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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자수성가 기업인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자수성가 기업인

    ’사망’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자수성가 기업인 성완종 유서 남기고 잠적 ’자원외교 비리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중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9일 잠적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정치인형 기업인이다. 성 전 회장은 지난 1985년부터 10여년간 대아건설 회장을 지냈고 이어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도급 순위 26위권(지난해 기준)의 경남기업 회장으로 재직했다. 건설업계에서는 꽤 이름이 있는 인물이다. 특히 성 전 회장은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꼽힌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14세 때 상경해 신문과 약 배달, 화물운송업을 하다 1977년 충청 지역에서 건설업을 시작했고, 2004년 자산규모 2조원대의 경남기업 회장직에 올랐다. 성 전 회장은 2007년 펴낸 자서전 ‘새벽빛’에서 “가난은 나의 재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은 2003년 충청권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특보단장을 맡아 김종필 당시 총재를 보좌하면서 정치권에 깊숙이 발을 담궜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측면 지원했다. 또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직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가경쟁력강화 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은 지난 2012년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19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 소속이 됐다. 정치적 보폭을 넓히려던 중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 당하며 정치 인생이 마무리 됐다. 총선 전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주민을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됐고, 결국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의원직 상실형인 벌금 500만원이 확정된 것이다. 성 전 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일한 경력으로 세가에서 ’MB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MB맨이 아니다”면서 “MB정부의 피해자가 MB맨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고, “검찰이 표적을 잘못 정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성 전 의원은 이날 오전 10시 반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돼 있었지만 새벽에 유서를 남기고 잠적해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성완종 前회장 숨진 채 발견] MB 인수위 참여…2007년 경선 땐 박근혜 후보 지원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기업가 명함을 들고 다닌 정치인으로 통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성 전 회장은 단돈 1000원으로 시작해 경남기업 등 11곳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2조원대의 매출을 올리던 기업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쫓겨나 어머니·동생들을 이끌고 방황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1985년부터 10여년간 대아건설 회장을 지내면서 주로 충청지역 공사에 매달렸다. 동시에 서산장학재단을 만들어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을 지원하는 등 지역에서 소리 소문 없이 정치 기반을 다졌다. 서울에서는 정치인, 정치부 기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충청포럼 회장을 지내면서 정치권 인맥을 이어 갔다. 사업 수완도 좋아 2004년에는 대우그룹 자회사였던 경남기업을 인수, 2012년까지 시공능력 26위 건설사로 키웠다. 경남기업 인수 당시 재계에서는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경남 아너스빌’ 브랜드로 주택사업도 활발히 펼쳤다. 베트남 최고층 건물을 짓는 등 해외 부동산개발사업에도 뛰어들었으나 재미를 보지 못했다. 경남기업 인수를 계기로 그는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2003년부터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특보단장을 맡아 김종필 당시 총재를 보좌했고, 2007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측면 지원했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직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가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았다. ‘MB맨’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계기다. 2012년 선진통일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에서 19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지만 공직선거법에 걸려 배지를 반납, 정치인의 꿈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성 전 회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날 서울 본사에 근무하던 200여명의 경남기업 임직원은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성희 경남기업 법정관리인이 취임해 회생 작업을 본격 추진하려던 첫날이라 당혹감은 더욱 컸다. 성 전 회장이 자원 비리로 수사를 받고 있었던 만큼 기업 경영에도 큰 차질이 예상된다. 금융권 및 협력업체 피해액이 40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에 임시로 안치돼 검안을 받은 성 전 회장의 시신은 10일 오전 충남 서산의료원으로 옮겨진다. 부검은 실시되지 않는다. 장례는 오는 13일 서산장학재단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 성완종 유서남기고 잠적… ‘정치인형 기업인’ 그는 누구인가

    성완종 유서남기고 잠적… ‘정치인형 기업인’ 그는 누구인가

    성완종 유서 남기고 잠적… ‘정치인형 기업인’ 그는 누구인가 성완종 유서 남기고 잠적 ’자원외교 비리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중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9일 잠적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정치인형 기업인이다. 성 전 회장은 지난 1985년부터 10여년간 대아건설 회장을 지냈고 이어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도급 순위 26위권(지난해 기준)의 경남기업 회장으로 재직했다. 건설업계에서는 꽤 이름이 있는 인물이다. 성 전 회장은 2003년 충청권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특보단장을 맡아 김종필 당시 총재를 보좌하면서 정치권에 깊숙이 발을 담궜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측면 지원했다. 또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직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가경쟁력강화 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은 지난 2012년 선진통일당(옛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19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 소속이 됐다. 정치적 보폭을 넓히려던 중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 당하며 정치 인생이 마무리 됐다. 총선 전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주민을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됐고, 결국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의원직 상실형인 벌금 500만원이 확정된 것이다. 성 전 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일한 경력으로 세가에서 ’MB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MB맨이 아니다”면서 “MB정부의 피해자가 MB맨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고, “검찰이 표적을 잘못 정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성 전 의원은 이날 오전 10시 반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돼 있었지만 새벽에 유서를 남기고 잠적해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유서 남기고 잠적’ 성완종은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형 기업인’

    ‘유서 남기고 잠적’ 성완종은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형 기업인’

