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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카터 특사/최광숙 논설위원

    “우리 후손들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지 않느냐?” 카드의 문구를 읽으면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총리의 마음은 흔들렸다. 캠프데이비드에서 머문 지 10일. 그들은 다음날이면 아무런 성과없이 이곳을 떠나야 했다. 미국에서 머문 마지막 밤에 전달된 카터 미 대통령의 카드 한 장은 서로 으르렁대던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였다. 중동에 긴장과 전운이 감돌던 1978년. 카터 대통령은 중동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이들을 대통령 별장으로 초대했던 것이다. 오직 자전거 두 대만이 놓여진 지루한 환경으로 이들을 내몰고, 카터 대통령은 결렬 직전의 중동평화협정을 이렇게 성사시켰다고 한다. 땅콩장수, 노벨평화상 수상자, 해비탯 운동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팔십 가까운 평생 동안 그는 대통령을 지낸 이로서는 드물게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열어 보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게 세상을 바꾸는 그의 스타일을 우린 일찌감치 캠프데이비드 평화회담의 카드 한 장에서 알아봤어야 했다. 날카로운 카리스마도 없이 오로지 ‘진심(眞心)’이 최고의 협상력이었고, 이런 사람을 움직이는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그는 이런 외교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 등에 실패하면서 무능한 대통령,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몰락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퇴임후 새롭게 부활한다. 조지아주의 작은 고향 마을의 땅콩 농장주로 되돌아 갔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편안한 노후를 마다하고 세계 평화의 전도사로 나선 것이다. ‘카터재단’을 만들어 인권보호와 질병·기아 퇴치 활동 등을 했고, 세계 분쟁지역 현장을 찾아 평화의 메신저로 뛰어다녔다. 자연 노벨평화상은 그의 몫이 됐다.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롯,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전 세계의 많은 퇴임 대통령들에게는 재단을 만들어 의미있는 활동을 하도록 ‘영감’을 줬다. 쉬지 않고 전세계에서 할일을 찾아 다니는 그가 어제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국인 곰즈의 석방을 위해 방북길에 올랐다. 제1차 북핵위기 당시인 1994년 미 대통령 특사로 방북한 데 이어 두번째 북한행이다. 그때 김일성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한 바 있기에 이번에도 그의 귀환 보따리에 관심이 쏠린다. 미국은 개인자격의 방북이라며 애써 의미 부여를 경계하지만 북·미대화 및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중재자의 역할을 할 것인지가 궁금해 진다. 그가 이번에 김정일을 만난다면 어떤 카드 한 장을 내밀까?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남북·북미관계 많은 변화 있을 것”

    “남북·북미관계 많은 변화 있을 것”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평소 한반도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 전문가다운 식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는 반드시 평화적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만큼 방북이 성사된 이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에 억류된 아이잘론 말리 곰즈를 석방키 위해 방북 길에 오르기까지 결정적인 중재자로 활약한 박한식 조지아대(UGA) 교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최대한 말을 아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북한을 50여 차례나 방문한 소문난 ‘북한통’. 카터 전 대통령이 조지아 주지사를 지내던 1970년대 초반부터 그와 인연을 맺어왔을 정도로 신뢰관계가 각별하다. 지난 1994년 6월 1차 북핵위기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을 때도 사전 정지작업을 맡았다. 그동안 남북 및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해 활약해온 박 교수는 한반도 정세가 천안함 사태로 대치국면으로 치닫자 6월 말 카터 전 대통령에게 한반도 평화를 위해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교수는 지난달 3일부터 8일까지 평양을 방문, 북한 측 인사들을 만나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문제를 협의하고 돌아왔다. 이후 북한 측은 뉴욕 유엔대표부 채널을 통해 카터 전 대통령을 초청하겠다는 뜻을 애틀랜타의 카터센터에 전달해 왔고, 카터센터는 백악관 및 국무부와 관련문제를 협의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박 교수는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3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모교인 애틀랜타의 모어하우스 대학이 주는 ‘간디, 킹, 이케다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카터 25일 방북 “곰즈 석방 협의”

    카터 25일 방북 “곰즈 석방 협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8개월째 북한에 억류돼 있는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30)의 석방을 협의하기 위해 25일 북한을 방문한다. AP통신과 CNN 등 미국 언론들은 23일 익명을 요구한 복수의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말을 인용, 카터 전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미국을 출발해 북한으로 향할 예정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AP통신은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하면 곰즈를 석방하겠다고 북한 당국이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익명의 미 행정부 고위당국자는 23일(현지시간) “카터 전 대통령이 내일(24일) 북한을 향해 출발할 예정이며 평양에서 1박하고 26일 곰즈와 함께 돌아올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AP 통신이 보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은 1994년 6월 1차 북핵위기 당시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한 뒤로 이번이 두 번째다. 미국 정부 관계자는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 정부 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방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행정부 당국자도 “이번 방북은 순수하게 곰즈 석방을 위한 사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임무에 국한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단에는 미 행정부 인사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천안함 사태 이후 남북한과 미국·중국 간 외교적 대치가 이어져 온 상황에서 전격 추진되는 방북이라는 점에서 천안함 정국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北김영남 “한·미 군사훈련 보복성전”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24일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핵전쟁 도발 기도’라고 비난하면서 “그에 대응한 초강경의 자위적 조치로 필요한 임의의 시기에 핵 억제력에 기초한 우리식의 보복성전을 개시해 침략자들을 무자비하게 격멸 소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보도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 영도’ 개시 50주년 경축 중앙보고대회 보고를 통해 “오늘 조선(한)반도에는 힘으로 우리 공화국을 압살하려는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의 무모한 침략전쟁 도발 책동으로 하여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최악의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면서 “우리 군대와 인민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역적 패당의 무분별한 핵전쟁 도발 책동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북한방송들은 전했다. ‘보복성전’ 주장은 북한 국방위원회가 지난달 24일, 동해상에서 진행된 한·미 연합훈련 등과 관련해 “필요한 임의의 시기에 핵억제력에 기초한 우리 식의 보복성전을 개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이날 평안남도 숙천군 쌍운리혁명사적지에서는 김영춘, 리영호, 김정각 등 군 고위 간부들과 북한군 군종, 병종 사령관 등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군 ‘육해공군 장병들의 결의모임’과 무도회가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밝혔다. 모임에서는 북한군이 “당과 수령을 맨 앞장에서 옹호 보위하며 백두의 혈통을 총대로 이어나감으로써 경애하는 최고사령관(김정일) 동지의 선군혁명 영도사를 김일성 민족의 국보로 천만년 길이 빛내어 나갈 것”을 다짐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김정은 새달초 국제무대 첫선 北 노동당대표자회의 나올 듯”

