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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S 유훈 ‘통합과 화합’의 울림

    YS 유훈 ‘통합과 화합’의 울림

    ‘통합과 화합’이라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지막 메시지에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반응하고 나서 우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울림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새정치연합 관계자는 23일 다음달 말 발간 예정인 ‘민주당 60년사’ 집필과 관련, “당초 부정적 기술이 많았던 김 전 대통령에 관한 내용을 재검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야권 통합을 위해서는 김 전 대통령을 야당의 정치적 자산으로 인정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동안 새정치연합 등 야권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교할 때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게 사실이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더욱 차가웠다. 또 5·18 기념재단과 유족회 등 5·18 민주화운동 관련 3개 단체는 이날 “24일 오전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고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5월 단체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제주4·3평화재단 등도 김 전 대통령의 유족에게 공로패를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오후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박 대통령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 7박 10일간의 순방 일정을 마치고 이날 오전 6시 10분쯤 서울공항에 도착한 뒤 오후 2시쯤 서울대병원에 도착, 7분간 머물렀다. 박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 영정 앞에서 분향 및 헌화를 한 뒤 묵념하고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다. 이어 고인의 부인 손명순 여사의 손을 잡고 애도의 뜻과 추모의 말을 전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박 대통령은 26일 영결식에도 참석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서울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YS “독재자의 딸” 독설 퍼붓다가 2012년 대선 지지 ‘지독한 애증’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영면에 든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조문했다. 박 대통령이 예를 갖춰 애도를 표했지만 그동안 두 사람은 악연에 가까웠다. 정치적 앙숙 관계가 대를 이은 탓이 크다. 1998년 2월 대통령직 퇴임을 계기로 일선 정치 현장을 떠난 YS와 같은 해 4월 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한 박 대통령 사이에 직접적 연결 고리는 없다. YS 입장에서는 정적이자 박 대통령에게는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갈등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통령 집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YS는 대통령 퇴임 직후인 1999년 김대중 정부의 ‘박정희 기념사업’ 지원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민주 헌정을 중단시킨 박정희씨를 찬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날 선 비판을 했다.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박근혜 부총재는 “자신이 하면 옳다고 주장하고 남이 하는 것은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인물이 다시는 정치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맞받아쳤다. YS는 박 전 대통령을 향해 “독재자”, 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독재자의 딸”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YS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MB)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이어 YS의 측근들도 잇달아 ‘MB 지지’를 선언하면서 결국 박 대통령은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YS는 2012년 새누리당 대선 경선에서도 김문수 후보를 격려하면서 경쟁 상대였던 박 대통령을 “칠푼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당시 대선을 8개월여 앞두고 치러진 총선에서는 YS의 차남인 김현철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이 새누리당에 공천 신청을 했다가 탈락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당의 수장인 비상대책위원장이었다. 이때 YS가 격노한 것으로 알려졌고, 현철씨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무자비한 정치 보복”이라면서 탈당했다. 그러나 YS는 2012년 대선 직전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박 대통령도 당선 직후 YS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클린턴 꽉 눌러줬다고 자랑” “난방 잘 안 되는 좁은 방에서 생활”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클린턴 꽉 눌러줬다고 자랑” “난방 잘 안 되는 좁은 방에서 생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입관식이 23일 오전 유가족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유가족의 뜻에 따라 기독교식으로 진행됐다. 황금색 수의를 입은 김 전 대통령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평온한 모습으로 관 속에 누웠다. 부인 손명순 여사가 김 전 대통령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다른 가족들도 끝내 오열했다. 시린 가을비가 그치고 한층 쌀쌀해진 날씨 속에서도 김 전 대통령을 향한 애도의 물결은 끊이지 않았다. 정치권 거물들은 물론 대기업 총수들까지 대거 조문 행렬에 동참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 상도동계 인사들은 서울대병원에 차려진 빈소를 줄곧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다. 조문객 수는 오후 10시 기준 9300여명이었으며 누적 1만 2500명에 달했다. 빈소를 찾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김 대표와 만나 ”호(號)가 거산(巨山)이다, 거대한 산. 일생을 풍미한 양반”이라면서 “(김 전 대통령은) 외국 원수들, 특히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오면 ‘내가 꽉 눌러 줬다’며 기싸움한 얘기를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이 전 총재는 김 전 대통령에 의해 감사원장으로 전격 발탁됐지만 국무총리 시절 대통령과 갈등을 빚으며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됐다. 이 전 총재는 자신이 방명록에 남긴 사자성어 ‘음수사원’(飮水思源)을 언급하며 “물을 마시면 물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라는 뜻인데, 지금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생활화돼 있다. 마치 공기처럼. 그래서 민주주의가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고, 세상이 하도 좋아져서 잘 못 느낀다”면서 “민주주의의 주역이었던 김 전 대통령이 이렇게 서거하시니까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뤄 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대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김 전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화답했다. 정운찬·김황식·정홍원 전 국무총리 등도 잇달아 조문을 했다. 정운찬 전 총리는 “총리를 할 때 세종시 개선안을 가지고 몇 번 뵀는데, 꼭 (개선안을) 관철시켜야 한다며 많이 격려해 주셨다”고 전했다. 김 전 총리는 “상도동 자택으로 찾아뵀을 때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좁은 방에서 생활을 하시더라”고 소개하며 “원칙에 충실하고 바른길이라면 좌우 살피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후학들이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의 경남중학교 후배인 정홍원 전 총리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한 어르신”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도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묵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남인 노건호씨도 이날 저녁 빈소를 방문했다. 노씨는 “민주화의 투사로서 아버지께서도 항상 존경해 오신 분”이라고 짧게 말했다. 노씨는 김 대표, 이완구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과 함께 자리해 대화를 나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측은 각각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명의로 조화를 보냈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직접 빈소를 찾을지도 관심사다. 93세의 고령인 신 총괄회장은 거동이 어렵지만 김 전 대통령과 생전에 각별했던 사이로 알려졌다. 이날 서울시가 마련한 서울광장 분향소에는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특히 노신사가 유독 많았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정부, 장례업무 최대한 예우 총력전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정부, 장례업무 최대한 예우 총력전

