만이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시는 분들 애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캠퍼스의 소소한 낭만도, 학자 김철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철수에게 유신헌법에 근거한 탄압에 앞서 유신헌법 제정 공신이 되기를 강요했다. “정권이 유신헌법 만들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했어요. 몇몇 교수는 해외에 보내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야당 성향 교수들도 법무부 자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그걸 하라고 강요했죠.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했더니 정부 쪽에서는 쉽게 말해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고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면 항명죄라며 협박까지 했죠. 그게 다 나중에 유신헌법이 각계의 자문위원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라는, 정당성 부여를 위한 계략이었던 거죠.” 김 교수는 갖은 협박성 설득에도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어 유신헌법 홍보에 나서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말이 제안이지 명령과 강압이었다. 정권은 중정을 통해 김 교수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유신헌법 홍보를 맡도록 압박했다. 유신헌법 찬양 글·홍보방송 안하고 버텨 “하루는 학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식사 마치고 저를 TBC(동양방송) 앞에 내려주더군요. 방송에 출연하라는 뜻이었죠.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후문으로 빠져나갔죠. 방송은 저 대신 다른 분이 출연했는데 중정에서는 방송 펑크 냈다고 난리가 났고, 그때 제대로 찍혀 저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 교수는 학자의 양심에 반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언론사의 정치부장이 찬양 글을 대신 썼다. 이후 김 교수를 대신해 유신을 찬양했던 한 인사는 국회 배지를 달았고, 또 한 인사는 장관까지 올랐다. 반면 김 교수에게는 정권의 보복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저술 활동이 금지됐다. “청와대 쪽 사람들과 법학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한테 ‘절대로 책 쓰지 말라. 책 쓰면 큰일 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이미 제3공화국에 관한 헌법책을 다 써놨고 유신헌법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의 문제점까지 다 정리한 상태였거든요. 출간을 강행했죠. 그게 1973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저술활동 금지당한 후 미·독 떠돌아 하지만 책은 출간 즉시 전량 몰수됐고 김 교수는 중정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독재적인 대통령’, 유신헌법을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한 대목에 대해서는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억지도 부렸다. 결국 김 교수는 정권이 문제 삼은 부분의 수정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1년간 집필이 금지됐고, 연구비도 끊겼다. 김 교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 등지의 방문 교수를 지원해 국외를 떠돌며 박정희의 시대가, 유신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바랐다. 철권(鐵拳) 같았던 박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으로 유린된 헌법을 바로잡을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 김 교수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김 교수 등이 제안한 개정안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도 만족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라는 걸림돌을 만나 헌법도 정치적 의도로 변질됐다. 그래도 김 교수는 1987년 헌법재판소 설치를 ‘유신 이후 헌법적 발전’으로 꼽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애정 어린 쓴소리를 늘어놨다. “요즘 헌재의 결정을 보면 재판관들이 얼마나 헌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야간 옥외집회 금지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것들은 또 질서 유지의 관점으로 보면 필요하거든요. 판검사들이 재판관이 되는데 판검사 때는 헌법을 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연구관들이 재판관보다 헌법을 더 잘 알아요. 재판관 임명 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해석 권한을 놓고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빚은 데 대해서는 헌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최고 사법부가 헌법재판소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도 헌법 만들 때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로 둬야 한다고 주장해 법원에서 결사반대했던 건데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 해석권한을 가진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신시절 정권에 저항했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동체 주의’를 강조했다. “30대에 진보적이지 않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는 개인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해도 개인은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국민이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사회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관 임명시 헌법 이해도 반영 필요”여든의 노학자는 헌법 연구에만 매진한 인생을 조용히 돌아봤다. 그는 학자가 대통령이 될 게 아니라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학자가 정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학자의 소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80년대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에서도 관료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저는 대학교수가 관료나 정계로 가는 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학자나 언론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관료나 정치인이 되면 조직 논리가 우선하거든요. 소신을 지키려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직에서 그런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들죠. 정치권은 특히 더 심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수와 싸울 수 있겠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는 젊은 기자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헌법과 사회 질서에 대한 고민에서는 좌익 프락치로 몰려 잡혀가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김철수의 고민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며 책장 가득한 그의 저서를 보며 “인세도 많이 받으셨겠다”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옛날엔 꽤 들어오더니만 요즘은 학생들이 책을 안 사긴 참 안 사네요”라며 웃어 보였다.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배 곯는 예술’은 옛말···‘자급자족’ 독립 예술인이 된 청년들 [청춘기록]

    ‘배 곯는 예술’은 옛말···‘자급자족’ 독립 예술인이 된 청년들 [청춘기록]

