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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한반도 상황」 서대숙 교수 진단

    ◎“「평양 빗장」 생각보다 단단… 통일은 아직도 멀다”/북녘선 「4.19」식 급진적 변혁 기대못해/상호검증 전제되어야 군축협상 진전/통일열기 한국쪽만 “후끈”… 차분한 접근 바람직 서대숙 교수는 한국의 남북한 문제는 동서독과 다르며 통일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전망했다. 북한은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를 앞두고 있어 매우 어려운 입장에 처해있으며 동서 화해무드와 관계없이 북한은 주체사상을 고수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선 북한에는 언제 다녀왔는가. ▲지난 7월6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 갔었다. 작년에는 8월말에 가서 9월초에 나왔다. 자주 다니고 보면 더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갔었다. ○동ㆍ서독 경우와 달라 ­통일과 남북교류에 관한 견해는? ▲나는 우리나라 통일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통일은 아직도 요원하다. 한국에서 모두 마음이 들떠 있는 것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ㆍ글라스노스트 해서 조금 더 소련이 개방되고 소련에서 공산당을 개편하고 사회주의경제체제를 없애고 자기들도 잘 살아봐야겠다는 입장에서 변하고 있는데다가 동구 나라들이 다 공산당을 없애고 이제는 정말 사회주의국가 경제체제로는 못살겠다 하는데서 나온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이제는 굶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그런면에서 대내적인 원인으로 이제는 먹고 자고 입고 이런 것은 모두 해결하고 대외적으로도 떳떳하게 나가고 돈도 좀 있고 이러니 이제 나라를 찾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분으로 통일에 관한 열기가 굉장한데 우리나라의 통일이라는 것은 남한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북이 관련돼 있다. 그러니 이북하고 이남하고 같이 하지 않고서는 통일이라는 것이 안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남한에서 이북을 너무 모른다. 이북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괜히 혼자 흥분하고 있다. 이북에서는 아주 완고하게 자기주장을 말하는 그런 곳이다. 지난 해에도 평양에 가서 김일성대학 총장도 만났는데 김일성대학에서 나 아니라도 나같은 사람,외국에서 와서 반공적이 아니고 친한적이 아닌 좀더 객관적으로 남북한사정을 보는 사람들을 그곳의 학생들과 토론하게 하지도 않는다. 「우리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의 만세를 불러야만 그곳에서 문을 열어주고 「아 이 사람은 애국자다」하는 것이지 아직은 이북이 열려져 있거나 열려지려는 태도는 아니다. 그러니까 통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남한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북에 있을때도 그곳의 학자들과 임수경양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신들의 운동선수가 이북은 올림픽을 보이콧하는데 어떻게 몰래 남한에 가서 마라톤에서 1등을 하고 노태우 대통령 앞에 가서 인사하고 나는 고향이 평양이니 휴전선을 통해 이북으로 오겠다고 할때 당신들이 받아주겠는가? 그리고 처벌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더니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행진하겠다고한 범민족대회의 경우도 그렇다. 이북에서 자기들의 통일주장을 지지하는 재일동포ㆍ재미동포ㆍ재중동포 등 다 모아다가 전국에서 왕왕하고 해서 통일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나는 대한민국 정부나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나 다 통일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제도나 민도나 정치적ㆍ경제적 상황이 너무 달라 지금은 안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아직 통일이 요원하다고 말한다. ○제도ㆍ민도 너무 달라 ­북한은 다른 세상 다 바뀌어도 바뀌지 않을 무풍지대란 말인가. ▲안바뀐다. 이북의 변화는 이북체제내에서 그 사람들대로의 변화가 와야지 옛날에 있었던 4.19같이 『못살겠다 갈아보자』해서 국민이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김정일은 김정일대로 자기가 정권을 잡으면 무엇을 좀더 잘하고 이루려고 하거나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한국에서 상상하는 그런 혁신적인 변화는 없다.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군축문제가 논의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는데 의견이 접근될 수 있을지,또 고위급 회담에 진전이 있을 것으로 전망하는지. △지금 강영훈 총리와 연형묵 총리가 무슨 이유로 만나는지를 나는 모르겠다. 군축문제 같은 것은 다른 나라에서 하는 것을 보라. 소련과 미국의 경우 얼마나 힘들게 오랫동안 협상을 벌여왔는가. 미소관계가 군축문제로 좋아진 것이 아니다. 소련내의 개혁 등 다른 일로 좋아졌다. 나는 군축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군축은 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하다. 믿지 못하면 가서 조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양측이 서로 신뢰라는 것은 없다. 남한사람은 이북을 안믿고 이북도 남한을 절대로 안믿는다. 이북에서는 큰 문제가 해결되면 작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큰 문제부터 해결하자 하는데 큰 문제는 절대로 먼저 해결되지 않는다.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데 올림픽이 실마리가 못됐다. 아시안게임도 남북단일팀이 안돼 실마리가 되지 못했다. 이산가족문제도 남한문제다. 이북에는 이산가족 문제가 없다. ○“북엔 이산가족 없다” ­이북에도 이산가족이 있지 않은가.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이 남쪽에는 많지만 남쪽 사람들이 북으로 간 사람은 적다. 그때 잡혀간 사람들도 이제 거의 다 죽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 때 이북으로 간 사람은 완전히 공산주의자밖에 없다.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들은 거의안갔다. 이남에는 피란온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까 그 사람들이 고향이나 한번 가보고 가족이나 한번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데 지금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부모들은 벌써 계시지 않는다. 이번에도 내가 이북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누구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그는 이북에다 6살난 딸을 두고 왔다가 어떻게 딸의 소식을 알아서 이북에 갔다. 그 딸이 지금 46살인데 부녀간에 만났으나 정을 못느꼈단다. 그 딸은 6살 때부터 아버지를 떠나 살다가 이제 가족이 있고 또다시 같이 살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하는가.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하느님이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한다. ­한국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한국도 문제가 있다. 동서독 통일하는 것을 보고 『야 이거 우리도 하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남한사람들이 동독 서독의 경우를 보고 서독에서 막대한 돈을 투자했는데 우리도 그만큼 투자하면 되지 하는데 한국사람들이 자기를 모르는 것이다. 한국은 서독이 아니다. 개구리가 올챙이시절을 모르는 꼴이다. ○반정ㆍ친북 구분해야 ­서울에서 89년에 6개월간 강의하셨는데 젊은 학생들의 생각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나한테 제일 가슴아팠던 것은 학생들이 공부를 안하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의 학생들은 정부비판과 친북한 활동을 구별 못한다. 정부에서 잘못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과 친북한 활동을 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정치문제로 정부를 비판하는 것,예를 들어 『미군 철수하라,미국 대사관에 CIA등을 대사로 보내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나라에 사는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무조건하고 이북을 찬양하는 것,주체사상의 주자도 모르면서 얘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한에 대해 공부를 해서 북한을 많이 알아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남한정부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 맹목적으로 이북을 좋아하는 것이 어리석고,대학생답지 않게 보였다. □서대숙 하와이대 한국연구소장 ▲1931년 중국 간도 용정에서 출생. ▲1946년 월남해 연세대 정외과 1년때인 52년 도미. ▲1964년 미 콜럼비아대에서 「조선공산주의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 서울에 올 북한대표의 얼굴

