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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간 맛보기/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북한 움직인 거물들의 실체

    역사란 ‘사람들간의 관계’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이런 점에서 격동의 남북현대사를 이끈 북한쪽 인사들의 행적을 뒤지는 일은 분명 의미있는 작업임에 틀림없다.이 작업은 북한이 우리와는 전쟁을 치른 적대국이자 통일의 대상이기도 한 ‘나머지 반쪽’이라는 점에서 더한 설득력과 당위성을 갖는다. 이런 관점에서 북한 현대사를 특정한 인물 중심으로 살펴본 책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정창현 지음)는 오늘의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집이다.정사는 물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까지 아우른 책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사와 수령제 정치체제의 형성 과정을 비롯,조만식 박헌영 이강국 박영빈 이바노프 푸자노프 김정일 등 북한 현대사를 움직인 인물들의 실체가 각종 자료를 근거로 설득력있게 그려 있다.도서출판 민연.1만 3000원. 심재억기자
  • [굄돌] 토론하는 사회

    북한의 변화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다.마오쩌둥(毛澤東)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 지도체제를 형성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개방경제를 실시했다.자본주의 경제이념을 받아들이면서 상품경제라 이름 붙여서 자신들의 이념으로 삼고,주변의 공산·사회주의 국가에도 보급하려고 하자 북한에서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공산주의 이념 속에 ‘상품경제’라는 말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급기야 1986년 6월 중국 ‘붉은기(紅旗)’편집회의실에 중국의 당 중앙 선전부 부부장인 슝후이(雄輝)와 국무원 개발연구소 교수,베이징(北京)대 경제학 교수 등 경제학자 10여명,북한 당중앙 선전부부장 김용학 등 경제 전문가 10여명이 모여 상품경제와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개방화 당위성에 관해 불꽃튀기는 토론을 벌였다. 국가의 자존심까지 건 토론이었기에 며칠이 지나도 확실한 비교 우위의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미 개방화에 착수한 중국의 선전(深玔) 등 연해 개발구를 방문해 첨단 산업시설을 보고서 북한 학자들의 견해에도 변화가 생겼고,김일성은 양국 학자들에게 만찬을 대접하고 금강산을 보여줬다. 이 일이 북한의 변화와,요즘 김정일 위원장의 경제와 환경 그리고 지속 가능한 개발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 배경이 됐다. 일인,일당 지배 체제 하에서 지도 이념을 확립하기까지 구성원들의 진지하고 철저한 토론을 통해 의견의 일치를 본다는 것이 묘한 느낌을 주는 데가 있다.그것이 설사 지도자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일지라도 과정의 정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노라면 과연 이 곳이 자유로운 토론을 하기는 하는 사회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IMF를 극복했다고 자랑하는 정부 각 기관은 그 많은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관리하는 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요직에 사람들을 선발하면서 또 어떠한 토론을 했는지,여야 공히 의장단을 선발하거나 상임위원장을 선임하는 데 절차상의 정의를 지켰는지…. 그리고 서해교전의 원인 조사와 대책 강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히딩크로 대변되는 월드컵 효과를 어떻게 내재화할 것인지등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한 명이라도 이해가 부족하게 되면 그만큼 사회의 통합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그런데 거의 모든 사항에 대해 고개를 모로 젓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참으로 우리 사회에 절차상의 정의가 부족하고 그만큼 필요한 덕목이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법현(불교종단협 사무국장스님)
  • 北 테러지원국 벗으려나/요도호 납치범 귀국추진 배경

    (도쿄 황성기특파원) 평양에 머물고 있는 일본 여객기 요도호 납치범 4명이 일본 귀국을 신청한 의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이들은 최근 평양에서 일본의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인 납치 의혹에 우리들이 관련돼 있다고 보도되고 있지만 우리들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고 귀국 이유를 설명했다.그러나 이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이들이 귀국하면 일본 공안당국은 이들을 곧바로 요도호 납치와 관련,체포하겠다는 입장이고 체포되면 중형이 불가피하다.이들은 “체포되든 되지 않든 전혀 겁내지 않는다.”고 귀국 강행 의사를 밝히고 있으나 설득력이 충분치 않다.오히려 그들 개인에게는 32년간의 평양 망명생활에 염증을 느꼈다는 편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이들이 귀국에 필요한 서류인 ‘도항서(渡航書)에 서명한 것은 적어도 북한 당국의 묵인 내지는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그렇다면 고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뜻이라며 이들을 북한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고 감쌌던 북한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인가. 일본 공안 관계자는 10일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미국은 북한이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15년간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고 있다.이들이 ‘자진 귀국’이든 ‘국외 추방’이든 북한 밖으로 나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북한 문제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북한의 대미 관계에 있어 요도호 납치범 귀국은 지금 시점에서 북한이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카드”라고 설명했다.테러지원국 지정이 해제되면 미국의 원조도 받을 수 있는데다 북미관계 개선의 실마리로도 활용할 수 있다. 북·일 관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일본이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일본인 납치 의혹의 해결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양측이 오랜 숙제를 풀었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들이 정말 귀국을 단행할 지는 미지수다.공안 관계자는 “이들이 정말 귀국할 의사를 갖고 있는 지는 지금 단계에서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marry01@
  • 통일플라자/북한의 군부/김정일 확고한 체제 구축, 국방위원 서열도 급상승

    6·29 서해교전을 계기로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군부의 관계가 관심사다.김 위원장의 지도가 먹히지않는 강경파가 북한의 군부내에 존재하는지,또 김 위원장이 무리하게 선군(先軍)정치를 앞세우는지 등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지난 91년 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해 착실하게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지난 94년 7월8일 김일성(金日成)주석 사망 이후 3년간 계속됐던 유훈통치 동안 홍수 피해와 식량난 등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자신의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지난 97년 김일성 사망 3주기 중앙추모대회에서 공식 탈상을 선언한 김 위원장은 98년 9월5일 사회주의 헌법을 수정·보완했다.당·정·군을 포괄 통치했던 주석제도와 명목상 국가 주권 최고지도기관이었던 중앙인민위원회를 없애면서 더욱 강화한 직책이 국방위원장이다. 북한 헌법 100조는 국방위원회를 ‘국가주권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으로 규정했다.102조는 ‘국방위원장은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하며 국방사업 전반을 지도한다.’로 돼 있다.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가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며 명실상부한 권력의 중심이 됐다. 지난 2000년 6·15 정상회담때 평양을 다녀온 영남대 정태욱 교수는 “김위원장이 북한 군부에 대해 큰 부담을 느낄 것으로 봤으나 군부를 비롯한 북한 정국 전반에 대해 확고한 지도력을 갖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개헌 이후 북한 정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군부의 위상이 지속적으로 강화됐다는 점이다.군부 중심의 정치 체제를 제도화하는 이른바‘선군정치’를 내세우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물론 김정일 위원장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조치다. 국방위원의 서열이 급상승하였다는 점도 중요한 대목이다.이에 따라 조명록제1부위원장은 김일철 인민무력부장보다 서열이 높다.과거 오진우,최광 등 인민무력부장이 군부인사 중 최고서열을 차지한 것과는 다른 흐름이다.김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국방위원회의 위상강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통일부 한 관계자 역시 “군부가 김 위원장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다는 정보를 아직까지 접한 적이 없다.”면서 “유훈통치 3년을 거치면서 안정적으로 군부를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北 김일성8周忌 ‘차분’

