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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장맛비/최종찬 국제부 차장

    일요일 새벽 후두둑 빗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우윳빛 하늘에서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마치 하늘에서 땅으로 융단 폭격을 하듯. 빗방울의 사정권에 든 세상은 속절없이 젖었다. 가로수도, 공원도, 크레인도, 교회도, 아파트도 비를 피하지 못했다. 내 마음도 비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원했다.10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비에 젖어 빗방울을 따라 갔더니 그끝에서 기억의 곳간이 열렸다. 작은 마당 한 구석의 장독대, 간장과 고추장과 신김치를 담고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던 장독들, 그리고 한밤 장독대 한쪽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순간들. 꼬리에 꼬리를 문 추억의 장면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있었다. 새벽 세상을 때리는 빗소리는 어느 음악보다 감동스럽다. 앞만 보고 달리는 외눈박이시대 잠깐이나마 뒤를 돌아보게 한다. 모처럼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게 한다. 최종찬 국제부 차장 siinjc@seoul.co.kr
  • [길섶에서] ‘그놈 목소리’

    “우리 요구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 인질을 죽였다.” 아프간 탈레반 대변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TV에서 목청을 높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물 흐르듯 막힘이 없고, 음성은 성우(聲優)를 해도 괜찮겠다. 많은 이들이 볼모로 붙잡혀 죽느니 사느니 하는 마당이다. 뭐래도 열쇠를 쥔 쪽은 그들이다. 언론들마저도 접근이 쉽지 않은 곳 아닌가. 따라서 우리와 유일한 대화통로인 탈레반 대변인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다. 방송에 잇달아 등장시키는 것도 마찬가지 까닭이다. 혹시나 하다 역시나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도 ‘실낱 희망’을 그의 입에서 찾아내려는 게 당연한 심리다. 어쨌든 한국인 20여명을 인질로 잡은 데에는 무슨 목적이라도 깔려 있을 게다. 하지만 지구촌을 온통 뒤집어놓은 이번 사건에서 대변인 격의 인사까지 오락가락하거나 헛말을 일삼고 있어 답답하고 종잡을 수 없다.‘그놈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지만 들을수록 모골이 송연해진다.송한수 국제부 차장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적자생존/육철수 논설위원

    오래 전 일선 경찰서에 출입할 때다. 어느날, 기자생활을 접고 기업체 홍보부장으로 옮긴 K씨가 찾아왔다. 당시엔 기업 홍보직원들이 기자실에 들어오려면 자존심을 팽개쳐야 했다. 기자들이 힘있고 잘나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역학관계’가 그랬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K씨는 깍듯했다. 당연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언론계 한참 선배였다.“기자출신답지 않게 왜 그리 싹싹하냐?”고 물어보았다. 얘기를 들으니 하루아침에 그렇게 변한 게 아니었다. 이직 후에 자신이 기자시절 출입했던 부처를 업무차 방문했더니 낯익은 공무원조차 고압적 태도를 취하고, 몇시간 동안 밖에서 기다리게 하더란다. 예전에 고분고분하던 사람들의 돌변한 모습에 분을 삭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어 골백번 속을 끓인 끝에 현실에 순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랬더니 일이 술술 풀리더란다. K씨는 “먹고살려고 ‘기자 티’를 지우는데 3년이 걸렸다.”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길섶에서] 모래탑/최태환 수석논설위원

    심리학자가 그랬다. 거짓말은 인간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문화유산이라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정상인보다 진실을, 또는 진실되게 말하려는 경향이 크단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회복되면 거짓말이 다시 늘어난다고 했다. 사회적응을 위한 거짓, 눈가림이 어디 말뿐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일상이 거짓의 연속일 때가 많다. 가발, 키높이 구두, 뽕브라, 성형 미인, 보톡스, 체지방 흡입 몸짱 등. 모두 거짓이고 가식의 몸짓이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거짓말로 구성됐다고 했다. 거짓말의 모래탑이란다. 정이현이 신작소설 ‘오늘의 거짓말’에서 예시했다. 주인공은 인터넷 쇼핑몰에 가짜상품 사용 체험기를 올리는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위층의 소음 때문에 고민한다. 알고 보니 자신이 인터넷에 체험기를 올렸던 그 상품이었다. 그래서 그는 거짓을 알고 지내는 것과, 모르고 지내는 것은 다르다고 했다. 가짜 인생, 성형 인생이 연일 화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어떨까. 거짓을 방조하고, 거짓의 모래탑을 쌓는 일을 거들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걸까.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길섶에서] 근속상/송한수 국제부 차장급

