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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블랙요원 30년’ 홍장원 “대통령의 그 말, 굉장히 충격적”

    ‘블랙요원 30년’ 홍장원 “대통령의 그 말, 굉장히 충격적”

    12월 3일, 비상계엄의 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한 통의 전화는 국정원 고위 간부에게 오래도록 남을 기억이 됐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지난해 12월 3일 이른바 ‘계엄의 밤’으로 불린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왜 그러세요?’라고 묻고 싶었다”고 밝혔다. 또 국정원 30년 경력자로서 자신의 경험과 내부 개혁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홍장원 전 차장은 18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그날(12월 3일)로 돌아간다면 대통령에게 뭐라고 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분에게 ‘왜 그러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윤석열 전 대통령이 감정 섞인 목소리로 ‘이번 기회에 싹 다 잡아들여’라고 지시했던 게 생생히 기억난다”며 “‘그럼 누구를 잡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정도는 물어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굉장히 충격적인 단어였고, 복합적인 감정이 남아 있는 안타까운 기억”이라고 덧붙였다. 홍장원 전 차장은 윤 전 대통령이 계엄 직후 직접 전화를 걸어 “국정원에도 대공수사권을 줄 테니 방첩사령부를 우선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비상계엄 상황에 대통령의 직접 지시인 만큼 뭔가 큰 일이 있다는 생각에 곧장 방첩사령부에 연락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방첩사령부로부터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등 정치인 14명의 실명이 담긴 체포명단을 듣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고 회상했다. 이 같은 내용이 담긴 홍장원 전 차장의 메모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파면 판결에 주요 근거로 작용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홍 전 차장은 국정원에 대한 깊은 애정도 드러냈다. 그는 “국정원은 국내정보 수집과 대공수사권이 폐지됐지만, 선택과 집중을 통해 오히려 더 특화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정보기관으로서의 국제적 위상은 오히려 높아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이 러시아에 1만 명 이상 파병한 사실을 국정원이 작년 10월 세계 최초로 포착했고, 이 내용으로 직접 나토에 브리핑도 다녀왔다”며 “국정원은 이제 정보기관계의 프리미어리그 같은 위상을 갖게 됐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홍장원 전 차장은 자신이 블랙요원(비공식 요원)으로 시작해 국정원 1차장까지 오른 첫 사례라는 점도 언급했다. “30년 동안 너무 재미있게 일했다”며 “이제는 블랙이 아니라 그레이 요원이 된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자신을 향한 일부 유튜버들과 정치권의 공격에 대해서는 “정권의 카르텔에 깔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아니다”라고 날을 세웠다. 끝으로 그는 “국정원이 지금처럼 투명성과 전문성을 유지해가길 바란다”며 “정보기관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정말 도전해볼 만한 길”이라고 덧붙였다.
  • 말벡 우아함에 흠뻑 아르헨 따뜻함에 잔뜩 취했다

    말벡 우아함에 흠뻑 아르헨 따뜻함에 잔뜩 취했다

    아르헨티나 말벡으로 빚은 와인이 그저 단순하고 강렬하기만 할 거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말벡도 이토록 깊고 복잡하고 우아하다. ‘세계 말벡의 날’이었던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의 한 음식점에서 아르헨티나 와인과 전통 음식을 맛봤다.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관이 마련한 ‘아르헨티나 말벡 월드 데이 디너 이벤트’였다. 익숙한 말벡부터 낯선 토론테스까지 여러 품종으로 빚은 와인을 마셨고, 아르헨티나의 여러 음식을 먹었다. 백포도주 ‘엘 에네미고 그랑 에네미고 토론테스’를 먼저 마셨다. 2021년 빈티지였다. 처음 보는 품종이었다. 수입사 신동와인 관계자는 “아르헨티나 토착종이다. 와이너리 엘 에네미고가 토론테스의 잠재력을 극대화했다. 오크통에서 18개월 숙성시켜 토론테스의 새로운 풍미를 찾아냈다”고 했다. 술을 머금고 우물거렸다. 라벤더와 복숭아, 서양배, 오렌지가 아른거렸다. 바디감은 보통이었다. 꽃과 시트러스가 뒤섞인 쌉싸름한 피니시가 길었다. 차가울 때도 좋았는데, 약간 온도가 오르니 더 좋았다. 다음으로 백포도주 ‘테라자스 데 로스 안데스 리제르바 샤도네이’였다. 빈티지는 2024년. 청량하고 준수했다. 자몽, 배 향이 났다. 가벼운 과일, 희미한 브리오슈를 느꼈다. 산미의 균형이 좋았다. 오크 터치는 있었지만, 선명하지 않았다. 구글링해보니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8개월 숙성’했다고 나왔다. 감동적이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가게에서 눈에 띄면 한 번쯤 사 먹을 것 같았다. 드디어 적포도주가 나왔다. ‘보데가스 살렌테인 누미나 말벡’이었다. 마시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맛있었다. 2020년 빈티지였다. 소믈리에는 “말벡에서 느낄 수 없는 구조감이 있다. 메를로를 많이 쓴 생떼밀리옹을 연상하게 한다”고 했다. 내 의견도 같았다. 눈을 가리고 마시면 말벡인 줄 몰랐을 것이다. 블랙 베리를 비롯한 검붉은 베리류의 농축미가 훌륭했다. 허브, 향신료도 꽤 뚜렸했다. 바디가 무겁고 피니시가 길었다. 즐겁게 잔을 비웠다. 마지막은 유명한 적포도주 ‘까테나 자파타 말벡 아르헨티노’였다. 빈티지는 2022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웠다. 좋아하기로 손꼽는 와인이기 때문이다. 이 술은 풍부하고 복합적인 향, 풍부한 과실과 초콜릿·검붉은 베리·바닐라·제비꽃의 조화로운 맛, 기나긴 피시시로 유명하다. 다만 이날 마신 까테나 자파타 말벡 아르헨티노는 조금 아쉬웠다. 시음 6시간 전에 와인을 열었다고 했는데 그게 문제였을까. 약간 꺾인 느낌이 들었다. 기억 속 퍼포먼스에 미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대사관은 현지 전통 음식을 함께 준비했다. ‘레부엘토 그라마호’, ‘아르헨티나 파이나와 후미타’, ‘카르보나다 크리올라’, ‘엠파나다’, ‘프로볼레타’, ‘치킨 쉬메인’ 등 모두 처음 맛보는 요리들이었다. 음식들은 자극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담백하고 자연스러웠다. 각각 그대로 훌륭했다. 와인과 마리아주 또한 더할 나위 없었다. 다리오 델라샤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는 “말벡은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와인이다. 말벡을 즐겨주시기를 바란다. 말벡과 한국의 김치를 함께 맛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 “복수를 결심했다”…헬스장서 힘 키워 전남편 살해한 60대 [사건파일]

    “복수를 결심했다”…헬스장서 힘 키워 전남편 살해한 60대 [사건파일]

