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기탁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매칭사업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급락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취업역량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 후유증
    2026-08-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722
  • 新구국운동 중심돼라/鄭晋錫 한국外大 교수·언론사(특별기고)

    ◎민족紙 ‘대한매일’ 재탄생에 부쳐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지경에 처했던 한말 구국의 필봉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했던 민족언론의 본산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였다.영국인 사장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과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당대의 논객과 우국지사들이 모였던 이 신문은 민족진영의 마지막 보루였다.일본 헌병사령부는 러일전쟁 후 민족언론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었으나 대한매일에는 검열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비통한 소식을 들은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검열을 받지 않고 황성신문에 게재한 다음에 밤새 통음(痛飮)하며 목놓아 울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고 신문은 정간당하는 상황이었다.그러나 대한매일은 바로 문제가 된 황성신문의 논설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진상을 영어로 번역하여 전세계에 널리 알렸다. 헤이그에 갔던 이준 열사가 이국 땅에서 한을 품고 분사한 소식과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던 고종의 비극,구한국 군대의 해산 등 긴박한 역사의 현장에서 언론의 사명을 다했던 신문이 대한매일이었다.용기 있는 기사,피끓는 논설,시간을 다투어 발행한 호외 등을 보고 국민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한탄했다. ○‘직필정론’의 표본 일본의 한국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한매일이었다.통감부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의병들의 무력항쟁은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대한매일의 직필정론이 의병들을 더욱 격동케 한 것은 사실이었다.오죽하면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자신의 백마디 말보다도 대한매일의 기사 한줄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겠는가.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던 것도 대한매일이었다.전국의 성금이 대한매일로 쏟아져 들어왔다.나라의 빚을 갚자는 뜨거운 정성을 담아 유생과 상류 지도층에서 이름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탁했다. 대한매일은 국한문판,한글판,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3가지 신문을 동시에 발행했다.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일이었다.일본은 대한매일에 대항하기 위해 친일지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공보비서이자 영어신문 편집자인 즈모토(頭本元貞)를 불러다가 서울프레스를 직접 발행해 보았으나 대한매일을 당할 재간은 없었다.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쳐도 대한매일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배설과 양기탁을 협박하고 회유하면서 신문의 배포를 방해하는 수법도 써 보았다.그러나 국민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발행되는 신문의 붓을 꺾을 수는 없었다.수년간에 걸친 일본의 끈질긴 요구와 공작으로 마침내 배설은 3주일간의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상해까지 가서 복역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통감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이번에는 신문의 편집과 제작을 총괄하던 총무 양기탁을 체포하였다.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운 것이다.일제의 강점 후에는 105인 사건으로 양기탁과 대한매일에 근무했던 애국지사들을 또다시 투옥하는 철저한 보복을 가했다. ○빛나는 전통 계승을 대한매일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태풍권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힘겨운 투쟁을 벌였으나 기울대로 기운 국운을 만회할 수 없었다.나라가 망하니 민족언론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최대의 민족지였던 신문이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한일합방 후 9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대한매일은 다시 살아났다.새로 태어나는 대한매일이여! 민족언론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위기에 처한 오늘의 난국을 헤쳐나가라.신 구국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어라.
  • 어떤 신문이었나(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

    ◎日帝 총칼에 맞선 ‘자유언론 표상’/애국지사 논객 총결집/日 침략­관료 무능 질타/국채보상운동 등 이끌어/항일투쟁·국권수호 선봉 ‘不允’(불윤).1905년 11월18일 아침.러일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서울 장안 거리의 화두는 “허락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이 한 마디였다. “韓皇陛下게옵셔 韓國獨立을 重念하시와 正大한 義理로 拒絶하신즉 伊藤 대사가 再三强請하되 强경 하신 勅語로 不允하셨다더라”(한국황제폐하께서는 한국의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어 정대한 도리로서 거절하시자,이토 대사가 재삼 강청하였으나 강경한 말씀으로 허락지 않으셨다 한다) 이날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勅語嚴正’(칙어엄정) 제목하의 잡보(보도기사) 첫 기사 중에 있는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국민들은 일제 앞에서 “No”라고 당당히 말한 황제에 박수를 보냈다.전날 이토 일본대사가 고종 황제를 알현,소위 을사조약으로 알려진 외교권 박탈을 요청한 4가지 내용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강력한 반대를 전한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총칼이번득이는 상황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당시 신문중 대한매일신보만 유일하게 보도했다.특히 본문활자로 된 기사내용에서 유독 ‘不允’ 두 글자만 가장 큰 2호활자로 두드러지게 인쇄한 것은 고종의 반대 강도에 대한 표현이자 대한매일 입장의 대외적 천명이기도 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총무 양기탁(梁起鐸)등 우국지사들이 모여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조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태어났다. 이후 한일합방 다음날인 1910년 8월29일 종간될 때까지 6년 1개월여간 대한매일신보는 우리민족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선 역사상 가장 위급한 시기에 굳건한 자세로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국민의 든든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이 민족정론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 영국인 배설로 돼있어 치외법권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총무 양기탁과 주필 박은식을 비롯,필진 신채호 장도빈 안창호 등의 투철한 애국심과 자주의식에 따른 것이었다.그들은 일제 침략과정의 부당성을 낱낱이 공개하고 당시 무능한 대신 및 관리들의 실정과 부패상을 질타했다. 반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인들의 애국적 활동상에 대해서는 대서특필을 아끼지 않았다.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국채보상운동 캠페인을 주관했고,그 활동상 소개와 함께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2∼3개 면에 걸쳐 상세히 게재함으로써 전국적인 참여의 불을 지폈다. 또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 직후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산발적인 보도가 아니고 ‘처처의병’ 등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소개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격 때는 격문을 게재,의병지원자가 구름같이 모이게 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실업’‘동양척식회사 설립문제’등 논설로 일제의 경제적 침투 반대와 우리민족의 자주적 산업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민족교육자들의 학교설립취지서를 적극 지면에 게재,1907년 말 공사립 보통학교가 전국에 4,000개에 달하게 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대한매일신보가 순한글판 발행을 통한 국어 발전,연재소설 게재를 통한 국문학 발전,또 여성교육 필요성 제기로 여권 신장 등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정부와 역적무리들의 매국은 대한매일신보의 노력을 미완(未完)에 그치게 하고 말았다.그러나 그 불굴의 자유언론 정신과 국난극복의 의지는 우리 언론사에 금자탑으로 남아있다.그리고 이제 그 숭고한 정신과 의지의 완성을 위해 ‘대한매일’의 첫걸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 ▲1905년 8월11일 영문판(The Korea Daily News) 분리 발행. ▲ 〃 11월18일 을사조약 다음날.고종의 조약거부 기사 ‘칙어엄정’게재.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공개.(영문판에도 번역 게재) ▲ 〃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 〃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 〃 11월말 전국 지사수 32곳. ▲1908년 3월6일 관보 전재 폐지. ▲ 〃 4월29일 신문지법 개정.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 금지 및 압수 가능. ▲ 〃 5월27일 발행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변경. ▲ 〃 5월말 현재 부수 1만3,400부. ▲ 〃 7월12일 통감부,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케 함 ▲1909년 5월 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만함에게 7,000엔(700파운드) 주고 대한매일신보사 인수. ▲ 〃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 (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
  • 청구수사 ‘용두사미’/“대가성 없다” 정치인 10여명 무혐의처리

