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길섶에서
    2026-03-20
    검색기록 지우기
  • 국조특위
    2026-03-20
    검색기록 지우기
  • 폭염경보
    2026-03-20
    검색기록 지우기
  • 연기대상
    2026-03-20
    검색기록 지우기
  • 기업 총수
    2026-03-2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107
  • [길섶에서] 더 오래 뭉근하게/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더 오래 뭉근하게/황수정 수석논설위원

    눈금으로 잴 수 없는 말이 좋아진다. ‘뭉근하다’라는 말은 얼마나 뭉근한가. “뭉근하다” 한번 말해도 한참 동안 입안이 따듯하게 데워진다. 죽자고 울어 덤비던 매미는 여름의 전설이 됐고. 버티던 홑이불은 장롱 깊숙이 들어갔고. 일없던 저 공터에는 누가 공을 들였을까. 시퍼렇게 단물 든 가을 무청, 옆에서 푸석거리는 호박잎. 푸르렀던 순서대로 어김없이 시들어 떠나는 때. 뭉근한 것의 의미를 누가 묻는다면 국어사전에 없는 말로 답하고 싶다. 가을볕에 종일 데워졌다 오래 식지 않던 것들. 도둑고양이가 해가 져도 배를 깔고 졸던 다듬잇돌, 난데없이 봉숭아 늦꽃이 피던 장독간의 소금단지, 걸터앉으면 발가락까지 노곤하던 마루끝. 없는 듯 제자리에 있던 속 깊은 것들의 온도. 무연히 쓸쓸한 이런 저녁이면 뭉근한 것들 생각이 간절해진다. 간절해져서, 바람같이 앉았다 오고 싶은 곳. 언제 앉아 보았던가 아닌가 기억도 가물한 자리. 저녁밥상 방금 들어가 저녁내 혼자 뭉근했을 그 고요한 부뚜막에.
  • [길섶에서] 어떤 묵념/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어떤 묵념/서동철 논설위원

    주류성은 나당연합군과 대치하던 백제부흥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의 위치를 두고 역사학계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의 운주산성도 주류성일 가능성이 제기된 곳 가운데 하나다. 운주산에는 1994년 고산사(高山寺)라는 작은 절이 세워졌다. 이 절이 특별한 것은 백제부흥군의 원혼을 위로하는 일종의 원찰(願刹)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백제의자대왕 위혼비를 중심으로 큰 법당인 백제극락보전과 도침당, 그리고 백제루가 제법 규모 있게 자리잡고 있다. 백제부흥군의 대장군 도침은 스님이었다고 한다. 30주년 백제고산대제가 지난주 열렸다. 백제 문화를 잇는다는 행사의 취지답게 지역 인사들이 많이 자리했다. 식순의 하나인 ‘백제부흥군에 대한 묵념’이 신라 지역 사람에게는 어떤 느낌일까 싶기도 했다. 이런 게 문화의 다양성이지 하며 산중의 가을 저녁을 흠뻑 즐겼다.
  • [길섶에서] 아빠 참여수업/황비웅 논설위원

    [길섶에서] 아빠 참여수업/황비웅 논설위원

    지난 주말 둘째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을 찾아갔다. 유치원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아빠와 함께하는 과학놀이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유치원 앞마당엔 솜사탕 만드는 기구며 팝콘 만드는 기구 등이 놓여 있고, 각 방엔 탱탱볼 만들기, 잠망경 만들기, 홀로그램 체험 등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놀이들이 준비돼 있었다. 원장님이 반갑게 맞아 주며 즉석 카메라로 사진까지 찍어 준다. 선생님들의 안내에 따라 종이로 잠망경을 만들어 본다. 다섯 살 아이가 만들기엔 너무 고차원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아빠들이 다들 잠망경을 만드느라 낑낑대고 있다. 그래도 아이의 기대 섞인 눈망울을 마주하고선 실패할 수 없다. 아빠와 아이가 함께한다기보다는 아빠가 직접 만들어 보는 과학 수업이라고나 할까. 여러 코너를 돌며 집중하다 보니 한 시간 반이 후딱 지나갔다. 그래도 열심히 하는 아빠를 보며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길섶에서] 꽃기린 키우기/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꽃기린 키우기/임창용 논설위원