    북한은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사망 8주기를 맞은 8일 회고 행사 위주로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했다.지난 99년 5주기 이후 일관되게 이어진 분위기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이날 0시 김 주석의 유해가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했다.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김영춘 군 총참모장,김일철인민무력부장 등 당·군 간부들과 함께였다.북한 조선중앙방송은 “김정일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가장 경건한 심정으로 삼가 인사를 드렸다.”고 전했다. 8주기를 앞두고 이뤄진 행사들은 주로 언론의 보도와 미술전람회 등 회고전 형식이었다. 김주석의 추모 행사는 5주기인 99년 때까지 ‘중앙추모대회’로 크게 치러졌다.그러나 그 이후 ‘중앙추모대회’는 한차례도 열리지 않았고 김정일 위원장이 금수산의사당을 간략히 참배했을 뿐이다. 이처럼 추모행사가 간소하게 치러지고 있는데는 지난 4월 90회 생일 때 대규모 행사를 치른 데다 북한당국은 일반적으로 5,10주년 단위로 행사를 크게 치르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김정일의 북한’으로 굳히려는 수순이란 분석도 만만찮다.북한이최근 각종 행사 장소를 김일성 주석을 상징하는 ‘만경대’에서 ‘백두산’으로 옮긴 것도 같은 맥락이란 풀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이경형 칼럼] ‘야누스 북한’ 다루기

    북한의 야누스적인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남쪽의 월드컵 경기를 인민들에게 방영해주다가 느닷없이 3,4위전이 있던 날 무력 도발을 했다.그러고는 이틀 뒤 우리의 월드컵 선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그 다음날엔 북의 경수로 핵안전규제훈련요원 25명을 남한에 보냈고,7·4남북공동성명 30주년이 되는 어제는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남북간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다. 북한의 이같은 냉온탕식 대남 정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탈냉전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장악하고 있는 북한 권력체제 아래서는 강경·온건파의 입지에 따라 대결과 화해의 무게가 수시로 달라진다고 한다.북한을 연구하는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늘 제기되는 쟁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북한 안에 ‘의미있는’ 대남 강·온 양파가 과연 있는가 하는 문제다. 김 위원장이 아버지 김일성 주석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그래서 아무리 군부 강경파가 득세한다고 해도 김 위원장의 의사에 반해 이번처럼 제멋대로서해 도발을 할 수 있겠느냐는 분석이 나온다.적어도 김 위원장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2년전 6·15 남북공동선언이 나온 후에도 북한은 군대가 각 분야에 앞장서는 이른바 ‘선군(先軍)정치’를 강조해왔다.바꿔 말하면 북한내 물적·인적 자원의 동원은 인민군이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이번 교전 사태의 정부 대응조치를 둘러싸고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는 국내 정당간 입장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북한내 강·온파의 실재 여부를 보는 인식과 연결되고 있다.현 정부가 이번 사태를 북한군 일부가 도발한 것으로,혹은 우발적 사건으로 보려는 시각의 바탕에는 강경 군부의 실체를 인정하고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북한내 강·온파란 유명무실하거나 설사 있다 해도 김정일 위원장의 묵인 속에 행동하는 ‘위장된 강경파’라는 인식이다.그래서 이회창 후보는 이번 사태가 결코 우발적이 아니며,안보는 등한히 하고 ‘퍼주기’만 해온 햇볕정책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서해 사태 이후 북한이 보여주는 일련의 화해 제스처가 눈길을 끈다.마치 이번 서해 도발엔 김 위원장의 의중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전쟁과 평화,대결과 화해라는 두 얼굴의 북한을 다루는 데는 ‘인내는 하되 때때로 단호함’이 필요할 것 같다.설령 북한내 강경 군부의 존재를 인정한다 해도 김 위원장의 완전한 통제 바깥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그렇다면 최고지도자로서 서해 사태를 일으킨 해당 군부에 대한 응분의 조치가 있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로서도 압력 수단을 구사할 수 있다고 본다.말로만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호응도에 따라 대북 민간 교류에서부터 금강산 관광,인도적 식량 지원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선택 가운데 다만 작은 몇가지라도 일정기간 동결하는 방안은 가능하다고 본다. 5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현 정부가 아무리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다고 해도 큰 덩어리의 대북지원을 할 수는 없으며,또 하지 않는 것이 순리다.그런 의미에서 대북포용정책의 기본틀은 유지하되 서해 사태에따른 불쾌감의 표현으로 일부 지원은 내년 2월 정권교체기까지 유보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을 민주당 클린턴 전 행정부 시절 적극적으로 마무리했다면 지금처럼 공화당의 부시 행정부와 피곤한 씨름을 하지 않아도 됐을것이다. 북한은 현 정부가 그래도 햇볕정책의 큰 줄기를 유지하고 있을 때 남한에 성의를 보이는 것이 조금이라도 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북한은 고집과 ‘벼랑 끝 버티기’전술이 가져온 득실을 이제는 따져볼 때가 왔다.김 위원장이 정말 ‘통 큰 정치’를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진면목을 보일 때가 아닌가 한다. 이경형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병형 前합참본부장이 회고하는 秘史/ 北 73년 “NLL 불인정”…해상 무력시위