    ◎장수홍 회장 등 8명 기소/김현철 전 삼미 회장 수배 청구그룹 비리사건을 수사중인 대구지검 특수부(曺大煥 부장검사)는 2일 張壽弘 회장(55)이 조성한 비자금중 10억원이 95년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지난해 대선때 특정 정당에 후원금명목으로 제공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정당 및 후보자에 대한 후원금 명목이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어 정당 이름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으나 기탁받은 정당은 한나라당(민자당)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날 종합수사결과를 통해 張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崔秉烈 전 의원,李義根 경북도지사 등 정치인과 단체장 10여명에 대해서는 대가성이 없어 무혐의 처리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지금까지 청구비리사건 수사에서 張회장 등 8명을 구속기소하고 閔拓基 전 철도청 차장(59) 등 5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한편 金顯哲 전 삼미그룹 회장(48) 등 5명을 수배하는 등 모두 18명을 사법처리했다. 검찰은 이들중 대구방송 인가와 관련,지난 94년 6월부터 3차례에 걸쳐 張회장으로부터 청탁과 함께 45억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洪仁吉 전 총무수석을 이날 특가법상 뇌물죄로 기소했다.
  • 노인의 날 모란장 받는 李六珠 할머니

    ◎밥장사로 모은 10억원 노인복지시설에 선뜻/어린시절엔 소녀가장… 장애남편과 결혼/푼푼이 저축… 74년부터 육영사업 시작 벙어리인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벙어리이자 귀머거리인 남편과 결혼해 모범 가정을 꾸리고 역경속에 모은 10억여원을 노인복지 시설을 위해 선뜻 내놓은 7순 할머니가 있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2일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릴 ‘노인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을 李六珠씨(76·여)가 그 주인공. 1922년 경북 경산군 자인면에서 출생한 李씨는 일찍 부친을 여의고 두 여동생과 모친을 부양하는 소녀가장으로 어린시절을 어렵게 보냈다.결혼후에도 장애인 남편을 맞아 온갖 풍상을 겪어야만 했다. 지난 5월 대구시 동구 불로동에 10억4,000만원을 들여 1,000평의 부지를 확보해 300평은 뇌성마비장애인시설,700평은 노인복지회관 건립을 위해 기탁했다. 李씨는 50년대 건축 미장일을 했던 남편의 공사장에서 밥장사로 푼푼이 돈을 모았고 60년대에 사설수도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싼 값에 물을 공급하면서 돈을 모았다.얼마안가 목욕탕까지 지어 큰 돈을 만들었다. 74년 폐교직전에 있던 대구 경산여자중학교 인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현재 6개 학교를 거느린 육주재단을 이룩했다.
  • 간암 투병 할머니 20억 장학금 쾌척/평생 모은 돈 한양대에

    간암과 간경화로 한양대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 金致德 할머니(73)가 20억원의 재산을 장학기금으로 대학에 내놓았다. 金할머니는 지난 30여년 동안 식당과 목욕탕 등을 경영하며 사둔 전재산인 서울 강동구 성내동 240평 대지(20억원 상당)를 28일 한양대에 기탁했다.金할머니는 2남1녀를 사고 등으로 모두 잃었다. 金할머니는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면서 “저승으로 간 남편과 아들 딸 모두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金할머니가 맡긴 재산의 40%(8억원 상당)는 지난 74년 한양대 의대에 진학했다가 의사가 되지 못한 채 지난 96년 지병으로 사망한 큰 아들 金時伯씨의 이름을 따 ‘金時伯 장학회’로 한양대 의대생들의 장학금으로 사용된다.
  • 親日의 군상:8/월북무용가 崔承喜(정직한 역사 되찾기)

