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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마음꽃/김성호 논설위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등지고 누린 잠깐 동안의 여유. 며칠 전 남녘 마을의 매화 놀이는 딱 그것이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한나절의 상춘. 활짝 피었으면서도 다소곳한 매화는 역시 일품이다. 꽃송이에 얹어 피어나는 상춘의 웃음꽃들은 덩달아 기분 좋은 덤이고. 시름 많은 일상에서 걸러낸 촌음의 향락은 언제나 신선하다. 꿈에 본 듯한 매화마을의 기분 좋은 잔상이 너무 짙었나. 비 그친 동네 공원이 유난히 을씨년스럽다. 공원을 빙 둘러선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엔 아직 먼 것만 같고. 약한 바람도 그저 차갑게만 느껴지는데. 그래도 여기저기 자리 잡은 젊은 연인들의 살가운 다정함엔 봄기운이 완연하다. 드문드문 앉은 사람들 사이를 느릿느릿 오가는 할머니들. 몸보다 더 큰 폐휴지 수레를 미는, 등 굽은 노인의 얼굴이 창백하다. 보고 난 신문지를 달라는 요구엔 퉁명스러운 대꾸가 더 많고. 매화마을에 지천인 웃음꽃들과는 영 딴판이다. 봄은 마음으로 온다는데. 세상은 차갑지만 마음꽃이라도 활짝 피웠으면. 훈훈한 마음꽃들을.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에도코 /이춘규 논설위원

    3·11 동일본 대지진 취재를 위해 이달 중순 도쿄에 갔을 때 도움을 받은 일본인 지인들과 통화하는 일이 잦다. 몇몇은 에도코(江戶子·도쿄 토박이)다. 에도코는 도쿄의 이전 이름인 에도의 사람이란 뜻. 도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을 가리킨다. 산업화 뒤엔 도쿄사람으로도 통한다. 방사능 공포가 에도코를 엄습했다고 한다. 오사카·오키나와로 피신한 에도코들이 많다. 지인 중 1명도 가족 중 노약자가 일본 서쪽지방에 피신했다가 돌아왔다. 부산 해운대와 서울에도 에도코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진 초기 질서를 지키고, 남을 배려하던 에도코들. 무사의 후예로서 절도가 약해졌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평범한 자연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도 일변했다. 달걀·생수 등 생필품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친다. 방사능 낙진을 걱정, 거리엔 인적이 드물다. 채소는 안 먹고 통조림·장아찌류만 먹는 사람이 늘었다. 변두리 지역 제한송전으로 촛불을 켜고 식사하는 에도코도 많다. 옹색하다. 간바레 에도코(힘내라 도쿄 토박이).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 습관/주병철 논설위원

    습관도 길들이기 나름. 1980년대 말 무렵까지 언론사에서는 원고지에다 글을 썼다. 반듯한 글, 삐뚤삐뚤한 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흘려쓴 글 등. 글씨체를 보면 누구 것인지를 금방 안다. 그렇게 친숙했던 원고지는 컴퓨터가 등장하고 나서 천대받기 시작했다. 컴퓨터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원고지는 계륵에 가까웠다. 컴퓨터 앞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서투름이나 미숙함보다 원고지에 수없이 썼다가 찢는 불편함이 더 컸으리라. 원고지의 추억이 아련해진 지금, 또 다른 ‘습관의 진화’와 씨름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랩톱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태블릿PC 시대가 도래했다. 문제는 습관의 진화가 도구의 진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시간적인 여유도 따라주질 않는다. 나쁜 습관, 좋은 습관이 있듯이 습관의 진화도 과거형과 미래형이 있다고 한다. “과거(습관)와 싸우지 마라. 미래(습관)를 창조하라. 그러면 미래가 과거를 정리해줄 것이다.” 미래학자들의 고언에 문득 귀가 쫑긋해진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박홍기 논설위원

