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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전협정 60년] 정전협정의 평화체제 전환 과제 (상)남·북한 입장

    [정전협정 60년] 정전협정의 평화체제 전환 과제 (상)남·북한 입장

    정전협정의 평화체제 전환 문제를 둘러싼 남북 간 줄다리기는 협정 체결후 1년도 안 된 1954년부터 시작됐다. 북한은 현재 한국을 제외한 정전협정 체결 당사국들과 평화체제 전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남북한 간 평화협정 체결에 무게를 뒀었다. 김일성 주석은 1962년 6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11차 회의에서 미군철수와 남북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했으며, 같은 해 10월 제3기 제1차 회의에서도 평화협정 체결을 재차 강조했다. 요지는 주한미군이 철수한 뒤 남북한 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각각 병력을 10만명 이하로 축소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기조는 197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이에 대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상호 무력침범 금지 ▲상호 내정간섭 금지 ▲휴전협정 존속을 골자로 하는 남북 상호불가침 협정체결 등을 역제의했다. 정전 상태를 유지하는 대신 양측 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억제해 전투 상태의 일시적 정지를 초월한 준(準)평화 상태를 만들자는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에 있어 남북한 당사자 원칙을 고수할 것과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정전체제를 유지할 것, 대북 군사 억지력을 위해 주한미군은 주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측 주장이었다. 그러자 북한은 우리 측 제안을 거절하면서 입장을 바꿔 같은 해 3월 미국 의회에 서한을 보내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북·미 간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더 이상 전쟁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성격 변화가 불가피하고, 대북억지력이 사라진다면 남한의 공산화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한국이 정전협정에 직접 서명하지 않았으며,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위 ‘실질적 권한 행사자’인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었다. 1984년 1월에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에서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과 함께 남북 사이에는 불가침 선언을 채택하자는 소위 3자 회담 형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반응이 없자 북한은 1987년부터 주한미군 즉각 철수에서 단계적 철수로 주장을 완화한 데 이어, 1990년대 들어와선 적대적 군사행위가 없다면 미군 주둔을 용인하겠다는 뉘앙스의 발언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아예 2002년 10월에는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정전협정마저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불가침 조약의 체결은 더욱 절실하다”며 목표를 불가침 조약 체결로 바꿔 잡았다. 불가침 조약은 기존에 제안했던 북·미 평화협정에 비하면 일보 후퇴한 제안으로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라크 전쟁(2003년 3월 20일~4월 14일)을 앞두고 전운이 고조되자 ‘제2의 이라크’가 될 것을 우려한 북한이 미국과 우선 불가침조약부터 체결하려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후 지지부진하던 평화협정 논의는 2005년 9월19일 제4차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이 채택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북핵 문제와 맞물려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국제적으로 공론화됐고, 북한의 핵 포기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9·19공동성명은 북한의 비핵화 이행과 동시에 별도 포럼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대북적대시 정책 철회 및 평화체제 보장을 동시에 논의하는 포괄적 해결 방안을 담았다. 그러나 이후 북한은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으로 9·19공동성명 이행을 사실상 거부했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핵을 개발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 등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관련한 일련의 조치들이 마무리된 뒤에야 핵폐기가 가능하다는 논리다. 반면 한국과 미국은 핵폐기와 관련된 실질적 조치들이 마련되고, 이 과정에서 상호 신뢰가 구축돼야 진정한 의미의 평화체제가 수립될 수 있다고 맞섰다. 양측의 현격한 입장 차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북한은 지난 1월 외무성 비망록을 통해 18대 대선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카드를 꺼내들었다. 정전 상태를 지속시키는 배후에 유엔군사령부가 있다고 주장하며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주장하고, 어떤 형태의 전쟁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도 곁들였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여전히 강경한 입장이다. 대선후보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한 안보 관련 심포지엄에 참석해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와의 뮌헨 회담 후 ‘우리 시대의 평화가 도래했다’고 천명했지만, 그가 가져온 합의문은 1년도 안 돼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전쟁이 발발했다”면서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평화협정에 사인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무력화하려는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당당히 맞서야 하며, 북핵 폐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을 분명히 밝혔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군사분계선이 막아 놓은 백두대간 맨 얼굴 만난다

    군사분계선이 막아 놓은 백두대간 맨 얼굴 만난다

    MBC는 22일 밤 11시 20분 정전 60주년 특집 다큐 스페셜 ‘백두대간’을 방영한다. 국내 방송이 처음으로 공개하는 북한의 백두대간 모습은 뉴질랜드인 로저 셰퍼드가 종주하며 담은 영상이다. 뉴질랜드 경찰 출신인 셰퍼드는 백두대간에 반해 2011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북측 백두대간 종주에 나섰다. 백두산을 출발점으로 삼지연 김일성광장 등을 거쳤다.
  • “시집 잘 가면 대학 3곳 나온 것보다 낫다” 재력가 선호… 여대생들 ‘야매’ 성형 유행