    ’유서 남기고 잠적’ 성완종은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형 기업인’ 성완종 유서 남기고 잠적 ’자원외교 비리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중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9일 잠적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정치인형 기업인이다. 성 전 회장은 지난 1985년부터 10여년간 대아건설 회장을 지냈고 이어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도급 순위 26위권(지난해 기준)의 경남기업 회장으로 재직했다. 건설업계에서는 꽤 이름이 있는 인물이다. 성 전 회장은 2003년 충청권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특보단장을 맡아 김종필 당시 총재를 보좌하면서 정치권에 깊숙이 발을 담궜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측면 지원했다. 또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직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가경쟁력강화 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은 지난 2012년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19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 소속이 됐다. 정치적 보폭을 넓히려던 중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 당하며 정치 인생이 마무리 됐다. 총선 전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주민을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됐고, 결국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의원직 상실형인 벌금 500만원이 확정된 것이다. 성 전 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일한 경력으로 세가에서 ’MB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MB맨이 아니다”면서 “MB정부의 피해자가 MB맨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고, “검찰이 표적을 잘못 정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성 전 의원은 이날 오전 10시 반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돼 있었지만 새벽에 유서를 남기고 잠적해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사망’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자수성가 기업인

    ‘사망’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자수성가 기업인

    ’사망’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자수성가 기업인 성완종 유서 남기고 잠적 ’자원외교 비리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중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9일 잠적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정치인형 기업인이다. 성 전 회장은 지난 1985년부터 10여년간 대아건설 회장을 지냈고 이어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도급 순위 26위권(지난해 기준)의 경남기업 회장으로 재직했다. 건설업계에서는 꽤 이름이 있는 인물이다. 특히 성 전 회장은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으로 꼽힌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14세 때 상경해 신문과 약 배달, 화물운송업을 하다 1977년 충청 지역에서 건설업을 시작했고, 2004년 자산규모 2조원대의 경남기업 회장직에 올랐다. 성 전 회장은 2007년 펴낸 자서전 ‘새벽빛’에서 “가난은 나의 재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은 2003년 충청권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특보단장을 맡아 김종필 당시 총재를 보좌하면서 정치권에 깊숙이 발을 담궜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측면 지원했다. 또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직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가경쟁력강화 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은 지난 2012년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19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 소속이 됐다. 정치적 보폭을 넓히려던 중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 당하며 정치 인생이 마무리 됐다. 총선 전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주민을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됐고, 결국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의원직 상실형인 벌금 500만원이 확정된 것이다. 성 전 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일한 경력으로 세가에서 ’MB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MB맨이 아니다”면서 “MB정부의 피해자가 MB맨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고, “검찰이 표적을 잘못 정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성 전 의원은 이날 오전 10시 반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돼 있었지만 새벽에 유서를 남기고 잠적해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형 기업인’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형 기업인’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누구인가…충청 기반 ‘정치인형 기업인’ 성완종 유서 남기고 잠적 ’자원외교 비리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중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9일 잠적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정치인형 기업인이다. 성 전 회장은 지난 1985년부터 10여년간 대아건설 회장을 지냈고 이어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도급 순위 26위권(지난해 기준)의 경남기업 회장으로 재직했다. 건설업계에서는 꽤 이름이 있는 인물이다. 성 전 회장은 2003년 충청권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특보단장을 맡아 김종필 당시 총재를 보좌하면서 정치권에 깊숙이 발을 담궜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박근혜 후보를 측면 지원했다. 또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직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가경쟁력강화 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은 지난 2012년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19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 소속이 됐다. 정치적 보폭을 넓히려던 중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 당하며 정치 인생이 마무리 됐다. 총선 전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주민을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됐고, 결국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의원직 상실형인 벌금 500만원이 확정된 것이다. 성 전 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일한 경력으로 세가에서 ’MB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MB맨이 아니다”면서 “MB정부의 피해자가 MB맨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고, “검찰이 표적을 잘못 정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성 전 의원은 이날 오전 10시 반 영장실질심사가 예정돼 있었지만 새벽에 유서를 남기고 잠적해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코오롱그룹] 이효상 前 국회의장·SPC 그룹과 사돈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코오롱그룹] 이효상 前 국회의장·SPC 그룹과 사돈