    전 남편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이유로 1년 가까이 헬스장을 다니며 범행을 준비한 60대 여성이 살인 혐의로 항소심에서도 중형을 선고받았다. 부산고법 창원재판부 형사2부(부장 허양윤)는 19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A(61)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고 징역 17년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A씨는 지난해 6월 경남 김해시 한 농장에서 60대 전 남편 B씨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1988년 B씨와 혼인한 뒤 약 15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오다, 남편의 외도를 의심해 2003년 이혼했다. 이후에도 자녀 문제 등으로 왕래하며 교류를 이어오던 중, 2023년 6월 B씨가 과거 불륜 의심 여성과 여전히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갈등이 폭발했다. A씨는 한 달 가까이 B씨에게 강하게 항의하고 위협을 가했다. 이에 참다못한 B씨는 자신의 농장 굴착기 외부 프레임에 A씨를 약 1시간가량 묶어두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던 A씨는 이 사건 이후 수모감과 분노를 느끼고 “복수를 결심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A씨는 이후 1년간 헬스장을 다니며 근력을 기르는 등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인에게는 “끝을 내야 할 듯” “받은 수모를 돌려줘야지”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범행은 지난해 6월 8일 실행됐다. A씨는 김해의 B씨 농장을 다시 찾아가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술을 마신 뒤 B씨에게 “너도 느껴봐라”고 말하며 손을 묶겠다고 요구했다. 이에 B씨가 “마음대로 해라”며 저항하지 않자 A씨는 B씨의 손을 묶은 뒤 본격적으로 몸싸움을 벌였고, 손을 풀어달라는 B씨의 요구를 무시한 채 목 졸라 살해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A씨는 범행 당일 새벽 B씨가 “디비 자라(눕고 자라)”라고 말하자 순간적으로 격분해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다. 범행 전 A씨는 과거 마약류 수수 혐의로 집행유예를 받고 있던 상태였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유족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점, 범행 전 마약 수수로 인한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다는 점, 정신적·신체적 건강이 모두 악화된 상태였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형을 정했다”며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A씨는 형이 무겁다며 항소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의 양형이 재량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어떠한 이유로도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피고인이 범행을 장기간 계획한 정황과 사후 태도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편집자 주 매일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납니다. [사건파일]은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잊지 못할 사건사고를 전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사건의 전말, 짧은 뉴스에서 미처 전하지 못했던 비하인드스토리를 알려드릴게요.
  • 한덕수 “4·19혁명, 민주주의 역사의 빛나는 성취”

    한덕수 “4·19혁명, 민주주의 역사의 빛나는 성취”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19일 “위기 극복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국민의 저력을 하나로 모으는 통합”이라고 말했다. 한 권한대행은 이날 서울 강북구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열린 65주년 4·19 혁명 기념식에 참석해 “우리 앞에는 여전히 수많은 도전과 난제가 놓여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한 대행은 “대외적으로는 전 세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대되고 글로벌 경제 질서 또한 재편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적 갈등과 국론분열이 심화하고 있다”면서 “우리 국민이 하나가 된다면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통합이 곧 상생”이라며 “대화와 협력으로 사회적 갈등을 풀어나가면서 국민의 저력을 국가 발전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겠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한 대행은 “4·19 혁명은 모두가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빛나는 성취”라며 “자유와 민주와 정의를 상징하는 그날의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의 토대가 됐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든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라고 평가했다. 또 2023년 1019점의 4·19 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사실을 거론한 뒤 “우리는 민주 영령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억하며 그 정신을 소중히 가꾸고 지켜나가야 한다”며 “정부는 민주 유공자 여러분의 명예를 드높이고, 유가족분들을 배려·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다짐했다.
  • (영상) MLB 슈퍼스타 오타니 인성에 충격받은 사람들…“일본 문화 때문?” [포착]

    (영상) MLB 슈퍼스타 오타니 인성에 충격받은 사람들…“일본 문화 때문?” [포착]

    미국 프로야그 메이저리그(MLB) LA 다저스의 슈퍼스타인 오타니 쇼헤이(30)의 인성이 또 다시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MLB 전문 리포터이자 미국 팟캐스트 프로그램 ‘더 빅리그 데일리’의 사회자인 댄 클라크가 최근 자신의 엑스에 올린 영상에서는 오타니의 인성은 단번에 알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상을 보면 오타니는 최근 LA에서 열린 다저스와 콜로라도 로키스와와의 경기 중에 음료존에서 음료수 8잔을 만들고 있다. 영상을 최초로 공개한 클라크는 “중요한 것은 오타니가 오로지 자신을 위한 음료 한 잔이 아니라 동료들을 위한 음료 여덟 잔을 준비했다는 것”이라고 적었다. 영상을 본 팬들도 그가 경기 중 보인 친절한 행동에 놀람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고, 이 영상은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했다. 한 엑스 사용자는 “그는 매우 올바르게 자랐다. 일본 문화 덕분인 것 같다”고 적었고, 또 다른 사용자는 “오타니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자다. 내가 오타니를 존경하는 이유”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밖에도 “이 세상에는 오타니 쇼헤이와 같은 사람이 더 많아야 한다”, “오타니의 행동에서 리더십이 보인다” 등의 칭찬이 쏟아졌다. 오타니의 미담이 화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파울 타구로 포수를 맞힌 뒤 즉각 사과하는 모습이나, 어린이 팬에게 배트를 선물하고 2년 전 만난 동료의 아이 이름까지 기억해 특별한 의미를 담은 사인을 남긴 일화 등이 유명하다. 한편 오타니는 한구시간으로 19일 텍사스주 알링턴 글로브 라이프 필드에서 열리는 2025시즌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출산 휴가를 낸 사실이 알려졌다. 아내인 다나카 마미코의 출산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이날 “그는 아내인 다나카 마미코와 출산을 위해 이번 원정길에 함께 하지 않았다”면서 “오타니는 텍사스와 원정 3연전 중 복귀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MLB 규정상 선수는 최대 3일간 출산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오타니는 23일부터 열리는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 시리즈에서 복귀할 것으로 전망된다. 오타니는 지난해 MLB 최초로 단일 시즌 50홈런-50도루를 달성하며 기록을 세웠다. 올 시즌에도 출산 휴가 전까지 20경기에 출전해 타율 0.288, 6홈런, 8타점을 기록하는 등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다.
  • “3개월 전 행방불명”…日 아이돌 출신 톱배우, 숨진 채 발견