    ‘시집만 잘 가면 대학 3곳을 나온 것보다 낫다.’ ‘결혼의 첫째 조건은 돈을 따라 흐른다.’ 국가정보원이 최근 탈북자 면접조사를 토대로 펴낸 ‘김정은 등장 이후 유행어·소문으로 살펴본 북한 사회 실상’ 책자에 따르면 결혼 상대자로 재력가를 선호하고 여대생들 사이에 속칭 ‘야매’ 성형수술이 유행하는 등 최근 북한의 사회주의 가치 체계가 급속히 이완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 간부 계층과 도시 부유층에서는 며느릿감을 고를 때 미모를 최우선적으로 중시하는 추세이며, 이로 인해 일반 여성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미모를 가꾸는 데 더 열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생활력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들은 제대한 군인과의 결혼을 기피하는 등 결혼관에도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출산율 저하, 이혼율 증가도 고질적 문제가 됐다.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에도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올해 죽지 않으면 내년에 후회한다’는 말도 회자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김정은이 나이가 많은 간부들에게 반말로 지시하는 것을 빗대 ‘할아버지도 내 동무, 손자도 내 동무’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김정일·김정숙(김일성 주석의 첫 부인) 등 3대 인물 초상 대신 가족사진이나 그림 등을 집안에 거는 추세도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미국·중국의 입장 美 ‘中 견제 전초기지’ vs 中 ‘대미 완충지대’… 전략적 인식 심화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한반도 분단의 조속한 종식과 평화적 통일을 바란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연방하원의 여야 의원들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결의안’을 발의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치 않다. 한반도 통일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통일 한국’은 친미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통일 한국’이 친(親)중국 성향으로 기울 것이란 우려가 제기될 경우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소극적으로 변할 개연성이 크다. 현실주의 이론의 대가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존 미어셰이머 교수는 2011년 한 세미나에서 “그동안 급속한 국력 신장을 이룬 중국이 향후 수십년간 더욱 힘을 키워 미국을 능가할 정도가 된다면 한국은 중국에 편승해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로 설정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한국에 공을 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지리적으로 중국에 매우 근접해 있는 한국이야말로 대(對)중국 견제의 전초기지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이 틈만 나면 한·미 동맹을 “린치핀”(linchpin·핵심)으로 부르며 중요성을 부여하는 배경에는 이런 계산법이 작용한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북한발 위협이 사라지면서 미국의 한반도 방위 부담이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 과거에는 많았지만 최근 중국의 국력이 급신장하면서 이런 전망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반도 방위 역량을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중국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한국전쟁’ 하면 떠올리는 것은 ‘미군의 북한 침략’이다. 중국의 대표 백과사전 격인 사해(辭海)에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관련해 “한국에 내전이 일어나자 미군이 북을 침략하고 나아가 중국 변경인 단둥(丹東)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중국이 전쟁에 참여해 나라를 지키고 북한을 도와 미국을 물리쳤다”고 미화한다. 중국에서도 김일성의 남침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화둥(華東)대학 역사학과 선즈화(沈志華) 교수는 러시아 비밀 문서를 토대로 한 연구를 바탕으로 꾸준히 남침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010년 환구시보 영문판에서 “스탈린이 1950년 4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허락했고, 그해 5월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미군이 개입하면 중국이 돕겠다는 승락을 받았다”며 남침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류 역사관은 아직도 북침이다. 일부 개혁파 지식인들은 “중국의 참전 결정은 마오가 소련과 밀착해 국내 정권 기반 강화 수단으로 삼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당국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참전 결정은 마오가 내린 것이고 마오는 중국의 국부여서 마오에 대한 부정은 곧 중국 공산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전문가들은 한·중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지만 당국이 아직은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물론 한반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역사학자 장리판(章立凡)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핵은 중국에도 위협 요소여서 중국이 북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이고 미국과 협력하면 북한 문제는 바로 해결된다”면서 “다만 이 경우 미군의 도움으로 남한 주도의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중국은 여전히 완충지대로서의 북한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 분단 해결에는 장애물이 많다”고 내다봤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러시아·일본의 시각 러 “北, 중·러 감정골 이용 땐 분단 상황 지속” 1948년 한반도 분단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미국과 함께 냉전의 한 축을 이뤘던 소련(현 러시아)은 영토 접경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막을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홍완석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소장은 “소련은 영토가 크기 때문에 항상 완충지대를 만든다. 유럽의 핀란드, 중앙아시아의 몽골이 대표적이다. 북한도 그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소련은 38선 이북을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보루로 삼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소련이 갖고 있던 영향력의 우위는 서서히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북한 문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소련은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북한 정권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즈음만 해도 북한 지도부가 혁명적 이상주의를 어느 정도 유지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시각에서 북한의 남침은 침략이 아닌 해방전쟁이었다”며 한국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러시아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국과 소련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북한이 이를 잘 활용하면서 분단이 계속 이어지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끝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계형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연구교수는 “러시아는 한국이 통일되는 게 동북아의 안정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통일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도 있는 등 한국의 통일이 러시아의 장기적인 이익과도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분단의 ‘당사자’였다면 일본은 ‘수혜자’였다. 분단이 고착화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한국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싶었던 미국의 입장 때문이다.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일본과 서둘러 맺었고, 이를 통해 패전국 일본은 정치적으로 ‘정상 국가화’ 됐다. 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의 정치인들은 이런 점을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인이 일본에 혜택을 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김정일이 1985년 설립…‘통일각’ 이름 직접 지어

    김정일이 1985년 설립…‘통일각’ 이름 직접 지어

    개성공단 관련 남북 당국 간 실무회담이 열리는 판문점 ‘통일각’은 이전에도 각종 남북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1985년 8월 당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에게 제안해 판문점공동경비구역(JSA) 북쪽 지역에 설립됐으며, 지하 1층·지상 1층에 전체 면적 약 1500㎡ 규모다. 가장 최근에는 2007년 12월 5일 남북 군사실무회담이 이곳에서 열려 파주 문산~개성 봉동 구간의 화물열차 운행에 필요한 군사보장 합의서를 채택했다. 사망 전날 작성된 김일성 주석의 친필 서명을 새긴 ‘김일성 친필비’가 건물 앞에 세워져 있다. 통일각이란 이름은 김 위원장이 직접 작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각은 판문점 남측 지역의 회담용 시설인 ‘평화의 집’과 기능적, 위치적 측면에서 대칭되는 곳으로, 두 건물을 번갈아 가며 회담하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다. 지난해 3월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대응 태세 강화를 지시한 이후 북한은 통일각을 비롯해 판문점 북측 지역 부속 건물에 대한 내부 정비 공사를 진행했으나, 이 과정에서 지난해 10월 통일각 1층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함께 살아낸 10대의 기억 속 그들의 특별했던 1990년대

    함께 살아낸 10대의 기억 속 그들의 특별했던 1990년대

    ‘김정일이 죽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2011년 12월 19일 정오, 나는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역사적 사건은 예측할 수 없고 장대하고 극적이나 개인의 일상은 지극히 범상하고 단조롭다. ‘밥 한 공기와 그저께 끓인 감잣국, 멸치볶음’으로 식사를 하고, ‘세제 거품을 많이 내어 천천히 설거지를’ 하고, 출근을 위해 ‘도봉산행 7호선 전철’을 타는 것이 필부들의 삶이다. 화자는 읊조린다. ‘돌이켜보면 지난 삶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받는 과정이었다.’ 정이현의 새 소설 ‘안녕, 내 모든 것’(창비)은 미래가 조금 더 특별할 거라고 믿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정이현에게 그것은 1990년대이고, ‘생에 대해 어떤 기대도 품지 않’게 된 열아홉살 이전의 3년이다. 소설은 그 안에서 특별한 서사를 얽어내지는 않는다. 대신 그 시기를 살아낸 이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정서와 흔적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시곗바늘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으로 돌아간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지존파가 붙잡히고, 거액의 유산을 타내기 위해 부모를 살해한 박한상이 체포된 그해다. 삐삐와 PC 통신이 유행하고, 극장에는 ‘뮤리엘의 웨딩’과 ‘당신이 잠든 사이에’가 걸려 있다. 1990년대 후반 환란을 맞기 직전까지 부동산 개발과 소비의 광풍이 막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1학년인 세미와 지혜, 준모는 예민하고 불안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세미는 부모와 떨어져 부유한 조부모 집에 얹혀 산다. 지혜는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을 잊지 않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졌지만 친구들을 빼놓고는 누구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다. 준모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반복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투렛 증후군에 시달린다. 준모는 세미를 좋아하지만 세미는 준모의 과외 선생을 좋아한다. 세미의 가세가 기울고, 지혜가 입시학원에 가고, 준모가 유학을 결정하면서 세 친구는 조금씩 엇갈린다. 1990년대와 10대라는 시간을 축으로 전개되던 소설은 필연적으로 죽음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른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어느 날 세미의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세 사람은 말 못할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일상의 휘장을 걷어내고 죽음의 풍경을 엿본 이들에게 미래는 약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이현은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밀어내면서, 이들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멈추지 않는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중략) 우리는 곧 어디엔가 도착할 것이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한반도 지형변화(하)

