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김원봉
    2026-02-15
    검색기록 지우기
  • 우주 산업
    2026-02-15
    검색기록 지우기
  • 김태년
    2026-02-15
    검색기록 지우기
  • 손자병법
    2026-02-15
    검색기록 지우기
  • 지구당
    2026-02-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24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김구, 우파정당 세워 中국민당과 연합 전선…사회주의 김원봉 “자유는 우리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김구, 우파정당 세워 中국민당과 연합 전선…사회주의 김원봉 “자유는 우리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

    대한민국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나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가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로 운영돼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이 대부분 민족주의자이다보니 역사학계에서는 그렇게 분류한다. 두 계열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기 전부터 갈라져 활동했다. 하지만 일제의 위력을 체감한 1920년대 후반부터 ‘서로 힘을 합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안창호 “대혁명적 조직으로 하나된 행동을” 지난달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찾아간 중국 상하이 황푸구 닝하이둥루. 빌딩숲 사이로 저층의 주상복합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식당들이 많아 활기가 넘쳤다. 임정 시절 상하이 한인들의 종교 활동 공간이자 독립운동 집회 장소로 쓰였던 기독교 예배당 ‘산이탕’ 터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여기서 안창호(1878~1938)가 ‘민족유일당’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한국 독립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대인배였다”고 평가했다. 1923년 전 세계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의 미래를 논의하고자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임정이라는 구심점이 와해되자 정치 세력들도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개별 독립단체가 일본을 상대하기에는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이상의 분열은 자멸’이라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이때 안창호가 모든 독립운동 단체·정당을 하나로 묶는 연합정당을 창설하자고 주장했다. 이것이 민족유일당 운동이다. 안창호는 1926년 7월 산이탕에서 동포들에게 호소했다. “공산주의 혁명을 하자, 무정부주의로 가자, 복벽(왕정복고) 운동에 나서자 등 각자가 자기의 의견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다투면 안 됩니다. ‘민족 혁명’을 한다는 각오로 ‘대(大)혁명적 조직’을 만든 뒤 하나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을 건지기 위해 개인의 사리(私利)를 버리고 큰 혁명당을 조직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민족 혁명이란 독립운동 세력이 정치·경제·종교의 차이를 떠나 민족 역량을 하나로 모으자는 것이다. 대혁명적 조직은 민족 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구심체를 뜻하는데, 이는 결국 임정을 대신할 새 기구를 꾸리자는 의도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가 조국 독립인 만큼 모든 갈등을 잠시 접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백가쟁명에 나서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민족유일당 운동은 독립운동계의 최대 화두가 됐다.●반임정 기치 내건 조선민족혁명당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윤봉길(1908~1932) 의거로 일본에 쫓겨 항저우로 피신했던 1935년 7월. 난징에서 의열단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5당이 모여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김두봉(1889~1961)을 비롯한 사회주의자, 김원봉(1898~1958년)으로 대표되는 무정부주의자, 이청천(1888~1957)과 신익희(1892~1956) 같은 민족주의자가 두루 모였다. 이들은 ‘반(反)임정’ 혹은 ‘비(非)김구파’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 독립운동가 2200여명이 참여한 거대 좌파 정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야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좌우 통합 분위기가 거셌다. 중국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제와 함께 싸우기 위해 1차 국공합작(1924~1927)을 성사시켰다. 소련에서도 한국 사회주의자들에게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은 이런 시대적 조류와도 잘 맞았다. 이들은 일본의 중국 침략(1931)과 독일의 국제연맹 탈퇴(1933),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1935) 등을 보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시 한 번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으로 예측하고 한국 독립의 기회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초기부터 김원봉이 이끄는 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의 독단이 문제가 됐다. 통합 두 달 만인 1935년 9월 한국독립당 조소앙(1887~1958)과 신한독립당 홍면희(1877~1946) 등이 탈당했다. 1937년 3월 이청천(1888~1957)도 김원봉과 결별하고 조선혁명당을 다시 세웠다. 충칭에서 만난 이선자(55) 전 충칭임시정부기념관 부관장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 기밀 문서를 살펴보면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힘을 합치지 못하고 분열을 일삼는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고 전했다.●한국국민당 창립 멤버 이동녕·안공근 조선민족혁명당은 외교 독립 노선에 매달려 온 임정 인사들을 ‘몽상가’로 여겨 줄곧 임정 폐지를 주장했다. 김구(1876~1949)는 이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과거 사회주의 세력이 ‘자유시 참변’(1921)과 ‘레닌 자금 배달사고’(1920) 등으로 독립운동 진영을 어려움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을 지키고자 ‘대항마’ 성격의 우파 정당을 준비했다. 김구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된 지 넉 달쯤 뒤인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결성했다. 창립 멤버는 이동녕(1869~1940)과 안공근(1889~1939) 등으로 대부분 그의 핵심 측근이었다. 이 정당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 국민당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여겼다. 실제로 한국국민당은 중국 측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며 임정의 여당 역할을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한국국민당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돕고자 조선민족혁명당 탈당파인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일종의 우파 연합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계열도 같은 해 12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해 맞섰다. 이로써 중국 본토에서 독립운동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임정파·민족주의 세력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주축이 된 반임정파·사회주의 세력의 두 축으로 재편됐다.●재평가 받아야 할 의열단 지도자 김원봉 난징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시간쯤 차로 이동하자 한 산골마을에 서탕녠 저수지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산을 타고 1㎞ 넘게 걸어 올라가니 산 중턱쯤에 폐허에 가까운 도교사원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1920년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무장단체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이 조선혁명간부학교(1932~1935) 학생들을 훈련시킨 톈닝사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일부러 산속 깊숙한 절에서 군사 훈련을 한 것이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우리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1919~1920)를 신성시하면서 이 학교 출신이 주축인 의열단을 무시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우리나라에서 재평가받아야 할 독립운동가를 꼽으라면 김원봉이 단연 1위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봉은 스무 살이던 1918년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현 난징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 같은 약소국을 위해 일본과 싸워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고 미련없이 학업을 포기했다. 이후 무장투쟁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가 의열단원에게 한 말이 지금도 전해진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우리(의열단)가 선구자가 돼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조국 광복의 꿈을 안고 의열단을 창단한 스물한 살 때부터 광복을 맞아 귀국한 마흔일곱 살까지 26년간 일제와 쉬지 않고 싸웠다. 조선총독과 친일세력, 한국인 밀정을 처단하고자 의열단 투쟁을 진두지휘했고,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항일무장 세력으로 인정받은 조선의용대도 세웠다. 그는 1919년 3·1운동을 ‘실패한 혁명’으로 봤기에 이를 계승한 임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래도 조선 독립을 위해 1941년 김구와 과감히 손잡고 임정에 참여했다.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과 임정 군무부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 해방을 앞당겼다.●일제, 현재 가치 300억원 넘는 현상금 걸어 일제는 그에게 100만 대양(大洋·중국 화폐단위)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다. 요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3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이 60만 대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원봉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필명 님 웨일스)가 쓴 책 ‘아리랑’에 나오는 김원봉에 대한 묘사다. “그는 고전적 유형의 의열투쟁가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몰랐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동경했다. 미남으로 빼어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김원봉의 생애는 영화 ‘아나키스트’(2000)를 시작으로 ‘암살’(2015), ‘밀정’(2016) 등을 통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상하이·난징·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윤봉길 의거 후 일제 핍박…상하이 떠나 8년간 ‘고난의 행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윤봉길 의거 후 일제 핍박…상하이 떠나 8년간 ‘고난의 행군’

