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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삶의 그림자/최태환 수석논설위원

    지난 주말 지인 상가를 다녀왔다. 고인은 17년간 병원신세를 졌다고 했다. 생전에 병투정이 유별나고, 심했던 모양이다. 가족들 수발의 고통과 아픔이 가슴에 닿는다. 특히 고인 며느리의 눈빛에선 지난 시절 곤궁함과 쓸쓸함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주위를 둘러보면 80수는 보통이다. 오래, 그리고 젊게 사는 게 소중한 가치임을 실감한다.90넘게 살았던 피카소는 말년의 다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가 죽으면 회화는 어떻게 하지.” 했다고 한다. 괴테는 74세때 19살 처녀를 사랑했다. 그는 “나는 요즘 춤추듯 살고 있다.”고 했다. 중매까지 부탁했다 딱지 맞고 쓴 시가 ‘마리엔바트의 비가’란다. 최근 출간된 슈테발 볼만의 ‘길어진 인생을 사는 기술’에 소개된 얘기다. 하지만 삶이란 길이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길이는 자신의 마음에 있다.‘생은 그림자/실낱같은 태양 아래 어른대는 하나의 환영…/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살지 않았을 뿐’‘티베트 사자의 서’에 나오는 시다.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길섶에서] 운칠기삼/구본영 논설위원

    도박은 흔히 운이 70%, 기술이 30% 정도로 승패를 좌우한다고 한다.‘운칠기삼’이라는 속어처럼. 최근 어느 공기업 임원인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소속한 회사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서 허무는 과정에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건물의 안전성에 절대적으로 긴요한 철근이 군데군데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해체공사 도중에 혹시 크레인이 굴러떨어지는 등 크고 작은 사고를 우려해 끊임없이 보강공사를 하면서 철거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운이 좋아서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대형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단다. 공적인 업무든, 사생활이든 도박하듯 적당주의에 물들면 결국 큰 화를 부를 수도 있다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어느덧 TV는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팀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단신의 박지성이 장신 숲을 헤치고 골을 넣는 장면을 보고 인생도 ‘운칠기삼’에 맡길 만큼 호락호락한 게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한골을 넣기까지 그가 맛보았을 온갖 신산함을 떠올리면서….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길섶에서] 봄의 꿈/최태환 수석논설위원

    흘러흘러 만나는 게 강물뿐일까. 다시 3월이다. 겨울 끝자락에 휴가를 다녀왔다. 봄이 오는 줄도 몰랐다. 슈베르트의 ‘봄의 꿈’을 듣는다.‘겨울 나그네’ 24곡 가운데 하나다. 겨울 나그네는 무겁다. 젊은 음악가의 실연과 삶의 절망이 오롯이 녹아 있다. 하지만 ‘봄의 꿈’엔 희망이 담겼다. 미래를 기다리는 소망이 잔잔하다. 심장의 고동이 머릿속 혈관을 타고 전신에 맥동하는 것 같다.“시가 소리가 나도록 하고, 음악이 말을 하도록 했다.”는 그의 묘비명이 귓전을 울린다. 지인이 전화를 했다. 요즘 글이 보이지 않아 궁금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전화는 왜 꺼 놓고 사느냐.”며 핀잔한다. 신문을 멀리했던 지난 며칠을 떠올린다. 신문이 아니라, 흘러가는 삶을 잠시 회피하고 싶지 않았나 자문한다. 흘러흘러 만나는 게 강물과 절기뿐일까.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일 터다. 돌고돌아 만나고, 엉키는 이들이 있다는 게 행복하다. 나의 존재를 확인케 하는 이들이다. 나도 그들에게 삶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는 살가운 존재가 됐으면 좋으련만….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길섶에서] 즐거운 귀동냥/송한수 국제부 차장