    언젠가부터 거실에서 키우는 꽃기린이 꽃을 피우지 않는다. 수년 전 지인에게 선물받은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심겨져 있던 걸 도자기 화분에 옮겨 심은 식물이다. 작지만 계속 피고 지는 꽃을 365일 볼 수 있어 소중하게 여겨 왔다. 나무줄기는 단단한 가시로 뒤덮여 있다.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으로 쓰였다고 해 꽃말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이다. 볼 때마다 숙연함을 느끼게 하는 이유다. 한데 서너 달 전부터 꽃잎이 떨어지기만 할 뿐 새로 순이 돋지 않는다 싶더니 결국 하나도 남지 않았다. 뭔가 이상이 있을 터. 인터넷에서 꽃기린 재배법을 검색해 보니 화분 위치가 문제였던 것 같다. 햇볕이 잘 드는 거실 창턱이나 베란다에서 키우던 걸 식탁 옆 탁자로 옮겼었다. 조금이라도 꽃을 가까이서 보고자 했던 욕심 탓이다. 작은 욕심에 일을 그르친 어리석음을 탓하며 화분을 창가로 옮겼다. 꽃기린이 그동안 꽃피우는 법을 잊지 않았기를 기원하면서.
  • [길섶에서] 꽃 천지/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꽃 천지/이순녀 논설위원

    지난 주말 전남 순천에 다녀왔다. 이달 말에 끝나는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 4월 개막 때부터 별렀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기만 하다 행사 종료를 코앞에 두고서야 만사를 제치고 장거리 여행에 나섰다. 800만명이 봤다는 박람회는 장관이었다. 가을바람에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도 꽤 있었지만 광활한 정원 곳곳을 형형색색 수놓은 가을꽃의 자태는 황홀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코스모스 들판은 그야말로 백미였다. 박람회 연계 코스인 순천만 습지에서 노을을 등지고 갈대밭을 산책한 시간도 오래 기억에 남을 특별한 경험이었다. 어디 순천뿐이랴. 지역마다 꽃 이름을 붙인 축제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마산국화축제, 고창핑크뮬리축제, 거제섬꽃축제…. 꽃을 보러 가선 사람을 본다. 옥리단길과 웃장시장에서 마주친 순천 사람들의 미소가 꽃만큼 환하고 아름답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꽃 천지다.
  • [길섶에서] 어깨 부딪침/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어깨 부딪침/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예전에 한 외국인이 서울 생활 소회를 털어놓았다. 한국말이 유창한 그는 10년 넘게 서울에 살았어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게 ‘어깨 부딪침’이라고 했다. 분주한 길목에서 너무 자주 일어나는 어깨와 어깨의 충돌, 어느 쪽도 사과 없이 대수롭지 않게 재촉하는 발걸음….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그 얘기를 듣고부터 가급적 부딪침을 줄이려 했다. 단풍이 내려앉은 동네 산책길. 저쪽에서 중년 남성이 휴대폰을 보며 바삐 걸어온다. 피한다고 피했으나 어깨가 스치고 말았다. 조건반사적으로 “죄송하다”고 읊조렸다. 그런데 상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목구멍에서 “앞을 안 본 사람은 아저씨거든요”라는 항변이 대차게 울렸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훨씬 커진 “죄송합니다”였다. 어느새 고개까지 비굴하게 숙여져 있다. 사소한 감정 다툼이 큰 싸움이 된 뉴스를 많이 본 탓이리라. 다시 인파 속으로 들어서는데 오래전 그 외국인은 지금도 어깨 부딪침에 적응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길섶에서] 상속/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상속/황성기 논설위원

