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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땅투기,명예투기 김우택 한림대교수·경제학(굄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속세의 가치는 부와 명예의 권력이다.세상이 변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지만,사실 속세의 가치라 할지라도 얻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어떻게 획득하느냐도 중요하다.속세의 가치를 얻는데도 최소한 남의 손가락질은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투기로 돈을 버는 것이 지탄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땀흘린 노력의 대가도 아니요,GNP 증가에 기여한 것도 아닌 반면,물가상승이라는 일반의 고통 위에서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인식에서이다. 돈벌이에서 투기에 상응하는,권력을 얻는 방법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는 것이다.명예를 얻는데도 적은 노력으로 투기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우리 사회는 한 번도 투기와 유사한 방법으로 명예를 얻는 일을 문제삼은 적이 없다.사람들이 명예를 얻는 방법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러다보니 우리 사회는 투기적 방법으로 명예를 얻은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명예란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남보다 뛰어난 업적으로 이름을 얻는 것이다.그것이 예술,학문,운동 또는 사회봉사일 수도 있다.명예를 얻기 위한 투기는 자기 일에 별로 충실하지도 않고,뛰어난 업적도 없이,그런 것같이 만드는 일에만 열중하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땅투기가 떼돈을 벌어주었듯이,명예투기가 사회 명사도,장관도 만들어주었다.사회가 명예를 얻기 위한,투기행위를 분별하지 못하고,투기꾼을 대우해주고 자기 일에 충실한 밀알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 사회의 장래는 결코 밝을 수가 없다.
  • 타클라마칸사막 동남단 호탄(서역 문화기행:7)

    ◎실크로드 남로 중심… 명주·옥의 명산지/한때 열국우전의 수도… 토기·벽돌 파편 널려/동보고승 법현이 도닦은 찬목묘 유명… 바로 옆엔 이슬람 예배당 우루무치부근을 떠돈지 엿새째,지구의 지붕으로 불리는 천산산맥언저리이건만 또 한번 서역의 깊숙한 벽지로 날고싶었다.호탄(화전)을. 호탄은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세갈래의 실크로드,그중 가장 환상의 코스인 남로의 중간지점이자 한나라때 서른여섯개의 열국중,남로의 최강국이었던 우전나라의 도읍지였고,「한서」의 「서역전」에선 「서성」으로 불렸던 곳이다. 우루무치에서 직항 2시간10분에 도착한 호탄비행장은 온통 잿빛 모랫벌이었다.과연 33만㎦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사막인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답게 끝이 없는 모랫벌이 이어져 있으며 그 모래는 콩가루같은 미립자로서 바람이 부는 날이면 활주로조차 묻혀 이착륙이 어렵다고 했다. 호탄시내까지 11㎞의 공항로를 달리면서 필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창밖에 하늘을 뚫는 포플러나무와 자작나무가서 있는데 그 잎새는 한결같이 잿빛으로 모랫바람이 휩쓸고 지난 자국들이었다.이런 모랫바람속 그 어디쯤에 화사한 꽃들이 피어서 꽃 따는 사람을 불렀고,또 이 사막 어디쯤에 꽃다운 비단을 짜 낸 뽕밭이 숨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삭막한 모랫벌 그 어디쯤 깊숙한 골에 하얀 구슬,푸른 구슬이 묻혔을까? 그런가하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여 장안으로 돌아가던 현장법사가 기원645년에 이곳을 지났는데 그들의 발길과 그들의 말방울이 울렸던 곳은 어딜까? ○화향 5천여명 수도 수나라때의 시선집인 「전수시」에는 「우전에서 꽃 따기(우전채화)」라는 무명씨의 시가 이렇게 실려 있다. 「산천수이소,초목상동춘. 역여진유지,자유채화인.」 (산천은 비록 멀리 떨어졌지만,초목의 봄은 마찬가지. 하남땅 진이나 유지처럼,여기도 꽃 따는 사람 있어라) 그런가하면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호탄은 1백여군데의 절에 5천여 화상들이 불도를 닦던 대승불교의 중심지로 그 사방을 둘러싼 뽕밭이 화려한 명주와 주단의 생산지임을 밝혔고,반고의 「한서」「서역전」엔 우전국이 장안으로부터 9천6백70리(4천8백35㎞)떨어진 곳에 3천3백의 호구와 1만9천3백명의 인구를 지닌 나라,특히 옥의 산지로 중원에 알려졌었다.「우전옥」,또는 「곤륜옥」으로 불리는 호탄옥의 성가는 1968년 하북에서 발굴된 한나라 중산왕의 「금루옥의」로 더욱 증명되었다.기원전 154년 2천4백89장의 연녹색 옥판으로 얽어 맨 시의,그것들이 몽땅 호탄의 옥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호탄을 에워 싼 두줄기의 강,백옥강과 묵옥강이 각각 동쪽과 서쪽을 흘렀다.옛날엔 이 두줄기 중간에 또 하나의 강 녹옥강이 있었다고 하니 강 이름으로 미루어서도 백옥·청옥·흑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호탄시내에 도착한 필자는 처음으로 이방감을 느꼈다.우선 거리에서 만나는 십중팔구가 까무잡잡하면서 무성한 수염을 단 위구르사람들,그들의 오똑한 콧마루에 쌍꺼풀,달걀모양의 갸름한 얼굴에 푸르딩딩한 눈동자,거기다 다혈질의 말씨에 굴뚝처럼 뿜어대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필자는 서역땅에 들어 처음으로 필자가 서 있는 곳이지금 중국의 강토이면서도 중국의 한족이 아닌 서역의 원주민속에 깊숙이 들어왔노라는 사실과 이곳 서역의 남로 도처에서 최근 민족갈등의 충돌이 가끔 일어난다는 생각때문에 얼른 여관문을 두들겼다. 이튿날 우전국의 고도를 찾기로 했다.한나라때는 36개부족국가의 하나였지만 당나라때는 「안서사진」의 하나였던 그 도읍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았다.혹자는 호탄시 남쪽 25㎞지점 카스강 서쪽언덕에 지금도 남아 있는 높이 6m,둘러 60m의 석탑근린을 두고 말하는가하면 혹자는 호탄시 서쪽 10㎞지점 요트칸(약특간)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그 두군데가 모두 우전국 도읍일 가능성은 있었다.거기에 남아 있는 폐허는 물론 거기서 지금도 출토되고 있는 기와조각·벽돌·질그릇·철제농구등이 그를 증언하고 있는데,특히 요트칸 유적지의 개울물에선 지금도 벽돌이나 질그릇 파편쯤은 쉽게 주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요트칸 유적지 찾아 필자는 그 말에 혹하여 요트칸을 찾기로 했다.호탄시에서 서쪽으로 10㎞라지만 아주 기름진 오아시스.가느니 굽이 굽이 농로요,농로를 따라 출렁이는 관개로,곤륜산에서 녹아 내리는 설수는 파랗고 차가웠다.게다가 농로는 자작나무가 목책처럼 늘어 섰거나 포도덩굴이 푸른 터널을 지어서 홀연 여기가 사막임을 잊게했다. 이윽고 「허톈셴바허치공사(화전현파합기공사)」라는 팻말이 보였다.거기서 좌로 돌아 또 한번 농로를 달렸다.마찬가지로 우거진 자작나무요 포도덩굴인데 길가엔 맨발의 개구쟁이가 흙투성이가 되어 뒹굴고,관개의 수문에는 빗장이 걸린 채 그 안으로 물살이 출렁거렸다.그 무렵 난데없이 「요트칸유적지」란 안내판이 보였다.필자는 습관처럼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산 한자락도 보이지 않는 편편한 언덕일 뿐이었다. 마치 환토하느라 새흙을 옮겨놓은 논바닥을 방불케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지면이었다.아닌게 아니라 버드나무 사이로 개울이 흘렀다.필자는 얼른 그 개울물에 손을 담았다.어렸을 적 뱀장어나 게를 잡았던 그 몸짓으로 개울을 뒤졌는데 당장 손끝에 잡히는 것은 빨간 토기의 파편이었다.풀잎무늬의 얇은 토기였다.또 한번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뒤졌더니 월척의 붕어를 잡듯 큼직한 벽돌 하나가 잡혔다. 호탄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요트칸일대 10㎦의 유적지에는 그런한 영세한 파편들이 널려 있다고 했다.더구나 그 일대는 일찍이 홍적기의 침적된 지질인만큼 겨우 3m내지 6m의 지층속에는 상당한 질량의 박물이 잠겼을지 모른다고 했다.그동안 발굴된 도기·옥기·전폐등 특히 개원통보 같은 엽전이나 인면·수면의 도기로 보아 기원 3세기로부터 8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고시대의 궁궐이나 도시의 유적으로,그리고 당시의 주민들이 황색의 한족이 아닌 긴 얼굴,긴 눈썹에 푸른 눈,황갈 피부의 회골족,곧 오늘의 위구르족임을 추정하기에 충분했다. ○인도수행길 머물러 비록 묻히고 무너졌지만 정치의 유적을 답사한지라 이젠 우전국의 종교 유적지를 찾기로 했다.그것은 「커커마르무」(극가마일목)유적,한족들은 「찬목묘」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진때의 고승 법현(337?∼422?)이 기원399년 인도에 갈때 여길 경유하면서 불법을 닦다가 그렇게 명명했다는 작은 암자였다.호탄시에서 남으로 36㎞지점,바로파랗게 굽이치는 카라카스강 동쪽,80m의 벼랑위에 있었다.그 벼랑을 오르느라 그 산의 북쪽을 우회하여 나무 한그루 없는 능선을 탔는데 거기서 굽어보는 카라카스강 유역은 정말 스펙터클한 장관이었다.파랗게 강이 굽이치고 강가로 푸른 오아시스,오아시스는 젖줄 따라 허리띠처럼 뻗는데 그 배경은 온통 황갈색의 구릉들.그림으로는 단조로운 삼원색,그러나 영원의 구도였지만 지세로는 찬목묘가 천혜의 요새였다.발밑으로 벼랑,벼랑아래로 강물,강물밖으론 사막.그렇게 무한히 펼쳐진 곳에서 상과 무상은 날마다 피부로 오득했을 지 모른다. 찬목묘는 천연의 작은 2층석굴이었다.석굴의 높이 겨우 6m남짓,그 한쪽에 사다리를 가설했는데 그 2층까지 기어올라간 필자의 눈에는 침침한 골방 하나쯤의 공간,그러나 아무런 시야도 없었다.법현이 책상다리하고 앉았을 때 그 귓전에 들렸을 법한 강물 소리,유사의 소리를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내려섰다. 그 석굴밖으로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마자(마찰) 두어칸이 있었고,산 허리를 돌아 카라카스강가에도 몇군데의 마자가 보였는데,여기 호탄 실크로드에 우뚝 선 커커마르무는 지금 종교의 금석을 한눈에 보여주는 박물관이었다.곧 불교의 유적에 이슬람의 마자가 공존한 사실말이다.바로 기원 10세기를 전후해서 불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것이다.
  • 캉자스먼쯔의 신산(서역 문화기행:6)

