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기어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 콘서트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 돈가스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 김병철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 배상금
    2026-01-2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868
  • 양승현의 취재수첩-送年不似送年

    ‘送年不似送年(연말인데도 전혀 연말기분이 나지 않는다)’ 무인년(戊寅年 ) 한해를 보내고 있는 청와대 정경이다.감기 몸살의 뒤끝인 탓인지,아니면 아직도 나라가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음인지 金大中대통령 스스로도 송 년의 소회조차 피력하지 않고 있다.해마다 쓰던 신년 휘호도 올해는 없다.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것 저것을 챙기는 일상의 연속이다. 지난 추석때는 그래도 조그마한 선물꾸러미를 들고 이방 저방을 들락거리던 직원들의 모습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朴智元대변인만이 공보수석실 직원들 에게 멸치를 돌렸고,일부 비서관들은 새해 수첩과 넥타이를 선물했다.뚝 떨 어진 ‘송년 추위’는 그렇지 않아도 한기가 도는 청와대 연말풍경을 더더욱 적막하게 만들기까지 한다.다만 청와대 경내 관람객,그것도 겨울로 접어들 면서 200∼300명 수준으로 현저히 줄어든 단체손님들만이 외견상 청와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대신 직원들 사이에 서로 예쁜 카드를 주고 받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매일 보는데 무슨 카드냐’는 질문에 한 비서관은 “올 한해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서로 위로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그래서인지 카드는 앞장 을 열면 장미 꽃다발이나 활짝 웃는 그림이 툭 튀어나오는 장난기어린 것이 많다.정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노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많 다.만년 야당에서 청와대로 입성했다는 기쁨도 잠시,이제는 솔직히 쉬고싶은 심정이라는 게 이들이 털어놓는 한결같은 푸념이다. 대부분의 직장이 오전에 업무를 끝내는데,청와대 종무식은 31일 오후 4시로 예정되어 있다.각 수석실별로 갖는다고 한다.金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신정 연휴를 하루로 줄이고 새해 2일부터 정상근무를 하라는 지시가 미친 여파로, 송년의 설렘을 누그러뜨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내년도 나라살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낮게 깔린 겨울하늘 만큼이나 송년을 맞는 청와대 직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 는 것 같다. 정치팀차장 yangbak@daehanmaeil.com [정치팀차장 yangbak@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신 청 721-5544)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내일부터 ‘파티’ 공연

    40대 가장이 있다.비엔나에서 유학 도중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고 귀국해 선 독문학 교수로 자리잡았다.아들 딸 하나씩 두고 남부럽지 않게 살다 전원 주택으로 이사왔다.순박한 이웃사람과 맑은 공기가 만족스럽다. 오는 31일 밤11시에 예술의 전당 자유소 극장에서 올리는 ‘파티’는 탄탄 대로의 삶으로 시작한다.하지만 그것은 잠시,불청객이 끼어들면서 흐름은 급 반전한다. 교수 부부가 유학시절을 떠올리며 무드를 잡는데 불길한 전화벨소리가 울 린다.동장을 앞세운 주민들이 이사를 축하하러 집으로 온다는 것이다.자칭 ‘화해의 길트기 모임’소속 사람들이다.겉으로 보면 선량한 이 이웃들은 술 을 마시다 돌변한다.억지를 부리다 어느덧 주인 행세를 한다.난장판은 7막에 서 극에 이른다. 예기치 않은 적대감에는 낱낱의 사연이 배어있다.공부를 잘했으나 집안이 몰락해 배달부 등 삶의 바닥을 기면서 배움에 한이 맺힌 동장,대학에 진학한 첫사랑 여학생이 ‘재수생이 격에 맞지 않다’며 떠나버리자 충격을 받고 시와 현실을 오락가락하는 삼수생 홍사형,구청 청소부의 딸로 태어나 들은 칭찬이라곤 ‘청소 잘한다’는 말밖에 없는 이정례…. 꿈의 좌절과 자기 깜냥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눌려있던 잠재의식이 동경의 대상인 교수를 보자 이그러지고 폭발한 것이다. 윤영선 작가가 작품을 착상했다는 존 케이지의 ‘반미학’의 한 구절은 연극 을 보는 한 방법을 제시한다.“파티는 끝났다.그러나 손님은 머무르고자 한 다.왜냐하면 그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에.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하고,집은 엉망이 된다.집안을 청소하자는 한마디 말도 없이 우리 모두 함께 있어야만 한다”. 안주할 곳 없는 사람에 견주면 일상의 안정감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메시지 도 느껴진다.지식인이 지닌 인간에 대한 애정과 포용이 실천이 동반되지 않 으면 값싼 동정심이거나 배부른 여유일지 모른다는 문제의식도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독특한 맛은 한 가정의 울타리를 깬 세력을 애매하게 처리했다는 점이다.기존의 공포·부조리극(카뮈 ‘오해’ 핀터 ‘생일파티’ 등)이 대개 나쁜 사람이나 악마적 존재를 설정했다면 이 작품은 외부의 실 체가 불투명하다.친근한 이웃이 때론 적이 될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연출을 맡은 이성렬은 “누구도 파괴하지 않지만 누구도 파괴 할수 있다 는 역설을 담고 싶었다”면서 “선이면서 악이기도 한 양면성을 포착하려는 의도였다”고 말한다. 동장 역을 맡은 김동수의 노련한 연기와 주·조연 할 것 없이 개성있는 연 기가 조화를 이룬 것도 미덕이다.특히 이정례 역을 맡은 성은경의 귀기어린 연기는 인상적이다.독특한 연기와 일상의 평온을 깨는 기괴한 방식에 놀라고 웃다가 파티는 끝난다.마지막에 남는 섬*한 질문 하나.내 가정은 안전한가?. 이봉규 남명렬 정재은 김혜민 정철민임진순 등 출연.1월17일까지 평일 오 후 7시30분,금·토 오후 3시·7시30분,일·공 오후 3시·6시,월요일 쉼.(02) 580-1880?곗골a? vielee@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의자를 치우면 건강이 좋아진다

    ◎건축사회학 전공 美 캘런 크렌츠 교수 ‘의자’서 주장/좌식생활 등뼈·허리·횡경막 등 긴장시켜/서있는 것보다 척추에 압력 30% 더 가중/하루 15분 딱딱한 바닥에 누워 쉬도록 잠시라도 의자에서 떠나라.그러면 당신의 건강은 훨씬 좋아진다. 건축사회학을 전공한 미국 캘리포니아대 캘런 크렌츠 교수(여)는 ‘의자’로 세계를 본다.지호출판사에서 나온 ‘의자’에는 의자의 역사,사회학,인간 환경공학,생체공학,인류학 등 의자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잠자는 때를 제외하면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의자에서 보내지만 태초에는 의자가 없었다.의자에 앉아 있는 흙인형은 신석기 시대에 발견됐다. 의자는 권력과 신분을 상징한다.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 레이건 대통령이 부재중이었을 때 절대 레이건의 자리에 앉지 않았다.권좌를 의미하는 영어 throne은 세력가가 타고 다니는 가마에서 유래됐다.앉아서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권력자일 것이다.의장을 chairman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자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보급됐다.공장노동이 농업노동과는 달리 의자에 앉는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좌식생활이 근대화와 진보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그러나 의자는 과연 인간을 편하게 해주는 이기(利器)일까. 이에 대한 크렌츠의 답변은 반(反)의자적이다.의자에 앉는 것은 척추,등 근육,허리부분 신경과 횡격막 등을 긴장시켜 서 있는 것보다 척추에 가해지는 압력을 30%가량 증가시킨다.또 허리를 곧게 펴지 않고 구부려 앉으면 갈비뼈들이 횡경막을 배쪽으로 내리눌러 폐와 소화기관의 과로를 가져온다.미국에서 근로자들이 감기 다음으로 잘 걸리는 병은 허리통증.육체 노동자들보다 사무실 노동자들이 25% 더 많다는 조사도 있다.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의자에 앉았을 때 발뒤꿈치가 반드시 바닥에 닿아야 하며 의자 끝부분이 아래로 휘어야 한다.더 좋은 것은 인공적인 수직앉기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인간은 걷고 서고 달리고 뛰고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고 움직이도록 창조되었다.도구를 이용한 앉기는 본성이 아니다. 인류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인간이 꾸준히 취하고 있는 몸의 자세는 1,0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직각으로 의자에 앉는 것은 전 세계인구의 1/3에서 1/2에 불과하다.척추가 쉴수 있도록 하루 15분 정도는 단단한 바닥에 누워라.기어다니거나 쪼구려 앉는 것도 좋다.쪼구려 앉아서 빵을 굽는 것은 에어로빅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조사도 있다.결론은 의자를 통해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을 줄이고 가능하면 땅과의 접촉을 늘리라는 것이다.
  • ‘왕따’ 현상/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왕따’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급우를 집단적으로 따돌리는 일종의 집단폭력이다. 한명이 괴롭혀도 억울한데 집단으로 따돌리고 구박을 한다면 그것은 학교생활이 아니라 지옥보다 무서운 악마의 소굴일 것이다. 아무런 지은 죄 없이 교실 전체가 돌아가면서 말을 걸지 않는다면 그처럼 숨막히는 형벌은 다시 없을 것이다. 말을 걸지 않을뿐 아니라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약점을 들추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물 떠와라’‘노래불러라’등 머슴부리듯 하는 바람에 학교가 싫어져서 지각이나 결석은 물론 피해망상에 시달려 자살같은 극단적 행위로 치닫는 수도 있다고 한다. 전에는 반에서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는 아이들이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으나 요즘의 학교내 따돌림은 무료급식을 받는 가난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배가 고픈 것도 서러운데 ‘거지’니 ‘해골’이니 놀려대는 바람에 아예 굶어버리는 학생이 늘고 있다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를 위해 두개의 도시락을 준비하거나 도시락을 나란히 나누어먹지는 못할망정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처럼 황폐하고 살벌해졌는지 끔찍하기만 하다. 상대방이 기가 죽어서 기어다니는 꼴을 봐야만 쾌감을 느끼게 된 세태다. 무엇이 그들의 인간성을 그토록 말살했는지 시대의 병폐라고 하기엔 너무 심각하다. 첫째 학교의 무신경이 문제다. 어린 학생들을 맡아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이런 면을 배려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학교의 책임이다. 무료급식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급식비 납부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급식을 하고 있는 학교도 있다. 구내식당 식권을 나누어 주는 방법도 있다. 또 국제통화기금(IMF)시대에서는 누구라도 고통을 당하고 한순간에 어려워질 수 있으며 가난은 자랑은 아니지만 적어도 수치가 아닌것을 가르쳤어야 한다. 이런 사회현상은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닌, 사회전반의 흐름으로 무료급식을 받는 학생은 일시적 도움을 받을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선 안된다. 우리의 상황은 무료급식을 원하는 결식아동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추세다. 아빠의 실직으로 멍든 가슴에 ‘왕따’로 두배 세배의 설움을 안겨주지 않도록 따뜻하게 보살피는 인정이 아쉽다. 부모도 아이와의 끈끈한 정서적 유대를 갖고 과연 내아이가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살펴줘야 한다.
  • 성금 내라는 전화를 받고(朴康文 코너)

