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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시각] 앞선 것을 뒤따르며 극복하는 지혜/김경운 산업부 전문기자

    [데스크 시각] 앞선 것을 뒤따르며 극복하는 지혜/김경운 산업부 전문기자

    기원전 3세기 신흥국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해상강국 카르타고와 기어코 맞붙고 만다. 지중해 무역로의 패권을 둘러싼 포에니 전쟁의 서막이다. 로마군은 막강한 함대를 지닌 카르타고군의 최신형 5단 갤리선을 본떠 ‘짝퉁’ 갤리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카르타고군처럼 빠르게 돌진해 뱃머리 하단의 쇠뭉치로 적함의 옆구리를 들이박는 전법을 구사하려면 함선뿐만 아니라 잘 훈련된 수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까마귀 부리처럼 생긴 쇠갈고리가 달린 길이 12m의 나무다리를 만들어 짝퉁 갤리선에 탑재했다. 적함에 다가서면 재빨리 다리를 내려 쇠갈고리를 박은 뒤 병사들이 상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해상전에서는 맥을 못 추지만, 육상 근접전에선 강한 자신들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새 전법이었다. 16세기 후반 임진왜란을 맞은 이순신 장군도 승산 없는 해상전에 나섰다. 일본군은 배 밑바닥이 ‘V자형’인 신형 함선으로 빠르게 접근, 조선군의 느린 ‘U자형’ 판옥선 갑판에 뛰어들어 능숙하게 칼을 휘두르는 버거운 상대였다. 이순신 장군은 고민 끝에 구형 판옥선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전략을 짜냈다. 둔하지만 튼튼한 판옥선에 대포를 탑재하고, 물 위의 판옥선이 거의 제자리에서 90도 회전할 수 있도록 노잡이 수병들을 훈련시켰다. 이는 일본군이 낡은 배라고 비웃던 평저선이었기에 도리어 가능했다. 판옥선은 적함을 유인해 ‘ㅡ형’으로 꽁무니를 빼다가 일제히 ‘∩형’으로 뱃머리를 돌린 뒤 적함을 향해 함포를 퍼부었다. 해상 함포전이라는 새 역사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삼성전자가 2년 연속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영업 실적을 거두었다. 두 해 전 이건희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진짜 위기론’을 거론했을 때 일부 언론 등에서는 괜한 ‘꿍꿍이셈’이라며 꼬집었던 기억이 난다. 이에 대해 당시 본 칼럼에서는 ‘엉뚱한 의심 말고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지적했으며, 삼성에는 ‘뼈를 깎는 노력’을 주문했다. 삼성은 애플의 아이폰이 엄청난 돌풍을 불러일으키며 찬사를 한몸에 받을 때, 짝퉁이나 만든다는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그때 국내 기업들의 수준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삼성은 스스로 소프트웨어 시대를 열지 못하자, 장점인 하드웨어에 더욱 매진했기에 오늘의 성과를 냈다. 선두를 바싹 뒤따르는 ‘패스트팔로어’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 요즘 경영인들이 좋아하는 성장 DNA, 즉 ‘삼성의 DNA’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렇게 따라가며 틈틈이 여력을 모아 새 디지털 시대를 준비할 것으로 믿는다.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려면 앞선 남의 것에다 나만의 것을 하나 보태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볼품 없는 내 것에서 결국 남의 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탄생하지 않을까. 이 회장은 지난해 1월 9일 70세 생일 때 “앞선 회사도 퇴보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한국이 정신 안 차리면 또 한 걸음 뒤처질 수 있다.”고 특유의 위기론을 거듭 언급했었다. 애플의 독주를 일단 꺾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동점골로 간신히 연장전에 들어갔고, 이제 골든골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어릴 적 농촌에서 ‘올게쌀’을 먹어본 사람들은 커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곤 한다. ‘가을 들녘의 싱그러운 향기가 입안 가득히 구수하게 감도는’ 맛이다. 올게쌀은 볕이 덜 드는 땅에서 자란 설익은 벼를 찧은 뒤 쪄서 정성스럽게 말린 ‘찐쌀’의 남도 사투리이다. 어느 해 추석이 빨리 와 조상의 차례 상에 햇밥이 오르지 못할 처지가 되자, 위기에서 탄생한 지혜의 쌀이다. 햅쌀이 없으면 묵은 쌀을 올리거나 더 훌륭한 것으로 대체하면 될 테지만, 우리 조상들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 기본에 충실함으로써 더 나은 명품을 낳은 것이다. kkwoon@seoul.co.kr
  • 2040·노동계 표심잡기 한목소리… ‘9인1색’ 민주통합 서울 TV토론회

    2040·노동계 표심잡기 한목소리… ‘9인1색’ 민주통합 서울 TV토론회

    민주통합당 당권주자들이 시민선거인단 마감을 하루 앞둔 6일 가장 많은 참가자들의 거주 지역으로 꼽히는 서울 지역 TV합동토론에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모바일 선거인단의 주요층인 2040세대와 노동계의 표심에 적극 호소했다. 그러나 후보 9명 모두가 2040세대와 노동계 공략에 집중하며 한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후보 간 변별력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구구동성(九口同聲)의 토론회가 된 셈이다. 후보들은 서울 양천구 방송회관에서 열린 SBS 주최 TV토론에서 젊은 층으로 추정되는 모바일 시민 선거인단(전체 선거인단의 93%)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정치권 대폭 참여와 청년 실업 해소, 공천·인적 쇄신을 하나같이 외쳤다. 이날 시민 선거인단은 54만명을 돌파했다. 시민 선거인단 지지 기반이 취약한 호남 출신 이강래 후보는 “대대적인 물갈이로 인적 쇄신을 이뤄내야 한다.”며 호남권 내 금기어로 분류되던 ‘물갈이’를 직접 언급했다. 박지원 후보도 “파벌을 없애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정당을 추진해 젊은 층과 소통하겠다.”며 일 안 하는 대표 등에 대한 ‘당원 소환제’ 도입을 시사했다. 박영선 후보는 “직능별 비례대표를 모시고 모바일 투표로 비례대표 순번을 정하겠다.”고 말했다. 한명숙 후보는 “모바일 투표는 내가 처음 제안했다. 소수 실세들의 밀실공천을 과감히 없애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성근 후보는 “40대 이내 후보들에게 가산점을 두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0명의 대의원과 100만명에 이르는 조합원을 보유한 한국노총 등 노동계에 대한 후보들의 애정 표시도 남달랐다. 김부겸 후보는 “죽어가는 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 일자리 없는 청년을 위해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박용진 후보는 “노동 존중,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학영 후보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이인영 후보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함께 “재벌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라며 고위 공직자 재산 형성 과정 공개법 도입을 주장했다. 후보들은 한노총의 노동정책 수용과 ‘론스타 먹튀’ 국정감사, 농협 신경 분리 유예 추진에 대해서도 입을 맞췄다. 유력 후보에게 견제구도 날렸다. 이학영 후보는 “호남 의원과 국회의원 오래한 분들은 후배들을 위해 기득권을 과감히 버리라.”고 말했다. 이강래 후보는 참여정부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찬성했던 박영선 후보에게 “투자자국가소송제(ISD)나 역진방지조항은 처음부터 문제였다.”며 비판했고 박 후보는 “당시 비자 면제국 문제가 걸려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굴욕적인 재협상을 했기에 전면 무효화해야 한다.”고 맞섰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뚱보돼지·미니돼지? 박물관서 보면 되지!

    뚱보돼지·미니돼지? 박물관서 보면 되지!

    경기 지역에 닭, 돼지, 옹기, 어린이 등 다양한 주제를 테마로 한 이색 박물관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3일 경기도에 따르면 닭고기 가공업체 마니커는 오는 27일 동두천시 하봉암동에 마니커 닭 박물관을 개관한다. 마니커 동두천 공장 옆에 자리한 닭 박물관은 562㎡ 규모로 전시실, 체험학습실, 시식 겸 카페 공간 등으로 조성된다. 전시실에서는 상여 앞을 장식하는 ‘꼭두’, 닭을 주제로 한 그림과 공예품 등 유물 4000여점을 관람할 수 있다. 또 마니커는 닭 박물관과 연천군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함께 관람할 수 있는 통합 입장권 발행 방안을 연천군과 논의 중이다. 이천시는 최근 율면 월포4리 64 일원에 국내 첫 돼지 체험 박물관인 ‘돼지 보러 오면 돼지’ 농장을 개관했다. 이곳에는 300㎡의 박물관에 5000여점의 다양한 돼지 모형과 자료를 전시하는 한편 미니돼지 사육장, 소시지 교육장, 아토피 치유 정원, 민화체험관, 온실 등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은 돼지 단계별 성장과정을 공개하고 최대·최소 체중의 돼지 전시와 미니돼지 경주 등을 통해 친근한 돼지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용인시에는 전국 최초의 어린이 전용 박물관인 경기도립 ‘경기어린이 박물관’이 지난해 7월 문을 열었다.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경기도박물관 및 백남준아트센터 인근에 부지 면적 2만 9896㎡, 연면적 1만 619㎡,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조성된 박물관은 수장고와 자료실, 뮤지엄숍, 교육실, 어린이 도서관, 영유아전시실, 기획전시실, 상설전시실 등으로 꾸며졌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 환경을 생각하는 어린이, 튼튼한 어린이, 세계속의 어린이 등 4개 주제로 나뉜 전시실에는 스포츠와 놀이를 통한 과학탐구, 환경, 재활용작품, 다문화 체험 관련 작품 및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연천군에는 선사박물관이 들어섰다.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내에 문을 연 박물관에서는 한반도 구석기 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보고 체험할 수 있다. 도비 311억원과 국비 161억원 등 472억원이 투입됐으며 7만 2599㎡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5000㎡ 규모로 건립됐다. 이 밖에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에 전시관과 카페, 세미나실 등을 갖춘 양평 군립미술관이,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에 옹기와 관련된 자료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부천시립 옹기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지난해 9월 세계유기농대회가 열린 남양주시 조암면 삼봉리에는 유기농박물관이 건립됐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서울신문 2012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 모기/ 하우 (본명 신광수)

    [서울신문 2012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 모기/ 하우 (본명 신광수)