    ◎붉은 암벽에 모계사회 생식숭배 그림/기원전 2∼3세기 카자크족 원주민들이 새겨/무도회·인구번식회에 인물 2백명… 여성이 대부분 우고,그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생식의 필요는 절실하다. 수렵과 유목을 위해서는 심산유곡과 만경초원이 안성맞춤이다.우랄·알타이산맥 남쪽으로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을 등지고,팔카스호 동쪽으로 아라호·아이피호·이리강·카스강·마나스강등을 낀 신강의 서북지대가 바로 최적의 지대로 꼽힌다. 그 지대를 기원전 7세기부터 누빈 것은 오손(오손)·강거(강거)·엄채등 돌궐어족인데,그들은 모두 오늘날 하사크족의 원조민족이었다.지금도 중국 서역에는 백만명을 헤아리는 카자크족이 신강의 서북지역을 물 따라 풀 쫓아 유목하고 있다. 그 유목하는 곳엔 카자크족이 살고 카자크족이 사는 곳,그러니까 팔카스호 동쪽의 초원에는 암화(암화)가 많았다. 지금 독립연합국의 하나인 카자흐스탄을 비롯,신강의 이리강과 초하유역인 쿨자파스산상에는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로 추정되는 동물암화가 많다.다시 동쪽으로이동하면서 비록 연대는 기원전 3세기 이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리강유역의 훠청(휘성)현 베이간(북간)계곡을 비롯,니러커(이근극)현의 훙광목장등 하미(합밀)의 남산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50여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초원에 천마 노닐어 그중에 위민(유민)현 팔타쿨(파이달고이)과 후투비(호도벽)의 캉자스먼쯔(강가석문자)의 암화도 포함되었지만 여느 암화와 다른 모계사회의 생식숭배를 보였다 한다.특히 최근에 발견된 캉자쯔먼즈의 그것이 보다 사실적인 데다 화면이 또렷하다는 신강사범대학 중문과의 황천(황천)주임의 권고와 안내로 그곳으로 머리를 돌렸다. 우루무치에서 캉자쯔먼즈까지 1백50㎞.위구르말로「도깨비 고을」이라는 후투비까지 70㎞는 시원한 아스팔트길이었지만,후투비에서 그 이름도 시골스런 추이얼거우(최예구)향에 있는 현장까지는 험한 산허리를 뚫고 천산산맥 서쪽의 어디쯤을 덜컹거릴 수 밖에 없었다. 깔딱 어느 고개를 넘어설 때,황주임은 별안간 차를 멈추게했다.일행이 내려서 멀리 산맥을 굽어 보았다.시뻘건 바위산맥이 서남쪽으로 꿈틀거리며 이어져 있는데 그 기상은 수십척의 함대가 파도를 가르며 행진하는 모습이었다.그 산맥은 적어도 20∼30㎞를 쪽빛 하늘밑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한복판에 활짝 열린 대문을 방불케 웅장한 바위가 보였다.그것이 바로 생식 숭배의 암화 현장이라했다.결코 소풍하는 산등성이가 아니라 출렁이는 산맥,어디를 보아도 기운이 넘치는 그러한 암맥들이었다. 후투비에서 거의 80㎞를 달려서 이윽고 골짜기의 초원에 도달했다.초원에는 낙타와 천마들이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신산의 어귀에 갔을 때,동그랗고 커다란 눈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청년이 길을 막았다.입장하는 표를 사라했다.아직은 알려지지 않아서 관객은 물론 관리자도 없을 줄 알았는데.그들의 재빠른 상혼이 놀랄만 했다. 문제의 암화가 있는 바위는 깎아 세운듯한 암벽이었다.그 암화는 비록 동서 14m,상하 9m의 크기,화면면적이 1백20㎡쯤되어 보이는 분사암에 그려졌지만,그 암화의 모체는 동서 1백50m쯤에 상하 50여m의 엄청난 바위였다. 필자는 마치 방을 보는 수험생처럼 고개를 들고,마치 숨은 그림을 찾듯 훑었다.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족히 2백명은 넘었다.보이는 대부분이 여성으로 이곳이 모계중심의 사회였음을 알게 했다.높은 모자를 눌러 쓰고 모자위에는 두개의 깃털을 꽂은 여성이었다.풍만한 가슴에다 둥실한 엉덩이,갸름한 얼굴에 높은 코,커다란 눈에 작은 입술,가느다란 목에 끊어질 듯한 허리,긴 다리에 섬섬옥수.첫눈에 모던한 서구의 처녀들을 연상케했다. 그 화면은 무질서하게 많은 군상이 여기저기 불거져 나왔는데 가만히 살피면 몇가지 화폭으로 분별할 수 있었다.약간 좌측엔 아홉명의 여인이 한결같이 오른팔은 올리고 왼팔을 내리면서 춤의 동작을 보였는데,어찌보면 벌거숭이요,어찌보면 오늘의 발레복처럼 성감적인 복장이었다. ○남자는 까까중머리 윗 그림을 「누드의 무도회」라 한다면 그 좌측으로 「혼무도(혼무도)」에 상당한 그림이 있었다.남녀 각각 10여명씩 춤을 추는데 여성은 위에서와 마찬가지지만 두팔을 모두 내렸고 남성은 모자도 깃털도 없이 까까중머리에다 홀쭉한 배에 뾰족한 그것을 기운 차게 달고 있었다.여기 저기 동체가 달아난 얼굴이 몇개 있는데 가필한 그림이거나 다른 상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보다 특기할 일은 남성의 가슴과 여성의 가슴에 각각 한 사람의 이성을 품고 있는가 하면 그러한 혼무의 마당을 향해 호랑이 두마리가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선명한 주제의 그림이 우측 가장자리에 보였다.한 사내가 발기된 길고 둔탁한 그것을 한손으로 들면서 계집의 하체에 조준하고 그 아래로 성숙한 여인 하나와 50명의 꼬마가 상하단으로 나뉘어 마치 기차놀이하듯이 이열 횡대로 서 있는 그림이었다.인구의 번식을 노골적으로 기구하는 강렬한 포스터같았다. 암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깊은 눈,높은 코,가는 목,긴 다리,그리고 높은 모자에 깃털,남자는 높은 코에 기다란 생식기,가냘픈 하체에 긴 다리,두건식의 모자에 동그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이러한 외모와 복식으로 미루어 한(한)족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카자크의 체모에 가장 근사할 뿐 아니라 그러한 암화가 아직도 카자크족의 집거 부락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금속도구 이용 음각 마지막 궁금한 것은 연대였다. 현지의 문화국이나 박물관에선 아직 뚜렷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게 없다지만 카자흐스탄 팔카스호 동쪽에서 발견되고 있는 카자크족의 암화,그 대부분이 기원전 6세기에서 3세기 사이,더구나 동점(동참)하였다는 사실 외에도 캉자스먼쯔의 암화가 금속도구에 의한 음각이란 방법으로 미루어볼 때 신석기시대의 말기에 시작해서 청동 및 철기시대였음을 단정할 수 있겠다.그렇다면 기원전 2,3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는데 무리가 가지 않는다. 이러한 암화를 작품시하는 데도 그 나름의 의의가 있다.첫째는 그 구성이 부호나 도안처럼 단순하지만 감성적이고 질박하다는 것이요,둘째는 그 표현이 비록 과장적이지만 주장이 선명하다는 것이요,셋째는 그 내용이 조잡하지만 당시의 생활을 생생하게 반영한 역사의 단편들이란 점이다. 필자는 돌아오는 길,캉자스먼쯔 바위에 생식 숭배를 그림으로 새긴 그 후손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조금전 들어갈 때,인민폐 몇푼을 쥐어 준 그 청년을찾기 위해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시집 가는 날」을 만났다.말 세필에 영감과 할멈이 혼수를 실은 행렬.어쩌면 선발대격인듯,영감은 앞에서 말을 끌고 할멈은 말을 타고 깡마른 언덕을 넘고 있었다. 그 청년은 서른여덟살의 마이무라치라고.형제가 다섯인데 모두 분가해서 한마을을 형성했다 한다.조심스럽게 재산정도를 묻자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염소 1백50마리에 낙타·말·황소를 합해서 50마리』라고. 그리고 염소 한마리의 값은 큰 것은 2백위안(한화 2만원상담). 짓궂게 통혼사정을 묻자 그 대답은 자못 단호했다. 위구르족이나 회족,시부족과 통혼할지언정 한족과의 통혼은 싫다고 했다.왜냐면 한족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기 때문이란다. 주인은 우리 일행을 그들의 흙집에 안내했다.사방이 흙벽,마루나 침대가 따로 없다.물론 안방과 건넌방의 구별도 없이 밋밋한 헛간 비슷한 구조였다.
  • “쓰레기 줄이자” 지혜짜기/종량제 5일째… 감량 백태

    ◎판촉물 규격봉투로/압축기 서둘러 설치/식당 반찬 조금내고/가게밖 쓰레기통 없애 아무나 못버리게/등산로에 몰래 버리기… 얌체수법도 등장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되면서 가정과 업체 등에서는 쓰레기를 줄이려는 갖가지 묘안이 등장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쓰레기양이 줄어든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며 머지않아 이 제도가 정착될 것으로 전망했다. ○…식당업자들은 『종량제실시로 쓰레기처리 비용이 종전보다 3∼4배쯤 많이 들고 있다』면서 음식찌꺼기를 줄이기 위해 반찬을 조금씩 내놓는 등 「쓰레기 감량작전」에 주력. 서울 종로구 경운동 D중국음식점의 경우 종량제 실시 전에는 쓰레기처리 비용이 미화원의 수고비 1만원을 포함해 한달 3만여원이었으나 앞으로 봉투값으로 한달에 10만원정도 들 것으로 예상했다. 주인 김모씨(45)는 그러나 『처음이라 다소 불편하지만 분리수거를 하면서 전체 쓰레기 양은 확실히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도시락판매업체에서는 재활용이 안되는 1회용품을 재활용 재질로 바꾸는 개발노력에 전력.도시락 체인업체 M사에서는 배달용으로 쓰이는 스티로폴 도시락통을 종이나 플라스틱재질로 대체할 계획이며 시험적으로 만든 샘플을 사용해본 뒤 빠르면 2월부터 각 체인점에 보급할 방침. 이와함께 그동안 판촉물로 썼던 자,책받침,병따개 대신 쓰레기 규격봉투를 고객들에게 주기로 하고 각 체인점에도 이를 권장하고 있다. ○…햄버거 등을 판매하는 패스트 푸드점인 L사도 체인점마다 쓰레기통을 3개씩으로 늘려 음식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얼음을 분리수거토록 유도. 기존의 코팅 종이컵도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코팅이 안된 것으로 대체했으며 쓰레기 부피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쓰레기 압축기를 체인점마다 설치키로 했다. ○…상점·가판대 등의 앞에 설치돼 있던 쓰레기통은 행인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릴것에 대비,업주들이 가게안으로 옮겨 고정된 휴지통을 제외한 휴지통들이 길거리에서 사라진 모습. 또 일회용기를 많이 이용하는 중국음식점·도시락배달전문점 등은 일회용기를 다시 수거해가라는 소비자들의 요구가 많아 배달을 한뒤 얼마후 다시 찾아가일회용기를 수거. ○…재래시장 채소가게앞에는 시장에서 채소를 다듬으려는 알뜰주부들로 북새통. 특히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배추는 거의 모든 주부들이 현장에서 직접 다듬어 알맹이만 가져가는 바람에 채소상인들은 물건을 팔때마다 늘어나는 쓰레기양에 울상.서울 마포구 모래내시장에서 10년간 채소가게를 해온 김모씨(56·여)는 『가게앞이 지저분해지고 혼잡해져 매상이 줄어들 정도』라고 말했다. ○…종량제가 시행된지 닷새째가 되는데도 여전히 일부 주민들이 규격봉투사용을 외면,통반장 등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홍보를 하는 등 애를 먹고 있다. 또 주민들 가운데는 출근길에 쓰레기 봉투를 가지고 나와 다른 곳에 버리거나 규격외의 봉투에 담은 쓰레기를 남의 집앞에 버리거나 규격봉투에 담아 내놓은 남의 집쓰레기통에서 내용물은 쏟아내고 봉투만 챙겨가는 얌체수법을 동원하는 사람도 있다고 동직원이 설명했다. ○…북한산 등산로 입구에 설치된 쓰레기 수거함에는 인근 주민들과 등산객들이 몰래버린 쓰레기가 늘어나 공원관리사무소측이곤욕.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종량제 실시이후 북한산 입구 21개의 쓰레기통과 주변은 몰래 내다버린 냉장고 등 대형 쓰레기와 생활쓰레기 등이 넘치고 있다』며 『투기행위를 적발하기 위해 취약시간대인 야간과 새벽에 직원들을 배치,단속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 ◎유통업체 고객쓰레기 부담 “부상”/재활용 포장재·용기 개발박차/쇼핑백 대신 장바구니 등 지급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되면서 기업에서도 쓰레기 줄이기 비상이 걸렸다.고객들의 쓰레기 부담을 덜지 못할 경우 매출 감소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포장지 및 용기의 부피를 최대한 줄이고 동시에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로 바꾸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고객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백화점 등 유통업체들이 가장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이달 말 설날 특수까지 겹쳐 기존의 포장 방법으로는 고객들을 쫓는다고 판단,선물세트도 가급적 포장을 없애고 포장이 불가피할 경우 스티로폴 대신 골판지 등 재활용 포장지를 사용키로 했다. 롯데백화점은 5일부터 쇼핑 백을 원치않는 고객에게 「그린 쿠폰」을 줘 양파 1망(10개) 등 우리 농산물과 바꿀 수 있게 했다.관광 식당가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쓰레기 압축기 2대를 추가로 설치했다. 신세계와 현대백화점도 상용 장바구니를 나눠 줘 고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설날 선물로 많이 나가는 갈비세트의 경우 압축 스티로폴로 포장,30% 가량의 부피를 줄이기로 했다. 캔터키 프라이드 등 외식업체와 LG25 등 편의점 업체들도 플라스틱 접시나 종이컵 등 1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매장 안에 쓰레기 압축기를 설치키로 했다. 제품 보호를 위해 쓰는 박스 스티로폴 등 대형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가전업체는 골판지나 신소재로 포장을 바꾸기로 했다.어쩔수 없이 사용한 스티로폴 등도 배달 직후 수거하기로 했다. LG 전자는 1백% 재활용이 가능한 새로운 충격 완하용 포장지 「하니 코어」를 제작,올 8월부터 사용에 들어간다.삼성전자도 국제환경 무역규제(그린라운드)에 대비,무공해 포장재 개발에 착수,96년까지 쓰레기량을 60% 까지 줄인다는 전략이다. 애경 등 세제업체와 태평양화학 등 화장품 업체들은 기존 용기에 내용물만 바꿔 쓰는 리필(Refill) 제품이 많이 팔릴 것으로 보고,40∼50%(기존 20%)로 생산을 높이기로 했다.중국 요리집이 가정 배달 때 사용하는 스티로폴 접시 등도 플라스틱 그릇으로 바꾸기 시작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전국 슈퍼마켓 연합회의 관계자는 『구청과 협의해 종량제 규격 봉투를 준비,일정 금액 이상을 구입할 경우 검은봉투 대신 규격봉투에 물건을 담아 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 화진포/감포/새 명소로 각광/해맞이 여행