    정부는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과 관련, 23일 관계 부처 회의를 열어 고인과 유족에 대해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총력을 기울이기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오는 26일 영결식 때까지 행정자치부는 장례 기본계획 수립과 영결식 주관 등 장례 업무를 총괄하고 기획재정부는 예비비 등 장례비용 지원, 외교부는 각국 특사 및 외교사절 안내와 해외 공관 분향소 설치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또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는 국립묘지 안장 등을 주관한다. 아울러 문화체육관광부는 언론 지원, 경찰청은 경호·경비 등 지원, 각 지방자치단체는 분향소 설치 등을 적극 뒷받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정종섭 행자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한 장례집행위원회는 유가족과 장례위원 구성에 대해 협의했다. 또 정재근 차관을 단장으로 한 행자부 실무추진단은 합동분향소 운영 상황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의 조문객 편의 등을 점검하며 바쁜 하루를 보냈다. 김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한 서울 등 전국의 합동분향소는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마치는 오는 26일까지 조문객을 맞는다. 지난 22일 오후 늦게부터 비가 내린 지역이 많아 전국의 분향소 설치 작업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서울의 경우 정부 대표 합동분향소인 국회의사당 본관 현관 앞과 서울광장, 강남·강동·강서 등 서울 25개 자치구 구청에 모두 분향소가 설치됐다. 물론 서울대병원에서도 조문할 수 있다. 성북구는 분향소 입구에 비치한 영정사진, 조문록 등 일체의 자료를 정부기록물로 관리하는 한편 유족에게도 사본을 전달할 예정이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칼국수 추모/서동철 논설위원

    1980년대 중반 서울 성북동 초입의 작은 한옥에 살았다. 골목에는 겉모습이 칼국수집 같지 않게 깔끔한 칼국수집이 있었다. 검은색 세단이 좁은 길을 메우곤 했는데, TV에 비치는 유명 인사들이 칼국수집에 드나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도 명성을 날리고 있는 ‘국시집’이다. 언덕 넘어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는 ‘혜화동 칼국수’가 있었다. 지금 있는 그 자리다. 동네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 집이 ‘국시집’보다 역사가 깊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혜화동 칼국수’는 나를 포함해 평범한 손님이 많다. 두 집 말고도 주변에는 괜찮은 칼국수집이 더 있었지만, 문을 열었나 싶으면 없어지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일대가 칼국수의 대명사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아무래도 ‘국시집’ 단골이었던 김영삼(YS) 대통령의 칼국수 사랑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지금 일대에는 손칼국수, 손국수, 명륜손칼국수, 우리밀국시처럼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칼국수집들이 성업하고 있다. YS의 부음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의 말미에 칼국수가 떠올랐다. 칼국수를 먹는 것도 그를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하면 코미디일까.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YS 사후 ‘평가 반전’… “민주화·하나회 척결 功이 더 크다”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YS 사후 ‘평가 반전’… “민주화·하나회 척결 功이 더 크다”