    지난 60년간 전쟁 억제 역할을 해온 정전협정은 북한의 무효화 선언이 아니더라도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다. 북한이 정전협정을 지키지 않는 상황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적대 행위의 사실상 정지’라는 본래 의미를 잃고 사문화된 지 오래됐다. 정전협정이라는 안전장치가 전면전을 막고 있는 게 아니라 달라진 국제 역학관계 등 외교 환경과 ‘최악의 무장 충돌만은 피하자’는 남북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안전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 정전은 휴전보다 좁은 의미로 ‘서로의 합의에 의해 전쟁 당사국들이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한다’는 뜻이다. 휴전은 전쟁 중 얼마 동안 전투를 멈춘다는 의미로 정전보다는 더 나아간 준 평화상태로 볼 수 있다. 정전협정 한글판에는 ‘한반도 정전협정’으로, 영문판에는 ‘휴전협정’(Armistice Agreement)이란 표현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 어떤 것이든 전투를 일시 중단할 뿐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는 1000명 이내의 비무장 인원이 들어가 관리하도록 돼 있지만, 한반도 대치 상황이 이어지면서 실제로는 양측의 무장병력과 지뢰, 방벽 등 군사 시설물로 중무장됐다. 군사 인원 및 장비의 반입을 감시하는 중립국감독위 산하 중립국 시찰 소조의 활동은 북한의 소련 무기 반입 논란 끝에 1956년 5월 활동이 중지됐고, 시찰 소조의 활동을 규정한 정전협정 조항도 폐기됐다. 정전 감시의무를 수행하는 군사정전위와 중립국감독위의 기능도 1990년대 들어 공산 측 대표단이 철수하면서 완전히 마비된 상태다. 북한은 1993년 체코, 1995년 폴란드 대표단을 강제 철수시켰는데, 폴란드의 경우 철수를 거부하자 겨울철 막사의 전기와 수도까지 단절했다. 1994년 12월에는 군사정전위 중국 대표단을 철수시켰고, 1996년에는 군사정전위를 대신한다는 명분으로 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일방적으로 설치했다. 북한이 군사정전위원회를 거부한 표면상의 이유는 한국군 장성을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군은 휴전협정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수석대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서명 당사자에 한국대표가 빠진 정전협정의 태생적 한계가 결국 협정문을 형식상의 문서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정전협정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 등 3명만이 서명했다. 중국군만 제어할 수 있다면 북진통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정전협상에 반대하며 한국군 대표를 휴전회담에서 철수시켰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전협정의 불안정성이 시작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군은 6·25전쟁 당시 교전 당사자일 뿐만 아니라 정전협정의 구속을 받는 집행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권한을 맡기고 있다. 이를 빌미로 북한은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협상에서 한국을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등 정치·외교적 공세를 펴왔다. 정전협정을 적용하면 한국은 북한이 도발을 해 와도 직접 책임을 따지지 못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책임 추궁을 의뢰해야 한다. 군사정전위가 나선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군사정전위가 조사 활동을 마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조사보고서를 제출하면 유엔군 사령관은 이를 유엔 안보리에 보고하는 절차를 밟는데, 이후의 대응 조치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어 북측의 책임을 추궁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에도 유엔사 특별조사팀이 조사에 들어갔지만 북한은 자신들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조사 결과를 부인했다. 꼭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아니더라도 정전협정은 60년간 달라진 남북 간 상황에 맞는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도 1996년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정전협정을 대신하는 ‘잠정협정’을 제안한 바 있다. 평화협정 체결 시까지 정전 상태를 평화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잠정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었지만, 주체를 북·미로 한정한 게 문제다. 정전협정이 그렇듯, 한국이 배제된 협정은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평화체제로의 전환 과정에 제도상이 아닌, 실질적인 안전관리 방안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美 학자 ‘北의 북침 유도설’ 제기

    [정전협정 60년] 美 학자 ‘北의 북침 유도설’ 제기

    캐스린 웨더스비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1950년 6월 북한이 국지 도발로 남한의 반격을 유발한 뒤 그것을 빌미로 전면 남침에 나서기로 계획했다는 내용의 ‘북침 유도설’을 지난 21일(현지시간) 제기했다. 이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24일 보도된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남침 유도설을 공식 부인하면서 나온 주장이어서 주목된다. 웨더스비 교수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이날 미국 워싱턴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원래 1950년 6월 옹진반도를 공격한 뒤 남한이 반격해 오면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며 전면적으로 남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면서 “하지만 6월 21일 남한군이 북한군의 낌새를 알아채고 옹진반도에 병력을 증강시키자 초조해진 김일성은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남침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꿔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승인을 받은 뒤 6월 25일 남한을 전면 침공했다”고 밝혔다. 웨더스비 교수는 1990년대 초 기밀 해제된 소련의 한국전 관련 문서들을 발굴, 분석함으로써 한국전이 북한과 소련, 중국이 정교하게 기획한 남침이었음을 규명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웨더스비 교수는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이 남침이라는 것은 기록으로 입증된 명쾌한 진실”이라면서 “간절하게 전쟁을 원한 김일성이 스탈린을 수차례 설득해 승인을 받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커밍스 ‘자기 수정’ 엇갈린 반응