    코오롱 가문은 아들이 귀한 집안이다. 그나마 창업주 이원만 회장은 슬하에 2남 4녀를 뒀지만, 이동찬 명예회장은 1남 5녀, 이웅열 회장도 1남 2녀다. 경영에는 장남만 참여하고 딸이나 사위, 처가와 친·인척은 경영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원칙을 고수한다. 사돈의 8촌까지 사업에 뛰어드는 다른 기업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과거 이 명예회장과 숙부인 이원천 전 사장 간의 경영권 분쟁이 일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창업주 때는 사위들의 경영 참여가 적지 않은 편이었지만 이 명예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한 뒤 이런 원칙이 굳어졌다. 이 명예회장의 속내는 그의 자서전에서 잘 드러난다. “사위들이 처가 덕을 보고 한자리하겠다면 득보다 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원만 창업주는 초기 자녀들을 평범한 집안과 인연을 맺게 했다. 하지만 사업 성공 이후엔 국내 명문가로 눈을 돌린 모습이 역력하다. 장남 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1944년 ‘학병에 끌려가기 전 장가부터 가라’는 부친의 강요로 맞선을 본 지 1주일 만에 신덕진(작고)씨와 결혼했다. 장녀 봉필(82)씨는 1954년 고향 인근에 사는 임승엽(작고)씨와 혼인했다. 승엽씨는 삼경물산 사장을 거쳐 그룹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차녀 애란(73)씨는 노영태(73)씨와, 3녀 미자(71)씨는 포항지주가의 장남이자 전 한국바이린 사장인 박성기(66)씨와 결혼했다. 차남 이동보(66) 전 코오롱TNS 회장은 김종필 전 총리의 장녀 예리(64)씨와 결혼했다. 막내딸 미향(61)씨는 식품종합그룹으로 성장한 SPC 허영인(66) 회장의 부인이 됐다. 이 명예회장의 장녀인 경숙(69)씨는 1969년 당시 공화당 의장 서리였던 고 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3남이자 영남대 교수로 재직한 문조(75)씨와 결혼했다. 차녀인 상희(66)씨는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회장의 장남 석진(작고)씨와 결혼했다. 석진씨는 코오롱제약(옛 삼영신약) 사장을 거쳐 빠이롯드전자 회장을 지냈다. 3녀인 혜숙(63)씨는 고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주의 장남인 동혁(68)씨와 결혼했다. 고려해운 회장인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컬럼비아대학 석사 출신으로, 국내 해운업계로는 처음으로 대만과 홍콩 등 동남아 항로를 개척했다. 4녀인 은주(61)씨는 신병현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장남 영철(65·의사)씨와 결혼했다. 5녀인 경주(56)씨는 개인 사업을 하는 최윤석(56)씨와 결혼했다. 이웅열(59) 회장은 큰누이 경숙씨의 소개로 1983년 서병식 동남갈포공업 회장의 장녀 창희(55)씨를 아내로 맞았다. 부인 창희씨는 이화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이 회장 부부는 규호(31)씨와 소윤(28)씨, 소민(26)씨 등 1남 2녀를 두고 있다. 장남 규호씨는 현재 그룹에 코오롱인더스트리㈜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딸과 며느리들은 모두 이화여대 동문이다. 현재 코오롱가의 안주인인 서창희씨는 자녀들이 장성한 이후 사회공헌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코오롱그룹 임직원의 배우자와 가족들로 구성된 ‘코오롱가족 사회봉사단’ 총단장을 맡고 있다. 또 코오롱그룹 사회봉사활동을 총괄하는 코오롱사회봉사단 총단장과 코오롱그룹 비영리 재단법인인 ‘꽃과 어린왕자’ 이사장도 담당한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서울광장] 역사적 시효가 끝난 ‘1987년 체제’/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역사적 시효가 끝난 ‘1987년 체제’/오일만 논설위원

