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김시덕
    2025-07-22
    검색기록 지우기
  • 자사고
    2025-07-2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8
  • 관악문화재단 1주년…주민 응원사업으로 주민 삶에 더욱 가까이

    관악문화재단 1주년…주민 응원사업으로 주민 삶에 더욱 가까이

    서울 관악문화재단은 출범 1주년을 맞아 코로나19로 지친 시민을 문화와 예술로 위로하고, 주민의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시민 응원사업을 확충하겠다고 14일 밝혔다.관악문화재단은 박준희 관악구청장의 민선 7기 공약사항으로 지난해 8월 13일 출범했다. 재단은 출범 1주년을 기념해 8월 한 달간 다양한 공연과 포럼 등 문화예술프로그램을 릴레이 형태로 선보일 예정이다. 앞서 지난 5일에는 지역연계형 청년예술활동 지원사업의 하나로 청년예술인의 창작활동 폭을 넓혀줄 ‘지역 이해 워크숍’을 진행했다. ‘우리가 사는 도시 관악’을 주제로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와 함께하는 강의와 지역 탐방이 진행됐다. 오랫동안 도서관 이용을 기다렸을 주민을 위해 관악통합도서관 중 일부 시설을 순차적으로 재개관하고, 대출 권수를 한시적으로 5권에서 8권으로 확대 운영한다. 재단은 지난 한 해 동안 다수의 문화예술 분야 공모 사업에서 약 11억원의 외부재원을 유치한 바 있다. 지원된 예산으로 지난 6월부터 7개월간 2020 지역연계형 청년예술활동 지원사업에 최종 선정된 5인의 청년예술인의 개인 창작활동비(매월 70만원 지급)와 프로젝트 비(1500만원)를 지원한다. 재단은 관악구만의 스토리 및 문화콘텐츠 발굴을 위해 예술인(단체)에게 총 5000만원의 창작지원금을 지원하는 ‘관악 우수창작 문화콘텐츠 지원사업’을 처음으로 진행한다. ‘강감찬장군’ 설화를 바탕으로 한 어린이뮤지컬, ‘신림동’고시원을 배경의 낭독극과 관악산을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는 오디오 명상 가이드 등을 운영하는 총 4개 팀을 선정했다. 차민태 관악문화재단 대표이사는“지난 1년간 관악구민의 기대와 지지에 힘입어 재단이 안정적으로 관악에 정착하고, 지역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며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관악구민을 위해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예술을 통해 위로와 기쁨을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과 성남의 경계에서 담배에 대해 생각하다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과 성남의 경계에서 담배에 대해 생각하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맞닿는 경계 지역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잘 보지 못하는 특수 시설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각 자치단체가 자기 지역의 중심부에 두지 못하는 시설들을 지역의 경계에 몰아넣기 때문이다. 군사시설, 상하수도시설, 폐기물처리장, 변압소나 저유소 같은 에너지 관련 시설, 각종 터미널과 버스·택시 차고 그리고 빈민촌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방자치단체가 나아가 한국이 무엇을 혐오하는가,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무엇을 시민들로부터 감추려 하는가를 보려면 경계지를 걸으면 된다. 경계 지역에는 한국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 가운데 서울 송파구와 경기 성남시 수정구가 만나는 지점을 알아보자. 이 경계 지역의 남쪽 성남 방면에는 복정정수장과 성남시수질복원센터, 그리고 서울 중심부의 빈민 수십만명을 트럭에 실어 보낸 성남 원도심 옛 광주대단지가 있다. 북쪽 서울 방면에는 송파의 발전소와 복합물류센터, 그리고 청계천을 복원한다는 명목으로 몰아낸 상인들을 수용한 가든파이브가 있다. 서울과 성남의 각종 특수 시설이 밀집한 경계 지역을 잇는 다리의 이름은 복정교다. 복정교의 서북쪽 탄천을 사이에 두고 성남시를 마주하는 서울 송파구의 남쪽 끝에는 ‘화훼마을’이라 불리는 빈민촌이 있다. 1980년대 초에 잠실 아파트 단지를 만들 때 추방당한 철거민들이 재정착한 마을이라 하는 이곳은 이웃한 옛 광주대단지의 과거를 오늘날에 재현한 것 같은 곳이다. 이 마을은 복정역 교차로에 인접해 있지만, 아마도 시에서 일반 시민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 펜스를 치는 바람에 그 존재를 잘 알아채기 어렵다. 이처럼 화훼마을이 일반 시민들로부터 분리돼 있다 보니 마을 바로 옆의 장지동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 일반 시민들 가운데 흡연자들이 펜스 너머로 담배꽁초를 버리는 일이 자주 있는 것 같다. 버스 정류장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펜스 출입구에는 이런 경고문이 쓰여 있다. “이곳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소변은 절대 할 수 없어며 담배꽁초도 버려서는 안대는 곳입니다. 주민일동”(표기는 원문대로) 비단 화훼마을뿐 아니라 대서울을 답사하다 보면 흡연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마을 입구와 집 담벼락에서 자주 확인한다. 흡연자들은 자신들이 담배를 구입하면서 세금을 냈기 때문에 타인의 건강과 안전을 해쳐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은 모두가 모여 있는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걸어다니면서 담배를 피우고 남의 집과 마을에 담배꽁초를 버린다. 사회에 대한 일부 흡연자들의 악의는 시민들이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대서울과 한국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다. 서울과 성남 사이의 경계 지점에서는 타인에 대한 흡연자들의 악의적인 무감각함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주는 피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 개편한 개콘… 불편한 개그