    지난 6월29일 발생한 서해교전은 북방한계선(NLL)으로 빚어졌다.북한은 지난73년 ‘NLL은 무효이며 서해5도 지역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은 북한당국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처음 주장,NLL논쟁의 불을 지폈다.이때부터 20년동안 NLL을 둘러싼 남북간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73년 당시 이병형 합참본부장을 만나 NLL과 관련된 비화를 들어봤다. 1973년 11월초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장 바로 옆 작전회의실에는 예정에 없던 긴급 비상회의가 소집됐다. 한신(韓信·육사2기·작고) 합참의장을 비롯,이병형(李秉衡·76·육사4기)합참본부장,그리고 배옥광(裵玉洸·74·해사4기) 작전국차장 등 합참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 북한의 일방적 북방한계선(NLL) 파기선언에 따른 대응책을 긴밀히 논의했다. 이보다 1시간 전.평양방송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내용을 전격 발표하면서 우리 군당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서해5도가 북한군 통제하의 해역에 있으므로 앞으로 우리 영해에 있는 5개도서 출입시 사전 승인과 임검을 마땅히 받아야 하며,위반시에는 응당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남조선 당국에 엄중히 알린다….” 53년 정전협정 이후 그동안 묵시적으로 인정해왔던 북한이 서해상의 군사분계선이나 다름없는 NLL은 무효이며,앞으로는 자신들이 주장한 새로운 해상분계선에 의해 서해질서가 재편돼야 한다는 실로 엄청난 내용이었다. “당시 평양방송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하나는 NLL을 파기하자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한강하구에서 서해상으로 향하는 일직선이 새로운 분계선이라는 것이었지요.이는 휴전 이후 잠잠했던 서해바다에 전쟁선포를 하는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이병형 전 본부장은 당시 상황을 ‘서해사태’라고 줄곧 표현했다. 이날 비상회의를 끝낸 이 본부장은 곧바로 유재흥(劉載興) 국방장관에게 올라갔다. “장관님,저들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서해5도를 당장 요새화해야 합니다.저들의 속셈은 서해5도를 고립화시켜 결국에는 자기네 영토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맞아,나도 그렇게 생각하네.어쩌면 좋겠나.” “제가 지금 당장 서해5도를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73년 11월27일 배옥광 합참작전국차장과 김영찬(金泳燦·74·육사5기)국방부동원국장 등과 함께 해군의 고속수송함(APD) 2300t급 ‘81함’을 타고 백령도,대청도,연평도 등 서해5도 순시에 나섰다. 아,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전혀 예상치 못한 위급 상황이 벌어졌다.이 본부장 일행을 태운 APD함이 연평도에 잠시 들른 뒤 이날 저녁 백령도로 막 향하는 순간이었다.연평도 서쪽 약 6마일 해상쯤이었다. APD 함상 곳곳에 설치된 비상벨이 갑자기 울리더니 “전원 전투배치부터.”라는 함장(정현경 대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계속 하달됐다. 저녁식사 후 함장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이 본부장도 깜짝 놀라 일어났다.이때 함장이 뛰어들어왔다. “본부장님,위급상황이 벌어졌습니다.CIC룸(레이더실)으로 지금 빨리 가줘야 하겠습니다.” “함장,도대체 무슨 일인가?” “적함 출현입니다.포문을 우리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본부장은 함장의 안내로 서둘러 레이더실로 올라갔다.동행했던 배 제독과 김 장군 등 합참 고위장성 10여명도 이미 도착해 전방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레이더 화면에는 NLL을 표시하는 선이 가운데에 그어져 있고 그옆에 APD함의 예정항로가 표시돼 있었다.그런데 APD함 예정항로 양쪽 옆에적 함정 6척씩,모두 12척의 북한 군함이 배치돼 있었다. “틀림없는 북한 군함들인가?” “예 그렇습니다,본부장님.” 아니 이럴 수가.저들이 어떻게 알고….위기일발이었다.북한군 함정이 이미 우리측 영해로 깊숙이 내려와 있는 데다 이 본부장 등 합참의 수뇌부들이 승선한 APD함을 완전히 포위한 것이 아닌가. “함장,이런 경우가 있었나?” “아닙니다.처음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일단 인천쪽으로 항로를 돌린 뒤 백령도로 돌아가는 우회항로를 택하겠습니다.” “알았네.함장인 자네 의견에 따르겠네.” 이 본부장은 다시 함장실로 돌아왔다.제발 무슨 일이 없어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으로 몸을 뒤척이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얼마쯤 지났을까.다시 비상벨소리가 들리고 “전원 전투배치부터.”라는 함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시계를 보니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함장이 또다시 헐레벌떡 달려왔다. “본부장님,백령도 항구 앞쪽에 적함 두 척이 나타났습니다.” 우회항로를 통해 연평도 해상의 적함 12척은 따돌렸지만 백령도에 가까워지자 다시 새로운 적함들과 조우했다는 것이었다. 이 본부장은 다시 레이더실로 올라가 상황을 주시했다.함장의 말대로 북한군함 2척이 항로를 가로막고 있었다.불과 1마일도 안된 해상에서 기동시위를 벌이며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함장,비상조치는?” “우선,우리 구축함 1척을 백령도 근처에 출동시켰습니다.” “어떻게 할 셈인가?” “저들의 함포가 우리쪽으로 향해 있습니다.이대로 가면 전쟁으로 이어질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비상용 항구가 있습니다.지금 저들이 가로막고 있는 항구는 용기포항입니다.남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장촌부두가 있습니다.함선을 남쪽으로 향하는 척하다가 장촌 부두쪽으로 돌리겠습니다.” 이 본부장은 함장의 조치내용을 옆에서 들으며 가만히 밖을 응시했다.뇌리에 번개 같이 뭔가 스쳤다.‘세상에 이게 웬일인가.저들이 NLL파기선언을 일방적으로 하더니 이제 와서 우리를 어쩔 셈인가.납치?전쟁? 우리 일행의 서해5도 방문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나중에 밝혀진 일이었지만 이 본부장일행이 서해5도 지역을 방문할 때 관련 도서부대에 암호화하지 않은 평문으로 무전을 타전,북한 군당국에 도청당했다.) 잠시 후 새벽이 밝아오면서 어슴프레 함교 좌측 전방쪽에 큰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한국군 구축함 91함(충무함)이었다. 당시 해군 관계자에 따르면 “APD함의 비상 지원요청을 받고 공해상에 있던 구축함 한 척을 급파했다.”고 말했다. 당시 APD함에 동승했던 배옥광(전 동서울컨트리클럽사장) 제독은 “세월이 지나 생각은 잘 나지 않지만 북한 경비정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우리 측 구축함도 출동,서로 교전 상황까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전도봉(全道奉) 전 해병대사령관은 당시 백령도 해병부대 정보정찰 장교로 근무중이었다.그는 마침 이날 새벽 백령도 관측소(OP)에서 북한군 경비정이 우리측 APD함을 가로막고 시위기동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하고 있었다.이와 관련,전 전 사령관의 회고. “그날 새벽녘에 81함이 잠시 시야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대신 북한군 고속정 4∼5척이 갑자기 나타나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백령도 앞바다를 고속 선회 항해했다.당시 백령도와 대청도 일대에는 즉각 비상이 걸렸으며 백령도에 설치된 각종 포문도 모두 열렸다.” 결국 APD함은 이날 아침 우회항로를 통해 장춘항에 도착했다.백령부대장 김치현(사망·해군간부 8기) 대령이 이 본부장 일행을 맞이했다. “본부장님,휴전 이후 이곳에 첫 공습경보가 내려져 있습니다.” “부대장,그게 무슨 말이오?” “적기 4∼5대가 백령도 상공에 출현했습니다.1,2초 간격으로 선회비행하다가 돌아가곤 합니다.” 해상의 적들을 피해 겨우 왔는데 이번에는 공중에서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이 본부장은 레이더기지에 직접 가서 이를 확인했다.부대장의 말대로 백령도 상공 고공에 적기 3대가 떠 있었다.결국 우리측 공군기의 추가 발진으로 적기들이 돌아가면서 상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와 관련,해군 기록에 보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술하고있다. “73년 11월27일부터 29일까지 이병형 합참본부장외 장성 10명이 서해 도서지역을 시찰하다가 북한 경비정 수척과 조우했다.81함은 2130t이며 정현경(전 해군참모차장) 대령이 함장이었다.81함은 2000년 12월 패함됐다….” 서울로 돌아온 이병형 본부장은 이튿날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임시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했다.이 자리에서 이 본부장은 서해5도의 요새화 필요성을 강조했다.그러자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만약 서해5도가 요새화한다는 것이 저들에게 알려지면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논리로 반대하고 나섰다.결국 장시간 회의 끝에 이 본부장의 주장대로 서해5도의 요새화 계획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로 하고 일단락지었다. 이튿날 박 대통령은 이 본부장과 마주한 자리에서 ‘서해5도의 요새화는 NLL을 굳건히 유지시키는 것과 다름 아니다.’는 요지의 보고를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경제기획원장관을 불러 예산 40억원을 즉시 지원해주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탄생된 것이 ‘81프로젝트’였다.81함에서 입안됐다고 해서 이렇게 명명됐다.그런데 이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주한미군측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 본부장이 청와대에 다녀온 몇 시간 뒤 주한미군사령부 참모장이 찾아와“백령도를 굳이 요새화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이에 이 본부장은 “만약에 러시아가 하와이를 위협하면 가만히 있겠느냐.”는 논리로 맞섰다. 이 무렵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서해의 NLL을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해 5개도서는 북한의 영토”라고 주장하곤 했다.그러던 차에 북한 군부는 한국군 고위 장성인 합참본부장 일행의 백령도 방문 사실을 미리 알고 기습적으로 고속정을 발진시켜 서해 5도가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김문기자 km@
  • 서해교전/조명철 前김일성大 교수 “北해군 위상회복 노린듯 정권차원 도발 이유 부족””

