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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YS ‘통합·화합’ 유지 민생 우선으로 구현해야

    그제 유명을 달리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추모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에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줄을 이어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고 한평생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그의 정치 인생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혹독한 탄압에 굴하지 않았던 정치인이다. 1990년 3당 합당을 결행하면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 연대로 국민 통합의 디딤돌을 놓았지만, 안타깝게도 동서의 지역 통합, 보수와 진보 간 이념의 공존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이어 YS의 타계로 민주화 시대의 리더십을 이끈 두 거인이 사라지면서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통합과 화합, 발전의 리더십을 창출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제가 된 것이다. 이런 국가적 위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고인은 마지막 메시지로 ‘통합과 화합’의 화두를 남겼다고 한다. YS의 차남 현철씨는 빈소를 찾은 김종필 전 총리와의 대화에서 “지난해 입원했을 때 말씀을 잘 못했는데 필담으로 ‘통합’과 ‘화합’을 쓰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하시곤 다른 말씀을 못 했다”고 전했다. 삶 자체로 현대사를 써 내려간 김 전 대통령은 사회 분열과 반목, 대립의 해소를 요구하는 국민적 염원을 전달하면서 정치권에 새로운 화합의 시대를 열라는 강력한 주문을 한 것이다. 정치권은 YS의 유지(遺志)를 계승 발전시킬 책무가 있다. 어제 김무성 새누리당,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앞다퉈 통합과 화합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다짐했다. 김 대표는 “민생 최우선이야말로 화합과 통합을 마지막 메시지로 남긴 김 전 대통령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이고 정치권이 지켜야 할 도리”라고 강조했고, 문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이 남긴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받들어 대결·분단 시대를 끝내고 평화·번영·통일의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여야 대표는 물론 비슷한 발언들을 쏟아내는 많은 정치인들이 절박한 YS의 유지를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해 정파적 이익에 활용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역사에는 공과가 있기 마련이다. YS를 포함한 이른바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정치는 지역주의와 계파정치를 잉태시키고 웃자라게 한 토양임이 틀림없다. YS의 마지막 메시지인 ‘통합과 화합’ 역시 지역과 계파로 인한 분열과 대립을 치유해야 한다는 반성이자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작금에 우리가 처한 상황은 3김 시대보다 더욱 암울하다. 지역과 계파적 분열정치에다가 3김 이후 극단적인 이념 대결까지 가세했고 세대와 빈부의 갈등마저 첨예해지고 있다. 극한 대립으로 일관하면서 걸핏하면 거리로 나서 의회민주주의를 후진시키는 구태를 청산하기 위해 여야 모두 스스로 개혁에 나서야 한다. 지역 갈등과 이분법적 이념의 골을 극복하는 국민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은 정쟁에서 벗어나 국정 성과를 내야 하고 민생을 챙겨야 할 시점이다. 여야 모두 상대방을 반대 세력을 몰아치면서 반사이익에 골몰하기보다 소통의 정치로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 주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기다.
  • [씨줄날줄] 대통령의 유언/강동형 논설위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통합과 화합이다. 고인이 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아버지가) 평소에 안 쓰시던 ‘통합’과 ‘화합’을 써 무슨 의미냐고 묻자 ‘우리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이 의사 표현이 힘들었기 때문에 ‘통합과 화합’은 김 전 대통령이 마지막 남긴 마지막 글이자 유언이 된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의 유언에서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분열과 갈등을 치유해 달라는 염원을 읽을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물론 역대 대통령의 유언에서도 시대 상황과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함축하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은 동지이면서 경쟁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遺志)와 상당히 닮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유지는 화해와 용서, 평화였다. 2009년 8월 23일 이희호 여사는 국장 중 서울광장에서 발표한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화해와 용서, 평화,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라고 밝혔다. 두 대통령의 유언이 닮았다는 것은 화해와 용서가 있어야 통합과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DJ가 방법론을 이야기했다면 YS는 도달해야 할 목표를 이야기한 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3개월 앞서 급서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는 “사는 것이 힘들고 감옥 같다”로 시작해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라고 맺고 있다. 양 김과 김종필 전 총리의 3김 시대를 역사 속에 묻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기를 갈망했던 ‘노 전 대통령다운 유서’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유서’로 많은 사람이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2006년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과 1990년 서거한 윤보선 전 대통령은 기억할 만한 유지를 남기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79년 급작스런 서거로 유언을 남기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휘호를 유지로 받들고 있다. 1965년 서거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언은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 이 전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이 말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야. 반드시 자유를 지켜야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후 한국전쟁을 경험한 대통령에게 어울리는 유언이라 할 수 있겠다. 대통령의 유지는 한 나라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남긴 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강동형 논설위원 yunbin@seoul.co.kr
  • [사설] ‘민주화의 별’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며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이 어제 새벽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 88세의 일기로 영면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의 아호인 거산(巨山)처럼 현대사의 굽이마다 뚜렷한 족적과 공과를 남겼다. 우리는 헌정사의 거목(巨木)을 잃은 상실감이 적지 않을 온 국민과 함께 그의 서거를 애도한다. 아울러 부인 손명순 여사 등 유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마음을 표한다. 이제 고인이 생전에 열망했던 민주화의 완성이나 신(新)한국의 건설은 남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정치 일생에는 우리 현대사의 부침과 영욕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유일무이한 나라다. 이 같은 기적을 거론하면서 그 눈부신 성취의 양대 축인 민주화에 앞장섰던 김 전 대통령을 빼놓고 말하긴 어렵다. 엄혹했던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의원직 제명과 가택 연금, 그리고 목숨을 건 23일간 단식 등 고인에게 가해졌던 혹독한 탄압과 그의 응전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가는 가시밭길 같은 역사 그 자체였다. ‘정치인 YS’에 대해서는 호오(好惡)와 포폄(褒貶)이 엇갈릴 수 있겠지만,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그의 신념처럼 이 땅에 ‘민주 헌정’을 뿌리내리게 한 공적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걸어온 역정(歷程)을 되돌아보자. 그를 슬픔 속에서 떠나보내는 이 순간 고인의 과보다 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고인은 평생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협력과 경쟁을 통해 이 나라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 않은가. 대한민국이 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 중 가장 짧은 기간에 민주화를 일궈 냈다는, 세계적 평가는 많은 부분 고인과 DJ의 영전에 받쳐야 할 헌사일 수 있다. ●민주화, 군정 종식의 기수 YS 양김(兩金)이 펼친 유신 반대나 대통령 직선제 관철 투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의 4반세기에 걸친 민주화 대장정이 대통령직선제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결합해 1987년 5년 단임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적 헌정질서를 이끌어 내면서다. 그래서 YS의 14대 대통령 당선은 고인의 민주화 노력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겠지만, 헌정사에서 군 출신 대통령의 집권을 끝내고 문민 시대를 다시 열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1992년 대선에서 이겨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고인의 대통령으로서의 치적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척결 등으로 군부에 힘이 실린, 32년간의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 시대를 연 공적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가 솔선한 공직자 재산공개, 그리고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부패 척결을 제도화한 공적도 빼놓을 수 없다. 고인이 광주 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키고 5공 신군부에 유혈 진압의 죄를 묻는 등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사를 정리하려 했던 시도도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뇌리에는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물론 고인의 이런 정치 역정에 대해 여전히 명암과 긍정·부정적 평가가 교차한다. 어찌 보면 그가 이끈 문민정부의 공과는 훗날 사가(史家)들로부터 엄정한 재평가를 받아야 할 대목도 없지 않을 게다. 특히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명분으로 단행한 ‘3당 합당’이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행보가 그렇다. 전자는 집권을 위해 비판의 대상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손잡았다는 점에서, 후자는 몇몇 악재와 비리로 문민정부가 흔들리는 국면에서 이를 덮으려 자의적으로 단행한 것처럼 비치면서 벌써 국민적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다. 더구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기까지 김 전 대통령에게 지워진 정치적 책임과 흠결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어받아야 할 신(新)한국 건설의 꿈 DJ에 이어 YS의 서거로 소위 ‘3김(金) 정치’ 시대도 저물어 가고 있다. 다만 3김 정치의 한 꼭짓점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아직 생존해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빛이 바래기 시작한 3김 정치식(式) 정치 행태와 강고한 지역주의로부터 우리 정치가 일정 부분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도 없지 않을 게다. 당장 아직도 우리 정치권에 유령처럼 배회하는 지역주의의 망령부터 배격해야 한다. YS의 상도동계니 DJ의 동교동계니 하는, 소위 가신 정치의 폐해를 상기해 보라. 차제에 정치권이 지역감정의 피해자이면서도 지역 갈등을 등에 업고 정치 생명을 연장했던 3김의 정치 행태와는 영원히 절연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양김의 퇴장은 3김 정치가 드리운 부정적 그늘을 확실히 걷어 낼 적기다. 더욱이 1987년 5년 직선제 개헌 이래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아 가는 시점이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로 국리민복을 추구하는 국가 정책에마저 흑백 논리로 접근해 발목을 잡던 것을 당연시하던 양김 시대의 이분법과도 결별할 때다.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직 선진 복지국가의 문턱에서 맴돌고 있다. 무릇 시민의 자유와 공공성의 조화로운 추구가 민주공화정 운영의 핵심 원리다. 그런데도 작금의 우리 사회에선 제 몫을 찾으려는 목소리는 높지만, 공동체에 헌신하는 움직임은 미약하다.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이른바 4대 개혁은 여전히 난항이다. 이는 어쩌면 김 전 대통령의 생전에 치유하려 했던 신(新)한국병이 더 위중하다는 증좌인지도 모르겠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그가 이루려 했던 신한국 건설은 남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 됐다. 다만 그나 그가 속했던 3김 정치의 긍정적 유산은 물려받되 부정적 측면은 소거하는 일은 여야 정치권에 주어진 엄숙한 소명이다. 그중에서도 합리적 토론과 소통으로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완성해 정치가 더는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 안 되게 하는 게 으뜸가는 시대적 과제일 것이다.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며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 ‘휠체어 조문’ JP “YS는 신뢰의 분”