    “3개월 전 행방불명”…日 아이돌 출신 톱배우, 숨진 채 발견

    일본의 유명 아이돌 그룹 출신 배우 이타가키 미즈키(24)가 실종 3개월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고인의 유족은 지난 17일 고인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을 통해 “이타가키 미즈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음을 알려드린다”며 그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유족은 “이타가키는 지난해부터 정신질환을 앓아왔으며 올해 1월 말부터 행방불명이 됐다”며 “경찰과 친구들의 협력 하에 수색을 계속해왔지만 전날 도쿄도 내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팬 여러분께 소식을 늦게 전해드리게 돼 깊이 사과드린다”며 “이타가키는 항상 팬들에게 즐거움을 드리고자 연예 활동에 성실히 임해왔다. 최근에는 활동 복귀를 준비하던 중이었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한 것은 본인에게도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유족은 “생전 응원해 주신 팬, 관계자분들께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작별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이렇게 알리게 됐다. 현재까지의 활동을 기억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 응원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타가키 미즈키는 2000년생으로, 2014년 일본 보이그룹 밀크(M!LK)로 데뷔했다. 이후 2020년 배우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팀을 탈퇴한 뒤 영화 ‘솔로몬의 위증’, ‘첫사랑 로스타임’, 드라마 ‘에일’, ‘기린이 온다’, ‘바보 야로의 키스’, ‘정직 부동산 2’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솔로몬의 위증’으로 2015년 제25회 일본 영화 비평가 대상에서 신인남우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3월 돌연 소속사와 계약이 해지됐으며, 팬클럽과 공식 SNS가 폐쇄되는가 하면 한달 간 종적을 감춰 팬들의 걱정을 산 바 있다.
  • [열린세상] 일상의 힘, 광화문글판 서른다섯 해

    [열린세상] 일상의 힘, 광화문글판 서른다섯 해

    마침내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지난겨울 계엄과 탄핵 정국 기간 동안 가장 절실하고 소중한 것은 일상성 회복이었다. 이 과정에서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라는 시인과 촌장의 노랫말 ‘풍경’이 널리 공감받았다. 제자리를 찾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삶의 풍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그리고 한번 어그러진 것이 본연의 자리를 되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1986년 발표된 ‘풍경’은 2020년 가을 광화문글판에 실려 회자된 바 있다. 사상 초유의 코로나19 팬데믹을 겪는 상황에서 30주년을 맞아 시민들에게 공모한 문안으로 채택된 이 광화문글판 글귀는 평화롭고 온전한 일상 회복을 바라는 마음이 모인 것이기도 했다. 광화문 사거리와 강남 한복판 가장 눈에 띄는 건물에 희망과 위로를 담은 글귀를 계절마다 전달해온 광화문글판이야말로 일상의 소중함을, 나아가 일상의 힘을 잘 일깨워준다. 개인적으로는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에 오랫동안 관여했기에 조금 아는 내면은 이렇다. 광화문글판에는 떨치기 힘든 욕망과 유혹을 이겨 낸 인본주의가 담겨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중심지의 랜드마크 건물에 자리한 가로 20m, 세로 8m 크기의 현판에 회사나 상품을 광고, 홍보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고 떨치기 어려운 욕망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억누르고 큰돈을 들여가며 따뜻하고 정감 어린 그리고 시의성 있는 글귀를 오랫동안 또박또박 전달해 왔다. 그럼으로써 개개의 일상을 보살피는 것이 공동체의 일상을 지키는 것이고, 기업과 시민사회를 더 아름답고 위대하게 만드는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광화문글판은 1991년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에 의해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라는 문구로 시작됐다. 이후 “개미처럼 모아라/ 여름은 길지 않다”와 같이 대산의 경험과 지혜를 전달하다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시민에게 위안을 주는 문안을 걸자는 그의 제안으로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고은 ‘낯선 곳’)를 올리며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이 시민과 온전한 소통을 위해 문인, 언론인, 학자 등으로 문안선정위원회를 구성했다. 문안선정위원회는 이 현판이 공공재이고 주인은 시민이라는 취지에서 ‘광화문글판’이라고 이름 지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시민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광화문글판 문구들이다. 이 문구들은 공통적으로 일상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까지 논의됐지만 애석하게 광화문글판에 오르지 못한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네가 켜는 촛불은 희미하나/ 네 마음은 하늘이구나/ 네가 이 세상의 풍경이 되거라”(김형영 ‘홀로 울게 하소서’) 등이다. 일찍 귀가해 아이들과 뒹굴며 함께 저녁을 먹는 일상의 소중함과 촛불을 켜고 귀가가 늦는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이 시구들 또한 일상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광화문글판의 힘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함께 공감하며 가꾸는 일상성과 그것을 지속하는 초심에 있다. 어느새 서른다섯 해를 맞은 광화문글판이 펼칠 서른 자의 마법과 이를 변함없이 운영하는 이의 마음을 헤아린다. 참 고마운 일이다. 곽효환 시인·전 한국문학번역원장
  • [세종로의 아침] 다시 과학기술부를 허하라

    [세종로의 아침] 다시 과학기술부를 허하라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웬만한 내공을 갖고 있지 않다면 머릿속으로는 알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라테는 말야”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오는 21일은 제58회 과학의 날이다. 과학의 날이 있는 4월은 ‘과학의 달’이기도 하다. 1980년대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4월만 되면 과학 관련 글짓기, 독후감, 포스터 대회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전국 곳곳의 과학 관련 기관들에서도 과학의 날 행사나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십몇 년 전부터는 하나둘씩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정부 차원에서 하는 행사들도 요즘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이 모여 있는 대전 지역의 지역행사 수준에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 최초의 과학의 날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과학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발명학회가 찰스 다윈이 사망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인 1934년에 기일인 4월 19일을 ‘과학 데이’로 정하고 카퍼레이드, 대중강연, 활동사진 상영회 등 대대적인 행사를 펼쳤다. 일제 탄압으로 5년 만에 막을 내린 과학데이는 해방 이후에도 부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부에 의해 빛을 봤다. 당시 정부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과학원을 세우고 1967년 과학기술처를 정부 부처로 신설했다. 과기처 발족을 기념하기 위해 이듬해인 1968년에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정했다. 그러나 2013년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을 합쳐 미래창조과학부를 출범시킨 박근혜 정부 때 체신의 날을 모태로 하는 정보통신의 날과 과학의 날 기념행사를 통합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깟 기념식이나 과학의 날 행사가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과학과 과학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커지는데 국내에서 과학에 대한 존재감은 미미해져 가는 느낌이다. 그 시작은 부총리급 단독 부처이던 과학기술부를 교육 분야와 합쳐 교육과학기술부로 만든 이명박 정부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정부는 창조경제니 융합이니 4차 산업혁명이니 말 잔치만 벌이면서 과학에 교육, 미래, ICT를 무리하게 접붙이기하는 실험을 해 왔다. 무리한 실험의 결과는 지난해 역대 최악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나타났다. 과학계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데도 ‘잘 되고 있어’라며 자기최면을 걸다 보니 과학정책의 본질을 까먹은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는 6월이면 새 정부가 들어선다. 새로운 정부가 말뿐이 아닌 진심으로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지난 17년 동안 벌여 온 실험을 이제는 끝내고 다시 과학기술을 전담하는 독립부처를 출범시켜 미래에 제대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미래 지향적 이름의 미래창조과학부가 있었지만, 창조경제를 내세우며 미래 대비는커녕 과학정책도 사라졌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과학기술 독립부처 이야기가 나왔지만 무슨 일인지 흐지부지 미래창조과학부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ICT와 과학기술의 통합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출범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래부 시스템에서는 융합 효과는 물론 제대로 된 과학정책도 본 기억이 없다.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 분야에 애정을 갖고 일하는 소위 과학 정통 관료들도 찾기 힘들다. 옛 성인의 구태의연한 말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공자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해야 할 일을 ‘이름을 바로 세우는 일’(正名)이라 했다. 기초과학 연구가 탄탄해야 양자 과학이나 인공지능, 생물공학, 항공우주도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부 부처는 종합선물 세트가 아니다.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름을 바로 세우고 정확한 목표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과학기술부를 허(許)할 때가 됐다. 유용하 문화체육부 과학전문기자
  • “장애·비장애인 모두 훌륭한 연주자… 무대 바깥에서도 하모니 이뤘으면”