    그 날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며칠 전 오후 바쁜 시간에 무슨 복지재단인가에서 온 전화를 끊고 나서는 한나절 내내 그랬다. 그 기관은 내가 한달쯤 전에 지로로 3만원을 보내 준 데였다.전화기 속 목소리는 고맙게 잘 받았다고 말했다.감사 인사로 끝나는 줄 알았더니만,말이 길었다.머리 속이 일 생각으로 가득차 있던 참이라 건성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요점은 연하장 한 묶음을 보낼 테니 3만 몇천원을 내라는 것이었다. 듣고 있노라니 스멀스멀 불쾌감이 기어 올라왔다.바쁘니 다음에 이야기하자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3년째,그 기관 직원의 전화가 있은 뒤에 책 몇권과 지로용지가 오고,그 때마다 나는 3만원씩 보냈다.책은 아동용이라 젊은 부원에게 주거나 제사때 오는 조카들에게 나눠 주었다.이 곳 아니라도 내가 조그마한 도움을 주는 곳이 몇 군데 있지만,한해에 3만원씩을 더 낸다고 해서 부담이 크게 느는 것은 아니니까,올해도 또냐고 투덜대면서도 돈을 내기로 약속하고는 했다. ○상대방 마음 헤아려야 결국 돈을 내면서 투덜거려 보는 것은,적은 액수의 돈이라 해도 남의 돈을 얻어내는 것인데 사무실에 앉아 전화 한통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 못마땅해서였다.지로로 보내니까 영수증이야 절로 남기는 하지만 고맙다는 엽서 한 장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해 오던 터에,날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전화기 속 음성이 연말연시 다가오니 도움을 달라고,그것도 바쁜 시간에 그러니 유쾌하지 못해 전화를 끊었고,끊고나니 마음이 무거웠다.생각해 보면,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돈 내라고 전화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사정이야 알 바 없으되,어쩌면 적은 인원에 엽서 다룰 만한 일손도 없고,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인사한다는 것은 더더군다나 생각도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조그마한 정성을 보태라고 했다가 전화선을 통해 느낀 내 싸늘한 태도에 그 직원은 마음이 상해 한숨을 쉬고 그 시각 이후 내내 기분이 언짢았을지 모른다. 그래도,다시 한편 생각하면,모금하는 데도 예절이랄까 법도랄까가 있어야 할 것 같다.돈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전화를 곧바로 하고 다음에도 도와주시기 바란다고 말해 놓으면,다음 번 모금때 한결 부드러울 것이다.돈 달라고 전화할 수 있다면,잘 받았다는 전화는 왜 못할까. ○적은 돈에도 소중함 있어 그리고 거듭 성금을 내는 이한테는 기관장 명의의 인쇄된 편지라도 보내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한다. 푼돈 내면서 무슨 대단한 요구냐고 할지 모르지만,보통사람의 적은 돈도 귀히 여겨야 하는 것이 모금기관의 태도다. 우리나라만큼 모금을 자주 하는 나라도 사실 드물다.선진국이라면 국고가 맡을 지출인데,우리는 일반 국민들이 대신하는 것이 많다.국가 재정이 빈약하고 사회복지제도가 갖춰지지 못해서지만,꼭 그래서만은 아닌 듯하다.우리보다 못한 나라에서도 모금 운동을 우리만큼 벌이지 않는 것을 보면,남 돕기에 선뜻 잘 나서는 우리 국민의 심성 때문인 듯도 하다. 올해는 그 복지재단 직원의 말대로 어려운 사람이 많아졌다.다시 그가 전화해 오면 이웃돕기 모금을 위한 연하장을 사야지 하고 기다리고 있다.
  • 노동부의 박노해 시인/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노동부의 기피인물이었던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되니 만감이 교차한다” 19일 노동부 회의실에서 노동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 박노해시인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사실 만감이 교차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노동부 직원들도 그런 표정이었다고 신문보도는 전한다. 그 신문을 읽은 많은 독자들도 그런 느낌이었을 게다. 그가 ‘얼굴 없는 시인’으로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발간(84년)했을 당시 문학분야을 취재했던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노동의 새벽’이 문단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고 그 문학적 힘 때문에 그는 문단에서 부정되기도 했다. 진짜 노동자가 쓴 것이 아니라 얼굴을 가린 기성시인이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돈 것이다. 구체적으로 기성시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는데 ‘노동의 새벽’ 원고를 출판사에 건넨 고(故) 蔡光錫 시인과 金思寅 시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신비의 베일에 가렸던 시인은 91년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의 핵심인물로 검거되면서 ”살기어린 눈빛을 지닌 야수의 얼굴”로 공개됐다.그자신 “짐승같은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바꾸려 야수와 같이 싸웠다”고 말했지만 시대의 간계는 노동운동의 순수성까지 왜곡시켰다. 그리고 그는 일반인들 사이에선 잊혀졌다. 지난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무기징역수에서 벗어나 다시 우리 앞에 선 그의 모습을 한 언론인은 ‘성직자’혹은 ‘현자’에 비유했다. 실제로 그는 노동운동가라기보다 사상가의 면모를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 자신 ‘가스발’이라는 세례명을 지닌 가톨릭 신자이고 형과 누이가 각각 사제와 수녀의 길을 걷는 경건한 신앙인 가족이기도 하다. 사면후 대학과 공연장,방송등에서 보여준 그의 경쾌한 모습은 저 무거운 70년대의 노동운동 투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당혹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변모였을 뿐이다. 노동부에서 강의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란 점에서 감회가 깊다. 그 자신도 “내가 여기 설 수 있는 것은 노동자의 지위가 향상되고 정권교체를 통한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말하고 있다. 박시인을 초청해 강의를 들은 노동부 공무원들의 열린 자세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박노해 시인처럼 과거 권위주의 정권아래서 어쩔수 없이 색깔이 입혀진 사람들의 이름만 들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기득권층이 적지 않다. 그들도 시인과 노동부 공무원들처럼 열린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조화로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 腐敗學 교육을 시작하자(林春雄 칼럼)