    [정전협정 60년] 커밍스 ‘자기 수정’ 엇갈린 반응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전쟁은 남침이며, 미국이 의도적으로 전쟁을 유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역사학)의 발언에 대해 학계의 입장이 엇갈리는 등 파장이 일고 있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평소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논리는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가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 충분히 밝히지 못한 부분을 커밍스 교수가 (1981년과 1990년에 각각 펴낸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1, 2권에서) 밝힌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주장에는 객관적 사실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1980년대 중반 커밍스의 주장이 각광을 받았지만 노태우 정부 시절 소련에서 남침에 대한 자료가 나오면서 커밍스의 논리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게 학계에서 밝혀졌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상상하고 추론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커밍스의 장점은 한글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원문을 봤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반면 오역도 많았다는 것이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의 지적이었다. 커밍스의 주장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학자들은 이번 발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통일연구원의 김진하 박사는 커밍스 교수의 발언에 대해 “소련이 붕괴된 이후 캐스린 웨더스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교수 등 역사학자들에 의해 (기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 유도설과 같은 가설적인 주장은 버티기 어려워졌다. 커밍스의 발언은 그에 대한 해명이 아닐까. 학자로서 객관적 사실과 충돌되는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연구원의 조민 박사는 “커밍스의 ‘자기 수정’은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커밍스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줄곧 본인의 한계에 대해 얘기해왔다. (자신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의 논지를 처음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조 박사는 “수정주의 학파는 1990년대 이후 냉전의 책임을 미국에 맞췄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못했다. 당시 커밍스도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에 포커스를 맞췄던 것에 대한 한계를 계속해서 인정해 왔다. 실제로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이 기획한 것인데 그런 점에서 커밍스의 초기 접근법은 보다 다양한 견해를 검토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反식민주의 근거한 내전 규정 잘못…공산주의 vs 反공산주의 이념전쟁”

    [정전협정 60년] “反식민주의 근거한 내전 규정 잘못…공산주의 vs 反공산주의 이념전쟁”

    캐스린 웨더스비(62)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지난 21일(현지시간) 워싱턴의 존스홉킨스대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을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의 한반도 내부에서 발생한 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일어난 내전으로 보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의 시각을 반박했다. →정전 협상 과정은. -1951년 7월 처음 협상이 시작됐으나 미국과 중국, 소련의 소극적 자세로 협상이 지체됐다. 당시 북한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은 미국의 엄청난 공습을 견딜 수 없어 조속한 정전을 원했다. 하지만 미국이 정전에 따른 경계선을 당시의 전선에서 훨씬 북쪽에 그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중국이 반대하면서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후 미국의 공습이 더욱 심해지자 1952년 초 북한 지도부는 다시 중국에 정전을 간청했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은 북한에 보낸 메시지에서 “전 세계적인 공산주의 투쟁을 위해서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일축했다. 소련은 한국전쟁으로 미군을 극동에 묶어둠으로써 동유럽에서 군사적 우위를 구축하려 했다. 1952년 가을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공산당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북한이 잃을 것이라고는 사람밖에 더 있느냐”면서 정전을 반대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정전 협상이 진전됐다. →북한의 목소리가 그렇게 약했나. -협상 과정에서 김일성의 역할은 미미했다. 모든 결정은 중국과 소련 지도자에 의해 이뤄졌다. 중국 협상대표가 전보로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에게 보고하면 중국은 그것을 다시 스탈린에게 보냈다. 역으로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지시하면 중국은 다시 중국 협상대표에게 하달했다. 북한과는 일부만 상의했을 뿐이다. 앞서 중국은 1950년 가을 참전하자마자 북한군의 지휘권을 접수했다. 김일성은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중국은 중국군의 역할이 압도적이라는 이유로 지휘권을 고집했고 스탈린도 중국 편을 들었다. →미국이 정전에 동의한 이유는. -미군도 많은 인력과 물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은 압도적인 무기를 갖고 있었지만 지상에서 중국군을 이길 수 없다는 자괴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여전히 한국전쟁은 남침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남침이라는 것은 기록으로 입증된 명쾌한 진실이다. 김일성은 간절히 전쟁을 원했다. 그는 중국 권력 장악에 성공한 마오쩌둥처럼 한반도 전체로 공산혁명을 확산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북한은 소련에 아주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가톨릭의 교황, 김일성은 신부와 같은 위상이었기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말을 따라야 했다. 1949년 9월 김일성이 남침 승인을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미군 개입 가능성을 우려하며 반대했다. 스탈린은 1950년 1월 말 김일성이 다시 요청했을 때에야 남침을 승인했다. 북한은 원래 옹진반도를 공격해 남한이 반격하면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고 핑계를 대며 전면적으로 남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6월 21일 남한군이 북한군의 공격 낌새를 알아채고 옹진반도에 병력을 증강시키자 초조해진 김일성은 38선 전역에서 남침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커밍스 교수는 1949년에 38선 부근에서 있었던 남북 간 무력 충돌의 대부분이 남한군의 공격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남한이 많은 공격을 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남한 지도부도 통일을 원했다. 하지만 38선 근처에서 벌어졌던 소규모 무력 충돌과 전면전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만약 북한이 침공하지 않았다면 남한이 침공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미국이 전쟁을 승인하고 지원했다면 이승만은 아주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전쟁을 원치 않았고 무기가 없었던 한국군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었다. →미국이 남한을 미군 방어선인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한 의도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의 규모를 줄이라는 요구가 미국 내에서 많았기 때문에 제한된 자원으로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최우선 관심 지역은 일본이었고 그다음이 필리핀이었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이 국제전이라기보다는 내전이라고 하는데. -남북한만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싸움이기도 했다. 만약 스탈린이 승인하지 않았다면 한국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은 남한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보다 훨씬 강했다. 만약 한국전쟁이 내전이라면 동서독 간에는 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겠나.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혁명세력 대 친일세력의 반(反)식민주의 전쟁으로 규정했는데. -공산주의 대 반(反)공산주의의 이념전쟁으로 봐야 한다. →한국전쟁의 교훈은. -근본주의적 이념의 파괴성을 경험한 것이다. 억지력의 중요성도 깨닫게 했다. 옛 소련 문서에는 “만약 1949년에 미국의 한국 방어 의지가 분명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부분이 있다. 애치슨 라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커밍스, 남침유도설 30년만에 부인