    모기/ 하우 (본명 신광수) 등장인물 무영(30대 초반·공무원시험 준비 중) 약희(20대 후반·백화점 화장품 매장 직원) 방역업체 직원 1(40대·제로버그 팀장) 방역업체 직원 2(20대·제로버그 사원) 집주인(40대·중반 여성) 매니저(소리·화장품 매장 관리인) 무 대 왼쪽에 침실과 작은 거실이 딸린 반지하 공간. 햇살을 느낄 수 없으며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이다. 거실 벽면 위로 창이 있으나 방충망은 찢기고 구멍도 뚫려 있다. 거실 한편에는 컴퓨터, 벽에는 벽시계가 걸려 있고 밑에는 커다란 동그라미가 그려진 달력이 걸려 있다. 침실에는 침대와 화장대, 구석에는 아기 침대와 모빌이 달려있다. 중장비의 굉음이 멀리서 들려온다. 중장비 소음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대화할 때에는 잘 들리지 않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크고 뚜렷하게 들린다. 중장비 소음이 들릴 때마다 무영은 귀를 후비는 습관이 있다. 희미한 침실 조명이 켜져 있고 ‘탁’ 하는 짧은 박수소리 한두 번 들린다. 조명 밝아진다. 무영 저희가 안 나가겠다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아무리 월세를 제때 못 낸다 해도 그렇지 사람이 살 수가 없잖아요. (약희의 눈치를 보며) 알았어요. 그러니까요, 사모님께서 먼저 계약서대로 모기부터 해결부터 해주세요. (사이) 네, 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무영은 수화기를 휙 던지며 클렌징을 하는 약희의 눈치를 살핀다. 약희 뭐래? 무영 (말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알았대. 약희 (순간 울컥함을 참고 몸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이것 봐, 이것 보라구. 어! 여기도 물렸네. 아이 가려워. 에이 정말, 여름만 되면 이놈의 집구석은 모기가 온통 벽에 온통 도배를 해요, 도배를… 얘네들은 날개를 폼으로 달았나? 날개가 있으면 날아올라야지,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요 앞 40층짜리 탑궁전 아파트 사람들은 놔두고 (무영을 보며) 바닥보다 낮은 이런 곳으로 기어 들어와서 피곤한 사람, 잠도 못 자게 한담. 무영, 약희를 힐끗 보다 다시 허공에 시선을 응시하며 손뼉을 친다. 약희 잡았어? 무영 어 (씩 웃으며 약희에게 빈 손바닥을 펴 보인다.) 약희(다시 거울을 보며) 그 한 마리를 잡아서 집안의 모기를 도대체 언제 다 없애겠어? (사이) 다 없앨 수나 있겠어? 좋아, 설사 집안의 모기를 다 잡았다고 쳐. 그럼 뭐해, 좀 있다가 집 밖에 있는 모기들이 주택청약 대기자처럼 얼씨구나 들이댈 거 아냐? 무영 미안해. (표정을 바꿔 자신감 있는 태도로) 그래도 오늘 밤만큼은 기필코 밤을 새워서라도 자기랑 울 희망이, 내~가 책임진다. 약희 허구한 날 또 그 소리 (무영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자기랑 울 희망이, 내~가 책임진다. 테이프 같으면 벌써 늘어져서 내~~가 책~임진~다. 책임이 뭔지나 아나? 무영 뭐!? 약희 됐어. 그건 그렇고, 난 정말 못 참겠어. 가뜩이나 모기소리가 나면 불면과 신경쇠약에 시달렸는데 이젠 편두통까지, 앵앵거리는 소리만 들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구. 이번 여름, 아니 딱 일주일만이라도 모기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 무영 (혼잣말로) 난, 자기 잔소리 없는 곳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살고 싶다. 약희 뭐야! 잔소리? 그럼 지금 당장 짐 싸. 무영 아니, 내 말은… 약희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잔소리 안 하게 생겼니? 무영(한참 동안 약희의 눈을 피하며) … 약희 이제 집은 어떡할 거야? 이제 보름도 안 남았어. 무영 … 약희 (울컥 치솟는 것을 참으며) 아이 참, 오늘 밤은 또 왜 이리 덥담. 무영 (약희의 눈치를 살피다가) 미안해, 여봉~ 내가 이번 시험만 붙으면… (약희를 안으며) 그리고 오늘 밤만큼은 자기하고 울 희망이, 내가 밤 새워서라도 모기들한테서 지켜줄게. 약희 (무영을 뿌리친 후) 더워 더워, 끈적거려, 붙지 말래두. 에어컨도 없는 집에서… 어! 빨리 손 안 치워? 무영 (머쓱한 듯 손을 빼며) … 약희 그리고 ‘이번 시험만 붙으면’ 이라는 말 도대체 몇 번째야.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먼저 모기 다 없애기 전까지 내 몸에 손도 대지 마. 무영 (약희를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다가) 이놈의 모기들 오늘 밤 다 (목소리를 낮추며) 죽었어. 무영은 약희를 계속 쳐다보다가 ‘앵’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탁’ 하고 박수를 친다. 그리고 잠시 광기 어린 무영의 얼굴이 살짝 비친 후 조명 꺼진다. 조명 켜지면 창밖에는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보다 커진 중장비 소음이 들려온다. 반바지 차림에 부스스한 몰골의 무영은 처음에는 귀를 후비다가 나중에는 귀를 막는다. 이후 한참 만에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는다. 약희 지금까지 잔 거야? 무영 아, 아냐, 진작 일어났지. 지금 기출 문제 동영상 강의 듣고 있어. (사이) 정말이야. 자 들어봐. (아이 젖병을 꺼내면서, 목소리를 바꿔) 네, 지난 5년간의 기출문제 유형을 종합하여 정리한다면, 이번 10월에 있을 공무원 9급 공채시험의 경향을 파악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이번 7주차 강의는~ 약희 됐어, 됐어. 소리 좀 줄여. 무영 거봐, 날 뭘로 보구. 흠 약희 잊지는 않았지? 자기가 한 약속,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무영 또 또 시작이다. 알았어요. 남자로 아니 가장으로, 아니 좋다. 울 희망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약희 애는? 무영 엉, 지금 분유 타서 먹이려… 때마침 아이 우는 소리 약희 뭐야, 애 분유는 시간 맞춰 먹여야 한다고 했잖아. 그리고 알고 있지? 유아들한테 전자 모기향이나 에프킬라, 절대 안 되는 거. 무영 알아 알아. 약희 그저 말로만… 저기 그런데, 오늘 연락… 왔어? 무영 … 약희 (울컥 차오르는 것을 누르며) 아이 진짜, 그보다 먼저 진짜 집에 있는 모기 좀 당장 어떻게 좀 해봐. 나 지금 코끝을 물려서 완전 딸기코야. 며칠째 모기가 앵앵거려 잠을 설치니까, 얼굴이 부어서 화장으로도 안 가려지잖아. 무영 … 약희 (갑자기 너스레를 떨며) 그것 때문에 고객들하고 상담할 때 자꾸 얼굴을 숙이니까 매니저가 자꾸 눈치 주는 거 있지. 내가 말했지? 그 사람 성질 더러운 거. 뭐냐, 뉴월드 백화점의 얼굴인 슈넬화장품 직원 태도가 뭐냐구… (사이) 내말 듣고 있지? 무영 … 어. 약희 그리고 집주인이 많이 삐친 것 같으니까 자기가 먼저 전화해서 어떡해서든 집주인 비위 잘 맞추고 우리 사정을 잘 말해봐. 무영 (말없이 잠시 침묵하다가) 저기 자기야, 사실… 약희 어? 무영 사실은, 자기 출근하고 바로 집주인한테 연락이 왔었어. 약희 그래! 뭐라구 해? 아니, 자긴 뭐라고 했어? 무영 먼저 모기를 싹 없애 주겠대. 약희 야! 진짜? … 무영 그리고… 약희 그리고? 무영 이번 달까지… 약희 …나가래? 무영 … 약희 그러‥면, 결국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거잖아. 그, 그러면 우리는? 우리는 어떡하구. 완전히 길바닥에 나앉아 죽으라는 거잖아. 그래서 자긴 뭐랬어? 무영 … 그, 그래도 우리집 구조상 모기를 싹 없애긴 쉽지 않을 거야. 그건 자기가 더 잘 알잖아. (사이) 그럼 작성한 계약서대로 모기를 다 없앨 때까지 나갈 수 없다고 버텨봐야지 뭐. 약희 (끓어오르는 것을 다스리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리고 집주인이 집안에 있는 모기를 진짜 다 없애면 그땐 어떡할 거야? 무영 그땐, … 사정이야기를 해봐야겠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대로… 약희 당신, 분명히 자기가 책임진다고 했어. 그럼 이번에야말로 가장의 책임감이 뭔지 보여줘. 아니면 우리 가족 모두 그냥 확! 무영 … 약희 아 네~ 팀장님. (목소리를 낮추며) 나 오늘 저녁에 늦어. 무영 어! 잠깐 …안 되는데. 전화가 끊기자 무영은 뚜뚜뚜뚜 소리를 한참 동안 멍하니 듣다가 전화를 끊는다. 이후 젖병을 든 채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침대와 창문 등,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본 후 아기 침대 쪽에서 모기 잡는 시늉을 하며 한참 동안 좁은 거실을 서성거린다. 이때 귀를 후비면서도 전화기에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 후 결심한 듯 전화기로 다가가 전화기를 들었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전화기를 내던진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무영 (조심조심 다가가 전화기를 들며) 여, 여보~세요? 목소리 이무영씨 댁 맞습니까? 무영 그, 그런데요. 목소리 집주인이 김수영씨 맞으시죠? 제로버그입니다. 무영 제로버그? 그런데… 목소리 이 집 주인께서 의뢰하셨습니다. 그럼,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 당황한 무영이 문을 열자 방역업체 직원1, 2 등장. 방역업체 직원은 빨간 모자에 동일한 유니폼(모기 박멸 프린팅)과 헤드셋 마이크를 착용하였고, 직원1은 고글을 쓰고 지시봉을, 직원2는 특이한 가방을 들고 있다. 방역업체 직원1 제로버그입니다. 고객님, 잘 아시겠지만 저희 회사는 ‘고객님의 건강과 행복’이라는 슬로건 아래 타업체와 비교할 수 없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하여 해충 없는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저희 회사가 하는 일을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바퀴벌레, 개미, 진드기, 거미, 모기, 집게벌레, 이, 좀벌레, 파리 등등을 박멸하는 곳이죠. 직원1이 이야기하는 동안 직원2는 무영을 가볍게 밀치며 돋보기를 들고 분주히 집안 구석구석을 관찰하며, 수첩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다. 무영은 그런 직원2를 힐끗 보다가 다시 직원1을 다시 본다. 무영 (벙벙한 표정으로) 아, 네. 그런데 어떻게 벌써… 방역업체 직원1 (말을 자르며) 스피듭니다, 저희 팀 모토는 스피드 앤 퍼펙트, 다시 말해서 신속 완벽. (명함을 주며) 저희는 스카~이 파트입니다. 무영 스카이요? 방역업체 직원1 네, 스카이. 하늘, 다시 말해서 날아다니는 해충 중, 피를 빠는 모기만을 전문으로 하고 있죠. 무영 모기를요? 방역업체 직원1 (고글을 벗고 주변을 둘러보며) 들은 바대로 이곳은 모기들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네요. 무영 누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방역업체 직원1 (말을 끊으며 짧게) 아! 걱정 마십시오. 방역업체 직원2 팀장님. 이 집에는 모기가 23마리, 파리가 12마리, 바퀴벌레가 44마리, 그리고 쥐 4마리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방역업체 직원1 그래, 위치는? 방역업체 직원2 다 파악됐습니다. 방역업체 직원1 그럼 바로 시작하지. 방역업체 직원1과 2. 가방에서 정체 모를 장비와 파리채를 꺼낸 후, 집안을 돌아다니며 체크한 후 구석구석에 커다란 모기박멸 스티커를 붙인다. 그 후 갑자기 책을 꺼내 천장으로 던지고, 파리채를 마구 휘두른다. 이때 무영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과 불안한 몸짓으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본다. 무영 어어, 저저, 저걸 (이때 방역업체 직원1과 눈이 딱 마주치자) 저, 저기요… 혹시 살충제 같은 것을 뿌리나요. 우리 아이가 아직 어려서… 방역업체 직원1 (순간 단호한 표정으로) 걱정 마십시오. 저희 회사는 그런 비과학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때 방역업체 직원2는 두세 차례 손뼉을 치며, 모기를 잡는 행동을 한다. 무영 (방역업체 직원2를 보며) 아, 네에. 방역업체 직원2 어어, 거기 팀장님. 순간 방역업체 직원1, 재빠른 동작으로 손뼉을 친다. (손뼉을 칠 때의 동작은 전통 무예의 한 동작과 유사하다.) 잠시 후 손바닥을 펴 무영에게 보여주며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띤다. 무영도 마지못해 웃음을 짓는다. 방역업체 직원1 (약간 고압적인 자세를 띠며) 잠깐만요, 이무영씨. 이 집에서 모기를 완전히 뿌리를 뽑고 싶으시죠? 무영 무물, 물론~이겠죠. 방역업체 직원1 음, 현실적으로 이 집의 구조상 모기를 완전히 박멸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무영 (화색을 띠며) 그, 그런가요? 방역업체 직원1 하지만, 저희가 누구입니까? 해충박멸의 신화 제로버그의 스카이팀. 괜히 스카이가 아니죠. 저희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무영 아 아, 네. 방역업체 직원1 그럼, 먼저 이무영씨에게 모기를 완전히 박멸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몇 가지 자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첫째, 모기는 우리 가족의 피를 빠는 적이다. (무영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무영씨, 지긋지긋한 모기를 박멸하고 싶지 않으시나요? 무영 그, 그렇긴 하지만… 방역업체 직원1 (말을 끊으며) 그렇다면 마지막은 복창해 주세요. (굳은 표정으로) 피를 빠는 적이다. 무영 … 방역업체 직원1 (무영을 지그시 응시하며) 피 무영 (고개를 순간 돌리며) … 방역업체 직원1 (아주 낮은 저음으로) 피 무영 피, 피 방역업체 직원1 피를 빠는…적이다. 무영 (위세에 눌려 마지못해) 피이…를 빠는 적이다. 방역업체 직원1 (분위기를 바꿔 경쾌하게) 일부 모기가 나와 가족의 피를 머금었다고 해서 피를 나눈 형제처럼 여기는 감상적인 생각이나 동정은 금물입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적개심만이 필요하죠. (다시 힘 있게 주먹을 조금 치켜들며) 둘째, 모기는 애완동물이 아니다. 무영 … 방역업체 직원1 (강압적인 어투로) 애, 애 무영 애, 애 방역업체 직원1 애완동물이 아니다. 무영 (동작마저 따라하며) 애완동물, 애완동물이 아니다. 방역업체 직원1 취향이 아주 아주 독특한 일부 사람들 중에는 개와 고양이와 같은 일반적인 애완동물에 싫증을 느껴, 모기를 애완용 곤충쯤으로 여기고 사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영을 보며) 자기 몸으로 말이죠. 물론 극소수의 사람들입니다. 하하하. 무영 (억지웃음을 지으며) 아, 네. 방역업체 직원1 (큰 동작으로 손끝을 하늘로 뻗다가 날갯짓을 하며) 셋째, 모기는 천사가 아니다. 무영 … 방역업체 직원1 (무영을 노려보며 힘을 주며) 천사가… 무영 천, 천사가 아니다. 방역업체 직원1 가끔 자신의 옥탑방을 천당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중에는 모기의 앵~ 하는 소리를 천사의 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살짝 무영을 응시하며) 이런 사람의 특징은… 무영 (멈칫하다가 손을 내저으며) 아니, 아니에요. 방역업체 직원1 넷째, 모기는 여자가 아니다. 무영 (조금 놀라며) 여자, 여자가 아니다. 방역업체 직원1 (무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알고 계시죠? 흡혈을 하는 것은 모두 암컷들인 거. 무영 (어색한 웃음) … 방역업체 직원1 (무영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그들의 정신세계는 아주 독특해서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암컷들에게만, 그래서 모기를 아내나 애인처럼 생각하죠. (몰입하며) 모기가 자기의 몸에 빨대를 꽂는 바로 그… 순간을 즐기죠. 무영 아, 네에. 방역업체 직원1 마지막으로… 모기는 집주인이 아니다. 무영 (침을 삼키며) 모기는 집주인, 이…다. 방역업체 직원1 (가늘게 실눈을 뜨며) 흠… 극히 일부의 세입자 중에는 집안에 모기를 대할 때 당황하거나 조금 심한 경우는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마치 집주인을 대하듯 말이죠. 지난달에는 모기에게 안방을 내주고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르는 세입자를 봤습니다. 물론 그와 반대인 상황도 있습니다. (무영을 지그시 응시한 채로 점점 다가가며) 그럴 경우 모기소리와 집주인의 목소리를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모기소리만 나면 히스테리를 부리죠. 