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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美·中상대 새로운 등거리 외교

    북한이 새로운 ‘등거리 외교’에 시동을 거는 조짐이다.과거 사회주의 양대 산맥인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교묘한 ‘외줄타기’를 했다면 이번엔 미국과 중국이 새로운 상대다.이런 맥락에서 북한 김영남(金永南)최고인민상임위원장의 중국방문은 등거리 외교의 신호탄이다.김일성(金日成)사망이후 거의중단된 양국 관계를 과거의 ‘순치(脣齒)’관계로 복원시킨 다는 복안이었다.최근 북-러간 신우호협력조약을 맺는 등 새로운 관계정립 추진도 비슷한 맥락이다. 신등거리 외교의 태동은 한반도·동북아 정세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냉전체제 이후 세계의 유일 강대국이 된 미국과 동북아에서의 ‘미국 독주’를 경계하는 중국 사이에서 체제 보장과 경제회생을 추구하겠다는 북한 지도부의 새로운 외교노선인 것이다.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이후 북한은 핵·미사일 등의 개발을 지렛대로 확실한 체제보장을 미국에 요구하고 있다.페리 조정관 방북이후 대량살상무기개발 포기와 체제보장 및 경제회생의 ‘빅딜’가능성도 점쳐진다. 중국의 경우 미국과 일본의 전역미사일방어망(TMD)구축 추진과 미일 신(新)가이드 라인 마련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미국과의 정면대결을 원치 않지만 적절히 지렛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북한에게 신등거리 외교는 ‘꽃놀이패’에 해당된다.그동안 ‘핵카드’로미국으로부터 60만t의 식량과 매년 50만t의 중유를 받아냈다.이번 중국 방문에서는 15만t의 식량과 40만t의 코크스를 챙겼다.때문에 중국과 미국을 오가는 북한의 신등거리 외교가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도 있다. 오일만기자 oilman@
  • 金永南 북경 도착…오늘 리펑과 회담

    베이징 연합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金永南)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국가대표단이 3일 오전 베이징에 도착,4박5일간의 중국방문 일정에 들어갔다.지난 94년 김일성 사망 후 최초의 북·중간 고위급 교류로 방중한 북한 국가대표단은 김위원장 외에 홍성남 내각총리,김일철 인민무력상,최태복 노동당비서 겸 최고인민회의의장,백남순 외무상,유미영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 등 5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 김정일 왜 페리 피했나

    “만나게 됐으면 유용했을 텐데…”미국의 윌리엄 페리 대북 정책조정관은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 면담이 불발된 아쉬움을 이렇게 달랬다.3박4일간의 방북을 마치고 29일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였다. 미국측은 그의 방북 전 외교 경로를 통해 면담 일정을 잡으려 했다.그것이안되자 평양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면담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북측이 굳이 김정일 면담을 기피한 배경이 궁금해진다.북한이나 김위원장으로선 한꺼번에 빗장을 다 열어줘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음직하다.몸값을 올려 협상력을 제고하기 위한 차원에서다. 북측 입장에서 한·미·일의 ‘대북 포괄적 접근’안은 구미가 당기는 카드였을 것이다.하지만 따지고 보면 철저한 ‘주고받기’게임일 뿐이다.즉 북한이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면 경제지원과 관계개선을 하겠다는 식이다.당장 반대급부가 있는 것도 아닌데 김정일이 미리부터 나설 까닭이없었던 셈이다. 더욱이 김정일은 은둔정치를 통한 신비주의로 부족한 카리스마를 보충해 왔던 터였다.그는 김일성 사후 방북한 총리급 외빈들도 만나지 않았다.이와는달리 김이 군부 실세들에 업혀 있음을 뜻하는 방증이라는 소수 설도 있다.페리 방북중 군부 실세급 인사들이 대거 얼굴을 내민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는것이다.북한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군사담당 제1부부장 이용철(李勇哲)도 그중의 하나다. 페리조정관은 회견에서 그를 만난 사실을 확인하면서 북한군부의 위상에 대해 미묘한 여운을 남겼다.김정일과 ‘직접적인 고리’를 가진 인물들과 ‘의미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데 방북 목적이 있었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 “페리,金대통령 메시지 전달”

    북한을 방문중인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조정관이 27일 저녁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면담했거나 28일중에는 만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27일 “페리 조정관이 26일 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전달했다”고 전제,“그럼에도 불구하고,의전상의 국가원수격인 김영남이 아닌 실제 최고실권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겸 당총비서가 페리특사를 면담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페리 조정관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경우,94년 김일성(金日成) 사망이후김정일 위원장이 만나는 첫 서방 주요인사가 된다.한 외교소식통은 “페리조정관의 김 위원장 면담에서 한·미·일의 대북 포괄적 협상방안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모종의 간접 메시지가 전달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구본영기자 kby7@
  • 北김영남 새달3일 訪中

    베이징 연합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자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김영남(金永南)이 오는 6월 3일부터 약 1주일간 중국을 공식방문한다고 베이징(北京) 외교소식통들이 24일 밝혔다.김영남은 3일부터 2박3일간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겸 공산당 총서기,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주룽지(朱鎔基) 총리,후진타오(胡錦濤) 국가부주석 등과 만나 양국간 현안과 한반도정세 등을 논의한다. 지난 91년 11월 김일성(金日成) 이후 7년 7개월만에 중국을 방문하는 최고위급지도자인 김영남은 베이징에 이어 상하이(上海),항저우(杭州) 등지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이번 중국방문에는 백남순 외상,부장급 군(軍) 고위인사,농업상,공업상 등이 대거 수행,군사 및 경제협력강화 방안도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북중수교 50주년(10월6일)을 앞두고 이뤄지는 김영남의 중국방문을 통해 양국간 현안이 원만히 해결될 경우,김정일의 방중과 장주석의 북한 방문문제도긍정적으로 검토될 가능성이 높다고 소식통들은 말했다.
  • [오늘의 눈] ‘변화’ 외면하는 북한