    [정전협정 60년] 커밍스, 남침유도설 30년만에 부인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역사학)는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침이며 미국이 의도적으로 전쟁을 유도하지도 않았다고 지난 20일(현지시간) 밝혔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미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이날 서울신문과 가진 단독 인터뷰를 통해 “나는 남침 유도설을 말한 적이 없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커밍스 교수는 1981년과 1990년에 각각 펴낸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1, 2권을 통해 한국전쟁이 미국의 남침 유도에 의해 일어났다는 수정주의 사관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고, 이에 따라 반공주의 시각에 치우쳐 있던 기존 한국전쟁 연구에 큰 충격파와 함께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공개된 옛 소련의 기밀문서를 통해 북한에 의한 선제적 남침설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자리 잡으면서 남침 유도설도 크게 위축돼 왔다. 결국 커밍스 교수는 이날 인터뷰를 통해 그가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남침 유도설을 공식 부인한 셈이다. 커밍스 교수는 인터뷰에서 “나는 수정주의자도 아니고 미국과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말한 적도 없다”면서 “전두환 정권이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1985년부터 그렇게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딘 애치슨 당시 미 국무장관이 ‘애치슨 라인’에서 남한을 배제하는 등 모호한 전략을 펴는 바람에 김일성이 어리석게도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면서 “애치슨 장관이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내가 1990년에 쓴 책은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됐다는 기존의 관념을 허물려는 시도였다”면서 “한국전쟁은 1945년 미국이 한반도 분단을 일방적으로 결정한 이후 일어난 일련의 사태와 일제강점기에 불거진 한반도 내부 모순에 뿌리를 둔 만큼 다각도로 원인을 진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커밍스 교수는 “1949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38선 부근에서 남한이 많은 도발을 했고 그해 8월 옹진, 개성, 철원 등지에서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격화됐다”며 남한의 군사적 자극이 한국전쟁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라는 시각을 보이면서 “한국전쟁의 발발에는 미국과 남한도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샬러츠빌(미 버지니아주)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北, 서울시민 50만명 북송 추진했다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한 지 3주 만에 서울시민 50만명을 대상으로 부역자를 차출, 북송시킬 계획을 추진한 사실이 소련 정부 문건을 통해 확인됐다. 미국 시카고 교외에 거주하는 재야 사학자 유광언(71)씨는 최근 워싱턴DC 소재 우드로윌슨센터의 디지털 기록보관소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 주재 소련 대사 테렌티 슈티코프가 소련 당국에 띄운 전보문을 찾아 22일(현지시간) 연합뉴스를 통해 공개했다. 1950년 7월 17일 타전된 전보문에는 북한 군사위원회가 서울의 식량난 극복을 명목으로 이날 공표한 포고령 제18호 내용이 들어 있다. 포고령에는 “서울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의장) 이승엽을 수장으로 하는 3인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서울·경기·강원 남부의 임시인민위원회 의장에게 해당 지역의 가용 식량자원 규모를 신속히 산출하고 인민군 내에 음식물과 교환할 수 있는 불필요한 재화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는 임무를 맡긴다”는 등의 시행 세칙이 담겨 있다. 특히 서울시 임시인민위 의장에게 서울시민 50만명을 농촌 지역으로 분산시키거나 북한의 각 부처와 기관이 요청한 노동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북송시킬 계획을 수립하도록 명시돼 있다. 북한의 각 부처와 기관의 수장, 평양시 인민위원회 의장 등에게는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의장과 합의하여 필요한 숫자의 인력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센터가 소장한 소련 정부 문서 가운데는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인 1950년 3월 9일 북한 김일성 주석이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안드레이 비신스키(1949~1953) 소련 외무장관에게 군사·기술 지원을 촉구한 내용의 편지도 포함돼 있다. 김일성은 편지에서 소련의 군사·기술 지원 대가로 1억 3500만 루블(약 47억원) 상당의 천연자원 제공을 제안했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브루스 커밍스 美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말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60년] 브루스 커밍스 美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말하는 ‘한국전쟁’