    지금 우리의 권력 구조는 너무도 기형적이다. 글로벌 시대의 격한 흐름과 21세기 문명사적 전환기에 적응하기 어려운 구조다. 승자 독식의 선거 구조는 여야 간 극한 대립을 내재화시켰고 우파와 좌파로 나뉜 사생결단의 정치문화는 공존의 패러다임 자체를 파괴시켰다. 이런 귀결은 권력의 핵심인 대통령과 국회의 권력을 만드는 시스템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87년 체제’로 불리는 우리의 권력 구조는 1987년 6·10 민주항쟁에 백기를 든 ‘전두환 군사정권’과 야권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세력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군부의 장기 집권 종식과 민주화 실현이란 화두로 1987년 10월 9차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유신 선포 이후 17년 동안 지속된 체육관 선거(간접선거)를 종식시키고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자는 직선제 개헌은 도도한 민심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지만 5년 단임제는 시간에 쫓기면서 당리당략으로 결정된 측면도 적지 않다. 당시 현장을 지켜봤던 원로 정치인들은 5년 단임으로 결정된 배경과 관련해 “장기 집권의 폐해를 막는다는 명분도 컸지만 정치권을 장악한 3김의 대권 야망이 짙게 배어 있었다”고 증언한다. 당시 정치 평론가들도 “3김과 군부 어느 일방의 독주를 막고 견제와 균형 속에서 5년간 대통령직을 나눠 갖자는 의도가 이심전심으로 통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87년 체제, 특히 5년 단임제는 나름대로 시대적 사명을 적절하게 수행했다. 더이상 장기 집권을 걱정하지 않게 됐고 여야 간 정권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대학교 교정에서는 매캐한 최루탄 가스를 맡지 않아도 되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독재 타도를 마음껏 외치는 자유도 얻었다. 적어도 87년 체제가 역사적 소명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이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87년 체제가 만들어 낸 권력 구조는 28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여기저기서 삐끄덕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노후화 현상이 확연하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문재인 여야 대통령 후보가 소리 높여 대통령 4년 중임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동안 우리의 경제 규모는 10배 이상 성장했고 21세기의 변화와 사고를 담기에는 너무도 낡은 그릇이 됐다. 무엇보다 5년 단임제의 치명적 약점은 레임덕 자체가 너무 빨리 온다는 점이다. 숱한 정권을 경험했던 고위 관료의 말을 들어 보자. “보통 정권이 초기 2~3년 정도 힘을 갖고 정책을 집행한다는 말도 이제는 통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직인수위가 그 정권의 판을 짜는 작업을 끝내는 순간부터 정점을 찍고 내려온다고 보면 됩니다.” 그는 국정이 5년 단위로 바뀌면서 국가의 장기 전략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항변한다. 김대중 정부의 지식정보화 육성 정책은 물론 노무현 정부의 국토균형발전 정책,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동반성장 등 심혈을 기울였던 대표적 정책들은 뿌리도 내리기 전에 다음 정권에서 사라졌다. 정권의 명운이 걸린 만큼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했지만 지속성을 상실하면서 혼란과 갈등만 증폭시킨 꼴이다. 모든 국가 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킨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더 무섭다. 군대와 경찰, 검찰, 국세청, 감사원, 국가정보원 등 모든 권력의 칼자루를 대통령 한 사람이 쥐고 있다. 외교, 안보, 국방과 더불어 경제, 복지, 민생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한과 책임을 대통령 1인에게 부여하는 것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근간을 허무는 일이다. ‘브레이크 없는 주행’처럼 위험천만하다. 국가 경영의 효율성 측면에서도 분권형 통치체제 개헌이 필요한 이유다. 3김 정치의 폐해로 꼽히는 지역주의와 우파와 좌파의 구도 안에서 안주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정치권의 행태도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인구 편차를 2대1로 조정하는 선거구 개편 정도로는 별 효과가 없다.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는 정도의 ‘판갈이’ 없이는 백년하청일 것이다. 권력의 틀을 정하는 문제는 국정의 방향과 국민 개개인의 사고와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대사다. 집권 세력 입장에서 실익도 없는 개헌 논의가 달갑지는 않겠지만 근시안적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시대를 선도하는 권력의 틀을 만드는 것이 최고의 정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oilman@seoul.co.kr
  •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朴대통령 3억 늘어난 31억여원… 우병우 409억 ‘최다’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朴대통령 3억 늘어난 31억여원… 우병우 409억 ‘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보다 재산이 3억 3600만원 정도 늘었다. 부동산과 예금을 합해 31억 6950만 5000원이었다. 지난해에는 28억 3358만 5000원이었고 취임 직후인 2013년에는 25억 5861만 4000원이었다. 재산 증가의 가장 큰 요인은 예금 증가로, 지난해 5억 3358만 5000원에서 2억 7592만원이 늘었다. 대우증권과 외환은행, 신한은행, 농협은행 등 금융기관에 맡겨진 것으로 8억 950만 5000원이었다. 박 대통령은 ‘인세 등 예금액 증가’를 사유로 밝혔다. 자서전과 에세이 등 저서가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판매됐고 관저에서 홀로 생활하며 급여를 거의 그대로 저축할 수 있는 점도 또 다른 배경이 된 듯 보인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억 9255만원의 연봉을 받았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사저는 지난해 23억원에서 6000만원 상승했다. 청와대에서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가장 많은 액수인 409억 2599만 6000원을 신고했다. 배우자의 재산이 채권 163억여원, 예금 130억여원, 건물(빌딩·교육연구 및 복지시설·아파트·근린생활시설) 50억여원 등 340억원을 넘었다. 정작 우 수석은 본인과 배우자의 예금이 토지구입비·세금납부·명예퇴직금 반납·교육비·대여금·생활자금 등으로 전년도에 비해 재산이 12억 4000여만원 감소했다. 윤창번 전 미래전략수석은 112억 8670만원이었다. 20억원 이상 신고자는 12명으로 조윤선 정무수석 45억여원, 김진각 전 국정홍보비서관 38억 9000여만원, 김기춘 전 비서실장 38억 6000여만원, 김영한 전 민정수석 37억 6000여만원, 권오창 전 공직기강비서관 39억 8000여만원, 김종필 전 법무비서관 32억 4000여만원, 민병호 뉴미디어비서관 29억 4000여만원, 윤두현 전 홍보수석 29억 3000여만원, 전성훈 안보전략비서관 27억여원, 김동극 인사비서관 26억여원, 박종준 경호차장 25억 9000여만원 등의 순이었다. 가장 재산이 적은 사람은 -2억 1638만 1000원을 신고한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이었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 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우] 신문배달 소년의 세계경영 꿈… 미완으로 끝난 ‘김우중 신화’

    [재계 인맥 대해부 (4부) 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우] 신문배달 소년의 세계경영 꿈… 미완으로 끝난 ‘김우중 신화’

