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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식물인간/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식물인간/박현갑 논설위원

    제라늄 화분이 두 개로 늘었다. 죽어 가는 난초를 뽑아낸 화분에다 옆 화분에 있던 제라늄을 가지치기해 옮겨 심었다. 정기적으로 물 주는 것 외에 따로 돌보지 않는데 눈에 띌 정도로 잘 자란다. 며칠 새 새로운 잎을 하나둘 키우며 나를 반긴다. 놀라운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시골집 담벼락을 덮고 있던 담쟁이덩굴이 생각난다. 담벼락을 따라 옆으로, 위로 뻗어 나가는 기세가 대단했다. 누가 돌보는 것도 아닌데 자라는 걸 보노라면 생명의 경이로움을 깨닫게 된다. 숲속에 빼곡히 자리잡은 나무 줄기를 치감으며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칡넝쿨도, 길가의 이름 모를 잡초도 마찬가지다. 돌보기는커녕 제거 대상이 돼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다. ‘식물인간’, ‘식물국회’라고들 한다. 살아 있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하는 말이다. 앞으로는 다른 말을 써야겠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성장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 친구들에게 도리가 아닌 것 같다.
  • [길섶에서] 초여름 앵두/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초여름 앵두/임창용 논설위원

    지난 주말, 아파트 뒤편에 가니 앵두가 빨갛게 익어 있다. 탱탱하면서도 말랑한 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조심스럽게 서너 알을 따 입에 넣어 본다. 톡 터지면서 입안 가득 퍼지는 새콤달콤한 맛. 이제나저제나 열매가 익기를 기다린 지 열흘은 족히 됐다. 몇 차례나 앵두나무 근처를 서성거린 보람이 있다. 앵두맛과 함께 여름을 시작한 게 벌써 10년째다. 10년 전 이맘때 아파트 단지 내에서 앵두나무를 처음 발견했다. 단지 구석 다른 나무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 때마침 빨갛게 익은 앵두 몇 알이 눈에 띄었던 것. 어릴 적 시골집의 부엌 뒤켠 돌담 아래에 있던 앵두나무를 보는 듯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앵두는 오디나 보리수 열매처럼 다닥다닥 붙지 않고 적당히 띄어져 열려선지 어린 맘에도 예쁘고 귀하게 느껴졌다. 한 알씩 입에 넣어 톡 터트려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잘 익은 앵두 몇 알을 따 하얀 종지에 담아 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워지는 초여름이다.
  • [길섶에서] 아침 라면/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아침 라면/황성기 논설위원

    지금은 끝났지만 멕시코 휴양지에 분식집을 차린 TV 예능 프로그램을 눈여겨봤다. 연예인 5명이 사장과 직원으로 나뉘어 일하는 설정이다. BTS 멤버를 빼놓고는 비슷한 프로그램에서 성공을 거둔 이들이다. 멕시코 분식집도 이들의 대활약으로 높은 매출에다 경이로운 시청률을 올렸다. 메뉴는 김밥, 핫도그, 치킨에 인스턴트 라면이다. 매운 라면을 먹으면서 엄지척을 해 보이는 현지인들. 인스턴트 라면을 멕시코 분식집의 K푸드 메뉴에 올린 제작진의 선택이 ‘신의 한 수’ 같다. 건강을 염려하면서도 사족을 못 쓰는 게 라면이다. 아침마다 라면을 먹은 지 몇 년째다. 토요일 이른 아침 아내 몰래 끓이던 라면이 당당히 식탁에 올랐다. 체중을 고려해 3분의2만 끓여 먹으니 1년이면 240개의 라면을 먹는 셈이다. 어느 진수성찬이 아침 라면의 강렬함을 이길 수 있을까. 건강검진에서 실제 나이보다 몇 살은 적게 나온다. 순전히 내 주관이지만 라면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 [길섶에서] 그늘을 보며/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그늘을 보며/황수정 수석논설위원