    북한측이 민주노총 인사들에게 김일성 동상 참배를 요구했다고 한다.14일한 당국자가 뒤늦게 이를 확인했다.남북노동자축구대회 개최 협의차 4월27일∼5월4일 방북했던 민주노총측에 그같은 ‘권유’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대표단이 이를 딱 잘라서 거부했다고 당국자는 전했다.이바람에 북측 관계자들이 오히려 당혹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김일성 동상 참배는 북측의 입장에서는 극히 당연한 ‘관성적인 행태’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이 ‘사건’은 남북한 사회의 이질성을 재확인하기에 충분한 삽화가 아닐 수 없다. 이 해프닝을 접하면서 남북한이 모두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남쪽은 북한의 ‘통일전선’카드에 필요이상의 피해의식을 버려야 할 것 같다. 정부는 평양 남북노동자축구대회에서 체육교류라는 본래 취지가 탈색될 가능성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북측이 8·15범민족대회의 일환으로 치르면서 대규모 매스게임과 카드섹션을 동원,체제선전장으로 악용할 경우에대한 우려다.이 대회는 오는 8월10일 열기로 합의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남북간 민간교류를 과감히 지원한다는 대원칙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민간단체의 자율성을 믿어야 한다는 차원만은 아니다.북한을 변화시키는 다른 방법이 없는 탓이다. 물론 무엇보다 북한당국이 남한당국과 민간단체를 ‘분리’시키려는 기도를 버렸으면 싶다.그같은 통일전선전술이 실효성없는 낡은 카드임이 속속 입증되고 있는 탓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눈앞에 두고 북한당국의 행보는 아직 갈지자다.지난해는 헌법개정을 통해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변화의 기미를 보였다.올해는 인민경제계획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방식을 강화하는 한편 먼지앉은 통일전선카드도 다시 빼들고 있다. 세계사의 주류는 독점산업자본주의-복지지향 수정자본주의-신자유주의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근자에는 제3의 길마저 모색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북한만이 ‘우리식 사회주의’를 외곬으로 고집하고 있다.통일연구원의 서재진(徐載鎭)박사는 사회주의 동독이 서독에 흡수당한 것은 “동독의 지배엘리트들이 마지막까지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지도부가 같은 사회주의권이었던 중국과 러시아가 변화를 통해 살아남은 전례를 직시했으면 싶다. 구본영 정치팀 차장
  • “파도타는 株價 흐름을 읽어라”

    국내 증시는 87년 이후 세차례의 대세 상승과 두차례의 하락 국면을 맞았다.상승기는 2년 4개월 가까이 지속됐고 하락기는 최장 3년 7개월이나 이어졌다. 지난해 6월 말부터 시작된 3차 상승은 1년도 안돼 주가를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등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고 있다. 1차 상승기 87년 초부터 89년 4월까지 종합주가지수(이하 주가)가 1,000선을 첫 돌파하는 시기다. 87년 6·29 민주화 선언과 88년 10월4일 자본시장 국제화 발표에 힘입어 주가가 89년 4월1일 1,007.77포인트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3저의 순풍을 타고 무역·건설·금융 등 트로이카주가 상승을 이끌었으나 89년 들어 경기의 거품이 꺼지면서 실적장세가 뒷받침되지 못해 92년 8월5일 493.33포인트까지 곤두박칠쳤다. 2차 상승기 92년 8월부터 94년 11월9일 사상최고치인 1,138.39포인트를 기록할 때까지 2년 3개월간 계속됐다.저금리 영향으로 금융장세로 출발,93년 2월25일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취임과 8월13일 금융실명제 실시로 900선을돌파했다. 94년 7월8일 북한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사망으로 대북 관련주와 무역·금융 주식이 강세를 보였으나 95년 부동산실명제 실시와 경기퇴조로 하락세로반전했다. IMF를 거치는 대폭락기 94년 말부터 97년 6월까지의 국면이다. 95년 벽두부터 멕시코 페소화의 폭락으로 경상수지에 암운이 깃들자 주가는 5월27일 850선 밑으로 떨어졌다. 증권거래세 인하 등 정부의 수요 진정책으로 1,000선이 일시 회복됐으나 같은해 10월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900선마저 깨졌다. 96년 10월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지만 97년 1월 한보그룹 부도와 7월 기아자동차 부도 유예,10월23일 홍콩증시의 대폭락으로주가는 500선까지 밀렸다. 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잠깐 600선에 육박했으나 한국경제의 신용등급 하락과 잇따른 대기업 부도로 지난해 6월에는 300선마저 붕괴됐다. 3차 상승기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대외신인도가 회복되고 금융·외환시장이 안정을 찾자 지난해 10월 현대의 기아차 인수를 시작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98년 12월12일 뮤추얼 펀드의 등록은 수요기반을 넓히는 계기가 됐고 지난 1월25일 S&P의 신용등급 상향조정에다 저금리 지속은 은행 등 금융주를 중심으로 1월 말 600선을 돌파했다. 2월 말 단기조정을 받았지만 ‘바이코리아’의 열풍으로 시중여유자금이 증시로 몰리면서 지난 6일 810선을 뚫었다. 앞으로의 흐름은 IMF 이후 재무건전성이 높고 시장을 지배하는 대표기업쪽으로 투자가 쏠리고 있다. 구조조정을 거친 은행주와 증시활황에 힘입은 증권주도 향후 유력종목으로 꼽힌다. 특히 부당내부거래의 금지로 기업 이익이 계열사로 분산되지 않는 모기업의경우 계열사 보유지분까지 매각하게 되면 현금흐름마저 개선돼 외국인투자자와 기관투자자의 1차 관심주이다. 백문일기자 mip@
  • 클린턴, 잭슨목사 중재 ‘떨떠름’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제시 잭슨 목사가 지난달 26일 미 정부의 자제 권유도 뿌리치고 유고에 입국,코소보 사태의 평화중재자로 자처한 데 대해 클린턴 정부는 썩 반기는 모습이 아니다. 정부가 임명한 특사도 아닌 데다 공습의 효과가 뚜렷한 마당에 지금에 와서 굳이 협상중재자를 내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안전보장을 못해주겠다고 말했음에도 유고에 입국했던 그가 미군 포로 3명석방예정 소식을 전하자 일단 환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밀로셰비치의 석방방침 뒷배경을 의심하기도 한다. 클린턴 대통령은 지난 95년 리처드 홀부르크를 보스니아내전 협상중재자로,그 이전에는 지미 카터 전대통령을 김일성에 보내 협상을 끌어내도록 의뢰한 적이 있다.그러나 중재자 파견 단계는 대화교착 상태이거나 제3자 협상이더 효과적이란 판단이 설 때였지 지금처럼 이미 공습이 한달여 지속돼 매듭단계에 들어간 때는 아니었다. 잭슨 목사는 지난 84년 레바논 공격시 추락해 억류됐던 미 해군 조종사의석방과 몇달 뒤 쿠바에 억류됐던 48명의 미국인의 귀환 등중재자로서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잭슨 목사가 지닌 밀로셰비치의 대 클린턴 대통령 친서가 어떤 내용일지는두고 볼 일이나 이번 그의 협상중재는 큰 안목에서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평가받고 있다. hay@
  • [제2공화국과 張勉]18-봇물터진 통일론(下)