그간 당했던 설움과 쌓였던 분노를 집주인에게 마구마구 쏟아 내듯 말이죠. (갑자기 표정을 확 바꾸며) 네, 고객님께서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제 경험에 비춰봤을 때 이런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자신감 있는 웃음을 지으며) 이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모기는 100% 박멸 가능합니다. 이때 방역업체 직원2가 다가온다. 방역업체 직원2 팀장님, 이제 모기를 완전히 퇴치했습니다. 무영 벌, 벌써요? 방역업체 직원1 스피드 앤 퍼펙트, OK? 방역업체 직원2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들며) 이게 끝까지 남아 있던 놈으로 23마리째입니다. 방역업체 직원1 음, 좋아. (무영을 보며) 그럼 여기 점검 내역에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무영 … 무영이 마지못해 받은 내역서를 살피며 서명을 망설이자 방역업체 직원1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무영이 주변을 둘러보며 계속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자, 방역업체 직원들의 태도가 서서히 위압적인 태도로 바뀐다. 이에 무영은 마지못해 서명을 하고, 방역업체 직원1은 뭔가를 해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방역업체 직원2에게 서류를 건넨다. 무영 그런데, 저기… 방역업체 직원1 네? 무영 (쭈뼛쭈뼛 머뭇거리다가) 아! 쥐나 바퀴벌레 같은 거는… 방역업체 직원1 음. (단호한 표정으로) 스카이, 아까 말씀드렸죠, 저희는 모기 전문입니다. 무영 아하! 스카이 방역업체 직원1 혹시 다른 해충을 박멸하시려면, 바닥 쪽이나, 구멍 쪽으로 연락주세요. 그 팀들도 프롭니다. (절도 있는 자세로) 저희 제로버그는 과학적이고 완벽한 서비스를 통해 100%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추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사이) 물론 완벽하겠지만요. 방역업체 직원1, 2 목례 후 바로 퇴장하자 전체 조명이 어둡게 깔린다. 무영은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본 후,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후 잠시 우스꽝스럽게 모기 흉내와 함께 모기를 잡는 행동을 한 후 한참 동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 매미소리와 중장비 소음은 점점 크게 들려온다. 무영은 갑자기 귀를 후비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세게 귀를 후빈다. 이때 오른쪽 조명이 들어오면 백화점 유니폼을 입은 약희,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약간은 울먹이며 매장 매니저에게 경고를 받고 있다. 매니저 이것 보세요. 김약희씨, 이게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됩니까? 매장에서는 절대 기대거나 의자에 앉으면 안 되는 거, 사적인 통화 금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비주얼, 비주얼 관리, 잘 아시잖아요. (사이) 그런데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술 마신 사람 마냥 코끝이 벌겋게 부풀어 있어요? 약희 그게 모기가… 매니저 그 핑계 그만, 이게 벌써 며칠쨉니까? 고객들이 퉁퉁 부은 코에 억지 웃음을 짓는 당신을 보고 우리 화장품을 사서 바르고 싶겠어요?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사이) 죄송 죄송 그러지 말고 속 시원히 말을 해보세요. (사이) 요즘 김약희씨를 보니까 서비스 마인드 교육이 아주, 정말, 매우 필요한 것 같군요. (사이) 계약서 내용은 잘 알고 있죠? 약희 …네 매니저 계약 위반 시에는… 약희 … 매니저 됐어요. (사이) 이만 됐구요, 서로 피곤해질 것 같으니까 이만 하죠. 다음 주부터는 서로 볼일이 없으면 좋겠네요. 약희 네!? 매니저 제 말 뜻 아시죠? 김약희씨. 흐느끼며 털썩 주저앉는 약희, 조명이 점차 어두워진다. 매미소리와 중장비 소음, 그리고 아이 칭얼거리는 소리와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한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무대가 점점 밝아지면 무영은 헤드셋을 끼고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때 현관 문소리가 나면서 약희가 들어온다. 현관 문소리에 무영은 순간 벌떡 일어나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거실로 나온다. 무영 왔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벽시계를 돌아보며) 어! 뭐야, 오늘 늦는다며 일찍 왔네? 약희 (모든 의욕을 상실한 표정으로) 나한테 말 시키지 마. 무영 뭔 일 있나? 아님, 땡땡이! 약희 (고개를 떨구며) … 무영 (살짝 건드리며) 내가 보고 싶어서 땡땡이 쳤구나. 그렇구나, 맞지? 약희 (말을 끊고 매섭게 노려보며) 나한테 말 시키지 말랬지. 무영 (움찔하다가 눈치를 보며) 왜 그래? 약희 당신은 도대체 뭐야? 마누라는 매일 뼈 빠지게 일하는데, 가장이란 사람이 1시가 넘도록 잠이나 퍼질러 자고, 그러고도 당신이 우리집 가장이라고 할 수 있어? 울 희망이 아빠냐고? 무영 약희야, 왜 그래, 농담한 걸 가지고 약희 됐어. 오늘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무영 자기,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일하다 말고 집에 와서 약희 듣고 싶지 않다고 했지. (몸서리를 치며) 당신은 몰라. 아무도 내 맘 모른다구. 무영 (순간 당황하며) 아 참, 낮잠 좀 잤다고 그러는 거야? (약희를 달래며) 오늘 동영상 강의 듣다가 너무 졸려서, 알잖아. 며칠째 밤새 자기랑 울 희망이 옆에서 모기 잡은 거. (사이) 매일 힘들게 고생하는 자기하고 울 희망이한테 남편과 아빠로서 해줄 게 있어야지. (가슴을 두드리며) 나만 믿어. 내가 이번 시험만 붙으면… 이때 이상한 야릇한 소리가 더 분명하게 들린다. 그러자 무영과 흐느끼던 약희, 동시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영이 컴퓨터 앞으로 뛰어간다. 허둥거리며 마우스를 잡는 무영. 잠시 후 무영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약희. 무영 아니, 그게 말이야. 있잖아. 아이 참 (표정을 바꾸며) 자기야 미안. 약희 (이를 악물고 쓴웃음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 하지도 마. 당신, 나한테 아니 우리 희망이한테 부끄럽지도 않아? 무영 (머뭇거리며) 약희야, 내 말도 좀 들어봐. 그렇잖아, 내 사정이… 내가 자기한테 붙으면 덥다고, 피곤하다고, 도대체 이게 며칠째야. 석 달은 된 것 같다. 그래서 동영상 강의 듣다가 잠깐, 머리 식히려고… 그냥… (살짝 웃으며) 남자들은 원래 다 그러잖아. 약희, 어이없는 표정 후 분을 삭이는 표정을 짓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때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약희는 눈물을 훔치며 젖병을 챙겨 아이에게 물리나 칭얼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약희 아가 아가, 괜찮아, 괜찮아. 무영 (약희에게 다가가며) 그러니까… 약희 가까이 오지 마, 당신 불결해. 무영 약희야, 저기… 약희 말하지도 마. 다, 당신, 말소리, 굶주린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 같아. 무영 (더 가까이 다가가며) 미안해, 내가 약희 (조금 더 악을 쓰며) 가까이 오지 말랬지. 피를 노리는 굶주린 모기…아니 모기보다도 못한… 무영 (멍한 듯 말을 잇지 못하며) 아무리 그래도… (순간 쓴웃음 지으며) 남편한테 모기는 너무, 너무했다. 약희 (어이없는 표정으로) 너무하다고, 너무하다고, 내가 너무하다고. 김약희 내가? 으흐…흐…흑 난 처음에 당신이 생각이 깊은 줄로만 알았어, 또 누군가를 진정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사이) 생각이 깊어? 흐… (손가락을 흔들며) 오, 노~ 당신은, 당신은 우유부단했던 거야. 다른 사람을 배려, 흐흐, 당신은 원래 당신의 밥그릇조차 지킬 용기나 배짱이 없는 사람이었어. 흐…흐 이젠 지긋지긋해. 하루 종일 햇빛도 안 드는 비좁은 이 집, 매니저와 손님의 비위 맞추느라 짓는 억지웃음, 매일 말뿐이고 책임감도 없는 무기력한 당신, 그런 당신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 그리고, 그리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미래 (팔을 휘젓다가 순간 신경질적으로 신발과 책 등을 벽과 천장에 마구 내던지며) 특히 이놈의 성가신, 성가신 모기들도, 그리고 당신도… (폭발하며) 모두 모두 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 사라져버리라구. 무영 … 약희야! 어찌할 바를 모르던 무영이 세차게 흐느끼고 있는 약희를 보며 용기를 내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 하자 약희가 무영의 손을 가로막으며 돌아선다. 무영은 한참을 멍하게 서 있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때부터 조명은 무영의 행동에 집중되며 중장비 굉음이 점점 크게 들려온다. 이때 전화벨이 울리자 무영은 한동안 심장박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짐을 느끼며 전화를 받는다. 무영 여, 여보, 여보세요 집주인 (소리만)마침 집에 있었네. 그쪽이 사인한 것 봤어요. 그럼 이제 그쪽이 약속을 지킬 차례네요. 제 말뜻 아시죠? 그럼 이만. 무영의 심장박동은 더욱 요동치며 점차 조명이 점차 어두워진다. 조명이 거의 사라질 무렵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무영에게 조명이 집중된다. 무영 그런데, 그런데, 이건 너무 일방적이지 않습니까? 무조건 정해진 날까지 집을 비워달라니요. 저희 세입자 입장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생각해 주세요. 집주인 (소리만)계약서, 계약서, 몰라요? 무영 그래서, 그래서, 조금만 더 배려를… 배려를 부탁드리는 것 아닙니까. 이번 가을까지, 아니, 다음 달까지라도… 집주인 (소리만)…… 배려라? 누굴 배려? 내가 당신들을? 난, 여태 배려했어요. 내 집에서 살도록 해줬잖아요? 물론 월세지만, 그리고 집세도 못 내는 당신들이 우긴, 그 말도 안 되는 그 요구, 그래서 이렇게 방역업체까지 불러 모기소리도 싹 없애 줬어요. 이만하면 집주인으로서의 충분한 배려 아닌가? 무영 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저…저도 (침을 삼키며) 몇 년간 여기 살면서 집세를 올려달라면 달라는 대로, 수도세 전기세 밀린 적 한번 없이, 때 맞춰 군말 없이 해드렸습니다. 한겨울에 보일러가 터져도, 장마철에는 방바닥에서 물이 올라와 곰팡이가 온 벽을 뒤덮어도, 한여름에는 방충망이 찢겨져서 온갖 해충들이 득실거려도, 그리고 지금처럼 하루 종일 공사 소음에 시달려 귀가 멍멍해져도 아무 불평 없이 지냈습니다. (사이) 작년 겨울 실직만 안 했어도 이런 부탁까지는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든 이번 가을에 치를 시험까지라도, 아니 다음 달 우리 애 돌까지만이라도 (무릎을 꿇으며)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집주인 (소리만)그래요, 듣고 보니 안타깝기는 하네요. 하지만 이를 어쩌나. 부탁은 내가 해야 되겠는 걸. 지금 공사가 지연된다고 재개발 조합에서 난리네요. 계약서대로 세입자를 내보내 집을 비우라구요. 그쪽이 용안 4동 재개발 구역에 거의 끝까지 남은 세대라는 거, 알고는 있었죠? 당신들이 나가야 우리 구역 철거가 마무리되거든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도 투자를 한 입장에서 손해 볼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이제 당신들은 계약서대로 나가주면 되는 거예요. 내 말 알아듣죠? 배려라? 배려라면 이번에는 당신들 차례인 것 같은데 무영이 털썩 주저앉자 바로 조명 꺼진다. 어둠 속에서 한동안 귀를 막고 머리를 감싸던 무영이 어느 순간부터 어떤 소리를 집요하게 찾고, 약희는 집안을 정리한다. 무대가 점차 밝아지면 무대의 가재도구는 모두 정리가 되고 커다란 박스 두어 개와 여행용 가방이 무대 중앙에 있다. 약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달력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일어나 벽에 걸린 달력을 뜯는다. 그러자 다음 달력에 커다란 동그라미가 보인다. 이때도 무영은 계속 귀를 후비며,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뭔가를 찾고 있다. 약희 (달력을 보며) 뭐해? 무영 … 약희 뭐하냐구? 무영 찾고 있어. 약희 (심드렁하게) 뭘? 무영 (잠시 머뭇거리다가) 있어, 지금 어딘가에 있어. 약희 그러니까 뭐가 있냐구? 무영 (주변을 계속 살피며) 모기 약희 (힐끗 보며) 모기? 무영 안 들려, 소리? 지금 막 몰려오고 있잖아. 봐, 앵~앵 약희 (무영을 쳐다보다가 잠시 귀를 기울이며) 도대체 무슨 소리? 무영 아, 미치겠네. 에이, 도저히 안 되겠다. 무영은 계속 구석구석 살피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지갑을 뒤지기 시작한다. 이때 전화벨이 울리자 약희가 전화를 바로 받는다. 약희 여보세요? 집주인 아직 있었나보네. 약희 … 네. 집주인 하긴 이틀이나 남았으니까. 지금 문 앞에 있어요. 약희 네? 알이 큰 색안경에 명품가방을 든 40대 여성이 현관문으로 들어온다. 이때도 무영은 집주인을 본 체 만 체 한쪽 구석에서 뭔가를 찾고 있다. 집주인 (무영을 힐끗 본 후,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며) 댁 남편한테 이야기는 들었죠? 약희 … 집주인 (색안경을 벗고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잡으며) 그런데 갈 곳은 정해졌~ (손잡이가 쑥 들어가자) 어머! 나? 약희 걱정 마세요. 날짜 되면 알아서 나갈 테니까. 무영 (혼잣말로) 어딨더라. 여깄다. (명함을 보며) 오이제로에 제로제로제로제로.   핸드폰 발신 신호 후 제로버그회사의 경쾌한 컬러링이 들린다. 집주인은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내리깔며 집안 구석구석을 훑어본다.   집주인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내며) 여기, 이사비용하고 남은 보증금, 다 까먹고 얼마 남지도 않았지만 (약희가 신경질적으로 봉투를 받자) 거, 세어 봐요. 약희 (눈으로 대충 보며) 맞겠죠. 집주인 그런데 모기, 이제 더 없죠? (팔목과 다리를 긁적이며) 어휴, 그런데 왜 이렇게 간지러워. 하긴 이런 구질구질한 데서 내 피부에 트러블이 안 생기면 그게 이상한 거지. 소리 (경쾌한 소리로) 스피디하게 모시겠습니다. 제로버그입니다. 무영 (손짓을 하며) 있어요, 우리 집에 모기가 있어요. 커다란 모기떼가 몰려왔어요. 집주인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며) 이게 무슨 소리야? 모기? 소리 네? 잠시 만요, 고객님. 담당자를 바꿔 드릴게요. 방역업체 직원1 네, 스카이 팀장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무영 지금 우리집에 난리가 났어요. 어마어마한 모기떼가 몰려오고 있어요. 집주인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모기떼? 방역업체 직원1 네? 이무영씨 이무영씨, 맞죠? 그런데 모기가 있다구요? 그것도 떼로? 무영 (확신에 찬 목소리로) 네. 아주 어마어마한, 그리고 커다란 방역업체 직원1 그럴 리가요? 그럼 본인이 직접 눈으로 확인했나요? 무영 소리가 들려요. (핸드폰을 공중에 대며)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의 모기떼 소리가 마구마구 들려요. 방역업체 직원1 그래요? 음… 바로 출동하죠.   무영이 잠시 큰 동작으로 모기를 쫓는 시늉을 하다가 귀를 막는다. 약희는 이런 무영의 행동에 당황하나, 그렇다고 무영을 말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집주인은 무영의 행동에 많이 놀란 눈치이다. 그러다가 잠시 집주인과 무영의 눈이 마주친다. 이때 둘 사이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갑자기 무영이 집주인에게 다가가 집주인의 뒷목을 찰싹 친다.   집주인 아! 뭐야? 무영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이, 거기가 집주인 목! 모기요? 