    <4>기성 시장 맞서 독립 예술인이 된 청년들 예술을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청년이 있다. 기획부터 준비, 실행까지 전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 독립 예술인 청년 이야기다. 자본, 사회적 지위, 인맥 등 기성 예술계의 높은 진입장벽에 맞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청년 예술인 3명의 삶을 들여다봤다.●크라우드펀딩으로 비용 해결…직접 의상 만들기도 지난 2월 대학을 졸업한 이유진(25)씨는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모여 만든 창작 연극 집단 ‘245Hz’의 연출을 맡고 있다. 이씨는 27일 “대학에서 듣던 연극 수업이 의무적으로 단순 반복되는 작업처럼 지겹게 느껴졌다”면서 “20대로서 직접 겪고 느낀 청춘의 이야기로 직접 관객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고 245Hz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기획부터 연출까지 모두 맡은 첫 창작극 ‘RE;SET’에는 학교를 벗어나 첫 도약을 준비하는 20대 청년 4명의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맨땅에 헤딩’으로 도전한 창작극에 가장 큰 장벽은 비용이었다. 연극을 올리고 무대에 서기 위해 필요한 극장 대관비와 무대 제작비 등을 20대 초반 청년만의 힘으로 모두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245Hz가 프로젝트 홍보 및 지원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단순히 필요한 돈을 모은다는 차원을 넘어 245Hz의 취지에 공감하는 후원자에게 지지와 응원을 받는다는 의미도 컸기 때문이다. 이씨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대관비와 제작비, 인건비 등 커다란 비용 문제를 해결했고 단원들끼리 학교 의상실과 소품실을 뒤지거나 직접 의상과 소품을 만들면서 극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구체화했다”고 말했다. 지난 6일 두 번째 공연 ‘벨기에 물고기’를 마친 245Hz는 앞으로도 계속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씨는 “연극의 매력은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 연극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이라며 “앞으로도 ‘우리가 왜, 지금 여기서 이 연극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선보이는 독립출판 청년들 독립출판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모여서 자신만의 글을 쓰는 청년도 있다. 차령(21)씨와 부원 8명으로 이뤄진 대학생 독립출판 동아리 ‘몽글몽글(夢글夢글)’이다. 개인별로, 팀별로 지금까지 5권 이상의 책을 출판한 내실 있는 독립 출판사다. 부원 개인이 단독으로 책을 출판한 경우도 있고 동아리 내부에서 팀을 꾸려 공동출판을 하기도 한다. 부원들의 단편소설을 엮은 ‘그럼에도 반짝이는 것들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가 대표작이다. 교정, 교열부터 내지 및 표지 디자인 등의 전 과정을 부원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텀블벅을 통해 출판 비용을 후원받은 ‘몽글몽글’은 마케팅의 일환으로 얼리버드(판매 초기에 구매하는 사람) 후원자에게 돌아가며 편지를 쓰는 ‘롤링페이퍼’를 진행했다. 7명의 부원이 카페에 모여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후원자에게 편지를 썼다. 인쇄소에서 100권이 넘는 책을 들고 나와 일일히 포장한 뒤 우체국까지 책을 짊어지고 가 후원자에게 택배를 보냈다. 동아리 부회장 김민호(25)씨는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책의 무게도 어마어마했지만 이걸 독자에게 보여줘도 괜찮을지에 관한 심리적 무게도 상당했다”고 말했다. 정해진 주제나 정형화된 틀이 존재하지 않아 비교적 자유롭고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평가하거나 심사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이들을 사로잡았다. 차씨는 “굳어진 기존 문학성을 깬 신선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며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담은 글을 쓰고 다른 부원과 의견을 나눠 출판까지 할 수 있는 독립출판은 저만이 할 수 있는 주체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인디 가수, 음악시장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노래하다 싱어송라이터(작곡·작사·노래를 모두 하는 가수) 안재윤(23)씨는 고교생 시절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자취를 하며 버스킹을 하는 인디 가수의 공연을 처음 접했다. 가수와 관객이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마주보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안씨를 인디 음악으로 이끌었다. 그때부터 안씨는 인디 가수로서의 관객과 직접 만나겠다는 꿈을 꿨다. 안씨는 “작업에 필요한 장비나 녹음실을 빌리는 비용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모았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시행하는 창작준비금지원사업에 신청해 지원금을 받으며 마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완성된 음악을 관객 앞에서 연주하기 위해서는 무대가 필요했다. 안씨는 인디 아티스트를 위해 대관료 없이도 공연할 수 있는 오픈마이크 공연장을 검색해 찾아다니며 관객을 만났다.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가 지금까지 발매했던 음원이 나온다. 안씨는 “대형 기획사에서는 상품성을 기준으로 음악을 판단한다”면서 “나의 생각과 감정을 음악과 무대에 그대로 나타낼 수 있는 인디 가수의 자유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로 공연장이 폐업하며 인디 가수들이 다들 정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며 “힘든 일이 많아도 각자의 감정을 음악으로 풀어내며 서로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응원의 말을 전했다. 김하진(경제학과 2학년) 권수빈(경영학과 2학년) 성대신문 기자
  • ‘안데르센상’ 이수지 작가, 文 대통령 축전에 “굳건하세요”

