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김 양식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담보대출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장애 선수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국민안전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 해외 범죄
    2026-03-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550
  • [농어촌청소년대상] 본상

    ●수산 강진오씨 복합양식어장을 조성해 물김 및 개량조개와 다양한 어류를 판매해 2002년 1억 2000만원이던 수입을 지난해 2억원까지 늘렸다. 구청 및 어촌계 주관의 과잉초과시설 등 불법어업 근절 활동에 모범적으로 참여했다. 어촌정보화사랑방을 이용, 어업인에게 전자상거래 기업을 전수했다. ●수산 김홍곤씨 오지의 섬인 원산도에서 어려서부터 부모를 도우며 어류양식업에 종사해 왔다. 어업인 후계자가 되면서 어한기를 이용, 어업의 다각화로 소득을 크게 향상시켰다. 어획 강도가 높은 통발이나 인강망어업을 피해 수산자원보호에 앞장섰다. 자율방범대원으로 안전사고 방지에 기여했다. ●수산 유승남씨 넙치 자망어구의 신기술개발로 어획량을 당일 조업기준 20∼30㎏에서 60∼80㎏으로 늘렸다. 조업상황, 어장위치 등 영어일지를 기록 관리하고, 각종 첨단장치를 활용함으로써 어선어업의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항내 폐유 및 오물을 버리는 행위를 금지하는 등 어장 정화활동에 솔선수범했다. ●수산 김병락씨 김 양식방법 개선 및 상표 등록으로 소득을 크게 늘렸다. 효율적인 황토 살포법을 개발해 ‘도청 김병락 황토김’의 상표를 등록했다. 그 결과 김 판매액은 2003년 8400만원에서 올해 1억 4700만원으로 늘었다. 김양식생산자협의회를 창립했고, 불법 및 과잉시설을 억제해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농업 양우선씨 제주의 주 소득원인 감귤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감귤원의 폐원·간벌·적과·휴식년 등을 적극 실천하고 있다. 감귤 폐원지나 휴원지에 고소득 작목인 브로콜리를 저농약 농법으로 재배하고 있다.14만평의 목장에서 한우 80마리도 기르는 등 복합영농으로 연 1억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매년 저공해 비누를 만들어 나눠주고 있다. ●농업 김정범씨 4만평에 묘목 45만그루를 키우며 인터넷에 ‘대림묘목농원’을 운영, 지난해에 52만 그루를 팔았다. 연 소득은 3억 5000만원이나 된다. 고성 산불 지역에 고로쇠나무 6000그루, 강원 영동군에 포도묘목 4700그루 등을 기증했다. 최초로 석류의 비닐하우스 재배 실험에도 성공하는 등 옥천군이 묘목특구로 지정되는데 기여했다. ●농업 박종성씨 광주광역시 화훼농가 사회에 영농기술과 유통관련 정보 등을 선도적으로 알리고 있다. 비닐하우스 4000평을 통해 연 6000만원의 소득을 올리며 화훼부농의 꿈을 키우고 있다. 폐품수집, 일일찻집, 사랑의 사탕바구니 등 각종 자원행사로 150만원의 기금을 조성, 불우이웃돕기를 해왔다. ●농업 박세우씨 분재 소재인 남천마무, 해송 등을 생산·판매하고 전통식물인 명아주도 기르고 있다. 수지팡이로 불리는 청려장 제작기술을 물려받았다.4H회원들과 유휴지에 도라지, 콩, 쪽파 등을 재배하고 있다. 논밭 2400평을 배 과수원 5400평으로 확대 조성하는 등 소득의 다변화에 힘쓰고 있다. ●농업 전형범씨 유휴지 3000평을 개간, 무·배추를 재배해 나온 이익금 5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놨다. 한우(14두), 피망·고추(1500평), 콩·옥수수(2000평), 벼(3000평) 등 복합영농의 기반을 갖췄다. 책 모으기 운동을 전개, 공부방과 버스 정류장 등에 500권에 달하는 책을 진열, 독서환경을 조성했다. ●농업 주승균씨 전북 무주의 관광지 주변과 농경지 자연정화 활동을 펴 9.5t에 해당하는 폐비닐 등을 수거했다. 벼농사 3000평 외에 인삼농사를 7000평에 짓고 있으며 4H를 통해 934만원의 기금을 만들어 소년소녀 가장 및 독거노인 돕기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농업 김민구씨 농업환경 오염을 막기 위해 매월 농업환경 보전활동을 하고 있고 충남 보령시 청라군계에 팬지, 피튜니아, 메리골드 등 꽃길 24㎞, 꽃동산 3000평을 조성했다. 오리농법에서 나온 부산물을 이용해 유기농으로 염소 300여두를 키우고 있다. 폐교를 이용한 팜스테이도 추진했다. ●농업 김춘기씨 부친의 농업을 이어받아 우렁이 농법으로 벼농사 2㏊, 기능성 표고버섯 1만본, 고추재배 900평 등 친환경 복합영농으로 연간 750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정보화 시대를 선도하는 4H회’라는 목표로 홈페이지 제작 활성화, 농산물 쇼핑몰 운영 등 경북 거창군 영농사회를 이끌고 있다.
  • [데스크시각] 이제는 ‘민박(民博)’이다/김종면 주말매거진WE팀 차장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관람객이 몰리면서 요즘 ‘박물관 신드롬’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역사와 문화에 목말라왔던가.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하지만 세계 여섯번째 규모의 박물관을 갖게 됐으니 문화민족의 자긍심도 가질 만하다. 그 위상에 걸맞은 내실을 어떻게 다져나가느냐 하는 과제는 남아 있지만 우리 박물관 문화는 분명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박물관은 더이상 우리의 일상생활과 거리가 먼 ‘호기심의 상자’가 아니다.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일반 대중 누구나 쉬면서 대화를 나누고 문화를 느끼며 배울 수 있는 친숙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용산 중앙박물관의 개관은 그 같은 박물관의 진정한 효용가치를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이즈음 기자의 머리에는 하나의 단어가 맴돈다. 물실호기(勿失好機). 이처럼 고양된 국민의 문화적 관심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한국 박물관 르네상스의 전기로 삼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용산 중앙박물관에 대한 환상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열악한 박물관 현실에 다시 눈을 돌려야 한다. 먼저 주목해야 할 곳은 단연 국립민속박물관(일명 민박)이다. 민속이란 한 민족의 얼과 혼이 깃든 생활양식이요 기층문화다. 이 살아있는 문화를 담아 놓은 곳이 바로 민속박물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그동안 한 해에 300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등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박물관으로 자리잡아 왔다. 특히 외국인 관람객이 절반 이상을 차지해 ‘소프트 관광’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최근 박물관 로비 천장을 우리 고유의 녹색 단청으로 꾸미고 뮤지엄숍 등 편의시설을 새롭게 단장하는 등 1993년 이전·개관 이래 처음으로 본격적인 건물 리모델링에 나섰다. 상설전시장 구조도 바꿔 보다 입체적인 공간연출이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전국 57개 생활사박물관과 함께 하는 ‘민속생활사박물관 협력망’ 구축이나 ‘찾아가는 민속박물관’ 프로그램 등 적지 않은 문화교육사업 성과도 올렸다. 그러나 민족문화센터로서의 국립민속박물관의 위상은 여전히 초라하다.2급 관장 아래 곧바로 4급 과장체제로 이어지는 기형적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학예연구실도 사무국도 없다. 그러니 전통 민속문화에 대한 발굴이나 조사, 수집 등 고유 업무뿐 아니라 유기적인 통합·조정 역할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을 물론 같은 줄에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중앙박물관이 고고·미술 중심이라면 민속박물관은 생활사 중심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상하의 개념이나 우열의 관점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또 알리기 위한 양대 축으로 병행 발전해야 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민속’이란 고부가가치를 낳는 유망 산업으로 대접받는다. 옛 유물이나 유적 관람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먼저 흥미를 갖는 것은 도대체 한 민족이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사야말로 21세기 역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요 역사교육의 화두다. 국립민속박물관이 관람객 수에서 늘 국립중앙박물관을 앞서왔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국립민속박물관은 상대적으로 무관심의 영역에 머물러 왔다. 국립민속박물관이 명실상부한 생활사 대표 박물관으로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현재의 관장직급은 1급으로 올려야 하고, 조직 운영 또한 적어도 1실(학예연구실) 1국(사무국) 체제를 갖춰 연구와 관리 기능을 이원화해야 한다. 아울러 2025년 마무리되는 경복궁 복원사업에 따라 국립민속박물관 이전·건립에 대한 공론화작업도 보다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올해 문화관광부 주요 업무계획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용산 이전 문제가 포함돼 있다. 새로운 국립민속박물관의 건립과 관련, 규모가 작더라도 4대문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민속박물관의 특성에 맞게 충분한 야외전시공간이 확보돼야 한다는 점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금부터 공청회라도 열어 중·장기 발전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 ‘민박(民博)’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김종면 주말매거진WE팀 차장 jmkim@seoul.co.kr
  • [불임, 사회가 나서야 (하)] 대리모 노예계약

