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기억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인권위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 공직자윤리법
    2025-12-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0,496
  • 4개국어로 규탄한 ‘반민주적 폭거’…‘4·19’까지 소환한 대학들

    4개국어로 규탄한 ‘반민주적 폭거’…‘4·19’까지 소환한 대학들

    전국의 각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주축이 돼 윤석열 대통령의 ‘6시간 계엄’을 규탄하는 성명문이 쏟아지고 있다. 각 대학의 학풍과 문화, 역사를 담아낸 성명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확산되며 지지와 호응을 얻고 있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지난 4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규탄한다”는 제목의 성명문을 내고 “비민주적 비상계엄이 우리의 학문적 전당마저 위협하고 짓밟으려 했다”고 비판했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포고령으로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으로 활기에 가득 찼어야 할 우리의 전당을 존중하지 않았다”면서 “진리의 횃불에 어둠이 드리우는 것을 좌시하지 않으리라”라고 강조했다. 연세대 총학생회도 같은 날 성명문을 내고 “민주사회에서 가장 용인될 수 없는 행위는 일체의 폭력을 동원해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협하는 것”이라며 비상계엄 선포를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배신행위”라고 규탄했다. 고려대 총학생회도 같은 날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하고자 한 반국가세력은 누구인가”라고 반문하며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성명문을 통해 각 대학의 학풍과 문화,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서울대는 교훈인 라틴어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과 정장(正章)에 새겨진 횟불 등을 인용해 “진리의 횃불”, “겨레의 빛” 등의 표현을 담았다. 조선시대의 성균관을 계승한 성균관대는 “선인들의 인의예지(仁義禮智) 정신”을 강조하며 “상소로서 뜻을 전했던 정신을 본받아 성균인이 읍소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외대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외국어대학교라는 특성을 살려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 등 4개국어로 성명문을 작성했다. 한국외대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세계는 대한민국을 지켜보고 있다”는 제목의 성명문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지향하는 모든 이와 함께 윤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죄와 진상 규명을 요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 운동의 역사도 성명문에 담겼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1987년 6월 교정과 광장에서 울려퍼진 학생들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강조했다.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6월항쟁에 나섰던 학생들과 교수들을 언급함은 물론, “이화인의 힘으로 최경희 전 총장을 사퇴시키고 박근혜 탄핵의 신호탄을 만들었다”면서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연결됐던 ‘미래라이프대 신설 반대 시위’도 언급했다. 고려대 총학생회는 1960년 4·19 혁명 당시 학생들이 작성한 ‘4·18 고대궐기 선언문’을 오마주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고려대 총학생회의 성명문은 “친애하는 고대학생제군,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로 시작해 “압제를 불살라라”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끝맺는다. 전남대 총학생회와 전북대 총학생회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과 당시 희생당한 선배들 및 시민들을 강조했으며, 제주대 총학생회는 제주4·3사건을 언급하며 “부당한 공권력으로 인한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실탄 지급? 진짜 몰라” 前계엄사령관, ‘무장 계엄군 투입’ 명령 안했다(영상)

    “실탄 지급? 진짜 몰라” 前계엄사령관, ‘무장 계엄군 투입’ 명령 안했다(영상)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 계엄사령관을 맡았던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5일 국회 투입 병력에 실탄이 지급됐는지 여부와 관련해 “모른다”고 답했다. 박 총장은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자리에서 안규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를 난입한 계엄군한테 실탄을 지급했느냐”라고 질문하자 “진짜 모른다. 투입한 것도 몰랐기 때문에…”라고 답했다. 이와 관련해 김선호 국방부 차관은 “제가 특전사령관한테 확인했는데 실탄 지급은 없었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박 총장은 국회 병력 투입은 자신이 지시하지 않았고, 투입 여부도 처음에는 몰랐다고 말했다. 조국 조국신당 의원이 ‘국회에 군부대 투입할 때 명령했느냐’고 묻자 박 총장은 “군부대 투입을 명령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누구의 명령으로 (국회에) 헬기가 들어왔느냐’는 물음에는 “그걸 제가 정확하게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에 조 의원은 김선호 국방 차관에게 다시 ‘(국회 군부대 투입을) 차관이 지시하셨느냐’고 물었고, 김 차관은 “병력에 대한 투입 지시는 (김용현) 장관께서 하셨다”라고 답했다. 박 총장은 이후 ‘계엄사령관 지시 없이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하고 유리창 창문을 깨고 계엄군들이 총을 휴대하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에도 “그 상황을 제가 인지를 못 했다”고 말했다. 안 의원이 “그게 말이 되느냐”라고 따져 묻자 “제가 명령, 통제를 안 했기 때문에 인지를 못 한 것”이라고 했다. ‘(국회) 지도부 체포조는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이냐’는 안 의원의 추가 질의에는 “그런 것을 들은 기억이 없다”며 체포조 편성은 사실이 아니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박 총장은 추미애 민주당 의원이 ‘(계엄령의) 목표가 국회라는 걸 언제 알았느냐’고 묻자 “몰랐다. 화상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아 국회에 경찰이 많이…”라고 답했다. 한편 국회는 국방부가 3일 밤 11시 48분부터 다음 날 새벽 1시 18분까지 헬기를 24차례 띄우며 무장한 계엄군 230여명을 국회 경내로 진입시켰다고 밝혔다. 오전 1시 40분에도 계엄군 50여명이 투입됐다.
  • 복지부 장관, ‘계엄 위헌인가’ 야당 질문에 “동의한다”

    복지부 장관, ‘계엄 위헌인가’ 야당 질문에 “동의한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관련해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 장관은 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당시 국무회의 참석에 대한 조국혁신당 김선민 의원의 질의에 “(3일 밤) 10시 17분쯤 국무회의 끝에 도착해 10시 45분쯤 회의실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는 “계엄 선포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전했고, ‘계엄이 위법이고 위헌이라는 데 동의하느냐’는 김 의원의 거듭된 질문에 “동의한다”고 재확인했다. 회의 당시 ‘몸을 던져 막은 장관들이 있었느냐’는 질문엔 “너무 놀랐고 경황이 없었다. 어떤 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조 장관은 지난 4일 새벽 계엄 해제 국무회의엔 불참했는데 그 경위에 대해선 “새벽 2시쯤 문자가 왔는데 4시쯤 알았다”며 “알았다면 당연히 갔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조 장관은 또 ‘전공의 미복귀시 처단’ 내용을 담은 계엄사령부의 포고령에 대해선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대화와 설득, 착실한 의료개혁을 통해 복귀를 유도한다는 정부 방침에 배치되고, 그 표현이 매우 거칠고 과격했다”며 “(포고령) 6개 항목 중 유일하게 특정 직역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조규홍 복지 장관 “계엄 선포 동의 안했다…포고령 정부 방침과 배치”