    ◎기술관료 출신… 북한 권력서열 6위/연형묵 정무원총리 연형묵총리는 분단이후 최초로 한국을 공식 방문하게 되는 북한의 최고위급인사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25년생으로 올해 65세인 그는 현재 북한내 권력서열 6위의 인물. 70대 고령의 혁명1세대인 오진우(73ㆍ3위ㆍ인민무력부장) 이종옥(79ㆍ4위ㆍ부주석) 박성철(76ㆍ5위ㆍ부주석)에 이어 김영남(65ㆍ7위ㆍ외교부장) 허담(65ㆍ11위ㆍ최고인민위원회 외교위원장) 등과 함께 북한의 권력핵심을 이루고 있는 60대중반의 혁명 2세대이다. 연형묵은 김일성대학과 소련우랄공대에서 금속ㆍ전기ㆍ전자 등을 공부한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로서 북한의 행정부인 정무원의 총책임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당정치국원ㆍ당중앙위원 등을 겸직,노동당의 정책결정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1985년 정무원 제1부총리 겸 금속기계공업위원장을 맡아 정무원에 첫 진술한후 88년 12월 이근모의 후임으로 총리에 선임됐다. 83년과 84년 김일성을 수행,중국ㆍ소련ㆍ동구권 등을 방문하는 등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우며 러시아어와 불어ㆍ일어에도 능통,국제감각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연형묵은 지난 5월24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 정무원총리에 재선됨으로써 김일성부자의 신임을 다시 확인했는데 경제실무에 밝으며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기술관료출신으로 고위급회담에서 어떠한 자세를 보일지 주목된다. ◎빨치산경력 군원로 비롯,경제엘리트도 연형묵총리와 함께 서울에 오게 될 북측 대표중 김광진 대장(77)은 오진우 김철만 김광 등과 함께 현직에 남아있는 김일성의 몇 안되는 빨치산동료의 한사람이다. 인민무력부 부부장 인민군 총참모 부부총참모장 등을 겸직하고 있는 그는 1913년 만주에서 태어나 소련군에 입대,소련 포병학교를 나온 포병장교 출신이다. 인민군 창설에 직접 참여한 군원로로 특히 포병화력 증강과 현대화에 기여한 공로가 커 김일성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다고 한다. 6ㆍ25당시 민족보위성 후방총국참모장직을 맡았던 김광진은 군을 대표해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또다른 대표인 최우진(외교부순회대사ㆍ군축및 평화연구소부소장) 김영철(소장) 등과 함께 이번 회의의 주요의제가 될 남북한 군축문제와 관련,북한측의 입장을 대변할 것으로 보인다. 군대표 2인중 한사람인 김영철은 인민군 8사단장을 거쳐 인민무력부 부국장ㆍ구분대장을 맡고 있는 인물로 지난해 2월부터 남북 고위급회담예비접촉 북측 대표로 일해왔다. 가나주재대사를 역임한 최우진(57)은 군축문제와 관련,북한측 최고의 이론가이자 실무책임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난 7월5일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있었던 「한반도 평화와 안보에 관한 학술회의」에 북한측 대표단장으로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남북 고위급회담준비관계로 불참하고 대신 이형철(평화군축연구소 연구실장)을 내보냈었다. 안병수(61)는 특히 조평통서기국장 명의로 종종 대남성명을 내놓고 있는데 지난 5월7일에는 홍성철통일원장관앞으로 김일성이 신년사에서 제의한 남북 정치협상회담을 재삼 촉구하는 전화통지문을 보내기도 했다. 정무원 참사실장 백남준(61)은 지난 73년 5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자격(당시 직업동맹부위원장)으로 서울에서 열렸던 남북적십자 제6차회의에 참석했던 낯익은 인물. 김정우(48)는 71년 김일성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80년부터 대외경제사업부부부장을 맡아오고 있는 신진 엘리트. 80년대 중반이후 북한의 경제대표단을 이끌고 소련ㆍ헝가리ㆍ이탈리아ㆍ스위스 등을 방문하는 등 북한경제의 현대화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우리안 초대 주한 루마니아대사/본지 특별인터뷰

    ◎“한­루마니아 「경협의 다리」 튼튼히 놓겠다”/전자ㆍ자동차부문 한국기업 진출바라/남북대화 지원… 통일촉진에 보탬될 터/15년간 평양근무… 주민,불만 많지만 드러내지 않아 이시도르 우리안 초대 주한 루마니아 대사. 그가 서울에 부임한지도 한달이 넘었다. 북방외교의 성공으로 봇물처럼 터진 동구권외교의 개가로 서울에는 헝가리ㆍ폴란드ㆍ체코ㆍ불가리아ㆍ루마니아 등 6개국의 상주대사관이 잇따라 개설되고 특명 전권대사가 부임했지만 우리안 대사가 유독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유창한 한국어 구사능력 때문이다. 에트레 산도르 헝가리 대사와 함께 난형난제의 한국어 실력을 보이고있는 우리안 대사는 그만큼 한국인에게 친근감이 가는 인물이다. 서울시내 중심부인 뉴서울호텔에 임시대사관 사무실을 설치한 우리안 대사는 기자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한달간의 서울생활,남북한 주민의 생활상,그리고 한­루마니아관계 등에 관해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서울에는 언제 부임하셨습니까. 『7월17일 서울에 도착한뒤 19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습니다. 대사관업무도 이날부터 본격 개시 했습니다. 물론 한국과 루마니아는 지난 3월30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구요. 어쨌든 초대 상주대사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서울생활도 이제 한달이 넘은 것 같은데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은. 『외교관으로서 여러나라를 다녀봤지만 한국처럼 짧은 기간에 이처럼 높은 수준의 경제적ㆍ사회적 발전을 달성한 나라는 보지 못했습니다. 루마니아는 이러한 한국의 발전 특히 경제ㆍ과학기술분야에서 이룩한 대단한 성과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점이 루마니아가 한국과의 수교를 서두른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 당시에도 북한과는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서울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한국음식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그동안 지내시면서 음식으로 인해 곤란한 점은 없었는지요. 『북한ㆍ중국ㆍ인도ㆍ베트남 등 아시아지역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커다란 불편은 없습니다. 한국음식도 지나치게 짜거나 맵지만 않다면 잘 먹습니다. 그래서인지 서양식당보다는 한식당에 자주 가는 편이고 특히 갈비와 비빔밥은 제 집사람과 함께 즐겨 찾는 식단입니다』 ­서울의 밤거리는 익숙해지셨는지요. 『낮과 밤이 확연히 구별되는 곳이 서울이더군요. (웃음) 조그만 선술집에도 가보고 포장마차에도 가봤습니다. 특히 지난번 호텔앞 포장마차에서 「꼬치」안주와 함께 맥주를 마신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대사는 웃는 얼굴로 기자에게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어를 잘 하시는데 평양에선 오랫동안 사셨는지요. 『55년부터 60년까지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했고 80년에서 83년까지 정무참사관을 지낸 것을 비롯,모두 세차례에 걸쳐 평양주재 대사관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양에서 15년 가까이 지낸 셈이죠. 조선어(한국어가 아닌)를 배운 것도 이때구요. 그렇지만 83년 평양을 떠난 이후 한번도 조선어를 써보지 못해 약간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평양에 있을때는 KBS라디오를 통해 한국어방송도 많이 들었습니다』 ­남북한 주민들의 생활상 차이점도 피부로 잘 느끼실 것 같습니다. 『남북간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상상하기 힘듭니다. 북한으로서도 적지않은 성과를 달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북한주민들의 불만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불만이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역시 한국어를 잘 하는 에트레 산도르 헝가리 대사와는 자주 만나는가요. 『서울에 부임한 이후 공식석상에서 한번 만났습니다. 에트레 대사와 대화를 나눌 때는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특히 한국에 관해서 얘기할 때는 한국어만을 사용합니다. 오히려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어 조선어가 달라 말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고충을 토로했더니 에트레 대사는 「몇개월만 지나면 괜찮다」고 충고해 주더군요』 ­루마니아는 지난해 12월혁명 이후 어떤 상황이 빚어지고 있습니까. 『지난 5월20일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대통령과 국회상ㆍ하원의원을 선출했고 이에 따라 일리에스쿠정권이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앞으로 18개월내에 신헌법을 제정하는등 민주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짐을 떠맡고 있습니다. 현정부는 또한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을 기본골격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1백% 국가소유 형태의 경제를 30∼50% 정도 사유재산화하는 것을 이 기간동안 달성할 최대 목표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루마니아에 진출할 수 있는 유망분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TV 및 비디오 등의 전자제품과 승용차,그리고 호텔경영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 분야는 루마니아정부에서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는 분아이기도 하구요. 특히 루마니아는 이들 분야의 한국업체 진출을 활성화하기 위해 관련협정을 이른 시일내에 체결할 계획입니다』 ­한­루마니아 관계발전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시는지. 『경제분야를 중심으로 긴밀한 유대강화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며 이에 따라 정치적인 관계도 보다 결속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양국간에 정부대표단의 상호방문과 민간교류가 이어져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리라 봅니다』 ­한­루마니아 관계개선이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은. 『남북간의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하며 루마니아는앞으로 어느 일방만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북 어느쪽에서든 통일과 관련된 건설적인 제안이 나오면 이를 적극 지지할 것입니다』 서울지리를 익히기 위해 가끔씩 숙소에서 이태원까지 걸어다닌다는 우리안 대사는 2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도중 잘 모르는 사항에 대해서는 일일이 메모,상당히 진지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는 차우셰스쿠정권을 무너뜨린 이후 차곡차곡 민주화를 진행시키고 있는 루마니아를 잘 소개해달라는 부탁도 빼놓지 않았다.
  • 순수성 잃은 오사카 「조선학토론회」