    ‘안데르센상’ 이수지 작가, 文 대통령 축전에 “굳건하세요”

    ‘아동문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가 문재인 대통령의 축전에 “항상 굳건하시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26일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수지 작가가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것에 축전을 보냈더니, 이 작가가 자신의 그림책 두 권을 감사 인사로 보내왔다. ‘3만원 이하니까ㅎㅎ 괜찮겠죠’라면서요”라고 밝혔다. 이 작가는 자신의 대표작인 ‘여름이 온다’와 ‘물이 되는 꿈’ 두 권을 보냈다. 문 대통령은 ‘여름이 온다’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글미에 글자 한 자 없는 데도, 한 권의 그림책을 보면서 이야기와 음악을 함께 듣는 느낌이 든다”고 소감을 전했다. ‘물이 되는 꿈’에 대해서는 “음악인 루시드폴과 공저인데, 옛날 그림 식으로 접혀 있어서 펼치면 연결되는 긴 그림에 여러 가지 꿈과 상상이 담겨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음악이 그려져 있어서 그림과 음악이 재미있게 결합된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이 작가는 증정 서명도 예쁜 그림으로 해줬다”며 이 작가의 SNS 계정을 소개했다.이 작가는 책과 함께 “존경하는 문 대통령님,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항상 굳건하세요!”, “존경하는 문 대통령께, 물처럼 자유로우시기를….” 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앞서 지난 21일(현지시간) 이 작가는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안데르센상을 수상했다.22일 문 대통령은 이 작가에 축전을 보내 “이 작가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 놓인 긴장과 즐거움을 탐구하는 작가’라는 호평을 받으며 줄곧 그림책의 혁신을 추구했다”며 “‘출판 한류’의 위상을 높인 이 작가가 자랑스럽다. 코로나로 지친 국민께도 큰 기쁨과 위로가 될 것”이라고 축하했다.
  • 조국 ‘가불 선진국’ 출간 동시에 베스트셀러 1위… “文정부, 최초의 ‘선진국’ 대열 진입”

    조국 ‘가불 선진국’ 출간 동시에 베스트셀러 1위… “文정부, 최초의 ‘선진국’ 대열 진입”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신간 ‘가불 선진국’(메디치미디어)이 25일 공식 출간되자마자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지난 17일 예약판매부터 책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출판사는 벌써 6쇄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조 전 장관의 책은 이날 오후 교보문고 강남점과 광화문점, 잠실점 등 오프라인 서점에 진열됐다. 지난 17일 메디치미디어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약판매로 1000부가 소진된 뒤 교보문고와 예스24, 알라딘 등 주요 서점을 통해 온라인 예약판매가 이뤄졌다. 예약판매로 이미 3만여부, 4쇄 분량에 가까운 책이 판매된 것으로 전해졌다. 공식 출간일인 이날 ‘가불 선진국’은 교보문고 인터넷 베스트셀러 주간 1위, 예스24 국내도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 알라딘 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나란히 올랐다. ‘가불 선진국’은 조 전 장관이 문재인 정부 국정 운영에 참여한 경험을 토대로 성과와 부족한 점, 미완의 과제 등을 정리한 책이다. 조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의 정신에 기초해 국정을 운영했고 대한민국을 최초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시킨 정부”라면서 “문재인 정부의 최고 성과는 외교, 안보, 방역에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우리나라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라며 사회권의 강화를 주장한다. 노동3권, 근로의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주거권, 보건권, 건강권 등 시민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실책으로 가장 많이 비판받는 것이 부동산 정책”이라면서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려는 시민의 꿈은 소중하며 존중되어야 하지만 집값을 단지 시장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지대 개혁을 통해 집이 투기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동시에 국가는 자기 소유의 집 외에도 다양한 주거 형태를 공급해 시민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택정책의 초점은 중산층과 서민에게 안정적 주거를 제공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 개막…6개팀 7개월간 120경기 대장정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 개막…6개팀 7개월간 120경기 대장정