    김일성대 교수 출신 탈북인사 조명철(趙明哲)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29일 “북한의 서해도발은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준비된 것으로 봐야한다.”며 “정부는 단호한 자세로 안보가 남북교류나 경협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북에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긴급 인터뷰를 통해 이번 사건에 담긴 북측의 의도와 우리의 대응방안을 알아본다. -이번 사건의 성격은. 이번 사건을 이해하려면 지난 99년 서해교전을 살펴봐야 한다.당시 북측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한(恨)이 컸었다는 얘기가 된다.그동안 군사적 위상을 되찾고 싶은 욕구가 강했고,이것이 하나의 동기가 될 수 있다.즉,3년 전 서해교전에서 당한 패배에 대한 보복성 도발의 측면이 있다. 북한 해군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서해교전 패배는 북한 군부 내부적으로 해군의 위상저하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엄청난 문책과 함께 해군 내 고위급 인사들간의 경쟁도 치열했을 것이다.해군의 기강 재확립 같은 사업도 있었을 것이다.이에 따라 그동안 북한 해군은 대단히 긴장돼 있었고,기회가 닥쳤을 때 순식간에 대응하는 준비태세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잃어버린 지위를 되찾기 위해 기회와 시기를 노리며 부심했을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교전은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북한이 기다려왔던 사건으로 봐야 한다.국가적 차원이나 전군 차원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은 현재의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 등과 연결되지 않는다. -북한이 어떻게 나올 것으로 보나. 북한은 예상대로 평양방송 등을 통해 “자위적 조치”라고 주장했다.앞으로 북한 당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중요한데,당장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북한도 군 내부적으로 사건조사가 있을 것이고,시간이 걸릴 것이다.다만 해군이 중앙에 ‘우리는 정당했다.’는 식으로 보고할 가능성이 높다.이번에는 한국군의 피해도 컸으므로 중앙당국은 칭찬하면 했지,문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보면 북·미 관계나 남북 관계,아리랑축전 등이 맞물려있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유감표명을 하는 수순을 밟을 듯하다.하지만 유감표명도 사과의 뜻을 강조하는것이 아니라 자신만만한 자세로 사건 자체에 유감을 나타내는 식이 될 공산이 크다. -정부의 대응은. 우선 북측에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일각에서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이는 전쟁을 불사하자는 것일 뿐 이니라 당장은 보복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이번 기회에 군사당국자회담을 통해 제도적으로 재발을 방지할 장치를 마련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 정부는 대북정책의 원칙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이를 북한에 강력히 전달해야 한다.즉,남북 교류도 중요하고 남북 경협도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안전보장이 선행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북한에 짚어줄 필요가 있다.단순히 구두경고를 끝내기보다는 북한 내 남한 기업인들을 일시적으로나마 모두 철수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진경호기자 jade@
  • 6·25참전 소년지원병 회고

    ‘어머니 지금 내 곁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1950년 8월 한국전쟁 중 경북 포항전투에서 숨진 소년지원병의 일기 내용이다.일기장에는 전쟁이 빨리 끝나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적혀 있다.그러나 동족끼리 겨눈 총부리는 소년의 간절한 소망을 비정하게 뿌리쳤다.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2년.당시 17세 이하의 어린 나이로 참전했던 노병들이 고희를 바라보면서 다시 모였다.이들은 국군이 인민군에 밀려 내려와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던 50년 7월과 8월 징병대상이 아닌데도 자원해 정규군에 입대했다. 내 나라를 붉은 군화로부터 지키겠다는 생각 하나로 펜 대신 총을 들었던 것이다.군복 없이 학생복과 학생모자 차림으로 훈련 한번 제대로 받지 않고 카빈총을 끌면서 전선에 나갔다.지난 96년 결성된 ‘6·25 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회장 朴泰承·69)가 그동안 각종 전사(戰史)기록 등을 통해 찾아낸 참전 소년지원병은 3000여명. 중학교 2학년인 15세때 입대했던 안봉근(安奉根·67·참전소년지원병 전우회 사무총장)씨는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친구 12명과 함께 전선으로 달려갔다.”고 말했다.일부 소년지원병들은 ‘나이가 어려서 안된다.’는 만류에 나이를 속이기까지 했다고 전했다.이들의 전과도 만만찮았다.임일재(任一宰·67)씨는 특공대 10명과 함께 함경도 청천강변을 수색하다 김일성 차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인민군 3800여명을 사살하고 309명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전과를 올린 50년 9월 초순의 경북 영천전투에도 상당수 소년지원병들이 활약했다. 글·사진 칠곡 한찬규기자 cghan@
  • 부모 성묘차 방북하는 조류학자 원병오박사