    ◎북한,「학술토론회」를 정치선전장화 기도/세미나보다 친평양무드 조성 관심/3년전 논문 재탕… 학자적 양식 의문/조총련 주도로 어용학회 결성도 시도 오사카(대판)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는 다음 3가지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첫째는 학술토론의 순수성이 보장되고 있는가라는 점,둘째 분단 이후 처음으로 갖는 남북한의 본격적인 학술교류에서 학문적 수준의 우열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라는 점,셋째로는 세계조선학회가 과연 결성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첫번째 의문,학술토론의 순수성 여부는 애초부터 빛을 바랬다. 부동산투기로 돈을 벌게된 조총련계 오사카 경제법과 대학은 처음부터 이번 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함으로써 무명의 대학을 이름있는 대학으로 만들어 보자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당초부터 순수성을 결한 것이었다. 게다가 조총련의 지시에 따라 8ㆍ15 범민족대회와 발맞춰 북한의 선전공세를 위해 무드조성을 꾀한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측의 대거 참가에 따른 개방화 영향은 오히려 위험부담이 크다는 판단에 따라 불가피하게 규모가 축소된 이상 주최측과 북한 참석자들은 정치적 색채를 줄이는 등 자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세기 전통일원장관,홍일식교수(고려대),김대환교수(이대) 등 거물급을 비롯한 1백93명이나 되는 대규모 한국대표단 앞에서 11명 밖에 안되는 북한 대표단으로서는 중과부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전략을 전환,학술토론의 내용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번 대회가 예상보다 학문적 중립성이 강조된 면이 있다면 그것은 비세에 따른 불가피한 위장전술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두번째 지적인 학술토론에서의 우열 또한 분명하게 차이가 드러났다. 북한이 내세우는 역사학자 김석형(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문)은 46년 월북하기전 30대에 서울대 교수를 지낸 인물이며 임나일 본부설을 이론적으로 제압,일본 학자들조차 그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는 거물이다. 그는 3일 하오 「삼국사기의 왜침범기사에 대하여」라는 내용의 주제발표를 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가족상봉등 여러가지 의미에서 김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므로 그의 강연은 인기였다. 북한측에서 참석한 11명의 대표단 가운데 김만이 유일하게 학자다운 학자로 간주되고 있는 터여서 청중이 몰린 것은 당연했다. 그의 학설은 이런 것이었다. 『신라에 대한 왜의 침범사건기사는 기원전 50년(혁거세거서간 18년)부터 기원후 5백년(21대 소지마립간 22년)까지 30여차례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나 그 이후는 없어진다. 침범은 5세기에 가장 많아 약 15차례 자행됐으며,3세기에는 8번의 침범이 있었다. 침범 횟수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신라를 침범한 왜가 당시 야마도(나라현)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통일국가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심이 그렇게 조선반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주 신라에 출병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침범한 왜군수는 한번에 고작해야 수천명 정도임을 짐작케 한다. 또 그들은 해적일 수도 없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해적이 계통적으로 쳐들어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신라를 침범한 왜는 그 침범횟수와 규모로 보아 기원전후 시기부터 수백년간 북규슈에 존재했던 여러개의 왜소국들에서 내습한 수천명 정도의 부대들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고대 한일교류사 전공인 김의 이같은 주장은 새로운 시각으로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벌써 3년전에 발표된 것으로서 새로운 학설이 아니다. 이번 북한측 참가자들은 이처럼 묵은 학설들을 들고 나와 주최측을 비롯한 참석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대회가 이처럼 질적 향상을 도외시하고 사상적 색채만 강조해서는 활로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번째로 관심을 끄는 것은 세계학회의 구성여부이다. 본래 이 학회결성을 서두르고 있는 사람은 북경대 최응구교수를 중심으로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오청달교수 등 몇몇이다. 최응구ㆍ오청달 두사람은 이번 제3회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의 실행위원회 공동위원장이다. 최교수는 황장엽이 김일성대학 총장시절 이 대학에 유학하며 유학생회 회장을 지냈다. 이 시절 김정일은 학부에 재학중이어서 친분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김의 북경방문때 통역을 맡을 수 있을 만큼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 오교수는 조총련계대학인 오사카 경제법과대학의 상무이사로 재직중인 실력자로서 북한에 형제를 두고 있다. 그의 동생은 북송선을 탄 이른바 「귀국자」로서 이번 토론회에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북한대표단의 규모축소로 오지 못했다. 이같은 상황속에 있는 두사람은 조선학관계의 세계학회를 결성,활약의 발판을 만들어 보려고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세계조선학회는 친김정일의 북경대 최교수가 회장,조총련계의 오교수가 사무국장,운영기금은 조총련 쪽에서 나올 것이 틀림없는 구도로 짜여 있다. 이러한 학회에 한국측이 참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학 관계자료의 80%는 서울에서 공급된다. 이런 열쇠를 쥐고 있는 한국측이 참여하지 않는 세계학회는 의미가 없는 것임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조선학회나 한국학회가 아닌 「국제고려학회」의 결성쪽으로 방향을 돌리려 한다. 그 회칙 초안에 따르면 사무국은 일본 오사카에 두며 회원이 많은 나라와 지역에는 분회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명칭이야여하튼 현재와 같은 친북한인사들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학회결성은 저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오사카=강수웅특파원〉
  • 북한 원로사학자,4남매와 극적상봉/일 「조선학토론회」개막식장 주변