    다음달 초순 열리는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은이 국제 무대에 첫선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의 유동열 치안정책연구소 선임연구관의 발언을 인용, “이번 대표자 회의에서 김정은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을 경우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상태를 감안할 때 김정은은 이번에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중요 보직을 맡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북한의 노동당 대표자회의는 9월6∼8일 열릴 예정이나 아직 정확한 일정은 공개되지 않았다. 북한은 김 위원장이 김일성 전 주석의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1980년 제6차 대회 이후 당 대표자회의를 열지 않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북한문제 전문가인 루디거 프랭크 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의 말을 인용, 북한이 김정은 단일 지도체제보다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김정은을 포함한 집단 지도체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법원, 이적표현물 링크 게재도 “국가보안법 위반”

    인터넷에 다른 사람이 작성한 이적표현물을 링크해 게재하는 것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 이숙연 판사는 국가보안법위반(찬양·고무 등) 혐의로 기소된 이모(40)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보호관찰 1년을 선고했다고 16일 밝혔다. 재판부는 이씨의 법정 진술과 검찰의 신문 조서,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사용 내역 등이 담긴 검찰 수사 보고서 등을 증거로 채택해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씨가 초범으로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으며, 인터넷 활동 외에 집회나 시위에서 구체적인 행위를 하지 않은 점, 우리 사회의 성숙도에 비춰 이씨의 행위가 지니는 위험성이 현저히 크다고는 볼 수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이씨는 지난 3월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력사과학(2호)’ 등을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의 한 카페에 링크해 올리는 등 총 433건의 이적표현물을 게시·반포한 혐의로 기소됐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나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 쓴다”

    “나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 쓴다”

    “도시의 왕이 비틀거리면 사람들은 그가 허리를 숙였다고 말하지만, 그는 허리를 숙이고 죽입니다.” 16일 중앙대 아트센터 대강당에서 열린 14회 국제비교문학대회에 참가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타 뮐러(57)는 덤덤한 말투로 기조강연을 이어갔다. 강연 제목은 ‘이발사, 머리카락 그리고 왕’. 지난해 노벨상 수상 연설 때 할머니가 건네던 ‘손수건’을 화두로 삼았듯, 어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 작은 키워드로 자신의 체험과 작품 세계를 설명해 나갔다. 할아버지 때의 1차 세계대전과 민족주의 광풍, 부모와 자신 세대에 있었던 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 그리고 조국 루마니아에 드리운 독재의 풍경 등에 대한 세세한 증언이 이어졌다. 반항하면 겉으로는 사과하고 미안한 척 고개를 숙일지라도, 속으로는 좀 더 악랄하게 괴롭힐 거리를 뒤지는 것은 모든 독재자들의 공통점일 듯. 뮐러의 장점은 이를 한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듯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서 멈춘다는 것이다. 목청 키워 주장하거나 억울했노라 울부짖지 않는다. 그저 그때 그랬노라고만 말을 끊는다. 노벨상 수상에는 그런 문학성도 영향을 끼쳤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마음짐승’ 등 뮐러의 대표작도 그의 방한에 맞춰 잇따라 국내에 번역 출간되고 있다. 다음은 기조강연 뒤 기자들과 가진 일문일답. →방한 소감은. -(한국 방문은) 처음인데 어제(15일) 와서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광복절 행사를 호텔에서 (TV로) 지켜봤는데 묘했다. 남한에는 이런 민주주의가 있는데 북한은 아직도 뒤떨어진 독재를 하고 있다. (가까이 붙어 있는) 남북한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과 루마니아는 절친했던 관계다. 북한에 대한 이미지가 있나. -(루마니아 독재자인) 차우셰스쿠와 김일성의 관계는 유명하지 않았나. 유감스럽게도 차우셰스쿠는 북한을 모델로 삼았다. 문화혁명이라는 것도 그대로 가져왔고, 인물 숭배나 부자 세습도 그대로 가져오려 했다. →그런 느낌이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난 루마니아인이다. 한국작가들이 이미 그런 주제를 많이 다뤘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작품을 하나쯤 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로선 아니다. →작품을 보면, 몹시 어두운 유년기가 연상된다. -맞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랐고 독재자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은 언제나 순간적인 것이다.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행복해도 끝까지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 불우함이 끝까지 영향을 주진 않는다. →당신의 작품은 고발인가, 기록인가. -1980년대 말 독일로 망명한 뒤에도 루마니아에는 독재가 계속됐고, 독재정권이 망가지는 것까지 지켜봤다. 고발인가 기록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치 않다. 문학은 변혁을 이뤄내는 것 같은 그런 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아주 작은 사물과 개인에 대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텍스트에 고발 자체가 있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정치적 팸플릿이라 생각한다. 난 담담히 기록해둔 것이고, 독자가 읽다가 분노를 느낀다면 그것은 고발이 된다. 내 작품은 나 스스로 분명히 하기 위해, 또한 살기 위해, 나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 쓴 것이다. →국내 소개되는 책들이 주로 초기 10년작들인데 후기작들은 어떤가. -초기 10년작은 주로 루마니아(시절) 때 쓴 것이어서 마음이 항상 불안했다. 빨리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주로 단편이었다. 독일로 건너가서는, 이를테면 ‘허파’가 생겨났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길게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까 말했듯, 문학은 사소한 것들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작품세계에 그리 큰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노벨상 수상 뒤 변화는. -없다. 난 똑같은 사람이다. 공적인 자리가 많아져서 좋은 면도 있는데, 책상 앞에 앉아 종이를 대면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다만 내 작품 때문에 사람들이 독재를 잊지 않고 독재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해서 좋은 점은 있다. →끝으로 작가 지망생들에게 해주고픈 말은. -없다.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부고] 北 첫여성장관 윤기정 사망

    [부고] 北 첫여성장관 윤기정 사망

    북한에서 여성으로는 첫 장관을 역임하며 20년간 북한의 재정을 총괄한 윤기정 김일성종합대학 명예교수가 사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5일 밝혔다. 통신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김일성종합대학 명예교수 윤기정이 급성심장기능부전으로 13일 8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또 “당과 혁명 앞에 세운 공로로 김일성훈장을 비롯한 많은 국가표창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윤 교수는 1980년 4월 여성 최초로 정무원 재정부장(장관)에 발탁돼 18년간 김일성 주석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국가 재정을 집행했다. 이어 1999년 경제간부양성기관인 인민경제대학 총장에 임명됐다가 2년 뒤 물러났으며, 2003년 김일성종합대학의 첫 명예교수가 됐다. 2003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으며,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 때 대통령 개최 답례 만찬에도 참석했다. 그는 서울 경기여고를 나온 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1기로 졸업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김정은체제 구축 자금난 직면할 듯