    개편한 개콘… 불편한 개그

    개콘 전설들 귀환 반짝 웃음 선사했지만 전성기 코너 부활… 기존 개그 재현 그쳐 풍자 위트 무뎌진 과거로의 회귀 한계도 “최장수 프로다운 과감한 틀 깨기 절실”20주년을 맞은 KBS2 개그콘서트(개콘)의 부진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최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는 명예는 상당 부분 전성기의 영광에 기댔을 뿐 예전 같은 애청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개콘이 지상파에 남은 유일한 공개코미디 프로그램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인 개그맨의 산실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과감히 틀을 깨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개콘은 지난 5월 1000회 특집에서 잠깐의 희망을 맛봤다. 박준형, 정종철, 김시덕, 김병만, 이수근, 강유미, 유세윤, 장동민, 김영희, 정태호 등 개콘 출신 개그맨들이 총출동해 과거의 대표 코너를 다시 선보인 방송에서 옛 추억을 그리워하던 시청자들이 다시 리모컨을 들었다. 덕분에 시청률은 8%대로 반짝 솟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특집 방송이 끝나자 시청률은 5~6%대로 돌아갔다. 제작진은 고심 끝에 2주간 휴방과 개편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며 대대적인 정비를 예고했다. 지난 7월에는 기자간담회를 열고 레전드 개그맨들의 컴백, 개그맨이 아닌 유명인이 등장하는 ‘셀럽 코너’, 한동안 뜸했던 시사 풍자 개그 신설 등 개편 방향을 설명했다. 변화를 통해 시청자의 웃음을 다시 이끌어내겠다는 취지였다. 지난달 돌아온 개콘에서 가장 눈에 띈 변화 중 하나는 박준형의 컴백이다. 오프닝 코너 ‘전설을 먹칠하다 불후의 분장’에서 박성호, 김대희 등과 함께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자아내는 분장을 선보였다. 또 ‘2019 생활사투리’로 전성기 코너를 그대로 부활시켰다. 인기 코너를 고스란히 재현해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보장했지만, 과거로의 회귀는 개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 측면도 있다.시사 개그의 경우 날카롭지 못한 풍자가 아쉬움을 남겼다. 개편 직후 선보인 ‘국제유치원’은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 나라를 대표하는 어린이들이 수업을 받는 코너다. 북한 어린이는 끝말잇기를 할 때 핵과 관련된 단어를 반복하고 미국 어린이는 여기에 발끈해 싸운다. 일본 어린이는 연신 “사과 싫다”고 떼를 쓰고, 한국 어린이는 “아, 배 싫어”라며 일본을 비꼰다. 국민감정에 편승해 호응을 유도할 뿐 곱씹어볼 만한 풍자나 위트를 찾아보기 힘들다. 매회 다른 초대 손님이 출연하는 ‘쇼미더아재’는 ‘아재 개그’가 퍼레이드처럼 이어지는 코너다. “청바지가 가장 많은 연예인은”이라는 물음에 “소유진”이라고 정답을 말하는 식의 진행이 반복되는데, 개그맨도 살리기 힘들 ‘아재 개그’를 비개그맨 출연자들이 하는 데서 어떤 웃음을 노린 건지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다. 개콘의 진짜 위기는 젊은층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졌다는 데 있다. 여전히 습관처럼 보는 시청자가 있는 50대 이상에서는 5% 이상의 시청률을 보이지만 10대와 20대 시청률은 1%까지 추락했다. 온라인 클립 영상 조회수도 저조하다. 코너 몇 개를 바꾼 기존 개그의 반복으로는 개콘을 부활시킬 수 없다는 지적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원래 개콘은 젊은 세대의 감각에 바탕을 둔 웃음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기성세대를 위한 개그에 의존하게 됐다”면서 “시청률을 의식하지 말고 새로운 개그를 하지 않는 이상 사태가 악화될 수밖에 없다. 공개 코미디 형식을 벗어나 구성과 형식의 다양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개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할 때라는 분석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시청자 선호의 변화를 진단했다. 정 평론가는 “유튜브에서는 자기만의 콘텐츠에 개그를 접목한 영상이 인기를 끈다”면서 과거 김병만의 코너 ‘달인’을 언급했다. “단순히 웃기는 기술로 콩트 코미디를 연기하는 방식으로는 시청자를 사로잡기 어려워졌다”는 그는 “무대 개그라는 작은 틀 안에서 변화를 줄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개그맨을 활용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폭넓게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인가, 한양역사박물관인가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인가, 한양역사박물관인가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지난 7월 19일부터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산하기관인 동대문역사관에서는 6월 11일부터 ‘도성의 물길’ 전시가 열리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성’은, 흔히 ‘사대문 안’이라고도 불리는 ‘한양 도성’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이 8월 14일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세 개의 전시 가운데 두 개가 조선시대의 수도였던 한양에 대한 것이다. 이번에 북촌에 대한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또 사대문 안인가’라고 생각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이라면 서울시 전체를 아우르는 박물관이어야 하지만, 이제까지 이 기관은 사대문 안과 넓은 의미의 한양을 가리키는 도성 바깥 10리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에 대한 전시를 주로 해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한양은 한강 북쪽 ‘강북’에 자리했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한강 남쪽 여의도만 간신히 성저십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근대 시기인 1936년에는 영등포 일대가 경성에 편입되면서 서울이 오늘날과 같이 한강을 끼고 남북으로 펼쳐진 형태를 이루게 되었고, 현대 시기인 1963년에는 오늘날의 강남 3구를 비롯한 그 바깥 지역이 모두 서울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 한양의 인구는 20여 만명으로 추정되는 반면 현재 서울시의 인구는 1000만명에 달한다. 이렇듯 서울은 조선시대 한양과는 매우 다른 도시이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지명을 붙인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해온 전시와 출판은 달라진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기 어렵다. 우선, 서울역사박물관와 그 산하기관인 경희궁?경교장?백인제가옥?한양도성박물관?동대문역사관?청계천박물관?돈의문전시관?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모두 사대문 안팎에 자리하고 있다. 근현대 서울의 삼대 도심권인 강북 도심?영등포?강남 가운데 강북 도심에만 ‘서울’역사박물관이 몰려 있는 것이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인지, 아니면 현대 서울의 근원은 오로지 조선시대 한양에만 있다는 ‘조선주의’ 때문인지, 전시와 도서 발간도 한양 도성 안팎이 주된 대상이 되고 있다. 2015~2019년에 서울역사박물관이 개최한 전시 가운데 한양도성?성저십리 안쪽을 대상으로 한 것은 34개, 성저십리 바깥을 대상으로 한 것은 한강?잠실?북서울?가리봉오거리의 4개다. 발간 도서 역시 34권 대 11권으로 그 차이가 뚜렷하다. 지난 5년간의 서울역사박물관 전시?발간도서 목록은 필자의 홈페이지(hermod.egloos.com)에 정리해 두었으니, 이 수치가 의심스러우신 분은 직접 확인하면 되겠다. 이리하여 필자는 의문을 품는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은 한양역사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는 게 맞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서울은 조선시대 한양과는 질적으로 다른 도시다. 오늘날 서울 시민의 대부분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 바깥에 살고 있다. 서울시의 공식 박물관은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여 연구?전시 범위를 적극적으로 넓혀야 할 것이다.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신문마을 비석’, 비석들의 엇갈리는 운명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신문마을 비석’, 비석들의 엇갈리는 운명

    서울 강북구 미아동을 며칠 전 답사했다.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서 ‘미아동 탐사’라는 뜻의 ‘explore.in.mia’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이 올린 ‘서울신문마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을 보았기 때문이다. 1965년에 서울 경기 일대에 대홍수가 일어나서 이재민이 발생하자 서울신문사에서 성금을 모아 이 지역에 집단주택을 건설했음을 기념하는 내용이었다. 의연금을 모금해 준 서울신문사의 이름을 따서 이 뉴타운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새 마을 주변도 이제는 헌 마을 취급을 받아 재개발이 비석 근처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비석 남쪽 지역에는 1965년 당시에 지은 집단주택단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근처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은 이 비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대서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마을 사람을 기리는 비석을 종종 만난다. 이런 비석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장군이나 권세 있던 성리학자들을 기리는 비석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지만, 실제로 대서울을 걸으면서 건물 옆이나 나무그늘 아래를 찬찬히 살피면 뜻밖에 자주 만나게 된다. 용산구 용산2가동주민센터 옆에 세워진 ‘동장 이봉천 기적비’는 북한에서 탈출해 남한으로 온 사람들이 정착한 해방촌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는 데 진력한 이봉천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용산구 보광동의 골목에는 ‘김점례 여사 배봉출 선생 공덕비’가 서 있다. 이 일대에서 큰무당으로 활동하던 김점례 선생 부부가 전 재산을 동네에 기증하고 노인정을 세워 준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모르긴 몰라도 한반도 역사에서 이렇게 여성 무당을 기리는 비석은 거의 없지 싶다. 한편 경기 부천시 소사본동의 소새울어울마당 앞에는, 이 위치에 어린이들의 공부방 자리를 기증한 동네 주민을 기리는 ‘심원 서경열 선생 공덕비’가 서 있다. 이런 비석들과는 달리 그 존재가 잊혀진 비석이 서울 영등포구에 있다. 도림고가도로의 남쪽 그늘 한구석에 서 있는 ‘차동식 선생 시혜비’다. 이 지역에 마을이 있던 시절, 차동식 선생이 동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부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을 기념하고자 도림2동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하지만 이 놀이터가 조성됐음을 전하는 1981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도림고가차도 아래 어린이놀이터 설치’에는 영등포구청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돼 있고 차동식이라는 이름은 지워져 있다. 지역공무원이나 언론에 하나의 마을, 한 명의 마을 사람은 기억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차동식 선생 시혜비’ 주변에서 놀이터는 찾아볼 길 없고, 이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이 비석을 세웠던 주민은 대부분 이곳을 떠났을 터이다. 자기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한 도림2동 주민 차동식 선생의 행적은 당시에 정부와 언론사에 묵살됐고, 재개발 후에 이 지역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잊혀졌다. 부디 ‘서울신문마을’ 비석은 이와 똑같은 운명을 겪지 않기를 기원한다.
  • ‘서울신문마을 비석’ 등 비석들의 운명을 생각한다