    폐지를 줍는 한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깔끔한 차림의 할머니는 서울 종로구의 주택가에서 조그만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종이상자를 겹겹이 싣고서. 일흔은 족히 됐을 법했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분리수거가 워낙 잘 지켜지는 터라 종이상자나 폐지가 없지만 주택가엔 아직 일거리가 적잖다. 인심도 남아 있는 까닭에 종이상자 등을 차곡차곡 정리해 대문 밖에 내놓는다. 잘 가지고 가라는 듯이. 동네 분인 듯한 다른 할머니가 “뭘 그리 어렵게 해. 쉬기나 하지.”라며 인사를 건네자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 “어때, 집에 있으면 뭐하누. 돌아다니면 운동도 되고, 돈도 벌고, 한참 움직이면 밥맛도 좋고, 운 좋은 날엔 쏠쏠해.” 웬만한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서울의 한쪽에서는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들끼리 다투다 크게 다치는 사건이 일어날 만큼 삭막해진 세상에서. 그 할머니는 “좋아서 하는 일이야. 행복이 따로 있는감.”이라며 종이상자를 집어들었다. 정말이지, “행복이 뭐 별건감.”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자연/최광숙 논설위원

    기타의 감미로운 선율을 느낄 수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면 타레가가 그런 명곡까지 만들었을까 싶었다. 1993년쯤인가 스페인 여행 중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에 있는 그곳을 찾고서야 이해가 됐다. 이슬람 국가도 아닌 곳에서 만난 이슬람 예술의 극치가 바로 알람브라 궁전이었다. 사람이 빚어낸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할머니 두분의 속삭임이 들렸다.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그들은 정원에 핀 꽃을 들여다보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현장에 와서 꽃구경에 열중하는 할머니들. 나이가 들면 최고의 예술품을 만나도 자연보다 위일 수는 없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하지만 최근 일본 대지진 참사로 자연의 또다른 이면과 맞닥뜨리면서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된다. 어마어마한 자연의 위력 앞에 처참하게 무릎 꿇지 않으면 안 되는 왜소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었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철옹성 까치집/이춘규 논설위원

    작은방 창문 옆 거대한 나무에 지난해 말 까치집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까치들은 이후 작업을 계속했다. 영하 10도를 밑돌던 혹한의 1~2월에도 정교하게 움직였다. 부리로 작업했다. 3월 초 형체가 완성됐다. 윗부분엔 지붕을, 출입구는 두개만 낸 철옹성이었다. 형체를 갖춘 뒤에도 보강작업은 때때로 이어진다. 좁디좁은 출입구로 드나들고 있다. 높이 70㎝. 폭 50㎝쯤 되는, 나뭇가지들로 구축한 요새다. 눈·비와 천적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안전한 이곳에서 새끼를 낳아 기를 터. 까치 가족은 작업을 하면서 우리 가족에 대한 경계는 거의 풀어버렸다. 3m 정도 곁에 서서 지켜봐도 도망가지 않고 제 할 일을 한다. 최근 수많은 까치집을 관찰해 봤다. 까치집 형태가 무척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됐다. 철옹성형이 많고, 지붕 없는 것도 있다. 천적·경쟁자가 있는 곳에는 철옹성 형태, 아닌 곳은 개방형태일 것이다. 유해조수로 전락한 까치의 급증 비결이 거기 있었다. 까치가 다시 길조가 되는 일은 없을까.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 흙비/김성호 논설위원