    “장애·비장애인 모두 훌륭한 연주자… 무대 바깥에서도 하모니 이뤘으면”

    “장애인도 내 눈·지휘봉 보며 연주단원, 하나의 소리 낼 때 가장 짜릿” 지난 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가 팔을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자 지휘봉에 맞춰 격정적인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졌다. 이어진 지휘자의 고갯짓에 트롬본과 호른 소리가 얹어졌다. ‘빠~밤 빠~밤 빠밤빠밤.’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멜로디가 대극장 안을 가득 메웠고,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오는 20일 ‘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장애인 40명과 비장애인 40명이 협연한 ‘제22회 사랑의 음악회’에서 지휘를 맡은 오승우(40)씨는 연주 내내 단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지휘봉을 움직였다. 공연이 끝난 이후 오씨는 “80명이 빈틈없이 하나의 소리를 내는 그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며 “‘장애인은 도와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연주자로만 대했더니 훌륭한 하모니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후 독일에서 지휘 공부를 하던 오씨는 2022년 7월 장애인 연주단 ‘나눔챔버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게 됐다. 오케스트라 전문 지휘자로 벌써 3년 가까이 활동했지만 첫 연습 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오씨는 “단원들이 지휘봉조차 쳐다보지 않아 굉장히 당황했다”면서 “모두 악보만 바라보며 연주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발달장애가 있는 이들은 상대의 눈을 쳐다보는 걸 힘들어해 그동안 몸으로 터득한 박자에 집중하고 악보만 보며 연주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합주를 위해 연주자들이 지휘자와 지휘봉을 봐야 하는 건 장애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씨는 단원 모두에게 “내 눈과 지휘봉을 보고 여기 맞춰서 연주하라”고 단호하게 말했고, 3년이 지난 지금은 단원 모두가 오씨를 1분도 놓치지 않고 쳐다본다. 비장애인 연주자들에게도 “(장애인에게) 맞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주 소리를 따라가지 말고 원래 박자에 맞춰 달라”고 강조한다. 오씨는 “제 손끝과 눈빛에 따라 연주를 이어 가는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다를 게 하나 없는 똑같이 훌륭한 연주자”라며 “무대 밖 세상에서도 이런 하모니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 ‘농촌 왕진버스’로 혁신… “어르신·의료진 모두 만족해 보람” [폴리시 메이커]

    ‘농촌 왕진버스’로 혁신… “어르신·의료진 모두 만족해 보람” [폴리시 메이커]

    “의료기관을 찾기 어려웠던 어르신들이 왕진버스에 만족하시는 모습을 보며 농촌에 정말 필요한 정책을 만들었다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홍경희(52·9급 공채) 농림축산식품부 농지과 사무관은 17일 ‘농촌 왕진버스’ 사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농촌 왕진버스는 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농촌으로 의료진이 찾아가 지역 주민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지난해 도입돼 9만여명이 양한방 진료와 치과 검진을 받았다. 홍 사무관은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의료 서비스 수요가 커진 농촌 현실에 주목했다. 기존에도 ‘농업인 행복버스’가 있었지만 예산이 적어 혜택을 받는 농민은 한정적이었다. 홍 사무관은 “지자체, 농협이 함께 예산과 지원 대상을 확대하고 실제 필요한 서비스에 초점을 둬 사업을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의료기관 확보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우였다. 그는 “의정 갈등이 불거지면서 사업에 함께할 의료기관 확보가 어려울 수 있겠다는 걱정이 많았다”면서 “다행히 지역 의료기관과 의료단체에서 농촌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줬다”고 전했다. 왕진버스는 공직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정책이 됐다. 홍 사무관은 “농촌 왕진버스는 수혜자(주민)와 공급자(의료진) 모두 만족하는 사업이라고 얘기해 준 어느 의료진의 격려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왕진버스의 진화는 진행형이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67% 늘어난 15만명을 찾아가 양한방 의료와 검안, 구강 검사 등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올해부터 노인 수요가 높은 골다공증과 치매 검진, 근골격계 질환 관리를 더했고 거동이 어려운 이들을 위한 방문 진료도 시범 운영한다. 홍 사무관은 “주민 목소리에 귀기울여 현장 만족도가 높은 정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무대 밖에서도 하모니 만들길”...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선보인 연주

    “무대 밖에서도 하모니 만들길”...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선보인 연주

    지난 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지휘자가 팔을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자 지휘봉에 맞춰 격정적인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졌다. 이어진 지휘자의 고갯짓에 트롬본과 호른 소리가 얹어졌다. ‘빠~밤 빠~밤 빠밤빠밤.’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멜로디가 대극장 안을 가득 메웠고,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오는 20일 ‘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장애인 40명과 비장애인 40명이 협연한 ‘제22회 사랑의 음악회’에서 지휘를 맡은 오승우(40)씨는 연주 내내 단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지휘봉을 움직였다. 공연이 끝난 이후 오씨는 “80명이 빈틈없이 하나의 소리를 내는 그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며 “‘장애인은 도와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연주자로만 대했더니 훌륭한 하모니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후 독일에서 지휘 공부를 하던 오씨는 2022년 7월 장애인 연주단 ‘나눔챔버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게 됐다. 오케스트라 전문 지휘자로 벌써 3년 가까이 활동했지만 첫 연습 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오씨는 “단원들이 지휘봉조차 쳐다보지 않아 굉장히 당황했다”면서 “모두 악보만 바라보며 연주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발달장애가 있는 이들은 상대의 눈을 쳐다보는 걸 힘들어해 그동안 몸으로 터득한 박자에 집중하고 악보만 보며 연주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합주를 위해 연주자들이 지휘자와 지휘봉을 봐야 하는 건 장애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씨는 단원 모두에게 “내 눈과 지휘봉을 보고 여기 맞춰서 연주하라”고 단호하게 말했고, 3년이 지난 지금은 단원 모두가 오씨를 1분도 놓치지 않고 쳐다본다. 비장애인 연주자들에게도 “(장애인에게) 맞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주 소리를 따라가지 말고 원래 박자에 맞춰 달라”고 강조한다. 오씨는 “제 손끝과 눈빛에 따라 연주를 이어 가는 장애인들은 비장애인과 다를 게 하나 없는 똑같이 훌륭한 연주자”라며 “무대 밖 세상에서도 이런 하모니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 김진경 경기도의회 의장,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 참석...기억하고, 행동하겠습니다

    김진경 경기도의회 의장,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 참석...기억하고, 행동하겠습니다