    ◎조총련탈퇴인사 2명,입장 거부되자 항의/“꼭 필요한 사람만 왔다”… 북,「대표단 축소」변명 분단이후 처음으로 갖는 남북한학자들의 본격적인 학술교류라는 점,북한측 대표단 규모의 돌연한 축소,남북이산가족의 상봉실현이라는 점 등에서 국내외의 관심을 끌어온 제3차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는 개막초부터 열띤 분위기를 보였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김석형씨(75ㆍ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문)는 3일 상오 11시30분 개막식이 개최된 오사카(대판) 국제교류센터 대회의장에서 동생 4명등 6명의 가족들을 45년만에 한꺼번에 만나 대회 열기를 고조시켰다. 모두 11남매중 셋째인 김씨는 지난 45년 해방 불과 2∼3개월뒤 경성대학 역사학교수로 재직하다 부인 고학인씨(56년사망ㆍ이전피아노과졸) 및 남매를 데리고 월북했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김일성대학에서 트럭을 몰고 「모시려」하자 『나를 대우해주는 곳으로 가겠다』며 가족들과 결별했다. 김씨의 부친 선균씨(46년 작고)는 한국인으로 처음 판사가 됐던 인물이며 변호사를 거쳐 초대 민선 경북지사를 지냈다. 모친도 정신여고 1기생으로,인텔리 가문 출신이었다. 이같은 가정환경속에 공산주의에 몰두했던 김씨는 가족들로부터는 거의 백안시되던 입장이었으며,스스로 월북을 선택했다고 가족들은 말한다. 이날 김씨와 상봉한 가족은 동생 석창(69ㆍ과천교회 장로),여동생 석순(65ㆍ성악가ㆍ뉴욕거주) 석수(61ㆍ숭실대 대학원장 최명관씨 부인) 성은씨(59ㆍ부산거주) 등 4명의 동생과 매부 최명관씨(65),최씨의 딸 선혜씨(40ㆍ전 대학강사) 등 6명이었다. 이들은 이날 상오 개막식이 끝날때쯤 식장으로 찾아와 재회를 이루었다. 식장 앞쪽에 앉아 있던 김씨는 여동생들이 『오빠』라며 달려와 포옹하자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 동생들의 소개를 받고 난 김씨는 『여관은 어디 들었나,전화번호는…』하고 물었으며,동생들이 『한방에서 같이 자고 식사라도 하면서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해요』라고 말하자 『그래,전화해서 식사나 하자』라고 대답했다. 한편 이날 개막식장에서는 조총련을 탈퇴한 하수도씨(61)와 김영성씨(67)등 2명이 『왜 초대장을 보내놓고 입장을 거부하는가』라며 격렬하게 항의,주최측 관계자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하씨는 주최측에서 보낸 초대장을 꺼내 보이며 『개막식장에 들어가기 위해 등록을 하려하자 명단에서 이름을 빨간줄로 긋고 입장을 거부했다』고 말하고 『이것은 이 대회가 조총련에서 주관하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입장거부 이유를 설명하라』고 버텼다. 이번 대회에는 역시 북한측 참가규모가 당초 통보됐던 1백50명에서 11명으로 대폭 축소된데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에 대해 북한측 김철명단장은 2일 하오 6시30분부터 나니와회관에서 개최된 환영리셉션에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니며 꼭 필요한 사람만 오게 됐기 때문』이라고 애써 변명하고 『참가신청을 했다가 철회하면 못오는 것 아닌가. 너무 참석인원에 집착하지 말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리셉션장에서 한국측 대표인 이세기 국방정책연구소장(전통일원장관)과 홍일식 고대교수는 북한의 김철명 단장,김석형씨 등과 만나 건배를 들며 잠시 환담했다. 이소장이 김석형씨에게 『잘오셨습니다. 건강이 좋으시네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김씨는 『네,네』라고만 간단히 대답했고 김철명단장은 보도진의 집중에 『왜들 이렇게 야단스럽지요』라며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다. 홍일식교수가 김단장에게 『너무 오랜만에 만나 이렇습니다. 앞으로 자주 만납시다』라고 말하자 『이번 토론회도 조국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며 손자ㆍ증손ㆍ고손들을 위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2번째 대화에서 이세기 전장관이 『우리 서로 싸우지 말고 형제같이 다정히 지내자』고 말하고 『다음번 올때에는 북경으로 돌아오지 말고 판문점을 지나 빠른 길로 오라』며 웃으면서 제의했다.
  • 서울행 북측대표 5명의 면모

    ◎전금철은 대남협상 18년 경력/언론계 출신 포함,대학생 1명도 26일 서울에서 열리는 범민족대회 준비를 위한 제2차 예비회담에 북한측대표 5명중 단장격인 전금철은 70년대이후 대남대화때마다 등장해온 인물이다. 이번 대회 북측준비위 부위원장이기도 한 전은 72년 11월 3차 남북적십자회담때 북측 대변인으로 얼굴을 나타낸 이후 73년 남북조절위 제2·3차 회의에 간사와 대변인으로 참가했다. 그는 82년 3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된 데 이어 84년 10월 남북경제회담 대표,85년 7월에는 남북 국회회담준비접촉 대표단장,88년 8월에는 남북 국회연석회의 준비접촉대표단장 등을 맡아오면서 남북관계의 실무를 전담해 왔다. 전은 북이 내세우고 있는 남북 접촉인사가운데 허담(조평통부위원장) 윤기복(최고인민회의외교위원장·조평통위원장)에 이은 제3인자이지만 「당국」 「국회」 「민간」 등 남북대화의 성격에 관계없이 대남대화에 종사해왔다는 점만으로도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전은 24년 함북에서 태어나 만주 용정의 대성중학을졸업한 후 광산노동자로 일하다 47년 김일성대학에 입학,철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6·25당시 사단정치부선동원(중위)으로 근무하다 휴전후 노동당에 입당,조직지도부·문화부장을 거쳐 78년 당중앙위 대남비서 참사가 되었으며 81년 6월이후 현재까지 노동당 외곽단체인 조평통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전은 김일성시대의 사람이면서도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한 70년대초부터 김정일쪽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부자와 똑같은 혁명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보수파 테크너크랫」으로 볼 수 있다고 북한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의 성격은 과묵한 편이며 술·담배를 멀리하는 한편 탁구를 즐겨하고 가족은 부인과 2남1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김동국(조평통준비위원)은 50년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뒤 57년 10월 사로청기관지인 「로동청년」의 편집국장을 맡은 것을 비롯,65년 1월 책임주필을 거쳐 79년 12월부터 현재까지 금성청년출판사사장겸 책임주필의 직책을담당하면서 북한언론출판계의 실력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특히 71년 11월 사로청대표단장으로 탄자니아 독립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비롯,시리아·일본·중국·소련·루마니아·그리스·키프로스 등 세계 각국을 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져 외국어도 능통하고 사교술에도 뛰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이밖에 대표단의 일원인 손종철(준비위원) 조상호(〃) 강지영(〃·대학생) 등 3명은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어서 서울에서의 2차 예비회담때 이들의 역할이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이들중 대학생이라고 북한측이 밝힌 강지영은 북한대학생들의 대표로 북한측 준비위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북한측 대표로 서울에 와서 전금철등 다른 대표단들과 일시분란하게 행동할 것인지 나름대로 북한대학생을 대표해 남한대학생과의 교류등 독자적인 제의를 할 것인지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 북의 대남전략 변화없어 결실 기대난/첫 남북총리회담과 연형묵

    ◎연총리는 합리적 성격의 기술관료 출신/김부자 신임 두터우나 행동반경 의문 북한의 정무원총리 연형묵(65)이 오는 9월초 서울에 온다. 지난 12일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 실무대표들이 남북총리를 각각 단장으로 한 남북고위급회담 1,2차 회담을 오는 9월초순 서울과 10월 중순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키로 완전합의함에 따라 분단 45년만에 최초로 북한의 총리가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장차관급(북한의 경우 정무원 부장ㆍ부부장)을 비롯,수행원 33명,기자 50명 등 모두 90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에 오게될 연형묵총리는 현재 북한내 권력서열 6위의 혁명 2세대. 북한권력 서열상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떠받치고 있는 70대고령의 혁명 1세대인 오진우(73ㆍ3위ㆍ인민무력부장),이종옥(79ㆍ4위ㆍ부주석),박성철(76ㆍ5위ㆍ부주석)에 이어 김영남(65ㆍ7위ㆍ외교부장) 허담(65ㆍ11위ㆍ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등 60대중반의 혁명 2세대중 선두주자로 나서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김일성대학 이공학부와 소련우랄공대에서 금속ㆍ기계ㆍ전기ㆍ전자 등을 공부한 대표적인 기술관료(테크노크랫)로서 북한의 행정집행기구의 총책임을 맡고있는 동시에 당정치국원ㆍ당중앙위원 등을 겸직,노동당의 정책결정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그는 지난 85년 정무원 제1부총리겸 금속기계공업위원장을 맡아 정무원에 첫 진출,88년 12월 이근모의 후임으로 총리직에 선임됐는데 기계공업분야에 정통하며 북한의 대외경제협력 등을 추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83년과 84년 김일성을 수행,중국ㆍ소련ㆍ동구권 등을 방문하는 등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운 편이며 러시아어와 불어ㆍ일어 등에도 능통,국제감각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25년 북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70년 당중앙위 부장에 기용되면서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만경대 혁명학원 1기생으로 김정일의 선배이자 70년대 3대혁명소조운동이 벌어졌을 때 당책임지도원을 맡았던 경력이 말해주듯 김정일 후계체제의 강력한 후원자로서 앞으로 김정일의 정치ㆍ경제 참모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연형묵은 판단이 예리하고 날카로우며 합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데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동시에 김정일의 측근인 그가 앞으로 있을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어떠한 자세를 보일지 주목되고 있다. 이와 관련,북한문제전문가들은 경제실무에 밝으며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기술관료출신의 연형묵이 보다 유연한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북한이 판문점에서의 8ㆍ15 「범민족대회」개최와 제정당ㆍ사회단체가 참여하는 「통일협상회의」개최를 거듭 주장하고 있는 등 기존의 대남적화 통일전략을 바꾸지 않고 있어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얼마만큼의 결실을 거둘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 북한에 핵전문가 5천명/62년 영변연구소 설립,개발 박차