    쉬는 날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린 봄비. 봄비야 언제나 을씨년스럽게 마련. 가뜩이나 봄 같지 않은 봄에 쌓인 불만도 큰데 휴일의 봄비라니 거추장스럽기가 오죽할까. 엎친 데 덮쳤다고 황사주의보에 흙비 예보까지 떨어졌고, 출근길 우산을 챙기라는 아내의 당부도 유난스럽다. 꽤 올 것 같던 봄비가 한나절을 못 넘기고 그쳤는데. 짧게 내린 흙비치곤 사방에 깔린 잔해가 너무 또렷또렷하다. 여기저기 오가는 차들마다 흠뻑 뒤집어쓴 추한 황사 자국들. 모처럼 광을 낸 구두 코에 생긴 추상화도 못마땅하고. 방금 지나친 아가씨의 연분홍 코트 속 하얀 셔츠에 앉은 노란 얼룩도 밉기만 하다. 봄마다 찾아오는 불청의 재난, 흙비. 조선시대엔 잘못된 정치나 못된 사람의 득세도 흙비가 쏟아지는 원인으로 쳤다는데. 그 흙비가 이봄엔 그저 만만하단다. 거대한 지진, 쓰나미에 얹힌 신음소리에 가려진 탓일까. 개나리·유채꽃 대신 세상을 어지럽게 물들인 봄의 어긋난 전령들. 해맑은 웃음꽃들은 언제나 활짝 피려나.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도그마/김성호 논설위원

    ‘이번 정차할 역은 성내역입니다.’ 사라진 성내역이란다. 지하철 2호선 객차 속 안내방송이 생뚱맞다. 역명이 잠실나루역으로 바뀐 지 반년이 지났는데. 귀에 콕 박히는 성내역의 느닷없는 부활이 혼란스럽다. 내처 육성으로 흐르는 정정방송. ‘잠실나루역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기관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왠지 반갑다. 망각의 작용은 참 편리하다. 성내역에서 바뀐 이름 잠실나루가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었다. 안내방송 때마다 생경하고 듣기 거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성내는 자연스럽게 잊혔고, 이젠 귀에 거슬리는 이름이 되었으니. 말 그대로 살게 마련인가 보다. 아니, 빠른 전환의 흐름에 익숙한 탓일까. 그 순치의 속도가 놀랍다. 저기 그 노인이 또 보인다. 매일 아침 맞닥뜨리는 ‘좌측통행’ 할아버지. 이젠 오른쪽 걷기가 널리 퍼져 자리잡았는데. 마주치는 이들에게 화까지 내가며 좌측통행을 소리쳐 고집한다. 나름의 도그마일 터인데. 망각의 순치와 꺾이지 않는 도그마의 사수. 어느 쪽이 더 나은 걸까.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청개구리/최광숙 논설위원

    엄마의 말에 반대로만 하던 청개구리. 우리 집안에도 청개구리가 있다. 7살짜리 개구쟁이 조카 녀석이다. 항상 청개구리 짓을 하며 말썽을 도맡아 피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따따따’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비가 오네.”라고 비오는 창밖을 가리키면 “비가 안 오면”이라고 엉뚱하게 되묻는다. 출근길 나에게도 “이모, 안녕히 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한다. 이모 회사를 물어보면 ‘마포신문’이라고 골지른다. 마포의 우리집과 신문을 교묘히 합쳐 놓는다. 좋아하는 ‘치즈케이크’ 사줄까 하면 듣도보도 못한 ‘포도케이크’를 사달라고 조른다. 최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그의 누나에게 띠를 물었더니 ‘원숭이띠’란다. 그 녀석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걸작이다. ‘초록띠’라고 우기는 것 아닌가. 태권도장에 다니는데 자신의 태권도 승급 띠 색깔을 갖다 붙이는 거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타고난 것 같다고 가족들이 결론을 내릴 정도로 매사에 삐딱한 조카. 반골 기질로 똘똘뭉친 그의 행보가 어디까지 갈는지….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이웃/주병철 논설위원

