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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1) 단원의 ‘포의풍류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1) 단원의 ‘포의풍류도’

    단원 김홍도의 ‘포의풍류도’. 조선 후기 서화와 골동품 수집 붐 속에 단원 역시 끼니를 걱정하면서도 매화 화분 하나를 큰 병풍 두 개 값에 해당하는 2000전(錢)에 선뜻 사들일 만큼 호사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림값이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얼마전 미술품 경매에서는 박수근과 김환기의 유화가 수십억원씩에 낙찰되기도 했지요. 그림 수집 열기는 그러나 요즘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닙니다.18∼19세기 조선시대에도 서화와 골동품의 수집 붐은 상상을 뛰어넘었다고 합니다.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이 있지요.‘서경(書經)’에 나온다고 하는데,‘물건에 집착하면 큰 뜻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문인(文人)은 서화나 골동을 도덕적 자기수양을 위한 방편으로만 써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명나라 말기에 시작된 수집 열기는 조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청나라와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종로거리에는 베이징의 골동품시장인 류리창(琉璃廠)에서 들여온 호사스런 물건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고 하지요. 서화와 골동 수집에 광적으로 탐닉하여 재산을 탕진한 인물도 여럿이 나타났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서화와 골동을 ‘투자대상’으로 분명하게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요즘의 그림 수집 열기와 다른 점이겠지요. 실제로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1696∼?)는 장안에서 으뜸가는 감식안을 자랑했지만, 노경에 이르러 물건을 내놓았을 때 산 값에 팔린 것은 열에 두셋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의 수집 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으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가 지목된 것은 뜻밖입니다.‘흙벽에 종이로 창을 내고 몸이 다할 때까지 시나 읊조리련다.’는 화제(畵題)가 담긴 이 작품은 세속의 명리를 초탈한 문인의 일상을 그렸다는 해석이 일반적이었으니까요. 미술사학자인 장진성 서울대 교수는 ‘포의풍류도’가 ‘고동서화(古董書畵) 수집에 몰두해 있는 인물의 호사취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인물의 이미지는 ‘완물상지’를 유념하면서 아취 있는 문인생활을 즐기는 감상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집한 골동품이나 서화로 끝없이 정서적 기쁨을 만끽하는 호사가의 모습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림 속에는 쌓아올린 서책과 다발로 묶여진 두루마리, 중국자기로 보이는 귀가 둘 달린 병, 벼루와 먹, 붓과 파초잎, 악기인 생황과 칼, 그리고 호리병 등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당시에는 여간한 사람이 소장하기 어려운 진귀한 재보(財寶)였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파초잎 옆에 놓인 나팔꽃 봉오리 모양의 고()는 기원전 11∼12세기 중국 상나라의 청동제기로 매우 비싼 값에 팔렸다고 하지요. 값이 치솟자 가짜가 나돌기 시작한 것은 요즘의 그림시장 상황과 비슷합니다. 서화나 골동을 수집하는 데 재산을 탕진하고도 진귀한 물건을 갖고 있는 데 스스로 만족하는 그림 속 인물의 모습은 당시 문인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풍속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포의풍류도’가 문인의 초탈한 심사를 가장했다고 하더라도, 조선 후기의 사회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서화나 골동품 수집열기는 물질문화를 긍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만큼 근대적 소비사회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dcsuh@seoul.co.kr
  • [사설] 세계 철강사 새로 쓴 포스코

    포스코가 영일만에 철강산업의 불을 지핀 지 40년만에 세계 철강사의 새 장을 열었다.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 준공으로 용광로 공법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친환경, 신기술의 최첨단 고지를 포스코가 선점한 것이다. 파이넥스 공법은 가루형태의 값싼 철광석과 일반탄을 사용함으로써 소결광과 코크스를 만드는 단계를 뛰어넘었다. 그 결과 설비 투자 및 제조원가를 크게 낮췄을 뿐 아니라 먼지와 황산화물 등 환경오염물질 배출량도 획기적으로 줄였다. 세계 철강업계가 숱한 도전과 좌절을 거듭했던 꿈의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성공신화다. 포스코의 쾌거는 노무현 대통령이 준공식 축사에서도 지적했듯이 우리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기술혁신의 중요성을 실증한 것이다. 특히 우리 경제가 미국과 일본에는 뒤지고 중국 등 경쟁국에 추월당할지도 모른다는 ‘샌드위치론’이 확산되는 시점에서 포스코의 성공 신화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심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포스코로서도 세계 주요 철강사들의 대형화, 합병화 바람 속에 꼬리를 잇던 피인수 합병설을 일거에 잠재우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포스코의 신기술은 앞으로 인도와 베트남 등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데 든든한 방패막이가 될 것으로 본다. 우리는 포스코의 도전 정신을 ‘한국형 성공모델’로 적극 활용하기를 제안한다. 거기에는 15년에 걸친 도전과 좌절, 불굴의 투지, 산·학·연 합심단결, 경영진의 용기있는 결단 등 모든 극적인 요소가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정보기술(IT) 분야의 퇴조 조짐이 두드러지면서 국가기간산업의 경쟁력과 기술력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포스코가 제조업 중흥의 기수가 되길 기대한다.