    ◎日帝에 국방헌금 내고 ‘舞踊報國’ 맹세/15세때 日 유학… 귀국후 세계순회공연하며 대활약/1942년 6개월간 만주 돌며 130여회 日軍 위문공연/해방후 前歷 비난 피해 남편과 월북… 北韓정권 참여 □엇갈리는 親日 평가 “예술위해 불가피” “자의적 친일 활동” 근대 이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중에서 ‘스타중의 스타’는 누구일까? 1930년대 당시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무용가 崔承喜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崔承喜는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찬사를 받은 ‘전설적 예술가’였다. 바로 그 崔承喜가 최근 우리사회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난 6월 북한국적의 재일교포 무용수 白香珠씨가 내한공연을 통해 崔承喜의 춤사위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한데 이어 한달 뒤인 7월에는 그의 이름이 국내 한 일간지에 대서특필되었다. 崔承喜(1911∼?). 언제적 이름인가. 그의 이름 앞에 ‘월북무용가’란 수식어가 필요할만큼 우리 귀에 낯선 이름 崔承喜. 해방후 남편을 따라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반세기 가까이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 왔다.그가 ‘최모(某)’에서 ‘崔承喜’라는 이름 석자를 되찾은 것도 90년대 들어서다. 암울한 일제하 미국과 유럽·중남미 등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식민지 조선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조선의 꽃’ 崔承喜. 그러나 그는 남한에서는 ‘월북예술가’라는 이유로,북한에서는 ‘반(反)혁명분자’로 낙인찍혀 남북한 모두에서 외면당해 왔다. 격동의 우리 현대사가 지하창고에 가둬 뒀던 한 천재 예술가를 ‘역사의 양지녘’으로 이끌어내 보자. 崔承喜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서울 종로에서 양반집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26년 숙명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당초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할 작정이었으나 연령미달로 입학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던중 큰 오빠 崔承一의 권유로 당시 일본 최고의 무용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 계기가 돼 그의 문하에 입문했다. 해방후 그에게 쏟아진 ‘친일파’라는 비난은 그의 출생시점과 그가 일본으로 무용공부를 떠나면서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열여섯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이시이 문하에서 무용공부를 한 崔承喜는 29년 귀국,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렸다. 이듬해 2월 그는 경성(京城)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는데 첫 공연 치고는 성공작이었다. 이 때 공연한 한국무용 ‘영산춤’ 등은 한국인이 춘 최초의 독자적 춤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이자 당시 와세다대학 재학생이던 安漠(본명 安弼承)과 결혼,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최승희연구가 鄭昞浩(중앙대·무용과) 명예교수는 그들의 결혼배경을 두고 “崔承喜는 공연기획 분야에서 천재적인 安漠의 능력을,安漠은 崔承喜의 인기를 사회주의 건설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했다. 해방후 崔承喜의 월북은 그의 남편 安漠의 권유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安漠은 북한정권에서 평양음악학교장·문화선전부 부부장(차관)을 지냈으나 58년 숙청의 비운을 맞았다. 한편 崔承喜는 3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로 들어갔다. 남편 安漠이 ‘조선독립음모사건’으로 구속되자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곤란까지 겹쳐 더이상 국내에서는 활동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일본행은 의외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로 돌아온지 두 달만에 그는 한 잡지사 주최 여류무용대회에서 ‘신인 스타’로 떠올랐다. 그 때 그가 춘 춤은 ‘에하라 노아라’라는 전통 조선무용으로 술에 취한 자기 아버지의 굿거리 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1934년 도쿄에서 개최된 그의 제1회 신작발표회를 통해 그는 명실공히 ‘톱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崔여사가 추는 조선무용을 보면 일본의 서양무용가들에게 민족의 전통에 뿌리박으라는 강력한 가르침을 볼 수 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인 최초의 무용가’라는 점이 의외로 일본사회를 강타하여 그에게 광고모델 요청이 쇄도했다. 하늘을 찌를듯한 그의 인기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마침내 해외공연을 추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38년 2월 그는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해외공연길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파리 공연에 이어 스위스·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 등 유럽공연을 마쳤다. 이무렵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40년 브라질 공연을 시작으로 우루과이·아르헨티나·페루·칠레·멕시코 등 중남미지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40년말 2년여 해외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자 일제 당국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인기를 군국주의 전쟁에 활용할 속셈이었다. 결국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친일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崔承喜 부부는 궁성(宮城),메이지신궁(神宮),야스쿠니신사(神社)을 참배하고는 ‘무용보국(報國)’을 맹세하였다.(‘報知新聞’40년 12월7일) 며칠 뒤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구미(歐美)공연 때 마음이 든든한 것은 위대한 일본의 국력 덕분이었는데 새삼 조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다”며 친일성향을 드러냈다. 그의 친일과 관련,빼놓을 수 없는 일화 한토막.아사히신문 41년 2월5일자에는 ‘일독(日獨)헌금 교환,독일인 기사와 崔承喜씨’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내용인즉 일본회사에 근무하던 한 독일인 기사가 귀국하면서 여비의 일부를 국방헌금으로 써달라고 이 신문사에 기탁한 일이 있은 후 이번에는 유럽공연을 다녀온 崔承喜가 두 차례의 독일공연에서 생긴 수입금을 독일육군병원에 헌금하려고 가져왔다는 것. 이 무렵 崔承喜는 일본을 ‘조국’이라고 불렀다. 또 춤을 통해서도 그의 친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데다 춤동작에서도 일본 전통춤인 ‘노(能)’가 차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공연 수익금의 일부,혹은 전부를 국방헌금으로 바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부터다. 그는 수 차례에 걸쳐 일본군부와 조선군사령부 등에 국방헌금을 바쳤다. 41년말 ‘대동아전쟁’(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예술가들까지도 전선(戰線)으로 내몰았다.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42년 2월초 그는 일본군 위문공연차 만주·중국으로 향했다. 8월까지 6개월 동안에 무려 130여 차례의 위문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의신분은 일본 육해공군 촉탁이었다. 해방때까지 그의 일본군 위문공연은 계속됐다.그는 상하이 주둔 한 일본군 부대에서 위문공연을 하다가 일본패망 소식을 접했다. 해방이 되자 그에게는 중국 현지에서부터 ‘친일파’란 비난이 쏟아졌다. 이듬해 5월 귀국해 보니 사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일전력(前歷) 때문에 그는 남한 땅에서는 설 땅이 없었다. 결국 그는 귀국한지 두 달도 채 안돼 남편을 따라 월북하였다.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공과(功過)가 교차된 崔承喜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에는 변호와 비판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무용학자 鄭昞浩 교수는 崔承喜의 친일행적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는 예술을 위해 친일을 했을 뿐”이라며 그가 한국무용사에 남긴 업적에 무게를 실어준다. 반면 金鍾旭(서지연구가·60)씨는 “崔承喜는 도일 직후부터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崔承子,사이쇼코)으로 활동한 열성 친일파”라며 그의 친일성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전성기 시절 ‘반도의 무희(舞姬)’‘민족의 꽃’으로 불리며 조선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崔承喜. 식민지시대와 분단기를 거치면서 그에게 씌워진 ‘친일(親日),친공(親共)’의 굴레가 ‘역사의 화해’를 볼 날은 과연 언제일까. ◎崔承喜의 知人들/동서양 명사들과 골고루 교분/美 소설가 존 스타인벡/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화가 피카소·시인 장콕토/周恩來 등과도 친교 전성기 당시 崔承喜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예술인들과 교류를 맺고 있었다. 우선 일본 체류시절 그를 후원해준 사람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민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등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소설가 존 스타인백·루이스 레에나·존 그로프,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소설가 로맹 롤랑·미셀 지몽,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또 중국인으로는 周恩來 총리,무용가 梅蘭芳 등이그의 후원자이자 벗이었다. 국내에서는 呂運亨·宋鎭禹 등 민족진영 인사와 남편의 동지이기도 한 朴英熙·韓雪野 등 카프계열 작가들이 그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파리공연 때 그는 피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은 적이 있다.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安씨집안(시댁)과 崔씨집안(친정)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 통일소/張淸洙 논설위원(外言內言)