    “근속(勤續) 했다고 화분을 보내다니 참 어처구니 없어.” Y선배가 웃는다. 딱 15년째 일터에서 땀을 흘렸다. 회사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그런데 부서 후배가 업무상 이래저래 연락을 하던 차에 창립 기념일 근속상 수상 소식을 자랑삼아 귀띔한 모양이다. 그래서 절친한 L이 질세라 그에게 난(蘭)을 배달했다. 농담 즐기는 이는 “아직도 다녔단 말이야?”라며 히죽거린다.Y선배는 겉으론 “오래 일했다는 게 욕으로 돌아오니 쓰리네.”라고 하지만 흐뭇한 그 속내를 다들 눈치 챘다. 회사 떠난 옛 선배가 엊그제 한 말이 겹친다.“동기들은 내게 한 턱을 내야지. 숨통 터줬잖아.” 실업률이 수그러들지 않는다.‘이태백’은 옛말이 된 지 이미 오래.‘청백전’이 대세다. 입에 담기도 마뜩잖은 청년백수 전성시대의 준말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일터에서 보람차게 오래 근무했다는 사실은 뽐낼 일이지 숨길 일은 아니다. 창장(長江)의 앞물이 끝내는 뒷물에 밀려나고야마는 법이다. 하지만 앞물은 사라지지 않고 너른 바다에 이른다. 송한수 국제부 차장급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새옹지마/구본영 논설위원

    오랜만에 체중계 위에 서 봤다. 등산길에서 허리를 다친 지 몇주 만이다. 저울 눈금이 상당히 올라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하지만, 체중은 오히려 다소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상했다. 그 동안 등산이나 조깅 등 옥내외 운동을 거의 중단했는데 말이다. 곰곰이 따져 보니 원인은 술이었다. 한동안 엄청난 고 칼로리의 알코올을 전혀 섭취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기에 앞서 사람의 길흉화복은 마음먹기에 따라 ‘새옹지마’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미국 학자의 올림픽 메달 색깔에 따른 심리분석 결과가 이를 말해 준다.1992년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들의 행복 점수는 10점 만점에 7.1점인 반면, 은메달리스트들은 4.8로 잡혔다고 한다. 은메달리스트들은 “한발짝만 더 나가면 금메달이었는데…”라고 자탄하지만, 동메달 딴 선수들은 “하마터면 노메달이었겠군.”이라고 자위하기 때문이란다. 최인철 교수의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프레임’에 소개된 사례다. 인간사의 행·불행도 세상을 보는 마음가짐에 따라 상당히 달라지는가 보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길섶에서] 법공양(法供養)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후배가 책 한 권을 갖고 왔다. 불가의 가르침을 풀어 쓴 책이다. 금강경 내용이 많았다. 그녀는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의었다. 지병은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죽음이었다. 망연해하던 그녀의 모습이 선연하다. 어머니를 절에 모셨다. 며칠 전 49재를 지냈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책을 돌렸다. 법공양이다. 책을 뒤졌다. 여기저기서 미망을 경계한다. 혜가스님이 달마대사에게 “마음이 괴로워 죽겠습니다.”라고 했다. 달마는 “그 괴로운 마음을 내놔봐라.”라고 했다. 혜가는 이내 ‘본래 없는 것이구나.’알아채고 괴로운 마음을 쉬었단다. 본질이 허망한 것을, 없애려 한다 해서 없어질까. 그림자를 파묻으려는 것과 같다. 중생의 삶은 어쩌면 열반을 향한 긴 여행이다. 후배는 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절을 찾았었다. 열반으로의 동행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가셨다고, 그리움의 미망이 쉬 사라질까. 시인의 글이 생각난다. 몸이 늙는다고 그리움이 늙을까. 사람이 죽는다고 그리움도 죽을까. 가슴에 어머니를 얹고 살아가는 후배가 안쓰럽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간다지만….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길섶에서] 먹통 휴대전화/이용원 수석논설위원