    김우중(79) 전 대우그룹 회장은 1936년 대구의 한 교육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신문배달과 열무, 냉차 장사를 했다는 김 전 회장은 경기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자본금 500만원과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차렸다. 충무로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셔츠와 의류 원단을 동남아에 내다 팔던 대우실업은 김 전 회장의 탁월한 경영 수완에 힘입어 5년 만에 국내 2위 수출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김 전 회장은 적극적인 인수·합병으로 대우의 몸집을 불려 나갔다. 1990년대에는 그 유명한 ‘세계경영’을 제시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김 전 회장의 신화는 1998년 대우가 유동성 위기를 맞으면서 좌초했다. 1999년 10월 출국한 김 전 회장은 중국 산둥성의 옌타이 자동차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뒤 돌아오지 않았고 2006년 20조원대의 분식회계와 9조 8000억원대의 사기대출을 벌인 혐의 등으로 징역 8년 6개월에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200억원을 선고받았다. 노무현 정권인 2008년 특별 사면됐지만 김 전 회장은 같은 해 추징금 강제집행을 피하기 위해 1000억원대의 재산을 빼돌린 혐의로 다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베트남 등 해외를 오가며 생활해 온 김 전 회장은 2012년부터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청년사업가 양성사업’(GYBM)에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경영복귀설’이나 ‘재기설’에 대해서는 일축하는 분위기다. 일단 건강이 좋지 않다. 김 전 회장은 최근 한 달에 한 번씩은 체크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대우그룹 창립 기념식에서는 보청기를 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앞서 김 전 회장은 1998년 뇌혈관 파열로 인한 뇌경막하혈종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기도 했다. 자금 역시 ‘재기’를 논하기엔 역부족이다. 현재 김 전 회장은 가족이 소유한 집과 베트남, 한국에 소유한 골프장을 제외하고는 재산이 전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 김 전 회장은 한국에 들어오면 딸 선정씨가 세를 내고 있는 방배동 빌라에 머문다. 김 회장은 부인 정희자(75)씨 아래 3남(차남 선협씨·삼남 선용씨) 1녀를 뒀다. 장남 선재씨는 1990년 교통사고로 일찍 사망했다. 고 선재씨는 영화배우 이병헌을 닮아 김 회장 부부가 이병헌을 양아들로 삼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의 부인 정씨는 선재아트센터 관장과 제5대 한국 여자테니스연맹 회장을 맡고 있다. 정씨는 80년대 초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인 고 박영옥 여사곁에서 테니스 단체를 돕는 활동을 하면서 테니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수료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포스코] 기술도 자본도 없는 亞 변방 황무지에 ‘금빛 철강신화’ 일구다

    [재계 인맥 대해부 (3부)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포스코] 기술도 자본도 없는 亞 변방 황무지에 ‘금빛 철강신화’ 일구다

    포스코의 47년 역사를 논할 때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빼놓고는 이야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고 경영자로 일한 25년간 그는 불가능할 것만 같던 철강 보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박 회장이 철강왕이라 불리는 건 글로벌 철강업체로 우뚝선 포스코를 일궈낸 그의 업적을 감안할 때 결코 무색하지 않다. 미국의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조강(가공되지 않은 강철) 1000만t을 이뤘지만 박 회장은 25년(1968~1992년) 내 연산 조강 2100만t이라는 신화를 일궈냈다. 기술도 자본도 없는 아시아 변방의 후진국에서 만들어진 신화라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된다. 물론 포스코가 지금의 경쟁력을 확보하기까지는 1960~80년대까지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존재감은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의 일본 방문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일본 기미쓰제철소를 방문한 덩샤오핑은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당시 이나야마 회장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 이 대화는 한동안 중국 대륙에서도 ‘박태준 신드롬’이 나타나는 배경이 됐다. 1927년 부산 기장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일자리를 찾아 현해탄을 넘은 부친을 따라 학창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1940년 이야마북중에 다니던 그는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제철 근로봉사에 동원됐다. 용광로와의 첫 만남이었다. 1945년 일본 와세다대에 합격했지만 2년만 다니고 귀국해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6기)에 입학했다. 박 전 대통령을 만난 것도 이때다. 당시 사관학교 중대장이던 박정희는 수학 실력이 탁월한 박태준을 눈여겨봤다. 박태준이 임관한 후 한동안 두 사람은 교류가 없었다. 하지만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발령받은 박정희가 박태준을 참모장으로 발탁하면서 인연은 다시 시작됐다. 10살 터울인 부하 장교 박태준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5·16군사혁명을 준비하던 박정희는 어느 날 박태준을 따로 불러 부탁한다. “임자는 이 일(쿠데타)에 참여하지 말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내 식구들이나 좀 돌봐줘.” 결국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스스로 2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오르면서 비서실장에 박태준을 임명했다. 2년 후 대부분 정치에 입문한 혁명세력과 달리 박태준은 소장으로 예편했다. 박 전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을 맡겼고 이어 제철사업도 지시했다. 한국이 제철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자 우방인 미국은 물론 일본까지 비웃었다. 군사정권의 과시용 사업일 뿐이라는 냉소만 돌아왔다. 그럴 법도 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이하, 국가의 총수출액은 42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종합제철소는 건설에 드는 돈만 무려 1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 1968년 4월 포스코의 전신 포항제철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장 큰 걸림돌인 자금은 해외 차관에 의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 등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 세계은행(IBRD), 미국국제개발처(USAID),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 등은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국을 방문해 KISA 대표에게 최종적으로 ‘협력 불가’라는 답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박태준 사장은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전용하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하게 된다. 당시 8000만 달러 정도 남아 있던 대일청구권 자금을 제철사업에 투자해 보자는 아이디어다. 곧바로 박 전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박 사장은 곧장 일본으로 가 일본 정재계 주요 인사들 설득에 나섰다. 미쓰비시상사의 후지노 사장 등 철강업계 관계자는 물론 통산성의 오히라 마사요시 장관 등을 연이어 만나 한국에 철강산업이 필요한 이유를 말하며 설득했다. 오히라 장관은 김종필과 함께 한·일청구권 협상을 타결 지은 인물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박 사장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박 선생은 보는 이들이 오히려 안타까워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의 진지한 노력에 일본은 감동했다” 박 사장은 결국 대일청구권 자금 7370만 달러와 일본 은행 차관 5000만 달러를 합한 1억 2370만 달러로 제철소사업을 시작했다. 1969년 8월 제3차 한·일 각료회담에서 일본 정부도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사업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자금이 확보되자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피해 배상 청구권을 사실상 포기하는 대일청구권 자금은 우리 민족에겐 피 같은 돈이었다. 회담을 성사시킨 박정희 정권은 ‘3억 달러에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사실을 박 사장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사를 독려하면서 박 사장은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3년여에 걸친 공사 기간 중에 13번이나 포항 현장을 방문했다. 박 사장에게 건넨 ‘종이 마패’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다. 공사 과정에서 당시 정치인들이 박 사장을 흔들어대자 박 전 대통령은 종이 마패 한장을 박 사장에게 쥐여 줬다. 마패에는 ‘박태준을 건드리면 누구든지 가만 안 둔다’고 적혀 있었다. 포항제철은 가동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빚을 다 갚고 흑자를 기록했다. 결국 1970년 4월 1일, 온 국민의 기대 속에 연산 130만t 규모의 철을 생산하는 포항 1기 설비를 착공했다. 1973년 6월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는 쇳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후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며 포철은 성장 가도를 달렸다. 세계 최대 제철소라는 타이틀은 포항제철소에서 광양제철소로 이어지며 1992년 2100만t의 사반세기 대역사를 마무리하게 된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설비 가동 첫해인 1973년 매출액 416억원에 46억원 흑자를 기록한 이래 1992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매출액을 149배(6조 1821억원), 순이익을 40배(1852억원) 이상으로 늘렸다. 용광로가 가동하기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단 한번의 적자 없이 흑자 행진을 지속하는 기틀이 됐다. 한국 제철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강력히 거부했던 존 자페 전 IBRD 한국 담당자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도 대한국제제철차관단에 투자 반대 의견을 제출했던 내 보고서가 옳다고 믿는다. 다만 박태준 회장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해 나의 보고서를 틀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포스코의 성공은 지도자의 끈질긴 노력을 바탕으로 설비 구매의 효율성, 낮은 생산 원가, 인력 개발, 건설 기간 단축을 실현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부고] 정상천 前 해양수산부 장관