    ‘휠체어 조문’ JP “YS는 신뢰의 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였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8시 50분 휠체어를 타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를 이끌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국화 한 송이를 들고 10초 정도 눈을 감은 뒤 양손의 깍지를 끼고 묵념을 올렸다.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3김 중 김 전 총리만 홀로 남게 됐다. 조문을 마친 김 전 총리는 내빈실에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상도동계였던 김수한 전 국회의장,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등과 김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김 전 총리는 “아침도 마음대로 못했다”면서도 현철씨에게 수차례 “자당(慈堂)을 잘 챙겨 달라”는 당부를 반복하며 부인 손명순 여사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나도 이제 여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 회자정리라는 말이 떠오른다”며 생각에 잠겼다. 김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을 회상하며 “하여간 신뢰의 (상징인) 분이다. 다른 사람이 못 하는 일을 하신 분”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래도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계시니까’ 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허탈함이 있다”면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공개석상에서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편인 김 전 총리는 “끝까지 아버지를 모시던 충신은 어디 갔느냐”고 퇴임 후 줄곧 김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김기수 전 비서관을 찾은 뒤 그에게 “잘 모셨다. 긴 세월 일편단심 잘 모셨다”고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김 전 총리는 현철씨에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중에 잊히지 않는 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면서 “보통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얘기다.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라고 밝혔다. 또 김 전 대통령이 정치인들에게 보내 줬던 ‘민주 멸치’를 언급하며 “여야가 나뉘어 있는데, 멸치를 매년 보내 주셔서 잘 먹었다”면서 “정치적인 찬반을 제쳐 놓고 멸치가 한창 잡힐 때니 먹어 보라”라고 권하기도 했다. 1926년생인 김 전 총리는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최근 회복됐지만 여전히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주변에서 건강을 묻자 “(김 전 대통령이) 단식을 여러 번 하셨다. 밥 못 먹으면 국민은 불행이고, 그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 때로는 동지로, 때론 맞수로 ‘숙명적 관계’를 이어 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민주화 시대를 연 두 전직 대통령은 정치사에서 양김(兩金)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에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합치면 3김(三金)이 된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세 사람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양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김 가운데는 김 전 총리만 남아 3김 시대의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DJ는) 나하고 가장 오랜 경쟁 관계이자 협력 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다.”(2009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 22일 타계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일생을 되돌아볼 때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숙명의 맞수’이자 ‘동지’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둘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맞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는 든든한 ‘동지’였지만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경쟁자’였다. ‘양김’은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야당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매김하며 고비마다 협력과 경쟁을 이어 갔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70년 대선 후보 경선, 87년 대선, 92년 대선까지 정치적 명운을 건 승부를 벌였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국회 등원은 훨씬 빨랐던 YS가 첫 승부였던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맞붙었던 1970년 대선 경선에서는 1차 투표에서 승리하고도 결선투표에서 DJ에게 역전패했다. YS는 1971년 대선에서 DJ를 도와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면서 지원 유세에 나섰지만 95만표 차로 패배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는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1985년 2월 총선에서 신민당의 극적 승리를 일궈 냈다. 양김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며 6월 민주항쟁을 이끌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냈다. 하지만 협력은 여기까지였다. YS와 DJ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실패한 뒤 DJ는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양김은 국민적 여망을 저버리고 대선에 뛰어들었고, 결국 정권 창출에 실패했다. 훗날 DJ는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회고했다. 이후 대립 구도는 가속화했다. YS는 1990년 1월 당시 여당인 민정당 및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했다.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1992년 대선에서 DJ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 끝에 먼저 청와대에 입성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DJ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제1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다. 1997년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YS에게 권좌를 넘겨받았다. 양김은 1987년 단일화 실패 이후 2009년 DJ가 서거할 때까지 22년간 반목을 이어 갔다. DJ는 3당 합당 이후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YS를 비난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렸다. 두 사람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조우’했지만 서로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응시했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독재’라는 표현을 써 가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자 YS는 “이제 그 입을 닫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YS가 사경을 헤매던 DJ를 문병한 뒤 취재진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한국 현대사의 두 거목은 극적으로 화해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김영삼 서거]”나도 얼마 안남았어” 홀로남은 김종필의 눈물