    휴대전화가 결국 먹통이 됐다. 그동안에도 통화때 상대방 또는 내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일이 흔했고, 때로는 멋대로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어제 의자에서 한번 떨어뜨린 뒤로는 영 켜지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잘 됐다 싶었다. 그러잖아도 휴대전화를 교체해야 하는데 버리기에는 아직 아깝다는 이유로 미적거리던 참이다. 이제는 미룰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모델을 택할까 이리저리 알아보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은근한 유혹의 목소리가 들렸다.“휴대전화 없이 살아보면 어때? 그동안 ‘느림의 미학’이 어떻느니 하며 좀 더 느긋한 삶을 원했잖아. 한번 해봐.”라고 속삭였다. 휴대전화를 두고 출근하다가 돌아가 가져온 일이 몇번 있었다. 전화번호도, 각종 약속·계획도 다 들어 있기에 휴대전화 없이 하루를 지낼 일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불편을 감수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없으면 내게 전화 걸 사람들이 꽤 불편하지 않을까? 그렇더라도 이번에 한번 저질러 봐?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길섶에서] 콩나물국/최종찬 국제부 차장

    나는 콩나물국이 좋다. 고기보다 생선보다 맛있다. 콩나물만 넣어 끓인 멀건 국보다는 묵은 김치를 넣어 끓인 매콤한 국이 더 맛있다. 거기에다 밥 한공기를 부어넣고 맛있는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금상첨화.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다. 이런 콩나물국은 술을 많이 마셔 몸과 마음이 부대끼는 날 해장용으로 먹어도 좋지만 그보다는 술을 안 먹는 날 먹는 것이 더욱 제 맛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가난의 그림자 속에서 휘적거리던 어린 시절엔 하루에도 몇번이나 밥상에 올라오던 콩나물국이 싫었다. 컴컴한 부엌 한 구석에서 하루가 다르게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던 콩나물들에 신물이 났다. 고깃국 생각이 간절하던 그 시절엔 도무지 콩나물국의 깊은 맛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내 입맛도 변했다. 나이 먹으면 옛날로 돌아간다고 하던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특히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엔 사무치도록 그 맛이 그립다. 콩나물국엔 내 어머니의 손맛이 들어있기에 그렇다. 어머니의 사랑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최종찬 국제부 차장 siinjc@seoul.co.kr
  • [길섶에서] 악수(惡水)/송한수 출판부 차장

    ‘불 지나간 자리는 있어도 물 지나간 자리는 없다.’고 한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그것도 한복판인 태평로 건물 4층에서 사람들이 큰물(?) 구경에 바쁘다. 비가 제법 내리고 있다. 무더위 식는 것은 좋은데 너무 쏟아져 고생하는 이들이 생긴다면 큰일 아니냐고 입을 모은다. 어떤 이는 “폭우 때 충청도 어디에서 그 속담이 딱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똑똑히 봤다.”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본디 집 세 채가 있었는데 집채같은 물살이 한복판을 갈라놨단다.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듯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뒤 바뀐 풍경은 가관으로 비쳤다. 가운데 집이 마치 애당초 없었다는 듯 자취를 감췄다는 게다. 물을 퍼붓듯 세차게 내리는 비를 억수라고 부른다. 악수(惡水)에서 나왔다. 말 그대로 쓸데없이 마구 쏟아지는 비다. 알맞은 비를 이르는 것도 많다. 단비, 꿀비, 약비에다 모내기를 다 끝낼 만큼 흡족하게 오는 비를 말하는 못비, 모낼 무렵 한목 오는 비를 가리키는 목비 등이다. 그나저나 올해엔 제발 꿀비만 뿌려지길…. 송한수 출판부 차장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인생교정/함혜리 논설위원