무영 그러니까 모기가 모게, 모기가 모게… 집주인 네? 모…모기!   집주인이 목 주변을 문지르며 긁다가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 본다. 순간 멈추며 무영을 노려보지만, 무영은 무관심하게 계속해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있다. 바로 이때 초인종이 울리고 방역업체직원1, 2가 등장한다.   방역업체 직원2 네, 제로버그입니… 무영 빨리요 빨리. 이 모기들 좀, 정말 미치겠어요. 얘네들 좀 보세요. (손가락으로 허공과 집주인을 가리키며) 여기 여기, 지금도 막 나한테 달려들잖아요. 방역업체 직원1 (무영을 응시하다가 직원2를 힐끗 보고) 확인하지.   직원2는 바로 장비를 들고 구석구석을 확인한다.   무영 이놈의 모기들이 처음에는 한두 마리가 앵앵거리다가 지금은 숨어 있는 놈들까지 몰려나와 날 쫓아오는 거예요. 방역업체 직원1 그래요? 본인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셨다고 하셨죠? 무영 그, 그럼요.   방역업체 직원1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집주인과 약희에게 동의하느냐고 묻는 손짓을 취하자 약희는 모른 척 눈길을 피하고 집주인은 계속해서 몸을 긁적이며 모기를 피하는 몸짓을 취한다. 이때 방역업체 직원2가 직원1에게 다가온다.   방역업체 직원2 팀장님, 확인 결과 이곳에는 모기는 물론 날파리 한 마리도 없습니다. 방역업체 직원1 역시 (무영을 보며) 들으셨죠? 무영 그럴 리가… 지금 이 소리 안 들려요? 지금 막 앵앵거리잖아요. 와, 미치겠네. 여길 보시라니까요. 여기 여기요, 이곳에서 났다가 아니 저기서… 방역업체 직원1 어디? 여기? 도대체 어디요? 한 마리라도 잡아보세요. 무영 (주변을 마구 돌면서 구석구석을 가리키다가 직원1을 돌아보며) 한…마리? 방역업체 직원1 (검지를 흔들며 단호하게) 한 마리! 우리 제로버그 스카이팀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리콜도 없는 퍼펙~팀입니다. 무영 퍼․펙․트! 방역업체 직원1 (짧게) 네, 퍼펙트. 집주인 그, 그럼 뭐야? 아까 내 목을 내리친 것은, 일부러… 이 사람들 안 되겠네. (뒷목의 부여잡으며) 이젠 폭행까지, 아이고 목이야, 아이고 목이야. 약희 폭행이라니요? 모기 잡을 때처럼 살짝 친 것을 가지고 집주인 살짝? 이게 살짝이야? (방역업체 직원2를 보며) 거기 젊은 총각, 이걸 보라고, 여기 여기, 보이지? 빨갛게 손자국 난 거. 방역업체 직원2 (집주인의 목 가까이 얼굴을 대고 살펴보다가) 제가 보기에는 그냥… 집주인 그냥? 그냥 뭐? 방역업체 직원2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냥 손톱으로 긁은 자국인데요.   어수선한 와중에 무영은 사람들의 대화에서 벗어나 있고 이러한 무영을 방역업체 직원1이 주의 깊게 살핀다.   방역업체 직원1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시, 잠시만요, 음, 제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이무영씨에게 들리는 모기 소리는 일시적인 환청인 듯합니다. 약희 (놀라며) 화,화, 환청이요? 방역업체 직원1 네, 맞습니다. 환청. 과도한 스트레스나 심리적 불안으로 인해 실제 없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종의 환각 현상이죠. 때에 따라서는 환영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약희․집주인 !? 방역업체 직원1 환청은 낮은 단계의 벌레 울음소리나 소음과 같은 단순한 잡음에서부터 단계가 높아질수록 뚜렷한 내용이 있는 특정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까지 합니다. 사람 말소리인 경우에는 불쾌감을 주는 간섭이나 욕, 또는 명령하는 소리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 심지어 아첨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타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죠. (사이) 음… 제가 보기에는 이무영씨는 아직까지 환청의 초기 단계로 보입니다만, 스트레스가 심해질수록 높은 단계의 환청을 넘어 마약 중독과 유사한 환각 증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약희 그, 그럼, 지금 애아빠의 귀에 헛소리가 들린다는 말씀이에요. 방역업체 직원1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는요. 약희 (무영의 모습을 멍한 듯 바라보며) 그, 그래서 아까도… 어이구, 세상에 집주인 (다리와 몸을 어색하게 긁다가 무영을 노려보며) 뭐야, 그럼 완전히 미친 거잖아? 어쩐지, 아까부터 눈빛이 퀭한 게 이상했어. 흥, 이제 정신병원에 가야겠네. 약희 (순간 노려보며) 함부로 말하지 마요. 당신이, 당신이 뭔데 남의 남편한테 미쳤다고 해요. 집주인 아니, 이 여자가 누구한테 당신이래. 그리고, 없는 소리가 난다고 우기면 그게 미친 거지. (사이) 아님 뻔한 거지. 모기 소리를 트집 잡아서 여기에 더 눌러앉으려고 하는 수작이겠지 뭐. 누가 그 뻔한 속셈 모를 줄 알아. 이래 봬도 나 산전수전 겪으면서 당신들 같은 사람 많이 상대해 봤어. 흥~ 약희 눌러앉는다고? 우리가? 여기에? 아무리 없이 산다고 자존심마저 죽지는 않아요. (단호하게) 걱정 말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날짜 되면 이곳에서 나갈 테니까. 사람을 도대체 뭘로 보고 그래요. (무영을 보며) 당, 당신도 뭐라고 좀 해봐. 집주인 뭘로 보긴, 내 눈에 보이는 데로 보지. (혼잣말로) 딱 보니, 말 그대로 갈 곳 없는 거지네 뭐. 흥~ 약희 뭐 뭐, 뭐라고, 거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우리가 집을 빌린 거지 언제 당신한테 구걸을 했어? 집주인 구걸? 흥, 구걸은 아니어도 (무영을 곁눈질하며) 애걸은 했지. 약희 뭐, 뭐라고? 이 여자가 정말 집주인 뭐, 이 여자, 이제 갈 곳도 없는 밑바닥 주제에 집주인한테 감히, 분수도 모르는 것들이 약희 (순간 집주인에게 달려가 악을 쓰며) 그래, 그래, 나 이런 밑바닥에 산다. 이젠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다.   방역업체 직원1, 2가 맞붙은 두 사람을 떼어 놓으며 진정시킨다. 그 와중에도 방역업체 직원1은 집주인 편을 간간이 든다. 이때도 무영은 계속해서 모기를 찾고 있다.   방역업체 직원1 자자자, 이제 그만, 그만하시고 진정하세요.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집주인 놔놔, 이것 안 놔? 깡패처럼 무조건 힘이나 써서 해결하려고 하고. 흥, 가진 것도 없는 것들이 분수를 모르면 교양이라도 있어야지. 약희 (악을 쓰며 다시 집주인에게 달려들며 몸싸움을 하며) 뭐라구? 깡패? 교양? 그래, 나 없어. 아무것도 없어. (한동안 엉겨 붙어 있다가 약희가 순간 엉엉 오열하며) 이젠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구. 방역업체 직원1 그만 그만들 두세요. 사모님, 사모님이 먼저 참으세요. 새댁도 진정을, 우선 진정부터 해요. (약희를 진정시키며) 그리고 새댁, 남편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 괜찮아질 겁니다. (둘 사이가 조금 누그러지자) 음…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는데… 사실 저도 집에선 모기소리와 마누라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헷갈릴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러다 보면… 마누라가 모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마누라를 보며 모기 때려잡는 생각을 합니다. (모기 잡는 동작을 취하며) 이렇게요. 이렇게라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리죠. (직원 2를 곁눈질하며) 안, 안 그런가? 방역업체 직원2 아 아, 네. (직원 1을 곁눈질하며) 사실 저도… 가끔 작업할 때 모기소리와 팀장님 목소리가 구별이 안 될 때가 있는데요, 그땐 이렇게… 방역업체 직원1 (싸늘한 미소로 직원2를 노려보며) 그래? 그래서 모기를 잡을 때 개잡듯이 후려치나? 방역업체 직원2 (뻘쭘한 표정) 그게 아니라 제 말은… 방역업체 직원1 (표정을 확 달리하며) 환청은 일시적인 현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주변 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절실하죠. 약희 (멍한 무영을 순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기야, 무슨 말이든 말 좀 해봐. 집주인 이분들께서는 이 세상에서 배려와 관심이 가장 많이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흥~ 약희 (순간 매서운 눈매로 노려보며)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방역업체 직원1 그만, 그만 (절도 있는 자세로) 그럼 이만, 저희 제로버그의 리콜 서비스는 고객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무제한 달려갑니다. 추후 문제가 생기면 다시 연락 주십시오. 집주인 어머나! 내 정신, 어머, 시간 좀 봐. 나도 늦었네. 오늘 계모임이 있었는데… 알죠, 내일 모레까지인 거. 약속이나 지켜요. 약희 맘 푹 놓으세요. 설사 붙잡아도 더러워서 나갑니다. 흥~ 방역업체 직원1, 2 퇴장. 집주인도 서둘러 따라 나선다. 무영은 계속 멍하니 있다가, 주변을 둘러보며 힘없이 모기 잡는 행동을 취한다. 그런 무영을 약희는 흐느끼며 바라본다. 이 와중에도 중장비의 소음은 계속된다. 얼마 후 무영은 축 처진 채로 의자에 앉는다. 약희 (맥이 풀린 듯 울먹이며) 그런데 자기야, 이제 우리, 우리, 어떡하지? 무영 진짜 들렸는데… 지금도, 지금도 분명히 들리는데 약희, 망설이다가 무영의 뒤로 가서 조용히 어깨를 감싸자, 잠시 후 무영은 약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조명이 꺼진다. 공사장 착암기 소리가 집안 구석구석을 울린다. 실내조명이 켜지자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있고 시간이 갈수록 중장비 소음은 커지면서 간간이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약희 (몸을 일으켜 무영을 보며) 소리 들려? 무영 뭐? 약희 이 소리? 잘 들어봐. 무영 … 약희 이거 귀뚜라미 소리야.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편해진다. 벌써 가을이 오려나? 무영 (심드렁하게) 나도 알아. 모기소리가 아닌 거, 귀뚜라미 소리인 거. 약희 (사이) 삐쳤어? 무영 뭐가? 약희 아니다. 무영, 약희… 이때부터 아주 조금씩 실내 연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인다. 무영 맞다. 조금 전에 하려던 말, 뭐야? 약희 (망설이다가 잔기침을 하며) 그래서는 안 됐는데… 무영 뭐? 약희 (뜸을 들이며) 엊그제… 자기한테 모기 같다고 말하고 확 뛰쳐나간 거. (사이) 그때는 모든 게 자기 탓 같았어. 자기가 한없이 못나 보이고 원망스러워서 울컥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어쩔 수 없었잖아. 자기도 지금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나라도 당신 편이 되었어야 했는데… (기침을 하며) 그래서 환청이 들렸나 싶어지구… (속삭이듯) 미안해. 무영 (홱 돌아서 등을 보이며) 스트레스가 확 더 쌓인다. 약희 (의아한 듯) 뭐? 무영 (귀를 파며) 환청이 들려. 예전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가 방금 내 귀에 들렸거든. 약희 (무영의 몸을 뒤집으며) 뭐야? 무영, 휙 뒤돌며 약희를 안는다. 그 후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애정이 담긴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때 무영이 기침을 하자 약희의 구토가 시작된다. 약희 (구토를 참으며) 나… 나, 괜찮아. 무영 미안해. 약희 … 무영 고마워, 함께해 줘서… 약희 난 편안해. 아무 말 (기침을 하며) 하지 마. 무영, 약희… 약희 아, 덥다. … 우린, 우린 그 약속은 지킬 수 있을까? (사이) 집주인한테 무영 (한참 생각하다가) 아마도 이때 무영과 약희는 한참 동안 기침과 구토를 반복한다. 한참 후 쪼그려 앉아 있던 무영이 무엇에 집중을 하며 귀를 기울인다. 무영 소리 들려? 약희 … 뭐? 무영 그러지 말고 잘 들어봐. 약희 (기침을 하며) … 무영 자자, (기침을 하며) 정신을 집중하고 우리의 처음을 생각해봐. 약희 처음? (사이) 처음이라… (기침 후 구토를 하며) 우리한테도 처음이 있었나? 무영 생각 안 나? 5년 전쯤에, 왜 있잖아, 강촌으로 동아리 MT 갔었을 때, (기침 후 헛구역질을 하며) 전혀? 음… 무영이 한참 헛구역질을 한 후, 엎드려 있다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손가락으로 점점 크게 원을 그린다. 그러자 연기는 점점 사라지고 대신 비눗방울이 서서히 날리기 시작한다. 무영 그럼 이 소리 좀 들어봐. 약희 소리? 무슨 소리가 나? 무영 잘 들어봐. 약희 (짧지만 심한 구토 후 웃으며) 혹시 자기, 또 환청 아냐? 무영 (진지하게) 지금 장난 아니야, (기침을 하며)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그리고 찾아봐. 약희 (조금 진지하게 살짝 눈을 감으며) 음… 들려. 물 떨어지는 소리랑, 계량기 돌아가는 소리, 음… 위층에서도, 어? 그 사람들, 그거 하나 부다. (애교 섞인 목소리로 기침을 하며) 에이, 부럽당~ 무영 참, 그런 소리 말고. 자, 마음을 편하게 눈을 감아. 그리고 천천히 집중해봐. 약희, 잠시 망설이다가 심호흡 후 진지하게 몰입한다. 점차 몽환적인 음악이 들릴 듯 말듯 울려 퍼지고, 이와 함께 환상적인 조명이 시작된다. 약희 음… 어! 이게 뭐지? 뭔가 들려, 음… 물소리랑, 바람소리 (일어나며) 어어, 잠깐 이건… 무영 들리지? 그럼 좀 더 주위 소리들을 찾아 봐, 그리고 느껴 봐. 약희 (다시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음… 귀뚜라미랑 개구리 울음 소리, 어~어, 새소리도 들려.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지? (순간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좀 더 깊이 빠져들며) 이 소리 이 느낌, 왠지 낯설지 않아. 무영 이제 그럼 눈을 감고 소리가 느껴지는 곳을 찾아가 봐. 약희 (무영의 어깨를 짚은 채 천천히 일어나 걸으며)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내가 예전에 느꼈던 그 편안함, 그리고 설렘… 그러면, 그러면, 여기는… 아! 조명이 꺼진다. 환상적인 조명과 몽환적인 분위기의 음악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점차 사라지면서 앳된 약희의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는 희미한 조명이 비춘다. 이때 분위기는 아늑한 꿈결 같은 분위기이다. 그 후 점차 계곡 물소리와 개구리소리, 새소리가 뒤섞인 자연의 소리가 함께 들리기 시작한다. 새소리는 뻐꾸기 소리이다. 약희 (황홀함과 나른함이 교차한 느낌, 그리고 혀가 약간 꼬인 발음으로) 여, 여, 여긴, 그러고 보니 개구리 소리가 들리고 … 새소리도 들리네. 음, 이게 무슨 새더라? 딱따구리 소린가? 아니면… 부엉이? (이때 ‘뻐꾹’ 하는 소리가 들리자 손뼉을 치며) 아, 맞네요. 뻐꾸기. 역시~ 무영 선배는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근데… 저기요, 선배님. 자꾸 선배님라고 하니까 좀 어색하네요. 그, 그러니까, 저기… 저는, 위로 오빠가 셋인데요, …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해서요, 그러니까, 저기 (사이) 그냥 오빠라고 하면 안 돼요? … 왜, 왜 말씀이 없으세요? … 네에! 진짜, 진짜루요? (한참 후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하늘을 보며) 무영, 무·영·오·빠. 그런데요, 하늘에 별이, 별이 보여요. 아주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무영 (소리)약희야! 야, 김약희, 너? 너! 약희 어… 어! 내 속에서 뭔가,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아. 잠깐만 여기서, 여기서 잠시 쉴래요. 약희 가 서서히 쓰러진 채로 눈을 감자 조명이 꺼진다. 잠시 후 급한 소방차의 경적소리와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무전소리 오전 02시 18분, 용안 4동 재개발 B-02지구 상황 발생. 도로 사정으로 소방차는 진입 불가능하며, 가스중독으로 인한 일가족 3명은 현재 후송 중, 이상. 조명이 꺼진다.
  • [서울신문 2012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홍루/김가경(본명 김숙희)