  • [문화마당] 북경과 베이징/김태성 호서대 중어중국학과 겸임교수

    한·중 수교 이후 출판 및 언론계가 직면한 커다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중국 인명과 지명의 표기문제이다. 같은 책에 중국어 발음과 한국어 발음이 뒤섞여 표기되고 있고 중국어 발음은 어색하거나 실제 음과 동떨어진 발음으로 표현되기 일쑤이다. 이런 문제로 고심하는 출판사 편집자들의 곤혹감을 해결하기 위해 국립국어원에서 정했다는 기준은 너무나 주먹구구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중국 신해혁명 이전의 인명은 한국어 독음으로 표기하고 그 이후에 출현한 인명은 중국어 독음으로 표기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어떤 근거로 신해혁명을 이러한 구분의 기준으로 삼은 것인지 묻고 싶다. 신해혁명은 역사 시기구분의 기준일 뿐, 이를 전후하여 중국어와 한국어의 어음관계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신해혁명이 우리말 발음표기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단음절 강 이름일 경우, 일반명사인 ‘강’을 더해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어떤 근거로도 이해할 수 없는 조잡한 방식이다. 예컨대 ‘珠江’을 한국어 발음인 ‘주강’도 아니고 중국어 발음인 ‘주쟝’도 아닌 양자가 뒤섞인 ‘주장강(珠江江)’이라 표기하는 것은 중국 지명에 대한 파괴이자 독자들의 이해를 흐리는 비상식적인 처사이다. 또한 우리글의 자모로는 현대 중국어의 다양한 음가를 적절히 표현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적지 않은 중복과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예컨대 ‘섬서(陝西)’와 ‘산서(山西)’는 중국어 발음을 사용할 경우 둘 다 ‘산시’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혼란과 불합리의 사례는 부지기수다. 모든 저작물은 자국의 독자들의 인식을 위한 것이고 여기에 사용되는 모든 언어와 부호의 사용은 독자들의 이해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한자문화권에 속한 나라이고 우리의 한자어 발음은 고대 중국어음 가운데 오음(吳音)에 가까운 발음이다. 요컨대 우리의 한자어 발음이 이미 중국어 발음이고, 여기에는 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역사적 기억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굳이 왜곡과 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정확하지도 않은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스스로 언어소통의 왜곡과 혼란을 자초하는 우매한 일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언어 주권을 포기하는 망국적 행태이다. 중국의 경우 자국 독자들의 인식을 고려하여 서양의 인명과 지명은 음역(音譯)을 사용하면서도 한자로 표기되는 일본의 인명과 지명은 그대로 중국어로 표기하고 있다. 예컨대 로스앤젤레스는 ‘洛杉磯(뤄산지)’라고 음역하면서도 ‘中村(나카무라)’은 그대로 ‘중춘’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저작물에 사용되는 언어와 부호의 표기에 일관성과 통일성, 그리고 합리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어의 정체성을 살린다는 이유로 우리글의 정체성을 파괴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한·중 수교 이전에는 베이징을 ‘북경’으로, 덩샤오핑을 ‘등소평’으로 표기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통일성과 일관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남경(南京)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중국어의 발음기호인 한어병음을 사용하여 ‘Nanjing’으로 표기한다. 그들은 중국의 지명을 발음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발음을 통한 인식과 함께 한때 남쪽 어느 왕조의 도성이었을 것이라는 그 지명의 의미도 유추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겐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중국을 더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특별한 장치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를 포기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동기 가운데 하나는 우리말과 중국어와의 원활한 소통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중국어의 정체성을 위해 우리말을 파괴하고 있는 것인가? 더 이상 같은 지면에 장예모(張藝謀)는 ‘장이머우’로 표기하면서 이연걸(李連桀)은 그냥 ‘이연걸’이라 표기하는 혼란이 없어야 할 것이다. 김태성 호서대 중어중국학과 겸임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려 했던 것은, 폐모논의와 궁궐 건설 문제 등 내정(內政)의 현안들을 해결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의 압력과 내부의 채근에 밀려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1619년(광해군 11) 2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1만 5000 가까운 병력이었다. 광해군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했던 심하 전역(深河戰役)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이 전역을 보통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부른다. 명군과 후금군 주력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戰場)이 사르후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거의 궤멸될 정도로 참패했고 두 나라의 향후 운명도 확연히 갈렸다. 