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격조있는 프로 외교를/황성기 논설위원
노무현 대통령은 5년간 27차례 55개국을 다니며 정상 외교를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14차례 33개국, 김대중 대통령이 24차례 35개국을 방문한 것에 비하면 참여정부는 외교에 꽤나 공을 들였다.
그러나 134회의 정상 외교 횟수만큼 노 대통령이 성과를 올렸느냐 하면 성적표는 별로다. 미국과 막판에 자유무역협정(FTA)에 합의해 협력의 끈을 이었으나 취임 초부터 시종 살얼음판을 걸었다. 아시아를 무시한 고이즈미 총리라는 독특한 상대가 있긴 했지만 일본과도 최악의 관계였다. 얻을 것은 없더라도 할 말은 하고, 각을 세우는 게 외교인 듯한 5년이었다.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세워 미·일의 의심을 샀다면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라도 좋았어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의 중국과는 무덤덤한 사이다. 딱히 친분이 두텁다고 내세울 정상도 없다. 양자회담만 일본 11차례, 미국 8차례, 러시아 6차례에 중국은 후진타오 주석, 원자바오 총리를 더하면 18차례나 가졌는데도 우리가 기억하는 이렇다 할 정상 간 개인적 우의에 관한 비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의 마지막 정상외교가 된 지난해 11월의 싱가포르의 아세안+3 정상회의. 노 대통령, 원자바오 총리,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한·중·일 회담을 가진 자리였다. 회담이 끝나갈 즈음, 후쿠다 총리가 유엔 개혁에 관한 화제를 꺼냈다. 일본이 관심을 갖는 유엔 개혁이라면 상임이사국 진입일 것이다. 회의를 주재한 노 대통령은 다음 기회에 얘기하자고 일축했다. 회담장이 싸늘해졌다. 원 총리가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소방수로 나선다. 일본의 유엔 공헌을 지지한다며 두루뭉술하게 후쿠다 총리를 치켜세웠다. 상임이사국 진입과 관련해 찬반 어느 입장도 아닌 립서비스였다. 노 대통령의 공세가 이어진다. 제국주의 국가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유엔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하며 지금도 유엔은 제국주의 국가의 이해에 따라 움직인다는 비판론을 개진한다. 덕담을 하고 끝내야 할 회의 말미에 예기치 않던 돌발상황이었다.
이어 열린 한·일 양자회담. 한방 먹은 후쿠다 총리 측이 일본인 납치 팸플릿을 정상을 비롯한 참석자에게 돌렸다. 사전에 협의가 없었던 돌출행동이었다. 외교적으로는 실례에 해당하는 이 일로 우리 측이 일본 측에 항의했고, 결국 양측은 없었던 일로 덮었다. 회담을 지켜본 외교관은 “한·중·일과 한·일 외교의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당시의 일화를 한탄조로 들려준다.
외교란 게 충돌하는 국가 간의 이해를 조정하는 일이라서 정상들이 인간적 관계로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피부로 느끼는 신뢰, 친밀감은 양자 혹은 다자회담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은 둘도 없는 반면교사이다. 자주 외교라고 하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어색해 보이는 정상끼리의 장면을 지난 5년간 숱하게 봐온 우리 국민들이다.
참여정부가 2차 남북정상회담 후 집착한 4자 종전선언도 그렇다. 유효한 어젠다이긴 하지만 동북아 균형자론 못지않게 주변국을 곤혹스럽게 했다.“종전선언이 대통령의 신념이라기보다 주위에서 부추긴 것 같다.”는, 대통령을 잘 아는 고위 외교관의 우려는 외교의 아마추어리즘을 지적했을 것이다.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는 5년이 끝나고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미지의 외교’의 막이 오른다. 실용이든 무엇이든 격조 있는 프로의 외교를 보여줬으면 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