    [서울신문 2012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홍루/김가경(본명 김숙희)

    소설 당선작 - 홍루/김가경(본명 김숙희) 녀석이 톱밥 속으로 숨어들었다. 녀석은 밀크셰이크처럼 어감이 달콤한 밀크스네이크 종이다. 먹이 줄 것과 따뜻하게 해 줄 것, 간단한 러시아 단어로 적어 놓은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이반이 출항하기 전 남긴 글이다. 이반은 녀석의 등을 쓰다듬고 마지막 선물처럼 케이지를 앞에 내려놓았다. 한국 사람과 러시아 사람은 닮은 구석이 많아, 이반은 러시아 사람들도 개나 고양이, 새 같은 애완동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뱀이라니, 나는 검정 바탕에 노랑, 빨강 줄무늬가 있는 이국의 낯선 뱀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러시아에서 뱀은 집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다고 생각해. 녀석을 보고 놀란 나에게 위로라도 하려는지 이반은 한국에도 그런 얘기가 있다는 걸 어디선가 들었다고 했다. 명자, 이반은 내 이름을 부르고 입으로 휘이휘이 휘파람 부는 흉내를 냈다. 그러면 집안이 텅 비게 돼, 녀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종종 휘파람을 불던 내게 이반은 러시아 속담을 빗대 말했다. 나는 멀찍이 녀석을 내려다보며 이반의 익살에 웃음을 내보였었다. 이반을 만난 것은 클럽 로즈에서였다. 로즈는 P시에서 속칭 텍사스촌으로 불리는 외국인 거리에 있었다. 예전에는 주로 미군들이 드나들었는데 미군이 철수하고 러시아 선원과 상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날도 나는 로즈에서 맥주를 마시며 립스틱이 번지지 않았는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젊은 러시아 청년 하나가 보드카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마담 장 앞에서 한국 얘기를 듣던 선원 중 하나였다. 술을 마실 때 거울을 보면 안 돼요, 아름다움까지 먹어버리거든요, 귓불에 입술을 갖다 대며 그가 속삭였다. 흔한 작업멘트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의 나긋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반이라고 했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처음 출발하는 곳이 고향이라고 말했다. 나는 시베리아 열차가 끝없이 달리는 드넓은 숲과 초원을 떠올렸다. 그에게 러브 오브 시베리아란 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양손을 허공에 올려 내 얼굴을 길게 그려보였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왼쪽 손목에 새겨진 푸른색 돛이 펄럭였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내가 여주인공과 닮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그린 얼굴이 허공에 그대로 떠 있는 것처럼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러시아 사람과 첫 대면을 할 때 영화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영화 속 여주인공을 만난 것처럼 이국의 여자들에게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대개 영화 속 지명이나 주인공의 이름을 들먹이는 선에서 끝이 났다. 러시아말로도, 한국말로도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순간에 이르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가 턱을 괴고 조용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여행지처럼 나를 설레게 했다. 음악이 흘렀고, 클럽 로즈는 마치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을 품고 있는 대합실 같았다. 그의 손목에 새겨진 푸른 돛 때문이었을까, 나는 문득 그라면 함께 여행을 떠나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같이 여행을 떠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월요일만 아니라면 언제라도 좋아요, 월요일 여행은 불행하거든요, 러시아 속담이에요. 느닷없는 제안이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는 벽면에 붙은 러시아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마치 오래 전에 만난 사람처럼 손을 잡고 아무 손님도 잡지 못한 나타샤를 지나쳐 거리로 나왔다. 밤하늘에는 만국기가 꽃잎처럼 나풀거렸고 만국기의 행렬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두 블록 떨어진 내 숙소로 걸어올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도 이반이 러시아 속담을 말하며 내 입술에 입을 맞출 것만 같다. 시계가 밤 아홉시를 넘겼다. 녀석은 원색의 몸을 감춘 채 아직 기척이 없다. 나는 열선을 펴서 케이지 크기만큼 접었다. 그 위에 타월을 깔고 케이지를 얹었다. 사람 옷 입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판매원이 열선 까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겨울철, 스스로 온도 조절을 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열선은 생명줄과 다름없다고 했다. 녀석에게 25도의 체온으로 이국의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불행일 수 있었다. 나는 콘센트에 코드를 꽂고 케이지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거실의 불을 낮추고 이반이 남긴 메모지를 냉장고에 붙였다. 주방 창가로 가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북향으로 나 있는 주방에서 밖을 보면 아래층에 있는 중국집 ‘홍루’의 뒤꼍이 훤히 보였다. 홍루 뒤꼍에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새들었다. 쥐라도 쫓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담자락을 타고 지나간다. 지난봄, 가게의 주인이 바뀌면서 홍루(紅樓)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홍루는 붉은 다락방이라는 뜻이지만 이곳에 사는 화교들은 늙은 기생의 방이라는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변두리 사거리의 허름한 중국집 이름 홍루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거리는 스산할 정도로 빛이 꺼져 가고 휑하니 바람만 몰아 불었다. 멀리 텍사스 거리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등 뒤로 손을 넘겨 자주색 민소매 드레스의 지퍼를 올렸다. 목선이 등 뒤로 깊게 파인 드레스였다. 이반을 만났을 때 이 드레스를 입었다. 이반이 긴 허리를 굽히고 마른 등에 입술을 댈 때면 나는 수줍은 소녀처럼 간지러움을 참아내곤 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빨강 립스틱을 덧바르고 귓불 뒤에 향수를 뿌렸다. 구제를 구입해 수선한 밍크를 꺼내 걸치고 자투리로 만든 밍크 모자를 머리에 비스듬히 얹었다.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장갑을 꼈다. 은색 스팽글이 촘촘하게 박힌 카우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텍사스촌에 접어들자 겨울 내내 공중에 걸려 있던 해진 만국기가 바람에 나풀댔다. 그 아래, 술에 취한 러시아 선원 두 명이 러시아 혁명가 스텐카 라진을 부르며 지나갔다. 나는 시애틀 노래주점을 지나고 캄차카 노래방을 지나 클럽 로즈로 걸음을 옮겼다. 로즈에는 러시아 민요인 백만 송이 장미가 흐르고 있었다. 낮고 고혹적인 중년 여가수의 목소리가 담배 연기와 흐린 불빛에 섞여 들었다. 손님이라고는 한국 선원 두 명과 러시아 선원 두 명이 전부였다. 마담 장이 표정 없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반을 만났던 자리에 앉아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얹었다. 한국 선원과 함께 있던 나타샤가 다가와 서툰 한국어로 언니, 마셔? 라고 물었다. 나는 보드카와 러시아 닭 꼬치인 샤실릭을 시켰다. 담배를 피워 물고 천천히 로즈 안을 둘러보았다. 마담 장이 무료하게 하품을 해댔다. 필리핀에서 온 구잘은 러시아 선원과 섞여 백만 송이 장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음악이 끝날 무렵 나타샤가 보드카와 샤실릭을 내왔다. 나는 담배를 끄고 보드카를 한 잔 따랐다.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자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목까지 치닿았다. 이반은 보드카를 마시는 순간이면 고향을 떠났다는 것도, 추운 바다 위를 떠돈다는 것도 모두 잊는다고 했다. 나는 열기가 되뿜어져 나오는 목을 진정시키기 위해 샤실릭 꼬치에서 닭 가슴살 한 점을 빼 마요네즈에 찍어 입에 넣었다. 내가 보드카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미군이 철수하고 나서였다. 러시아 선원들이 골목을 차지하고 거리의 젊은 여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짐을 꾸려서 떠났다. 고작 러시아 선원의 비위나 맞추며 살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마담 장도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갔던 여자였다. 나는 미군 대신 러시아 선원을, 맥주 대신 보드카를, 영어 대신 러시아어를 몸에 익혔다. 이 거리에 나타샤와 구잘이 찾아들었다. 나타샤는 러시아에서 발레리나였고 구잘은 필리핀에서 가수였다고 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꿈을 찾아 이곳을 떠났고 또 누군가는 또 다른 꿈을 좇아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텍사스촌으로 되돌아 온 사람들은 좀체 이 거리를 다시 벗어나지 못했다. 마담 장이 러시아 민요 대신 빠른 행진곡으로 음악을 바꾸었다. 선원들이 경쾌한 해군의 노래에 맞춰 무릎과 팔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보드카 병이 순식간에 비어 갔다. 시계는 벌써 열한 시를 넘겼다. 한국 선원이 나타샤의 뺨을 비비며 등줄기를 훑었다. 선원 하나가 그녀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 순간 그녀가 마담 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담 장이 전화를 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아가씨가 클럽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는 여자였다. 계산을 마친 그들이 클럽 안을 빠져 나갔다. 손님은 이제 러시아 선원만 남았다. 유난히 손님이 없는 밤이었다. 살집이 많은 러시아 선원 하나가 보드카를 마시며 계속 나를 주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선원은 보드카 병을 쥐고 일행을 벗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구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틀거리는 선원보다 구잘이 먼저 내 테이블 앞에 와 선다. 러시아 선원이 들으라는 듯 러시아말로 이번에도 손님을 채 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선원이 멈칫거리는 사이 구잘이 밖으로 나갔다. 선원이 내 앞에 앉는다. 그는 잔에 보드카를 따르며 자신의 고향 이야기로 말을 건넸다. 나는 그에게 이반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깨를 추켜올리며 자신이 이반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주색 드레스가 마음에 든다며 슬쩍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해군의 노래가 끝나고 러시아 혁명가가 시작되었다. 구잘이 필리핀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구잘의 친구가 러시아 선원의 팔을 꿰찼다. 멍청이! 저 언니 나이 많아, 주름 많아, 구잘이 선원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구잘의 말에 선원이 내 앞에 앉은 선원에게 손짓을 보냈다. 동료가 만류하는 손짓을 무시하듯 선원이 지갑을 꺼내 보드카와 샤실릭 값의 두 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켜보고 있던 구잘이 거칠게 다가왔다. 언니 년 나빠! 그녀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놀란 선원이 성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의 돈을 챙겨 일행 쪽으로 가버렸다. 망할 년! 어린 년이! 마담 장이 구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언니 년, 나빠! 구잘이 악다구니 끝에 손을 풀었다. 그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샤실릭 꼬치가 꾸들꾸들 말라갔다. 러시아 혁명가가 끝나고 경쾌한 아코디언 연주와 함께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유난히 손님이 없는 밤이었다. “이 짓도 이제 지긋지긋해, 러시아 년들을 한국 놈들에게 붙이고 필리핀 년들은 러시아 놈에게 붙이고, 이렇게 갈보 년들 불러대는 것도 신물이 난다구!” 그녀가 보드카를 마시며 넋두리를 해댔다. 쿨럭쿨럭, 천식 때문인지 잔기침이 뒤따랐다. “그래도 옛날에 이 바닥에서 명자, 하면 알아줬는데, 사내들을 홀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지, 그 시절에는 먹물 튄 년이 드문 때였으니…….”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흐릿한 불빛을 타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거에 혹해서 사내놈들이 많이 찝쩍댔지…… 그때 한 놈 잡아 떠나지, 무슨 미련이 있다구…….” 그녀의 목소리는 무대 위에 홀로 앉은 재즈가수의 독백처럼 한없이 낮았다. “너나 나나, 진즉에 이 바닥을 떴어야 하는데……, 사나운 팔자는 이래도 저래도 막히니…….” 그녀는 마치 거울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손님은 더 이상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코트를 걸쳤다. 카우치 백을 열어 계산을 마치고 조용히 로즈를 나왔다. 홍루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나는 홍루 앞에서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고 모자를 반듯하게 썼다. 보드카 때문인지 속에서 열이 올랐다. 어두운 계단을 지나 2층 현관문을 열었다. 녀석은 아직도 톱밥 속에 파묻혀 있다. 녀석에게 다가가 케이지 밑에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댔다. 따뜻했다. 월요일에 길을 떠나면 여행이 불행하게 된다고 했던 이반은 정작 월요일에 떠났다. 이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단순히 그가 월요일에 떠났기 때문이리라. 나는 욕실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드레스를 벗었다. 거울에 깡마른 몸이 드러났다. 이반이 명자, 라고 이름을 부른 뒤 커다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려 보이면 나는 러시아 회화 책을 뒤지듯 그가 허공에 그려낸 그림을 꼼꼼히 살폈다. 이반은 종종 그렇게 자신이 탈 배가 지나갈 곳을 손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이반의 손목에 새긴 푸른 돛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이반은 지금 어느 바다를 지나고 있을까, 나는 깡마른 몸에 샤워기의 물을 뿌렸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것은 녀석 때문이었다. 문득 녀석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이 떠나고 녀석을 제대로 본 적도 없다. 나는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케이지에서 멀찍이 떨어져 톱밥 위를 보았다.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반이 떠나고 녀석은 줄곧 톱밥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일까, 나는 케이지 안을 살폈다. 톱밥의 곡선이 흐트러짐 없이 처음 그대로였다. 나는 냉동실 문을 열고 이반이 사 놓은 먹이를 하나 꺼냈다. 먹이는 알루미늄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개수대에 따뜻한 물을 받아 포장된 먹이를 그대로 담갔다. 재스민 차를 우려내 창가로 간다. 눈이 흩날렸다. 홍루 지붕에는 엘피 가스통 4개와 물탱크,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작업복과 면장갑, 깨진 그릇이 나뒹굴었다. 그 낡은 지붕 아래 자장면과 짬뽕 옆으로 적힌, 익숙하나 한 번도 맛을 본 적 없는 횡서 끝자락의 낯선 메뉴를 떠올린다, 어쩌면 남자가 만들어 본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감조차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그 메뉴 밑으로 삐뚤삐뚤하게 적힌 러시아 음식들. 흑빵과 함께 홍루의 남자는 육개장과 비슷한 쌀단까나 빈대떡과 비슷한 블린 같은 러시아 음식도 만들었다. 종종 러시아 사람들이 중국 음식 중에 끼어 있는 러시아 음식을 주문하였다. 눈이 내려앉는 홍루 뒤꼍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등을 보이고 양파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다. 내가 보는 것은 언제나 남자의 등이다. 남자는 마치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사람처럼 묵묵히 앉아 양파를 깠다. 넓은 고무 대야를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물에 붇고 있는 양파 껍질을 벗겨 낸다. 인조털이 달린 두툼한 점퍼에 가려진 남자의 양 옆 어깨가 끊임없이 움직인다. 나는 껍질과 뒤섞인 혼탁한 물에 한 쪽 손을 깊숙이 집어넣고 남은 양파 알을 찾는 남자의 기울어진 어깨를 본다. 언뜻언뜻 삐져나오는 남자의 붉고 물에 불은 손. 남자는 허리를 펴고 위를 올려다보는 법이 좀체 없다. 남자의 등 뒤로 살금살금 나타샤가 다가간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허리를 익살스럽게 굽히고 남자의 등 뒤에 몰래 다가섰다. 나타샤가 두 손으로 남자의 눈을 가린다. 남자가 양파 껍질이 묻은 젖은 손을 차마 나타샤 손에 포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나타샤가 손을 풀었다. 나는 뒤돌아보고 멋쩍어하는 남자의 표정을 바라보며 식어가는 찻잔을 볼에 대고 눌렀다. 나타샤가 남자 앞에 턱을 괴고 앉는다. 분홍색 털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클럽에서와는 달리 앳돼 보였다. 남자가 양파 껍질을 벗기는 일을 멈추었다. 나타샤가 일어서더니 뒤꿈치를 모으고 양발을 벌려 발레의 폴리에 자세를 취한다. 두 팔을 뻗어 머리 위로 올리고 천천히 발 앞굽을 세워 잔걸음으로 뒤꼍을 옮겨 다녔다. 한눈에 봐도 그녀가 백조의 동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타샤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총총걸음으로 뒤꼍을 돌아 남자 앞에 섰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동그랗게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남자를 향해 웃고 있는 나타샤를 보며 식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개수대에 던져놓은 녀석의 먹이가 녹았다. 먹이를 건져서 접시에 담고 알루미늄 포장지를 벗겨냈다. 손가락 한 마디를 좀 넘긴 연한 핑크색 먹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쥐가 녀석의 먹이라니. 처음 기지촌에 왔을 때처럼, 처음 러시아 선원을 만났을 때처럼 무섭고 낯설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집게로 새끼 쥐를 집어 올려 녀석에게로 갔다. 톱밥 위는 아직도 텅 비어 있었다. 케이지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고 먹이를 내려놓았다. 휘파람을 분다. 녀석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휘파람을 분다. 어릴 적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아무도 없는 집 마루에 앉아 허공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대곤 했다. 설령 어른들의 말처럼 뱀이 나온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휘파람을 불면 곁에 누가 있는 것처럼 무서움이 가셨다. 이반의 말대로 휘파람을 불어서 집이 비었는지 집이 비어서 휘파람을 불었는지 지금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케이지에서 시선을 거두고 소파에 앉아 여행자를 위한 러시아 회화 책을 폈다. 90쪽 ‘거리’에서부터 120쪽 ‘모자 가게’까지는 이반이 떠나기 전 러시아어로 읽어주었다. 151쪽 기차여행 편을 한글로 따라 읽는다. ‘그제야 마구 쎄스츠 나 보예즈제?’ 어느 기차에 타야 합니까? 홍루 뒤꼍으로 함박눈이 쌓였다. 나는 눈을 밟으며 홍루로 갔다. 홍루에는 나타샤와 한국인 두 명만이 앉아 있었다. 주방 안으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종업원에게 이반이 즐겨 먹었던 쌀단까와 흑빵을 주문했다. 종업원 대신 나타샤가 내 쪽을 힐금거리며 주방 입구로 갔다. 그리고 주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주문을 받아 전해준다. 나는 낮은 선반 위에 펼쳐진 러시아 회화 책을 잠시 쳐다보았다. 남자도 틈틈이 회화 책을 뒤지며 러시아 말을 익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폴리에 자세로 발을 벌리고 서 있는 나타샤의 뒷모습이 왠지 서글퍼서 고개를 돌렸다. 쌀단까와 흑빵이 나왔다. 이반은 홍루의 쌀단까 맛이 고향의 맛과 같다고 했지만 홍루의 쌀단까 맛은 육개장과 별반 다름없는 맛이었다. 천천히 흑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흑빵이 입안에서 거칠게 씹혔다. 나는 반쯤 뜯어 먹은 흑빵을 남기고 홍루를 나왔다. 케이지 안에 먹이가 그대로 있었다. 녀석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나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케이지의 뚜껑을 열고 먼지떨이를 거꾸로 찔러 넣어 천천히 톱밥을 휘저었다.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막대기로 커다랗게 원을 그은 뒤 안으로 조금씩 좁혀가며 톱밥을 감아 올렸다. 녀석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반이 곁에 있었다면 아마도 내가 휘파람을 불어 모든 게 텅 비어버린 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녀석은 어디로 간 것일까. 눈이 녹고 있었다. 녀석이 사라진 지 일주일째, 부두에 배가 들어왔다. 텍사스 거리는 러시아 선원들과 보따리 상인들로 붐볐다. 나는 클럽 문을 열었다. 로즈도 러시아 선원들로 북적였다. 여전히 러시아 음악 백학이 흘러나왔고 조명은 더 흐려 있었다. 나는 이반을 만났던, 거울이 걸린 자리에 앉았다.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리고 카우치 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언니 머? 구잘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보드카와 샤실릭을 주문했다. 마담 장이 새로운 선원들을 앞에 두고 예전 텍사스 거리에 몰려들었던 미군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선원들이 이야기를 채근하듯 마담 장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시절 마담 장의 사랑을 구하려는 한 미국 병사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백만 송이 장미를 사다가 거리에 뿌렸노라고 말하자 선원들이 속았다는 듯 몸을 털며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백만 송이 장미에 얽힌, 가난한 화가의 슬픈 사랑이야기란 것을 이내 알아챈 모양이었다. 마담 장은 배가 들어올 때마다 선원들을 앞에 두고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곤 했다. 선원들은 이국의 낯선 이야기에 자신들 나라의 이야기가 섞여 든 것을 알아채자 긴장이 풀렸는지 보드카를 연거푸 마셨다. 마담 장이 의자를 돌려 몸을 반쯤 틀고 있는 러시아 선원들을 달래듯 두 손을 들어 허공을 다독였다. 선원들이 다시 마담 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타샤는 한국인 선원들 사이에 섞여 있었고 이미 취해 보였다. 한국인 선원이 길고 곧은 나타샤의 등줄기를 더듬어 내려가다 허리를 감싸 안고 일어섰다. 마담 장이 재빠르게 나타샤와 눈길을 주고받았다. 나타샤와 한국인 선원이 계산을 마치고 클럽 밖으로 나갔다. 홍루의 남자가 클럽에 들어선 것은 내가 두 번째 담배에 막 불을 붙일 때였다. 남자는 이곳이 처음인 듯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소 들뜬 표정으로 구잘에게 주문을 했다. 그의 테이블에 맥주와 마른안주가 올려졌다. 나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셨다. 마담 장이 음악을 바꿨다.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었다. 러시아 선원들이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러시아인들의 춤은 마치 목각 인형이 줄에 매달려 움직이는 것처럼 무릎과 팔이 절도 있게 꺾어졌다. 격렬하면서도 율동 사이사이에 강한 매듭이 있는 러시아 춤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정신이 맑아졌다. 춤이 격렬하면 할수록 더 그랬다. 나는 선원들이 원무를 이뤄 추는 가팍을 보며 이반을 떠올렸다. 이반도 어디선가 함성을 지르며 저들처럼 가팍을 추고 있을까, 나는 보드카를 마시고 샤실릭을 한입 베어 물었다. 바에 앉아서 계속 몸을 흔들고 있던 마담 장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육중한 그녀의 몸이 빠른 리듬에 맞춰 민첩하게 움직였다. 선원들의 함성이 추임새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음악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의 춤은 자정까지 계속될 것이다. 구잘이 나타샤가 없는 빈자리를 대신하여 분주히 움직였다. 마담 장은 점점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해갔다. 가끔 이렇게 마담 장이 흥에 취해 선원들과 춤을 추면 그녀가 어김없이 해 오던 일, 러시아 아가씨를 한국 선원에게 붙이고 필리핀 아가씨를 러시아 선원에게 붙이는 일을 잊었다. 더불어 나의 존재도 잊었다. 그녀가 잊는 것은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천식처럼 오래된 이 거리의 모든 것들, 그녀를 되돌아오게 만들었던 익숙한 모든 것들, 그녀의 생 모두를 잊을 것이었다. 이반의 말대로 휘파람을 불면 무언가 텅 비게 되는 것처럼 그녀도 텅 비어가는 것이리라. 원무에 끼어 점점 격렬하게 몸을 흔들 때마다 그녀가 한줌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기라도 할 듯 깡마른 손을 허공에 내밀었다. 홍루의 남자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남자는 무릎 사이에 손을 찔러 넣고 눈은 줄곧 나타샤를 찾았다. 나는 마지막 보드카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남자가 취했는지 점점 고개를 떨궜다. 녀석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문득 잊고 있던 녀석을 떠올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남자가 고개를 든다. 거짓말처럼 녀석을 찾은 것은 소파 밑에서였다. 환전소에 가기 위해 러시아 동전을 지갑에 넣는 중이었다. 소파 밑으로 굴러들어간 동전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누렇게 바랜 벽지에 노랑 빨강 검정 색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소파 안쪽 벽 틈에 일자로 붙어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았다. 녀석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먹이를 꺼내 따뜻한 물에 담근 다음 물기를 닦아 소파 입구에 놓았다. 집게를 들고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녀석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숨을 삼켰다. 먹이 앞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간 녀석이 고개를 들며 혀를 날름거렸다. 녀석의 여린 혀가 재빠르게 입속을 반복해서 드나들었다. 녀석이 먹이 앞으로 다가가 먹이를 덥석 무는 순간 집게로 녀석을 집어 케이지에 넣었다. 녀석의 입에는 삼키다 만 새끼 쥐의 여린 몸이 반쯤 물려 있었다. 로즈 앞에는 며칠째 클로즈라는 안내판만 달려 있었다. 겨울이면 도지는 마담 장의 천식 때문에 잠시 문을 닫았다고 했다. 나타샤도 가끔씩 목욕탕이나 환전소에서 마주치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한국 선원을 따라 이곳을 떠났다는 말도 있었고 임신을 해서 로즈에서 쫓겨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텍사스 거리는 다 해진 만국기를 걷어내는 상인들로 분주했다. 나는 만국기가 끝나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반을 처음 만났던 날, 이반의 달콤한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던 순간, 나는 내 여행이 이대로 끝이 나길 간절히 바랐었다. 이반은 지금 어느 바다를 지나고 있을까? 나는 만국기가 걷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블라디보스토크 행 비행기표 판매소를 지나 환전소로 갔다. 마지막 남은 먹이를 녀석에게 넣어주었다. 녀석이 조심스럽게 먹이에 다가간다. 잠시 목을 추켜세우더니 슬그머니 방향을 틀었다. 또 먹이를 먹지 않을 모양이었다. 온수에 목욕을 시키면 좀 도움이 될 겁니다. 수의사는 전화로 간단하게 처방을 내렸다. 소화불량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정상적으로 탈피를 하기 힘들어진다고도 했다. 대야에 온수를 받아 케이지 옆에 놓았다. 케이지 뚜껑을 열고 널브러지듯 몸을 길게 풀고 있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집게를 들다가 내려놓았다. 녀석의 외피에 손을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녀석의 차가운 체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천천히 선을 그으며 머리 쪽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녀석의 입을 지나 턱쯤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녀석이 감미로운 몸동작으로 손에 감겨든다. 소름인지 전율인지 무언가 몸속으로 울려들었다. 나는 녀석을 안듯 들어올려 온수에 담갔다. 녀석이 천천히 물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물끄러미 녀석을 보다가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미끄러지듯 내 손을 비켜나가는 녀석의 꽁무니를 따라가며 손을 저어 작은 물보라를 일으켰다. 녀석이 점점 생기를 찾은 듯 작은 원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뒤 작은 수건으로 민첩하게 손아귀를 벗어나는 녀석을 떠내 마른 수건을 깔아놓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 녀석을 재빨리 수건 위에 굴린 뒤 케이지 안으로 털어 넣었다. 명자, 아주 잘했어, 이반이 보았더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홍루를 지나고 로즈를 지나 도로 건너편에 있는 수족관으로 갔다. 파충류 먹이 있음. 간판 옆에 적힌 글씨를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이 햄스터 케이지를 열다가 내 쪽을 본다. “뭘 드릴까요? 손님.” 점원이 케이지 안에서 햄스터를 꺼내며 물었다. “밀크스네이크 종인데……먹이 좀 사려고요.” 나는 나무토막을 기어오르는 비단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한다. “뱀을 키운 지 오래되셨나 봐요. 처음 키우는 사람은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거든요.” 점원이 손에 쥔 햄스터를 비단뱀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이렇게 한창 클 때는 녀석도 산 먹이를 찾아요, 그래야 탈피를 제대로 할 수 있거든요.” 나무막대를 기어오르던 녀석이 슬그머니 방향을 틀며 혀를 날름거렸다. 케이지에 던져진 햄스터가 꾸물꾸물했다. 움직임을 감지한 녀석도 먹이를 견준 채 꼼짝 하지 않다가 입을 벌리고 먹이를 물어 삼켰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점원에게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는 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 속담이 있었나요?” 점원은 손에 묻은 햄스터 털을 털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 냉동 쥐로 드릴까요?” 점원이 물었다. 나는 햄스터의 하얀 몸이 비단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점원은 케이지에서 꿈틀거리는 분홍색 새끼 햄스터 한 마리를 꺼냈다. “녀석들이 종종 냉동 먹이를 먹지 않는데…… 그건 아마도 탈피를 하려고 그럴 겁니다. 제대로 크고 있다는 증거죠.” 나는 점원에게서 새끼 햄스터를 받아 골목으로 돌아왔다. 날이 풀리고 있었다. 곧 부두에 배가 들어온다고 했다. 나는 문이 닫힌 로즈를 지나 홍루에 들러 쌀단까와 흑빵을 시켰다. 남자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탁자 위에는 너덜너덜해진 러시아 회화 책과 비닐도 뜯지 않은 발레 슈즈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흑빵을 뜯어 쌀단까에 적셔 먹었다. 맞은편 거울에 흑빵을 씹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밥을 먹을 때 거울을 보면 안돼요, 아름다움까지 먹어버리거든요, 이반이 내 귓불 뒤에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일 것 같았다. 홍루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 NASA “종말은 없다”…당신은 믿으십니까?