사르후 전투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분수령이었던 것이다. ●광해군, 강홍립을 발탁하다 광해군은 심하 전역의 향방에 대해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명군이 동북(東北)의 오지인 허투알라(赫圖阿拉)까지 장거리 원정에 나서는 것의 위험성을 간파했다. 실제로 명군 가운데는 내륙 지역인 쓰촨(四川)에서 출발하여 산하이관(山海關)을 통과하고, 랴오양(遼陽)과 선양(瀋陽)을 거쳐 허투알라에 이르는 수천㎞의 거리를 행군해야 하는 병력도 있었다. 장거리 행군에 지친 명군이, 가만히 앉아 대비할 수 있는 후금군을 상대하기란 버거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또한 명군 지휘부가 조선군을 몹시 닦달할 것이란 사실도 예측했다. 그가 조선 원정군의 도원수(都元帥)로 문관 출신의 강홍립(姜弘立)을 임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강홍립은 어전통사(御前通事:왕의 직속 통역관)를 역임할 정도로 중국어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명의 강요에 밀려 ‘내키지 않는’ 출병을 단행한 이상,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적어도 명군 지휘부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작전권을 틀어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광해군은, 출정하기 직전 강홍립에게 지침을 주었다.‘그대는 조선군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있으니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평안도에 머물 때부터 닦달을 시작했다. 총사령관이었던 경략(經略) 양호(楊鎬)는 강홍립에게 조선군 화포수(火砲手)부터 속히 도강(渡江)시키라고 요구했다. 조선군 부대 가운데 명군 지휘부가 가장 크게 탐냈던 병력이 바로 화기수였기 때문이다. 강홍립은 양호의 명령대로 화기수 5000명을 미리 들여보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명군의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 사령관인 유정(劉綎)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강홍립을 질책했다.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라는 자신의 지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질책은 당연했다.3월4일, 유정 휘하의 명군이 후금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궤멸될 때 배속된 조선군도 대부분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낯선 땅에서의 행군, 또 행군 평안도 창성(昌城)을 출발한 조선군 본진은 1619년 2월23일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좌영(左營), 우영(右營), 중영(中營) 등 3개 진영으로 구성되었다. 조선군 가운데는 항왜(降倭)들도 참전했다.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 투항했던 일본군 출신의 병사들을 말한다. 그들은 조총을 잘 다루고, 검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용맹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정예 병력이었다. 압록강을 건넌 후 허투알라에 이르는 조선군의 행군로에는 산악과 강이 널려 있었다. 날씨 또한 좋지 않았다. 양마전(亮馬佃)이란 곳에 도착했던 25일에는 눈이 내리고 강풍이 불어 날씨가 몹시 추웠다. 병졸 가운데 얼어죽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무엇보다 문제는 군량 운반을 맡은 수송 부대가 본진을 제 때 따라오지 못하는 점이었다. 2월26일, 진자두(榛子頭)라는 곳에 이르러 강홍립은 유정을 만났다. 강홍립은 유정에게, 군량 운반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조선군의 행군을 잠시 늦춰 달라고 요청했다. 유정은 거부했다.‘약속한 시간은 정해져 있고 군율은 지엄한 것이기에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군은 할 수 없이 계속 걸었다. 2월27일, 진자두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배동갈령(拜東葛嶺) 부근에 도착했을 때 조선군 3영의 장졸들은 모두 휴대했던 군량이 떨어졌다. 보병들 가운데는 행군에 지쳐 정강이와 발 뒤꿈치에 유혈이 낭자한 병사들이 많았다. 계속 행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명군 ‘고문관’ 우승은(于承恩)이 달려왔다. 그는 강홍립에게 칼을 빼서 휘두르며 ‘조선군이 뒤처지면 자신의 목이 날아간다.’고 소리쳤다. 당시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군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망하려 하기 때문에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유격 교일기(喬一琦)와 우승은을 고문관 겸 감시자로 붙여 강홍립을 계속 몰아붙였다. 3월2일, 허기와 명군 지휘부의 채근에 시달린 끝에 조선군은 심하에 도착했다. 허투알라까지는 6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조선군과 명군은 약 600명의 후금군 기병과 조우한다. 적병은 높은 산 쪽에서 화살을 쏘아댔지만 조선군이 조총으로 응사하여 물리쳤다. 서울 포수 이성룡(李成龍)은 적장을 쏘아 맞혔고, 병사 한명생(韓明生)은 그의 목을 베어왔다. 조명연합군이 최초로 거둔 작은 승리였다.‘만주실록’에 보면 ‘토부(托保)와 에르나(額爾納)가 이끄는 병력이 유정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성룡이 사살한 장수는 둘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강홍립의 투항 작은 승리의 기쁨도 잠시 뿐,3월3일 조선군은 다시 ‘굶주림과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강홍립은 병사들을 풀어 주변의 후금인 부락을 뒤져 숨겨진 양곡을 찾아냈다. 