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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202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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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입춘 소망/오일만 논설위원

    입춘은 봄의 전령사다. 24절기 중 가장 춥다는 대한을 지난 터라 땅속 깊은 곳에서 봄이 싹트는 소리가 들리는 시기다. 아무리 혹독한 추위가 닥쳐도 입춘을 지나면 봄의 희망이 생긴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이란 입춘첩을 큼지막하게 대문 양쪽에 붙인 것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봄을 뜻하는 춘(春) 역시 햇볕을 받아 풀이 돋아나오는 모양이다. 봄을 시각적으로 제대로 표현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봄은 생명과 희망의 첫 단추로 통했다. 조상에게도 봄은 생명의 덕을 알리는 존재였고 사형수라도 입춘을 지나면 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생명을 키우는 계절에 목숨을 뺏었던 것 자체가 하늘의 뜻에 따르지 않는 불경스런 행위였다. 봄에 서둘러 씨 뿌리지 않고, 여름에 땀 흘려 김매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다고 일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연일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입춘 추위’가 몰아치고 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오는 것처럼 엄혹한 겨울도 봄을 막지 못한다. 며칠 있으면 입춘이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의 기운을 느끼듯 절망의 터널에서 희망을 보는 새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나이테/박건승 논설위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인연’이라 쓰고 ‘질기다’라고 읽는 모양이다. 나와 안경의 사이가 그런 것 같다. 안경과 처음 인연이 닿은 것이 열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어느덧 세 개씩 매일 번갈아 써야 하는 처지다. 돋보기 두 개와 초고도근시 안경 하나. 돋보기 하나는 사무실에서만 쓰고 다른 하나는 집과 지하철 공용이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마다 안경을 갈아 끼우는 일은 번거롭기 이를 데 없다. 허둥대다 돋보기를 낀 채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다. 돋보기를 쓰고 점심 먹으러 갔다가 사람을 못 알아봐서 난감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몸이 열 냥이면 눈이 아홉 냥이라더니…. 나이 한 살 더 먹었으니 눈은 더 침침해질 게다. 그렇다고 세월 탓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눈이 침침해지는 것은 더이상 쓸데 없는 것을 보지 말라는 소명(召命)이고, 귀가 어두워지는 것은 세상의 명리를 떠나 깨끗하게 살라는 뜻이라던가. ‘인생의 어둠과 빛이 녹아들어/ 내 나이의 빛깔로 떠오르는/ 내 나이를 사랑하고 싶다.’(신달자 ‘나는 내 나이를 사랑한다’)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길섶에서] 스마트폰과 명절/손성진 논설실장

    젊은 사원들이 음식상을 앞에 두고 각자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신문사 어느 부서의 회식 장면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부서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앞사람, 옆사람에게 술을 권하는 회식 문화에 익숙한 기성세대들에겐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스마트폰이 건전한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것은 회식에서만이 아니다. 가족, 친지 모임에서도 어린 청소년은 물론이고 성인들까지 스마트폰을 보며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는 것은 보기 드물지 않은 풍경이 됐다. 오래전 명절이나 제삿날에는 가족, 친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같이 모여 윷놀이도 즐기곤 했다. TV가 안방에 들어오고 나서는 그런 화기애애한 대화나 놀이 문화도 사라졌다. 모두 멍하게 화면만 쳐다보며 한마디씩 할 뿐이다. 그래도 한 프로그램을 같이 보았기에 유대감은 있었다. ‘바보상자’ TV의 자리를 스마트폰이 이어받았다. 다른 게 있다면 각자 하나씩 TV를 가진 셈이다. 그러니 유대감이라고는 없고 개인의 관심 영역만 있을 뿐이다. 스마트폰의 전통적인 가족 문화 파괴다. 이번 설 연휴에는 스마트폰은 잠시라도 꺼 두자.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공기 자랑/서동철 논설위원