    NASA “종말은 없다”…당신은 믿으십니까?

    2012년의 첫 날인 지난 1일, 한 영화전문 케이블채널은 ‘센스있게’ 영화 ‘2012’를 방영했다. 이 영화는 2012년 지구에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닥치면서 지구 전체가 멸망하고 극소수만 살아남는다는 끔찍하고 잔혹한 이야기다. 미래에 불과했던 영화 속 2012년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고, 1월 1일 잠 못 이루던 많은 사람들이 한 해의 시작을 지구가 멸망하는 영화를 보며 불안에 떨었다. 2012년 새해 첫날, ‘2012’를 방영한 국가가 과연 한국뿐일까. 물론 타국 방송사에 일일이 물어보진 못했지만, 전 세계인들이 2012년에 가지는 종말의 이미지는 상당히 짙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나서 “2012년에 종말은 없다.”고 말했지만 믿지 않는 분위기는 커져만 갔다. 이 때문인지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해명’에 나섰다. 과학전문매체인 스페이스닷컴에 따르면, NASA의 한 자문위원은 “2012년에 종말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론은 형편없는 것”이라며 “미지의 행성이 2012년 지구와 충돌한다면, 이미 십 수 년 전에 과학자들이 추적에 나섰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다른 태양계의 행성 중 지구와 가장 가까운 것은 40억 마일 밖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현재가 되어버린 2012년에 충돌하기에는 매우 멀리 있다는 뜻이다. NASA의 지구근접물체연구소(Near-Earth Object Program Office)의 도널드 예먼스 박사도 “현재 일부 행성들의 위치가 계속해서 변하고 있지만 이것들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면서 “다른 행성이 지구에 큰 문제를 끼치진 않을 것”이라며 종말설이 터무니없는 ‘설’에 불과하다는 데에 한 표를 던졌다. 갖가지 종말설에 쐐기를 박은 것은 마야의 달력이다. 예지력을 갖췄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야인들의 달력이 2012년에 멈춰 있다는 것.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분쟁이 일었다. 일부는 실제 종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가 하면, 일부는 문제의 달력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는 법. 영화 ‘2012’는 마지막 장면에서 ‘0001년’의 시작을 알린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끝이 나자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마야인들의 달력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조차 종말론과 연결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예먼드 박사는 2012년에 종말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None, Zero, Zip, Nada“라고 답했다. 한마디로 ‘가능성 절대 없음’이다. 소행성이 지구로 오는지 오지 않는지, 거대한 지진과 해일이 발생할지 발생하지 않을지를 전혀 알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믿을 뿐이다. 다만, 영화처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영화로 직접 확인하시길.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프로배구] 마틴·김학민 ‘고공폭격’ 삼성화재 11연승 저지

    [프로배구] 마틴·김학민 ‘고공폭격’ 삼성화재 11연승 저지

    힘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미리 보는 챔피언결정전이 과언이 아니었다. 1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맞붙은 프로배구 삼성화재와 대한항공. 앞서 두 차례 만남에서 모두 피 말리는 풀세트 접전을 펼쳤던 두 팀은 이번에도 기어코 5세트까지 가고야 말았다. ●현대캐피탈 LIG손보 꺾고 4연승 질주 1, 3세트는 대한항공이, 2, 4세트는 삼성화재가 나눠 가진 뒤 맞이한 마지막 세트. 급한 것은 대한항공이었다. 앞서 두 맞대결 모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삼성화재를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하고 통합 우승을 내준 아픔도 채 가시지 않았다. 곽승석(대한항공)이 가빈의 공격을 혼자 블로킹하며 마지막 세트를 산뜻하게 출발했다. 김학민의 백어택과 마틴의 오픈 공격이 성공하며 10-8로 먼저 10점대에 안착한 데 이어 에이스 김학민이 경기를 끝냈다. 동료 마틴이 오픈 공격을 성공시켜 16-15가 된 상황에서 박철우의 공격을 블로킹해 17-15를 만들었다. 이로써 대한항공은 3라운드 전승은 물론, 삼성화재의 11연승을 막는 짜릿한 승리를 챙겼다. 마틴이 36득점, 김학민이 17득점으로 공격을 주도했고 세터 한선수의 영리한 볼 배분도 돋보였다. 신영철 감독은 “강한 서브를 박철우에게 집중시켜 상대 리시브를 흔들겠다는 전략이 주효했다.”고 승인을 풀이했다. 삼성화재는 가빈이 36득점, 박철우가 20득점으로 분전했지만 대한항공의 거센 공격과 남다른 집중력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구미에서는 현대캐피탈이 LIG손보를 3-2로 꺾고 4연승을 내달렸다. ●KGC인삼공 흥국생명 제압 선두 독주 여자부에서는 KGC인삼공사가 흥국생명을 3-1로 누르고 독주 체제를 굳혔다. 대전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계승자 김정은, 김정일 이은 영도자”… 유훈통치 공식 선언