    1929년 10월 미국발(發) 경제공황이 전 세계로 퍼졌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 일본은 그간 협력하던 자세를 버리고 각자도생에 나섰다. 내수시장 규모가 작았던 일본은 경제 위기를 탈출하고자 1931년 9월 중국 만주를 공격했다. 1932년 1월에는 상하이도 침공했다. 이 지역 이권을 선점한 미국과 영국이 철군을 요구하자 일본은 1933년 2월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이들과 갈라섰다. 이 시기 임정은 일본의 공세를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마지막 정착지인 충칭에 도착하는 데 8년이 걸렸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임정의 이동시기’라고 부른다.●“임정 지도자 중 군대 편성 실현은 김구뿐” 일본이 열강 질서에서 이탈해 파시즘으로 치닫던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히로히토(1901~1989)의 생일 축하연이 열렸다. 일제가 점령지 한복판에서 보란 듯 승전고를 울리는 모습에 중국인들은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스물네 살 한국인 청년 윤봉길(1908~1932)이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1869~1932) 등 일본군 수괴들을 한꺼번에 처단했다. 그의 희생으로 한국 독립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각지에서 지원금이 쇄도하며 임정의 권위가 되살아났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모욕을 한국이 대신 갚아준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항일 역사 인식을 공유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임정을 ‘진정성 있는 파트너’로 대하기 시작했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1887~1975)는 임정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도 마련했다. 한국독립군(1930년대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부대) 출신 이청천(1888~1957) 등이 교관으로 참여했다. 이곳 출신들은 1940년 9월 임정 최초 정규 부대인 한국광복군의 주축이 됐다. 장제스는 일본의 패망이 유력하던 1943년 전후처리를 논의하려고 연 카이로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도 한국 독립 약속을 받아냈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1919년 임정이 세워진 뒤로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다. 하지만 (항일투쟁의 최종 목표인) 군대 편성 계획을 실현한 이는 김구뿐이었다”며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에서 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임정은 잃은 것도 많았다. 일제가 즉각 보복에 나섰기 때문이다.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사를 벌인 것이 오전 11시 40분쯤이었는데, 일본 경찰은 오후 1시 프랑스 조계로 들이닥쳤다.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벌여 안창호(1878~1938)를 비롯한 임정 관계자 12명을 체포했다. 그간 임정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조계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윤봉길 의거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는 더이상 임정을 지켜 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임정은 상하이를 떠나 생존을 위한 장정에 나섰다. 일본 경찰과 군대, 밀정을 피해 중국 각지를 떠돌았다. 우선 급한 대로 찾아간 곳이 상하이에서 멀지 않은 항저우였다. 1932년 5월 임정 국무위원 대다수가 상하이에서 빠져나와 이곳으로 모였다. 반면 김구와 일부 위원들은 항저우 인근 자싱으로 몸을 숨겼다. 서로 흩어져 있는 것이 임정 존속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중국 국민당 첩보기구 소속 천리푸(1899~2001)가 김구의 피난처를 주선했다. 그는 저장성장을 지낸 자싱의 유명인사 추푸청(1873~1948)에게 “김구를 누구보다 잘 챙기라”고 부탁했다. 이때부터 김구는 추푸청의 비서 겸 수양아들 천둥성의 별채(메이완제 76호) 등에서 숨어 지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돈에 눈이 먼 ‘한국인 밀정’ 항저우는 ‘물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호수와 수로가 산재해 있다. 임정 요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배를 띄우고 호수 위에서 회의를 열었다. 말 그대로 ‘물 위에 떠다니던 정부’였다. 항일무장단체 의열단 리더 김원봉(1898~1958)이 배를 타고 김구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 ‘암살’(2015)은 바로 이 시기 항저우 임정을 배경으로 했다. 하지만 이곳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임정이 상하이를 떠났다는 것을 눈치챈 일제가 추격에 나섰다. 특히 김구에게는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중국 상하이주둔군 사령부가 각각 20만 대양(大洋·중국 화폐단위)을 걸었다. 60만 대양은 지금 가치로 150억~2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일본 경찰보다 한국인 밀정을 더욱 두려워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독립운동의 큰 적은 현상금에 눈이 먼 우리 자신이었다”고 씁쓸해 했다. 김구는 많은 이들에게 쫒기며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때를 보냈다. 다음은 광복군 출신 인권변호사 태윤기(1918~2012)가 쓴 수기 ‘회상의 황하’ 가운데 일부다. “윤봉길 의거 뒤로 일본은 대(大)상금을 건 동시에 밀정 300여명을 풀어 백범을 생포하는 데 집중했다. 김구는 이를 눈치채고 2년 가까이 행적을 감췄고 임정 요인에게도 위치를 알리지 않았다.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안공근(1889~1940·안중근의 동생)뿐이었다. 그러면 김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중국옷을 입은 촌로 복장을 하고는 ‘정크’라고 부르는 작은 배로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녔다.”‘풍찬노숙’ 김구 지키며 생사 함께한 中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 ●부인 역할하며 日검문서 보호한 주아이바오 풍찬노숙하던 김구를 5년이나 돌보며 일본 경찰과 밀정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 중국인 여성이 있다. 자싱에서 뱃사공으로 일하던 주아이바오(1913~?)다. 사실상 김구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구는 ‘장천’, ‘왕사장’, ‘장전추’라는 가명을 쓰며 광둥인 행세를 했다. 하지만 중국어가 서투른 데다 키도 너무 커 쉽게 의심을 샀다. 실제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풀려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33년 추푸청의 장남 추펑장은 그에게 신분 세탁을 위해 위장결혼을 제안했다. 김구는 자싱에서 추푸청의 집에 갈 때 우연히 만난 처녀 뱃사공을 떠올렸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자신의 정체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선상(船上) 생활이 시작됐다. 백범이 57세, 주아이바오가 20세였다.처음에는 김구에게서 매달 일정 금액을 받고 일하는 계약 관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신뢰가 쌓여 운명공동체로 바뀌었다. 주아이바오는 9년 전 아내 최준례(1889~1924)를 잃고 혼자 살던 김구를 애틋한 마음으로 보살폈다. 밤낮없이 이뤄지는 경찰 불심검문에서 그를 지켰다. 1937년 중일전쟁 때는 일제의 폭격이 극심하던 난징까지 따라가 그와 생사를 함께 했다. 이들은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을 뿐 부부로 살았다. 둘 사이에 자녀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일본의 공세가 거세지던 1937년 11월. 김구는 주아이바오의 안전을 염려해 집으로 보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백범일지’에도 당시 안타까운 감정이 기록돼 있다. “난징에서 떠날 때 주아이바오를 고향인 자싱으로 돌려보냈다. 지금도 이따금 후회되는 것은 그와 헤어질 때 여비를 100원밖에 주지 못한 것이다.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미안할 따름이다.” 김구는 왜 그와 재혼하지 않았을까.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다고 전해진다. 서른일곱 살이라는 나이 차가 큰 걸림돌이었다. 서울신문 중국 취재에 동행한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주아이바오는 김구의 장남 김인(1917~1945)과 네 살밖에 차이가 안 났다. 차남 김신(1922~2016)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 된 아버지가 이런 일로 구설에 올라 대사(大事)를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이 컸다”고 설명했다. 그런 부담 때문이었을까. 김구는 해방 뒤 주아이바오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를 한국에 데려갈 때 생길 정치적 파장을 고려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김구의 경쟁자인 이승만(1875~1965)이 스물다섯 살 연하였던 벽안(碧眼)의 이혼녀 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와 함께 귀국한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중국 작가에 의해 소설 ‘선월’로 재탄생 중국 작가 샤녠성(71)은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이야기를 소설 ‘선월’로 재탄생시켰다. 여기서 주아이바오는 1949년 김구가 살해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샤녠성은 몇 년 전 중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1970년대까지 생존했다는 것을 최근에 들었다. (김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원규 작가는 “주아이바오는 백범과 함께 살며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목에 거액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현상금을 받고자 김구를 노리던 한국인이 많았지만 이 가난하고 순박한 중국 여성은 그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믿는다면 이 나라가 주아이바오에게도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상하이·항저우·자싱·난징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리더십 잃은 통합 임정… 3대 구심점 ‘이·창·만’ 모두 떠나… ‘채소장수’ 윤봉길의 폭탄, 꺼져가던 임정 불씨 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리더십 잃은 통합 임정… 3대 구심점 ‘이·창·만’ 모두 떠나… ‘채소장수’ 윤봉길의 폭탄, 꺼져가던 임정 불씨 살렸다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이념과 지역에 따른 파벌싸움으로 갈등이 컸다. 독립운동 방법론을 두고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대립했고 출신 지역에 따라 기호파(경기·충청)와 서북파(평안·함경)로 나뉘었다. 임정이 정말로 한성정부를 계승했는지를 두고 ‘승인·개조’ 논쟁도 불거졌다. 결국 임정의 ‘3대 축’인 이동휘(1873~1935)와 안창호(1878~1938), 이승만(1875~1965)이 차례로 조직을 떠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무능한 임시정부 갈아엎자” 노령정부(러시아)와 상하이정부(중국), 한성정부(한국)가 힘을 모아 통합 임정을 만든 지 1년이 지난 1920년 9월. 이승만의 진정성을 의심해 임정 내각 참여를 거부한 신채호(1880~1936)와 박용만(1881~1928) 등이 중국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를 세웠다. 이들은 분란만 일삼는 임시정부를 불신임하고 전 세계 한인들이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독립운동의 새 길을 찾자고 주장했다. 이듬해 2월 박은식(1859~1925)과 원세훈(1887~1959) 등도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임정의 무능함을 조목조목 지적한 뒤 신채호가 주장한 대표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같은 해 5월 만주 지역에서 김동삼(1878~1937)과 이탁(1889~1930), 여준(1862~1932)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개혁안’을 선언하고 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통합 임정이 설립 2년도 되지 않아 해체 위기를 맞게 됐다. 심지어 임정이 있던 상하이에서도 여운형(1886~1947), 안창호 등이 회의 참여를 선언했다. 임정 각료들은 “국민대표회의 소집 운동은 정부 파괴 행위”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이미 리더십을 상실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버틸 힘이 없었다. 결국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회됐다.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 미주 등에서 100여개 독립운동단체 대표가 모여 임시정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회로 치러졌다. 경비는 러시아 레닌 정부가 지원했다.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3월 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조 제의안이 올라오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창조파’와 ‘개조파’가 끊임없이 공방에 나섰다. 창조파는 임정을 부수고 한성정부를 계승할 새 기구를 만들어 무력 투쟁에 나서자고 선언했다. 신채호와 문창범(1870~1938) 등 베이징과 러시아에 기반을 둔 이들이었다. 개조파는 임정이 1919년 3·1운동 결과로 생겨났다는 점을 들어 해체가 아닌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봤다. 안창호와 여운형, 김동삼 등 상하이와 만주 지역 출신이 많았다. ●‘창조파’ 새 정부 설립 결의… 분열 주범으로 이들은 합의안을 만들지 못하고 두 달 넘게 논쟁만 벌였다. 5월 15일 김동삼과 배천택(생몰연대 미상) 등 만주 지역 개조파들이 더이상 자리를 지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고 회의장을 떠났다. 다른 개조파들도 대거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자 6월 창조파가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어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정부 설립을 결의했다. 임정은 이들의 행동을 반역으로 보고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창조파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코민테른(공산주의 국제연합) 지부로 달려가 “새 정부를 정식 국가로 인정해 달라”고 청원했다. 소비에트가 같은 사회주의자인 자신들의 편에 설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창조파 단독으로 세운 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보고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세력은 1920년 레닌 자금 배달사고에 이어 또 한 번 독립운동 분열의 주범이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국민대표회의는 우리나라 독립운동 미래를 가늠할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6개월 가까이 무의미한 논쟁만 벌이다가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독립운동가들 임정 각료 거부… 권위 추락 임정은 국민대표회의 결과에 따라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개조파의 탈퇴와 창조파의 무리수로 어부지리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미 임정의 ‘3대 주주’였던 이승만과 안창호, 이동휘가 사라진 뒤였다. 1921년 1월 이동휘가 임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떠났고, 같은 해 5월 안창호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고자 임정을 탈퇴했다. 이승만은 1921년 5월 워싱턴회의(1921~1922) 참석차 미국으로 갔다가 자신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상하이로 돌아오지 않았다. 1922년 9월 하와이에 정착한 뒤 임정 업무에서 손을 뗐다. 결국 3년 가까이 지난 1925년 3월에야 박은식(1859~1925)이 임시 대통령이 돼 이승만을 탄핵했다. 이때 임시의정원이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헌법을 위반했다는 의견도 있다. 김희곤(65)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은 “당시 임정은 재정난과 신뢰도 추락 등으로 의사 정족수를 채우기 불가능했다. 합법적으로는 이승만을 쫓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탄핵을 쿠데타라고 볼 수도 있다”고 전했다.●내각책임제 초대 국무령 이상룡 임명 임정은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꾸고 최고 지도자인 국무령의 임기(3년)도 정했다. 이승만에게 임기 없는 대통령직을 맡겼다가 혼란을 겪은 데 따른 학습 효과였다. 같은 해 9월 서간도 무장단체 ‘서로군정서’의 책임자 이상룡(1858~1932)을 초대 국무령에 임명했다. 그는 김동삼과 김좌진(1889~1930) 등을 각료로 선임했지만 대부분 상하이로 오지 않았다. 임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서였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상하이 요인들이 싸움만 일삼자 이상룡은 몇 달 만에 자리를 내던졌고 1926년 2월 면직됐다.같은 달 임정은 대한매일신보 주필 출신 양기탁(1871~1938)을 국무령으로 지명했지만 스스로 취임을 거부했다.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선출했지만 반대 세력인 기호파(경기·충청 지역 파벌)가 강하게 반발해 물러났다. 7월 홍면희(1877~1946)가 국무령이 됐지만 임정 분규가 끊이지 않자 12월 내각 총사퇴를 선언했다. 당시 임정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다.통합 임정이 세워지던 1919년만 해도 상하이에는 독립운동가가 1000명 가까이 됐다. 하지만 6~7년 뒤인 1920년대 중반에는 고작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다. 상당수는 상하이의 외교독립론에 실망해 다른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조만간 독립이 될 것으로 보고 새 나라에서 요직을 차지하려던 ‘쭉정이’들은 일본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떠났다. 일부는 국내에 잠입한 비밀요원들에게서 “대다수 민중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요즘 말로 하면 ‘번아웃 증후군’(심리적 탈진현상)에 빠진 것 같다. 상하이정부 창립 멤버였던 소설가 이광수(1892~1950)도 한국인들이 일제에 순응해 가는 현실에 실망해 독립운동을 접고 신여성 허영숙(1897~1975)과 재혼하겠다며 1921년 4월 한국으로 돌아갔다.1926년 12월. 지리멸렬하던 임정에서 잠시 국무령을 맡았던 이동녕(1869~1940)은 그간 주목받지 못한 후배 운동가에게 자리를 넘겼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도 하겠다는 이가 없어 억지로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임정 최고 지도자에 오른 이가 바로 김구(1876~1949)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원래 임정은 사제폭탄 사용을 금지하고 외교적 노력을 우선시했다. 하지만 김구는 이 원칙을 고수해선 얼마 안 가 임정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잘 알았다.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해야만 했다. 1931년 10월 임정 주석이던 그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고자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김원봉(1898~1958)을 단장으로 한 무장투장단체 의열단(1919~1935)을 모델로 했다. 당시 의열단은 황포탄 의거(1922) 등으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역사학계에서는 김구나 김원봉의 공작 시도를 이슬람국가(IS) 등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테러’와 구별하기 위해 ‘의열 투쟁’으로 부른다.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5개월간 6건의 암살, 폭파를 기획했다. 대부분 실패하거나 미수에 그쳤다. 그럼에도 1932년 1월 이봉창(1900~1932)이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1901~1989)에게 수류탄을 던져 한국인들의 저항의식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고무적이었다.●이봉창 ‘일왕 수류탄’ 임정 존재감 일깨워 이봉창 의거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상하이 훙커우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던 허름한 차림의 동포 한 명이 김구를 찾아왔다. 자신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으니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가 채소바구니를 짊어지고 날마다 훙커우 일대를 다니는 이유가 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하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죠.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으니 선생님께서….” 충남 예산에 아내와 세 자녀(1녀 2남)를 남겨두고 혼자 상하이로 건너왔다는 스물네 살 청년 윤봉길(1908~1932)이었다. 4월 29일 그가 훙커우 공원에서 던진 폭탄이 끝없이 추락하던 임정의 판도를 극적으로 바꿔 놓는 ‘게임 체인저’가 될 줄은 그땐 누구도 몰랐다. 윤봉길이 없었다면 임정 존속과 한국 독립 또한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상하이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MBC ‘1919-2019, 기억·록’ 신혜선, 신하균이 재조명하는 김향화와 김원봉

    MBC ‘1919-2019, 기억·록’ 신혜선, 신하균이 재조명하는 김향화와 김원봉

    MBC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1919-2019, 기억·록’의 3, 4회 다큐가 14일부터 공개됐다. ‘1919-2019, 기억록’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대표하는 100인의 인물을 이 시대 대표 샐럽 100인의 ‘기록자’를 통해 새롭게 조명하는 3분 캠페인 다큐 프로그램이다. 김연아가 재조명한 첫 번째 인물 ‘유관순 열사’의 1, 2회에 이어 오늘부터 공개되는 3, 4회 인물은 김향화와 김원봉으로 배우 신혜선과 신하균이 기록자로 등장한다. 배우 신혜선이 기록한 김향화는 수원의 기생으로, 1919년 1월 고종임금의 붕어(임금이 세상을 떠남) 때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소복을 입고 통곡했으며, 3월 29일에는 수원기생 30여명이 자혜의원과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인물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신혜선은 “독립운동가들이 어렵게 물려준 소중한 환경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며 소감을 전했다.배우 신하균이 기억하는 인물은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을 이끌며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했던 ‘약산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 ‘조선의용대’를 이끌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남과 북의 역사에서 모두 지워져 독립운동가로서의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인물이다. 약산 김원봉의 기록자로 나선 신하균은 “자랑스러운 과거가 있으니 많은 분께서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이런 기록들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라며 역사의 기억을 강조했다. 김향화와 김원봉을 기억하여 기록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은 MBC를 통해 수시 방송되고, ‘기억록’ 홈페이지를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영상부 seoultv@seoul.co.kr
  • 독립 열망, 붓으로 남기다