    출근하려면 광역버스를 한 시간쯤 타야 하는 서울 주변 신도시에 살고 있다. 계획도시답게 편의시설이 다양하게 들어서 생활 여건은 좋지만,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편치가 않다. 그래서 친구들과 주거 환경을 놓고 이야기를 나눌 때면 “우리 동네는 공기만 좋아” 하면서 농담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공기 하나는 정말 좋다. 그래서 그런지 낮 동안 서울에서는 담배 연기에 비교적 무신경하다가도 아침저녁 집 주변에서는 관대해지질 못한다. 퇴근길 한 시간 동안 버스에 갇혀 있던 애연가들은 내리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멀리서라도 담배 연기가 느껴지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상한다. ‘공기만 좋은 동네’에서 그것마저 망치는구나 싶다. 영하 10도 안팎의 추위가 이어지면서 훼방꾼이 늘었다. 출근길 정류장에서 승용차에 탄 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엊그제는 학교에 가는 딸을 태워다 준 엄마 운전자인 듯했다. 승용차가 내뿜은 배기가스가 쉴 새 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덮쳤다. 말을 안 했을 뿐 표정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이튿날은 ‘아재’ 운전자였다. 공기 좋다는 자랑도 이제는 그만해야겠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김영란법과 설 선물/최용규 논설위원

    어느 정도 인정미 있는 사람이라면 “넌 퍼주기 좋아해서 부자 되긴 틀렸다”라는 핀잔을 한두 번은 들었을 것이다. 자식이 걱정돼서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저 아이 성정이 원래 그러니까…’, 즉 체념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우리네는 그렇게 남한테 뭐가 됐든 줘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피를 타고났나 보다. 크든 작든 선물은 참 다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어찌 보면 내 맘 편하자고 주는 측면도 있고, 자식을 돌봐 주는 학원 원장에게 줄 보따리를 싸는 어미의 심정처럼 고마움 반 기대 반일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이유를 대려면 한이 없을 듯하다. 받으면 좋고 주면 뿌듯하고…. 이런 물건이 우리네 선물 아니겠나. 그저 단순 상품이 아닌 다정이 깃든 ‘묘한 것’이기에 김영란법도 선물을 아예 금한 게 아니다. 설을 앞두고 소고기·굴비가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을 터. 반 토막 난 선물용 소고기 시장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사과 배도 좋지만 고기를 보냈으면 하는 이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 궁하면 통한다고 했나. 소고기 대신 돼지고기 선물이 늘었다고 한다. 주고받는 이의 마음은 어떠할까.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길섶에서] 기부하는 사람들/이동구 논설위원

    서울 중랑구청에는 땅 수만평을 기부한 독지가의 흉상이 있다. 시세가 400억원이나 되는 땅이지만 개발 잠재력 등 미래 가치를 고려한다면 기부금액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한쪽 벽면에는 유물 기증자를 알리는 명패가 빼곡히 붙어 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개인 소장품들을 흔쾌히 내놓은 사람들로, 그 이름은 박물관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역대 최고 액수라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기부금은 우리에겐 좀 낯설다. 100만 달러를 약속한 보잉사를 비롯해 석유기업, 카지노 재벌 등 대기업 몇 곳이 1억 달러(1200억원 상당)의 막대한 기부금을 내놓기로 한 것. 기부자들은 취임식 관련 행사에서 대통령과 새 정부의 실세들을 만날 수 있어 ‘접견권 판매’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소중한 것을 내놓을 수 있다면 찬사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1억원 이상 기부한 아너소사이어티(고액기부자 모임) 회원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살면서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의 100분의1만큼이라도 기부할 수 있을는지….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그대, 잘 가게”/송한수 체육부장

