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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선단체장 취임 열흘 달라진 것들

    ◎도보·자전거로 출·퇴근… 시민과 더 가까이/점심은 청사 구내식당서 직원들과 함께/「열린 시장실」 마련… 주민 목소리 여과없이 청취/회의실 원탁으로 고쳐 실무자와 격의없는 대화/「정책 실명제」 시행·타지 거주 공직자 관내로 이주 지방 관청가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민선 단체장들이 주민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으로 도보나 자전거 등으로 출·퇴근하고 근무실을 정례적으로 민원실로 개방하기도 한다.또 관사를 주민을 위한 「사랑방」으로 활용하거나 또는 팔고 값싼 곳으로 옮겨 지역개발 재원에 보태기도 한다.행정 스타일도 변하고 있다.실무 국·과장의 전결이 크게 늘었고 회의실도 원탁으로 고쳐 실무자들의 목소리를 크게 들으려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 ▷근무실 개방◁ 서울의 진영호 성북구청장은 10일 「이동 구청장실」을 운용하기 위해 24인승 미니버스를 개조,전화기와 구정 현황판 등 즉석 브리핑 자료를 갖추었다.권문용 강남구청장은 민원 전용 팩시밀리(510∼1111)를 구청장실에 설치했고 정흥진 종로구청장,설송웅 용산구청장 등도 구청장실을 개방하고 있다. 경남 백승두 진주시장은 시장실 옆에 「열린 시장실」을 따로 마련하고 직원 2명을 배치해 주민들의 소리를 듣고 있다.주민들의 건의,고충,청원을 여과없이 전달하라는 것이 그의 엄명이다. 하일청 사천시장도 10평짜리 주민면담실을 마련해 운용하고 있고 공민배 창원시장은 매주 목요일을 「시민과의 대화의 날」로 지정,주민들과 만난다. 전북의 국승록 정읍시장은 취임과 함께 2층이던 시장실을 1층 민원실 옆으로 옮겨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임명환 완주군수는 매주 이틀 동안 스스로 민원실장을 맡는다. 신구범 제주도지사는 비서실 외에 주민들을 만나는 10평짜리 접견실을 따로 마련했고 신철주 북제주군수,전남 조형래 곡성군수,충북 청원군 변종석는 비서실을 없애고 군수실을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출·퇴근◁ 문정수 부산시장은 북구 만덕2동 자택에서 시청사까지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갈아 타고 출·퇴근하며 「열린 행정」의 현장으로 활용한다.부산의 오규석 기장군수는 관사에서 청사까지 1시간거리를 주민들과 함께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며 대화를 나눈다. 경기도 심재덕 수원시장도 취임 첫 날부터 시내버스로 출·퇴근한다.광주 광역시의 김태홍 북구청장은 취임한 날부터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민원인들에게 부족한 주차공간을 넓게 내주기 위해 직원들의 승용차 이용을 자제하라고 당부했다. ▷관사 활용◁ 이의근 경북지사는 관사로 써 온 대구 도심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경산에 값싼 아파트를 임대하도록 지시했다.최용규 인천 부평구청장도 62평짜리 관사 아파트를 처분하라고 지시했다. 충남 김낙성 당진군수는 관사를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랑방으로 개조토록 했다.강원도 이승호 인제군수는 『관사를 공무원들의 복지 시설로 활용하겠다』는 공약에 따라 여직원 탈의실과 공무원의 휴게실로 개조,활용토록 했다. 경남의 김두관 남해군수는 고현면 자택을 계속 쓰겠다며 관사를 헐고 민원인을 위한 주차장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권위주의 탈피◁ 심대평 충남도지사는 길게는 1시간30분까지 계속되던 각종 회의를 30분으로 줄여 실무자들의 회의 부담을 덜어주었다.또 도청과 시·군의 32개 실무 실·과를 선정,토요일마다 2개 팀으로 나눠 한개 팀을 평일처럼 전일 근무토록 하는 한편 다른 팀은 쉬도록 하는 새로운 근무방식을 도입,운용하고 있다.실적이 좋을 경우 내년부터 충남도 전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전남 구례 이동승 군수는 회의실 탁자를 원탁으로 바꾸고 의자도 일반 참석자와 같은 크기로 바꿔 부하 직원들과의 벽을 허물고 있다. 홍선기 대전시장은 청사 출입 때 비서진의 마중과 환송을 없앴고 송석찬 유성구청장,오희중 대덕구청장은 조회나 각종 행사 때 단상을 없앰으로써 참석자들과의 위화감의 소지를 원천봉쇄했다. ▷위민 행정◁ 전남 권이담 목포시장은 공무원에게 책임감과 함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시책을 입안한 직원의 명단을 공개하는 「정책 실명제」를 도입,운용하고 있다.전남 고흥의 유상철 군수는 주민과의 「만남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고흥 이외 지역에 거주하는 공직자들에게 모두 고흥으로 이사하라고 지시했다. 전북 김상두 장수군수와 강수원부안군수도 모든 직원들이 부안군으로 주민등록을 옮겨 주민과 함께 살며 대화의 기회를 넓히라고 지시했다. 경기도 이석용 안양시장은 공직자들의 근무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직원들에게 희망하는 근무부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토록 했다.이시장은 근무부서는 본인의 희망이 존중돼야 한다며 인사 자료로 활용키로 했다. ▷기타◁ 서울의 조순 시장을 비롯,부산의 문시장,유종근 전북지사 등 민선 단체장들은 시간나는 대로 점심식사를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하며 「열린 행정」의 분위기를 만드느라 안간힘이다.