    독립 열망, 붓으로 남기다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민족의 독립을 이끌고 민주공화국 건설을 꿈꿨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헤아려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된다.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주관하는 특별전 ‘문화재로 되돌아보는 100년 전 그날’이다. 오는 2월 19일부터 4월 21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에 앞서 서울신문은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의 조국에 대한 애정과 자유를 향한 염원이 깃들어 있는 전시 유물 20여점에 얽힌 이야기를 매주 한 차례씩 소개한다.중국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마지막 거처인 충칭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았다. 임시정부는 당시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다. 환국을 앞둔 11월 4일 김구를 비롯한 이시영, 김원봉,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 23명은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독립에 대한 감회와 새 조국 건설에 대한 포부를 붓으로 적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재유기념첩(在諭紀念帖)은 요인들의 필적뿐만 아니라 이들이 당시 품고 있던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다. “낡은 집 무너지매 새집 지으려고 온갖 셈 닿이어 놓고 옛 터 두루 살피어보니 터는 좋다마는 가시 덩굴 적지 않소라. 날랜 연장 잡았으니 그 무엇 걱정하랴.” 눈앞에 놓인 현실이 가시덩굴처럼 험하지만 정교한 연장과 더불어 걱정없이 나아가겠다는 호기로운 이 문장은 독립운동가 윤기섭(1887~1959)이 적었다. 1908년 안창호(1878~1938)의 지도 아래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이후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1876~1949)의 “변하지 않음은 수많은 변화를 감당할 수 있다”(不變應萬變)는 문장 역시 주목할 만하다.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변치 않는 의지와 굳건한 사상만 있다면 극한의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명근 한국기독교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독립운동가들이 마음속에 품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향한 포부와 희망,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문서로서 의미가 깊다”고 설명했다. 조소앙(1887~1958)의 “세상의 지혜와 부에 대한 권리를 균등하게 하라”(均天下之智富權), 이시영(1869~1953)의 “오직 정성이 하늘을 움직이고 지성이 신을 감동시킨다”(惟誠動天 至誠感神), 신익희(1894~1956)의 “독립은 아직 미완성이니 우리들은 여전히 노력해야 한다”(獨立尙未完成 我等仍順努力), 장건상(1882~1974)의 “세계의 평화와 민족의 자유를 위해 분투하는 자라야 혁명가라 할 수 있다”(爲世界和平幷民族自由而奮者方可謂革命家) 등의 휘호를 통해 임정 요인들의 대동단결과 자립, 자유에 대한 열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1부>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①러시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우리는 헌법 전문을 통해 우리나라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해방을 맞게 됐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대한민국 임정은 1919년 여러 정부가 하나로 합쳐져 세워진 뒤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았다. ‘식물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임정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27년간 외교 노력과 전쟁을 병행한 독립 운동의 총괄체였다.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민중의 뜻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서울신문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에 있는 임시정부 이동 경로를 추적하며 임정의 역사와 인물, 이슈 등을 망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12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역사 탐구에는 김원봉(1898~1958년)과 김산(1905∼1938년), 조봉암(1898∼1959년) 평전을 쓴 이원규(72) 작가와 독립운동가 김연방(1881~1919년)의 증손자 김주용(53)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가 함께했다.●신한촌碑, 고려인 독립운동 중심지 일깨워 지난달 초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강추위가 몰려왔다. 서울보다 기온이 10도 가까이 낮았다. 기자를 안내한 교포2세 권세라(27) 가이드는 “그래도 여기는 연해주 다른 도시보다는 따뜻한 편”이라며 “러시아에는 ‘40도 이하 술은 술이 아니다. (영하) 40도가 안 되는 추위는 추위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며 웃었다. 공항에서 남부 루스키섬 쪽으로 50여분쯤 달리자 시내 외곽 라게르산 비탈에 도착했다. 검은색 철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에 직사각형 모양 5m짜리 기둥 3개와 네모난 돌 8개가 놓여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묶어 놓은 태극기와 노란 리본도 눈에 들어왔다. 신한촌 기념탑이었다. 3개의 기둥은 우리 민족과 친근한 숫자인 3을 형상화한 것이다. 8개의 돌은 조선 8도를 상징한다.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명분 삼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던 고려인 마을 구(舊)개척리를 철거했다. 한인들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한국’이라는 뜻의 신한촌을 세웠다. 1919년 3월 17일 우리 민족이 세운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한때 1만명이 넘는 고려인이 여기에 살았지만 1937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1953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마을을 모두 파괴했다. 지금은 기념비만이 이곳이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의 구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3·1운동은 세계 각지에 임시정부 설립을 촉발했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 “이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고 밝히면서 여기저기서 뜻있는 이들이 주권 기관을 세워 이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곳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 정부),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 등 세 곳이었다.●전로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정부 수립을 위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300년 넘게 러시아를 지배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다.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년)은 열강의 제국주의 책동을 비난하며 “약소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일본이 패배하면 우리도 반제국주의 흐름에 힘입어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같은 해 5월 문창범(1870~1938년)과 최재형(1860~1920년)이 중심이 돼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열었다. 러시아 전역의 한인을 대표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라는 의미다.이들은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면서 2월 25일 중국 간도 지역 동포들과 함께 총회를 열었다. 이때 이름을 ‘대한국민의회’로 바꾸고 연해주와 간도를 기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선언했다. 의회 의장에 문창범을 선출하고 외교부장 최재형, 군무총장 리동휘(1873~1935년) 등을 임명했다. 공식 선포는 20일쯤 뒤인 3월 17일에 이뤄졌는데, 이는 3·1운동과 궤를 맞추려는 의도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노서아(러시아) 영토에 있던 임시정부’라는 뜻으로 ‘노령정부’라고도 한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국가 기능을 한 곳에 모아 집행하는 소비에트제를 채택했다. 단시일 내에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에 나서고자 정부 조직 과정을 다수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대한국민의회는 정부 선포 직후 각국 영사관에 전문을 보내 일본 제국주의와의 혈전(血戰)을 선언했다. 간도 뤄쯔거우(나자구)에 군사 훈련소도 마련했다. 신한촌 옛터에서 이원규 작가는 “전 세계 임시정부의 최종 목표는 독립 전쟁으로 영토를 되찾아 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노령정부는 이런 임정의 본령을 구현할 최적지에 있었다”고 평했다.다만 이 정부는 상하이·한성 정부와 달리 별도의 헌법을 발표하지 않아 조직 구성이 체계적이지 못했다. 고려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유산계급인 원호인(러시아 귀화자)들이 무산계급인 여호인(미귀화자)들을 차별해 한인 사회가 둘로 쪼개지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러·韓 어느 곳에도 최재형 추모비 하나 없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우수리스크. 발해성 등 2개의 성터가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쌍성자’로 부르던 곳이다. 민가가 즐비한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가자 단정히 정돈된 최재형 생가가 나타났다. 추운 날씨에도 러시아 인부들이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하느라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집은 그가 1919년부터 이듬해 4월까지 살던 곳이다. 권 가이드는 “최재형을 빼놓고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이나 러시아 어느 곳에도 추모비 하나 세워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전했다.노령정부 태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들자면 단연 ‘연해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최재형이 꼽힌다. 안중근(1879~1910년)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1841~1909년)를 저격할 수 있게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을 건넨 인물이다.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조선 최초의 근대인’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하다.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였던 아버지 최형백과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9살이던 1869년 가족들이 배고픔과 학정을 이기지 못하고 크라스키노(연추)의 한인마을 ‘지신허’로 이주했다. 11살 때 “밥만 축낸다”는 형수의 구박에 집을 뛰쳐나왔다가 포시에트라는 작은 항구에서 러시아 선장 부부를 만났다. 이들은 최재형을 친아들처럼 보살폈다. 그는 이 부부와 전 세계를 항해하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서양문명을 체험했다.187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최재형은 군수업자로 변신해 성공을 거뒀다. 당시 이 지역 노동자 한 사람의 급여가 월 10~15루블 정도였는데, 그는 포시에트항을 근거지로 여러 사업을 벌여 매달 1만루블 이상을 벌었다. 거부가 되자 그는 자신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고국을 돕고자 발벗고 나섰다. 1909년 10월 안 의사의 하얼빈역 저격을 도운 것이 대표적이다. 최재형의 막내딸인 엘리자베트 표트로브나의 회고록에는 “안중근은 아버지와 함께 거사를 준비했고 실행 전 우리 집에 기거하며 사격 연습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연해주 한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페치카’(러시아식 난로)라는 애칭도 얻었다.●전 재산 독립에 쓰고… 日 헌병대에 총살당해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일본은 1920년 4월 러시아혁명 세력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상륙해 대대적인 체포·학살에 나섰다. 조선 독립에 전 재산을 쓰고 어렵게 살던 최재형은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의 자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4월 5일 처형됐다. 63세였다. 당시 막내딸이 아버지에게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여러 차례 애원했지만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까봐 담담히 앞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죽음을 맞으러 발걸음을 내딛던 그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외로웠을까. 블라디보스토크·바라바시·우수리스크·크라스키노(러시아)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분단을 넘어, 진정한 포용국가로… 100년 전, 임정이 꿈꾸던 나라