    조규홍 복지 장관 “계엄 선포 동의 안했다…포고령 정부 방침과 배치”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전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계엄 선포에 “동의하지 않았다”며 계엄 포고령에 포함된 ‘전공의 처단’ 문구에 대해 “정부 방침과 완전히 배치된다”고 말했다. 조 장관은 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해 김선민 조국혁신당 의원의 당시 국무회의 참석 관련 질의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국무회의 참석 시간과 관련해 “(3일 밤) 10시 17분쯤 국무회의 말미에 도착해 10시 45분께 회의실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어 ‘계엄이 위법이고 위헌이라는 데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동의한다”고 했다. 회의 당시 ‘몸을 던져 막은 장관들이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너무 놀랐고 경황이 없었다. 어떤 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4일 새벽 계엄 해제 국무회의에 불참한 이유에 대해서는 “새벽 2시쯤 문자가 왔는데 4시쯤 알았다”며 ”알았다면 당연히 갔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계엄 직후 발동된 포고령에 ‘전공의 처단’ 관련 문구가 들어간 것에 대해선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며 “포고령에 들어간 내용은 정부 방침과 완전히 배치된다”고 했다. 그는 “(포고령) 6개 항목 중 유일하게 특정 직역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 계엄사령관 박안수 “계엄 선포 대통령 발표 보고 알아”

    계엄사령관 박안수 “계엄 선포 대통령 발표 보고 알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직후 계엄사령관을 맡았던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5일 윤 대통령의 담화 발표를 보고 계엄이 선포된 사실을 알았다고 밝혔다. 박 총장은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자리에서 ‘계엄 사실을 언제 알았냐’는 조국 조국혁신당 의원의 질의에 이같이 답한 뒤 “(대통령 계엄 담화 후) 바로 이어진 전군지휘관회의에서 명확히 인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누가 연락했느냐’는 조 의원의 추가 질의에 “합동참모본부 지휘통제실에서 국방장관이 (주재한) 지휘관 회의 후 계엄사령관은 육군총장 박안수라고 해서 그때 정확히 알았다”고 답했다. 박 총장은 자신의 명의로 발표된 계엄 포고령에 대해서는 당시 김용현 국방장관에게 법률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김 장관이 법률 검토를 마쳤다고 해서 발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회 병력 투입은 자신이 지시하지 않았고 투입 여부도 처음에는 몰랐다고 말했다. 박 총장은 ‘국회 난입한 계엄군에 실탄이 지급됐느냐’는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진짜 모른다. 투입한 것도 몰랐기 때문에…”라고 답했다. ‘(국회) 지도부 체포조는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이냐’는 안 의원의 추가 질의에 “그런 것을 들은 기억이 없다”고 답변했다.
  • 美국무부 부장관, 尹 계엄 선포에 “불법적, 심한 오판”

    美국무부 부장관, 尹 계엄 선포에 “불법적, 심한 오판”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4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의 ‘6시간 계엄’에 대해 “불법적”이라며 윤 대통령이 “심한 오판”(badly misjudged)을 했다고 에둘러 비판했다. 캠벨 부장관은 이날 아스펜전략포럼(ASF)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 ‘주요 동맹인 한국의 비상계엄을 미국이 인지하지 못한 게 첩보 실패냐’는 질문을 받고 이같이 답했다. 캠벨 부장관은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심한 오판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계엄법의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이 한국에서 깊고 부정적인 울림이 있다”고 말했다. 또 비상계엄 선포 뒤 3시간도 되지 않아 국회가 계엄을 제지한 것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뛰쳐나와 이것이 매우 불법적인(deeply illegitimate) 과정임을 분명히 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캠벨 부장관은 “앞으로 몇 달간 한국은 도전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며 “우리의 목표는 한미동맹이 절대적으로 견고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 국무부가 동맹국 정상의 결정을 ‘오판’으로 규정한 것은 외교 관례상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다. 캠벨 부장관은 동맹국 국민들이 ‘매우 불법적’인 과정을 제지했다는 설명을 통해 윤 대통령의 ‘6시간 계엄’을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캠벨 부장관은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중대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캠벨 부장관은 3일 워싱턴DC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우리는 최근 한국의 상황 전개를 중대한 우려로 주시하고 있다”면서 “어떤 정치적 분쟁이든 평화적으로, 법치에 부합하게 해결될 것을 전적으로 희망하고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 [기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데버라 스미스

    [기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데버라 스미스

    문학의 중요한 역할은 독자에게 생각하는 힘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학 번역과 한국문학 영어번역가의 역할과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하는 뜻깊은 계기가 됐다.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번역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뿐 아니라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 사이에도 필요하다. 한국어 사용자끼리, 심지어 함께 사는 가족 사이에서도 갈등과 소통의 어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고 상대방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마음의 번역’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어려움은 번역의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특징 때문에 발생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인정받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상대방이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이타적인 마음이 번역 안에 공존한다. 한강의 역사적인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면서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당시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긴 데버라 스미스의 번역에 대한 국내 학계의 오역 논쟁과 한국어를 독학한 지 6년밖에 안 된 외국인 번역가에 대한 신랄한 공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스스로 한국어를 배워 세계적인 문학상 수상을 가능하게 했던 번역가의 대단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고마움보다 마치 죄인 대하듯 가혹해야만 했을까. 한국문학의 영어 번역은 한국어를 전혀 읽지 못하는 해외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스미스가 아니었더라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영어 번역은 영어권 원어민 독자와 같은 감성으로 영어 번역본을 읽을 수 없는 국내 독자들과 학자들이 평가하고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닐 수 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미국 독자나 학자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의 한국어 번역에 오역 논쟁을 벌이지 않는 건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헤밍웨이 소설을 한국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는지는 오롯이 한국 독자의 몫이라서 그렇다. 한강 소설 영역본의 소유주가 ‘우리’라는 착각을 내려놓자. 우리는 위대한 한국어로 쓰인 원작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해외의 독자와 출판사들이 한강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깊은 감정과 문학적 가치를 공유하고,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한국문학 작품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스미스의 번역은 충분히 의미 있고 자랑스러운 문화 자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강의 소설을 우리보다 해외 독자가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을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배려가 어쩌면 한국문학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 노벨문학상 열풍이 곧 지나가 버린 다음에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번역가들의 헌신과 기여를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이 될 것이다. 이형진 숙명여대 영문과 교수
  • “부산국제영화제 성공 요인은 ‘정치 중립’… 지원하되 간섭 배제”[서동철의 노변정담]

    “부산국제영화제 성공 요인은 ‘정치 중립’… 지원하되 간섭 배제”[서동철의 노변정담]

