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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孫·鄭·李, 열흘만에 입대결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정동영·이해찬 세 후보가 10일 만에 토론회 테이블에 앉았다. 파행을 거듭해 온 경선이 정상화된 첫날이라 조심스러운 태도 속에서도 날카로운 공방이 오갔다. 세 후보는 9일 저녁 KBS 1라디오 ‘정관용의 열린토론’에 출연해 ▲경선과정에 대한 평가 ▲본선 경쟁력 ▲참여정부 계승 여부 ▲단일화 문제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토론회 중 손 후보가 1차 휴대전화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요 공격 대상이 정 후보에서 손 후보로 이동했다. 문민정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손 후보에 대한 정통성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당 안팎에서 벌써부터 경선 후유증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후보 간의 팽팽한 긴장감은 토론회 초반부터 감지됐다. 이 후보는 정 후보를 겨냥,“여러 선거를 겪고 관리했지만 역대 선거 중 이렇게 무법천지로 경선 이뤄지는 것은 처음 봤다.”면서 “국민께 이런 사태 미연에 막지 못해 사과드린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손 후보도 “국민경선제가 오픈 프라이머리를 빌려오자는 취지였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조직을 준비해놓고 거기에 경선제도를 맞춘 꼴”이라며 이 후보를 거들었다. 다른 후보들의 공격이 이어지자 정 후보는 “선거는 조직과 동원이다.”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됐다. 이 후보는 “선거가 조직과 동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구정치”라고 쏘아붙였고 손 후보는 “말씀에 놀랐다. 그건 정말 낡은 사고 방식”이라면서 “잘못은 잘못대로 인정하면 되지 자꾸 변명하려고 하니까 그걸 국민들이 짜증 내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후보는 “정통성은 중요한 문제”라고 전제한 뒤 “3당 합당으로 부산·경남 지역 개혁 진영 기반이 다 무너져 내리는 정치 역학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것(문민정부)을 민주정부라고 하는 데 정치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고 날을 세웠다. 정 후보는 “문민정부를 계승하는 세력은 한나라당”이라면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국민참여 선대위로 ‘국민후보’ 굳히기

    국민참여 선대위로 ‘국민후보’ 굳히기

    한나라당은 8일 외부 인사 대거 영입을 골자로 한 이명박 대선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인선 결과를 발표했다. 공동선대위원장은 강재섭 대표와 안상수 원내대표 등 당내 인사 2명에 외교안보 분야의 유종하 전 외무장관을 비롯한 외부 인사 7명 등 9명 체제로 인선됐다. 문화예술정책위원장으로 발탁된 박범훈 중앙대 총장도 선대위원장급이다. 박 총장은 현직 총장이어서 선대위 직함이 부담스럽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나머지 체육청소년, 농어업 분야 공동선대위원장은 당사자들과 입장조율 중이며, 이달 말쯤 확정할 예정이다. 이방호 사무총장은 이날 “과거 정치인 중심의 선대위를 일 중심의 조직으로 꾸렸다는 특징이 있다.”고 자체 평가했다. ●대선 후 이명박식 당 체질 변화 예고 공동선대위원장에 무려 7명의 외부 인사를 위촉,‘과두(寡頭)체제’를 형성한 일은 전례가 없다. 또 이 후보 직할로 운영되는 각종 위원회에도 이윤구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윤진식 전 산자부 장관,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등을 끌어들임으로써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국민참여형 선대위를 꾸린 셈이다. 대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국민 후보’로 각인시키며 대세론을 굳히려는 이 후보측 의도가 보인다. 당내부적으로는 대선 후 ‘이명박식’ 당 체질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당초 공언했던 ‘슬림형’ 선대위 방침과는 달리 다수의 공동선대위원장과 각종 위원회 조직 등 ‘비만형’ 선대위로 변질됐다는 지적도 있다. 원내대표가 선대위원장에 포함된 것도 이례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번 국정감사에서 이 후보 방어의 중책을 맡은 점이 감안돼 막판에 포함됐다는 후문이다. 외부 인사 역할의 한계도 거론된다. 대선 막판에 범여권과 가파른 전선이 형성되면 어차피 선거는 기존 당조직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외부 인사들은 사실상 자문역할을 맡는 정도에 그칠 것이란 얘기다. 선거 실무를 총괄할 양대 조직인 선대본부와 전략홍보조정회의의 수장을 이방호 사무총장이 겸임하는 사실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 과거 선대위 외곽의 비선 조직에 머물렀던 외부 전문가 그룹을 선대위 리더그룹으로 끌어들이고, 후보 본인이 특위(경제살리기)의 위원장을 맡은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파격이라는 평가다. ●외부 인사 면면 외교안보분야 선대위원장에 내정된 유종하 전 장관은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역임하는 등 외교관 생활만 30년을 한 베테랑이다. 교육과학기술 담당 선대위원장 박찬모 전 포항공대 교수는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장 등을 맡는 등 과학·기술계를 중심으로 발이 넓다. 미래신산업 분야 담당 선대위원장 배은희 리젠바이오텍 대표이사는 국내 IT분야에서 최고의 여성경영자로 인정받는다. 사회복지분야 선대위원장 김성이 이화여대 교수는 청소년보호위원장 출신으로 이 후보의 서울시장 시절 자문위원을 맡으면서 인연이 닿았으며,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를 맡은 박범훈 총장은 국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김상연 박지연기자 carlos@seoul.co.kr
  • 노대통령 “말씨·자세 대통령 준비 안됐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말씨와 자세에서 대통령 할 준비가 안 돼 있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8일 보도된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내가 지지자들에게 가장 미안한 점은 나를 지지한 것 때문에 힘들게 한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오마이뉴스 인터뷰는 지난달 2일과 16일 8시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오마이뉴스는 인터뷰 내용을 여러 차례로 나눠 게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권력론, 민주주의론, 지도자론, 시민사회론을 공부한 내용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정치학 교과서를 쓰고 싶다.”고도 했다. 이어 “참여정부의 권위주의 해체와 권력분산은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검찰은 장악하려야 장악도 안 되지만 일부러 검찰 신세를 절대 지지 않았다.”면서 “임기 끝내고 살아서 내 발로 걸어나가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언론에 대해서는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막판에 언론에 타살당했다. 나는 송장이 안 되고 떳떳이 걸어나가겠다.”면서 “자기방어에 대한 준비가 돼 있다.”고 또다시 적대감을 드러냈다. 노 대통령은 “정치권력은 하나의 권력일 뿐 진정한 의미의 권력은 시민사회에서 나온다.”고 전제하고 “대통령을 퇴임하는 나는 권력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권력 속으로, 시민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시도에 대해서는 “나의 자만심이 만들어낸 오류”라면서 “아주 뼈아프게 생각한다.”고 자성했다. 그러면서 “다음 대통령은 좀 부드러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국감 증인신청 맞불

    국회 국정감사 증인신청을 놓고 정치권이 ‘막가파식’힘겨루기 공방을 벌이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관련 상임위를 중심으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대한 증인 신청을 쏟아내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신당 대선 후보 3인은 물론 노무현 대통령 내외까지 증인 및 참고인으로 요구하며 맞불을 놓고 있다. 최대 격전장은 법사위다. 신당은 이 후보의 도곡동 땅 투기의혹과 관련해 이 후보와 김만제 전 포철회장,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를 증인과 참고인으로 신청했다. 또 이 후보의 위장전입 사건에는 이 후보의 부인 김윤옥 여사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권력형 게이트’사건을 공략, 신씨와 정 전 비서관은 물론 권양숙 여사까지 증인으로 신청했다. 또 노 대통령을 공무원 선거중립의무 위반 결정에 대한 헌법재판소 제소사건과 관련, 증인 및 참고인으로 신청하기로 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깔깔깔]

    ●소에 관한 단상 소 한마리가 있었다. 모처럼 농촌을 찾아 한자리에 모인 전직 대통령들이 소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소, 미국서 보냈구나∼” 박정희 대통령:“임자, 이 소 잘 키워서 새마을 운동에 쓰면 좋갔구만.” 전두환 대통령:“본인은 술안주로 잡아 먹었으면 해∼” 노태우 대통령:“먹지 말고 어디다 감춰두는 기 안낫겠나?” 김영삼 대통령:“이 소 현철이 줬으면 딱 좋겠구마는….” 김대중 대통령:“에∼김정일 국방위원장 갖다주게 한마리만 더 있었으면 쓰것습니다.” 소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니, 쌍꺼풀 어데서 했노?”
  • [이용원 칼럼] 鄭·孫·李 세 후보, 죽어야 산다