    술자리 화제는 주로 건강, 자녀, 취미활동이다. 조금 더 나가면 맛난 가게, 즐거웠던 여행, 만난 지 오랜 동료나 동창의 근황 등이 입길에 오른다. 최근엔 지극히 개인사인 상속도 종종 안줏거리가 되기도 한다. 나나 아내 모두 부모가 돌아가셨다.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은 유언이 없었던 터라 처분해 남은 형제끼리 정확히 나눴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아 상속은 다툼 없이 원만히 끝났다. 하지만 세상에 이런 가족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상속은 끝났지만 형이 아버지의 전 재산을 차지하고 인연을 끊었다는 지인. 부모 살아생전에 사업하는 형제가 야금야금 재산 대부분을 말아먹는 바람에 자신에겐 돌아올 게 거의 없다는 얘기. 모친을 가까이에서 모신 형제가 투자 명목으로 어머니 재산을 몰래 받은 것도 모자라 부동산 명의마저 바꾸려 한 것을 겨우 막았다는 친구. 상속이 종료된 이부터 현재진행형까지 다양하다. 돈이면 지옥문도 연다지만 형제의 연까지 끊는 상속은 달갑지 않다.
  • [길섶에서] 그런 사람 없더라/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그런 사람 없더라/박현갑 논설위원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다. 그래서 외로웠다.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것이다. 지인이 보내온 카톡이다. 지난해 작고한 이어령 교수의 삶에 대한 고백을 담은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에 담긴 내용이다. 초대 문화부 장관까지 지낸 분이 외로웠다니 의외다. 존경에다 사랑도 받으면 외로움이 사라질까. 탁월한 성과를 내거나 우수한 업적을 이룬 사람을 볼 때 드는 감정이 존경이다. 물질적 유혹을 떨치고 도덕성을 지키려는 삶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존경과 사랑을 다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존경하면서도 질시하고 경계하는 게 인간 심리가 아닌가. 인간에게 외롭다는 감정은 불가피하다. 창조적 외로움을 가져 보자. 나만의 생각을 키우는 시간은 죽음과는 거리가 먼 숭고한 창조의 시간이다. 이 교수도 내 육체가 사라져도 내 말과 생각은 남는다고 했다. 군중 속 고독의 이치를 깨우치고 자아를 찾는 외로운 삶은 부나 명예가 없더라도 살 만한 삶이 아닐까 싶다.
  • [길섶에서] 먼먼데이/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먼먼데이/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안내문이 붙었다. 늘 출근에 쫓겨 살펴볼 여유가 없는데 이날따라 시선이 꽂혔다. ‘먼먼데이’라는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뭔 말인가 호기심이 동했다. 요지인즉슨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인사하는 날(Day·데이)’을 만들자는 거였다. 낚였다 싶었다. 그래도 유쾌한 낚시질이다. 구(區)에서 새로 시작한 캠페인이란다. ‘먼 사람도 가깝게 만드는 3초의 기적’이라는 과장된 문구가 아니더라도 엘리베이터 안의 어색한 침묵을 깨는 데는 인사만큼 좋은 게 없다. 가벼운 목례나 눈인사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진다. 다만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건 약간의, 아니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무표정한 상대도 먼저 인사를 건네면 십중팔구 화답을 한다. 물론 아주 가끔은 ‘무플’로 민망함을 안기는 이도 있지만…. 때로는 뚱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상대의 싹싹한 인사에 어색하게 맞받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관(官) 냄새가 나도 이런 캠페인이라면 기꺼이 동참하리라.
  • [길섶에서] 섬진강 시인/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섬진강 시인/서동철 논설위원

    ‘나는 어머니가 좋다. 왜그냐면 / 그냥 좋다’ 시인 김용택은 1999년 자신이 교사로 있던 임실 마암분교 전교생 22명의 글을 엮어 동시집을 펴냈다. ‘어머니’는 당시 2학년 어린이의 작품이다. 시인은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이와 같은 아이들의 글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주말 제천 리솜리조트에서 열린 ‘시(詩)적인 순간’ 토크 콘서트에서 시인을 만났다. 마암분교 안부를 물었더니 뜻밖의 이야기가 돌아왔다. 학생수가 제법 늘어나 마암초등학교로 승격했고, 전주 시내에서 통학하는 어린이도 있다는 것이었다. ‘섬진강 시인’의 학교라는 이미지가 이런 변화에 보탬이 됐을 것이다. ‘교사로 행복했느냐’는 물음에는 시구절로 답변을 대신했다. ‘오랫동안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가르친 대로 살지 못했다. 아이들도 배운 대로 살지 않았다. 나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괴로워했다.’ 그림 같은 섬진강변에서도 교육 현장이 아름다움만 가득할 수는 없었나 보다.
  • [길섶에서] 코스트코의 이중성/황비웅 논설위원