    문공부 재직 때 예술의전당 건립영진공 사장 맡고 ‘K영화 알리기’국제영화제 대표단·포상 제도화난관 뚫고 남양주에 종합촬영소‘피란 추억’ 부산서 또다른 인생길창립 주도했던 국제영화제 성공모든 영화 선정에 일절 관여 안 해감독 데뷔… ‘칸’서 인생다큐 상영도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우리 영화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편으로 영화는 K팝이나 K드라마처럼 K라는 접두사가 붙는 한국 콘텐츠 산업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의 콘텐츠 산업이 국제적 경쟁력을 갖는 데 김 전 위원장이 선구적 역할을 했음은 이렇듯 자명하다. 그는 지금 경기 광주시 분원리에 살고 있다. 그림 같은 팔당호수의 품에 안긴 아름다운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그릇을 만들어 공급한 사옹원 분원이 있었던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창밖 호수 너머 다산 정약용이 살던 마재가 멀리 바라보이는 자택 서재에서 그를 만났다. 김 전 위원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인이지만 필자에게는 여전히 대표적 문화관료로 인상지어져 있다. 문화부 출입기자 시절 차관으로 부임한 그를 처음 만났고 이후에도 소통할 기회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공직 이력 가운데 하나가 예술의전당 사장이다. 1992년 2월 24일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에 올랐지만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4월 20일 문화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술의전당은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 시절 기획에 참여하고 부지 선정과 설계자 선정 과정도 주도했어요. 서울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만들려면 상징적인 복합 문화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부지로 가장 먼저 물망에 오른 곳은 지금의 대법원 자리였어요. 하지만 군 정보사령부 부지와 정부 땅을 교환하고 착공하면 올림픽 전까지 완공이 불가능했어요. 결국 지금의 예술의전당 자리를 1안으로,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선 옛 서울고등학교 터를 2안으로 보고했지요.” 그는 사장에 취임하고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한다. 곧바로 예술의전당에서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까지 지하로 연결하는 계획을 세웠다.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예술의 거리로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추진력을 생각하면 사장 재직 기간이 조금만 길었어도 현실화됐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세계적 위상 K콘텐츠’ 선구적 역할 김 전 위원장이 차관으로 부임한 이후 출입기자들과 가졌던 첫 번째 저녁 자리가 기억이 난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 밥을 사는 사람은 술을 받을 때 “조금만 달라”고 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달랐다. 20명 남짓한 출입기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예외 없이 술잔을 채워 주고 다시 가득 받았다. 그것도 한 순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2010년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마치고 떠날 때는 많은 신문이 ‘술로 영화제를 성공시켰다’거나 ‘술로 세계 영화계를 제패했다’는 기사를 실은 것을 알지 않느냐”고 했다. 김 전 위원장은 문공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우고 퇴직한 1988년 4월 영화진흥공사 사장이 됐다. 당장 영화감독협회에서 “낙하산 인사”라며 반대 성명을 냈다. 영화계 인사들의 반응은 싸늘한 것을 넘어 살벌할 지경이었다. “그럴 만도 했어요. 1973년 영화진흥공사 창설 이후 제 이전에 다섯 분의 사장이 거쳐 갔는데 초대 김재연 사장을 제외하곤 모두 예비역 장성 출신이었습니다. 제가 주무 부처에서 일했다고는 해도 영화인은 아니었으니 반대는 당연했을 겁니다.” 이때 “영화판에서 살아남으려면 영화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화인들을 만났다. 4월 4일 사장에 취임했는데 5월 16일에는 벌써 문공부 장관에게 영화진흥계획을 보고할 수 있었다. 영화계의 원로 및 중진뿐 아니라 젊은 감독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크고 작은 영화계 행사에 반드시 참석했고 얼굴을 몰라도 영화인의 경조사는 아무리 멀어도 찾아갔다. 영화진흥공사 사장에 임명됐을 때까지는 영화를 즐겨 보지 않았다고 한다.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영화에 빠져들었고 조금씩 ‘준영화인’으로 발전해 나갔다. ●강수연 등 해외영화제 여우주연상 토대 “영화인들을 만나면서 우리 영화의 해외 진출과 종합촬영소 건립이 영화 발전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사장 임기 중 이 두 가지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먼저 우리 영화를 해외에 알리고자 중요한 국제영화제에 대표단을 구성해 참여했어요. 이것이 몬트리올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신혜수와 강수연이 각각 여우주연상을 받는 토대가 됐습니다.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면 제작사에 보상금을 주고 당사자에게는 훈장과 포장을 주는 것도 제도화했어요.” 종합촬영소 건립에도 착수했다. 1983년 3월부터 틈나는 대로 서울 사방 100리의 국유지와 경기도유지를 찾아다녔다. 4월 24일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김원 건축가와 남양주군 조안면 삼봉리를 돌아보고 촬영소 자리로 확정할 수 있었다. 상수도 보호구역이어서 난관에 봉착했지만 돌파했다. 그는 “오기와 집념,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것이 남양주 촬영소”라고 했다. 종합촬영소 건립 과정에도 그의 술 실력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촬영소가 들어설 조안면 주민들의 동의를 받고자 마을회관에서 건립 계획을 설명하고 저녁을 냈는데 100명 남짓한 참석자들과 소주 한 잔씩을 주고받았다. 최소한 100잔의 소주를 마신 꼴이다. 이렇게 ‘한국을 대표하는 주당’이었지만 우리 나이로 70세를 맞이한 2006년 1월 1일 술을 완전히 끊었다. 술 실력이 막강했던 만큼 단숨에 끊은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술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그때 술을 끊은 것이 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웃었다. 이제 종합촬영소는 영화진흥공사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진흥위원회의 부산 이전과 함께 기장에 다시 세워지고 있다. 실내 스튜디오 3개동과 오픈 스튜디오, 제작지원 시설이 갖춰진 국내 유일의 종합촬영 시설은 2026년 9월 완공된다. 김 위원장은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산을 했고, 풍수에 밝은 한학자였던 할아버지는 손자의 이름을 ‘동쪽의 호랑이’라고 짓고는 채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직후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는데 종로구 충신동 언덕은 비가 오면 축대가 무너지고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원남동으로 이사하고는 재동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300명을 뽑는 경기중학교에 100명이 합격했다고 한다.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6·25전쟁이 터졌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란했다. ●부산서 피란 생활… 모판 메고 행상도 “부산에선 봉래동의 피란민수용소에서 지냈는데 국제시장에서 오징어를 사서 광복동, 남포동, 부산시청 앞을 뛰어다니며 팔았어요. 모판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행상도 했어요. 양담배와 미제 과자, 라이터 같은 물건을 받아다가 팔았습니다. 어느 날 보수동에 좌판을 펼쳐 놓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선배가 용두산공원에 경기중학교 분교가 생겼다고 알려 줘 학교를 다시 다녔지요.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피란 생활을 했습니다.” 김 전 위원장에게 부산은 ‘애환의 도시’였다. 서울에 돌아온 가족은 청량리 초가에 한 칸 방을 얻어 살았다. 서울대 법과대학을 다녔는데 왜 고시를 보지 않았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지만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에 도전하는 것은 가정 형편도 그렇거니와 공부할 여유가 없으니 자신도 없었다. 1961년 9월 졸업을 앞두고 일자리가 급했던 그는 공보부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누구나 겪은 피란살이였지만 부산의 4년은 비록 어떤 난관에 부닥칠지라도 혼자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처음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이런 추억이 담긴 부산에서, 부산을 위해 일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지요. 이때부터 인생 행로가 관료에서 영화인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고 할 수 있지요. 부산에서 명실상부한 영화인이 된 것입니다.” ●관료서 영화인으로 완전히 탈바꿈 김 전 위원장이 창립을 주도한 부산국제영화제는 1996년 9월 13일 제1회 행사의 막이 올랐고 이후 엄청난 성공을 이어 간 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개막 행사가 끝난 뒤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서 미포에 이르는 포장마차는 국내외 영화인들이 모두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는 해운대 포장마차의 비치파라솔을 모래사장으로 옮겨 외국의 주요 영화인을 대접했는데 술값이 80만원이 나왔다. 신용카드로 계산하려 했지만 포장마차 주인은 “카드받는 포장마차 봤느냐”며 거절했다. 그는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는 사람이 현금 80만원 들고 다니는 것 봤느냐”고 버텼다. 결국 주인이 어디선가 카드 결제기를 들고 와 소동은 끝났다. 이 스토리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을 거듭하면서 해운대 포장마차촌 일대의 전설로 남았다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을 묻자 그는 뜻밖에 ‘정치적 중립’이라고 했다. 자신의 신념은 간단명료했는데 첫째는 개폐막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영화의 선정을 프로그래머에게 맡기고 집행위원장은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다. 둘째는 장관이나 정치인이 무대에 올라가거나 연설하는 것을 철저히 배제했다. 대통령선거 때 각 당 유력 후보들이 개막식에 참석해도 인사를 시키지 않은 것은 물론 소개조차 하지 않았다. 지원은 하되 간섭을 배제한다는 원칙을 관철했다는 것이다. 김 전 위원장은 2012년 영화 심사 과정을 담은 단편영화 ‘주리’를 연출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주리’는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이후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됐다.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선 그의 영화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가 상영되기도 했다. 배우로는 1998년 이재용 감독의 ‘정사’와 2004년 프랑스 클레르 드니 감독의 ‘개입자’(Intruder)에 조선소 사장 역할로 출연했다. ‘영원한 현역 영화인’으로 대접받는 그의 서재 한켠에는 영화감상실이 있다. 그는 요즘 이 공간에서 마을 주민들을 위한 영화상영모임을 종종 갖는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도 참여했다니 누구라도, 아무리 먼 곳에서도 찾아가고 싶은 영화 모임일 것이다. 김 전 위원장이 주민이 되면서 도자기 마을 분원이 영화가 있는 현대적 문화 마을로 발전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싶다. ■ 김동호 전 위원장은 1937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경기중·고등학교와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61년 공보부에 들어간 이후 문화공보부 문화·보도·공보·국제교류국장과 기획관리실장으로 일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 예술의전당 사장, 문화부 차관, 공연윤리위원장, 문화융성위원장을 역임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창설해 17년 동안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97년 로테르담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시작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을 비롯해 30차례 이상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빙됐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와 첨단영상대학원 연구교수로 활동했고 2012년에는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을 신설해 초대 원장으로 재직했다. 황조근정훈장과 은관문화훈장, 프랑스 정부의 예술문학훈장 기사장과 최고영예훈장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를 받았고 유네스코 펠리니상을 수상했다.
  • “계엄군 총·칼에 짓밟힌 ‘5월 악몽’ 되살아나”…광주시민들 충격·분노