    친구, 거긴 따스한가. 꼭 요맘때였어. 자네가 세상을 버린 게. 몹쓸 사고 탓에 말이야. 이제 마음 푹 놓게나. 하늘에 고하네. 어기찬 자네 아들 소식을. 어엿이 대학 합격증을 받았지 뭔가. 온 나라에서 내로라할 명문이라지. 인제야 흐뭇하게 웃음꽃 피우게 생겼군. 자네를 보내고서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승에 남은 벗들과도 기쁨을 나눔세. 자넨 ‘텁수룩 사나이’였지. 숯검댕이 턱을 뽐내곤 하더니. 그럼 고백하겠네. 힘겹게 면도한 그 얼굴로 내 얼굴을 비빌 땐 ‘까칠까칠’ 싫기도 했노라. 귀에 박힌 명언(?)도 꾸역꾸역 떠오르네. 대한민국 오천만 국민이 자동차를 살 때까지 ‘무소유’로 남겠다던. 오지도 않을 ‘고도’처럼 기다려지는, 오늘날 국가지도자 마음가짐 아닐까 싶네. 때마침 올해 큰 선거가 있네. 친구 누군간 벌써 자네 모습이 흐릿하다 털어놨어. 절대 서운해 마소. 기억도, 추억도, 끝내 묻히고 말거늘. 철없이 일찍 흩날린 눈발이, 감쪽같이 가을을 지워버리듯. 머릿속 ‘지우개’ 또한 분명히 있다고 믿네만. 그리고 차마 못할 말을 던지네. 이젠 눈을 감으라고. 나도 자넬 놔줄까 하네. 머잖아 봄이야. 송한수 체육부장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실패/박홍기 수석논설위원

    꼬마가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잘하나 싶었는데 ‘페일’(fail·실패)이라는 문자가 떴다. 그런데도 좋아했다. 지켜보던 아빠가 의아해 물었다. “페일이 무슨 뜻인지 아니?”, “응, 실패.”, “실패가 뭔데…?”, “다시 하라는 거잖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크고 작은 실패가 많다. 나이와 상관없다. 어리면 어린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대체로 ‘실패’라고 한다. 노력이 많을수록, 목표가 클수록 실패의 강도는 크다. 무시하고 넘길 수도 있지만 실망해 풀이 죽거나 좌절하기 일쑤다. 방황이 뒤따를 수도 있다. 요즘 대학들이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짧게는 고교 3년, 길게는 공부라는 걸 알고 대학에 합격했을 때까지의 결과다. 길고도 긴 기간이다. 취직도 마찬가지다. 희비가 갈릴 수밖에 없다. 상대가 있는 경쟁에선 불가피하다. 다만 실패의 두려움을 털자. 새로운 도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실패와 싸우지 말고, 실패로부터 배우고, 실패를 즐겨라. 쉽지 않겠지만 꼬마처럼 “다시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다. 기회는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찾거나 만드는 것이다. 실패도 때론 힘이다. 박홍기 수석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마당 있는 집/황수정 논설위원

    지인의 집 벽난로에 여럿이 둘러앉아 장작불을 지폈다. 타닥타닥 불티 날리는 소리가 어찌나 경쾌하던지, 맨숭맨숭한 얼굴들에 금세 화색이 번졌다. 땔감을 건사하는 방편도 얘깃거리. 아침저녁 동네 산책길에 나무쪽을 주워 모으거나 이도 저도 궁해지면 장작을 산다고. 사방을 걸어 잠근 아파트 사람들에게야 재미진 이야기다. 예전 우리 집 마당 귀퉁이에는 조촐한 가마솥 아궁이가 있었다. 보리차를 끓이든 시래기를 삶든 부엌에서 못할 것도 없는 일거리들인데, 저녁 어스름에 엄마는 꼭 한두 가지쯤 아궁이로 들고 나왔다. 부산했던 동선이 병풍처럼 멈추던 시간. 이글이글한 불잉걸이 하얗게 사위도록 하염없이 앉았었고. 지금은 알 듯도 하다. 삶의 매듭을 다스리는 지혜가 그날들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삶을 달래는 기도는 깊은 산 선방(禪房)에만 있지 않다는 것. 욕심이 생겼다. 큰 집이 아니라 마당 있는 집. 아궁이 하나 놓을 수 있게만 마당이 깊은 집. 호되게 심란한 날은 불땀도 세게, 소소하게 심란한 날은 불땀도 약하게. 마당집 아궁이 생각만 하면 나는 한동안 실실 웃을 것 같다. 이런 날에는 지복(至福)이 별건가 싶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조용한 장례/황성기 논설위원