    현대그룹 鄭周永 명예회장이 지난 6월 판문점을 통해 500마리의 소떼를 북측에 기증했을때 우리는 이 소떼가 통일을 가져올 것이란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통일소’로 이름붙였다. 소가 우직하게 힘든 농사일을 도우면서 우리민족과 애환을 함께하며 살아온 가축이었기 때문에 북으로 가는 소떼에게 통일의 염원을 담아 통일소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산가족들이 소떼가 지나가는 통일로까지 나와 듣지도 못하는 쇠귀에 대고 “꼭 통일을 이룩해 달라”고 눈물어린 기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북으로 간 통일소떼 가운데 4월개도 못돼 몇십마리가 죽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그것도 남쪽의 통일부와 안기부가 의도적으로 소에게 먹여서는 안될 비닐쓰레기와 불순물을 먹였기 때문에 죽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북한의 생떼는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정성들여 먹이고 기른 소를 북한에 보낸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을 조금이나마 도와준다는 인도주의적 동포애의 발로에서였다.굶주리는 북녘동포들을 돕는다는 순수한 마음을 전한 것이다. 또 이러한 인도적 남북교류가 분단의 높은 장벽을 허물고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소망을 함께 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우리가 북한에 보내는 소에게 고의적으로 불순물을 먹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떼다. 더구나 현대그룹측이 지정기탁한 통일소 500마리가 엉뚱한 곳으로 분배됐다는 소식까지 접하고 보니 솔직히 괘씸한 생각도 없지 않다. 우리 국민들의 한결같은 통일 염원을 가득 싣고 판문점을 넘어간 소떼들의 운명이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북한당국자들이 말못하는 짐승까지 정치목적에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통일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가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아무쪼록 통일의 여망을 싣고 북으로 간 통일소떼가 더 이상 별탈없이 남북의 화해를 이어주는 전도사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통일을 하루속히 이어주는 아름다운 연(緣)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수재의연금 지정기탁제 추진/지역별 형평성맞게 부작용 보완/행자부

    앞으로 수재 의연금을 낼 때,자기가 내고싶은 지역을 지정해 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현재는 중앙 재해대책협의회에서 언론사 등을 통해 모집한뒤 대책협의회에서 이를 일괄적으로 집행하는 실정이다. 행정자치부의 한 관계자는 23일 “고향 등 특정지역을 정해 수재 의연금을 내고 싶어하는 기탁자들이 적지않은 실정”이라면서 “수재 의연금을 기탁자가 지정한 특정지역에 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도입키로 하고 관련 부처에 의견을 파악중”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지정 기탁제를 전면 허용하면 특정지역에만 기탁금이 몰리는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만큼 재해구호 및 재해복구 비용부담기준 등에 관한 규정을 엄격히 적용해 기탁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전국 248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접수대행 뿐만 아니라 집행까지 대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수재 의연금 등 기부금품은 행자부의 허가를 받아 재해대책협의회만 모집하도록 되어 있으나 지난 8월 전국적인 수재를 계기로 지자체에서도수재 의연금을 대신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집행은 할 수 없었다. 재해구호 및 재해복구 비용부담 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의연금은 사망·실종자 부상자 위로금이나 침수주택 수리비,세입자 보조,주택복구비 등으로만 사용할 수 있게되어 있다.
  • 푸드뱅크/李啓弘 논설위원(外言內言)