    [길섶에서] 코스트코의 이중성/황비웅 논설위원

    집 근처에 미국 대형유통업체 코스트코가 있는 건 알았지만 직접 가본 건 처음이었다. 회원 가입까지 하며 그곳을 찾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게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속는 셈치고 들러 보기로 했다. 카트를 밀며 무빙워크를 타려는데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제지했다. 뭐가 잘못됐나 하고 카트를 살펴봤지만, 문제는 없어 보였다. 조금 있다가 직원이 가라고 손짓했다. 알고 보니 안전거리를 유지시키는 ‘안전관리자’였다. 문득 얼마 전 폭염 속 열기가 뜨거운 주차장에서 일하다 쓰러져 숨진 코스트코 직원 김동호씨가 떠올랐다. 지난 5일은 김씨가 숨진 지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사고 100일이 넘도록 사측은 어떤 입장 표명도 없다고 한다. 민주노총 산하 마트산업노조 설문 결과 코스트코 직원 10명 중 9명은 ‘회사가 폭염 속 직원 사망사고 이후에도 반성하거나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고객들의 안전은 이렇게 배려하면서 직원들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는 회사의 이중성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 [길섶에서] 억새 실종/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억새 실종/임창용 논설위원

    지난 주말 아파트 뒤 하천으로 산책에 나섰다가 깜짝 놀랐다. 산책로를 따라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억새와 갈대 숲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다. 숲이 있던 자리엔 사정 없이 잘려 나간 억새와 갈대 밑동들만 촘촘했다. 하천 산책로는 가을이 오면 억새와 갈대 숲이 장관을 이뤘다. 이맘때부터 본격적으로 꽃을 피워 10월 말까지 동네 주민들은 가을 정취를 만끽했다. 한데 누가 이런 ‘야만적인 짓’을 한 것일까? 하천 위쪽으로 올라가니 ‘범인’이 나타났다. 잡목을 제거하는 굴삭기가 억새숲을 통째로 도려내고 있었다. 그 옆에 관리자인 듯한 이가 서 있었다. 한쪽에 아직 남은 억새숲이 있어 사진을 찍으려니 그가 다가와 “억새 찍으시냐”고 묻는다. 대답 대신 “이제 막 가을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데 왜 다 베어 없애냐?”고 되물었다. 그는 “구청에서 하라고 하니 할 뿐”이라며 자신도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연말이 가까워오니 남은 예산을 모두 써 없애는 행정기관의 ‘고질병’이라도 도진 걸까.
  • [길섶에서] 가을 고궁/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가을 고궁/이순녀 논설위원

    대한제국 영빈관이 100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기에 모처럼 덕수궁을 찾았다. 함녕전, 중명전을 지나 석조전 옆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우뚝 선 돈덕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붉은색 벽돌과 청록색 창틀이 어우러진 서양식 건물이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가을 하늘과 대비를 이루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고종 즉위 40주년 이듬해인 1903년에 외빈 영접과 국제 교류 공간으로 개관한 돈덕전은 국권 상실로 제 기능을 잃은 뒤 일제강점기인 1921 ~1926년 사이 철거됐다. 복원된 돈덕전은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외관과 마찬가지로 내부도 첨단 디지털로 재구성한 자료들로 채워져 한 세기 시차를 실감하게 했다. 구경을 마치고 장욱진 회고전이 열리는 미술관 앞을 지나 정문 쪽으로 걷는데 뜻밖의 안내문이 시선을 끌었다. ‘맨발 보행 금지’ 표시였다. 요즘 유행을 넘어 열풍이라더니 고궁 안에서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나 보다. 이 가을, 고궁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풍경들이다.
  • [길섶에서] 시월이면/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시월이면/황수정 수석논설위원