    ◎흰모래·해변 소나무숲 “한폭 그림”/화진포/이견대 유명·드라이브길 환상적/감포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눈부신 모래펄,세찬 바람이 어우러진 겨울바다끝에서 불덩이같이 솟아오르는 해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자연의 경외감과 함께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95년 을해년 새해 새아침.가족들이 탁트인 해변가 한자리에 모여 겨울바다의 이색 정취속에서 해돋이를 지켜보며 새해를 설계하고 추억을 담는 기회를 가져봄직 하다.짧은 순간을 보기위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장시간 지켜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출여행은 특히 겨울철에 인기가 높다.사시사철 볼 수 있는 일출이지만 구름과 안개가 덜하고 비교적 대기가 맑은 겨울철이 일출의 장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돋이여행」의 명소인 경포대·낙산·의상대·설악산·대청봉등 강원도일대에는 해마다 이맘때면 관광객들이 크게 붐비는 통에 최근에는 바다가 인접,호젓함을 더해주고 있는 남녘땅 북쪽끝 화진포와 경주시 감포가 새로운 「일출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는 남한 최북단에 위치한 해수욕장.맑은 물과 고운 모래,소나무로 뒤덮인 해변의 정취가 뛰어나다.해방을 전후해 이승만 전대통령과 김일성의 별장이 들어선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이같은 절경속에서 신년 일출의 장관을 감상하는 것은 일석이조의 기쁨이다. 6㎞ 남쪽의 거진항은 명태서거리·명태밥식혜등 명태로 만든 향토음식이 유명해 먹거리로 안성맞춤이다.주변에는 통일전망대와 건봉사등 볼거리도 많다.서울에서 승용차로 6시간이상 소요된다.강원도 홍천∼인제∼원통∼진부령∼거진읍을 거쳐가면 된다. 화진포는 현재 개인의 출입이 어려워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 단체이용이 바람직하다.여행단체를 따라 나서면 더욱 편리하다.문화답사모임 「신들메」(02­3141­2875)는 오는 31일부터 1일까지 무박2일로 일반인들과 함께 화진포로 「해돋이 기행」에 나선다.여성문화예술기획도 1월14∼15일 이곳으로「해맞이기행」을 떠난다. 경북 경주시 감포항도 바다의 전망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는 곳.바다를 낀 언덕에 세워진 누각인 이견대 아래로 넓이가 10ha나 되는 백사장이 펼쳐져 탁트인 바다가 더욱 드넓어 보인다.이 곳이 경주 인근에서 손꼽히는 대본해수욕장이다. 주변의 대표적인 볼거리로는 이견대 남쪽 1.4㎞거리에 위치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문무대왕 수중릉(사적 제158호)이다.수중릉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왕릉이어서 찾아 볼만하다.이 곳에는 식당가가 형성돼 있는데 특히 싱싱한 회맛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또 경주시와 해안이 인접한 감포와 양북·양남면 지역은 동해안 가운데서도 가장 한적하고 차분한 해안도로를 끼고 있어 해안가 드라이브코스의 백미라고 불리우고 있다.여행단체인 「누리암」(02­747­9077)은 새해 아침 감포로 해돋이여행에 나선다.이밖에 레저전문업체인 코니언(02­723­7237)이 31일 설악산 대청봉에서 일출산행 행사를 갖는다.
  • 방학맞은 초중고생/일 역사기행 크게 늘어/여행사에 참기신청 쇄도

    ◎금호 「역사기행단」·삼흥 「유적지여행」 기획/“한·일 역사차이·상호교류 자취 견학” 기회 여행자유화이후 대학생의 해외여행 붐이 일고 있는 가운데 최근 겨울방학을 맞아 초·중·고학생의 외국역사문물 탐방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여행사들이 마련하는 이들 세계화상품은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만큼 경비문제,안전상의 이유등으로 아직 가까운 일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학생과 학부모의 열기속에 참가신청자가 쇄도하고 있다. 금호관광은 국교생부터 고교생까지 1백50명이 참가,5박6일동안 일본에 살아있는 우리겨레의 문화유산과 일본역사유적등을 탐방한다는 목적으로 「일본역사기행단」을 구성,내년 1월21일 출발할 계획이다. 기행단은 부산을 떠나 페리호를 이용해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카(복강)·오사카(대판)·교토(경도)·벳푸(별부)등 일본 서부 주요도시를 돌면서 세계최대의 칼데라 확산인 아소산,금각사·청수사·헤이안신궁·일본최대 오사카성·NHK 방송국등을 돌아본다. 특히 이번 견학중 학생들은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잡혀간송씨일가등 조선도공의 후예2백80여명이 정착해 살고 있는 도자기마을 아리타(유전)를 견학해 조선도공의 숨결을 직접 느끼게 된다. 국민학생 등 나이어린 학생이 많지만 부모의 동반은 일체 금지돼 있고 대학교수·중고교사들의 설명으로 진행되며 짭은 일정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자니 자연 일정이 빡빡해져 잠은 모두 배안에서 자고 일과중에는 어른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된 강행군을 할 예정이다. 이번 기행에 참가하는 박창완(청운중2)군은 「일본의 역사유적을 직접 보고 그속에서 우리문화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여서 부모님을 졸라 참가신청을 했다」며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6일동안 낯선 이국땅에서 친구들과 단체생활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즐거워했다. 또 삼홍여행사도 국교4년부터 중3까지의 학생 6백명을 모집,6박7일 일정으로 규슈·고토·나라·오사카 등 일본의 주요유적지 탐방여행 상품을 내놓았다. 여행사측은 한·일 역사의 차이와 상호교류의 자취를 견학하는 한편 일본과 일본문화에 대해 새롭게 알게되는 게기로삼게 한다고 설명했다. 금호여행사 최전호(41) 국제영업부장은 「세계화시대를 맞아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을 잘 이행함으로써만 동반자라는 인식을 갖출수 있고 고속에서 또 일본을 따라잡을수 있는 경쟁력을 키울수 있다는 생각에 학생을 대상으로 이번 기행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 1월의 문화인물/표암 강세황 선생/서화가로 단원 김홍도의 스승

    ◎학술강연회·유고집 발간 등 기념행사 문화체육부는 조선 시대의 서화가이자 문신인 표암(작암)강세황선생을 95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시·서·화의 삼절로 일컬어지는 강세황(1713∼1791)선생은 기예를 겸비한 사대부 서화가로서 창작과 화평을 통해 18세기 우리나라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서화에 뛰어나 1784년(정조 8년)천추부사로 북경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청나라 사람이 많았다고 전해 온다. 중국의 화론·서법·예술론을 수용하고 배우면서도 우리 실정에 맞게 지도하고 권장해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이 자리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림으로 산수 사군자와 서체로 전서 예서에 뛰어났던 선생은 단원 김홍도를 제자로 두었다. 저서에 「표암유고」,그림에는 벽오청서도,송도기행첩,사군자병풍 등이 있다. 문체부를 비롯한 관련단체는 선생을 기리는 학술강연회,유고집 발간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한다.
  • 투루판분지 고창고성(서역 문화기행:5)

    ◎서한군이 지은 토성… 내·외성 2중구조/성복판에 망루… 인도식 원형불탑 남아/서쪽 사막지대엔 고분 5백여기… 고대문서·미술품 등 유물 20년간 1만여점 출토 아테네가 로마의 폐허에 들어서면 보이느니 돌기둥에 돌계단이지만 서역의 폐허에 들어서면 모두가 흙의 덩어리요 흙의 동굴이다°그 황색의 폐허는 중국의 감숙·섬서는 물론 산서·하북·하남·산동 등 황하가 흐르는 그 언저리였다. 걸핏하면 토성의 자드락길이요,때로는 치열하게 활싸움을 벌였던 보루의 주춧돌이었다.그런 흔적들을 보면 흙은 먼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러한 폐허가 결코 앙상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된다.투루판에는 그러한 역사의 현장으로 두군데의 고성이 있다.하나는 서쪽 13㎞지점에 있는 교하고성이요,다른 하나는 동쪽 40㎞ 지벙에 있는 고창고성이다. 고창고성은 바로 베제크리크천불동이 있는 무르룩계곡을 빠져나와 승금구에서 약간 남쪽의 언덕위,그러니까 멀리 화염산이 병풍처럼 북쪽을 가린 나직한 오아시스에 세워진 성곽이다. 교하고성과 비슷한 역사배경을 지닌 고창고성은 교하보다 1세기,차사왕국에 주둔한 서한둔전부대가 축조한 것이다. 그곳은 적어도 한 두개의 사단 병력이 훈련을 받다가 세워총을 하고 휴식중인 연병장을 방불케 했다.5㎞의 둘레에 2백20만㎡의 넓이,바로 그러한 광장인데 그 유적들은 모두 올망종망한 높이로 유적과 유적사이의 길조차 좁고 꼬불꼬불 하였다.그것은 교하의 토성이 흙 자체의 판축인데 반해 고창의 것은 흙벽돌의 축조라서 무너지기로 말하면 와르르 붕괴되었기게 그렇다. ○외성엔 4개문 설치 그들 설계의 구도도 달랐다.교하의 그것이 남북의 중앙대로를 중심한 동서의 정연한 분포임에 비추어 고창의 그것은 불규칙한 정방형의 외성이 있고 한 복판에 내성이 있는 이중구도로서 그 내성의 주위로 사원이나 민가들,다시 변두리로 무덤들이 산발적으로 분포된 것으로 보였다. 온전한 외성은 12m의 높이며,그 두께도 넉넉했다.그동안 출토된 기록에 따르면 외성 4면에 「현덕문,「금복문」,「금장문」,「건양문」,「무성문」등의 성문이 가설되었다고 한다.과연 외성의 풍모는 당당했다.내성 어디쯤으로 보이는 복판에 국기대나 첨성대인양 높다란 축대가 솟았는데 거기에 규칙적으로 뚫린 구멍으로 보아 당시 둔병을 총지휘하던 교위의 청사나 말대쯤으로 쓰였을지 모른다.보다 분명한 유적은 동남쪽과 서남쪽에 남은 불사의 폐허였다.동남쪽의 그것이 인도식 불탑의 원형층탑이라면 서남쪽의 그것은 사각의 튼튼한 기초위에 원형의 건물이다.그 언저리로 널따란 마당에 우두커니 선 필자에게 적어도 천년전 서로 다른 피부에 서로 다른 언어와 복장들이 오락가락하면서 희희낙락했을 그 소리들이 들리는 듯 했다. 명나라 초엽의 명시인이었던 진성의 「화주성」이란 시가 바로 이 자리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창구치월씨서, 성곽숙조시사희. 유적상존당제도, 거인쟁도한관의. 범궁영락류금상, 신도류량와석비. 정마불지풍토이, 격화유자인시」. (고창은 옛날 월씨의 도성 너녘, 성곽은 썰렁한채 저자도 한산해. 폐헤엔 아직도당나라 법도, 주민들은 다투어 한관을 쳐다보네. 절터엔 스산하게 공부처가 뒹굴고, 신도엔 황량스레 돌비석이누웠네. 전마는 달라진 풍토에 영문 모른채, 꽃 그늘에 사람보고 소리지르네) ○현장법사도 머물러 지금부터 6백년전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그때만해도 성곽이나 사원은 무너졌어도 유물은 즐비한데다 아직 주민들이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 고창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고창성을 다스렸던 회골의 마지막 고창국왕인 훠츠할(화적합이)이 몽골군의 위공에 못견디어 전사하고 그 전화로 소실되던 1275년까지 고창은 1천4백년동안 때로는 군현의 치소로,때로는 와국의 서울로 그 나름의 번영과 웨세를 부렸던 곳이다. 기원전 1세기는 서한 둔병들의 주둔지로,기원 327년엔 전향(전량)의 군현으로,기원 460년엔 원주의 함·장·마·국씨 등이 서로 번갈아 「고창국왕」을 1백40년이나 누리다가 640년에는 당나라의 군현으로,840년에는 회골족이 와국을 세워 가장 강력한 왕권을 부리다가 훠츠할에 다다른 것이다. 무덥고 낮은 투루판에도 많은 와국이 엎치락 뒤치락 흥망을 반복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흥성했던 와국으로 두말할 것 없이 서로 쿠처(고차),동으로 하미(합밀),북으로 천산의 북록 창지(창길)까지 넓은 영토를 4백년이 넘게 떵떵거렸던 회골의 「고창왕국」을,그리고 가장 흥성했던 군형시기로 한·당(한·당)두 조대를 들수 있겠다.그것은 고창이란 지명이 곧 한나라때 대완국을 원정하던 이광장군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지세가 높고 넓은데다 백성이 창성하다(지세고창 인서창성)는 뜻으로 미뤄보아 그렇고,당나라 때인 630년 2월경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던중 고창왕 국씨의 요청으로 한달이나 머물면서 불법을 강론했다는 데서도 문물이 성행했음을 알게한다. 당나라와 당나라 이전의 문물이 출토되어 「투루판문서」로 불리는 지하박물관은 바로 고창고성의 서단 하라허줘촌 사막에 있었다.이름하여 「아스타나(아사탑나)고분」.50년대말에서 70년대까지 계속된 발굴탐사에서 드러난 5백여 고분은 10여㎦의 넓은 모랫벌에 묻혀 있었다. 그것은 흡사 우리나라 한강변 고수부지에 쌓아 둔 동그란 모래 둥지 같았다.도시 이토록 삭막한 사막에 무덤은 웬 일이며 더구나 거기서 2천7백여점의 고대문서를 포함한 만여점의 미술품·농기구·생활구등이 쏟아져 나왔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부부합장 묘 필자가 답사한 세걔의 무던은 그 구조가 대체로 비슷했는데 지상에서 비스듬히 팬 1·20m의 묘도를 따라 묘실에 들어가면 안창에는 묘주의 시신,그 중간에는 두개 혹은 네개의 이실이 사랑방처럼 양쪽에 설시되어 있었다.삼면의 묘벽에 벽화를 두르고 누운 시신은 대체로 부부,그것도 미라로 누웠고 그 미라 가운데로 장난감같은 헌금함,그 뒤로 삶인지 죽음인지 알수 없도록 희미한 불빛에 묘실을 지키는 소년이 졸고 있었다.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소년은 웬걸『시원해서 좋다』며 빙그시 웃었다.하긴 서역 사막에서 미라를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건조한 기후와 토질 때문에 시신도 얼른 수분을 뺏긴 채 건시로 남는다 했다. 진나라에서 당나라때까지 고창 주민들의 공동묘지였던 아스타나무덤에는 뜻밖에 북량의 장군으로부터 당나라의 도호같은 고관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부부합장,혹은 가족합장이었고,관목보다는 초석이나 목판같은 간소한절차를 따랐음에도 그 속에 벽화와 문물을 시설허가너 부장한 것이 특기할만 했다. 특히 필자가 보았던 인물화나 동물화같은 벽화는 진·남북조시기의 사실적이면서 전원적인 생활의 단면이 생동하게 표현되어 있었다.그것들은 어쩌면 무덤의 주인이 살았을 때의 생활이요 윤리였을 것이다. 아스타나고분에서 투루판으로 돌아오는 도중,투루판 동쪽 2㎞지점에 있는 훤칠하고 준수한 건축물인 「에민탑(액민탑),속칭 소공탑을 답사했는데,1777년 투루판 군왕이었던 에민의 수복을 빌기 위해 그의 아들 수라이만(소래만)이 청대의 이름난 위구르족 건축사 이푸라인(이포랍음)을 시켜 세운 높이 37m 72단 사다리의 이슬람식 탑이다. 커다란 강당크기의 예배당 입구에 우뚝 솟은 탑신에는 삼각·물결·꽃잎·마늘덩굴등 열몇가지 무늬가 적갈색으로 새겨져 있는데 얼핏 단조로운듯 하면서도 근엄한 분위기를 뿜으면서 멀리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마주보고 있다.이 탑은 그 탑기에 새긴 비문이 한문과 위구르문자인 것처럼 또 한가지 성공적인 동서 융합이었다.
  • 동료·고객에 20억 사기/전선경증권 과장 구속