    “한국 사람들은 왜 어느 쪽이 전쟁을 일으켰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브루스 커밍스(70)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는 지난 20일(현지시간)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북한이 한국전쟁의 책임을 놓고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비난전을 그만둬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의 부인인 한국인 우정은 박사가 학장으로 있는 버지니아주립대 캠퍼스 내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커밍스 교수는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구체적인 날짜와 한국인 이름을 자료도 없이 술술 말해 한국전쟁 연구의 최고 권위자임을 실감케 했다. →미국과 한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당신의 수정주의 이론에 반해 옛 소련의 기밀문서를 통해 북한의 남침이 확인됐는데. -나는 수정주의자가 아니라 개척자다. 내가 쓴 글은 미국 정부의 1급 비밀 문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는 미국과 한국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1985년부터 전두환 정권이 그렇게 (조작)한 것이다. 내가 1990년에 쓴 책은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됐다는 기존의 관념을 허물려는 시도였다. 한국전쟁의 뿌리는 1945년 이후 발생한 일련의 일들에 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한반도 분단을 결정했고 소련이 나중에 그것을 수용했다. 그것이 한국전쟁의 기반이 됐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 진주했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았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내전이다. 나는 북한이 남한을 6월 25일 침공한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침공이 남한의 자극에 의해 일어났는지 여부다. 1949년 8월 옹진, 개성, 철원 등지에서 남북 간 충돌이 격화됐다. 이승만이 공격을 원할 때 주한 미국대사가 반대했고, 김일성이 공격을 원할 때 주북 소련대사가 반대했다. 양측의 공격 욕구는 이렇게 억제됐다. 그리고 이듬해 봄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이 김일성에게 제한적인 대남 공격을 승인한 것이다. →소련 기밀문서 공개에도 불구하고 기존 이론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얘기인가. -기밀문서를 통해 소련의 연관성이 예상보다 깊숙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을 빼면 나머지는 별로 수정할 필요를 못 느낀다. 나는 내가 했던 일에 대해 여전히 굳은 확신을 갖고 있다. 다만 책을 쓰는 시점에 아직 나오지 않은 문서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나는 다른 학자들이 하지 못한 방대한 북한 문서를 연구했다. 나는 지난 20여년간 내가 하지도 않은 말 때문에 공격받았다. 사람들은 내 책을 읽지도 않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미국이 일부러 유도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 -안 했다. 나는 단지 딘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이 탱크와 항공기를 한국에 두기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무기로 이승만이 북한을 공격하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그 결정으로 인해 남한은 북한이 6월 25일 침공했을 때 대처할 무기가 없었다. 애치슨은 한국에 대해 매우 모호한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어리석게도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애치슨이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고 그로 인해 미국은 많은 ‘옵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만약 이승만이 공격하면 미국은 지원하지 않는 반면 북한이 공격하면 이승만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애치슨이 남한을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한 이유는 이승만이 미국을 등에 업고 북한을 공격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이 북한을 침공할 가능성도 있었다는 얘기인가. -1949년 5월부터 12월까지 38선 곳곳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싸움을 남한이 먼저 시작했다. 따라서 1950년 6월 25일의 침공은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켰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1949년 8월 주한 미국대사는 워싱턴에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이 북한군의 옹진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철원을 공격하려 한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의 본질은 당시 남북한의 지도부가 서로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 모두 뜨거운 감자를 두 손에 쥐고 있는 꼴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그해 12월부터 한국군에 “38선에서 도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후 38선 남쪽이 조용해졌다. 남한의 공격을 남침 명분으로 삼으려던 김일성이 1950년 2월 주북 소련대사에게 “왜 남한이 요즘 공격을 안 하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남한을 배제한 것은 북한의 침공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1949년 6월 30일 남한에 있던 마지막 미군이 오키나와로 나간 직후 애치슨 장관이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에게 ‘만약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 유엔에 회부한다’는 메모를 건넸다. 한국전 발발 1년 전에 이미 전쟁 가능성을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스탈린이 승인하지 않으면 북한은 남한을 침공할 수 없는데, 스탈린은 침공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소련이 2차 대전의 후유증 때문에 새로운 전쟁에 뛰어들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또 스탈린이 허락지 않으면 감히 중국도 전쟁에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스탈린이 통제하는 획일적인 공산주의가 있다고 잘못 추정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특징은 무엇인가. -반(反)식민지 전쟁이라는 점에서 베트남전과 매우 비슷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빨치산 출신 김일성 등은 북한을 접수한 반면 남한에서 김구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밀려났다. 남한에서 미국은 일본 경찰과 장교 출신들을 기용했다. →한국에서는 내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곳에서 8마일(약 12.8㎞)만 리치먼드 쪽으로 가면 남북전쟁박물관이 있다. 거기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남군을 침공할 명분을 얻기 위해 남군의 공격을 유도하는 속임수를 썼다’는 내용이 씌어 있다. 남부 사람들은 남북전쟁이 내전이 아니라 주(state)들끼리 벌인 전쟁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이 6월 25일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만 나쁘고 남한은 결백한 게 된다. →한국과 미국도 한국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얘기인가. -미국의 책임이 크다. 미국은 38선을 그을 때 어떤 나라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쁜 결정이었다. 7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반도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이승만도 큰 책임이 있다. 그는 일본군에서 복무한 장교를 기용했다. →결국 한국전은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발생했다고 봐야 하나. -아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국 내 모순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45~1950년 사이 일련의 사태들이 영향을 줬다. →지난 60년간 정전체제는 잘 운영됐다고 보나. -아니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 매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다. 정전체제는 평화협정으로 대체돼야 한다. 중국과 소련은 1990년대 초 남한을 승인했지만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의 교훈은. -미국인으로서 나는 한국전쟁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열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서 김일성의 반(反)식민지 운동에 봉착한 것이다. 1944년 국무부 문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인과 진정한 관계가 없는 반면 만주의 빨치산은 일본군에 잘 대적하고 있다”면서 “김일성을 접촉해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현실화했다면 한국전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정전 60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인들은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1997년 북한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갔을 때 한 북한인이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더라. “많은 원인이 복합작용한 내전”이라고 답했더니 그는 “한민족에 대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이라고 하더라. 한국전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난 게임’을 멈추고 화해해야 한다. 글 사진 샬러츠빌(버지니아주)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학(동아시아 전공) 박사 출신이다. 1960년대 후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한국 현대사 연구에 천착했다.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반공주의에 치우친 기존 연구의 평면성을 넘어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식민지와 냉전, 계급 갈등이라는 전쟁의 구조적 기원을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전 연구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1980년대 통일, 반미 운동과 맞물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전쟁 연구는 커밍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생겼다.
  • 北 김계관 “6자회담 등 대화로 核 해결 원해”

    北 김계관 “6자회담 등 대화로 核 해결 원해”

    북한 김계관(왼쪽) 외무성 제1부상이 ‘6자회담을 포함한 각종 대화’를 통해 핵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북한이 국방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과의 고위급 대화를 제의한 직후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일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김 제1부상은 이날 베이징에서 진행된 북·중 외교 당국 간 첫 전략대화에서 “조선(북한)은 유관 당사국과의 대화를 희망한다”면서 “6자회담을 포함한 어떠한 형식의 회담에도 참가해 담판(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핵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제1부상은 ‘조선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유훈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김 제1부상의 이 발언은 최근 방중한 최룡해 북한군 총정치국장의 발언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이에 대해 중국 장예쑤이(張業遂·오른쪽) 외교부 상무(수석) 부부장(차관)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 한반도의 평화 안정 유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은 유관 당사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면서 “중국은 당사국 사이의 대화를 지지하고 조기에 6자회담이 재개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 화춘잉(華春瑩)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북한 김 제1부상과 장 상무 부부장을 단장으로 한 양자 대표단의 전략대화가 오전 9시 30분 시작돼 오찬까지 이어졌으며 핵 문제 등 한반도 주요 현안 및 북·중 관계 개선 방안 등이 논의됐다”고 밝혔다. 또한 화 대변인은 “김 제1부상 일행은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사무특별대표도 만났으며 다른 외교부 고위 관리들과도 만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외교 소식통은 “김 제1부상 일행은 식사를 마친 직후 즉각 지방 시찰 일정에 돌입했으며 오는 22일 중국을 떠난다”고 말했다. 김 제1부상 일행은 회담 직후 다롄(大連)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으며 함께 방중한 최선희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이 줄곧 동행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김 제1부상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작년 2월 베이징에서 글린 데이비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회담한 이후 처음이다. 한편 한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조태용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18일(현지시간) 미 국무부에서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만나 북한이 제안한 북·미 고위급 회담에 대한 대응 방안 등을 협의했다. 조 본부장은 이날 미국 워싱턴 덜레스공항에 도착한 뒤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행동을 통해 진정한 비핵화 의지를 보여 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 양국은 비핵화 의지를 확인할 구체적인 기준 등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조 본부장은 이어 한·미·일 3국 6자회담 수석대표들과 회동한 뒤 21일 베이징에서 중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우다웨이 대표와도 만날 예정이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여의도 블로그] ‘북침’ 정확한 뜻 몰랐다면 역사교육 잘못된 탓