    김진경 경기도의회 의장(더민주, 시흥3)은 16일 오후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1주기 기억식에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날 기억식은 4.16재단과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피해자 가족 및 일반 시민, 우원식 국회의장과 이민근 안산시장 등 2천여 명이 참석했다. 김 의장은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묵념하며 진정한 애도의 뜻을 전했다. 김진경 의장은 방명록을 통해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기억하고, 행동하겠습니다”라는 추모의 글을 남겼다. 김 의장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생명, 특히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희생은 우리 모두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아픔”이라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각계의 노력이 끝까지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경기도의회는 앞으로 도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각종 의정 활동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 [마감 후] 개헌할 결심, 직을 걸 각오 섰습니까

    [마감 후] 개헌할 결심, 직을 걸 각오 섰습니까

    12·3 비상계엄의 밤을 기억한다. 그날 밤 11시 30분쯤 서울시청 광장엔 싸라기눈이 내렸다. 사대문 안 주요 언론사 사옥에 장갑차가 깔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와 우리 팀원들은 시청 광장과 광화문을 뛰어다녔다. 군인은 없었다. 장갑차도 없었다. 기이하고 두려운 밤이었다. 그때 시민들은 국회에서 군경과 대치했다. 잠들지 못한 다른 시민들은 분노와 불안 속에 뉴스를 확인했다.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대통령의 실정이 공화국의 위기를 불렀다. 비상계엄 이후 탄핵이냐 아니냐, 파면이냐 아니냐를 두고 나라가 두 쪽이 났다. 이 분열과 갈등을 봉합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미국발 관세전쟁이 발발했는데 우리나라에는 통수권자가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 국정은 사실상 마비됐다. 의대 정원 증원, 밸류업, 규제개혁 등의 국정과제는 줄줄이 멈춰 서거나 사실상 백지화됐다. 이런 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대통령의 힘을 빼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행정권, 군 통수권, 법률 거부권, 사면권을 다 갖고 있다. 레임덕 전까지 대통령은 곧 여당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는 없다. 개헌해야 한다. 분권형 대통령제, 양원제, 중대선거구제 등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할 방법은 많다. 이미 각계 전문가들이 이 주제를 두고 충분히 논의했다. 개헌은 차기 대통령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6공화국 거의 모든 대통령의 끝은 좋지 않았다. 임기 말 지지율 하락과 레임덕을 피한 대통령은 없었다. 대통령 8명 가운데 3명이 퇴임 후 비리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1명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3명이 탄핵소추를 당했고 2명이 파면됐다. 비극은 대통령 개인의 인품, 역량과 상관없이 찾아왔다. 현행 대통령제가 비극의 씨앗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국민들도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개헌에 찬성하는 여론이 70%에 육박한다. 이번 비상계엄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개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비록 철회했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일 때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해야 한다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과 후가 달랐기 때문이다. 후보 시절 개헌을 약속했던 후보 모두 대통령이 된 뒤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지키지 못했다. 다음 대통령이 그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대권을 잡기 전에 개헌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6·3 조기 대선과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하기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차선은 후보자들이 개헌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선 직후 몇 개월 내에 원포인트 개헌으로라도 대통령 권력을 조정하기로 못을 박아야 한다. ‘안 되면 말고’ 식의 가벼운 약속은 안 된다. 개헌 안 하면 직을 내놓겠다는 각오가, 확언이 필요하다. 이번이 아니면 기약이 없다. 강신 사회2부 기자(차장급)
  • “문인 1000명 인장 어렵게 모았지만… 내 것이라고 생각 안 해요”[서동철의 노변정담]

    “문인 1000명 인장 어렵게 모았지만… 내 것이라고 생각 안 해요”[서동철의 노변정담]