    미국 정부가 2주일 내 북한의 돈줄을 끊어버리는 ‘대북 패키지 제재’를 단행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향후 북한이 겪을 자금 압박과 경제적 피해 규모 등이 주목된다. 미 정부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북한 관련 은행 계좌 200여개 중 불법 가능성이 높은 계좌 100여개에 대한 정밀 추적을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北계좌 100개 추적 마쳐 이번 조치는 2005년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제재처럼 북한과 거래하는 은행 한 곳만을 대상으로 했던 것과는 달리, 금융기관은 물론 지도부의 통치자금의 모집책인 북한의 무역 기업과 거래하는 다른 기업들에 대한 제재 조치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대북 압박 효과는 더욱 강력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당시 미 재무부가 BDA은행을 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 2500만달러를 동결시켜 북한은 ‘피가 마른다.’며 고통을 호소한 바 있다. ●核·미사일개발비도 막혀 김일성종합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소장은 23일 “미국 정부가 해외에서 모집된 불법 자금을 북한으로 송금하는 일명 허브계좌를 다수 확보, 금융 제재를 가할 경우 북한이 힘을 쏟고 있는 해외 진출 분야는 물론 북한의 산업 및 최고위층 통치자금 등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다.”면서 “북한은 마약, 위조지폐 등을 주요 외화벌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제재를 가할 경우 북한 경제와 북한의 통치 체계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2주 내로 미국 정부의 다차원적인 대북 금융제재가 가해질 경우 북한 입장에선 상당한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미국의 추가 대북 금융 제재 조치가 북한 경제는 물론 후계구축 과정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수석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지난해 5월부터 북한이 김 위원장의 비자금과 통치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8·39호실을 조직개편하고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조선대풍투자그룹과 조선펀드 등을 구축하는 등 김 위원장에게 집중된 자금을 김정은에게 이양하는 시도가 있었다.”면서 “대북 금융 제재가 가해질 경우 김정은 체제를 준비하며 경제 자금 구조를 조정하려던 움직임이 중단되거나 연기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어 북한 후계 구도 구축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北 ‘천안함 사과’ 경제가 열쇠?

    정부는 북한이 천안함 사건에 대해 사과해야 북핵 6자회담 재개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잘못을 인정하기 전에는 관계 정상화가 불가하다는 얘기다. 과연 북한은 사과를 할까. 지난 수십년간 저지른 수많은 도발에 대해 북한이 사과를 한 적이 몇번 있기는 하다.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방북했을 때 김일성 당시 수상은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다.”고 사과했다. ●교역 중단으로 北 연간 10억弗 적자 1976년 8·18 도끼 만행 사건으로 미군이 동해상에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등 무력시위를 펼치자 김일성은 사흘 만에 군사정전위를 통해 유엔군 사령관에게 ‘유감’을 전달했다. 1996년 12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석달 전 일어났던 북한 잠수함 강릉 침투에 대해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처럼 북측이 사과한 경우는 대체로 증거가 명약관화하거나 인명 피해가 적은 사건에서였다. 반면 1983년 버마(미얀마) 아웅산 사건, 1987년 대한항공(KAL) 858기 공중폭파 사건 등 대형 테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부인하고 있다. 천안함 사건의 성격은 후자에 가깝다. 특히 북한은 이 사건에 대해 유엔은 물론 전 세계를 상대로 결백을 주장하는 외교전을 펼쳐 왔다는 점에서 선뜻 사과하기는 힘들 것이란 관측이 많다. 우리 정부도 북한의 사과가 쉽게 나올 것이란 대답은 안 한다. 다만 12일 정부 고위 관계자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도 있다.”면서 “지금은 일종의 ‘치킨게임’이 벌어지는 국면”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장기간 사과를 하지 않고 버티기에는 경제사정이 너무 안 좋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북한의 수출은 연간 10억달러, 수입은 23억달러 정도인데 그동안 남한 등으로부터 받은 10억달러 규모의 지원으로 수출입 격차를 메워 왔다. 그런데 2006년부터 일본의 교역제한으로 2억달러, 2008년부터는 남한의 식량·비료 지원이 끊기면서 5억달러, 천안함 사건 이후 남북교역 중단으로 3억달러 정도의 손실이 겹쳐지면서 연간 10억달러의 무역적자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이 나오기 무섭게 ‘대화공세’를 펼치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작용한다고 정부는 판단하고 있다. ●南 “사과형식은 안 정해져”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들은 “사과의 형식을 딱히 정해두고 있지는 않다.”는 말로 북한의 태도변화를 ‘유인’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만 보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끝내 사과를 하지 않을 경우가 정부로서는 고민일 법하다. 2년 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에 대해 북한이 사과를 거부했을 때만 해도 대치국면이 이토록 길어질 것으로 예상하는 시각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한미 전작권 전환 연기] 김정은에 당직함 맡겨 후계 공식화?

    [한미 전작권 전환 연기] 김정은에 당직함 맡겨 후계 공식화?