    시간에 휘둘려 마음 헛헛해지면 산책길 나무벤치에 앉는다. 앞장선 강아지 녀석은 나무벤치 앞에서 틀림없이 나를 힐끗 돌아본다. 꾸물대지 말고 앉으라는 눈짓이다. 녀석이 알고 있다. 제 머리를 쓸어 주는 손길이 그 자리에서는 천천히 고요해진다는 것을. 지난가을 옮겨 심은 어린 나무들 앞에 나무벤치가 있다. 그저 앉았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시커멓게 그늘 좋은 큰 나무만 좋은 줄 알았다. 작은 나무들도 할 일을 다하고 있다. 잔가지들은 바람더러 샛길을 내라고 아낌없이 흔들리고 저녁볕 한 줌에도 애써 그늘을 짓는다. 부쩍 짙어진 그늘이 마주 앉은 내 발치에까지. 서툴고 모자란 어린 나무 그늘이 날마다 여물고 있다. 봄비에 다정하게 자랐으니 괄괄한 여름 장대비를 잘 견디겠다면서. 옛 시인 소동파는 일없이 고요히 앉았으면 하루가 이틀이 된다 했지. 그늘 바깥에 가만히 앉아 그늘을 배운다. 길어지는 저녁해가 어린 나무의 그늘을 오래 지켜 주는 유월의 나무벤치에서.
  • [길섶에서] 장마 대비/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장마 대비/이순녀 논설위원

    연휴 내내 비가 오는 걸 보면서 ‘올여름 장마는 얼마나 길까’ 걱정하다 제습기를 사야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매년 살까 말까 망설이다 다음을 기약하곤 했었는데 마침내 결단의 시간이 왔다는 확신이 섰다. 지난겨울 베란다와 세탁실 벽면에 생긴 곰팡이를 없애느라 끙끙댔던 경험도 한몫했다. 지금 제습기를 사 두면 여름철 장마 때 잘 쓰고, 겨울에도 유용하게 활용할 테니 합리적인 소비 아닌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제습기를 검색하고 깜짝 놀랐다. 웬만큼 인기 있는 제품은 물량 부족으로 배송에 한 달 이상 걸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배송이 빠른 쇼핑몰에서 재빨리 주문했다. 정신없이 구매하고 난 뒤엔 ‘이렇게까지 할 일이었나’ 싶어 허탈해졌다. 남보다 앞서 장마에 대비한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나만큼 미래를 내다보는 이들이 사방에 천지였다. 어쨌든 현명한 소비였는지, 충동구매였는지는 여름을 지나 봐야 알 것 같다.
  • [길섶에서] 들풀 혹은 잡초/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들풀 혹은 잡초/서동철 논설위원

    남대문시장 끝자락 퇴계로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가는 길, 늦었다. 오랜만에 택시를 탔지만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그런데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내려고 카톡을 여는 순간 약속 시간이 열두 시 삼십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10분 늦을 판이었는데 갑자기 50분 여유가 생긴 것이다. 정독도서관 언저리에 살던 어린 시절 학교에 갔다 오면 가방을 던져 놓고 남산 초입까지 거리와 사람 구경을 하며 걸어갔다 오곤 했다. 그때 생긴 어린이회관 건물에 지금은 서울과학전시관이라고 적혀 있다. 어린이회관에 들어가려고 정말 한참이나 줄을 섰던 기억이 난다. 김유신 장군상과 이시영 선생상을 지나면 백범 김구 선생상이 나타난다. 공원의 나무와 잔디는 자주 매만지는 듯 잘 가꾸어 놓았다. 그 사이로 씀바귀며 개망초가 자연스럽게 피어 있다. 꽃을 피우기 전에는 잡초에 불과했을 들풀이다. 공원을 관리하는 분들의 안목이 감탄스러우면서 고마웠다. 남산의 들꽃으로 뜻밖의 위안을 얻은 하루였다.
  • [길섶에서] 수명/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수명/황성기 논설위원

    냉장고가 시원찮아 애프터서비스를 불렀던 게 1년 전이다. 수리 기사 얘기가 냉동고의 촘촘한 물건 배치가 냉기의 순환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냉장고 뒷면에도 먼지가 꽤 쌓였다. 먼지를 털어내고 물건의 배치를 달리했더니 1년을 썼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순간이 왔다. 수리해서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는 터, 수리비라도 아낄 요량으로 아쉽지만 7년 반 된 냉장고와 작별하고 새 냉장고를 들였다. 설치 기사의 말로는 요새 냉장고의 권장 사용기간은 7~10년이란다. 예전엔 10년, 20년은 큰 문제 없이 쓴 것 같았다고 하자 별 대꾸는 없다. 같이 산 세탁기는 2년 전 수리를 했는데, 요새 세탁기 수명은 5년이라고 했다. 모두 굴지의 세계적 기업이 만든 국산 제품이다. 반면 중소기업 제품인 주스 압착기는 12년이 됐는데도 손때만 탔을 뿐 여전히 훌륭하게 주스를 매일 짜 준다. 의학이 발달해 인간의 수명은 느는데, 기술의 진화에도 전자제품의 수명은 왜 줄어드는지 모르겠다.
  • [길섶에서] 비 오는 날에/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비 오는 날에/박현갑 논설위원