    6년 전 미국으로 연수 갔을 때다. 산도 물도 낯선 땅에 살림살이를 하려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럴 때 옆에서 도와 준 이들이 교민, 위·아래층의 아파트 주민, 현지 연수생들, 대학교 관계자 들이었다. 낯선 이웃이었다. 이사 왔느냐며 묻는 인사에서 뭔지 모를 친밀감이 와 닿았고, 필요한 것이 뭐냐는 도움의 손길에서 넉넉한 인심을 느꼈다. 머나먼 타국땅에서도 이럴진대 우리땅에서야 오죽하랴. 유난히 이사를 자주 다니는 편이어서 그런지 이웃의 정에는 익숙해진 것 같다. 그래서 이사를 다녀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이웃이란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서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대지진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을 돕자는 온정의 손길이 지구촌 곳곳에서 밀려들고 있다. 가깝게 지내든, 그렇지 않든 이웃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은 눈물겹도록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이웃사촌, 이웃나라의 소중함이 새삼 느껴지는 요즘이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가족/최광숙 논설위원

    미국 뉴욕에 잠시 머물 때 자주 가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다. 그곳에 가면 벽에 쭉 걸려 있는 사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몇대 위의 선조부터 부모님까지 가족 사진들이다. 마피아 일가를 그린 영화 ‘대부’에서 보듯 이탈리아인들의 가족 사랑은 유별나다. 식당에 이런저런 가족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으면 십중팔구 이탈리안 식당이라고 보면 된다. 살던 아파트 근처에는 인도인들이 많아 공원이나 지하철 등에서 그들과 마주칠 기회가 많았다. 그들의 특징 중 하나가 3대(代)가 거의 같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아기가 탄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 옆에는 항상 노부부가 있다. 인도인들도 이탈리아인처럼 전통적으로 가족을 중시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과거 우리도 저랬는데 싶어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핵가족 사회로 접어들면서 가족의 개념이 점차 축소되는 것 같다. 하늘이 내린 천륜이라는 부모와 형제들과의 인연도 저멀리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교통사고/박홍기 논설위원

    며칠 전 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엉엉 울면서 “엄마, 나 교통사고 당했어.”라며 전화를 했단다. 깜짝 놀란 아내가 “괜찮냐.”며 묻자 “몰라. 아파.”라고만 했다. 곧 이어 가해 운전자가 “병원으로 데려갈 테니, 그리로 오세요.”라고 전화했다.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넜을 때 우회전하던 승용차에 받쳤단다. 그것도 초록 신호등에서. 운전자는 “급히 코너를 돌다가 그만…정말 죄송합니다.”라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다행히도 상처는 크지 않았다. 겉보기엔 팔과 허벅지, 얼굴에 긁힌 자국뿐이었다. 정밀 검사에서도 타박상 이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지켰는 데도 사고를 당한 딸의 충격은 컸던 것 같다. “사고란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찾아오기도 한단다.”라는 위로도 겸연쩍기만 했다. 운전자는 보험처리 뒤 연락이 없다. 야속했다. 하지만 “그 아저씨, 많이 잘못했다고 했어.”라며 팔걸이를 한 채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딸이 대견하다. 그래, “다행 중에서도 천만다행”이라며 위안을 삼을 수밖에.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D라인 생각/김종면 논설위원

    여성의 아름다운 육체라면 우리는 으레 호리병 몸매를 떠올린다. 이른바 S라인이다. 아니 요즘은 X라인쯤 돼야 직성이 풀리는 몸매 마니아도 적지 않다. 조붓한 어깨 대신 단단한 사각어깨, 개미허리지만 복근은 근육질인 만만찮은 몸매가 새로운 지존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의 라인은 대부분 닦고 조이고 해 만들어낸 분재처럼 허망한 인조품. 왜 또 부질없이 ‘자연산 타령’이 떠오를까. 얼마 전 경기도가 주최한 저출산 극복 ‘경기맘 D라인 패션쇼’를 보니 자연이란 숭고한 말은 정말 포태한 여인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리우드 스타 데미 무어의 B라인 만삭쇼와는 또 다른 D라인의 도저한 육감(肉感)이라니…. 어쩌다 대한민국이 아이를 낳자고 외치며 임신부 패션쇼까지 여는 나라가 됐을까. 라인도 하도 많아 헷갈리는 세상. 날렵한 S라인이면 어떻고 둔중한 D라인이면 또 어떠랴. 무릇 곡선은 아름답다. 하물며 자연의 곡선이야 일러 무엇하리오. 이땅의 여성들이여, 부디 성형몸매 말고 D라인 좀 가꾸시라.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길섶에서] 침묵은 銀/박대출 논설위원