    오랜 친구의 부친상 소식을 다른 친구에게서 듣고는 느낀 극심한 당혹이란. 장례를 치른 뒤여서 그 친구에게 ‘위로’와 더불어 섭섭하다는 ‘유감’을 먼저 전화로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는 “조용히 장례를 치렀으면 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들려주었다. 장남인 처지에서 부친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고 한다. 친구를 위로하는 ‘조문 모임’을 몇몇 친구들끼리 가졌다. 친구들이 모여 얼굴을 보며 슬픔을 나누고 안부도 주고받을 수 있었으니 그 또한 뜻깊었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만 모여, 고인을 기리는 ‘조용한 장례’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임권택 감독의 1996년 작 ‘축제’는 어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우리 장례 풍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다. 5년 치매를 앓다 저세상으로 간 87세 노모 혹은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러 시골집에 모여들어 울고 웃고, 싸우고, 화해하는 인간 군상을 그린 작품인데, 기억에 남는 건 그 떠들썩한 장례였다. 40년 전 아버지의 장례를 ‘축제’ 못지않게 집에서 치렀다. 다시 시끌시끌한 장례를 치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조용한 장례에 쏠리는 마음을 느끼지만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난감하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불편한 손님/최용규 논설위원

    A에게 밤은 고단한 하루를 멎게 하는 시공이 아니다. 이경을 지나 삼경쯤 되면 몽경에 빠져 허우적대는 또 다른 일상과 만난다. 자기가 무슨 석가모니나 된 양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가부좌 틀고 연신 고개를 처박다 맥없이 쓰러진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괸 채 칼잠 자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위태위태하다. 애 낳기 전 잠귀 어두운 A의 짝꿍은 이 낯설고 괴이한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20대 후반쯤인지, 서른 들어서인지 생긴 A의 선잠은 그렇게 30년 넘게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불편한 손님’이었다. 그렇다고 신경정신과 문 한번 두드린 일 없고, 약 한 봉지 입에 털어 넣은 적이 없는 A의 무모함이란…. 밤마다 슬그머니 찾아온 손님과 어울리다 보면 몇 번이고 깨곤 한다. 들킬까 봐 조심조심 누워 눈 감으면 어느새 다른 손님이 A 곁에 바짝 붙어 있다. 무쇠라도 버티지 못했을 노동에 팔 근육이 엉망이 된 A의 짝꿍. 새벽마다 비명에 가까운 신음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A의 선잠은 꽤 쓸 만한 물리치료사 옷을 걸쳤다. 다르지만 A나 A의 짝꿍에게 고통이었을 그 ‘불편한 손님’이 서로 선물이 될 줄 꿈엔들 알았으랴.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길섶에서] 멀리 보는 안목/오일만 논설위원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중국 대륙을 놓고 격돌한 인물이다. 군인 출신의 장은 격정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고 교사 출신의 마오는 낙관적이지만 치밀한 전략가로 유명하다. 정반대 기질의 두 사람은 사사건건 철천지원수처럼 으르릉거렸지만 단 하나 일치점이 있었다. 바로 인재 양성이다. 항일전쟁(1931~1945년) 시기 380여만명의 군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병력이 모자라 늘 고민했지만 이들은 경쟁적으로 우수한 청년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냈다. 미래를 짊어질 인재들의 목숨을 보전하고 전쟁 이후 중국의 재건을 대비한 조처였다. 개혁 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도 참혹한 문화대혁명이 끝나자마자 많은 청년 인재들을 선진국으로 보내 과학 기술을 배우게 했다. 이들은 10년, 20년 뒤에 돌아와 중국을 재건했다. 죽의 장막에 갇혔던 중국이 유인 우주선을 쏠 정도로 발전하고 단시간 내에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비결도 여기에 있다. 5년마다 돌아오는 대선. 목전의 표심을 유혹하려는 사탕발림들이 또 난무한다. 단기 실적에 급급하다 보니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기도 어렵다. 국가의 미래를 보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절실하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한잔 술/박건승 논설위원