    분단을 넘어, 진정한 포용국가로… 100년 전, 임정이 꿈꾸던 나라

    올해는 3·1운동 발발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인 해다. 우리가 ‘나라다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매진하게 된 데에는 조국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이 100년 전 세운 ‘임시정부’라는 씨앗이 굴곡의 세월을 견디고 뿌리를 내려 ‘100살 대한민국’으로 성장했다. 임정의 두 거인인 김구(1876~1949)와 안창호(1878~1938), 그리고 임정의 국가건설론인 건국강령(1941년)의 기초를 짠 조소앙(1887~1958) 등이 살아 온다면 2019년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평가할까. 또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임정 초기, 국가 개입 최소화한 자유주의 꿈꿔 임정 인사들이 꿈꿔 온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확인하려면 무엇보다 이들이 직접 만든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살피는 것이 최선이다. 거기에는 ‘오래된 미래’처럼 미래 한국의 지향점도 함께 담겨 있다. 임시정부 헌법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정부 출범 당시 제정된 임시헌장(1차 헌법)을 시작으로 해방 직전인 1944년 4월 22일 충칭청사에서 개정된 임시헌장(6차 헌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6번에 걸쳐 제·개정이 이뤄졌다. 일반적으로 임시정부는 1917년 ‘2월 혁명’ 뒤 러시아·폴란드에 세워졌던 것처럼 짧은 시간 안에 정식정부를 세우고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민족 역시 1919년 3·1운동 직후 임정을 세운 뒤 단시일 내에 새 정부를 출범시키고 해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임정 요인들은 파리강화회의(1919년)와 워싱턴 군축회의(1920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1921년) 등을 지켜보며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일본에서 독립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잔인한 현실’을 깨달았다. 한국 임정은 당초 예상과 달리 27년을 버티며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이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언젠가 한반도에 들어설 새 나라의 이상을 헌법에 하나씩 새겼다.1919년에 제정된 1차 헌법은 내용이 너무 간략해 선언적 수준에 머문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성을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임정은 민주공화제와 대의제를 채택하고 평등권과 자유권, 참정권을 인민의 기본권으로 규정했다. ‘소유의 자유’를 명시해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고 생명형(사형)과 신체형(태형)을 폐지해 인도주의 원리도 명시했다. 다만 이때는 교육이 권리가 아닌 의무로 규정됐고 국가가 사적 영역에 개입하는 것도 최소화했다. ‘야경국가’로 불리는 자유주의 국가 모델을 염두해 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도 있어 당시 임정이 구(舊)체제와 완벽히 결별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흘러 1941년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1차대전 승전국인 두 나라가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오래지 않아 두 나라 간 전력 차가 드러났고 일본이 몇 년 안에 패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임정 관계자들은 정식정부 수립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좀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민족국가의 밑그림을 그릴 때가 왔다. 1944년 6차 헌법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1943년 카이로 선언(미·영·중이 일본 문제 논의)으로 조선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은 시기에 만들어져 상징성이 크다. 1941년 임정이 조선민족혁명당과의 합작을 앞두고 좌우를 아우르고자 내놓은 건국강령의 영향을 받았다.주석(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되 의원내각제도 가미한 절충적 정부를 구성했다. 교육과 직장, 노약자 부양을 요구할 권리를 명시하고 파업권도 보장했다. 전문에는 “‘진보의 기본정신’에 입각해 헌법을 제정했다”고 밝혔다. 전형적인 사회민주주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임정은 설립 초기인 1919년만 해도 순수자유주의에 기초한 ‘작은 정부’를 내세웠다. 하지만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수정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큰 정부’로 바뀌어 있었다. 이는 세계 대공황(1929~1933년)을 통해 제어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험했고,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1898~1958) 등이 임정에 가담하면서 진보 이념을 대거 수용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들의 생각대로 정식정부가 수립됐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스웨덴이나 독일 같은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추구하고 있을 것이다. 조석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31일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건국강령의 경제조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친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당시 임정 요인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한 안창호는 한국이 세계 12대 경제대국이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 달러까지 성장한 모습에 그 누구보다 뿌듯해할 것 같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교육열에도 혀를 내두를 것이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밝힌 김구는 ‘방탄소년단’ 등 글로벌 대중문화를 이끄는 한류스타들의 활약이 너무도 반가울 듯싶다. ‘사민주의자’ 조소앙은 최근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포용국가 전략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1945년 해방이 지금까지도 진정한 의미의 광복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식민 지배에 이어 전쟁, 군사독재라는 험난한 길을 걸어온 것에도 가슴 아파할 것이다. 무엇보다 남북분단 상황이 고착화되고 친일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을 개탄하리라.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100년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까. 무엇보다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한 통일 무드 조성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한상진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은 상하이 임정에서 법통을 찾지만 북한은 항일무장투쟁에서 뿌리를 찾는다. 각자의 정당성으로 통일 문제를 풀려면 쉽지 않다”며 “우리와 북한이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은 (임정보다는) 광복”이라는 견해를 내놨다. 김구가 강조한 혈통적 민족 개념에 대한 발전적 계승도 필요하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G2 시대’에 민족주의는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정치적 기획”이라면서도 “그렇다고 민족주의에 내재된 권위주의와 인종주의까지 인정해서는 안 된다. 민족과 세계시민 사이의 상반된 정체성을 어떻게 공존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새로운 100년으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신도시나 공공시설에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붙이고 이들을 화폐 모델로도 내세워 ‘임정 법통을 이어받은 민주공화정’의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의 1달러 지폐 모델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1732~1799) 초대 대통령이다. 수도인 워싱턴DC와 이곳에 자리잡은 조지워싱턴대 역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 파리의 ‘샤를드골 공항’이나 이스라엘 예루살렘 ‘벤구리온 공항’ 역시 독립 영웅을 기리고자 명명됐다. 김상회 전 국민대(정치학) 교수는 “화폐란 국가의 얼굴이고 여기에 들어가는 문양과 인물은 나라의 정체성이자 지향점”이라며 “(5만원권 모델이) 왜 유관순이 아니라 신사임당이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김구나 안중근, 안창호 대신 조선의 유학자들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지향점이 돼야 하는지도 석연치 않다”고 지적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부산의 윤봉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부산의 윤봉길’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하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게.” 1921년 5월 5일 대구감옥으로 면회 온 친구 최천택이 가져온 달걀꾸러미를 건네자 박재혁 의사(義士)는 이렇게 말했다. 엿새 후인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박 의사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식음을 전폐한 지 열이틀째, 사형 집행 사흘 전이었다. 며칠 후 의사의 시신은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박 의사의 노모와 친구들, 수많은 시민이 역 앞에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천만뜻밖에 이 지경이 되니 하늘이 무너진 듯합니다.” 노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초로 의열단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주인공이자 ‘부산의 윤봉길’로 불릴 만한 박 의사가 순국한 지 97년이 흘렀다.취재차 찾은 부산 날씨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쯤 됐다. 서봉수 박재혁 의사 기념사업회장 겸 삼일동지회중앙회장을 만나 박 의사의 생애와 기념사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삼일동지회는 해마다 박 의사 추모제를 여는 등 기념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박 의사는 직계 후손이 없다. 박 의사 여동생 명진의 손녀인 김경은(53)씨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인데 업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아 가슴 아프다”고 말문을 떼었다.●정부·지자체 관심 부족… 담당자도 박재혁 몰라 김씨와 서 회장은 인터뷰 내내 독립유공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정부와 지자체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로 고위층은 물론 현지 담당자 중에도 박재혁이 누군지 모르는 이가 있다고 했다. 10억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조성했다는 ‘박재혁 거리’를 찾아가 보니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박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부산 동구 범일동 183번지에서 가난한 선비 박희선과 어머니 이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생가 복원은 고사하고 아직 출생지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범일동 550번지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550번지는 1919년 이사해서 가족이 살았던 집으로 보인다. 현재 ‘183번지’는 공용 주차장이 돼 있고 ‘550번지’에는 민가가 있다. 박 의사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 명진과 어렵게 살았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다. 교육열 높은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의사는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부산상고, 현 개성고)를 4회로 졸업했다. 박 의사와 동급생 최천택, 오택(오재영)은 친형제보다 가깝게 지낸 ‘삼총사’였다. 의형제를 맺고 부모상을 당하면 같이 상주 노릇을 하자고 다짐할 정도였다. 최천택이 남긴 글에 따르면 “박재혁, 김인태, 김병태, 김영주, 장지형(장건상 조카), 오택 등 친구들과 매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전도를 모의하였다”고 한다.●고서적상으로 위장… 서장실 들어가 폭탄 던져 2학년 때인 1913년 박 의사와 최천택 등은 일제가 금서로 규정한 ‘동국역사’를 여러 학교와 학우들에게 몰래 나눠주다 발각됐다. 구한말 역사가인 현채가 지은 우리 역사교과서였다. 이때부터 박 의사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된다. 3학년이 된 박 의사는 최천택 등 16명과 ‘구세단’을 결성, 지역 청년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탄로 나 1주일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다. 구세단은 1915년을 전후해 경남 밀양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이 결성한 ‘일합사’와 교류했다. 이는 나중에 박 의사가 의열단에 가입하는 계기가 됐다. 박 의사는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1920년 초 박 의사는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김원봉은 “부산경찰서장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는 의열단원 다수를 체포한 악질 경찰로 경남북 경무부 관내 수석 서장인 거물이었다. 박 의사는 김원봉에게서 거사 자금 300원과 여비 50원, 러시아제 원통형 폭탄 한 개를 받아 중국 상하이를 떠났다. ●“모든 책임 진다” 편지 붓대롱에 넣어 친구에 박 의사는 감시가 심한 관부연락선을 타려던 계획을 바꿔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잠입했다. 선생은 상하이 동지들에게 ‘熱落仙他地末古 大馬渡路徐看多’(열락선 타지 말고 대마도로 간다)고 적은 엽서를 보냈다. 검열을 피하려고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부산에 들어온 날은 1920년 9월 6일이었다. 폭탄은 친구 오택의 집에 숨기고 “총독부를 폭파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얘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경은 오택을 찾아와 박 의사의 입국 경위를 캐물었다. 의사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폭탄을 숨겨둔 오택의 집으로 갔다. 오택은 유고집에서 이렇게 썼다. “박형이 시간이 절박하다며 맡겨둔 물건을 내어달라고 독촉했다. 나는 암실에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나왔다.” 박 의사는 가족을 부탁하면서 붙잡히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홀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박 의사가 중국 고서적상을 가장해 용두산공원 아래 부산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9월 14일 오후 2시 30분쯤이었다. 폭탄을 숨긴 짐꾸러미를 들고서였다. 최천택은 용두산공원에서 망을 보았다고 한다. 고서적상으로 위장한 것은 하시모토가 중국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박 의사는 서장실로 들어가 서장이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라며 준엄하게 꾸짖고는 폭탄을 던졌다. “꽝” 하고 폭탄이 터졌다. 폭탄은 1층 유리창과 책상을 부수고 천장을 관통할 만큼 강력했다. 하시모토는 중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의사도 오른쪽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일본 관광객 보기 안 좋다”… 표지석도 안 세워 다친 박 의사는 현장에서 검거됐다. 투탄 후 경남 전역에 비상령이 내려졌다. 일경은 경찰서 주변을 지나던 행인 등 수십 명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들였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잡혀와 심문을 받았다. 최천택 등 친구들도 붙잡혔다. 오택은 폭탄을 숨겨준 혐의로 1년 동안 수감됐다. 응급처치를 받은 박 의사는 공범을 불라는 일경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단독범행임을 고집했다. 박 의사는 부립병원 간호원을 통해 유치장에 갇힌 최천택에게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짧은 편지를 붓대롱에 넣어 전달했다고 한다. 망을 보았던 최천택(1897~1962·건국훈장 애족장)은 모진 고문을 받아 의식을 잃은 채 풀려났다. 치안 조직의 핵심인 경찰서장실에 폭탄을 던진 박 의사의 의거는 일본 본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일본 신문들은 “일선(日鮮) 동화를 단념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썼다. 박 의사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2심에서 사형으로 형량이 높아졌고 경성고법 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사형이 선고되자 선생의 홀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대성통곡했다. 방청객 모두 따라 울었다. 폭탄 파편에 맞은 부상과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 생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박 의사는 면회 온 사람들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고 유해도 1969년 부산에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그러나 부산에서도 박 의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데는 정부나 부산시의 책임이 크다. 동상조차 예산 한푼 들이지 않고 롯데그룹 지원으로 건립했고 그나마도 인적이 드문 부산 성지곡 수원지 맨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산길을 돌아 찾아간 동상 앞에는 등산객 몇몇이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을 뿐이었다. 폭탄 의거가 있었던 옛 부산경찰서 자리엔 모텔과 상가가 들어서 있었다. 그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표지석도 없었다. “개인 땅이어서 안 된다”거나 “일본 관광객들 보기에 안 좋다”는 반대에 부닥쳐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헝가리 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의열단장 김원봉은 고국이 해방되자 이역에서 숨진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귀국했다. 김원봉은 피 묻은 박차정의 속적삼을 친정 식구들에게 전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뒷산에 유골을 묻었다. 13년이란 짧은 세월이었지만 중국 땅에서 함께 투쟁한 동지이자 반려자였다. ●중국서 만난 김원봉과 13년간 항일독립운동 제대리에서 내려 농가를 지나 야산으로 들어가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니 띄엄띄엄 무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묘지였다는데 나무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100m쯤 올라가니 박차정의 묘소가 나타났다. 마른 솔잎이 봉분을 뒤덮는 바람에 풀이 자라지 않아 메말라 있었다. 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여성 독립운동가의 묘소로는 너무 초라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란 비문만이 묘주(墓主)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묘소에서 멀리 너른 들녘이 보이고 밀양강이 굽이쳐 흐른다. 밀양강 바로 북쪽, 해천 옆에 남편 김원봉의 생가가 있었다. 그 위쪽 부북면 신작로에는 해방 후 귀국해 고향을 방문한 김원봉을 환영하는 인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었다.‘빨갱이’로 낙인찍힌 김원봉의 배우자란 딱지는 박차정의 공훈을 인정받는 데도 오랫동안 장애물이 됐다.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박차정의 생가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 동래고등학교 담벼락 옆 동네 안쪽에 있다. 지금은 옛날 모습대로 깔끔하게 복원돼 드문드문한 관람객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충절의 고향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은 어릴 때부터 반일 감정이 남다른 소년이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방황하던 김원봉은 대한광복회의 암살 활동에 충격을 받고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약산은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터진 3·1운동의 비폭력에 실망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암살·파괴활동이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열혈 운동가들은 민중 속에 잠재한 폭력의 위력을 끌어내는 뇌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1919년 11월 9일 중국 지린성 반 아무개 농부의 집에 우국 청년 10명이 모였다. 밤샘 토론 끝에 김원봉을 의백(義伯·단장)으로 하는 의열단이 결성됐다.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등을 ‘칠가살’(七可殺)로 규정, 처단의 목표로 삼았다. 단원들은 거사에 서로 가겠다고 싸울 정도로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첫 거사 모의는 그만 악명 높은 조선인 경찰 김태석에게 발각돼 윤세주 등 6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의 밀양경찰서장 폭탄 투척,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기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습격 등 잇단 의거를 감행했다. 헝가리인 마자알의 고성능 폭탄 제조법 전수와 의열단 정신을 명문화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 단원이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화물선 석탄창고 속에서 열이틀을 지낸 끝에 일본에 도착해 황궁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원들의 잇단 항거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에게는 김구 선생보다 많은 100만원(현재 가치 약 320억원)이란 막대한 현상금이 붙었다. 김원봉은 잠자리를 자주 옮겨 다니고 같이 사진을 찍고 나서는 원판을 회수하는 치밀함을 보이며 일경을 따돌렸다. 신출귀몰이었다. ●신출귀몰 약산,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 더 붙어 5~6년 동안 수백건의 투쟁을 했지만 자금이 바닥나자 의열단의 활동도 주춤해졌다.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약산은 군관학교에 다니던 조선 학생들을 가입시키면서 의열단 재건에 나섰다. 김원봉이 박차정을 만난 것은 이즈음이다. “천궁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의 반월이/ 고요히 대지 위에 비칠 때(…)/ 옛 기억이 마음의 향로에서 흘러넘쳐서/ 비애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1910~1944)이 18세 때 모교(동래 일신여학교·현 동래여고) 교지에 발표한 시 ‘개구리 소리’다. 꿈 많은 문학소녀였던 박차정은 항일 정신으로 무장된 집안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침략에 비분강개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박차정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서울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바로 ‘근우회 사건’이다. 두 번의 구금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해 몸은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박차정을 중국으로 부른 사람은 의열단에 몸담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였다. 박차정은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합류했다. 1930년 3~4월쯤이었다.●독립투쟁·문학 공통관심… 사랑으로 발전 박차정은 등단을 권유받을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김원봉도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등의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다. 독립투쟁과 문학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관심사는 사랑으로 승화됐다. 두 사람은 1931년 3월 결혼했다. 김원봉은 난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장제스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해 투사들을 양성했다. 이육사는 이 학교 1기 졸업생이었다. 박차정은 교관으로 힘을 보탰다. 김원봉은 일본의 침략이 격화되자 혁명세력의 통합을 위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박차정은 그 산하에 난징조선부녀회를 만들어 당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독려했다. 약산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 10월 10일 항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약산은 의용대장이 됐고 박차정은 부녀복무단장을 맡았다.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을 했고 총을 들고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39년 2월 박차정은 장시성 쿤륜관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화베이지방으로 북상해 팔로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김원봉은 화베이로 가지 않고 임시정부에 합류해 광복군 부사령관, 임정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군무부장 취임 직후인 1944년 5월 27일 부상의 후유증이 깊어져 아내 박차정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김원봉은 광복을 맞아 근 30년 만에 귀국했으나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 인사 김원봉에게 반대파의 백색테러와 암살 위협이 지속됐다. 미군정에 체포됐을 때 고문을 하고 수모를 준 경찰이 친일 앞잡이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풀려난 뒤 너무나 분해서 사흘 동안 통곡했다고 한다. 김원봉이 월북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검열상과 노동상이란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1958년 숙청당하고 말았다.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좌우를 넘나들며 독립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약산 생가터엔 의열기념관… 서훈은 거부 당해 밀양 내이동 김원봉의 생가터에는 의열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앞에 흐르는 해천변에는 항일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는 “김원봉뿐만 아니라 박제혁, 최수봉, 강우규 의사 등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라면서 “의열단에 최초로 참여한 사람은 알려진 대로 13명이 아니라 10명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약산 집안의 9남2녀 중 4형제는 6·25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당했다. 막내 김학봉(86)씨가 생존해 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 중이다. 김원봉에 대한 유족과 밀양시민들의 서훈 신청은 번번이 거부됐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남북 공동 연구하면 잊혀진 우리 역사 바로 설 것”

    “남북 공동 연구하면 잊혀진 우리 역사 바로 설 것”

    “광저우 독립운동가를 남북한이 공동 연구하고 잊혔던 우리 역사도 바로 섰으면 좋겠습니다.”1920~1930년대 중국 광저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33명을 발굴한 재중 연구가 강정애(60)씨는 14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이 같은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공산주의자라는 낙인 때문에 치열한 항일 투쟁을 했음에도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이들을 이제는 남북한이 함께 연구해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강씨는 2009년 11월 광저우에 있는 황포군관학교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한국인 김근제, 안태의 묘를 보게 됐다. 1927년 이십대 젊은 나이에 죽은 이들은 입학도 하지 못한 예비학생 신분이었다. 이들은 왜 꽃다운 나이에 광저우까지 오게 됐을까. 강씨는 의문이 생겼다. 자료를 찾아본 강씨는 독립운동가들이 1924년 쑨원의 국공합작 이후 광저우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로 1924년 1월 중국 국민당 전국 대표대회에 의열단 김원봉과 권준 지사 2명이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원봉은 이듬해인 1925년 의열단 12명을 황포군관학교에 데려온다. 이런 식으로 1927년 봄까지 광저우에 온 독립운동가는 8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1927년 4월 국공합작 결렬 이후 다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 역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강씨는 발품을 팔아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광저우 지역에서 사들인 중고 서적, 중국 중산대학의 역사 자료, 당시 기사와 현장 방문으로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이 자료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 그리고 독립기념관의 자료들과 비교, 대조했다. 회사를 마친 뒤 자료에 나온 곳을 찾고 후손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자료를 정리했다. 전문 연구가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현지에서 10년 동안 모은 자료는 방대하고 촘촘하다. 이렇게 1차로 33명의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냈다. 신해혁명에 참여한 첫 한국인인 범재 김규흥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다. 분명한 발자취가 있음에도 우리 역사에는 왜 이들에 관한 자료가 없었을까. 알려지지 않은 이들 대부분이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란 게 강씨의 주장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는 나라를 되찾을 힘이 필요했습니다. 공산주의와 상관없이 중국을 돕고, 중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이루자는 의도였습니다. 이승만을 비롯해 상하이나 미국 등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잘 알려졌지만 (광저우의 독립운동가들은)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잊혔습니다.” 강씨는 자신이 이렇게 얻은 방대한 자료를 내년까지 책으로 낼 예정이다. 이 자료에 관한 검증과 활용은 남북한이 함께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연구 결과가 맞는지 틀리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식으로 바로잡아야 하는지는 결국 후대의 과제라는 것이다. “남북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은 시기입니다. 체육이나 예술 교류는 활발하지만 다른 분야는 미진합니다. 이런 점에서 광저우 독립운동가는 남북이 함께 연구하기에 아주 좋은 소재라 생각합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윤창수 베이징 특파원 항일투쟁 발자취를 찾다] 폐허로 변한 ‘광복 선봉’ 의용대 옛터… 함께 싸운 팔로군은 혁명성지로 보존