    [이용원 칼럼] 鄭·孫·李 세 후보, 죽어야 산다

    유권자로서 또 기자로서 대통령선거를 여러차례 겪어봤지만 올해처럼 재미없는 대선은 정말 처음이다. 1987년 대선부터 되돌아보자. 군부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와 민주화투쟁 지도자인 김영삼·김대중 후보 등 3명은 개표가 끝날 때까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승부를 벌였다. 1992년 대선은 김영삼·김대중 양김이 다시 맞붙는 빅 매치에, 정주영 현대그룹 총수가 가담해 박진감이 넘쳤다.5년 후에는 집권당의 후계자 다툼이 치열하더니, 여야 대표인 이회창·김대중에 범여 성향인 이인제 후보간 3파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지난번 대선에서는 노무현·이회창·정몽준 후보의 3자 대결에 막판 ‘단일화 변수’가 개입해 지지자들을 끝까지 조마조마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어떠한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홀로 여론조사에서 50%대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고공비행할 뿐 그 대항마는 아직 보이질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 후보와 대적할 대표선수가 끝내 떠오르지 않아 이번 대선은 거인 하나에 여러 난쟁이가 뒤섞인 볼품없는 대결로 끝날지도 모른다. 만약 그리 된다면 그 책임은 일단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손학규·이해찬 세 경선후보가 져야 한다. 진보·개혁을 내세운 범여권의 통합체로 자처하는, 원내 제1당인 통합신당에서는 앞으로 경선이 계속될지조차 예상하기 힘들 만큼 이전투구가 벌어지고 있다. 손학규·이해찬 두 후보는 정동영 후보 측의 동원선거·돈선거를 규탄하며 경선일정 연기를 요구했고 정 후보 측은 그같은 요구에 당연히 반발했다. 지도부는 어제 ‘원샷 경선´을 결정했지만 근본적으로 위기를 수습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이같은 현실에서 정동영·손학규·이해찬 세 경선후보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신당 경선이 계속되건, 판이 깨지건 지금과 같은 흐름이 이어지면 그들 앞에 기다리는 건 공멸뿐이다. 경선이 무산돼 각자 대선에 나가면 군소후보로 전락할 테고, 이 추악한 경선에서 이겼다고 대선에 나가봐야 승리는커녕 참패의 덤터기만 뒤집어쓸 테니까 말이다. 대선 승패를 가름하는 계산법은 단순하다. 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명박 대항마’로 자리잡으려면 먼저 경선에 패한 다른 두 후보의 지지자들을 흡수해야 한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바탕 위에, 이미 50%를 넘어선 이명박 후보 지지층 가운데 일부를 빼앗아 와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 후보에 대적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밖에 없다. 경선 과정이 공정하고 아름답고 희망적이어서 당원은 물론이고 국민 일반에게 비전과 감동을 선사해야 한다. 그래서 세 후보에게 당부한다. 먼저 자신을 죽여라. 내가 대선에 나가야만 한다는 아집을 버리고 당과, 진보·개혁 세력을 살리는 데 주력하라. 정치권 일각에서 의심하듯, 경선 승리의 목적이 대선에 있지 않고 그 뒤에 전개될 당권 잡기에 있다면 그 무모한 꿈을 당장 버려라. 대선에서 참패한 후보에게 대표성을 부여할 만큼 진보·개혁 세력이 어리석지는 않다. 그에 앞서 대선에서 참패하면 통합신당은 공중분해되거나, 아니더라도 국민에게 철저히 외면당할 것이다. 거듭 세 경선후보에게 당부한다. 먼저 죽어라. 그래야 당신들은 진보·개혁 세력의 지도자로 되살아난다. 선거는 올해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내년에 총선이,5년 후엔 대선이 또 찾아온다. 이용원 수석 논설위원 ywyi@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남북대화 어제와 오늘

    [2007 남북정상회담] 남북대화 어제와 오늘

    남북은 ‘7·4남북공동성명’에서 ‘10·3 남북정상회담’까지 수많은 대화와 교류협력을 통해 통일의 기반을 다져왔다.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남북관계 연혁을 통해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구조가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던 1970년대 이전까지는 남북간에 실질적인 대화와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반도 주변정세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분단 이후 최초의 ‘7·4 남북공동성명’ 1971년 8월20일 남북간 최초의 대화인 적십자회담이 성사됐다. 이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됐다.‘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한 당국이 국토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발표한 공동성명이다.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평양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평양과 서울을 비밀리에 오가며 대화를 시작한 결과 7개 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통일 원칙으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에 합의하고,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과 상설 직통전화 설치, 남북조절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그러나 1973년 8월에 남북대화는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1980년대, 남북간 다양한 대화채널 확보 1980년대 초반부터 전두환 정부는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펼쳤다.1981년 6월5일 남북 당국 최고책임자간의 직접 회담을 제의했다. 그러나 1983년 9월1일 소련 전투기에 의한 KAL기 격추사건,10월9일 버마 아웅산 테러사건 등으로 한반도 평화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던 중 북한은 1984년 3월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을 제의, 대화의 물꼬를 이어나갔다. 이어1980년대 남북은 상호 적대의식 속에서도 대화를 지속했고, 전 시기에 비해 대화채널을 다양화하는 성과를 거뒀다. ●1990년대‘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990년대 남북관계는 커다란 진전을 이루게 된다. 특히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여덟차례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남북은 이 합의서에서 정치와 군사·교류협력 등 3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5개 공동위원회(화해, 군사, 경제교류협력, 사회문화교류협력, 핵 통제)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도 채택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 추진의지에 북측이 호응했지만,1994년 7월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2000년‘6·15선언’발표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남측 일행은 6월13일부터 15일까지 북한을 방문,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두 지도자는 공동선언을 통해 5개 항에 합의했다.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나가기로 했으며,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연방제에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이산가족의 상호방문 실현과 경제협력 및 제반 분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산가족의 상봉과 남북장관급회담이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이제 2일부터 4일까지 열리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간 안정적인 대화와 협력의 시대가 이어지게 될지 주목된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대세론의 함정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대세론의 함정

    1996년 하반기∼1997년 상반기와 2001∼2002년에도 대세론이 있었다. 두 번에 걸친 이회창 대세론이다. 이회창의 첫번째 대세론은 김영삼(YS) 대통령이 96년 3월 15대 총선을 앞두고 그를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에 전격 발탁한 게 계기가 됐다. 아들 현철씨의 국정농단으로 ‘식물 대통령’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YS는 정국 돌파와 총선 승리를 위해 ‘이회창 카드’를 꺼내들었다.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이회창은 인기가 꽤 높았다. 결국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이 이회창 대세론으로 이어진 것. 당시 이회창의 지지율은 50%를 웃돌았다. 이회창은 2001년에도 대세론을 이어갔다. 한나라당의 16대 총선과 지방선거 승리로 ‘사실상 대통령’이란 얘기까지 들었다.2002년 3월까지 이회창의 지지율은 50%를 넘나들었다. 노무현 후보가 여당 경선에서 이긴 3월 이후 두 달가량 그에게 1위 자리를 내준 것 말고는 후보단일화가 이뤄진 11월까지 이회창의 대세론은 위용을 떨쳤다. 그러나 두 번의 대세론은 모두 무너졌다. 외연 확대를 외면하고 보수세력 결집에만 신경을 쓴 탓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이명박 대세론이다. 이명박은 50%를 넘는 지지율로 홀로 고공 행진 중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범여권의 단일후보로 누가 되더라도 이명박은 3∼4배 차이로 압도한다. 지금의 대세론과 과거의 대세론은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여권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 효과는 공통점이고, 상대 당의 확실한 후보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른 점이다. 지지 기반의 차이도 있다. 이회창은 보수층 강화에 역점을 뒀지만, 이명박은 플러스 알파(20∼40대의 지지)에 초점을 맞춘다. 연대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현 대세론은 2002년보다 상대적으로 견고성을 갖고 있다.”면서 “특히 공식 선거운동기간에 들어가서는 후보간 지지율이 바뀐 사례가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범여권의 후보단일화는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확정(10월16일)돼야 가능하다. 범여권에 남은 시간은 달포가량이다. 지지율을 뒤집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대세론 즐기기 또는 대세론 안주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명박 후보가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지도 40일이 지났다. 한데 그동안 이 후보가 내놓은 작품 가운데 떠오르는 게 없다. 전략 역시 경선 전과 경선 후,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외교분야를 빼곤 인재 등용이나 정책개발에서 눈에 띄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선대위원장 인선과 관련해 그렇고 그런 인물들의 하마평만 나온다. 한반도대운하 공약도 어정쩡한 상태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피터 슈워츠는 “어떤 경우에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는 생물이다. 불가측성이 특징이다. 이 후보도 30%초반까지 지지율이 떨어질 수 있다. 이 후보에겐 도곡동 땅과 BBK 문제가 여전히 진행형이고, 이것이 지지율 널뛰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후보 캠프에서는 이 가능성을 도외시하는 것 같다. 대운하도 고집을 피울 필요가 없다고 본다. 활발한 내부 토론을 거쳐 대운하 공약을 수정한다면 오히려 이 후보의 유연성이 돋보일 수 있다. 대선에선 단순히 이기는 것보다 어떻게 감명 깊은 승리를 거둘 것이냐가 중요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이 후보 진영은 더욱 팽팽한 긴장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 후보가 유력 후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jthan@seoul.co.kr
  • [2007 대선 매니페스토] 역대 외교·안보정책 파괴력은