    ‘중립화 통일론’이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장면(張勉)정부는서둘러 불끄기에 나선다.1960년 11월2일 장면총리는 담화를 발표해 오스트리아식의 중립화 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장총리는 그 이유로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차이점을 제시했다.‘소련·중공과 인접한 한국이 전략적인 가치가 훨씬 높다’는 점을 비롯 ▲침략을 당하면 오스트리아는 즉각 지원 받을 수 있지만 한국은 지원군이 바다 건너 있다 ▲중립국이 되기 전 오스트리아는 단일정부를 유지했지만 한국은 남북으로 갈려 전쟁까지 치렀다는 사실 들을 지적했다.따라서 “유엔 감시하남북총선거가 현정부의 유일한 통일방안”이라고 장총리는 거듭 강조했다. 같은 날 민의원도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따라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로자유선거를 실시하는’통일방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해 이를 제15차 유엔총회에 전달키로 했다.‘대한민국 헌법 절차를 따른다’는 전제조건을 단 민의원 결의는 장면정부의 통일정책보다 더욱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장면정부를 긴장케 한 요인은 혁신계도,중립화 통일론도 아니었다.4월혁명의 주역인 학생세력이 통일논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학생들은 4월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지자 이에 만족하고 ‘혁명과업 수행’은 기성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듯했다.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도호국단 대신 학생회를 구성하고 어용교수 퇴진과 재단 민주화를 요구하는 등 학원민주화운동에 나섰다.또 공명선거·농촌계몽·국산품애용 같은 국민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논쟁이 확산되자 학원가는 그 흡인력에 급속히 빨려들어갔다.각대학에는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동아리가 들어섰고 크고작은 토론회·강연회가 잇따랐다. 11월18일 서울대에서 300여 학생이 참여해 ‘서울대 민족통일연맹(民統)’을 결성했다.이들은 ▲통일에 관한 국민의식을 높이고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며 ▲통일방안을 정부·사회에 제시해 여론을 조성하겠다고 공표했다.아울러 ‘북한 학도’들에게는 “4·19로 이승만정권을 타도했듯이 김일성(金日成)정권을 타도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이들의 통일론은 한마디로 ‘기성 정치인은 믿지 못하니 남북의 학생들이 직접 나서자’는 것이었다. 61년 들어 정부의 ‘유엔 주도하 통일’방안에 충격을 주는 사태가 발생했다.4월12일 제15차 유엔총회 정치위원회에서 한국문제 토의에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자는 안이 나왔다.당시 중립국이던 인도네시아가 제출한 ‘동시초청안’이 높은 지지를 받자 미국대사 스티븐슨은 ‘북한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할 경우에만 초청한다’는 수정안을 냈다.‘스티븐슨 안’은 59대 14로 통과된다. 그동안 유엔이 통한(統韓)문제를 토의하면서 늘 남한 대표만을 초청해 왔기때문에 조건부라 해도 북한이 함께 초청받은 사실은 국내에 큰 영향을 미쳤다.‘스티븐슨 안’자체를 반대하던 장면정부는 막상 수정안이 통과되자 다음날 환영 성명을 발표한다. 장면총리는 “공산측이 기왕의 파괴적 태도를 청산하고 이 획기적인 결의의모든 조건을 성실히 충족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면서 북한이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받아들여 그 임무수행을가능케 하라고 촉구했다. 이같은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과는 달리 사회 분위기는 “스티븐슨 안은 미국이 북한과 타협하는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고 보수계 신문들은 “정치인들이 충격을 받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할 정도”라고 보도했다. 남한 사회는 이제 통일논쟁으로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혁신계와 급진 학생세력이 ‘어떻게든 통일만은 이루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공격적으로나온 반면 장면정부는 기존 원칙만을 고수하며 소극적·방어적으로 대응할수밖에 없었다.북한은 북한대로 혁신계·학생세력을 부추기는 제안을 끊임없이 해댔다.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도 한국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변해갔다. 그 달구어진 용광로의 문을 열어제끼려고 한 세력은 학생들이었다.‘중립화’니 ‘남북교류’니 논쟁 차원에 머물던 통일문제에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4·19 1주년 기념일을 맞아 민통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통일을 기피하고 민족통일세력을 탄압하는 현정권은 피를 보기 전에 물러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이어 5월3일 남북문화교류의 전제로서 남북학생 모임을 갖자고 북한 학생들에게 제의했다. 이틀뒤 전국 18개 대학과 경북고 대표가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학련)’결성준비대회를 열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열겠다고 발표했다.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즉각 이를 환영했으나 집권 민주당과 신민당(민주당 구파)등 기성 정치권은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 대변인인 정헌주(鄭憲柱)국무원 사무처장은 ”학생들의 주장은 정부 방침에 어긋나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면서 “순진한 학생들이 공산당의 흉계에 넘어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다”고 단호한입장을 밝혔다. 5월13일 민통학련은 ‘남북학생회담 및 통일축제’개최 원칙을 공개했고 정부는 이에 대해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면 전원 체포하겠다”고 발표했다.그러나 3일후부터 통일논의는 쿠데타군의 총검에 눌려 전면중단된다. ‘가자 북으로,오라 남으로’를 외치던 학생이건,‘중립화’를 꼭 이뤄야 하느냐 아니냐로 다투던 혁신계건 그 운명은 장면정부와 다르지 않았다.박정희(朴正熙)시대에 ‘통일지상주의자’들은 자유당정권 때보다도 훨씬 가혹한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분단의 역사에서 통일은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임에 틀림없다.민주주의가 활짝 꽃핀 제2공화국에서 통일논의가 최고의 이슈로 떠오른 것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체제간 경쟁이 엄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만 치우친 통일론,자파(自派)의 세력 확장에 급급해 중구난방 식으로 쏟아부은 통일론은 급기야 스스로가 발디딘 토대마저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이용원기자 ywyi@
  • [외언내언] 북한 군사우위정책 /장청수 논설위원

    4월25일은 북한 인민군 창건 67주년 기념일이다.북한은 48년 2월8일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당초 이날을 창군일로 기념해 오다가 지난 78년부터 김일성(金日成)이 만주에서 조직했다는 반일인민유격대 결성일인 32년 4월25일로 바꿨다.알려진대로 북한 인민군은 6·25동족상잔을 일으킨 주력군으로 또는 북한 사회주의 존립의 보루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같은 북한군의 위상과 역할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金正日)체제 출범이후에도 지속돼 무소불위를 자랑하고 있다.김정일체제 출범 이후 ‘군대는 곧 인민이고 국가이며 당’이라고 역설함으로써 기존의 당우위에서 군사우위정책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체제고수를 위한 군대의 중요성을 거듭강조하는 등 북한군의 제고된 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북의 이같은 군사우위정책은 올해 신년공동사설에서도 명백히 나타나 있으며 김일성생일인 이른바 태양절을 기해 군장성 79명을 대거 승진시킨 것은군사우위성을 잘 보여준 대목이다.북한의 이같은 군사중시 정책은 김정일이군에대한 지속적 관심과 배려를 표명함으로써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위축된군의 사기진작을 통해 절대적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군부에 대한 카리스마가 약한 김정일로서는 군부를 장악하지 못하면 체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택한 통치 전략으로 이해된다. 김정일체제 출범과 맞물린 북의 군사우위정책은 과다한 군사유지비로 북한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북한 군부가 권력의 핵심을 장악할 경우 한반도 안보에 위기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도 군사우위정책은 포기돼야 한다.총칼로 유지되는 정권은 총칼에 의해 멸망한다는 것은 세계사적 교훈이다.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도 결국 비극적 종말을 고할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며 이는역사의 필연이다.현 시점에서 북한당국이 선택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무리한 군사우위정책을 포기하고 남북당국간 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보장을 제도화하는 일이다.그리고 과다한 군사비 지출과 군사적 모험주의를 중단하고남북관계 개선과 교류협력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그 길이 바로 북한의 체제말기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제2공화국과 張勉](17)-봇물터진 통일론:上