  • 김현옥 전 내무 부산시장 출마

    【부산=김정한 기자】 서울·부산시장과 내무장관을 지낸 김현옥(69)씨가 6일 부산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육사 3기인 김씨는 62년 준장예편 이후 부산시장,서울시장,내무부장관을 지냈으며 지난 81년부터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장안중과 장안여고에서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부산(6·27 표밭 기류:12)

    ◎“힘있는 시장”대 “청문회 스타” 여 야 각축/아주게임 유치 등 호재에 “낙승” 장담­민자 문정수/「서민대변자」 부각… TV토론 큰 기대­민주 노무현/막판 김현옥 전 내무 뛰어들어 부동표 향방 변수로 부산은 민자당의 난공불락 요새였다.김영삼 대통령이 쌓아놓은 보호벽이 두텁게 에워싸고 있었다.그러나 최근 그 보호벽에 약간 금이가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반민자정서」라고까지 불리는 이상기류가 원인이다. 이상기류의 실체는 현정부에 대한 「섭섭함」이다.2백66만 부산 유권자들은 날마다 전국 최악의 교통난에 시달리고 있다.경제사정도,환경도 나아진 게 없다고 불만이다. ○“민자서 당선될것” 이러한 정서변화는 부산시민들의 「야성」을 서서히 되살려 놓고 있다.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자당 문정수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백중지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물론 부동표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망은 매우 불투명하다.그러나 문 후보의 독주로 싱겁게 끝날 것이라는 처음의 예측과는 달리 볼만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다 3공 때 서울·부산시장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불도저」 김현옥씨(69·부산 기장군 장안중·장안여고 교장)가 6일 출마를 선언하며 맞대결에 끼여들어 선거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부산시장 선거의 최대 관심은 결국 민자당의 수성여부로 집약된다.당초 「거품인기」로 치부됐던 노후보의 지지도가 의외로 오래 지속되고 있는 데 대해 현지 선거관계자들은 더이상 이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분위기 호전 기대 하지만 부산시민들이 민자당에 다소 불만은 있지만 민주당을 밀며 등을 돌리기까지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몇가지 여론조사에서도 『지지도와 상관 없이 민자당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는 응답이 훨씬 많았다. 민자당 부산시지부의 한 관계자는 『여론조사 결과는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라고 분석하고 『안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려할 만한 상황은 더욱 아니다』라고 압승을 장담했다. 그럼에도 문 후보 진영에는 비상이 걸려 있다.유권자들의 무관심으로좀처럼 달궈지지 않는 선거분위기,구청장 후보공천 탈락자들의 잇따른 탈당,정치인출신 후보에 대한 공직사회의 반감,「자금」등을 핑계로 움직이지 않는 조직 등 4중고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 후보측은 조직과 경력면에서 노후보에 비해 훨씬 우위에 있으므로 선거전이 본격화되면 분위기가 호전될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민자당 공조직과 민주산악회등 사조직을 풀가동,압승을 거둔다는 계산이다.각급 직능단체를 시지부 산하조직으로 흡수,조직을 더 강화하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각종 행사장에 부지런히 얼굴을 내밀고 공무원들과도 꾸준히 접촉하고 있다. 