    조류학자인 원병오(73·경희대 명예교수)박사가 한국전쟁 때 헤어진 부모 묘소를참배하기 위해 방북길에 올랐다.그는 베이징을 거쳐 22일부터 고향인 개성 방문에이어 평양 애국열사릉의 부모님 묘소를 찾는 등 새달 6일까지 북한에 머물 예정이다.원 박사의 선친은 김일성대학 교수로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한 세계적인 조류학자인 원홍구 박사. 원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둘째형과 함께 북한에 남은 부모와 생이별했고 1965년 우연히 아버지 소식을 접하게 됐다.철새의 이동경로를 연구중이던 원박사는 당시 일본 도쿄의 국제조류보호연맹 아시아지역본부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엔 북한의 저명한 조류학자 원홍구박사가 우연히 철새인 북방쇠찌르레기 다리에서 일련번호(C7655)가 새겨진 알루미늄 링을 발견했는데 발신지를 알고 싶다는내용이 담겨 있었다. 북한의 아버지는 국제조류보호연맹을 통해 아들이 2년전 서울에서 북방쇠찌르레기를 날려보낸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원박사는 부자 상봉의 날만 손꼽아 기다렸으나 아버지가1970년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3년뒤 눈을 감았다. 원 박사의 이번 방북은 지난 4월말 독일의회대표단의 방북 과정에서 통역을 담당한 한국외대 독일어과 홀머브로흘로스 교수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게 그의 편지를 전달해 성사됐다.부모묘소 참배와 남북한 학술교류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히자 북측은 지난달 17일 북한동물학회 명의로 초청장을 보내왔다.원박사는 “북한의 대학에서도 강의하고 남북 학술교류에 기여하고 싶다.”며 “새들처럼 자유롭게 왕래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김정일, 박 前대통령 묘소참배 희망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서울 답방이 이뤄지면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고 싶다고 언급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한국미래연합 대표인 박근혜(朴槿惠) 의원은 지난달 중순 평양 방문 때 김 국방위원장이 “적절한 시기에 답방 의사가 있다.”면서 “서울에 가면 박 대통령 묘소도 참배하고 싶고,그 게 예의라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2일 밝혔다.박 대표는 “그러나 김 위원장은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싶다는 의미로 이러한 말을 하지는않았다.”고 전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박 의원이 방북 당시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지 않은 점을 김 위원장이 간접 지적하면서 ‘광폭정치' 차원에서 답방때 박 대통령 묘소 참배문제를 언급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진경호기자 jade@
  • 연합제·낮은단계 연방제 무엇이 다른가

    ‘6·15 남북공동선언’ 제 2항인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대목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남측의 연합제는 남과 북이 단일통일국가로 가는 중간단계에서 현재의 2국가 2체제,2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반면 북측의 연방제(고려연방제)는 남북에 2개의 제도와 2개의 정부를 유지하되 군사권과 외교권을 갖는 연방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다.북한이 이 고려연방제를 수정해제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현재처럼 남과 북이 두제도,두 정부를 갖고,군사권과 외교권도 남북이 각각 갖는 방안이다.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은 지난 91년 북한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처음으로 거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관해서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엇갈리는 편이다.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북한이 그동안 주장해온 1국가2체제의 고려연방제에 토대를 둔 변종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전문가들은 남북한의 다른 체제를 그대로 두고 하나의 연방정부를 만들어 모든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다만 북측이 ‘북과 남에 존재하는 2개의 정부가 정치 군사 외교권 등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갖게 하고,그위에 민족통일기구를 내오는 방법’이라고 해석하고 있기때문에 이 안이 실제로는 우리의 연합제 쪽에 접근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곽태헌기자 tiger@
  • 박근혜의원 방북기/ “김위원장 남한 정치흐름 훤히 알아”