    이재인 관장의 본업은 소설가베트남전 1년 참전 후 전쟁소설 구상1989년에 쓴 ‘악어새’ 10만부 히트연좌제 넘어 참전… 집필 약속 지켜서울신문·사상계 읽고 ‘문인의 꿈’오영수 권유로 경기대 국문과 입학장준하의 사상계社에서 알바 기회전국 대학생 백일장 詩부문서 당선서울·충북에서… ‘연설문의 달인’예산고 교사 부임… 어릴 때 꿈 이뤄충북교육위서 교육감 연설문 쓰고당시 문교부 장관 연설문까지 작성유치진·서정주… 인장 1200과 소장인장 찍힌 책 인지는 ‘정품 보증서’문인 인장 공간 생긴다면 기증하고향토문화 좀더 발전하도록 힘쓸 것 충남 예산의 한국문인인장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새삼스럽게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벗어나 새로 뚫린 평택~부여 고속도로를 타고 예산 땅에 접어드니 추사고택 나들목을 알리는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의 옛집을 가리키는 표현이 고속도로 나들목 이름이 될 줄을 추사 김정희 선생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물관으로 가려면 예산예당호나들목으로 나가야 한다. 강태공들에게 꿈의 낚시터인 예당저수지 얕은 여울목에는 새로 나는 물풀을 헤치며 백로며 왜가리가 그야말로 떼를 지어 먹이를 찾고 있었으니 눈이 씻기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멀지 않은 곳에 한때 멸종됐던 황새를 번식해 보존하는 예산황새공원이 있다.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된 고장이라는 것을 새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나 보다. 예당저수지가 있는 대흥면을 벗어나 광시면에 접어들면 한우마을이 나타난다. 작은 동네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고깃집이 자리잡을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마을을 찾는 손님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겠다. 이재인 관장은 광시파출소 앞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보령·청양으로 가는 길을 따라 달리다 오른쪽으로 접어든다. 좁은 길이지만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그런데 이 관장을 따르지 않더라도 박물관은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한우마을부터 10개가 넘는 표지판이 갈림길마다 방향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관장에게 “지역에서 대접을 잘 받으시는 것 같다”고 했더니 “박물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공간을 고향분들이 존중해 주시고 있는 것 같아 고마울 뿐”이라며 웃었다. 이 관장의 본업은 소설가다. 그는 1985년 ‘예술계’ 신인상에 단편소설 ‘금이빨과 금지구역’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같은 해 교육신보사의 2000만원 현상 공모전에서도 최우수상을 받았다. 조금 나이가 있는 세대라면 그가 1989년 발표하고 10만부가 팔려 나간 장편소설 ‘악어새’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에게 “동네에서는 선생님을 어떻게 부르느냐”고 하니 “여기선 교수님”이란다. 그는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소설론을 가르치다 정년퇴임했다. “‘악어새’를 발표할 당시는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은 무엇이든 성공할 때였어요.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원규의 ‘훈장과 굴레’, 이상문의 ‘황색인’,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안정효의 ‘하얀전쟁’이 그렇지요. 그런데 ‘악어새’가 다른 것은 한국인의 시각이 아닌 베트남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전쟁을 그린 겁니다.” 그는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 군에 입대했다. 2학기 등록금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논산에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육군통신기지창에서 10개월 남짓 졸병 생활을 하던 중 베트남전 모병 소식이 들려왔다. 5개월 동안의 전투 훈련을 마치고 군수지원단에서 일하며 베트남의 이런저런 사정에 관심을 가졌다. 1년 동안의 베트남전 참전을 마치고 돌아와 제대할 때까지 전쟁 소설을 구상했다. 베트남에서 모아 고향에 보낸 ‘피 같은’ 전투수당은 그동안 농토와 송아지로 바뀌어 있었다. “베트남에 가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연좌제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큰아버지가 좌익 활동을 했는데 6·25 때는 장택상씨 집을 차지해 살았을 만큼 거물급이었다고 해요. 그러니 베트남전에 지원해도 보내 주지 않는 겁니다. 부대 방첩대장을 찾아가 “국문과를 다니다 입대한 소설가 지망생인데 베트남전에 참전해 꼭 작품으로 쓰고 싶다”고 간청했어요. 그랬더니 한참 듣고 있던 방첩대장이 부관에게 “저 자식 베트남에 보내 버려” 하는 것이었어요. ‘악어새’는 그 약속을 지킨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지금도 열심히 작품을 생산한다. 그동안 장편소설만 10권을 냈다. 하지만 소수의 작가만 팔리는 시대 ‘악어새’ 같은 반응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근작을 읽고 박물관으로 찾아오는 독자가 있다고 한다. 그때마다 작가는 ‘영원한 스타’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죽었다고들 하는데 작가와 독자가 이렇게 만나는 걸 보면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어떻게 문학을 하게 되셨냐”고 하니 “이야기가 긴데…” 하더니 보따리를 끌러 놓기 시작한다. “국민학교, 요즘 말로 초등학교에 열 살이 되어서야 들어갔어요. 이장댁에 배달된 서울신문이며 서울신문 어린이판을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읽었습니다. ‘학원’이나 ‘현대문학’도 닥치는 대로 찾아봤고 나이가 남들보다 많기는 했지만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이가 ‘사상계’에 실린 문학작품도 탐독했어요. 그런데 집에서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권했지요. 머슴을 살면 한 해 쌀이 두 가마이니 3년 여섯 가마면 논 세 마지기를 사서 초가삼간을 지을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머슴을 살기에는 꿈이 너무 자라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예산군 경찰의 날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먹방’의 대명사인 예산 출신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의 할아버지가 당시 예산경찰서장이었다. 서울신문과 경향신문 독자란에 투고한 글이 실려 자신의 이름이 인쇄돼 나오던 시절이다. 그 언저리 이재인의 꿈은 문인이 돼 예산이나 홍성에서 중학교 교사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6세 문학청년은 결국 가출해 서울에 왔다. 종로6가 어문각 언저리에서 구두닦이를 했는데 활자로만 뵈던 ‘갯마을’의 작가 오영수를 만나게 된다. 어디에 가면 누구를 만날 수 있는지쯤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오 선생의 구두를 닦으며 “작가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했다. 그는 “부탁을 하면서 구두 닦은 값은 그대로 받았으니 아직도 미안하다”며 웃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지나간 문예지를 헐값에 한 무더기 사서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강의록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도 공부했습니다. 이듬해 봄 오영수 선생으로부터 우편엽서를 받았어요. 공부하고 싶으면 올라오라는 겁니다. 경기실업초급대학이 경기대학교로 승격한 첫해 입학할 수 있었어요. 광시 양조장집 여주인이던 서창남 시인의 도움도 컸습니다. 서 시인은 오영수 선생에게 ‘시골서 공부를 열심히 시킬 테니 길을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지요.” 대학에 들어간 그는 존경하던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언론인이 되고 싶은데 사상계에서 근무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장 선생은 엽서로 답장을 보내 왔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졸업하면 오라”는 것이었다. 사상계사로 인사차 찾아갔더니 정기 구독자에게 부칠 봉투에 주소를 쓰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었다. 사상계 알바생이 된 이 관장은 경기대 학보사 기자로 특채됐다. 이 관장은 글 쓰는 일을 시작하며 인생이 비로소 흐르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고 했다. 경기대 시절 양주동, 박남수, 이형기, 홍기삼, 김광식, 이형기 선생 등 문단의 대표적 존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그는 이 무렵 영남대가 주최한 전국 대학생 백일장 시 부문에서 당선되면서 더욱 자신이 붙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 몇 군데를 거쳐 예산고 교사로 부임했다. 어린 시절 꿈이 이뤄진 것이다. 백종원 대표 집안에서 설립한 학교다. 부천 소명여고, 충북 영동중, 미원고, 충주상고에도 재직한다. 이 즈음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아 충북도 교육위원회에서 교육감 연설문을 작성하게 된다. ‘연설문의 달인’이라는 소문이 서울까지 퍼지면서 당시 문교부 공보관실 교육연구사로 장관 연설문을 썼다. “청주 시절이었어요. 그때 고교 교사 보충수업 수당이 시간당 700원이었습니다. 집에서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어느 날 가방 하나를 물고 들어왔어요. 현금 500만원과 월급봉투가 들어 있었으니 놀랐지요. 봉투에 적힌 대로 도자기 회사에 전화를 걸어 주인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도자기 회사 임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만나자고 하는 겁니다. 그분 도움으로 중국·러시아·중앙아시아 동포를 현지 조사하며 석사 학위를 마칠 수 있었어요. 도자기 회사가 옌볜 지린대에 거액을 지원하면서 그곳에서 박사 학위도 할 수 있었고요. 돌이켜 보면 제 길은 거기서부터 열렸는가 봅니다.” 지금도 박물관 마당의 강아지를 끔찍하게 챙기는 이유일 것이다. 문인인장박물관은 고향으로 돌아온 2000년 개관했다. 인장박물관은 1000명 안팎 문인의 1200과(顆) 남짓한 인장을 소장하고 있다. 그에게 “문인의 도장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요즘 책은 대개 인지를 생략하지만 과거엔 반드시 작가의 인장이 찍힌 인지가 붙어 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인지는 저작권 증지라는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어요. 책의 말미에 붙인 인지는 작가와 출판사의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인지는 낙관처럼 ‘정품 보증서’를 뜻한다는 설명이다. 박물관 소장품은 유치진, 박종화,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오영수, 조연현, 백철 등 우리가 아는 20세기 문인의 인장을 망라한다. 대부분은 직접 건네받았고 작고한 문인은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았다. 박물관을 찾아오는 문인에게는 입장료 대신 인장을 달라고 했다. 박물관은 봄가을로 명사 초청 강연회를 가졌는데 “사례금 영수증에 인장이 필요하다”며 자연스럽게 ‘기증’을 유도하기도 했다. “어렵게 모았지만 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문인의 인장을 빛나게 하는 공간이 생긴다면 흔쾌히 기증하려 마음먹고 있습니다. 앞으로 국립한국문학관이 개관해 자리가 만들어진다면 함께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지요.” 인장박물관에는 충남문학관이라는 간판도 걸려 있다. 지역 문학유산을 좀더 부각시키겠다는 취지다. ‘근대예산풍류선’과 ‘홍주 역사 인물기행’을 펴내며 향토문화 발굴사업에서 힘을 기울인다. 박물관은 항상 문을 열어 놓고 있지는 않지만 이 관장이 자리를 지키는 낮에는 안내판에 적힌 대로 전화를 걸면 관람할 수 있다. “우리 박물관이 자리잡고 주변에 모두 9개의 박물관이 들어섰어요. 고향에 돌아왔으니 지역문화가 좀더 발전할 수 있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읽고 싶은 책이 너무나 많아요. 아직은 건강에 자신이 있는 만큼 이렇게 허송세월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 이재인 박물관장은 1945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중·고교 국어교사와 문교부 공보관실 교육연구사로 일했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이 대학 한국문화연구소장을 지냈다. 월간문학상, 한국평론가협회상, 한국박물관인상, 백제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악어새’를 비롯한 10편의 장편소설과 ‘오영수 문학 연구’ 등 연구서를 펴냈다. 현재 한국문학관협회와 한국박물관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외국인 노동자들은 소모품이 아닙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소모품이 아닙니다”