    얼마 전부터 수영장에 다니고 있다. 저녁 클래스에 등록해 여러 사람과 함께 수영을 배운다. 선수 수준은 아니지만 물을 겁내지 않을 정도는 된다. 혼자 운동을 하다 보면 쉽게 지치고, 운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도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첫날 반을 배정받았다. 자유형, 배영, 평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중급반이다. 중급반의 학습 목표는 세가지 영법을 정확하게 배우고, 제일 어려운 접영의 기초를 닦는 것이다. 조카뻘 되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바로잡고, 호흡법도 가다듬는다. 배우면서 보니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수영 자세에서 잘못된 부분이 참 많았다. 아무 생각없이 참 비효율적으로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힘만 낭비하고 있었다. 숨도 과도하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거듭했다. 나는 잘한다고 했지만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 어설픈 포즈였던 것이다. 자세를 바로잡아 수영을 해보니 속도도 나고 운동효과도 더 큰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훨씬 재미있다. 나의 삶도 이렇게 교정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베스트셀러/최태환 수석논설위원

    부지런한 친구가 있다. 미디어 전문가다. 대학서 강의도 하고, 강연도 한다. 방송출연도 열심이다. 거의 해마다 책을 낸다. 전문서적도 있고, 생활교양서도 있다. 딱히 대박난 것은 없지만, 전체 부수로 따지면 밀리언 셀러다. 이런 경우도 베스트셀러 저작자라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재미있는 친구다. 출판계에선 반짝 베스트셀러에 기대선 살아남기 어렵다는 게 정석이다. 외화내빈이기 때문이다. 홍보비, 직원충원 등의 비용을 따지면 속빈 강정이 되기 일쑤란다. 이른바 백리스트(back list)가 튼튼해야 실속이 있다.1년에 1000권이라도 팔리는 백리스트를 다양하게 보유해야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도 백리스트가 튼실하다. 오랜만에 장편 ‘바리데기’를 낸 황석영씨가 베스트셀러 줄세우기가 우리 문학을 고사시킨다고 했다. 그는 “질과 관계없이 상업적으로 줄을 세우는 베스트셀러 집계가 문학에 타격을 준다.”고 지적했다. 한국문학을 망가뜨릴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껍데기, 포장에 함몰되면 미래가 없는 게 어디 문학뿐일까.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길섶에서] 낯선 사람들/우득정 논설위원

    우리는 형제, 자매, 부모 그리고 자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들의 삶의 궤적에 드리워진 그늘과 의식의 저편에 숨겨진 비밀의 창고를 상상이나마 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대학시절 첫 하숙을 함께 한 김영현이 최신작이라며 건넨 ‘낯선 사람들’은 나 자신에게 이런 의문을 던졌다. 아버지 피살사건에 얽힌 실타래를 한올 한올 풀어헤쳐 가던 예비 신부 성현은 가족 구성원들의 이면에 감추어진 추악한 실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실체를 알면 알수록 가족으로 알고 있었던 인물들이 점점 낯선 사람들로 탈바꿈한다. 시대의 부조리에 거센 몸짓으로 항거했던 김영현으로서는 대단한 변신이자 영역 확장이다. 그날도 김영현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로 밤 새워 토론하자며 발톱을 곧세웠다.“형,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라고 하자 갑자기 낯설어진 듯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봤다.‘낯선 사람들’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라는 결론이 선연하게 다가왔다.‘내 생각도 마찬가지야.’하고 가만히 되뇌어 본다. 우득정 논설위원
  • [길섶에서] 프로필/최태환 수석논설위원

    고대나 근대의 인물 그림이나 부조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수천년, 수백년을 뛰어넘는 교감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마치 어제 작업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오싹한 느낌이 든다. 고대의 얼굴 그림은 대부분 옆 모습이다. 프로필이다. 정면은 절대자나 신에게만 허용됐다. 정면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집트 피라미드 유적의 그림·조각에서도, 고대 인도·중국의 부조나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하기야 서양미술에서 평민이 주인공이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밀레를 기원으로 잡는다. 그는 만종, 이삭줍는 사람들 등에서 평민을 중심 인물로 등장시켰다. 지난해 덕수궁미술관에서 만난 기억이 새롭다. 평민은 그림 속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는 게 생경하다. 좀 엉뚱하지만 지폐엔 얼굴 정면이, 동전은 옆 얼굴이 그려진 이유가 뭘까. 미국의 경제학자가 일상의 궁금증을 경제·역사적으로 규명한 책을 내놨다. 답은 위조방지다. 비싼 지폐는 정교한 정면을 넣어 위조를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요즘 화폐 속 얼굴도 신분(값)에 따라 정면·측면이 정해졌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길섶에서] 습관/최태환 수석논설위원