    오랜만에 비가 온다. 가로등에도, 길 가는 사람의 머리 위에도, 아파트 단지 내 아름드리 팽나무와 자그마한 황매화에도 우두둑 떨어진다. 반가운 마음에 우산 없이 밖으로 나가 맞이한다. 일상의 고단함은 사라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비란 녀석은 공평하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골고루 나눠 준다. 다른 건 인간의 잣대다. 가뭄에 마음 타들어 가는 농부에게는 하늘이 주는 생명수이나, 침수 지역 주민에게는 내 삶을 망치는 훼방꾼일 뿐이다. 비는 오는 건가, 내리는 건가. 이 역시 사람 따라 다를 게다. 절실함과 그리움을 지닌 사람이라면 얘기 나눌 친구가 찾아오듯 오는 비가 제격이다. 욕망에서 해방됐거나 나만의 자유를 찾는다면 구름 속 물방물이 땅으로 떨어지는 자연현상인 내리는 비가 맞을 것이다. 행복이든, 성공이든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기다릴 게 아니라 찾아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두 발 묶인 고목이나 꽃들도 떨어지는 빗방울에 움츠러들지 않고 춤추며 자신을 표현하지 않나.
  • [길섶에서] 소쩍새 우는 밤/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소쩍새 우는 밤/임창용 논설위원

    며칠 전부터 아파트 앞 산에서 밤마다 소쩍새가 운다. 창 너머로 흘러드는 구슬픈 듯하면서 애틋한 소리가 언제 들어도 반갑다. 소쩍새가 ‘소쩍’ 울면 흉년이 들고 ‘소쩍다’ 하면 풍년이 든다고 했던가. 침대에 누운 채 ‘소쩍다’ 소리가 듣고 싶어 귀를 쫑긋해 본다. 한데 아무리 들어도 내 귀엔 ‘소쩍’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래도 언젠간 ‘소쩍다’ 소리도 들리겠지. 실없는 기대 속에 잠든 게 몇 날째인지 모르겠다. 소리가 정겹고 애틋하다 보니 사람들이 이런저런 의미 부여를 하다 풍·흉을 점치는 얘기까지 나왔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너무 작은 솥에 밥을 짓게 하자 밥이 모자라 굶어 죽은 며느리가 환생해 ‘소쩍’(솥적다) 울면서 소쩍새가 됐다는 말까지 있으니 말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소쩍’ 울음소리는 수컷이 내고,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소쩍다’ 3음절로 변할 때는 경쟁이 심할 때라고. 구애의 의미가 담겨 소리가 그리 애절할까? 오늘은 잠이 더디 올 것 같다.
  • [길섶에서] 근자감/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근자감/안미현 수석논설위원

    분양받은 돌화분에 상추 모종을 사다 심었다. 오래전 씨앗에 도전했다가 참담한 ‘무(無)수확’을 맛본 터라 이번엔 겸허히 모종으로 직행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너무 많다. 심을 때 간격은 얼마나 둬야 하는지, 흙이 마르면 물을 주라는데 ‘마르다’의 기준은 뭔지…. 쪼그리고 앉은 초보 손님의 질문 공세에 화원 사장님 설명엔 점점 짜증이 묻어났다. “뽑아 먹고 나면 다시 사러 올게요.” 딴에는 애교였는데 사장님은 기어코 폭발했다. “아이고 이 양반아, 상추는 뽑는 게 아니라 뜯어야지!” 아…. 불현듯 마트의 밑동 달린 상추가 떠오르며 반문이 목구멍을 간질댔으나 사장님의 ‘버럭’에 꼴칵 삼키고 만다. 어찌 됐든 상추잎을 뜯고 나면 또 자란다니 갑자기 모종값이 너무 싸게 느껴졌다. 생각의 모순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추를 중도 사망시키지 않고 잘 키워 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근자감)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긴 살면서 근자감을 갖는 게 어디 상추뿐이랴.
  • [길섶에서] 한보살 전보살/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한보살 전보살/서동철 논설위원

