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허수아비와 들쥐/김소연
너른 들판에 가득 찬 벼 이삭들이 가을바람에 춤을 춥니다. 논 한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의 낡은 저고리도 덩달아 나부낍니다.
“허! 그 놈 참 험악하게도 생겼다.”
논두렁을 지나던 이웃 농군들이 허수아비를 보며 흉인지 칭찬인지 한마디씩 던집니다.
농부는 망태 할아범처럼 생긴 허수아비가 여간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어요. 허수아비를 세워 둔 후론 얄미운 참새들이 얼씬도 못했으니까요.
“금쪽같은 내 곡식들, 잘 지켜야 한다.”
농부 말에 어깨가 으쓱해진 허수아비가 무서운 얼굴로 고함을 쳤어요.
“어떤 놈이든 논가에 얼씬만 해라. 이 허수아비님이 가만 안 둔다!”
가을들판엔 허수아비 빼곤 개미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질 않았어요.
“내 덕분에 올 해도 풍년이구나.”
허수아비는 한껏 으스댔지만 그 모습을 보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요. 아침에 한번 농부가 나와 둘러볼 뿐, 하루 종일 허수아비 혼자였지요. 따가운 햇살에 머리가 지끈거려도, 차가운 밤비에 옷이 젖어도 누구하나 얘기 나눌 친구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뒷산에서 들쥐 한 마리가 들판으로 내려왔어요. 벼가 다 익어가니, 겨우내 먹을 쌀을 장만하러 오는 게지요.
들쥐는 허수아비가 서 있는 논 한가운데로 들어왔어요.
잘 익은 벼 이삭 하나를 똑 잘라 물고 나가다 그만 허수아비에게 들키고 말았지요.
“웬 놈이 남의 벼를 훔쳐 가느냐!”
“아이고 깜짝이야. 간 떨어지겠네.”
천둥 같은 고함소리에 놀란 들쥐가 자리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렸어요.
“에이, 난 또 뭐라고…. 허수아비잖아.”
들쥐는 허수아비를 보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어요. 그리고 놓쳤던 이삭을 입에 물고 제 갈길을 갔어요.
“아니, 네 이 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 논에 함부로 들어 온 게냐? 혼구멍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허수아비는 큰소리로 으름장을 놓았어요. 자기를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들쥐가 괘씸했거든요.
하지만 들쥐는 허수아비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콧방귀를 뀌었어요.
“어쩌려고요? 막대 팔로 날 잡으려고요?”
“뭐, 뭐라고?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느냐?”
“무서워요? 그 우스꽝스러운 바가지 얼굴이 무서워요? ”
들쥐의 대답에 허수아비가 할 말을 잃었어요.
“아저씨, 나는 겁쟁이 참새하고는 달라요. 허수아비가 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요.”
들쥐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어요.
“아저씨는 그저 속 빈 강정이에요. 저고리 속은 텅 비어가지고 논바닥에 쿡 박혀 꼼짝도 못하는 그야말로 허깨비, 그게 바로 허수아비죠.”
‘속 빈 강정? 허깨비?’
허수아비는 생전 처음 듣는 말에 화 낼 생각조차 잊어버렸어요.
“그럼, 이만. 내일 또 봐요.”
들쥐는 멍하니 서 있는 허수아비를 두고 벼 포기 사이로 유유히 사라져버렸어요.
다음날부터 생쥐는 제 멋대로 들판을 오가며 벼이삭을 물어갔어요.
“도둑놈 같으니. 당장 나가지 못 해!”
허수아비는 들쥐를 볼 때마다 고함을 지르며 내쫓으려 했지만 들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요.
보다 못한 허수아비가 들쥐를 나무랐어요.
“너는 남이 일 년 내내 공들여 키운 곡식을 허락도 없이 축 내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 말에 들쥐가 발길을 멈추었어요.
“우리 짐승들에겐 이 벼들도 산에서 나는 열매와 다를 게 없는 걸요.”
“무슨 소리야? 이 논엔 엄연히 주인이 있는데.”
“그거야 사람들끼리 하는 소리지, 어디 이 땅이 생길 때부터 농부 것이었나요?”