    [부고] 정상천 前 해양수산부 장관

    ‘국민의 정부’에서 자민련 몫으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정상천 전 의원이 4일 오전 별세했다. 84세. 경남 진주 출생으로 경남고, 부산대 법대를 졸업한 고인은 고등고시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한 뒤 경찰 조직에 몸담았다. 만 39세의 나이에 경찰 고위직인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고, 40대에 강원도지사, 내무부 차관, 대통령 정무제2수석비서관, 서울특별시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15대 총선에서 김종필 전 총리와 인연을 맺어 자민련 비례대표로 당선됐으며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다. 이후 ‘DJP 연합’으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에서 각료 제청권을 가진 김 전 총리의 추천으로 4대 해양부 장관으로 투입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주씨와 아들 영기(봉강실업 대표)·성학(코리아후드서비스 대표)씨, 딸 효진씨, 사위 손진모(카이온 인터내셔널 부회장)씨, 며느리 김유정·최현정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9호실이며, 발인은 6일 오전 7시다. (02)3410-6919.
  • JP와 64년 ‘영옥의 세월’… 침묵의 마지막 인사

    JP와 64년 ‘영옥의 세월’… 침묵의 마지막 인사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눈물 속에 ‘평생의 반려자’인 부인 박영옥씨를 하늘로 떠나 보냈다. 박씨의 유해는 25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선산에 안장됐다. 발인식은 이날 새벽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에 김 전 총리가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김 전 총리는 발인식과 노제가 진행되는 내내 침통한 표정으로 장례 절차를 지켜봤다. 유가족이 두 번 절하는 동안 휠체어에 의지해 있던 김 전 총리는 베레모를 잠시 벗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기도 했다. 운구 행렬은 발인례를 마친 뒤 김 전 총리의 신당동 자택 앞 골목으로 자리를 옮겨 노제를 지냈다. 안장 절차는 서울 서초동 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친 뒤 오후 2시 20분쯤 고인의 영정과 위패를 든 직계가족과 김 전 총리가 선산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안장식에는 지역 정치인과 인근 주민 등 500여명이 참석해 박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다. 안장식은 개식을 시작으로 화장한 고인의 유골함을 가족납골묘역에 안치하고서 마지막 제를 올리는 반혼제 순서로 진행됐다. 말없이 지켜보던 김 전 총리는 유골함이 안장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품에 들어오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주위를 더욱 숙연하게 했다. 안장식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떠나기 전 김 전 총리는 “국민의 정성 어린 조문에 아내가 기뻐할 것”이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어 “아내가 먼저 눈을 감아 슬프다”면서 “국민 모두 건강하고 희망찬 내일이 되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박대통령, 빈소 조문 사촌언니 故박영옥씨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사촌언니 故박영옥씨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사촌언니 故박영옥씨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박근혜 대통령은 설 연휴기간에 숙환으로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자신의 사촌언니이기도 한 박영옥씨의 빈소가 마련된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을 23일 오후 찾아 조문했다. 비공식 일정으로 진행된 박 대통령의 이날 문상에는 청와대에서 조윤선 정무수석과 민경욱 대변인 등이 수행했다. 박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형인 박상희씨의 장녀로, 박 대통령에게는 사촌언니이다. 이날 오후 4시30분쯤 빈소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영정 앞에 헌화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어 빈소에 마련된 내실로 들어가 김 전 총리, 김 전 총리의 딸 예리씨와 8분 정도 대화하며 위로한 뒤 다른 유족들과 인사하고서 빈소를 나왔다. 김 전 총리는 휠체어를 타고서 장례식장 건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박 대통령을 배웅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1일 밤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투병하던 박씨가 숨지자 다음날인 22일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한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朴대통령 “정성 다한 보살핌에 감명”