    [2007 대선 매니페스토] 역대 외교·안보정책 파괴력은

    역대 대선에서 외교·안보·통일정책은 어느 정도 파괴력을 발휘했을까. 외교정책을 둘러싼 주요쟁점이 대선의 핵심 어젠다로 부상한 적은 없었고, 통일정책 가운데 북핵문제와 대북지원은 2002년 16대 대선에서 쟁점으로 부상했다. 국방정책에서 사병복무기간 단축 같은 표를 의식한 인기영합 공약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은 장밋빛이었고, 후보별 차별성은 찾아 보기 어려웠다. ●통일정책 통일정책은 남북관계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다양한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고, 중장기 추진과제들이 제시됐다.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남북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 체결을 공약으로 내세워 7·7선언을 이끌어 냈다. 김대중 후보는 13대 대선에서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론을 제시하면서, 미·일·중·소의 남북한 동시 교차승인,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등의 어젠다를 제시했다.14대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는 남북핵 상호사찰 실시, 남북협력기금 확충 등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15대 대선에서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이회창·김대중 후보는 각각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기본합의서 정신을 살리는 과정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인제 후보는 ‘조건없는 추진’을 주장했다.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거치자 16대 대선에서는 북한 핵문제와 대북지원이 쟁점으로 등장했으며, 노무현 후보는 ‘대북지원 및 경협과 일괄타결안’을 제시했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핵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현금지원을 중단하고, 핵개발을 대북지원과 경협과 연계해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외교·국방정책 외교정책 분야에서 한미행정협정 개정, 작전지휘권 환수문제 등이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13대 대선이었다. 외교정책이 선거의 핵심 어젠다로 부상한 것은 처음이었다.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직속 동북아 중심국 프로젝트 전담기구 설치, 동북아 철도공사 설립, 동북아 평화 및 경제협력체, 동북아 개발은행, 동북아 에너지 협력기구 창설 등의 공약을 제시했다. 국방정책 공약에서는 표를 의식한 인기영합식의 공약과 실현성이 뒷받침되지 못한 장밋빛 공약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주한미군 주둔을 비롯한 한·미 안보문제, 방위비 규모, 병력감축을 비롯한 군축문제 등 민감하고 굵직한 현안에 대해 후보 사이에서 뚜렷한 이견은 찾아 보기 어려웠다. 예비군 복무기간 단축, 사병 복무기간 단축, 민방위 복무연령 인하 등 실리적 공약들이 등장했다.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예비군 의무훈련기간 8년으로 축소, 사병복무기간의 축소, 민방위 복무연령인하, 보충역 대상 확대 등의 공약을 내세웠다. 다른 후보들은 예비군 5년제, 사병복무기간 2년으로 단축, 민방공훈련의 폐지 등을 경쟁적으로 제시했다. 14대 대선에서는 군복무기간과 예비군 훈련시간 단축, 직업군인 복지 등 표를 의식한 공약들이 앞다퉈 제시됐으나 전력보충방안이나 예산구상 검토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15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5년간 GNP 3.2% 이상 국방예산 확보 등을, 김대중 후보는 직업군인 보수 대기업 90%로 개선, 계급별 정년 점진적 연장 등을 약속했다.16대 대선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국방개혁위원회 설치, 사병봉급의 현실화 등을 제시했으며, 노무현 후보는 예비군 편입기간과 편성연령 3년씩 단축, 예비군 동원훈련일수 3일 축소 등의 공약을 제시했다.
  • [어떻게 지내십니까] 청렴 정치인의 표상 박영록 前의원

    [어떻게 지내십니까] 청렴 정치인의 표상 박영록 前의원

    돌아가 쉴 집, 내 몸 하나 뉠 곳, 거기에 60년을 함께한 사랑하는 아내가 소찬을 만들어 반기면 그 위에 더한 행복이 있겠는가. 비록 그 집이 1.8평 손바닥만 한 컨테이너라 할지라도 비 오면 비 막아주고 바람 치면 바람 막아주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내 집이 아닌가. ●“1.8평짜리 컨테이너 박스가 내 보금자리” 헌정회 회원인 박영록 전 의원은 얼마전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독지가로부터 비어 있는 집이 있으니 들어와 사시면 어떠냐는 제안을 들었다. 애초부터 남에게 신세질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지만 하도 간절히 청하는 바람에 못이긴 척 그를 따라 나섰다. 서울 강남의 70평짜리 집이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호의를 물리칠 수 있을까 궁리하던 터에 대궐 같은 집을 보니 오히려 핑계대기가 좋았다고 한다.“그래도 세상에 아직은 인정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컨테이너에서 나오면 거처를 제공하겠다는 분들이 여럿 있어. 그렇지만 내 양심상 70평 집에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관뒀지.”어느 사업가는 담양에 있는 집을 내줄 테니 살라고 했지만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낙향할 처지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서울 성북구 삼선초등학교 뒷문 쪽 가파른 언덕배기에 아슬아슬하게 얹어 놓은 두 개의 컨테이너가 강원도지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을 4번이나 한 그의 보금자리다. 바로 위 40년간 살던 35평짜리 집을 2003년 공매처분 당하고 1년을 이곳저곳 떠돌았다. 다행히도 옛 집 바로 아래 3.8평 땅 하나는 건졌던 그는 수중에 있던 돈을 털어 컨테이너 2개를 사 2004년부터 이 곳에 자리잡았다. “올 여름 정말 더웠어. 낮에는 보통 40도까지 올라가는데 그래도 어떡해. 더우면 더운 대로 그러고 사는 거지.”지난해 11월 가까스로 끌어온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촛불을 켜고 살았다. 방바닥에는 촛농 자국이 검버섯처럼 가득하다. 살림이라곤 넉자 장농과 구형TV, 냉장고, 선풍기가 전부다. 손님이 찾아왔다고 내놓는 냉수를 차마 벌컥 들이마시기가 외람될 정도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이웃집에서 길어오던 물도 이제는 연결된 수도관에서 콸콸 나온다. 겨울이면 꽁꽁 언 이웃집 수도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녹이고는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받았다. 역시 이웃 신세를 졌던 화장실도 부엌을 겸한 컨테이너 아래 지하방에 만들었다. “이러고 사는 게 신문에라도 나가면 원주에 있는 아들놈이 욕을 들어먹는다고 그래. 왜 아버지, 어머니 안 모시냐고. 사실 우리 부부랑 살 형편도 안되고, 우리도 그리로 내려갈 생각도 없는데 말이지.”자식은 아들 셋을 뒀으나 둘을 앞세웠다. 장남은 현역 정치인 시절 세상을 떴고, 막내는 3년 전 사업에 실패하자 “부모님 고생만 시켜드린다.”며 목숨을 끊었다. 현역 정치인 때 마음 먹고 돈을 챙기고 모았으면 자식을 가슴에 묻는 일 따위 없었을지도 모른다. 박 전 의원 옆에 앉아 있던 부인 김옥연(82)씨가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 지난 7월 어느 시민단체가 ‘대한민국청렴정치인대상’을 줬다. 상금이 무려 1억원이었는데도 한푼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내가 이런 거 받을 자격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받은 이상은 절반은 청렴정치를 실천하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사람을 모으고, 세운 뜻을 이루는 데 돌리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상금의 나머지 절반은 그가 주도하고 있는 ‘남북통일 과도임시정부’ 준비위원회에 쓸 요량이다. “남북이 갈려 있지만 가만히 두면 옛날의 삼국시대와 같은 2국시대가 될 수 있거든. 대한민국 헌법이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고 한 것처럼 정통 국맥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통일을 이루는 과도 임시정부가 필요하지.”1948년 유엔이 결정한 남북동시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남과 북이 따로 국가를 세웠지만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으면 유엔 결정에 따라 선거를 치를 임시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청렴정치운동도 마찬가지다. 그는 “안 보이고 안 밝혀져서 그렇지 나라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축재를 한 전직 대통령이 활보를 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에게 닥친 조그만 사건만 봐도 그렇단다. 구청에서 어느날 컨테이너 집을 철거하러 왔다. 망치로 문을 부수고, 유리창을 깼다.3.8평 땅이 자기 땅이라는 어느 주민이 신고를 했는데 구청이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철거하러 온 것이다.“그제서야 등기부등본을 떼보고 박영록이 땅인 게 드러나니까 부서진 데를 보상하겠다고 하더라고. 나같은 사람도 이렇게 당하는데 힘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어?” ●민선 강원도지사 시절 관용차 안 타고 도시락 싸 출근 그는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는 광명정대한 청렴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했다. 민선 강원도지사 시절 관용차를 타지 않고,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했다. 그런 청렴함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헌정회에서 나오는 연금 99만원 중 80만원은 범민족화합통일운동본부 운영비로 내고 나머지와 지인들이 돕는 돈을 합쳐 50만∼60만원으로 살아간다. 평일에는 헌정회에서 주는 식권으로, 주말에는 헌정회 사무실에서 가까운 서울신문사 사원식당이나 1000원짜리 밥집을 이용한다.“한국에서 청렴정치 하면 바보란 소리 들어.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알려진 뒤로는 어떤 헌정회 회원들은 날 모른 체하더라고. 같이 다니기가 부끄러웠던 게지. 허허.” 지금의 정치에 대해서는 말하길 꺼린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원로 정치인으로 기사가 났었다.“그랬나요? 참석도 하지 않았는데 이름이 올라간 모양”이라고 한다. 애증이 교차할 것 같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텐데도 계속 말을 돌린다. 다만 대선 정국과 관련한 DJ의 언행에 대해서는 “옳지 않다.”고만 짤막하게 언급하고 입을 굳게 다문다. 스스로를 “초정파”라는 그는 “이 나라에는 진짜 어른이 없으며 특히 정치판에는 원로가 없다.”고 쓴소리를 한다. 그는 사기(史記)의 ‘상군열전’에 나오는 고사 ‘법지불행 자상정지(法之不行 自上征之)’를 인용한다. 법이 행하여 지지 않는 이유는 위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신을 지도자들이 명심하고 지키면 정치가 올바르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 나라엔 진짜 어른 없고 정치판엔 원로 없다” “요새 정치인들은 현실문제만 갖고 다투지만 사실 민족이라든가, 국가라든가 근본을 놓고 고민을 해야 해.”그는 청렴정치운동, 통일운동 외에도 천제를 지내는 원구단 되찾기,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중국 지린성 룽징(龍井)시 외곽에 있는 일송정에 독립기념관을 건립하는 일들을 추진하고 있다. 은퇴 정치인이라고 하기엔 그가 벌여놓은 일은 현역 정치인 못지 않게 많다. 여의도에 있는 그들이 손대지 않는 영역에서 자신의 뜻을 일구고 실천해간다. 세상이 그를 따돌리고 왕따해도 의연하다. 독문학자 김진섭은 1947년 수필 ‘청빈예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이왕 부자가 못된 바에는 빈궁은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일이니, 사람이 청빈을 극구예찬함은 우리들 선량한 빈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한 개의 힘센 무기요, 또 위안이다.”라고. 그렇지만 박영록의 청빈은 피할 수 없는 수동적 운명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선택한 길이요, 세상살이 방식이다.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컨테이너 방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고 남쪽으로 난 창밖으로 나가 세상을 주유하는 꿈을 꾸는 그는 그것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그는 누구인가 박영록 전 의원은 ‘박총재’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명예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현역 정치인으로 최고 직함을 누린 평민당 부총재 시절의 애착 때문일 것이다. 1922년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춘천농고를 졸업하고 정계에 들어서기 전 강원일보 기자를 지내기도 했다.37살에 강원도지사에 당선된 뒤 6,7,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69년 3선 개헌 반대투쟁 때에는 동료인 장준하와 함께 신민당의 원외투쟁을 주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이철승 전 의원과 함께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이끌었다. 70년 의원 자격으로 방문한 독일에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몰래 들어가 승리자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 ‘JAPAN’을 ‘KOREA’로 바꾼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또한 80년 신군부가 5000만원밖에 없는 그를 20억원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최근 최연희 의원 등 강원도 국회의원협의회 회원들이 그를 돕겠다고 했으나 “돈을 들고 올 거면 오지 말라.”고 사양했다고 한다. 3·1운동의 성지를 세계평화공원으로 만들자는 뜻에서 매일 오전 탑골공원을 둘러보고, 헌정회 사무실에 들른 뒤 소공동의 원구단에 들러 참배하는 ‘시천살이’를 하는 게 하루 일과이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종교·신념따른 대체복무 허용] 병역 거부자 ‘잔혹史’