    [김영삼 서거]”나도 얼마 안남았어” 홀로남은 김종필의 눈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였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8시 50분 휠체어를 타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를 이끌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국화 한 송이를 들고 10초 정도 눈을 감은 뒤 양손의 깍지를 끼고 묵념을 올렸다.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3김 중 김 전 총리만 홀로 남게 됐다. 조문을 마친 김 전 총리는 내빈실에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상도동계였던 김수한 전 국회의장,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등과 김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김 전 총리는 “아침도 마음대로 못했다”면서도 현철씨에게 수차례 “자당(慈堂) 을 잘 챙겨 달라”는 당부를 반복하며 부인 손명순 여사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나도 이제 여생이 얼마 안 남았는데 회자정리하는 말이 떠오른다”며 생각에 잠겼다. 김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을 회상하며 “하여간 신뢰의 (상징인) 분이다. 다른 사람이 못 하는 일을 하신 분”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래도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계시니까’ 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허탈함이 있다”면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공개석상에서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편인 김 전 총리는 “끝까지 아버지를 모시던 충신은 어디 갔느냐”고 퇴임 후 줄곧 김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김기수 전 비서관을 찾은 뒤 그에게 “잘 모셨다. 긴 세월 일편단심 잘 모셨다”고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김 전 총리는 현철씨에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중에 잊히지 않는 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면서 “보통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얘기다.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라고 밝혔다. 또 김 전 대통령이 정치인들에게 보내 줬던 ‘민주 멸치’를 언급하며 “여야가 나뉘어 있는데, 멸치를 매년 보내 주셔서 잘 먹었다”면서 “정치적인 찬반을 제쳐 놓고 멸치가 한창 잡힐 때니 먹어 보라”라고 권하기도 했다. 1926년생인 김 전 총리는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최근 회복됐지만 여전히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주변에서 건강을 묻자 “(김 전 대통령이) 단식을 여러 번 하셨다. 밥 못 먹으면 국민은 불행이고, 그게 걱정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라며 희미하게 웃었다.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3) 한국영화와 극장가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3) 한국영화와 극장가

    “안인숙 예쁜 젖꼭지 본 사람, 손들어 봐.” 까까머리 십대 시절 국어 시간, 선생님이 느닷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순간 교실안은 와 웃음이 터졌다. 잠시 후 선생님이 “아니 ‘별들의 고향’ 정도는 형님 옷이라도 입고 봐야지”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랬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갔다가 학생 주임 선생에게 귓바퀴를 잡힌 채 끌려 나오던 그 시절 선생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여주인공 안인숙의 중요 부위는 보질 못했지만 어쨌든 그 영화가 대단한 영화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극장에선 보지 못하고 스무 살이 넘어 어찌어찌해서 비디오로 본 기억만 남아 있다. 1970~80년대 비록 초라했지만 한국 영화가 우리 곁에 있었다. 그때는 한국 영화를 방화라고 했다. 할리우드에 비해 변방에 있다는 의미로 유추된다. 한국 영화에 대해 자존감이 없음을 상징하는 말쯤으로 보면 되겠다. 그래서 영화인들은 언제쯤 한국 영화도 방화가 아닌 영화가 되는 날이 올까 하는 자괴감 속에 살았다. 하지만 그런 방화도 80년대 청춘에게는 단연 인기였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해외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곤고했던 시절, 영화는 당연히 그 시절 청춘들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우리는 극장에 입장하려고 일부러 부모님의 옷을 입거나 세탁소에서 빌려 입은 옷으로 극장을 찾았다. 그 시절 선생님은 시도 때도 없이 하필이면 애꿎은 귓바퀴를 잡고 끌어당겼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70년대를 상징하는 영화가 앞서 예를 든 ‘별들의 고향’이라면 80년대를 관통하는 영화로는 ‘겨울 나그네’가 있다. 슈베르트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연상케 하는 이 영화는 대중작가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아직은 젊었던 안성기, 풋사과 같았던 강석우, 이미숙이 주인공이다. 자학하던 80년대 청춘들은 영화에 열광했으며 시국 상황을 잊고 잠시나마 달콤한 연애를 꿈꾸기도 한다. 그렇고 그런 주제이지만 잘 버무려진 영화였다. 개봉 당시 ‘겨울 나그네’는 시대를 반영하는 아이콘으로 일약 부상했고, 80년대 서울 거리에는 ‘겨울 나그네’와 ‘보리수’란 이름의 다방과 빵집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겨울 나그네’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보리수’ 같은 독일 리트(가곡)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뿐인가. 영화 속에서 첼로를 들고 가던 이미숙이 강석우와 부딪쳤던 연세대 교정과 강석우가 바래다주고 쓸쓸하게 돌아가던 세브란스병원 언덕 위의 하얀 대리석 돌집은 그 시절 청춘들이 한 번쯤 찾아보던 명소가 된다. 70, 80년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끈 영화는 대개 신문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문이 배달되면 연재소설부터 일단 읽은 뒤 1면, 사회면을 펼쳐 보곤 했다. ‘겨울 나그네’ 역시 신문 연재소설이 바탕이다. 이십대 내가 가장 떨리는 가슴으로 읽은 소설이었다. 1984년 어느 일간지에 연재된 소설은 당시 대학에 다니던 나와 주인공들의 세대가 맞물리면서 묘한 동질감을 안겨 주었다. 우울했던 80년대 중반 늦은 밤 하숙집 길목 가판에 있던 신문을 사들고 읽노라면 나의 고통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 흠뻑 빠져들었다. 살벌했던 시대 휘둘린 청춘 남녀의 사랑을 그린 소설은 보도블록을 깨어 던지거나, 겁에 질린 눈빛으로 주위을 둘러보던 그 시대와는 정말 무관한 얘기들이었다. 사회면을 장식했던 핏빛 활자들을 보란 듯이 무시한 소설은 나를 현실과 전혀 다른 달콤한 세계로 밀어 넣었다.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 속 / 목마름의 기억으로 / 남몰래 고민하던 민주주의에 대한 간절함’도 소설을 읽는 순간만큼은 잊었다. 실제로 최인호의 소설에서 시대정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험악했던 80년대 현실의 모순을 문학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점도 이해가 가지만 시대의 아픔을 찾아보기 어려운 그의 글들이 몹시 서운했다. 그의 글을 열정적으로 읽으면서도 그 시절 청년이었던 나는 점차 불편해져 갔다. 그럼에도 그는 80년대 청춘의 상징이 됐고 소설로, 영화로, 우리 기쁜 젊은 날을 사로잡았던 작가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80년대의 가난했던 청춘들은 가장 싸게 치이는 극장 데이트와 함께했다. 종로 3가 단성사와 피카디리, 광화문 네거리의 국제극장, 명동 입구의 중앙극장과 충무로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퇴계로의 대한극장, 낙원상가 허리우드 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은 그 시절 젊음들이 순례하듯 찾던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닥터 지바고를, 벤허를,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며 저마다의 사랑을 꿈꿨다. 소피 마르소, 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 책받침이 등장하는 시기도 이때쯤이다.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재개봉관이 도심 구석구석에 있었고, 낡은 필름이 돌아가는 스크린에는 맑은 날에도 늘 비가 내리곤 했다. 강의 없는 날을 이용해 단골로 들락거렸던, 시인 기형도가 숨진 종로의 파고다극장, YMCA 뒤편의 우미관 등등이 그 주인공이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단단한 조가비’란 의미심장한 영화 제목이 내걸린 이대 입구 인근 대흥극장도 단골이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어렵지만 80년대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담배 연기가 자욱한 극장은 낯설지 않았다. 비까지 내리는 스크린은 뿌연 담배 연기로 인해 더욱 흐릿하게 보였다. 지금은 역사가 돼 버렸지만 본영화 상영 전에 꼭 봐야만 했던 대한뉴스도 빼놓을 수 없다. 재개봉관의 경우 술을 마신 관객들 덕분에 코고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추운 겨울날 난방이 잘 되지 않은 극장에서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영화를 보고 또 옆자리의 여자 친구 손을 가만히 훔쳐 잡았다. 난방과 냉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극장. 그런데도 영화 팬들은 그러려니 하고 극장을 찾았다. 요즘에는 복합 영화관이 대세다. 한 극장에서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상영된다. 그러나 80년대만 해도 한 극장에서 딱 한 영화만 상영됐다. 유명 영화는 긴 줄이 기본이다. 대박 난 극장에서는 먼저 온 남학생들이 긴 줄 속에서 구운 땅콩 봉지를 들고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풍경도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대한뉴스도, 그 많던 정들었던 극장들도 더이상 우리 곁에 없다. 80년대 젊음은 극장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 80년대의 풍경이 지금의 윤제균, 박찬욱, 봉준호와 같은 세계 정상급의 작가가 탄생하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80년대 청춘의 표상이었던 영화 ‘겨울 나그네’의 곽지균 감독은 4년 전 연탄불을 피워 놓고 자살했다. 영화를 보고 열광했던 80년대 젊음을 보낸 지금의 중년들은 그의 자살로 한 시대가 완전히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생활고로 인해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우리는 동병상련의 망연자실한 심정이 된다. 그는 “자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구절을 유서에 남겼다고 한다. 힘들고 지친 나머지 아름답고 아늑한 숲에서 쉬고 싶어도 지켜야 할 약속과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고 강조한 프로스트의 시, 풍운의 정치인 김종필(JP)이 자주 인용해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그가 지켜야 할 약속은 무엇이고 아직 남아 있는 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11월 여기저기에서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김동률 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 교수
  • “신주류는 新성장전략·국제정세 논할 수 있어야”