    국내 유일 독립야구리그인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가 25일 경기 광주시 곤지암읍 팀업캠퍼스 2구장에서 연천 미라클과 성남 맥파이스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2022시즌의 막을 올렸다. 올해로 4년째를 맞는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는 연천 미라클, 고양 위너스, 파주 챌린저스, 성남 맥파이스, 포천 몬스터, 가평 웨일스 등 총 6개 팀이 참가해 10월까지 약 7개월간 대장정을 펼친다. 팀당 40경기씩, 총 120경기로 정규리그를 치른 뒤 상위 3개 팀 간 결선 토너먼트가 벌어진다. 리그 2위와 3위 팀이 3전 2선승제로 먼저 경기하고 그 승자가 1위 팀과 5전 3선승제로 우승팀을 가린다. 올 시즌에는 지난해 우승팀 광주 하이에나들이 해체를 결정해 아쉬움을 남겼지만 포천 몬스터가 새롭게 창단됐고, 시흥 울브스가 가평 웨일스로 연고지를 이전해 재창단하면서 6개 구단 체제를 유지하게 됐다. 이번 시즌에는 유튜브 채널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를 통해 팀업캠퍼스 2구장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를 생중계한다. 또 지난해 코로나19로 실시하지 못한 프로야구 2군 및 대학팀과의 교류전을 확대하고, 프로구단들을 초청해 트라이아웃(공개 선발 시험)도 할 예정이다. 이날 개막식에는 이석범 경기도 문화체육관광국장, 이원성 경기도체육회장, 김재철 경기도야구소프트볼협회장, 김성일 경기도독립야구경기도리그위원장, 엄미정 SCG스포츠아카데미 대표 등이 참석해 6개 팀 관계자와 선수들을 격려했다. 오병권 경기도지사권한대행은 영상축사에서 “경기도는 앞으로도 독립야구단 활성화에 나서면서 선수들의 꿈을 담아낼 무대를 넓혀가겠다”며 “선수들이 부상 없이 멋진 활약을 펼쳐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프로리그에 진출하지 못하거나 은퇴 또는 방출된 선수들이 모여 다시 프로야구의 꿈을 향해 뛸 수 있도록 2019년부터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를 지원했다. 지난해 7월에는 ‘경기도 독립야구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법적 근거도 마련했다. 올해에는 기존의 리그 운영비와 출전 수당 지원 외에 감독 및 코치 수당이 신설돼 보다 안정적인 리그 운영이 가능하게 됐다. 지난해에는 광주 하이에나들의 권광민 선수가 2022 한국야구위원회(KBO) 신인드래프트에서 한화 이글스에 지명되는 등 총 6명의 선수가 프로 진출에 성공했다. 2019년의 5명, 2020년의 3명, 2021년의 6명을 더하면 출범 이후 총 14명의 선수가 프로에 진출했다.
  • ‘25억’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가세연 도움 맞다”

    ‘25억’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가세연 도움 맞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구 달성군 유가읍 쌍계리의 단독주택을 25억원에 매입했다. 박 전 대통령의 측근인 유영하 변호사는 사저 마련을 위해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가세연은 지난달 “우리가 직접 밝히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머지않아 박 전 대통령이 직접 밝히실 때가 올 것이다”라며 달성 사저 구입에 기여했음을 암시한 바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사저는 연면적이 700㎡에 달할 만큼 주변 입지에 보기 드문 대형 단독주택인데다 각종 보안설비도 완비됐다. 지하 1층~지상 2층짜리 단독주택에 3개의 부속 건축물로 이뤄졌으며 내부 면적은 ▲지하 1층 132.4㎡ ▲지상 1층 331.9㎡ ▲지상 2층 201.6㎡다. 마당에는 조경수가 다수 식재돼 있으며 작은 정자도 하나 세워져 있다. 유영하 변호사는 25일 대구매일신문 유튜브 채널 ‘매일 관풍루’와의 인터뷰에서 “사저 구입자금은 개인 간의 채권채무 관계이기 때문에 상세하게 밝히진 못하지만 일정 부분 가세연이 도움을 준 게 맞다”라며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 빌린 것이다. 차용한 것이기에 갚아야 할 부분이며 가족들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앞으로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유영하, 대구시장 출마설 솔솔 유 변호사는 “당시 집 구입자금을 마련할 때 은행대출 부분에 문제가 있어 급한 대로 빌렸다”며 “(가세연이 자발적으로 줬다면) 증여가 되는 것이어서 빌렸다. 변제 계획도 다 마련돼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현재 박 전 대통령 가족들이 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고 앞으로도 줄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 변호사는 대구시장 출마설 등에 대해선 “박 전 대통령과 상의할 것이며, 가족과 고심 중이다”라면서 “대구시장이든, 2년 후 총선이든 국민이 원하고, 여건이 무르익으면 따르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은 대구 사저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돌아보면 지난 5년의 시간은 저에게 무척 견디기 힘든 그런 시간이었다. 정치적 고향이자 마음의 고향인 달성으로 돌아갈 날을 생각하며 견뎌냈다”라며 “제가 못 이룬 꿈들은 이제 또 다른 이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좋은 인재들이 저의 고향인 대구의 도약을 이루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저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 한다”고 말했다.
  • 허구연 신임 KBO 총재 “지자체가 구단 깔보면 연고지 버리는 강단도 필요”