    서울지검 조사부(황선태 부장검사)는 21일 동료회사원과 투자자들을 상대로 20억원대의 사기행각을 벌인 전 선경증권 과장 최광식(33·인천시 남구 청학동)씨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사기)혐의로 구속했다. 최씨는 지난 92년 8월 동료직원 김모씨(31)에게 은행 신용대출 연대보증을 서게 한 뒤 2천만원을 대출받은 것을 비롯,지난 8월까지 동료직원 15명에게 연대보증을 서게 한 뒤 9개 시중은행으로부터 6억4천여만원을 대출받아 주식에 투자해 보증인들에게 상습적으로 피해를 입힌 혐의를 받고 있다. 최씨는 또 평소 알고 지내던 권모씨(30)에게 「주식에 투자하면 매달 6부 이자만큼을 벌게해 주겠다」고 속여 15억9천여만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조사결과 최씨는 고객의 주식투자를 대신하다 거액의 손해를 입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사채를 끌어들여 주식에 투자했다가 다시 자금을 날리자 20여차례에 걸쳐 1백억원대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매입한 뒤 매입액보다 낮은 금액으로 되팔아 매입자금을 변제하는 수법을 써 온 것으로 드러났다.
  • 3년간 3회이상 부동산 취득/투기여부 집중조사/국세청

    앞으로 3년 동안 3회 이상 부동산을 취득한 사람은 국세청의 특별 관리를 받게 된다.자금출처를 조사하는 기준 안에서 교묘히 행하는 투기행위를 막기 위해서이다. 13일 국세청에 따르면 부동산 취득횟수가 3년 동안 3회 이상이면 건당 액수가 자금 출처조사 기준에 관계없이 취득 경위를 분석,투기 혐의가 있으면 세무조사를 하기로 했다.
  • 베제크리크 천불동/허세욱(서역 문화기행:4)

    ◎화염산기슭 석굴 83개… 6세기 불교유적/위구르족 왕가 사원… 당시 생활상 벽화로 남겨/서유기의 무대… 삼장법사­손오공 등 3제자의 조각상 곳곳에 투루판은 그 동서를 관통하는 국도 312번에 놓여있다.그것은 신강의 최서단인 이닝(이령)에서 황하와 황해가 만나는 최동단의 상하이(상해)까지 장장 5천㎞,어쩌면 미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80번 하이웨이에 상당하다. 투루판에서 312번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40㎞쯤 달렸을 때,갑자기 그 왼편으로 빨간 바위산을 만나는데 그 형상은 얼핏 한국전쟁당시 철의 삼각지,아이스크림고지를 방불케하는 타원형으로 마치 험상궂도록 쪼글쪼글한 노인의 얼굴 혹은,여름날 여인의 풍덩한 주름 치마같았다.한 포기의 폴도 없이 세로의 주름살은 차라리 빨간 폭포가 쏟아지는 형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화염산의 남쪽 기슭이었다.그 맹렬한 화염의 섭곡을 보자 놀랍고 반가웠다.그 명성을 들은지 너무 오래라서 그렇다.당나라의 고승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를 비롯,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잠참(715∼770)이 이곳에서 벼슬하는 동안 썼던 경화산」,「화산운가송별」등의 명작,그리고 중국4대기서로 꼽히는 오승은(1500?∼1582?)의 「서유기」등에서 익히 화염산,그 「팔백리에 걸친 불길」을 들어 왔었다. ○홍산에 풀한포기 안나 화염산은 「홍산」혹은 「화산」으로 불렸다.그보다 위구르말로는 「쿠즈로다고」즉 홍산이란 뜻이다.그것은 지구상에서 두번째로 넓고 낮은 동서 1백20㎞,남북 60㎞의 투루판분지에 동서 98㎞의 길이에 남북 9㎞의 폭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야 8백32m,평균 높이는 고작 5백m다.하지만 해발 이하의 분지라서 그 높이는 상당했다.연간 강우량이 겨우 16㎜의 초건조지역에 평균 기온이 섭씨38도 최고 기온이 49도나 된다.그래서 암석표면의 온도는 무려 80도를 넘는다.거기다 지층에 매장된 무진장의 석탄과 석탄에서 배출되는 가스로부터 폭발 연소도 적지 않다고 하니 「서유기」에 묘사한 대로 「화두 불길이 천길의 높이」란 형용도 결코 터무니 없는 말이 아니었다. 필자가 화염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은 지금부터 1천2백45년전인 기원749년,이곳에 당도했던 잠참의 「화산을 지나며」란 시에 잘 나타났다. 「화산금시견, 돌올포창동. 적염소로운, 염기증색공. 불지음양탄, 하독연차중? 아래엄동시, 산하다염풍. 인마주한류, 열지조화공」 (처음 만난 화염산은, 포창 동녘에 우뚝하여라. 화염은 오랑캐의 구름을 불지르고, 증기는 변방의 하늘을 찜질한다. 음양의 숯이, 어찌 여기서만 훨훨 타오르는가? 엄동설한에도 산밑엔 삼복의 열풍이. 사람도 말도 땀을 뻘뻘 흘리거늘, 누가 알랴? 자연의 조화를) 화염산 섭곡이 끝나는 승금구에서 312번 국도를 작별하고 좌회전하자 이윽고 빨간협곡이 열리면서 차는 화염산 북록을 휘돌았다.그 협곡의 정면에 보이는 둥근 모자모양의 홍산이 피라미드의 형세로 성큼 다가섰다.그것이 화염산의 주봉이었는데 주봉은 충격적 이라기보다 다소곳한 곡선으로 다만 풀 한 포기 없을 뿐 여느 동리앞을 지키는 안산의 크기였다.거기서 삼장의 길이 막히고 손오공이 파초의 부채로 재주를 부렸다는 곳이다. ○아래쪽 설수도 흘러 그 주봉아래로 기원6세기 고창왕국씨때부터 9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 위구르족들 왕가의 사원으로 건설한 석굴의 촌락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고 천불동아래로는 파란 설수가 콸콸 흐르는 목두구.그리고 천불동 입구 편편한 산기슭엔 최근 「서주천성원」이라는 작은 전시장을 개설 해 놓았다.그 안에는 「서유기」의 주연으로 삼장법사를 비롯,손오공·저팔계등을 조소한 외로도 「팔십일난」을 도해한 동굴,동굴밖 언덕위로는 잠참의 입상과 그의 대표작인 「화산운가송별」을 새긴 시비가 있었다.그 시비에 새겨진 첫 절은 이러했다. 「화산돌올적정구, 화산오월화운후. 수운만산응미개, 비조천리불감래」 화산이 우뚝 적정 어귀에 섰거늘, 오월이라 불꽃 구름 뭉게 뭉게. 불꽃 구름 엉긴 채 풀리지 않거늘, 천리길 나는 새도 얼씬할 수 없네) 필자가 찾은 때는 다행히 쾌청한 9월중순 이어서 인지 불꽃구름커녕 흰구름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진하디 진한 쪽빛 하늘 뿐이었다.그 쪽빛에 적갈의 산빛,골짜기와 석굴,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조차 일색으로 빨갰다. 그런데 그토록 숨 막힌 빨간 모랫벌과협곡에도 서원의 의지는 굴을 파고 예술의 꽃을 피웠었다.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그것이다. 화염산 주봉 동쪽 기슭엔 광장이 닦여 있었다.그 왼편엔 「서유기」의 일사삼도의 조상을 세웠는데 초입의 서주천성원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규모가 큰데다 훨씬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었다.그 바른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황갈색의 가파른 벼랑이 무르토크강(목두구))을 굽어 보고 있었다.과연 「베제크리크」란 지명이 「산 허리」라는 위구르말을 딸만했다. 기록상으로 석굴의 수는 83개라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50여개이며 그중 벽화를 소유했던 것이 40여개요 벽화의 총면적은 1천2백㎡라고.그것들은 열차의 창을 방불케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고,그 내부는 대체로 석굴의 길이 20m에 5m의 폭과 5m의 높이의 장방형,거기다 천장은 동그란 궁륭식이라 쿠차의 키질,돈황의 막고굴에 비해 훨씬 넓고 시원했다. ○일부 벽화 손실 아쉬워 기원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금 위구르족의 조선인 고창왕국씨들의 왕가 사원을 비롯,당시 불가의 승려·신도들의 승방,고승을 기리는은굴,혹은 그들이 좌선하던 비가라굴로 쓰였었다.당대의 문헌인 「서주도경」에 고창지역 불교의 승지로 소개한 「영융굴사」가 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인 것이다. 여기 벽화는 비록 석가모니 전생의 사적을 선양하는 본생고사를 비롯,서원도·경변도·공양상·인연고사등 불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왕공 귀족과 공양 신도들의 복식·가옥·거마·기악등을 통해 당시 불교를 신앙하던 회골사람들의 생생한 생활과 문화를 볼수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했다. 특히 33호 석굴의 「왕자거애도」에 그려진 여러나라 왕자의 각기 다른 모습과 표정은 마치 오늘날 정상들의 모임을 발불케했고,39호 석굴의 커다란 공양 보살의 풍윤한 얼굴과 굵직한 청화의 무늬,그리고 31호 석굴의 설법도에 그려진 보살의 성장과 복식등은 생생한 역사와 문화가 묻혀 있음을 직감케 했다. 그러나 20호 석굴과 27호 석굴에서 만난 복사물의 대체와 훼손된 잔화를 대하면서 허탈과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특히 20호 석굴의 서원도,회골국왕과 왕후의 형상은 10세기 당시 회골국 복식을 알수있는 증거임에도 절취된 채 지금 영인된 사진만 걸려 있음은 27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필자가 참관한 9호,37호등 석굴에서도 불상의 눈이 뭉개지거나 벽면을 도려낸 칼날의 선이 남아 여기 저기서 수난의 흔적은 완연했다. 베제크리크의 수난은 크게 두번 있었다.13세기말,몽골의 말굽 아래 처음 망가졌고,그를 전후해서 이슬람교가 흥성하면서 불교의 석굴은 쇠락을 거듭하였다.또 한번은 금세기초인 1902년,독일의 그륀베델과 로코크 등이 네차례나 답사를 빙자한 예술품의 절취가 있었다. 그 속에는 20호,27호 석굴의 것 말고도 회골귀족과 몽골인들의 복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공양도」와 회골문자가 들어 있는 「본생고사도」등이 절취당한 것은 통석할 일이다.더구나 그중 베를린 박물관으로 납치되었던 벽화 일부가 2차대전의 전화에 소실되었다니 서역의 찬란했던 회골문화의 운명도 꽤나 기구한 것이었다.
  • 투루판분지의 교하고성(서역 문화기행:3)