    “신주류는 新성장전략·국제정세 논할 수 있어야”

    새정치민주연합 중도 성향 인사들이 잇따라 책을 출간하며 대중과의 접촉을 넓히는 가운데 당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의 원장을 맡고 있는 민병두 의원이 연구위원들과의 공저 ‘새로운 진보정치’를 최근 출간해 주목받고 있다. 민 원장은 2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정치연합의 총선 승리 및 집권 전략에 대해 “배(본질)는 튼튼히 지키되 그물을 넓게 쳐 블루오션을 개척해야 한다”고 비유했다. 대구 출마를 준비 중인 김부겸 전 의원과 박영선 전 원내대표 등이 함께 속한 새정치연합 중도파 인사들의 모임 ‘통합행동’ 등 당 안팎의 현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자제했지만 수권 정당으로서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고민은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묻어났다. 민 원장은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유훈과 유산에 기대는 진보정치로부터의 질적인 도약”을 강조했다. 최근 ‘낡은 진보 청산’을 주장하며 “김·노 전 대통령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 안철수 의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에 “책은 내가 먼저 쓰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 등 끊임없는 확장주의 전략이었다면 노 전 대통령은 ‘노사모’와 같은 중심에서 폭풍을 일으키는 전략으로, 우리 당은 확장주의를 고민하는 사람과 본질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이 늘 대립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두 가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신주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신주류’가 누구인지에 대해 그는 “이 시대의 소구에 맞는 새로운 성장 전략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실제적인 국제 정세도 얘기할 수 있는, 시대 변화에 맞는 사람을 통해 형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선을 넓게 쳐야 한다, 창과 방패를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 민 원장은 인이 박인 듯 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최근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비유해 “종북사관이나 식민지사관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획일 사관을 반대하는 것이고, 다양성 문제 때문에 교수와 교사들이 대부분 반대하는 것”이라며 “이런 관점에서 전선을 넓게 쳐야 한다”고 진단했다. 또 “논쟁이 논쟁을 촉발시켜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지지를 최대화하고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풀어 가야 한다”고도 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모교 찾은 김종필 前 총리 야구부 후배들 격려

    모교 찾은 김종필 前 총리 야구부 후배들 격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24일 자신의 모교인 공주고를 방문해 야구부 소속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 전 총리는 휠체어에 앉아 정진석 전 국회 사무총장과 함께 모교에서 1시간가량 교정을 둘러본 뒤 공주고 교사와 교직원, 학생들과 담소를 나눴다. 공주 연합뉴스
  • “시장 매출 10% 늘어” “납품업자 年1조 손해”

    “시장 매출 10% 늘어” “납품업자 年1조 손해”

    “전통시장과 중소 소매업체의 매출이 늘었고, 규제 절차도 적법하다.” “전통시장이 살아나는 효과는 없고 소비자 선택권만 침해됐다.” 하급심에서 ‘적법’과 ‘위법’이 반복됐던 대형마트 의무휴업 논란이 18일 서울 서초동 대법정을 뜨겁게 달궜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창석 대법관)가 이 사건에 대한 선고에 앞서 진행한 공개변론에서는 2심의 ‘위법’ 판결로 벼랑 끝에 몰린 지방자치단체(피고) 측과 의무휴업일 폐지의 교두보를 확보한 대형마트 측의 법리 공방이 전개됐다. 공개변론의 쟁점은 ‘대형마트의 영업 제한이 실제로 전통시장 활성화로 이어졌는지’ 여부였다. 대형마트의 영업을 제한하는 규제가 법적 정당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졌다. 이 재판은 2012년 서울 동대문구청과 성동구청이 지역 내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의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조례를 만들자 대형마트 측이 이에 반발해 소송을 내면서 시작됐다. 소송에는 롯데마트와 이마트, 홈플러스, GS리테일 등 6개 대형 유통업체가 원고로 참여했다. ●지자체, 영업 제한 순기능 강조 지자체를 대리해 변론에 나선 이림 변호사는 2심 판결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대형마트의 영업을 제한한 유통산업발전법은 10년 이상 논의된 끝에 제정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대형마트에 대한 영업 제한으로 전통시장과 중소 소매업체의 평균 매출액이 10% 이상 신장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면서 대형마트 영업 제한이 당초 목표했던 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자체 측 참고인으로 나온 노화봉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조사연구실장은 선진국 사례를 소개하며 영업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노 실장은 “대형마트 규제는 독일과 미국, 영국, 일본 등에서도 이뤄지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대형마트가 골목상권까지 진출하면서 전통시장이 2004년부터 2012년 사이에 191개가 감소하는 등 타격이 컸다”고 말했다. ●업계 “중소 상인들도 피해” 주장 반면 대형마트 측은 국민의 선택권이 침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소상인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형마트 측 변론을 맡은 법무법인 태평양의 김종필 변호사는 “동대문구 마트 1개에만 40개의 임대 점포가 있고 이들은 모두 중소자영업자”라면서 “마트 영업일 규제로 인한 납품업자의 매출 감소 피해액이 연간 1조 6891억원에 이르고, 이중 농어민이나 중소협력업체 손해는 8690억원이나 된다”고 반박했다. 대형마트 측 참고인인 안승호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는 “생계형 소매상인들은 정부가 직접 도움을 줘야 할 대상”이라면서 “영업 규제로 사기업에 지원 부담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공개변론을 진행한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번 사건이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일반 국민과 소비자의 일상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 “양측의 주장을 들은 뒤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동생이 쓴 전세금 1억’이 결정타… 대법관 8대5로 유죄 판단