    [불임, 사회가 나서야 (하)] 대리모 노예계약

    “임신 중 사망·질병에 대한 책임은 대리모에게 있으며 의뢰인은 법적·도덕적 책임을 일체 지지 않는다.” 대리모 여성과 출산 의뢰자간 비밀 계약서의 내용이 공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신문이 입수한 경찰 압수자료와 대리모 희망 여성의 증언으로 본 대리모 계약은 ‘현대판 노예계약’이었다.<서울신문 2월23일자 1·4·5면 보도>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가 난자매매 브로커 김모(28)씨로부터 압수한 계약서와 친권포기각서는 2가지 양식이었다. 난자매매 알선 초기 일본에서 쓰이는 대리모 계약서를 그대로 번역해 사용하던 김씨는 5건의 거래를 성사시키고 수수료 1500만원을 챙긴 뒤 본격적인 알선을 위해 더욱 정교한 계약서 양식을 만들었다. 계약서에는 의뢰인이 ‘갑’, 대리모가 ‘을’, 브로커가 ‘병’으로 명시돼 있으며 대리모가 기혼자일 경우 남편의 동의도 받도록 했다. 친권에 대해 “대리모 부부는 시험관이나 인공수정 시술로 태어난 아이의 친권, 양육권을 주장하지 않으며 출산 뒤 친권포기각서의 공증을 받고 나서 잔금을 받는다.”고 돼 있다. 출산 뒤에는 1주일 안에 거처를 옮겨야 하며 이후 의뢰인과는 일체 왕래를 끊어야 한다. 사례금 3300만원은 대리모에게 선금으로 1500만원을 주고 착상 성공 이후 매월 100만원씩 지급하게 돼 있다. 잔금은 출산 뒤 지급하며 브로커에게는 사례금의 10%선인 300여만원이 수수료로 지급된다. 계약서는 임신과 출산에 따른 모든 위험을 대리모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대리모 임신에 자연임신과 같이 유산, 이상임신, 합병증 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임신 중 발생하는 선천적 이상, 사망·상해, 질병에 대해 경제적·법적·도덕적으로 야기되는 모든 문제는 대리모 자신이 책임진다. 의뢰인은 민·형사상 어떠한 손해배상 및 책임도 지지 않는다.” 기형아를 출산하면 의뢰인이 친권을 거부할 수도 있다. 대리모가 임신중 음주, 흡연, 성관계 등을 할 때에는 곧바로 계약을 파기할 수 있으며 이때에는 의뢰인과 브로커에게 받은 금액의 2배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임신중 5일 이상 연락이 두절되는 것도 계약파기 사유다. 경찰 관계자는 “대리모를 하겠다고 나선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터무니 없이 불리한 조건에도 계약이 쉽게 성사됐다고 한다.”면서 “이 여성들은 금지된 행위를 한다는 생각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보호를 요청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대리모를 자원했던 여성으로부터 전해들은 계약서 내용도 브로커가 가지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2월까지만 해도 대리모 의뢰자를 구하고 있던 A(29)씨. 최근 다시 만난 그는 대리모를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여러 차례 불임부부들과 접촉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보증을 잘못 서 9000만원의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로 전락, 대리모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A씨는 계약조건이 기가 막혀 포기하고 말았다. 생활비, 출산비용과는 별도로 9000만원이라는 높은 사례금을 주겠다고 한 불임부부는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시비의 싹을 자르자며 구체적인 내용의 계약서를 제시했다. 임신이 확인되면 3000만원을 선금으로 지급하고,4개월 후 3000만원, 출산 후 다시 3000만원을 주는 식이었다. 계약서에는 “의뢰인이 중간에 계약종료를 원할 경우 대리모는 태아를 포기(임신중절)해야 하며 이 경우, 의뢰인이 위약금으로 1000만원을 준다.”고 돼 있었다. 의뢰인의 사정이란 이혼이나 뜻하지 않은 임신 성공, 파산 등으로 인해 아이가 필요 없어지거나 사례금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만약 대리모가 임신중절을 거부한다면 보수는 한푼도 없을 뿐더러 의뢰인은 태어날 아이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돼 있다. 아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경우 의뢰인측이 아이를 인수하되, 출산 뒤 대리모에게 주기로 했던 3000만원은 없던 일로 한다. 남아를 출산할 경우에는 별도로 소정의 사례금을 추가 지급하겠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대리모 계약서의 유효성 인정 여부는 대리모 논쟁의 촉발점이 되는 부분으로 학계에서는 전통적으로는 무효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상업적 대리모의 경우 유효하다는 의견이 우세해지고 있다.1991년 대구지방법원은 아파트 한 채와 1억원을 지급하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며 의뢰인 부부에 대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기각했다. 법학자들은 이를 일종의 가족법상 특수계약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대리모 계약이 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 해도 아직 포태되기도 전에 장차 태어날 자녀를 인도하기로 하는 약정은 단지 ‘신사협정’에 불과해 법적으로 불완전한 구속력을 가질 뿐이고, 대리모 계약에 의해 아이의 인도를 법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태평양그룹 창업주 고 서성환(1924∼2003) 회장은 화장품업계의 신화가 됐다.‘미와 향을 파는 마케팅의 귀재’인 서 창업주는 어려서부터 개성에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후 기업경영에서 개성상인의 맥이 면면히 흘렀다. 서 창업주는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태평양이 직접 운영하는 비영리 재단이 3개이며 후원 단체는 셀 수없이 많다. 신용과 근검절약을 가장 큰 밑천으로 삼는 개성상인의 기질,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윤리는 2세 경영으로 넘어온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업 태평양은 1945년 9월5일 창립됐지만 연원은 좀 더 거슬러올라간다. 태평양의 역사를 알려면 서성환 회장의 가족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서 회장은 1924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부친 서대근(1890∼1973)씨와 모친 윤독정(1891∼1959)씨의 3남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 창업주 가족은 소학교 시절인 1930년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사를 했다. 개성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인 동현동에 정착했다.‘상인의 도시’ 개성 생활은 소년 서성환에게 이후 기업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개성에 정착한 가족들의 생계는 어머니 윤 여사가 책임졌다. 전 재산을 털어 조그마한 상점을 열고 잡화를 취급하다가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렸다. 윤 여사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 이웃으로부터 ‘여중군자’라고 불릴 만큼 활동적이고 사교적이었다. 인삼 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개성지방은 소득수준이 높아 우수한 품질의 동백기름이 잘 팔린다는 것을 간파한 윤 여사는 직접 동백기름을 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았다. 당시 서민들은 피마자 기름을 썼지만 상류층은 고가의 동백기름을 애용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진 머리에 머릿기름을 자르르 바른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이도록 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태평양 모체는 어머니의 ‘창성상점’ 동백기름에서 자신을 얻은 윤 여사는 차츰 사업영역을 확대했다.1932년부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를 시도했다. 또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다. 소년 서성환도 물건을 도매상에 배달해주는 등 잔심부름을 하며 가업에 참여했다. 당시 제조방식은 물론 가내 수공업이었다. 솥을 걸어놓고 그안에 물과 기름을 섞어 손으로 직접 젓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품질은 우수하다는 평을 얻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자신감을 얻은 윤 여사는 ‘창성상점(昌盛商店)’이라는 생산자 명칭을 표기했다.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상품에 ‘창성당제품’‘오리지날’ 등을 표기했다. 가업에 참여한 소년 서성환의 경영 수업은 계속됐다. 보통학교시절부터 소년 서성환은 하루 끼니인 도시락 세개를 자전거에 싣고 해뜨기 전에 개성을 출발,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곤 했다.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1939년부터 화장품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거래 도매상에게 물건을 납품하거나 예성강 20리를 따라 형성된 상로(商路)를 따라 직접 팔기도 했다. 자전거로 화장품을 팔러 다니면서 유통에도 눈을 떴다.10대 소년 서성환은 개성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글리세린과 향료, 빈 병을 사는 일을 도맡았다. 창성상점의 제품은 1941년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3층 양옥의 김재현백화점에도 들어갔다. 백화점에 작은 코너를 개설, 자사의 제품뿐만 아니라 인기가 높던 다른 회사의 제품도 위탁 판매했다. 제조와 판매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제품도 함께 판다는 서성환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면서 화장품 제조법도 어머니 윤 여사로부터 직접 배웠다. 물과 기름의 혼합비율, 열을 가하는 강약 정도,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의 비율 등에 따라 화장품의 품질은 천차만별이었다. 화장품 유통에 이어 제조까지 현장 경험을 쌓았지만 스물한살이던 1944년 강제징용되면서 그의 화장품 수업은 중단됐다. ●‘블루오션’ 태평양으로 광복을 맞아 다시 개성으로 돌아온 청년 서성환은 화장품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세운 창성상점을 ‘태평양상회’로 이름을 바꿨다.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웅지와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도전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광복정국의 혼란속에서 서성환은 1947년 개성을 떠났다. 서울로 이주, 회현동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청년 서성환은 당시 누님 한분이 내려오지 못한 이산가족의 한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 이 즈음 부인 변금주(77)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모조품과 위조 화장품이 기승을 부리던 50년대 서성환은 “남보다 월등한 제품을 만들어야 제 값에 팔 수 있다.”며 시종일관 품질을 강조했다. 이때 내놓은 메로디크림은 태평양 1호 제품의 영예를 안았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했지만 6·25가 터졌다. 그는 피란길에도 화장품 원료를 싣고 부산으로 내려갈 정도의 집념을 보여줬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1951년 순식물성의 ABC포마드를 시장에 내놓았다. 대단한 인기를 끌며 화장품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다. 서성환 회장이 직접 작명한 ABC포마드는 60년대까지 대히트 브랜드로서 태평양의 성장 기틀이 됐다. 청년 서성환은 환도 이후 1954년 후암동시대를 열면서 기술력에 대한 갈증에서 장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었다.1953년 처음 열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을 통해 화장문화가 태동한 것도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향기나는 밥, 그리고 최초의 연속… 서성환은 후암동 시절 잘 팔리던 화장품을 구해 직원들과 함께 실험을 거듭했다. 생산직 여종업원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가내 수공업에 실험기구가 부족한 것은 당연지사. 향료가 밴 솥과 물바가지를 이용해서 밥을 하면 향내 나는 밥이 되고, 크림을 만들었던 도구를 쓰면 구리무 향밥이 됐다고 한다. 56년 용산으로 이전한 이후 성장가도에 들어섰다. 서성환은 57년부터 해마다 기술자들을 독일과 일본에 유학시켰고,58년엔 동양 최초로 고성능 미분기를 도입했다.59년 주식회사 체제로 출범했고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제휴를 통해 장업사의 새 장을 열었다.60년 장업계 최초의 해외방문,64년 오스카 브랜드로 최초의 화장품 수출, 당시 획기적인 방문판매제와 아모레화장품 개발 등에 힘입어 급신장했다.68년 매출이 14억 2800만원으로 창업 이후 처음 10억원대를 돌파했다. 당시 태평양의 품질은 어느 정도였을까?지난 71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화장품 콘테스트에서 3개의 금상을 수상했다. 화장품 제조 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74년 장업계 최초의 소비자과를 신설, 정부의 소비자 기본법안보다 3년 빨리 소비자 중심을 지향했다. 순항하던 태평양은 90년대 들어 무한경쟁시대를 맞았다. 서 창업주는 창업 50년을 맞은 95년을 ‘세계화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을 다짐했다. ●태평양에 순항중인 2세 경영 서 창업주는 개성상인 특유 기질을 두 아들에게 물려줬다. 서 창업주는 지난 82년 장남 영배(49)씨를,87년 차남 경배(42)씨를 입사시키면서 2세들에게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영배씨는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도쿄 및 뉴욕 지사를 거쳐 태평양증권 부사장 태평양종합산업의 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태평양개발 회장으로 기업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영배씨는 태평양개발을 연매출 1000억원대의 중견 건설업체로 키웠다. 차남인 경배씨는 재경본부를 시작으로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과감한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태평양증권·태평양패션·프로야구단 돌핀스·여자농구단 등 계열사를 정리했다.97년 3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태평양에 2세 경영의 배를 띄웠다. 지난해 매출은 1조 1053억원. 후계작업이 부드럽게 진행되던 2003년 1월 장원 서성환 회장은 영면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가 태평양은 해마다 50억원 가량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여성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여성에게 되돌려준다.’는 취지에서 주로 여성의 삶의 질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 이윤의 사회환원은 기업윤리 이전에 창업주 서성환 회장의 소신이라는 게 한 측근의 설명이다. 그는 “창업주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돈을 버는 게 바로 우량기업’이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말했다.‘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후덕함도 있었다. 그러나 창업주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는 개성상인의 ‘짠돌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서 창업주는 지난 63년 중앙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성환 장학금’을 만들었다. 중앙대 최초의 외부장학금이다. 당시의 기업가치고는 사회적 책무를 빨리 깨달은 편이었다. 첫 수혜자는 리대룡(64)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이후 75년부터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학업 성적이 좋은 여고생 9700여명에게 17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지난 9월부터 태평양학술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꿔 학술연구사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성들에게 유방은 모성의 상징이자 여성답게 해주는 상징적인 기관이다. 여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태평양은 2000년 9월 한국유방건강재단을 만들었다. 태평양이 전액 출자한 재단은 국내 최초의 유방암 전문 비영리 공익재단이다. 지금까지 1만 2000여명의 여성들에게 수술비를 지원하거나 무료로 검진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회 환원은 태평양이 출연한 재단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2003년 6월 서 창업주가 타계한 다음 태평양 주식 7만 4000주와 이익배당금 전액 등 50억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전달했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아들 서경배 사장으로 이어졌다. 서 사장은 선친의 고향이 북한인 것을 감안, 북한 어린이와 여성을 돕기 위해 유니세프에 지난해와 올해 각각 1억원을 기부했다. ■ 오늘의 태평양 일군 3인방 오늘날의 태평양을 일군 데는 창업주 서성환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한 3인방이 있다. 태평양의 사사에 남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들은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재인식시키고, 국민 생활양식을 한층 높인 신화 창조의 주역이다. 오원식(69)전 부사장은 40년이 넘게 입에 오르내리는 브랜드 ‘아모레’를 1961년 작명했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가곡 ‘아모레미오(난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따왔다. 상금으로 당시 거금인 1만원(당시 월급 7000원)을 받았다. 오 전 부사장은 1967년부터 한방미용법을 연구, 지난 73년 인삼 사포닌을 이용한 화장품 아모레 진생삼미를 탄생시켰다. 진생삼미는 브랜드 진화를 거듭하다가 가장 한국적인 명품 ‘설화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설화수는 단일 브랜드로 매출이 2000년 1000억원을 달성했으며, 지난해에는 국내 최초로 3000억원을 돌파했다. 화장품 사상 유래가 없는 기염을 토했던 브랜드다.82년 대한화장품학회 회장을 지낸 오 부사장은 87년 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기술개발에 힘썼다. 이후 90년대 초까지 연구부문을 총괄하면서 태평양 40년 연구와 생산 분야의 산증인으로서 화장품 기술의 과학화에 큰 획을 그었다. 그 어렵던 50년대의 태평양 생존 기틀을 닦은 데는 구용섭(81)초대 연구실장의 공을 빠뜨릴 수가 없다. 좋은 원료 확보를 위해 암거래 시장에서 발품을 팔았다. 서울 환도이후 후암동의 가내 수공업 시절의 ‘향기나는 밥’과 ‘구리무밥’을 먹으면서도 제품개발을 진두 지휘했다. 이같은 노력 덕분에 태평양은 독자적인 기술 개발과 화장품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발판을 마련했다.68년 한국화장품 화학자회 창립회장에 취임,80년까지 회장을 지내면서 한국의 화장품 발전에도 공이 크다. 머리를 감을 때 비누에서 샴푸로 바꾸게 한 사람이 김창규(66) 고문이다. 프랑스 파리 이과대학 연구소의 실장으로 재직중 태평양에 스카우트됐다. 그가 73년 개발한 브랜드 ‘타미나’는 7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이 됐다.78년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화장품학회 국제회의에서 인삼사포닌이 모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김 고문은 80년대 태평양의 생활용품 사업을 일궜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리도 푸로틴 샴푸는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비누로 머리를 감던 국민들의 생활양식을 샴푸로 머리를 감게 바꿨다.88년 가정용품을 연구하는 기술연구소장과 92년 태평양중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91년부터 대한화장품학회장을 연임하면서 화장품학계 발전을 위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chuli@seoul.co.kr ●정·관·재계로 연결된 화려한 혼맥 창업주 서성환 회장은 1947년 변금주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 4녀, 송숙(58), 혜숙(55), 은숙(52), 영배(49), 미숙(47), 경배(42)를 두고 모두 성혼시켰다. 서 창업주의 사돈가는 한마디로 쟁쟁한 집안들이다. 정·관계를 비롯해 기업인과 언론인으로 인연이 이어진다. 방우영(77)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비롯해 신춘호(73) 농심그룹 회장, 최두고(84) 전 국회의원 등의 기업인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을유문화사 정진숙(93) 회장, 최주호(작고) 전 우성그룹 회장, 박세정(88)대선제분 회장과는 혼맥을 쌓았다가 끊어졌다. 서 창업주는 또 사돈가의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통해 정재문(69) 대양산업 회장(전 의원), 신춘호 농심 회장을 통해 서봉균(79) 전 재무장관과는 ‘사돈의 사돈’으로 간접 혼맥을 이루고 있다. 김치열(84) 에이오에스 회장(전 법무·내무장관)과는 신춘호 농심 회장을 거쳐 박남규(85)조양상선 회장을 통해 연결된다. 서 창업주는 이같은 순환 혼맥을 통해 김일환(작고) 전 내무장관, 정운갑(작고) 전 농림부 장관, 김영생(작고) 전 의원, 김도창(작고) 전 법제처장 등 정·관계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같은 현상은 서 창업주 특유의 신중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는 자녀 혼사를 사람됨됨이를 중시하여 중매 형식을 택한 서 창업주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돈가의 ‘유명세’와 관련해 정략적이라는 세인의 오해를 받기 쉬우나 태평양측은 이를 극구 부인한다. 정관계의 발판을 만들 필요도 없었거니와 ‘정경유착’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서 창업주 측근의 설명이다. 관계(官界)의 집안과는 모두 현직에서 물러난 뒤 맺어졌고, 재계 인사들과는 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대부분 양쪽 집안 가장들의 친분으로 혼사가 이뤄졌다고 전한다. 혜숙씨는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출신으로 김일환씨의 3남인 의광(56)씨와 지난 74년 결혼했다. 김일환씨는 6·25전쟁 당시 국방차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무관 출신으로 상공·내무·교통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의광씨는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태평양 계열사의 장원산업 회장으로 활동하다 물러났다.4명의 사위 가운데 유일하게 장인 회사의 경영에 참여했다가 서울 인사동에서 목인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공부하고 있는 근종(29)씨와 LG전자에 다니는 우종(27)씨를 두고 있다. 3녀 은숙씨는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씨의 차남인 상용(53)씨와 지난 77년 결혼했다. 상용씨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은숙씨와 결혼, 미국에서 7년간 수련의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현재 고려대 의과대학장으로 재직중이다. 부부에겐 ㈜태평양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환석(27)씨와 미국에서 학업중인 양희(23)씨 등 1남1녀가 있다. 서 창업주의 두 아들인 영배씨와 경배씨의 혼사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장남인 영배씨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그룹경영에 참가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증권회사로 자리를 옮겨 90년도 태평양증권 부사장을 거쳐 태평양개발 회장을 맡고있다. 영배씨는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1남3녀 가운데 장녀인 혜성(45)씨와 지난 83년에 결혼했다.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재원인 혜성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마친 후 조선일보에 입사,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서씨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혜성씨는 태평양학원(성덕여중·성덕여상)의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영배씨 부부는 2남1녀를 두고 있는데 모두 학생이다. 차남인 경배씨는 지난 90년 11월, 농심 신춘호 회장의 막내딸인 윤경(37)씨와 화촉을 밝혔다. 서 창업주와 신춘호씨는 같은 용산구 관내에서 평소 자주 만나 인사를 나누던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이 훗날 사돈으로 연결된 것. 경배씨는 경성고·연세대 경영학과를 마친 뒤 미국 코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로 87년 태평양화학 과장으로 그룹에 첫발을 내디뎠다.90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실장을 지내는 등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및 대한화장품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배씨는 학생인 두딸 민정(14), 호정(10)을 두고 있다. chuli@seoul.co.kr ■ 故서성환 회장의 차사랑 “기다리는 시간의 맛도 있고, 잔의 맛도 있고, 차 맛도 있다.”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을 모신 회의에서 손수 차를 우려드렸던 서경배 사장의 회고담이다. 요즘 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전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상상력을 뛰어넘는 초스피드 시대에서 여유를 찾아주는 음료이다. 철학이 담긴 고급 문화로 이해된다. 이런 차가 화장품 회사 태평양과 어떻게 이어졌을까? 서 창업주는 60년대 일본 등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 차를 대접받았다. 일본 거래처를 찾았을 때 가루차가 늘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고작이었다. 특히 서 창업주는 일본 거래처 사람들이 고려·조선왕조의 다구(茶具)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에 차에 관심을 기울여 70년대 후반부터 녹차사업을 시작했다. “차밭을 조성하되 반드시 불모지를 개간해야 한다.”80년 녹차밭을 구상하면서 서 창업주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당시 차밭 개간은 무모한 사업으로 비쳐졌다. 80년대 초 우리나라는 차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부족한 전문인력과 제주도 땅의 척박함 등 그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다. 골프장을 짓는다거나 땅투기를 한다는 등의 오해까지 받았다. 축적된 기술과 자료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회사 전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며 모두 만류했다. 그러나 서 창업주는 뚝심을 발휘해 밀어붙였다. 대한농구협회 회장 시절인 80년 중국을 방문, 공안(公安)을 설득해 황제차로 유명한 용정차(龍井茶)의 고향 항저우를 둘러봤다. 차가 거대한 산업임을 확인했지만 차 박물관은 그저 형식만 갖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해결의 실마리는 우연히 풀렸다.90년대 초 사업을 위해 찾았던 그는 미국 하와이의 파인애플농장 안에 있는 돌(Dole)사의 파인애플하우스, 즉 파인애플박물관에 들렀을 때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겨우 손익분기점에 도달할까말까 하던 차사업을 차박물관으로 견인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차박물관은 가슴에 고스란히 묻어두었다. 말년, 몸이 쇠약해진 서 창업주는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머물면서 파인애플하우스를 가보곤했다. 지난 99년 아들 서경배 사장이 부친 문병을 위해 하와이에 들르자 그는 짐을 풀던 아들을 다짜고짜 차에 태우고 돌사의 파인애플농장으로 데려갔다.“바로 이거야, 이렇게 만들어봐라.”와병중이던 아버지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해서 설록차박물관 오’설록이 탄생했다. 지난 2001년 9월 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에 문을 연 오’설록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찻잔 등 다구가 잘 진열되어 있다. 차에 관한 명상의 최적 공간으로 소문나면서 연간 30여만명이 찾는다. 장원 서성환의 정성과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chul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김치 안먹어”… 한식당 썰렁