    북한이 오는 9월 초 노동당 최고지도기관 선거를 위한 대표자회를 소집한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6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를 인용,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주체 혁명 위업,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위업 수행에서 결정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 당과 혁명 발전의 새로운 요구를 반영하여 조선노동당 최고지도기관 선거를 위한 조선노동당 대표자회를 2010년 9월 상순에 소집할 것을 결정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노동당 대표자회의 개최는 1958년과 1966년에 이어 세 번째로, 44년 만이다. 북한의 노동당 대표자회 개최 결정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인 김정은과 그의 후견인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당 정치국 상무위원 또는 후보위원으로 선임해 후계자 지명 공식화와 국방위 등에 기능이 밀려 권한이 축소된 노동당 재정비, 김정일 위원장 위주의 정책 결정 실책 인정 및 권력 분산 의도 등이 감지되고 있다고 북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정치국 상무위원 임명 가능성 우선 김정은의 후계구도 공식화와 당 기능의 복원을 위한 인사 개편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27일 “북한이 당 대표자회 개최를 알리며 인사문제를 거론한 만큼 당 대의원과 중앙위원을 선출하는 등 주요 당 조직 엘리트들을 새로 충원하는 절차가 진행될 것”이라면서 “당 대표자회를 44년 만에 소집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인물 인사보다는 후계자 김정은과 그의 후견인 장성택을 김 위원장과 같이 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임명해 김정은 후계를 공식화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월 8일자 노동신문 정론에 보면 ‘향도의 당’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과거 김정일 후계 구축 과정에서 김정일을 ‘당 중앙’으로 불렀던 것처럼 후계자 김정은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런 과정에서 김정일 시대에 선군정치에 밀려 정상화되지 못했던 당의 기능을 복원시키고자 당 대표자회를 개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도 “당 대표자회의 기능과 역할이 당 지도기관 인사 개편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만큼 당 중앙위와 정치국, 비서국의 인사개편이 이뤄질 것”이라면서 “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의 후계가 내정된다면 그에게 당 중앙위 위원·정치국 후보위원·비서국 조직담당 비서 등의 직함이 부여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출신인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통일국제협력팀장도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자 이번 당 대표자회에선 당 규약을 개정하고 당 조직·지도부·인사·정책·노선 변경 작업 등이 이뤄질 것”이라면서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단기적 목표를 설정하고, 김정일 시대에 대한 역사적 총아 및 평가 작업 등이 논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失政 인정… 권력분산 의도” 반면 일각에서는 김정일 위원장 위주의 정책 결정 실책 인정 및 권력 분산 의도 등이 존재한다는 시각도 있다. 서재진 통일연구원 원장은 “당 대표자회 개최 목적은 정치국 위원과 후보위원을 뽑으려는 것”이라면서 “이는 화폐개혁, 천안함 사태 등 김 위원장의 결정하에 이뤄진 주요 정책들이 실패하면서 내부적으로간부들의 불만이 심화됐고, 당 기능을 정상화해 권력을 분산화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1949년 3월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한 주목적은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승인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한다. 북한군대가 남한군대를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지 않다. 남한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과 합의한 38도선 파기를 소련이 주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해 6월 주한미군이 완전히 물러가고,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다.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지원으로 전력을 강화하면서 중국 공산군에 편입된 이른바 한인 3개사단을 1950년 1월까지 중국으로부터 돌려받는다고 보장받는다.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 가능성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제기한다. “남한에서 미군 철수는 38선을 지킬 명분과 능력을 미국 스스로 없애고 있다.” “왜 우리가 38선에 얽매여야 하는가.”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 극동방위선 발언은 김일성과 스탈린에게는 미국 불개입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50년 1월 말 스탈린은 북한대사 슈티코프에게 비밀전문을 보내 “김일성 동지의 불쾌감을 이해하고 있으며”, 대남행동에 대해 “언제고 만나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렸다. 이 전문이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최초의 문건이다. 김일성은 1950년 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남침조건, 전쟁지원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미군개입의 철저한 평가, 중국의 남침승인, 소련의 직접 참전에 대한 기대 포기 및 철저한 전쟁준비이다. 5월 중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남침승인을 알리면서 마오의 승인을 얻는다. 미군 개입시 중국은 군대를 보내고 소련은 무기를 보내 북한을 돕는다는 데 합의한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북한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북한이 한반도 통일을 완수할 시 조약을 발효시킬 것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얻는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싸우게 되면 중국은 소련에 더욱 의존할 것이며 미국은 국력의 손실로 세계적 세력균형이 소련에 유리하게 이동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1950년 1월과 7월사이 유엔 안보리에 소련의 불참은 계획된 것이었다. 미국이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보다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하기 위한 스탈린의 의도는 1950년 8월 체코 대통령 고트아트에 보낸 비밀전문에 보인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부대 명칭을 중국인민 “지원군”으로 제시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항공지원도 한·만 국경지역에 한정하는 등 중·소동맹조약의 의무가 발동돼 미군과 군사분쟁에 들 수있는 상황을 최대한 회피했다.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만든 “선제타격작전계획”에 따르지만 개전시기를 소련 군사고문단이 주장한 7월서 6월로 앞당긴다. 개전계획도 옹진반도의 진격에 의한 단계적 확전에서 비밀누설 위험 때문에 전 전선 공세계획으로 바꾼다. 중국은 10월2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직후 스탈린과 김일성의 간곡한 파병요청을 받으면서 참전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대다수 정치국원의 반대와 소련 공군력 지원이 불분명해지자 그 결정을 스탈린에 알리지 않고 저우언라이를 협상사절로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이 파병을 재차 거부함을 알리면서 동북지역으로 조속히 퇴각할 것을 지시한다. 10월8일 미군이 북진하고 유엔이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설립을 결정하자 마오쩌둥은 서둘러 파병명령을 내리지만 10월19일 평양이 유엔군에 장악될 때 중국인민지원군은 한·만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중국군은 사실상 한국과 유엔의 한반도 통일노력을 저지시켰다. 6·25전쟁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산블록의 세력확장 기도에 적절한 억제책을 적용했다면 예방할 수 있었다. 6·25는 억제의 실패가 아니라 억제의 부재 때문에 발발했다. 휴전이후 한·미동맹과 주한 미군의 역할, 남북한 군사력 균형 및 중국, 소련과의 관계를 계속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억제의 취약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 억제를 넘어 한반도에 안정된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 평화통일은 한국전쟁이 남긴 중요한 교훈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 中 환구시보 “6·25 김일성이 촉발”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가 인터넷 홈페이지인 환구망을 통해 한국전쟁이 김일성에 의해 촉발됐다는 사실을 25일 우회적으로 보도했다. 환구망은 ‘조선전쟁 60년-북한과 한국은 평화로써 전쟁을 없앨 수 있는가’라는 특집 코너를 마련, 6·25 전쟁 전후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환구망에 따르면 김일성은 한반도 무력통일을 허가해 달라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둘은 동의하지 않았다. 환구망은 “1950년 1월 말, 스탈린이 돌연 마음을 바꿔 김일성의 군사행동 계획에 동의했다.”며 “조선전쟁이 폭발했고, 김일성은 군대에 38선 돌파를 지시했으며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고 서술했다.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 밝히진 않았지만 문맥상 북한의 남침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와 관련, 관영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국제선구도보(國際先驅導報) 역시 전날 6·25 특집기사를 통해 “1950년 6월25일 북한 군대가 38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해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고 남침 사실을 보도했다. 하지만 해당 기사는 국제선구도보 및 신화통신 홈페이지는 물론 다른 포털사이트상에서도 바로 삭제됐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北통제’붕괴… 외부개방 시작 인적교류 확대 南北 모두 이익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北통제’붕괴… 외부개방 시작 인적교류 확대 南北 모두 이익