    ◎절벽위 토성… 2200년전 차사국때 건립/불탑 등 유적… 인불교 중국전파 중간지점 입증/성밖에는 끝없는 청포도밭… 2천년전 지중해서 품종 옮겨와 우루무치에서 제일 가까운 고도는 우루무치 동남쪽 1백87㎞지점의 투루판(토로번).그곳은 「서유기」의 무대인 화염산이 있고 세계에서 두번째 낮은 분지라는 지리적인 특성도 있었다. 투루판 버스터미널에서 투루판호텔로 가는 1.5㎞의 청년로는 환상의 거리였다.4차선도로가 온통 포도덩굴에 덮인 녹색의 터널이었다.주렁주렁 파란 포도를,그것들은 「개혁개방」의 선물이 아니었다.벌써 2천년전,지중해로부터 이식된 서양의 품종으로 그것은 신강이라는 열사의 땅에 이룩한 기적이었다. 투루판의 옛이름은 차사·고창·서주·화주·투루판 등으로 불렸다.그만큼 긴 역사에 다난한 역사를 지녔다는 뜻이다.사기의 대원전이나 한서의 서역전같은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450년대까지 7백년동안,이곳에는 이란계의 서역사람이 차사라는 왕국을 세우고 그 수도를 교하에 두었었다.그뒤 서한은 투루판서북쪽에 세워진 오손왕국과 인척관계를 맺고 차사와 연맹관계에 있는 흉노를 치기 위해 BC108년부터 BC60년까지 50년동안 다섯번이나 전쟁을 겪었던 소위 오쟁차사가 있었다. ○이란계 서역인이 건국 그뒤 서한은 교하에 무기교위를 두어 둔병을 주재함으로써 군사와 농사를 다스렸지만 멀지 않아 북량이 기원450년,차사를 공멸하고 고창왕국을 세웠다.그러나 국씨 왕국인 고창은 멀지않아 당태종에게 망하고,당나라는 고창에다 서주를 설치했다. 원대에 들어 몽골의 판도에 들면서 원은 「화주」를 건립했다가 청대에 들어서야 확실히 한족의 지배에 들면서 그 지명도 투루판으로 고쳤고 거기다 현청을 두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결국 투루판의 역사는 기원전250년,차사국의 수도였던 교하로부터 시작되었다.그 교하가 바로 오늘의 투루판에서 서쪽 13㎞지점인 아르나이즈계곡위 30m의 절벽위에 버들잎새나 배모양의 토성 교하고성이었다.남북 길이 1.6㎞에 동서의 폭은 넓게 3백30m 좁게 1백여m,그러한 작은 섬이었다. 필자가 막상 이 역사의 토성,전쟁이 여러번 쟁기질했던 곳,여러번 정권을 바꾸면서 14세기중엽까지 1천7백년동안 정치의 요충이었던 교하에 오기까지 낯 익었던 시도 적지 않았다. 그중 당나라의 변새시인이었던 이기(690∼751)의 「고종군행」과 잠참(715∼770)의 「봉대부」에게 주는 시,그것들에 비친 1천2백여년전의 교하를 읽고 싶다. 「백일등산망봉화, 황혼음마방교하. 행인도두풍사암, 공주비파류원다.」(하략) (고종군행) (한낮엔 산에 올라 봉화를 보고 황혼엔 말을 먹이려 교하에 맨다. 전사의 구리솥은 풍사에 깜깜한데 공주의 비파에선 원한이 서렸어라) 교하의 지세와 전란속의 한을 피상적으로 그렸지만 「황혼음마방교하」(황혼음마방교하)의 이미지는 명구로 칭송되었다. 「봉사안호속,평명발륜대. 모투교하성,화산적최외. 구월상류한,염풍취사준. 하사음양공,불유우운래.」(후략) (봉대부에게 주는 시) 「오랑캐 예속 따라 명령을 받고 새벽에 윤대를 떠났다. 저녁에 교하성 닿을 때, 화염산은 뻘겋게 치솟고. 구월에도 땀이 뻘 뻘열풍은 모래를 날린다.무슨 음양의 조화이기로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가?」 ○길다란 배처럼 지어 잠참이 비록 봉상청이란 대부의 공적을 치하하는 시지만 당시 교하의 자연환경을 생생하게 그렸다.곧 중추 9월임에도 땀이 나는 폭염에 모래 바람,그리고 화염산의 불길과 타질듯한 가뭄을 기록했다. 잠참은 749년부터 757년까지 서주와 북정을 오가면서 많은 변새시를 써서 중국 최고의 전쟁시인으로 알려졌다.특히 최근 고창폐허에서 출토된 당시 역사의 장부에선 잠참이 긁어 놓은 외상의 기록이 나왔다하는데 가슴을 뭉클케 했었다. 1994년 9월28일 하오,필자는 오랫동안 듣고 읽었던 교하성 전망대에 올랐을 때,듣던바처럼 길쭉한 배모양의 섬.비록 밤새도록 마시다 날이 샌 낭자한 술상처럼 쓸쓸한 폐허지만 그 규모와 기풍은 상상밖으로 광대하고 장엄했다. 소위 「교하」는 지금 그 거의가 말라빠진 하상으로 드러나 있었고 겨우 실내가 졸졸거렸다.그 실내위로 30m의 언덕.언덕위로 지금도 4백m의 중앙대로가 10m의 너비로 남북을 관통하고 있었다. 중앙대로를 축으로 동·서·남등의 세개 성문과 북부의 사원구,중부의 사원및 관청가·주택가등 종합구,남부의 일반 주택구등 세개 구역으로 나뉘었다.동문밖엔 벼랑이요,벼랑아래로 바닥이 드러났고,서문은 교하성의 서북쪽에 위치하여 바로 고비사막으로 통하였고,북문은 없지만 멀지않은 곳에 모여둔 1백여개의 사리탑림과 연결되었고 남문은 오늘날 「교하고성」으로 들어가는 정문으로서 우로 토성의 절벽이요 좌로 교하를 낀 언덕.그 위용이 당당하고 지세 또한 험난했다. 남문을 지나 약간의 비탈길을 오르면 왼쪽에 전망대가 정사각의 튼튼한 토성위에 축조되었다.그 동쪽엔 옹기종기 나지막한 유허들이 널려 있었다.그것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자연의 지층을 뚫어놓은 땅굴로서 큰 것은 2∼3m의 높이에 10여m의 너비였고 작은 것은 1m의 높이에 2m쯤의 너비였었다.그런가 하면 움푹 팬곳은 옛날의 우물이요,뻘겋게 탄 흙돌을 보면 옛날의 굴뚝이나 부엌이었을 가능성도 보였다.그보다 그러한 땅굴옆으로 참치하게 늘어선 토담들,토담밖에는 이리 꼬불 저리 꼬불한 골목길,여기가 틀림없는 백성들의 다운타운이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술래잡기라도 한바탕 벌이면서 퉁탕탕 잰걸음치고 싶었다. ○큰길 사방으로 연결 남부의 중앙쯤에는 7∼8m쯤 팬 광장이 있었고,그 광장옆으로 10m정도의 터널 하나와 절반쯤 무너진 벽들이 꼭 그만한 높이로 줄을 섰거늘 혹자는 옛날 감옥의 흔적이 아닐까고 말했다. 중부의 가도는 확실히 넓었다.적어도 6∼8m 너비의 길이 사방으로 연결되어 정연한 구획정리를 보였다.군데군데 넓고 높은 제단의 모습은 무너진 사원의 어느 기초일터요,때로 높은 계단에 훤칠한 기둥들은 어느 관아의 잔해일거라는 생각에 잠겼다. 중부와 북부 사이에 우뚝 선 불탑이 시선을 모았다.그 중앙은 10m의 돌출에 그 기단의 네 구석엔 4m 높이의 장방형 건축이 그를 에워싸서 한눈에 인도풍의 불탑,곧 스토파임을 알 수 있다.아무리 늦어도 당대의 축조물로 보이는 그 불탑에서 한때 교하성은 인도와 장안의 중간지점에서 불교를 전파 수도하는 중간역임을 말해주었다. 그런가하면 교하성은 당대문하의 전진기지였음이 70년대의 발굴로 증명되었다.거기서 출토된 연꽃무늬의 기와가 장안의 당대 왕궁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데다 심심치 않게 무더기로 나오는 동전이 또한 그랬다. 불교의 성황은 북부의 대불사유적이 이를 확증해 준다.중앙대로가 끝나는 지점에 남북의 길이 88m에 동서 너비 58m의 사원이 높이 5m의 담에 둘러싸인 유적이다.남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광장이 있고,광장 양쪽으로 고루와 종루,다시 뒤편에 3단계의 단상으로 철자형의 대웅전,그 탄탄한 기초와 웅혼한 기둥이 완연하다.그리고 사원의 둘레는 평균 3m 네모의 방들,곧 승방들이 빙 둘러 있었다.서울 근교 어느 불사에서도 볼수 있는 대승적인 구도라서 한결 다정했다. 필자는 사원의 담에 올라 남쪽으로 즐비한 폐허를 굽어보면서 차사왕국 당시 이 언덕에 살았던 7백호구에 6천50명의 인구와 1천8백65명의 군대(한서의 통계),그 번영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것들이 모두 토성으로,그것도 폐허로 남았다는 사실이 성채와 먼지사이,그리고 영원과 순간사이,그것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보였다.
  • 올해 가장 많이 팔린책/「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서울시대 대형서점들 연간 베스트셀러 분석/「무궁화…」 4백만권 판매… 인기 급증/젊은 작가 대거 등장… 소설류 많이 팔려/「일본은 없다」·「서른 잔치는 끝났다」도 주목 지난 1년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은 김진명씨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새로운 감각으로 일본문화를 비판한 전여옥씨의 「일본은 없다」를 비롯해 최영미씨의 시집 「서른,잔치는 끝났다」,이인화씨의 역사추리소설 「영원한 제국」,유홍준 영남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2권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종로서적·을지서적·영풍문고등 서울의 대형서점들은 지난해 12월부터 지난주까지 1년동안의 베스트셀러를 집계,28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남북한이 힘을 합쳐 일본을 쳐부순다는 내용의 「무궁화꽃이…」가 나이·직업에 상관없이 대단한 호응을 받아 출판사상 전례 없는 판매고를 기록하며 「가장 인기있는 책」으로 자리잡았다.「무궁화꽃이…」는 4백만권 가량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또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없다」고 일본을 매섭게 비판한 「일본은 없다」는 70만부 정도가 팔리는 인기를 모았다.「일본은 없다」는 출간이후 「일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라는 논쟁을 사회에 불러일으켰고 「일본은 있다」(서현섭 지음)등 숱한 일본비평서를 만들어낸 계기가 됐다. 지난해 인문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장기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면서 「한국인의 레저 형태에 역사·문화 기행이라는 새 분야를 정착시켰다」고 평가받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은 올들어서도 꾸준히 인기를 유지했다.지난 7월 나온 2권도 전편의 인기에 힘입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목록 수위를 차지했으며,1∼2권의 인기가 함께 올라가는 보기드문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부문별로는 소설이 예년보다 많이 팔린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이인화·공지영·신경숙씨등 뛰어난 젊은 작가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 주요인으로 분석됐다.이와 함께 「서른,잔치는 끝났다」가 순수시집으로는 모처럼 많이 나가 주목을 받았다. 비소설 쪽에서는 전문작가들의 책보다 자기 분야에서 한몫을 하는 아마추어들이 쓴 책이 폭넓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전체 책 판매량은 하반기 들어 더욱 부진해 출판계는 예년에 없던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 신강위구르 성도 우루무치/허세욱(서역 문화기행:2)