    지난 7월 서울신문 창간 111주년 대국민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누구를 가장 존경하는가’란 질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을 꼽은 응답자는 0.3%에 불과했다. 박정희(33.6%)·노무현(29.3%) 전 대통령은 물론 ‘숙명의 맞수’ 김대중 전 대통령(12.8%)에 한참 못 미쳤다. 전두환(1.8%) 전 대통령에 못 미쳤고 이명박(0.9%)·노태우(0.5%) 전 대통령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난 8월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광복 70주년 여론조사에서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김 전 대통령을 꼽은 응답자는 1%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22일 김 전 대통령이 타계한 뒤 고인에 대한 평가는 ‘과’(過)보다 ‘공’(功)으로 무게추가 쏠리는 분위기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던 야권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화의 큰 산”(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온 국민의 애도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정의당 심상정 대표) 등 긍정 일색이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추모 열기나 삼삼오오 빈소와 분향소를 찾는 일반 조문객들을 보면 ‘외환위기를 불러온 대통령’보다는 민주화 투쟁과 금융실명제 등 개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한다. 소모적 정치 갈등이 심한 데다 사회의 큰 어른, 원로가 없는 분위기 속에서 현대사의 주역이었던 분에 대한 좋은 평가가 주를 이루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김 전 대통령이 ‘하나회’ 정치군인들을 척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과 노무현(정부)도 불가능했고, 그런 측면들이 뒤늦게 평가받는 것”이라며 “보수·진보의 진영 논리가 뚜렷한 상황에서 고인 같은 자유주의자가 설 땅은 없었다. 그래서 저평가된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고인에 대해 야박한 평가를 하지 않는 한국 사회 특유의 문화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여전히 3당 합당의 충격은 물론 임기 중 외환위기 초래, 차남 현철씨의 국정 농단 등이 국민의 뇌리에 남아 있지만 한편으로 잠시 미뤄 놓은 것뿐이란 얘기다. 전문가들은 전직 대통령에 대해 호불호가 아닌 역사적 맥락에 따른 객관적 평가의 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정치평론가인 박상병 박사는 “대선에서 국민에게 약속했던 시대적 소명을 완수했는지를 놓고 평가해야 한다. 예컨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 극복과 첫 정권 교체,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탈권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글로벌 금융위기 속 경제 살리기, 박근혜 대통령은 보수의 혁신”이라면서 “동시에 시대적 소명에 걸맞은 인재풀을 등용했는지, 핵심 공약 사항을 완수했는지 등을 따져 보면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이념에 치우쳐 평가해서는 안 된다. 호불호에 따라 사적 감정과 이데올로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다”면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가 필요하며 단기간에 평가가 이뤄지는 것도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도 “모든 전직 대통령은 공과가 있다. 쿠데타처럼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정권을 잡은 사람이 아니라면 지도자로 선출한 국민이 있고 제도적 적통성을 가진다”며 “사후에 공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김대중·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을 뜻하는 ‘양김(兩金) 시대’ 이후 통합·화합의 시대정신을 이끌어 갈 새로운 리더십도 필요하다. 김 교수는 “양김의 시대정신은 민주화였고 불가피하게 보스 정치나 정치의 사유화 측면도 있었지만 이젠 그런 리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며 “다양성과 다원성의 기반 위에서 협의성을 높이는 소통형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박 박사는 “총재나 제왕적 당권을 가진 사람이 공천권을 손에 쥐고 정당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끝났다”면서 “다원화된 원내 시스템의 의사 결정 구조를 통해 당을 실질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권위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사설] YS ‘통합·화합’ 유지 민생 우선으로 구현해야