    제2공화국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분단 이후 통일논의가 가장 활발한 시대였다는 점이다.‘반공으로 동이 트고 해가 저무는’이승만(李承晩)정권 때나 5·16후 한세대 동안 지속된 군부권위주의 정권 때는 물론이고,그후에도 2공(共)시기처럼 남북통일이 국가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활기찬 이슈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지면서 ‘북진통일’로 대표되는 무력통일론은 자연히 도태된다.허정(許政)과도정부가 1960년 5월3일 국가의 근본방침을 밝히면서 “과거보다 더 견실하게 반공정책을 펴 나가겠지만 허장성세하는 물질적·정신적 낭비를 없애는 대신 유효하고 구체적인 대공(對共)방위태세를 확립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이로써 집단이건,개인이건 통일방안을 자유롭게 발표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특히 내각책임제 개헌에 따라 민·참의원을 새로 뽑는 ‘7·29총선’이다가오자 통일론은 주요한 선거 이슈가 되었다. 통일론을 먼저 제기해 이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킨 정치세력은 혁신계였다.하지만 혁신계의 분열을 반영하듯 그 무렵의 주장은 다양했다.한국사회당(대표 錢鎭漢)은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되 통일조국은 민주주의를 견지해야 한다”고 했고,혁신동지연맹(張建相)은 “민주적인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통일위원회를 구성해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정치적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회혁신당(高貞勳)은 “김일성(金日成)괴뢰가 타도돼 자유로운 정권으로 바뀌면 남북교류를 허용하고 그 다음에 남북 총선거로 평화통일을 기한다”는 일정을 발표했다.혁신계라고는 하지만 통일정책은 이처럼 ‘반공’의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보수·혁신 양 진영을 대표하는 민주당과 사회대중당도 총선 직전 통일정책 공약을 내놓는다.사회대중당(徐相日)은 7월22일 성명에서 ▲정당·학계를망라한 협의기구를 설립하고 ▲유엔이 선정해 우리가 승인한 국가로 감시단을 구성,자유총선거를 치러야 하며 ▲경제건설 및 대외정책이 국토통일의 성취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원칙을 공개했다. 민주당도 나흘뒤 ▲유엔 감시하의 남북 자유선거 ▲선거감시단은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회원국으로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일부에서 주장하는 ‘선거전 남북연합위원회 구성’과 ‘통일 전 남북교류’는 반대함을 분명히 했다. 총선이 민주당 압승으로 끝난 뒤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은 8월13일 취임사에서 ‘유엔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원칙을 다시 한번 천명하면서 “이보다 앞서 이루어야 할 근본문제는 남한이 혼란에서 벗어나 국력을 부강케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장면(張勉)총리도 민의원에서의 첫 시정연설에서 같은 통일방안을 밝힌다.‘선(先)건설,후(後)통일’이 장면정부의 기본정책으로 확립된 것이다. 장면정부가 ‘선건설 후통일’을 내세운 데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4월혁명 뒤처리를 맡은 정부로서 당면과제가 산적한 마당에 어차피 단기간에 해결하지 못하는 통일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기는 어려웠다.따라서 장면정부는통일논의에서 소극적·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장면 내각에서 내무부 정무차관을 지낸 김영구(金永求·고려대 법학과교수출신)는 “그때 시급한 과제는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어떻게 먹여살리느냐와,4·19이후 쏟아진 각계의 욕구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면서 “솔직히 통일에 신경 쓸 겨를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김 전차관은 “통일문제는 형식상 외무부에서 관장했지만 사실은 주무부처가 따로 없었던 셈”이라면서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장총리가 그때그때 처리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7·29 총선’에서 참패해 원외 세력으로 남은 혁신계는 돌파구를 통일논의에서 찾는다.총선 당시의 애매모호하던 통일논리를 강화해 ‘선통일후건설’을 내세웠다.장면정부의 ‘선건설 후통일’이란 결국 통일을 하지않겠다는 뜻이라고 비판하면서 통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통일지상주의를 강조했다. 혁신계 정당·단체들은 통일에 관한 이념과 행동을 통합하고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를 구성한다.9월15일 준비위원회를 발족한 민자통은 사회대중당·사회당 등 혁신정당,천도교·유도회 등 종교단체,민주민족청년동맹·4월학생혁명연합회 등 청년단체가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이 무렵 혁신계가 새로 가다듬은 ‘무기’가 남북교류운동,그리고중립화통일운동이었다.남북교류운동이란 사람·편지·문화예술·체육 교류를 가져민족의 동질성을 살리자는 것과,남는 경제재(經濟財)를 주고 필요한 것을 받아오는 물물교환을 하자는 두가지였다.이는 국민의 감성과 경제난에 호소하는 바가 커 큰 호응을 얻었다. 중립화운동은 더욱 관심을 끌었다.민자통은 9월 말 발표한 ‘통일문제에 관한 견해’에서 ▲즉각적인 남북협상 ▲남북대표들의 ‘민족통일 전국최고위원회’구성 ▲외세 배격 ▲통일을 협의하는 남북대표자 회담 개최를 주장했다.그리고는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을 택할 것이냐,아니면 다른 형태를 택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중립화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한달쯤 뒤인 10월22일 미국에서 중립화론이 터져나왔다.마이크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극동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를 중립화한 것처럼 미국이 여러강대국들과 협의,한국을 중립화해 통일시켜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맨스필드의 제안이 알려지자 혁신계는 크게 고무돼 혁신동지연맹·사회대중당·사회당 등이 잇따라 지지성명을 발표한다.이어 부산대 학생들이 11월5일 ‘통한(統韓)궐기대회’에서 ‘외세의존적인 통일을 배격한 중립적인 무혈(無血)통일’을 제의하고 나섰다.학생들은 또 “현 정부와 국회는 실천 가능성이 없는 통일방안을 주장하지 말고 국민투표로써 통일방안을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중립화 바람’은 통일논쟁이란 불씨를 거대한 들불처럼 번지게 했다.그불길은,남북대치의 냉전구조에 토대를 둔 장면정부의 통일정책을 뿌리까지태울 기세로 밀려왔다. 이용원기자 ywyi@*북한의 대남정책 제2공화국 시절 통일논의의 세 축은 장면(張勉)정부,혁신계와 일부 학생 등 급진주의자들,그리고 북한이었다.이 가운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쪽은당연히 북한이다. ‘3·15부정선거’로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두차례 발생하자 북한 당국은 이를 ‘인민봉기’로 규정했다.지난 97년 모 주간지가 공개한 푸자노프(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비망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960년 4월11일 김주열(金朱烈)의 시신이 발견돼 제2차 마산시위가 일어나자 조선노동당은 이를 ‘인민대중의 진정한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한 데 이어 “시위가 인민봉기 유형을 띠고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대도시를 휩쓸고 있다”고 판단했다. ‘4·19’이틀 뒤 노동당은 “파국에 처한 남조선의 현사태를 수습할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연합회의를 긴급 소집하자”고 제의한다.아울러 “평화적 통일은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이 전체 조선인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남북조선 총선거를 통해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한이 ‘7·29총선’국면에 들어가자 북한은 혁신계 정당·단체의 창설을적극 지지하고 나선다.6월13일 푸자노프를 만난 김일성(金日成)은 “우리는단 하나의 (혁신계)대중정당이 아니라 여러 당을 지지하며 현재 그런 당으로는 한국사회당·대중사회당과 기타 정당이 있다”고 말한다. 북한은 ‘7·29총선’결과에 큰 기대를 걸어 “혁신계에서 35명 가량이 당선될 것같다“고 전망하지만 실제로 당선자는 민·참의원 합해 7명에 그쳤다.게다가 그들은 북한이 보수파로 분류한 인사들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듯 북한은 전략을 바꿔 ‘남북연방제’를 제안한다.김일성은 8월14일 열린 ‘해방 15주년 경축대회’에서 “남조선 당국이 아직 자유로운 북남(北南)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먼저 민족의 긴급한 문제를해결하는 과도적인 대책이라도 세워야 한다”면서 남북연방제를 처음 내놓는다. 김일성은 “우리가 말하는 연방제는 남북조선의 현 정치제도를 당분간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보존하면서,두 정부 대표들로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해 남북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을 실시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남북연방제’제의는 과도적이자 단기적인 성격을 가졌다.연방을형성하면 곧바로 남북한 총선거로 넘어가는 수순이었다.북한이 연방제를 제의하며 통일공세를 적극 강화한 이유는,혁신계의 평화통일 주장에 발맞춰 전략적으로 유연한 통일방안을 내놓기 위해서였다. 북한의 남북연방제 안은 50년대후반 북한학계가 전체적으로 동원돼 벌인‘과도기논쟁’을 이론적으로 수렴한 것이기도 했다. 북한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김일성의 남북연방제를 재확인하는 내용의 각서를 11월11일 유엔에 제출한다. 남북 총선거의 전단계 또는 대안으로 북한이 마련한 ‘과도적 연방제’안은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다. 이용원기자
  • [외언내언] 남북한 白凡회고모임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가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 50주기가 되는 6월 26일 평양에서 남한 인사들을 초청하여 김구선생 회고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백범선생 50주기를 앞두고 한국에서는 대한매일신보사가 ‘백범김구전집’12권을 편찬중인 것을 비롯,여러가지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터에 북한의 ‘김구선생 회고모임’개최는 의미있는 행사라 하겠다. 해방공간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시도라 할 남북의 최고정치지도자 4김회담이 1948년 4월 30일 평양 김두봉의 집에서 열렸다. 남쪽의 김구·김규식과 북쪽의 김일성·김두봉이 참석한 이 회담은 분단으로 질주하는 해방정국의 마지막 ‘제어장치’였다. 4김회담이 열리기에 앞서 평양에서는 ‘남북한 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란 긴 이름의 남북요인 15인 회담이 열렸다. 남측대표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봉준·엄항섭, 북측대표로는 김일성·김두봉·최용건·박헌영·주영하·허헌·백남운 등이 참석했다. 이 요인회담은 해방 후 좌우익과 중도파 지도자가 모여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최초, 최후의 모임이었다. 남북협상에 비판적인 이승만과 연금상태의 조만식이 불참하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남북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된 절호의 기회였다. 요인회담에서는 △진정한 민주국가 건설△사유재산제도 승인 △통일중앙정부 수립 △군사기지 불제공 △미·소 양군 철수 등이 논의되고 이것은 4김회담에서 4개항으로 조정·채택되었다. 백범은 특히 수풍발전소의 송전 계속과 조만식의 월남 허용, 하얼빈 안중근의사 유해를 서울로 봉환할 수 있도록 북측의 두 김씨에게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그해 9월 22일 중국에 묻혀있던 이동녕·차이석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장하였기 때문에 안의사의 유해봉환 문제는 백범으로서는애절한 동지애의 발로였다. 그러나 북측은 소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서회답을 피하였다. 4김회담과 남북요인회담으로 조성된 남북협상파의 통일정부 수립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북측의 정치적 이용과 하지 중장의 비협력, 양측 단정수립 세력에 의해좌절된 것이다. 그로부터 51년의 세월이 지났다. 당시 요인회담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작고했다. 남한에는 김규식선생의 비서 송남헌씨, 신창균씨 그리고 당시백범을 수행한 아들 김신씨가 생존해 있다. 민족의 거성(巨星) 백범을 회고하는 모임이 성사되도록 남북한 정부 당국에 당부한다. [金三雄주필 kimsu@]
  • 방송대 박태상교수 연구서‘북한문학의 현상’펴내