    “김치 안먹어”… 한식당 썰렁

    24일 오후 2시 경기도 평택시 포승면 식품의약품안전청 평택수입식품검사소. 중국과 가장 가까운 물류관문인 평택항 옆에 있는 이곳은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어느 때보다 분주한 모습이었다. 전체 직원 4명 중 소장을 포함,3명이 자리를 비웠고 남은 한 명도 빗발치는 전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김치를 담당하는 직원은 이날 오전 컨테이너에 실려온 중국산 김치박스에서 추출한 표본을 들고 안전성 검사를 받으러 출장을 떠난 상태였다. ●평택항검사소 1명이 10만t 검역 평택항은 중국산 김치의 70∼80%가 통관되는 곳. 김치가 배에 실려 동항과 서항에 도착하면 바로 근처 보세창고로 보내진다. 김치가 여기에 머무는 동안 세관과 식약청의 검사가 실시된다. 총 소요기간은 3∼10일. 중국산 김치는 식약청 검사실에서 한국식품공업협회의 식품공전에 따라 고유의 향과 색·모양 및 타르색소와 보존료·대장균 유무 등 검사를 받는다. 한번 검사를 통과하면 다음에는 서류 심사만으로 간소화되기 때문에 수입업자 및 제조업자들이 가장 긴장하는 과정이다. 직원 이장균씨는 “2002년부터 김치 수입이 가파르게 증가해 현재 평택항을 통해 들어오는 하루 500∼600개의 컨테이너 중 10∼20%가량이 김치를 실은 냉동 컨테이너”라면서 특히 “하루 평균 70∼80건에 이르는 검역대상 식품 중 10∼20건이 중국산 김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올해 평택항을 통해서만 10만t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산 김치의 위생상태를 점검하는 직원은 단 한 명뿐이다. 소장을 뺀 나머지 2명은 김치를 뺀 나머지 수입식품을 다루고 김치 담당자도 다른 수입 음식을 함께 맡고 있다. ●학교급식 안먹고 ‘도시락´ 학생 많아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발견된 이후 첫 근무일인 이날 직장인, 학생과 학부모 등도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김치를 거부하는 직장인들이 많았고 갑작스레 학교급식 대신 도시락을 싸오는 중·고등학생들도 적잖았다. 평소 한식을 즐겨 먹는다는 박준영(28·서울 명륜동)씨는 이날 점심 때 평소 자주 찾는 설렁탕 집에서 배추김치 없이 부추김치, 깍두기, 무채만으로 밥을 먹었다. 주인에게 배추김치는 없는지 물었더니 “아무도 배추김치에는 손을 안 대 달라고 해야 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 역시 꺼림칙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예 한식집을 찾지 않는 사람들도 늘었다. 회사원 홍미영(27·여)씨는 “직장 동료들과 양식이 나오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면서 “앞으로 도시락을 싸오거나 아니면 패스트푸드점을 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학생 아들은 둔 김모(40·서울 마장동)씨는 급식을 하는 중학생 아들에게 당분간 김치만은 따로 챙겨줄 생각이다. 공연한 불안감도 확산됐다. 서울 종로구 C중학교 2학년 이모(14)군은 “교내 급식 김치가 강원도에서 직접 가져오는 것이라고 했는데도 친구들 사이에 믿을 수 없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도 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일부 초등학교에는 ‘우리 학교 김치는 직접 담근 안전한 국산 김치입니다.’와 같은 안내 문구를 붙여놓기도 했다. 평택 이유종·서울 김준석기자 bell@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2)-대잇는 가족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2)-대잇는 가족경영

    “재계 랭킹 몇 위 어쩌구 하는 언어의 마술에 홀려 방만한 기업경영을 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도리어 나라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그런 기업은 되지 않았다.”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의 자서전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에 나오는 글이다. 김 명예회장의 심정은 삼양그룹 경영의 핵심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올해로 81년째를 맞는 삼양그룹은 흔히 ‘돌다리도 수없이 두드려 본 뒤 건너가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우보(牛步)경영’ ‘내실경영’ ‘보수경영’ ‘정도경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세계적으로 기업 평균 수명이 3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저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수식어의 이면에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지 못해 성장동력을 놓쳐 재계 50위권으로 처져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함께 담겨져 있다. ●역대 정권과 긴장관계, 성장경영 꿈도 못 꿔 삼성석유화학 허태학 사장은 강연때마다 삼양사의 사례를 들곤 한다. 허 사장은 “삼양사가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국내 최고의 기업 중에 하나였지만 적극적인 경영을 하지 못해 중견기업으로 뒤처졌다.”며 삼양식의 경영방식에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는 게 주위의 전언이다. 그러나 삼양그룹의 시각은 이와는 다르다. 삼양사는 역대 정권과 갈등 관계를 유지하느라 회사를 크게 키울 수 없었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삼양사는 이승만 대통령 재직시 창업주 김연수 회장의 형인 ‘인촌’ 김성수씨가 부통령까지 지내며 이 대통령의 라이벌로 활동해 집중 견제를 받았다. 김 창업주는 1951년 제당공장을 짓기 위해 울산에 부지를 확보했지만 정부가 공장 공사대금으로 활용할 외화 사용 승인을 3년이나 늦게 내줘 고초를 겪기도 했다.3공화국때도 인촌이 창간한 ‘야당지’ 동아일보를 지원하느라 정부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정부의 금융지원 같은 특혜는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게 삼양그룹측의 주장이다. 삼양사 문성환 부사장은 “60∼70년대 급성장한 기업들의 성장동력은 정치권과 야합해 무차별적인 차입경영에 있었다.”며 “그러나 삼양사는 역대 정권과 긴장관계를 유지해 정경유착에 나설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통기업을 묵묵히 지켜온 2세 기업인 이런 안정 지향적인 기업 경영은 외환위기(IMF)때 빛을 발했다. 부채비율이 높았던 대부분의 기업은 무너졌지만 삼양그룹은 그때나 지금이나 탄탄한 재무구조를 유지하고 있다.2004년 12월 현재 삼양그룹의 매출액은 2조 7180억원에 머물러 있지만 부채는 8537억원으로 부채비율 60%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기간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양사는 매출 8902억원, 부채 2799억원, 부채비율 40%다. 이런 이유로 삼양그룹은 지난 9월 재정경제부와 신산업경영원이 주최하는 재무경영종합대상을 수상했다. 삼양그룹이 튼실한 경영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김상홍(83) 명예회장의 공이 크다. 김 명예회장은 1956년 34세에 삼양사 사장에 취임했다. 부친 김연수 회장으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것이지만 80년이나 넘게 기업을 온전히 지켜온 ‘수성’(守城)이 그의 최대 업적이다. 김 명예회장이 우리나라 대표 기업을 지켜온 데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철저하게 받은 경영수업 덕이 컸다. 창업주는 1944년 일본 와세다대에 재학 중이던 김 명예회장을 만주로 불러 삼양사가 운영하던 매하구 농장에서 일을 시켰다. 사장 아들이라고 특혜를 베풀지 않고 농장 직원들과 똑같이 숙식하고 생활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호텔 경영인의 꿈을 꾸기도 했다. 이때 창업주는 “무슨 일이든 성공해 맨 윗사람이 되려면 우선 그 분야의 제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면서 기초를 익혀야 된다.”며 조선호텔에서 접시닦기와 객실담당(벨보이)부터 맡도록 권했다. 이후 1947년 제헌의원이던 나용균씨의 추천으로 수도경찰청(내무부 치안국) 경위로 특채돼 경찰에 입문했다. 그는 4년간 경찰관으로 복무하다 1952년 큰아버지인 김성수씨가 부통령직에서 사임하자 총경직에서 퇴직했다. 이때부터 김 명예회장은 경영인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창업주는 장남 상준씨를 비롯해 둘째 상엽, 넷째 상돈씨에게는 해리염전을 포함한 ‘삼양염업사’를 맡겼다. 김 창업주가 직접 경영하는 삼양사는 셋째인 김 명예회장과 다섯째 상하씨가 일을 하도록 교통정리를 했다. ●밑바닥부터 배워라 김 명예회장은 부친에게 받았던 경영수업이 혹독하리만큼 철저했다고 회고한다. 회사의 맨 밑바닥 일부터 배우라고 지시했는데 주산, 부기, 기장은 물론 고용노무작업, 구매자금조달 등 실무 업무부터 맡아야 했다. 김 명예회장은 일본 와세다대, 상하 회장은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상업고교 출신처럼 주산을 열심해 배워야 했다. 이런 전통으로 인해 삼양그룹은 사무직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우선 공장에서 현장 연수를 하는 것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한다. 김 명예회장은 50세가 넘어서도 창업주 앞에서는 의자에 마주 앉는 일조차 삼갔다고 한다. 부친을 지근 거리에서 모셨지만 “아버지 그림자도 안 밟겠다.”며 어려워했다. 지금도 사무실에 부친의 흉상을 두고 ‘무언의 조언’을 듣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이처럼 혹독한 ‘문하생’ 생활을 보낸 김 명예회장은 1950년대 제당사업을 전개할 때는 부친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설탕 영업의 골간을 만들었다.70년대 제당업이 정상에 오르자 경영 다각화의 일환으로 금융업에 진출, 삼양종합금융을 인수했다. 그러나 그는 삼양종합금융은 물론 1대 주주였던 전북은행에도 삼양사 직원을 단 한명도 파견하지 않는 등 자율과 원칙을 지킨 경영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삼양그룹의 장수비결에 대해 “욕심내지 않고 우리가 잘하는 것만, 그것도 능력이 닿는 범위내에서만 사업을 해왔다.”며 “정말 힘든 일이긴 했지만 우리가 잘하는 제조업체에만 집중하면서 넘치지도 않고 부족함도 없는 중용정신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의 경영철학은 ‘제조업을 통해 건전하게 돈을 벌어야 하고, 수익성이 좋다고 아무 사업이나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부회장을 함께 맡았던 김 명예회장에 대해 “과묵 침착하며 절제를 아는 선비, 중용의 참뜻을 실천해온 외유내강형의 단아한 신사”라고 평가했다. 김 명예회장은 1996년 동생인 상하씨에게 그룹회장직을 넘겨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 났다. ●삼양의 제2탄생을 마무리 김상하(80) 그룹회장은 상홍 명예회장과 함께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성장 궤도에 정착시킨 주역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김 그룹회장은 1949년 삼양사에 몸 담은 뒤 줄곧 부친과 상홍 회장을 도왔다.1952년 일본 도쿄사무소 첫 주재원으로 파견돼 삼양사 공장설계와 전문가 채용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상홍 명예회장과 상하 회장은 형제간이긴 해도 서로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상홍 회장이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하는 반면 상하 회장은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했다. 상홍 회장이 사람을 가려서 만난다면 상하 회장은 이런저런 사람을 폭넓게 사귀는 성격이다. 취미도 상홍 회장은 단조로움을 즐겼던 반면 상하 회장은 스포츠와 여행을 좋아했다. 때문에 그룹 경영에 있어서는 꼼꼼한 상홍 명예회장이 관리를 맡고, 활동적인 상하 그룹회장이 영업전선에 나서는 등 형제간 역할분담을 이뤘다. 실제로 상하 회장은 유창한 일어 실력과 깨끗한 인품으로 재계에서는 국제 감각이 뛰어난 대표적인 일본통으로 꼽혔다. 특히 1988년부터 12년간 최장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많게는 100여개의 대외 직함을 수행할 정도로 전방위 활동을 벌였다. 상하 회장은 이런 왕성한 대외활동을 바탕으로 제조업 중심으로 삼양의 성장을 진두지휘했다. 폴리에스테르 사업의 경우 10년에 걸친 증설을 이끌어 국내 최대 폴리에스테르 업체로 위상을 높였다.1980년대에 집중된 화학, 의약 등의 사업 다변화에도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폭넓은 대외 교분을 토대로 미쓰이, 미쓰비시화학과의 각종 기술제휴 및 합작이 추진돼 삼양화성, 삼남석유화학을 설립했다. ●외유내강의 기업인 상하 그룹회장은 소탈하면서 모가 없는 성품이지만 그룹경영에 있어서는 진퇴를 명확히 제시하는 ‘외유내강형’의 기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90년대 국내 폴리에스테르 업체들이 신·증설을 활발하게 진행했지만 그는 화학섬유 사업의 한계를 감안해 대규모 증설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또한 섬유본부에서 신사업으로 오랫동안 검토해 샘플 제작까지 끝낸 폴리에스테르 필름 사업도 사업의 구조적인 경쟁력과 취약성을 들어 사업을 중단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상홍 명예회장을 모시는 데도 깍듯했다. 상홍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수시로 의견을 구했다. 상하 회장은 서울 성북동에 형집과 담장 하나 사이를 두고 함께 살고 있다. 담장 중간에 쪽문을 해놓고 수시로 오갈 수 있는 ‘핫라인’까지 설치해 놓고 있다. 상홍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동생과 집을 나란히 짓고 살게 된 것은 동생이 스스로 땅을 함께 사고 집도 순서대로 나란히 짓고 살아온 덕”이라며 “아우는 본래 2층집을 짓고 싶었는데 순전히 나 때문에 일조권을 염두에 두고 단층집을 짓고 산다.”며 돈독한 형제애를 소개했다. 상하 회장은 2004년 3월 상홍 회장의 장남이자 조카인 김윤 삼양그룹 부회장에게 ‘대권’을 물려줬다. 아들인 원씨는 삼양사 사장에 나란히 취임했다. 이로써 1975년부터 30년간 지속된 2세 형제경영에 이어 3세 사촌 형제간 공동경영 시대의 막이 올랐다. ●숨은 주역들 김 명예회장과 그룹회장은 삼양그룹이 81년의 전통을 이어온 데는 동생들과 매제의 역할히 컸다고 회고한다. 김 명예회장은 “나는 아우들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면서 크고 작은 일에 신중을 거듭했다. 아우들과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선친께서 잡아놓은 틀을 잡는 데 힘썼다.”고 말했다. 김 명예회장은 회사 발전에 공을 세운 일등공신으로 지난 2002년 작고한 김상응 막내 동생을 손꼽는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미국 유타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상응씨는 96년부터 삼양사 회장으로 재직하며 외환위기 등 창업 이래 최고의 시련기를 뚝심으로 돌파하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고 떠올린다. 부인 권명자(53)씨와 4남 1녀인 자식들은 남편이 죽은 뒤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또 막내 여동생 희경(66)씨의 남편 김성완(66)씨의 공헌도 높이 평가했다. 김씨는 미국 유타대 교수로 생체고분자 및 약물전달시스템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김 교수는 김 명예회장에게 “기업이 발전하려면 연구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데 장래성이 좋은 분야는 의약계통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결국 김 명예회장은 김 교수의 의견에 따라 1993년 충남 대덕 연구단지에 ‘삼양그룹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삼양그룹이 중점사업으로 키우고 있는 화학, 식품, 의약부문의 성장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제는 공격경영 김윤(53) 회장은 부친 상홍 명예회장, 상하 그룹회장과 같이 바닥부터 경영수업을 받았다.1979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LG그룹 계열인 반도상사에 취직했다.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기에 앞서 다른 회사 직원으로 영업전선을 두루 체험해 보라는 부친의 의도였다. 이를 두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김상홍 회장님의 큰자제가 2년간 반도상사에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내게는 그런 사실을 전혀 귀띔도 해주지 않았다.”며 “나는 훗날에야 그 사실을 알고 한쪽으로는 좀 서운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상홍 회장님의 인품을 새삼 느꼈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MIIS(Montere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에서 MBA 석사를 취득한 뒤 곡물회사인 루이스 드레푸스에서 2년간 근무하며 국제적인 경영감각을 익혔다. 또 삼촌인 상하 그룹회장처럼 도쿄지점에서 2년간 주재하며 삼양그룹의 해외진출 사업을 손수 챙기며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다져 나갔다. 고국에 귀국한 뒤에는 울산공장 기술수출팀을 시작으로 이사(90년)-상무(91년)-대표이사 전무(93년), 대표이사 사장(96년)-대표이사 부회장(2000년) 등을 거치며 착실히 경영수업을 쌓았다. 2004년 삼양사 회장에 취임한 김 회장은 차분하고 안정적인 경영 스타일로 삼양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편 보수적인 관행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삼양그룹은 보수적이고 안정 위주의 경영전략을 구사해 성장이 정체돼 있었다.”며 “앞으론 사고방식을 진취적으로 전환해 그룹의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포부를 밝혀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2010년까지 2조원을 투자해 매출액 6조원을 달성하고 자본수익률 2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이를 위해 화학, 식품, 의약, 신사업 등 4대 부문을 핵심 성장 사업군으로 설정했다. ●다시 세계로 진출 2004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전기전자, 부품소재 등을 생산하는 삼양공정소료 유한공사를 설립, 창업주인 할아버지가 만주에 진출한 데 이어 68년 만에 중국에 현지법인 형태로 재진출했다. 향후 중국을 기점으로 인도, 중남미 등 생산기지를 다각화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 세계적인 전문 화학회사로 육성한다는 복안이다. 또한 식품부문을 총괄하는 통합 브랜드로 ‘큐원’(Qulity No.1)을 출범시켰다.47년간 사용해 오던 대표 브랜드 ‘삼양설탕’을 과감히 버리고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식품소재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김윤 회장의 이런 자신감은 1996년부터 삼양사 사장과 부회장을 거치며 길러졌다. 과감한 추진력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발휘됐다. 사장 시절이던 1998년 사업실적이 저조한 금융업과 무선통신사업을 포기하고 계열사를 섬유·식품·화학 등을 핵심 사업군으로 재편했다. 특히 삼양사의 주축이었던 폴리에스테르 사업부문을 과감히 정리,2000년 SK케미칼과 통합법인 휴비스를 설립했다. 이후 삼양그룹 직원들은 단 한명의 구조조정과 한 푼의 임금삭감 없이 경영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이런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19일 서울대 산학협력재단이 주최한 ‘제1회 한국을 빛낸 CEO’에 이명박 서울시장, 정운찬 서울대 총장,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이지송 현대건설 사장 등과 함께 뽑혔다. 또 2001년 전경련 부회장에 선임됐고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3세에도 공동경영 상하 그룹회장의 장남인 김원(48) 사장은 선대 회장들처럼 사촌 형인 김윤 회장을 도와 삼양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3대 경영의 주역들은 선대 회장들과는 달리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윤 회장은 부친인 상홍 명예회장이 내성적인데 반해 활발한 활동으로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반면 원 사장은 전방위 대외활동을 펼친 부친 상하 그룹 회장과는 달리 묵묵히 사촌형을 챙기고 있다. 원 사장은 연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유타대에서 재료공학과 산업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윤 회장처럼 도쿄지점 부장을 거쳐 삼양이 의약부문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1993년 개발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의약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연구개발 부문을 관장하면서 이사, 상무로 승진한 뒤 1997년 연구개발본부장(전무)에 오르는 등 ‘테크노 경영인’으로 각인되고 있다.1999년 부사장 승진에 이어,2000년 8월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됐다. 이공계 출신으로 매사에 치밀하며 경영분석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외 영업에 치중했던 부친과 달리 관리쪽에 무게가 실리는 경영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결혼도 자식 뜻대로 상홍 명예회장과 상하 그룹회장은 창업주처럼 자식들의 결혼과 관련해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본인들의 의사를 최대한 들어주는 스타일을 지켰다. 상홍 명예회장의 장남 김윤 회장은 친구들 모임에서 부인 김유희(46)씨를 처음 만났다. 김 회장은 이화여대를 졸업한 김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김씨가 상당한 미모를 갖추고 있는데다 집안 대대로 친척들이 이대 출신이 많다는 점도 맘에 들었다고 고백한다. 김 회장은 부인을 웬만한 행사에는 동행할 정도로 ‘부인사랑’이 남다르다. 지금도 사석에서 김 회장의 18번인 ‘만남’을 두 부부가 함께 부른다고 한다. 김원 사장도 친구들끼리의 모임에서 부인 배주연(41)씨를 만나 열애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반면 김량(51) 삼양제넥스 사장과 김정(46) 삼남석유화학부사장은 중매로 배필을 만났다. 김량 사장은 김정렬 전 국방부 장관의 중매로 부인 장영은(46)씨와 혼인했다. 상홍 명예회장과 김 전 장관의 집안이 오래전부터 친해 자연스레 연결됐다. 김 전 장관은 영은씨의 부친인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과 막역한 사이어서 혼인을 주선했다. 김정 부사장은 어머니 박상례(75)씨가 자영업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안혜원(39)씨를 만났다. 안씨 부친이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어서 흔쾌히 혼담이 오갔다. jrlee@seoul.co.kr ■ 막강한 손녀사위들 김연수 삼양사 창업주는 부인 박하진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는 2세들보다 3세들의 혼사를 통해 혼맥을 이뤘다. 재계, 정계, 언론계, 법조계 등 매우 다양하다. 이 가운데 손녀사위들은 대학교수, 의사, 경영인 등의 전문 직업군을 이루며 삼양가(家)의 명망을 잇고 있다. 둘째아들인 김상협 전 국무총리는 1남3녀를 두었는데 3명의 사위가 모두 교수인 것이 이채롭다. 김 전 총리는 형제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다고 한다.5년제였던 경복중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당시는 도쿄제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나올 정도의 수재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김 전 총리는 학자 사위들을 좋아했다. 김 전 총리의 장녀 명신(58)씨 남편 송상현(65)씨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씨는 송진우 전 동아일보 사장의 손자다. 둘째딸 영신(56)씨는 정성진(58) 서울대 공대 교수와 결혼했다. 정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이다. 막내딸 양순(52)씨의 부군 이양팔(59)씨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다. 또 상홍(83) 명예회장의 장녀 유주(56)씨도 윤영섭(59)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와 혼인했다. 창업주의 넷째딸인 정유(73)씨는 외동딸인 원경(43)씨를 한정수(48) 전 충남대 교수와 결혼시켰다. 손녀사위들의 ‘의사 파워’도 만만치 않다. 김 창업주의 둘째딸 상민(78)씨는 둘째딸인 이정현(41)씨를 백완기(47) 인하대병원 흉부외과 의사와 인연을 맺어 줬다. 김 창업주의 셋째딸 정애(75)씨 장녀 조경미(47)씨의 부군 주춘희(47)씨도 캐나다에서 병원을 운영 중이다. 그러나 삼양가가 전문 경영인 집안이어서인지 손녀사위들도 전문 경영인이 많다. 김 창업주의 장남 상준씨의 장녀 정원(62)씨의 남편 김선휘(68)씨는 삼양염업사 부회장으로 재직하며 처가의 가업을 잇고 있다. 둘째딸 정희(58)씨는 김준기(62) 동부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또 셋째딸 정림(57)씨도 윤대근(59)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이자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과 결혼해 유달리 ‘동부그룹’과 인연이 많다. 창업주의 둘째 김상협 전 총리가 교육자 집안으로 꾸렸던 것에 비해 장남 상준씨는 전형적인 경영인 가족을 형성한 셈이다. 넷째 상돈(81) 삼양염업사회장은 외동딸 희진(45)씨를 오광희(49) 전 나이스 정보통신 전무와 결혼시켰다. 다섯째 상하(80) 그룹회장도 외동딸 영난(44)씨를 송하철(45) ㈜ 항소 사장과 혼인시켰다. 송씨는 송삼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다. jrlee@seoul.co.kr ■ 계열사 사장들 ‘전문적 경험’ 풍부 삼양그룹의 현 계열사 사장들은 경영전면에 나선 창업주의 3세들을 지원하는 것에 역할이 주로 맞춰져 있다. 분야별로 전문적 경험이 풍부해 경영 승계가 무리없이 이뤄지도록 돕고 있다. 박종헌(66) 삼양사 사장은 40년동안 영업, 해외업무, 인사, 재무, 기획분야를 두루 거쳤다.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박 사장은 법학도답게 매사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영훈 대법원장과 서울법대 동기동창이다. 김량(51) 삼양제넥스 사장은 김상홍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경방유통에서 16년간 재직하며 사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유통부문의 핵심 역량을 쌓아왔다.2002년 삼양제넥스에 입사해 제조업 유통부문의 경영 노하우를 성공적으로 접목시키고 있다. 김 사장은 창업주의 손자이지만 직원들과 자주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즐기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다. 김경원(62) 삼남석유화학 사장은 전주 폴리에스테르 공장 설립때부터 중앙연구소 소장, 화성본부장, 삼양화성 사장 등 화학, 섬유, 폴리카보네이트 등을 두루 지낸 전문 경영인이다. 폴리에스테르 부문의 대가로 ‘폴리머 김’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김 사장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연구통’이다. 송창기(63) 삼양중기 사장은 인사관리분야에서 15년간 일해온 ‘인사통’이다. 총무부장, 인사부장, 관리본부장을 지냈다. 송 사장은 삼양중기에서 기계부문 4개사로의 분사와 주물사업부문 합작사 설립을 성공리에 추진했다. 박호진(59) 삼양화성 대표는 도쿄지점을 거쳐 전주공장에서 20년 동안 현장 경험을 쌓았다. 지난 3월 대표로 선임돼 사원간에 가족적인 유대감을 높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규한(58) ㈜삼양밀맥스 대표는 판매와 현장을 두루 거친 식품부문 전문가다. 경영과 마케팅 감각을 두루 갖췄고 비전팀을 만들어 내부 혁신활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변수식(55) 삼양데이타시스템 대표는 전사적자원관리(ERP)팀장,IT전략팀장, 경영혁신(PI)팀장 등 프로세스 이노베이션 업무를 주로 맡았다. 변 대표는 IT부문의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IT통’이다. 김상익(59) 삼양웰푸드 대표는 경리부, 삼양제넥스 경영지원팀장을 거치는 등 25년 동안 경리와 관리를 맡았다.2004년 대표로 선임돼 원칙과 현장을 중시하는 현장 밀착형 경영을 중시한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고침 서울신문 17일자 15면에 게재된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편에서‘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 서울대 법대교수’는 ‘송 전 사장의 손자’이기에 바로잡습니다.
  • [데스크시각] ‘장자종단’이라 함은?/김성호 문화부장