    학교 동기생중에 아주 출세한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가 공직에 있을때 거액의뇌물을 받은 죄목으로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난 일이 있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감옥에 있는 동안 면회를 가려했으나 우물쭈물하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실은 예상보다 너무 빨리 보석으로 나와 버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래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전화로나마 위로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전화를 걸려하니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 일로 낯을 들지 못하고 있을 사람에게 불쑥 위로랍시고 전화를 하면 위문이 폐문이 될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목소리도 낮추고 위로의 말도 어디서부터 할지 메모를 해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들었다. 마침 친구가 전화를 받기에 내가 누구인지를 밝힌 다음 더듬더듬 말을 꺼내려 하는데 친구가 허!허!허! 너털 웃음을 웃으며 어찌나 호방하게 전화를 받는지 메모대로 얘기를 이어 갈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화는 엉망이 되어서 어물어물 전화를 끊고 말았다. 전화통을 내려 놓고 전화건 것을 한참이나 후회했던 기억이 있다. ○국민들 부정·부패문제에 관대 대통령하면서 기천억원 씩을 꼬불쳐 놓았다가 감옥에 간 全斗煥 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이 출옥하던 날 풍경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얼마전 4,0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해서 잡혀갔다가 풀려나온 전직 국회의원의 출소장면도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그 사람의 표정은 막 국회의원에 당선이라도 된양 밝았고 더 없이 당당했다.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부정·부패문제에 지나치게 관대하다. 술자리에서 얘기를 하다 보면 표적사정을 얘기한다. 표적 사정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표적사정이면 나머지 부정한 사람도 빠짐없이 잡아내라고 해야지 명백히 범법한 사람을 보고 저 사람만 억울하다는 식은 곤란하다. 앞선 나라에서는 점심 한끼 먹는 것도 문제가 되는 세상인데 우리는 아직도 전세기에 살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이 문제에 대한 교육을 해야한다. 교육을 한다고 부패한 공직자가 아주 없어질까마는 우리 국민들은 부패문제에 의외로 문제의식이 없어 보인다. 청백리 얘기는 가끔 책에서 읽었고 통쾌한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극장에서 보았으되 부정·부패문제를 체계적으로 교육 받은 일이 없다. 학교에서,가정에서 부패학(腐敗學)을 교육해야 한다. 부패문제는 바로 국민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부패의 부도덕성을 교육해야 하고 부패가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부패가 국민 모두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를 교육해야 한다. IMF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한보와 기아 사태가 다 부정·부패에서 비롯된 일이다. 뇌물은 정치인,공무원,은행원들이 받았지만 그 천문학적인 빚은 모두 국민의 몫으로 남게됐다. ○부패 인지 지수 세계 43위 국제투명성기구(TI)가 얼마전 발표한 98년 각국 부패인지 지수에 의하면 조사대상 85개국중 한국은 짐바브웨이와 함께 세계 43위로 돼있다. 우리 국민의 부패 불감증 지수는 이보다도 더 나쁠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는 부패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반부패 운동이 이미 국제적으로 연대화(連帶化)하고 있다. 부패한 나라는 국제적 신인도가 떨어지고 그런 나라엔 투자도 교역도 하기어렵게 돼가고 있는 것이다. 부패는 더 이상 개개인의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 과제요 국민적 숙제다. 부패학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
  • 국감 일일 베스트5

    ▷재경 김재천(한)◁ 자동차 급발진사고 대책 마련하라 ­자동기어를 장착한 자동차의 급발진사고가 급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토미션 차량을 보유하고 있거나 구매하려는 소비자들의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이유로 자동차 구매가 위축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급발진사고의 원인 규명과 대책마련이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통일외교 이건개(자)◁ 북한 찬양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방지 대책 세워야 ­김정일의 활동상과 최근 개정된 북한 사회주의 헌법 등을 소개한 것은 너무 전문적이다. 통일부는 관계 부처와 협의해 인터넷을 이용한 대남공작을 차단할 수 있는 방안을 조속히 강구해야 한다. 또 올바른 통일교육을 위해서는 대북관계 내용에 대해서도 국민들에게 알릴 것은 바로 알려야 한다. ▷통일외교 이영일(국)◁ 한국어 초청사업 중복 피하라 ­한국국제협력단과 한국교류재단이 외국인을 초청하면서 중복된 사례가 있다. 외국인 초청 한국어 교육은 여러 기관에서 시행하고 있어 중복 문제와 함께 예산 낭비도 우려되고 있는 실정이다. 같은 사업을 하는 기관간에 업무가 조율되거나 어느 한 기관이 센터가 돼 업무를 총괄해야 한다. ▷산업자원 김명규(국)◁ 가스요금 불합리한 요금체계 시정하라. ­전국의 도시가스 도매요금이 동일하게 책정돼 있는데도 지역마다 소매요금 차가 크다. 특히 산업용은 지역별,용도별로 3만8,000원에서 4,600원까지 차이가 난다. 각 시·도가 요금체계를 불합리하게 책정해 가스회사의 배만 불리는 격이다. 요금체계를 재조정하고 부당이득은 소비자에게 환원해야 한다. ▷환경노동 권철현(한)◁ 장애인 고용 의무비율 준수하라 ­장애인 고용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노동부 및 산하 기관이 장애인 고용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현재 근로복지공단의 장애인 고용률은 1.8%로 노동부산하기관중 유일하게 법정비율을 밑돌고 있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은 10.39% 산업인력공단 2.23% 산업안전공단 2.01%다.
  • 중앙소프트웨어/산업자동화용 SW개발(경쟁력으로승부건다:7)

    ◎공장자동화 SW 독자개발/공정별 제어시스템 컴퓨터 한대에 국내 1,000업체·日 도시바 등에 납품/美 하니웰과 어깨 나란히… 세계 ‘빅5’ “타이 빵!” “하오 질러!”(정말 훌륭합니다) 지난달 초 한국수자원공사 통제실에서는 중국의 재벌급 민영회사인 동방그룹 관계자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한강수계의 댐들과 수도사업소에서 나오는 수자원 데이터를 분석해 순간순간 최적의 상황으로 물을 관리하는 첨단시스템에 홀딱 반해 버린 것. 지난달 29일 동방그룹은 이 시스템의 제작사인 중앙소프트웨어(주)와 ‘동방CSC시스템 유한공사’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중소기업이 이른바 ‘글로벌 경영’에 성공한 보기 드문 예다. 중앙소프트웨어는 공장 공정 빌딩 등 산업자동화용 소프트웨어와 컴퓨터를 만드는 회사다. 주력 제품은 공장 자동화의 핵심인 ‘공정 감시·제어 소프트웨어’(PCMS)와 산업용 컴퓨터 ‘마이크로 패널’. PCMS는 기계별,공정별로 흩어져 있는 제어시스템을 통합,한대의 컴퓨터로 관리할 수 있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고 마이크로 패널은 PCMS기술을 하드웨어에 옮겨심은 산업용 컴퓨터다. 모두 독자개발한 것이다. 최근에는 한차원 높인 실시간 통합 감시시스템을 개발,국내 산업자동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다. 崔사장이 회사를 세운 것은 산업자동화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83년. 26세때였다. 고등학교와 군대에서 배운 컴퓨터 지식만 믿고 뛰어든 ‘맨발의 청춘’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공장자동화 기계를 우리 실정에 맞게 고치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우수인력을 유치하고 매출의 30%를 연구개발에 쏟아부은 결과 이제는 미국의 하니웰,랜디스기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산업자동화 분야의 ‘빅 5’로 우뚝 섰다. 국내에 납품하는 곳은 1,000여 업체에 3,000여 사업장. 93년 5억원이던 매출이 96년 60억원으로 뛰었고 올해엔 12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96년부터 국내 최초로 일본 도시바에 마이크로 패널을 수출하고 있다. 도시바는 이 제품에 자사 상표를 부착,‘차세대를 이끌 멀티 채널,멀티 드라이버 실현’이라는 광고카피로 높은 판매실적을 올리고 있다.운용소프트웨어의 일본어판에 대해서는 판매가의 10%를 로열티로 받는다. 내년도 동방CSC 합작법인의 매출목표는 600억원. 崔사장은 “축적된 우리의 기술과 건설 항만 금융 식음료 등 20여개 계열사를 갖추고 있는 동방그룹의 마케팅력이 합해지면 수년안에 중국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 얼굴없는 노동자시인 박노해:하(금지문화금지인생이제야말한다:13)