    동풍(東風)은 동쪽으로 부는 바람인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인가? 답을 아는 일이 중요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시험에 나오면 맞히거나 틀리면 되니까 정도의 문제일 수 있다. 뒷날 동풍이 요즘 축약식 표현으로 ‘동·부·바’ 또는 ‘동·불·바’로 표현돼 출제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6·25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이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완전히! ‘위안부’(慰安婦) 얘기를 먼저 해 보자. 누군가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부인’ 아니냐고 한다면 피가 거꾸로 솟을 일 아닌가. 그 누군가가 한국의 학생들이라면 얼마나 자괴스러운 일인가. 분을 치밀게 하는 것은 ‘역사성의 결여’일 것이다. 위안부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지닌 역사성은 한국인이라면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해야 한다. 반드시! 유대인이라면 ‘홀로코스트’를 알아야 하듯. 북침, 남침이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분명, 그럴 일이다. 우리는 특히나 1980년대 이 문제로 홍역을 치렀기에 더욱 그렇다. 어느 외국 학자가 북침설을 주장하고 몇몇 국내 학자들이 이에 동조하기 시작하면서 그 시기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큰 혼동에 빠졌다. 1990년대 초 옛 소련이 붕괴해 관련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까지 남침, 북침으로 싸우고 있을지 모른다. 남침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는 문서가 나온 뒤에도 일부 학자들은 남침 유도설이니 어쩌니 하는 ‘변종 학설’로 진실을 호도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뢰’의 벽에 틈이 생겼다. 남침은 어떤 역사성을 담고 있나? 북이 남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음과 그러기 위해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을 오가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승낙을 얻어내 각종 병참을 지원받은 사실 등이다. 기습의 결과, 개전하고 단 3일 안에 당시 남한 병력의 50%에 가까운 4만 3000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서울신문이 최근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6·25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설문조사를 해 보니 충격적인 결과가 나와 이를 보도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이를 인용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랬더니 “‘북한 침공’을 ‘북침’으로 답한 것뿐인데 웬 호들갑이냐”는 식의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북의 기습 남침’은 고정 용어, 그 자체로 알고 있어야 한다. ‘위안부’처럼. 이 표현들을 몰랐다면 이에 관한 전반적인 교육이 통째로 결여됐거나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하나 더. 남침과 위안부, 어느 것이 더 어려운 단어인가?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北 3代 ‘비핵화’ 차이점은

    북한 국방위원회가 지난 16일 대변인 중대담화를 통해 언급한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조선반도 비핵지대화’ 주장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 폐기도 원한다는 김정은식(式) 논리는 핵무기를 동원한 군사훈련을 금지해 한반도 주변 지역을 ‘비핵지대화’해야 한다는 과거 주장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다만 미국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북한의 핵 포기도 없다는 점을 보다 분명히 했다는 게 특징이다. 김일성·김정일 2대를 걸쳐 주장해 온 북한식 비핵화 논리를 이번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가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한·미동맹 와해를 겨냥한 김일성·김정일식 비핵화 주장의 확장판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을 앞세워 비핵화를 언급했지만 이런 점에서 큰 틀의 입장 변화가 보이지는 않는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궁색한 처지에 놓일 때마다 국면 타개용으로 비핵화 논리를 펴왔다. 그렇지 않을 때는 다시 핵무장을 주장하는 등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 김 위원장은 생전 “한반도의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수차례 언급하면서도 실제로는 핵개발에 전력했다. 일각에서는 국제사회를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이었다고 평가한다. 2005년 방북한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김 주석의 비핵화 유훈을 언급해 놓고 이듬해 보란 듯이 1차 핵실험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핵무장론은 김정은 체제에 와서 더 노골화됐다. 북한 매체들은 2011년 12월 김 위원장 사망 직후 그의 주요한 업적으로 북한의 핵보유국화를 들었다. 김 위원장이 김 주석 사망 이후 김 주석의 비핵화 유훈을 먼저 언급한 것과 사뭇 다르다. 지난해 4월에는 아예 헌법을 뜯어고쳐 북한은 ‘핵보유국’임을 명시했다. 남북 당국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에 북측 대표로 나섰던 김성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도 지난 4월 북한에서 열린 한 특별좌담회에서 남측은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北 진정성 회의적… 핵개발 포기한 적 없어”

    “北 진정성 회의적… 핵개발 포기한 적 없어”

    브루스 클링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16일(현지시간)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전날 북한의 북·미 고위급 회담 제의에 대해 “북한의 진정성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미국에 고위급 회담을 제의한 의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현 시점에서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진단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진정성에는 회의적이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최근 열린 한·미, 미·중 정상회담과 이달 말 열릴 한·중 정상회담 등 주변국의 공조 움직임에 압박을 느껴 회담을 제의한 것은 아닐까. -한·미·일이 제재를 포기하지 않고 압박을 지속해 온 것은 맞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중국의 대북 정책이 실제 얼마나 변했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중국이 변했다는 추측성 언론보도는 많지만 아직 중국이 변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온건하게 이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톰 도닐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 8일 미·중 정상의 대북정책 합의 사실을 강조했지만, 거기에서도 중국이 제재를 한층 강화할 것이라는 얘기는 빠져 있다. →미국 정부가 북한의 회담 제의를 수용할까. -미국 정부도 북한의 진정성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들어 중요한 대화 시도가 두 번이나 무산된 바 있다. 특히 지난해 2·29 북·미 합의 무산은 충격이 컸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진지함이 결여된 대화 제의는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훈”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실제 비핵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나. -김일성은 생전에 한반도 비핵화를 말했지만 뒤로는 핵개발을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까지 김일성 통치하에서 북한은 계속 핵무기를 개발해 왔다. 이후 김정일 정권 들어서도 북핵 6자회담에서 핵 포기를 약속해 놓고 뒤로는 핵 개발을 계속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北 둘러싼 6월… 비핵화 기싸움 분수령