    ◎원자로 가동ㆍ미사일도 자체생산 북한이 6개월안에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외신 보도가 국민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장근모 과학기술처장관이 지난 12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원자력기구(IAEA)이사회에 참석,북한이 85년 12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고서도 전면 안전협정(Full Scope Safeguards)체결을 이행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음을 주지시키고 가입을 촉구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돌아온 직후라서 이 소식은 더욱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수단 방법을 가릴 줄 모르는 폐쇄적인 북한이 핵무기를 생산할 능력이 확보돼 있다는 것이 사실일 경우 어린이들이 안전핀을 뺀 수류탄을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면 북한은 핵무기를 생산할 능력이 얼마나 있을까. 이것은 아무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만 알려진 대로 북한은 이미 핵연료를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핵폭발에 이용되는 뇌관,핵무기원료인 플루토늄 재처리공장,그리고 핵폭탄 운반에 쓰이는 스커드 미사일의 자체 생산능력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원자력 분야연구는 1959년 9월 소련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한 후 62년초 영변에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면서부터 시작했다. 86년 12월 원자력공업부를 정무원 산하에 발족시켰다. 연구기관 및 인력현황을 보면 62년 설립된 영변 원자력연구소에 2천5백여명의 연구원이 있다(IAEA 추정). 또 김일성대학ㆍ 김책 이과대학에 원자력연구부서를 64년 설치했으며 89년까지 약 5천여명의 핵 전문가 및 기술자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은 65년 2메가w급 연구용원자로를 도입,70년 4메가w급으로 출력을 늘렸으며 87년 30메가w급 연구용 원자로를 자력 설계 가동중이다. 특히 평안북도 영변의 30메가w급 원자로에는 천연우라늄 75t이 장전돼 있는데,이 원자로는 군사용으로 전용하기 쉬운 핵연료 처리시설로 사용한 핵연료 찌꺼기에서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시설이 특징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원자로는 1㏏(TNT 1천t의 폭발력)급 원자탄을 제조할 수 있는 7∼8㎏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연구용이든,발전용이든간에 우라늄을 핵연료로 쓰고 있는 나라는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핵연료(우라늄)의 재처리공장 ▲핵연료 가공시설 ▲원자로 설계 기술자를 확보하면 핵무기의 생산은 가능하다. 이는 원전을 가동할 수 있는 기술 수준을 가진 나라라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단기간내에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최초의 원자탄 제조에 참가했던 물리학자 데오도 테일러박사는 『원자탄 만들기가 얼마나 쉬운가는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원자탄 제조방법은 한 때 1급 국가기밀이었으나 이제는 백과사전을 뒤져봐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고 할정도로 이 기술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인 핵연료 재처리공장이 북한에 건설되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재처리 공장은 원자로에서 타고있는 핵연료(우라늄 235와 238)가운데 연소되지 않은 우라늄 238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플루토늄 239가 생성된다. 이 플루토늄은 핵분열을 일으키는 물질로 새로운 핵연료로 이용된다. 현재 핵폭탄을 생산하고 있는 인도나 파키스탄은 모두 원전에서 수거한 우라늄 238을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생산,핵폭탄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이 보도에 접한 한국원자력학회장 이창건박사는 6개월이내 북한의 핵무기생산 가능이라는 뉴스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박사는 첫째 동독이 농축우라늄을 독자적으로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발전용이 아닌 무기용 농축우라늄을 줄 수 없을 것 같고,소련이 이럴 경우 가만히 있을리가 없다는 분석이유를 들고 있다. 다음은 루마니아에서 기술을 들여왔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을 표시한다. 그는 루마니아가 아닌 불가리아라면 혹시 믿을 수도 있지만 루마니아는 그런 수준에 와 있지 않다고 가능성을 배제한다. 불가리아의 경우는 전체 전기발생량의 30%가 원자력에서 나오고 있으며 세계원자력기구(IAEA)를 통해 20명의 북한원자력 전문가를 훈련시킨 바 있으며 원자력건설 당시 10여명 정도를 훈련시킨 바 있다는 것. 이박사는 소련이 한국으로 하여금 정보소스를 자기쪽으로 끌어가기 위해 그런 자료를 낸 것으로도 분석하고 있다.
  • 김정일,군부 장악… “세습정지”/북한 권력구조 대폭개편의 저변

    ◎강경파 부상… 대남정책 변화 가능성/“섣부른 개혁은 위기 자초”체제 고수 북한의 김일성이 24일 개막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 국가주석으로 다시 선임됨으로써 그간 논란이 되어온 「김정일의 국가주석직 승계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날 확대개편된 국가기구인 국방위윈회에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와 인민군총참모장 최광을 제치고 김일성에 이어 제1부위장직을 신설,그 자리에 앉음으로써 이제까지 취약한 것으로 알려진 군내의 지위를 확고히 했고 이에 따라 김정일의 권력승계는 그 시기만 남아있을 뿐 거의 모든 준비를 마친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지난달 22일 이례적으로 6개월여 앞당겨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대의원선거나 이번 대의원 1차회의는 일부에서 예측했듯 김일성이 일선에서 완전히 퇴진,김정일에게 전권을 물려주기 위한 절차였기보다는 소련 및 동구권국가들의 대변혁에 대응,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를 보다 강화해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김정일의 입지를 보다 강화시켜 언제라도 권력세습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준비단계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북한은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외부의 압력이 점증하고 있고 주체적 자립경제의 건설마저 난관에 봉착해 있는 등 내우외환이 겹친 현상황에서 권력이양이나 섣부른 개혁 및 대외개방,남북교류 등이 오히려 북한체제의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 45년간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북한을 통치해온 김일성을 국가원수로 재추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현재까지 드러난 이번 회의의 결과는 대남정책을 통괄해온 허담(65)의 당비서탈락,최광(73) 등 군출신과 한성룡등 테크노크라트의 부상,김필환등 제2세대 인물의 진출등이 두드러진다. ○대남정책 실패 문책 허담의 당비서탈락은 「다른 직무를 맡게됨에 따라 해임됐다」는 평양방송의 해명성 발언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대남정책 실패책임을 물어 실각됐다는 관측이 유력시되고 있다. 지난 83년 11월 정치국원(서열10위)으로 승진하면서 외교부장을김영남에게 넘겨주고 대남사업에 전념해온 허담이 이번 당비서탈락을 계기로 대남사업에서 손을 뗄 경우 북한의 대남정책이 앞으로 보다 강경한 방향으로 선회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부고위당국자는 이와 관련,『허가 북한측 실무총책을 맡았던 금강산공동개발계획이 무효화 되는등 최근 노동당내에서 강경파들이 득세를 하고 있는 조짐이 엿보인다』고 말하고 이에 따라 북한이 이번 대의원회의를 계기로 남북관계개선을 위한 모종의 제안을 내놓으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또한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인민군 총참모장 최광의 정치국원기용이나 김철만(전인민군부총참모장)의 정치국후보위원 승진,김익현(전인민무력부 부부장)의 당중앙위원 승진 등이 이같은 예측을 뒷받침한다는 설명이다. 이들 군출신들의 당내 영향력이 강화될 경우 지난 69년부터 대남공작사업의 총수로서 땅굴ㆍ무장간첩남파 등 각종 대남도발을 지휘해 오다가 지난 86년 아웅산사건으로 밀려나 지난 88년 11월 당비서로 재기용된 강경파 김중린(66)이 다시 대남정책을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김일성대학출신인 최영림(64)과 대외경제위원회위원장 김달현,문화예술부부장 장철(64) 등의 부총리 기용,당경제담당비서 한성룡의 정치국원 승진 등은 3대혁명소조원 출신으로 추측되는 김필환(정무원내 광업부부장),김이용(2ㆍ8직동청년탄광 지배인),김격식(9기대의원) 등 신진세대의 기용과 함께 김정일후계체제의 공고화작업으로 분석된다. ○중국식개방 따를 듯 또 이들 전문테크노크라트출신 당관료들은 북한의 경제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김정일을 도와 침체에 빠진 북한의 경제활성화를 주도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중 대외경제위원회 위원장과 무역부부장을 겸직하고 있는 김달현의 부총리 승진은 북한의 적극적인 경제적 대외개방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여져 주목된다. 국가주석으로 재추대된 김일성은 이날 정책연설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나가는 것은 역사의 기본추세이며 이것만이 인류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동구권국가들의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고수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따라서 북한은 앞으로 대내 정치 및 대남정책에서 강경한 입장을 계속 견지하면서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중국식 모델의 개혁과 대외합작 등을 추진할 것으로 분석된다는게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 40년만의 「전화상봉」30분/한필성씨,북의 노모와 감격의 통화