    그제 유명을 달리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추모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에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줄을 이어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고 한평생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그의 정치 인생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혹독한 탄압에 굴하지 않았던 정치인이다. 1990년 3당 합당을 결행하면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 연대로 국민 통합의 디딤돌을 놓았지만, 안타깝게도 동서의 지역 통합, 보수와 진보 간 이념의 공존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이어 YS의 타계로 민주화 시대의 리더십을 이끈 두 거인이 사라지면서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통합과 화합, 발전의 리더십을 창출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제가 된 것이다. 이런 국가적 위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고인은 마지막 메시지로 ‘통합과 화합’의 화두를 남겼다고 한다. YS의 차남 현철씨는 빈소를 찾은 김종필 전 총리와의 대화에서 “지난해 입원했을 때 말씀을 잘 못했는데 필담으로 ‘통합’과 ‘화합’을 쓰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하시곤 다른 말씀을 못 했다”고 전했다. 삶 자체로 현대사를 써 내려간 김 전 대통령은 사회 분열과 반목, 대립의 해소를 요구하는 국민적 염원을 전달하면서 정치권에 새로운 화합의 시대를 열라는 강력한 주문을 한 것이다. 정치권은 YS의 유지(遺志)를 계승 발전시킬 책무가 있다. 어제 김무성 새누리당,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앞다퉈 통합과 화합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다짐했다. 김 대표는 “민생 최우선이야말로 화합과 통합을 마지막 메시지로 남긴 김 전 대통령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이고 정치권이 지켜야 할 도리”라고 강조했고, 문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이 남긴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받들어 대결·분단 시대를 끝내고 평화·번영·통일의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여야 대표는 물론 비슷한 발언들을 쏟아내는 많은 정치인들이 절박한 YS의 유지를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해 정파적 이익에 활용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역사에는 공과가 있기 마련이다. YS를 포함한 이른바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정치는 지역주의와 계파정치를 잉태시키고 웃자라게 한 토양임이 틀림없다. YS의 마지막 메시지인 ‘통합과 화합’ 역시 지역과 계파로 인한 분열과 대립을 치유해야 한다는 반성이자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작금에 우리가 처한 상황은 3김 시대보다 더욱 암울하다. 지역과 계파적 분열정치에다가 3김 이후 극단적인 이념 대결까지 가세했고 세대와 빈부의 갈등마저 첨예해지고 있다. 극한 대립으로 일관하면서 걸핏하면 거리로 나서 의회민주주의를 후진시키는 구태를 청산하기 위해 여야 모두 스스로 개혁에 나서야 한다. 지역 갈등과 이분법적 이념의 골을 극복하는 국민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은 정쟁에서 벗어나 국정 성과를 내야 하고 민생을 챙겨야 할 시점이다. 여야 모두 상대방을 반대 세력을 몰아치면서 반사이익에 골몰하기보다 소통의 정치로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 주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기다.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취임 10여일 만에 ‘하나회’ 척결…관료화된 조직 청산 여전히 숙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생전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꼽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회’ 척결로 대표되는 군 개혁이다. 김 전 대통령은 30여년간 한국 정치사의 기득권 집단으로 자리잡던 군부에 과감히 칼을 들이댔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집권 계기가 된 12·12(1979년)를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해 문민통제의 초석을 쌓은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개혁이 인적 청산에만 그쳐 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군내 인사 잡음, 조직 이기주의, 방산비리 등은 청산할 적폐로 남아 있다. 전 전 대통령의 집권 기반이 된 군내 사조직 하나회는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라 배타적 인맥을 형성해 요직을 독식하고 군이 공공연히 정치에 개입하는 통로로 뿌리내려 왔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10여일 만인 1993년 3월 8일 하나회 출신인 김진영(육사 17기)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국군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했다. 이어 한 달도 되지 않은 4월 2일 군부의 실세였던 안병호(육사 20기) 수도방위사령관과 김형선(육사 19기) 특전사령관을 해임했다. 김영삼 정부는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4년부터 30조원 규모를 투자한 전력 증강 사업(율곡사업) 비리에도 칼을 들이댔다. 이를 통해 이종구, 이상훈 전 국방장관, 김철우 전 해군참모총장, 한주섭 전 공군참모총장 등 전직 군 최고위 간부들이 방산업체와 무기중개상 등으로부터 수억원에서 수천만원까지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기도 했다. 12·12와 하나회 연루인사, 율곡비리 등과 관련해 전역 조치되거나 해임·전보된 장성만도 50여명에 이른다. 취임 첫해에 군단장급 장성의 62%, 사단장급의 39%가 교체된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의 군 개혁은 취임 직후부터 3개월 동안 파격을 거듭하며 전광석화처럼 진행했기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후보 시절부터 12·12 사태의 피해자인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과 교분을 갖고 군내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다만 개혁이 인적 청산에 그쳐 본질적 적폐를 뿌리 뽑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 군은 1993년 9조 2154억원이던 국방예산이 올해 37조 4560억원으로 늘어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현재도 방산비리 문제가 지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인사를 둘러싼 논란이 지속되는 등 전투형 강군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다.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23일 “김영삼 정부 이후 우리 군 인사 관행이 정권 교체에 따른 한풀이, 유력자와의 친분에 따른 정실인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보신주의와 관료화된 조직은 여전히 후임 대통령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지적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특별기고] “자유민주주의 향한 헌신·희생 국가발전 커다란 밑거름 될 것”

    [특별기고] “자유민주주의 향한 헌신·희생 국가발전 커다란 밑거름 될 것”