    ◎동쪽 1백㎞ 천산중턱의 천지 장관/만년설 녹은 물 담겨… 설봉·수해와 함께 “한폭 그림”/시 한폭판에 호랑이모양 홍산 “우뚝”… 벼랑위엔 진요탑 남고 우루무치의 금석 청나라때 유명한 소설가였던 기윤(1724∼1805)이 1768년부터 1771년까지 우루무치에 유배되었을 때 쓴 「오로목재잡시」1백60편은 2백20여년전의 우루무치를 사생활처럼 볼 수 있었다. 「독차력록만장가 화수은화대대배. 무수홍군란초수, 유인습득봉황혜」 (오로목재잡시·유람) (삐걱 삐걱 달구지소리 거리를 누비고, 불빛 나무 은빛 꽃들,쌍쌍이 줄을 섰네. 빨간 치마들 몰려나와 왁자지껄한데, 구경꾼들은 그녀들 벗겨진 봉황신을 줍네) 정월 대보름에 불놀이하던 풍물을 그렸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우루무치엔 송아지나 노새들이 끄는 달구지나 손수레가 많았었다. 이보다 옛적인 당나라시대에는 우루무치를 윤대라 불렀다.지금 우루무치교외의 오랍박댐 근처를 말하는데 그때 변새시인이었던 음참(715∼770)이 754년부터 3년이나 안서절도사 판관으로 이곳에 주재했었다.그때에 쓴 윤대군사에는 우루무치 당시의 풍물 풍속이 생생하다. 「윤대풍물이, 지시고단우. 삼월무청초, 천가진백유. 번서문자별, 호속어음수. 수견류사북, 천서해일우」 (윤대의 풍물이 달랐다, 옛날 흉노의 땅이라서. 삼월에도 풀이 돋지 않고, 집집마다 하얀 느릅나무. 오랑캐 글씨라 글도 다르고, 오랑캐 말이라 소리도 달랐네. 사막 북녘을 망연히 보면, 하늘은 로부노오르 저편에) 1천2백년이 지났어도 별로 변함이 없다.어디를 가도 느릅나무요,거리마다 위구르 문자에 들리는 것은 낯선 언어들,다만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뒤,비록 1954년 신강성을 「위구르족자치구」로 선포하고 소수민족의 풍습과 문화의 고유성을 보호한대지만 우루무치같은 대도시를 비롯,북로의 연도도시엔 한족들의 이주가 늘어 지금 한족대 소수민족의 인구비율은 거의 반반을 형성한 것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서왕모의 전설 간직 우루무치에서 시인묵객의 붓끝에 자주 오르던 명승으로는 천지와 홍산이 있었다.천지는 우루무치 동쪽 1백여㎞ 지점의 천산산맥에안긴 호면 해발 1천9백28m의 반월형 호수요,홍산은 우루무치시의 한복판에 선 해발 9백10m의 호랑이 형상을 한 적갈색의 바위산이었다. 천산산맥의 제2주봉인 해발 5천4백45m의 보고다(박격달),그 서북쪽 음지의 능선 아래로 설수의 모임이다.그 동남에 웅장한 만년설의 병풍을 두르고 그 품안에 길이 3.4㎞ 너비 1.5㎞의 호수와 호수에 누운 설봉의 그림자를 안았기로 그 천지의 절경은 백두산의 천지에,그 배경은 스위스의 몽블랑에 견줄만했다. 오죽해야 중국 최초의 허구적인 전기요,허구적인 여행기인 「목천자전」에서 주나라 목왕이 서역 선녀의 수령격인 서왕모를 만난 무대로 여기를 골랐던 것이다.그로부터 천지는 요지 용담 천경 신지등으로 미화되었다. 필자가 탄 버스가 부강현을 지나 두시간뒤에야 천산산맥으로 접어들었는데 그 첫번째 경관은 아무래도 해발1천5백m 높이서 만난 석문이었다.20∼30m 높이의 우람한 바위가 마치 두쪽 대문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그 사이를 뚫고 굽이 굽이 산길을 오르면 파란 전나무의 진하디 진한 바람을 타고 하얀적설이 시야에 부딪는다.다시 가파른 비탈을 오르면서 기우뚱 보이는 시퍼런 호수,그게 「목천자전」에 서왕모가 발을 씻었다는 「서소천지」였다. 버스의 종점부터 필자는 4시간동안 준마 한필에 마부 한사람을 빌리곤,더덩실 안장에 가랑이를 얹고 천산의 가파른 등성이를 향해 고삐를 죄었다. 반달 모양의 천지,그 북쪽 제방을 거드름 피우며 건너가는데 늙은 느릅나무 한그루가 호수쪽으로 누운 채 버티고 있다.목책을 세워서 그 자빠진 나무를 보호했고,그 옆으로 「정해신침」,곧 「서유기」의 한장면을 표시하는 비를 세웠다.호수를 안정시키는 신침이란 뜻.듣건대 여기 산지 사람들은 그 느릅나무와 호수의 간격으로 호수의 저수량을 측정한다고 했다.그보다는 여기에도 서왕모의 전설이 서려 있었다.어느날 서왕모가 벌인 반도회잔치에 훼방을 부리는 도깨비가 있어 자기의 비녀를 뽑아 던졌더니 그 자리서 느릅나무가 돋았다는 비녀의 화신설이다. ○분지는 마치 솥바닥 천지에서 서쪽으로 3㎞쯤 올랐다.고개를 넘자 널찍한 분지,그 뒤로 팽이처럼 꼿꼿한등간산,등간산 꼭지에는 뾰족한 바위 세덩이가 창모양으로 서있다.이름하여 「정천삼석」.등간산 아래로 그 분지는 마치 솥바닥,그래서 서왕모가 밥을 짓던 솥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한때 군마를 사육하고 훈련시켰다던 곳이다. 등간산분지로부터 하산할 때 굽어보는 천지는 절경이었다.하얀 설봉에 파란 수해,거기에 저 아래로 시퍼런 호수,문득 천산의 높이와 천산의 주변을 잊고,천지가 작은 그림엽서로 보였다.청나라 역사학자요 시인이었던 홍량길(1746∼1809)이 1800년 유배길에 쓴 천산가의 한대목이 잘 말해 준다. 「지맥지차단, 천산사포천. 일월하처루, 총괘청송전」(후략) (지맥이 여기서 끊겼고 천산은 벌써 하늘을 안았으니,해와 달은 어디서 살까? 청송 가지끝에 가만 걸렸네) 천지 언저리엔 일찍이 팔대사가 있었다고 한다.그런데도 몽땅 폐허로 남았다.그중에도 천지 서북쪽 7백m 비탈에 남은 철와사가 그 유적만으로도 당시의 장관을 짐작케하는 제일사원이었다.원나라때 칭기즈칸이 유럽 정벌길에 목천자의 전설을 따라 천지를 오르고는 거기다도관을 짓토록 명령했다고.그러나 확실한 연혁은 아무래도 청나라 건륭연간,푸른 벽돌로 벽을 쌓고 쇠 기와로 지붕을 이었대서 「철와사」로 불린 것이다.학교 운동장을 방불케 널따란 폐허에 유적비만 동그마니 서 있었다. ○하사크족 파오 즐비 철와사 유적지 아래로 하사크족들의 파오가 즐비했다.몽골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하얀 모전의 둥근 텐트형의 그 속은 난로에 식탁·침구정도의 간소한 가구지만 초원의 주막이라고 호객도 서슴지 않았다. 이토록 빼어난 경관을 지녔음에도 발길 닿는 곳마다 서왕모의 전설이 얽힌 곳.말하자면 천혜의 상품에다 전설의 포장을 덧붙여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우루무치로 돌아와서 곧장 홍산으로 차를 몰았다.고개를 치켜 들고 하늘로 치솟는 용이나 호랑이의 형국이다.천산에선 청색과 백색을 보았는데 홍산에선 검붉은 바위,그러니까 원색과 원색을 옮겨 다니는 강렬한 대비로 오싹한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홍산은 벼랑,벼랑위로 회청빛 9층탑이 섰다.거기서 우루무치 전경을 굽어 볼 수 있었는데 이름하여 「진요탑」.옛날 해마다 여름이면 범람하는 홍수로 우루무치가 물 바다였다고.그것을 요괴의 장난이라고 믿은 청나라 총독은 드디어 1788년 거기다 탑을 쌓고 요괴의 맥을 끊었던 것이다. 「진요탑」에서 정상으로 한참 오르면 「임칙서시비」가 새로운 초점으로 우뚝 섰다.청나라 아편전쟁때 아편을 금지하였던 항전파의 수령이요 시인이었던 임칙서(1785∼1850)를 기념하는 비다.거기에는 그가 영국 투항파에 쫓겨 신강으로 귀양살이하던 1845년12월4일,이곳 홍산에 올라 단숨에 썼던 「금루곡」,그 명작이 절록되어 있었다. 「임광가,취와홍산취. 풍경처,주린기」 (미친듯 노래하다가 홍산에 누웠노라! 바람 모진곳에 술잔조차 일렁인다.) 한 영웅의 강개가 뭉클하게 표출되었다.더구나 싸늘한 서역의 바위산에서
  • 칠레도주 사기범 인터폴 공조 검거

    서울지검 북부지청 특수부는 22일 18억원대의 부동산사기행각을 벌이고 칠레로 도주한 전양진씨(55·서울 서초구 신원동)를 국제경찰기구(인터폴)와의 공조수사로 7개월만에 검거,한국으로 압송중이다. 전씨는 지난 3월8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 321일대 1천4백여평의 땅 주인인 김모씨의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뒤 공범을 내세워 D공영대표 윤모씨(51)와 토지매매계약을 맺고 계약금으로 5억원을 받는 등 2차례에 걸쳐 18억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 지적양식·생활의 지혜가득/독자의 눈길잡는 다양한 기획·참신한 지면

    ◎칼럼/시대조류 심층분석·예각평가/이동화…/정치동향 조망/최택만…/생활경제 쉽게 풀어/연재물/전문가 해외답사… 생동감 넘쳐/서역…/실크로드 역사 반추/연변…/북간도 동포 조명 지난 49년 동안 정론지로서의 사명을 다해 온 서울신문은 오는 21세기의 개방화·국제화의 흐름에 발맞춰 다양한 정보의 흐름을 깊이 있게 전달하는 기획 연재물들을 싣고 있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추진한 개혁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개혁의 열기가 뜨거운 세계 곳곳의 현장을 찾아 심층 취재한 「세계의 개혁 현장」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데 이어 올해에는 개혁보다 국민생활에 직결되는 연재물들을 중점적으로 연재하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경제 제일주의」에 밀려 피폐해진 국토를 되살리자는 「94 캠페인­녹색환경 가꾸자」가 장기 연재되며 독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녹색환경 가꾸자」는 「내가 사는 이 땅의 환경은 내가 지킨다」는 슬로건 아래 환경을 깨끗이 가꾸는 데 모두 힘을 모으자는 취지의 기획물.환경보호 운동의 추진 방향과 시민·기업·정부의 역할을 진단·점검하고 미국과 일본 등 환경 선진국의 실태를 현지에서 취재,배워야 할 점을 제시하고 있다.이 연재물은 이미 90회를 돌파했다. 서울신문은 「녹색환경 가꾸자」가 단순히 구호의 차원이 아닌 현실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깨끗한 산하 지키기 운동」을 함께 벌여 나가고 있다. 전문가적 시각에서 세계의 문화를 조망해 보는 장기 연재물도 독자들의 호응이 높다.「세계의 명소걸작 건축 감상」과 중국의 신강지역 탐사기인 「서역문화기행」이 그것이다. 「세계의 명소 걸작 건축 감상」은 세계적인 명소와 유명 건축물의 건축학적 의미와 감상법,건립에 얽힌 재미있는 비화,그 곳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문화와 삶의 모습 등을 소개한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을 비롯,이탈리아의 「콜로세움」,일본의 「도쿄 새 도청사」,프랑스 라데팡스의 그랜드 아치 「신개선문」 등이 생동감 있게 독자들을 찾아갔다.명지대 건축학과 최재필·장성준·김혜정·윤명오교수 등 4명의 교수가 해박한 전문지식과 현지 답사를 통해 번갈아 집필한다. 「서역 문화기행」은 중국 서안에서 이탈리아의 로마에 이르는 2만리 실크로드(비단 길·고대 무역로)의 중앙으로,지구의 지붕인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이 있는 서역의 어제와 오늘을 반추하는 기획물이다.우리의 선인인 고선지장군과 고승 혜초의 발자취가 배어있으며 황금과 비단의 교역은 물론 불교와 회교·기독교가 거쳐가며 종교·예술·문학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곳이다.작년부터 실크로드를 탐사한 중국 문학의 태두 고려대 허세욱교수가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다. 「오늘의 우리는 누구인가」를 돌이켜보는 「연변 조선족 1백년」과 「한국인의 얼굴」도 인기를 끄는 연재물이다.「연변 조선족 1백년」은 오늘의 삶에서 억척의 생명력을 다시 본다는 부제를 달고 있다. 외롭고 고달픈 민족의 땀과 한이 얼룩진,흔히 북간도로 불려온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그 미지의 땅을 찾아 이민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 지 1백년을 맞아 그들의 삶과 애환을 민족지적 시각에서 재조명한다.현지를 답사한 인하대 최인학교수(비교 민속학)가 맡았다. 「한국인의 얼굴」은 순수한 학술분야를 알기 쉽게 풀어주는 연재물이다.사람의 얼굴은 희로애락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갖가지 모습이며 지역과 민족·시대에 따라 달라진다.「우리는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들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역사 속에 투영된 민족의 자화상인 한국인의 얼굴을 우리 스스로 어떻게 그렸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세기의 인물탐구」도 훌륭한 읽을거리다.지난 92년부터 연재가 시작되었다가 한 때 중단됐던 이 연재물은 주위에서 가장 흥미를 가지고 관심있게 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 인물 평전이다.세상살이와 고리를 함께 하는 인간의 참모습을 유려한 문체로 풀어나가고 있다.이 연재물을 통해 소설가 황순원씨,연극배우 전무송씨,무용가 이매방씨,문학·문예 평론가 이어령씨 등 문화계 거봉들의 족적을 탐색할 수 있었다.본사 출판편집국 이세기 기획위원이 집필하고 있다. 얽히고 설킨 세상사를 명쾌하게 풀어주는 명칼럼도 즐비하다.「송정숙 칼럼」「이동화 칼럼」「최택만 경제평론」「박갑천 칼럼」「임춘웅 칼럼」이 있다.다른 신문과의 차별화를 추구한 「청와대 칼럼」과 「최선록 건강 칼럼」도 많은 독자 층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 해부터 연재 중인 「청와대 칼럼」은 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보는 청와대 출입기자가 대통령의 생각과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때문에 베일에 가렸던 대통령의 진솔한 이면을 숨김없이 접할 수 있다.최근 「칼국수와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라는 책으로 출간돼 베스트 셀러가 됐다.
  • “지구의 처마” 신강지역(서역 문화기행:1)