    세계적으로 불교의 선(禪)풍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나라 가운데서도 한국은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선 불교는 중국에서 발아해 찬란하게 꽃피웠지만 정작 그 종주국인 중국에선 사실상 명맥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쇠퇴했다. 이에 비해 한국은 그 정신과 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서구인들은 티베트 불교를 비롯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기 수행방식인 위파사나를 따르는 미얀마·실론 등의 남방불교를 선호해 왔지만 최근 들어 이들이 한국 선불교에 쏟는 관심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늘어만 가고 있다. 한국불교에서 1700년 선불교의 맥을 이어온 중추 종단은 이른바 ‘장자종단’이라고 불리는 조계종이다. 전국 25개 교구에서 총 3000개의 본·말사를 거느리는 장자종단 조계종에 적을 두고 있는 신도는 전체 불교신자 1000만명중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조계종에 귀의한 뒤 한국불교를 세계에 전파하고 있는 ‘푸른 눈’의 납자들도 이루 셀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조계종은 이제 한국에 머물지 않고 세계적인 종단이 된 것이다. 이 세계적인 불교종단 조계종의 수장이 바로 총무원장으로, 맘 먹기에 따라서 엄청난 세력을 부릴 수도 있는 막강한 지위다. 조계종단뿐만 아니라 불교계 전체의 대표성을 띠는, 사실상 한국불교의 최고 지위랄 수 있다. 그 때문에 총무원장 자리를 둘러싸고 거듭 빚어졌던 조계종단의 마찰과 내홍은 씻을 수 없을 만큼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지난 94년,98년 조계종 수장 자리다툼의 와중에서 멸빈(승적박탈)된 적지 않은 스님들이 아직도 복권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법장 스님 입적후 새 총무원장 선출을 놓고 조계종이 고질을 반복해 앓을 전망이다. 법장 스님이 시신을 사회에 기증한 뒤 오랜만에 한국 선불교에서 자비행과 회향정신이 살아났다는 세간의 고운 시선과 존경심을 짓밟기라도 하듯 그 분위기가 혼탁상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법장 스님 입적후 얼마간 종단에서는 종전과 달리 추대를 통한 총무원장 세우기 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얼마 안돼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마치 예정된 것처럼) 현 종단의 여권에서 추대위를 구성해 단일후보까지 뽑았지만 야권이 선출된 후보에 반발해 자신들의 후보를 추대할 움직임이다. 이와는 별도로 개별 후보까지 출마를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어 종단 전체의 단독 후보 추대는 물 건너갔고 결국 선관위에서 21일부터 후보 등록을 시작한다고 한다. 물론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지기만 한다면야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철을 밟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급기야 종정 스님이 나서 공정한 선거를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전국의 7000여 비구니들도 ‘우리가 원하는 총무원장 스님’이라는 성명을 내 들뜬 분위기를 지적하고 나섰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이번 선거는 조계종 내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로부터 혹독한 심판과 외면을 받을 수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반대로 지금까지의 오욕을 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31일 선거일정이 잡혀있는 만큼 전대미문의 아름다운 선례를 창조할 수 있는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광복 직후인 1947년 경북 문경 봉암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행하던 성철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스님 등 젊은 스님 20여명이 집결해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그 유명한 ‘봉암사 결사’다. 이들은 스스로 밥하고 나무하며 마을로 탁발을 나가 양식을 조달했다. 신도들로부터는 개인적으로 일절 시주를 받지 않음으로써 생활상의 평등을 실천했으며 이후 이들의 전설적인 수행 기풍은 조계종의 으뜸 귀감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장자종단 조계종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이 고승대덕들의 뜻을 진중하게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김성호 문화부장 kimus@seoul.co.kr
  • [서울이야기] (26) 여성의 문화·여가활동