    TV를 틀면 온통 수다다. 집단으로 떠든다. 수명 또는 수십명이 등장한다. 요즘 오락프로의 대세다. 처음엔 생소했다. 시끄럽게만 들렸다. 마냥 채널을 돌린다. 리모컨을 열심히 돌리는 ‘컨돌이’였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재미있다. 소개하는 경험담들이. 지어낸 얘기들이 아닐까. 하지만 그뿐이다. 의심보다는 내용에 빠져든다. 언제부턴가 수다에 익숙해졌다. 경상도 출신 탓일까. 세 마디만 한다는 그 경상도. 다변(多辯)을 경박함으로 알고 자랐다. 침묵을 금()으로만 여겼다. 사내의 무거움으로 표현되는 줄 알았다. 나이가 늘어 말수가 늘었다. 다변까지는 아니지만. 딸아이는 여성 호르몬 때문이라고 놀린다. 어쨌든 가족과의 대화는 늘었다. 소통이라면 다행이다. 침묵도 표현이다. 그 자체가 의사 전달이 된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제3자가 읽기는 쉽지 않다. 멀리 있어도 알기 어렵다. 소통이 필요한 시대다. 대화가 소통을 늘린다. 이때의 침묵은 은(銀)이 아닐까.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서울신문은 재미있는 신문인가/강청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4년

    [옴부즈맨 칼럼] 서울신문은 재미있는 신문인가/강청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4년

    일고여덟살 무렵부터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신문을 펼치는 사람은 나였다. 아침에 눈만 뜨면 내복바람으로 달려나가 신문을 집어들고 와서 먼저 펼쳤던 것이 ‘TV편성표’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색연필까지 들고서 만화영화의 편성시간대에 체크를 하고, “~하고 마는데…” 하고 끝나는 프로그램 예고기사를 두근거리는 맘으로 읽기도 했다. 여덟 살 꼬마에게 신문읽기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의식이었다. ‘신문사랑’은 계속되었다. 열살 때는 연재소설에 맛을 들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야했다. “보지 마라.”는 부모님의 핀잔은 어린 가슴에 불을 댕겼고, 그 이후로 아침마다 가장 먼저 신문을 읽고 나서는 안 읽은 척, 새 신문인 것처럼 각을 잡아놓곤 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몰래 읽는 스릴이 최고였다. 나이가 들고 관심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스포츠 섹션, 시, 짤막한 칼럼, 독자참여란이나 오피니언 등의 순서로 ‘열독 코너’의 수준이 높아지고 범위가 확장되어 갔다. 서울신문에서 요즘 가장 즐겨 읽는 코너는 토요일자 서평 섹션이다. 마음만큼 책을 읽지 못하는 욕구불만을 서평으로 대리만족하곤 한다. 이렇게 자잘한 재미를 찾아 신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신문과 친해지고 그 이로움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하여 신문을 읽는가?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얻고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소소한 즐거움이 있기에 신문을 집어들게 된다. 매일 아침 펄떡거리는 새 뉴스를 상에 올리는 신문이지만 고정적으로 즐겨 찾는 밑반찬 같은 코너가 있다는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위안은 자못 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신문은 ‘재미있는’ 신문일까. 눈에 들어오는 편집과 디자인 덕에 전체적으로 읽어 나가기에는 쉬운, 젊은 느낌의 신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을 붙일 만한 피처기사들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취약하다는 점은 아쉽다. 유머는 한물간 것이고, 날씨는 지면 중간 애매한 곳에 있어 가독률이 떨어진다. 만화, 만평, 운세는 다른 신문과 별반 차이가 없다. 풍부하고 충실한 내용 이외에도 독자의 충성도를 높여줄 ‘갈고리’를 추가로 장착할 것을 제안한다. 서울신문은 지난 1954년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연재하면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한국 신문소설의 역사, 나아가 현대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는 시대지만 여전히 연재소설이 주는 즐거움은 무시할 수 없다. 과거의 전력을 살려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실험적인 작품의 연재는 어떨까. 서평이나 문화면에서도 차별화를 권한다. 서평 전문기자의 충실하고 풍부한 서평은 지금도 좋다. 책의 주제를 쉽게 함축한 디자인에는 눈이 덜컥 가서 걸린다. 하지만, 책을 고르는 기준이 궁금하다. 그냥 화제작이나 신간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다시 읽어 볼 만한 책이라든지 특정 주제의 책을 묶어 소개하는 식으로 기준을 다양화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구색갖추기용 지면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이 신문을 읽을 때 먼저 1면을 대충 훑어보고 그 다음 뒤로 넘겨 신문을 펼친다고 한다. 오피니언 면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좋은 거리가 ‘길섶에서’와 ‘씨줄날줄’ 이다. 주제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담담히 풀어낸 글은, 편하게 앉아 현명한 인생선배의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 같아 좋다. 기사를 읽기 전 혹은 후에 쉬어갈 수 있는 코너가 많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알차고 풍부한 내용이라도 쉼 없이 읽어 내려면 생각만 해도 숨이 찬다. 물론 그런 것이 신문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정공법 말고 다른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젊은 층이 신문을 외면하는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도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어릴 적 그 설렘을 다시 떠올리며 깊이 있는 신문, 살아있는 신문에 더해 재미있는 신문, 정이 가는 서울신문이 되기를 기대한다.
  • [길섶에서] 인사/박홍기 논설위원