    정부의 햇볕정책이 북한문학의 각질(角質)을 벗겨내고 있는 것일까.최근들어 북한문학이 희미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현재 간행중인‘북한문학사’(전15권)를 보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근간으로 항일혁명문학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만,프롤레타리아문학과 진보적 문학도 거의 대등한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또 부르주아 반동작가들을 비판하면서 이광수의 ‘혁명가의 안해’를 공격하되,김일성의 교시와 이기영의 평론을 앞뒤로 배치해감정적인 처리보다는 객관적인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오늘의북한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방송대 박태상교수(국문과)가 최근 내놓은 ‘북한문학의 현상’(깊은샘)은 북한문학사 전반을 통시적인 시각에서 다룬 연구서로 관심을 모은다.특히 이 책은 김정일의 우상화를 위한 ‘불멸의 향도총서’ 가운데 하나인 ‘동해천리’(96년)와 북한의 베스트셀러 소설인 ‘청춘송가’(87년),북한 농촌관리구조의 모순을 보여주는 ‘씨앗’(92년) 등을 꼼꼼히 분석하고 있어 70∼90년대 북한사회의 실상을살피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동해천리’는 70년대의 ‘70일전투’ 등 속도전과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소조운동을 주도한 김정일이 사회주의 건설투쟁을 벌이면서 국가기간산업의 현지지도에 몰두하는 모습을 미화한 장편.이 소설을 지은 백남룡은이른바 ‘4·15창작단’에 속한 작가로 남대현과 함께 김정일이 키우려고 하는 ‘새 세대작가’군에 속하는 인물이다. 남대현의 ‘청춘송가’는 80년대와 90년대 북한 소설문학의 다리역할을 하는 과도기적 성격의 작품으로 북한문학에서는 보기 드문 로맨스소설이다.이작품은 70년대 이후 북한소설의 단골메뉴인 과학기술문제와 80년대 문학에서흔히 볼 수 있는 ‘숨은 영웅찾기’의 형상화란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한윤의 ‘씨앗’은 북한의 대표적인 농민소설이다.이 소설에는 북한 농촌사회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으로 세가지 말이 자주 등장한다.‘어버이수령’‘주체농법’‘관료주의’가 그것이다.관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김일성은‘청산리방법’에서 현장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그러나 이 소설은실제현장의 관리일꾼들은 ‘의무공수’를 제외하고는 책상에 앉아 보고만 받으려는 요령주의에 젖어있다고 비판한다.‘씨앗’은 이기영의 ‘땅’,김규엽의‘새봄’등 해방이후 북한의 토지개혁 과정을 다룬 작품들과 같은 맥락에서읽힌다. 북한의 대표적인 예술장르는 혁명가극과 영화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김정일이 80년대 이후 장·중편소설 창작을 독려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예술장르의 중심축은 장·중편소설 쪽으로 현저히 기울고 있다.북한의 대표적인 소설에 대해 남한학자로는 처음으로 창작배경과 작품구조 등을 분석한 ‘북한문학의 현상’은 이 시점에서 적잖은 의미를 지닌다.박교수는 “북한문학을서구문학이론의 잣대로 재단하거나 흥미위주로 접근하는 것은 금물”이라며“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비평적 접근을 통해 통일문학사를 일궈내려는 전향적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종면기자 jmkim@
  • 盧 전대통령 육성 회고