    “아저씨, 무얼 하고 계세요?” “술을 마시고 있단다.” “왜 술을 드세요?” “잊어버릴 일이 있어서란다.” “무얼 잊고 싶으세요?” “부끄러움을 ~”, “뭐가 부끄러우세요?” “술 마시는 게 부끄럽단다.” 어린 왕자는 ‘어른들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어’란 생각을 하며….(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오늘도 어둠이 골목을 서성일 무렵, 허름한 선술집에서 한잔 술로 찌든 하루를 씻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을 게다. 피곤함에 한잔, 분위기에 한잔…. 우리나라 성인 남성 열에 여덟이 술을 마신다고 하던가? 그런데 2홉들이 소주 한 병에 5000원을 받는 식당이 부쩍 늘었단다. 그럼 한 잔에 600원이란 소리 아닌가? 주당들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하기야 출고 가격 핑계대고 한꺼번에 1000원 이상 올려 버렸으니. 이제 웬만하면 ‘혼술’ ‘집술’ 해야겠다고 아우성이다. 술 못 마시는 젊은 직장인들도 맘이 편치 않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리라. 술잔 몰래 쏟으려다 꼬리 잡히면 600원을 그냥 버리느냐는 상사 눈꼬리가 더 올라갈 테니. 담배 한 값 4500원, 소주 한 병에 5000원인 세상. 직장인들의 요사이 한잔 술 안주는 소주 값이 아닐까. 팍팍함에 대한 넋두리와 함께.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길섶에서] 만발공양/서동철 논설위원

    서울 조계사에는 신도들을 위한 공양간인 만발식당이 있다. 절을 찾은 대중에게 차별 없는 마음을 담아 베푸는 한 끼 식사를 뜻하는 만발공양(萬鉢供養)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바리때에 수북이 밥을 담은 만발(滿鉢)이자 많은 이와 나누는 만발(萬鉢)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계사 공양간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는 않다. 만발식당을 이용하려면 이 절 신도로 ‘공양카드’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밥값으로 2000원을 내야 한다. 이 시대 서울 한복판 인심으로는 감지덕지해야 하나. 봄·가을에는 지역 어르신을 초대해 한 끼 식사를 나누는 만발공양 행사가 전국 여기저기 사찰에서 열린다. 이런 자리는 되도록 많은 어르신을 모시고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즐거운 하루를 만들어 드리는 게 미덕이다. 팔공산 선본사의 만발공양은 인상적이었다. 소원을 들어준다 하여 입시철이 다가오면 더욱 붐비는 갓바위 부처가 있는 곳이다. 절을 찾는 사람 모두에게 차별 없고 대가 없이 제공하니 만발공양의 정신이 살아 있다. 밥과 시래깃국, 짠지가 전부지만 힘들게 산에 오르니 꿀맛이다. 이렇게 멋있는 음식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상실의 시대/최광숙 논설위원