문 후보측은 김 대통령의 측근이자 집권여당 사무총장 출신의 「힘 있는 시장」 「부산을 아·태중심도시로 이끌 적임자」임을 부각시키며 얼굴 알리기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인기도 앞서 최대의 호재는 지난번 삼성자동차공장에 이어 2002년 아시안게임의 부산유치.문후보는 『그 때까지 5조원의 국고보조가 필요하다.야당출신 시장이 막대한 돈을 중앙정부로부터 얻어낼 수 있겠느냐』고 강조하고 있다. 노 후보측은 당초 「승산 없는 게임」이라고 여겨 출마조차도 머뭇거렸던 것과는 달리 최근까지의 여론조사에서 인기도가 문 후보보다 높게 나타나자 한층 고무돼 있다.특히 20·30대 젊은 층의 지지도가 높아 『한번 해볼만 하다』고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노 후보는 『민자당의 정치력 부재에서 비롯된 반민자 기류를 적극 활용하면 이변을 창출할 수도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문 후보보다 조직에서 열세인 점을 극복하기 위해 인물대결과 정책대결로 선거전을 이끌어 간다는 전략이다. ○「반민자 기류」 활용 「5공 청문회 스타」로서의 인기와 기획력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특히 이곳 지역민방에서 추진하고 있는 TV토론에 기대를 걸고 있다.문 후보와의 맞대결에서 원칙과 소신,논리정연함,서민대변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민자당에 곱지 않는 기류가 있다고 해서 「친민주」는 더욱 아니라는 데 노 후보측의 부담이 있다.지난 14대 총선 때 높은 인기도에도 불구하고 민자당의 허삼수 후보에게 참패한 경험이이같은 「부산정서」를 설명해 준다.가장 걱정거리는 역시 막판 「지역바람」의 출현 가능성이다.
  • 국회의원 선거구 20곳 늘어/전국선거구 2백57개로

    ◎국회 획정위 확정 국회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위원장 최종율)는 6일 마지막 회의를 열어 인구가 30만을 넘어 분구하거나 새로운 행정구·군의 신설 등으로 늘어나는 선거구를 23개로 정했다. 획정위는 또 최소인구 기준인 7만명에 못 미치는 5개 지역 가운데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을 한 선거구로 합치고,전남 신안군은 이웃 무안지역에 통합시키기로 함으로써 2개 선거구를 줄였다. 이와 함께 경북의 달성·고령에서 달성을 대구로 편입하고 고령은 이웃 성주와 합쳐 선거구 하나를 더 줄였다. 그러나 인구가 7만명이 못되는 5개 지역 가운데 전남 장흥과 영암 등 2곳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강원도 춘천·원주·강릉시,충북 제천시,전북 군산시,전남 순천시,경북 경주시와 안동시 구미시 등 인구가 30만이 안되는 통합시·군 9개 지역에 대한 분구문제도 앞으로 여야 협상에 맡기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국회의원 선거구는 현행 2백37개에서 증가 23곳,감소 3곳이 우선 결정되면서 20개가 늘어난 2백57개가 됐으나 감소대상 지역이 아직확정되지 않아 전체숫자는 유동적이다. 이날 회의에서는 부산의 기장군은 해운대구에,인천의 옹진군은 중동구에 편입시켜 한 선거구로 만들었고 강원도에서는 양구·인제·고성,강릉·명주,양양·속초,횡성·홍천등으로 선거구를 조정했다. 경남의 진주시는 남강을 경계로 강남과 강북으로 선거구를 나누기로 결론을 내렸다.
  • 독하게 지은 감기약 “조심”/독감기승속 유아 등 사망

    독감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감기환자들이 감기약을 먹고 숨지는 사례가 잇따라 주의가 요망되고 있다. 10일 하오 8시50분쯤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 궁전아파트 1508호 범용균씨(32)집 안방에서 범씨가 이웃 약국에서 지은 감기몸살약 한봉을 먹고 갑자기 호흡곤란증세를 일으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또 이날 0시50분쯤 대구시 동구 신암1동 705 최원수씨(37)의 한살난 딸이 병원에서 지은 감기약을 먹고 호흡곤란증세를 보이다 10분만에 숨졌다. 이에 대해 병원관계자들은 『일부약사들이 빨리 병이 낫도록 하기 위해 평소보다 감기약을 독하게 짓는 바람에 저항력이 약한 유아들이 이를 이겨내지 못해 변을 당하는 것 같다』면서 약을 조제할때 약사들에게 환자의 평소 건강상태를 정확히 얘기해줄 것을 당부했다.