    “1990년 10월 서동권(徐東權) 당시 안기부장을 평양으로 보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노 전대통령은 월간조선 5월호에 ‘육성회고록’을 게재하면서 그동안 숨겨진 비화를 털어놓았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남북정상회담.노 전대통령은 “서 부장은 당시 북한에가서 김일성·김정일과 밀담을 나누었고 92년 봄 북한 노당당 중앙위원 윤기복(尹基福)이 김일성의 밀사로 서울에 와 남북정상회담 초청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하지만 “당시 김은 자신의 생일(4월15일)에 맞춰 정상회담일을잡아 나는 초청을 거절했다”며 “우리는 김일성이 남한 정세를 오판하지 말도록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김일성은 생일에 맞춰 나를 초청,정상회담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주장했다.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에 대한 ‘실망감’도 피력했다.노 전대통령은 “나는 결과적으로 김영삼씨의 국정 능력에 대해 오판을 한 셈이다”라고 전제,“국정 경험이 없는 사람이 정권을 잡아 취약점이 노출된 데다가 이를 보완해야 할 미국의 클린턴 정부도 취약점을 갖고 있어 북한이 이 허점을 이용했다”고 분석했다.이어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6공때 확보한 대북 고삐(주도권)를 놓치는 바람에 북핵문제에서 한국이 소외되는 상황을 맞았다”며 YS의 외교 미숙을 질타했다. 91년 주한 전술핵무기 철수와 관련,“당시 부시 대통령은 핵우산 제공에 대해 보장을 했다”며 “그 전까지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군산 미군기지 한군데서만 보관됐었다”고 회고했다.노 전대통령은 이외에 ▲김대중 구명 비화 ▲한·소 수교 ▲88올림픽 등 현대사의 주요사건을 증언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외언내언] 서울·평양지하철

    남북한 지하철은 외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심과 교외를 잇는 주요한 대중교통수단이다.남한의 지하철은 서울·수도권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운행되고 있는 데 반해 북한의 지하철은 평양에서만 운행되고 있다.현재 서울에서운행되는 지하철은 8개노선 가운데 5개노선은 완전 개통됐고 5·7·8호선 3개노선은 일부만 개통됐다.평양지하철은 1호선인‘천리마선’과 2호선인‘혁신선’이 있으며 3호선으로 불리는‘만경대선’은 천리마선의 연장노선 역할을 하고 있다.천리마선은 평양시의 남북을 횡단하는 6개역을 잇는 12㎞구간이며 연장노선인 만경대선은 2㎞구간이다.혁신선은 동서를 횡단하는 9개역으로 총연장 34㎞에 이른다. 북한 최초의 지하철은 73년 9월에 개통됐으며 서울과 인천을 운행하는 남한의 1호선은 북한보다 1년 늦은 74년 8월에 개통됐다.서울지하철은 일부 지상구간이 있으나 평양지하철은 이름 그대로 지하로만 다닌다.필자가 92년 9월제8차 총리회담 지원단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천리마노선 지하철을 탑승할 기회가 있었다.서울에 비해 평양지하철은 100∼150m 깊은 지하에 건설됐다는 것이 인상 깊게 느껴졌다. 평양지하철이 이렇게 깊게 건설된 것은 전시에 대비,지하 방공호와 통제사령부로 활용할 목적때문이라고 한다.금수산기념궁전과 이어진 광명역은 북한 수뇌부의 유사시를 대비한 비상통로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그리고 평양지하철에서 또한번 인상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모든 역이‘지하예술의 전당’으로 불릴 정도로 각종 대형 벽화들로 장식된 점이었다.서울지하철의 경우도그림이나 조형물로 장식된 역이 가끔 눈에 띄긴 하지만 평양과는 비교가 안된다.평양지하철 벽화는 거의 대부분이 김일성(金日成)주석의 혁명과정을 소재로 한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김주석의‘당과 정권 창건활동’을 비롯해‘전후복구모습’이나‘경제건설활동’그리고‘국방건설활동’ 등 주로 정치적 의미를 소재로 한작품들이다.서울의 지하철요금은 기본구간(1구간) 500원을 시작으로 거리별로 가산되지만 평양지하철은 일률적으로 10전을 받는다.현재 북한의 환율이1달러에 2원16전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돈 약 565원에 해당된다.평양지하철은 노동조합도 없고 사회안전성 인민경비대에서 운영을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서울지하철의 경우처럼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하는 파업이나 지연운행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다.남북간의 화해·협력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남북한 주민들이 서울과 평양의 지하철을 탈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대해 본다. 장청수 논설위원
  • 특별배급 없는 金日成생일 구호성 행사 그쳐