    ◎암울한 ‘불의 시대’ 지나 이제는 감싸고 흐르는 ‘물의 시대’ 같은 느낌/약한자들 고통과 슬픔 외면못해 뛰어든 노동운동/이념에 갇혔던 ‘사노맹’ 합리적 진보운동 밑거름 기대/정직한 성찰과 반성만이 희망의 미래 열어갈것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핵심간부로 활동하다 9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지난 8·15특사로 석방된 박노해씨(40·본명 朴基平).시골출신의 노동자로 시작해 급진 이데올로기의 핵으로 활약하다 사형구형까지 받아 7년간 격리된 뒤 준법서약서를 쓰고 다시 햇빛을 보게 된 인물이다.출감직후부터 줄곧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며 강연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노해씨를 만나 보았다. ­91년 구속될 때와 요즘 분위기의 차이는. ▲당시가 어두운 시절 불덩어리처럼 자기 몸을 던지는 ‘불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열정을 내면화시켜 물처럼 흘러가는 ‘물의 시대’같은 느낌이 든다. ­처녀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글들은 언제 쓴 것인가. ▲선린상고 야간 시절 체험한 공장의 불쌍한 삶과 군제대 후 함께 부대끼던 공장과 버스회사 동료들의 짓눌린 모습들을 가식없이 담은 것들이다.작업장과 기숙사 구석에서 작업장 일지 등에 적어놓은 것들이었다. ­시집 ‘노동의 새벽’을 자평한다면. ▲시대적 서정과 비전이 문학적 형태로 충분히 제시됐다고 본다.사회의 모순들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현장 분위기를 솔직하게 담았다. ­어린시절 작가가 꿈이었다는데 노동운동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는. ▲어렸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그러나 서울에 온 후 공장에 다니면서 계속되는 특근·철야잔업에서 동료들이 손을 잘리는 급박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이때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기로 했다.노동운동 아닌 노동운동부터 시작한 셈이다. -얼굴없는 시인으로 집필활동에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나만의 책상,나만의 펜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단 한순간도 편안히 앉아서 글을 써본 적이 없다.원고 전달때도 항상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85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에 가입한뒤엔 급진 노동운동가로 바뀌고 노동해방문학에선 정치적인 색채까지 보이는데…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대로 일하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날 때였다.모순은 갈수록 첨예해지면서 분신과 구속 시위 등 항쟁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람이 불에타 죽는 상황에서 시만 쓴다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명을 부인하다 신동아 90년 12월호에 자전수기를 보내 신원을 밝힌 이유는. ▲86년 5·3인천사태로 구속된 金모씨가 조사과정에서 내 본명을 실토했다.수사기관에서 전담반까지 구성해 추적하는 상황에서 동료 노동자들이 박노해로 몰려 희생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수사기관에서 이미 신원을 파악하고 있는데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판단,이름을 밝혔다. ­사노맹의 핵심사상은 무엇이었나. ▲사노맹은 80년 당시 군사독재하에서 민주주의 민족통일 그리고 노동자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노동해방을 온몸을 다바쳐서 밀고 나갔던 80년대 시대 정신의 절정이었고 시대의 최전선에서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사노맹의 실패 원인은. ▲시대변화에 너무 늦었고 실천과정에서 너무 조급한 게 한계였다.급진 사회주의에 갖혀 당시 정권을 여전히 군사독재로 규정한 채 변화를 보지 못했다. ­지금 사노맹에 대한 생각은. ▲사노맹 사건은 500명이 구속되고 형량도 2,000년이 넘는 가혹한 희생을 치렀다.그동안 침묵 절필 삭발정진을 통해 책임을 지려했다.사노맹 관련자들 이 삶의 모범을 통해 극좌이념에 치우친 후배들을 진정하고 합리적인 진보운동으로 이끌어 가는 훌륭한 일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93년 옥중시집 ‘참된 시작’은 어떻게 나왔나. ▲91년도 대법원 상고 이유서를 쓸때 이미 창비(창작과비평사)에 원고가 넘어가 있었다.진보운동 쪽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 조금 늦춘 것이다. 극우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모두 돌멩이를 맞았다.합리적 진보쪽에선 올바른 변화라는 평을 얻었다. ­‘참된 시작’에서 사상 갈등과 자기반성이 두드러지는데 그 배경은. ▲분단과 군사독재라는 절대폭압의 조건 속에선 작은 권리 하나를 위해서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했다.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붙든 게 사회주의였다.70∼80년대 짐승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살려내기 위해 야수처럼 싸웠다.그러나 사회주의 붕괴를 정직하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를 국민 앞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93년 6월호 ‘사회평론’지에 낸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평에선 진보진영의 반성을 주장했는데… ▲철저하고 정직한 자기성찰과 책임 없이는 미래의 민주개혁과 진보적 운동이 불가능하다.새로운 진보이념과 비전,운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목숨걸고 참구(參究)해 나가자고 한 것이다. ­계획된 작품은. ▲내년 여름쯤 이 시대의 역할과 비전에 대한 생각을 담은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올 겨울엔 6년만에 세번째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다.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동양사상과 서구사상,사회적 실천과 내적 영성(靈性) 등 양극대립을 모두 담을 생각이다. ◎격별의 글들/“그래 결국은 사람만이 희망이다”/처절한 노동현장 ‘시다의 꿈’/강렬한 저항·분노 ‘노동의 새벽’/격랑뒤의 깨달음 ‘사람만이…’ ‘시다의 꿈’(83년 시동인지 ‘시와경제’에 발표)에서 ‘사람만이 살길이다’(97년 해냄刊)까지­.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활동하다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박노해씨의 글들은 험난했던 역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언들이다. 박노해란 이름을 처음 알린 ‘시다의 꿈’은 노동현장의 비극성을 그나마 우회적으로 들이민 처녀시였다.“…/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아직은 시다/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하나로 연결하고 싶은/시다의 꿈으로/…”. 박노해를 ‘한국문학을 관통하는 80년대 최고의 문제작가’로 자리매김한 시집 ‘노동의 새벽’은 훨씬 거칠어진다.“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칠은 땀방울 피눈물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쓰린 가슴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노동의 새벽)“올 어린이날만은/안사람과 아들놈 손목잡고/어린이대공원이라도 가야겠다며/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손목이 날아갔다”모두 열악한 작업조건과 억눌린 사람들의 직설적인 고발이다. 그러나 옥중시 ‘참된 시작’과 지난해 발표한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살길이다’에선 사상의 갈등과 반성,그리고 새 생활에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마저 갖게 된다.“뜻과 주장은 좋으나 나타나는건 앙상하고/노동해방 계급투쟁 당파성 혁명적 관점…/거 제껴두자니 아깝고 먹자니 뼈만 걸리는/꼭 닭갈비와 같은 존재/지금 우리 마치 닭갈비 같은 처지는 아닌가/…”(참된시작중 닭갈비)“희망찬 사람은 그자신이 희망이다/길찾는 사람은 그자신이 새길이다/참좋은 사람은 그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사람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사람만이 희망이다중 다시) 감옥에서 500여편의 작품을 구상했다는 박씨.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에서 이젠 만날수 있는 시인으로 바뀌어 새 작품을 구상중이다.80년대 노동계와 시단을 뒤흔들었던 박씨의 새 작품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민주열사 열전:10/분신 택시기사 朴鍾萬(정직한 역사 되찾기)