    미국의 저명한 한반도 냉전사 전문가인 캐슬린 웨더스비 존스홉킨스 국제대학원 교수는 “북한에서는 이미 김일성체제로부터의 이반현상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 등은 북한 지도층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이들에게 외부세계와의 접촉 기회를 늘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열리는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학술대회 참석차 워싱턴을 출발하기 직전인 지난 22일 전화인터뷰를 가졌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에 갖는 의미는. -남북한간 갈등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시작됐다. 서로 다른 정치적 비전을 놓고 경쟁해 왔다. 65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공산주의는 경제적으로 실패했고, 한국의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대성공했다. 더 복잡한 문제는 남북한간 어느 정권이 국가적 정통성을 인정받느냐인데, 이는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결국 남북한 문제는 공동의 비전을 갖고 주변국들과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나갈 것인지 결정될 때까지 해결되기 어렵다고 본다. 남북한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 사람들의 왕래를 늘리고 국경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냉전체제가 구축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는데. -신냉전의 시작은 아니다. 중국이 북한을 어느 정도 지지하지만 1950년처럼 전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은 아니다. 중국은 북한 정권의 붕괴에 따른 급작스러운 혼란과 국경의 붕괴를 우려하고 있다. →북한의 변화 가능성은. -2008년 6월 북한을 다녀왔다. 북한에서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점진적이지만 김일성 구(舊)체제로부터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아래로부터의 변화 압력을 받고 있다. 얼마 전 시장에 대한 규제를 모두 해제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북한 주민들은 정권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고 점점 자율적으로 변하게 된다. 북한 지도부의 경우 김정일 생전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사후에는 군부나 김정일 측근·가족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든, 3남인 김정은이 후계를 잇든 간에 현재와는 매우 다를 것이다. 중국·베트남처럼 공산주의 정권을 유지하면서 변화가 가능할지 지켜봐야 한다. →김일성체제로부터의 변화라는 건 무엇을 뜻하나. -우선 경제체제의 근간을 이뤄온 국가배급제도가 거의 붕괴된 상태다. 또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한 정보 통제 역시 많이 약화됐다. 북한의 지도부 중 외국 여행을 하거나 외국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있다. 이미 외부 세계에 개방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데, 한번 시작되면 멈추기 어려운 것이 개방이다. →한국 정부의 역할은. -독일과 영국 등 여러 나라들이 북한 학생들을 초청하고 30~50대 농업·에너지분야 종사자들에 대한 단기 해외연수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천안함 사건이 이런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미국과 한국은 북한에 인적교류 기회를 계속 제공해야 한다. 양국이 관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북한의 변화가 모두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국내 학자가 본 한국전쟁] “외세개입으로 무력통일 불가능 증명”

    [국내 학자가 본 한국전쟁] “외세개입으로 무력통일 불가능 증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남다른 식견 때문에 설화에 휘말린 적이 많았는데, 6·25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한국 역사에서는 세 번의 통일전쟁이 있었는데, 삼국통일전쟁과 후삼국통일전쟁 그리고 6·25전쟁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만 여겨온 6·25전쟁에 통일전쟁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은 재향군인회 회원들로부터 거센 비난과 항의에 직면해야 했다. 독일의 전쟁사가 클라우제비츠가 설파한 것처럼 모든 전쟁은 정치의 연장인 것이 분명하다. 전쟁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6·25전쟁의 목적이 통일에 있었다는 해석이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전쟁 발발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남북의 지도자들은 모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김일성은 1949년에 들어서자 공공연히 ‘국토완정=공산화 통일’을 주장했다. 결국 6·25전쟁의 방아쇠를 먼저 당긴 것도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설득에 성공한 김일성이었다. 남한 지도자들의 북진통일 주장은 인민군의 기습남침으로 빛이 바래 버렸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에 나선 국군은 38선의 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해 자유의 깃발을 꽂으려 했다. 남북의 지도자들은 형태는 다르지만, 전쟁을 통해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보는 것은 행위자들의 주관적 의도만을 고려한 역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행위자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전혀 다른 길로 전개되는 과정과 그 결과도 함께 고려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전쟁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3년여에 걸쳐 폭력과 학살의 광기에 지배된 전쟁은 엄청난 인명의 손실을 초래했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물적 자원과 생산력도 파괴했다. 전쟁은 남북대립 및 좌우대립을 통해 서로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으로 몰고 갔다. ‘미제와 그 주구에 대한 적개심’ 및 ‘공산당에 대한 반감’은 극한적으로 증폭되고 내재화되었다. 전쟁은 남북화해와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결과를 놓고 보면 6·25전쟁을 통일전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안이한 역사인식이며, 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이었는지 분명해진다. 전쟁이 통일이 아니라 분단의 고착화로 귀결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6·25전쟁으로부터 얻어야 하는 교훈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지극히 단순하다.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여건상 전쟁으로 어느 한 편을 말살하여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각축하는 전략적 요충지, 사회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이 각축하는 열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북한이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미국은 신속히 참전해서 공산화 통일을 저지했고, 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하자 중국은 신중국의 운명을 걸고 인해전술로 맞서 자유통일을 막았다. 6·25전쟁은 무력을 통해 한반도 전체에 통일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나 반대로 통일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그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불가능했음을 극명하게 증명한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한반도 전체가 사회주의 체제로 통일될 뻔했고, 그 중반에는 반대로 자본주의 체제 아래 통일될 뻔했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가 그 적대 세력에 의해 통일되는 것을 반대하는 외세의 개입으로 남북의 무력통일 기도는 모두 실패하고 도로 분단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상충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원인이 되어 분단된 한반도 지역에서, 적어도 1950년대의 상황에서는,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분단국가의 어느 한 쪽 세력이 주도해 한반도 전체를 무력으로 통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 바로 6·25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 [實錄, 한국전쟁] 이승만 휴전반대·북진통일 주장… 美 친위쿠데타 검토