    [서울이야기] (26) 여성의 문화·여가활동

    # 사례 1 세 살된 아이를 키우는 가정주부 김미란(30)씨는 친구와 전화통화 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미혼인 친구들이 모처럼 모여 음악회를 가기로 했다며 함께 할 수 있는지를 물어왔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지휘자에 즐겨듣는 곡들로 구성된 공연이었다. 결혼전에는 곧잘 공연장이나 미술관을 찾아다녔던 김씨이다. 문화예술에 별 관심이 없던 남편도 이런 김씨 덕분에 연애시절에는 공연이나 전시장에 종종 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결혼 후 아이 낳고 키우느라 직장까지 그만 둔 김씨는 공연장과 미술관은커녕 동네 가까운 영화관에 가 본 기억도 아물아물하다. 김씨의 남편은 간혹 직장 동료들과 함께 화제작인 영화를 보러가기도 하는데 회사에서 영화비를 주고, 관람 후에는 동료들과 한잔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란다. ●서울 여성의 문화생활 수준 서울시에 거주하는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조사에 의하면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여가문화활동에 대한 관심은 더 크나, 현재 자신의 여가문화활동에 대한 불만족은 남성에 비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서울시정개발연구원,2004년). 서울 남성과 여성 모두 문화행사에 자주 참여하는 편은 아니다. 연극의 경우 서울 여성의 26%가 일년에 한편 이상 연극을 보며, 서울 남성은 이보다 약간 낮은 22%이다. 미술전시회의 경우, 서울 여성의 27%가 1년에 한번 이상 전시장을 찾은 적이 있으며, 남성은 이보다 적은 21%가 전시장을 갔다. 음악 공연의 경우 장르별로 대중음악공연을 일년에 1회 이상 본 서울 여성은 19%, 서울 남성은 20%로 별 차이가 없다. 뮤지컬의 경우 서울 여성의 12%가, 서울 남성의 10%가 일년에 일회 이상 관람하였다. 클래식, 오페라는 이 보다 저조하여 서울 여성의 8%, 서울 남성의 7%가 일년에 한번 이상 클래식, 오페라를 관람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시민이 가장 적게 접하는 공연은 무용으로 서울 여성의 3%, 서울 남성의 4%만이 일년에 한번 이상 무용 공연을 관람했다. 서울 시민이 가장 손쉽게 접하는 문화활동은 역시 영화 관람으로 여성과 남성 74%는 일년에 한편 이상의 영화를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행사 참여도만을 볼 때 서울 여성은 서울 남성에 비해 근소하나마 문화생활을 더 향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울 여성의 60%는 왜 현재의 문화여가생활에 불만족한 것일까. # 사례 2 토요일 오후 집안일을 겨우 끝낸 이미경(42)씨는 서둘러 쇼핑길에 나섰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아이를 둔 이씨는 맞벌이를 하고 있다. 결혼 후 집 장만을 위해 힘들기는 했으나 맞벌이를 했는데,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사교육비가 이제 만만치 않아 당분간 맞벌이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올해 들어 주 5일제 근무가 시작되었으나, 이씨는 오히려 주말에 더 바빠졌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최근 병원에 입원한 시어머니에게 들어가는 비용도 늘어나고 있다. 주 5일제가 되면서 집안일을 봐주던 파출부를 그만 오게 하고, 대신 자신이 주말에 밀린 집안일들을 하고 있다. 시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는 일요일마다 병문안을 간다. 만약 여가시간이 나면 집에서 TV를 보거나 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한다. 앞으로 시간과 돈에 여유가 생기면 여행을 가고 싶고, 연극도 보러가고 싶다. ●서울 여성의 여가생활 양식 서울 시민은 남녀 모두 약 60%가 여가 시간을 주로 TV 시청과 잠자는 것으로 보내고 있어 일반적으로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다. 서울 시민이 문화예술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남녀 모두 시간이 없어서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자녀와 부모를 돌보느라, 또는 돈이 없음을 이유로 드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30∼40대 여성의 경우 그러한 경향이 더하다.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가 늘어나면서 어린 아이가 있는 취업여성들이 문화여가생활에서 더욱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에 의하면 맞벌이 가구의 주부는 남편에 비해 평일 가사노동시간이 약 1시간 많으며, 취업 주부의 가사노동 시간은 주말에 오히려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미취학 자녀가 있는 취업여성은 평일 9시간 50분을 일하고, 일요일에도 6시간 56분을 일하고 있어, 경제활동과 가사노동에 대한 이중 부담을 크게 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가활용방법에서 여성과 남성간에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가사와 스포츠 활동이다. 여성의 경우 여가시간에 46%가 주로 가사를 하며, 스포츠를 주로 한다는 여성은 4%에 불과하다. 반면 남성은 여가시간에 주로 가사를 한다는 경우는 13%이며, 스포츠를 주로 하는 사람은 15%였다(통계청,2002). 서울 여성의 대부분은 여가를 주로 집에서 TV를 보거나 휴식, 가사 등으로 소극적으로 현재 보내고 있으나, 여가를 여행이나 스포츠 레저활동, 공연관람으로 적극적으로 보내기를 희망하고 있다. # 사례 3 이번 토요일 구민문화예술회관에서 동호인 그룹 전시회를 갖게 될 박정란(35)씨는 마음이 약간 들떠 있다. 첫 전시회라 긴장도 되지만, 성취감과 함께 생활에 활기가 생겼다.2년전 구민문화예술회관이 완공되면서 여러가지 강좌가 개설됐다. 마침 평소에 박씨가 하고 싶던 유화 실기가 교육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취학전인 둘째아이를 마땅히 맡길 곳이 없어서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초 여성이 구민문화예술회관 관장으로 오면서, 구민문화예술회관 내에 어린이 놀이터와 독서실 공간을 만들었다. 박씨가 유화 실기를 하는 동안 둘째아이는 어린이 놀이터 내에서 보내고 있다. 저렴한 수업료에 강좌시간에는 아이까지 돌봐주는 구민문화예술회관이 없다면 자신에게 이 처럼 투자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주부들이 집에서 자신의 작업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을 배려하여 구민문화예술회관에서는 작지만 공동작업실을 제공해 주었다. 공동작업실을 꾸준히 이용하던 몇몇 여성들이 서로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작업을 하다 뜻을 모아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구민문화예술회관에서는 이들에게 흔쾌히 전시공간을 대여해 주기로 했다. 박씨는 첫 전시회 작품을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그리고 자신의 자화상으로 구상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작품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박씨는 새로운 삶의 자신감이 생겨남을 느끼고 있다. # 사례 4 요즘 최정아씨 가족은 대화가 많아졌다. 가족들이 최근 각자 좋아하는 문화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어제 구민문화예술회관의 국악 공연을 보고 오셨는데, 구민문화예술회관에서 하는 국악 공연은 빠지지 않고 이제 가겠다고 하신다. 중학교 다니는 딸은 오늘 저녁 구민문화예술회관에서 하는 청소년 연극제에 가기로 되어있다. 내일은 초등학교 아들이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상영한다고 한다. 저녁 시간에 요가반이 개설되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최씨 같은 여성들도 드디어 구민문화예술회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구민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일요일 가족음악회에는 온 가족이 함께 한다. 최씨가 특히 구민문화예술회관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성을 배려해 시설물이 설계됐기 때문이다. 우선 여자화장실이 넓고 아이를 동반한 여성을 배려하고 있다. 가족음악회 중간 휴식시간에 이곳은 다른 문화시설과 달리 여자 화장실의 줄이 짧은 편이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위한 놀이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휠체어를 탄 채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간도 있고, 통로도 계단이 아닌 나지막한 경사로 되어 있다.1층 로비에는 안락의자가 놓여 있고, 음료를 파는 작은 매점도 있다. 구민문화예술회관 주변은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에 아름답지만 밝은 조명으로 편안한 기분이 든다. 여름에는 매점이 밖으로 나와, 저녁 늦게까지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최씨도, 딸아이도 저녁 시간에도 안심하고 구민문화예술회관을 이용하고 있다. ●여성친화적인 문화시설과 운영 방식 1998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정책회의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문화권(Cultural Rights)이 인권만큼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 문화예술을 향유하거나 문화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는 데 장애요인이 많으므로 여성의 문화기관 접근성, 여성의 문화예술활동을 지원 장려하는 정부 차원의 문화정책을 촉구하고 있다. 그럼 여성친화적인 문화시설과 문화정책으로 어떤 사례들이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여성들은 가깝게 이용할 수 있는 지역사회 문화시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서울 여성의 경우 서울 남성에 비해 지역사회 문화시설인 구민회관, 공공도서관, 구민체육센터, 구민문화예술회관, 문화의 집 등을 더 많이 이용하고 있다. 문화시설을 이용할 때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대중교통이나 도보로 가는 경우가 많다. 지역사회 문화여가시설이 교통이 불편하거나 외진 장소에 있다면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시설 이용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점에서 최근 서울시가 목표로 하고 있는 지역문화예술회관 건립 지원, 소규모 공공도서관 확충사업, 학교시설에 체육스포츠센터나 문화공간을 확보하는 학교시설 복합화 사업은 여성친화적인 문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사회 문화시설을 여성이 많이 이용하는 만큼, 시설 설계나 운영이 이를 고려해서 건립될 필요가 있다. 최근 여성경제활동이 증가하고 있는 만큼, 이들 직장 여성을 위한 운영 방안이 필요하다. 영국의 글래스고시는 시민조사를 통해 여성의 72%가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이 낮 시간에 제공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시에서는 취업여성들을 위한 저녁 스포츠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다. 일부 시설에서는 저녁시간 스포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혼취업여성들을 위해 다림질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여자 청소년과 여성은 남성에 비해 문화여가시설의 쾌적함과 안전에 대해 민감한 편이다. 따라서 시설이나 주변환경이 쾌적하거나 안전한 느낌이 들지 않을 경우, 이용을 꺼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스포츠 시설의 경우 탈의실 같은 남녀별 이용시설 표식을 분명하게 하거나, 시설 안팎으로 조명을 밝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국에서는 여성과 여자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체육시설을 조사하고, 여성친화적 시설운영지침을 만들기도 하였다. 유럽, 캐나다, 미국의 문화시설에서는 전통적으로 무시되거나 과소평가 받아온 여성예술가나 여성 작품을 발굴하고 이를 알리는 사업을 하고 있다. 미국의 국립여성미술관은 여성 예술가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소장한 세계 최초의 여성 전문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에서는 다양한 가족 문화예술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으며, 어린 관람객에게 여성 예술가의 공헌에 대해 교육하며,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성공한 여성들과 여자 청소년 여성을 연계하는 멘토링 프로그램도 하고 있다. 이밖에 문학, 음악, 영화, 무용 등의 분야별로 여성 예술가 중심의 행사와 교육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유네스코는 한 사회의 문화적 창의성은 문화 다양성에서 나오므로 여성 예술가와 여성 작품을 재평가하며, 여성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문화정책에 각 정부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성친화적인 문화시설 운영과 관련해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의 경우 정책적으로 문화시설의 운영위원이나 고위직의 경우 여성과 남성의 참여율이 50대50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동작구에는 여성을 위한 문화복지시설인 서울여성플라자가 있다. 이곳은 여성들이 문화 및 교육활동에 참여하는 동안, 아이들은 그들을 위한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지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여성 관련전문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2003년부터 서울여성플라자에서는 유쾌한 치맛바람이란 주제로 서울여성문화축제를 매년 열고 있다. 2005년 5월에는 유쾌한 치맛바람 가족風(풍)을 주제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문화행사를 했다. 여성문화예술활동에 관심이 있거나, 또는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 문화생활에 빠져 들고 싶다면 서울여성플라자의 행사일정을 찬찬히 챙겨 본다면 유용할 것이다. 서울여성플라자의 프로그램은 홈페이지(www.seoulwomen.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경희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시사회연구부 연구위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일반인들에게 ‘삼양설탕’(현 ‘큐원설탕’)으로 익숙한 삼양사는 한국 근대경제사를 주도한 명문 기업이다. 호남 거부의 후예인 김연수(金秊洙) 창업주는 일제하인 1924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기업을 설립, 한국기업의 명맥을 이었다. 김 창업주는 형인 인촌(仁村) 김성수씨가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꾸려가도록 뒷받침했고, 여러 차례 재산을 털어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뒤에서 도왔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일제하에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친일인사로 선정하는 등 사후에 ‘친일’ 시비에 휘말리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근대 한국경제의 산증인인 김 창업주의 삶은 굴곡 많은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김 창업주는 1896년 10월1일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부친 김경중씨와 모친 장흥 고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형의 호인 인촌은 바로 두 형제가 태어난 동네 이름을 따온 것이다. 김 창업주의 부친은 1만 5000석 지기의 호남 최대 거부였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부친은 일제하에서 나라가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당시 저명한 사학자들을 몰래 불러 ‘조선사’를 17권이나 엮을 정도로 민족애가 투철했다는 게 삼양그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창업주는 어린 시절 외롭게 지냈다. 김 창업주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일찍 잃었다. 여기에다 한 명뿐인 형인 인촌이 큰아버지인 김기중씨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양자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어릴 적 김 창업주는 몸이 허약했다. 폐가 약했으며 위도 튼튼하지 못해 일찍이 폐와 소화기 계통의 질병으로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는 부모의 애를 끓게 했다. 이런 이유로 개구쟁이처럼 장난이 심하고 활발했던 인촌과는 달리 김 창업주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품을 지녔다. ●27세에 경영인으로 출발 김 창업주는 15세 되던 1910년 12월8일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박하진씨와 혼인을 맺었다. 결혼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인 최초로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922년 형의 권유로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전무와 상무에 취임, 경영인의 삶을 시작했다. 김 창업주는 고무신과 ‘태극성표’ 광목을 대히트시킴으로써 일본자본과 맞서는 최대의 민족회사를 일궜다. 집안 내력을 잘 아는 김재억 삼양사 상임감사는 “30년대 경성방직은 우리나라 금융거래 절반을 담당할 정도의 민족 최대 기업이었다.”고 말했다. 김 창업주는 또한 농촌재건을 위해 소작농을 협동농업 형태로 결합한 근대영농을 시작했다. 이를 발판으로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해 호남 일대의 소유농토에 대한 근대화 작업에 나섰다. 장성, 줄포, 고창, 명고, 신태인, 법성, 영광농장을 차례로 개설해 기업형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간척사업에도 눈을 돌려 손불농장과 해리농장의 2개 지역에 1070정보의 농토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상호가 삼양사(三養社)로 바뀌었다. 어느 날 한 작명가가 찾아와 ‘물 수’(水)를 ‘만인의 양식’이라는 뜻인 ‘기를 양’(養)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 창업주는 만주벌 개척에도 나섰다.5개 협동농장을 개설한 데 이어 봉천에 남만방적을 설립했다. 남만방적은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생산법인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으로 만주의 사업장들을 고스란히 놓고 철수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제당업으로 재기에 나서 해방공간을 겪으면서 반민특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 창업주는 한국 전쟁 이후 해체상태에 놓였던 삼양사 재건에 나섰다. 그는 재기의 발판으로 제당업과 한천제조업을 선택했다. 당시 설탕은 수입에 의존해온 대표적인 외화소비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울산 바닷가를 메워 그곳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건설했다. 그는 1956년 삼양을 제당으로 키우면서 주식회사 삼양사를 출범시켰다. 자신이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고, 사장에 3남인 상홍(83), 상무에 5남 상하(80)를 앉혔다.3남과 5남이 삼양사를 맡는 전통은 3세에도 그대로 이어져 삼양그룹은 현재 상홍씨의 장남 윤(53)씨와 상하씨의 장남 원(48)씨가 삼양사 회장과 사장을 맡고 있다. 둘째 아들들인 량(51)씨와 정(46)씨도 각각 삼양제넥스 사장과 삼남석유화학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당시 삼양사보다 수익률이 높았던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라는 별개의 회사로 독립시키고 맏아들 상준(작고)을 사장에 임명해 경영을 맡겼다.3공화국때 문교부장관과 5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차남 상협(작고)에게도 삼양염전의 지분 25%를 떼어주어 형제간 경영권을 일찌감치 교통정리했다. ●재계의 거목으로 김 창업주는 1962년 설립한 삼양수산을 통해 다양한 어종을 가공, 수출하는 등 한때 냉동선만 21척을 보유할 정도로 수산업에도 주력했다. 이처럼 제당과 수산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 한국 재계의 얼굴이 되었다. 경영이 본 궤도에 오르자 김 창업주는 전주방직을 인수, 삼양모방(주)을 설립했다. 이어 1969년 전주에 대단위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건설했다. 이로써 70년대 들어 삼양은 국내 초창기 산업의 중심이었던 제당으로 확고한 제조업체로의 변신을 이룩했다. 이 당시 삼양은 매출액에서나 기업선호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국내 정상급 기업으로 우뚝 섰다. 김 창업주는 사업에 투신한 지 만 53년이 되던 1975년 회장을 상홍에게, 사장에 상하를 임명하는 등 ‘2세경영’을 출범시키고 은퇴했다. 그의 나이 80세일 때였다. 그는 은퇴 후 농촌으로 돌아가 마지막 열정을 쏟다가 1979년 84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교육사업도 아낌없는 지원 그는 기업경영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운영기금을 출연한 것을 비롯해 양영회와 수당장학회를 설립,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문성환 삼양사 부사장은 “창업주는 두 재단을 통해 대학생 2만여명에게 대학등록금을 비롯해 하숙비, 책값, 소정의 용돈까지 장학금으로 대줬다.”고 회고했다. 이런 김 창업주의 혜택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덕수 경제부총리, 오세철 연세대 교수 등이 꼽힌다. 경성방직의 회계를 맡아 김 창업주를 도왔던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는 “수당(秀堂·김 창업주의 호)은 돈 쓰는 데도 일가견을 가진 사람으로 만금을 쓰면서도 기업경영에는 한 푼을 아꼈다.”고 그의 용전(用錢)철학을 전했다. 김 창업주는 경쟁회사에도 관대했던 묵묵한 성격의 경영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1966년 삼양의 경쟁회사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한국비료가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곤혹을 치렀다. 임원들이 ‘사카린 없는 삼양설탕’이라는 문구로 대대적인 광고전을 벌이자고 수차례 건의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는 그의 성품을 읽는 일화로 경영인들에게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방대한 혼맥…사회 각 분야와 사통팔달 김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아들로는 장남 상준(작고), 차남 상협(작고),3남 상홍(83),4남 상돈(81),5남 상하(80),6남 상철(70),7남 상응(작고) 등 7남과 장녀 상경(79), 차녀 상민(78),3녀 정애(75),4녀 정유(73),5녀 영숙(72), 막내 희경(66) 등 6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 가문의 혼맥은 정계·관계·학계·언론계·재계·교육계 등과 거미줄처럼 얽힌 방대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김 창업주의 성격이 소탈해 자식들에게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평범하고 무난한 결혼을 시켰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김재억 감사는 “창업주의 생활철학이 권세를 배격하는 것이어서 자식들이나 3세들의 결혼에도 사돈 될 집안의 내력과 상대방의 성실성을 먼저 봤다.”고 회고했다. 김 창업주는 특히 자녀들의 대부분은 중매결혼으로 짝지웠지만 사위와 며느리를 맞는 데서는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사위를 고를 때는 가문을 따지지 않고 사람됨됨이와 능력을 위주로 보았고, 며느리는 후덕한 집안 출신으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기를 원했다. 특히 사돈가의 위치를 보고 정혼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 그의 직접 사돈 가운데는 정관재계의 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김 창업주의 며느리들 가운데 위로 세 명은 이화여전 출신 등으로 당시의 김 창업주가 원했던 신여성들의 표본이 많았다. 반면 창업주의 형인 인촌 성수씨도 9남4녀를 두어 대가를 이뤘는데 장남인 상만(작고)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직계 자손들은 화려한 혼맥을 자랑하고 있다. 고려대 이사장이자 동아일보 전 회장인 장손 병관씨는 장남 재호(41·동아일보 대표이사 전무)씨를 이한동 전 총리의 차녀인 정원(38)씨와 결혼시켰고,2남 재열(37·제일모직 상무)씨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인 서현(32·제일모직 상무보)씨와 결혼했다. 김연수 창업주 자녀들의 혼맥을 살펴보면 장남 상준씨는 당시 집안과 각별하게 지내던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의 소개로 이뤄져 1943년 구영숙씨의 맏딸 연성(85)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상준씨는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조흥은행에 근무할 때였고 연성씨는 이화여전 음대를 졸업한 직후였다. 상준씨는 3명의 딸을 출가시켜 정·관·재계 인맥을 형성했다. 장녀 정원(62)씨의 부군은 고려대와 국가대표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선휘(68·삼양염업사부회장)씨다. 축구를 좋아하던 상준씨는 모교인 고려대 축구팀을 지원했는데, 이 일로 선휘씨가 상준씨 집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혼사가 맺어졌다. 차녀 정희(58)씨는 5공시절 당시 거물 정치인이었던 김진만씨의 맏며느리로 보내 동부그룹 회장인 김준기(64)씨를 사위로 맞았다.3녀 정림(57)씨는 전 문교장관 윤천주씨의 장남 대근(59)씨와 결혼했다. 대근씨는 현재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과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을 맡고 있다. 상준씨의 장남 병휘(60)씨는 한양대 자연과학대 자연과학부 수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차남 범(52)씨는 독신으로 지내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차남 상협씨는 해방 직후 고려대 부교수 시절, 의사 김준형씨의 2남3녀 가운데 맏딸 인숙(82)씨와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인숙씨도 니혼조시 대학을 나온 당시 보기 드문 일본 유학 신여성이었는데 상협씨의 도쿄제대 동창 부인의 소개로 만나 연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녀 명신(58)씨를 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65) 서울대 법대교수와 혼인시켰다.2녀 영신(56)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 성진(58)씨와 결혼했다. 외아들 한(52)씨는 메리츠증권 부회장으로 있다. 3남 상홍(83)씨는 구 치안본부 재직시절 수원갑부 차준담씨의 2남2녀 가운데 맏딸 부영(79)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영씨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이었다. 상홍씨는 2남2녀 가운데 장남 윤씨를 전 서울신문사 김종규 사장의 딸 유희(46)씨와 혼인시켜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과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됐다. 또 차남 량씨는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막내딸 영은(46)씨와 백년 가약을 맺었다. 영은씨의 오빠 장대환씨는 매일경제 신문 창업주 정진기씨의 사위로, 현재 매일경제신문 대표이사회장 인쇄인 겸 발행인과 현 매일경제TV 대표이사 회장이다. 장녀인 유주(56)씨를 사업가 윤주탁씨의 2남 영섭(59·고려대 상대교수)씨에게 시집 보내 윤주탁씨와 직접 사돈간인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과 연결되고 있다. 영섭씨의 남동생인 영식씨가 박 전 위원의 장녀 진아(48)씨와 결혼했다. 4남 상돈씨는 6·25 직후 김유황 전 광장㈜ 부사장의 딸 용옥(73)씨와 결혼했다. 상돈씨는 맏형인 상준씨의 중매로 장남 병진(52)씨를 축구협회 부회장과 축구대표팀 감독을 지낸 한흥기씨의 딸인 혜승(45)씨와 맺어줬다. 차남 영로(50)씨는 사업을 하던 정형식씨의 딸 은미(46)씨와 혼인했다. 외동딸 희진(45)씨는 전 대한항공 이사 오명석씨의 외아들 광희(49)씨에게 시집갔다. 광희씨는 전 나이스정보통신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5남 상하씨는 삼양사 설탕공장 설립관계로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1953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 바로 박상례(75)씨와 혼인을 맺었다. 상례씨는 공무원 출신인 박규원씨의 딸로 김 창업주의 친구가 중매를 섰다. 외동딸인 영난(44)씨를 송하철(45·주식회사 항소 사장)씨와 결혼시켜 송남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며느리로 보냈다. 장남 원씨를 배영화 경희어망 회장 딸인 주연(45)씨와 맺어 줬다. 차남 정씨는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딸인 혜원(39)씨와 결혼했다. 6남 상철(70)씨는 사업을 하던 우근호 씨의 딸 정명(63)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7남 상응(작고)씨는 공무원 생활을 했던 권오경씨의 5녀중 셋째딸 명자(53)씨와 결혼했다. 장녀 상경(79)씨는 아폴로박사 조경철씨와 결혼 후 이혼해 조서봉(필립), 조서만(조지)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차녀 상민(78)씨의 남편은 이두종(작고)씨로 활발하게 삼양사의 경영에 참여했다. 온양 지주의 아들로 자란 두종씨는 1956년 삼양사 과장으로 입사해 이 회사의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올랐다.1984년 회사를 떠난 뒤에도 삼양그룹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양영회와 수당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3녀 정애(75)씨는 교육계에 몸담았던 조종립씨의 아들 석(작고)씨와 결혼했다. 석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결혼 후인 57년 삼양사에 사원으로 입사, 총무부장·경리부장·이사·상무·대표이사 부사장을 거쳐 전 삼양제넥스 상임고문까지 역임했다. 4녀 정유(73)씨의 남편은 전 서울대 부총장인 김영국(작고)씨다. 그는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김덕창씨의 8남매 가운데 3남으로 인천이 낳은 천재로 불리었다. 이들은 김 창업주 친구의 소개로 결혼했다. 영국씨는 서울대 정치학과 총동창회장을 지낸 상하씨의 후배이자 매제인 셈이다. 5녀 영숙(72)씨는 미국인 스테푸친과 결혼, 딸 페기, 아들 프랭크를 두고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막내딸 희경(66)씨도 교육자였던 김종규씨의 아들 성완(68·삼양사 의약사업 고문)씨와 결혼,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성완씨는 미국 유타대학 석좌교수로 인공심장 분야의 권위자다. jrlee@seoul.co.kr ■ 창업주의 친일논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29일 친일인사인명사전 편찬을 앞두고 수록예정자 명단 3090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삼양사의 창업주 김연수씨도 포함됐다. 김씨는 전쟁협력 분야에서 ▲1939년 만주국 명예 총영사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적 이사장 ▲1940∼1945년 중추원 참의(자문위원)를 지냈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이에 대해 삼양그룹측은 대응을 일절 자제한 채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다만 그룹의 한 관계자는 “창업주가 일제의 압제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등 깜짝 놀랄 만하게 대항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일제의 폭거에 맞서 민족자본을 형성했다.”며 “후세에 역사가들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보다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창업주는 무죄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또 창업주는 창씨 개명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 창업주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는 일제시대 그의 행적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6부로 구성된 전기에는 4부 ‘고난의 시절’ 편에 일제에 협조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었던 고심의 일단들이 실려 있다. 김씨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통렬한 자기반성의 글을 실었다. 김 창업주는 반민특위에 검거돼 7개월간 수감됐지만 이런 반성의 자세가 참작됐는지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경성방직을 경영함에 강력히 일본자본과 싸웠고, 항상 한민족을 위한 경제적 기반확립에 노력했고, 경성방직의 상표를 태극기에서 모방한 것으로 보아 피고의 행위는 많이 참작할 곳이 있으며, 그 외의 관직 및 명예직은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피동적으로 맡은 것이라고 증명되며, 또 피고는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학생에게 원조를 해 그의 혜택을 본 자의 수는 현재 수백명에 달하는 것이니 이 점으로 피고가 남긴 공적은 크다고 할 것이며, 기타 증인의 증언을 통해 볼 때 피고를 단순히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jrlee@seoul.co.kr ■ 형 김성수와 동생 김연수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인촌(仁村) 김성수와 수당(秀堂) 김연수를 아는 주위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인촌과 수당은 호남갑부 김경중씨의 두 아들이었지만 성격은 딴판이었다. 수당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침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형 인촌은 활달하고 외향적이었다. 여기에 형제는 다섯살이나 터울이 져 어린 시절엔 서로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평생을 친한 형제로 지냈다. 인촌은 수당이 근대적 교육을 받도록 인도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일본으로 가게 해 중·고등학교와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도록 도왔다. 수당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일찍이 ‘기업인’이 될 것을 결심했다. 오사카의 공장지대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결단의 계기였다. 이처럼 수당의 행적은 형 인촌의 행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수당이 기업가로서 길을 걷는 데는 인촌이 설립하고 인수한 기업의 경영을 맡음으로써 시작됐다. 수당이 경영인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도 1922년 형이 운영하던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인을 맡고부터다. 이후 수당은 경영인으로서 성공하자 인촌을 적극 도왔다. 생전에 인촌은 수당이 없었으면 교육사업을 비롯한 자신의 활동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곧잘 술회했다. 수당은 언제나 인촌에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뜻을 펼치라고 말했다. 인촌이 설립한 고려중앙학원이나 고려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등 모두 동생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수당은 1940년대까지 고려중앙학원과 고려대에 기부한 재산이 연 평균 250만원에 이르렀는데, 이를 현 시가로 어림잡아 환산하면 1000억원(쌀값 기준)을 훨씬 넘는 액수다. 그러면서도 동생은 형이 하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돕기만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형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나는 재정적인 지원만 하면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형을 만날 때마다 “형님은 교육과 문화사업을 하세요. 저는 뒤에서 돈을 대리다.”라며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했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국감 하이라이트] 野 “감청대상 4개월마다 대통령 승인”