    ◎노동운동 탄압 항거 84년 분신/군사정권 反노동자적 행태에 격분/민주노조 파괴공작 목숨 바쳐 제동 84년 11월30일 오전 11시30분. 조인식 여사(46·국민회의 민원부국장)는 문밖에서 나는 자동차 급브레이크 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남편 회사차였다.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말았구나”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들어선 순간 조여사는 눈을 감았다. 시커멓게 그을리고 온몸이 부풀어오른 알몸의 사내는 바로 자신의 남편 朴鍾萬이었다. 물을 달라고 소리지르던 그는 부인을 알아보고는 거듭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회사에서 할일이 남았으니 퇴원시켜달라고 떼를 썼고,옆에 있던 동료들에게는 빨리 회사로 가 일을 수습하라고 재촉했다. “내 한 목숨 희생되더라도 동료기사들의 희생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몸에 불을 붙였던 택시기사 朴鍾萬. 그는 저녁 8시50분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회사 노조어용화 기도 무엇 때문에,누구를 위해서 그는 죽어야 했을까. 노조대의원이었던 朴鍾萬은 소속회사인 민경교통이 노조사무장 이태길씨를부당 해고하자 이에 항의하는 단식농성 끝에 분신자살했다. 당시 이씨는 조합주택 기금 유용 비리의혹을 받고 있는 노조위원장을 대신해 노조를 열성적으로 이끌고 있었고 회사는 사소한 이유를 들어 그를 해고했던 것이다. 그외에도 노사간에는 몇가지 요인으로 갈등이 쌓여 있었고,여기에 노조위원장의 비리의혹과 어용화,노조의 분열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회사는 그 이전부터 3차례에 걸쳐 노조간부를 해고하고 정상적인 성과급 지급을 거부하는 등 상습적으로 부당 노동행위를 자행해 왔었다. 또한 고참기사들 중심인 상조회 회원들을 노조에 가입시켜 노조 분열을 조장하고 노조의 어용화를 기도했다고 한다. 朴鍾萬은 노조위원장도 사무장도 아닌 대의원에 불과했지만 그런 부당해고를 통한 노조파괴공작을 방치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해고통지서가 게시판에 붙자 鍾萬이는 격분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비단 자신들만이 아닌 전국의 택시기사들이 당하는 문제라고 보았어요”함께 농성에 참여했던 안을환씨(48·개인운송조합 은평지부 차장)의 회고다. 안씨는 그가 숙직실에서 운행일지 뒷면에 무언가를 적고 있어 무얼 쓰느냐며 다가가자 “알 필요 없다”며 찢어 잠바주머니에 넣었다고 말했다. 그때 쪽지 앞부분에 “내 한목숨 희생되더라도…”란 글귀를 분명히 보았으며 안씨는 쓸데 없는 생각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유서로 보이는 그 쪽지를 찾으려고 잠바를 뒤졌지만 없었다고 했다. 당시 동료들은 朴鍾萬이 유달리 의협심과 동정심이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동료 일이라면 발벗고 뛰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그를 먼저 찾았고 따라서 동료들로부터 ‘대장’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고 한다. 동료 부인이 중병이 걸리자 아이를 자신의 부인 조씨에게 맡겼고 적금을 깨 급한 일을 당한 동료를 돕기도 했다. 과로로 2개월간 쉬고 나온 동료가 한푼의 월급도 받지 못하자 자기일은 팽개치고 동료일에만 매달려 당사자가 그만두자고 하기까지 했다. ○갖은 회유·협박 물리쳐 회사는 모든 기사들이 따르는 그를 회유하려고 새 차를 우선 배정하기도 했지만 즉각 거절당했다. 역시 함께 농성에 참여했던 배철호씨(48)는 “朴鍾萬은 진실 하나로 조합에 참여한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무장의 해고가 결정되기전 전무를 찾아가 ‘해고’가 아닌 ‘자진사퇴’만이라도 허락해달라고 빌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당시 택시회사에서 해고되면 회사마다 비치돼 있는 이른바 ‘취업카드’에 기록됐고 ‘불순분자’로 찍혀 택시를 몰 수가 없었다. 그는 해고철회를 요구하며 회사정문 앞에 가마니를 깔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동료기사인 배철호 안을환씨도 곧 합류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던 한 회사 고위간부는 추위때문에 동료들이 갖다준 담요까지 빼앗아 갔고,“너희들도 오래 못갈 것”이라고 협박했다. 분신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함께 농성을 하던 두 동료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노조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석유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배씨가 낌새를 채고 그를 부른 순간 朴鍾萬은 시뻘건 불덩어리가 되어 창문을 깨고 튀어나왔다. 당시 한 일간지는 사설에서 이 사건의 배경으로 노사대립을 적절히 수렴할 만한 제도적 장치 미흡과 분규 해결과정에서의 기업과 정부의 진지하지 못한 자세를 꼽았다. 그러나 이것은 핵심을 벗어난 ‘점잖은’ 분석이었다. 실은 독재정권 유지의 자양분인 정경유착에 의한 착취구조와 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적 시각이 근본 원인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그 이전부터 노동자의 자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왔다. 정보기관이나 행정관청의 노동운동에 대한 눈에 띄지 않는 감시와 통제,신규노조 설립 신고 반려 및 어용노조 결성 유도,임금인상투쟁에의 경찰 개입 및 민주노조 파괴행위 등이 일상화돼 있었다. 朴鍾萬 열사는 민경교통 노조사무장 이태길씨가 아닌 전국 택시회사의 부당해고와 노조탄압,독재정권의 반노동자적 행태에 항의해 분신했던 것이다. □朴鍾萬 열사 연보 ▲1948년 부산출생 ▲68년 서라벌고교 3년 중퇴 ▲82년 (주)민경교통 입사 ▲83년 노조 복지부장 ▲84년 11월30일 분신 ◎가족·동료들 그후/부인 조인식 여사 민주화투쟁 혼신/동료 이태길씨 충격 딛고목회의 길 朴鍾萬 열사의 죽음이후 부인 조인식여사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가 죽었을때 31살의 평범한 운전기사 아내였던 조여사는 지금 집권여당 민원부국장으로,국민들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같이 고민하며 해결점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당시 장례식때까지만 해도 기가막히고 경황이 없어 죽음의 의미 같은 것에는 크게 신경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을 일산공원묘지에 묻고 돌아오면서 억울함이 복받쳐 올라왔다고. 그때 노동부는 남편 죽음의 배경을 단순한 노조 내분과 朴鍾萬의 개인적인 결함으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조합장과 사무장의 실권 장악 다툼에서 희생양이 됐다고 주장하고 朴鍾萬이 전과 3범이라는 사실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전과라는 것이 하나는 고등학교때 열차역 앞에 있는 자재를 엿바꿔먹은 행위였고,나머지는 간이매점을 운영할때 옆집 사람과 물품인수과정에서 싸움이 붙었던 것,민경교통에서 동료운전사의 사고로 인한 손해배상 문제로 회사측과 다툼이 있었던 것이었다. 조여사는 그때부터 남편의 명예회복에 직접 나섰다. 같은 처지에 있던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민주화투쟁 및 노동운동 현장에 악착같이 나갔다. 또 박종만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추모사업과 함께 운수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담는 ‘운수노보’를 발행했다. 당시 朴鍾萬과 함께 단식농성을 했던 안을환씨는 그의 죽음이후 노조위원장을 맡아 근무여건 개선에 앞장서다 4년후부터 개인택시를 몰고 있다. 분신의 직접적 원인제공자가 됐던 사무장 이태길씨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노동 자체가 살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그것이 죽음으로 연결됐다는 사실이 그를 평상으로 돌아가게 하지 못했다. 영안실에 朴鍾萬이 내걸었던 요구조건을 내걸다 경찰서 정보과로 붙들려 갔던 그는 1년여 동안 기도원을 돌며 기도에만 열중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 신학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서울 응암동 응암중심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하고 있다. ◎당시 택시기사 근무여건/회사마다 ‘취업카드’ 비치 노조활동 방해/사납금 과중으로 사고율 다른 車의 4배 당시만 해도 택시기사는 구조적으로 회사측에 한없이 무력했다. 사용자와 근로자의 종속관계에서,‘돈은 주는 대로 받고 일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전근대적인 의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곳중의 하나가 택시회사였던 것이다. 우선 노조원들은 해고 앞에 무력한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이유가 회사마다 비치돼 있던 ‘취업카드’에 ‘해고’라는 단어가 기록되면 택시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朴鍾萬씨처럼 해고가 아닌 ‘자진 사직’을 시켜달라고 애원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또 운전사들,특히 고참 운전기사들이 기업주에 쉽게 굴복하는 것은 대부분 기사들의 꿈인 개인택시에 대한 욕심때문이다. 개인택시를 몰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무사고 운전기록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하는데 회사측의 협조나 배려가 꼭 필요한 것이다. 또 회사에 노조가 있으면 회사를 팔아먹기도 힘들고,따라서 값도 깎이기 때문에 업주들은 기를 쓰며 노조설립을 막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노조를 통해 업주에게 대항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기사들은 상당히 열악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했다. 다른 차량에 비해 교통법규 위반이나 과속, 난폭운전을 많이 하기 때문에 사고빈도가 매우 높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택시는 다른 차량에 비해 4배 정도 높은 사고율을 보였는데 과중한 사납금이 주요 원인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운전사들은 병도 많아 78.5%가 위장병을 앓고 있으며,시력장애는 40%,신경성 질환 38.5%,성욕감퇴 23.1%라는 조사결과가 있었다.
  • 서류 직접 복사·햄버거 점심 예사/OB맥주 데스멧 사장 話題

    ◎격식 구애 받지않고 필요한 일 스스로 처리/퇴근시간 지나 자리지키는 직원 이해못해 “근무시간에 신문을 보다니 이해가 안됩니다” 지난 14일 OB맥주가 벨기에 인터브루사와의 합작회사로 재탄생하면서 사장으로 부임한 벨기에인 토니 데스멧씨(50).그가 얼마전 사무실에서 무심코 신문을 읽고 있던 사원을 발견하고 던진 말이다. 사상 처음으로 국내 대기업에 외국인 사장이 앉은 지 이제 보름.사내에는 문화차이에서 오는 갖가지 에피소드가 속출하고 있다.무엇보다 신임사장의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면모가 화제다.사원들만 있는 사무실에 불쑥 들어와 필요한 것을 가져가는가 하면,직접 서류를 복사하기도해 비서나 직원들을 당황케 한다. 데스멧 사장은 점심시간을 따로 갖는 문화를 생소하게 여긴다고 한다.서구에서는 대부분 점심시간에 업무를 계속하며 빵이나 샌드위치 등으로 간단히 때우기 때문이다.데스멧 사장 역시 사장실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대신하는 경우가 다반사다.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직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그가 이해하기어려운 부분이다.직원들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의사소통이다.영어로 보고를 하다 보니 영어실력이 딸리는 직원들은 상사나 부하직원을 통해 대신 결재를 받는 일도 생긴다. 모든 보고서는 영문으로 대체됐다.이 때문에 직원들은 책상위에 영어사전등 외국어 전문 서적을 4∼5개씩 쌓아놓고 영작과 씨름하고 있다.
  • 존 실버 총장(朴康文 코너)