    허구연 신임 KBO 총재 “지자체가 구단 깔보면 연고지 버리는 강단도 필요”

    경기인 가운데 첫 한국프로야구의 수장이 된 허구연 KBO 신임 총재는 “솔직히 나는 한국인 빈 스컬리가 되고 싶었다. 버드 셀리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고 털어놨다. 빈 스컬리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캐스터다. 버드 셀리그는 1998∼2015년 메이저리그 사무국 커미셔너(총재)로 일하며 미국 야구의 전성기를 열었다.KBO는 25일 “서면 표결을 통해 구단주 총회 만장일치로 허구연 위원을 제24대 총재로 선출했다”고 밝혔다. 허 신임 총재는 KBO 발표 직후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해설위원으로 야구 인생을 마감하는 게 내 꿈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시기에 총재 자리에 올랐다”며 “우리 한국야구에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이 보이도록 노력하겠다”고 취임사를 전했다. 허 신임 총재는 야구계 현안을 훤히 꿰뚫고 있다. 최근 화두가 된 ‘강정호 복귀 추진 파문’도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 중이다. 그는 “강정호 문제를 신중하게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았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려운 시기에 취임한다. 솔직히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난제를 풀어가야 하는 게 총재의 역할이다. 우리 한국야구에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이 보이도록 노력하겠다. ▲가장 시급한 일은. -정규시즌 개막이 다가왔다. 김광현(SSG 랜더스), 양현종(KIA 타이거즈)의 복귀, 김도영(KIA) 등 신인의 등장, 야시엘 푸이그(키움 히어로즈) 등 개성 있는 외국인 선수의 입단 등 호재가 많다. 이런 긍정적인 부분이 주목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키움이) 강정호 복귀를 추진하면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데, 문제를 신중히 살피겠다. 한쪽의 이야기만 듣지 않고, 법률적인 부분 등을 잘 들춰보겠다. 내가 또 법대(고려대 법학과 학사·석사) 출신이지 않은가. 지금 KBO 규약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KBO 실무진의 보고를 받고, 법률 자문 등도 구해서 신중하게 판단하겠다.▲야구인 최초 KBO 총재라는 무게감도 느낄 텐데. -커미셔너(총재)는 팬, 구단, 선수의 동의를 구하며 리그를 발전시키는 자리다. 각자 입장이 다른 상황에서 절충안을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구단과 선수들에게 ‘팬 퍼스트’를 강조하고 싶다. 선수들은 프로다운 경기력을 보여줘야 하고, 많은 구성원이 ‘스피드 업’ 등 야구의 재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팬 서비스도 선수와 구단의 중요한 임무다. KBO리그의 인기가 하락세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 2022년이 한국 야구의 터닝 포인트가 되길 기원한다. ▲팬들은 인프라 확충‘을 기대한다. -내가 ’자연인‘일 때도 지자체 관계자를 만나서 야구장 등 인프라 구축을 강조했다. 최근까지도 꾸준히 지자체장과 만났다. 대전, 부산, 서울 등에 야구장 신축이 절실하다. 이 부분을 독려할 것이다. 또한, ’남해안 벨트‘를 조성해 국내에서 ’2군 캠프‘가 가능하게 하겠다. 이렇게 되면 아마추어팀도 활용할 수 있다. 지방에 야구 붐이 일어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지자체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기업이 운영하는 KBO리그 상황을 고려하면, 구단은 지자체에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총재인 내가 지자체에 목소리를 높이겠다. 싸움도 불사할 생각이다. 약속만 하고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자체가 ’우리는 야구단의 연고지‘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한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지자체가 불성실한 태도로 야구단을 대하면 구단이 연고지를 떠나는 강단 있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해설위원 허구연’을 그리워할 팬도 많을 텐데. -내 꿈은 해설위원으로 야구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나는 빈 스컬리가 되고 싶었지, 버드 셀리그가 될 생각은 없었다. 2022시즌 KBO리그와 메이저리그 중계를 위해 준비도 많이 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갑작스럽게 KBO 총재 제의를 받았고, 결국 KBO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팬들에게 방송으로 인사드릴 기회도 없이 떠난다. 그 점이 참 아쉽다. 40년 동안 팬들께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한 번도 ’퍼펙트한 해설‘을 하지 못했다. 최선을 다 해도 완벽하지는 못했다. 마이크를 놓는 지금, 아쉬운 장면이 더 많이 떠오른다. 총재 자리에서 야구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 사망한 마라도나가 오는 11월 카타르 월드컵에 참석한다?