    박근혜(朴槿惠) 의원의 최근 방북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딸과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의 아들인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만남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화제를불러일으킨 바 있다.연합뉴스가 박근혜 의원의 구술을 정리한 ‘방북기’를 간추려 싣는다. 지난 10일 오후 인천공항을 출발,숙소인 베이징(北京) 캠핀스키 호텔에서 하룻밤을 잤다.다음날 오전 11시30분에 떠나는 고려항공기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를 하는데 일행중 한명이 부랴부랴 찾아와 비행기편을 바꿔야겠다고 말했다.약간 흥분한 듯했다. 그는 “북측으로부터 김정일 위원장이 전용기를 보낼 테니타고 오라는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북측이 이번 방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구나,각별한 대우를 하는구나.’ 하는생각이 들었다. 베이징 공항에서 전용기를 타고 오전 11시50분에 출발했다.순안공항에는 북한 민족화해협의회 김영대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영접을 나왔다.북측 취재단도 많이 나왔다.간단한환영행사를 마치고 백화원초대소로 가니 김용순 노동당 중앙위 비서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김 비서는 방을 안내하며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머문 곳”이라고 설명했다. 방북 이틀째인 12일 아침식사 뒤 김용순 비서와 한 시간 정도 만나 남북문제와 유럽·코리아 재단 일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기탄없이 할 말을 다했다.김 비서는 금강산댐 문제에대해 섭섭함을 털어놨다.“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문제도 아니고 북남회담이 임박해 있는데,회담장에서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느냐.군인들이 힘들게 만든 자랑스러운 댐인데 남조선이 부실 덩어리라고 막 나갔다.일부러 그렇게 한 것 아니냐.북남회담이 열렸으면 공동으로 임진강 조사를 하자고 하려 했는데 이마저도 안됐다.”는 취지였다.나는 “섭섭하다고 해서 남북회담까지 안하면 어떻게 하느냐.회담 약속을 했으면 지켰어야 했던 것 아니냐.남북한이 사소한 것이라도 약속을 지켜야 신뢰를 쌓아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김 위원장과의 면담 일정은 이날 점심식사 뒤 전해들었다.가슴이 뛰긴 했어도 그렇게 긴장되지는않았다.북측 안내원이 김 위원장이 저녁 7시에 숙소를 찾아온다면서 구체적인면담 일정을 알려줬다.김 위원장은 가식없이 얘기했고,나도솔직하게 얘기했다.첫 만남이라고 하지만 (선친들간에) 과거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은 우리 정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정치인의 지지도 변화 등에 대해 내가 말할 필요없이 잘 알고 있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답방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적절한 시기에 하겠다.”고 했다..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김 위원장은 ‘1·21사태’에 대해 사과했다.순간 진지하고엄숙한 태도를 보였다.만찬 때는 김 위원장이 김용순 비서등에게 면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개성을 들러 판문점으로 귀환할 때 ‘남북이 이렇게 가까운데 먼 길을 둘러서 오가고 있구나.’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3박4일의 북한 방문기간 가슴이 찡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의 현실이 서글펐다.남북한이 같이 잘사는 날이 오길 손꼽아 기대해 본다. 정리 전영우기자
  • 노무현후보 관훈토론/ 남북·경제분야 짙어진 보수색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14일 관훈토론회에서 대북문제에 있어서는 포용,대미관계는 균형,경제분야에서는 원칙을 강조했다.전체적으로 기존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일부 사안에 있어서는 좀더 보수화한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대북문제에 있어 노 후보는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바탕으로 대화와 인내의 원칙을 견지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북한이 흡수통일이나 정권붕괴의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북한의 면전에서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기도 했다.특히 “6·25도 김일성 입장에서는 통일시도”라고 과거 DJ의 발언에 동조하면서 “자꾸 그런 (어휘상의) 문제로 나를 사상검증하려 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 후보는 그러면서도 보수층을 의식한 듯,북한의 대남적화통일 방침은 절대 용납할 수 없고 북과의 대화도 확고한 안보의 토대 위에서 해나갈 것이란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국가보안법 폐지와 관련해서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폐지’보다는 ‘대체입법’이다.”고 말해유화적 표현을찾느라 애쓰는 모습이었다.주한미군에 대해서는 “통일 후에도 ‘조건없이’ 주둔해야 한다.”며 한층 명확히 답했다. 대미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사진 찍기용으로는 미국에 가지 않겠다.”는 ‘자존심’을 과시했다.노 후보는특히 미국 부시 행정부에 대해 “클린턴이 예쁘다거나,(미 공화당의)밥 돌이 밉다고 외교적으로는 그대로 말할 순없지 않느냐.”며 우회적으로 부정적 입장을 갖고 있음을강조했다. 경제분야에서 시장이 자율적으로 작동할 때까지는 재벌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을 그대로 두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경제분야에서 관치의 냄새를 걷어내되,‘무중력공간’에서 대기업이 전횡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겠다는 뜻이어서 반(反)재벌적 사고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노 후보는 그러나 “복지증진을 목표로 하더라도,성장에부담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하겠다.”고 강조,보수층의우려를 의식하는 모습이었다. 김상연기자 carlos@
  • 北 ‘박근혜 환대’의 계산/ 광폭정치 선전 극대화

    정부 당국자와 전문가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박근혜의원을 환대하고 현안에 대한 여러 언질을 한 것에 대해깊은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우선 이념적으로 보수 성향이 뚜렷한 박 의원을 김 위원장이 직접 면담,‘통일에 도움이 된다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인덕정치·광폭정치’를 안팎에 선전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북한은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방북한박 의원을 시종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 겸 국회의원’으로 불렀다.지난 7일에는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박 의원의 방북 사실을 사전에 보도,눈길을 끌었다. 경추위 무산으로 따가운 눈길을 받고 있는 때에 박 의원의 방북을 자세히 소개,자신들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음을 국제적으로 과시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은 박 의원 일행이 지난 12일 김용순(金容淳) 노동당 중앙위 비서 등과 회담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자세히 보도했다.지난 13일에는 이례적으로자정에 방송을 통해 박의원의 김 위원장 면담 사실을 전했다.북한의 정규 방송은 보통 밤 11시에 끝난다.김 위원장은 백화원초대소로 박의원을 찾아가 1시간 정도 단독 면담한 뒤 2시간여 동안만찬까지 함께했다. 이와 함께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한나라당과 이회창(李會昌) 대선후보를 견제하는 효과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김 위원장은 박 의원 일행이 판문점을 통해 편히 귀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판문점을 통한 귀환은 고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임동원(林東源) 특사 등 김 위원장을 만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다. 세종연구소 이종석(李鍾奭) 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남한의 보수층을 대변하는 박 의원을 직접 만나 남쪽에 유연성을 과시하는 ‘박근혜 효과’를 노렸다는 인상도 지울수 없다.”고 분석했다. 한편 박 의원과의 면담은 김 위원장의 ‘개인적 관심’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김일성’ 주석의 아들인 김 위원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 의원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는 전언이다. 전영우기자
  • 카터 쿠바 방문, 공산혁명후 美대통령 최초

    지미 카터 전 대통령(77)이 12일(현지시간) 5박 6일간의 일정으로 쿠바를 찾았다.1959년 쿠바공산혁명 이후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첫번째 쿠바 방문이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혁명평의회 의장(75)의 초청에 따른 개인적 방문이지만 ‘국제 해결사’로 부각된 그의 위상 때문에 이번 방문이 두 나라 관계개선에 가교 역할을 할 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북한의 핵 위기로한반도에 전운이 감돌 때에도 평양을 찾아 남북 정상회담을주선했다.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회담은 무산됐으나 이후남북 및 북미 관계 증진에 초석을 마련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하바나 대학에서 쿠바 국민을 상대로 TV중계되는 연설을 하고 인권·종교단체 및 반체제 지도자들과도 만날 예정이다.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mip@
  • [씨줄날줄] 박근혜와 김정일