    “길거리 아줌마가 내미는 광고물도 떠밀지 말고 죄다 챙기세요.” 출판 일을 할 때였다. 꽤 큰 업체의 사장이 한 말이다. 허접스러울지라도 광고물 속 글과 그림을 보노라면 ‘번쩍’하고 스치는 아이디어를 붙잡을 수도 있다는 게 이유다. 엊그제 점심 먹으러 나갔다가 알록달록하게 꾸민 광고물을 받았다. 근데 딱히 버릴 데도 없고 해서 주머니에 넣어 들어왔다. 꺼내 보니 肉談(육담)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돋보였다. 어∼라, 저속하고 품격 낮은 이야기가 육담 아니던가. 바로 아래엔 ‘고기 뷔페 레스토랑’이라 적혔다. 근사하게 써먹을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똑같은 표현은 아니라도 응용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다못해 삼겹살 불판 위에서 술안주 삼을 얘깃거리로는…. 한날 눈썰미 좋다고 뽐내는 A는 거리에서 이따금 떨어져 있는 돈을 줍는다고 예쁘게 웃었다. 당신도 어느날 쓰레기통으로 처박힐 종이 쪼가리에서 행운을 낚을지 모른다. 길은 때때로 뚱딴지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송한수 국제부 차장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민폐/함혜리 논설위원

    밤 늦게 문을 여는 동대문운동장 근처 도매 옷시장에 가끔 간다. 부담없는 가격에 최신 유행 스타일의 옷도 사고, 다른 세상의 활력을 느낄 수 있어서다. 얼마 전 시장에 갔다가 추위도 식힐 겸 출출한 배도 채울 겸 호떡 집에 들렀다. 아저씨 혼자서 호떡을 굽는데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하루에 얼마를 버시느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하루 평균 50만원은 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열흘이면 500만원, 한달이면 1500만원을 번다는 얘기다. 추운 날씨에도 신나게 호떡을 만들어 파는 게 이해가 갔다. 구두 수선집 아저씨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하루 5만원 정도 번다고 했다. 호떡장수 아저씨의 하루 수입이 50만원이나 된다고 했더니 아저씨는 “얼마를 버느냐보다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아저씨도 잠시나마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떡집 아저씨가 부러운 마음에 괜히 엉뚱한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했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봄이 오는 소리/ 최종찬 국제부차장

    바람의 톱날이 점점 무디어간다. 햇살은 온기를 머금기 시작한다. 가로수의 빈 가지의 끝자락에서는 꽃눈이 새록새록 솟아나온다. 젊은 여심과 등산객들의 옷차림도 한꺼풀 얇아진다. 개울이나 강에서는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제주에선 유채꽃이 들녘에 노랑 물감을 퍼뜨린다. 남녘에선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다. 대지에서 봄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길고 추웠다.2월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수은주가 영하 10도 주위를 맴돌았다. 온난화로 지구가 더워진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바람마저 날을 세워 체감온도가 더 떨어진 날은 거리를 다니는 일이 너무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계절의 달력은 어김없이 넘어가는 법. 겨울의 절정 속에서도 봄은 만물의 부활을 알리는 축제를 차곡차곡 준비해 왔다. 남녘으로부터 겨울과 교대식을 하기 위해 봄이 진군의 나팔을 불며 뚜벅뚜벅 걸어온다. 병색이 깊어가는 겨울이 계절의 무대에서 떠날 날이 다가왔다. 최종찬 국제부차장 siinjc@seoul.co.kr
  • [길섶에서] 이분법 세상/육철수 논설위원

    세상살이만큼 복잡한 게 없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총명한 사람과 우둔한 사람, 친한 사람과 소원한 사람…. 따지자면 끝이 없다. 이런 사람들과 복잡다단한 조합관계로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이다. 하지만 단순한 것 또한 인생사다. 가벼운 수술로 사흘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아내는 “병원에 있으니 세상에는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만 있는 것 같더라.”라고 했다. 병원 신세를 지는 처지에선 당연히 그럴 게다. 건강을 잃은 마당에 남보다 더 잘나고 더 총명함을 따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달 전엔 노쇠한 장인어른이 갑자기 입원한 요양병원에 들렀다. 거기엔 삶과 죽음만 있었다. 병실에 누워 사투를 벌이는 사람에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해본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서로 지지고 볶고 미워하며 증오하는 것은, 어찌 보면 건강해서 그런 것이라고…. 세상만사가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극한 상황에 처해 봐야 세상을 단순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의 한계일까.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길섶에서] 땅을 사랑한 여인/임병선 체육부차장