    예전엔 회사에 유별난 선배들이 많았다. 책상머리에서 볼펜을 돌리면 불호령이었다. 산만하고 어지러워 보였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혼낼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도 치도곤이었다. 책상에 엉덩이를 댔다가 눈물이 날 만큼 꾸지람을 들은 후배도 있다. 술자리에서 음식예절을 설교하는 별난 선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랑이었다. 고마운 선배들이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였다. 진행자가 유난히 예의바르게, 야무지게 말 잘하는 친구 딸의 일화를 소개했다. 초등학생인 아이가 어느날 “아빠, 이제 학교를 좋아하지 않게 됐어요.”라고 말했다.“아니, 왜.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하는 물음에 아이는 “아뇨, 이제 학교를 사랑하게 됐어요.” 학교에 대한 애정을 그렇게 맛깔스럽게 표현하더란다. 아빠가 각별히 말하기 교육과 예절에 대해 신경 쓴 결과라고 했다. 예쁜 표현이 이제 습관이 됐단다. 최근 어느 법원이 시민모니터링 결과를 내놨다.‘재판 중 볼펜 돌리는 판사’를 꼴불견 1위로 선정했다. 누군가 자주 지적해 줬더라면, 없어졌을 습관일텐데….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길섶에서] 귀국 신고/최종찬기자

    한국에 돌아오니 너무 편하다. 귀가 뚫리고 눈이 커지는 느낌이다.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호주 시드니에서 1년간 살아봤지만 그곳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다. 오페라하우스와 캥거루 등의 아이콘으로 대표되는 시드니는 관광지로는 적당한 곳인지 몰라도 내 한몸 편히 쉴 곳은 못됐다. 무거운 무언가를 가슴 속에 품고 산다는 호주교민들의 심정의 일단을 이해하게 되었다. 늘 겉돌 수밖에 없는 검은 머리의 이방인 신세가 바로 나였다. 시드니 생활 5년째인 모 대기업 상사원인 내 친구는 처음 3년간은 이곳이 무척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나면서 갑자기 한국이 너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일년에 한 두번 업무차 서울 본사에 가면 시커먼 매연 냄새마저 사랑스럽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그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세계화 시대 촌놈이라고 놀려도 할 수 없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속담처럼 나는 식빵이나 고기보다 콩나물국과 김치가 훨씬 더 맛있으니까.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길섶에서] 후배의 결혼식/송한수 출판부 차장

    “결혼해 줄래요?” “네.” 신랑·신부가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이 멀티비전에 비친다. 지난 휴일에 다녀온 후배 결혼식에서다.30대 중반에 총각 딱지를 뗀다. 두 화동(花童)을 앞세워 입장하는 모습에서 행복이 충만함을 느낀다. 다들 흐뭇해하며 지켜본다. 늦깎이 신랑이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가 들려온다.“신랑이 노래를 다 부르네. 하객들 앞에 웬만한 실력으론 나서기 힘든데.”라는 말에 서른 즈음의 후배가 한바탕 웃긴다.“갈수록 장가들기 어려워지네요.” 옆에서 끼어든다.“맞아. 몇 년이라도 먼저 하길 잘 했어. 우린 기껏해야 별난 퍼포먼스 정도로 넘겼지.” 누군가 “선배 땐 발바닥 몇 대만 맞고 떨어졌잖아요?”라며 눈을 치뜬다. 한 노총각은 “저렇게까지 해가며 장가들 생각은 없다.”며 웃는다. 만세 부르기는 이미 옛 얘기란다. 예식 풍경도 참 많이 달라졌다. 어쨌든 눈길을 끌려는 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다짐이 변하지 않도록 앞으로 애쓰겠다는 뜻일 터이다. 송한수 출판부 차장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인생 3막/최태환 수석논설위원