    [국감 하이라이트] 野 “감청대상 4개월마다 대통령 승인”

    7일 국가정보원을 상대로 열린 국회 정보위 국감에서는 국민의 정부 시절 휴대전화 감청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전 인지설을 둘러싸고 공방이 벌어졌다.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은 “당시 국정원장이 직접 대통령을 방문해 승인을 받았다.”면서 “국정원은 감청 대상자의 규모를 정해 매년 1월과 5월,9월 등 4개월 단위로 대통령의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쳤다.”고 주장했다. 이어 “KT측에 대통령 승인서 사본을 제출한 뒤 유선중계망 회선에 연결, 국정원 내부의 감청 장치까지 연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권 의원은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감청관련 서류에는 유·무선 전화번호를 기재하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에 대통령 승인서에도 감청 대상의 번호가 기재돼 있었을 것”이라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승인서에는 장비 기재란이 없다.”면서 “국가안보 목적을 위한 감청의 경우 반국가활동 혐의가 있는 외국기관과 단체 등에 한정하고 있으며 적법한 절차를 따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권 의원은 “대통령 승인서에 휴대전화 번호가 적시되지 않았다면 더 문제”라면서 “이 경우 국정원이 대통령의 백지 위임을 받아 정치사찰 등을 위한 불법 도청을 자행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권 의원은 지난해 국정원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문서 양식을 열람한 뒤 “현재로서는 김 전 대통령이 사전 인지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며 꼬리를 내렸다. 권 의원은 한걸음 더 나아가 참여정부의 불법감청 가능성까지도 제기해 이를 부인하는 국정원측과 설전을 벌였다. 그는 “국정원의 대화감청 건수가 지난해 160여건, 올해 6월 현재 60여건이나 되지만 법원에 청구된 영장은 1건에 불과하다.”면서 “국가안보 등에 관련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영장이 필수적인 만큼 현 정부에서도 불법감청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이에 국정원측은 “국정원은 대상사건 모두 영장을 발부받았고 영장 사본을 보관하고 있다.”며 불법감청 의혹을 일축했다. 김승규 원장도 “노무현 대통령이 승인서를 결재할 때 불법적으로 감청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하게 강조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한편 “김은성 전 차장이 권노갑·박지원씨 등에게 불법 감청 관련 내용을 보고하지 않았냐.”는 추궁에 김 원장은 “전직 직원이라 수사권이 없어 조사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한인동포 정체성·생활문화 급변 한민족 네트워크 위한 조사 절실”

    “한인동포 정체성·생활문화 급변 한민족 네트워크 위한 조사 절실”

    “중국 동북3성의 조선족은 차 대신 숭늉을 마시는 등 의식주 생활에 한민족 전통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멕시코의 한인 후손들은 한인보다 멕시코인, 미국인 등과 결혼을 해 정체성이 상당히 약화됐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홍남)이 한국문화인류학회(회장 김광억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와 공동으로 27일 개최한 광복 60주년 기념학술대회 ‘재외 한인동포 이주의 역사와 문화’에서 소개된 한인동포들의 생활상이다. 이 자리는 민속박물관과 문화인류학회가 지난 10년간 벌여온 한인동포들에 대한 현지조사 연구를 평가하고, 추후 사업 및 정책의 방향설정을 위해 마련됐다. 발표에 나선 김광억 서울대 교수는 “중국 둥베이(東北)지역 조선족의 일상에서는 조선어가 기본이나 30대 이하 사람들은 한어가 오히려 유창하다.”면서 “최근 경제여건이 개선되면서 일생의례 등에서 한국식 생활양식이 전파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밝혔다. 중앙아시아 한인동포를 연구해온 전경수 서울대 교수는 “북한과 밀접한 구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이후 남북 대결구도가 조성됐고, 지역별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다.”고 전했다.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재일동포의 문화에 대해 “식생활은 민족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지만 의생활은 거의 일본식으로 바뀌었다.”면서 “일본정부의 동화주의 정책의 영향으로 재일동포의 생활문화는 ‘혼성화’ 및 ‘재민족화’ 성격을 띤다.”고 말했다. 멕시코 한인동포의 문화연구를 맡은 김세건 강원대 교수는 “지난 100년간 한국과 단절돼온 멕시코 한인들의 생활문화는 ‘현지화’와 ‘고립적 정형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서 “그러나 식문화와 세시풍속에서 한국문화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재인식하는 중”이라고 소개했다. 김홍남 민속박물관장은 “한인동포 이주의 역사가 140여년이나 됐지만 지금까지 조사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동포들의 생활지역이 남아있고 이미 조사한 지역들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면서 “한민족 네트워크 강화를 위해 이들의 생활문화에 대한 조사연구를 강화할 필요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꿈의 초특급열차「관광호」