    [종교·신념따른 대체복무 허용] 병역 거부자 ‘잔혹史’

    ‘20만 5801개월’. 지난 1950년부터 2006년 5월까지 종교적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1만 2324명에게 선고된 형량이다.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신성한’ 국방 의무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던 만큼 ‘반국가사범’이란 낙인을 찍히고도 항변할 기회조차 없었다. 지난해 수형자 가족모임이 병역 거부로 수감됐던 여호와의 증인 신도 전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인 6328명이 수감생활 중 1만 8966건의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응답했다. 가혹 행위는 사망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1975년 논산훈련소에서 숨진 김종식씨,1976년 포항 해병대에서 사망한 정창복씨 등 5명의 유가족은 지난해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죽음의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진정을 낸 상태다. 2∼3년간 복역한 뒤 출소한 뒤엔 전과자라는 주홍글씨가 기다렸다. 공무원은 물론 변변한 기업체에 취업하기도 어려웠다.1972년 유신이 선포된 뒤에는 특별조치법까지 제정돼 처벌이 강화됐다.‘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시절엔 형량이 35개월까지 늘기도 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한승원 토굴살이] 바보시인 이야기

    [한승원 토굴살이] 바보시인 이야기

    시인의 토굴에서 남쪽으로 80m쯤 떨어진 곳에 소 백 마리쯤을 키울 수 있는 우사 두 채와 그 우사의 주인집이 나란히 서 있었다. 우사와 주인집의 파란 양철지붕은 쏟아지는 햇살을 뽀쪽거리는 스테인리스 쇠 조각들처럼 퉁겨 날리곤 하므로, 시인은 서재에서 나와 들판과 바다를 내다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지난 한여름의 어느 날 아침에,40대 중반의 우사 주인이 시인을 찾아왔다. 시인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우사를 지은 지 10년이 조금 넘었는데 그는 아직 송아지 한 마리도 들여놓지 않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정부 보조금 5000만원,5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의 5000만원을 가져다가 그것을 설치한 이래, 소를 키우려 하지 않고, 그 돈으로 이런저런 사업을 하다가 빈손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우사 주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시인은 그 우사에 소를 넣어 키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그 우사 속에서 백 마리쯤의 소가 생활하게 된다면 소의 똥오줌 냄새와 파리 떼들이 들끓을 것이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시인의 토굴을 향해 몰려들 것이 뻔한 일이었다. 시인은 그 농부가 우사에 소를 넣으려 하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행정 당국을 상대로 ‘왜 마을 안에 축사를 짓도록 했는지’를 놓고 소를 제기하려고까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젊은 우사 주인은 시인의 처지를 생각해서인지, 자기네 집 옆 우사에 소를 넣어 키운다면 먼저 자기들이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소를 키우고 싶어도 자금이 없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인지, 좌우간 소를 넣어 키우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시인으로서는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시인의 마음을 깊이 읽어온 듯 우사 주인이 말했다. “오래 전부터 이 사람 저 사람이 제 우사를, 일 년에 200만원씩 세를 내고 사용하고 싶다는 것을, 여기 사시는 선생님 처지를 생각해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저께도 제 동생 친구가 와서 통사정을 했거든요. 그런데 마다했어요. 그냥 놔두니까, 동네 사람들이 저것을 자기네 창고처럼 사용하는 것도 속상하고 그래서, 이제 지은 지 10년이 지났으니까 군에서도 상관하지 않을 테고…만일 선생님께서 저것 철거하는 비용을 부담해주신다면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진 시인은, 철거 비용이 기껏 100만원쯤일 거라는 생각으로 “고맙네. 그 비용 내가 부담해줌세.”하고 말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찾아온 농부가 말했다. “폐기물 처리 회사에서 와보고 8t 트럭으로 13대쯤이 소요되겠다는데, 한 트럭에 25만원이랍니다. 모두 삼백 몇 십만 원은 되겠는데 300만원만 부담해주십시오.” 시인은 그 비용이 너무 많다 싶었지만 한 번 약속한 것이므로 그 돈을 선뜻 주었다. 시인의 아내는 시인의 말을 듣고 하늘을 향해 소처럼 웃더니,“당신이 결정한 일인데,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좌우간 그것 뜯어내면 시원하기는 할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한데 제 어미에게서 그 사연을 전해들은 아들이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왜 그러셔요? 한·미 에프티에이로 인해서, 이때껏 소를 키우던 사람들도 폐업하려고 꿈틀거리는 판국에, 대관절 어느 누가 새삼스럽게 그 우사를 비싼 세 주고 얻어서 소를 키우려 하겠습니까?!” 시인이 우사 주인에게 봉 노릇을 했다는 소문이 근동에 퍼진 어느 날 면장이 시인을 위로해 주려고 찾아왔다. 시인은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우사를 철거하고 나니까 시야가 트이고 시원해졌는데, 날마다 맛보는 그 시원한 맛이 어디 300만원어치만 되겠습니까?” 소설가 한승원
  • [서울광장] 청와대의 생로병사/진경호 정치부 차장