    지인이 신간 저서를 보내왔다.‘인생 3막’이 주제다. 인생이 4막의 드라마라면,3막은 자식 출가시킨 뒤 주도적인 삶을 가꾸는 시기란다. 그녀는 45세가 넘으면, 해마다 유서를 쓰라고 권한다.45세 이하면 가상 유서를 쓰란다. 가족과 주위에 덜 미안하고, 부끄러워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삶이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고 했다. 지인은 스피치컨설팅회사 대표다. 아나운서 출신이다. 그는 영상으로 유서를 남기는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한 적이 있다고 했다. 가상이지만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순수’를 봤다고 했다. 베토벤은 32세때 두 아우에게 유서를 남겼다.(세상의 모든 지식, 김흥식 지음)“너희들은 나를 적의에 차고 사람을 혐오하는 고집쟁이로 여기지만, 그것이 얼마나 그른 일인지 모른다.”편견과 화해하려 한 연민이 엿보인다. 평소 우리는 주변을 배려하는 노력을 얼마나 하며 살아갈까.‘이 세상이 꽃다발과 같다면’ 솜사탕 같은 에릭 쿤츠의 가곡이 떠오른다. 꽃다발과 같은 세상, 지금 우리 마음 속에 있지 않은가.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 [길섶에서] 바실란도/이목희 논설위원

    존 스타인벡이 애견과 함께 미국 전역을 누비며 쓴 소설 ‘찰리와의 여행’ 내용이 멋져서 한번쯤 흉내를 다짐했다. 스페인어로 ‘바실란도’. 목적지 도착보다 여행과정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라고 했다. 몇년 전 아무 준비없이 바실란도에 도전했다. 가족들과 함께 서해안 쪽으로 내려가다가 남해안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표지판에 볼거리가 나타나면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다. 하지만 길을 못 찾아 빙빙 돌았고, 제대로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지친 몸을 달래느라 눈에 띄는 음식점으로 일단 들어갔다. 그 역시 기대 이하였다. 가장 불편한 건 잠자리. 깔끔한 호텔은 꽉 찼고, 밤은 깊어갔다. 여관에 방을 잡았는데 러브호텔이었다. 짙은 화장에 짧은 치마의 여성이 커피배달을 빙자해 들락거렸다. 아이들 보기 민망했다. 결국 바실란도는 이틀만에 끝났고, 부여에서 서울로 차를 돌렸다. 그후부터는 철저히 예약하고, 인터넷 검색을 꼼꼼히 해 시간단위 스케줄을 짠 뒤 휴가를 떠난다. 바실란도를 즐길 여유조차 없음을 가끔은 한탄하지만….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길섶에서] 건설과 파괴/구본영 논설위원

    천상의 목소리를 지녔다는 그리스 출신 세계적 여가수 나나 무스쿠리가 곧 생애 두번째 내한 공연을 갖는다는 소식이다. 벌써 만73세라니 뜻밖이라고 여겨졌다. 더욱 놀라운 건 고희를 훌쩍 넘긴 할머니인 그녀가 아직도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두시간 이상 맹연습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감미롭게 와닿는 그녀의 목소리가 천부적 재능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다. 부수기는 쉽지만 쌓아올리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요즈음이다. 아차 실수로 다치기는 쉽지만 부상을 회복하는 일은 늘 더디기 마련이다. 파괴보다 건설이 어려운 것은 가정 살림이나 나라경제에도 적용되는 세상 이치가 아니겠나. 그래서 “나라경제는 숲과 같다. 이루는 데는 한 세대가 걸리지만, 태워 없애는 데는 하루면 된다.”(김종석 한국경제연구원장)는 비유가 그럴싸해 보인다. 무스쿠리의 한국 공연이 기다려진다.“over and over…”라는 그녀의 히트곡 노랫말처럼 오랜 세월 공들여 빚어온 목소리이기에 울림도 그만큼 크지 않겠나 싶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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