    15일 고(故) 김일성(金日成)주석의 87회 생일을 맞아 북한 전역에서 대대적기념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북한은 ‘태양절’로 명명한 김주석 생일행사를 요란하게 치렀지만,경제난을 반영하는 듯 주민들에 대한 특별배급이 없는,구호성 행사에 그쳤다는 게정부당국의 평가다. 친북인사를 동원한 해외행사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40개국에서 벌어졌으나,대내 행사는 지난해 36건에서 34건으로 줄었다. 북한 중앙방송은 이날 김정일(金正日)당총비서를 후계자로 내세운 것을 김주석의 가장 큰 ‘업적’으로 내세워 그의 ‘유훈통치’시대가 끝나고 김정일시대가 개막됐음을 내비쳤다. 한 당국자는 “북한이 중앙보고대회에서 ‘사회주의 조국은 두분의 수령 밑에서 건설되고 있다’고 선전했다”고 전하고 “김일성에 대한 추모를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체제결속을 다지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구본영기자 kby7@
  • KNCC 75돌 맞춰 북한 개신교대표단 서울 초청

    올해로 창립 75주년을 맞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북한 개신교 대표단을 초청할 예정이어서 성사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김동완 KNCC 총무는 최근 KNCC 75주년 기념행사 계획에 관해 설명하면서 “오는 9월 24일 창립기념일에 맞춰 조선기독교도연맹(위원장 강영섭) 대표단을 서울로 초청할 계획이며 한반도 주변상황과 남북관계가 호전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성사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김 총무는 97년 북한을 방문한 이래 꾸준히 서울 초청의사를 북한에 전달해왔고 지난해 12월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총회에서도 북한대표를 만나 긍정적 반응을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욱이 세계교회협 콘라드 라이저 총무가 17일부터 20일까지 북한을 방문,김정일을 만나고 바로 서울에서 김대중대통령을 예방할 예정이어서 북한개신교 대표단의 첫 서울방문에 대한 기대에 부풀고 있다. 세계개신교 최고지도자가 남북한을 동시에 방문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논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93년 김일성주석 사망 직전 미국의 카터전 대통령이 남북한 최고지도자들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합의를 이루어냈던 것처럼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가능성도 높다. 콘라드 라이저 총무는 방북기간중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를 찾아 예배를 올리고 남포항에서 400만 달러어치의 지원물품도 전달할 계획이다. 한편 KNCC는 창립일인 오는 9월24일을 전후해 창립 기념예배(9월30일),필립 포터 WCC전 총무 특별강연회(10월7일),KBS 열린음악회(9월중),축하음악회(10월25일)등도 개최할 예정이다. 박찬기자
  • [외언내언] 태양절