    ‘동생이 쓴 전세금 1억’이 결정타… 대법관 8대5로 유죄 판단

    “피고인 한명숙에 대해서는 다수 의견에 따라, 피고인 김문숙(한명숙 의원의 비서)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한명숙(71)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재판은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상훈 대법관) 선고에서 단 10분 만에 ‘유죄 확정’으로 종결됐다. 2010년 7월 검찰의 기소 이후 5년 1개월에 걸친 기나긴 공방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전체 180석의 대법정은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 한 의원 지지자, 취재진 등으로 꽉 들어찼지만 선고를 앞두고는 극도의 긴장 속에 서늘한 적막감이 흘렀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입에서 한 의원에 대한 유죄 확정을 뜻하는 언급이 나오자 문 대표는 눈을 질끈 감았고 몇몇 의원은 기도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대법원이 끝내 상고를 기각하고 실형 선고 원심을 확정하자 새정치연합 의원들과 한 의원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허탈감으로 나지막한 탄식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눈시울이 붉어진 의원도 있었다. ●무죄→유죄→유죄… 5년 재판 끝 실형 확정 하급심에서 유무죄 판단이 엇갈렸던 한 의원 재판의 핵심 쟁점은 그에게 돈을 준 사람으로 지목된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 진술의 신빙성을 얼마나 인정하느냐였다. 1심은 한 전 대표의 검찰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해 한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은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해 유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검찰이 제출한 수사 자료와 증거, 1·2심 재판 자료를 토대로 “한 의원이 한 전 대표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9억원을 받았다”고 인정한 2심 재판부의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다른 증거로 한 전 대표를 추궁해 진술을 받아 낸 게 아니라 한 전 대표의 진술에 따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확보한 점 ▲한 전 대표가 건넸다고 진술한 1억원짜리 수표를 한 의원 동생이 실제 전세금으로 사용한 점 ▲한 의원이 입원한 한 전 대표의 병문안을 갔고 이튿날 2억원을 돌려준 점 등을 주요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이인복, 이상훈, 김용덕, 박보영, 김소영 대법관은 “한 전 대표가 7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검찰 조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회 진술서와 5회 진술 조서 외에는 자료가 전혀 없는 등 증거 수집 과정이 수사의 정형적 행태를 벗어났고 허위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며 검찰 공소사실 전체를 유죄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또 “비자금 장부 사본은 입수 경위가 의심스럽고 한 의원이 사용처로 직접 적시돼 있지 않아 실질적 증명력도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반대 의견이 전원합의체 의결 기준인 7명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한 의원은 검찰 공소사실 전체가 유죄로 인정됐다. ●71세에 옥살이… 사면되지 않는 한 2년간 수감 이번 확정판결로 한 의원은 1948년 정부 출범 이후 역대 40명(현 황교안 총리 포함)의 국무총리 가운데 처음으로 실형을 살게 됐다. 지금까지 역대 총리 가운데 14명이 검찰 수사 선상에 올랐고 장면(2·7대), 장택상(3대), 김종필(11·31대), 박태준(32대), 이한동(33대), 한명숙(37대), 이완구(43대) 전 총리 등 7명이 기소됐다. 이 가운데 한 의원 외에 나중에 공소가 취소된 박 전 총리, 1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이완구 전 총리를 빼고는 모두 집행유예를 받았다. 한 의원은 앞으로 검찰 소환을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뒤 수형자 분류 후 교도소로 이감될 예정이다. 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 왔기 때문에 사면이 되지 않는 한 앞으로 꼬박 2년간 수형 생활을 해야 한다. 만기 출소를 하더라도 공직선거법 제18·19조에 따라 출소 후 10년간 선거에 후보로 나설 수 없다. 검찰은 한 의원의 서울구치소 입감을 위해 21일 오후 2시까지 서울중앙지검이나 서울구치소 중 한 곳으로 나오라고 통보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한명숙 전 총리, 총리 출신 첫 금품수수 옥살이 불명예

    한명숙 전 총리, 총리 출신 첫 금품수수 옥살이 불명예

    한명숙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 총리 출신 첫 금품수수 옥살이 불명예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20일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한명숙 전 총리는 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금품수수 사건으로 실형을 확정받고 옥살이를 하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한 전 총리는 앞서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2009년 12월 검찰 소환에 불응했다가 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체포영장에 강제구인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48년 이범석 초대 총리가 취임한 이후 44대 황교안 총리까지 역대 총리는 모두 40명이다. 이 가운데 14명이 검찰 수사 선상에 올랐고, 장면(2대·7대)·장택상(3대)·김종필(11대·31대)·박태준(32대)·이한동(33대)·한명숙(37대)·이완구(43대) 등 모두 7명이 기소됐다. 이완구 전 총리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지난달 재판에 넘겨졌다. 충남 부여·청양 국회의원 재보선에 출마했던 2013년 4월 4일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3천만원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총리직에 있을 당시 수사 선상에 올라 결국 취임 70일 만에 사퇴하기도 했다. 이한동 전 총리는 2002년 하나로 국민연합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면서 SK그룹에서 불법 선거자금 2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김종필 전 총리는 2002년 지방선거 때 삼성으로부터 채권 15억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장면 전 총리는 박정희 정권 시절 군사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이른바 ‘이주당 사건’으로, 장택상 전 총리는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대통령 입후보 등록 방해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됐던 박태준 전 총리는 공소가 취소됐다. 이회창(26대) 전 총리는 ‘차떼기’ 사건으로 불리는 한나라당 불법 대선 자금 모금 의혹과 관련해, 이해찬(36대) 전 총리는 2006년 3·1절 골프 파동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다. 한 전 총리는 일단 서울구치소에 입감되고서 교도소로 이감되는 절차를 밟게 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1970년 껌 파동때 정부 지원으로 롯데재벌 탄생”

    “1970년 껌 파동때 정부 지원으로 롯데재벌 탄생”