    [實錄, 한국전쟁] 이승만 휴전반대·북진통일 주장… 美 친위쿠데타 검토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남한정부는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게 평가받을까. 북진통일을 외친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을 논하는 장에서 반짝 등장하지만, 한국전쟁 과정에서는 언급이 미미하다. 존재감이 없다. 러시아나 중국, 심지어 미국 자료들도 한국전쟁의 주역으로 이승만을 취급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하고 있던 남한 정부와 이승만은 단지 전쟁을 획책한 북한 김일성과의 비교 대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휴전협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승만의 극렬한 휴전반대가 주요 변수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평양과 모스크바, 베이징 그리고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 오간 각종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이승만’이라는 이름 석 자의 등장 빈도가 갑자기 높아졌다. 특히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의 전격적인 석방이 준 충격파는 컸다. 휴전협정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은 물론 평양이 발칵 뒤집혔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아침에 면도하다 이 소식을 보고받고 얼굴을 벨 정도였다. ●‘미국의 남자’ 이승만 美와 애증 미국은 진퇴양난이었다. 미국 국내의 들끓는 휴전여론과 달리 중국과의 휴전협상은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한국정부와의 관계는 이승만의 휴전반대로 말미암아 담벼락 위를 걷는 아찔한 상태였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간행한 ‘한국전쟁’에 따르면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러운 이승만 정부의 자세와 행동이 특별히 어려웠다. 이러한 것들은 회담에 역기능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협상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이 대통령의 조치는 유엔군사령부의 군사적 입장을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승만은 어떤 종류의 휴전협정도 반대했다.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오로지 남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원했다. 그는 ‘중국군의 완전한 철수, 북한 공산당 해체, 인민군 무장해제’ 등을 협상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승만은 1951년 7월 “유엔군이 한국의 분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장해 달라.”라는 서한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트루먼은 이 대통령을 비난하면서도 협조를 요청하는 답신을 보냈다.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합참보고서는 1952년 초 뉴욕 출신의 저명한 천주교 인사인 스펠만이 한국을 방문, 무초 미 대사와 벤플리트 8군 사령관이 함께한 자리에서 이승만이 “미국의 모든 천주교인이 한국에 휴전이 없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정보를 싣기도 했다. 미국입장에서는 수용 불가능한 무리한 요구였다. 미국이 한국의 지도자로 선택한 ‘가장 미국적인 한국인’인 이승만은 그를 키워준 미국을 거역하고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지목한 것처럼 이승만도 미국에 의해 선택되고 키워졌다. 이 시기 이승만을 묘사한 미국 측 자료는 온통 노회, 변덕, 아집, 독선 같은 단어로 도배돼 있었다. 전쟁발발 이전 이승만을 접촉한 한국주둔군 사령관 하지는 “솔직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며, 야비하고, 부패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악평했다. 이승만을 바라보는 미국의 우려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남자’였다. 1905년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선발돼 백악관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해 인연을 맺었다. 미국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중단할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랐지만, 그때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으려고 작업 중이었다.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재량권을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이승만은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하고 나서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훗날 대통령이 된 윌슨의 제자가 됐다. 윌슨은 이승만을 ‘미래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구세주’라고 부추겼다. 이승만은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미 국무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 이승만과 미국은 애증의 관계였다. 미국 지도부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기독교인인 이승만이 미국식 종교와 정치 기조를 따를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마음속에는 미국에 대한 배신과 위선, 불신의 불씨가 자라고 있었다. ●이승만 ‘북진통일’ 정치적 구호 이승만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인 ‘북진통일’은 남한주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와 호응을 받았지만 득보다 실이 컸다. 김일성의 남한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구실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스탈린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와 군수물자로 완전무장한 북한 인민군과 비교하면 남한의 군사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발발 당시 한국군은 자신을 지키기에도 역부족인 상태였다. 전쟁 열흘 전인 1950년 6월15일 미 국방부에 보고된 군사고문단 보고서에는 ‘한국군은 가까스로 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장비와 무기 대부분은 쓸모가 없었고, 방어능력도 기껏 보름 정도’라고 기술돼 있다. 실제 인민군이 보유한 소련제 T34전차의 위력 앞에 한국군은 맥없이 무너졌다. 구형 바주카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준비한 김일성의 남침에 비해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은 이승만의 의도와는 달리 종결을 향해 달려갔다. 미국 공화당이 1952년 7월 아이젠하워를 대통령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대세는 군사적 종결이 아닌 정치적 종결, 즉 휴전 쪽으로 기울었다. 대통령 후보자 아이젠하워는 같은 해 10월 디트로이트 연설에서 “명성을 걸고 한국전쟁을 조기에 명예롭게 종결짓겠다.”고 천명했다. 그는 “새로운 행정부의 정책은 한국전쟁을 끝내는 일에 집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그는 12월2일 극비 한국방문길에 올랐다. 미 행정부 수뇌부는 남한의 정치적 위기는 전적으로 이승만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 여겼다. 이 같은 위기가 휴전협상뿐만 아니라 38도 상에 진행되고 있는 군사작전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 실제 이승만은 1952년 국회 간선을 통한 재선이 어렵게 보이자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을 꾀했다. 임시수도인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를 제거했다. 한국군 전투부대를 철수시켜 계엄군으로 사용하려 했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나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군대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이승만은 막무가내였다. 전쟁을 끝내고 싶은 미국에 이승만은 골칫거리였다. 1953년 미국과 중국의 협상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부와의 사이는 또 다른 고비를 향해 뒤틀려 갔다. 이승만은 4월5일 “판문점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관계없이 우리의 목표는 똑같다. 우리의 변함없는 목표는 한국을 남으로부터 압록강까지 통일시키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유엔군사령부가 중국군이 압록강 이남에 잔류하는 것을 허용하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에서 철수시킬 것이며 단독으로 싸울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장을 보냈다. ●아이젠하워 한때 李 제거 계획 워싱턴은 이승만을 휴전협상의 훼방꾼이자 위협세력으로 간주했다. 특유의 허세라고 판단하면서도 극단적인 조치로까지 몰고 갈 것으로 예측했다. 달래기에 나섰지만 이승만은 클라크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당신들은 모든 유엔군, 모든 경제원조를 철수시킬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의존한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력하겠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면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승만은 6월6일 ‘선(先) 한미방어조약 체결, 후(後) 유엔군과 공산군의 상호철군’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반쪽 휴전이나 평화보다는 싸움을 택한다.”라는 예의 벼랑 끝 외교전을 펼쳤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 대통령은 송환 불원 한국인 포로를 경고 없이 석방할 수 있다.”는 예언에 가까운 메시지를 워싱턴에 보냈다. 포로경비부대 대부분이 한국군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유엔군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클라크 사령관의 예언대로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제거를 검토했다. 미국 수뇌부는 당시 한국에 임시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극비의 군사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 다음날인 6월19일 자 미국 국가안보회의 비망록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위험을 없애는 가장 빠르고 유일한 길은 쿠데타”라면서 “이는 확실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군사자문 기구인 합참은 1952년부터 쿠데타 계획을 세워 놓았다. 합참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6월27일 벤플리트 장군에게 이 계획을 통보했다. 한국육군과 참모총장은 유엔군사령부에 충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밀해제된 미국 합참보고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을 어떤 구실을 붙여 서울로 초대한다. 유엔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하여 주요 지지자들을 체포하고, 주요시설을 방호하며 한국육참총장을 통하여 기존 계엄령을 장악한다. 이 대통령에게 계엄령을 종결토록 요구한다. 만일 거부하면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한 채 연금하고, 요망되는 포고령은 협조적인 것으로 예상하는 국무총리가 발표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李 재선 이후 美와 화해모드 다행히 워싱턴의 친위 쿠데타계획은 불발됐다. 현실론을 내세운 참모들의 설득으로 강력한 경고수준에서 그쳤다. 한국 국회도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을 승인했다. 계엄령은 해제됐고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화해모드로 전환됐다. 미국은 손을 들었다. 미국은 휴전동의를 얻고, 이승만은 그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보호우산을 제공받는 선에서 양국의 갈등은 마무리됐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의 통일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계속 추구한다. 휴전협정 수락 직후에 상호방위조약을 협상한다. 전후 경제원조를 계속한다.”라는 세 가지 조치를 약속했다. 이승만은 극단적인 휴전반대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허물도 컸지만,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주춧돌을 놓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국전쟁의 산물인 한·미동맹은 단순한 양자동맹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지역동맹”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를 저지하고, 중국을 봉쇄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동맹이라는 것이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기자 joo@seoul.co.kr
  •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시산혈해 55일 전투… 다리에 6발 총상 지옥이었다”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시산혈해 55일 전투… 다리에 6발 총상 지옥이었다”