    거리의 새하얀 이팝나무꽃도 이제 끝물이다. 그런데 누가 “이팝나무” 하면 곧바로 주변 사람 입에서 따라나오는 게 “조팝나무”다. 중국 북송시대 사신이 고려를 다녀가고 남긴 ‘계림유사’(鷄林類事)는 흰쌀을 한보살이라 부른다(白米曰漢菩薩)고 적었다. 당시에는 ‘흰쌀’과 ‘한보살’의 소리가 비슷했나 보다. 조선시대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고려시대에는 이렇게 썼다면서 흰쌀은 한보살이고, 좁쌀은 전보살(粟曰田菩薩)이라는 대목도 보인다. 쌀과 조가 대표적인 식량작물이어서 이팝·조팝나무처럼 따라다녔나 보다. 지금 서울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 가면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을 치유하는 부처다. 그런데 장곡사 여래가 들고 계시는 것은 아무리 봐도 약그릇 아닌 밥그릇이다. 밥이 부처라고 했다. 고려시대 청양 산골에선 약보다 밥이 급하지 않았을까. 한보살과 전보살에도 이런 마음이 담겼겠지 싶다.
  • [길섶에서] 박물관의 명태/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박물관의 명태/이순녀 논설위원

    시인 양명문은 이것을 두고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고 예찬했다. 이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이고, 오현명이 1952년 초연한 가곡이 바로 ‘명태’다. 가수 강산에도 2002년 자작곡 ‘명태’를 발표했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노래 되고 시가 되고/이야기 되고 안주 되고/내가 되고 니가 되고/그대 너무 아름다워요’라는 도입부 노랫말은 양명문의 시와 조응한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곡의 흐름도 가곡 ‘명태’만큼 인상적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조명치’전을 얼마 전 흥미롭게 관람했다. 예술가의 영감을 자극할 정도로 한국인이 사랑하는 명태와 더불어 조기, 멸치 등 3대 대표 어류에 관한 이색 전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였던 명태는 동해에서 완전히 사라져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여러 이름만큼이나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명태의 소멸이 새삼 안타까울 따름이다.
  • [길섶에서] 봄날은 가는데/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봄날은 가는데/황수정 수석논설위원

    몇 해째 아버지는 꽃구경을 가자 하셨다. 부쩍 걸음이 느려지셔서 건성건성 들었다. 이 봄에야 시골집의 먼 철쭉산으로 꽃을 보러 갔다. 때가 늦어 붉었던 흔적만 어룽어룽. 늦자락의 봄산을 아버지는 아쉬워하지 않으셨다. 펼치면 삼십 리는 됐을 산길을 내내 몇 발을 앞장서셨다. 뛰듯이 날듯이 그때처럼. 꿈을 꾸며 걸으셨을까. 꽃이 한창, 꽃그늘이 한창, 발소리도 한창이라고. 아버지 발소리만 따라 내려온 산길. 아버지 뒷그림자에 온 마음을 놓고 걸었던 그 옛날 같은 봄길. 저녁 해가 남았는데 아버지는 곤하게 쪽잠을 주무신다. 축지법을 다 써 버린 산할아버지처럼. 아버지가 옮겨 심은 송엽국이 마당귀를 덮었다. 채송화 닮은 줄기꽃이 흙 있는 자리를 모조리 뒤져 서너 뼘 부추 고랑에서도 활짝 피었다. 부추밭인지 꽃밭인지. 아버지와 걷고 온 길은 산길인지 꿈길인지. 손목베개로 돌아누운 저 숨소리를 환청으로 듣겠지. 조용히 혼자 숨소리처럼 저무는 먼 봄날의 저녁이면.
  • [길섶에서] 유실물/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유실물/황성기 논설위원