    일본 도쿄에 근무할 때 이따금 일본 이발소를 찾았다. 코리아타운에 교민 이발소도 있지만 가깝고 경험도 할 겸해서다. 들어서자 “어서 오십시오.”라며 깍듯하게 45도 인사를 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기다리다 보니 가는 손님에게 “안녕히 가십시오.”라며 90도 허리를 숙이지 않는가. 오는 손님보다 가는 손님에게 더 정중하게, 더구나 볼 수도 없는데. 익숙하지 않은 터라 조심스레 묻자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손님들을 위한 예우”라고 했다. 나머지 손님들에게 ‘보지 않는데도 저렇게 정성을 보인다면’이라는 인식을 심어줘 훨씬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옷가게든, 제과점이든 들렀다가 그냥 나올 때 역시 상냥하게 웃으며 “또 오십시오.”라는 인사를 받곤 했다. 많고 많은 가게 중에 자기 가게를 찾아준 손님은 비록 빈손으로 가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들를 수 있는 고객’인 만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맞다. 설령 상술이면 어떤가, 기분 좋으면 그만이지.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모자/최광숙 논설위원

    겨울철 내내 가방에 장갑과 모자를 챙겨 다닌다. 그 전에야 칼바람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머리로 길거리를 활보해도 견딜 만했지만 요즘은 다르다. 모자를 쓸 때와 쓰지 않을 때의 그 ‘현격한’ 차이를 알고부터는 모자는 소중한 친구가 됐다. 계기는 미국에 잠시 머물 때가 아닌가 싶다. 워낙 춥다 보니 그곳 사람들에겐 모자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정장 차림의 남자들도 털모자를 눌러쓰고 출근했다. 여성들이야 패션까지 겸하니 모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실용주의가 뭐 별건가. 추우면 모자 쓰고 점퍼 입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사정이 좀 다르지 않나 싶다.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추워도 외출길에는 가급적 모자 쓰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1월 수십년 만의 추위에 중절모를 쓴 한 중년 남성을 만났다. 연예인이나 쓸 법한 모자를 그는 용감하게 쓰고 다니는 것 아닌가. 유럽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 때문일까. 거리에서 모자 쓰는 멋쟁이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화신(花信) /김성호 논설위원