    오랫동안 지녔던 물건을 잃어버리고 나면 속상하다. 지난해 15년 동안 사용하던 화장용 솔을 잃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이상한 일은 잃어버린 그것과 똑같은 상표의 솔을 다시 손에 쥐었는데도 상실감이 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새 솔을 볼 때마다 예전의 그 솔이 생각난다. 외국 여행길에 선배와 같이 그것을 사던 추억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행동 연구를 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획득에 의한 행복’보다 ‘상실에 의한 고통’을 더욱 크게 느낀다고 한다. 만약 평생 모은 저축을 두 배로 불릴 확률이 85%이고 반대로 전 재산을 날릴 확률이 15%인 내기를 하라고 하면 웬만히 간이 크지 않고서는 응할 이가 별로 없는 이유다. 이는 프린스턴대 심리학 교수인 대니얼 카너먼의 실험을 통해서도 밝혀졌다. 사람들은 새롭게 무엇인가를 얻게 되는 행복보다는 자신이 소유하던 것에 대한 상실을 더욱 아프게 느낀다고 했다. 요즘 온 국민이 ‘순실증’을 앓고 있다. 도둑맞은 민주주의, 법치주의….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어렵게 쌓아 온 소중한 가치이기에 국민의 가슴속 생채기는 쉬 아물지 못하고 있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정년퇴직/이동구 논설위원

    이맘때면 기대 반, 아쉬움이 반이다. 새해를 맞아 좀더 나은 경제력과 지위, 건강 등을 꿈꾸다가도 곁에서 멀어져 가는 이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엊그제까지 함께 일했던 선배와 동료들이 정년퇴직이란 이름으로 직장을 떠난다. 60세 의무 정년이 시행되기 전인 지난 2년간은 만 55세가 된 직장인들이 특히 많이 떠났다. 한때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 등의 용어들이 크게 유행했다.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설 당시 직장인들의 어려운 처지를 빗대거나 위로해 주던 말이다. 퇴직 후 집에서 삼시 세 끼를 해결하는 남편을 일컫는 ‘삼식이’는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주부들이 남편의 은퇴 시기가 되면 몸이 아프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는 ‘은퇴 남편 증후군’이란 용어도 생겼다고 한다. 은퇴는 누구나 경험하지만 연습해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준비는 할 수 있다. 미국의 몇몇 기업은 퇴직 준비 기간을 최대 5년까지 준다고 한다. 임금피크제 등으로 비용부터 줄이려는 우리 기업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얼마 전 찬바람 속에 정년을 맞이한 선배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1월의 트리/박홍기 수석논설위원

    거실엔 아직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다. 해마다 12월 초에 만들었는데 이번엔 늦었다. 성탄절 즈음 생각났다. 창고에서 트리가 든 상자를 꺼내 조립했다. 기둥을 세우고 줄기와 이파리를 하나하나 꽂았다. 방울, 반짝이, 별…. 크고 작은 갖가지 장식물을 달았다. 솜 조각도 군데군데 얹었다. 조그만 전구가 붙은 줄을 트리에 둘렀다. 화려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끝났다. 설날 직전까지 놔둘 작정이다. 돌아가며 이유를 댔다. 밤마다 수시로 변하고 깜박이는 빛들의 놀이가 좋다. 삭막한 겨울을 따뜻하게 바꿔 주는 것 같아 좋다. 마음을 달래 주고 감싸 주는 듯해 좋다. 성탄의 축복이 일년 내내 있으면 더 좋겠다 싶어서. 때가 지났다고 얼마 안 돼서 치우는 게 아쉬워서. 딸 친구들이 놀러 왔다 트리를 보더니 ‘아직도’라는 의아함도 잠시, 오히려 반겼다. 트리 옆에 앉아 사진도 찍었다. 야간자습이다 학원이다 힘겨운 애들이 즐거워하자 아내가 웃는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의 틀을 가끔 벗어나는 것도 좋다. 남들에게 피해는 주기 않는 선에서….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더 좋다. 1월의 크리스마스트리, 철 지났지만 훈훈해서 좋다. 박홍기 수석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나이/손성진 논설실장