    ◎동서문물 교류 실크로드의 중심지/중국 서쪽끝 고원… 불교·회교 전파경로/천산 남·북로­중로 등 실크로드 세갈래 길 모두 거쳐/분지·사막에 위구르족등 47개 민족 거주… 고승 혜초·고구려 고선지장군 발자취 남겨 지난 6개월동안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속에 연재해온 중견작가 4인의 연작문화기행 「아랍서 지중해까지」를 끝맺고 새연재 「서역 문화기행」을 싣습니다. 집필은 허새욱 고려대 교수(중국문학)가 맡습니다. 서역,즉 오늘의 신강은 동양에서 가장 높은 고원과 드넓고 황량한 사막지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동·서문화가 최초로 교차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돈황 보다도 1∼2세기 앞서 불교문화를 꽃피운 곳이자 이슬람교의 최초 경유지이며 또한 변새문학의 본거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선인 고선지 장군과 고승 혜초도 이곳에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사막과 고원이라는 열악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궈온 이곳의 어제와 오늘이 허교수의 예리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각으로 다뤄질 것입니다. 북경에서 비행기로 네시간남짓 날아서 신강의 성도 우루무치(오로목재)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주나라의 다섯번째 황제인 목왕이 서왕모를 만났다는 천지를 가기 위해 정거장으로 가던 길이었다.겨우 9월 중순인데 가로수 잎새들이 떨어져서 아스팔트위를 소리 치고 뒹굴고 있었다.때마침 손수레를 끌고 노새들이 줄을 지어 오는데 손수레는 비닐을 깔고 시냇물을 담고,거기서 팔뚝만한 잉어들이 팔딱거렸다. 필자는 그 손수레 행렬을 따라가면서 잉어 한근에 얼마냐고 물었다.『한근에 3위안(한화 3백원 상당)』이라고 내뱉듯이 대답하면서 노새와 함께 뛰어갔다.풍년에 무값이었다.월척 한마리라도 15위안이면 넉넉히 살수 있기에 말이다. ○만년설 녹은 설수흘러 그만큼 담수어가 흔하다는 말이다.서역에는 담수어 뿐만이 아니다.백초의 왕이라는 감초말고도 포도와 파란 푸성귀가 흔하고 서역 가는 곳마다 훤칠한 천마가 길쭉한 허리에 미끈한 다리를 뽐내고 있었다. 그것들을 기르고 그것들을 살찌게 하는 물이 흔하다는 말이다.가도 가도 황막한 사막에 물이 풍족하다는 말은 믿기지 않았지만 신강의 사막을 거닐다 보면 도처에 땅속으로 흐르는 우물 「카레즈」가 있고 아예 봇물처럼 꿈틀거리며 흐르는 복류수를 만나게 마련이다.그것들은 신강에 와서 조금만 눈여겨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북으로는 알타이산맥,서로는 천산산맥,동으로 곤륜산맥,남으로 파미르 고원,그 사방의 산맥들을 덮고있는 만년설이 녹아서 내린 푸르디 푸른 비취빛 설수인 것이다. 그러나 서역은 분명히 먼 곳이다.청나라 건융24년(1759),청나라가 이 땅을 재통일하고 「신강」으로 고쳐 부르기까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줄곧 「서역」으로 불렀었다.고구려의 명장 고선지가 절도사로 군권을 장악했던 곳이요,신라의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에서 말하는 「서역」은 물론,오늘날 서정주의 「귀촉도」에서 「눈물 아롱 아롱/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3만리」하는 「서역」도 여기를 말함직하다. 전국시대의 「산해경」을 비롯,「목천자전」,그리고 중국문학사상 양대상고작품의 하나인 「초사」에는 신강이 신선들의 거소로 등장했다.「초사」에 나오는 「현포」나 「낭풍」은 오늘의 곤륜산이요,「초사」에 나오는 「서해」는 오늘의 보수톤호를 말한다. 그것들은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서역」이지만,실제의 서역 또는 전국시대로 소급된다.한무제가 기원전 138년부터 장건을 비롯,위청,곽거병등의 사절이나 장군을 파견하기까지 여기엔 오손이나 흉노등 원주민들이 36개의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열국의 혼전시대를 보이고 있었다.그토록 기나긴 혼전시대를 겪고 기원전 60년에야 한나라는 오뢰(지금의 신강성 윤대현)에다 「서역도호부」를 창설,신강을 정식으로 중국의 판도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그 땅은 풍운의 역사였다.총면적 1백60여만㎦의 넓이에 47개민족을 망라한 1천3백여만명이 산다. 그 넓이가 전중국의 6분의 1이요,우리나라(남한)의 17배에 상당하지만 그 안에는 동서의 길이 1천5백㎞에 남북의 길이 6백㎞,53만㎦의 타림분지와 38만㎦의 석유분지인 중가르분지,그리고 5만㎦의 투루판분지를 안고 있다.그 분지에 7백여하류와 50여 호수를 안고 있지만 그 절대면적이 사막이다.그중의 타클라마칸사막은 33만㎦이다.타클라마칸은 우리말로 「들어가면 나올수 없다」는 뜻.그래서 누구나 신강을 죽음의 계곡쯤으로 생각했었다. 파미르고원에서 히말라야산맥까지를 지구의 지붕이라면 신강은 지구의 처마에 해당했다.그 지붕을 넘으면 옛날 페르시아를 뚫고 지중해를 만난다.그러니까 중국의 최서단일 뿐 아니라 동서를 가르는 장벽인 셈이다. 그러나 이 처마와 장벽을 통해 인도의 불교와 중동의 이슬람교가 들어왔다.그 최초의 전도노선인만큼 기원1세기부터 불교의 동점을 따라 간다라,아잔타의 미술이 서역의 문화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실크로드 복지로 관심 쿠처(고차)의 크잘천불동에 착굴된 2백36개의 석굴이 돈황의 막고굴보다 1세기 앞선 미술이 그를 증명하고 당나라의 현장법사와 우리 신라의 혜초스님이 인도를 취경차 오가던 길이 여기란 사실로도 이 땅이 중원이나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말해준다. 그런가하면 신강은 또한 서역문학의 현장이다.그 열악한 지리조건 때문에 중원의 문인들이 왕래하기에 어려웠지만적어도 전쟁문학을 생산한 최전선이요,중국 신마소설의 무대란 점에선 결코 간과할 수 없다.당나라때 「변색시」파로 알려진 고적이나 음참 등의 문학이 여기서 생산되었거니와 명나라의 걸작 「서유기」의 무대로 화염산을 비롯한 여러 현장이 있다. 신강이 보다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실크 로드의 복지란 데에 있다.장안에서 로마까지의 그 가운데 토막인 셈이었다.그런데 돈황에서 파미르고원,혹은 흑해로 가는 남로·중로·북로등 세갈래길은 모두 신강을 횡단하거나 종단했다. ○혜초는 중로따라 귀국 당나라때까지만 해도 남로는 동서를 교통하는 하이웨이에 상당했는데 그 남로란 돈황을 출발,서쪽으로 옥문관을 통과,곤륜산맥의 북쪽과 타클라마칸사막의 남단을 뚫고,지금 중국 핵실험의 첨단기지인 뤄부보(나포박)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3세기까지 왕국으로 실재했었던 누난의 고성을 지나 지금의 찰크리트(약미),첼첸(차말),케리아(우전),호틴(화전),야르칸트(사차),타스크르칸(탑십고이간)등을 경유해 파미르고원 아래로 해서 중앙아시아로 뻗는길이다. 중로는 양관을 통과,천산산맥의 남쪽과 타클라마칸사막의 북단을 뚫고 신강의 가슴을 횡단하는 길인데 한나라때 차사전국의 수도였던 투루판(토로번),지금 파인쿠어렁(파음곽릉)몽골자치주의 수도인 쿨러(고이근),한대의 「서역도호부」와 당대의 「안서도호부」의 소재지였던 쿠처,그리고 옛날 소륵국의 수도였던 카스칼등을 거쳐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장장 2천㎞를 말한다. 마지막 북로는 역시 옥문관을 통과,서북쪽으로 종단,하사크스탄의 토크마크를 뚫고 곧장 지중해로 뻗어나간 길인데 거기엔 참외의 고장으로 알려진 하미(합밀),지금 신강성의 성도인 우루무치,그리고 농목의 고장인 우쑤(오소),훠청등이 있는 아름다운 초원에 젖과 꿀이 풍성한 길이다. 「대당서역기」와 「왕오천축국전」의 기록에 따르면 현장법사는 중로를 따라 인도에 갔다가 올때는 남로를 택했고,혜초법사는 중로를 따라 귀국길에 올랐었다. 필자는 비록 그 세갈래를 완주할 수 없었지만 그 세코스의 요지 대부분을 강행군했다.육로·철로는 물론 공로를 많이 이용한 데다 밤낮도 가리지 않았다. 남로가 황막한 백색이라면 중로는 긴장의 적갈색,북로는 목가적인 청록색이었다.그도 그럴것이 남로는 비록 가장 창연한 옛길이라지만 뒷날 황량한 폐허가 많은데다 지금의 주민 또한 대부분 위구르족이었고,중로는 타림분지의 가슴을 뚫는 중앙대로로 역사를 자랑하는 석굴이나 오늘의 부를 공급하는 유전이 몰려 있었다.그 마지막 북로는 인력으로 개간한 농지에다 천연적인 초원이 많아서 얼핏 분지요 사막임을 잊게 했었다. 그러나 신강은 황·백·청의 3색평면도란 인상을 씻을 수 없었다.보이는 것이 사막이라서 황이요,타클라마칸사막같은 백사에 산마다 봉우리가 백설인데다가 길마다 가로수로 선것이 백양이라서 백이요,산마다 음지는 전나무요 오아시스마다 초원이라서 청이었다.
  • 농어촌 청소년대상 시상식/서울신문사주최

    서울신문사와 한국방송공사(KBS)·농림수산부가 공동으로 마련한 제 14회 농어촌 청소년 대상 시상식이 18일 한국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시상식에는 최인기 농림수산부 장관과 이한수 서울신문 사장,최동호 한국방송공사 부사장,김광희 농촌진흥청장,이희수 수산청장,송찬원 축협중앙회장,이방호 수협중앙회장,한성희 농협중앙회 부회장,최민호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교수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대상인 농림수산부 장관상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산채 4­H회(대표 김하겸)가,특별상인 서울신문사 사장상은 진명호씨(34·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주문6리)가 각각 받았다.본상인 농촌진흥청장 및 수산청장상은 류기행씨(29·전북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825) 등 12명이,공로상인 한국방송공사 사장상은 윤경석씨(46·충북 농촌진흥원 농촌지도사) 등 2명이 각각 받았다.
  • 파리/불 여류작가 이자벨 라캉과의 대화(아랍서 지중해까지:23)