    박근혜(朴槿惠) 의원이 11일부터 14일까지 북한을 방문한다.드러난 방북 목적은 지극히 사무적이다.재단법인 주한(駐韓)유럽연합상공회의소·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 관계자와 만나 남북간 상호협력 및 교류 문제를 협의한다고 했다.지난해 5월 유럽 24개국 주한 외교관과 상공인 등 600여명으로 구성된 재단법인이 북한 어린이에게 축구공 3만개를 보내는 등 민간 차원의 지원 활동이 인연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박 의원의 북한 방문은 예사롭지 않다.사흘이나 북한에 머물다 보면 십중팔구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만날 것이다.두 사람의 하고픈 얘기로 말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말머리는 아버지 시대로 올라 갈 것이다.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남북은 본격적인 대결 시대를맞는다.1917년생 박 대통령이나 1912년생의 김일성이 모두50세 전후로 나름대로 지도력을 발휘하던 시절이었다.박 대통령은 강인한 의지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며 부국강병 경쟁에서 김일성 주석을 압도했다. 세상 일이 선의의경쟁에서 지면 폭력을 쓰게 되나 보다.박 의원이 22살이던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어머니를잃는 쓰라림을 맞는다.북한의 사주를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이 육영수(陸英修) 여사를 저격하는 테러를 자행했다.박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육 여사였고 보면 박 의원의 슬픔은 원한으로 응어리질만도 했을 것이다.박 대통령의 장녀였던 박 의원은 많지 않은 나이에 어머니의 빈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자신을 돌볼겨를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박 의원은 독자적으로 정당을 하나 창당할 만큼 무게있는 정치인이 되었다.두 사람은 아버지들이 치열한 부국강병 경쟁을 벌이던 그 나이가 되었다.박 의원의 정치적 영향력을 조금 부풀린다면 두 사람의 역할도 엇비슷한처지다.박 의원은 어머니가 끔찍한 불행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평범한 가정 주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두사람이 마주할 첫 장면이 궁금해진다.그리고 두 사람의 과거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무슨 말을 이어갔는지 나중에도 알았으면 좋겠다.꼬박꼬박 계산서를 주고 받을 수만도 없는민족 분단사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든다.박 의원 다짐대로 두 사람의 만남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구름판이 되기를기대해 본다. [정인학 논설위원 chung@
  • 어린이날 맞는 탈북아동들/ “”남쪽 땅 낯설기만…따뜻하게 봐줬으면””

    “두부 한 모를 놓고 ‘생일잔치’를 했던 기억이 가장 먼저 나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인민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남한에 온민수(14)에게 남한 땅은 낯설기만 하다.부모를 잃고 2000년3월 친구들과 먹을 것을 구하러 두만강을 건넜던 민수는 중국 용정에서 ‘꽃제비’ 생활을 했다. 북한에서 가족과 함께 삼엄한 국경 경비를 뚫고 중국으로건너가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어렵게 남한에 온 소영(10·여)이는 “조선에서는 돼지죽도 없어서 못 먹었다.”는 말부터 꺼냈다. 몇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탈북 어린이들에게 한국은 좋기는 하지만 아직도 적응하기 힘든 곳이다. 민수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남한에 온 수혁(10)이 역시 남한에서 두번째 어린이날을 맞지만 특별한 느낌은 없다.지난해에는 그림그리기 대회에 가고 학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도 했는데도 수혁이는 “5월5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겠다.”고고개를 갸우뚱했다. 북한에도 어린이날과 비슷한 날이 있다.6월1일 아동절에는탁아소나 유치원에서는 한상 가득 음식을 차려준다.김일성장군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가계(家系)를 암송하는 ‘사상경연대회’를 열기도 한다.6월6일은 소년절.인민학교에 다니는 7∼13살의 소년단 어린이들이 학교별로 체육경기를 하며즐긴다.북한에서는 기념일이나 명절에도 아이들을 위해 음식과 행사를 마련한다. 탈북 어린이들에겐 이조차 ‘사치’에 속했다.어릴 때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 어린이들은 대부분 ‘먹고 사는 게 급해’ 학교는 구경도 못해봤고 어린이날은 더욱 더 모른다. 탈북자 지원 시설인 하나원 내 방과후 학교인 하나둘학교에서 1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친 마석훈교사는 “탈북한 아이들은 항상 위축돼 있고 예민하다.”고 말했다. 남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행여나 탈북했다는 게 알려질까봐 학교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마 교사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들이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마 교사는 “원하는 것을 안 주면욕을 해대고 돈이라도 쥐어주면 ‘천국 가십시오.’하며 굽신거린다.”고 걱정했다. 1인당 정착비 3700만원과 임대아파트도 아이들이 느끼는 위축감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5개월만에 돈을 다 쓴 아이도있고 컴퓨터 게임 등에 빠진 아이들도 허다하다. 탈북 어린이들은 “남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같은 민족으로봐주지 않고 무시할 때 가장 속이 상한다.”고 털어놓았다. 마 교사와 어린이들은 이번 어린이날에 한 단체가 주최하는 북한어린이 돕기 행사에 참가할 생각이다. “같이 사는 게 통일 아니겠어요.그냥 따뜻하게만 봐 주세요.” 어린이날을 맞는 탈북 어린이들의 소박한 소망이다. 구혜영기자 koohy@
  • 금강산 2차상봉/ 화제의 만남