    사망한 마라도나가 오는 11월 카타르 월드컵에 참석한다?

    사망한 마라도나가 오는 11월 카타르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참석할 수 있을까? 이제는 축구계의 전설이 된 디에고 마라도나를 2022 카타르 월드컵에 참석시키자는 캠페인이 시작돼 관심을 끌고 있다.  캠페인에 발동을 걸고 나선 주체는 봄베이라는 광고대행사와 콘텐츠 제작 대행업체 SDO 등 두 곳이다. 이들 2개 업체는 "11월에 월드컵이 열리는 카타르로 사망한 마라도나의 심장을 가져가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광고대행사 봄베이의 이사 마누엘 베가는 "마라도나가 생존해 있다면 반드시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찾아 아르헨티나 월드컵 대표팀을 응원했을 것"이라면서 "그 꿈을 이뤄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같은 회사의 또 다른 이사 하비에르 멘사스티는 "경기 관전과 아르헨티나 대표팀 응원은 마라도나가 고인이 되기 전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일"이라면서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도 우리는 마라도나의 존재감이 느껴지길 원한다"고 강조했다.  2개 업체의 구상은 사망한 마라도나의 심장이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아르헨티나 월드컵대표팀과 동행하는 것이다. 구상이 현실화한다면 마라도나의 심장은 아르헨티나 월드컵대표팀과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카타르로 날아간다. 아르헨티나 월드컵대표팀이 숙소로 사용할 호텔에서 선수 룸에 보관되면서 연습을 할 때마다 동행한다.  경기 때 선수들과 함께 입장해 경기를 관전(?)하는 건 물론이다.  광고대행사 봄베이는 "신의 뜻이라면, 그리고 마라도나가 도와준다면 (아르헨티나가 월드컵에서 우승해) 7경기 후 월드컵트로피 곁에 마라도나의 심장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소 황당하게도 들리는 말이지만 당국이 허락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마라도나의 심장은 현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경찰이 보관 중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사망한 마라도나를 부검한 부에노스아이레스 경찰은 삼엄한 경비 속에 마라도나의 심장을 포말린에 보관하고 있다.  한편 이들 2개 업체의 제안에는 벌써부터 지지가 잇따르고 있다.  마라도나 박물관의 관장 세사르 페레스는 "마라도나의 심장이 카타르로 가는 월드컵대표팀과 동행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마라도나의 심장으로 하여금 월드컵대표팀과 동행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한편 마라도나는 2020년 11월 25일 사망했다. 카타르월드컵 개막(11월 21일) 직후 사망 2주기가 된다.
  • [열린세상] 날개라도 만들어 입으라는 건가/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열린세상] 날개라도 만들어 입으라는 건가/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하늘을 나는 꿈을 꿀 때가 있다. 한 번도 맨몸으로 하늘을 날아 본 경험이 없는데도 꿈속에서는 어찌나 신이 나는지 360도 공중회전도 자유자재다. 그 꿈을 꾼 날이면 가고 싶은 곳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단순한 장소 이동의 의미가 아닌 그 사람 안의 자율성이 온전히 발현되는 의미라는 것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약 8년 전인 2014년 3월 휠체어나 유아차를 이용하는 교통약자 몇 명이 모여 대한민국과 서울시, 경기도, 교통사업자를 상대로 시외(市外) 이동권 보장을 위한 장애인 차별구제 소송을 제기했다. 몇 년에 걸친 소송을 통해 1심과 2심 재판부는 미약하게나마 교통사업자에게 휠체어 승강설비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지난 2월 17일 이 휠체어 승강설비 제공 의무마저도 없다고 봐 기존 원고 승소 부분을 파기했다. 원고들의 집과 직장의 위치를 고려하면 피고들이 운행하는 모든 노선의 버스에 원고들이 실제 탑승할 구체적·현실적 개연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란다. 설상가상으로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저상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것도 장애인 차별이 아니라고 봤다. 교통사업자가 교통약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정당한 편의시설을 규정한 ‘교통약자법 시행령 별표2’에는 ‘승하차 편의를 위한 휠체어 탑승설비’를 설치하도록 규정돼 있을 뿐 ‘저상버스를 도입하라’는 규정은 없어서란다. 