    29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김정일 국방위원장 중앙추도대회에서 낭독된 지도부 추도사는 후계자 김정은에 대한 찬양과 충성 다짐을 통해 김정은에 의해 김 위원장의 ‘유훈통치’가 시작됐음을 공식 선언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추도사에서 “김정일 동지께서는 고난의 행군, 강행군의 준엄한 시기에 독창적 선군정치로 우리 인민군대를 혁명강군으로 키우시고 우리 조국을 세계적인 군사강국, 당당한 핵보유국으로 전변시킴으로써 우리 인민이 대대손손 자주적 인민으로 살아갈 억년 기틀을 마련하셨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의 유훈이 선군정치 및 핵보유국 지위 주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김 상임위원장은 이어 “오늘 우리 혁명의 진두에는 주체혁명위업의 계승자인 김정은 동지께서 서 계신다.”며 김정은을 전면에 내세운 뒤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는 위대한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영도, 인격과 덕망, 담력과 배짱을 그대로 이어받으신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최고 영도자이시다.”라고 치켜세웠다. 김정은의 권력 승계에 대한 정통성을 내세우고 ‘최고 영도자’라는 표현을 사용으로써 김정은 시대가 열렸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김기남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겸 비서는 연설에서 “우리는 우리 당과 인민의 최고 영도자이신 김정은 동지의 영도 따라 오늘의 슬픔을 천백배의 힘과 용기로 바꾸어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위업을 한치의 양보나 드팀도 없이 빛나게 계승 완성해 나갈 것”이라며 김정은 영도를 바탕으로 유훈통치를 이어갈 것임을 밝혔다. 인민군대를 대표한 김정각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도 연설에서 “김정은 동지는 우리 혁명무력의 최고 영도자이시며 불세출의 선군영장이시다.”라며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뒤 “우리 인민군대는 만약 적들이 감히 건드린다면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진막강한 군사적 위력을 총동원하여 놈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리고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기어이 성취할 것”이라고 밝혀 군부가 더욱 강경해질 것임을 시사했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은 “김정일에 대한 추모보다 김정은에 대한 충성대회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이 이례적으로 추도대회를 생중계한 것은 김정은이 모든 것을 갖췄다는 것을 대내외에 과시함으로써 김정은 체제가 시작됐음을 공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김미경·최지숙기자 chaplin7@seoul.co.kr
  • [데스크 시각] 상가(喪家) 취재/안미현 문화부장

    [데스크 시각] 상가(喪家) 취재/안미현 문화부장

    예나 지금이나 취재하기 참 꺼려지는 곳 중의 하나가 상가(喪家)다. 뼈를 발라내는 것 같다는 부모의 참척(慘慽) 고통 앞에서, 말간 눈으로 영정을 바라보는 어린 자식 앞에서, 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배우자의 얼굴 앞에서, ‘심경’을 물어야 하는 탓이다. 더러 고인의 사진을 빼내야 할 때도 있다. 이는 훗날 술자리 영웅담으로 둔갑하기도 하지만 오열하는 유족을 뒤로한 채 사진을 뒤지고 있노라면 ‘기자놈들’이란 말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초년병 기자 딱지를 떼도 상가 취재를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상가의 성격이 ‘사건사고’에서 고위공직자나 유명 인사의 부모 상(喪)으로 옮겨가곤 한다. 다행히 고인의 사진을 훔쳐내는 따위의 못할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더러 기삿거리를 놓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기자들은 이걸 ‘물 먹는다’고 표현한다). 상주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 보니 상주나 조문객의 말 한마디가 그대로 기사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친소(親疎) 관계를 떠나 사회 지도층 인사의 상가에 기자들이 어김없이 진을 치는 것은, 물 먹을 위험이 높은 곳이 상가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때로 조의(弔意)는 건성인 채 취재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호상(好喪)인 경우는 떠들썩하게 술잔도 부딪친다. 죄의식이 덜하긴 해도 상가를 빠져나올 때면 가슴 한쪽이 걸리기는 매한가지다. 개인적으로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상가가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분의 상가였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큰 충격에 빠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역에서 물러난 지 이미 몇 해 뒤라 언론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잠시 망설이다가 빈소를 찾았다. 그래도 조의를 표하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눈이 벌개져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니, 역시나, 유족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신분’을 밝히고 서둘러 상가를 빠져나왔다. 그날의 상가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것은 초면의 상주에게 나 자신을 설명해야 했던 민망함이나, 누가 기자를 반긴다고 꾸역꾸역 찾아갔을까 하는 잠시잠깐의 자책 때문은 아니었다. 빈소의 썰렁함 때문이었다. 범부의 상가에 비하면야 북적댔지만 생전의 사회적 직함에 비하면 상가는 다소 스산했다. 그렇다고 고인의 인품이 훌륭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정승집’ 속담을 떠올리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내내, 마음이 헛헛했다. 2011년도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올해는 유난히 많은 사람이 운명을 달리했다. 자식을 앞세우고도 구수한 청국장 냄새에 침이 꼴깍 하고 넘어가던 순간, 아직은 더 살아야겠구나 하고 느꼈다는 박완서 작가가 연초 우리들 곁을 떠났다. 열린 예배를 전파한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 죽음으로 법을 만든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그토록 사랑했던 친정 팀(롯데 자이언츠)감독을 끝내 맡아 보지 못한 최동원 투수, 자신의 부정적인 면모까지 낱낱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허락했던 애플 공동 창업주 스티브 잡스, 떠나는 길조차도 선명하지 못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상가에 얽힌 기억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온 것은 아마도 세밑까지 계속된 ‘죽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죽을 만큼 힘든, 누군가에게는 죽을 만큼 기쁜 해(年)였으리라. 하지만 이 땅을 사는 대부분의 소시민에게는 여전히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팍팍한 한 해였을 것이다. 시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세상이지만, 문단의 축복 속에 늦장가를 든 함민복 시인이 쓴 시 중에 이런 게 있다. 전봇대에서 전깃줄을 걷어내고 꽃줄로 집과 건물을 연결하는 꽃봇대를 만들자는, 상상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신작시집 ‘꽃봇대’에 수록된 ‘세월’이란 시다. ‘죽고 싶도록 속상하던 마음도/ 세월이 지나면/ 마음결 평평하게 펴져/ 미소 한 자락으로/ 떠오르기도 하지요’ hyun@seoul.co.kr
  • 김동찬 성동구청 제설팀장 등 지방행정 달인 22명 최종확정

    김동찬 성동구청 제설팀장 등 지방행정 달인 22명 최종확정

    눈이 푹푹 쌓이는 밤 가난한 시인 백석은 아름다운 나타샤를 떠올리며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셨다(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폭설이 쏟아진 날이면 하루종일 차는 엉금엉금 기어다니다 접촉사고가 나고, 빙판을 걷던 노인네는 미끄러져 크게 다치기 일쑤다. 지방자치단체들이 흔히 쓰는 대책은? 염화칼슘 뿌리기다. 염화칼슘은 빠른 제설효과만큼이나 부식시키는 성질도 강하다. 차량 부식을 가속화하고, 도로와 다리 등의 콘크리트를 약화시켜 안전을 위협할 뿐 아니라 토양을 알칼리화해 가로수를 고사시킨다. 특히 염화칼슘 대 소금의 비율을 5대5로 정했지만 마구잡이식으로 뿌려 대다 보니 효율적이지도 않고, 환경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 시간이 흐르면 굳어버리는 성질의 염화칼슘을 과소비하는 것도 문제다. ●제설효과 3배… 해외 특허신청 서울시 성동구청은 달랐다. 김동찬(57) 토목과 제설현장팀장 덕분이다. 1978년 공무원이 된 뒤 제설 팀에서만 꼬박 19년 동안 일한 기계6급 기능직인 김 팀장은 ‘어떻게 하면 토양 오염과 도로 파손을 줄이면서 효과적으로 눈을 치울 수 있을까.’를 고심했다. ‘미친 사람처럼’ 새벽에 먼저 나와, 또 한밤중까지 남아서 기술 개발과 연구에 몰두했다. 변변히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중학교만 나와 공무원이 되기 전까지 카센터에서 일한 게 전부였다. 결국 2006년 다목적 제설차량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실용신안 특허를 냈다. 이후 특허권을 통해 나오는 수입은 모두 성동구청으로 넘겼다. 현재 미국, 중국, 유럽연합, 캐나다 등에 특허신청을 출원 중이다. 서울 용산구, 대구, 김포공항 등에서 제설차량 이용 상담이 쏟아지고 있다. 그는 26일 “며칠 전 눈이 왔을 때도 확인됐지만, 우리는 어느 지자체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눈을 치울 수 있었다.”고 자랑스레 밝혔다. ●내년 1월31일 시상식 서울신문과 행정안전부가 공동주관하는 ‘2011 지방행정의 달인’ 심사에서 김 팀장을 비롯해 이형수 강원도 영월군 도시관광과장과 이명옥 부산 해운대구 기획감사실 주무관 등 22명이 최종 선발됐다. 내년 1월 31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제2회 달인 시상식 및 사례 발표대회가 열린다. 최우수 달인 1명에게는 대통령 표창이, 우수 달인 2명에게는 국무총리 표창, 달인 18명에게는 장관 표창이 수여된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포스트 김정일 北 어디로 가나] ⑤ 김정은시대 통일외교 방향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중국에 이어 미국, 러시아 등도 김 위원장 사망에 조의를 표하는 등 동북아 외교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런 가운데 남북이 주도하는 한반도 ‘통일외교’를 새롭게 정비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동북아 평화·안정을 위한 평화 통일을 이루려면 주변국 협조가 필수적인 만큼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25일 “김 위원장의 사망을 계기로 남북이 염원하는 통일을 위해 당사자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며 “중국·미국 등 주변국들의 이해와 협력도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사망이 북한의 급변사태를 야기해 체제 붕괴로 이어져 결국 북한에 대한 남한의 흡수통일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은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낮다. 김 위원장 사망 이후 중국은 물론 미국·일본 등도 ‘김정은 후계’를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김정은 체제의 조기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며 북한이 조속히 안정을 되찾도록 상황을 관리하는 한편 여러 유화적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통일에 대한 북한의 태도도 주목된다. 북한은 지난 19일 조선중앙통신의 중대보도를 통해 “우리는 조국통일 3대 헌장과 북남공동선언을 철저히 이행하여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기어이 실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노동신문은 22일 사설에서 “조국 통일은 위대한 장군님의 필생의 위업이었으며 최대의 염원이었다.”고 전했다. 북한이 김 위원장 사망 후 통일을 위한 과업을 ‘유훈통치’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도 흡수통일 논란을 빚기는 했지만 북한의 비핵화 및 개혁·개방을 강조하며 통일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 취임 후 통일재원 마련 등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져 왔다. 류 장관은 최근 국회에서 “국민적 동의하에 통일을 위해 점진적이라도 (남북관계를) 개선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통일에 대한 지지와 협조를 끌어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이다. 외교 소식통은 “미·중·일·러 등 주변 4강은 공식적으로는 통일을 지지하지만 속으로는 동북아에 대한 영향력 등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며 “특히 미·중 간 역학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통일 과정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중국은 김 위원장 사망 후 ‘북한의 불안정성 차단을 통한 동북아 평화·안정’을 앞세워 통일보다는 분단 상황이 낫다는 ‘현상유지·관리’ 정책을 고수해 오고 있다. 북한을 대미 관계에 있어서 지정학적 완충지대로 삼겠다는 구상인 것이다. 미국도 당장 북한 체제의 급변으로 한반도 정세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원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통일을 주도할 한국은 주변국들에 통일의 당위성과 함께, 통일이 주변국들의 정치·경제·안보적 이해에 부합하며 동북아 평화·안정 및 다자안보협력에도 기여할 것임을 지속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봉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통일외교 차원에서 미국에 쏠려 있는 시각의 조정이 필요하다.”며 “연미친중(聯美親中) 전략을 통해 통일이 주변국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포스트 김정일-北 어디로 가나] ④ 김정은시대 대남 전략은

    [포스트 김정일-北 어디로 가나] ④ 김정은시대 대남 전략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예기치 못한 사망으로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남북관계도 ‘시계제로’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북한의 일관성 없는 대남전략으로 남북관계는 그동안 냉·온탕을 수차례 오갔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새 지도자의 등장은 이전과 차원이 다른 변수들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유훈통치’가 이뤄지는 기간 동안에는 큰 변화가 없겠지만 후계자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지도체제를 정비하고 자신만의 대남전략을 펴려는 순간 남북관계도 분수령을 맞이할 전망이다. 북한의 대남전략 윤곽은 우선 내년 초 북한의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매년 1월 1일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대내외 문제에 대한 한 해의 정책기조를 천명해 왔다. 신년공동사설로 대남전략 방향을 가늠할 수는 있지만 정부는 사설에 담기지 않을 북한의 추가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유훈통치가 시작된 만큼 사설에 이전과 다른 대남 메시지가 담기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며 “가늠은 할 수 있으나 예단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년공동사설에는 22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사설에서 김 위원장의 ‘유훈’이라고 밝힌 정도의 내용이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신문은 “조국통일은 장군님 필생의 위업이었으며 최대의 염원이었다.”며 “조국통일 3대 헌장과 북남공동선언을 철저히 이행해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기어이 실현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정은의 대남전략이 윤곽을 드러낼 시기를 놓고선 북한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판단의 기준은 지도력 확장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 생활 향상을 낮은 수준이라도 보장할 자구책을 김정은이 쥐고 있느냐다. 김정은의 ‘식량 창고’가 지도체제를 구축하는 동안 주민들을 먹여 살릴 정도라면 내년 총선·대선이 끝난 뒤쯤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남북관계 틀을 새로 짜기보다는 소극적으로 남한 정부를 상대하며 내부 정비를 끝내고 차기 정부에서 본격적인 남북관계를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남북관계는 진전도, 후퇴도 하지 않은 채 긴 동면 상태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도 북한의 대남전략이 어떻게 전환되는지를 보고 대북정책을 수정한다는 방침이다. 반면 북한이 내년 ‘강성대국’을 열 여력도, 당장의 먹을거리도 부족하다면 체제 안정을 위해 식량 지원 요구를 시작으로 보폭을 넓힐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 체제 안정화의 핵심은 경제문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용석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 교수는 “경제문제에 대한 일정한 해결 없이 강성대국을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지원과 경제협력을 매개로 적십자회담 또는 장관급 회담을 제안하며 남북관계 복원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경우 남북관계의 ‘키’는 우리 정부가 쥐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 시나리오는 예측 가능하지만 유훈통치 이후 김정은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호전적인 김정은이 또 다른 도발을 감행할 수도 있고, 스위스에서 유학생활을 한 ‘신세대’지도자답게 유연하면서도 개방적인 대남전략을 펼 수도 있다. 다만 한 대북 전문가는 “체제의 연속성, 혈통을 잇는 계승자라는 측면에서 기존에 김 위원장이 추진해 오던 대남전략을 크게 이탈할 가능성은 낮다.”고 진단했다. 이현정기자 hjlee@seoul.co.kr
  • 北, 인민복 차림 김정일 시신 신속공개

    북한이 20일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을 공개했다. 김 위원장이 17일 오전 8시 30분에 사망한 지 78시간 30분 만이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는 93시간 40분 만에 시신을 공개했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이날 오후 3시쯤 평양 금수산기념궁전 유리관 속에 안치된 김 위원장의 시신 모습을 방영했다. 북한은 김 위원장의 시신을 방부처리해 김 주석처럼 금수산기념궁전에 영구보존할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의 시신은 붉은 천으로 가슴까지 덮여 있었고 인민복 차림이었다. 시신이 들어 있는 유리관은 붉은색 김정일화와 흰색 국화로 장식돼 있었다.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의 새 영도자에 오른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김정일 위원장의 영전에 조의를 표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참가자들이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탁월한 영도자이신 김정은 동지의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고 일심단결하여 장군님(김정일)의 염원을 기어이 성취하고야 말 굳은 맹세를 다졌다.”고 전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리차드 기어도 사로잡은 ‘사찰음식’, 도심에서 만나다