    남은 음식물 나눠먹기 운동이 확산돼 가고 있다.구세군을 비롯한 일부 종교단체와 사회복지 시설이 관공서나 기업체의 구내식당,그리고 제과점과 결혼예식장 식당들과 연대해 먹다 남은 음식물을 거둬 경로당,고아원에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당국이 추산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역할의 푸드뱅크(음식은행)는 시작 8개월만인 최근 전국망을 갖춰 4,600여건에 8억원이 넘는 액수의 음식물을 기탁 받았다고 한다.음식물은 대개 빵과 같은 간편식품과 결혼식장 식당이나 기업체 및 관공서 구내식당에서 당일 만든 음식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알다시피 음식을 나눠먹는 풍습은 우리네의 전통적인 미풍양속이었다.어려운 시대일수록 이런 미풍은 더 활발하게 살아났다.일제때나 6·25 동란직후 폐허한 나라 현실인데도 거지가 찾아오면 따뜻한 밥 한덩어리를 퍼주었고,이웃집 굴뚝에 연기가 안나면 그집 아이들을 불러다 밥을 먹인 것이 우리네 인심이었다.이때의 대표적인 걸인이 ‘품바’가 아니었나 싶다.품바는 끼니를 잇기 위해 밥동냥을 다녔지만 그들 또한 남은 음식은 역시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품바’ 타령은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이런 따뜻한 사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세기동안 대중의 가슴속에 이타령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나눠먹기에는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가능하다면 음식이 남아돌지 않게 해야 한다.어느 관공서 구내식당의 경우,400인분의 식사를 준비했다가 300인분만 팔고 나머지를 고스란히 푸드뱅크에 넘긴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는 자랑이라기보다는 부끄러운 일이다. 주먹구구식의 계량으로 무턱대고 많이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무모한 살림인가.낭비를 막자고 하는 운동이 도리어 낭비를 관성화시키고,또 음식나눠먹기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합리화시킨다는 것은 이 운동의 근본 취지를 대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리라.남은 것을 주기 때문에 함부로 취급해도 좋다는 것 또한 나눠먹기의 참뜻을 외면한 일이 될 것이다.먹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음식을 다룬다는 것은 진정한 나눔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은 음식물은 자칫 유통시간이 길수 있고,또 여러 음식이 섞일 수 있어 부패하기 십상이거나 개밥이 될 우려도 없지 않다.결혼식 피로연장의 종업원들을 보면 시간에 쫓긴 나머지 음식물을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이 음식이 어려운 이웃에 전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식중독이라도 일으키면 안보낸 것만도 못하다.음식은 정성이다.
  • 의원 영입 공방 새국면/與,대화위해 자제… 단체장에 눈길

    ◎野,다소 진정 “탈당위원 낙선운동” 여권의 한나라당 의원 영입을 둘러싼 여야간 공방이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여권은 대화정국을 위해 한나라당 의원 영입을 당분간 자제한다는 방침이다.한나라당은 탈당 인사들을 ‘변절자’로 몰아세우면서도 다소 여유를 찾은 분위기다. 국민신당 출신 의원의 당적 일시 변경을 무시한다면 15일 현재 여당은 국민회의 103석,자민련 52석 등 모두 155석으로 과반수의석을 넘었다.그런만큼 무리하게 의원 영입을 추진,경색정국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 국민회의 韓和甲 총무는 15일 “현재 여당은 의석과반수를 확보한 상태”라며 “앞으로 의원 영입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해 이를 뒷받침했다. 이에 따라 선거법위반으로 재판계류중인 무소속 洪文鍾 의원 등의 입당은 당분간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권은 하지만 자발적으로 입당을 원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발걸음은 막지 않겠다는 입장이다.직접적 영입보다 제4의 교섭단체나 무소속 교섭단체를 만들어 추후 영입하는 방안도 거론된다.특히 자민련은 지방자치단체장 및 지방의원 영입에 신경을 쓰고 있어 한나라당측의 심기를 계속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때문에 여야간 의원 영입공방의 불씨는 완전히 꺼진 게 아니라 ‘내연(內燃)’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탈당한 국회의원과 기초 및 광역단체장을 ‘변절자’로 규정하고 ‘흠집내기’를 계속하고 있다.탈당한 지역구에는 당 안팎에서 가장 강력한 위원장을 새로 임명,낙선운동을 끈질기게 편다는 계획도 세웠으나 인물난을 겪고 있다. 또 탈당한 사람들의 ‘배신행위’를 공개하는 신문광고를 내고,탈당자들을 상대로 선거기탁금 반환청구소송도 내기로 했다. 16일부터는 탈당한 의원들을 규탄하는 내용을 담은 야당파괴 저지 1,000만 서명운동에 들어간다.
  • 칠순 할머니,90세 남편 이혼訴/법원 “해로 하세요” 기각

    서울 가정법원 가사합의3부(재판장 金善中 부장판사)는 11일 70세인 A씨가 90세인 남편 B씨를 상대로 낸 이혼소송에서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오신 두분이 계속 해로했으면 한다”며 기각했다. A씨는 단신으로 월남해 사채업을 하던 B씨와 57년 결혼한 직후부터 가부장적인 남편의 태도 때문에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B씨는 아내의 외출은 물론 친정나들이도 못하게 했다. A씨는 급기야 95년 이혼소송을 냈다가 남편의 사과를 받아들여 소송을 취하했지만 별거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지난해 5월 B씨가 상의도 없이 노후생활비로 10억원을 남기고 집과 임야 등 30억원대의 전재산을 K대학에 장학금으로 기탁하자 A씨는 곧바로 2차 이혼소송을 냈다.
  • 화가 墨昌善씨 작품 70점 서울동부署 기증

    ◎경찰 정서순화에 도움됐으면…/“내 권유로 경찰투신 처남 13년전 교통사고死/87년부터 군경에 1,800여점 진혼의 기탁”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경찰관들의 정서순화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화가 墨昌善씨(55)는 지난 8일 온 정성을 들여 그린 산수화 화조도 풍속화 맹호도 서예 등 70점(6,700만원 상당)의 작품을 서울 동부경찰서에 기증했다. 墨씨는 지난 87년부터 지금까지 양구·파주·강화·부산진경찰서와 일선군부대,재활원 등에 1,800여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시가로 10억여원에 이른다. 墨화백은 “저의 권유로 경찰에 투신했던 막내 처남이 13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경찰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작품을 기증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국악계의 거목인 명창 墨계월 선생(인간문화재 53호)의 친조카이기도 한 墨화백은 현재 전남 강진에서 도자기 및 서화 등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종합미술대전 특선을 비롯,한국전통예술대상전 동상,한국미술문화대상전 대상,한국서화대전 최우수상등을 수상한 중견 화가이다.
  • 美 교민 수해성금 4만弗 本社 전달/라디오코리아 李章熙 사장