    朴대통령 “정성 다한 보살핌에 감명”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김종필(89·JP)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자신의 사촌 언니인 박영옥 여사의 빈소를 찾았다. 이날 오후 4시 30분쯤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영정 앞에 헌화한 뒤 “가시는 길 끝까지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신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라고 JP에게 인사했다. 이에 JP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 또 박 대통령은 내실에서 김 전 총리와 10여분 정도 대화하며 “건강 잘 챙기시라”고 위로했고, 이에 김 전 총리는 “대통령께서 와 주셔서 죽은 언니도 기뻐할 것”이라고 감사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JP는 휠체어를 타고 장례식장 승강기까지 나와 박 대통령을 배웅했다. 박 대통령에게 JP는 사촌 형부지만 JP가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총리직에서 경질되면서 둘 사이에도 거리가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빈소에는 정의화 국회의장,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등 전날에 이어 거물급 인사들의 조문이 잇따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도 빈소를 찾았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주한일본대사관을 통해 김 전 총리에게 위로 서신을 전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조문객에게 ‘정치는 허업’이라는 지론과 관련해 “정치는 키워서 가꿔 열매가 있으면 국민이 나눠 갖지 자기한테 오는 게 없으니 정치인 자신에겐 텅텅 빈 허업”이라면서 “정치인이 열매를 따 먹겠다고 그러면 교도소밖에 갈 길이 없다”고 말했다. 김 전 총리는 “대통령 하면 뭐하나. 다 거품 같은 거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박대통령, 빈소 조문 JP 부인이자 사촌언니 故박영옥씨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JP 부인이자 사촌언니 故박영옥씨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사촌언니 故박영옥씨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박근혜 대통령은 설 연휴기간에 숙환으로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자신의 사촌언니이기도 한 박영옥씨의 빈소가 마련된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을 23일 오후 찾아 조문했다. 비공식 일정으로 진행된 박 대통령의 이날 문상에는 청와대에서 조윤선 정무수석과 민경욱 대변인 등이 수행했다. 박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형인 박상희씨의 장녀로, 박 대통령에게는 사촌언니이다. 이날 오후 4시30분쯤 빈소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영정 앞에 헌화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어 빈소에 마련된 내실로 들어가 김 전 총리, 김 전 총리의 딸 예리씨와 8분 정도 대화하며 위로한 뒤 다른 유족들과 인사하고서 빈소를 나왔다. 김 전 총리는 휠체어를 타고서 장례식장 건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박 대통령을 배웅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1일 밤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투병하던 박씨가 숨지자 다음날인 22일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한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박대통령, 빈소 조문, 사촌언니 박영옥 씨 빈소 조문 ‘뭐라고 했나?’

    박대통령, 빈소 조문, 사촌언니 박영옥 씨 빈소 조문 ‘뭐라고 했나?’

    ’박대통령, 빈소 조문’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오후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자신의 사촌언니인 박영옥씨의 빈소가 마련된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박 대통령은 23일 오후 4시30분께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박영옥 여사의 빈소에 들러 헌화하고 분향한 뒤 묵념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날 박 대통령은 김 전 총리에 “가시는 길 끝까지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신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고, 김 전 총리는 말없이 눈물을 보였다. 고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박상희씨의 장녀다. 비공식 일정으로 진행된 박 대통령의 문상은 조윤선 정무수석과 미경욱 대변인 등이 수행했다.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 21일 밤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투병하던 박씨가 숨지자 다음날인 22일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한 바 있다. 박대통령, 빈소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박대통령, 빈소 조문 사진 = 서울신문DB (박대통령, 빈소 조문) 뉴스팀 chkim@seoul.co.kr
  • “못된 병 때문에…” 휠체어 탄 JP, 영정 앞 비탄의 눈물