    미국의 존 실버 박사는 윤리학자,법철학자,그리고 권위있는 칸트철학 연구자다. 미국 트리니티 대학교를 나와 예일 대학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일 대학교,텍사스 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고,71년 보스턴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다른 대학 출신이 총장으로 왔다고 누구도 트집잡지 않았다. 96년까지 26년동안 보스턴 대학교 총장으로 있었는데,그가 너무 오래 그자리에 있다고 누구도 헐뜯지 않았다. 그는 총장직을 떠난 뒤 이사장이 되었으면서도 교수로서 전공분야의 강의를 맡고 있다. ○美 대학사회 통렬히 비난 그는 촘스키 같은 정치적으로 좌파적인 교수들을 맹공했다. 이는 진보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던 대학사회에서 인기가 없는 행동이었다.그가 총장직에 있으면서 89년 ‘직사’(直射)라는 책을 써서 미국사회와 미국 대학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했다.누구도 이런 처신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도 별난 대학교 총장이었다. 그의 글은 직설적이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좌충우돌로 자기 주장이나 비판을 폈다. 대학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이를 실천에 옮겼다. 총장직에 있는 동안 보스턴 대학교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그는 교사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교사를 양성하는 미국의 교육대학원들은 인기가 없어 지원자가 적어지자 합격기준을 자꾸 낮추었다. 이 때문에 우수한 학생은 교육에 뜻이 있어도 입학하려 들지 않았다. 실버총장은 보스턴 대학교 교육대학원의 합격기준을 놀랄 정도로 올려버렸다. 당연히 정원을 채울 수 없었다. 이런 엉뚱한 조치를 정부의 누구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의 과감한 시도는 성공한다. 우수한 학생을 모은다는 소문이 나자 몇 해 지나지 않아 성적좋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교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훌륭한 연구업적을 남기는 교수보다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교수가 더 중요하다. 신입생들을 경험없는 조교들에게 내맡겨서는 안된다. 강의실은 비밀스런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곳이 아니다. 강의는 공개되어 동료교수와 학생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가 지적한 교수사회의 병폐를 보자. 학장이나 총장이 의욕적으로 개혁하려 하면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교수들이 기어코 몰아낸다. 새로운 학문적 견해를 가진 젊은 교수에게 늙은 교수들이 자리를 주려 하지 않는다. 한번 전임이 되고 나면 나태해지는 교수들이 있다. 강의하거나 학생을 지도하기보다는 학교 밖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자문담당이 되기를 더 좋아하는 교수들이 많다. ○오른손 장애 딛고 성공 그곳도 교수사회는 한국과 비슷한 구석이 있구나 싶은데,그래도 실버박사 같은 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만은 크게 다른 것 같다.무엇보다도 정부가 대학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나는 실버박사가 총장일 때 그의 저서에 서명을 받으려고 하버드 대학교 앞 서점에서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왼손으로 서명해준 뒤 또 왼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오른손은 없었다. 손 하나가 없다고 해서 대학교 총장직을 수행하는 데 아무런 지장은 없겠지만 그때 놀라움은 컸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오른손이 왜 없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전쟁터에 나가서 다쳤다면 용사의 표상이다. 어려서부터 그랬다면 어려움을 극복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KAL기 비상 착륙/김해서 착륙중 기어 고장

    ◎승객 186명 피해는 없어 8일 상오 11시47분쯤 승객과 승무원 등 186명을 태우고 서울을 출발,김포공항에 내리려던 대한항공 KE 1121편(기장 엘타렘코·39·러시아) 여객기가 착륙기어 고장으로 비상착륙을 시도하던중 타이어 6개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제주발 부산행 1006편등 항공기 4편이 회황하고 20여편의 항공기가 결항됐다. 김포공항은 하오 2시쯤부터 정상화됐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여객기가 40여분간 김해공항 상공을 선회하는 바람에 승객들이 불안에 떨었다. 사고기는 이날 상오 10시15분쯤 김포공항을 이륙했으며 착륙을 불과 15분여 남기고 여객기 뒤쪽에 있는 왼쪽 착륙기어 4개와 오른쪽 착륙기어 2개가 고장을 일으켰다. 사고기는 30여분동안 공항상공을 선회하며 자체수습을 시도했으나 연료부족으로 당초 예정보다 40분이 늦게 비상착륙을 시도했다.착륙후 600m를 달리던 여객기는 기어고장으로 바퀴 12개가 파열된채 활주로를 900여m 미끄러지다 활주로 북쪽 끝인 2,100m 지점에 멈춰섰다. 대한항공과 부산지방항공청은 사고 여객기의 착륙기어가 작동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정비불량일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사고기의 블랙박스를 회수,자체 원인 조사에 들어갔다.
  • 하도급 위반 과징금 업체 公共공사 맡기 어렵다