    LA 라디오코리아 李章熙 사장(51)은 3일 서울신문사를 방문,미국 교포들이 기탁한 4만1,588달러(한화 약 5,500만원)의 수해 복구성금을 전달했다. 李 사장은 서울신문사 車一錫 사장에게 성금 증서를 전달하면서 “고국의 동포를 사랑하는 미국 교포들의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70년대 통기타문화의 선두주자이자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가수로 더 유명한 李 사장은 “이 성금은 92년 4월 LA 흑인폭동 때 조국 동포들이 물심 양면으로 도와준 데 대한 보답”이라면서 교포들의 조국 사랑을 거듭 강조했다. 李 사장은 “미 전역에서 동포들의 성금이 물밀듯 답지했다”면서 “꼬마들까지 저금통을 깨 꼬깃꼬깃 접힌 돈을 가져왔다”고 전했다.
  • 親日의 군상:2/국립묘지에 묻힌 日帝경력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민족성지’에 일제고관·황군장교까지/‘과거’ 검증 안된채 안장… 끝없는 논란/백강 선생 “나는 국립묘지 싫다” 유언 “내가 죽거든 국립묘지에 묻지말고 생사를 같이한 임정요인들이 누워있는 효창원 묘역에 묻어달라.” 지난 93년 1월 타계한 마지막 임정요인 백강 趙擎韓 선생의 유언이다. 백강 선생은 왜 남들이 다 묻히기를 원하는 국립묘지 안장을 굳이 거부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한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국립묘지에 누워있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립묘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모신 민족의 성지다. 그러나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사 중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한 인사들도 일부 포함돼 있다는 주장과 함께 이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두고 논란이 있어왔다. 국립묘지 내에서 친일단체나 일제 통치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묻혀 있는 묘역은 국가유공자묘역,애국지사묘역,장군묘역 등 세 곳.국가유공자묘역에는 제1묘역의 白樂濬·陳懿鍾·白斗鎭·嚴敏永·黃鍾律·李殷相·李瑄根 등 7명,제2묘역의 趙鎭滿 등 모두 8명이 묻혀 있다. 문교장관과 참의원 의장을 지낸 白樂濬은 1942년 4월 창간된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陳懿鍾은 경성제대를 나와 일본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도청에서 농무과장을 지냈다. 白斗鎭 전 국무총리는 도쿄제대 상대 출신으로 조선은행에 근무했다. 3공때 장관을 지낸 嚴敏永과 黃鍾律은 모두 일본 규슈(九州)제대 출신으로 嚴씨는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하여 군수를,黃씨는 만주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한 후 만주국 재정국에서 관리를 지냈다. ‘민족시인’으로 일컬어지는 李殷相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신문 ‘만선(滿鮮)일보’에 몸담은 경력이 있으며 문교장관,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李瑄根은 만주국의 국회격인 협화회(協和會) 간부를 지낸 기록이 있다. 3·4대 대법원장을 지낸 趙鎭滿은 일본 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해주지법 판사와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지냈다. 이들이 해방후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일제 당시의 행적을 무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데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애국지사묘역은 일제하 항일투쟁 공로로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수여(추서포함)받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친일의 ‘흠’이 있는 인물은 근처에도 가서는 안되는 ‘성역(聖域)’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친일단체 등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金鴻亮(77년 독립장),崔昌植(83년 독립장),李鍾郁(77년 독립장),尹益善(62년 독립장),李甲成(62년 대통령장) 등이 그들이다. 친일파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故) 林鍾國씨의 조사결과에 따르면,金鴻亮은 황해도 도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냈고,崔昌植은 그의 아내 金元慶(63년 대통령표창)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친일 교민단체인 계림회에 소속돼 친일활동을 한 의혹을 받고 있다. 승려로서 3·1운동에 가담했던 李鍾郁은 국민총력연맹 위원으로 불교계 친일에 가담한 일이 있으며 尹益善은 경성부(현 서울시) 원서정(苑西町) 총대(總代·지금의 동장에 해당)와 경성부 북부정회 총대회 간사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해방 후 초대 광복회장을 지낸 李甲成은 상하이에서 이와모토(岩本正一)라는 창씨명으로 밀정노릇을 했다는 주장(임정 서무국장 林義鐸,유관순 열사의 오빠 柳愚錫씨 등의 증언)이 그의 생전에도 끊이지 않았었다. 장군묘역에는 1,2,3묘역 모두에 구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누워 있다. 제2묘역의 육군중장 李應俊,제3묘역의 육군중장 李鍾贊과 육군대장 출신으로 국무총리·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군 ‘창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李應俊은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해방당시 일본군 대좌(대령)였다.한국군 재임시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참장군’으로 불리는 李鍾贊 역시 일본 육사출신(49기)으로 일본군 공병소좌(소령)로 남방전선에서 해방을 맞았다.3공 당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丁一權은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 출신으로 朴正熙 전 대통령(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국가원수묘역 안장)과 같이 만주군에서 장교를 지냈다.지난 2월 대전국립묘지(장군묘역)로 이장한金昌龍(사후 중장 추서) 전 특무부대장은 만주 관동군 헌병대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장군묘역에 있는 사람들은 건국후 창군과 6·25및 그 이후의 공로로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황군(皇軍)’의 장교를 지낸 인물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선열들/일제 항거 애국열사 등 1,341위 모셔/임정묘역엔 박단식·양기탁 선생도 국립묘지내에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신 곳은 애국지사묘역(대전분소 포함)과 임정묘역 두 곳이다.이곳에는 한말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순국선열을 비롯해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열사들이 안장돼 있다. 98년 8월 현재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총 1,341위(대전분소 1,136위 포함),임정묘역에는 최근에 유해를 봉환한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 16위의 애국선열이 안장돼 있다.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애국지사들을 활동분야별로 보면,申乭石·李仁榮 등 의병장,李鍾一·洪秉箕 등 3·1운동 관련자,의거 당시 64세의 나이로 사이토(齋藤)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姜宇奎 의사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金相玉 열사등 의열투쟁가,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순국한 朱基徹 목사,외국인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하고 제암리학살사건의 진상을 전세계에 공개한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 박사,여류독립운동가 南慈賢 여사,‘독립신문’을 창간한 徐載弼 박사 등 항일 독립운동계의 상징적인 인물들이 총망라돼 있다. 93년에 조성된 임정요인묘역은 임정관계자중 국무위원급 이상의 요인들을 별도로 모신 묘역. 이곳에는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낸 朴殷植 선생을 비롯해 국무령을 지낸 李相龍·洪震·梁起鐸 선생과 임시정부 의정원(국회에 해당) 의장을 지낸 金仁全 선생·孫貞道 목사,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盧伯麟 선생,국무총리 대리겸 외무총장을 지낸 申圭植 선생,국무원 통위부 총장 金東三 선생,그리고 임정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지낸 趙擎韓(94년 3월 애국지사묘역에서 이장함) 등이 안장돼있다.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金九 선생과 尹奉吉·李奉昌 의사 등은 효창원묘역에,임정 내무총장을 지낸 申翼熙 선생 등은 수유리 묘소에 안장돼 있다.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가 만원이어서 최근에 작고한 애국지사는 대전 분소에 안장되고 있다. 柳寬順 열사와 같이 후손이 없는 무후(無後)선열들은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를 봉안해 놓고 있다.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 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인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 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 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 ▲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은경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 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국민회의 수입 한나라 추월/올 정당기탁금은 한푼 없어