    오죽했으면 모래 위의 사람 발자국이 바람에 흩어질까봐 대야를 덮고 아침마다 들여다봤을까. 중국 네이멍구 마오우쑤 사막에 나무를 심어 숲을 일군 인위쩐. 사막의 노총각에게 영문도 모른 채 시집가 일주일 목놓아 울다 삶의 희망을 붙들려고 시작한 것이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그리고 20년, 대략 80만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2004년 그곳을 찾아간 이미애씨는 “숲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만 종의 나무와 풀과 새와 다람쥐와 온갖 벌레에 의해 저절로 건설되고 통치되는 자연의 제국이라고만 알고 있던 나의 통념은 그녀가 피와 눈물로 이룩한 오아시스를 보는 순간 깨졌다.”라고 털어놨다. 그 위대한 일을 묵묵히 해온 그녀가 하늘의 해처럼 높아 보였다고 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스콧 니어링, 전우익 선생보다 울림이 컸던 건 보잘것없는 아낙이 철학자도 문인도 감히 꿈꾸지 못한 ‘행동의 풀씨’를 사방에 퍼뜨렸기 때문이리라.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했다는 어느 장관 후보자가 생각나 떠올린 얘기다. 임병선 체육부차장 bsnim@seoul.co.kr
  • [길섶에서] 웃고 있어도/ 함혜리 논설위원

    동료들과 한담을 나누노라면 자연스레 자녀들 이야기가 나온다. 말을 안 들어 속상하다거나, 대학 입시 준비하느라 고생하는데 성적이 안 올라 걱정이라든가,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든다든가 뭐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러면서 결론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며 혼자인 내 처지가 부럽다고 한다. 나는 대답한다.“하하하, 맞아요. 내 걱정이라고는 우리 강아지가 밥 안 먹는 것 말고는 없거든요.” 얼마 전에는 40대 초반의 어느 여인이 여덟살 아래의 부하 직원과 열애 끝에 결혼하기로 했다는 얘기가 화제가 됐다. 연상녀와 연하남이 결혼하는 게 뭐 그리 새삼스럽다고 그렇게들 즐거워하는지…. 얘기 끝에 내게 화살이 돌아왔다. 나도 연하남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다.“하하하, 나는 그런 재주도 없어요.” 요즘 유난히 가슴에 와닿는 노래구절이 있다. 조용필이 부른 ‘그 겨울의 찻집’ 중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대목이다.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웃어 넘길 때가 많다. 하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까.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산불 친구/염주영 논설실장

    조계산 한자락을 깔고 앉은 송광사. 우린 매표소 뒤쪽 소나무 숲에서 야영을 했다. 이튿날 부랴부랴 짐을 꾸려 산행길에 올랐다. 점심 무렵 정상을 넘어 선암사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오다 그만 등산로를 놓쳤다. 진작 선암사가 나타나야 할 시간인데 이름 모를 야산을 헤매고 있었다. 산중 겨울 해는 금방 넘어간다. 체력이 소진되고 주위가 어둑어둑할 무렵 저 아래 작은 마을이 보였다.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발 아래 토끼굴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등산용 도끼를 꺼내들었다. 주위 덤불을 긁어모아 토끼굴 입구에 불을 놓았다. 얼핏 산불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욕심이 눈을 가렸다. 불은 바람처럼 번졌다. 온마을 사람들이 동원되고도 자정이 지나서야 불길을 잡았다. 소나무 수백그루가 탔다. 마을 지서에서 방화범으로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대학생 신분이 감안돼 무죄로 방면되긴 했지만. 정월 보름마다 극성을 부리는 산불 기사를 읽다가 30년도 더 지난 옛일을 떠올려본다. 그 친구가 그립다. 염주영 논설실장
  • [길섶에서] 아들 생각/우득정 논설위원