    “당시 한국에 재벌은 물론 돈 좀 있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일본에서 껌으로 성공을 거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엄청난 지원을 받았어요. 정부는 호텔이든 뭐든 다 키울 생각으로 전폭 지원했지요.” 1970년대 서울의 도시계획을 총괄한 손정목(88)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5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대표 저작인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다룬 롯데그룹의 성장 배경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손 교수는 1970년 이후 7년간 서울특별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역임한 후 학계로 옮겼다. 2003년 총 5권으로 발간된 손 교수의 저서는 최근 극심한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롯데그룹이 국내 굴지의 재벌로 성장하게 된 과정이 기술돼 재조명을 받고 있다. 그는 저서에서 ‘1970년 11월 13일이 신격호에게는 운명의 날이었다’고 기술했다. 롯데제과 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돼 제조 정지 명령이 내려진 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 총괄회장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서 롯데껌 파동을 ‘조치’해 주고 호텔롯데 건설을 당부했다고 공개했다. 손 교수는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과 함께 김종필 전 총리에게 불려가 호텔롯데 건설에 모든 지원을 하라고 지시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신격호는 일본인과 다름없어 그의 재산 대부분이 당연히 일본에 귀속될 처지에 있었고 한국정부 입장에선 그의 막대한 재산 일부만이라도 모국에 투자하게 하고 부동산 상태로 남겨두게 하려는 속셈이었다”고 설명했다. 호텔롯데와 롯데백화점뿐 아니라 1980년대 잠실 일대 롯데타운 개발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신 총괄회장은 당시 취득세와 재산세, 등록세, 영업세, 도시계획세 등 각종 세금도 모두 면제됐다고 손 교수는 증언했다. 손 교수는 잠실 롯데월드에 대해 당시 슬로건이 ‘최고의 건물을 최소의 비용으로 최단시일 내 완성한다’였다며 관계기관 공무원들이 총력으로 지원한 전무후무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손 교수는 저서에서 “청와대와 서울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행사를 앞두고 (잠실 개발) 사업을 맡길 대상을 심사숙고했다”고 회고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신 총괄회장의 친분으로 사업권과 한양이 갖고 있던 토지소유권도 롯데로 넘어간 것으로 기술했다. 손 교수는 저서 말미에 “자본력과 공권력이 결탁하면 못할 짓이 없고,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자책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사설] ‘영남당’ 자인한 김무성 대표 발언 뜻 곱씹어야

    큰 상처를 남긴 ‘유승민 파동’을 뒤로하고,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이 원내대표 등 주요 당직 인선을 서두르고 있다. 하루빨리 상처를 치유하고 당을 정상화하겠다는 뜻일 게다. 친박(친박근혜)계와 비박계 간의 난타전으로 홍역을 치른 김무성 대표는 추가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당내 인사들에게 ‘묵언’을 주문하고, 최고위원들과 함께 당직 인선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계파색 옅은 인물을 후임 원내대표에 합의 추대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당직 인선에서는 지역적 안배도 고려되고 있는 모양이다. 김 대표는 최근 사석에서 “우리 당은 ‘영남당’인 만큼 주요 당직에는 비영남권 인사를 기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내년 20대 총선을 코앞에 두고 영남 인사 일색의 전투 진용을 갖추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에 비영남권 인사 기용 뜻을 밝혔다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김 대표의 발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우선 집권 여당의 대표 입에서 ‘영남당’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영남당은 야당 등 반대 세력이 새누리당을 폄하할 때 사용하는 단어 아닌가.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상당히 민망한 표현을 당 대표가 직접 꺼내 든 것이다. 물론 이는 1992년 대선 당시 김기춘씨가 “우리가 남이가”라며 영남권 대단결을 촉구한 것과는 성격이 다른, 일종의 반성 내지는 현실 인정성 발언으로 해석된다. 집권 여당 대표조차 우리 정치권의 뿌리 깊은 지역 연고주의를 인정한 셈이어서 안타깝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정치의 암울한 현실이기도 하다. 주요 당직에 비영남권 인사를 기용하겠다는 대목도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다. 거꾸로 해석하면 그동안 주요 당직을 영남 출신들이 사실상 독식해 왔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어디 당직뿐인가. 행정부 차관급 이상 고위공직자들의 상당수가 영남 출신 인사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임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른바 ‘영포(영일·포항) 라인’이 득세했고, 현 박근혜 정부에서는 대구·경북(TK) 출신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오죽하면 김 대표가 직접 “비영남권 인사를 기용하겠다”고 말했겠는가. 사실 우리 정치권의 지역주의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정치’의 뿌리 깊은 유산이기도 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시절에는 부산·경남(PK) 출신이, 김대중 정부에서는 호남 출신이 상대적으로 우대받고, 주요 자리에 기용됐다는 점에서 유독 영남 출신 인사들을 중용한다고 현 정부만 탓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달라져야 한다. 누군가 솔선수범해 개선함으로써 변화의 물꼬를 터 줘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영남당’을 자인하고, 비영남권 인사 중용 뜻을 밝힌 김 대표의 발언 의미는 작지 않다. 지역과 계파를 초월한 탕평 인사를 하겠다는 것 아닌가. 당과 정부의 주요 보직을 특정 지역 인사들이 독점하는 상황에서는 전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새누리당뿐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치권이 정당별로 지역과 계파에 얽매이지 않는 탕평 인사를 실시함으로써 스스로 지역 정당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길 기대해 본다.
  • 황교안 총리, 취임 인사차 이희호 여사·전두환·이명박 전 대통령 ‘릴레이 예방’

    황교안 총리, 취임 인사차 이희호 여사·전두환·이명박 전 대통령 ‘릴레이 예방’

    황교안 국무총리가 29일 방북 의사를 재차 밝힌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오신 것에 감사드린다”면서 “30일로 예정된 방북 실무협의가 성과 있게 진행되도록 관심을 갖고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황 총리는 전직 대통령과 총리를 예방하는 일정에 따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평화센터에서 이 여사를 만나 방북에 대한 정부 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대해 이 여사는 “예전에는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금강산 관광으로 남북이 만날 수 있었는데, (현 정부도) 그 같은 일을 다시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굶주리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2013년부터 모자를 만들었고, 이것 때문에 (지난해 10월)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을 때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다행히 갈 수 있게 됐다”면서 “내일 실무협의를 하면서 몇 명이 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에 황 총리는 “협의가 이뤄지면 정부도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화답했다. 황 총리는 이어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택과 중구 청구동 김종필 전 총리의 자택을 잇따라 찾았다. 황 총리가 법무부 장관 시절인 2013년 검찰이 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재산 환수 관련 수사를 해 이날 대화에 관심이 쏠렸으나, 의례적인 인사와 당부만 오갔다. 황 총리는 강남구 대치동 이명박 전 대통령 사무실도 예방했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박정희 물꼬 트고 JP가 메모로 청구권 담판… 과거사 청산 못한 ‘미완의 협정’

    [새로운 50년을 열자] 박정희 물꼬 트고 JP가 메모로 청구권 담판… 과거사 청산 못한 ‘미완의 협정’

    한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체결로 국교정상화를 이뤘다. 일제 36년간의 식민지배를 딛고 한·일관계를 정상적 외교관계로 나아가는 역사적 출발이었다. 그러나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질곡이 깊었던 만큼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한 한·일간의 샅바싸움도 길고 치열했다. 1965년 협상이 최종 타결되기까지 한·일 양국 간 ‘마라톤 외교전’에서 상호의 인식 차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특히 1960년 4·19 혁명에 따른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뒤이은 장면 내각의 제2공화국 등장, 1961년 5·16 군사정변 등 우리 내부의 정치적 격변도 협상에 직간접 영향을 미쳤다. 협상이 속도를 내지 못하자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11월 12일 미국 방문길에 도쿄에 들러 이케다 총리와 회담을 하고 조속한 시일 내 현안을 해결해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1962년 10월 20일, 한 달 뒤인 11월 12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담판을 벌여 청구권 자금과 관련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합의, 협상의 돌파구를 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두 사람 간의 합의는 양국 정부 간 최종 타결 과정에서 8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로 조정됐다. 냉전체제에서 공산주의에 맞서 한·일을 묶어두려던 미국의 중재 노력도 협상 개시에서부터 난관 돌파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게 작용했다. 14년간의 기나긴 협상은 1965년 6월22일 한·일이 총 5개의 조약에 정식 서명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와 개인 청구권 문제가 철저히 마무리되지 못해 ‘미완의 협정’이라는 지적과 함께 현재까지 한·일 간 갈등의 씨앗이 됐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새로운 50년을 열자]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 “한국은 100년 전 고래들 속 새우 아니다…돌고래 정도로 성장”