    “계엄군 총·칼에 짓밟힌 ‘5월 악몽’ 되살아나”…광주시민들 충격·분노

    “비상계엄 발동 뉴스를 보는 순간 계엄군의 총칼에 짓밟힌 ‘5월 광주’가 떠올랐습니다. ‘또다시 피를 흘려야만 하나’라는 생각에 온 몸이 떨려왔습니다.” 지난 3일 밤 45년 만에 비상계엄령 선포되고 총과 칼로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로 진입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지켜본 광주시민들은 ‘1980년 5월 광주’를 되새기면서 충격과 공포로 밤을 지샜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4일, ‘5월 민주화운동’의 현장인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을 찾은 시민 김 모 씨(59)는 “광주는 5·18당시 비상계엄이 선포된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계엄군에게 학살당한 아픔이 있는 도시”라면서 “그날의 충격과 공포가 트라우마로 남아있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시민 박 모씨(62)씨는 “1980년 5월 고등학생 시절 도청에 장갑차가 진입하고 헬기가 날아다니며 군인들이 시민에게 총구를 겨누는 모습을 지켜봤다”며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세대로서 그런 비극을 또다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분노했다. 박 모 씨(55·여)는 “국회 앞에 헬기와 함께 장갑차까지 등장한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너무도 두려워 TV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며 “서울에 있는 딸에게 연락해 ‘집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게 어떻게 현실의 2024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냐”며 말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한 모씨(32)는 “영화에서나 봤던 일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 충격을 받았다”며 “당장 주식시장이 붕괴되는 등 경제를 비롯한 모든 일상이 단번에 무너질 것 같아 두려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개탄했다. 김형미 오월어머니집 관장은 “계엄선포 뉴스를 보자마자 1980년 생각이 나면서 ‘또 다시 피를 봐야 하나’ 싶었다”면서 “계엄령이 해제돼 다행이긴 하지만 광주 시민은 반드시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5·18을 경험하지 못한 최 모씨(31)는 “지금은 유튜브나 SNS로 정보를 실시간 공유할 수 있는데, 언론이 통제된 5·18 당시에는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이 안 된다”며 “총칼을 든 계엄군과 학살의 공포 속에서도 민주화를 위해 끝까지 용기를 내 준 광주시민이 존경스럽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27개 단체로 구성된 광주시민단체협의회는 4일 오전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광주시민 비상시국대회’를 열고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한목소리로 규탄했다. 시국 대회에 참석한 강기정 광주시장은 “계엄의 밤은 가고 심판의 시간이 돌아왔다. 5월의 아픔을 기억하고 배운 우리는 이 상황을 결코 용납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다”며 “윤석열 정부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고, 퇴진하는 그날까지 함께 싸우겠다”고 밝혔다. 한편, 1980년 5월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진입한 광주에서는 166명이 사망하고 76명이 행방불명됐다. 당시 부상으로 사망한 이도 113명에 이른다.
  • “계엄군에 짓밟힌 ‘5월 광주’ 악몽 떠올랐다”

    “계엄군에 짓밟힌 ‘5월 광주’ 악몽 떠올랐다”