  • 자자체 부단체장 직급 올린다/부시장(직할시)·부지사 1급으로

    ◎부군수·부국청장은 국가직 2∼4급/내년 7월부터 내년 7월부터 국가직 1급과 2급으로 이원화돼 있는 시·도(서울제외)의 부시장·부지사 직급이 1급으로 일원화된다.또 시·군·구의 부단체장은 지방직 3∼4급에서 인구 15만명과 50만명을 기준으로 그 규모에 따라 국가직 2∼4급(지방직 1∼3급)으로 변경돼 최고 2단계까지 상향,조정된다. 내무부는 22일 각급 부단체장의 직급을 상향시키는 방침을 확정,국가공무원 정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내년 7월부터 시행키로 했다. 이는 내년도 단체장 선거와 관련,각급 부단체장을 98년 6월말까지 한시적으로 국가직으로 임명토록 되어 있는데다가 자치단체의 국가직 공무원을 지방직으로 전환시키면서 자치단체의 국·과장 직급이 한단계씩 상향된데 따른 것이다. 이에따라 1급(관리관) 6명과 2급(이사관) 8명을 맡고 있던 시·도의 부단체장은 정무직인 서울을 제외하고 모두 1급(관리관)으로 보직된다. 또 인구 50만이 넘는 성북구 등 서울시내 7개구청과 수원·울산·전주·포항 등 15곳은 2급(이사관),서울 종로구 등 인구가 15만∼50만명미만인 82곳은 3급(부이사관),부산 중구 등 인구 15만명미만의 1백39개 시·군·구는 4급(서기관)의 부단체장을 각각 두게 된다.지금은 서울과 부산의 모든 구청과 인구 15만명이상의 시 61곳에서는 지방직 3급(부이사관)이,나머지 1백99곳의 시·군·구에서는 지방직 4급(서기관)이 각각 부단체장을 맡고 있다. 내년의 기초단체수는 시·군 통합으로 34개 군이 줄어드는 대신 9곳의 자치구 분구와 구역조정(부산 기장군 신설) 등으로 10곳에 늘어 2백36곳으로 줄어든다. 내무부는 이같은 부단체장 직급조정과 함께 도 기획관리실장 직속의 감사담당관(국가 사무관)을 직할시와 같이 부지사 직속의 감사실장(국가 서기관)으로 개편,일선 시·군에 대한 감사기능을 강화키로 했다.
  • 자치단체장 겸직 금지/자치법개정안/광역시에 군·읍·면 설치

    내년부터 광역시(직할시)에도 군 및 읍·면이 설치될 수있다.또 내년에 선출되는 민선 지방자치단체장은 지방의회 의원처럼 농협의 임·직원등 다른 공사직을 겸할수 없게 된다. 내무부는 20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마련,입법예고했다. 개정안은 내년부터 직할시를 광역시로 이름을 바꾸고 자치구와 함께 군 및 읍·면을 함께 두도록 하는 한편 읍이 없는 34개 통합시에서는 인구규모와 관계없이 한곳을 읍으로 승격시킬 수있도록 했다. 이에따라 부산에 편입되는 경남 양산군의 5개 읍·면지역은 부산시 기장군으로,대구시에 편입되는 달성군은 대구시 달성군으로,인천 편입대상인 경기도 옹진군과 강화군은 인천시 옹진군과 강화군으로 각각 개편된다. 경기도 옹진군은 안산시로,김포군 검단면은 인천 서구 검단동으로,진해시 웅동2동은 부산 강서구 녹산동에 편입되거나 개편된다. 개정안은 또 내년도 단체장선거등 통합선거와 관련,지방의회의 공백상태를 메우기위해 내년 4월15일로 임기가 끝나는 기초의회 의원의 임기를 6월30일까지 77일간 연기토록 했다.