    ‘서울신문마을 비석’ 등 비석들의 운명을 생각한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을 며칠 전 답사했다.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서 ‘미아동 탐사’라는 뜻의 ‘explore.in.mia’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시는 분이 올린 ‘서울신문마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을 보았기 때문이다. 1965년에 서울 경기 일대에 대홍수가 일어나서 이재민이 발생하자 서울신문사에서 성금을 모아 이 지역에 집단주택을 건설했음을 기념하는 내용이었다. 의연금을 모금해 준 서울신문사의 이름을 따서 이 뉴타운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새 마을 주변도 이제는 헌 마을 취급을 받아 재개발이 비석 근처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비석 남쪽 지역에는 1965년 당시에 지은 집단주택단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근처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은 이 비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대서울을 걷다 보면 이렇게 마을 사람을 기리는 비석을 종종 만난다. 이런 비석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장군이나 권세 있던 성리학자들을 기리는 비석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지만, 실제로 대서울을 걸으면서 건물 옆이나 나무그늘 아래를 찬찬히 살피면 뜻밖에 자주 만나게 된다.용산구 용산2가동주민센터 옆에 세워진 ‘동장 이봉천 기적비’는 북한에서 탈출해 남한으로 온 사람들이 정착한 해방촌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는 데 진력한 이봉천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용산구 보광동의 골목에는 ‘김점례 여사 배봉출 선생 공덕비’가 서 있다. 이 일대에서 큰무당으로 활동하던 김점례 선생 부부가 전 재산을 동네에 기증하고 노인정을 세워 준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모르긴 몰라도 한반도 역사에서 이렇게 여성 무당을 기리는 비석은 거의 없지 싶다. 한편 경기 부천시 소사본동의 소새울어울마당 앞에는, 이 위치에 어린이들의 공부방 자리를 기증한 동네 주민을 기리는 ‘심원 서경열 선생 공덕비’가 서 있다.이런 비석들과는 달리 그 존재가 잊혀진 비석이 서울 영등포구에 있다. 도림고가도로의 남쪽 그늘 한구석에 서 있는 ‘차동식 선생 시혜비’다. 이 지역에 마을이 있던 시절, 차동식 선생이 동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부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을 기념하고자 도림2동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하지만 이 놀이터가 조성됐음을 전하는 1981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도림고가차도 아래 어린이놀이터 설치를 영등포구청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돼 있고 차동식이라는 이름은 지워져 있다. 지역공무원이나 언론에 하나의 마을, 한 명의 마을 사람은 기억될 가치가 없는 것이다.오늘날 ‘차동식 선생 시혜비’ 주변에서 놀이터는 찾아볼 길 없고, 이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이 비석을 세웠던 주민은 대부분 이곳을 떠났을 터이다. 자기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한 도림2동 주민 차동식 선생의 행적은 당시에 정부와 언론사에 묵살됐고, 재개발 후에 이 지역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잊혀졌다. 부디 ‘서울신문마을’ 비석은 이와 똑같은 운명을 겪지 않기를 기원한다.글 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인천 가좌동에서 서울 교남동의 옛 모습을 만나다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인천 가좌동에서 서울 교남동의 옛 모습을 만나다

    지난주 인천 서구 가좌동에 자리한 코스모40이라는 건물에서 열린 사진 전시회 ‘재개발’에 다녀왔다. 한국과 일본에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학문의 자유를 위해 독립 학자가 된 로버트 파우저라는 한국어 교육 연구자가 찍은 사진들을 전시했다. 그는 2013~15년 사이에 서울 서대문구 교남동의 옛 마을이 재개발 대상이 돼 철거되는 모습을 찍었다. 교남동은 서울시 종로구 지역의 이름으로, 서울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의 북쪽이다. 조선시대에서 식민지시대에 걸쳐 번성한 지역들이 다 그렇듯이 이 일대에도 교남동, 평동, 홍파동, 무악동, 행촌동, 신문로2가 등 작은 동(洞)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왜 서울 교남동의 재개발 모습을 인천 가좌동의 건물에서 전시하고 있는 걸까? 코스모40은 이 지역에서 운영되던 코스모화학의 공장건물을 리모델링한 복합문화시설이다. 조선시대 후기인 300여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이곳 가좌동의 남쪽 바닷가를 현대 한국 들어서 매립한 결과 이곳에는 길고 가느다란 공업단지가 만들어졌고 코스모화학 공장단지도 들어섰다. 지금도 코스모40의 4층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크고 작은 공장들이 끝 간데없이 펼쳐져 있다. 전 세계 많은 지역에서 공장은 혐오시설로 치부된다. 공장을 대도시의 변두리나 농촌 지역으로 옮기고 공장 부지를 오피스텔이나 고층아파트 단지로 바꾸는 것이 유행이다. 단일용도로 설정된 네모난 공장 부지는 큰 건물을 짓기에 편리하기 때문에 예전에 큰 공장이 많았던 서울시의 서남쪽 영등포구·구로구·금천구나 동북쪽 노원구·도봉구 등에는 오늘날 수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있다. 이렇게 공장 부지를 아파트나 오피스텔 건설을 계획하는 회사에 매각하면 공장 소유주 측으로서도 큰 이익을 보겠지만, 최근 이 코스모40처럼 옛 공장의 내외부 모습을 그대로 남기면서 복합문화시설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얼마 전 논란이 일었던 목포시 조선내화주식회사 구 목포공장 부지와 같은 특이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공장 주변 시민들은 이런 방식의 활용을 환영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저 ‘재개발’ 사진전을 보러 코스모40이라는 건물에 간 것뿐이었지만, 코스모화학의 공장 건물을 복합문화시설로 훌륭하게 개조한 모습을 보고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부천의 옛 쓰레기 소각장 건물을 ‘부천아트벙커B39’로 개조한 사례와 함께, 21세기 들어 한국 시민들이 자신들의 현대사에 대해 조금은 더 애정을 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파우저 선생이 찍은 사진 속 교남동 옛 마을이 모두 헐리고 고층아파트단지로 바뀌었음을 알기 때문에, 코스모화학 공장 건물에서 코스모40으로의 변화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서울시에서 일어난 재개발에 대한 기억을 전시하도록 허락한 인천 지역의 뜻 있는 분들께도 경의의 마음이 들었다. 파우저 선생은 교남동과 무악동 옥바라지골목의 재개발 당시 모습을 찍은 몇몇 분과 단체 사진전도 계획하는데, 서울에서 열렸으면 좋겠다.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헬싱키에서 대서울을 생각하다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헬싱키에서 대서울을 생각하다

    지난달 핀란드의 헬싱키대학에서 서울에 대해 강연했다. 인구 63만명의 헬싱키 시민들에게 인구 2500만명의 수도권, 즉 대서울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서울 송파구의 2010년 인구가 64만명이니, 송파구 규모의 도시가 고민하는 문제와 서울시-대서울이 고민하는 문제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헬싱키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앤듀 로기 선생과 일주일간 헬싱키를 찬찬히 살피면서 두 도시 사이의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스웨덴과 러시아에서 독립한 핀란드의 시층(時層)을 볼 수 있는 “헬싱키의 삼문화광장”이었다. 헬싱키 항구의 광장에는 핀란드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가 1833년에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 헬싱키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기념물인 이 비석은 핀란드 독립 후에도 파괴되지 않았는데, 이 비석 바로 뒤에는 러시아에 앞서 핀란드를 지배한 스웨덴의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일본·중화민국의 건물을 모두 볼 수 있는 명동이나 정동의 삼문화광장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묻힌 러시아 정교회 묘지와 핀란드의 국부(國父)인 만네르헤임 원수를 비롯한 스웨덴?핀란드인이 묻힌 히에타니에미 묘지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광경도, 한국인·일본인·중국인 묘지가 공존하는 인천 부평의 시립승화원을 연상시켰다. 식민지 시기를 증언하는 유적은 헬싱키 곳곳에 있고 스웨덴ㆍ러시아ㆍ핀란드의 세 문화는 대서울보다 좀더 평화롭게 공존하는 듯했다. 이는 여전히 스웨덴계 핀란드인이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한편 소련ㆍ러시아의 위협이 이어져 온 핀란드의 파란만장한 근현대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헤이몰란 탈로라는 이름의 건물도 서울의 조선총독부ㆍ중앙청ㆍ국립중앙박물관 건물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910년에 완공된 헤이몰란 탈로는 1911~31년에 국회의사당으로 쓰였고 1917년 12월 6일에는 이곳에서 독립선언서가 서명됐다. 핀란드의 건국을 상징하는 이 건물은 1969년의 어느 밤에 몰래 헐렸다. 혹시라도 보존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해서 하룻밤 사이에 헐어버렸다고 하며,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핀란드 시민들은 그 뒤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을 보존하게 됐다고 한다. 서울의 조선총독부ㆍ중앙청ㆍ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은 1926년에 완공돼 45년까지 20년간 일본의 한반도 지배거점이었다. 경복궁 일부를 헐고 세워진 탓에 보존하기에는 위치가 너무 나빴다. 다만 아쉬운 것은, 헤이몰란 탈로와 마찬가지로 이 총독부 건물에서 1948년 5월 10일에 제헌국회가 열렸고 1950년 9월 28일의 서울 수복 때에도 이 건물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그리고 1995년에 철거될 때까지 중앙청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여 역사의 일부가 됐다. 식민지 시대는 20년이지만 현대 한국에서 50년이나 썼다. 한국인이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 포스터에 그려진 대한민국 건국의 현장을 더이상 실물로 볼 수 없다는 점은 큰 아쉬움이다.
  • 헬싱키에서 대서울을 생각하다