    8년째 외국인 마을변호사 활동“처음엔 여성이 제대로 하겠어 불신그들 입장 이해하니 마음을 열어” “중동이나 아프리카처럼 여성에 대한 편견이 극심한 문화권에서 온 외국인은 처음에 저를 불신하는 경우가 많아요. ‘여성 변호사가 제대로 일이나 하겠어?’ 하는 눈으로 보죠. 그럴 땐 그냥 묵묵히 일해요. 승소율이 5% 미만인 난민심사 관련 소송에서 에티오피아 난민을 인정받게 해줬을 때, 위장 결혼으로 의심받아 비자가 안 나왔던 외국인의 진정성을 입증해 가족으로 정착하게 해줬을 때가 기억나요. 좋은 결과를 끌어내면 ‘미안했다’며 다른 외국인에게 저를 추천하세요. 그때가 가장 보람차죠.” 법무부가 운영하는 ‘외국인 마을변호사’로 일하는 김예진(40) 법률사무소 K 변호사는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외국인 변론을 맡으며 느낀 소회를 이렇게 설명했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1기 출신인 김 변호사는 한국외국어대에서 영어 통번역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이주·비자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 이민출입국변호사회 부회장, 국제인권특별위원 등도 맡고 있다. 외국인 마을변호사는 외국인이 민·형사, 가사, 행정 사건 등에 관한 법률 자문이 필요할 때 법무부로부터 소개받아 무료로 이들을 돕는 제도다. 김 변호사는 2017년부터 이 업무를 맡아 매년 10여건씩 무료 상담을 한다. “외국인 의뢰인은 관공서에서 서류를 떼는 것도 도움을 구할 때가 있어요. 물론 ‘변호사가 이런 일도 해줘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들에겐 낯설고 생소한 일이라 지원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도왔더니 마음을 열고 다가오더라고요.” 김 변호사는 “외국인을 저렴한 인건비 때문에 잠깐 일 시켰다가 내보내는 소모품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외국인 의뢰인을 변호하며 내 할 일을 하다 보면 ‘나비 효과’처럼 우리 모두가 외국인을 포용하는 진정한 사회통합도 이뤄질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 “힘 닿는 데까지… 기술자는 은퇴 않죠”

    “힘 닿는 데까지… 기술자는 은퇴 않죠”

    “기술자는 은퇴하지 않습니다. 몸이 허락하는 한 그저 끝까지 하는 겁니다.” 60년 넘게 바늘과 실을 놓지 않은 한 의상 장인이 또다시 경연 무대에 섰다. 김재곤(사진·77)씨는 지난 9일 열린 제44회 광주기능경기대회 의상디자인 부문에 최고령 참가자로 출전했다. 어느덧 20년째 도전이다. 김씨가 처음 바늘을 든 건 1966년. 전남 화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열일곱 살에 서울 충무로의 한 양복점에 취업하며 재단과 봉제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처음엔 그저 생계를 위해 시작했어요. 그런데 실과 천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놨죠.”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광주에 ‘신진라사’라는 양복점을 차렸다. 정교하고 꼼꼼한 바느질 솜씨가 입소문을 타면서 가게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그땐 모든 과정을 손으로 했습니다. 재단도, 박음질도.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완성도는 지금보다 훨씬 뛰어났죠.” 그는 여전히 손으로 옷을 만들던 시절의 기억과 기술을 간직하고 있다. 그 감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도 바늘을 든다. 2006년엔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을 맡았지만 2010년엔 다시 참가자로 나섰다. 그해 은상을 수상한 그는 2017년에도 은상, 2019년엔 동상을 받았다. 어느새 그는 의상기능장 사이에서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린다. “대회에 나가는 건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내 기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을 뿐이에요.” 양복 부문이 대회에서 사라지자 그는 망설임 없이 양장을 새로 배웠고 종목도 의상디자인 부문으로 바꿨다. 김씨는 중단했던 학업은 검정고시로 다시 시작했고, 전남대 경영자과정과 한국기술교육대학원도 수료했다. 양복기능사, 양장기능사, 패션디자인산업기사 자격증도 차례로 취득했다. “해남의 80대 할머니도 여전히 재봉틀을 돌립니다. 일본엔 103세 이발사도 있고요. 저도 그분들처럼 힘이 닿는 데까지 바늘을 놓지 않을 겁니다.” 내년에도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하겠다는 김씨는 오늘도 조용히 바늘을 든다.
  • 영광 ‘단오제’ 500년 이어져 온 흥겨움

    영광 ‘단오제’ 500년 이어져 온 흥겨움

    2025 영광법성포단오제가 다음달 29일부터 6월 1일까지 ‘빛과 바람이 기억하는 500년의 흥겨움’이란 주제로 법성포단오제 전수교육관과 법성포 뉴타운 일원에서 열린다. 영광법성포단오제는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오를 전후로 개최되는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행사이다. 2012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잡았다. 법성포단오제는 민간 주도의 나눔과 어울림 한마당이다. 대체로 다른 지역의 단오제가 어울림만 있고 나눔의 장이 없는 데 비해 법성포 단오제는 나눔의 장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단오절이 되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귀천의 차이도 없이 서로 정을 나눠 먹었다. 그 전통을 계승해 지금도 제전행사 음식 나눔 등 흥으로 어울리고 정을 나누는 축제를 치르고 있다. 특히 올해는 다음달 2일 난장트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축제의 서막을 열며, 24일부터 25일까지는 ‘숲쟁이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열려 국악의 멋과 흥을 체험할 수 있다. 2025년 주요 공연으로는 다음달 29일 오후 7시 30분 ‘천년의 영광, 오백년의 흥’ 글로리 콘서트와 다음달 30일 오후 7시 단오축하공연 ‘달빛길 따라 단오길 따라~’, 다음달 31일 오후 7시 ‘날GO! 뛰GO! 우리가 별☆이다’ 공연과 7시 30분 올해 처음 선보일 ‘단오낙화놀이’가 펼쳐진다. 6월 1일 오후 7시 30분에는 폐막공연으로 ‘꽃비 내리는 단오 밤나들이’ 등이 열려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 군산 청보리밭 초록 물결 속으로 풍덩