2001년 1월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로 위태롭게 이동하던 장애인이 7m 아래로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이 참사 이후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안전하게 이동할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명제 아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본격화됐다. 2005년에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해 이동할 수 있는 권리’로서 이동권을 명시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제정됐다. 그렇게 이어 온 지 21년째인 지금의 상황은 좀 나아졌을까. 시내버스(68.1%)는 지하철(31.9%)보다 두 배 이상 애용되는 교통수단이지만 저상버스가 많다고 자랑하는 서울조차도 시내버스 중 저상버스 비율이 겨우 절반을 넘었다. 비수도권의 시내버스 저상버스 설치율은 30%도 안 된다. 먼 지역을 오갈 때 요긴한 시외버스는 2019년에야 휠체어 탑승설비가 있는 버스로 시범운행됐다. 겨우 10대로 시작한 이 버스는 현재 시외버스와 고속버스 전체를 통틀어 전국에 단 7대에 불과하다. ‘장애인도 버스 타고 고향 가고 싶다’는 소망을 헛된 꿈이라 구겨 버리는 이 현실을 바꾸고자 지난해 말 천신만고 끝에 교통약자법 개정을 이끌어 냈지만 시외버스와 고속버스에 저상버스를 도입할 의무는 결국 제외됐다. 이 와중에 사실상 장애인 시외 이동권을 전면 부정한 이번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이다. 지하철이 처음 생길 때 그냥 땅으로 다니면 되지 굳이 왜 위험하게 지하에 굴을 뚫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반대를 이겨 내고 자리잡은 지하철은 서울만 해도 일주일에 500만명 넘게 이용하는 시민의 발이 됐다. 사람이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음은 평범한 일상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이기에 ‘이 정도면 충분한’ 타협은 불가능하다. 비용이 많이 든다고 인간의 존엄을 침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동권 투쟁 20년이 넘는 동안 좌절을 거듭하는 장애인들에게 지금 같은 상황을 감내하라고 하는 것은 차라리 날개나 만들어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미국 장애인 운동의 살아 있는 역사인 주디스 휴먼은 평범함을 위한 투쟁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장애인이 아닌 시민이 됐다고 고백했다. 평범함을 위한 이동권 연대에 살포시 힘을 보태 보면 어떨까.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브뤼겔의 두 마리 원숭이/비스와바 심보르스카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브뤼겔의 두 마리 원숭이/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브뤼겔의 두 마리 원숭이/비스와바 심보르스카 꿈에서 대입 면접 전형을 치르는데 창가에는 사슬에 묶인 두 마리 원숭이가 묶여 있다 창 너머로 하늘이 날아다니고 바다는 멱을 감는다 나는 인류의 역사에 관해 구두시험을 보는 중 말을 더듬으며 한창 죽을 쑤고 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빈정거리듯 듣고 있고 또 한 마리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듯 내가 질문을 받고 말이 막히면 원숭이 한 마리가 가만히 사슬을 흔들어 살짝 귀띔해 준다 심보르스카의 이 시 따스하다. 훗날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될 시인은 대학 입시 구두시험에서 말을 더듬으며 죽을 쑨다. 사슬에 묶인 원숭이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귀띔해 준다. 뭐라 얘기했을까. 당신이 사랑할 세상과 아무 관련이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쓰고 싶은 시를 얘기하세요. 암기한 지식을 묻는 모든 시험은 초라하다. 인간의 꿈과 거리가 멀다. 대학 시절, 오월 항쟁이 있었고 강의는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기말시험 답안지에 그 무렵 내가 쓴 시 몇 편을 정성스레 적었다. 수강신청 과목 모두 다른 시들을 적었음은 물론이다. 다 함께 아팠던 그 시절, 엉뚱한 선생들은 내 답안지에 A를 주었다. 인간의 꿈이 살아 있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곽재구 시인
  • 끊임없이 상상합니다…나오지 않는 이야기까지