    지금 북한에서는 주인 없는 생일잔치가 요란하게 벌어지고 있다.사망한 김일성(金日成)의 87회 생일을 축하하는‘태양절’행사가 그것이다.북한은 97년 7월8일 김일성 사망 3주기를 맞아 그가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하여주체연호를 사용하고 생일인 4월15일을 태양절로 제정했다.이에따라 민족최대의 명절로 찬양하던 김일성 생일을 태양절로 제정한 이후 그의 영생을 위한 생일잔치를 다채롭게 치르고 있다. 특히 올해는 소위 꺾어지는 5년 해로 제1회 김일성화(花)전시회를 비롯해서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행사에도 46개국 80여개 예술단과 교예단을 초청하는 등 성대한 경축행사를 준비했다.아울러 전체 주민들에게 태양절을 맞아 김일성 태양민족의 긍지를 살려 김정일(金正日)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강요하고 있다.이처럼 북한이 해마다 죽은 김일성 생일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는 것은 그의 카리스마를 빌려 김정일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정권유지 차원에서 개인 우상화의 극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북한이 당면한 경제난과 헐벗고 굶주리는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개인의 우상화를 강화하는 것은 정권도덕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왜냐 하면 북한은 해마다 김일성 생일행사에 많은 외화를 소비하고있기 때문이다.북한은 그의 사후 4년 동안 생일행사 비용으로 약 1억달러를소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한해 평균 2,500만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우상화 비용으로 낭비된 셈이다.생일행사 비용으로 소비된 1억달러는 국제곡물시장에서 최소 40만t의 식량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도덕성에대한 비난을 면키 어렵다. 김일성 사후 그가 북한 사회주의 건설에 실패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역사적 평가다.때문에 그의 개인우상화정책을 통해 실패한 역사를 영구히 호도하거나 보상받을 수는 없다.다시 말해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오늘의 북한체제를 그의 우상화정책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하다.그리고 우리가 개인우상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북한을 의도적으로 비판하려는것이 결코 아니다.민족의 화해를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여 민족자존의 시대를 창조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노력이 경주되고 있는 시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다만 이같은 북한의 정권유지를 위한 개인우상화정책에 의해 민족의 정통성이 말살되고 역사가 오도되어 결국은 민족통일에도 장애요인이 된다는점에서 하루속히 시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장청수 논설위원
  • 北-美 대화채널 통해 본 현주소 점검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한반도의 봄은 21세기의 몫인가.’윌리엄 페리대북조정관의 방한 이후 북한을 둘러싼 한·미·일 3국의 움직임이 바빠지고 있다.한국과 미국은 포용정책(햇볕정책)에 완벽한 합의를 이룬 가운데 북한의 태도변화를 위한 인내의 노력을 재확약했다.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당사자인 한국과의 쌍무적 대화는 기피한 채 미국과의 대화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풀릴듯 풀릴듯 풀리지 않는 한반도 문제의 현주소를 현재 가동중인 북한과미국의 각종 대화채널을 통해 조망한다.[편집자주]▒금창리 핵의혹시설 협상 지난해 8월 찰스 카트만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와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차례 회담이 진행돼 14일 뉴욕에서 13일째 회의를 마쳤다. 북한이 제네바 핵합의에서 모든 핵관련시설을 보유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도 금창리에 다시 핵의혹시설 공사를 벌여 이를 규명하기 위해 협상 중이다. 북한은 역시 이를 식량원조에 철저히 이용하고 있어 막판진통을 거듭하고 있다.조만간 타협지어질 것으로 전망되는가운데 미국내의 대북강경 분위기 속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주목된다. ▒미사일협상 지난 96년4월부터 북한의 미사일 개발및 수출을 우려한 미국이 협상을 유도,북한을 미사일 기술통제체제(MTCR)에 가입시키려한 협상이다. MTCR은 사정거리 300㎞가 넘는 미사일과 관련부품의 수출을 제한하는 국제기구로 북한의 미사일수출을 막기 위해 적극 협상을 벌여었다. 그러나 북한은 협상진행과 관계없이 지난해 8월 3단계 미사일을 일본열도너머로 시험발사,국제적 문제를 야기시켰다.따라서 이 문제는 더욱 중요시되고 있으며 미국내 북한지원 반대 움직임을 낳기도 했다. 지금까지 모두 3차례 회담이 진행됐지만 뚜렷한 결론은 없으며 북한이 내정간섭을 이유로 몇차례 협상을 결렬시켰으나 이달내에 제4차회담이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4자회담 한반도의 평화안정기조의 정착을 위한 남·북한을 포함한 미국과중국 등 4개국 회담이 지난 96년 상반기 제의돼 97년 12월 9일을 첫회의로지금까지 4차례 진행돼왔다.한국전쟁 휴전 이후 남북한 관계를 정전체제로규정하고 있는 상황을 평화체제로 대체키 위한 것이다. 4차례 회담이 진행되면서 우여곡절도 있었으나 시작 1년이 채못된 지난해 10월말 ▲평화체제 구축과 ▲긴장완화를 다룰 2개의 분과위원회 구성에 합의,지난 1월 3차회의에서 분과위 회의는 열었으나 분과위의 의제선정 문제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오는 4월초쯤 제5차회의가 예상되고 있다. ▒미군 유해송환협상 지난 94년6월 남북대화 중재자로 나선 카터 전대통령이 평양을 방문,사망전 김일성과 만나 합의해낸 뒤 거의 매년 양측이 만나 협상과 발굴을 해오고 있다. 애초 90년 미군유해 5구를 놓고 북한측이 이른바‘유해값’을 요구해 합의를 보지 못하다 카터 방북시 김일성 부인인 김성애가 승낙을 유도,합의를 보았다. 그후 유해발굴 실무협상을 위해 지난 96년 1월 북한의 유해전문가가 미하와이에 입국,북·미간 비밀협상이 이뤄졌다는 것이 확인돼 한국정부의 거센 항의도 받았다. 북한은 매번 미군유해의 인도 대가로 금전이나 다른 반대급부를 원하고 있다.지금까지 약100구 이상의 유해가 인도됐다.▒수교협상 지난 94년 북·미간 3단계 고위급회담을 통해 “각기 쌍방이 수도에 외교대표부를 설치한다”고까지 합의했으나 이후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후 하와이 유해협상시 양측은 북·미외교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를 통해한때 연락사무소급이 아닌 대표부 교환선까지 대화를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역시 북한측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에 대해 북한에서 망명한 황장엽씨는 최근발간한 저서에서 “김정일이 북한땅 내에 미국인이 머무는 것을 원치 않기때문”으로 풀이했다. 한때 한국측이 북·미수교협상 진전이 너무 빠른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정도였던 이 협상은 이후 전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장성급 대화 95년 북한측이 군사정전위 일직장교 접촉을 통해 장성급 대화를 제의해와 98년 6월말 첫대화를 가진 뒤 지금까지 모두 4차례가 열렸다. 애초 경수로 지원문제로 논의가 한창이던 95년 북한측은 한반도 위기관리를 위해 유엔사와 북한군 사이의 장성급대화가 필요하다며 미측에 제의했으나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가 다시 98년5월 유엔사령부가 북한과 대화재개를 합의,일정이 잡혔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98년 6월말 북한 잠수함 사건이 발생,6월30일 열린 판문점 장성급회담에서 북한측에 이를 강력 항의했고 북한측은 이를 사과하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후 98년말 다시 남해안에서 잠수함이 발견돼 이를 항의하기 위해 12월 다시 소집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고 이후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미의원대화채널 미국 의회의원들을 통한 북한과의 대화가 종종 이뤄져와한국정부와의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기도 했다.미 의원들의 방북은 지난 60년대초부터 이뤄져 양측 충돌현안을 비공식적으로 푸는 지렛대 역할을 했고 대북식량지원 등 순수 민간외교 목적을 띠기도 했다.
  • 精文硏 ‘한국인물대사전’빠진 사람 많고 서술 부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원장 한상진)이 최근 내놓은 ‘한국인물대사전’(전2권)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있다.이유는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마땅히수록됐어야 할 인물들이 대거 누락돼 있고 서술도 부실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97년부터 전문가 800여 명을 동원,민족의 시조 단군에서부터 지난 해 작고한 최종현 전 선경 회장,시인 박두진 선생에 이르기까지 작고 인물 총1만6,000명을 담은 이 사전은 규모로는 단연 국내 최대다.또 ‘부록편’에 수록된단군 이후 조선 순종까지의 왕실가계도,유명인물의 자(字)·호(號)일람표,또 상고시대 이후 1910년대까지의 관직·기구·법제 등에 대한 용어해설 등에는 편집진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정문연측은 “기존 인물사전은 영웅주의에 빠져 공적은 강조한 반면 허물은 감추어 한 인물의 객관적 면모를 이해하는데 미흡했다”고 지적하고 “총체적인 시각과 객관적인 서술을 바탕으로 실로 90년 만에 제대로 된 인물사전을 출간했다”고 설명했다.특히 정문연측은 이번 ‘사전’에서 친일경력자와 현대인물 가운데월북·납북자,북한의 인물까지도 망라해서 수록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전’을 직접 들춰 보면 정문연측의 주장은 ‘눈가리고 아웅’한 것임이 금새 드러난다. 우선 친일경력자 언급문제.‘김활란상’제정 문제로 최근 논란이 됐던 김활란의 경우 여성교육자로서의 화려한 행적을 장황히 언급한 후 맨 마지막에가서 겨우 ‘최근에 와서 친일행적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정도로언급한 것이 전부다.또 정문연의 초대원장을 지낸 이선근의 경우 그가 만주에서 친일단체인 만주국 협화회(協和會)의 간부를 지낸 사실은 전혀 언급돼있지 않다.또 정문연측은 ‘국군·경찰의 창설및 발전에 특기할만한 업적을남긴 인물’을 포함시켰다고 해 놓고도 ‘민족경찰’로 불렸던 최능진은 빼놓았다.또한 ‘상훈을 받지 않았더라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사실이 객관적인 자료로 입증된 인물’이라면 포함시켰다는 설명과는 달리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으로 4년형을 언도받은 장재성도 누락시켰다.4·19후 민주당 정부는 장재성에 대해 건국훈장 추서를 계획했으나 5·16후 박정권은 장씨가해방후 월북했다며 이를 취소한 바 있다. 이밖에 일제하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평가는 차치하고 아예명단조차 들어있지 않다.또 북한 현대사의 인물로는 김일성·최용건(부주석역임)정도를 다루는데 그쳤다.벽초 홍명희의 장남이자 국어학자인 홍기문,역사학자 김석형은 물론 초창기 북한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낯익은 김책·최현·오진우 등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물선정에 있어 종래의 보수적 관점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이에 대해 韓원장은 “이것이 우리 정신사의 현주소”라며 “정문연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역사학계의 한 중진교수는 “거액의 정부예산을 들여 만든 사전이 종래의구태를 재연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이는 정문연의 현주소를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혹평했다. 한편 800여명에 이르는 이번 사전의집필진 중에는 진보성향의 학자로 알려진 韓원장은 물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연구의 전문가인 姜萬吉 전 고려대 교수,현대사 전공의 徐仲錫 성균관대교수 등이 빠져있어 필자 선정도 편향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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