    한강시민공원에서 개줄을 잃어버렸다. 강아지와 산책할 때 고정된 개줄과 자동으로 되감는 기능의 개줄 두 개를 번갈아 쓰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고정식 줄을 어디선가 떨어뜨린 것 같았다. 널찍한 한강변을 신나게 달리는 강아지를 챙기다 흘린 모양이다. 집에 와서야 잃어버린 걸 알았으나 찾으러 가기엔 너무 늦었고, 관리사무소에 알아보니 유실물센터에 들어올지도 모르니 내일 전화해 보란다. 이튿날 강아지와 집 근처로 아침 산책을 나가려다가 ‘분실 현장’에 다시 가 보면 줄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공원. 곳곳에서 공원의 쓰레기 청소가 시작됐다. 수거하는 분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휴대전화나 개줄 같은 유실물들은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어 수거하지 않고 그 자리에 놔 둔다”고 한다. 전날 걸음을 거슬러 갔더니 아닌 게 아니라 강아지와 뛰어놀기 시작한 그곳에 개줄이 있다. 소중하게 써 온 물건을 다시 손에 쥐니 그리 반가울 수 없다.
  • [길섶에서] 냉커피/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냉커피/박현갑 논설위원

    철학자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해 이웃 사람들이 그의 산책을 보고 시간을 맞췄다고 한다. 습관의 힘을 보여 주는 사례다. 언제적 습관인지 모르나 매일 하루 두 잔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한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커피점 손님 10명 중 9명이 냉커피를 마시는데 홀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라니 외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목젖을 휘감으며 온몸에 스며드는 온기와 풍미에서 느껴지는 활력에 기분이 좋아진다. 냉커피든, 따뜻한 커피든 선호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환경론’을 거론한다. 냉방이 잘 되는 커피점에선 냉커피보단 따뜻한 커피가 제격 아니냐는 냉온 조화론이다. 몸이 차가워 따뜻한 커피를 찾는다는 ‘체질보강론’도 있다. 무더위에는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냉커피가 건강에 좋다는 반론도 있다. 여름이면 시원한 오이냉국, 콩국수를 즐겨 먹는다. 그런데 유독 커피는 따뜻한 커피를 찾다니 커피 덕분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 [길섶에서] 자전거 폭주족 유감/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자전거 폭주족 유감/임창용 논설위원

    지난 주말 집 인근에서 산책을 할 때다. 자전거 여러 대가 빠른 속도로 내 옆을 달려 스치듯 지나간다. 너무 놀라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뭐라고 한마디 하려니 이미 멀리 가 버린 뒤다. 아파트 앞에 숲과 하천을 낀 산책로가 있어 애용하는 편이다. 한데 언젠가부터 자전거 ‘폭주족’들 때문에 망설여진다. 굳이 폭주족이라고 ‘저격’하는 건 이들이 보행자에 대한 배려 없이 과속을 일삼기 때문이다. 시속 20㎞ 안팎으로 다니는 일반 자전거족들과 달리 폭주족들은 40㎞ 이상 속도를 낼 때가 많다. 도로가 아닌 산책로에서 이 정도 속도로 달려 스치듯 지나가면 상당히 위협적이다. 대부분 성능이 뛰어난 자전거를 타고 헬멧과 고글에 마스크까지 착용해 얼굴도 보기 어렵다. 간혹 10명, 20명씩 떼지어 지나갈 때면 아예 산책로 난간에 바짝 붙어서서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쾌적함과 여유를 즐기기 위한 산책로가 자전거 폭주족들의 놀이터가 돼 가는 걸 막을 방법은 없을까.
  • [길섶에서] 거지방/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거지방/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요즘 젊은층 사이에서 ‘거지방’이 유행이라고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수십, 수백명의 단체방을 만들어 놓고 서로의 ‘거지됨’을 감시하고 독려하는 식이다. 공짜 이벤트 등 ‘짠테크’ 정보 공유는 기본이다. 방장은 시시때때로 ‘우거’(우리는 거지입니다)를 복창시킨다. 한 푼도 안 쓰는 ‘무지출 챌린지’를 경쟁하고 누가 더 거지인가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이 방을 지배하는 기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각성과 절약이다. 그래서 껌 한 통을 살 때도 다른 회원들의 결재를 구한다. “말로 씹으라”며 승인이 거절되면 좌절한다. 어떤 이는 상사한테 두 시간 동안 깨진 사연을 구구절절 올려 ‘매운 떡볶이’ 재승인을 받아내기도 한다. 한때 씀씀이를 과시하며 ‘플렉스’를 즐기던 이들이 이제는 지출내역을 공유하면서 연대의식을 느낀단다. 취업난과 고물가가 빚어낸 단상일 터. 애환도 놀이로 소비해 내는 발랄함이 부럽기도 하고 거지놀이를 할 수밖에 없는 팍팍한 현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 [길섶에서] 반성/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반성/서동철 논설위원