    헬싱키에서 대서울을 생각하다

    지난 달, 핀란드의 헬싱키 대학에서 서울에 대해 강연했다. 인구 63만명의 헬싱키 시민들에게 인구 2500만명의 수도권, 즉 대서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서울시 송파구의 2010년도 인구가 64만명이니, 송파구 규모의 도시가 고민하는 문제와 서울시-대서울이 고민하는 문제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런 한편, 헬싱키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앤듀 로기 선생과 함께 일주일간 헬싱키 시내 및 교외 지역을 찬찬히 살피면서 두 도시 사이의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첫 번째는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핀란드의 시층(時層)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헬싱키의 삼문화광장”이었다. 헬싱키 항구의 광장에는 핀란드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가 1833년에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 헬싱키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기념물인 이 비석은 핀란드 독립 후에도 파괴되지 않았는데, 이 비석 바로 뒤에는 러시아에 앞서 핀란드를 지배한 스웨덴의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일본·중화민국의 건물을 모두 볼 수 있는 명동이나 정동의 삼문화광장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묻힌 러시아 정교회 묘지와 핀란드의 국부(國父)인 만네르헤임 원수를 비롯한 스웨덴?핀란드인이 묻힌 히에타니에미 묘지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광경도, 한국인·일본인·중국인 묘지가 공존하는 인천 부평의 시립승화원을 연상시켰다.이처럼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증언하는 유적은 헬싱키 곳곳에 남아 있었고, 스웨덴-러시아-핀란드의 세 문화는 대서울에서보다 좀 더 평화롭게 공존하는 듯 했다. 이는 여전히 스웨덴계 핀란드인이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한편, 소련-러시아의 위협이 이어져 온 핀란드의 파란만장한 근현대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헤이몰란 탈로라는 이름의 건물도 서울의 조선총독부-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 건물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910년에 완공된 헤이몰란 탈로는 1911~31년에 국회의사당으로 쓰였고, 1917년 12월 6일에는 이곳에서 독립선언서가 서명되었다. 핀란드의 건국을 상징하는 이 건물은 1969년의 어느 밤에 몰래 헐렸다. 혹시라도 보존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해서 하룻밤 사이에 헐어버렸다고 하며,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핀란드 시민들은 그 뒤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을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의 조선총독부-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은 1926년에 완공되어 45년까지 20년간 일본의 한반도 지배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경복궁 일부를 헐고 세워진 탓에 보존하기에는 위치가 너무 나빴다. 다만 아쉬운 것은, 헤이몰란 탈로와 마찬가지로 이 총독부 건물에서 1948년 5월 10일에 제헌국회가 열렸고, 1950년 9월 28일의 서울 수복 때에도 이 건물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그리고 1995년에 철거될 때까지 중앙청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여 역사의 일부였다. 식민지 시대 20년이지만 현대 한국에서 50년이나 썼다.오늘날 조선총독부-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의 자재 일부는 천안 독립기념관에 놓여 있다. 그곳에는 “조선총독부의 철거 부재를 폐허의 공간에 전시하여 우리민족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게 연출·전시”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한반도를 식민 통치한 일본인들을 군사적으로 몰아내지 못한 원한을 엉뚱하게 건물에 푸는 것이 한국 시민의 자긍심을 살리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이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 포스터에 그려진 대한민국 건국의 현장을 더 이상 실물로 볼 수 없다는 점은 큰 아쉬움이다.글 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의주로 또는 통일로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의주로 또는 통일로

    조선시대에 압록강 남쪽 의주에서 동남쪽 한양으로 이어지는 서북방의 길을 의주로라 불렀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그 길은 통일로라 불리게 되었지만, 필자는 여전히 이 길을 의주로라 부르고는 한다. 남북 통일은 먼 미래의 일일 것이므로 통일로라는 명칭은 공허하다. 또 통일이 되더라도 통일로라 부르는 것은 좀 뜬금없게 느껴질 터이다. 의주로는 조선시대 이래로 명·청과 오가는 주요한 길이었다. 남북으로 단절된 뒤로는 그 경제적 중요성이 많이 줄었다. 반면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북한의 국경선과 너무 가깝다 보니 의주로의 군사적·정치적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 경기 고양시와 서울시 은평구의 경계인 창릉천 남쪽부터 서대문역 교차로에 이르는 옛 의주로 구간에는 여러 개의 군사시설이 있다. 그 사이사이의 빈틈에 식민지 시대 이래 조성된 단독주택·빌라·고층아파트단지가 있다. 그리고 이들 공간의 외곽에는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존재했거나 여전히 존재한다. 사람이 사는 공간인 주택과 사람의 삶을 지키는 군사시설, 그리고 삶이 끝난 뒤 사후에 이용하는 화장터·공동묘지가 모두 존재하는 공간이 이 의주로이다. 사람이 사는 구역들 사이에 군사시설과 죽음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시설과 죽음의 공간 틈에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런데 서울시 내부에서 거주하거나 근무하는 사람들은 이들 시설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 군사 시설은 각종 지도에서 안보를 이유로 지워져 있고, 서울시민들이 죽은 뒤에 이용하는 공간들은 경기 고양·남양주·파주시에 자리한 탓이다. 서울시설공단에서 관리하는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대서울 외곽 경기도에 존재하고, 고양시와 서울시의 경계에 자리한 이말산에서 전근대의 무덤과 군사시설, 은평신도시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서울시 외곽과 서울시 바깥의 대서울 곳곳으로 이들 시설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혐오시설’을 외곽으로 밀어내어 ‘청결’하고, 가난한 자들을 외곽으로 밀어내어 계급적으로 ‘균질’해진 서울‘특별’시가 만들어졌다. 서울‘특별’시를 ‘청결’하고 ‘균질’한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은 계속된다. 은평구에서 서대문구로 이어지는 옛 의주로 양옆에서는 오늘도 현저동·옥바라지골목과 같은 공간이 철거돼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현저동 입구의 옛 재개발 추진 사무소에는 “돌팔매질 잘 해! 또 해 봐!”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재개발 추진파와 반대파 사이에 투석전이 있었던 흔적이다. 아직 ‘빈민촌’ 시기의 도시 공간이 남아 있고 몇몇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홍은동 문짝거리 근처의 부동산 정면에는 고층아파트 단지 분양 광고와 개량한옥촌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혐오시설’과 가난한 자들의 주거를 모두 밀어낸 뒤 올린 고층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면서 개량한옥으로 상상되는, ‘만들어진 조선의 전통’을 향유하는 중산층의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런 공간은 서울시민에게 건전하지 못한 결과를 낳으리라고 필자는 예측하고 있다.
  • 의주로 또는 통일로