    차가워진 저녁. 긴소매 옷들을 꺼내며 문득 생각했다. 오래전 가을은 어떻게 왔던가. 마루의 두레상이 안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가을이 온다는 신호였다. 여름내 별도 달도 올려다 보며 놀멘놀멘 숟가락질하던 안마루의 밥상. 맨드라미 마른 냄새가 일렁거리고 환한 이마처럼 달빛에 마당이 빛날 때. 소풍 같은 밥상을 방으로 가두기 싫어 “밥상 어디 펼까요” 저녁마다 하릴없이 묻고는 했다. 두레상이 안방으로 아주 들어가고 나면 시월은 성큼 깊었다. 가을이 어디까지 차오르는지 말 안 해도 알았다. 아람 벌어진 통배추가 느슨하게 짚풀에 묶이는 아침이면 발목까지. 따듯한 숭늉이 밥상에 올라오면 종아리까지. 댓돌에 씻어놓은 할머니 흰 고무신의 물기가 쨍하게 시려운 새벽이면 가을은 목젖까지. 대답을 듣지 않아도, 기댈 곳이 있던 말들은 얼마나 다정했는지. 맹렬한 시간에 매달려 사는 일이 무서워지는 날. 혼잣말로 묻는다. 오늘 밥상은 어디다 펼까요, 이 가을은 어디쯤 와 있는가요.
  • [길섶에서] 보디 프로필/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보디 프로필/황성기 논설위원

    SNS 메시지로 느닷없이 들어온 한 장의 사진. 이른바 ‘보디 프로필’(보프)이다. SNS 등에서 무작위로 나오는 사진은 봤지만 지인이 불쑥 보낸 사진은 놀랍게도 당황스럽게도 만든다. 보통의 옷이 아닌 몸에 찰싹 달라붙는 레깅스 차림에 아무래도 노출이 평상시와는 다르다. 오래된 지인이지만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단련된 몸을 보니 딴사람처럼 느껴진다. 부러운 마음도 든다. 유행이란다. 나이 60이 넘어서도 몸을 잘 가꾼 이들이 보프를 촬영해 SNS에 올리는 사진을 접하는 게 이제는 자연스럽다. 운동을 주 3~4회는 하는 편인데도 근육이 전혀 붙지 않는다. 체계적인 교습을 받지 않아서일까, 20분 정도의 짧은 운동이라서 그럴까. 좀처럼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 터에 지인의 보프는 자극이 된다. 뽀빠이 이상용이 TV 다큐멘터리에 나왔는데, 골절로 운동을 못 해 근육이 많이 빠졌다고 했다. 79세인데도 다시 근육을 붙이려고 운동을 재개했다는 정신에 탄복한다.
  • [길섶에서] 용쓰기를 포기한 아이들/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용쓰기를 포기한 아이들/박현갑 논설위원

    지난주에 2028 대입제도 개편 토론회가 있었다. 현 중학교 2년생부터 적용하는 정부안이 나오기 전에 학계 차원에서 방향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정부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토론장은 자리가 꽉 찰 정도로 열기가 가득했다. 수능시험 과목 변경에 따라 대입 준비가 달라질 터이니 이런 관심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배가 산으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시험은 교육을 개선하는 하나의 방편인데 시험 자체가 목표가 돼 버린 사회 아닌가. 교육 현장은 수업 시간에 딴짓하고, 예체능은 아예 관심 밖인 실정이다. 아이들에겐 자연에서 흙을 만지고 바람을 느끼며 꿈과 희망을 키우는 교육 환경이 필요하다. 하지만 ‘학원 행렬’에서 아이들을 해방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사회ㆍ경제적 환경 때문에 장래 희망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청소년들도 많다. 개천에서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용이 되기는 어렵다는 걸 아는 게다. 희망을 접은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나.
  • [길섶에서] 자꾸 떠오르는 ‘생파’/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자꾸 떠오르는 ‘생파’/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아이가 수상쩍다. 잘해야 초등학교 2, 3학년으로 보이는데 등에는 책가방, 손에는 풍선이며 휴대폰이며 짐이 잔뜩이다. 가장 수상한 것은 시간이었다. 시계는 이제 막 오전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가 등교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오지랖 발동. 사연인즉슨 “오늘 선생님 생일이라 친구들이랑 일찍 만나서 파티를 준비하기로 했”단다. ‘타의’를 의심하기에는 아이의 표정이 너무 해맑고 신나 보인다. 어린아이 특유의 뻐김도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깜짝 생일파티(생파) 선물을 받고 입이 귀에 걸렸을 생면부지의 선생님 표정을 상상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저 마음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이어져야 할 텐데….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는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저절로 뒤따라 나온 아침이었다. 선생님들의 ‘검은 물결’ 시위가 다음 주말 재개된다는 소식에 맨먼저 떠오른 것도 그 아침이었다.
  • [길섶에서] 또 다른 주인공/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또 다른 주인공/서동철 논설위원