    잠을 자다가도 몇번씩 깬다. 아들이 군에 가고 난 후 생긴 현상이다. 잠에 곯아떨어졌을 아들을 생각한다. 지금쯤 보초를 서고 있지 않을까. 슬며시 일어나 창밖에 손을 내밀어본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지만 여전히 차다.30년 전 내무반에 누워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잠을 청하다가 얼마 후에는 또다시 몸을 뒤척인다. 그러다 보면 휴대전화의 알람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아들의 기상시간이다. 유난히 새벽잠이 많았는데…. 그날 아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멀어져 갔다.‘걱정 말라’며 몇 차례 손을 흔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 부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머릿속은 그 옛날 전방 산야를 헤매고 있었지만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아내는 차창 밖을 스치는 눈 덮인 산줄기를 보며 ‘아직도 한겨울이네.’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간 뒤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이별한 줄 알았는데, 아들과의 이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보다. 얼른 봄이 왔으면.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길섶에서] 아빠의 마음/육철수 논설위원

    지방에서 작은 사업을 하는 친구 L을 근 10년만에 만났다. 화제는 자연스레 아이들 대학입학 문제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친구, 그때부터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술잔을 거푸 비우더니 속내를 털어놓았다. L의 큰딸은 지난해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그래서 유명학원이 즐비한 서울 강남에 전세를 얻어 딸과 아내를 보내 재수를 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도 시원찮았다고 한다. 건강까지 나빠져 성적이 지난해만도 못했단다. 어느날 딸이 “아빠, 미안해!”하며 눈물을 글썽이더란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L은 “뭐가 미안한데?”라며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등을 돌렸다고 한다.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야, 이 사람아! 대학 좀 늦는 게 무슨 대수야? 따뜻하게 안아주지 그랬어.”라며 핀잔을 주었다. 친구는 그제야 휴대전화를 주섬주섬 꺼내 딸을 연결했다.“미안하구나, 아빠가 옹졸했어. 그래, 힘내서 다시 시작하자….” 전화기 저쪽에서 딸의 풀죽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식의 입시가 부모의 성적이나 자존심은 아닐진대, 나도 비슷한 처지라 남의 일 같지 않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길섶에서] 아버지의 통바지/송한수 국제부 차장

    아버지가 바지 하나를 보냈다. 한창 젊었을 때 입던 것이다.“얘, 얼마 안 주면 고쳐 입을 수 있어.” 꼭 11년째 중풍을 앓고 계신 당신으로서는 생각이 간단찮았다. 다 큰 자식에게 입히고 싶었던 게다. 체격이 엇비슷한 녀석이라 조금만 손보면 괜찮으려니 하고. 아무렴, 그리 넉넉잖던 때 양복점에서 곧잘 빼입었다는 어른의 옷이니 때깔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런데 핀잔을 줘도 흘려들어 어쩔 수 없었다는 어머니의 걱정은 딱 들어맞았다. 옷 고치는 집에 갔더니 허리 둘레가 39인치 반이란다. 거의 10인치를 줄여야 한다.“아저씨, 어떻게든 좀…. 노인네가 무에 아깝다고 이다음 내려올 땐 이 바지 입고 오라시네요.” 혀를 차던 가게 주인은 줄자를 대고 바지를 돌려보더니 결단을 내렸다.“허벅지 쪽은 놔두고 허리만 줄여도 좋다면…. 젊은이한테 맞추진 못하고,33인치로 합시다.” 옷 걸치면 3인치를 꼭꼭 숨겨야 하니 웃음이 새 나온다. 갈 때마다 손사래를 쳐도 김치니 뭐니 바리바리 싸주는 어머니 고집도 만만찮다. 송한수 국제부 차장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책 도둑/임병선 체육부차장