    [서울광장] 청와대의 생로병사/진경호 정치부 차장

    회백색 담 탓일까. 출퇴근길 지나는 청와대는 늘 스산하다. 비라도 오면 내려앉을 듯 무겁고 적막하다.‘권부(權府)’임을 잊는다면, 서울 한복판 7만여평의 넓은 그 곳은 그저 도심 속 섬에 불과하다.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그제 일요일, 노무현 대통령이 그곳에서 예순한번째 생일을 맞았다. 진갑상에 미역국이 올랐는지는 모르지만 국무위원 등 부르려던 하객(賀客)은 모두 물렸다고 한다. 부인 권양숙 여사와 가까운 친지만이 그와 생일상을 마주했다. 그가 ‘본받을 공직자’라고 한 유능한 참모 변양균씨의 신정아 스캔들로 ‘할 말이 없게’된 지 일주일 뒤 일이다. 임기 마지막 해 대통령 부부만의 생일상은 처음이 아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퇴임을 한 달여 앞둔 2003년 1월 78회 생일을 부인과 둘이 보냈다. 작은 선물이라도 들고 왔어야 할 홍걸, 홍업 두 아들은 차가운 구치소에 갇혀 있었고, 다음 대통령이 드리운 권력 무상의 짙은 그늘에 노부부는 더 없는 한기(寒氣)를 느껴야 했다. 우울한 청와대는 낯설지 않다. 대통령이 있고부터 죽 있어 왔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까지 임기말 청와대는 우울하거나 불행했다. 한껏 어깨 펴고 들어섰다가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임기말 증후군의 대표적 증세다. ‘거세된 대통령’(노 대통령의 표현이다)이 우울한 생일상을 받던 그제, 청와대 밖에서는 한때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자산이었던 옛 열린우리당 주역들이 ‘노무현 이후’를 놓고 또 한차례 일합을 겨뤘다.5년 전 종로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내 옆에 있다.”고 한 정동영은 ‘낫(not) 노’, 비노(非盧)를 외치며 선두를 달린다. 한나라당 이적생 손학규는 ‘노(no) 노’, 반노(反盧)로 살 길을 찾는다. 유일한 친노주자인 이해찬도 “대통령이 (특정후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거리를 둔다. 장외시장의 문국현은 아예 자신을 후보 단일화 무대에 올려 놓고는 노무현 정치와는 전혀 다른 프레임의 정치를 외친다. 노 대통령의 우군인 몇몇 인터넷 매체와 386세대들은 친노주자 대신 문국현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임기 마지막까지 할 일은 하고 가겠다는 노 대통령이다. 선거법이 대통령의 입을 틀어막는다며 헌법소원을 내고, 야당 대선후보를 거침없이 고소한 그가 이런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직 내 무대인데, 불러야 할 노래가 많은데 정작 관객들은 고개를 돌리고 다음 가수가 마이크를 넘겨 받으려 드는 이 당혹스러운 현실을 승복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유령선거인단을 동원한 ‘날림 경선’을 불사하며 노무현 이후를 향해 눈에 불은 켠 그들이다. 대통령이 자신도 모르게 선거인단에 포함된 것은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이 얼마나 날림이냐의 문제를 넘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는 야만적 무원칙과 빈곤한 정치신념, 누구든 가로막으면 부수고 가겠다는 전의가 담겨 있다. 그들에게 지지율 20%의 대통령은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아니다. 이명박이 끌어안지 못한 50%의 국민들 마음만 살 수 있다면 ‘노무현 밟고 가기’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권력의 생로병사다. 균형발전정책과 기자실 문에다 대못을 쾅쾅 박을지언정 ‘노무현 이후’에 대해서만은 한 발 물러서는 자세가 노 대통령에게 필요하다. 눈발 날리기 시작한 청와대의 겨울을 오롯이 관조했으면 싶다.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진경호 정치부 차장 jade@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서 활동하는 中 ‘반상의 철녀’ 루이내웨이 9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서 활동하는 中 ‘반상의 철녀’ 루이내웨이 9단

    장강삼협(長江三峽), 삼국지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도도히 흐르는 장강(양자강)에 빼어난 경치의 서능협(72㎞), 무협(44㎞), 구당협(33㎞)을 말한다. 웅장함과 험준함, 오묘함이 극치를 이루는 대자연의 창조물이다. 위·촉·오 세나라가 삼협의 꼭짓점에 있었다는 것만 상상해도 어느 정도인지 그림이 절로 그려진다. 1987년 여름, 장강의 삼협을 유영하는 선상(船上). 내로라하는 중국과 일본의 고수들이 참여한 바둑대항전이 벌어졌다. 대회 폐막을 하루 앞둔 날 오후. 대표선수로 참가한 루이내웨이, 장쉬엔, 요다 노리모토, 이마무라 등이 숙소 근처에 산책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요다가 루이에게 속기바둑을 한번 두자고 불쑥 제안을 했다. 이어 둘은 흑백돌을 가리고 숙소 복도에서 서로 마주 앉았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자 요다 9단이 밝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해 속기바둑은 요다의 방에서 계속됐다. 가토 9단과 장주주 9단 등이 구경꾼으로 관전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루이를 찾는 전화였다. 중국 지도부에서 저녁회식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싼샤 사건´으로 日유학길 올랐다가 한국행 이튿날 바둑대항전은 모두 끝나고 중국팀이 합계성적에서 일본에 패했다. 그런데 루이는 중국 지도부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일본 기사의 방에 들어가지 말라는 훈령을 어겼다는 것이다. 앞서 중국 지도부에서는 “여류기사는 일본 남자 기사들의 방에 가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렸다.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데다가 루이가 그걸 깜빡 잊고 요다의 방에서 바둑을 둔 것이 화근이었다. 동료 프로기사 장주주 9단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반성문까지 썼고 나중에는 국수전 등 주요 기전의 참가자격을 박탈당했다. 중·일 바둑계에서는 이를 샤(三峽)사건이라고 한다. 결국 견디다 못한 루이는 2년 뒤 장주주와 함께 중국 국가대표팀을 떠났다. 장주주는 미국으로, 루이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루이는 일본에서 살아 있는 전설 오청원(吳淸源) 9단의 제자가 돼 바둑공부를 더 할 수 있었으나 각종 기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일본기원측이 루이가 일본 여류기전을 싹쓸이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6년을 그렇게 보내다 장주주와 결혼, 미국을 거쳐 1999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이듬해 조훈현 9단을 눌러 외국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국수전 우승을 차지, 파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한국기원의 정식기사가 되면서 제2의 인생길을 걷게 됐다.“바둑 둘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 집이다.”고 말하는 그는 자서전 ‘우리집은 어디인가’(마음산책)를 펴낼 정도로 비록 중국 국적이지만 한국생활에 많이 익숙해지고 있다. 올해 44세의 루이내웨이(芮乃偉).18세에 중국 국가 대표선수가 됐고 35세에 9단으로 승단, 세계 바둑 역사상 여성으로는 최초로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다. 그래서 세계 바둑계에서는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불세출의 여류기사”라는 찬사와 함께 ‘반상의 철녀’라고 부른다. 가을바람이 감미롭게 스치던 지난주, 서울 성동구 홍익동에 위치한 한국기원 프로기사 대국실에서 루이를 만났다. 그는 “한국말을 잘 못하는데….”라며 수줍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인터뷰 도중 간간이 한자를 써가며 이해를 도와주려는 ‘친절한 철녀’였다. 한국생활이 어떠냐고 했더니 “(한국에 온 지)8년이 됐다. 프로기사 생활을 할 수 있는 한국이 좋고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이어 남편과 같은 방향의 바둑인생을 사는 게 즐겁다며 해맑게 웃었다. 자택도 한국기원 바로 옆에 마련했단다. 근황을 물었다. 대국이 없는 날에는 오전 10시쯤 기원 연구실에 나와 공부를 하거나 다른 프로기사들의 대국을 지켜보고, 또 집에 돌아가서는 남편과 함께 복기(復碁)를 꼭 한다. 이창호 9단, 유창혁 9단 등과 기원에서 복기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럴 때 점심식사를 기원 옆 작은 식당에서 하는데 하얀 쌀밥이 바둑돌로 보일 때가 많단다. 집에서는 바둑TV를 시청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기보를 검색한다. 남편과 바둑을 두면 누가 이기느냐고 했다.“남편은 내가 다음 돌을 어디에 둘지 아는 것 같고, 반대로 나는 그걸 잘 모른다. 그런 것으로 봤을 땐 내가 남편보다는 머리가 나쁜 것 같다.”며 웃는다. 알다시피 루이 부부는 세계 최강의 9단 커플이다. 한살 연상인 남편은 산시성(山西省)의 타이위안(太原) 출생으로 1978년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1984년과 1985년에 벌어진 중·일 바둑대항전에서 일본의 고수들을 차례로 물리쳐 중국 국민들에게 ‘항일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세계최강 9단 커플… 한국기원 옆에 ‘둥지´ 루이와는 국가대표 시절 알게 됐고 싼샤사건으로 가까워지면서 결혼에 골인했다. 루이와 서울에 정착할 때까지 10년 넘게 외국을 돌아다녀 ‘바둑집시’라는 말도 듣는다. 루이는 “남편은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한다. 집에 DVD와 음향기기까지 설치해 영화감상을 자주한다.”면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서 함께 영화보는 재미가 그만이라고 말했다. “중국 국가대표를 떠난 10년 동안은 정말 무척 괴로웠지요. 특히 일본에서 바둑을 가르치는 노동으로 연명하며 견뎌야 했던 세월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인지 요즘 한국에서는, 내몫이 아닌 것 같은 행복과 평화, 그리고 한국의 친구들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남편이 있고, 우리 집이 있고, 새로운 삶을 열어준 바둑친구들이 있어 아주 행복해요.” 한국의 바둑기사 중에서는 목진석 9단과 김승준 9단과 친하다. 특히 김성룡 9단, 박승철 5단, 김영삼 7단 등은 중국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어서 기사실에 같이 있을 경우 한국말과 중국어를 섞어가며 열띤 토론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자기사 중에는 중국어를 비교적 잘하는 이지현 3단, 한해원 2단 등과 가깝게 지낸다. 루이 부부는 경희대 국제교육학원에 입학,2년여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한·중·일의 바둑수준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엇비슷하고 일본은 좀 어렵다.”면서 한국은 힘이 센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고향의 가족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지난달 중국에서 양가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했다.”면서 바둑은 어릴 적 아마초단인 아버지한테 배웠고 남동생이 아마5단의 실력이라고 귀띔했다. 상하이에서 태어난 루이는 평소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으로 집중과 인내력이 필요한 바둑에 쉽게 빠져들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예 바둑선수가 되려고 체육중학에 진학했으며 1년반 만에 상하이 시대표에 발탁되면서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남들은 전투형이라고들 합니다. 제가 어떻게 두는 것인지 잘 몰라 일단 싸움부터 걸다 보니 그런 얘기를 듣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두터운 바둑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하얀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막힘없이 써내려갔다.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달팽이 뿔 위에 싸워서 무엇하리. 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부싯돌 번쩍이듯 찰라에 기대 사는 몸. 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부귀든 가난이든 그대로 즐길 일이니. 不開口笑是癡人(불개구소시치인):크게 웃지 않는 그가 어리석구나.-백거이(白居易)의 시 중에서.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63년 상하이 출생 ▲76년 상하이 체육중흥학교(바둑훈련반) 입학 ▲78년 상하이 시대표 ▲80년 중국 국가대표 ▲88년 여성최초로 9단승단 ▲90년 일본 유학 ▲99년 한국기원 객원기사 ▲2000년 제43기 국수전 우승 ▲01년 한국기원 정식기사
  •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하) ‘생활정치’ 꿈꾸는 20대 당원들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하) ‘생활정치’ 꿈꾸는 20대 당원들