    “1950년 8월 다부동 일대는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뤘어. 당시 참상은 필설로는 도저히 표현 못 할 정도로 잔인했지.”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앞둔 24일 경북 칠곡 다부동 전투에 참가했던 여준구(80·다부동 전투 구국용사회 본부 사무총장)옹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여옹은 “이곳을 찾으면 언제나 만감이 교차해. 55일간 밤낮 없이 벌인 사투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지만, 전우들이 이곳을 사수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뭉클하지.” 그는 1950년 7월15일 자진 입대했다. 20살 때였다. 경산국민학교에서 10여일간의 짧은 훈련을 받고 상주 함창 전투에 투입됐다. 하지만 그가 속했던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바로 후퇴해야 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바람에 국군은 순식간에 다부동까지 밀려났어. 그 때가 8월 초였지.”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국군과 미군은 다부동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대구 북방 22㎞에 있는 다부동은 북서쪽은 유학산, 동쪽은 가산으로 둘러싸여 협곡을 낀 천혜의 방어선이었다. 이 일대를 적에게 넘겨주면 대구와 부산을 내주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특히 8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督戰) 명령을 받은 북한군이 주력 사단을 집중 투입, 총공세를 펼쳤다. 국군과 미군 역시 사력을 다해 방어했다. 먼저 국군 1사단과 북한군 3개 사단간에 혈전이 붙었다. 뺏고 뺏기는 혈전이 55일간 이어졌다. 소총수였던 여옹은 “하루에도 고지의 주인이 서너 차례씩 바뀌기도 했어. 미군 항공기가 도와주는 낮에는 우리가 고지를 점령했고 밤이 되면 빼앗겼지. 한 번 전투가 벌어지면 산 정상이 2~3m 낮아질 정도로 포탄과 총을 쏴댔지. 총구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쏘고 또 쏘다가 정신을 잃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 전우가 북한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 미쳐서 날뛰고….” 그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면서 국군과 북한군, 미군의 시체가 수북히 쌓였고 삼복더위에 시체가 썩어 악취가 진동했어. 개울물은 항상 피로 검붉은 색을 띠었지.”라고 회상했다.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8월1일부터 9월24일까지 다부동 전투에서만 북한군 2만 400여명, 한국군 1만여명이 전사했다. 그도 다리에 6발의 총상을 입는 중상을 당했다. 밤샘 혈투를 벌이는 데 지급된 식량은 주먹밥 하나였다. 그런데 날이 새면 주먹밥 6~7개가 돌아왔다고 했다. 보급 사정이 좋아서가 아니라 전우들이 야간 전투에서 그만큼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시체를 치우다 피범벅이 된 손으로 주먹밥을 먹어야 했고 타들어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철모에 오줌을 받아 마셔야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었고 아비규환의 연속이었다고 전했다. 이곳에서 당시의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처절한 전투 현장이었던 유학산 기슭으로 중앙고속도로와 국도 5호선이 시원하게 뚫렸다. 계곡에는 공장과 민가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여옹은 “청소년들은 6·25 전쟁을 모르고, 기성 세대조차 이를 잊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면서 “6·25의 실상을 바로 알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우들을 지금 세대가 따뜻하게 안아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칠곡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한국전쟁 名著]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 名著]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전후 세대들에게 한국전쟁은 낡은 흑백사진이다. 호화찬란하지도, 역동적이지도, 극적 반전도 없는 재미없는 전쟁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는 뉴스는 듣지 못했다. 이 모든 얘기들이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쟁쟁한 역사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가 출판되기 전의 얘기다.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은 이 책에 대해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정의했다. 부연한다면 미국인의 눈으로 본 걸작 한국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보다 흥미가 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착각을 확실하게 불식시켜 준다. 방대한 문헌과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을 정공법으로 조명하면서도 소설처럼 읽는 재미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책은 2007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으며,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됐다. 4만 8000원이라는 가격보다 1082쪽이라는 분량 때문에 지레 질릴 수도 있다. 잠깐의 망설임만 극복하면 일사천리로 읽힌다.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전투와 작전묘사는 숨이 막힐 듯 생생하고, 전쟁의 막후에서 벌어지는 정치인, 고급 군인들의 권력투쟁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다. 60년 전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점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된 국제정세가 60년이 지난 지금과 판박이라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지적이 실감 난다. 학자들은 별로 환영하지 않는 눈치다. 흥미 위주의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된 이유는 막강 화력의 미군이 중국 해방군에게 처절하게 패했을 뿐 아니라, 참전자들의 인간 스토리가 별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돌아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색없다. 핼버스탬은 이 책의 출판을 30년 동안 구상했고, 10년 동안 집필했다. 참전용사들을 찾아 미국 구석구석을 뒤졌다. 책의 진가는 인터뷰 대상자 목록에서 나타난다. 그가 인터뷰했다고 이름을 밝힌 사람은 모두 130명이다. 이 중에는 알렉산더 헤이그 전 국무장관,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명예교수 등 유명인사도 있다. 대부분은 최전선에서 싸운 초급 장교이거나 사병들이었다. 저자는 후기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의 변두리에 사는 폴 맥기를 특별히 소개했다. 그는 지평리 전투 당시 소대장이었다. 저자는 “맥기는 55년 동안 내가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 같았다.”고 했다. “일반대중이 얼마나 고귀한 이야깃거리를 가슴속에 숨겨두고 있는지 알았고, 그들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두 공산 지도자는 물론 옛 소련 적군 소령계급장을 달고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에서의 행적, 대륙에서 쫓겨난 장제스 등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책은 중국군과의 첫 교전으로 시작해 미국의 참전 배경으로 옮겨간다. 세계 최강의 부대 미군이 중국군에 얼마나, 어떻게 호되게 당했는지 낱낱이 알려준다. 미국인답게 워싱턴 내부 정가와 군부의 이야기가 압권이다. 한국전에서 동고동락한 맥아더, 리지웨이, 알몬드 등 세 장군의 애증 관계가 저자 특유의 저널리즘적인 서술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갈등과 알력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을 읽노라면 소름이 끼친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만 알려진 맥아더의 야망에 대한 분석은 새롭다. 