    도둑질을 하면서도 화가 났다. 며칠 전 야근하다 한 후배 책상의 책더미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발견했다. 이거 봐라, 이런 책을… 어쩌구 했던 것 같다. 이토록 감칠 맛 나는 책을 안 읽고 왜 쌓아두는 걸까. 좋은 뜻이든 궂긴 의미든 구스타프 융이 말한 ‘정신적 팽창(psychic inflation)’의 즐거움을 저버리는 짓이라고. 신문사 문화부에는 책들이 많이 들어온다. 돌아보건대 초년병 시절 야근이 잦았던 터라 슬쩍한 적이 적지 않았다. 동료들은 무척 속이 상했을 것이다. 뒤늦게 사죄드린다.10년쯤 ‘손을 씻었던’ 것 같다. 이젠 메모를 남기고 가져온다. 그렇다고 책도둑을 면하는 건 아니겠지만. 물론 주인으로부터 나중에 씁쓸한 미소를 돌려받는다. 메모를 남기면서도 책을 쌓아두는 행태에 대해선 솔직히 화가 치민다. 많은 사람들이 책의 향연에 빠져들 기회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늘 시간에 쫓기는 와중에도 작은 배려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도둑이 이런 말 늘어놓는 게 적반하장일까. 임병선 체육부차장 bsnim@seoul.co.kr
  • [길섶에서] 강아지 입양/함혜리 논설위원

    친구 동생네 골든리트리버 종(種) 개가 달포 전 새끼를 낳았다. 여덟마리나 되는 강아지를 모두 입양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성견의 덩치가 커서 아파트에서는 키울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도 한마리 키우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당 딸린 단독주택에 살면서 개를 잘 키워줄 집을 찾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한 마리만 남기고 모두 입양을 시켰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는 암컷인데 다른 강아지들에 비해 덩치가 작고 약해서 입양 순위에서 밀린 놈이었다. 단독주택에 사는 분이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해서 친구 동생과 연결시켜 주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마지막 강아지를 데려가게 됐다. 입양가는 집에 관해 설명해 주었더니 친구 동생이 무척 흐뭇해했다. 그러더니 딸 시집 보내는 엄마처럼 하는 말이 걸작이다.“제일 약해서 걱정했는데 제일 좋은 집에 입양가게 됐네요.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더니….”강아지가 새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이별/최종찬 국제부 차장

    그가 홀연히 떠나갔습니다. 왜 떠나야 했는지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그를 알던 사람은 모두 황망한 표정이었습니다. 떠나기 전까지 그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처럼 이야기도 재미있게 했고 술도 마셨습니다. 천진한 얼굴과 잘 어울리는, 수줍은 표정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해맑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의 얘기 속에서는 책에서만 봤던 별난 세상들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그를 오지 전문가로 대접합니다. 북극과 남극, 베링해 그리고 히말라야 등 세상의 끝이란 끝은 다 가봤기 때문입니다. 그가 돌아다닌 나라만 해도 45개국이 넘습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의 속살을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의 심연을 우연히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해서 우리에게 뭔가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안녕이란 말을 하지 않으렵니다. 그에 대한 빛나는 기억들도 다 버리려 합니다. 그가 그곳에서 새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게 말입니다. 최종찬 국제부 차장
  • [길섶에서] 홍시/국제부 송한수 차장

    한겨울 외가를 찾아갈 때면 외할머니는 늘 그러셨다. 큰 외손자 왔냐며 보자마자 장독대로 가셨다. 어르신, 무엇을 놓칠세라 조심조심 되돌아 나오신다. 온갖 풍상에 뼈만 남은 듯 허약해진 당신이다. 쟁반엔 사랑이 그득했다. 몰랑몰랑 홍시 댓개가 담겼다. 할머니 두 볼도 추위 탓에 홍시처럼 빨개져 있었다. 살얼음 살짝 얹힌 홍시는 ‘사각사각’ 소리까지도 맛났다. 이런 노래가 있다.‘홍시가 열리면/생각이 난다/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 주던/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설날, 하늘나라로 가신 어른들을 떠올리는 이야기가 오갔다.“아∼따.76년 이맘 때라. 얼마나 추웠는지….”누구든, 무엇이든 이제 볼래야 볼 수도 없게 된 터에야 뒤늦게 가슴을 치는 게 인생사 아닌가. 새삼 되새길 필요도 없건만, 너무나 간단한 이치를 지키지 못하는 존재 또한 인간이다. 한겨울 외가 뒷마당 빈 감나무 사이로 울어대는 바람은 그리움을 무시로 불어 넣었다. 엊그제 홍시를 댓개 사다가 들여 놓았다. 그제야 어머니의 어머니 생각이 그득해진다. 국제부 송한수 차장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아이젠 단상/구본영 논설위원