    ◎무조건 벌점 입찰심사 타격 공정거래위는 3일 하도급법을 위반한 업체에 물리는 과징금이 정부가 발주하는 공사 낙찰에 끼치는 불이익을 분석한 자료를 내놓았다. 앞으로 하도급법을 위반한 사업자가 위반사실을 자진해서 시정하더라도 산출된 과징금의 50%를 물어야 하는 등 하도급제도의 운영이 대폭 강화되면서 과징금을 부과받은 업체에 주어지는 벌점이 정부발주공사의 입찰참가자격 사전심사기준(PQ) 및 적격심사 때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도급법위반 사업자가 위반사실을 자진 시정할 경우 과징금을 부과하지 않았지만 이번 강화방안에 따라 위반사업자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모두 과징금이 부과된다. 과징금 부과대상은 하도급법상 원사업자인 일반건설업체들이 발주자로부터 선급금을 지급받고도 15일 이내에 하도급업체에 대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하도급 대금을 법정지급기간인 60일 이내에 주지 않는 불공정 대금지급행위가 주를 이룬다.60일 이상짜리 장기어음을 줘 어음할인료를 부담케 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하도급법을어기면 돈은 돈대로 물고 굵직굵직한 정부발주 공사는 따내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PQ심사는 재경부의 회계예규에 따라 100억원 이상인 교량,공항,항만,공용청사 등 22개 공사를 적용대상으로 경쟁입찰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미리 심사·선정하는 제도.시공경험(33점),기술능력(34점),경영상태(33점)를 각각 점검한다. 하도급법 및 건설산업기본법을 위반하거나 우수시공업자로 지정될 경우 최고 20점까지 점수를 가산해 주거나 감점한다.60점 이상인 자 가운데 20% 범위 안에서 상향조정이 가능하도록 최근 개정됐다. 적격심사는 58억3,000만원 이상 공사에 해당되며(99년 2월부터는 30억원 이상으로 대상 확대)낙찰자 선정시 예정가격 이하로서 최저가격으로 입찰한자 순서로 계약이행능력을 심사하는 제도이다.공사수행능력(35점),시공계획 적정성(35점),입찰가격(30점) 등 3개 항목에 대해 심사한다.
  • 민주열사 열전:4/金相眞 서울농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할복 자결… 反 유신의 魂으로 부활/학생운동사 목숨 던진 첫 인물/꺼져가던 투쟁의 불씨 되살려/암울한 시대 희망의 새싹 틔워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합법을 가장한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75년 4월11일 상오 11시. 서울대농대 4학년 金相眞은 수원에 있는 농대 캠퍼스에서 그렇게 ‘양심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격정의 순간이었지만 오히려 차분했다. 그러나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는 비장함에 묻혀 이내 사그라졌다. 선언문 낭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이 보잘것 없는 생명,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는 말이 나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 그는 품속에서 과도를 빼 치켜들었다. 그리고 하복부를 깊게 찔러 위로 그어올렸다. 그는 친구들에게 들려 택시까지 가며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수원도립병원에서 1·2차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이송중이던 12일 상오 8시55분 그는 앰뷸런스 안에서 눈을 감았다. ○죽어가며 “애국가 불러주오”金相眞 열사는 민주화투쟁 학생운동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진 최초의 인물이다. 주변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죽음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했고,그 파장까지도 충분히 예측했던 것 같다. 75년 2월 朴正熙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에서의 승리를 내세워 강경으로 선회했다. 정부가 약속했던 구속학생과 교수들의 복학·복직을 불허하고 극심한 언론탄압을 일삼는 등 유신체제가 오히려 폭악화되자 그는 어떤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미온적인 동료·후배들의 자세도 그를 피할 수 없는 ‘결단’으로 밀어댔다. 그는 ‘양심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꼼꼼히 작성했다. 그리고 4월9일 ‘인혁당 재건 사건’으로 8명이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기가 무섭게 사형당했다는 소식에 치를 떨며 과도를 구입했다. 인혁당사건은 10년 뒤인 95년 모방송사가 법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사법사상 ‘가장 치욕스런 판결’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김상진기념사업회 安鍾健 회장(50·방송대 교수)은 “相眞이는 복학후 되도록 시위에서 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74년말부터 급격히 암울해지는 시대상황에 매우 당혹스러워했고,무언가 돌파구를 찾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회고했다. 安회장은 金相眞 열사와 고등학교 및 대학 같은 과 동기다. 그는 또 “相眞이가 할복 전날 밤 자신을 찾아와 칼을 보여주며 가족과 애인 걱정을 했다”고 전한다. “相眞형은 항상 ‘이래선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렸어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때다’‘내가 해야할 것 같다’고 결의를 나타내기도 했구요”후배 鄭鉉敦씨(축산·74학번)의 회고다. ○시위 확산에 긴급조치 9호 선포 朴正熙 정권은 金相眞의 죽음이 반유신의 상징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숨을 거둔 지 15시간만에 장례식도 없이 화장하게 했으며,서울대 농대를 사실상 폐쇄했다. 각 대학에도 휴교·휴강 조치를 내려 4월 중순까지 25개 대학이 전면 휴강에 들어갔으며,시위 주동자의 대량 연행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는 5월13일 체제에 관한 어떤형태의 반대의견이나 행동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그러나 서울대생 1,000여명은 5월 22일 관악 캠퍼스에서 기어이 ‘金相眞 열사 장례식’을 거행하고 긴급조치 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5·22사건’이다. 朴炯圭 목사는 95년 金相眞 20주기 행사때 “모든 사람들이 좌절할 때 꺼져가는 민주화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긴 이가 金相眞 열사”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튼 민주화와 정의의 물길을 우리가 제대로 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반문했다. 당시 5·22사건으로 수배됐던 金槿泰 의원(국민회의)은 “金相眞형과 그 사건은 아직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며 “진정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제의 폭압아래 똑같은 나이(27살)에 옥사한 尹東柱의 ‘서시’는 그의 이상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金相眞 열사는 尹東柱의 ‘서시’처럼 한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간직한 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민주화투쟁은 오늘의 민주주의로 승화됐고 밝은 미래의 희망으로 존재할 것이다. ◎어머니 朴載娟 여사의 통곡/“정부에 의한 명예회복 평생소원” “에미로서 자식 마음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혼자 고통을 겪다 가게 했어요…” 金相眞 열사의 어머니 朴載娟 여사(80)가 아직도 못내 아쉬워하는 점이다. ‘군대까지 다녀와서 데모에 끼겠느냐’며 항상 어머니를 안심시키던 아들. 그가 죽자 슬픔과 원망이 뼈에 사무쳤지만 朴여사는 차차 목숨을 던져야 했던 아들의 장한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相眞이는 유난히 정이 많고 심지가 깊었어요. 친구를 무던히도 좋아했지요. 친구들을 몰고와 내가 음식상을 내오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어요” 어머니는 95년 20주기 행사때 손수 음식을 장만해 벽제 묘소로 가져가 100여명의 아들선·후배 동료들을 먹였다. 朴여사는 아들이 죽자 병원에서 “제발 화장하지 말고 묘를 쓰게 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은 포항에 있던 맏아들을 불러올려 억지로 설득해 화장을 강행했다고. 그녀는 “화장터로 쫓아가 ‘우리가 뿌릴 터이니 유골단지를 달라’고 해 중앙청 옆 법륜사에 감췄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후에 金相眞 열사는 벽제공원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朴여사는 현재 서울 갈현동 자그마한 한옥에 혼자 산다. 신경통과 위경련을 앓고 있지만 심하지는 않은 듯했다. 고려컨테이너 부사장인 맏아들 상운씨와 대한투신 원주지점장으로 있는 둘째아들 상근씨 등 8남매가 모두 건실하게 살고 있어 흐뭇하다고 했다. 그녀는 “아들이 공식적으로 정부에 의해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죽기 전에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후배 鄭赫基씨의 맺힌 恨/“긴 겨울 몰아낸 ‘민주햇살’ 빛 봐야” 김상진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鄭赫基씨(42·산야농산 대표)는 “相眞이 형이 죽은 이후 학생들은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재야나 지식인들이 자기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金相眞 할복사건이 유신독재정권이 내리막길을 걷는 시대적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朴正熙 정권의 폭압이 절정에 달해 정권 말기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죠. 공권력으로는 도저히 국민의 항거를 막기 힘들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건 당시 축산과 새내기였던 그는 金相眞 열사가 할복하는 순간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뒤에 있던 선배들은 그가 칼을 빼드는 순간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덮쳤지요. 그러나 정작 저는 ‘단순히 각오를 다지기 위해 빼들었겠지’했어요. 그런데 막상 할복하고 쓰러지자 정신이 멍하고 아찔했습니다” 그는 “그후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鄭씨는 지난 95년 기념사업회가 출간한 金相眞 열사 평전 “긴겨울 얼음뚫고’의 정리작업을 맡았었다. 3년이나 걸린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는 “죄책감에 대한 빚갚음의 의미도 있지만 相眞이 형의 진실이 진정한 역사로 기록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화가 후퇴하고 권력이 부패하면 언제라도 제2,제3의 金相眞이 나올수 있다”는 鄭씨. 그는 “全·盧 시대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며 “지금의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이 항상 경계해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金相眞 열사 연보 ▲1949년 金東壽·朴載娟씨의 3남6녀중 여섯째로 서울에서 출생 ▲1962년 혜화국민학교 졸업 ▲1965년 보성중학교 졸업 ▲1968년 보성고등학교 졸업,서울대농대 축산학과 입학 ▲1971년 군입대.경기 포천의 공병대에서 근무 ▲1974년 2학기 복학 ▲1975년 4월11일 서울대 수원농대 교정에서 유신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낭독하고 할복 자결 ▲1975년 4월12일 상오 8시55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도중 사망
  • 제주서 항공기 사고훈련/공포의 순간 번개구조 60분

    ◎“랜딩기어 고장… 활주로 벗어났다”/소방차 9대 출동… 10분여만에 진화/200명 비상탈출… 중상자 헬기 후송 승객 200여명을 태우고 서울을 출발한 가칭 태평양항공 소속 국내선 A300기가 제주공항에 착륙하던중 우측 랜딩기어 고장으로 활주로를 이탈하면서 화재가 발생했다. 관제탑으로부터 소방차 출동지시가 떨어지자 공항공단 소방차 6대와 해군항공대 소방차 1대가 사고현장으로 즉시 출동했다. 제주소방서 소방차 2대도 화재진압에 합류했다. 실제상황이 아니다. 18일 하오 3시부터 4시까지 한시간 동안 제주공항 계류장에서 실시된 항공기 사고처리 훈련 장면이다. 훈련은 가상 사고기에 연막탄이 터뜨려지면서 시작됐다. 붉은 연기에 휩싸였던 사고 항공기는 9대의 소방차가 분당 4만5,000ℓ의 물을 일제히 뿜어대자 10여분만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탑승객들은 승무원 지시에 따라 비상 탈출구를 통해 긴급히 빠져나왔고 기내에 남아있던 20여명의 사상자들은 인명 구조원들에 의해 응급처치장까지 옮겨졌다. 중상자 2명은 해경 구조헬기에 의해 지정병원으로 후송됐다. 사망자는 임시 영현안치소에 안치돼 가족들에게 통보됐다. 훈련에는 한국공항공단 제주지사,공항경찰대,제주해경,제주소방서,해군항공대,한국병원,제주시보건소,대한항공 등 관련기관이 참여했다.
  • 겉도는 사람들/주위 무관심에 사회적응 어려워(탈북 그 이후:6)