“그래도 모를 내고 벼를 키운 건 바로 주인 농부라고.”
허수아비는 제가 마치 농부인 양 점잖게 말했어요.
“산에 나는 열매는 저절로 큰 줄 아세요? 하늘이랑 바람이랑 산이 서로 도와가며 키운 것이지.”
들쥐는 반들거리는 코를 벌름거리며 대꾸했어요.
“따져보면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산에 올라와 마음대로 열매를 따가잖아요. 사람들이 언제 산이나 하늘에 허락받고 가져 간 적 있나요? 지난 봄에는 나무꾼이 다람쥐네 참나무를 통째로 베어갔어요. 하루아침에 집을 빼앗긴 다람쥐 가족이 얼마나 울었는데요.”
들쥐의 말에 허수아비가 입맛을 다셨어요.
“다람쥐네 식구들한텐 안 된 일이군.”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허수아비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어요.
“그래도 너무 많이 물어가진 말아다오. 내 체면도 있으니까.”
“그럼요. 저도 염치가 있는데.”
들쥐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어요.
다음날, 벼이삭을 물고 이랑 사이를 지나던 들쥐가 갑자기 허수아비 어깨위로 쪼르르 올라왔어요.
“아저씨. 혼자 심심하지 않으세요?”
“심심하다니. 난 지금 일하는 중인데.”
허수아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들판을 살피며 말했어요.
““근데, 며칠 다녀보니까 이 논에는 아저씨 말고는 메뚜기 한 마리도 안보여요.”
“그야 당연하지. 너처럼 맹랑한 녀석이면 모를까, 다들 날 무서워하거든.”
들쥐는 잘난 체하는 허수아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어요.
“다들 아저씨를 무서워만 하는데, 슬프지 않아요? 친구 하나 없이?”
“친구? 그런 것 보단 내 몫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법이야.”
허수아비 말에 들쥐가 입을 쌜쭉거렸어요.
“피~. 그런 게 어딨어. 아저씨, 그러지 말고 제가 아저씨 친구 할까요?”
“친구랍시고 논에 있는 벼 맘 놓고 훔쳐가려고?”
허수아비가 어림도 없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어요.
“치! 아저씬 벼밖에 몰라.”
들쥐는 혀를 쏙 내밀더니 어깨에서 내려가 버렸어요.
들쥐는 그 후 며칠 더 왔다 갔다 하더니, 이후론 나타나질 않았어요.
허수아비는 벼를 훔쳐가는 들쥐가 사라지자 마음이 놓였어요. 그래도 혼자 심심할 때면 들쥐의 또랑또랑한 눈이 생각났어요.
얼마 후, 추수가 시작되었어요.
농부는 콧노래를 부르며 벼를 거두었어요. 그리고 허수아비를 벼 그루터기 사이에 던져놓고 가버렸어요. 이제 허허벌판엔 허수아비만 덩그러니 남았어요.
“가을 내내 고생한 나를 쓸모없어졌다고 내버리다니….”
허수아비는 농부의 야속한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어요.
날은 갈수록 추워졌어요. 허수아비가 쓰던 벙거지는 늦가을 찬바람에 떠밀려 어디론지 날아가 버리고, 저고리도 비바람에 헤져 여기저기 찢겼지요.
“이제 겨울이 닥쳐오면 얼어 죽겠지….”
허수아비는 힘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아저씨. 여기 누워서 뭐하세요?”
어느 틈에 왔는지, 들쥐가 머리맡에 서서 허수아비를 빠끔히 내려다보고 있질 않겠어요?
“아니. 너 여기 웬일이냐?”
허수아비는 반가운 마음에 큰소리로 물었어요.
들쥐는 대답 대신 허수아비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중얼거렸어요.
“지나가는 길에 와봤더니…. 농부가 그예 버리고 갔구나!”
그 말에 허수아비는 두 볼이 벌게졌어요.
“정말 이렇게 있다간 한 겨울에 얼어 죽겠어요.”
“그게 허수아비 운명이라면 할 수 없지.”
허수아비가 체념한 듯 우물거렸어요.