    집 안에 천리향 향기가 가득하다. 이맘때면 언제나 기다려지는 단골 봄 손님. 겨우내 베란다에 웅크렸다가 한풀이하듯 진한 향을 내뿜고 살아나는 현신이 고맙다. 화신(花信)의 첨병은 매화라지만. 설중매의 고매한 품격이야 어디 쉽게 범접할 수 있을까. 봄마다 애틋한 향으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내 집 천리향. 그 오랜 친구 같은 수수함은 그래서 더 반갑다. ‘소 눈까지 눈이 쌓였다.’는 설한도 다 갔나 보다. 봄 길목 입춘이더니 우수를 지나 개구리가 겨울 잠을 터는 경칩이다. 꽃샘 추위가 마지막 발악을 할 것이란 예보는 이제 두렵지 않은데. 그래도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하소연은 왜 이리 많은지. 벚꽃이 예년보다 사나흘 앞서 핀단다. 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들이 전해졌나 보다. 화신이라고 어디 모든 이들에게 다 좋기만 할까. ‘늙어 가니 봄이 더디기를 바란다.’는 옛 시성의 한탄도 있고. 그래도 화신은 약동과 소생의 희망일 터. 천리향의 향은 이렇게 진하기만 한데….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만사(萬事) 감사/황진선 특임논설위원

    소소한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고, 경치를 볼 수 있으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런 당연한 일에도 감사하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데 연극 ‘바보 추기경’을 보면 그런 의문이 가신다.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 중 돌아가시기 바로 전의 고통과 고독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연극 속 김 추기경은 배변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차고 있다가 자신을 돌보던 수녀에게 못 볼 것을 보게 한다. 그러고는 “주님, 마지막 자존심까지 내려 놓으라 하십니까. 오늘 저를 데려가 주시면 안 됩니까. 배변이 이렇게 감사한 일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라고 하소연한다. 연극이 끝나자 누구 할 것 없이 눈가가 젖어 있다. 대부분 서너 차례 운 것 같다. 90세에 가까운 아버지는 얼마 전 방광암 수술을 받았는데 용변뿐 아니라 배변도 힘들어하신다. 그러니 병원 응급실에도 자주 가신다. 요즘 새삼 세상엔 감사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걸 느낀다. 황진선 특임논설위원 jshwang@seoul.co.kr
  • [길섶에서] 소망석/박홍기 논설위원

    청계천을 다시 걷는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에도 발길이 늘었다. 외국 관광객들도 눈에 띈다. 청계천을 걷다 보면 무심코 지나치는 곳이 있다. 소망석이다. 청계천의 상징 조형물 ‘스프링’ 쪽. 초입에서 내려가면 바로 눈에 띈다. 팔도의 정기를 담은 팔석담 부근이다. 당초 소망석은 없었다. 2008년 유선형 석재 그릇, 수반 형태로 설치됐다. 팔석담에서 동전 던지기가 시작되면서다. ‘행운의 동전 던지기’라는 입간판도 서 있다. ‘동전을 던지며 고향도 느끼고 간절한 소원도 빌어 보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엄마 손잡고 나온 꼬마들도, 젊은이들도, 나이가 지극한 노부부도, 배낭을 멘 외국인들도 소망석 앞에 서서 동전을 던진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처럼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조그맣고 단조로운 소망석에 동전을 던지는 순간은 자못 진지하다. 의도하든 하지 않든 꿈과 희망, 정성이 실린다. 불우이웃을 돕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한닢 한닢 모여 현재 3600만원이 넘었단다. 오늘 또 던진다.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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