    북한의 핵 협상 얼굴마담 격인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방중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북핵 외교판’이 커지고 있다. 북 비핵화 의제가 연쇄적으로 다뤄지는 양자 및 다자 접촉이 집중된 6월이 ‘비핵화 기싸움’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다음 달부터는 7·4공동성명 41주년, 김일성 주석 19주기(8일), 김정은 원수 추대(17일), 북한 전승절인 정전협정(27일) 60주년 등 북측이 체제 결속 강화 기회로 삼고 있는 정치 일정이 줄지어 있다. 김 제1부상은 19일 방중, 장예쑤이(張業逐)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 전략대화를 한다고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17일 밝혔다. 북한 고위 인사의 방중 일정을 중국이 앞당겨 밝힌 것은 이례적이다. 게다가 시점도 한·미·일 6자회담 수석대표의 워싱턴 회동과 겹친다. 이 때문에 북한이 김 제1부상을 앞세워 남북당국회담 무산 및 미국에 대한 고위급회담 제의 배경 등을 설명하고, 북·미 대화를 위한 중국의 역할을 요구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북핵 외교의 ‘정점’은 27일로 예정된 한·중 정상회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중 양국 정상의 비핵화 메시지 수위가 관건이다. 미·중 정상회담에 이어 한·중 정상이 공동선언문 등을 통해 북핵 불용 등을 공식 천명하게 되면 한·미·중 3국의 안보 목표는 북핵 폐기로 일치하게 된다. 한국은 19일 워싱턴에서 미·일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을, 21일 베이징에서는 중국과 비핵화 의제 조율에 나선다. 이와 관련, 글린 데이비스 미 6자회담 수석대표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워싱턴의 한 포럼에서 “북한 비핵화를 위한 유일한 외교적 해법은 미국 등 관련국들이 결속해 북한에 비핵화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데 있다”며 북핵 외교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바 있다. 사상 첫 한·미·중 3국 외교장관 회동 가능성도 타진되고 있다. 정부는 이달 30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한·미·중 3자 대화를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윤병세 외교장관, 존 케리 국무장관, 왕이(王毅) 외교부장의 3자 회동이 성사될 경우 강력한 대북 압박 공조 메시지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다. 북한 박의춘 외무상이 매년 ARF에 참석해 온 만큼 남북 간 급(級)이 맞는 외교장관 접촉 가능성도 주목할 대목이다. 남북은 이번 ARF 의장 성명에 비핵화 이행을 문구로 포함시키는 문제를 놓고도 치열한 외교전을 펼 것으로 관측된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사설] 北, 美에 추파 앞서 남북대화 응하라

    북한이 어제 북·미 당국 간 고위급 회담을 미국에 전격 제안했다. 북한 국방위원회는 이날 대변인 명의의 중대 담화를 통해 “조선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미국 본토를 포함한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담보하는 데 관심이 있다면 조(북)·미 당국 사이에 고위급 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북이 우리가 그토록 기대하던 남북 당국회담을 수석대표의 격을 핑계로 무산시켜 놓은 지 불과 5일 만에 새삼스레 미국에 대화의 손길을 내미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미국은 그동안 북·미 대화에 앞서 북한의 선(先)비핵화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 만큼 북의 제안에 어떤 자세를 보일지 주목된다. 이번 담화문은 국방위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의중이 실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회담 의제도 “군사적 긴장 완화 문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문제, 핵 없는 세계 건설 문제 등을 폭넓게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대화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특히 북핵 문제와 관련해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훈”이라고까지 밝혔다. 북은 지난달 최룡해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시진핑 중국 주석과 만났을 때도 한반도 비핵화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북은 이번에 북·미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에 강한 ‘추파’를 던진 셈이다. 하지만 북은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우리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정책적 과제”라면서도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의 당당한 지위는 흔들림 없이 유지될 것”이라는 자가당착적인 주장을 폈다. 비핵화를 고리로 미국을 대화 테이블에 앉힌 뒤 핵 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핵군축 회담을 하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담화문을 보면 북은 과거의 입장에서 전혀 변한 게 없다. 진정성이 담긴 대화 제의라고 보기 어렵다. 오는 18~20일 한·미·일 정부 간 북핵 협의와 27~28일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미 대화를 제의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난 6일 미·중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남북 대화를 제의한 것과 비슷한 맥락 아닌가. 한·미·중 간의 대북 공조체제를 흔들고 중국 등 국제사회를 향해 대화를 하고자 한다는 명분을 쌓으려는 꼼수도 엿보인다. 설령 북측의 미국과의 대화가 진심이라 해도 그 또한 우리 측에 제안한 남북 당국 간 회담이 북·미 대화의 징검다리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외침이 무색하게 진짜 논의해야 할 비핵화 문제에 대해서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운운하며 미국하고만 대화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진정 미국과의 대화를 원한다면 남북 대화부터 먼저 여는 것이 순서다.
  • [北, 북·미 고위급회담 제안] 전방위 대화공세로 고립 탈피… 한·미·중 북핵 공조 흔들기 전략

    [北, 북·미 고위급회담 제안] 전방위 대화공세로 고립 탈피… 한·미·중 북핵 공조 흔들기 전략

    남북 당국회담이 결렬된 지 5일 만에 북한이 북·미대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난달 14일 일본과의 대화를 시작으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특사(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방중에 이은 ‘전방위적 대화 공세’의 연장선에 있다. 비록 남북 당국회담은 무산됐지만, 국제사회 공조에 따른 고립국면에서 벗어나려고 북한 수뇌부가 전략을 수정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북한이 제안한 고위급회담 의제 가운데 ‘군사적 긴장완화’나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등은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핵 없는 세계건설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껏 미국이 북·미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어 온 ‘선(先) 비핵화 조치’ ‘진지하고 의미 있는 변화’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체코 프라하 연설에서 ‘핵 없는 세계’란 표현을 빌려 온 북한이 과거 핵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더는 거론하지 말고, 현재 핵 능력을 인정받은 채 이를 토대로 협상을 해나가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즉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미국과 군축 협상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북한의 북·미대화 제의는 중국과 한국에 보내는 정치적 메시지로도 해석된다. 미국의 수용거부 가능성을 염두에 둔 중국에 대한 ‘보여주기용’일 수 있다는 의미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닌 만큼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칠한 대화제의”라고 평가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한·미·중의 북핵 공조를 흔드는 동시에 남북 당국회담 무산 이후 언제든 ‘통미봉남’(通美封南)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진단했다. 정부는 북한이 대화를 제의한 상대가 미국인 만큼 우리가 나서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미국정부가 북한에 대한 대응을 지켜볼 뿐이지 청와대가 뭐라고 말하겠느냐”고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다. 다만 북·미대화에 앞서 북한의 실질적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에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6일 남북대화 제안(조국평화통일위 특별담화)보다 ‘격’을 높여 헌법상 최고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 대변인 중대담화 형식을 취한데다 김정은 체제에서 ‘비핵화’ 문제를 사실상 처음 언급한 데서 적극적인 대화 의지로 읽힌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북한이 의제로 내놓은 ‘핵 없는 세계 건설’과 관련, 행간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2011년 헌법 개정을 통해 핵보유국 지위를 명시한 이후 비핵화 표현 자체를 꺼리던 점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변화라는 지적이다. 특히 이날 담화에서 “비핵화는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의 유훈”이라며 처음으로 ‘김정일 유훈’임을 강조해 관심을 끌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미국과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채 나온 일방적인 대화 제안일 것”이라면서도 “‘비핵화는 수령과 장군의 유훈’ 등을 언급한 것을 보면 최근 핵보유 강화 기조와 달리 대화를 하겠다는 메시지”라고 분석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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