    ◎“활동하며 명상… 나는 2중으로 산다”/“어머니 나라는 한국… 동서양 내면세계 모두 수용 하고파” 파리기행의 프로그램 속에 프랑스 명사와의 인터뷰가 언약되어 있었다. 원래 나는 사강이나 뒤라스 혹은 브리지트 바르도를 인터뷰 해보고 싶었으나 잠시 머무르는 일정으로서는 여의치 못했다. 대신 한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르노드 수상작가 아버지 막스 올리비에 라캉 사이에서 태어난 이자벨 라캉을 서면으로 인터뷰 할 수 있었다.우리에게는 이쪽이 더 친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그녀는 런던대학에서 중국어,파리 3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용의 입맞춤」「아주 훌륭한 처녀」가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하였는데 이제 40세가 된 그녀는 영화배우·성우·가수활동도 했던 매우 다재다능한 여성이다. 타인이란 자신의 거울이어서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펴보는 일에 대체로 아주 흥미있어한다.그리고 타인의 삶의 어떤 작은 부분에서 의외의 커다란 자극을 받기도 한다.그러나 언어의 불소통으로 몇사람을 거쳐왔다갔다하는 사이 원래 생각했던대로의 아기자기한 내용이 아닌,섬세성이 결여된 딱딱하고 의례적인 인터뷰가 되어 버린 점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다. ○한국의 산과들 흠모 ­그 사람의 하루가 그 사람의 일생이라는 말이 있다.당신의 하루의 일과를 말해달라.우선 아침에 눈을 뜨면 첫 생각이 무엇인가. ▲주로 글을 쓴다.그리고 경이롭기만한 내 어린 아들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본다.그 때문에 나는 시골에서 살기를,한국의 산들과도 조금 흡사한 세벤 산맥 속에서 자연과 계절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살기를 택했다.그렇다고해도 그것이 파리 생활 속의 스트레스를 완전히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나는 여러 주일동안 현실과 차단된채 종이에 코를 박고 지낼 수도 있다.내 소설 제목처럼 그야말로 「활동적인 명상하는 여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여인은 자신의 안락의자에 파묻혀 상상력의 날개 위에서 여행한다.즉 이중으로 사는 것이다. ­얼마전 한국 TV로 당신이 카페에서 글 쓰는 것을 보았다.오랜 친구인 영화감독과 함께 합작 소설을 쓴다고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쓰는가.그가 남자의 부분을 맡고 당신이 여자의 부분을 맡는가.아니면 파트별로 분담해서 각자 쓰는가. ▲나는 어디에서든지 글을 쓸 수 있다.만남에 집중되어 있기만 하다면.다시말해 내가 내 인물들과 함께 있기만 하다면.분명 나는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작가이며 소설가인 내 오랜 친구 장과 함께 글을 쓴다.글쓰는 방법은 소설에 따라 달라진다.핑퐁 경기와도 같은 공동의 논쟁을 통해서 대체로 내가 소설 속의 인물을 만들어 내는 동안 그는 소설의 구성에 더욱 집착한다. ○인기란 손에 든 폭탄 ­당신은 배우·가수·성우등을 했고 매우 아름다우며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당신은 인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기란 손에 든 작은 폭탄과 같다.개인에게 자유를 주고 쓰고 싶은 것을 쓸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인기란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지지는 않는 하나의 행운일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매우 쉽게 사라지는 그 금빛의 작은 층은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에게 들려줄 기회를 조금 줄 뿐이어서 그 목소리를 좋은 목적을 위해 보다 긍정적이고 유용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글을 쓰는가. ▲내가 화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나는 그림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나는 분위기나 감정·감각을 그린 후에 거기에 대한 적당한 언어를 찾아 내기를 좋아한다.당신은 내게 글쓰기는 또한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고 말할 것이다.단어와 문장의 리듬·멜로디 때문에 예술은 사람들 각자가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을 표현할 다른 지지대와 다른 매체들 사이의 「조화」의 이야기일 뿐이다.그러므로 글쓰기는 영화감독이면서 동시에 극을 연기하는 하나의 경이로운 방법이다.자기가 시나리오를 쓴 후에 장치·의상·배우들의 연기 몽타주에 참여하는 연출가,즉 소설은 매우 완벽한 실습이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보고 싶은가. ▲전통주의자가 된 정열적인 여인 파키스탄의 부통령 부토와 같은 여성이다.왜냐하면 그녀는 남자들의 세계 속에서 벌이는 여성의 투쟁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모순과 약함과 딜레마와 잘못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다.이상과 기회주의,반항과 지속 사이의 갈등…자식으로서의 복수와 충성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는 그녀는 완벽하게 고대극적인 인물이다.자기자신만의 문화 속에 편입되어 있는 그녀는 매혹적이면서도 공포스러운 무엇을 지니고 있다.주의를 끄는 소설적 인물이다.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버지다.너무 일찍 돌아가셨지만 언제나 마음 속에 생생하다. ­당신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특히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사랑과 남자의 사랑은 어떻다고 보는가. ▲아마도 프로이드가 당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나 보다.사실 나는 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랑과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비교해 본적이 없다. 부모 자식의 사랑 속에는 어떤 합병,보다 평범하게 말하면 「용서」의 색깔을 주는 끈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남녀 사이에서 이런 희생에 이르는 사랑은 매우 드물다.그들 사이에는 육체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그러한 사랑에 이르는 남녀야말로 위대한 사랑을 알고 있다고나는 생각한다. ­당신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고 어머니는 한국인이다.동양의 피를 자신에게서 느낄때가 있다면 어느때인가. ▲내가 감미로운 한국인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던 그 환경이 프랑스 임을 잊지 않는다.그러므로 1+1=1이라고 나는 생각하려 한다.이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원론적인 사회와 화합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행동하는 방식이다.어떤 상황에 있어서 또다른 면을 생각하는 것은 때로 내 행동을 부자유하게 한다.그렇다고는 해도 그런 면은 아마도 내 성격쪽에 더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서양과 동양을 다 수용하여 그것을 경이로운 성공조건으로 변경시키고 싶다. ○자신에 정직하려 노력 ­당신은 삶의 어떤 규범이 있다고 보는가.이것만은 하고 꼭 지키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정직하려 노력하는 일이다. ­파리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장소는. ▲에펠탑 꼭대기.에펠탑의 구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중 하나다.그리고 팔레 팔레루아얄의 정원이다. ­어린시절의 파리와 오늘 날의 파리가 다르다고 느끼는가. ▲교통,그리고 지역적 삶의 사라짐에서 그런 느낌을 갖는다. ­당신의 어머니는 매우 음식솜씨가 뛰어나다고 들었다.당신의 식탁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가. ▲서구인에게 있어 대수롭지 않은,그러나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이다.어머니는 내 요리를 매우 극단적이며 일정한 솜씨를 유지하지 못하고 관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이것이 어머니가 당신 딸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다.내가 흐리멍텅하고 전혀 완벽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앞날에 대한 마음의 그림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나는 미래가 평화롭고 조용하며 시적인 의미에서 생산적이고 활동적이고 드라마틱하고 언제나 강력하게 일을 해나가고,포식하고,내게 일하고 글 쓰고 사랑하고 살려는 더 많은 욕구를 주는 내 아들에 의해 자극받기를 희망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에게 몰두하는 겸손을…감사한다.
  • 불 라데팡스 「그랜드 아치」(세계의 명소/걸작건축 감상:4)

    ◎현대판 개선문… 「세계를 향한 창」 상징/중심부 뻥 뚫린 6면체인류 상호교류 표방/건물 표면은 “커뮤니케이션의 대명사” 반도체 칩 모양으로 꾸며 건축은 사회문화를 비춰보는 거울이다.한 사회의 시대적 이념·경제·생활문화·기술 등이 함축되어 건축 환경에 그대로 표현되기 때문이다.현존하는 건축물이든,건축물의 흔적이든 건축 기행을 통해 시대상·문화상을 읽어 가는 것은 책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우리를 비춰볼 수 있듯이,그 속에서 나와 우리와 또한 문화를 비춰볼 수 있어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된다.역사 속의 주요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건축을 대하면 인류의 삶의 흔적을 바라보며 시간속에서 나와 이 시대를 생각해 보게 한다.외국의 민속적인 고유성을 지닌 일련의 건축물을 대할 때는 이국적 정취에 한껏 빠져 일상에서 일탈한 자유로움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인간의 능력에 대해 감탄을 쏟지 않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대할 때는 무엇이 그토록 신비로운 힘을 솟아나게 했는지 무한한 능력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그리고 아기자기한 손길이 표현된 인간의 따뜻한 정서를 전달하는 일상적 건축은 그 공간속에서 인간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세계의 곳곳에서 나름대로의 분위기를 간직하며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공존하는 이 모든 형태의 건축물에 대한 경험을 나는 매우 소중히 여긴다.그중에서도 프랑스 수도 파리 근교에 있는 그랜드 아치는 프랑스의 현대적 문화 가치관과 세계관을 깊이 느낄 수 있어 매우 흥미로운 명소라 생각한다. 1989년에 완공된 그랜드 아치는 금세기 현대 건축의 걸작품으로 상호교류를 통한 「인류의 승리」를 표명하는 현대판 개선문으로 전세계의 건축가들로부터 사랑 받을 뿐 아니라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빠뜨리지 못할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금세기 최대 걸작품 그랜드 아치는 역사적 건축물로 가득찬 파리의 현대적 도시 기능을 위해 개발된 수도권 서쪽 신도시인 라 데팡스에 위치하고 있다.인접 파리와는 대조적으로 현대건축물이 군집해 있는 이곳은 파리 중심부에서 고속전철로 10여분 거리에 있어 파리의 업무지구로 여겨지는 곳이다.그곳에서도 그랜드 아치가 서 있는 지점은 파리 내의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들과 일직선상에 있어 위치가 상징하는 의미가 깊다. 파리가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도시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도시 계획의 우수함에 기인한다.시민들에게 가장 친숙하고,다양한 역사적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으며 관광객들이 가장 가볼만한 명소들이 위치해 있는 가로는 파리 중심부를 가로지르며 동서로 일직선상으로 뻗어나가 도시의 강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이 가로는 동쪽에서는 루브르 궁전의 정원에서 시작한다.서쪽을 향해 따라가면 일직선상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를 비롯해 1천명 넘는 사람들이 이곳의 단두대에서 처형 당하였고 현재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물인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서있는 콩코드광장에 도달한다.이곳을 지나 서쪽으로 계속되는 가로는 세계 패션의 중심인 샹젤리제 거리로 확장되고 연속해서 나폴레옹의 승전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있는 샤를 드골 광장으로 이어진다.이러한 파리의 강한 「역사적 축」의 서쪽 끝은 현대도시라 데팡스의 그랜드 아치에서 현재는 종결된다.이렇듯 파리의 역사적 도시축선상에 또 한 장의 역사를 펼치고 있는 이 건축물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도시축을 확인함과 동시에 종결하고,시간의 진행 속에서 미래를 향한 시작을 알리는 장소적 의미가 있다. ○정보화시대 상징물 성당이 기독교 문화의 상징이며,궁전이 제왕의 권력의 상징이듯,현대 정보화 시대의 상징물을 구축하겠다는 미테랑 대통령의 야심에 찬 건축 정책에 따라 그랜드 아치는 「국제 커무니케이션 센터」로 설계되었다.중심부가 뻥 뚫린 육면체 형태는 프랑스 미래의 세대들에게 21세기에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뚫린 부분은 「세계를 향한 창」을 의미하고 양측 프레임은 개선문의 현대적 표현이다.그랜드 아치의 거대한 뚫림은 프랑스는 세계를 향해 창을 활짝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이 창을 통해 외부의 세계는 내부로 유입되고,열려있는 창을 통해 서로간의 사랑의 세레나데를 교환하자고 손짓하는 듯,이 건물의 광장에 들어서면 열려있는 창으로 강렬히 빨려 들어 가게 됨을 느낀다.전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 거대한 뚫림 속에 떠있는 「구름」형상의 하이테크 구조물 아래서 서로 만나고,서로의 언어·관습·종교 등을 배우고,서로 이해하고 나아가 이 시대에 유발된 상호간의 불신과 오해를 없애고,교류를 통한 「인류의 승리」라는 메시지를 이 「현대판 개선문」을 설계한 건축가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건물의 표면은 금세기 커뮤니케이션의 대명사로 일컬을 수 있는 반도체 칩을 추상적으로 상징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미래 지향적 이상향을 전달하는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는 역사 속에서 발견한다.루브르 궁전과 정원의 규모와 동일하게 입방체의 가로와 세로는 1백5m이다.전체 높이는 1백10m로 뚫린 창의 높이는 노트르담 성당을 연상할 수 있는 기념비적 높이며,폭은 샹젤리제 거리를 연상하게 하는 넓이인 점은 기존의 문화 유산에 대한 깊은 사랑의 표현일 것이다.더욱이 건물의 축은 샹젤리제 거리의 축에서 약간 기울어져 있는 루브르 궁전과 동일하게 일직선의 도시축에 대해 6도30분 기울어져 배치되어,역사에 대한 겸손함과 미래의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듯하다.또한 관광객을 위한 전망대와 전시실이 있는 최상부로 바로 연결되는 전망 엘리베이터가 주는 노출된 기계미는 에펠탑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임을 느끼게한다.이 건물을 대하면 멀리 동쪽으로 마주하는 파리의 주요한 역사적 산물들이 우측으로 비스듬히 바라보이는 현대건축 기술의 모태인 에펠탑의 기술이념을 끌어안고,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단순화되어 다시 태어나 있는 듯 하다. 새로운 프랑스를 열어갈 다짐으로 파리의 역사적 축 위에 세위진 이 기념비적 건축물이 국제설계경기를 통하여 각 나라에서 출품된 4백24작품 중 덴마크의 건축가 스프렉켈센의 설계안으로 건축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바가 크다.이것은 파리는 21세기를 향해 이미 프랑스인만의 도시가 아닌 국제화된 도시임을 다시 한번 세계인들에게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 건축가 설계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금세기 걸작품이 탄생되기까지는 장구한 기간에 걸친 준비 작업이 있었다는 점이다.파리의 서쪽으로 향한 도시축의 연장은 1931년 처음으로 검토되었고,1958년부터 라 데팡스는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그러나 「데팡스의 머리」라는 가칭으로 진행되어온 현재의 그랜드 아치 건축 부지에 들어설 건물은 1970년초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그후 3명의 대통령에 의한 3번의 설계 경기를 거쳐 마침내 미테랑 정부에 들어와서 20여년간의 준비기간을 마무리하고 「인류의 승리문」으로 건축 되었다.그리고 현재 이 건물의 양측 사무동은 프랑스 교통부와 환경부가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미래의 세대들에게,또한 세계인들에게 길이 기억될 건출물을 탄생시키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신중한 검토를 거치는 프랑스인들의 건축관은 오랜 세월을 두고 길이 보존되고 있는 파리의 건축물들이 주는 교훈 때문이라 생각된다.한번 건축된 건물은 잠깐 쓰고 폐기시키는 자동차나 생활용품과는 달리 긴 역사를 두고 후세에 문화적 유산으로 전해지고,축적되어 그 사회의 문화적 깊이를 더해준다.시간을 두고 신중히 진행되어온 그랜드 아치와 라데팡스 신도시 계획을 바라보면 신속히 계획되고,지어지고,길지 않아 허물어지고,따라서 얄팍해져 가기만 하는 우리의 건축문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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