  • 김정일 찬양 수사 1백여가지 선전(북녘 사회상)

    ◎담배도 지위따라 5등급 구분/양질 컬러 TV 대량생산 독려 ○「붉은 태양」등 대대적 “발굴” ○…북한은 최근 선전기관을 통해 지난 87년부터 「발굴」하고 있다는 「구호문헌」에 김정일에 대한 존칭·수식사가 근 1백여가지에 달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 「구호문헌」이란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빨치산투쟁경력을 사실화하고 김정일이 태어날때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예정(?)됐었음으로 선전하기 위해 지난 87년 2월 김정일의 45회 생일무렵부터 조작해 오고 있는 것으로 김일성의 추종인물들이 항일빨치산투쟁 당시 나무껍질을 벗겨 새겨넣었다는 찬양구호. 이들중 몇가지만 예를 들면 「김일성대장 계승인」「애기장군별」「2천만의 아들」「조선독립대장 김일성 대이을 백두광명성 여기출연 42」「2세의 대장군」「절세의 위인」「5대양 6대주에 비친 붉은 태양」「2세 영걸」「2세 대통령」「김일성 대장을 하늘림으로,녀장수 김정숙 녀신으로,백두광명성 2세영걸로 천만년 높이 모시자」「조국=2세영걸 광명성만세」등. ○김부자전용품이 최고급 ○…북한에서는 담배까지도 ▲김일성­김정일 전용 ▲고급 ▲준고급 ▲보통 ▲막담배 등 5등급으로 구분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지급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월남한 한 귀순자에 따르면 북한에서 피우고 있는 담배만 보아도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대개 짐작할 수 있으며 일부 청년들은 여자친구 앞에서 허세를 부리기 위해 암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좋은 담배를 구입해 피우고 있다는 것. 5등급으로 구분된 담배를 구체적으로 보면 김일성­김정일 전용 담배는 기초과학연구소(만수무강연구소)에서 생산한 「백두산」「영광」등이다. ○서브·드라이브가 주특기 ○…최근 북한에서는 남자탁구 간판스타인 김성희·이근상을 이을 선두주자로 홍준일 선수(13)가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정부기관지 민주조선 최근호에 의하면 홍준일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체육구락부 소속으로 지난해말 「전국소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강력한 회전서브와 드라이브로 모든 경기를 무실세트로 승리(6전6승),우승함으로써 『전도유망한 선수로 주목받았다』는 것이다. 특기는 상대의 오른쪽 깊숙이 밀어 넣는 강한 스카이서브와 다양한 좌우드라이브인데 게임당 평균 6점의 서브포인트를 얻어내며 좌우드라이브에 의한 득점률이 80∼90%에 달한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연산 24만대… 대부분 흑백 ○…북한은 2일 평양 대동강 TV수상기공장서 종업원들의 궐기모임을 열고 질좋은 컬러TV양산을 강조했다. 김정일이 지난달 26일 새로 건설된 애국천연색텔레비전 조립공장시찰시 제시한 과업실천 명목으로 열린 이날 집회서 북한은 질좋은 컬러TV 수상기를 양산,텔레비전공업의 수준을 일층 제고시키기 위해 전자소재 및 부품의 전문화·대량생산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중앙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북한은 90년말 현재 대동강 TV·청진TV공장(각 10만대)을 비롯,원산·나진·남포공장 등에서 연간 총 24만대 내외의 TV수상기를 생산하고 있으나 대부분이 흑백수상기이며 컬러수상기의 경우 구소련·루마니아 등에서 부품을 도입,대동강TV공장에서 조립생산해왔는데 이번에 조총련의 헌금으로 「애국컬러TV수상기 조립공장」을 건설하게 됐다.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강경진압ㆍ과격시위가 광주사태 도화선”/합수부 설치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계획/정 총장,「김재규 관련조서」 4차례 고쳐/광주특위 ▷6ㆍ29선언◁ 어느 시대,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또 지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이면의 얘기들은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간첩조작사건등◁ 선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게 마련입니다. 실무진에 의해 이뤄진 일인 경우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임대통령으로서 답변할 수있는 부분을 총괄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간첩조작사건 등은 실무진들이 조작했는지 않았는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 물리적으로 답변준비시간이 짧아서 거기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답변하지 못한 점을 양해바랍니다. ▷10ㆍ26에서 12ㆍ12까지◁ 1979년 국내 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ㆍ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공백상태와 행정체제의 마비는 국민들의 충격과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시해사건이 권력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지절러졌다는 점에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내에서의 수사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합수부설치 배경◁ 본인은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 정보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당시에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로 나누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 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62 당시 김재춘방첩부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사전조직 및 4대 의혹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 체포 경위◁ 대통령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불러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27일 새벽 02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 장군을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서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m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11시께 본인에게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습니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 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통제ㆍ조정 필요◁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일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도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차 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 입고 신고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 자신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지 일곱시간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 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산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4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습니다.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조서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습니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습니다. ▷10ㆍ26,쿠데타로 판단◁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셔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인이 운명적으로 시해사건수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을 때에 저 개인의 신상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히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김재규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통설,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이 범행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취합해서 쿠데타가 아니면 쿠데타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당시로서는 판단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정 총장 자신의 말대로 오비이락격으로 그가 시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건 그분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입니다. 불운이라 해서 수사의 객관성과 냉정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용의자를 제외하고 수사를 마무리지었다간 의혹은 의혹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수사책임자의 직무태만이란 원성으로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직무태만이란 비난이 겁나서가 아니라 정 총장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동시,정 총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인은 정 총장을 수사할 적기를 포착하기 위해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군부내의 여론을 수집하였습니다. 