    98년 상반기 정당별 수입에서 국민회의가 처음으로 한나라당을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또 올해는 여야 각 정당에 기탁금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한나라당에는 여당일 때인 97년 1년동안 365억여원의 기탁금이 있었다. 13일 중앙선관위(위원장 李容勳)가 공개한 98년 상반기 정당별 수입·지출내역에 따르면 전체수입의 경우 국민회의가 490억6,700여만원,한나라당이 487억1,300여만원,자민련 229억5,900여만원,국민신당 129억여원으로 각각 나타났다. 같은 기간의 지출내역은 국민회의 414억여원,자민련 192억여원,한나라당 438억여원,국민신당 124억여원 등으로 집계됐다.각 정당이 올 상반기중 ‘흑자경영’을 한 것이다.
  • 5대그룹 25억 기탁키로

    삼성 현대 대우 LG SK 등 5대 그룹은 각 그룹이 5억원씩 총 25억원의 수재의연금을 모아 재해대책본부에 기탁키로 했다. 5대 그룹 총수들은 7일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열린 정부·재계 2차 정책간담회가 끝난 후 별도 모임을 갖고 이같이 결정했다고 孫炳斗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밝혔다.
  • 자동차손배보상법 개정/내년 3월부터… 부족한 보상 정부서 보조

    ◎교통사고 사망자·중증 후유장애인/자녀·부모에 생계비 지원 내년 3월부터는 의료기관이 교통사고 환자에게 의료비를 직접 청구할 수 없다. 2000년부터는 교통사고 사망자나 중증 후유장애인의 18세 미만 자녀와 노부모에 대해 정부가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대 준다. 건교부는 14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9월 정기국회를 거쳐 내년 3월부터 시행키로 했다. 개정안은 자동차보험회사가 지급해야 하는 진료비를 교통사고 환자에게 직접 청구하는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리도록 했다. 2000년부터는 교통사고 사망자나 중증 후유장애인(장애 단계 1∼7급)의 자녀 및 노부모가 사고 보상을 충분히 받지 못할 경우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정부가 지원키로 했다. 재원은 교통안전기금이나 정부의 일반 예산,민간 기탁금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앞으로는 자동차 양도나 천재지변,교통사고,화재,도난 등의 이유로 자동차를 더 이상 운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때에도 책임보험료를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현재는 자동차 등록을 말소할 때만 책임보험료를 환급받을 수 있다. 건교부는 개정안에 대한 의문이나 의견이 있는 사람은 다음달 3일까지 전화(02­504­951∼2)나 팩스(02­504­3062),PC통신(p1767@Chollian.net)으로 연락해 줄 것을 당부했다.
  • 교육위원선거 졸속 우려/법규정 개정 늦어져 선거일정조차 못잡아

    ◎일부지역선 벌써 불법·과열 운동도 교육위원 선거를 앞두고 관련 규정과 시행규칙의 개정이 지연돼 졸속선거의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는 출마 예정자들이 벌써부터 선거인단인 학교운영위원회 대표들을 접촉하는 등 과열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5일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에 따르면 대통령령인 ‘교육위원 및 교육감 선출 등에 관한 규정’의 개정이 당초 예상보다 열흘 이상 늦어진 오는 14일쯤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부터 교육위원은 학교운영위원회 대표들이 직접 뽑는다. 전국의 교육위원 정수는 234명에서 146명으로 줄었으며,입후보자는 600만원의 기탁금을 내야 한다. 교육부 관계자는 “기표방식 등에 대해 논란이 있어 입법예고 과정에서 시일이 오래 걸렸다”면서 “오는 14일 열리는 국무회의에서는 통과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은 당초 오는 6일로 잡았던 선거공고일을 15일 이후로 미루는 등 각 시·도교육청이 선거일정을 전면 재조정키로 했다. 교육위원 선출의 법정시한은 다음 달 21일이며,오는 9월1일 임기가 시작된다. 한편 교육부는 사전선거및 과열선거조짐이 나타남에 따라 교육감및 교육위원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의 불법선거 운동을 엄단키로 했다. 특히 교육위원과 교육감 후보 출마 예정자들이 선거인단인 학교운영위원회 위원들을 찾아다니거나 학교를 방문하는 행위등이 적발될 경우 즉각 사법당국에 고발키로 했다. 현행 선거법상 교육위원과 교육감 후보는 정해진 소견발표회 및 선거공보 발송외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게 돼있다. 교육부는 불법선거 운동을 하다 적발된 후보는 고발 조치하고 검찰과 경찰에 엄정한 엄정한 수사를 요청할 방침이다. 불법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징역 또는 1백만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되면 당선이 무효화된다. 교육부 관계자는 “지방교육자치가 제대로 실현되려면 교육위원,교육감 선거부터 깨끗하게 치러져야 한다”며 “정부와 시·도교육청,선거인단이 합세해 후보들의 불법선거 운동을 막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내일부터 달라지는 경제·사회제도