    존경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평소 불굴의 의지와 집념이 강한 분이셨고 그간 재활 치료가 조금씩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어 꼭 회복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인사드릴 날을 기다렸는데 급작스러운 서거 소식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김 전 대통령은 저를 정치에 입문시켜 주신 정치적 스승이고 개인적으로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제가 영국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던 시절인 1993년 3월 청와대의 부름을 받아 문민정부에서 공보, 정무비서관으로서 김 전 대통령을 모셨던 5년간은 제 생애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특히 군정을 종식하고 문민정부 시대를 연 국가지도자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남다른 분이었습니다. 치열한 국익을 다투는 외교 무대에서 김 전 대통령은 주권국가의 입장을 당당하게 내세웠습니다. 취임 초 1993년 11월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 문제를 다룰 때 미국의 포괄적 접근과는 다른 철저한 남북한 상호 사찰을 요구했습니다. 또 한·미 팀스피릿 훈련 중단 문제는 한반도의 중요한 안보 사안인 만큼 당사자인 한국의 대통령이 우선 결정할 문제라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 때문에 정상회담이 예정보다 길어지고, 클린턴 대통령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역사상 처음 한국을 방문한 장쩌민 국가주석은 한·중 간 역사 공조를 통해 일본 오사카에서 개최됐던 APEC 정상회담에서 ‘시위 산책’을 통해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대북 관계에 있어서도 김 전 대통령은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1994년 북한 핵 위기 고조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군사 합동 가능성에 직면해 이를 반대했고,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외교에 의한 남북 정상회담 합의를 이끌어 내며 한반도의 위기를 기회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고 그 귀중한 기회는 현실화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 예정대로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지금도 가장 애석하게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자주 했습니다. 주로 한·미 동맹 현안과 북한 핵 문제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 때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두 분 사이의 마지막 정상회담은 1997년 11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은 경제의 기초가 튼튼해서 동남아와 같은 외환위기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상황이 어려워질 경우 미국이 지원하겠다”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며칠 후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평상시에는 워싱턴 백악관에서 전화를 걸지만 이번에는 대통령 휴양지인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거두절미하고 “각하, 오늘은 제가 중요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국의 경제 상황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국제통화기금의 긴급구제금융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심하게 응징받을 것입니다”라고 대본을 읽듯 얘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밴쿠버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발언에 고무됐던 김 전 대통령은 아연실색했습니다. 반기문 당시 외교안보수석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한 부분입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워싱턴의 분위기가 바뀐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5년 동안 모시면서 국내에서, 그리고 일선 외교 현장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경험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믿는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투사적인 강인함과 함께 진솔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대통령을 5년간 모시면서 청와대 녹지원에서 아침 5시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조깅을 하였습니다. 저를 비롯한 30대 중반의 젊은 비서관들은 밤늦게 일하다가 새벽에 늦거나 간혹 빠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루를 빠지면 대통령께서는 그다음 날 새벽 조깅 때 “니 어제 안 나왔제”라고 족집게 지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틀을 연달아 빠지면 대통령께서는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 화가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새벽에 나가면 대통령께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니 어데 아프노?” 하고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그처럼 따뜻한 인간적인 매력을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은 소중한 국가지도자 한 분을 잃었지만 당신께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바치신 헌신과 사랑, 그리고 빛나는 민주화와 세계화의 업적은 앞으로 국가 발전과 남북통일을 위한 커다란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 대도무문의 정신을 저희들이 계속 이어 가겠습니다.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위안부 문제’ 對日 도덕적우위 이끌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후 대일 외교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그중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정부의 주도적 해결을 언급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한 것은 지금까지도 정부의 기조로 남아 있다. 위안부 문제는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뒤부터 공론화돼 김영삼 정부 출범 직전에는 한·일 양국 간 감정적 현안으로 부상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삼 정부는 1993년 3월 출범 직후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자구조치’를 선언해 피해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일본에 요구하지 않고 정부가 직접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보인 일본으로서는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입장 표명이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연구소장은 23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공식 책임 인정과 사죄는 일본이 해야 하고 피해자 구제는 정부가 하겠다는 원칙을 밝힌 것은 지금까지도 우리 정부의 기조로 유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며 또다시 금전적 요구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김영삼 정부가 예상치 못한 발상의 전환을 하면서 일본 내 양심세력의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이 때문인지 일본은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또 1995년 8월에는 식민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임기 후반부 김영삼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직설적인 어법이 화근이 되면서 한·일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1996년 시작된 한·일 어업협정 개정 협상 과정에서 배타적경제수역(EEZ)의 경계 획정 문제와 독도 영유권 문제가 맞물리면서 양국은 얼굴을 붉히는 상황을 맞이했다. 결국 1998년 1월 일본은 한·일 어업협정 파기를 일방적으로 선언해 뒤를 이은 김대중 정부는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힘겨운 협상을 거쳐야 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의석+α’ 호남 예산 챙기는 與