“가만있자…, 아! 좋은 생각이 났다.”
들쥐가 논두렁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어요.
잠시 후, 볏짚을 잔뜩 물고 온 들쥐는 허수아비 저고리 속으로 쏙 들어갔어요.
들쥐가 저고리 안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허수아비는 간지러워 웃음이 터졌어요.
“뭐하는 거야? 히히히….”
“저고리 속을 짚이랑 마른 풀로 가득 채우면 바람도 막고, 추위에 끄떡없을 거예요.”
이 말에 허수아비는 웃음을 멈추고 멍한 눈으로 들쥐를 쳐다봤어요.
그러자 들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어요.
“우린 친구잖아요.”
들쥐는 하루 종일 쏘다니며 마른 풀들을 모아 저고리 속을 채웠어요. 덕분에 저녁노을이 질 무렵, 허수아비는 두툼한 외투를 걸친 것처럼 뚱뚱해졌지요.
들쥐는 손을 흔들며 산으로 돌아갔어요.
밤이 되자 첫 눈이 내렸어요. 밤새 내린 눈은 솜이불처럼 허수아비를 덮어 주었어요. 그래도 저고리 속은 휑하니 찬바람이 가득했어요.
그때였어요.
“허수아비 아저씨! 어디 계세요?”
들쥐의 목소리가 눈 쌓인 들판에 울려 퍼졌어요.
허수아비가 서둘러 대답했지요.
들쥐는 허수아비에게 다가와 바가지 얼굴에 덮인 눈을 쓸어냈어요.
허수아비는 들쥐를 보자마자 두 눈이 커다래졌어요.
들쥐는 마치 큰 싸움이라도 한 것 같았어요. 콧등엔 할퀸 자국이 선명하고, 털은 땀과 흙이 범벅인데다 이마에는 멍까지 들었어요.
“어떻게 된 거야? 겨우내 집에서 따뜻하게 지낸다더니.”
그 말에 들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어요.
“어젯밤, 난데없이 오소리가 쳐들어왔어요. 창고에 가득 채워둔 식량을 빼앗더니, 집까지 부셔버렸어요. 간신히 목숨만 구해 도망쳐 나왔어요.”
들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허수아비를 바라보았어요.
“아저씨한테 작별인사 하러 왔어요. 먹을 것도, 집도 잃었으니 이번 겨울은 나기 어려울 거예요. 아저씨 부디 안녕히 계세요.”
들쥐가 힘없이 뒤돌아섰어요.
“무슨 소리야? 여기가 네 집인데.”
들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어요.
“네? 어디가요?”
“어디긴. 바로 내 저고리 안이지.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한데.”
허수아비는 뽐내듯 가슴을 쭉 내밀었어요.
“겨울동안 나랑 같이 지내자. 들판엔 농부가 떨어트리고 간 이삭도 제법 있으니 양식 걱정은 말고.”
허수아비가 왼쪽 눈을 찡긋하더니 한마디 덧붙였어요.
“어때, 친구?”
“아저씨!”
들쥐는 연못에 뛰어드는 개구리처럼 허수아비의 품으로 뛰어들었어요.
그제야 허수아비는 온 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답니다.
●작가의 말
힘겹게 농사지은 쌀을 훔쳐가는 들쥐는 얄미운 도둑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사람이야말로 자연의 가장 큰 도둑일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자연에게 한없이 베풀어 달라고 조르면서 막상 제가 가진 것은 쌀 한 톨도 그냥 내어주지 않으니까요. 곡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눈을 부라리는 허수아비야말로 그걸 세워 둔 사람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요? 혼자서 모든 걸 독차지 하려고 아무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그래서 밤낮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그런 허수아비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약력
▲2004년 단편 ‘행복한 비누’가 샘터문학상 동화부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등단 ▲2007년 창비가 주관한 좋은 어린이책 공모에서 장편 ‘명혜’가 당선 ▲2008년 창작동화집 ‘꽃신’ 발표 ▲지은 책으로는 ‘명혜’ ‘꽃신’ ‘나불나불 말주머니’ ‘선영이, 그리고 인철이의 경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