    “계엄군 총칼에 짓밟힌 ‘5월 광주’가 떠올랐어요. 충격과 공포의 밤이었습니다.” 지난밤 45년 만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로 진입하는 모습을 지켜본 광주시민들은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리며 충격과 분노를 토해냈다. 광주시 북구 시민 박 모 씨(65·여)는 “광주는 1980년 5월 비상계엄령으로 아픈 기억이 있는 도시로 가족들과 밤 내내 충격과 공포에 떨었다”며 “처음에는 가짜뉴스인 줄 알았는데 TV를 켜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되냐”고 분노했다. 동구 임 모씨(75·남)는 “20대 그 당시에 계염군이 광주를 쑥대밭으로 짓밟았던 5.18 악몽이 떠올랐다. TV 화면을 통해 계엄군을 다시 본다는 것 자체가 심장이 뛸 정도의 충격이었다. 제2의 5·18이 일어나는 것 아닌지 초조했다”며 “21세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비상계엄 발령 후 일부 광주시민들은 광주시 동구 5·18민주광장에 모여 성명을 발표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재자와 맞서 싸워야 한다. 피 흘려 지켜온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지켜내자”고 다짐했다. 5·18민주광장에서 만난 최 모 씨(51)는 “자다 깨서 본 충격적인 소식에 대한민국이 과거로 회귀한 것 같았다”면서 “갑자기 계엄이라니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고 토로했다. 오월단체는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난 시간’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양재혁 5·18 유족회장은 “윤석열의 계엄선포 ‘사태’는 명분 없는 독단적인 행위로 국민을 혼란과 위기에 빠뜨리는 행위였다”면서 “국가 지도자로서 자질과 책임감이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 시간이었다. 마치 5·18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고 토로했다. 조규연 부상자회장은 “전두환 시대로 회귀한 듯하다”며 “80년 5월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온몸이 떨리고 분노가 치솟았다”고 말했다. 김형미 오월어머니집 관장은 “계엄선포 뉴스를 보자마자 1980년 생각이 나면서 ‘또 다시 피를 봐야 하나’ 싶었다”면서 “계엄령 해제 발언을 하니 한숨 돌리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종료되었다고 보기 어려워 오늘 예정됐던 오월 어머니들 대상 교육도 중단하기로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광주 시민사회는 반드시 윤 대통령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 이정선 광주시교육감 “5·18 정신으로 민주주의 수호”

    이정선 광주시교육감 “5·18 정신으로 민주주의 수호”

    이정선 광주시교육청 교육감은 4일 “지난 3일 밤의 비상계엄은 우리 모두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5·18 광주정신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고 밝혔다. 이 교육감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44년 전, 비상계엄의 역사가 떠올랐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권력은 국민이 용서치 않았다. 1980년 5월 비상계엄에 광주의 피와 눈물을 먹고 자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6월 항쟁을 거쳐 촛불혁명까지 이어지며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민중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교육감은 이어 “무도하고 무능한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켰던 1980년 5월을, 총칼 앞에 맨몸으로 맞서며 꽃잎처럼 떨어지던 부모 형제의 아픔을,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5월 광주와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한 맺힌 울분을 광주는 기억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육감은 특히 “광주교육은 흔들림 없이 우리 학생들의 교육활동을 지원하겠다. 우리 아이들이 정의로운 대한민국에서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대한민국 정상화의 길에 광주시민과 교육가족 모두가 함께 해주길 간곡히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 용산구, 용산역사박물관 기획전 ‘접속, 용산전자상가’ 개막

    용산구, 용산역사박물관 기획전 ‘접속, 용산전자상가’ 개막

    서울 용산구가 용산역사박물관에서 오는 6일부터 내년 9월 7일까지 ‘접속, 용산전자상가’ 기획전을 연다고 4일 밝혔다. 이번 기획전시는 청과물시장에서 전자상가로 변모하고, 1990년〜2000년대 전성기를 거쳐 2010년대 침체기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전반적으로 보여준다. 기획전은 ▲제1부 용산, 만초천 물길이 흐르던 자리 ▲제2부 전자제품은 용산으로 ▲제3부 우리들의 용산전자상가 등 3개 소주제로 나뉜다. 우리나라 전자제품 상권 중 최고 명성을 지녔던 용산전자상가 특유 문화와 전자제품 유행 흐름을 다양한 연출로 전시하고 전자상가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용산전자상가를 추억할 기회를 제공한다. 제1부에서는 천변에서 청과시장으로, 다시 청과시장에서 현대식 상가로 변모하며 용산전자상가가 형성되는 과정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 전기·전자 상가로 자리매김하는 배경을 알 수 있다. 제2부에서는 ‘용산전자상가에 없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용산전자상가에서 거래되던 개인용 컴퓨터(PC), 이동 통신 기기, 게임기 등 각종 전자제품을 통해 국내 최대 규모 전자상가의 위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제3부에서는 다양한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상인, 구매하려는 소비자로 붐볐던 당시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나 볼 수 있다. 그 외에 컴퓨터 게임 대명사 ‘스타크래프트’ 게임과 한글 타자 연습 프로그램 ‘한메타자 베네치아’ 게임을 체험할 수 있으며 전시실 곳곳에서 증강현실 캐릭터와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구는 전시 개최 하루 전인 5일 낮 3시 용산역사박물관 1층 로비에서 개막식을 개최한다. 개회, 축사, 테이프 커팅, 전시 해설 순으로 진행하는 개막식에는 용산구청장, 용산구의회 의장, 용산역사박물관 운영위원, 유물 기증자, 전자상가 관계자 등 30명이 참여한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용산역사박물관은 용산을 중심으로 서울의 근현대사에 대한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명소”라며 “1985년 양곡도매시장 이전으로 조성된 상가가 1990년대 대호황을 맞아 한국 전자산업의 메카로 변모한 용산전자상가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이번 기획전에 많은 관심 바란다”고 전했다. 용산역사박물관 기획전과 상설전 관람료는 무료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단, 1월 1일, 설·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다음 날)은 휴관이다.
  • “시민들에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계엄군…안쓰러움·고마움 느꼈다”

    “시민들에 ‘죄송합니다’ 고개 숙인 계엄군…안쓰러움·고마움 느꼈다”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이 150분 만에 해제된 가운데, 국회 본청 건물에 투입됐던 무장 계엄군이 시민에게 고개 숙인 뒤 철수한 모습이 온라인상에 퍼지고 있다. 4일 오전 허재현 리포액트 기자는 고개 숙인 한 계엄군인의 사진을 올리고 “오늘 항의하러 국회 앞으로 몰려온 시민들에게 허리 숙여 ‘죄송합니다’ 말해주고 간 이름 없는 한 계엄군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눈에 봐도 너무나 반듯하게 생긴 그 계엄군 청년. 안경 너머 비치는 맑은 눈동자에 그만 저는 모든 분노가 사라지며 한없는 안쓰러움과 고마움을 함께 느꼈다”고 설명했다. 그는 “쫓아오는 저에게 한 번, 두 번, 세 번 거듭 절을 하며 ‘죄송합니다’ 말하던 그 짧은 순간, 당신의 진심을 느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같은 편’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 진심을”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가 당신의 인사를 받은 한 시민이자 취재 기자였다. 민주공화국의 새벽을 지켜준 당신의 한마디를 평생 기억하겠다. 부디 건강하게 군 복무 마치고 건강한 청년으로 우리 사회에 돌아와 달라. 고맙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4일 오전 4시 27분 전날 선포한 비상계엄을 해제했다. 윤 대통령은 긴급 담화에서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에 계엄사무 투입 군을 철수시켰다”며 “바로 국무회의를 통해 국회 요구를 수용해 계엄을 해제할 것”이라고 했다. 전날 오후 10시 27분 전격적인 계엄 선포에 나선 지 6시간 만이다. 앞서 윤 대통령이 3일 오후 10시 23분 전격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여야는 충격과 당혹감 속에 속속 국회로 집결했다. 민주당은 국회의원 전원 소집령을 내렸고, 국민의힘도 비상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경찰과 계엄군이 국회의원과 취재진의 경내 진입까지 차단해 국회 출입문마다 충돌이 벌어졌다. 계엄군 헬기 3대가 국회 상공을 돌다 국회 뒤뜰에 하강한 후 무장 군인들이 경내에 진입했다. 총을 든 이들은 곧바로 국회 본청 진입을 위해 집권여당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실과 지도부 회의실 창문을 깨고 본청에 들어갔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만 출입할 수 있는 본회의장 진입도 시도했다. 이에 국회는 오전 1시 본회의를 소집해 재석 190명, 찬성 190명으로 계엄령 해제 요구안을 처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건으로 1979년 비상계엄 이후 45년 만에 선포된 계엄은 2시간 37분 만에 사실상 종료됐다. 헌법 제77조 5항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 지금 여기의 삶을 담은 집 [노은주·임형남의 K건축 이야기]