    ‘의석+α’ 호남 예산 챙기는 與

    새누리당이 내년 4·13 총선을 겨냥해 불모지인 ‘호남 공략’에 나섰다. 당장은 새해 예산을 매개로 한 구애 전략이 얼마나 먹힐지, 근본적으로는 고질적인 인물난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으로 꼽힌다. 새누리당은 23일 윤장현 광주시장과 이낙연 전남지사, 송하진 전북지사 등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호남권 광역자치단체장들과 예산정책협의를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 상주 역할을 하겠다던 김무성 대표도 자리를 지키며 호남권 예산을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협의는 새누리당 소속의 유일한 호남권 의원인 이정현 최고위원의 제안으로 성사됐다. 이 의원은 “호남 지역 현안 사업에 대해 구체적인 당위성과 우선순위를 설명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지사는 평소 이 최고위원의 ‘호남 예산 폭탄’ 발언을 거론하며 “진정으로 피폭되고 싶다”면서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인) ‘화합과 통합’을 위한 상징적 조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최고위원은 지난해 7·30 전남 순천·곡성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호남권 진출에 물꼬를 텄지만 총선에서는 1988년 소선구제 도입 이후 새누리당 후보가 단 1석도 건지지 못했다.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내년 총선에서 이 최고위원의 당선 여부가 최대 관심사다. 지역 정가에서는 전북 출신인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대한 ‘차출론’에도 촉각을 세우고 있다. 전남 무안·신안에서 도전장을 낸 비례대표 주영순 의원, 전북 전주 완산을에서 출마 예정인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등의 선전 여부도 주목받고 있다. 동교동계 출신으로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을 지지한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과 김경재 대통령 홍보특보의 역할론을 넘어 호남권 인사들과의 추가 연대 또는 통합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DJ·盧 서거 때와 다른 北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북한은 당일(22일)은 물론 23일에도 별다른 보도를 하지 않았다. 또 조전도 보내오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뤄 특별히 조의 입장을 밝히거나 조문단을 파견하진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북한 관영 및 선전매체들도 이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공개 활동 외에 김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선 별다른 언급을 내놓지 않았다. 앞서 북한은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에는 모두 다음날 관영매체를 통해 관련 소식을 보도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전을 통해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은 1993~1994년 1차 북핵 위기가 터졌을 때 김 전 대통령이 ‘핵과는 결코 손을 잡지 않겠다’고 천명하며 강경하게 대처한 데 대해 아직까지도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은 김 전 대통령을 대북 강경론자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당국 또는 김 제1위원장의 명의로 조전을 보내거나 조의를 표할 가능성이 낮다”고 전망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김 전 대통령 시절 북한과의 관계가 좋았다고 평가하긴 어렵지만 남북이 1994년 정상회담 개최까지 합의하는 등 의미 있는 행보를 보인 바 있고, 중단됐던 당국 간 대화가 기지개를 켜는 현시점에서 북측이 조전을 보내는 등의 ‘예의’를 표할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오는 26일 당국 간 대화를 위한 실무접촉 과정에서 우리 측에 간접적으로 조의를 표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정치인 富가지면 부덕한 일”… 상도동 자택 등 전재산 사회 환원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생전인 2011년 전 재산의 사회 환원을 약속했다. 경남 거제도 땅 등 52억원을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에 기부했고,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은 부인 손명순 여사 사후에 소유권을 센터로 기부토록 했다. YS 사후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재산은 사실상 전무한 셈이다. 이와 별도로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생가 옆에는 거제시가 운영하는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이 있다. YS 측 관계자는 23일 “상도동 자택 근처에 있는 김영삼 대통령 기념도서관은 현재 준공 검사까지 마쳐 내부 인테리어만 손보면 되는 단계”라면서 “도서관 기증 및 운영 주체를 놓고 장기간 협의해 왔는데, 서울대와 중앙대 중 현재 중앙대와 얘기가 오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YS 측근이었던 문정수 전 부산시장은 “본인 명의의 집 외에는 땅 한 평 가진 것이 없었고, 가지고 있는 재산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전 대통령은 평소 ‘정치인이 부를 가지는 것은 부덕한 일이다’라고 말했고 이를 몸소 실천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YS를 기억하는 새누리당 중진들은 이날 청와대 시절에도 소탈했던 그와 부인 손 여사를 회고했다. 문민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실장을 지낸 4선 정병국 의원은 “당시 ‘청와대에 가면 배를 곯고 나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처럼 번졌다”고 말했다. 음식을 무서울 정도로 빨리 해치우는 YS 특유의 급한 성격 때문이었다. 정 의원은 “VIP(대통령)가 먹는 속도가 워낙 빨라 칼국수가 나오면 뚝딱 해치우시는데, 정작 국무위원이나 내빈들은 젓가락을 채 들지 못했다”면서 “나중에는 청와대에 들어간다고 하면 배고프지 않도록 모여서 미리 밥을 먹고 들어가기도 했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손 여사는 청와대 경내에 있는 많은 과일나무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봄엔 살구, 가을엔 감이 잔뜩 열렸는데 손수 따다가 비서진들에게 일일이 나눠줄 만큼 잔정이 깊었다. 대통령 당선 전엔 수행 비서들을 “비서 아저씨”라고 부르며 챙겼다고 한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된다 생각하면 밀어붙여… 정치 감각 탁월”

    김영삼(YS)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23일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 측 동교동계 인사들이 조문 행렬을 이어 가며 고인을 애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이날 차남 홍업씨,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 등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이 여사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 차남 현철씨 등과 악수를 나누며 위로를 전하자 현철씨는 “(어머니가) 충격이 없진 않으시다”고 말했다. 이 여사와 휠체어를 타고 마주한 손 여사는 “오래오래 사세요”라며 건강을 기원했다. 앞서 오전에는 동교동계 좌장 격인 새정치연합 권노갑 상임고문과 이훈평, 박양수 전 의원 등이 빈소를 다녀갔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YS에 대해 한목소리로 “추진력과 결단력이 뛰어났던 승부사”라고 회고했다. 동교동계 막내인 새정치연합 설훈 의원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한번은 DJ에게 YS의 장점을 묻자 ‘YS는 된다고 생각하면 끊임없이 밀어붙인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그 예로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을 추진할 때 DJ가 100만명을 목표로 제시하자 YS가 “100만명이 뭐꼬. 1000만명은 돼야지”라고 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설 의원은 또 “YS와 DJ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 말을 높였지만 둘만 있을 땐 말을 놓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밝혔다. 같은 당 문희상 의원은 “두 분이 쪼개졌을 당시 YS의 기분이 나쁠 때 누가 옆에서 DJ 욕을 하면 웃음을 짓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서로 앙숙이었다”면서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서로 굉장히 챙기며 힘을 합쳤다”고 말했다. 문 의원은 “DJ가 생전에 ‘나는 논리적이어서 (일을 진행하려면) 한참 걸리는데, YS는 말보다 행동이 빠르더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DJ의 비서실장을 지낸 박 의원은 “동물적 정치 감각은 YS, 논리적 사고는 DJ가 탁월했다”며 두 전직 대통령의 리더십을 비교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민주화 상징 인물” “임기말 경제 위기”