    ▷정책실명제◁ 주요 정책 보고서나 계획서 등을 만들 때,정책 관련자의 실명과 의견,주요내용 등을 반드시 적어야 한다.또 각종 민원,인허가 담당자 및 관리책임자는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꼭 써야 한다. ▷팩스발급 민원◁ 시 도,시 군 구,읍 면 동,출장소에서도 전국 314개 대학의 졸업 성적증명서 발급 신청을 받는다.증명서는 4∼5시간 뒤에 팩스로 보내준다. ▷주민등록등 초본 발급◁ 주민등록등 초본에 발급자의 도장과 함께 발급기관의 전화번호가 표기된다.인천시의 경우 도장 대신 발급자의 성명을 표기한다. ▷선급금 지급제도◁ 지방자치단체가 발주하는 공사 중 낙찰률 85% 미만의 공사 물품 제조 용역의 경우에도 선급금을 지급할 수 있게 된다. ▷외국인 공유재산 대부 매각제도◁ 자치단체의 공유지를 외국인 투자기업에 공장용지로 대부(임대) 또는 매각할 때,수의계약을 허용하고 대부 매각대금 감면 및 영구시설물의 축조가 가능해진다. ▷공유재산 관리제도◁ 농경지인 잡종재산을 수의계약으로 대부할 때 3정보 이하로 돼 있던 제한기준이폐지된다.재래시장은 사업시행자,사용자,점유자에게 수의계약으로 매각할 수 있게 된다. ▷비업무용 토지 중과세 제도◁ 비업무용토지 판정유예 기간과 채권보전용 토지 유예기간이 현행 1년에서 3년 등으로 연장되고 부속토지 중과기준도 대폭 완화된다. ▷도서 오지 민방위교육◁ 올 하반기부터 도서 오지 가운데 민방위대원이 5명 이내인 거주지역은 민방위교육이 통신교육으로 대체된다. ▷소방시설 자체 점검◁ 소방시설 자체 점검대상이 연면적 1만5,000㎡에서 1만㎡이상인 건축물에 설치된 소방시설로 확대된다. ▷교육위원 교육감 선거제도◁ 오는 8월에 실시되는 제3기 시 도 교육위원 및 교육감 선거부터 학교운영위원회 대표들에 의한 직접선거가 실시된다.입후보자 기탁금제도가 도입돼 교육감 입후보자는 3천만원,교육위원 입후보자는 6백만원의 기탁금을 내야 한다.
  • 연극 ‘김치국씨 환장하다’의 어설픈 해석/孫靜淑 기자(객석에서)

    ◎웃음과 통일·씁쓸한 만남 어느 날 신문을 펴들다 평생 모은 자기 돈 18억이 북한돕기에 기탁됐다는 기사를 발견하곤 대경실색하는 이북 출신 김밥장수 김치국씨.그날 이후 김씨는 출연하지도 않은 TV 토크쇼에서 ‘김밥통일론’을 역설하는 자기를 보질 않나,대공수사기관에 끌려가 간첩으로 몰리질 않나,환장할 곤경을 치른다. 연우무대가 1년반만에 내놓은 신작 ‘김치국씨 환장하다’(희곡 장소현,연출 최용훈)는 이젠 주위에서 사라져 가는 월남 1세대를 내세워 분단 해법을 모색해 보자는 작품.심각한 주제지만 등장인물들과 그 얽혀들어가는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없어 객석엔 폭소가 끊이질 않는다.‘실컷 웃고 나니 뭔가 찡하게 남더라’는 효과를 노린 듯.연극은 효과 달성에 성공했을까.만일 그렇다고 말하기가 썩 내키지 않는다면 그건 연극의 문제틀 탓이다. 작품엔 90년대 대중문화에서 빌려온 기호들이 범람한다.영화 ‘미션 임파서블’ 주제음악이 깔리고 ‘터치터치 공공뭣’하는 국제전화 광고,‘똑사세요’라는 드라마속 떡장수 어머니의 말씨,‘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자 어투 등이 계속 삽입된다.이들은 연극 ‘폭소지수’를 높이기도 하지만 통일문제에 90년대 옷을 입히는 분장사기도 하다.통일이란 어쨌건 구닥다리 숙제.이를 관객 감각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것. 그런데 90년대 감각과 통일문제의 만남은 어째 행복해 뵈질 않는다.90년대 기호에 70∼80년대식 문제의식을 담으려니 삐걱대는 것이다. 치국씨를 둘러싼 곤경은 북쪽의 쌍둥이형 탓.해방 전부터 망나니짓을 도맡아 한 뒤 파편은 몽땅 치국씨에게 뒤집어씌운 형.그가 이젠 남파간첩으로 따라와서 그 죄까지 떠넘긴 판.치국씨는 감옥에 갇혀 증오에 치를 떤다.그런데 치국씨 꿈에 나타난,북에 두고 온 떡장수 어머니가 애원한다.“왜 그리 형을 미워하느냐.너흰 한 씨알에서 나온 쌍둥이다.둘이 모여 오순도순 살면,그것이 사는 것 아니냐”. 배를 잡던 객석이 잠시 숙연해지지만 그뿐.극은 뻔히 예측할 수 있는 결론을 향해 치닫고 막이 내리면 남는 건 웃음의 잔해뿐이다.80년대 너무나도 흔히 봐 온 ‘화해’의 줄거리는 공허하고 옛 안기부의 용공조작 장면도 유행지난 옷처럼 을씨년스럽다.지금은 냉전이 경제전쟁으로 재편되고 새 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때.한때 가장 앞장서 통일의 지렛대가 됐던 문화계는 좀더 정치(精緻)한 새틀을 짜야 하지 아닐까.물론 연극 홀로 감당할 몫은 아니겠지만.연극은 21일 막을 내린 뒤 쉬었다가 27일 다시 올려 7월26일까지 계속.744­7090.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