    학교 친구가 수십년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쌓은 학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번역한 사료 수십 권을 애써 택배로 부쳐 주었다. 고마울수록 열심히 읽어야 한다. ‘호남의록 삼원기사’를 빼들었다. 왜란의 와중에 억울하게 죽은 인물들을 다룬 ‘삼원기사’(三寃記事)에서 김대인(金大仁)이라는 인물에게 눈길이 갔다. 그는 노략질한 좌수영 노복들의 죄를 물었다는 이유로 문초하는 이순신에게 이렇게 따졌다. “노복의 민폐가 이미 옳지 않은데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드니 어떻게 3도를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이순신은 기특하게 여기며 휘하에 두었고 김대인은 뛰어난 전공을 세우게 된다. 오늘날 여수에 가면 이순신광장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김대인은 이후에도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상관의 무고로 의금부에 갇히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김대인이지만, 이순신이 성공한 이유의 일단을 짐작하게 하는 스토리였다.
  • [길섶에서] 자녀 핸드폰 관리/황비웅 논설위원

    [길섶에서] 자녀 핸드폰 관리/황비웅 논설위원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와의 핸드폰 실랑이가 크나큰 고민거리일 것이다. 틈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딸에게 “숙제는 하고 보는 거야? 그만 보고 숙제해”라고 다그치지만 곧바로 눈을 떼는 경우는 드물다. 혹여나 낯선 사람과 채팅이라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핸드폰 중독이 점점 심해지면 어쩌나 등등 별의별 걱정이 다 생긴다. 가까운 친구와 얘기를 해 보니 자기는 자녀 핸드폰 관리 앱을 이용한다고 귀띔을 한다. 부모가 직접 관리하기 힘드니 ‘문명의 이기’를 빌리는 것이란다. 앱이 얼마나 철저히 관리를 해 주겠나. 속는 셈치고 앱을 깔아 봤다. 그런데 이용 시간 제한, 게임 시간 차단, 특정 앱 차단, 위치추적 기능까지 없는 게 없었다. 부모 외에 절대 풀 수 없도록 하는 보안 기능까지 완벽해보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게 옳은 걸까. 아동학대는 아닐까. 조만간 핸드폰을 맘 놓고 사용할 권리를 부르짖는 아동이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길섶에서] 초능력/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초능력/이순녀 논설위원

    명절은 설레지만 꽉 막힌 도로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어릴 땐 ‘하늘을 나는 초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요즘 초능력자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인기다.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무빙’은 비행, 초인적인 오감, 무한 재생, 괴력 등 특별한 능력을 지닌 탓에 위험에 처하는 초능력자 부모와 자녀들의 이야기다. JTBC 드라마 ‘힙하게’에는 사람과 동물의 엉덩이를 만지면 과거가 보이는 사이코메트리 수의사가 등장한다.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으면 세상살이가 한결 수월할 것 같지만 드라마 속 초능력자들의 삶은 고달프다. 평범하게 살고 싶은 소박한 바람조차 이룰 수 없고, 동물의 내면은 들여다보면서도 가장 가까운 가족의 마음은 까맣게 모른다.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무빙’의 대사처럼 모두가 공감의 초능력을 발휘하는 뜻깊은 한가위가 되기를 희망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