    주요 외신들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을 긴급 기사로 타전했다. 외신들은 대체로 ‘한국의 민주화 지도자 출신 전직 대통령 서거’라는 제목으로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여정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각지 한인회가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외신들은 야당 대표 시절의 민주화 여정과 대통령 재임 중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을 김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고루 강조했다. AFP 등 유럽 언론들은 김 전 대통령이 군부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출범시킨 대목에 주목했다. 영국 BBC 방송은 김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 가택연금을 당했던 사실과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의 북핵 시설 공습에 반대했던 일화를 전했다. 프랑스 일간 르파리지앵은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고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1993년 한국에서 군사정권을 끝내고 (실질적인) 민간정부의 시대를 처음 열었다”고 보도했다. 한편으로 외신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상황이 초래되며 그가 대통령 임기 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도 비중 있게 다뤘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반부패 개혁을 추진 중인 중국의 언론들은 문민정부 시절 군 개혁 및 반부패 개혁 정책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중국신문망은 김 전 대통령 재임 중 하나회 척결 인사를 소개하며 “김 전 대통령이 반부패, 청렴을 기치로 개인의 배경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유재시거’(唯才是擧)를 실천했다”고 보도했다. 해외 한인회들도 잇따라 애도의 뜻을 밝혔다. 김훈 재외동포언론인협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에 항거해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끌어내신 한국 민주주의의 거목”이라면서 “가슴 깊이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박우민 재영 한인여성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신 분이란 점에 이견이 없을 것”이라며 명복을 빌었다. 외교부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사실을 재외공관에 통보하고 조문소 설치를 지시했다. 유제헌 재독한인총연합회 회장도 “어려운 시절, 젊어서부터 정치에 입문해 역경을 거쳐 승리했던 분이라고 본다”면서 “잘한 일도, 또한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임기 내내 美와 ‘대북 갈등’… 동맹은 강화

    임기 내내 美와 ‘대북 갈등’… 동맹은 강화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미국 유력 일간지인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등과 함께 방송인 CNN, ABC 등이 서울발로 긴급하게 보도했다. 이런 가운데 NBC는 김 전 대통령과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빌 클린턴(69) 전 미국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북 정책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지만 한·미 동맹 강화에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 1993년 초 한달 간격으로 집권한 김 전 대통령과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닥친 난관은 북한 핵 문제였다. 김 전 대통령의 5년 재임 기간 내내 미국 대통령은 클린턴이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 미신고 시설 두곳의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해 벌어진 ‘1차 북핵 위기’로 한·미 간 대북 협상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그의 부인이자 민주당 대선 유력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이 그해 7월 방한하자 김 전 대통령은 좌우명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직접 쓴 휘호를 건넸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북·미 회담에 대한 큰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1994년 초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둘의 관계는 더 불편해졌다. 미국은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결의를 추진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돌변했다. 당시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 계획까지 검토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해 6월 미국이 주한 민간인 소개령을 검토하기 시작하자 이를 전쟁 임박 징후로 이해하고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대사를 불러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 전쟁을 할 수는 없다”며 강력한 항의의 뜻을 표했다. 이들은 북핵 문제로 갈등을 겪었지만 개인적 우의를 유지하며 한·미 동맹 강화를 위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1993년 한국 방문에 대해 “영빈관에 묵었는데 그곳 실내 수영장에 몸을 담그려 하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며 “한·미 동맹에 대한 감사와 그것을 유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박지원 “YS는 동물적, DJ는 논리적”

    박지원 “YS는 동물적, DJ는 논리적”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23일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비교하며 “동물적 감각은 김영삼 대통령이 탁월했다면, 논리적 사고는 김대중 대통령이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박 의원은 이날 tbs ‘열린아침 김만흠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늘 모든 것을 판단할 때 굉장히 단순하게 하시고, 참 편리하게 생각을 한다”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굉장히 논리적 접근을 하기 때문에 접근도 신중하고 복잡하다”고 한국 정치의 두 라이벌을 평가했다.  그는 또 YS가 2009년 8월 당시 DJ가 입원 중이던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일화를 소개하며 “김대중 대통령은 중환자실에 계셨기 때문에 누구도 면회하지 못해 김영삼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와 차를 마시며 말씀을 나눴다”고 소개했다. 당시 YS는 취재진에 DJ와 대화를 나눴다는 취지로 면회 사실을 설명한 바 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88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DJ·1926~2009)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쌍두마차’였다. 바른길로만 가겠다며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정치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로 ‘정치 9단’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아호인 거산(巨山)은 자신의 고향인 거제의 ‘거’와 정치적 고향인 부산의 ‘산’을 따 지은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통영중 재학 시절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했고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였다. 이어 경남고를 거쳐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으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과 손 여사는 장녀 혜영(63), 차녀 혜정(61), 장남 은철(59), 차남 현철(56), 삼녀 혜숙(54)씨 등 2남 3녀를 뒀다. 이 중 현철씨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활동상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거제에서 출마해 최연소 의원(27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9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7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을 쏟아냈다. 그의 정치 행보는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고, 이는 야당 정치 인생의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지만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되고 이듬해에는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며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고,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자택 앞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도 당했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줬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헌정 사상 최초로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맞섰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한 것이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선 후보로 탈바꿈했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퇴임 후에도 부산·경남(PK)을 기반으로 한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리더로서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그는 떠났지만 말은 남아 있네