    “못된 병 때문에…” 휠체어 탄 JP, 영정 앞 비탄의 눈물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 박영옥 여사가 지난 21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6세. 박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씨의 장녀로 박근혜 대통령과는 사촌지간이다. 1951년 박 전 대통령 소개로 김 전 총리와 결혼해 올해 결혼 64주년을 맞았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3김(金) 시대’의 한 축을 이루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김 전 총리 곁에서 박 여사는 ‘조용한 내조’를 했다. 정치 현안에 직접 관여하는 대신 시중에서 듣는 민심을 남편에게 자연스럽게 전하고 지역구 관리를 돕는 역할을 주로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양지회 회장, 한국여성테니스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22일 박 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에는 각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전날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병원에서 박 여사의 임종을 지킨 김 전 총리는 오전 10시 40분쯤 딸 예리(64·Dyna 회장)씨가 밀어 주는 휠체어를 타고 빈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심대평 지방자치발전위원장 등은 이날 일찌감치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 이 밖에 이완구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 박 대통령의 동생인 근령씨, 지만씨 등도 빈소를 찾았다. 김 비서실장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여사님께서 강건하신 줄 알았는데 어찌 그렇게 되셨느냐”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에 김 전 총리는 “6개월 만에 그리됐다. 65년을 같이 살면서 한 번도 큰 병을 앓은 적이 없었는데, 못된 병이 걸려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전 총리의 측근인 조용직 운정장학회 사무총장은 “임종 직전 김 전 총리가 고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다”고 전했다. 유족으로 김 전 총리와 딸 예리·아들 진(54·운정장학회 이사장)씨 등 1남 1녀가 있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25일 오전 6시 30분. 장지는 충남 부여 가족묘소. (02)3010-2230.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대통령 잘 보필해달라” 김기춘 실장 사표 수리 언제?

    “대통령 잘 보필해달라” 김기춘 실장 사표 수리 언제?

    대통령 잘 보필해달라 ”대통령 잘 보필해달라” 김기춘 실장 사표 수리 언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22일 오전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부인인 박영옥씨 빈소를 찾아 조문한 데 이어 오후에는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했다. 자신의 사의를 박 대통령이 지난 17일 수용했지만 사표는 아직 수리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김 실장이 기본 업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김 실장의 사표는 후임이 결정되는 것과 동시에 수리될 전망이다. 김 실장은 이날 오전 박 씨 빈소가 마련된 서울 아산병원을 찾아 “사모님은 건강하신 줄 알았습니다”라며 김 전 총리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다. 이에 김 전 총리는 김 실장 사의가 수용된 것과 관련, “(박 대통령을) 가끔 찾아뵙고 외롭지 않게 해주세요. 다 외로운 자리입니다”라면서 “모셔보니까 어떤 인격입니까”라고 물었다. 김 실장은 “제가 감히…잘 모시려고 마음을 다해…”라고 말한 뒤 “그 자체가 나라 생각밖에 없는 분”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 전 총리는 박 대통령에 대해 “아버지, 어머니 성격 좋은 것을 반반씩 다 차지해서 결단력도 있고, 판단력도 있고”라고 덧붙였다. 김 실장은 조문을 마친 뒤에는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설연휴 기간 현안을 점검하는 한편 수석들에게 박 대통령을 잘 보필해달라고 당부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눴다. 민경욱 대변인은 기자들을 만나 “김 실장이 수석들에게 대통령을 잘 보필해달라고 얘기했고, 회의가 끝날 때 참석자들과 악수를 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세월호 유가족 찾아간 李총리 “선체 인양, 보고 받은 뒤 결정”

    세월호 유가족 찾아간 李총리 “선체 인양, 보고 받은 뒤 결정”

    이완구 신임 국무총리가 설 연휴에 잇달아 정치 원로를 예방하고 치안·안보 현장을 찾는 등 ‘광폭 행보’를 보였다. 총리 취임 이후 불거진 ‘충청권 대망론’에 군불을 지핀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이 총리는 설날인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택에서 차례상을 물리자마자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을 찾아 이희호(93) 여사를 예방하고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남북 관계의 초석을 깔아 주신 덕분에 (남북 관계가) 많이 발전했는데 요새 경직된 것 같아 걱정”이라고 밝혔다. 이 여사는 “잘하실 것으로 믿는다”며 덕담을 건넸다. 이어 동교동과 가까운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84) 전 대통령의 집을 방문했다. 전 전 대통령은 “통일을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전했고, 이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께서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구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 총리는 또 김종필(89) 전 국무총리의 중구 청구동 자택을 찾아 엎드려 큰절을 했다. 김 전 총리는 “소신껏 국가에 봉사할 기회가 주어졌다”며 “여성 (대통령)이라 생각하는 게 남자들보다는 섬세하니 절대로 먼저 하지 말고 선행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예방 후 이틀 뒤인 21일 김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86)씨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 총리는 이명박(74)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68) 여사도 예방하려 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다시 약속을 잡기로 했다. 이 총리는 설 연휴 첫날인 18일에는 두 명의 홀몸노인 집과 남산의 아동복지시설을 방문했다. 이어 종로소방서를 찾아 비상근무 중인 소방관들을 격려하고 최근 문제가 된 가짜 방화복과 관련, “해결은 국무조정실이 직접 챙기라”고 지시했다. 설 당일 오후에는 국립경찰병원과 중앙보훈병원을, 이튿날에는 강원 철원의 최전방인 육군 15사단을 방문했다. 21일에는 총리실 주요 간부들과 회의를 했고, 22일에는 인천 남동공단과 경기 안산의 세월호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이 총리는 유가족들이 세월호의 조속한 인양을 요구하자 “뜻을 잘 이해한다”면서 “공식 업무보고를 받은 뒤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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