    의주로 또는 통일로

    조선시대에 압록강 남쪽 의주에서 동남쪽 한양으로 이어지는 서북방의 길을 의주로라 불렀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그 길은 통일로라 불리게 되었지만, 필자는 여전히 이 길을 의주로라 부르고는 한다.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한다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일 것이므로 통일로라는 명칭은 공허하고, 만약 통일이 된다면 그 후에도 이 길을 통일로라 부르는 것은 좀 뜬금없게 느껴질 터여서이다.의주로는 조선시대 이래로 명?청나라와 오고 가는 주요한 길이었지만,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서서 교류를 단절한 뒤로는 그 경제적 중요성이 많이 줄어들었다. 반면 한국의 수도인 서울이 북한과의 국경선에서 너무 가깝다보니, 조선시대나 식민지 시대에 비해 의주로의 군사적?정치적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더욱 커졌다. 고양시와 서울시 은평구의 경계인 창릉천 남쪽부터 서대문역 교차로에 이르는 옛 의주로 구간에는 여러 개의 군사시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사이사이의 빈틈에 식민지 시대 이래 조성된 단독주택?빌라?고층아파트단지가 지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공간의 외곽에는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존재했거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 공간인 주택과 사람의 삶을 지키는 군사시설, 그리고 사람의 삶이 끝난 뒤에 이용하게 되는 화장터?공동묘지가 모두 존재하는 공간이 이 의주로이다. 서울, 아니 한국의 어디가 그렇지 않겠는가만, 한국은 여전히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나라여서 곳곳에는 군사 시설이 존재한다. 또한,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이 화장터와 무덤도 당연히 존재한다. 사람이 사는 구역들 사이에 군사시설과 죽음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시설과 죽음의 공간 틈에 사람이 살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시 내부에서 거주하고 근무하는 사람들은 이들 시설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군사 시설은 각종 지도에서 안보를 이유로 지워져서 표시되고, 서울시의 시민들이 죽은 뒤에 이용하는 공간들은 경기도 고양시?남양주시?파주시에 자리한다. 서울시설공단에서 관리하는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대서울 외곽 경기도에 존재하고, 고양시와 서울시의 경계에 자리한 이말산에서 전근대의 무덤과 군사시설과 은평신도시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서울시 외곽과 서울시 바깥의 대서울 곳곳으로 이들 시설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다른 지역과는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이른바 ‘혐오시설’을 외곽으로 밀어내어 ‘청결’하고, 가난한 자들을 외곽으로 밀어내어 계급적으로 ‘균질’해진 서울‘특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이와 같이 서울‘특별’시를 ‘청결’하고 ‘균질’한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은평구에서 서대문구로 이어지는 옛 의주로 양 옆에서는 오늘도 현저동?옥바라지골목과 같은 공간이 철거되어 고층 아파트단지가 지어지고 있다. 현저동 입구의 옛 재개발 추진 사무소에는 “돌 팔매질 잘해! 또 해봐!” 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재개발 추진파와 반대파 사이에 투석전까지 전개되었을 시기를 지나 이제 현저동은 본격적인 철거를 앞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이곳에는 ‘빈민촌’ 시기의 도시 공간이 남아 있고 몇몇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홍은동 문짝거리 근처의 부동산 정면에는 고층아파트단지 분양 광고와 함께 개량한옥촌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이른바 “혐오시설”과 가난한 자들의 주거를 모두 밀어낸 뒤 만들어진 고층아파트단지에 거주하면서 개량한옥으로 상상되는, 만들어진 조선시대의 전통을 향유하는 중산층의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청결’하고 ‘균질’한 환경이 사람에게 도리어 해를 끼치는 것처럼, 군사시설과 화장터와 무덤과 서민의 공간을 모두 고층 아파트단지로 바꾸어버리는 것이 결국은 서울이라는 공간과 서울시민에게 건전하지 못한 결과를 낳으리라고 필자는 예측하고 있다.글 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최초의 강남’ 신길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최초의 강남’ 신길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식민지 시대 말기 1941년에 조선주택영단이 세워졌다. 주택 부족을 해소할 목적이었다. 해방 후 대한주택영단과 대한주택공사가 됐다가 2009년에 한국토지공사와 합병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됐다. 조선주택영단은 한강 이남의 문래·신길·대방·상도 등에 집중적으로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넓은 의미의 영등포 권역에 포함되는 이들 지역은 말하자면 최초의 ‘강남 신도시’였다. 식민지 말기에 조성된 ‘강남 신도시’는 당시 제작된 토지구획정리계획 평면도와 주택배치도로 남아 있다. 80~90년 전 조성된 도시 구조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답사 때 충격을 받았다. 실제로 현장을 걷다 보면 이들 지도의 바깥쪽은 급경사이거나 하천일 때가 많다. 조선시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지역에 늘어난 경성 인구를 수용할 목적으로 식민지 말기에 신도시가 조성되고, 해방 후의 서울 인구가 늘면서 신도시 외곽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서울지하철 1호선 대방역의 남쪽에 자리한 신길동의 재개발 예정지를 답사하다가 겪은 일이다. 현재는 대방역 남쪽 구획이 남서쪽의 영등포구 신길동과 남동쪽의 동작구 대방동으로 나뉘어 있지만, 식민지 시기에는 이들 지역이 ‘번대방정’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조선주택영단이 제작한 번대방정 주택 배치도에는 ‘이번에 준공한 지역’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대방초등학교 및 현재 고층아파트 단지가 건설 중인 지역의 동쪽 기슭이다. 식민지 당시 대방초등학교 자리에는 조선 19대 국왕 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묘지와 신도비가 있었다. 묘지는 번대방정이 ‘강남 신도시’로 조성될 때 충남으로 옮겨졌고, 신도비는 1967년에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다. 연령군 신도비가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지자 마을 주민들은 ‘숙종왕자연령군명묘비지’라는 비석을 만들어 대방초등학교 담벼락에 심어 넣었다. 이 현대의 비석이 심어진 담벼락의 북쪽에는 해인사라는 사찰이 있다. 2017년 9월에 이 지역에는 사찰 바깥에 시공사 등을 비판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2019년 1월에 이 지역을 재방문하니 골목 입구에 철문이 설치됐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철문 옆에 걸려 있다. 주지는 지난 몇 년간 재개발과 관련해 분쟁 중이라고 했다. 지적도에는 현재 이 사찰의 위치에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군사정권 시절에 근거 없이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진 연령군 신도비를 이 부근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가장 좋은 위치는 현재의 사찰 자리다. 하지만 이 사찰과 기초생활수급자·장애인이 있는 부설 요양원을 몰아내고 공원을 조성해 신도비를 반환받는 건 최선의 결말이 아니다. 이는 주자학을 신봉한 조선왕실이 불교계를 탄압한 역사를 연상시킨다. 사찰을 그대로 두고 반환된 연령군 신도비를 사찰 옆에 배치하는 게 훌륭한 역사의 화해가 될 것이다. 종교시설이라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약자의 보호시설인 소규모 기관 하나를 남기는 것이 행정관청이나 재개발 관련자들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최초의 강남” 신길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최초의 강남” 신길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식민지 시대 말기 1941년에 조선주택영단이 세워졌다. 주택 부족을 해소할 목적이었다. 해방 후 대한주택영단과 대한주택공사가 되었다가 2009년에 한국토지공사와 합병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은 한강 이남의 문래·신길·대방·상도 등에 집중적으로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넓은 의미의 영등포 권역에 포함되는 이들 지역은, 말하자면 최초의 ‘강남 신도시’였다.식민지 말기에 조성된 ‘강남 신도시’는 당시 제작된 토지구획정리계획 평면도와 주택배치도로 남아 있다. 80~90년 전 조성된 도시 구조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답사 때 충격을 받았다. 실제로 현장을 걷다 보면 이들 지도의 바깥쪽은 급경사이거나 하천일 때가 많다. 조선시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지역에 늘어난 경성 인구를 수용할 목적으로 식민지 말기에 신도시가 조성되고, 해방 후의 서울 인구가 늘면서 신도시 외곽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서울지하철 1호선 대방역의 남쪽에 자리한 신길동의 재개발 예정지를 답사하다가 겪은 일이다. 