    한 살을 더 먹었다. 어릴 때는 참 더디게 가던 세월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다. 조금씩 문제가 생기는 건강과 다가오는 은퇴를 놓고 50대쯤이면 누구나 걱정을 한다. 그러나 올해 만 97세가 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앞에서 이런 걱정을 하는 건 응석에 불과하다. 100세에 가까운 그가 인생에서 가장 보람찼던 시기로 꼽는 때는 60~75세다. 50대에 여생의 계획을 세우고 은퇴해서도 일과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노년에도 얼마든지 알찬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나이를 먹는 게 더는 두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부터 나머지 인생에 대한 준비를 차근차근하면 인생의 황금기를 15년 이상 누릴 수 있다고 하니 다가오는 은퇴와 노쇠가 겁나지 않는 것이다. “벌써 60이 아니라 이제 60”이다. 올해 만 83세가 된 이시형 박사는 스스로 50대로 칭한다. 그는 40대까지는 타고난 유전자로 살지만 그 후는 제2의 유전자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바른 생활습관인데 운동과 좋은 식사 요법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는 못 속인다”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자신의 몫이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고령자의 정의/황성기 논설위원

    일본노년학회와 일본노년의학회가 고령자의 정의를 ‘75세 이상’으로 고쳐야 한다는 제언을 내놓았다는 뉴스에 “옳거니” 했다. 현재 일본의 고령자는 ‘65세 이상’을 가리킨다. ‘노인대국’ 일본다운 발상이다. 의학적으로 65~74세라도 충분히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활력과 의욕을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75세부터가 고령자라면 40~50대를 중년이라 보는 사회의 통념은 50~70대 초반으로 수정되어야 함이 옳다. 10~20대를 젊은층으로 보는 세간의 의식도 10~40대로 확장을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30~40대를 따로 떼어내 ‘젊은 중년’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는 어떤가. 지난해 12월 27일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고용상 연령 차별금지 및 고령자(장년)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은 55세 이상을 법적으로 ‘고령자’로 불러왔는데, 명칭이 듣기 거북하니 올 하반기부터 장년(長年)으로 바꾼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한국의 55~65세가 스스로를 고령자나 장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름만 바꿀 게 아니라 고령자 혹은 장년의 연령을 상향 조정하는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노인 취급은 하루라도 늦게 받았으면 하는 게 상정(常情)이잖은가.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한겨울/최용규 논설위원

    러시아워. 대로에 스멀스멀 차량이 기어오른다. 창밖 한강변은 비운의 투탕카멘이 잠든 나일강변을 닮았다. 공히 2리나 3리쯤 될까. 허우대만 멀쩡한 물 폭, 청명과 다른 희한한 물색이 슬픔을 채색한다. 강 너머 물담배 파이프의 묘한 향이 음습함을 스멀스멀하게 하는 카이로 칸엘칼릴리. 이웃사촌이라 해도 시비 못 걸 보스포루스 해협의 이스탄불 그랜드바자르, 그리고 남대문시장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찬 바람이 휘감은 한강변 형형색색은 낯선 이방인을 품어준 카이로 불빛으로 되살아나 뇌리를 스친다. 한겨울, 시인들은 회색 구름, 나그네, 고단한 육신을 노래했다. 물담배 파이프는 안 물었지만 묘한 향이 스멀스멀하다. 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인간의 영고성쇠는 불변의 진리. 이를 누가 모르랴. 알지만 ‘쇠’를 더디게 하고 싶은 것이 욕망이요, 본능이다. 지난 5일 한강 남쪽 A병원. “확실히 ○○○병이구먼. 세포가 다 죽었어. 보이죠.” 그러나 반전이 일어난다. “손 이렇게… 자 걸어보세요. 어~ 굉장히 좋아졌네. 괜찮아 ○○○으로 죽지 않아요.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 한겨울, 명의의 한마디에 화색이 돌고, 입춘이 기다려진다.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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