    끊임없이 상상합니다…나오지 않는 이야기까지

    “뮤지컬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까지 루시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생각하죠.” 이제는 스테디셀러 뮤지컬이 된 ‘지킬앤하이드’의 헤로인, ‘루시’ 역의 배우 선민(35)을 지난 22일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만났다. ‘지킬앤하이드’는 인간의 내재된 본성이 분리되는 실험을 통해 탄생한 하이드와 지킬이 벌이는 갈등이 주된 서사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클럽 무용수 루시가 등장한다. 루시는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지킬에게 하이드의 난폭성과 잔인함을 일깨워 준다. 선민은 이번 시즌 1차 캐스팅 라인업에 이어 2차에도 루시 역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루시는 신사인 척 다가오는 남자들이 결국 자신의 몸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지킬과의 관계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작품 속 지킬은 루시에게 아무것도 얻어 내려 하지 않는다. 루시에게 명함을 주며 ‘친구’라고 관계를 정의한다. 선민은 “루시는 친구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서로에게 얻어 낼 것이 없더라도 ‘새 인생을 살아 보라’ 얘기해 주고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며 “루시는 지킬에게 난생처음 응원을 받고 새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선민과 루시의 인연은 각별하다. 2010년 뮤지컬 입문 당시 ‘지킬앤하이드’에서 루시를 연기했고 8년 공백을 깨고 복귀한 ‘드라큘라’(2021)에서 맡았던 배역도 루시였다. 그는 “‘드라큘라’의 루시는 청혼자 중에서 멋있는 남자, 돈 많은 남자가 아닌 마음을 알 수 없는 남자에게 끌리는 호기심이 많은 인물이라면 ‘지킬앤하이드’의 루시는 짓눌린 현실에 꿈과 열정 등을 잊고 사는 존재지만, 지킬의 응원으로 열정, 꿈틀거림을 느끼는 존재”라고 했다. 선민은 2013년 ‘아르센 루팡’ 이후 뮤지컬 무대를 떠나 있었다. 그는 “캐나다 밴쿠버에 사촌 언니를 보러 갔다가 그곳이 너무 좋아 오래 머물게 됐다”며 “딸로서, 친구로서 등 누구로서의 내가 아니라 ‘인간 이선민(본명)’만 남긴 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무대가 그리웠던 걸까. 그는 “‘지킬앤하이드’를 공연하는 꿈을 자주 꿨다. 갑자기 무대에 올라 가야 하는데 준비가 안 된 상태라 당황하곤 했다”며 “‘지킬앤하이드’를 마지막으로 한 것은 2013년 1월 샤롯데에서였는데, 이번에 같은 공간에서 그 당시 함께했던 배우들(류정한, 김이삭 등)과 무대에 오르니까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선민은 2006년 일본에서 가수로 데뷔했고 영화 음악에 참여하고 지난해 12월 개봉한 영화 ‘긴 하루’에도 출연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 왔다. 다음 행보에 대해 그는 “(가능성을) 다 열어 두고 ‘내가 뭘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고 있다”며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을 찾는 관객을 위해, 제 안의 비슷한 점을 찾아 가까워지려 노력한 루시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했다.
  • 차준환, 쇼트프로그램 17위 멀어진 메달의 꿈

    차준환, 쇼트프로그램 17위 멀어진 메달의 꿈

    한국 남자피겨 간판 차준환(고려대)의 첫 세계선수권대회 메달은 사실상 멀어졌다.차준환은 24일(한국시간) 프랑스 몽펠리에 수드 드 프랑스 아레나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세계선수권대회 남자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잇단 실수 탓에 예상 밖의 낮은 점수를 받아들었다. 기술점수(TES) 40.40점과 예술점수(PCS) 43.03점에 감점 1을 합친 총점 82.43점으로 30명의 출전 선수 중 17위. 그는 상위 24명에게 주어지는 프리스케이팅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메달 획득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차준환은 26일 오후 6시 55분부터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남자싱글 리스케이팅에 나선다. 24번째로 은반 위에 선 차준환은 ‘페이트 오브 더 클록 메이커(Fate of the Clockmaker)’의 선율에 맞춰 연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 연기 과제 4회전 점프인 쿼드러플 살코를 시도하다 넘어졌지만 이어진 기본점 10.80점의 트리플 러츠-트리플 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깔끔하게 뛰어 실수를 만회했다. 가산점도 1.52점을 챙겼다. 이어진 플라잉 카멜 스핀을 우아하게 연기하며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차준환은 가산점이 붙는 후반부 들어 다시 큰 실수를 범했다.마지막 점프 과제인 트리플 악셀 착지에서 발목이 흔들리는 바람에 스텝이 꼬였다. 기본점수 8.8점에서 2.29점이나 깎였다. 차준환은 이어진 체인지 풋 싯 스핀, 스텝 시퀀스, 체인지 풋 콤비네이션 스핀을 차례대로 수행해 연기를 마무리했지만 두고 두고 아쉬운 경기였다. 점수는 자신이 베이징올림픽 때 기록한 개인 최고점(99.51점)보다 무려 17.08점이나 낮았다. 이시형은 기술점수 47.13점, 예술점수 38.21점을 합한 총점 85.34점으로 14위에 올랐다.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는 뒤로 넘어지는 큰 실수를 범하면서 탈락했지만, 이번 대회에선 최고의 연기를 펼치며 개인 최고점을 기록했다. 베이징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우노 쇼마가 109.63점으로 1위 자리에 오른 가운데 가기야마 유마(105.69점), 도모노 가즈키(101.12점)가 뒤를 이어 일본 선수 3명이 1~3위를 모두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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