현재는 대방역 남쪽 구획이 남서쪽의 영등포구 신길동과 남동쪽의 동작구 대방동으로 나뉘어 있지만, 식민지 시기에는 이들 지역이 ‘번대방정’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조선주택영단이 제작한 번대방정 주택배치도에는 “이번에 준공한 지역”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대방초등학교 및 현재 고층아파트 단지가 건설 중인 지역의 동쪽 기슭이다. 식민지 당시 대방초등학교 자리에는 조선 19대 국왕 숙종의 아들 연령군의 묘지와 신도비가 있었다. 묘지는 번대방정이 ‘강남 신도시’로 조성될 때 충남으로 옮겨졌고, 신도비는 1967년에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다. 연령군 신도비가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지자, 마을 주민들은 ‘숙종왕자연령군명묘비지’라는 비석을 만들어 대방초등학교 담벼락에 심어 넣었다. 이 현대의 비석이 심어진 담벼락의 북쪽에는 해인사라는 사찰이 있다. 2017년 9월에 이 지역에는 사찰 바깥에 시공사 등을 비판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2019년 1월에 이 지역을 재방문하니 골목 입구에 철문이 설치되었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철문 옆에 걸려 있다. 주지는, 지난 몇 년간 재개발 관련으로 분쟁 중이라고 했다. 지적도에는 현재 이 사찰의 위치에 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군사정권 시절에 근거 없이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진 연령군신도비를 이 부근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가장 좋은 위치는 현재의 사찰 자리다.하지만 이 사찰과 기초생활수급자·장애인이 있는 부설 요양원을 몰아내고 공원을 조성해 신도비를 반환받는 건 최선의 결말이 아니다. 이는 주자학을 신봉한 조선왕실이 불교계를 탄압한 역사를 연상시킨다. 사찰을 그대로 두고 반환된 연령군 신도비를 사찰 옆에 배치하는게 훌륭한 역사의 화해가 될 것이다. 종교시설이라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약자의 보호시설인 소규모 기관 하나를 남기는 것이, 행정관청이나 재개발 관련자들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글 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신길동 남서울아파트 놀이터에서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신길동 남서울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직 봄바람이 차갑던 지난해 3월, 서울지하철 7호선 신풍역에 내렸다. 신풍역은 최근 몇 년 사이 흑석·노량진·영등포와 함께 뉴타운 개발로 주목받고 있는 신길동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들 지역은 식민지 시대에 경인(京仁) 메트로폴리스의 동쪽 구역으로서 일찍부터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그러다 보니 현대 한국에 들어서는 다소 낙후된 감이 없지 않았다. 최근 나는 경인 메트로폴리스, 또는 경인 공업지대의 초기 흔적을 확인하는 장기 작업을 시작했고, 이날은 신길뉴타운 개발과 함께 철거되고 있는 그 이전 시기 신길동의 몇몇 흔적을 찾기 위해 신풍역에 내린 것이었다.신풍역 5번 출구를 나오자, 남서울아파트라는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1974년에 입주가 시작된 5층짜리 아파트 단지로, 현재 안전등급 E등급을 받은 상태이며 천장이 내려앉을 정도라고 한다. 필자도 구반포주공아파트와 개포주공아파트1단지에 살면서 천장이 내려앉아서 비가 줄줄 흘러내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조금만 비가 내려도 천장에서 비 새는 걸 걱정해야 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현재 남서울아파트는 신길뉴타운 10구역에 지정되어 재개발 건설사도 정해졌다고 하니 재개발은 기정사실이다. 이날 처음, 그것도 잠깐 남서울아파트에 들른 것이었지만, 이 단지는 결국 재개발이 되어야 하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그런 생각을 하며 단지 안쪽으로 들어가니 탁 트인 놀이터가 나타났다. 모래밭에 미끄럼틀, 시소, 그네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등나무 그늘과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벤치 옆의 벽돌 기둥에 붙어 있던 두 개의 머릿돌이었다. ‘준공 1979. 8 어머니회 일동’과 ‘一九八九年 二月 어머니회 증축’. 1979년에 당시의 어머니회가 놀이터를 만들었고, 10년 뒤인 1989년에 당시의 어머니회가 놀이터를 증축한 것을 각각 기념하는 내용이었다.이 두 개의 머릿돌을 보고 1974년 입주한 뒤 1979년에 아파트 단지의 어머니들이 자금을 모아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 놀이터를 만들었고, 그로부터 10년 뒤에 또 다른 어머니들이 놀이터를 증축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재개발 와중에 남서울아파트의 놀이터는 사라질 것이고, 1979년과 1989년의 두 차례에 걸쳐 놀이터를 만들고 증축한 어머니회 회원들의 뜻을 담은 머릿돌들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에서 유독 아파트 단지가 발달한 것은, 원래라면 국가가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각종 기반 시설을 아파트 단지에 입주하는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마련하게 했기 때문에, 국가 입장에서는 이른바 ‘낙후 지역’을 손쉽게 개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 차례에 걸쳐 만들어진 남서울아파트의 놀이터는, 국가에 의지할 수 없는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 기반을 만들어 나간 현대 한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산이다. 그리고 두 개의 머릿돌은 그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 반포와 용인 수지를 이어주는 예수성심상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서울 반포와 용인 수지를 이어주는 예수성심상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 합쳐서 거의 30번 정도 이사를 했다. 서울 마포에서 시작한 나의 이사 인생은 반포, 부천 소사, 잠실, 안암동, 중계동, 고양 일산, 개포동, 신림동 등 서울시와 경기도 수도권 지역, 내가 말하는 ‘대서울’을 망라하고 있다. 이 중 초·중·고·대학 시절을 보낸 반포 지역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반포는 구반포와 신반포로 나뉜다. 구반포 지역은 중산층을 대상으로 건설된 최초의 아파트인 반포 주공아파트가, 신반포 지역은 한신공영이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세운 신반포 한신 1차~28차 아파트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신반포에 살 당시에는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신아파트가 보여서 친구들과 신반포를 “한신랜드”라고 농담 삼아 부르고는 했다. 신반포 한신 아파트는 대체로 “몇 차” 아파트로 불리는데, 그 가운데 한남대교 남단 교차로 근처에 있던 24차만은 대개 “성심 24차 아파트”라고 불렸다. 이 아파트 단지의 이름에 “성심”이 들어간 이유를 최근에 알게 됐다. 1946년부터 1984년에 성심원이라는 이름의 아동 양육시설이 이곳에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1946년에 이우철 시몬 신부가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당시 경기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 13-59에 해당하는 성심 24차 아파트 자리에 정착했다. 그 후 미8군의 원조를 받아 건물을 신축했다. 1973년 항공사진에 당시로는 수년 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서북쪽에 펼쳐진 논밭 한가운데 사각형의 성심원 건물과 부속 시설들이 확인된다. 1976년 서울시는 이 지역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도시계획을 세웠고, 1983년 사회복지 육아시설을 지방으로 이전하기로 확정했다. 영등포 동쪽 지역이라고 해서 영동이라 불리던 오늘날의 강남을 개발하는 도시계획에서 성심원은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됐다. 성심원은 1984년에 오늘날의 용인시 수지구로 옮긴다. 현대 서울의 역사는 서울 시민이 거부하는 수많은 시설과 사람을 경기도로 밀어낸 역사다. 청계천변 등 서울 곳곳의 빈민촌에 살던 10여만명을 지금의 성남 원도심인 광주 대단지로 보냈고, 서울시민이 사용할 화장장을 고양시 덕양구에 세운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서울과 경기도는 연결 고리를 만들면서 수도권을 형성했다. 서울 시민은 이 역사를 잊지 않고 부채의식과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어지러울 정도로 햇빛이 뜨겁던 지난 8월 4일 반포에서 옮겨 간 성심원을 찾아 용인 수지로 갔다. 성심원 정문 안쪽에는 1950년 10월 9일 만든 예수성심상(Sacratissimum Cor Jesu)이 서 있었다. 예수성심상을 받치는 대좌(臺座)에는 미8군단 기병대 1소대 로버트 H 영이 ‘한국의 소년 마을’(Boys Town Korea)을 기념한다는 동판이 붙어 있다. 1950년 당시에는 “농촌 강남”의 한복판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을 터인 예수성심상은 현재 수지 신도시의 고층아파트를 배경으로 서 있다. 강남 개발로 밀려난 성심원이 다시 개발 압력에 떠밀려 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귀가했다.
  • 서울 반포와 용인 수지를 이어주는 예수성심상