    ◎“오마니”ㆍ“필성아”외치곤 목메인 울음만/귀 어두운 어머니에“평양 갈께요”다짐 【삿포로(일본)=동계아시안게임 특별취재반】 『오마니』『필성아』 40년만에 처음으로 서로를 확인한 어머니와 아들은 목이메여 울음만 삼켰다. 살아 생전에 다시는 불러보지 못할줄 알았던 어머니를 부르는 아들의 음성은 기쁨과 회한으로 떨리기만 했다. 『네가 정말 필성이냐. 40년전 홀로 떠난 필성이가 틀림없느냐』 『예,오마니. 석선(아명)입니다』 14일 상오8시30분.일본 삿포로 뉴오타니 호텔. 40년전 16세 홍안의 소년으로 어머니 곁을 떠났던 한필성씨(56ㆍ경기도 파주군 문하면 동패리)가 평양에있는 어머니 최원화씨(85)와 극적으로 전화통화에 성공,비록 육성으로나마 감격적인 해후를 나누는 순간이었다. 『혼자 타향에 떨어져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필화가 갖고온 사진으로 어마니 모습을 뵙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난8일 40년만에 처음 누이동생 한필화씨(48ㆍ북한 빙상연맹서기장)와 상봉한 한필성씨는 아직도 어린자식으로 생각하고 걱정부터 하는 노모의 목소리에 가슴이 찢어지는듯 했다. 이들 모자의 전화상봉은 필성ㆍ필화씨 남매 내외가 13일 삿포로의 뉴오타니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함께 머물고 있을때 평양에서 노모가 직접 국제전화를 걸어와 이루어졌다. 상오9시까지 30분간 계속된 이날 통화에서 필성씨는 어머니의 귀가 고령으로 잘 들리지 않아 큰소리로 말해 의사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필성씨는 『이곳에서 잘살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귀국하면 적십자사를 통해 고향방문을 신청해 하루 빨리 달려 가겠습니다』라고 흥분된 어조로 인사를 했으며 어머니 최씨는 안부를 묻는 아들의 질문에 『김일성수령님이 우리 가족들을 돌봐줘서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필화씨는 오빠와 어머니의 통화를 눈시울을 붉히며 지켜본 뒤 『북한에 돌아가는 대로 오빠를 초청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필성씨는 어머니 이외에도 8살위의 누나 필녀씨(64)와 두살아래 동생 필환씨(54) 조카 종국씨(27ㆍ필환씨의 아들) 등과 번갈아가며 통화를 했다. 노모 최원화씨가 살고 있는 평양의 집은 김일성대학체육교수로 있는 필화씨의 남편 임세준씨가 세대주로 되어 있는 아파트로 주소는 평양시 중구역 창광거리 연화2동 13반 13층 2호이며 전화번호는 평양 23672. 한필성씨 부부는 13일밤 어머니와의 통화를 시도했으나 어머니가 안계셔서 성사되지 못했으나 14일아침 뉴오타니호텔로 국제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해 노모가 평양­중국­삿포로라인을 이용해 전화를 걸어와 이루어 졌다. 한편 한필성씨 내외는 14일 하오1시15분 전일본항공편으로 삿포로를 출발,도쿄에서 이틀밤을 보낸뒤 17일 귀국할 예정이다. ◎“6일간의 만남 너무 짧아요/기약없는 이별 안타까움만”/필성ㆍ필화씨 남매 고별 기자회견 한필성ㆍ필화 남매는 14일 상오11시45분 삿포로 지토세공항 2층 대기실 아카시아룸에서 6일간의 극적상봉을 마치고 이별에 즈음한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이별소감과 앞으로의 일정 등을 밝혔다. ­오늘 아침 통화내용은. ▲필성=40년만에 북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했다. 어릴때처럼 「오마니」라고 불렀고 어머니의 목소리는 40년전과 마찬가지로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삿포로에서의 1주일은. ▲필성=삿포로는 동생을 만난 곳으로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필화=오빠의 사랑을 받으며 즐겁게 지냈다. 만나기전까지는 오빠의 따뜻한 정을 깊게 느끼지 못했으나 오빠를 만나고 보니 혈육은 헤어져 살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40년간 다른 체제에서 생활했는데. ▲필성=삿포로에 와보니 민단ㆍ조총련의 구분이 없더라. 가족얘기만 했다. ▲필화=40년만에 만나 알아보지 못할까 우려했으나 첫눈에 알아 보았다.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어도 혈육은 혈육이다.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심정은. ▲필성=그립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보니 더욱 어머니를 뵙고 싶다. ▲필호=만날때는 기쁘고 헤어질땐 쓰라리기만 하다. 이날 회견은 하오12시20분까지 35분간 계속되었고 한필성ㆍ필화 남매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한채 6일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다.
  • 한필성ㆍ필화 「남북 오누이」 40년만에 일 삿포로서 극적 상봉