    [윤창수 베이징 특파원 항일투쟁 발자취를 찾다] 폐허로 변한 ‘광복 선봉’ 의용대 옛터… 함께 싸운 팔로군은 혁명성지로 보존

    “강제병(으로) 끌려 나온 동포들은 팔로군(八路軍)이 있는 곳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늘로 향하여 쏘시오!”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으시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지금 봐도 가슴이 뛰는 한글 격문들이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릴 정도로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남북 600㎞ 길이의 타이항산맥 곳곳에 숨어 있다. 서울신문은 광복절을 앞두고 지난 11~12일 중국 허베이성과 산시성 일대 조선의용대의 역사적 발자취를 좇았다. 좌우로 이념이 갈리면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첫 정규군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피 흘렸던 조선의용대의 역사는 잊혀지거나 버려졌다. 함께 싸웠던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은 승리의 역사로 생생하게 보존돼 있지만 조선의용대의 주둔지는 잡풀만 무성해 저절로 통한의 눈물을 자아낸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약산 김원봉이 중국의 한커우에서 200여명 규모로 창설한 항일 첫 부대였다. 영화 ‘암살’(조승우 연기)과 ‘밀정’(이병헌 연기)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김원봉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국민당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후 조선의용대와 함께 광복군에 편입했지만 1948년 월북하면서 그의 이름과 함께 조선의용대의 전공도 잊혔다. 산시성 진중(晉中)시 쭤취안(左權)현 상우(上武)촌의 흥복사 일대는 조선의용대가 최초로 주둔한 곳이다. 중국 공산당의 화장실 혁명이 아직 시작되지 않아 재래식 화장실만 있는 궁벽한 마을 입구에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주둔지란 표지판이 당당하게 세워져 있다. 마을 아이들은 베이징에서 온 역사 탐방단이 들어서자 ‘오빠는 강남 스타일’ 노래를 부르며 환영했다.조선의용대는 군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등 3개 언어에 능통해 일제에 저항하는 선전 작업에도 대거 투입됐다. 그런데도 농민이 주력 대원이었던 공산당 팔로군과 달리 전투에도 능해 그들의 맹렬한 기세를 기억하는 현지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타이항산에서 벌인 전투는 일본군을 마을 밖으로 유인하느라 인명피해가 컸지만 조선의용대의 명성을 높인 1941년 12월 후자좡(胡家莊) 전투 등이 유명하다. 하지만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과 펑더화이(彭德懷)의 퇴로를 열어 주면서 진광화, 윤세주 열사가 희생된 십자령 전투를 빼놓을 수 없다. 1942년 5월 일본군이 3만 5000명의 대부대를 동원해 팔로군을 싹쓸이하는 ‘참빗작전’을 벌이면서 팔로군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됐다. 조선의용대가 십자령에서 처절하게 희생된 끝에 팔로군 지도부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상우촌 마을 주민들은 무명 열사 묘가 있는 곳을 안내하며 잡풀이 무성하니 조심하라고 친절하게 당부했다. 인적이 끊겨 희미한 자취만 남은 길을 따라 가슴팍까지 오는 풀숲을 헤치고 산을 오르자 한국이 있는 동녘을 바라보며 잠든 ‘의용군 열사지묘’가 나타났다.팔로군의 명장이었던 쭤취안 장군의 이름을 딴 쭤취안현 윈터우디(云頭底)촌에는 조선의용대가 70여년 전에 남긴 한글 격문이 남아 있다. 마을 주민들이 보존해 온 한글 격문은 마을 입구에 세워진 망루에 쓰여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허베이성 한단(邯鄲)시 서(涉)현 스먼(石門)촌에 있는 ‘조선의용군 열사 기념관’은 팔로군이었던 시아버지를 둔 중국인이 관리한다. 방문객이 오면 전화를 받고 열쇠로 문을 열어 주는 리슈잉(李秀英·53)은 “지난해 10월 개최된 제19차 공산당 대회를 기점으로 중국에서도 공산당 유적을 돌아보는 ‘홍색 관광’ 열기가 크게 일고 있다. 매일 한 팀 이상 찾을 정도로 방문객이 늘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중앙(CC)TV도 최근 이곳을 찾아 취재했다.타이항산맥 우즈(五指)산 자락의 조선의용대 주둔지에는 ‘잘생기고 멋진 조선 오빠’를 기억하는 왕차오즈(王巧枝·90) 할머니가 생존해 있다. 왕 할머니는 아직도 큰방을 조선 사람들에게 선뜻 내어 주고 작은방에서 묵었던 기억을 간직한다. 왕 할머니는 “조선의용대가 타이항산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키우는 등 주민들과 농사를 함께 지었다”며 “처음에는 조선 사람들이 우물에서 물을 제대로 못 길어서 동네 사람들이 물 긷는 법도 알려 줬다”고 회상했다. 16살 때 ‘조선인 오빠’라고 기억하는 조선의용대원들과 한집에서 살았던 왕 할머니는 지금도 그 집에 그대로 살고 있다. 집 마당에는 일본군을 피해 조선의용대들이 몸을 숨겼을 법한 토굴도 있다. 왕 할머니의 중국어는 현지 사투리가 심해서 중국인의 통역이 따로 필요할 지경이었지만 한번 잡은 손을 오랫동안 놓지 않으며 말을 이어 갔다. 멀리 베이징에서 왔으니 하룻밤 묵어가라는 인정만은 조선의용대에게 보여 준 것과 같으리라 짐작됐다. 조선의용대를 기억하는 중국인들이 너무 연로해 상세한 역사적 구술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조선의용대들이 현지 주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농사일도 함께 하는 등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 앞에서 중국인과 한마음으로 힘을 합쳤던 것으로 짐작된다. 타이항산은 조선의용대를 품은 역사 그 자체였다. 잡풀이 무성하지만 일부 주둔지에는 한글로 ‘조선의용군 옛터’라고 쓴 표지판도 설치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내년에 한국 방문객들이 조선의용대를 추모하는 데 손색이 없다. 상룽성(尙榮生) 조선의용군기념관장은 “조선 독립운동에서 조선의용대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지만 아는 중국인들도, 한국인들도 많지 않아 섭섭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의용대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 얽힌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되새겨야 할 존재들”이라고 말했다. geo@seoul.co.kr
  • [윤창수 베이징 특파원 항일투쟁 발자취를 찾다] ‘빛난 전투’ 조선의용대 주둔터 잡초만 무성

    [윤창수 베이징 특파원 항일투쟁 발자취를 찾다] ‘빛난 전투’ 조선의용대 주둔터 잡초만 무성

    내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중국 내 연구자들과 동포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자취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광복절을 앞둔 지난 11~12일 베이징에서 출발한 역사탐방단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첫 정규군으로 기록된 조선의용대가 주둔하며 일제와 전투를 벌였던 허베이성과 산시성에 걸쳐 있는 타이항산맥을 찾았다.조선의용대를 기억하는 현지 중국인들은 그들은 중국군과 대등하게 소통하며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맹렬히 맞서 싸웠다고 그들의 빛나는 활약을 탐방단에 전했다. 경남 밀양 출신 약산 김원봉이 1938년 창설한 조선의용대는 독자적 전투 끝에 광복군에 편입했지만 이들 중 일부가 북한으로 가면서 의문부호로 남았다. 산시성 진중(晉中)시 쭤취안(左權)현 상우(上武)촌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조상의 묘를 찾는 청명절이면 이름 모를 조선인 의용대원을 위한 제를 올린다. 이곳에는 타이항산 십자령 전투 중에 사망한 조선의용대의 진광화, 윤세주가 처음 묻힌 곳과 함께 조선의용대 무명용사의 묘가 있다. 쭤취안현 윈터우디(云頭底)촌에는 일본어, 중국어 등 3개 언어에 능통해 선전전에 투입됐던 조선의용대의 한글 격문이 남아 있다. 한글을 모르는 주민들이 그림을 그리듯 페인트칠을 하며 보존해 온 70여년 묵은 기록이다. 한국 정부가 2004년 세운 ‘조선의용군 열사 기념관’은 공산당의 유적지를 찾는 ‘홍색 관광’ 열기로 하루에 한 팀 이상 방문객이 찾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의용대 주둔터는 잡풀이 무성한 폐허로 방치되어 함께 피 흘렸던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기념관과 쓸쓸하게 대비된다. 상룽성(尙榮生) 조선의용군기념관장은 “조선의용대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차단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있어야만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완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타이항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김원봉 드라마 나온다 “주목 받지 못한 이인자” KBS 대하사극 출사표

    김원봉 드라마 나온다 “주목 받지 못한 이인자” KBS 대하사극 출사표

    KBS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약산(若山) 김원봉 선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 대하드라마를 만든다. 18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KBS 관계자는 “임정 100주년인 내년을 맞아 대하드라마를 선보이려고 여러 아이템을 기획 중인데 이 중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을 주인공으로 한 구상이 있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김원봉 선생은 김구 선생 다음 이인자였는데 월북을 하는 바람에 엄청난 역할을 했음에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지금쯤 이 인물에 대해 조명을 해보면 어떨까 한다”며 사극 기획 이유를 전했다. 앞서 김원봉은 2015년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2016년 ‘밀정’에서 이병헌이 연기해 화제가 됐던 인물. 김원봉은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항일무장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월북 행정과 종파 다툼으로 인해 남한과 북한, 어디에서도 제대로 환대받지 못하는 비운의 독립운동가로 불린다. 아직 기획 단계인 이 드라마는 내년 광복절 전후 첫 방송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KBS가 100% 자체 제작한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영애 주연 ‘이몽’ 건국 100주년 기념 2019년 방송 확정 ‘첩보 멜로’

    이영애 주연 ‘이몽’ 건국 100주년 기념 2019년 방송 확정 ‘첩보 멜로’

    배우 이영애가 캐스팅되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첩보 멜로 드라마 ‘이몽’이 2019년 방송을 확정짓고 건국 100주년 기념 드라마로 도약한다. 드라마 ‘이몽’은 일제강점기 경성과 만주, 그리고 중국 상해를 배경으로 펼치는 첩보 멜로 드라마로 독립투쟁의 최선봉이었던 비밀결사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과 일본인에게 양육된 조선인 외과의사 이영진(이영애 분)이 상해임시정부의 첩보요원이 되어 태평양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활약하는 블록버스터 시대극이다. 김원봉 역을 포함한 주요 배역들의 캐스팅이 진행 중이며 올 가을 몽골, 상해 등의 로케이션을 시작으로 본격 촬영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몽’의 촬영이 코앞에 다가오자 아시아 전역 및 미주, 이란과 중동 등에서까지 판권 문의가 뜨겁다는 전언. 더욱이 2019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민족영웅들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 ‘이몽’에 대한 국내외 기대감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태양의 후예’의 제작총괄로 최근 ‘이몽’ 프로젝트에 합류한 한석원 부사장은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뜨거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몽’은 다가오는 2019년, 글로벌 프로젝트의 첫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며 “건국 100주년 기념 드라마에 걸맞게 국내외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퀼리티 높은 드라마를 선보이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건국 100주년 기념 드라마 ‘이몽’은 현재 캐스팅 막바지에 있으며, 2019년 전 세계 방송 예정이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운암 김성숙선생 49주기 추모재

    운암 김성숙선생 49주기 추모재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의 49주기 추모재가 오는 12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회장 함세웅) 주최로 오전 11시 열린다. 이번 추모재에서는 운암선생 유족, 관련단체장, 회원 등 500여명이 참석하며 개식, 국민의례, 운암 김성숙 선생 약사보고, 내빈추모사, 합창단 추모곡, 헌화 및 분향, 조총발사 및 묵념, 그리고 운암 김성숙 선생 묘소 참배 순서로 진행되며 군악대 반주에 맞춰 부천 석왕사합창단의 추도곡, 역사어린이합창단의 공연으로 진행되며 국방부의장대, 수도방위사령부 군악대가 참여한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나 19세에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했으며, 1919년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의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운암 김성숙선생은 조선의용대, 일제 주요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의열단에 가입하고 ‘반역사’(反逆社)라는 이름의 학생단체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을 배후 조종하며 항일투쟁 선봉에 서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기념사업회에 전달한 추도사에서 “다툼을 그치고 서로를 존중하며 대한민국의 앞길을 여는 일이야말로 운암 선생의 고귀한 뜻을 받드는 길일 것입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는 이 봄에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한길을 걸으셨던 선생의 가르침이 우리와 늘 함께하길 바라는 절실함으로 삼가 분양합니다”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밀양 ‘의열기념관’ 내일 개관

    밀양 ‘의열기념관’ 내일 개관

    경남 밀양시는 5일 항일 독립운동 의열투쟁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기념관을 7일 개관한다고 밝혔다. 시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 장군의 생가 부지(내이동) 150㎡와 생가 자리에 건립된 2층 건물을 2016년 11월 매입해 리모델링했다. 전국 최초 의열기념관으로 12억원이 들었다. 의열투쟁 주요 사건 관련 자료와 동영상, 김 장군의 연설 동영상 등 항일 독립운동 당시 목숨을 걸고 벌인 의열투쟁을 소개하는 다양한 자료를 전시한다. 밀양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인사