    서울 반포와 용인 수지를 이어주는 예수성심상

    부모님이 결혼한 뒤 내가 태어나고, 내가 아내와 결혼한 뒤 딸 아이가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 합쳐서 거의 30번 정도 이사를 했다. 마포에서 시작한 나의 이사 인생은 반포, 부천 소사, 잠실, 안암동, 중계동, 고양 일산, 개포동, 신림동 등 서울시와 경기도 수도권 지역, 내가 말하는 <대서울>을 망라하고 있다. 40여년 동안 거쳐온 수도권의 지역들 가운데, 나는 초·중·고·대학 시절을 보낸 반포 지역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반포는 구반포와 신반포로 나뉜다. 구반포 지역은 중산층을 대상으로 건설된 최초의 아파트인 반포 주공아파트가, 신반포 지역은 한신공영이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세운 신반포 한신 1차~28차 아파트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내가 신반포에 살 당시에는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신아파트가 보여서, 나와 친구들은 신반포를 “한신랜드”라고 농담삼아 부르고는 했다. 신반포 한신 아파트는 대체로 “몇 차” 아파트라고만 불리는데, 그 가운데 한남대교 남단교차로 근처에 있던 24차 아파트만은 대개 “성심 24차 아파트”라 불렸다. 이 아파트 단지의 이름에 “성심”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이유를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1946년부터 1984년 사이에 성심원이라는 이름의 아동양육시설이 이곳에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1946년에 이우철 시몬 신부가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당시 주소로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 13-59에 해당하는 신반포 성심 24차 아파트 자리에 정착했다. 그 후 미8군의 원조를 받아 건물을 신축했고, 1973년 항공사진을 보면 당시로부터 수년 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서북쪽에 펼쳐진 논밭 한가운데 사각형의 성심원 건물과 부속시설들이 확인된다. 1976년, 서울시는 이 지역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도시계획을 세웠고, 1983년에는 사회복지 육아시설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정부 정책이 확정되었다. 영등포 동쪽 지역이라고 해서 영동이라 불리던 오늘날의 강남을 개발하는 도시계획에서, 성심원과 같은 기관은 계획 실시에 지장을 초래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던 듯 하다. 그리하여 성심원은 1984년에 오늘날의 용인시 수지구로 옮겨오게 되었다.현대 서울의 역사는, 서울이 발전하는데 방해가 되고 서울 시민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간주되는 수많은 시설과 사람들을 서울 바깥의 경기도 지역으로 밀어낸 역사이기도 하다. 청계천변 등 서울 곳곳의 빈민촌에 살던 10여만명을 지금의 성남 원도심인 광주대단지에 보낸 것이 그러하고, 서울시에서 사용할 화장장을 고양시 덕양구에 세운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울과 경기도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가면서 수도권을 형성했다. 서울 시민들은 이러한 역사를 잊지 않고, 부채의식과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어지러울 정도로 햇빛이 뜨겁던 지난 8월 4일, 나는 반포에서 옮겨간 성심원의 현재 모습을 보기 위해 용인 수지를 찾았다. 성심원 정문 안쪽에는 1950년 10월 9일에 만들어진 예수성심상(Sacratissimum Cor Jesu)이 서 있었다. 예수성심상을 받치는 대좌(臺座)에는, 미8군단 기병대 1소대 로버트 H.영이 <한국의 소년 마을(Boys Town Korea)>을 기념하며 이를 만들었다는 동판이 붙어 있었다. 1950년 당시는 “농촌 강남”의 한복판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을 터인 예수성심상은 현재, 수지 신도시에 한창 건설중인 고층아파트를 배경으로 서 있다.강남 개발로 인해 서울 바깥으로 밀려난 성심원이, 또 한 번의 개발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 오래도록 평온을 지키며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심정으로 귀가했다. 글 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 서울 신반포 한신 24차 아파트는 왜 ‘성심 24차 아파트’라 불렸나.

    부모님이 결혼한 뒤 내가 태어나고, 내가 아내와 결혼한 뒤 딸 아이가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 합쳐서 거의 30번 정도 이사를 했다. 마포에서 시작한 나의 이사 인생은 반포, 부천 소사, 잠실, 안암동, 중계동, 고양 일산, 개포동, 신림동 등 서울시와 경기도 수도권 지역, 내가 말하는 <대서울>을 망라하고 있다. 40여년 동안 거쳐온 수도권의 지역들 가운데, 나는 초·중·고·대학 시절을 보낸 반포 지역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반포는 구반포와 신반포로 나뉜다. 구반포 지역은 중산층을 대상으로 건설된 최초의 아파트인 반포 주공아파트가, 신반포 지역은 한신공영이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세운 신반포 한신 1차~28차 아파트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내가 신반포에 살 당시에는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신아파트가 보여서, 나와 친구들은 신반포를 “한신랜드”라고 농담삼아 부르고는 했다. 신반포 한신 아파트는 대체로 “몇 차” 아파트라고만 불리는데, 그 가운데 한남대교 남단교차로 근처에 있던 24차 아파트만은 대개 ‘성심 24차 아파트’라 불렸다. 이 아파트 단지의 이름에 “성심”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이유를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1946년부터 1984년 사이에 성심원이라는 이름의 아동양육시설이 이곳에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1946년에 이우철 시몬 신부가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당시 주소로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 13-59에 해당하는 신반포 성심 24차 아파트 자리에 정착했다. 그 후 미8군의 원조를 받아 건물을 신축했고, 1973년 항공사진을 보면 당시로부터 수년 전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서북쪽에 펼쳐진 논밭 한가운데 사각형의 성심원 건물과 부속시설들이 확인된다. 1976년, 서울시는 이 지역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도시계획을 세웠고, 1983년에는 사회복지 육아시설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정부 정책이 확정되었다. 영등포 동쪽 지역이라고 해서 영동이라 불리던 오늘날의 강남을 개발하는 도시계획에서, 성심원과 같은 기관은 계획 실시에 지장을 초래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던 듯 하다. 그리하여 성심원은 1984년에 오늘날의 용인시 수지구로 옮겨오게 되었다. 현대 서울의 역사는, 서울이 발전하는데 방해가 되고 서울 시민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간주되는 수많은 시설과 사람들을 서울 바깥의 경기도 지역으로 밀어낸 역사이기도 하다. 청계천변 등 서울 곳곳의 빈민촌에 살던 10여만명을 지금의 성남 원도심인 광주대단지에 보낸 것이 그러하고, 서울시에서 사용할 화장장을 고양시 덕양구에 세운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울과 경기도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나가면서 수도권을 형성했다. 서울 시민들은 이러한 역사를 잊지 않고, 부채의식과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어지러울 정도로 햇빛이 뜨겁던 지난 8월 4일, 나는 반포에서 옮겨간 성심원의 현재 모습을 보기 위해 용인 수지를 찾았다. 성심원 정문 안쪽에는 1950년 10월 9일에 만들어진 예수성심상(Sacratissimum Cor Jesu)이 서 있었다. 예수성심상을 받치는 대좌(臺座)에는, 미8군단 기병대 1소대 로버트 H.영이 <한국의 소년 마을(Boys Town Korea)>를 기념하며 이를 만들었다는 동판이 붙어 있었다. 1950년 당시는 “농촌 강남”의 한복판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을 터인 예수성심상은 현재, 수지 신도시에 한창 건설중인 고층아파트를 배경으로 서 있다. 강남 개발로 인해 서울 바깥으로 밀려난 성심원이, 또 한 번의 개발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 오래도록 평온을 지키며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심정으로 귀가했다.글 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역사란 무엇인가 - 대치동 구마을에서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역사란 무엇인가 - 대치동 구마을에서