    리차드 기어도 사로잡은 ‘사찰음식’, 도심에서 만나다

    12월 6일 방영된 SBS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 아침’에서는 사찰음식의 대가 대안 스님이 출연해 할리우드 스타 리처드 기어가 사찰음식에 반했던 사실을 전했다. 또한 리차드 기어는 미국에 돌아가서도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사찰음식이라고 꼽을 만큼, 사찰음식과 불교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이처럼 세계 속에서 불교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백인 스님으로 유명한 현각스님, 할리우드 스타 리처드 기어 등 세계 저명 인사들이 하나 둘 불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며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불교문화가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수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불교는 생활 전반에서 생명존중사상을 실천한다. 이는 불교의 식생활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스님들의 식사법을 일컫는 발우공양은 음식물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친환경적인 식사법이자 육류를 사용하지 않는 채식 위주의 사찰음식으로 불교의 문화, 한국의 문화로 알려졌다. 사찰음식은 채식식단의 대표주자로 고기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웰빙 및 로하스적인 식생활로 다이어트식, 육식을 벗어나 건강한 식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알맞다. 특히 생선류, 육류, 오신채(파, 마늘, 부추, 달래, 양파)를 비롯하여 인공조미료, 합성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완전한 채식식단으로 차려지는 사찰음식은 자극적이지 않고 건강한 식단 그 자체다. 무치고 찌고 굽는 요리법은 채소의 담백한 맛을 최대한으로 살려주며 본연의 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게 한다. 동물성 기름을 배제한 저지방, 저염, 저당을 추구하는 사찰음식은 건강에 좋은 웰빙식단으로 손색이 없다. 채식주의자들에게도,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안성맞춤인 사찰음식으로 건강한 식생활을 권하고 있다. 단, 불교라는 종교적 색깔 때문에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의 색채를 덜어내고 식사로서의 사찰음식을 정갈한 코스요리로 내놓는 사찰요리전문점에서는 편안하고 건강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그 중 도심에서 사찰요리를 접할 수 있는 명동 사찰요리 전문 레스토랑 ‘고상’은 연잎밥, 곤드레밥, 인삼두유, 각종 나물류 등 전통 사찰요리를 맛볼 수 있다. 정숙한 분위기로 조찬회의, 상견례 장소로도 적합하며 특히 외국인 바이어나 채식주의자를 접대하는 장소로도 좋다. 육류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가장 한국적이고 자연을 그대로 담은 정갈한 음식을 선보이는 명동 이색맛집 ‘고상’의 송수미 대표는 “사찰요리는 몸에 부담을 주지 않고, 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조미료에 길든 입맛을 돌이켜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프로농구] ‘28점’ 최진수의 날

    [프로농구] ‘28점’ 최진수의 날

    오리온스가 ‘대어’를 낚았다. 11일 전주체육관에서 ‘디펜딩챔피언’ KCC를 85-84로 꺾고 시즌 5승(19패)째를 챙겼다. ‘루키’ 최진수의 원맨쇼였다. 한국인 최초로 미대학농구(NCAA) 디비전1 무대를 밟은 최진수의 진가가 마음껏 발휘된 경기였다. 이날 무려 28점 7리바운드 4블록으로 혼자 팀을 이끌었다. 어시스트와 스틸도 3개씩 곁들였다. 28점은 올 시즌 데뷔한 최진수의 한 경기 최다 득점이다. 드래프트 3순위로 오리온스 유니폼을 입은 최진수는 그동안 혹독한 나날을 보냈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갔기에 한국의 조직적인 농구는 생소했다. 포지션도 애매했다. 함께 데뷔한 오세근(KGC인삼공사)과 김선형(SK)이 펄펄 날자 상대적으로 더 위축됐다. 그러나 지난달부터 한국 무대에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고, 이동준이 부상으로 코트를 떠난 사이 확실한 역할을 부여받으며 에이스로 급부상했다. 지난달 13일 모비스전부터 12경기 연속 두 자릿수 득점 행진을 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신인상 행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진땀승이었다. 오리온스는 4쿼터를 73-65로 앞선 채 시작했지만 KCC의 뒷심이 매서웠다. KCC는 마지막 쿼터에만 3점포 4개를 꽂으며 맹추격했다. 경기 종료 11.5초를 남기고는 정선규의 3점포로 기어코 동점(84-84)을 만들었다. 승부가 요동치던 찰나 크리스 윌리엄스가 파울로 얻은 자유투 중 1개를 넣으며 1점 차 승리를 매듭지었다. KGC인삼공사는 안양에서 삼성에 91-63으로 승리했다. 박찬희가 12어시스트(6점), 김태술이 6어시스트(13점)를 기록했다. 부산에서는 전자랜드가 KT를 69-58로 눌렀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오징어+불가사리 모양’ 기어다니는 로봇 개발

    ‘오징어+불가사리 모양’ 기어다니는 로봇 개발

    마치 연체동물처럼 유연하게 기어다니는 오징어 모양의 로봇이 개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 조지 화이트사이드 교수 연구팀은 최근 미국과학원회보(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부드러운 재질의 로봇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멀티게이트 소프트 로봇’(Multigait soft robot)이라고 불리는 이 로봇은 오징어나 불가사리 등 뼈없는 동물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됐다. 이 로봇은 4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마치 불가사리와 오징어를 합쳐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크기는 15cm 정도이며 엘라스토머(Elastomer·고무와 같은 성질을 가진 물질)라는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졌다. 또 작동은 공기 주입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해 조절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이트사이드 교수는 “이 로봇은 재해로 인한 틈 사이 등 딱딱한 로봇이 작동하기 힘든 다양한 곳에서 활용이 가능하다.” 면서 “일반 로봇이 움직이기 힘든 표면 위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 로봇 개발은 미국 펜타곤 연구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장래에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일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땅 위를 걷는 희귀 ‘문어’ 포착…물밖 나온 원인은?

    땅 위를 걷는 희귀 ‘문어’ 포착…물밖 나온 원인은?

    땅 위를 걷는 문어가 공개된 가운데 이에 대한 과학적인 원인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지난 6월께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공개된 땅 위를 걷는 문어를 촬영한 이 영상은 최근 데일리메일, 더 선 등 해외 언론이 잇달아 보도하면서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영상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마테오 카운티 피츠제럴드 해양보호구역에서 촬영된 것으로, 물 속에 있던 문어가 갑자기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땅 위를 느릿느릿 걷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후 그 문어는 다시 자신이 살던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에 대해 미국 과학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카’는 해양생물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해당 문어가 돌발 행동(?)을 벌인 원인을 분석했다. 호주 빅토리아박물관에서 해양 무척추동물 수석 큐레이터를 맡고 있는 줄리안 핀은 “물 밖을 기어 다니는 문어는 해안가에서 서식하는 일반 문어는 아닐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해양생물학자 겸 같은 박물관의 두족류 큐레이터인 제임스 우드는 자신의 연구 과정에서 몇몇 다른 문어가 이 같은 행동을 보였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문어가 속한 낙지류는 야행성이라서 인간은 바다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왜 문어가 뼈도 없는 몸을 이끌고 힘겹게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핀은 먹잇감을 구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땅 위를 걷는 문어 영상을 접한 누리꾼들은 “굉장하다”, “문어가 진화했다”, “광합성을 하기 위해 잠시 나온 것 같다”는 등 다양한 의견을 보이고 있다. ▶ 땅 위를 걷는 문어 영상 보러가기  사진=유튜브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50/50’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50/50’

    아담(조셉 고든 레빗)은 라디오 방송의 작가다. 요즘 들어 등이 쑤시도록 아파 병원을 찾은 그는 희귀암 판정을 받는다. 나름대로 성실하고 건강한 생활을 꾸렸던 27살 청년은 영문을 몰라 충격에 빠진다. 친구, 연인, 직장 동료에게 알리고 용기를 내 부모에게도 암에 걸렸다고 말한다. 인터넷을 뒤져본 친구는 그 병의 생존 확률이 50대50이라고 알려 준다. 절반의 확률. 힘을 북돋워 열심히 살 것인가, 절망하고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하지만 그에게 조용히 명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여자는 바람이 나고, 친구는 아담의 병을 미끼로 여자들과 놀아나기에 바쁘며, 극성맞은 엄마는 틈만 나면 전화해 안부를 챙긴다. 연이어 관객을 찾아온 두 편의 미국 영화는 이른 나이에 죽음과 대면한 청춘을 다룬다. 보통 이런 유의 영화는 감정 과잉을 주특기로 삼아 관객이 눈물콧물을 쏟아내 탈진하게 한다. 24일 개봉한 ‘50/50’은 한달쯤 앞서 개봉한 ‘레스트리스’(Restless)와 다른 노선을 취한다. 근래 청춘과 죽음의 주제에 매달려 온 거스 반 산트는 ‘레스트리스’에서 아예 현실의 판타지를 구한다. 죽음이 주눅 들 만큼 두 아이는 아름답게 찰랑거린다. 오죽하면 죽음의 얼굴이 스크린에 끼어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는가. ‘레스트리스’가 새침하다면 ‘50/50’은 담담한 게 특징이다. 죽음을 앞둔 남자를 보며 엉엉 울 준비를 한 관객은 ‘50/50’이 심심하다고 여길 것 같다. 익숙한 감동은 없다. 단점이 적은 데 주목해야 할 영화다. 실제로 암에 걸린 각본가 윌 라이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극 중 친구 역으로 나오는 세스 로건은 라이저의 친구로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50/50’은 사실적인 까닭에 건조하게 느껴지는 경우다. 인물의 심리적인 동요와 실제로 일어날 법한 상황에 대해 섬세한 묘사가 가능했던 반면 불필요한 드라마와 과장은 줄였다. 아담이 혼자 버스 안에 앉아 있는 장면이 영화의 스타일을 대표한다. 울컥 설움이 북받쳐 오른 아담이 눈물을 흘릴 판이지만, 영화는 눈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대 감정의 폭발을 유도하지 않는다. ‘50/50’은 애써 세련된 척하는 영화일까. 청춘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때다. 이를 시샘하듯 죽음이 문을 두드려 빛을 일시에 꺼트리려 하니 비극이 따로 없다. 그러나 죽음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슬픔을 느끼는 순간에도 삶의 시계는 째깍거리며 돌아간다. ‘50/50’은 젊은 남자가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거대한 의무감을 품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냐고 묻는다. 준비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꼭 끝내겠다는 다짐 외에 아담이 특별히 하는 행동 같은 건 없다. 여전히 실수를 저지르고 어색한 인간관계는 개선되지 않는다. 언제 마지막이 닥칠지 모르지만, 인간은 어제처럼 오늘도 서툴게 사는 거다. 병마를 이긴 미국의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각별한 마음으로 ‘50/50’의 리뷰를 썼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나 가족이 ‘50/50’으로부터 더 많은 교훈을 얻는 건 당연하다. ‘50/50’의 좋은 점은, 꼭 그런 사람이 아니어도 감정의 찌꺼기 없이 각자 삶의 진실을 발견하도록 돕는다는 데 있다. 주변을 다르게 보든 하루하루를 새롭게 대하든 그걸 관객의 몫으로 돌려놓는다. 최선의 의도만 지닌 채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은 영화가 거둔 의미 깊은 성과다. 영화평론가
  • [24일 TV 하이라이트]

    ●즐거운 책 읽기(KBS1 오전 11시) ‘심청전’은 효녀 심청이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300석에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내용이다. 심청은 용왕에 의해 구출돼 왕후의 자리에까지 올라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불교와 도교, 유교 사상의 혼합적인 요소가 보이는 ‘심청전’. 작품에 드러난 효의 의미, 그리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 등을 통해 ‘심청전’을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해 본다. ●호루라기(KBS2 밤 8시 55분) 쓰레기집에 사는 모자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서둘러 도착한 동네. 문제의 집 근처에 이르자 원인을 알 수 없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마당에 가득 쌓여 있는 기저귀와 유아용품 쓰레기들, 여기저기 널린 음식에는 구더기까지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결코 열리지 않는 대문. 과연 이 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MBC 밤 7시 45분) 내상은 구치소에 갇히고 만다. 그 모습에 가족들은 모두 넋을 잃은 듯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역시 엄마는 강했다. 유선은 기운을 잃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고, 빚쟁이들과도 정정당당하게 마주한다. 한편 지나 고등학교에서는 교가를 새로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 임무는 음악 선생 윤건과 국어 선생 하선에게 주어진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 밤 8시 50분) 최고령 90세 할머니부터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까지. 연령대부터 거주지, 직업까지 다양한 가족들이 있다. 가족모임이라고 하기엔 엄청난 인원인 만큼 모임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1988년부터 시작된 가족모임, ‘부모사랑 효(孝) 이종사촌 모임’ 등 그 어느 날보다 따뜻했던 264명 대가족의 1박 2일을 대공개한다. ●EBS 다큐 프라임(EBS 밤 9시 50분) 선생님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성장을 위한 디딤돌로 인정했을 때 변화는 시작되었다. 첫 수업이 있던 날, 교실 속 선생님의 모습은 너무나 나약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선생님은 어느 누구보다 에너지 넘치는 수업을 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는데…. ●검색녀(OBS 밤 11시 10분) 핫이슈 속의 연예인과 20~30대 여성의 심리를 알아보는 쌍방향 토크쇼 ‘검색녀’. 이번 주는 방송인 김나영과 김새롬이 출연하여 과거 사진을 공개한다. 김나영은 데뷔 전 춘천의 고소영 ‘춘고’로, 김새롬은 경기 성남의 전지현 ‘성전’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동네에서 이름 좀 날렸다는 그녀들의 수다를 함께 들어본다.
  • [심재억 전문기자의 건강노트] 가을 별미 추어탕

    가을 별미 중 하나가 추어탕입니다. 끓여내는 방법은 남북과 동서가 제각각이지만 미꾸라지를 원료로 한다는 점은 똑같습니다. 요새야 추어탕집에서 쓰는 미꾸라지 대부분이 양식이지만 옛맛을 살리려면 진흙논에서 벼꽃을 받아먹고 자란 놈이 으뜸입니다. 한로(寒露), 상강(霜降) 지나도록 살을 채워 뱃바닥이 노르스름한 게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지요. 여름이면 농수로나 도랑에서 잠깐 반두질을 해도 몇 사람 먹을 미꾸라지 어렵지 않게 잡았지만 요새는 그마저 추억입니다. 농약을 쏟아붓듯 뿌려대니 생명붙이가 살아남을 재주가 없는 것이지요. 그때는 벼베기 끝난 논에서 차진 흙 삽질하며 미꾸라지 잡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진득한 흙을 파뒤집으면 실한 미꾸라지가 꾸무럭꾸무럭 기어나오곤 했지요. 그 미꾸라지가 농가의 가을철 보신식이었습니다. 왕소금 척척 뿌려 미끈덕거리는 곱을 씻어내 가마솥에 넣고 푹곤 뒤 뼈째 갈아 냅니다. 여기에 고사리, 고구마순에 시래기와 갖은 양념을 듬뿍 넣고 끓여내면 담박하고도 감칠맛 나는 추어탕이 됩니다. 먹을 때 방앗잎이나 산초가루 좀 곁들이면 “이 맛 볼려고 가을 기다렸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경기도 등지에서는 통미꾸라지로 탕을 끓여내는데, 이것도 나름 풍미가 있더군요. 봄부터 몸뚱이 놀려 논밭 일궈야 했던 장정들, 가을걷이 후 추어탕 먹는 재미로 1년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 추어탕이 간단치 않습니다. 단백질과 비타민A가 많아 고기 귀했던 그 시절에 회를 동하게 하는 영양식이었던 것인데, 요새도 이 정도면 으뜸가는 웰빙음식이겠지요. 이게 탕은 탕인데, 누군 ‘추어탕(秋魚蕩)’이라고 하고 또 누군 ‘추어탕(鰍魚蕩)’이라고도 합니다. 미꾸라지를 ‘鰍魚’라 했으니 鰍魚蕩이 맞는 것 같지만 미꾸라지 제맛 보려면 가을이라야 되니 秋魚蕩도 크게 틀린 말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문제는 미꾸라지가 사라져 간다는 것인데, 그래도 맛난 추어탕 먹으려면 중국산이나 양식보다야 토종이 제격 아니겠습니까. 이미 씨가 말라버린 토종 타령이 좀 그렇지만 잘하면 그런 땅 만들기 어렵지 않을 듯도 한데 다들 남의 일이라고만 여기니…. jesh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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