    ◎“오빠!왜 이제 왔어요”… /목메인 남매,오열ㆍ절규도 잊어/생이별의 한은 울음까지 삼켜 【삿포로(일본)=동계아시안게임 특별취재반】 『오빠,왜 이제 왔어요』 『40년만에야…』 헤어지기 40년,생사를 확인한지 19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남북의 오누이는 오히려 담담했다. 통곡도 오열도 절규도 없었다. 40년 생이별이 서러웠고 남북의 정치적대립으로 상봉직전에서 또 19년을 기다려야했던 안타까움과 그동안 가슴을 저린한이 큰울음까지도 삼켰기 때문이다. 지난50년 6.25의 와중에서 이산가족이 돼버린 한필성(62ㆍ목축업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통패리 166의2) 한필화(48ㆍ북한국가체육위원회 동계경기지도부국장)남매는 지난71년 극적으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상봉직전까지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필성씨는 71년 2월7일 삿포로 동계프레올림픽에 출전한 북한 스피드스케이팅선수중 여동생 필화씨가 포함돼 있는 것을 알고 일본 아사히신문 주선으로 도쿄로 날아가 30분동안 전화로 통화,「목소리만의 상봉」은 이루었으나 남북간의 팽팽한대립의 벽에 막혀 눈물을 뿌리며 귀국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19년만인 8일 하오8시 이국땅 삿포로에서 필성,필화남매는 혈육의 정을 갈라놓은 벽을 마침내 허물고 40년만에 재회했다. 17살 홍안소년이던 필성씨는 어느덧 환갑을 넘은 노인으로,8살의 귀엽기간 했던 막내동생 필화씨도 중년을 넘긴 주부로 세월이 흐른뒤였다. 삿포로 지도세공항 입국장대합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오누이는 비명처럼 반가움의 한마디를 토해 놓고는 어깨를 들먹이며 얼싸안고 흐느꼈다. 두 오누이의 극적인 만남은 북한선수단 임원으로 지난2일 삿포로에 도착,선수촌 프린스호텔에 묶고있던 필화씨가 남편 임세진씨(김일성대학 체육교수)와 조총련 간부 송암우의 안내를 받아 삿포로에 도착한 한필성­홍애자 내외를 마중나옴으로써 지도세공항 로비에서 이뤄졌다. 한필성씨는 회색싱글 양복차림,홍애자씨는 분홍빛 치마저고리에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공항에 나와 플래시세례를 받았으며 1백50명의 내외신기자들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돌아서는 순간 회색빛깔의 양장차림에 파머를 한 필화씨가 『오빠』하고 부르며 와락 달려들어 극적인 상봉이 이뤄졌다. ◎“기쁘단 것외엔 할말 없어 이젠 어머니한 푼것 같다” ○한필성ㆍ필화 남매 회견 지도세공항에서의 아쉬운 첫만남을 마친 필성ㆍ필화남매는 이날 하오10시15분쯤 공항에서 동남쪽으로 40㎞ 떨어진 삿포로 프린스호텔에 도착,45분동안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금의 소감은. ▲필성=기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다. ▲필화=19년전에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됐다. 하지만 나도 오빠만큼이나 기쁘다. ­사전에 상봉을 위한 연락이 있었는가. ▲필성=없었다. 서울에는 나같은 이산가족이 많다. 남북한의 자유왕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생사확인과 서신교환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일이 더 잘풀려 교향방문단교환이 성사되면 제일 먼저가고 싶다. ­앞으로의 일정은. ▲필성=오늘(8일)은 일단 따로 숙소를 정해 각자 휴식을 취하겠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동생이 삿포로를 떠날때까지 숙식을 함께할 예정이다. ­북한을 떠날때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나. ▲필화=『이번에는 꼭 오빠를 만나라,네가 지명한 체육인이니 주위의 도움을 청하면 상봉이 성사될 것이다. 오빠를 만나면 큰절을 올리고 숙식을 함께하라. 너만이라도 필성이를 만날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 삿포로상봉 앞둔 한필성­필화 남매 국제전화 8분

    ◎“이번엔 꼭 만나자” 19년만에 눈물의 통화/“내일 만나 귀띔말로 실컷 얘기하자” 필성/“오빠 줄 8순 엄마 사진도 가져왔시요”필화 『필화야,나 오빠 필성이야』 『오빠,진짜 오빠 맞아요』 지난 71년 국제전화를 통해 서로 목소리만을 확인,1천만 이산가족의 심금을 울렸던 한필성씨(62ㆍ목축업ㆍ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동패리)와 필화씨(48)남매가 7일 하오8시 19년만에 다시 서울∼일본간 국제전화를 통해 오누이의 정을 나누었다. 한필성씨는 이날 하오 MBC로 찾아와 일본 삿포로 동계올림픽(3월9∼14일)에 북한측 임원으로 참가,삿포로 프린스호텔에 묵고 있던 동생 필화씨와 8분30초동안 국제전화로 얘기를 나누었다. 한필성씨는 남북분단으로 단신 월남한뒤 20여년만인 지난 71년 동생 필화씨가 삿포로 동계올림픽에 선수로 출전하자 일본으로 날아가 동생을 만나려다 남북분단의 장벽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한채 전화로 그리움을 달랬었다. 8일 상오11시45분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 삿포로로 떠날 예정인 한필성씨는 최근 TV에서 동생 필화씨의 인터뷰가 방송됐다는 사실을 알고 출국직전 직접 동생의 목소리를 듣기위해 전화를 걸었다. 통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필성씨=여보세요,서울인데 잘들려요,필화오빠 필성이예요. ­한필화씨=오빠,진짜 오빠 맞아요 ▲나 석선이야,네 오빠야 ­네 한필화입니다. 그런데 오빠 목소리가 달라졌어. ▲낮부터 전화하려 기다리다가 목이 좀 가는 것 같애(웃음),MBC에서 너를 방송했다고해 보려고 왔어,내일 그곳으로 간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최원화ㆍ86)가 아직 살아계셔요,어머니가 꼭 만나고 오라고해서 어머니 사진과 아버지 사진을 갖고왔어요,오빠 모습을 일본 TV에서 봤는데 할아버지같이 늙어 마음 아픕니다. ▲엄마가 지금 86살이구나 내가 엄마 45세일 때 나왔거든,너도 모습이 많이 달라졌더라,71년에 본 얼굴하고 너무 틀려 잘 모르겠더라 ­오빠 정말 내일 오세요 저번에 못만났으니까 우리 둘이 이번엔 꼭 만나자우요 ▲정말 간다. 내일 낮11시45분 비행기타고 나리타를 거쳐 삿포로에 저녁7시에 도착할거야. ­내일 빨리 만나서 구체적으로 얘기하자우요,오빠 나는 남편(임세진ㆍ김일성대 체육학교수)하고 같이 왔어요. ▲알았다. 어머니가 얼마나 그리운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우리 형제 12명을 낳았는데 6명만 살아남고 그중 나를 제일 귀여워했어. 엄마 선물을 갖고 갈께(울음). ­어머니 선물하나도 필요없어요. 남북이 갈라져 있으니까요(울음) ▲그런 소리하지마. ­오빠는 어머니한테 선물 주려면 어머니 죽은 후 속옷이나 가져오시라우요. 오빠 선물 갖고 관에 들어가게(울음). ▲기집애,그런 소리하지마. ­40년만에 만나서 귀띔말도 하고 많이 얘기하자우요. 어머니도 꼭 오빠 만나고 오라고 했어요. 이레 살면 얼마나 사나면서 꼭 만나라고 했어요. ▲전에 못만나 안타까웠다. 이번엔 우리를 못만나게 할수 없어. ­안녕히 계십시요. ▲내일 간다. 한편 이들 남매는 빠르면 8일 하오쯤 40년만의 재회를 이룰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이산40년…「분단의 벽」을 넘어/“삿포로상봉”기대 부푼 남북오누이