    [새로운 50년을 열자]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 “한국은 100년 전 고래들 속 새우 아니다…돌고래 정도로 성장”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는 “한·일 국교정상화는 양국 모두 경축해야 할 역사의 마디”라며 “국교정상화 이후 50년간 양국은 서로 윈윈한 사이였으며 최근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양국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바뀐 것에 대한 상호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과 지난 21일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히고 한국은 더이상 100년 전 강대국이라는 고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대던 새우가 아닌 돌고래 정도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일 관계를 진단하고 정상화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1965년 이뤄진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은 두 나라가 함께 경축해야 할 역사의 마디다. 그런데 정작 두 나라는 경축해야 할 시기에 정상회담도 열지 않고 국민 간 호감도도 오히려 나빠졌다. 일본 내 혐한론도 돌이키기 힘들 정도다. 직접적인 원인은 분명히 역사 인식과 과거사 처리를 둘러싼 갈등이지만 그 배경에는 한·일 관계의 구조가 바뀐 내력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1910년 한국은 주변의 열강인 고래의 싸움에 휘말려 자기 몸도 지키지 못한 새우 신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더이상 새우가 아닌 돌고래 정도로 성장했다. 한·일 관계 역시 오랫동안 지속됐던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바뀌었다. 양국 모두 이런 상황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한·일 국교정상화 협정의 의의와 기여한 사람을 굳이 꼽는다면. -세계사에서 식민지와 지배국이 과거사를 사죄하고 배상하며 대등한 조건에서 국교를 맺은 사례가 없다. 없는 모델을 만들다 보니 한국과 일본은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나 배상을 애매하게 처리하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으로서는 민생과 안보가 시급한 상황에서 경제 협력 방식의 국교정상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 격화되자 일본에도 한국은 안보와 경제 면에서 중요했다. 누가 뭐래도 한국에서는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를 기여자로 꼽을 수 있다. 또 기본 틀을 만든 김종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전 총리 기시 노부스케는 사토의 친형이자 현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로서 막후에서 도왔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와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한 사람들은 국익이 뭔지를 알고 있었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한국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국교정상화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한국에 이득이 됐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일본은 더 큰 이익을 얻었다는 점도 얘기해야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이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줬는데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한국이 받은 자금은 현금이 아닌 노무와 물자 및 서비스 등이었다. 그것을 통해 떼돈을 번 것은 일본 기업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공적 자금은 13억 달러 정도인데 일본은 무역에서 200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남겼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한국은 부단히 자본과 기술을 축적해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국이 모두 득을 봤다. 1965년 당시 1년에 1만명이 두 나라를 왕래했는데 지금은 550만명이 넘는다. 무역액도 1000억 달러에 이른다. 이런 수치를 보면 한·일 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게 진전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은 받아들이고 부족한 점은 보완해야 한다. →식민 지배 가해자로서 일본의 책임은 이제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한국병합조약(1910년)의 불법·무효, 합법·유효 여부를 놓고 논쟁을 계속했다. 평행선을 달리다 보니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조약에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일본이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주어와 ‘한국’이라는 상대를 지칭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문서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공동선언이었다. 2010년 당시 간 나오토 총리가 한국병합조약 100주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하면서 ‘한국인의 의사에 반한 식민지 지배’라는 표현을 사용해 한국병합조약이 강제로 이뤄졌다는 점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그때가 과거사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역사 인식이 절정에 달한 시기라고 본다. 지금도 일본은 국교정상화조약으로 과거사 문제는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해결됐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할린에 버려둔 한국인이나 원자폭탄 피폭자 등에 대해서는 인도적 견지에서 나름대로 보완 조치를 취해 왔다. 한국으로서는 성에 차지 않지만 일본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닌 만큼 한 것은 한 것대로 평가하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라고 지적하는 것이 좋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데 해법은 무엇일까. -한·일 양국 정부가 국장급 회담을 하고 있으므로 조만간 어떤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국가의 책임과 배상을 둘러싸고 의견 차이를 좁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해 일본 도쿄에서 양국의 주요 운동단체가 논의해 제시한 의견도 참고가 될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고 통제했으며 ‘위안부’를 본인의 의사에 반해 모집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선이다. 그런 후에 적절한 사죄와 보상 및 기념 등의 후속 조치를 하면 해결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사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양국이 미래를 위해 협력할 사안은 무엇인지. -한국은 자유, 민주, 지력, 기술, 평화, 인권, 환경 등에서 일본에 상당히 근접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성취다. 한국의 강인한 개척정신과 일본의 뛰어난 노하우 등을 합치면 서로 도움이 되는 분야가 많다. 환경이나 에너지 및 사회안전망 등은 더욱 배울 만하다. 중국의 부상 속에서 우리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적당히 손잡고 가는 것은 플러스가 된다. 남북 통일을 전망하면 더욱 그렇다. →21세기 동북아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양국이 노력해야 할 일은. -한국과 중국, 일본 등 3국이 유럽연합(EU)과 같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20~30년이 지나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현실적으로 3국 간 국력 차이가 너무 크다. 중국의 국토는 한국의 100배, 인구는 30배에 달한다. 다행히 한·일 간 국력 차이는 줄어들었다. 20년 전만 해도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12배였으나 지금은 5분의1로 줄었다. 따라서 3국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되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남북 통일의 분위기를 형성해 가야 한다. →동북아 지역 협력을 위한 화해의 실마리를 무엇으로 풀어야 할까. -우선 경제적으로 한·일 간 상호 이익을 심화시키기 위해 자유무역협정(FTA)을 빨리 체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역사 문제는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추진해 볼 수 있다. 과거사와 관련된 주요 행위자, 곧 한·일 양국의 정부와 기업 등 4자가 공동으로 출연하는 재단(가칭 한일미래재단 또는 한일우호신뢰재단)을 만들어 식민지 지배와 관련한 모든 사안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다. 이의 출범과 함께 양국의 수뇌가 역사 문제를 더이상 정치외교의 현안으로 삼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런 후에 역사 인식의 개선은 연구자, 교육자, 시민의 역할에 맡겨야 한다. →양국 시민사회 간 연대 강화가 두 나라 관계 발전과 협력의 대안이 될 수 없을까. -양국 시민사회 간 교류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본격화됐다. 그 전만 해도 양국은 경제나 안보 면에서 가까웠지만 일본인들은 한국을 군사독재국가라는 시각에서 바라봤다. 한국이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민주사회를 이룩함에 따라 일본 시민사회와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역사 분야만 해도 한·일 간 공동 연구가 진척돼 공통 교재 개발에까지 이르게 됐다. 양국에서 동시 출판한 것이 5종류나 된다. 시민사회의 교류는 두 나라의 관계 발전에 기여했고 앞으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한국과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는 유럽연합(EU)처럼 될 수 없나. -우리와 중국은 이미 FTA를 맺었다. 일본이 그 장점을 이용하기 위해 한국을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일 양국은 이미 고령화와 저출산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의 젊은 정보기술(IT) 인력이 일본에 많이 진출해 있다.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도 더러 있다. 앞으로 한·일은 경제 통합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다고 보는데, 중국은 여러 문제 때문에 힘들 것이다. 한·중·일이 EU처럼 되는 것은 멀고 먼 이야기다. →미·일 동맹 강화가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 어떤 영향을 줄까.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은 남북 통일이 되기까지 미국과의 동맹을 버릴 수 없다. 따라서 한·미·일 3국 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맞는다고 본다. 중국도 한국의 처지를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스스로 줏대 있는 자세를 견지하는 게 좋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해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일본에 설명을 요구하고 이를 활용해야 한다.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는 중국에도 쓴소리를 하고 이해를 구할 필요가 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흔들리다가는 또 새우 신세가 된다. →양국 지도자에 대한 바람이나 제언이 있다면. -양국의 지도자가 한·일 관계를 너무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양국은 2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서 전쟁 등의 불행한 일도 겪었지만 교류를 통해 자신의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서로 강한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겪고 있는 갈등은 극복하기 어려운 게 아니다. 일본이 고대문명을 형성하는 과정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른바 도래인이 큰 역할을 했고 한국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이 소화한 서양문명을 받아들인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웃 간에 사이가 좋지 않으면 이사를 가면 그만이지만 국경을 맞댄 나라 사이는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교류 협력해 상호 발전에 이바지하는 관계를 맺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면 한국과 일본이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정재정 교수 정재정 교수는 1951년 9월생으로 충남 당진 출신이다. 1974년 서울대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에서 한·일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94년부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3년 제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9년에는 제2대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과 일본의 왜곡된 역사 교과서 채택 및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06년 9월에 설립된 교육부 산하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이다.
  • [메르스 비상] 국내외 정상 외국 방문 취소 사례