    꿈의 초특급열차「관광호」

      2월 8일 하오 1시 20분 -「관광호」가 시험운행을 시작함으로써 24년 만에 우리나라에 1등 객차가 부활되었다.「살롱·카」「비즈니스·룸」등「딜럭스」시설을 갖춘 이「달리는 응접실」은 오는 4월부터 경부(京釜)간을 4시간 45분에 달려「꿈의 초특급」구실을 할 예정. 엷은「오린지」빛 바탕에 하늘색 띠를 두른 이「딜럭스」열차는 특1등 1량, 1등 8량,「살롱·카」1량, 발전차 1량 모두 11량으로 편성된 호화판 객차로 우선 그 내부시설을 살펴보면 - ◇ 특1등 = 푸른「카페트」가 깔려 있고 전기「히터」32개와「쿨러」(냉방시설) 6개가 달려 있어 자동온도조절. 좌석마다 안내원을 불러낼 수 있는 초인종이 달려있고 베개, 휴지통, 간이탁자 등이 있다. 뒤에 마련된 3석의「비즈니스·룸」에선 사무를 볼 수 있는 탁자와 칸막이 시설이 되어 있으며 변소는 양식(洋式). ◇ 1등 = 종래 1량에 72좌석이던 2등에 비해 좌석 56개로 좌석 간격이 넓어서 좋다. 모든 시설이 특1등과 같으나 초인종,「비즈니스·룸」, 베개가 없으며 변소는 재래식. ◇ 발전차 = 종래의 객차발전은 객차마다 직류전원이 달려 있었으나「관광호」엔 따로 발전차량을 달아 4백kw의 발전량으로 전력 공급. 이 전력은 2천 세대가 충분히 쓸 수 있는 것. 이「관광호」의 모든 객차, 발전차는 새로 일본에서 도입된 것으로(총 236량)「관광호」의 도입값을 따져보면, 특1등 1량 2,250만원, 1등 8량(1량 2천만원) 1억 6천만원, 발전차 1량 3,598만원,「살롱·카」1량 2,520만원으로 총 2억 4,368만원이 된다. 가위 시설뿐만 아니라 가격면에서도「수퍼·딜럭스」열차. 철도청은 관광「시즌」에 대비, 외국인 국내관광객이 단체로 이용할 때에는 전세 운행도 할 방침. 한편 이「관광호」의 운행에 앞서 철도청은 12만 7천 입방m의 도상(道床)자갈을 보강하고 경부간만 약 12만개의 PC침목을 바꾸어 끼어 침목의 84%를 PC화 했다. 또 앞으로 1등 객차엔 그 시끄럽던 이동판매원을 타지 못하게 할 방침이라고. 8일,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떠난「관광호」의 행운의 첫 시승(試乘)기관사는, 서울은 경력 15년에 32만여km를 무사고로 달린 김교원씨(서울기관차사무소소속), 부산에선 경력 16년에 70만km를 무사고로 달린 이동진씨(부산기관차사무소소속)가 몰았다. 시승 당일 철도청은 국내외 귀빈들을 초청, 시승케 하고 여행용「백」, 기념「메달」, 맥주,「토스트」,「코피」,「카라멜」, 신탄진 담배, 과자 등 푸짐한 선물. 여기에 든 비용만 6백만원이란 얘기다. 운행 도중 시승권 추첨놀이를 하여 가수 김「세레나」양이 추첨결과 1등 1377번의 이한용씨가 당첨, 3개월간 전선(全線)무임승차권을 받고 2등은 1258번, 3등엔 1053번 등이 각각 당첨. 최연소 시승객은 L국회의원의 아드님인 6살짜리 꼬마. 이 꼬마귀빈은 수원역을 지나자 그만 잠에 골아 떨어져「카라멜」을 손에 쥔 채 특1등객차 2좌석을 점령하고 단잠에 녹아 떨어졌다. 한편 철도병원에서 나온 의무반(의사 1명, 간호원 2명)에 첫 신세를 진 사람은 17세의 소하물(小荷物)운반원 서(徐)모군. 서군은 소하물을 나르다 왼손 식지 끝을 다쳐 응급처치를 받았다. 김기형 과기처장관, 이훈섭(李勳燮) 철도청장, 김「세레나」양이 한편에서 한담을 나누는가 하면 가수 최희준,「디자이너」「조세핀」조(趙), 김비함씨 등이 모여 앉아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지만 경부간 특1등 4,700원, 1등 4,200원으로 보리쌀 한 가마 값이 넘는 이 엄청난 운행요금은 서민(庶民)들에겐 아직 그림의 떡.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
  • [성매매 특별법 시행 1년] 집결지 여성 절반 떠나…변칙 성매매는 급증

    [성매매 특별법 시행 1년] 집결지 여성 절반 떠나…변칙 성매매는 급증

    성을 사고 파는 행위, 특히 성을 구매하는 사람도 범죄자로 다루는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된 지 23일로 1년이 된다. 성매매가 오랜 관습이라며 시행을 전후한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특별법 시행으로 성매매를 범죄로 여기는 의식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는 바탕은 마련됐다. 그러나 보다 은밀하고 교묘해진 성매매에 한계를 드러낸 당국의 행정력, 성매매에 빠지는 피해 여성들을 도울 수 있는 사회안전망의 부족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더미처럼 많다. 20일 오후 10시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88번지. 속칭 ‘미아리 텍사스’라고 불렸던 곳이다. 낮시간부터 일찌감치 유리문 앞에 켜져 있는 빨간불은 ‘영업 중’을 알리고 있지만 드나드는 손님은 드물다. 불꺼진 업소 앞엔 어김없이 ‘월세 놓습니다’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낡은 종이가 몇달 동안 문을 닫은 곳이란 것을 알리지만 성매매 집결지라 세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울의 최대 성매매 집결지였지만 1년새 업주도 종사자들도 하나둘씩 이곳을 떴다. 지난해 초만 해도 160여개 업소에 성매매 종사자들이 690명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130여개 업소,450여명으로 급감했다. 이날 만난 40대 중반의 업주는 “낮 시간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던 유명 업소들조차 하루 한두명 받기가 힘들다.”고 했다. 성매매 집결지의 쇠락은 지방도 마찬가지다. 경남지역의 유일한 성매매 집결지인 마산 서성동 속칭 ‘신포동’에는 특별법 시행 이전 47개 업소에 218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25개 업소에 60명이 있을 뿐이다. 부산의 속칭 ‘완월동’에도 70개 업소 500여명에 달하던 여성 종사원들이 지금은 30여개 220여명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홍등가의 불빛은 어두워졌지만 성매매 행위는 더욱 음성화·지능화된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인터넷 출장매춘’‘출장마사지’‘전화방’‘대딸방’ 등 변칙 성매매 행위는 오히려 급증세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부풀어 오르는 이른바 ‘풍선효과’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청량리 588번지에서 만난 업주 김모(37)씨는 “성매매특별법이 이뤄낸 건 집창촌의 침대를 이리저리 흩어놓은 것뿐 그 이상은 아니다.”고 말했다. 인터넷 성인사이트 등에는 채팅을 통해 성매매 대상자를 찾는 여성들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고급 외제 밴 등을 이용해 장소를 이동해가며 성을 제공하는 서비스까지 출연했다. 단속경찰은 “마약단속만큼 증거를 잡기가 힘들다.”고 토로했다. 손을 이용해 손님에게 유사 성행위를 해주는 대딸방에 대한 단속이 심해지자 이를 변형한 ‘페티시 클럽’이 생겨나고 있다. 스타킹이나 유니폼 등 사물에서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페티시즘’을 이용, 독특한 차림의 여성들이 유사 성행위를 해 주는 것이다. 전남과 광주지역에는 ‘피부관리실’ 등 간판을 내걸고 성매매를 하는 업소가 늘어나고 유사 성행위를 하는 새로운 형태의 성매매 업소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부 여성 종사자들은 아예 해외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강원 춘천지역 성매매 종사자 수십여명은 일본으로 유입됐고 일부 성구매자들이 룸살롱 여성 종사자들과 함께 3∼5일간 일정으로 동남아 여행을 하는 등 이른바 ‘묻지마 성여행’을 떠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성매매 여성이 다시 잘못된 길로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재활사업은 아직 큰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올해 성매매 방지대책 추진을 위해 편성한 예산은 모두 220억원으로 이 가운데 82억원이 성매매집결지 자활지원 시범 사업에 쓰이고 있다. 그러나 대책이 지나치게 집결지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데다 탈성매매 지원 대책도 미흡해 성매매 여성들의 ‘역유입’이나 음성적 성매매로의 이동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조영숙 사무총장은 “성매매특별법은 성매매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열매를 맺기 위해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 1년이 성매매가 잘못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이뤄낸 해라면 이 법을 국민이 수용하고 실천하는 단계가 필요하다.”면서 “아직은 법에 비해 성매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너무 관대하다.”고 말했다. 또 “또 성매매단속을 위한 장기적인 대책수립과 지속적인 시행을 위한 전담기구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유영규 유지혜기자 whoami@seoul.co.kr ■ 성매매 31%가 인터넷 알선 지난 1년간 성매매 종사자와 집결지 수는 크게 줄었지만 인터넷 알선이나 유사 성행위 등 변칙적 행태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또 위반사범에 대한 처벌도 경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7월 이후 성매매 집중단속 결과, 전체 적발 3422건 중 31.9%인 1093건이 메신저 등 인터넷을 통해 연결된 성매매로 나타났다. 또 스포츠마사지, 휴게텔, 휴면텔, 화상대화방, 출장마사지, 성인전용PC방 등 유사 성행위도 597건으로 17.5%를 차지했다. 반면 성매매 집결지에서의 성매매는 205건으로 6.0%에 그쳐 특별법 시행 이후 드러내놓고 하는 성매매는 크게 줄어든 것으로 확인됐다. 룸살롱 등 유흥업소에서의 성매매가 1166건으로 가장 많은 34.1%를 차지했다. 경찰은 “특별법 시행 이후 인터넷 성매매 등 외에 물건 판매 등 합법을 가장한 변칙채권으로 성매매를 하는 등 새로운 성매매 방법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단속을 대폭 강화키로 했다.”고 밝혔다. 성매매특별법 발효 이후 지난 1년간 성매매 종사자 수는 5567명에서 2653명으로 52.3% 감소했다. 성매매 집결지에 있던 업소 수는 특별법 발효 전 1679곳에서 1061곳으로 36.8%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한편 법무부가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주호영(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9월부터 올 6월까지 검찰에 접수된 성매매특별법 위반사건은 총 1680건이었으나 이 가운데 정식기소된 사건은 305건으로 기소율이 18.1%에 불과했다. ●성매매방지특별법이란 지난해 9월23일 발효된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등 2개의 특별법을 통칭한다. 성매매 업주와 성매수자에 대한 처벌 강화 및 성매매 여성의 인권보장 등이 골자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본지기자가 만난 脫성매매 여성들 지난해 10월 유흥주점에서 일하던 김주연(23·가명)씨는 성매매특별법 시행으로 자신을 옭아매던 ‘성매매’의 사슬을 가까스로 끊었다. 이후 사회복지단체의 도움으로 서울 종로구의 어느 성매매여성 쉼터에 정착, 제과·제빵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1월에는 ‘케이크데커레이션’ 과정까지 등록,7월 ‘케이크디자이너’ 자격증을 땄다. 제과·제빵사도 이미 필기시험에는 합격해 실기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다.‘삼순이’처럼 개성있는 빵을 내놓는 ‘파티시에’가 그의 꿈이다. 같은 보호시설의 이미영(가명)씨도 8월 ‘양식조리’ 이론 시험에 합격,‘쉐프’의 희망을 이어가고 있다.10여명이 모여 사는 보금자리에는 이들 외에도 대부분 미용이나 제빵, 네일아트 등 취업에 도움이 되는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고 있다. 성매매 피해 여성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최고 1년까지 머물 수 있는 쉼터에서는 개인 상담과 인성교육 등 피해자치료회복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생계 대책을 위한 미용과 컴퓨터, 조리, 제빵 등 직업훈련도 병행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사설 학원을 오가며 검정고시와 대학입시 등을 통과해 못다 이룬 배움의 열정을 이어가기도 한다. 성북구 H쉼터의 하미정(28·가명)씨와 전유진(23·가명)씨는 미용학과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05학번’ 새내기. 중졸 학력인 하씨는 대입검정고시에 합격, 지난해 전씨와 함께 대입 원서를 냈다. 헤어디자이너와 성매매여성·노인 관련 사회복지사가 새로 설정한 목표다. 동료를 위해 강사로 직접 나선 경우도 있다. 마포구 H쉼터의 오시내(가명)씨와 신미진(가명)씨는 현재 ‘탈성매매 전업 프로그램’의 네일아트 강사다. 지난 5월부터 두달 동안 첫 강의를 맡았는데 반응이 좋아 다시 강단에 섰다.20명 안팎이 머무르는 이 쉼터에서 이번 여름에만 미용사 자격증을 2명이 땄다. 네일아트 자격증도 1명, 전산처리 관련 자격증은 2명이나 얻었다. 서울시에 설치된 탈성매매 여성을 위한 쉼터는 모두 15곳으로 지난 8월 말 현재 169명이 입소한 상태다. 최대 수용 가능 인원은 204명. 성매매방지법을 시행한 뒤 일시적인 포화상태를 보이다가 올해 초부터 안정세를 찾았다. 지난해 9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516명이 입소,502명이 퇴소했다. 이전 특별법 시행 이전에 입소한 인원까지 포함시켜 555명이 의료지원을 받았으며 498명이 법률지원,310명은 직업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다.S대 등 상급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10명, 이밖에 일반 사무직과 미장원, 네일아트점 등 사회에 진출한 사람만도 27명에 달한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클릭 이슈] 서울대진학 고교순위·합격자수 공개 논란

    고등학교별 서울대 입학자 수를 보여주는 자료를 일부 언론이 공개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지금까지는 신문과 방송 등 언론사들이 관련 내용을 취재는 하더라도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서울대 입학자 수를 기준으로 고등학교의 서열을 만든다는 이유였다. 이는 언론사간의 암묵적 합의요,‘신사협정’이었다. 그러나 15일 일부 신문에 관련 내용이 보도되면서 ‘협정’이 깨졌다. 한 신문은 15일자 조간에 ‘명문고 출신 서울대 신입생 10년 전의 절반으로’라는 기사를 실었다. 한 석간 신문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2005학년도에 서울대에 10명 이상 진학시킨 고등학교 65곳의 실명과 합격자 수를 넣은 표를 합격자가 많은 순서대로 길게 ‘한 줄’로 배치했다. 표의 내용을 분석하고, 전날인 14일 서울대가 발표한 ‘1996∼2005학년도 합격자 배출 고등학교 현황’을 실었다. 서울대는 지난 14일 기자설명회에서 보도자료를 내면서 ‘서울대 입학생의 출신고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설명을 달았다. 지역균형선발 전형으로 서울대에 학생을 입학시키는 고등학교 수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학교별 합격자 수는 공개하지 않았다. 예로 든 일부 학교도 영문 머리글자로 처리하고,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학교 이름을 서너 개만 공개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서울대에 합격한 고등학교의 실명과 합격자 수를 알아내서 공개했다. 고등학교를 컴퓨터 추첨으로 배정하는 방식인 지금의 평준화 체제에서 고등학교별 서울대 합격자 수가 공개되면 합격률이 높은 고등학교에 배정받기 위해 위장전입을 하는 등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이런 이유로 고교별 입학생 수를 공개하지 말라고 대학에 당부하고 있다. 국회의원들도 국정감사 때 구체적인 자료는 공개하지 않는다. 일선 학교에서 ‘축 서울대 ○명 합격’이라는 현수막이 사라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재 일부 학원에서 학생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서울대 합격자 수를 현수막으로 내걸기는 하지만 틀린 경우가 많다. 교육부는 이 신문이 보도한 서울대 합격자 수도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교육부를 취재하는 출입기자단에서는 지난 98년부터 ‘대학입시 보도강령’이라는 것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지키고 있다. 해마다 상황에 따라 고치는 일종의 자발적인 윤리강령이다. 종로와 대성, 중앙, 고려 등 주요 대입 학원 6곳도 지난 2003년부터 관련 내용을 발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기자단의 ‘2005학년도 대입 보도강령’을 보면 ▲국·영문 머리글자를 포함해 단위 고교별 및 특정 기초자치단체별 대학 합격자 수 ▲대학의 전체·계열별 수석 합격자 ▲수능 수석(만점자는 예외) ▲수능 점수대별 지원가능 대학 예상 표 ▲수능 총점·영역별 점수의 등락 예상 폭 등 5가지는 보도하지 않도록 돼 있다. 이를 어길 경우 최장 1년 동안 기자실의 출입을 금지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강제성이 없는 자율 강령이기 때문에 실제 실천 여부는 언론사의 양식에 맡길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실제 보도강령을 만든 이후 이를 어긴 언론사가 서너 곳 있었지만 제재 결정에 반발, 흐지부지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사태가 확산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동안 교육계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에 대해 언론 스스로 보도를 자제해온 관행이 사실상 깨졌기 때문이다. 박융수 대학학무과장은 “관련 보도가 잇따를 경우 큰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려대 김경근 교수는 “알 권리 차원에서는 학교의 실명을 공개할 수 있겠지만 그에 따른 여파를 생각하면 공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이강수 연대교수 제자들, 정년퇴임 논문집 비판