    ◎일본 도착한 한필화씨/71년엔 오빠와 아쉬운 전화통화만/“「19년 맺힌 한」 이번엔 꼭 풀겠어요” 『오빠를 만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꼭 만나야 합니다. 내가 일본에 온줄알면 오빠가 반드시 만나러 올 것으로 믿습니다』 오는 9일부터 14일까지 일본 삿포로에서 열리는 제2회 동계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할 북한측 선수단임원으로 2일 저녁 나리타(성전)공항에 도착한 한필화씨(48)는 한국에 사는 오빠 필성씨(62)와 만나고 싶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한씨는 지난 64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때 여자3천m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에서 은메달을 땄으며 71년 삿포로 동계프레올림픽에도 참가했었다. 프레올림픽 당시 오빠 필성씨는 6.25때 헤어진 막내동생 필화씨를 만나기 위해 현해탄까지 건너갔으나 당시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한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한채 전화통화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40대후반의 중년여성으로 다시 일본에 온 필화씨는 이날 분홍색 스커트 차림으로 후배선수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공항내에서 한씨를알아본 한국여행객들이 『이번에는 오빠와 꼭 만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한씨는 『고맙다』고 답례하기도 했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민항비행기가 5시간이나 연발하는 바람에 선수들이 다소 지쳐있으나 별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35명의 북한선수단을 이끌고 있는 박명철단장은 이날 저녁 도쿄의 한 호텔에서 있은 기자회견에서 이들 남매의 재회가능성을 묻는질문에 『재회의 기쁨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남매가 재회를 희망한다면 실현을 위해 노력하겠으며,자연스런 형태로 재회가 이뤄지도록 성의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필화씨는 현재 북한의 체육위원회관리로 일하고 있으며 남편 임세진씨(김일성대학 체육교수)도 이번에 함께 일본에 왔다. 북한선수단은 중국민항기의 연발로 밤늦게 일본에 도착하는 바람에 도쿄에서 하룻밤을 보낸후 3일 삿포로로 떠났다. ◎오빠 한필성씨 집/동네사람들과 잔치 벌이며 어깨춤/“북에 계신 어머님 안부부터 묻겠다” 『필화의 얼굴이 환한것을 보니 이번에는 꼭 만날 수 있을것같습니다』 한필성씨(62)는 3일하오 젖소 25마리를 키우며 살고있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동패리의 마을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열어준 축하잔치에서 들뜬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실향민인 친구들에 둘러싸여 고향이야기를 나누다 막 배달된 석간신문에서 일본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은 동생의 환한 표정을 본 순간 40년만의 재회를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씨는 지난달 중순『한필화가 동계아시아경기대회에 참석하기위해 일본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숨에 국토통일원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도 좋다는 허가를 얻었고 곧바로 일본행에 필요한 여권가 비자를 받았다. 『삿포로동계올림픽이 열린 지난71년 동생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갔을때 신문과 TV에 비친 필화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는 만나지 못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나 지금의 동생 표정을 보면 북한당국도 우리의 만남을 승인한 것이 분명합니다』 1.4후퇴때 월남한 뒤 줄곧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함께 살다 3년전 고향이 가까운 이곳 파주로 옮겨서도 형제처럼지내고 있는 안인숙씨(52)가 마련한 잔치에서 한씨는 『이렇게 즐거운 것은 난생 처음』이라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한씨는 『이번에 동생을 만나게되면 먼저 북한에 생존해 계시는 어머님의 안부를 물을 작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 최원화씨(86)의 소식은 지난 87년 필화씨의 남편 임세진씨가 일본TV와의 인텨뷰에서 『장모님이 평안남도 진남포시에 살고 계시다』는 말을 해 이미 알고 있는 터이다. 한씨 못지않게 상기된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부인 홍애자씨(53)는 엊그제 서울에 나가 고향식구들에게 전해 줄 선물을 샀다. 한번도 뵙지 못한 시어머님에게 드릴 한복과 금가락지,보약 그리고 4명의 시누이와 동서에게 줄 한복을 정성스레 골랐다. 홍씨는 특히 필화씨 몫은 어머니가 딸을 시집보내며 예단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마련했다. 아버지가 안계신 집안의 큰오빠와 큰올케로서 남과북의 장벽때문에 필화가 시집갈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씨부부는 오는 6일이나 7일쯤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다. 주위에서는 더일찍가라고 성화지만 한씨는 젖소 「벌갱이」가 새끼를 낳는 것을 지켜보고 가기로 했다. 한씨는 지난71년 너무 큰 기대를 가졌다 좌절된 기억이 떠올라 이번에는 겉으로나마 여유를 갖기위해서라고 했다.
  • “한ㆍ소,첫 『학술 교류』 기쁘다”/모스크바대 총장,어제 서울에

    ◎연세대와 교수ㆍ학생 교환각서/「페레스트로이카」주제 강연도 소련 모스크바국립대의 아나톨리 로구노프총장이 불라디미르 트로핀부총장 등 일행 3명과 함께 연세대 초청으로 26일 하오4시20분 대한항공편을 이용,김포공항으로 내한했다. 로구노프총장은 이날 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소간 국제적인 학술교류 각서를 교환하기 위해 온것이 무척 기쁘다』고 밝히고 『특히 모스크바와 한국 영사처가 개설된뒤 첫 입국사증을 받게 된데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로구노프총장은 특히 『1904년 노일전쟁뒤 중단됐던 양국간의 교류가 85년만에 민간차원의 문화학술교류로서 재개된 것이 무척 기쁘다』고 밝혔다. ­한국영사처가 모스크바에 개설된뒤 첫 입국자로서 입국과정에 어려움이 없었는가. 『전혀 문제가 없었다. 특히 대학총장이 첫 비자를 받은 것은 앞으로의 양국 관계 개선에 좋은 의미의 징표가 될 것이다』 ­양국의 학술교류전망은. 『학생과 교수들의 교환이 이뤄지게 되는데 특히 물리학부문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다.또 핵물리학쪽으로도 서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번에 초청을 해준 연세대와 모스크바대학간의 학술교류협정은 어떤 필요성이 있어서 맺어진 것인가. 『양국학자들사이에는 연구분야 등에 대해 서로 상대방의 활동을 잘알고 있다. 협정은 두나라사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앞으로 교환학생들은 학술연구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문화나 생활전반에 걸쳐 깊은 이해를 하게될 것이다. 지구의 미래를 위해 생태학적인 분야에 대해서도 서로 협력했으면 좋겠다』 ­학술교류 이외에 스포츠 등 다른 교류도 가능할 것인지. 『오는6월 모스크바대학에서 열리는 여러나라의 운동경기에 한국대학의 선수들을 초청할 계획이다』 ­영사관계는 이루어졌는데 올해안에 양국간에 완전한 외교관계가 수립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영사관계는 1차적인 단계이다. 멀지않은 장래에 공식외교관계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방한중 강연하게 될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사회주의의 재활이나 사회주의 건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나아가 인간적인 사회민주주의 건설이 목표다. 그러나 정치적인면에서는 진전이 빠른 반면 경제적인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뒤지고 있다. 이는 경제라는 것이 모든 인간생활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일성대학과 한국대학 사이에 중재역할을 할 용의는. 『평양의 대학과는 우호적 관계에 있고 교수들 사이에도 장기적인 체류ㆍ방문 등 많은 교환이 이뤄지고 있다. 앞으로는 한국과도 북한의 대학 못지않게 유사한 관계의 진전이 있을 것이다. 우리대학은 모스크바대와 연세대 양자간의 교류뿐만 아니라 다자간 협력을 시도하고 있어 한국내의 다른 대학은 물론 한국의 문화계 전반과 교류할 가능성이 크다』 로구노프총장 등은 9박10일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소련의 정치개혁과 공산당의 역할」 등을 주제로 강연도 할 계획이다.
  • 원광대,김일성대와 국제학술회의 추진/정부에 승인 요청

    【이리】 원광대는 오는 11월28일부터 30일까지 3일동안 학교 숭산기념관에서 2천년대 서해권역 경제협력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키로 하고 북한 김일성대학과의 공동주최를 추진하고 있다. 6일 원광대에 따르면 이 국제학술회의 추진을 위해 지난해 12월 국토통일원에 북한주민 접촉승인서를 제출한 데 이어 오는 11일 김삼룡총장이 도일,조총련계인 조선대 남시우총장 등을 접견,김일성대학과 공동주최를 위한 중재요청을 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원광대는 김일성대학과의 공동주최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중국ㆍ미국ㆍ소련ㆍ영국ㆍ프랑스 등 15개국에서 40여명의 경제학자를 초청,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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