    정당은 시민사회의 다양한 견해와 요구를 정치로 이어주는 민주주의의 생명줄이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정치학)는 저서 ‘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사회의 요구로부터 괴리된 정당체제를 개혁해 정치와 대중사회가 소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들은 권력자와 지역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정당의 주인이어야 할 당원들은 표를 모으기 위한 동원용 도구에 불과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정당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각 정당에서 나오고 있다. 당원 요구를 묵살하는 기성 정당을 뛰어넘어 새 정당을 만들려는 실험도 계속되고 있다.‘생활정치’를 꿈꾸는 20대 젊은 당원들을 만나본 결과 한결같이 “소통이 원활한 정당을 원한다.”고 말했다. ●“보수도 개혁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중장년층의 지지를 받아온 한나라당은 요즘 대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이런 현상을 놓고 일각에서는 대학생들의 보수화를 우려하고 있으나 정작 한나라당 대학생 당원들은 “건강한 보수정당의 기틀을 우리가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백길현(28·경기대 4학년)씨는 “청년당원으로서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 입당했다.”면서 “한나라당을 아래로부터 의견이 수렴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며, 생명력이 영원한 수권정당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인하대 재학 당시 한총련 활동을 했던 이재양(26)씨는 “한국 사회에서 이념 논쟁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좌파나 우파를 떠나 구체적인 정책입안 과정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자체를 잘 몰랐다는 이인규(23·한국기술교육대 4학년)씨는 지난해 당의 대학생 캠프에 우연히 참가했다가 입당했다. 이씨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는 소통과 공감의 분위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중앙당의 대학생 조직인 ‘2030위원회’ 위원장인 권용태(27)씨는 “보수는 변화와 개혁을 무조건 거부한다는 통념을 깨고 싶다.”면서 “나이 지긋한 당 선배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정당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개혁당에서 활동하다가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으로 활약했던 김선진(29·서울시립대 4학년)씨는 기간당원제의 실패를 무척 안타까워한다. ●“당원혁명 끝나지 않았다” 김씨는 “국회의원들이 개혁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기간당원제를 찬성하다가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돌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소선거구제가 중대선거구제로 바뀌고, 비례대표를 대폭 늘리면 동원당원이 아닌 기간당원들이 설 자리가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이 원활한 정당을 찾다가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던 서명숙(29)씨는 “기간당원제가 실패했지만 우리는 당내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런 문제의식은 당원들의 가슴속에 계속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보진영의 집권을 꿈꾼다” 2000년 창당과 동시에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명재석(28)씨는 당원이 주인인 민노당을 자랑스러워한다. 아직 소수정당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다수당이 되고 집권까지 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명씨는 “여전히 계파별 과두체제 형태인 중앙당의 개혁이 시급하다.”면서 “지역 모임도 주거지 기준을 고집하지 말고, 직장이나 관심 분야가 비슷한 소모임 형태로 개편해야 더 많은 대중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김희선(23·서울대 4학년)씨는 민노당과 비슷한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당에서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씨는 “과거 대학생들의 정치적 요구는 한총련과 같은 운동권 조직으로만 수렴됐지만 이젠 정당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사회당원의 이름으로 장애인, 비정규직, 여성 등 사회적인 이슈는 물론 학내의 세세한 문제까지 친구들과 토론하고 행동한다.”고 덧붙였다. 다음달 20일 초록당 창당을 준비중인 초록정치연대의 김경미(25)씨는 자동차를 갖지 않고도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 농업을 파산시키지 않아도 잘사는 나라를 꿈꾼다. 김씨는 “정치는 항상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했다.”면서 “내 삶을 변화시키는 작은 동력을 만들기 위해 녹색정치에 뛰어 들었다.”고 말했다. 이창구 유지혜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 “인물 아닌 정책 중심 재편 바람직” 전문가들은 한국 정당정치의 후진성이 여야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고 진단한다. 여론조사 방식을 도입하는 바람에 1인 1표의 등가성이 생명인 평등선거 원칙이 무너졌고, 보통·직접·비밀 선거의 원칙도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새로운 정당체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유럽식 계급(대중)정당이나 미국식 포괄정당 중 하나를 선택할 게 아니라 우리 정치 현실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면서 “인물 중심의 정당이 아니라 환경이나 평화와 같은 정책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소속 임종인 의원은 “당원의 뜻에 따라 후보가 결정되고, 당원들이 지지층을 확대시켜 나가며, 당원과 지지자의 힘으로 당선된 다음에는 전체 국민의 이익과 당원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대의민주주의 기본이 바로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열린우리당의 실패로 갈 곳을 잃은 중도개혁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서민적 진보정당이 출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경제학)는 “우파 헤게모니를 한나라당이 완벽하게 장악했기 때문에 이와 경쟁할 수 있는 튼튼한 중도개혁 정당이 나와야 하고, 민주노동당도 지금보다 더 대중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컨설팅업체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 역시 이념과 정책에 따른 정당 분화가 필요하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박 대표는 “지역구도가 약화됨에 따라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진보세력이 등장할 수 있다.”면서 “산업·외교·교육·조세·부동산·복지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싸고 정치세력이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인터넷 정당’을 주장하고 있는 김두수 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은 “사회 자체가 인터넷을 통해 재편되고, 인터넷이 기존 정당보다 더 강력한 정치적 의사 표출의 수단이 됐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면서 “후보 선출과 주요 정책결정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직접민주주의가 대폭 강화된 인터넷 정당이 조만간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한국정당 오욕의 역사 해방 이후 60년간 수많은 정당이 만들어지고 해체돼 왔지만 제대로 운영된 정당은 찾아보기 어렵다. 핵심 지지층을 확보하지 못한 채 표면적으로 ‘모든 국민’의 이익을 내세우는 포괄정당, 대중적 기반이 허약한 간부정당,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 목적으로 하는 선거전문 정당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시작부터 파행이었다. 미군정 법령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은 이 전 대통령이 하야하자 바로 스러졌다. 애초에 우리나라 법으로 정당을 만들지 못한 ‘정통성의 부재’도 문제지만, 정당이 정책이나 비전이 아니라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며 ‘무원칙한 인맥집단’으로 전락하는 전범(典範)이 된 게 더 큰 문제였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을 거치며 우리나라 정당은 ‘권력자 정당’의 면모를 띤다. 가장 수명이 길었던 민주공화당은 박 전 대통령이 5·16쿠데타 뒤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만들었다. 이를 해체한 전 전 대통령 역시 12·12와 5·17을 거치고 나서 1980년 민주정의당을 창당해 정권의 정통성을 도모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하고 나서도 구태를 벗지 못한다. 이 시기의 정당은 ‘1인 사당(私黨)’,‘지역주의 정당’으로 규정된다.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창당한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자유민주연합 등이 그렇다. 2000년 탄생한 민주노동당,3년 뒤 만들어진 열린우리당은 우리나라에 정당법이 도입된 지 40년 만에 처음으로 근대적 정당의 형식과 내용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당원이 당비를 내고, 상향식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지구당을 법적으로 폐지해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을 만들려는 것이 두 정당의 목표였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기간당원제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정당 개혁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손혁재 경기대 정치교육원장은 “우리나라 정당은 대중정당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간부정당”이라며 “아직은 당원 문화가 뿌리 내리지 못해 유권자나 당원이 시대 요구에 맞는 의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스캔들과 게이트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스캔들과 게이트