11월 중순경부터 중진 장성들과 접촉을 계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 총장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장군도 끼여있었습니다. 당시 황영시 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노태우9사단장 등을 한분한분 찾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그분들은 하나같이 10ㆍ26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어떤 고위층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빨리 흑백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최고책임자의 관련혐의는 군의 단결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결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화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12월 초순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 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 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본인은 총리공관으로 최규하대통령을 찾아뵙고 정승화총장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혐의만으로도 정총장이 계엄사령관과 참모총장직에 부당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정 총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계엄사령관 및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그 공백을 대통령께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 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 후 모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 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인은 그날 밤 18시30분 경복궁에 있는 30단으로 평소 정 총장과 가까운 관계인 군의 중진 장성들과 그밖의 몇몇 장성들을 초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이 시해사건과 고의이건 아니건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군내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으로 군 지휘계통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도록 허심탄회하게 건의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결과 예편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인 장성들이 총장공관에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예편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정 총장이 일단 예편하기로 결심하였다가 혹시 울컥하는 감정으로 군을 동원하여 보안사를 공격하고 수사요원을 체포하여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보안사가 아닌 30단으로 정한 것은 본인이 정 총장의 감시하에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보안 유지를 위해 저의 사무실이 아닌 바로 인접한 30단의 단장실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상했던 대로 연행과 관련된 무력충돌 직후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면서 수도권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 총장 측근의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 등이 탱크를 포함한 중무장부대를 동원하여 청와대 지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합수부는 수사기관으로서 전투병력이 없는 상태이고 부대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될 것이므로 주요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제를 당부하는 등 충돌을 피하도록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정 총장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긴급대응의 조치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일각에서 또는 미국측에서 이 사태를 계획적인 거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태는 돌발적이었습니다. 당시 30단에 모였던 장성들이 병력을 출동시킬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본인에게 대한 전보발령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는 모양이지만,본인은 그 당시에는 일체 그와 같은 일은 들안 바가 없습니다.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장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고 박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입문 권유를 몇차례 받은 바 있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2ㆍ12사태는 당시 시해사건에 대한 최고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발생◁ 광주사태는 10ㆍ26 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보고를 들은 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읍니다. ▷광주참극 상상 못해◁ 당시 광주 일대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보책임자였던 본인도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하였고 현지 주둔부대인 광주계엄분소에서 계엄사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극히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부재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서울에 있던 광주출신의 한 장교가 자진해서 현지에 잠입,단편적 정보를 계엄사를 통해 보내오기도 하고 또 당시 보안사의 간부를 현지로 실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정확한 상황판단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본인은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으며,시민을 상대로 한 사태수습을 군 작전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정보책임자로서의 의견을 계엄사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낸 이 비극적 사태의 원인에 대하여 본인은 무어라 한두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 계엄하에서 광주사태 이전에 서울 등지에서도 각종의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을 되찾은 반면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파견ㆍ작전◁ 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당시의 계엄사령관 이희성장군은 그분의 강직한 개인적 성품으로 보아도 지휘선상에 있지 않은 본인이 군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공수부대는 5ㆍ18계엄확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전주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병력을 광주 전주 대전에 각각 3백여명 규모의 일개 대대씩 파견하였고 서울지역 8개 대학에도 6개 여단병력 9천6백여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의 증강은 광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광주지역에 특별한 상황을 예상하여 투입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파견 배속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군지휘의 이해부족에서 제기된 의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 배속이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서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현지 지휘관이 군 경력상 특수부대에 대한 지휘경험이 전무하여 원활한 작전수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해가 갑니다만 배속된 부대가 현지 지휘관의 지휘통제에 불응했다는 주장은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위권행사문제◁ 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이 되며 현지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판단에 따라 제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상급사령부나 계엄사령부 등의 군 고위층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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