    지금 여기의 삶을 담은 집 [노은주·임형남의 K건축 이야기]

    국도를 달리다 우연히 마주치는 길가의 집들을 무척 좋아한다. 낡은 흙담의 담배 건조장, 정미소 등 어떠한 과장도 없고 허세도 없으며, 필요에 맞게 형편에 맞게 지어진 집들이다. 그 안에서는 건강한 삶들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그런 집들을 민가라 부르고, 살림집이나 시골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거창하게 한옥이니 목조 전통가옥이니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어지고 그렇게 이 땅 위에 오래 살아남았다. 기후에 맞게 땅의 성질에 맞게 고쳐 가며 개선해 가며 형식을 만들었다. 혹독한 겨울 추위와 뜨거운 여름 더위를 막으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안온한 덮개로 존재했다. 한옥이라는 단어가 전통가옥을 아우르는 명칭이 됐지만, 그 단어가 나온 것은 근대 무렵이었다. 문호가 개방돼 외국 문물이 국내로 유입되던 시기이다. 우리보다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많은 나라 중 유럽이나 미국 문물은 대부분 외국에서 들어왔다는 뜻의 ‘양’(洋) 자를 붙여 부르곤 했다. 음식은 양식, 의상은 양복·양장, 그리고 집은 양옥이라 불렀다. 그와 반대로 우리 전통가옥은 한옥이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한옥이라는 단어는 사실 상대적 개념만 있지 전통가옥 속성이나 느낌은 약하고, 어떤 특징이나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은 건조한 단어이다. 또 한옥은 어느 시대부터 어느 시대까지라는 시간적 범위가 없이 우리 민족이 우리 땅에 우리 기후와 지질 등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지어 살던 집인데, 양식이나 표준도 명확하지 않다. 특히 살림집은 다양한 형식과 재료를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무수한 오해와 억측이 난무한다. 대표적인 게 우리 민족은 대대로 온돌을 주 난방방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 건축은 늘 단층 규모인지라 도시적 밀도를 높이지 못해 발전하지 못했다는 주장인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온돌이 건축의 주 난방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쪽구들’이라고 부분 난방의 형식으로 쓰이거나 환자나 노약자를 위해 일부 공간에 부분적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러던 게 200~250년 사이에 수요가 늘고 기술이 더욱 개발되며 보편적 난방형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 이름이 무엇이건 우리의 집은 시대마다 변형되고 발전하며, 우리 기후와 우리 정서에 맞는 음식처럼 인위적으로 바꾸려 해도 없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나 20세기로 접어들고 우리 문화를 꼼꼼하게 말살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 문화 전체를 전근대적이라며 백안시하는 풍조 속에서 한옥 또한 외면받았다. 한옥은 빨리 개선돼야 할 구습으로 치부됐고, 많은 한옥이 사라졌다. 그 흐름이 끊어졌다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한옥이 재조명된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한옥이란 어떤 특정 시점의 주거형식이 아니고 양식을 답습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북촌이라 불리는 가회동 일대에 1930년대 지어진 근대 한옥들은 양동마을이나 하회마을처럼 오래전 지어진 대로 유지돼 온 한옥과는 달리 도시 생활에 적합한 구조로 개량된 한옥들이다. 그러면 이 시대 우리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무엇을 이어받고 무엇을 되살려야 할까. 건축가로서 그 점이 하나의 화두이다. 경북 영주 부석사 근처를 지나다 본 이층집이 하나 기억난다. 집의 규모는 정면 세 칸인데 자세히 보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한옥과 사뭇 다르다. 일단 나무 기둥으로 뼈대를 잡고 회벽을 칠한 것 외에는 지붕이며 2층 창문이며 양식에 맞춰 지었다. 당시 구하기 쉬운 재료로 자신의 필요와 구상대로 편하게 지은 집이다. 이 집을 보며 한옥이다 아니다 평가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 시대에 그 동네에 사는 사람 집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한옥이라는 유형의 집도 그런 과정과 그런 필요로 지은 집들의 총합일 것이다. 어떤 욕심도 없고 과시도 멋도 없는 그저 길가의 들꽃처럼 피어 있는 집들을 보면서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이 모두 각자 다르게 자신의 인생을 살 듯, 집도 그곳에 사는 사람을 닮은 집이어야 하고, 그래서 좋은 집이란 마치 몸에 맞게 늘어나고 색이 바랜 평상복처럼 편안한 공간일 것이다. 산이 깊고 아름다운 부석사 근처, 사과밭 가운데 땅을 사서 찾아온 부부가 있었다. 워낙 산을 좋아해 산 가까이에 풍광이 좋고 고요한 곳에 집을 짓겠다고 했다. 생활은 단출하며 그저 차 마시는 공간이 있으면 된다는 단순한 조건을 이야기했다. 해결해야 하는 복잡한 동선이 없고 살림이 간소한, 소박한 삶에 어울리는 집이면서 자연과 어울리는 집이란 쉬운 듯 보이면서도 어려웠다. 나지막한 구릉에 편안하게, 예전에 이 땅에 살았던 분들이 집을 짓는 것처럼 짓기로 했다. 길고 얇은 네모난 평면 가운데 옛 대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거실과 부엌을 넣고 양쪽 끝에 안방과 다실을 겸한 손님방을 두었다. 남향으로 배치해 햇빛과 바람이 자연스럽게 집을 넘나들고 주로 좌식으로 사용할 다실에는 앉았을 때 비로소 보이는 낮은 창을 냈다. 집 앞뒤로 여유롭게 남은 땅과 자연의 경계에 담 대신 대문채를 하나 두어 여기서부터 집의 영역임을 암시했다. 지금의 재료로 옛집의 정신을 담은 집이 소백산 기슭에 앉혀졌다. 노은주·임형남 부부 건축가
  • 호퍼의 걸작·에코의 책장 보러 간다… 영화관으로