    ◎천신만고끝 밟은 자유의 땅 생각보다 냉랭/막노동 전전하다 한때 밀입북 기도까지 金亨德. 25세. 연세대 경영학부 2년 휴학중. 학년에 비해 나이가 좀 많다싶은 것 빼고는 특이할 것 없는 대한민국 보통 젊은이의 신상명세다. 그러나 이 짤막한 문구 뒤에 감춰진 金씨의 이력(履歷)은 평범한 젊은이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재입북하려다 적발된 비운의 탈북자’. 한동안 金씨의 이름앞에는 이같은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지금도 드러내놓고 아는 체하지는 않지만 이 때문에 金씨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밀입북 시도 당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임대주택과 직장 등 물질적으로는 훨씬 나아졌지만 남한역시 이상적인 민주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회의가 오더군요. 애써 외면했던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그만큼 더 커졌구요” 金씨는 자신의 밀입북 기도로 탈북자들에 대한 사회 인식이 나빠진데 대해 후회하면서도 당시 언론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남북한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한 떠돌이’로 몰아붙인 것에 대해서는 섭섭함을 나타냈다. 金씨가 밀입북 혐의로 체포된 것은 96년 2월. 인천에 정박중이던 중국 배에 몰래 숨어들어 밀항을 시도하다 적발됐다. 중국 베트남을 거쳐 목숨을 걸고 귀순한지 17개월만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金씨가 우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참작해 이례적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가벼운 형량을 내렸다. “그일 이후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원래 성격이 낙관적인 편이지만 세상을 좀더 밝은 쪽으로 보기로 작심했지요. 지금은 남한사람보다 더 남한사람 답다고 자부합니다” 74년 북한에서도 살기어렵다는 자강도 희천시에서 출생한 金씨는 평남 속도전 청년돌격대에서 물건을 훔치다 적발돼 노동교양소로 압송됐다. 혹독한 구타와 짐승같은 대우에 시달리다 93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金씨는 북경의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도 귀순이 거절된 金씨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홍콩을 거쳐 마침내 한국땅에 발을 디뎠다. 이 과정에서 두번이나 중국 베트남 보안당국에 붙잡혔다가 탈출했다. 그야말로 천신만고끝에 자유의 땅에 닿은 것이다. “탈출하면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긴 탓에 남들보다 빨리 남한사회에 적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구요. 그런데 정작 주위에서는 아무도 안 알아주는 거예요. 정말 미치겠더군요” 경제적인 어려움도 그를 실망시켰다. 정착금 1,400만원으로 경기도 부천에 방 하나를 얻어 남한 생활을 시작했으나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다. 신문배달,막노동,주유소 기름배달원 등을 전전해야 했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떤 환경이든 자기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이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다음 학기에는 복학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할 계획이라는 金씨의 얼굴에서는 2년반전에 볼 수 없었던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 현대自 곳곳서 폭력사태/조업저지 노조원들 관리직과 몸싸움

    ◎정리해고협상 이견 못좁혀 정리해고에 대한 노조의 반발로 23일째 조업이 중단되고 있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11일 회사측과 조업을 막으려는 노조원간에 폭행사태가 공장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날 상오 10시쯤 승용 3공장 품질본부장실에 둔기를 든 노조사수대 30여명이 난입,관리사원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내는 등 조업을 방해하자 노사간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또 엔진기어사업부 생산관리 사무실과 상용 4공장 생산라인에서도 관리사원과 사수대간의 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尹國鎭 품질본부장(54)이 각목에 뒷머리를 맞아 울산대병원으로 후송되는 등 관리직사원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한편 노사는 이날 상오 11시부터 정리해고 수용문제를 놓고 막판 협상을 벌였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 高宗과 조개탕(秘錄 南柯夢:20)

    ◎嚴妃,남편 바람기 재우려 안간힘/“女色 멀리하도록 잘 보필하라” 鄭환덕에 경고/기다리다 못한 엄비 직간했다 고종의 미움 사/부부끼리 서로 의심… “왕비 폐출”흘리기까지/크게 놀란 엄비 가슴치며 하소연하다 쓰러져… ‘왕과 왕비’라고 부부싸움을 하지말란 법은 없다. 다만 원인이 다를 뿐이다. 가난이 유죄라고 사가에서는 돈때문에 부부싸움을 하지만 왕실에선 돈 걱정할리 없다. 걱정이 있다면 여자 문제다. 고종은 참조개탕을 즐기셨는데 하루는 조개탕을 들다가 이가 뿌러졌다. 누구의 책임인가 당연히 감선청(監膳廳)이 책임을 져야 했다. 상감께서 참조개탕(蛤子湯)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감선청에서는 조석으로 수라상에 조개탕을 올렸는데,하루는 상감이 조개탕을 드시다가 앞니 하나가 뿌러져 소반위에 떨어졌다. 덩그렁하며 소반에 이가 떨어지자 상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옆에 있던 순종은 크게 웃으시면서 측근을 불러 명하시기를 “감선당번은 무엇을 했는가. 당장 원도로 유배하라”고 명하셨다. 감선당번은 서인택(徐仁宅)과 이봉천(李鳳天) 두 사람이었다. 한 개 치아로 말미암아 두 사람이나 유배당하게 됐으니 과연 국법이 무섭기도 하다. 조개탕 사건이 일어나서 그랬던가. 우연치 않게 고종과 엄비사이에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1904년 고종의 나이가 50대 초반이었으니 아직 노쇠하였다고 보기 어려웠고 조개탕을 즐겨 그랬는지 양기에도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엄비는 상감의 옥체에 이상이 있을까 두려워했다. 순비(엄비)께서 내게 은근히 말씀하시기를 “상감께서는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나이(非老不少之年)신데 방사(房事=남녀의 동침)가 너무 빈번하셔 옥체를 상하실까 두렵소. 그대는 상감을 항상 가까히 모시고 있으면서 어찌 한번도 간하여 아뢰지 않았는가”라고 나무라셨다. 며칠 뒤 순비께서는 병풍 뒤에 숨어서 상감마마의 동정을 살피셨다고 들었다. 왕비도 여자인지라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환덕을 불러서 질책하듯 원망하듯 황상을 잘 보필하라 했다. 엄비의 질책을 받고 정환덕은 기어이 상감께 성색(聲色)을 삼가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마침 상감이 매우 기분좋은 상태에서 정환덕에게 물었다. 상감께서 자못 기쁜 기색으로 물으시기를 “역색(易色)이란 말뜻을 아는가”하셨다. 이에 아뢰기를 역색이란 얼굴빛을 바꾼다는 뜻으로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에는 귀천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러나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슬픔이 찾아오고(樂極哀生) 음탕함이 극에 달하면 재앙이 찾아오는 것(淫極災生)이 자연의 이치라 군자는 반드시 중도를 지킴으로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엄비는 직접 고종에게 이렇게 간했다고 하는데 후환이 두려운 말이었다. 근래 국법이 해이하여 궁인들이 대궐 밖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으니 혹시나 병에 걸려 들어오는 아이가 있지 않을까 두렵사오니 궁인을 상대하실 때는 반드시 정환덕에게 명하시어 그 사람의 몸에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때 고종은 묵묵 부답하며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고종은 정환덕을 불러 독대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짐이 경과 함께 지내기를 밖으로는 군신지간(君臣之間)이었으나 안으로는 부자지간으로 정분을 나누어왔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겠는가. 묻겠는데 엄비에게 큰 비밀이 있다고 들었다. 그대는 아는가. 숨김없이 대답하라”고 하시었다. 깜짝 놀란 정환덕은 시침을 떼고 대답하기를 “청천벽력같은 말씀으로 소신은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라고 단언했다. “정녕 그러한가?” 고종께서 다시 다그쳐 물어 보았는데,그때 정환덕의 등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도끼로 맞아죽는다고 해도 아뢸 말이 없습니다”고 잡아뗐다. 집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하니 동네사람의 부부싸움도 말리기 어려운데 하물며 국왕 내외에 있어서랴. 무슨 재주로 말릴 수 있겠는가 싶었다. 다음날 대궐에서 입궐하라는 명이 내려 인력거에 올라탔다. 대한문에 들어서니 안내자는 “오늘은 함녕전에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경선궁에서 부르신 것이니 그리로 갑시다”고 했다. 경선궁에는 엄비가 계셨다. 엄비가 물으시기를 “그대는 상감을 뵙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고 하셨다. 사실대로 대답했다가는 대번에 야단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드디어 속여서 말씀 드리기를 “어제 밤 상감께서 소신에게 물으신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간사한 무리들이 혹은 일본에 붙고 혹은 러시아에 붙어 유언비어를 만들어 서로 이간질하고 마침내는 나라를 팔아 먹고 있으니 이 나라 운명의 길흉이 어떠한가를 물으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엄비께서는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씀하시기를 “상감께서 내게 의심을 품으셔 장차 나를 폐출하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말씀이 있었는가”하셨다. 나는 시침을 떼고 “소신은 듣느니 처음입니다. 내외간 일을 상감이 소신에게 물으실리 있겠습니까.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고 대답했다. 엄비가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신하에게 하소연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엄비가 졸도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순비가 졸도하여 죽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어린 영왕은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고 있으며 상궁나인들은 한편으로 엄비의 입에 기름을 넣어 드리고,다른 한편으로는 물을 목구멍에 넣어 드리느라 분주하다. 약으로는 사향환(麝香丸)을 갈아 드리고 있으나 삼키지 못하고 침을 흘릴 뿐이다. 어찌 하면 좋겠는가” 하시기에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니 길한 일이 모인다’(用死終生吉相聚)는 말을 인용하며 “염려 마시옵소서. 반시간만 지나면 깨어나실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벽시계를 보니 7시반이었다. 고종께서는 시계를 보더니 “과연 8시에는 깨어나시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더니 “너는 여기 있으라” 하시며 종종 걸음으로 대청으로 나가 내의(內醫)를 불러 화제(和劑)를 쓰라고 하시니 내의들은 강화자음전(降火磁陰煎)이 좋다느니 청심진정탕(淸心鎭靜湯)이 더 좋다느니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기를 30분이 지나 괘종시계가 8시를 쳤는데 그때서야 내의의 화제가 나왔다. 사후 약방문 격이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