족보까지 파헤치면서 맥아더의 허상을 밝혔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한반도에는 100년 만에 닥친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책제목은 하복차림으로 투입된 미군들이 중국군이나 인민군보다 ‘동장군’ 때문에 고생했다는 데서 따왔다. 50년 동안 21권의 저서를 남긴 핼버스탬은 베트남전쟁에서 실패한 미국의 이야기를 주로 썼다. ‘최고의 인재’는 베트남전쟁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한 권이다. ‘콜디스트 윈터-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는 유작이다. 저자는 2007년 봄 마지막 퇴고작업을 마무리한 닷새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미식축구에 관한 새로운 책을 준비하려고 캘리포니아로 가던 길이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한국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중국과 일본도 수시로 한국전쟁의 여파에 휩싸이며, 미국과 유엔 동맹국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한국을 침공한 지 60년이 지났지만 한국전쟁은 관련국들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전쟁은 1948년 제주와 여수·순천반란에서부터 시작됐다. 반란의 뿌리는 1919년 3월 일본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만세운동에 있다. 3·1만세운동이 실패하면서 일부는 중국으로 피해 국민당과 공산당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한국 내에서 은신처를 찾아 숨었고, 일군의 무리는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또 다른 이들은 소련에 의탁했다. 독립된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던 이들은 1945년 광복을 맞자 중국과 일본, 미국에서 물밀듯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한국인들에게는 희생의 경험이 주를 이룬다. 1945~1948년 미국과 소련 군정의 유일한 목적은 한국에서 일본과 이들의 잔재를 몰아내는 데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한(對韓) 정책의 지향점은 같았지만 달성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도 달랐다. 소련은 1904~1905년 러·일전쟁 참패에 대한 인적·물적 배상을 북한에 물어 2차대전의 피해를 충당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 잔존 인물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경제·사회적 개혁을 순탄하게 진행시키길 바랐다. 이처럼 한반도에 들어서는 과도정부는 다양한 목적에 부합돼야 했고, 결국 서로 다른 후원국들에 의해 남북한에 들어선 정부가 서로의 적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모두 흡수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미국과 소련간의 차이점은 미국은(물론 나름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을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었지만, 소련은 직접 관여하기보다 북한과 중국을 앞세워 싸웠다. 한국전쟁이 국제적인 분쟁으로 확대된 1950~1953년은 남북한 상호간에 뿌리깊은 증오를 낳았고, 이같은 적개심을 오늘날 한국의 젊은 세대들과 세계는 이해하지 못한다. 남북한간 증오는 전선을 넘어 광범위하게 자행된 잔혹성에 근거한다. 한국전쟁은 유럽의 30년전쟁(1618~1648) 당시 공포를 연상시킨다.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한국군 전사자수를 능가했다. 기근과 질병, 유엔군의 무자비한 폭격, 남북한군에 의한 인질과 포로 학살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에 패배한 북한은 수많은 양민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해 학살했다. 수천명이 집단농장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전쟁의 정당성과 김일성의 ‘신성’에 도전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됐다. 남한의 사정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비무장지대에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산주의 게릴라들과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공산당 잔당에 대한 토벌작전으로 남한의 인구는 급격히 줄었다. 1950년대 한국의 상황은 잔혹했던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김일성은 1953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휴전할 생각이 없었다.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경제적 재건과 군사적 안보의 열쇠를 쥐고 있었기에 결국 김일성은 이들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았고, 휴전협정에 서명하길 거부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과의 상호안보조약체결과 10억달러 원조, 한국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한국·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이 한국을 방위한다는 약속을 얻어낸 뒤에야 휴전을 받아들였다. 한반도 통일이라는 전쟁 목적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수십억달러를 지불했고, 현재도 지불하고 있다. 3년간의 전쟁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민간인과 군인 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이 2차대전에서 입은 인명피해와 맞먹는다. 이 밖에 교전국 인명피해는 50만명에 이르며, 이중 90%가 중국인이다. 휴전협정은 순식간에 한국인들로 하여금 정복이 아닌 전복을 위한 전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미국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핵전쟁이나 재래식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억지한다는 데 암묵적 합의를 도출해 냈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남북한은 계속해서 주변국들과 미국의 우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한국이 태평양의 주요 국가로 발전해 나가지 않는 한, 역사와 지정학적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미래는 다른 여타 포스트모던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밝다. 반면 북한은 이미 실패한 국가이지만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독재체제는 3대를 넘기지 못한다. 다음에 닥쳐올 ‘제국’의 몰락을 국제사회는 준비 없이 맞아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열망하는 새로운 통일된 국가를 전쟁 없이 세울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박명림·와다 하루키·브루스 커밍스’ 한국전 3대 저술가 23일 한자리에

    박명림, 와다 하루키, 브루스 커밍스 3명의 학자가 한자리에 모인다. 23일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동아시아협력센터가 주최하는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국제학술회의’에서다. 알려진 대로 이 3명의 학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서를 낸 학계의 큰 인물들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와 ‘한국전쟁’을 낸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는 도도한 수정주의 물결을 만들어냈던 학자. 이들은 단순하게 남북 가운데 누가 먼저 38선을 넘었느냐를 따지기보다 정치사회적인 구조를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전쟁의 내전적 성격을 강조했다. 반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국제전·내전의 이분법이나 내전이 국제전으로 발전했다는 관점을 거부하고,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끌어들인 내전이자 국제전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 세 학자는 이날 학술대회에서 최근 천안함 사태에서 보듯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의 의미와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24일에는 세 명의 학자가 나와 ‘역사, 진실, 학문탐구-한국전쟁 연구와 개인적, 사회적 경험’을 주제로 한 특별강연이 이어진다. 청중들과 공개토론도 함께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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