    1997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은 신한국당 대표최고위원에 이회창 전 국무총리를 전격 발탁했다. 이 전 총리는 1994년 김 대통령과 대립하다 총리직을 그만뒀기에 그의 기용은 예상 밖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 역시 껄끄러웠다. 이 전 총리가 대표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그해 신한국당 대통령후보를 거머쥔 것은 주지의 사실. 김 대통령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김 대통령이 ‘눈물을 머금고’ 이 전 총리에게 신한국당 선장 자리를 내준 것은 바로 그의 클린 이미지 때문이었다. 이 전 총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대쪽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가 꽤 높았다. 결국 김 대통령은 이회창의 클린 이미지로 정국을 돌파하려 했던 것이다. 취임 초의 높은 지지율은 온데간데없고 ‘식물 대통령’이란 비아냥마저 듣던 김 대통령이었기에 국면 전환이 절실했다. 이렇게 만든 원인 제공자는 김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권력형 비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김현철 게이트’는 임기 말의 문민정부를 벌집 쑤신 듯 초토화시켰다. 날이 새면 터져 나오는 국정 농단 사례와 불법자금 수수로 김 대통령은 그로기 상태였다. 김현철 게이트로 자신이 의도했던 후계자 문제 역시 포기해야만 했던 김 대통령이다. 국민의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차남(홍업)과 3남(홍걸)의 잇단 구속에 따른 ‘아들 게이트’ ‘김홍업 게이트’로 일찌감치 레임덕을 초래했다. 국민의 정부 때는 이것 말고도 ‘굿모닝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등등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권력형 비리사건이 줄을 이었다. 게이트 천국이란 유행어까지 등장했다. 이런 게이트에는 대개 대통령의 아들이나 청와대 핵심인사를 비롯한 권력 실세, 정치권 유력 인사, 그리고 천문학적 액수의 불법 로비 자금이 단골 메뉴다. 요즘 신정아 사건으로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연일 새로운 뉴스 거리가 터져 나온다. 범여권인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 흥행에도 찬물을 끼얹는 등 대선 구도마저 흔들 조짐이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신정아 게이트’로 확대될 것인가. 아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신정아 스캔들’에 머물고 있는 수준이다. 여느 게이트처럼 다수의 권력층이 개입된 대형 비리나 불법 로비 자금이 건네진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시중에 권력층과 관련된 적잖은 유언비어가 나도는 것도 간단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정윤재 전 청와대 비서관의 청탁 의혹 사건 역시 폭발력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문제는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층의 자세다.‘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란 말이 있다. 자꾸 감추려다 보면 발목을 잡히게 되고,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막게 된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처를 해야 하는데, 청와대는 그렇지 못했다.”면서 “노무현 정부는 국민의 정부 때 초기 대응을 잘못하는 바람에 6개월가량 이어진 옷로비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참여정부는 도덕성만큼은 전임 정권보다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오만으로 비쳐진다. 이번에도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지나친 자신감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 레임덕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 밝히는 자세가 절실한 때다. jthan@seoul.co.kr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민노당의 희망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민노당의 희망

    마이너리그의 희망을 봤다. 프로야구가 아니라 민주노동당 얘기다. 대통령후보 선출 게임에서 민주노동당은 아무래도 한나라당이나 대통합민주신당에 비해 마이너리그다. 당 지지도나 국민들의 관심도, 예비후보들의 지지율 등을 종합적으로 봐도 그렇다. 3부 리그라는 촌평까지 듣는 민노당이지만 의미있는 변화의 몸부림은 일고 있었다. 당내 최대 정파인 자주파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은 권영길 후보의 손쉬운 승리로 막을 내릴 것 같았던 대선 후보 경선이 권 후보와 심상정 후보의 결선투표로 최종 승자가 가려지게 된 것은 그런 변화의 움직임을 방증한다.‘대세론’으로 밀어붙인 권 후보가 무난하게 1차에서 승리, 대선전에 내리 세 번 출마하는 진기록을 세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권 후보는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확실한 3등으로 여겼던 심 후보가 막판 대단한 뒷심으로 2위까지 치고 올라가 권 후보와 결승전을 치르게 된 것. 심 후보의 말대로 ‘심바람’이 권 후보의 대세론을 막은 셈이다. 최종 승자가 누가 되든, 민노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2차 투표까지 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아닐까. 창당 이래 첫 경선이란 점도 그렇다. 민노당의 결선 투표는 양김(김영삼·김대중)이 처음 맞붙은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연상케 한다. 그 때도 1차에서 과반을 득표한 후보가 없어 2차 결선투표를 했었다. 김대중 후보가 1차 2위를 딛고 결선투표에서 1차 1위였던 김영삼 후보를 제치고 뒤집기 드라마를 연출했는데, 민노당의 결선 투표 역시 그런 극적 승부를 보여줄 것인지, 아니면 권 후보가 대세론을 더욱 밀어붙여 1주일 늦춰진 월계관을 찾아갈 것인지, 또 권 후보가 승리하더라도 그의 득표율은 얼마가 될 것인지 관심은 커져가고 있다. 이런 관심 자체가 민노당으로선 고무적인 일이다. 민노당은 정체성이 가장 뛰어난 정당이다. 민노당의 당원들에게는 ‘골수’ ‘진성’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들어 대중의 지지나 관심이 점차 엷어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른바 민심과의 괴리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이를 철학과 과학으로 설명한다. 김 교수는 “민노당은 제 정당 가운데 철학만큼은 투철하다. 그러나 과학적 접근은 갈수록 뒤처지고 있다. 민노당으로선 실용적 자세를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의 ‘정체성’은 뛰어나지만, 민심을 꿰뚫어 보는 능력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당이 정체돼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당이 지나치게 민주노총화(化)돼 있는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민노당은 2004년 총선 때 13%를 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계속 하락세다. 요즘은 당 지지율이 10%를 넘기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민노당이 실용주의 모드를 적극 수용한다면 보수 정당의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고, 정국 운영의 캐스팅 보트 역할도 가능하다. 마의 20% 지지율도 불가능한 얘기만은 아니다. ‘심바람’ 현상은 당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아직 강풍은 아니지만. 정체성이 뛰어나다고 해도 ‘고인 물’이 돼서는 안 된다. 바깥에서 입출입이 자유로우면서도 정체성을 지켜 나갈 때 당의 생명력은 더 커질 것이다. 정체성을 승화 발전시키면서 그동안 왜 민심과 따로 놀았는지, 그런 민심을 끌어올 방안은 무엇인지 민노당은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때다.15일 결선투표 결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jthan@seoul.co.kr
  • [이용원 칼럼]차라리 레임덕이 낫다/수석논설위원

    [이용원 칼럼]차라리 레임덕이 낫다/수석논설위원

    임기를 다섯달 남짓밖에 남기지 않고도 거칠 것이 없던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에 잠시 제동이 걸리는 듯했다. 호주에서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마치고 지난 10일 귀국한 노 대통령이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정아씨의 부적절한 관계를 보고받자마자 변씨를 잘랐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소식에 많은 국민이 대통령의 ‘정식 사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언론이 ‘변양균-신정아 연결고리’에 의혹을 제기하자 그는 “깜도 안 되는 의혹”에 “소설 같은 느낌이 든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바 있다. 불과 열흘 어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긴급 소집한 청와대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여전히 당당했다. 노 대통령은 변양균 건이 “난감하고 황당”하다면서도 국민에게 입장을 표명하는 일은 검찰 수사 결과가 확정된 뒤로 미루었다. 정윤재 건에 대해서도 “아주 부적절한 행위”였지만 “검찰 수사 결과 불법행위가 있으면 ‘측근 비리’라고 이름 붙여도 변명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부적절한 행위’이지만 수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아직 불법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당장 사과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측근 비리’라 불러도 된다고 허락했으니, 언론으로서는 뒷날 시빗거리가 될 뻔한 큰 짐을 하나 던 셈이다. 노 대통령은 이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손학규 대통합신당 경선주자 등을 비판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을 보면 뒤끝이 늘 좋지 않았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 모두가 극심한 레임덕을 겪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외형상 아직 레임덕이 없다. 제1야당 후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하고, 범여권 주자들에게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직설적으로 비난하며, 헌법과 선거법에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리는, 그리고 언론에 선전포고를 하고 무차별 공격하는 무서운 대통령에게 어찌 레임덕의 그림자라도 어른거리겠는가. 문제는 레임덕이 없다는 말이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는 데 있다. 노 대통령이 레임덕을 거부한 채 전방위로 정치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정작 “난감하고 황당”한 사람들은 국민이다. 대선은 코 앞에 있는데, 노 대통령은 어차피 후보로 나서지도 못할 텐데,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이명박 후보의 상대역을 자처한다. 그 탓에 범여권 대선주자라는 이들의 존재감은 희미하기만 하다. 혹시 노 대통령의 속셈은, 자신이 지목하는 후계자가 대선에 나가지 못할 바에야 한나라당에 져도 상관없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임기가 정해져 있고 연임이 제한된, 정상적인 대통령중심제 아래서 레임덕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것은 마치 새 생명을 싹 틔울 봄을 맞이하고자 대지가 한겨울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정치학자들은 레임덕을 피하려 들지 말고 잘 관리하라고 충고한다. 요즘 노 대통령의 행태를 지켜보노라면 아무나 쪼으려고 덤벼드는 싸움닭이나, 시도 때도 없이 꽥꽥거리고 따라다니는 거위보다는 차라리 길을 잃고 뒤뚱거리는 오리, 곧 레임덕이 낫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나마 갈등과 혼란을 덜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께 간곡히 부탁드린다. 대통령님, 이제는 제발 국민을 편하게 놓아두시지요.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변양균·신정아 파문 확산] 변씨 청불회장 된뒤 사찰보조금↑