    군산 청보리밭 초록 물결 속으로 풍덩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청보리밭이 상춘객들의 발길을 기다린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전북 ‘군산 꽁당보리축제’는 미성동 보리밭 일원에서 다양한 체험과 즐길거리로 특별한 잔치를 펼칠 전망이다. ‘군산 꽁당보리축제’는 보릿고개의 아픈 추억을 건강과 힐링 체험의 장으로 승화시킨 지역 행사다. 군산시는 당시 전국 생산량의 50%에 육박했던 흰찰쌀보리를 알리고자 지리적 표시 제49호로 등록하고 판로 확대를 위해 미성 지역 농민 중심의 축제를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군산 꽁당보리축제’다. 소규모 축제로 시작된 이 행사는 군산의 대표 농업 축제로 자리매김하며 어느덧 스무 해를 맞았다. 올해 ‘군산 꽁당보리축제’는 오는 24~27일 미성동 행정복지센터 일원에서 열린다. 주제는 ‘꽁당보리 20주년, 두근두근 스무 살’이다. 축제는 볼거리, 먹거리 등 여섯 개 마당, 50여개의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세부 행사로는 개·폐막식, 난타, 노래자랑 등 시민 참여 무대, 공연 마당, 농특산물 및 가공 상품 전시 마당, 농특산물·짬뽕라면·수제 맥주 장터, 그린 카페·보리밭 힐링 쉼터 마당, 전통 놀이 체험 마당, 보리밭 사잇길 포토존 등이 마련돼 있다. 보릿고개를 기억하는 어른들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는 농촌을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군산 꽁당보리축제’. 푸른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며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농촌 체험은 최고의 가족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대구 찾은 한동훈 “계엄 막은 후보 나 뿐…비토하는 사람 설득할 것”

    대구 찾은 한동훈 “계엄 막은 후보 나 뿐…비토하는 사람 설득할 것”

    제21대 대선 출마를 선언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16일 대구를 찾아 “계엄을 막은 후보는 나 뿐”이라고 밝혔다. 한 전 대표는 이날 오후 대구 수성구 한 식당에서 대구 청년 기업인 경청회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이번 대선은 계엄에 관한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선거이며, 이재명 전 대표와 민주당은 (국민의힘을) 계엄 옹호 세력이라고 공격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보수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후보는 제가 유일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경선 예비후보 등록 이후 첫 번째 공식 일정으로 대구를 찾은 데 대해 “처음이 어디냐가 중요했다”며 “우리에게 대구는 승리의 기억이고 적에게 이 땅을 내주지 않고 끝까지 지켰던 애국심의 상징”이라고 답했다. 한 전 대표는 ‘배신자 프레임’ 등 보수 지지층 일각의 부정적 여론에 대해서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저를 비토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그분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만나 왜 제가(후보가) 돼야 하는지 설명하겠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연대 가능성을 묻는 말에는 “당연히 많은 분, 좋은 분들과 만나고 싶다”며 “오 시장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정치 해온 분이고 저하고 방향이 많이 닿아 있어 함께 좋은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보수 빅텐트론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경선에 집중할 때이고, 연대 문제는 그다음”이라며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면 대의가 흩어진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서 경선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고 부연했다. 한 전 대표는 앞서 대구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사에 마련된 기억공간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한 전 대표는 “2003년 2월 18일은 우리 대구시민들에게 잊지 못할 날”이라며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국민들은 잊으셨겠지만, 대구시민들은 지하철 참사를 잘 기억하고 계시고, 그 이후 철도안전법이 새로 만들어지는 등 대한민국 안전 수준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 “기술자는 은퇴하지 않습니다. 나이는 숫자일 뿐”

    “기술자는 은퇴하지 않습니다. 나이는 숫자일 뿐”

    “몸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가는 겁니다.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입니다.” 60년 넘게 바늘과 실을 잡아온 의상 장인이 올해도 다시 무대에 섰다. 지난 9일 제44회 광주기능경기대회 의상디자인 부문에 출전한 김재곤 씨(77). 그는 올해로 이 대회에 20년째 도전 한 셈이다. “기술자는 은퇴하지 않는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세월을 비껴간 손끝은 여전히 능숙하고, 그가 표현하는 기술은 이제 하나의 예술이 됐다. 김 씨가 처음 바느질을 한 것은 1966년. 열일곱 살 전남 화순의 소년은 서울 충무로의 양복점에 취업하면서 옷 만들기를 시작했다. 생계를 위한 일이었지만, 그에게 실과 천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었다. 인생을 바꾸는 매개체였다. 다섯 해 뒤, 광주로 돌아와 ‘신진라사’라는 이름의 양복점을 열었다. “정확하고 꼼꼼하게 만들다 보니, 손님들이 먼저 알고 다시 찾아오곤 했죠.” 당시를 회상하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옷 만들기를 넘어선다. 손끝으로 나타난 섬세한 기술, 그 자체가 예술이다. “그 시절엔 모든 공정이 손으로 이뤄졌어요. 재단도, 박음질도 모두 손끝에서 나오는 기술이었죠.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완성도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손끝에서 옷이 만들어지던 시대를 그는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술을 지켜내고 싶어 했다. 세월이 흘러 2006년, 그는 광주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으로 승격(?)했지만, 2010년에는 다시 선수로 참가해 은상을 받았다. “직접 평가받는 것이 더 매력적이더군요.” 이후 2017년 은상, 2019년 동상을 받으며 꾸준히 입상하자 전국대회에서 그의 존재감이 점차 드러났다. 특히 그가 제작한 ‘여성용 나폴레옹 재킷’은 “정교한 디테일이 돋보인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에게 전국기능경기대회는 단순한 경쟁의 장이 아니다. “내 기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 출전한다” 고 했다. 양복 부문이 폐지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양장 기술을 새로 익히고, 의상디자인 부문으로 분야를 바꿔 도전했다. “두렵기도 했지만, 기술자에게 도전은 꼭 필요합니다. 배움을 멈추면 손끝도 멈추게 되니까요.” 그렇듯 그의 삶은 배움의 연속이었다.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뒤늦게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전남대 경영자과정과 한국기술교육대학원까지 수료했다. 양복기능사부터 양장기능사, 패션디자인산업기사까지 자격증도 하나하나 쌓아 올렸다. 광주 연세직업학교에서 강의하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기술은 나눌수록 깊어집니다. 누군가는 가르쳐야 이 길이 이어지죠. 그게 제 몫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그는 ‘93세 한국인 디자이너가 미국에서 현역으로 활동 중’이라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띄었다고 한다. “해남의 80대 할머니가 아직도 재봉틀을 돌리고, 일본에서는 103세 이발사도 있더군요. 저도 그분들처럼, 힘닿는 데까지 바늘을 놓지 않을 겁니다.” 내년에도 기능경기대회 출전하겠다고 말하는 그의 환한 얼굴에는 젊은이 같은 자신감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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