    ■국무조정실·총리비서실 ◇고위공무원△총무기획관 최창원△사회복지정책관 장상윤 ■교육부 △고등교육정책실장 이진석△학교혁신지원실장 이중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 ◇고위공무원 전보△경영기획실장 손승현△경인지방우정청장 이동형△충청지방우정청장 홍만표△전남지방우정청장 정진용△전북지방우정청장 김성칠◇3급 전보△우편정책과장 신대섭△물류기획과장 김홍재△금융총괄과장 박태희△보험기획과장 김도균△보험개발심사과장 이진영△감사담당관 이동명△서울관악우체국장 최상규△여의도우체국장 김재목◇4급 전보△경영성과정보담당관 김맹호△소포사업과장 최승만△국제사업과장 오형근△우편집배과장 임성민△예금사업과장 박한선△예금증권운용과장 김승모△예금대체투자과장 최충봉△보험위험관리과장 김희중△보험사업과장 권영란△보험대체투자과장 김동주△우정사업정보센터 우편정보과장 김성택△서울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김군현△서울지방우정청 사업지원국장 김영일△서울중앙우체국장 김영호△동대문우체국장 김낙현△서울서초우체국장 조현진△서울중랑우체국장 박기섭△경인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천장수△경인지방우정청 사업지원국장 박윤섭△인천계양우체국장 김동혁△남인천우체국장 황국선△인천남동우체국장 윤순상△성남분당우체국장 오기호△부천우체국장 박병률△용인우체국장 박종욱△평택우체국장 송준현△화성우체국장 신동희△경기광주우체국장 조현호△구리우체국장 권혁운△부천우편집중국장 김상우△안양우편집중국장 선향△부산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김용원△동래우체국장 김규영△남부산우체국장 최재웅△부산금정우체국장 심정보△부산사하우체국장 윤원근△양산우체국장 최종철△부산우편집중국장 남철진△부산영도우체국장 김기영△동천안우체국장 진수동△공주우체국장 이남훈△전남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박종훈△광주우체국장 박호열△서광주우체국장 황백만△광주광산우체국장 강명구△목포우체국장 김석주△순천우체국장 임영일△광양우체국장 우홍철△나주우체국장 김주열△경북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이건호△경북지방우정청 사업지원국장 김진만△대구우체국장 오일태△북대구우체국장 최무열△대구수성우체국장 박성수△포항우체국장 김원봉△안동우체국장 권천조△경산우체국장 김종환△익산우체국장 장재혁△강원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김영식△춘천우체국장 박찬우△동해우체국장 함기철△속초우체국장 이동만△제주우체국장 신유익 ■법무부 ◇고위공무원 전보△법무부 보안정책단장 이경식△법무부(국방대학교) 이영희△서울구치소장 윤재흥△대전교도소장 신경우△광주교도소장 김천수△안양교도소장 오홍균△수원구치소장 권민석◇부이사관 전보△법무부 보안과장 김승만△화성직업훈련교도소장 김동현△의정부교도소장 김진구◇서기관 승진△대구교도소 보안과장 김영광△대구교도소 분류심사과장 서보균△수원구치소 보안과장 김현우△ 부산구치소 보안과장 최철경△경북북부제1교도소 보안과장 최종수◇서기관 전보△법무부 직업훈련과장 오세홍△법무부 의료과장 박진열△법무부 심리치료과장 서호영△법무부 보안과 금용명△법무부 분류심사과 이희정△법무부(통일교육원) 민낙기△법무연수원 교정연수과장 김평근△서울지방교정청 사회복귀과장 강군오△대구지방교정청 총무과장 도재덕△대구지방교정청 보안과장 정재열△대전지방교정청 총무과장 하영훈△대전지방교정청 보안과장 김동환△대전지방교정청 사회복귀과장 최병록△광주지방교정청 사회복귀과장 홍순철△여주교도소장 김도형△진주교도소장 김태수△목포교도소장 박병일△춘천교도소장 김동윤△원주교도소장 신동윤△경북북부제2교도소장 이승철△경북북부제3교도소장 서수원△울산구치소장 정창헌△홍성교도소장 노용준△경주교도소장 이경우△밀양구치소장 김철민△강릉교도소장 양원동△영월교도소장 민현기△해남교도소장 김재익△정읍교도소장 박삼재△상주교도소장 노현태△서울구치소 부소장 장종선△서울구치소 총무과장 최진규△서울구치소 분류심사과장 김재술△대전교도소 부소장 황의호△대전교도소 분류심사과장 고성태△광주교도소 부소장 홍정기△안양교도소 부소장 김왕무△안양교도소 총무과장 차재성△부산구치소 부소장 박상용△수원구치소 부소장 남상오△서울동부구치소 부소장 서민△서울동부구치소 총무과장 박종관△서울동부구치소 보안과장 김영대△인천구치소 부소장 김남주△인천구치소 총무과장 이효선△서울남부구치소 총무과장 이홍연△경북북부제1교도소 부소장 김진석◇부이사관 승진△법무부 출입국기획과장 박상훈△제주출입국관리사무소장 김도균△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장 이동휘◇서기관 승진△법무부 출입국기획과 강수근△법무부 외국인정책과 이재형△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 총무과장 나현웅△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총무과장 김병철△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관리과장 구본준△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이민특수조사대장 고석곤△창원출입국관리사무소장 오주호△전주출입국관리사무소장 이정욱△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 안산출장소장 서철진◇서기관 전보△법무부 출입국심사과장 김두락△법무부 체류관리과장 이덕룡△법무부 이민조사과장 이재유△법무부 이민정보과장 이상달△법무부 국적과장 반재열△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 지원국장 최영길△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 심사1국장 김현채△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 심사2국장 심준섭△서울남부출입국관리사무소장 임진택△김해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장 정수동△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장 배상업△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장 황택환△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장 유병길△양주출입국관리사무소장 김민수△울산출입국관리사무소장 이춘용△김포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장 김상진△광주출입국관리사무소장 우석환△춘천출입국관리사무소장 천승우△청주출입국관리사무소장 고동기△청주외국인보호소장 김수남 ■보건복지부 ◇국장급△인구정책실 보육정책관 김상희◇과장급△OECD 대한민국정책센터 파견근무 맹호영△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파견근무 임근찬△기획조정실 통상협력담당관 남복현△사회복지정책실 자립지원과장 방석배△사회복지정책실 복지정보기획과장 신지명△사회보장위원회사무국 사회보장조정과장 우경미△질병관리본부 국립포항검역소장 이능교△OECD 대한민국정책센터 파견근무 김덕곤 ■환경부 ◇국장급 전보△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장 김용건◇과장급 전보△기후미래정책국 기후경제과장 오일영 ■국토교통부 ◇과장급 전보△제주지방항공청장 장만희△항공안전정책과장 정의헌△부산지방항공청 안전운항국장 이종성△부산지방항공청 항공관제국장 이원행△서울지방국토관리청 수원국토관리사무소장 최영락△국토지리정보원 공간영상과장 이부영△국토지리정보원 운영지원과장 장구중△원주지방국토관리청 건설관리실장 김광덕 ■해양수산부 ◇과장급 전보△세월호후속대책추진단 기획총괄과장 윤상훈△세월호후속대책추진단 대외협력과장 나송진△해양수산부 이상길△인천지방해양안전심판원 수석조사관 김철홍 ■중소벤처기업부 ◇부이사관 승진△장관비서관 김대희△기획재정담당관 박치형◇과장급 전보△대전충남중소벤처기업청장 홍진동△시장상권과장 김정일△경기지방중소벤처기업청 창업성장지원과장 윤종욱△울산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하인성△기술혁신정책과장 김우순 ■공정거래위원회 ◇과장급 파견△대법원 고용휴직 김성균◇과장급 전보△공정거래위원회 이용수 ■방송통신위원회 △행정법무담당관 신종철△방송정책기획과장 장봉진△지상파방송정책과장 신승한△이용자정책총괄과장 곽진희△통신시장조사과장 고낙준△방송광고정책과장 김재철△편성평가정책과장 오광혁△방송시장조사과장 반상권△운영지원과장 김종영 ■농촌진흥청 ◇승진<과장급>△국립원예특작과학원 원예특작환경과장 김현란△국립축산과학원 가축유전자원센터장 이성수△국립농업과학원 농산물안전성부 농자재평가과장 홍수명<도원국장>△전라남도 농업기술원 연구개발국장 박흥규△경상북도 농업기술원 연구개발국장 김세종△경상남도 농업기술원 기술지원국장 최달연 ■기상청 ◇고위공무원단 전보△기획조정관 김성균△기후과학국장 신도식◇4급 전보△총괄예보관 김영화△국가태풍센터장 정덕환△기상기후인재개발원 인재개발과장 임하권△부산지방기상청 예보과장 고정석△부산지방기상청 대구기상지청장 전준항△광주지방기상청 예보과장 유근기△광주지방기상청 관측과장 박정수△대전지방기상청 기후서비스과장 유민수△대전지방기상청 청주기상지청장 정광모△제주지방기상청 기후서비스과장 선지홍△기상레이더센터 레이더운영과장 김동진△국립기상과학원 연구기획운영과장 문재인 ■전남도청 ◇실·국장급 승진△감사관 박준수△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청 행정개발본부장 강효석△장기교육 안상현◇실·국장급 직위승진△동부지역본부장 직무대리 송경일◇실·국장급 전보△일자리정책실장 김병주△경제과학국장 김신남△관광문화체육국장 방옥길△보건복지국장 문동식△농림축산식품국장 전종화◇실·국장급 전입△공무원교육원장 이인곤◇실·국장급 파견△한국전력공사 위광환△장기교육 정찬균△장기교육 임채영△장기교육 서은수◇실·국장급 전출△목포시 정순주◇국장급 공로연수△서기원 윤광수◇준국장급 전보△대변인 이기춘△모터스포츠담당관 김양수△의회사무처 의사담당관 박봉순△자치행정국 총무과 안기권◇준국장급 전출△구례군 부군수 최정희△보성군 부군수 유현호△해남군 부군수 최성진△무안군 부군수 장영식△진도군 부군수 이춘봉 ■국민건강보험공단 ◇1급 전보△광진지사장 주용화△성북지사장 신동효△은평지사장 박두신△영등포남부지사장 김재훈△동작지사장 정재규△서초북부지사장 조해곤△송파지사장김덕용△해운대지사장 정형태△창원마산지사장 유재승△안동지사장 박득수△구미지사장 우병욱△칠곡지사장 이해준△광주서부지사장 주인철△전주남부지사장 송선근△군산지사장 임동하△여수지사장 최옥용△대전중부지사장 한길호△대전서부지사장 김경숙△성남남부지사장 정범길△평택지사장 김정일△안산지사장 홍순경△고양일산지사장 정광수△남양주가평지사장 홍영삼◇2급 전보△급여보장실 급여개선부장 주원석△건강관리실 검진평가부장 이용구△서울지역본부 소송전담팀장 안석성△서울지역본부 보험급여2부장 이은옥△동대문지사 우상진△중랑지사 이명수△중랑지사 장용섭△강북지사 김장수△구로지사 양재춘△영등포남부지사 김석원△강남동부지사 구본세△강남서부지사 박숙희 유민임△송파지사 추동수△부산지역본부 보험급여2부장 최만림△부산지역본부 장기요양2부장 박인숙△부산진구지사 최경희△부산남부지사 김윤기△대구지역본부 보험급여2부장 이영현△대구지역본부 장기요양2부장 김성진△대구중부지사 김은순△경주지사 이철우△광주지역본부 보험급여2부장 이옥순△광주지역본부 장기요양2부장 김동석△광주서부지사 김희웅△전주남부지사 정상용△여수지사 남영환△대전지역본부 보험급여2부장 민정기△대전지역본부 장기요양2부장 정대옥△대전중부지사 양병준△천안지사 맹진영△경인지역본부 보험급여2부장 신영숙△경인지역본부 경인집중화센터장 이재장△인천남동지사 이용화△안산지사 손문락△광명지사 정주식△성남북부지사 황하원△성남남부지사 고흥석△파주지사 최광희 ■농촌경제연구원△부원장 정민국 ■한국조세재정연구원△공공기관연구센터 소장 라영재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경영지원본부장 김용빈△감사실장 김창하△양식어촌연구실장 마창모△극지연구센터장 김민수△연구기획·협력팀장 전형모△수급전망팀장 이헌동△홍보출판실장 김혁주 ■한국연구재단 △국제협력본부장 신숙경△인문사회연구총괄실장 박재간△국제협력기반실장 김종덕△국제협력진흥실장 이길승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산업연구과장 배재수△산림복지연구과장 손영모△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장 전현선 ■SBS ◇승진<부국장>△편성실 편성팀 비주얼커뮤니케이션담당 나병심△전략기획실 정책팀장 양윤석△전략기획실 UHD추진팀장 김도식△미디어비즈니스센터 동물농장사업프로젝트팀장 민인식△미디어비즈니스센터 글로벌제작사업팀 하승보△시사교양본부 사회공헌담당 성영준△시사교양본부 이윤민△예능본부 예능1CP 최영인△드라마본부 드라마2EP 홍창욱△보도본부 논설위원실장 윤춘호△보도본부 보도운영팀장 신홍기△경영본부 ERP팀장 김도중△경영본부 미디어솔루션팀장 김상진<부장>△아나운서팀 손범규△편성실 편성팀장 김상우△편성실 문화사업팀장 이영찬△전략기획실 경영기획팀 서정필△미디어비즈니스센터 사업기획팀장 우규호△미디어비즈니스센터 글로벌제작사업팀 김태형△시사교양본부 3CP 박진홍△시사교양본부 4CP 김기슭△시사교양본부 임기현△예능본부 예능3CP 유윤재△예능본부 예능4CP 공희철△예능본부 예능운영팀 마케팅담당 남경원△드라마본부 드라마4EP 박영수△보도본부 시민사회부장 표언구△보도본부 기획취재부장 양만희△보도본부 뉴미디어제작부장 이주형△보도본부 정치부 북한전문기자 안정식△보도본부 정책사회부 이용식△보도본부 문화과학부 과학전문기자 안영인△보도본부 북경지국장 편상욱△보도본부 보도제작부 동세호△보도본부 뉴미디어뉴스부 홍지영△경영본부 노사협력팀장 조정△경영본부 인사팀장 김기헌△경영본부 총무팀 시설관리담당 손진상△SBS미디어넷 파견(스포츠전략팀장) 김경수△경영본부 인프라관리팀장 정상욱△경영본부 송출기술팀 김병기△경영본부 편집기술팀 나종진 ■조선일보 ◇승진△부국장 박은주 ■TV조선 △사회에디터 겸 사회부장 이진동△정치부장 강상구 ■조선경제아이 ◇조선경제아이(조선비즈)△디지털편집국장 강경희△크리에이티브 에디터 겸 사회부장 박은주△정치부장 이동훈△경제부장 김기성△산업부장 김종호△정보과학부장 김주현△국제부장 정재형△이코노미조선 편집장 최원석◇아이티조선△전략마케팅이사 김윤곤△취재본부장 류현정△마이크로소프트웨어 편집장 조병승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장 겸 법과대학장 민만기△의과대학장 겸 의학전문대학원장 최연호△소프트웨어대학장 정태명△총무처장 전승호△학사처장 겸 식물원장 겸 교육학술림장 김윤배△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 이희상△정보통신대학원장 김문현△번역·TESOL대학원장 이혜문△박물관장 조환△유교문화연구소장 신정근△카운슬링센터장 이동훈△양성평등센터장 현소혜△성균어학원장 김수준 ■경상대 △법과대학장 황경환△수의과대학장 조규완△해양과학대학장 김무찬 ■신한은행 ◇신한금융지주<신규선임>△본부장 안준식 이영종 지원구◇신한은행<상무급 승진>△신한베트남은행 법인장 신동민<본부장 신규선임>△기관영업1본부장 류승현 △GIB본부장 겸 투자금융부 본부장 정근수△ICT본부장 배시형△업무혁신본부장 이범미△스마트컨택본부장 조경선△강동본부장 배두원△서초본부장 박현준△서부본부장 이상화△강원본부장 김기호△충북본부장 정도영△부산/울산본부장 정병각△대전/충남본부장 장용석△WM그룹 본부장 이찬구△대기업그룹 본부장 최동욱 이영철△글로벌사업본부소속 조사역(신한인도본부장) 권오형<본부장 재선임>△기관영업2본부장 이재석△영업추진1부 본부장 임준효△영업추진2부 본부장 전재원△여신지원본부장 이재학△디지털채널본부장 윤봉선△자금시장본부장 서태원△동부본부장 전영교△경기중부본부장 최현섭△중부본부장 윤보한△경기서부본부장 김혜민△경기동부본부장 백홍근△일산본부장 왕미화△강남본부장 박문근△경인본부장 서용근△강서본부장 김재성△대기업그룹 본부장 신연식△신한은행(중국)유한공사 법인장(본부장급) 우상태<본부장 전보>△기관영업3본부장 이병철△신탁본부장 최현지△대기업그룹 본부장 권태엽△북부본부장 박광옥△남부본부장 이상용<부서장 전보>△개인고객부장 최영화△유동성핵심예금 Lab장(부서장대우) 조병학△기관고객부장 박성현△영업기획부장 배현재△IB심사부장 겸 부장심사역 강명규△ICT기획부장 신희정△총무부장 마호창△전략기획부장 김기흥△재무회계부장 이정빈△감사부장 윤정현△동탄역금융센터 개설준비위원장 박영호△GIB사업부소속 조사역(부서장대우, 신한아주금융유한공사 사장) 장성은△뉴델리지점장 서봉균◇신한캐피탈<본부장 재선임>△기업금융본부 전호근 △리테일금융본부 이용동 △지역영업본부 김학영◇신한저축은행<본부장 신규선임>△리테일영업부 이호준 △종합기획부 강혁 ■키움증권 ◇이사부장 승진△법인영업3팀 최혜경△투자금융팀 김태현△프로젝트금융팀 김기만◇부장 승진△경영기획팀 나연태△업무개발팀 남현석△투자금융팀 정상협△투자금융팀 이승준△투자컨텐츠팀 구상회△PI팀 이재준 ■KB증권 ◇승진<상무보>△기업금융1부 강진두△기업금융2부 주태영△SF1부 문성철△에퀴티파생운용부 강승희△외환컨설팅부 민경섭<이사대우>△신용공여부 김국년△신기술사업금융부 강석원△스마트시스템부 손호영△PB지원부 김상혁△리스크관리부 이염무△양천지점 정경화△비즈니스시스템부 김영학△동래지점 남헌식△상품기획부 류재동△강남지점 이승우△평택지점 전현호△수유지점 김남희◇신규 보임<부서장>△FICC파생운용부 윤상호△채권영업부 정준△트레이등 퀀트부 안청희△디지털혁신부 심완엽△기업분석부 유승창△기업금융4부 김영동△해외사업지원부 윤법렬△투자금융3부 한민규△SF3부 김홍조△국제영업1부 김건형△해외사업추진부 문정환<지점장>△화곡지점 정민철△수유지점 윤철수△구로지점 신동성△신림지점 양회백△방배PB센터 고영륜△도곡스타PB센터 김종국△영통지점 김만숙△아산지점 권오식△포항지점 이영우△대천지점 박병효△논산지점 추현식△전주지점 신승균△화봉지점 허창훈◇전보<부서장>△업무지원부 이재용△해외상품부 배영식△MS부 김중강△S&T운영전략부 문주현△투자관리부 양창호△자금부 김성현△회계부 이성일△신용공여부 김경중△총무부 김국년△투자컨설팅부 이상화△ECM1부 이상오△투자금융1부 안병� 邃塚未鳧�2부 김경식△국제금융부 이용출<지점장>△상계지점 김남희△신설동지점 김상재△테크노마트지점 이재영△분당PB센터 정대영△수지PB센터 조관희△부평지점 오항영△평택지점 서원규△수원지점 박민배△대전PB센터 이중순△부천지점 전현호△대전지점 한대원<법인장>△홍콩현지법인 박종건 ■하나금융투자 ◇임원 승진<전무>△채권본부장 김희<상무>△투자금융2본부장 강성근△경영지원본부장 송인범<상무대우>△PI실장 김학우△부동산솔루션실장 김학정△SOC실장 신명철△신기술금융팀장 한진규△멀티에셋운용팀장 신동현△청주지점장 권영진△강남지점장 서강학◇부서장 승진△올림픽지점장 문경식△e-비즈니스실장 조대헌△소비자보호팀장 편도욱△법무팀장 김도형△알파 퀀트팀장 클라우디우람바△전주지점장 이정남△수원지점장 송희주△미금역지점장 김주형△창원지점장 서한주◇임원 전보<상무>△투자금융1본부장 편충현△마케팅본부장 윤병군△남부지역본부장 박재익◇부서장 전보△목동지점장 정용만△고객지원실장 이동구△돈암동지점장 정주우△업무혁신실장 김봉재△영등포지점장 구본탁△WM기획실장 이은용△잠실지점장 장윤석△인천지점장 이시헌△감사실장 안수련△영업추진실장 김대열△마케팅실장 정기환△신반포지점장 김운한 ■한국투자금융그룹 ◇한국투자금융지주<상무보>△감사실 정형문<부장>△윤리경영지원실 손해원△경영지원실 허석준△경영관리실 이영철◇한국투자증권<상무보>△대치PB센터 권문규△투자전략부 노근환△결제업무부 문영춘△서초동지점 이용구△광화문지점 조원호△연금영업담당 한관식<부장>△연금영업2부 고수영△구조화금융부 김영우△e기획부 김태훈△방화동지점 박춘하△건대역지점 서지형△양재중앙지점 양원택△인재개발부 유경석△강남대로지점 윤재원△상품전략부 이강희△상인PB센터 이상국△서신동지점 이은아△FICC공학부 이인석△청주PB센터 이종태△광명지점 장창수△부산지점 장철호△상무지점 정경윤△PSF부 차원주△구포지점 최경순△광양지점 최은석△M&A/기업융자1부 하미영△인천PB센터 황선구<담당>△종합금융담당 전태욱△M&A/기업융자담당 이중헌<법인장>△싱가폴현지법인 전희석<부서장>△소비자보호부 김용규△멀티솔루션영업1부 문용희△고객자산운용부 박진환△PE/기업투자부 방한철△연금영업4부 성일△기업분석부 여영상△심사부 이민주△종합금융운용부 이종수△M&A/기업융자2부 이한규△연금영업3부 진원식<지점장>△천안지점 김혜진△사하지점 노현성△상봉지점 류재형△여수지점 박재범△수지지점 서경희△합정동지점 서상훈△제주지점 장재걸△의정부영업소 정순희△남원지점 정진상△서초중앙지점 최은정<부서장 전보>△연금영업1부 박동성△리서치지원부 서성문△투자공학부 이대원△DS부 지현준<지점장 전보>△청량리지점 고완식△동수원PB센터 고효준△동래PB센터 김순실△신촌PB센터 류천수△평촌PB센터 박재현△목포영업소 손성연△지산영업소 안상모△정자PB센터 유승엽△둔산PB센터 윤기수△여수충무영업소 윤안순△대전지점 이강혁△해운대PB센터 이상호△부평지점 정창훈△순천지점 조은숙◇한국투자신탁운용<부장>△경영관리실 안영진△투자풀운용본부 장원준△주식운용본부 정상진△상품본부 한동우△경영기획실 한진탁△주식운용본부 현동식△민간투자운영본부 홍현<부서장>△연금마케팅담당 황의상<부서장 전보>△상품전략본부 조준환◇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본부장>△자산운용2본부 김은형<부서장>△경영관리부 이승식△경영전략부 김남진◇한국투자파트너스<이사>△투자1팀 김근호△투자지원실 김창호<실장>△컴플라이언스 이상화◇한국투자저축은행<상무보>△감사실 이강국<부장>△심사2팀 김정찬△은평지점 강영수△전산팀 김선중△광주지점 김용세△금융1팀 이유형△금융6팀 장윤호<부서장>△여신관리팀 박진배△금융2팀 오자문△금융5팀 김병욱<지점장>△은평지점 배상은<부서장 전보>△전략기획실 신용원△여신지원팀 김규석<지점장 전보>△평촌지점 김상필△평택지점 강영수◇한국투자캐피탈<부서장>△경영지원부 김명관
  • [인사]