    이강수 연대교수 제자들, 정년퇴임 논문집 비판

    최근 부쩍 각광받고 있는 노장철학. 서양의 이성주의나 물질주의의 대항마로 꼽힌다. 허무맹랑하다는 평가는 벗어던졌으니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서양에 ‘대해’ 의미를 가진다고 해석하는 것도 편하지만은 않다. 여전히 중심에는 서양철학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노장철학 연구의 1세대로 꼽히는 연세대 이강수 교수의 정년퇴임을 맞아 출간된 두 권의 기념논문집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30여년에 걸친 이 교수의 연구성과를 집약한 ‘이강수의 노장철학의 이해’와 10여명 제자들의 논문을 묶은 ‘이강수 읽기를 통해 본 노장철학 연구의 현주소’(예문서원 펴냄)다. 이 가운데 제자들의 책이 눈길을 끈다. 우선 으레 ‘기념논문집’ 하면 예상되는 ‘용비어천가’가 없다. 이들은 외려 한결같이 ‘이 교수를 어떻게 딛고 넘어설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건국대 철학과 박소정 강의교수가 “선생님에 대해 우호적이든 비판적이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이를 수용하여 싣고 이에 대한 제자들의 생각도 실어보자고 합의하게 된 것이다.”라고 밝힌 대목이 이해될 정도다. 스승 비판이 금기인 학계에서 이례적이다. 동시에 노장철학의 서양식 해석에 대한 우려도 흥미롭다. 바로 얼마전 정년퇴임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형효 교수와 서강대 최진석 교수에 대한 비판이다. 이들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끌어다가 해체주의 입장에서 노장철학 다시 읽기 작업을 해온 인물들이다. 요컨대 노장철학을 둘러싼 최근 논의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는 셈이다. ●지나친 관념론적 해석은 서양에 대한 열등감 이 교수에 대한 비판 포인트는 중국의 신유가적 노장읽기. 관념론적 성격이 유독 강조된 노장철학 이해를 지나치게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원래 유학을 비판하면서 나온 노장철학은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지만 서양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노출되면서 뒤늦게 재발견됐다. 서양에 대해 ‘우리에게도 이런 사상이 있다.’라고 내세워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다는 것. 군산대 철학과 김성환 교수는 “그런 접근은 서구에 대한 열등감 해소와 중국철학의 통합을 위해 독일 관념철학을 변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면서 “중국이라면 이해되지만 우리까지 그런 방식을 수용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이런 지적은 곧 현실도피라는 비판으로도 연결된다. 충남대 철학과 이종성 조교수는 “이성적으로 판단해 제대로 읽으려는” 업적은 높게 평가하면서도, 제대로 읽기에만 몰입하다 보니 “누구의 해석이 얼마나 유용한가.”에만 매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장자에 대한 일부 해석에서는 현실과 무관한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징후가 보인다면서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심미적으로 접근해 ‘즐거운 유희’에만 그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해체적 노장 읽기? 사료비판이 없다 한국국학진흥원 박원재 수석연구원은 이런 비판을 종합해 “이 교수의 실체론적 해석을 뛰어넘어야 한다.”면서 그런 면에서 “김형효 교수의 해체적 읽기가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사료에 대한 엄밀한 접근이 부족한 것은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강릉대 철학과 김백현 교수는 장자의 ‘제물론’에 대한 이 교수와 김형효 교수의 해석을 꼼꼼하게 비교한 뒤 “이 교수가 원문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다면, 김 교수는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에 맞춰 일부만 떼내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군산대 철학과 이권 겸임교수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해체적 독법이란게 궁극적으로는 서양의 시선이라는 것. 그렇기에 “서양철학적 개념으로 동양의 사유를 읽을 때 겪는 어려움을 간과할 경우 대단히 위험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놨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논술 가이드라인] “예이츠詩 욕망과 연관 분석하라”

    [논술 가이드라인] “예이츠詩 욕망과 연관 분석하라”

    교육부의 논술 기준을 따를 때 어떤 문제가 해당되고 안되는지 궁금해진다. 입시전문학원인 종로학원은 29일 교육부 기준에 따라 주요 대학들의 최근 기출 논술 문제를 분석, 공개했다. 이 학원에 따르면 논술에 해당하는 유형으로는 주요 대학의 정시모집 논술 문제가, 논술에 해당하지 않은 유형으로는 수시모집 논술 문제가 많았다. 논술에 해당하지 않은 유형 가운데 ‘특정 교과의 암기된 지식을 묻는 문제’로는 고려대와 숙명여대의 2006학년도 수시1학기 논술고사를 예로 들었다. 숙명여대는 소설가 복거일씨의 ‘쓸모없는 지식을 찾아서’라는 글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파스퇴르의 생물속생설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 발견 과정과 과학사적 중요성에 대해 서술할 것을 요구했다. 고려대는 정수와 유리수의 관계를 간단히 소개한 뒤 복소수의 필요성과 실수와 구별되는 복소수의 성질 세 가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라는 문제를 냈다. ‘수학·과학과 관련한 풀이의 과정이나 정답을 요구하는 문제’ 유형으로는 고려대와 이화여대의 2006학년도 수시1학기 수리논술을 예로 들었다. 고려대는 염색공장의 생산량과 염색업자와 양식업자의 이윤을 표시한 표를 주고 서로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설명하라는 문제를, 이화여대는 아파트에서 남산타워의 높이를 계산하는 방법을 설명하라는 문제를 냈다. 교육부의 기준에 맞는 출제 가능한 문제로는 고려대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의 2005학년도 정시 논술문제와 서강대의 2004학년도 정시 논술문제를 제시했다. 서울대는 두 개의 우리말 제시문을 주고 별도로 제시한 특정 문장을 인용해 자신의 견해를 담아 논제를 해결하는 문제를 냈다. 고려대는 4개의 우리말 제시문을 주고 공통 주제와 제시문간 관계, 자신의 생각을 물었다. 연세대는 영국 시인인 예이츠의 ‘나이 들면 철이 드는 법’이라는 시를 번역 제시하고,‘세월이 흘러감’에 대한 생각을 ‘욕망’과 연관시켜 분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쓰라고 요구했다. 이화여대는 3개의 우리말 제시문을 바탕으로 네번째 제시문에 대해 찬반 입장을 정해 현대사회 안에서 비일상성이나 비현실성이 지니는 기능을 논하라는 문제를 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수표·어음 ‘날씬’해진다

    수표와 어음이 20년만에 날씬한 모양으로 바뀐다.29일 한국은행과 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22개 금융기관의 수신업무담당 부서장들은 지난 25일 은행연합회 산하 수신전문위원회를 열어 자기앞수표와 당좌수표, 가계수표, 약속어음 등의 양식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현재 가로 157㎜, 세로 71㎜인 수표와 어음의 규격이 가로 160㎜, 세로 68㎜로 바뀐다. 가로는 더 길어지고 세로는 줄어들면서 전체적으로 더 날렵한 모양이 된다. 수표와 어음의 크기를 바꾸기로 한 것은 내년 초부터 도입되는 새 은행권의 규격과 보조를 맞춘 것이다. 한국은행 정남석 발권정책팀장은 “새 수표의 규격은 중·장기적으로 도입할 예정인 5만원권,10만원권과 세로 길이가 같기 때문에 현금·수표자동입출금기(ATM)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연합회는 현재 수표 및 어음의 용지 재고가 바닥날 것으로 예상되는 올 연말이나 내년 초쯤 새로운 디자인의 용지를 도입키로 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사회플러스] 공적자금 가로챈 어민 12명구속

    광주지검 목포지청은 25일 어류 양식장 면적을 부풀려 가짜 계약서를 만든 뒤 공적자금 수십억원을 부당하게 대출받아 가로챈 이모(58·신안군 흑산면)씨 등 양식업자 12명에 대해 사기 및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김모(58·신안군 흑산면)씨 등 어민 21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 1968년을 웃긴 걸작 어록

    1968년을 웃긴 걸작 어록

      공비출현, 폭력배단속 종(鍾)3철거, 배우의 폭력 등 갖가지 사건을 낳고 68년은 저물어 간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올해 한 해를 웃겨 준 걸작과 명언을 훑어보자. 남을 웃겨 준 말이라면,『말도 금』일 수 있다는 격언의 실례가 되지 않겠는가. 『남한의 여기자들은 모두 여배우 같습니다』 1·21 사태의 생포공비 김신조(金新朝)가 여기자들과 회견했을 때 한 말. 이 기자회견에 동석한 모 여기자의 말에 의하면 총각 김신조는 눈을 이 기자에서 저 기자 쪽으로 빙글빙글 돌려가면서 자못 흥분한 상태였다. 북괴에서 사람 잡는 기술만 배운 김은 아마 이 때처럼 많은 여성을 대해 보지는 못한 모양. 그렇찮으면 그는 비밀리에 여심조종술을 익혀 두었던가? 『제일 귀찮은 손님은 대학교수들』 「호스테스」양들의 절박한 체험담. 여성문제연구소가 실시한「호스테스」의 실태조사에서 나타난 그녀들의 손님평이다. 근엄한 교수님들이「바카스」의 제자로 승화했을 때의 생태학이 여기있다. 이 말, 걸작치고는 금년의「히트」가 되지 않겠는가 싶다. 『나는 국제첩보원,「미스터·가네시로」다』 이 말도 심심치 않다. 말짱한 한국의 백성인 박흥민이라는 자가 이 말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둘러 귀하신 몸 행세를 톡톡히 했으니 말이다. 『출입자의 명단을 공개한다』 명물「종(鍾)3」사창가를 정리할 때 김현옥(金玄玉)시장의 공갈협박(?)이 신문에 나왔다. 신문마다 이 말을 굵직한 고딕 활자의 제호로 신나게 뽑았다. 『생사람 잡지 말라』 폭력배를 잡아 제주도로 보냈다. 이 때 서슬이 퍼런 경찰의 과잉단속이 문제되자 대검(大檢)에서 내린 지시. 실감나는 말이었다. 『다음엔 꼭 금「메달」』 「멕시코·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얻은「복서」지용주(池龍珠)군이 김포공항에서 한 첫마디 귀국인사. 기록은 간데 없고 전적만 남았다는「멕시코·올림픽」의 우울한 성적을 나타내는 맥풀린 말이다. 우리「올림픽」의 성적은 언제나『다음에는 꼭…』.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프로·스포츠」계에서 걸작인 안나오면 섭섭하다. 일본의「프로」야구「팀」인「동영 플라이어즈」의 백인천이 거리낌없이 한 마디를 지껄였다. 『나니?』 그가 귀국차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말. 정말「나니?」다. 무슨 말인지를 알려고 우리말 큰사전을 뒤져 보다간 큰 코 다친다. 그는 야구에만 아니라 조어력(造語力)에도 소질이 있는 듯. 「프로·복서」김기수가 애교를 부렸다. 『나는 졌다. 감기 때문에』 일본에 원정가서 지고 온 것까지는 상관없겠지만 감기 때문에 얻어 맞고 돌아왔으니 김기수「팬」들에게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내적인 미가 더 중요하죠』 우리나라 여자는 아니지만 68년도「미스·아메리카」「데브라·딘·반스」(20)양이 지난 8월 미군 위문차 한국에 와서 내뱉은 첫마디의 미녀정의.『가슴둘레나 엉덩이의 크기와 같은 외모보다도 재능, 성격, 지성 등 내적인 미가 더 중요하죠』라고 말씀하셨것다. 정작 가슴둘레, 엉덩이 크기, 다리 곧기 등의「콘테스트」에서 1위로 뽑힌 미녀의 미녀론이니 걸작 아닌가. 『내 딸 같다』 이 말의 동기와 결과가 웃겨 준다. 군용「백」여인변사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경찰이 여인의 신원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경찰에 전화가 걸려 왔것다. 바로『내 딸 같다』고. 박용기(朴龍起)(44)라는 한 아버지가 6개월 전에 집나간 딸 서정(曙庭)양을 찾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벌인 연극인 줄이야 흥분한 경찰이 어찌 알았으랴.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신문을 보고 놀란 서정양이 저승 아닌 파주에서 떡 출현하는 바람에 그만 허탈감에 빠졌다. 『모르고 팔았다』 국문학자 조윤제(趙潤濟)박사가 대구시내의 고서방에서 1500여 년 전의 돈황굴 경전완본을 사들여 학계의 화제가 됐다. 그러나 이 희귀본을 판 책방주인이, 일단 팔아놓고 다시 그것을 반환해 달라는 소송을 내걸어 또 한번 이야기 거리가 됐다.『아- 모르고 팔았다』 영화계에 화제가 없어라면 영화계가 운다. 최고걸작은 아마 폭력으로 한 때 수감된 신영균(申榮均)에게로 갈 것 같다. 그의 명언-. 『때리진 않았다. 한 번 밀었을 뿐이다』 그런데「한 번 밀린」정진우(鄭鎭宇)감독은 얼굴에 7바늘을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었다. 정진우 감독이 영화인대회에서「악질제작자」를 규탄했다. 『악질제작자란… 우리들「개런티」를 연수표로 주는- 그런 놈 모두 다』 명우 고(故) 김승호씨가 명언을 남겼다. 『살고 싶다. 나는 억울하다』 이 유언, 숨진 뒤에 만들어 낸 말인 듯. 뇌진탕으로 쓰러진 고인이 입을 열어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문화재 덕수궁의「대한문」을 놓고 벌어진 시비. 『한 치도 못 움직이겠다』 문화재 관리 당국. 『몇 해 못 갈 것이다』 서울시 당국. 그래서 대한문은 옛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다. 공비이야기로 시작한 이 기사를 역시 공비로 끝맺는다면 꼭 한 마디가 있다. 『「대머리 총각」을 부를 줄 안다』 북괴 중위 조응택이 자수를 해서 기자회견에 나타났다.『민가마다 양식이 많은데 놀랐다』면서 회견이 끝날 무렵「트랜지스터·라디오」로 익힌「대머리 총각」을 신나게 뽑아댔다. [ 선데이서울 68년 12/22 제1권 제14호 ]
  • [사설] 광복 60년, 한민족 공영시대를 열자

    광복 60돌의 아침이다.60년 전 오늘 우리 민족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광명을 되찾긴 했지만 초기 해방공간은 여전히 빛과 어둠이 공존했다. 외세의 개입과 내부의 분열은 국토의 분단을 초래했다. 주체적 역량의 미성숙은 우리 민족을 다시 전쟁과 가난의 질곡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우리는 강인한 민족성으로 다시 일어섰다. 모두가 열심히 배우고, 일하고, 뛰었다. 두 세대만에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의 최빈국에서 세계 11위의 경제부국을 건설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 세계가 놀라워 하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독재의 악순환을 끊고 정치 민주화도 이룩했다. 그러나 어둠이 모두 걷힌 것은 아니다. 분단과 이산의 고통은 60년이 지나도록 민족의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이제 우리는 순국선열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통일조국 건설의 과업을 앞에 두고 새로운 60년의 출발선에 서 있다. 지금 남과 북 사이에는 민족화해와 평화의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제와 오늘 서울에서는 광복 60돌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8·15 기념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무엇보다 올해에는 남과 북, 그리고 해외의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화해와 대동단결의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특히 북한 대표단은 국립현충원을 참배했다. 실로 얼마만인가. 분단 60년, 그리고 6·25전쟁 발발로부터 55년 만에 남과 북은 체제와 이념의 벽을 넘어 화해의 몸짓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5년전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다짐하는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는 모습을 가슴 뜨겁게 지켜 보았다.6·15 남북공동선언은 남과 북이 대립과 분열, 왜곡과 반목의 시대를 끝내고 21세기 화해와 공영의 시대를 열어갈 것임을 민족 앞에 약속한 것이다. 이 선언에 따라 남과 북 사이에는 하늘과 땅과 바닷길이 열리고 교류와 협력의 물꼬가 트였다. 금강산 관광이 가능해지고 개성에는 경제협력의 상징인 공단이 들어섰다. 머지 않아 백두산 길도 열릴 것이라고 한다. 이산가족 화상상봉센터도 문을 열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헤어진 가족들을 화상으로나마 만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분단의 극복을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그 가운데 북핵 문제는 남과 북이 함께 힘을 모아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 4강의 협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반도의 오랜 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가기 위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단을 촉구한다. 우리는 또한 5년전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이 서로를 뜨겁게 포옹하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김 국방위원장의 답방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김 위원장의 답방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이는 남북간의 신뢰 구축과 화해·협력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킬 것이다. 우리는 김 국방위원장이 민족에게 다시 한번 희망과 감동을 안겨주기를 갈망한다. 올해는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빼앗긴 지 100년, 그리고 일본과 다시 국교를 맺은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광명을 되찾은 지 60년이 지났건만 일본의 역사인식은 갈수록 퇴보하고 양심을 저버린 망언들은 계속되고 있다.36년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를 만들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가르치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동북아의 평화는 물론,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일본의 시대착오적인 일부 우익 정치인들의 망동에 단호하게 대처하되 양식 있는 지식인들과 연대해 상호 존중과 화해의 바탕 위에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의 발전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 또한 시급하다. 과거사를 정리함에 있어 진실은 규명하되 화해의 정신을 발휘해 민족화합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대결의 정치를 지양하고 동서의 지역갈등과 빈부의 계층갈등을 치유하는 화합의 정치를 펼쳐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남과 북이 한자리에 모여 화해와 협력을 다짐하면서 새로운 60년을 시작한다. 한민족 특유의 강인함과 역동성으로 또 한번의 도약을 이룩해야 한다.21세기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도록 통일의 초석을 쌓아가야 한다. 세계와 미래를 향해 한민족 공영의 시대를 열어 나가자.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