    [변양균·신정아 파문 확산] 변씨 청불회장 된뒤 사찰보조금↑

    청와대 불자 모임인 ‘청불회’가 국민의 정부 때 활동이 주춤했으나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회장을 맡으면서 활발하게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불교계 관계자는 12일 “변 전 실장은 불교와 정부를 잇는 가교였다.”면서 “불교 관련 예산이 증액되도록 도움을 많이 준 그가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되자 불교계에선 굉장히 껄끄럽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김대중 정권 말기부터 청불회는 세력이 계속 약해졌는데 변 전 실장이 청불회장이 되고 나서 청불회는 물론 정부와 불교계의 관계도 활성화됐다.”고 설명했다. 변 전 실장은 지난해 7월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발탁돼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청불회 회장을 맡던 서주석 안보수석이 사임하고 나서 지난해 11월 바통을 이어 청불회 회장을 맡았다. 이후 불교계의 의견수렴 창구 역할을 해왔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변 전 실장이 청불회 회장이 되고 난 이후 불교계에 예산이 많이 배정된 점을 들어 변 전 실장과 급격한 예산 증액의 상관관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화관광부 등에 따르면 전통사찰 보존정비사업에 쓰인 국고보조금은 올해 89억 9200만원으로 지난해의 60억 5200만원에 비해 48.6%나 늘어났다. 이에 대해 문화부 종무실장은 “문화부에서는 전년과 동일한 액수로 예산을 올렸는데 국회 예결위 심의 과정에서 여야 합의로 증액됐다.”며 변 전 실장과 예산 증액은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예산 증액 당시 국회 예결위 여당 간사였던 이종걸 의원은 “불교 관련 예산 증액이 이뤄진 것은 무슨 명목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불교계가 특별하게 추가로 요구해서 예산을 확정지은 것은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변 전 실장과 관련돼 예산을 처리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청불회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6년 결성돼 박세일 당시 사회복지수석이 회장을 맡았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조윤제 전 경제보좌관이 회장을 맡다가 그가 영국 대사로 자리를 옮긴 이후 한동안 공석 상태였다. 김병준 전 정책실장이 지난해 4월 제9대 청불회장에 취임했지만 표절 논란 등에 휩싸여 물러나면서 지난해 6월 서주석 전 안보수석이 제10대 청불회장이 됐다. 국민의 정부 시절엔 청불회장을 맡았던 한 인사가 모 재벌그룹에 협찬을 요청했다가 사법처리되면서 청불회 활동이 급속히 위축됐다. 구혜영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상) 한계 부딪친 당원제도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상) 한계 부딪친 당원제도

    ■ 열린우리, 실패한 혁명 대통합민주신당은 당원 투표가 아닌 국민경선으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후보 선출 방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여론조사 방식’으로 실시된 예비 경선(컷 오프)은 ‘유령선거’ 논란만 남겼다. 원내 최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을 승계한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이 원칙없이 치러지는 까닭은 후보가 난립했고, 당원들이 들러리로 전락했다는 데 있다. 특히 옛 열린우리당은 집권당으로는 처음으로 당비를 납부하는 기간당원이 후보 선출 등 당내 중요 의사결정권을 갖는 ‘당원 혁명’을 시도했었기 때문에 대통합민주신당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 ●어느 기간당원의 회한 열린우리당 대의원들이 당 해체를 결의하던 지난달 18일. 꼬박꼬박 당비를 내며 기간당원으로 활동했던 김성현(42)씨는 눈물을 흘렸다. 정당을 통해 ‘생활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꿈이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경기도 광명에 있는 교회의 목사다.“목사들은 예전부터 정치에 관여를 많이 했어요.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여서 출마자들이 목사를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이죠.”김씨는 이런 음성적인 방식보다는 공개적인 참여를 택했다.“신도들과 지역 문제를 토론하고, 우리들의 정치적인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당이 필요했습니다. 상향식 민주주의를 표방한 열린우리당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기간당원제는 도입과 동시에 퇴색했다. 특히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광명시의 기간당원이 하루 밤새 500명씩 불어나는 기현상을 목격했다. 김씨는 “지방선거 후보들이 당비를 대납해 주면서 자기편 기간당원을 대거 확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기간당원제는 항상 권력투쟁의 원흉으로 꼽혔고, 아홉 차례의 당헌·당규 개정을 거치면서 계속 후퇴하다가 결국 폐기처분됐다.”면서 “기간당원들은 특정 후보의 지지자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말했다. ●‘당원 혁명’ 왜 실패했나 김씨의 말대로 창당 당시 ‘권리행사(전당대회) 2개월 전에 입당해 월 2000원 이상의 당비를 6개월 이상 납부한 자’로 정해졌던 기간당원제는 단 한 차례도 적용되지 못했다. 희망제작소 유시주 객원연구위원은 기간당원제 실패를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탓이라고 지적했다. 유 위원은 “차기 대권을 노리는 당의장들이 지지자들을 당원에 대거 포함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기간당원제를 흔들었다.”고 말했다. 공직후보 선출과 당내 요직 선출에서 기간당원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조직관리에 위기를 느낀 당의장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기간당원제 요건을 완화했다.‘선거꾼’ 활동에 익숙한 과거 당원들이 대거 들어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기간당원들과 ‘동원’된 당원들은 해당 지역에서 사사건건 충돌했다. 실제로 2006년 2·18 전당대회와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3개월새 기간당원이 30만명이나 늘어 ‘종이당원’,‘대납당원’ 논란이 일었다.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던 김희숙(36·여)씨는 “수평적인 정치 네트워크를 실현하기 위해 당 활동에 적극 나섰지만 결국 실패했다.”면서 “열린우리당이 총선 직전 급조됐고, 일거에 최대 의석을 차지해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소속의 임종인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는 노사모 회원들이 기간당원의 주축이었다.”면서 “특정 개인을 위한 계파 성격이 강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했다. 기간당원제 사수를 끝까지 주장했던 김두수(45) 전 중앙위원은 “유럽식 대중(계급)정당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 근본적인 한계였다.”면서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고, 참여한 만큼 발언권이 주어지는 개방·참여·공유의 ‘웹2.0’식 정당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구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 한나라, 당심의 분노 경남 합천에 사는 임모씨(57)씨는 15년 전인 1992년 민자당에 입당했다. 돈을 받고 당에 가입하는 게 자연스럽던 그 시절, 임씨는 돈을 내고 당원이 됐다. 그만큼 김영삼 총재의 비전과 철학을 지지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다시 한나라당으로 바뀌는 동안 정당에 대한 임씨의 지지는 변함이 없었다. 매월 1만원씩 통장에서 당비가 빠져나갔지만 아깝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씨의 생각은 요즘 들어 바뀌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당에 반영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임씨는 “당 소식은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접한다. 옛날에는 가끔 중앙당에서 전화해서 내 의견을 묻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다.”고 했다. 이렇듯 평당원의 민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은 130만 당원을 거느린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당원들은 대부분 충성도가 높고 오랫동안 당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은 더 큰 파급력을 갖는다. 인천 계양을 당원협의회 소속 당원인 이모(52)씨는 “옛날부터 당원은 선거 때 표를 모으는 수단이거나 당 행사에 동원되는 인력일 뿐이었다.”고 씁쓸해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당원도 “당이 좀더 민생정치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는데, 이런 의견을 당에 전달할 통로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대선 경선을 거치면서 일부 당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당심(黨心)보다 일반 국민 여론조사의 결과가 경선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판단에서다. 불만은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했던 당원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경선 불복 소송을 낸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대표인 정광용씨는 “선거법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경선을 여론조사로 대체할 수 있다고 했는데, 투표도 하고 여론조사도 하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시절부터 당원이었다는 김모(67)씨도 “당원 투표로도 충분한데 왜 여론조사까지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당 교육도 꼬박꼬박 받고 당이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왜 당원의 의견을 무시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문가들은 한나라당이 이번 경선을 통해 드러난 평당원들의 불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학과 교수는 “박사모와 같은 자발적인 지지자의 출현은 고무적인 현상”이라면서 “이들을 책임있는 당원으로 포섭해 자발적 참여자가 주인되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민노, 우물안 내분 국내 유일의 계급정당인 민주노동당은 2000년 창당 이후 줄곧 진성당원제를 유지하고 있다. 매월 당비 1만원(저소득층은 5000원)을 내는 진성당원만이 공직후보 선출권을 갖는다. 옛 열린우리당이 진성당원제와 유사한 기간당원제를 도입했고, 한나라당도 책임당원제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민노당 역시 이번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당원의 역할을 두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진성당원제를 엄격하게 유지하다 보니 대중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주장과 당 정체성을 위해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다 결국 정파선거로 이어졌다. 진성당원제를 접점으로 해묵은 노선투쟁의 골이 더 깊어진 셈이다. 다수파인 자주파(NL)는 국민들에게도 경선 참여의 길을 열어 놓아야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다며 국민참여경선을 주장했다. 하지만 평등파(PD)의 반대로 무산됐다.NL은 권영길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정파적 투표를 감행했고, 노회찬 후보를 중심으로 한 PD는 이를 집요하게 비판하며 세를 규합해 나갔다. 인천시당 김응호 사무처장은 “지지자 획득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면서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면 외연확대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당 마포구위원회 정경섭 위원장은 “국민참여경선을 했다면 선거인단 모집에 당의 모든 정치활동이 매몰됐고,‘종이당원’ 논란도 불거졌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평당원인 백준(45)씨는 “국민참여경선을 무산시킨 PD, 정파선거를 한 NL 모두 비판받아야 한다.”면서 “지역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중앙당만 여전히 주도권 다툼에 사로잡힌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는 “국민참여경선 논란과 정파선거는 극한 대립을 낳았다.”면서 “당 발전의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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