    ■헌법재판소 ◇사무처 <실장 신규보임>△기획조정실장 임종성<3급 승진>△심판사무과장 하정수<과장 전보>△자료총괄과장 최병협△정보화기획과장 윤해정<과장 신규보임>△헌법재판연구원 기획행정과장 최혁<4급 전보>△심판민원과 배승철△자료총괄과 김준곤<4급 승진>△재판관 비서관 김정일 ■기획재정부 △운영지원과장 이호모△협동조합정책과장 강장원 ■교육부 ◇일반직 고위공무원 전보△서울시 부교육감 박춘란△대학지원관 승융배△지방교육지원국장 강영순△평생직업교육국장 홍민식△부산시 부교육감 오승현△울산시 부교육감 류혜숙△경기도교육청 기획조정실장 전진석△제주대 사무국장 송기민◇서기관 전보△지방교육자치과장 박지영△기획조정실 강종부△대학정책실 김아영 김형기△평생직업교육국 류민수△교육부 김성근 장세은(국조실 교육문화여성정책관실 파견) 한위전(국조실 세월호피해자지원·추모사업지원단 파견)△경북대 구원근△경상대 이상범△공주대 조용준△부산대 이종필△안동대 신기철△전북대 구자익△제주대 이태주△중앙교육연수원 김태경△충남대 박기원△충북대 유은종△한국방송통신대 오찬택△한국체육대 한창진△한국해양대 박진창△대구시교육청 박종성◇기술서기관 전보△교육안전정보국 윤석훈△공주대 최승화◇서기관 승진△강원대 김정열 김성겸△국립특수교육원 신경현△군산대 강두중△목포대 길종호 전희중△창원대 박윤호 김창열△한국교원대 엄정수△충남대 김남우△한국교통대 이우관△한국해양대 황경섭 서영희△한밭대 이애시△부산대 유경종◇기술서기관 승진△강릉원주대 강경호△한국교원대 강현묵△제주대 오순철 ■미래창조과학부 우정사업본부 ◇3급 전보△재정기획담당관 정현철△국제사업과장 김홍재△보험자산운용과장 김도균<우체국장>△서울중앙 김재목△서울강남 임정수◇4급 전보△우정공무원교육원 교육기획과장 도병균△우정사업정보센터 정보기반과장 정원주△우정사업정보센터 예금정보과장 오광수△국제우편물류센터장 강승호△경인우정청 우정사업국장 윤순상△경인우정청 금융사업국장 강영철△부산우편집중국장 황국선△충청우정청 예금영업과장 권혁운△전남우정청 우정사업국장 강명구△전남우정청 사업지원국장 황수연△전남우정청 예금영업과장 진수동△경북우정청 사업지원국장 석원근△경북우정청 예금영업과장 이상희△강원우정청 우정사업국장 박찬우<우체국장>△서울마포 김평석△서울은평 백형국△여의도 이재찬△서울양천 강연중△서울강서 정연석△서울중랑 김용모△서인천 이태근△의정부 최석봉△수원 유해수△서수원 이육현△안양 고용석△군포 박노직△성남 우상익△성남분당 정순덕△부천 김동혁△고양일산 윤선혁△고양덕양 조병호△시흥 이광해△용인수지 이재현△용인 김곤배△남양주 조병화△평택 김승만△이천 마재욱△구리 이상만△파주 송영식△김포 김광호△안성 이혜림△경기광주 신동희△부산 박경호△동래 오후기△진주 최원봉△거제 정재범△부산영도 심정보△동천안 임성민△청주 이상명△서청주 손충환△광주광산 박호열△목포 유완근△순천 김병환△광양 윤병기△포항 조현진△안동 김원봉△경산 오일태△춘천 송혁호△강릉 이용춘△동해 최명철△제주 김한준 ■법무부 ◇고위공무원 <전보>△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장 손홍기<승진>△정책기획관 김태복◇일반직 고위공무원 가급△교정본부장 김학성 ■문화체육관광부 △대변인 박정렬△콘텐츠정책관 최병구△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장 이진식△미래창조과학부 민관합동창조경제추진단 문화창조융합본부 부단장(파견) 최보근 ■고용노동부 △장관실 정책비서관 홍경의△노동시장분석과장 양현수△직업능력평가과장 이민재△서울고용노동청 서울동부지청장 김연식△중부고용노동청 부천지청장 장현석△중부고용노동청 성남지청장 김호현△부산고용노동청 부산고용센터소장 김효순△부산고용노동청 양산지청장 유재식△대구고용노동청 구미지청장 박정웅◇서기관 승진△홍보기획팀 이후송△감사담당관실 손성길△외국인력담당관실 김선재△청년고용기획과 이준호△직업능력정책과 이종구△일학습병행정책과 손재형 정병팔△노사협력정책과 최윤미△퇴직연금복지과 이강연△고용차별개선과 유해종△공공기관노사관계과 김태은△산업안전과 허서혁△산업보건과 전하준 ■국토교통부 △정책기획관 백승근 ■금융위원회 ◇실·국장급 <임명>△상임위원 손병두△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 이병래△금융정보분석원장 유광열<전보>△금융정책국장 도규상 ■원자력안전위원회 ◇서기관 승진△안전정책과 장현아△원자력안전과 주호성△방사선안전과 유광구 ■국민안전처 ◇국장급 승진△재난복구정책관 이한경 ■국가보훈처 △국립4.19민주묘지관리소장 방형남 ■식품의약품안전처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식품위해평가부장 홍진환 ■관세청 ◇과장급(일반임기제) 임용△대변인 하변길◇과장급 전보△중앙관세분석소장 윤동규◇기술서기관 승진△중앙관세분석소 총괄분석과장 김종명 ■병무청 ◇고위공무원 <승진>△전북지방병무청장 김용학<전보>△기획조정관 박우신△병역자원국장 김종호△서울지방병무청장 황평연△경인지방병무청장 김태화◇과장급 전보△대변인 곽유석<과장>△운영지원 정창근△현역입영 최재숙△현역모집 김종철△사회복무정책 김용두△병역공개 이영희<병무지청장>△인천 이우종△강원영동 김창진 ■중소기업청 △경영판로국장 이상훈 ■특허청 ◇일반직 고위공무원 승진△특허심판원 심판장 권규우◇전보△특허심판원 심판관 오재윤△국제상표출원심사팀장 정덕배△에너지심사과장 손창호◇과장급 승진△정보관리과장 한규동△주거기반심사과장 권호영△특허심판원 심판관 박성우 정재훈◇서기관 승진△대변인실 배재현△감사담당관실 박노익△산업재산창출전략팀 복상문△디자인심사과 배흥선 ■기상청 ◇고위공무원단 승진△지진화산관리관 김남욱◇3급 전보△예보정책과장 정관영◇3급 승진△감사담당관 안용모△관측정책과장 이정환△대전지방기상청장 서장원△국가기상위성센터장 박훈◇4급 전보△연구개발담당관 이은정△총괄예보관 김동준 박영연△방재기상팀장 김희수△국가태풍센터장 전영신△기후정책과장 권오웅△기후변화감시과장 신동현△국립기상과학원 수치모델개발과장 나득균△부산기상청 관측과장 한성의△부산기상청 기후서비스과장 이희서△국가기상위성센터 위성분석과장 장재동 ■서울시 ◇3급 이상△평생교육정책관 김용복△복지본부장 직무대리 장경환△경제진흥본부 창조경제기획관 김선순△지역발전본부장 천석현△시의회 사무처장 김경호△서울시립대 행정처장 양인승△민생사법경찰단장 김용남△기후환경본부 환경에너지기획관 직무대리 성은희△기획조정실 재정기획관 직무대리 한영희△복지본부 복지기획관 직무대리 엄의식△국회사무처 파견근무 강석원△은평구 부구청장 신용목△광진구 부구청장 백호◇4급 행정직△감사담당관 강희은△조직담당관 심상원△예산담당관 이동률△재정관리담당관 박범△정보기획담당관 이기완△민생수사1반장 김영기△소상공인지원과장 곽종빈△문화융합경제과장 장영민△디지털산업과장 박태주△민생경제과장 천명철△복지정책과장 신종우△지하철혁신추진반장 박진순△역사문화재과장 정상훈△기후변화대응과장 이승복△총무과장 정상택△자산관리과장 김두성△관광정책과장 김재용△관광사업과장 오제성△체육진흥과장 이구석△북부수도사업소장 박철규△강남수도사업소장 차장운△한강사업본부 운영부장 최규해△서울대공원 관리부장 홍순길△서대문구 기봉호△민관협력담당관 직무대리 장화영△시민봉사담당관 직무대리 전재선△해외도시협력담당관 직무대리 권순기△장애인복지정책과장 직무대리 이동수△자전거정책과장 직무대리 김성영△체육시설관리사업소장 직무대리 최윤식△공기업담당관 박진영◇4급 기술직△대기관리과장 이인근△기후환경자원순환과장 최홍식△도시공간개선반장 안재혁△동부도로사업소장 송만규△서부도로사업소장 한동근△북부도로사업소장 신응수△강서도로사업소장 김용제△시설계획과장 조남준△공원조성과장 최현실△난지물재생센터소장 정흥순△도시철도계획부장 권영찬△암사아리수정수센터소장 임정규△성동구 문인식△동대문구 한유석△영등포아리수정수센터소장 직무대리 이성락△자연생태과장 직무대리 유영봉△한강사업본부 공원부장 직무대리 문길동△보건환경연구원 축산물부장 직무대리 손흥락△생활권계획추진반장 직무대리 정제호△서북권사업과장 직무대리 차창훈△도시철도사업부장 직무대리 박동룡△용산구 정대현△서대문구 이경우△서초구 하현석 박내규△한옥조성과장 직무대리 진조평△건축부장 직무대리 김진용△마포구 하용준△구로구 남궁용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지방소방준감 승진△소방행정과장 김선영△안전지원과장 김송연◇지방소방준감 전보△서울종합방재센터 소장 이성묵◇지방소방정 승진△현장대응단장 정재후△종합상황실장 김성회△119특수구조단장 민춘기◇지방소방정 전보△소방학교 교육지원과장 현진수<소방서장>△중부 이동선△동대문 이영우△서초 김재학△강동 권혁민△도봉 김형철△구로 장현태△송파 박근종△동작 박찬호△서대문 서순탁 ■경기도 ◇지방이사관△의회사무처장 이화순<부시장>△성남시 김진흥◇지방부이사관△균형발전기획실장(직무대리) 박정란△경제실장(직무대리) 박신환△교육협력국장 정상균△농정해양국장 김건중△일자리정책관 최원용△수자원본부장 김준태<부시장>△고양시 이진찬△시흥시 류호열△양주시 오현숙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김명서△심의위원 서배원
  • “통일 못 보고 간 독립운동가들 아쉬워”