    설연휴 끝자락에 산을 찾았다. 음력설과는 무관할 외국인들과 조우하자 미국에서 연수하던 시절이 떠올랐다.‘콜럼버스 데이’가 공휴일이라는 사실에 의아했던 기억 때문이다. 이미 아메리카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기념할 이유가 뭔가 싶었다. 길섶의 잔설(殘雪)에 몇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배낭 속에 넣어둔 아이젠 덕택에 무사히 내려왔다. 하산 후 아내는 곧 고교생이 될 아들에게 줄곧 훈계다. 진학 전에 영어·수학 기초도 다져놓고 고전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아이젠도 없이 먼 길을 떠나려는 아들이 걱정스럽다는 투다. 하지만, 사춘기 아들은 그런 간섭이 부담스럽기만 한 눈치다. 별 것 아닌 아이젠 하나가 더없이 요긴한 장비라는 것을 체험한 뒤끝이어서일까. 모자의 실랑이를 지켜보다 새삼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발명이나 발견도 결국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에게나 의미있다는 사실을. 인디안들에게는 늘 심드렁하게 보던 땅이었지만, 고통스럽고 긴 항해 후의 콜럼버스에게는 감격스러운 새 땅이었듯이…. 구본영 논설위원
  • [길섶에서] 대학생 세뱃돈/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설날 아침, 차례상 준비를 하느라 다들 바쁜 가운데 누군가가 불쑥 말을 꺼냈다.“올해부터 대학생들에게는 세뱃돈을 주지 말지. 대학생이면 이미 다 컸고, 각자 아르바이트 해서 용돈은 벌어 쓰잖아.”라고 했다. 형 부부, 우리 부부 모두가 찬성이었다. 우리가 대학생인 때에도 세뱃돈은 받지 않은 걸로 기억되는 데다 요즘엔 아이들이 부지런만 떨면 아르바이트 하기 어렵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요 녀석들아, 툭하면 어른 대우 해달라면서 세뱃돈까지 챙기려 들어?’하는 마음 또한 한켠에는 있었다. 세배하기 직전에 통보를 했더니 처음엔 황당해하다가 이내 수긍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세뱃돈 챙기는 꼴이 어른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복학생인 조카는 “제가 용돈을 드려야 하는데…” 운운하며 의젓한 척했다. 자식·조카 합해 대학생이 절반이 넘는지라 세뱃돈은 상당히 굳었지만 한편으로는 떨떠름했다. 애들이 이제 내 품을 벗어나는가 하는 기분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애들이 컸음을 확인하는 건 어쨌거나 흐뭇한 일이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 [길섶에서] 악몽의 대물림/황성기 논설위원

    몇년 전까지 꿈에 등장한 단골 메뉴가 입시다. 공부에는 별 관심없던 고교 시절을 보냈던 터라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지금에도 왜 내가 대입 시험을 치르는 꿈을 꾸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됐다. 그 꿈이란 게 대부분 악몽이었다. 시험 종료시간에 쫓긴다거나 백지 답안을 낸다거나 하는. 공부를 열심히 한 우등생이었다면 덜 억울할 꿈이다.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도 마음 한쪽에 웬만큼은 해야겠다는 강박증이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 악몽이 사라져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었더니 웬걸, 입시 꿈이 되살아났다. 주인공이 나에서 올해 고2로 올라가는 아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상황 설정도 비슷하다. 올들어 벌써 두번이나 아들의 입시가 꿈의 테마로 등장했다. 심지어는 “죽어도 공부 못하겠으니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말라.”는 꿈 속 아들의 외침에 가위 눌려 잠을 깨기까지 했다. 자식의 입시란 게 남의 일처럼 여겨지던 십수년을 보냈다. 입시 악몽의 재등장은 정말이지 반갑지 않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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