    내가 사는 신도시는 첫삽을 뜨고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파트를 새로 짓는 공사가 벌어진다. 쉬는 날이면 동네를 한 바퀴 걷곤 하는데 아파트 현장도 지나친다. 담벼락에는 안전에 힘쓰라는 현수막이 여러 개 펄럭이는데, 우리말과 함께 중국어로도 적혀 있다. 중국인 건설 인력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자재인양구 낙하물주의·注意材料打撈口坠物’가 눈에 들어온다. 자재, 인양구, 낙하물, 주의라는 단어 4개가 모두 한자어다. 우리말이라고 하기가 민망하다. 중국어와 나란히 세워 놓으니 더욱 그렇다. ‘석재 5장 초과 적재 금지·石材 5个 超額 超過 裝载 禁止’도 다르지 않다. 산보할 때마다 자랑스럽지 않은 우리말의 실상과 마주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다고 이런 한자식 표현을 순우리말 어휘로 ‘번역’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해 보지만 그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한 해에 하루, 한글날에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요즘은 공사장 걸개 덕분에 자주 반성을 하게 된다.
  • [길섶에서] 눈이 부시게/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눈이 부시게/황수정 수석논설위원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며 상상을 한다. 겹겹의 창문 따위는 없다 치고, 서른 자 빨랫줄이 길게 걸렸다 치고. 마음속에 빨랫줄을 걸면 잔바람이 일고 볕이 소란해진다. 마당가에 봄볕이 깨춤을 추던 날. 옛집에는 빨래꽃이 활짝 피었다. 묵었던 이불 홑청들이 빨랫줄을 다 차지하면 갈 곳 없는 잔빨래들은 구석구석 잘도 누웠다. 장독대 대숲에, 장독 뚜껑 위에, 엎어진 왕소쿠리 등짝에. 식구들 고단한 빨래들을 엄마가 온종일 해를 따라다니며 다독다독 돌려 눕히던 집. 그때는 몰랐지. 쨍글쨍글 볕자리에 우리들 옷이, 볕이 들다 마는 마당귀에 엄마 옷이. 엄마의 삶은 면양말짝과 행주포는 그늘 비끼는 오동나무 아래서 가장 느리게 말랐다. 엄마가 했던 것처럼 나도 하고 있다. 가장 느리게 마르는 자리에 나는 내 양말을 널고 있다. 옛집에 가서 빨랫줄을 걸어야지. 오동꽃 한창일 오동나무 아래 행주포를 널고 기다려 봐야지. 빨래꽃이 피는지, 그 봄밤처럼 하얗게 눈이 부신지.
  • [길섶에서] 치매 검사/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치매 검사/황성기 논설위원

    요새는 노인정 같은 데에 노인들을 모아 놓고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와 간단한 치매 검사를 무료로 해 준다고 한다. 지인의 92세 된 어머니가 이 검사를 받았다. 이전에는 단어 몇 개를 읽어 주고 외워 보라고 하거나 물건을 보여 준 뒤 어떤 물건이 있었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검사였단다. 최근에는 아예 문장을 읽어 주고 그대로 따라 해 보라는 검사를 지인의 어머니가 받았다. 그런데 100점 만점을 받았다고 집에 와서 자랑을 하시더란다. 병상에서 치매를 맞고는 코로나로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생각하니 함께 즐거워야 하는 일인데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지인의 어머니가 워낙 건강하신 건 알고 있었다. 지금도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자식들과의 언쟁에서도 지지 않는다고 한다. 부럽기 짝이 없다. 모셔야 할 어버이가 안 계신 지 2년째다. 하나 있는 자식이라고 어버이날에 해외여행을 가 버렸다. 면박이라도 줘야 하나 싶다가 언젠가는 깨닫겠거니 하고 입을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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