    호퍼의 걸작·에코의 책장 보러 간다… 영화관으로

    예술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 인문학 분야의 천재 움베르토 에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2편을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다. 대형 스크린으로 호퍼의 걸작을 감상하고, 책으로 가득한 에코의 개인 도서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에드워드 호퍼가 주목한 도시의 일상 지난달 27일 개봉한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 미술의 아이콘인 호퍼의 이야기를 다룬다. 188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웠지만 40대 초반부터 수채화와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주제는 도시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이어진 경제 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풍경과 인물을 표현했다. 원색을 많이 사용했음에도 그림에서 소외감이나 고독감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이유다. 그의 그림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해 앨프리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 등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영화는 지난해 4월 국내에서 열린 에드워드 호퍼 개인전에 등장한 작품들과 당시 볼 수 없었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뉴욕의 방’까지 모두 94점의 그림으로 호퍼의 삶을 소개한다. 애덤 웨인버그, 엘리엇 데이비스 등 유명 미술관 소속 큐레이터가 작품을 해설해 준다. 그의 뒤에서 희생한 아내 조세핀에 관한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담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집념이 담긴 도서관 오는 11일 개봉하는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은 2016년 타계한 에코와 그가 집착한 책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193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에코는 변호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토리노대에 입학했지만 중세 철학과 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후 기호학 교수로 건축학, 미학, 언어학, 고문서학 등을 강의하며 전 세계 대학에서 모두 42개에 이르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 세계에서 30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 ‘장미의 이름’ 저자로도 유명한 그의 집필 활동에 기반이 된 것은 책이었고, 그가 평생을 천착한 것도 바로 책이었다. 그런 그의 집념은 5만여권에 이르는 개인 도서관에 고스란히 담겼다. 영화는 에코가 세상을 뜨기 1년 전 자택 도서관에서 진행한 인터뷰와 책·도서관에 관한 생전 인터뷰, 강연, 연설 영상을 통해 그의 생각을 보여 준다. 이 밖에 가족과의 일상, 그와 평생 함께했던 동료들과 유족들의 인터뷰 등도 담겼다. 독서광인 에코는 “도서관은 집단적 기억의 상징이고 실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도서관에 대해 “기호학적이고, 기이하고, 망상적이고, 마법적이고, 영적인 책들을 모은 곳”이라고 소개한다.
  • 발달장애 중학생 ‘화가의 꿈’ 날개 달아준 양천

    발달장애 중학생 ‘화가의 꿈’ 날개 달아준 양천

    중학생 화가 양예준군은 7세 때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다. 초등학교 진학 이후에는 외부 자극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커졌고, 결국 약물치료를 받아야 했다. 약물치료의 부작용은 컸다. 예준군의 어머니 장윤경씨는 “약물치료를 6개월 동안 받으면서 아이가 무기력감에 시달렸다”면서 “약물치료 대신 손을 흔들고 혼잣말하는 것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 찾은 게 그림이었다”고 설명했다. 손에 색연필을 쥐여 주자 예준군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지금까지 보기 어려웠던 집중력을 발휘하며 신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공모전에 참가해 수십 차례 상까지 받았다. 약물을 끊었음에도 더이상 혼잣말과 손을 흔드는 동작을 하지 않았다. 예준군의 꿈은 “마음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는 7일까지 자신의 작품 42점을 내건 첫 전시회 ‘보는 것은 기억이고 사랑이에요’도 개최하고 있다. 전시회에선 ‘꽃잎을 불고 있는 젊은 우리 엄마’, ‘우리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오랑우탄’ 등 가족과 동물 등의 눈빛들을 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서울 양천구 오목공원 오목한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양천구가 진행하는 ‘문화진흥기금 지원사업’을 통해 기획됐다. 이 사업은 ▲청소년 ▲청년 ▲시니어 ▲장애인 등이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올해는 5개 분야 29개 팀에 총 6800만원을 지원했다. 지난 8월에는 ‘가부키 증후군’을 가진 열다섯 살 조예은양의 연주회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기재 양천구청장은 “이번 전시회를 통해 장애인 예술가의 다양성과 재능을 알리고 문화예술로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지역 내 예술적 재능이 있는 장애인들을 발굴하고 지역예술인들이 창의성과 역량을 높일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 남해 독일마을, 유럽 크리스마스의 감성이 폭발하는 곳 [여니의 시선]

    남해 독일마을, 유럽 크리스마스의 감성이 폭발하는 곳 [여니의 시선]

    겨울이면 으레 화려한 장식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따뜻하게 데운 와인을 들고 즐기는 마켓을 떠올리게 된다. 핀란드의 로바니에미 산타마을을 비롯해 스위스 몽트뢰 산타마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크리스마스 마켓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도 유럽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한국 속 작은 유럽으로 통하는 경남 남해 독일마을은 연말이면 크리스마스의 화려한 분위기와 따뜻한 감성이 어우러진 명소가 된다. 독일 전통 크리스마스 마켓의 매력남해 독일마을은 붉은 지붕과 독일식 주택들이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주민들이 직접 꾸민 아기자기한 장식과 조명으로 마을은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마을 중심의 카페에서는 따뜻한 독일식 와인인 글뤼바인(Glühwein)과 크리스마스 쿠키를 맛볼 수 있다. 낮에는 남해 바다와 어우러진 겨울 햇살 속에서 여유를 즐기고, 밤이 되면 조명 아래 빛나는 마을 속에서 한 모금의 글뤼바인으로 언 몸을 녹인다. 독일마을의 크리스마스는 눈과 입을 모두 즐겁게 한다. 소품샵에서는 독일 전통 크리스마스 오너먼트와 나무 장식을 구입할 수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간식으로 유명한 슈톨렌(Stollen)은 꼭 맛봐야 추천 먹거리다. 건포도와 견과류가 듬뿍 들어간 과일 케이크로, 달콤하고 고소한 풍미가 크리스마스의 감성을 더해준다. 희생과 사랑의 기억을 담은, 특별한 공간남해 독일마을은 단순히 이국적인 풍경만으로 매력적인 곳이 아니다. 1960년대 독일로 떠난 간호사와 광부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만든 마을로, 그들의 희생과 사랑을 품은 장소이기도 하다. 낯선 타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외로움과 그리움을 담아 이 마을을 꾸몄다. 그래서 이곳에선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삶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곳에서는 퍼레이드와 작은 공연이 열려 주민과 방문객이 함께 어우러진 따뜻한 시간을 만든다. 마을 곳곳의 크리스마스 리스와 조명은 마치 동화 속을 거니는 기분을 준다. 올겨울, 남해 독일마을에서 글뤼바인 한 잔과 슈톨렌 한 조각을 즐기며 유럽의 낭만과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느껴봐도 좋을 듯하다.
  • 157㎝·47㎏ 남자친구를… ‘여행가방 살인’ 美여성 종신형 받고 ‘미소’

    157㎝·47㎏ 남자친구를… ‘여행가방 살인’ 美여성 종신형 받고 ‘미소’