    평소 일이 있어서 어딘가 갈 때면 지도앱의 스카이뷰 모드를 켜고 지리를 살핀다. 그곳의 지형과 길, 유적지와 가게들을 훑어보고,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약속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먼저 가서 답사한다. 서울 등 수도권은 넓기 때문에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다. 그리고 ‘서울은 만원’이 아니라 ‘서울은 공사 중’이어서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이 오늘도 재개발?재건축되고 있다. 서울답사가의 마음은 바쁘고 발길은 빨라진다.대치동 지역에 눈이 간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잡지 인터뷰 건으로 대치동에서 미팅이 잡힌 김에 이 지역을 답사하려고 지도앱을 켜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특이한 사실을 확인했다.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대치동의 곳곳에 빗금처럼 사선으로 난 길과 구불구불한 길이 보였다. 사선으로 난 길은 역삼로 69길과 역삼로 73길, 도곡로 73길이었고, 구불구불한 길은 이른바 대치동 구마을이다. 이 길들이 신경 쓰여 1974년에 찍은 항공사진과 비교해봤더니 영동 개발 중이던 40여년 전에도 그 길들이 있었다. 좀 더 알아봐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길들이 강남 개발 이전의 농촌 강남 시절부터 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1974년 항공사진을 실마리 삼아 대치동 구마을에 가보니 이곳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파른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영동 개발 때에도 일단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때 어떤 중년 남성이 “어디서 나오셨냐”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늘 겪는 일이다. 서울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공사 중이고 임차인은 늘 쫓겨나고 있다. 개발을 추진하는 관청 공무원이나 건설회사 직원으로 생각한 임차인 분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온다. 이 대치동 구마을은 강남 개발 과정에서 살아남은 옛 영동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띤 곳이라고 설명했더니, “여기 볼 게 뭐 있다고 오셨냐”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언제나 역사란 국가나 왕족이나 양반의 것이라고 교육받은 한국 시민들의 생각이 바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이란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내 가족과 우리 마을에서 시작해서 귀납적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서울과 수도권의 시민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임차인으로 살고 있기에,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사대문안에 있는 지배층의 역사적 흔적에 대해 배우고 이것들이야말로 가치있는 역사라고 주입받는다. 그 후로 매달 한 번씩은 대치동 구마을을 답사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개발 속도가 빨라져서 주민들의 이주가 상당히 진행된 모양이다. 1970년대 강남의 풍경을 남기고 있는 ‘평화의 교회’라는 건물이 구마을 남쪽에 있다. 교회 계단 아래에는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라는 글자가 소박한 손글씨로 새겨져 있다. 옛 강남과 영동 개발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로서 공공 박물관에서 이 머릿돌만이라도 수집해 주면 좋겠다.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역사란 무엇인가 - 대치동 구마을에서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역사란 무엇인가 - 대치동 구마을에서

    평소 일이 있어서 어딘가 갈 때면, 지도 애플리케이션의 스카이뷰 모드를 켜고 지리를 살핀다. 그곳의 지형과 길, 유적지와 가게들을 훑어보고,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 정도 먼저 가서 답사한다. 서울 등 수도권은 넓기 때문에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이 많다. 그리고 “서울은 만원”이 아니라 “서울은 공사 중”이어서,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이 오늘도 재개발?재건축되고 있다. 서울답사가의 마음은 바쁘고 발길은 빨라진다.대치동 지역에 눈이 간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잡지 인터뷰 건으로 대치동에서 미팅이 잡힌 김에 이 지역을 답사하려고, 지도앱을 켜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특이한 사실을 확인했다.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대치동의 곳곳에, 빗금처럼 사선으로 난 길과 구불구불한 길이 보였다. 사선으로 난 길은 역삼로 69길과 역삼로 73길, 도곡로 73길이었고, 구불구불한 길은 이른바 ‘대치동 구마을’이다. 이 길들이 신경쓰여 1974년에 찍은 항공사진과 비교해봤더니, 영동개발 중이던 40여년 전에도 그 길들이 있었다. 좀 더 알아봐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길들이 강남개발 이전의 농촌 강남 시절부터 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1974년 항공사진을 실마리삼아 대치동 구마을에 가보니, 이곳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파른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영동 개발 때에도 일단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때 어떤 중년 남성이 “어디서 나오셨냐”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답사 다니다보면 늘 겪는 일이다. 서울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공사 중이고 임차인은 늘 쫓겨나고 있다. 40대 초반의 남자가 혼자 다니면서 사진찍고 있으면, 나를 개발을 추진하는 관청 공무원이나 건설회사 직원으로 생각한 임차인 분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내온다. 그래서 “서울 역사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1974년의 항공사진을 보여드리면서, 이 대치동 구마을은 강남 개발 과정에서 살아남은 옛 영동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띤 곳이라고 설명드렸다. 내 설명을 들은 그 중년 남성분은 내가 재개발 관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하신듯, 한 마디 하셨다. “여기 볼 게 뭐 있다고 오셨냐”. 이 말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언제나 역사란 국가나 왕족이나 양반의 것이라고 교육받은 한국 시민들의 생각이 바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이란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내 가족과 우리 마을에서 시작해서 귀납적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서울과 수도권의 시민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임차인으로 살고 있기에,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저 멀리 서울 사대문안에 있는 지배층의 역사적 흔적에 대해 배우면서, 이것들이야말로 가치있는 역사라고 주입받는다. 흔히 한국인은 역사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나는 많은 한국 시민이 자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있는 역사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로서의 역사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 후로 매달 한 번씩은 대치동 구마을을 답사하고 있는데, 최근 들어 개발 속도가 빨라져서 주민들의 이주가 상당히 진행된 모양이다. 1970년대 강남의 풍경을 남기고 있는 “평화의 교회”라는 건물이 구마을 남쪽에 있다. 교회 계단 아래에는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라는 글자가 소박한 손글씨로 새겨져 있다. 옛 강남과 영동 개발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로서, 공공 박물관에서 이 머릿돌만이라도 수집해 주시면 좋겠다.글 사진: 서울대 규장각 교수
  •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신도시 망향비

    [김시덕의 대서울 이야기]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신도시 망향비

    서울은 행정구역으로 서울특별시만이 아니라, 학교나 직장이 서울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포함해 ‘대(大)서울’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시를 활동권역으로 하는 사람들을 단지 그들이 잠잘 집이 서울시 바깥의 도시에 있다고 해서 배제해버리면 서울과 주변 도시나, 신도시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대서울에는 광명·과천·부천·안양·의정부·성남·하남·구리·김포·인천·시흥·고양·남양주 등의 일부 또는 전부가 포함된다. 서울과 별개의 생활권으로 설계한 반월 신공단인 오늘날의 안산이나, 서울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생활권을 지니는 수원·광주·화성·오산·동탄 등은 대서울에 포함하지 않는다. 교통이 긴밀하게 연결돼 부동산 가격이 서울과 연동하는 안성·원주·춘천 등의 지역도 대서울에 묶기에는 사람들의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최근 대서울에 포함되는 서울시 바깥의 도시들을 답사하며 현지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대서울 지역의 거주자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 해당 지역에 신도시가 생긴 뒤 서울에서 그 지역으로 이주·정착한 주민, 그리고 현재 서울을 주요 생활권으로 삼으면서 신도시를 임시 거주지로 삼는 주민 등 이 세 부류가 서울의 접경도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 세 유형의 주민들은 해당 도시와 경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최근 관심을 갖는 유형의 주민은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고향 마을을 수용당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원주민들이다. 이들 원주민은 대개 아무 흔적 없이 이주하지만, 고향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망향비를 세우기도 한다. 이 망향비는 전국적이다. 최근에는 성남시의 1기 신도시 분당과 2기 신도시 판교의 딱 중간 지점에 자리한 ‘동간마을 모향비(慕鄕碑)’가 가장 인상 깊었다. 양반이나 선비가 세운 비석과는 달리 비문을 한글로 새겼고, 뒷면에는 마을 주민의 이름을 일일이 새겼다. 어떤 망향비는 여성 이름도 새겨졌지만, 성남의 이 모향비에는 남성의 이름만 보였다. 그 옆면에는 ‘신도시에 솟은 정’이라는 제목의 절절한 망향가(望鄕歌)를 새겼다. “신도시란 새 이름은 희망도 들어 있어 고향 떠날 아픈 마음 참으려 해도, 멀리 가는 아쉬움에 애가 타는 사연들, 조상님의 은공 쌓인 고향의 산천, 그 많은 세월 속에 쌓인 인정아. 못 잊을 이웃 정은 만날 수야 있지만, 정든 마을 산천초목 안타까워라”. 이런 망향비야말로 대서울 주민의 삶과 생각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소중한 자료다. 성남시 분당의 중앙공원에는 이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모 양반 가문의 묘소와 비석 등이 ‘문화유적’으로서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양반의 유적보다, 신도시 고층아파트 단지 한 켠에서 신도시 주민들의 관심 밖에서 거미줄까지 처진 이런 망향비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대서울에 살아온 흔적이라, 더 소중하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