    “통일 못 보고 간 독립운동가들 아쉬워”

    美 OSS서 특수훈련·김구 비서로 활동 “국내 진격 못해 허탈… 평화통일 이뤄야”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이 항복했을 때 기뻤지만 허탈하기도 했죠. 광복군으로서 국내로 진격하지 못한 것 때문에 늘 쓸쓸한 마음을 안고 있습니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택에서 애국지사 김우전(94)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은 광복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김 지사는 1943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당했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첩보부대(OSS)에서 특수훈련을 받았고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내며 각종 기밀을 다뤘다. 현재는 생존해 있는 광복군들의 모임인 광복군동지회장을 맡고 있다. 광복군은 미국, 일본 등지에서 사는 사람을 합해 40명 정도가 생존해 있다. 고령에 몸이 편치 않은데도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그는 김구 선생의 차남이자 자신과 동갑으로 막역하게 지낸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을 최근 떠나보냈다는 말을 하면서는 쓸쓸함이 묻어 나왔다. “김신에게 예쁜 아가씨를 소개해 줬던 일, 김구 선생이 남북 협상 때문에 평양에 갈 때 자신을 안 데리고 가려고 해 상심에 빠진 김신을 위로한 일이 생각이 난다”며 “김두한과 같이 술을 마시면 김두한이 당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잘 마시는 장사였다”고 추억했다. 특히 김구 선생의 뜻을 이어 꼭 조국이 평화 통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지사는 “임시정부에도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있었고 야당, 여당이 있었다”며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김원봉 선생은 부하들에게 배신자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뜻을 모았고, 임시정부는 산하 부처 7개 중 3개 장관을 줄 만큼 아량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한국이 지금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어서 고생하는데 평화통일을 하면 다 해결이 될 일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김 지사는 이번 현충일에도 자택에서 가까운 성남 현충탑을 찾아 먼저 돌아가신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조국통일의 염원을 되새길 예정이다. “독립운동하시던 선배들은 다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계시고 내 동료, 친구는 대전현충원에 많이 있지요. 통일 조국을 보지 못하고 간 선배, 동료를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연합뉴스
  • [인사]

    ■미래창조과학부 우정사업본부 ◇4급 전보△예금위험관리팀장 구영섭△예금대체투자팀장 이남훈△우정공무원교육원 교육지원과장 박래구△서울지방우정청 금융사업국장 김철수△서울지방우정청 사업지원국장 이성천△서울관악우체국장 유태철△부평우체국장 김영일△부천우편집중국장 서기석△안성우체국장 김원봉△충청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김문수△서대전우체국장 이계송△대전유성우체국장 백경노△대전대덕우체국장 한우향△동천안우체국장 박노직△충주우체국장 이진섭△제천우체국장 박승곤△대전우편집중국장 류대규△전남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박호열△여수우체국장 우홍철△경주우체국장 박계화△전북지방우정청 우정사업국장 박찬례 ■환경부 △기획재정담당관 금한승△화학물질정책과장 홍정섭 ■금융위원회 ◇서기관 승진△구조조정지원팀장 김선문△창조기획재정담당관실 조문희△감사담당관실 김제동 ■인사혁신처 △인사관리국장 이정렬 ■국세청 ◇본청 <복수직 서기관 전보>△감사담당관실 황남욱△세정홍보과 신예진<복수직 기술서기관 전보>△전산운영담당관실 김천기△정보보호팀 윤현구◇서울국세청 <복수직 서기관 전보>△개인납세1과 정근형△송무1과 나교석△조사1국 조사3과 송우진 박상준△조사2국 조사관리과 서동욱△조사3국 조사1과 전상은△조사3국 조사2과 윤경필△조사3국 조사3과 공준기△조사4국 조사관리과 정형엽△조사4국 조사1과 김갑식<기술서기관 전보>△개인납세2과 김민기△전산관리팀장 최승일◇중부국세청 <복수직 서기관 전보>△징세과 권태성△조사4국 조사2과 김운걸△신광주세무서 하남지서장 이현강△포천세무서 동두천지서장 서영윤<기술서기관 전보>△전산관리팀장 이준목◇대전국세청 <복수직 서기관 전보>△개인납세1과장 오미순◇광주국세청 <복수직 서기관 전보>△체납자재산추적과장 김기완△순천세무서 벌교지서장 최재훈◇부산국세청 <복수직 서기관 전보>△금정세무서 양산지서장 이준홍△통영세무서 거제지서장 지정호 ■방위사업청 ◇부이사관△국제협력팀장 정재준△방공유도무기사업팀장 정상구◇서기관△품목기술심사담당관 김선국△방산지원과장 이형석△핵심기술사업팀장 강정훈△화생방사업팀장 이창호△지원함사업팀장 황양운△원가검증팀장 윤여철 ■중소기업진흥공단 ◇실장△비서 권오민△고객행복 김병수◇처장△기업금융 조한교△융합금융 신동식△재도약성장 정태식△국제협력 이성희△마케팅사업 구본종△인력개발 박윤식△수도권경영지원 임성순△서부권경영지원 정연도△동부권경영지원 권순일◇본부장△서울지역 이은성△강원지역 이우수△대전지역 박노우△경북지역 이상국◇지부장△경남동부 김성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기획조정본부장 황진구△감사실장 이권수△연구·예산기획실장 최인재△경영지원실장 권영걸△활동·참여연구실장 최창욱△보호·복지연구실장 김경준△자립·역량연구실장 김기헌△통계·기초연구실장 이종원 ■한국원자력의학원 △원자력병원장 노우철△방사선의학연구소장 황상구△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장 진영우 ■아시아에너지경제 △대표이사 사장 이승범△대기자 박남철△편집국장 이정훈 ■경기일보 △인천본사 이사 최석보 ■무역협회 ◇1급 승진△기업경쟁력실 박용규△홍보실 박천일△센터경영실 허인규△무역연수실 박철용△정책협력실 이동기◇실장 보임△서비스정책지원실 박준△중국실 김경용△전시컨벤션확충추진실 고재수△통상연구실 장상식△인천지역본부 안용근△성도지부 김종환◇실장 전보△비서실 강호연△감사실 권도하△물류·남북협력실 김병훈△통상협력실 한창회△아주실 김승욱△미주실 성영화△유라시아실 장석민△현장지원실 심준석△회원지원실 심남섭△정보지원실 천진우△기획조정실 정규동△인사총무실 박연우△재무관리실 배길수△동향분석실 김병유△글로벌연수실 허덕진△사이버연수실 홍사교△FTA활용지원실 이권재△FTA원산지지원실 송형근△부산지역본부 허문구△경남지역본부 홍성해△경기지역본부 전종찬△울산지역본부 최정석△경기북부지역본부 박진성 ■미래에셋증권 ◇본부장△경영혁신본부 김대환△WM본부 박주만△감사실 김수환△증권서비스본부 홍성일△영남사업본부 박기관△PBS본부 김준영 ■EY한영 △부회장 신세균 ■종근당 △부사장 김창규△전무 정광희 김진 최수영 김성곤△상무 강수연 임종래 윤재훈 배대길△이사 이승환 김진규 최세웅 최병규 심영근◇경보제약△전무 김춘한 ■한국화이자제약 ◇사장 승진△대표이사 사장 겸 혁신제약사업부문 한국대표 오동욱◇전무 승진△항암제사업부문 송찬우△인사부 신경호△재정부 임현정◇상무 승진△이스태블리쉬드제약사업부문 MCM sub BU/CD팀 임소명◇이사 승진△항암제사업부문 영업부 김형택 ■한국지멘스 ◇전무 승진△산업공정 및 드라이브사업본부 송창현△자산관리부 김춘구◇상무 승진△빌딩자동화사업본부 손희철△전력 및 가스사업본부 토마스 링만 박상진 아티크 쇼드리◇이사 승진△빌딩자동화사업본부 김영욱 문형권△디지털팩토리사업본부 강동우 정석진△수출입통제부 정선영△산업공정 및 드라이브사업본부 노정호 이광무 정성훈△전력 및 가스사업본부 서재모 손완경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