    ‘혐의 인정시 징역 15년’ 감형 거부선고 후 지지자 돌아보며 미소 지어숨바꼭질 해명…가정폭력 피해 주장 미국에서 남자친구를 여행가방에 가둔 채 꺼내주지 않아 질식시켜 죽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40대 여성이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됐다고 2일(현지시간) AP통신이 전했다. 이날 플로리다주 올랜도시 오렌지 카운티 법원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마이클 크레이닉 순회법원 판사는 4년 전 남자친구인 조지 토리스(사망 당시 42세)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세라 분(47)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토리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은 2020년 2월 23일 올랜도시 북쪽에 접한 윈터파크시 자택에서 벌어졌다. 분은 수사기관의 조사에서 자신과 토리스가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중 토리스가 여행가방 위에 올라가는 것이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분은 처음엔 토리스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가 전날 밤 여행가방 안에 들어갔던 것을 기억해냈다고 했다. 분이 가방 지퍼를 열었더니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토리스가 그 안에 있었다는 게 분의 주장이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분을 2급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가방 안에 있던 토리스가 “숨을 못 쉬겠다”고 소리치면서 분의 이름을 수차례 부르는 영상이 분의 휴대전화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담당 검사인 윌리엄 제이는 “피고인은 피해자가 가방 안에서 숨을 쉴 수 없다고 말했을 때 그를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가방에 가두기로 결정했다”며 “야구 방망이로 때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검 결과 피해자의 등과 머리, 얼굴 등에는 부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망한 토리스는 키 157㎝, 체중 47㎏의 왜소한 체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분은 끝까지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았다. 그는 살인 혐의 유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15년 징역형을 구형하겠다는 검찰의 제안을 거부했다. 분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가정 폭력 피해자였다고 주장했다. 분은 토리스와 사이에 폭행 사건이 있었고 자신에게 해가 올 것이라는 위협을 느껴 자기방어 차원에서 그를 가방에 넣었다고 말했다. 체포보고서에 따르면 사건 당일 밤 촬영된 분의 휴대전화 영상 중에는 분이 토리스를 향해 “그래, 이게 바로 네가 날 목 조를 때의 느낌이야”, “네가 날 속일 때 내가 느끼는 기분이 이래”라고 말하는 내용이 담겼다. 분은 살인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이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보도 방식을 비난하면서도 토리스의 가족에게는 용서를 구했다. 그는 “저는 괴물과 사랑에 빠진 저 자신을 용서한다. 그 (사랑의) 주문을 깨려고 노력했지만,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며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저를 용서해달라”고 말했다. 체포된 후 58개월간 구치소에서 지냈던 분은 이날 재판정에서 종신형 선고 후 지지자들을 돌아보며 미소 짓기도 했다.
  • 궁금하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드워드 호퍼, 움베르토 에코

    궁금하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드워드 호퍼, 움베르토 에코

    예술가들이 가장 사랑한 화가 에드워드 호퍼. 기호학을 비롯해 다방면 인문학 분야의 천재 움베르토 에코. 이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2편을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다. 대형 스크린으로 호퍼의 걸작을 감상하고, 책으로 가득한 에코의 개인 도서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에드워드 호퍼’는 미국 미술의 아이콘인 호퍼의 이야기를 담았다. 188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웠지만 40대 초반부터 수채화와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주제는 도시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이후 이어진 경제 대공황을 겪은 미국을 사실 그대로 표현했다. 원색을 많이 사용했지만, 그림에서 소외감이나 고독감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이유다. 그의 그림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해, 앨프레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 등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영화는 지난해 4월 국내에서 열려 4개월 동안 무려 33만명의 관람객을 동원한 에드워드 호퍼 개인전에서 나왔던 그림들과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뉴욕의 방’ 등 모두 94점의 그림으로 호퍼의 삶을 소개한다. 애덤 웨인버그, 앨리엇 데이비스 등 유명 미술관 소속 큐레이터가 작품을 해설해준다. 그림뿐 아니라 그의 뒤에서 희생한 아내 조세핀 호퍼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달 11일 개봉하는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은 2016년 타개한 에코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193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에코는 변호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토리노대에 입학했지만, 중세 철학과 문학으로 전공을 선회했다. 이후 기호학 교수로 건축학, 미학, 언어학, 수사학, 고문서학 등으로 전 세계 여러 대학에서 모두 42개에 이르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번 읽은 책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았고, 재직 중이던 볼로냐대 도서관의 모든 책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알려졌다. 전 세계에서 30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 ‘장미의 이름’의 저자로도 유명한 그의 집필 활동 기반이 되었던 것은 책이었다. 그리고 그가 평생을 천착한 것도 바로 책이었다. 그런 그의 집념은 5만여권에 이르는 개인 도서관에 고스란히 담겼다. 영화는 그가 서거하기 1년 전 자택 도서관에서 진행한 인터뷰와 책·도서관에 관한 생전 인터뷰, 강연, 연설 영상으로 그의 생각을 읽는다. 이 밖에 가족들과의 일상, 그와 평생 함께했던 동료들과 유족들이 말하는 그의 모습 등 다채로운 내용을 담았다. 독서광인 에코는 ‘도서관은 집단적 기억의 상징이고 실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도서관에 대해 “기호학적이고, 기이하고, 망상적이고, 마법적이고, 영적인 책들을 모은 곳”이라고 소개한다.
  • 방금 결혼했는데 ‘음주 차량’에 목숨 잃은 신부… ‘시속 105㎞’ 질주 美여성 징역 25년

    방금 결혼했는데 ‘음주 차량’에 목숨 잃은 신부… ‘시속 105㎞’ 질주 美여성 징역 25년

    피고인 “평생을 강렬한 후회 속에 살 것”신랑은 술집 등으로부터 합의금 12억원 미국에서 음주 상태로 운전하다 결혼식을 막 마친 신혼부부를 들이받은 여성이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고 2일(현지시간) AP통신이 전했다. 신부 사만다 밀러(사망 당시 34세)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는 지난해 4월 28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폴리비치에서 발생했다. 신랑 아릭 허친슨은 신부와 함께 골프 카트를 타고 결혼식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때 제한속도 시속 40㎞인 도로를 시속 105㎞로 질주하던 제이미 리 코모로스키(27)의 차량이 신혼부부가 타고 있던 골프 카트를 들이받았다. 차량 충돌로 카트는 약 91m를 날아갔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던 신부는 사망했고, 신랑은 뇌 손상과 여러 군데 골절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코모로스키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26%로, 법적 한도의 3배를 초과했다. 코모로스키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엄청난 충격과 깊은 부끄러움, 미안함을 느낀다”며 “이 끔찍한 비극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평생을 강렬한 후회 속에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은 인생을 알코올 중독자를 돕고 음주운전의 위험을 경고하는 데 바칠 것을 약속한다”고 했다. 찰스턴 카운티 법원은 이날 코모로스키의 음주운전으로 인한 중대한 신체적 상해와 무모한 살인 혐의에 대해 각각 징역 15년과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신랑 허친슨은 ABC방송 ‘굿모닝 아메리카’(GMA) 인터뷰에서 “제가 기억하는 신부의 마지막 말은 ‘오늘밤이 끝나지 않길 바란다’는 말이었다”고 회상했다. 신체적 부상과 정신적 고통으로 수많은 의사를 찾아갔다는 허친슨은 “그날 밤 (신부 대신) 제가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골프 카트에서 뛰어 내렸을 텐데”라며 매일 사고 당시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허친슨은 코모로스키의 보험회사와 차량을 렌트해준 회사, 그에게 술을 판매한 술집 3곳으로부터 총 86만 3000달러(약 12억 1000만원)의 법적 합의금을 받았다고 AP는 전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