    ■북쪽 형 만난 김민하 평통 수석부의장 “어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형을 찾았어.” 상봉 이틀째인 2일 금강산여관에서 북쪽의 형 성하(成河·77·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씨를 다시 만난 김민하(金玟河·69)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 형제 자매들은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와 형제들의 근황,경북 상주의 고향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했다. 김 수석부의장의 모친 박명란(朴命蘭)씨는 이산가족 방문단 북측 후보자 생사·주소확인 때 성하씨가 포함돼 있어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지난해 4월24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부의장이 지난해 3월 병원에 누워있던 어머니에게 성하씨가 보내온 편지를 읽어주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자 성하씨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훔쳤다.북에 있는 형제들의 얘기를 나누던 중 김 부의장이 “북에 있는 창하(71)형이중학교 시절 써놓은 시 100편이 담긴 빛바랜 공책과 즐겨불던 퉁소를 가져왔다.”며 꺼내자 성하씨는 “문학적 재질이 있었지….내가 전해주마.”라고 답했다. 김부의장은 결혼예물로 받은 시계를 풀어 형에게 건네며“이거 내가 분신처럼 아끼는 것인데….형이 남쪽의 형제들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 보세요.”라며 말꼬리를 흐렸다.성하씨는 “고맙다.잘 간직하겠다.”면서 “우리 다시 만날때를 기다리자.”고 말했다. ■남측 아내 만난 기자출신 김강현씨 “이 반지 우리 아내 줘야지.” “안돼요.당신이 끼어야해요.” 신문기자 출신으로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에 김구,여운형 선생 등과 함께 ‘남조선 청년대표’로 참석했다가 그대로 눌러 앉은 김강현(76)씨와 50여년간수절해 온 남측 아내 안정순(74)씨는 2일 오전 금강산여관에서 가진 개별상봉에서 동생 김영순(68)씨가 건네준 다섯돈짜리 금반지를 놓고 잠시 사랑싸움을 벌였다. 칠순을 바라보는 동생 영순씨는 이날 “어렸을 때 처럼 오빠 무릎에 한번 앉아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고 어리광을 부리며 오빠의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워주었다.그러자김씨는 반지를 빼더니 “이건 우리 아내에게 줘야지.”라며 안씨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아내 안씨는 “정말 보고 싶었어요.한번이라도 만나려고 기도 많이 했어요.살아줘서 고마워요.”라며 남편에게 반세기 넘게 간직해온 애틋한 심정을 전했다.이에 김씨는 “우리는 아직 애인 같잖아.”하며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김씨는 또 헤어질 당시 4살이던아들 재성(55)씨에게 “어제는 너를 몰라보고 ‘저 놈이 누군인가’하고 한참 생각한 뒤에야 넌 줄 알았다.”며 자상하게 손을 잡았다. 안씨는 결혼한 지 5년째 되던 23살때 두살 연상의 남편과헤어졌다.아침을 먹고 나간 뒤 소식이 끊긴 것.지난해 남북간 서신을 통해 김씨가 북에서 재혼해 딸 넷을 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리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김씨가 “북조선에 온 뒤에도 황북일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해 상장과 훈장도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자 아들 재성씨는 “어린 나이에 헤어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나 어머니가 한평생을 힘겹게 살아오셨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고 말하며조금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들 만난 北 배우출신 이의필씨 “서울서 떠날 때 네 어머니에게 셋방 하나 똑똑히 알선해 주지 못하고 왔는데 가슴이 아프다.” 연극배우 출신 이의필(80)씨는 2일 반세기 만에 재회한 아들 이선교(李善敎·55·서울 도봉구 쌍문동)씨와 며느리 임옥자(林玉子·51)씨의 손을 꼭 잡았다.아들 선교씨가 “밤새 잘 주무셨느냐.”고 인사하자 이씨는 이번에 몸이 불편해 오지 못했다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연신 “가슴이 아프다.”는 말만 되뇌였다.이씨는 그러나 “북쪽에서 새로 배우자를 만나서 아들을 하나 밖에 못 얻었지만 잘키워서 지금은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화제를 돌렸다. 이때 손녀 이윤주(李允珠·28·충북 청주)씨가 나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어쩜 이렇게 꼭 닮으실 수가 있어요.”라며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아들 선교씨가 어릴때 찍은 사진 등을 꺼내 보이며 “4살때인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아버님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고 말하자 이씨는 “내가연극 무대에 오르면 네 엄마가 너를 안고 와서 연극을보곤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서울 서대문 영천동에서 살면서 9·28 서울수복 직전 극단배우로 일하다 북으로 갔다.이씨의 아내 김원순(76)씨는 지난해 10월부터 골반에 이상이 생겨 전혀 걷지를 못하는 상태다.선교씨는 “어머니께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인사하자 계속 울기만 했다.”고 소식을 전하자 이씨는 숙인 고개만을 끄덕였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 금강산 2차상봉/ 난생 처음 불러본 “아버지”

    1일 금강산에서 또 한차례의 혈육 상봉이 이뤄졌다. 제4차 이산가족 상봉 두번째 행사에 참가한 남측 가족 466명은 이날 저녁 금강산 온정각 휴게소에서 북측 가족 100명과 만났다.반세기만에 남편과 아내,자식,형제 등을 만난 남북의 가족들은 4시간여 동안 단체상봉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가족·친지의 안부를 물으며 지난 세월 서로가 헤어져 겪어야 했던 이산의 아픔을 위로했다. 남측 가족들은 2일 북측 가족과 개별상봉,공동 중식,삼일포참관상봉 등 세차례 만난 뒤 3일 오후 속초로 귀환한다. ◆아버지와 첫 대면한 4명의 ‘유복자’들 “아버지…” 오후 5시30분 시작된 단체상봉에서 북측 아버지 송수식(宋守植·81)씨를 만난 딸 정하(貞夏·51)씨는 난생 처음 본 아버지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만했다.송씨도 처음 만난 딸에게서 큰 절을 받으며 지난해 저세상 사람이 됐다는 아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연신 딸의 손과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날 송씨 부녀 외에도 이연윤(李淵潤·72)씨의 딸 의화(義華·52)씨,김두환(金斗煥·73)씨의 딸 외숙(52)씨,이은주(75)씨의 아들 익주(益周·51)씨 등 3명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나 애틋한 부녀·부자의 정을 나눴다. ◆아흔 셋 최고령 할머니 남측 가족 가운데 최고령인 안순영(93) 할머니는 둘째아들조경주(71)씨를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아들 넷,딸 넷 등 모두 8명의 자식 가운데 아들 셋을 먼저 여읜 안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아들인 경주씨의 손을 마주 잡았다.안 할머니는 “순하고,말도 잘 듣었던 아들을 만나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경주씨를 꼭 안았다.함께 간 딸 숙희(59)씨는 “어머니는 오빠가 인민군에 끌려간 뒤 50년 동안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밤 촛불을 켜고 돌아오기를 기도했다.”고 말했다. ◆설레는 10대 손자 남측 가족 가운데 가장 어린 박승한(13·휘문중 1년)군은말로만 들었던 할아버지(박문근·75)를 만났다.요즘 청소년답게 MP3 플레이어를 챙겨 설봉호에 오른 박군은 할머니(이덕순·74)와 아버지(박용원·50),어머니(김충희·48)가 할아버지와 나누는 감격의재회 장면을 열심히 비디오 카메라에담았다.박군은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면서 “나도 커서 할아버지와 같은 의사가 되겠다.”고 말했다.박군의 할아버지 박문근씨는 6·25전쟁 전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 의사였으며,할머니·아버지·어머니도 모두 의사다. ◆유명 인사들의 가족상봉 “니들이 내 동생이구나.” 김성하(金成河·77·전 김일성종합대 교수)씨는 상봉장에 들어서는 순간 민하(玟河·68)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비롯,윤하(71·전 축구협회장)·옥화(63·여)·옥려(61·여)씨를 감싸 안았다. 헤어질 때 초등학생이던 옥려씨가 오빠를 안고 오열했고,김 부의장은 “둘째아들 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던 어머니가 지난해 4월24일 돌아가셨다.”며 50여년간 보관해온형의 대구중 시절 교복입은 사진을 전했다. ●서울대 의대에 다니다 6·25전쟁 중 헤어진 누나 이명분(69)씨를 만난 대희씨(66·순천향병원 검진센터소장)는 누나의 단짝 친구였던 주양자(朱良子·71)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안부를 전했다.경북중·경북여고와 서울대 의대동창인 두사람은 고교시절 한조를 이뤄 정구 복식경기에 출전하기도했다.주 전 장관은 대희씨에게 특별히 안부를 부탁했다.이씨는 “아,그래 양자가 살아 있니.”라고 물으며 함께 사진을찍은 뒤 “양자에게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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