    해외 순방을 앞둔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방문 일정을 축소, 연기, 취소한 사례는 많다. 당장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지난해 5월 중동 순방을 앞두고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면서 예정됐던 일정을 대폭 줄여 1박 3일로 아랍에미리트(UAE)의 한국형 원자로 설치 현장을 방문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10년 4월 미국 방문에 이어 멕시코와 아이티를 순방할 예정이었으나 천안함 폭침 사고 수습을 위해 급히 취소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월 헝가리와 폴란드, 터키, 이탈리아 등 유럽 4개국 순방을 연기했다. 당시 청와대는 국내 사정을 이유로 순방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했다고 밝혔다. 국내 사정이란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 스캔들로 불렸던 ‘한보 사태’를 말한다. 한보철강의 부도와 이에 관련한 권력형 금융 부정 및 특혜 대출 비리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을 거듭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역시 1990년 5월 일본과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4개국 방문 계획을 변경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일본만 방문하고 미국, 캐나다, 멕시코 순방은 미뤘다. 현대중공업의 극심한 노사 분규와 함께 KBS에도 경찰 병력이 투입되는 등의 정국 혼란이 원인이었다. 특히 당시 민주자유당 김영삼, 김종필 최고위원이 “국난의 시기에 대통령이 장기간 외국에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한 것도 미국 방문 연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과는 좀 다르지만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8년 미국 방문을 계획했으나 연기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등으로 인한 국내 문제도 있었지만 이라크 사태 악화로 인한 미국 내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우 2013년 10월 연방정부 ‘셧다운’(업무 정지) 사태의 여파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문 계획을 취소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불참은 미국으로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0년 3월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안) 문제, 4개월 뒤 멕시코 걸프만 기름 유출 사고를 빌미로 순방을 취소했다. 10월에는 세 번째로 순방을 취소하면서 아시아 중시 전략은 빈말이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2017년을 꿈꾸는 정치인들에게 Ⅱ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2017년을 꿈꾸는 정치인들에게 Ⅱ

    메르스 공포가 나라를 비상 국면으로 몰아가는데도 정치권은 왜 여야 없이 정쟁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2016년 국회의원 총선과 2017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공천 싸움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늘 그날그날의 ‘작은 정치’에만 집착하는 듯하다. 고개를 들고 좀 더 멀리, 넓게 보면서 큰 정치를 얘기해 보자. # 비전:Quo Vadis Domine? 많은 국민들이 궁금해한다. 정치 지도자들은 이 나라를, 우리 국민을 도대체 어디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의 길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의 길로 이 나라를 이끌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불과 반세기 만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이룩한 20세기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이 나라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21세기로 넘어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새로운 정권이 탄생할 때마다 선진화, 통일, 경제민주화와 같은 새로운 구호들이 나왔지만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가치나 목표로 승화되지 못했다. 추구하는 가치, 목표가 있는 사람의 삶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에게는 두 가지 역할이 부여돼 있다. 위로는 국가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다시 말해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아래로는 사회의 모든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하수구의 역할이다. 우리 정치인들은 날마다 치열한 정쟁을 통해 하수구 역할은 그런대로 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비전을 제시하는 숭고한 역할은 아직 부족하거나 결여돼 있다. 우리 국민은 정치인의 비전에 목말라 있다. 지난 대선 당시 안철수의 설익은 새 정치에 열광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누가 어둠 속에 갇힌 우리 국민에게 횃불을 밝혀 줄 것인가. # 스케줄:집권 십년지계 정치인이 아무리 훌륭한 비전을 제시해도 그것을 5년 안에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을 바꾸려면 적어도 10년은 필요하다. 그래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현대 정치사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마거릿 대처(1979~1990년) 영국 총리, 로널드 레이건(1981~1989년)·빌 클린턴(1993~2000년) 미국 대통령, 룰라 다 시우바(2003~2010년) 브라질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1981~1995년) 프랑스 대통령 모두 10년 안팎을 집권했다. 우리 국민 다수가 높게 평가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18년 동안 집권했다. 만일 박 전 대통령의 임기가 5년이었다면 무엇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5년 단임제 대통령 제도를 개선할 개헌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개헌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현행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10년을 집권하는 방안을 정치인들이 찾아보기 바란다.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당 차원에서 10년 집권 전략과 정책을 마련해 국민에게 공약하고 대선에서 연거푸 승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뜻을 같이하는 잠재적 대통령 후보들이 연합해 정권을 이어 가는 것이다. 우리 정치문화로는 어렵다고? 꼭 그렇지는 않다. 김대중·김종필·박태준 간의 DJT 연합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2년여 동안 그런대로 훌륭하게 나라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연정 실험도 진행 중이다. 그런 경험들을 연구해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 통합:51%만 갖고 49%를 돌려주자 인간은 왜 공격적으로 행동하는가. 세 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 본능설, 둘째 좌절·공격설, 셋째 두 가지 설의 절충설. 본능설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절충설은 별 의미가 없다. 좌절·공격설은 사회에서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할 경우 좌절해 공격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학설이다. 무시당할 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치적으로 좌절·공격은 정권을 잃었을 때, 권력으로부터 소외됐을 때 일어난다. 대선에서 51%를 득표한 후보와 정당이 권력의 100%를 독점하면 야당은 좌절·공격형으로 나오게 된다. 51%를 득표했으면 51%의 권력을 행사하고 나머지 49%는 야당에 돌려줄 수 없을까. 그러면 100%의 국민 지지와 100%의 국민 통합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da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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