    그는 떠났지만 말은 남아 있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1979년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자) “민주화 산행에 있어 최종 고지의 200m 전방에 왔다.” (1987년 언론 인터뷰)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한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한다.” (1993년 첫 국무회의) “새 정부 국가 기강 확립의 대도(大道)는 첫째도 윗물 맑기요, 둘째도 윗물 맑기다.” (1993년 국가기강확립 보고회의) “우째 이런 일이….” (1993년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 아들의 대입 부정에 대해) “너무 급히 달려도 위험하지만 달리다가 멈추면 쓰러진다.” (1993년 모범 수출업체 대표들과의 오찬) “분노와 저항의 시대는 갔다. 투쟁이 영웅시되던 시대도 갔다.” (1993년 서울대 졸업식 치사) “지지율이 90%를 넘을 때는 너무 높아서 어지럽고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1994년 대통령 취임 1주년 기자회견) “로마제국은 외침이 아니라 내부 부패로 망했다.” (1994년 인천 북구청 세무 비리 사건에 대해)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 (1995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갈 때도 생각해야 한다.” (1997년 LA다저스 박찬호 선수 가족 초청 오찬) “나도 23일간 단식해 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 (2003년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의 단식투쟁 현장) 김영삼 전 대통령은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정치 거목이 자신의 ‘직설 화법’을 통해 단단한 ‘저항 의식’을 담은 말들을 쏟아 내니 무시 못 할 파괴력이 더해졌다. 김 전 대통령은 1979년 헌정 사상 첫 제명 국회의원이 된 직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저항’을 뜻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여겨지며 정치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회자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며 화살을 피했다. ‘큰길로 나가면 거칠 것이 없다’는 의미의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은 김 전 대통령은 같은 해 국가기강확립 보고회의에서 “새 정부의 국가 기강 확립의 대도(大道)는 첫째도 윗물 맑기요, 둘째도 윗물 맑기다”라며 공직자들의 청렴성을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우째 이런 일이…”라는 말도 유행시켰다. 최형우 민주자유당 사무총장 아들의 대입 부정 사건이 벌어진 데 대한 김 전 대통령의 반응이었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 발음 탓에 ‘학실히(확실히)’, ‘씰데(쓸데)없는 소리’, ‘이대한(위대한) 국민 여러분’ 같은 유행어도 만들어졌다. 또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에 대해 “이번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비판하며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기도 했으나 한·일 관계에서는 오랜 기간 그늘이 됐다. 2008년 당시 김무성 의원이 한나라당의 공천 학살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을 때에도 김 전 대통령은 “공천 심사가 엉망이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당시 LA다저스 소속 박찬호 선수에게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갈 때도 생각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이는 정치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2003년 단식 농성을 벌이던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찾아가 “나도 23일간 단식을 해 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며 단식을 중단할 것을 종용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뇌졸중·협심증으로 입원 반복”

    “뇌졸중·협심증으로 입원 반복”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치의인 오병희(62) 서울대병원 원장은 22일 오전 긴급 기자회견에서 “과거 반복적인 뇌졸중, 협심증, 폐렴 등으로 수차례 입원했다가 지난 19일 고열로 입원했다”며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이 겹쳐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다음은 오 원장과의 일문일답. →어떤 상황이었나. -(김 전 대통령은) 동맥경화 때문에 심장 혈관이 막힌 부분이 있어 과거에 여러 차례 시술을 받았다. 패혈증과 같은 급성 스트레스가 겹쳐 심장 기능이 갑자기 악화돼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스텐트 시술을 하는 등 혈관 관련 병이 많았다. 지병이 악화돼 사망한 것으로 판단된다. →서거하기 전에 의식이 명료했던 시점은 언제인가. -지난 19일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어느 정도 의식은 있었다. 갑자기 많이 악화돼 입원하게 됐다. 입원 당시 고열과 함께 호흡곤란 증상이 있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질 때는 의식이 없었나. -의식의 정도는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된다고 보고 중환자실로 옮겼다. →이러한 상황을 예측했는지. -(김 전 대통령이) 워낙 고령이고 중증 질환이 반복됐다. 중환자실에서 최선의 치료를 했으나 심장 기능이 회복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2008, 2009년부터 뇌졸중이 있었다. 가장 큰 뇌졸중은 2013년 4월에 있었다. 이후 18개월 정도 입원했고 그 후에는 통원 치료를 했다. 상황에 따라 입원하기도 했으며 3~4년 정도 제가 직접 진료했다. →서거 직전에 누가 곁에 있었나. -저를 포함한 의료진과 가족들이 있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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