그것을 돌로 빻아 죽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먹게 했다. 3월4일 아침, 조선군은 계속 행군하여 부차(富車)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세 발의 대포 소리를 듣는다. 이윽고 교일기 등이 강홍립에게 달려와 유정이 이끄는 명군 본진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난 밤, 무리하게 행군을 감행하다가 귀영가(貴盈哥)와 홍타이지,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후금군의 매복, 습격에 휘말린 것이었다. 명군의 궤멸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선군도 후금군의 공격에 휘말렸다. 좌영과 우영이 먼저 후금군 철기(鐵騎)의 공격을 받았다. 조선군은 조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두 번 째 탄환을 장전하기 전에 철기는 두 영을 유린했다. 선천(宣川) 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雲山) 군수 이계종(李繼宗), 영유(永柔) 현령 이유길(李有吉) 등이 전사하고 두 영은 무너졌다. 이민환(李民 )의 ‘책중일록(柵中日錄)’은 ‘강홍립이 거느리던 중영은 좌우영과 불과 1000보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달려가 구원할 겨를도 없이 두 영이 무너졌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후금군 철기의 가공할 파괴력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후금군의 포위 속에서 중영의 조선군 지휘부에서는 ‘마지막 결전을 치르자.’는 논의가 나왔지만 병사들 가운데는 아무도 움직이려는 자가 없었다. 눈앞에서 두 영이 무너지는 참상을 목도한 데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잃었던 것이다. 싸울 의지가 없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한다. 그런데 투항 상황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광해군일기’와 ‘책중일록’은, 강홍립이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후금군이 먼저 통사를 보내와 항복을 종용했다고 적었다.‘만주실록’은, 후금군이 조선군 진영을 공격하려 할 때, 강홍립이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다고 적었다. 양자의 기록에는 분명 각각의 주관적 서술과 윤색이 가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적었는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강홍립이 남은 생령(生靈)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을 선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3월5일 허투알라로 들어가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 곧 이어 항복 소식이 서울로 날아들었다. 조야를 막론하고 사대부들은 ‘매국노’ 강홍립의 가족들을 수금하라고 아우성이었다. 광해군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홍립의 항복과 함께 그의 정치적 운명도 조락(凋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울며 겨자먹기식 ‘저가 수주전’ 부실 초래

    울며 겨자먹기식 ‘저가 수주전’ 부실 초래

    우리나라 건설 산업은 ‘을(乙)이 갑(甲)이 돼 또 다른 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수직적 중첩구조다.‘발주자-원청업체(시공회사)-하도급자…하도급자-시공참여자(비정규직 근로자)’라는 다단계 구조속에서 공사가 진행된다. 원도급자는 대부분 대기업들이며, 하도급자는 주로 이들의 협력업체인 중소 전문건설업체들이 많다. 그런데 대기업은 국가 등 발주자에게는 ‘을’의 입장이지만, 하도급을 따내려는 전문건설업체들 위에 군림하는 ‘갑’으로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른다. 하도급업체들도 건설 현장에서는 대기업 이상의 횡포로 노동자들을 울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은 다단계 하도급을 2단계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발생한 ‘포스코 건설 사태’에서 보듯 잘 지켜지지 않는다. 지난해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하도급 실태조사에 따르면 건설현장에서 불법 다단계 하도급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70%에 이른다. 특히 응답자의 69.8%가 3단계 이상의 불법 하도급 단계에서 일하고 있었다.5단계 하도급에 종사하는 경우도 18.7%로 나타났다. 때문에 하도급이 불법적으로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되면서 실공사비가 누수되고,‘로비’등 불공정한 거래속에 부실 시공이 초래되기 일쑤다. 하도급업체들이 모인 대한전문건설협회가 지난해 하도급업자 111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하도급 불공정거래의 주요 유형은 ▲초저가 하도급 단가 책정 ▲불공정 계약 조건 강요 ▲하도급 업자 선정시 우월적 지위 이용한 금품 수수 ▲건설공사의 전매행위·일괄하도급 ▲불공정한 하도금대금 지급관행 등으로 나타났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대 경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다단계 하도급으로 중간단계 업체들이 수수료 등을 떼어가 최종 공사 단계에서는 최초 공사비의 48%수준까지 감소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대한전문건설협회 관계자는 “저가 낙찰이 하도급자에게 모두 전가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는 입찰 예정가의 30%수준(토목공사)까지 하도급액이 추락하고 있다.”면서 “차라리 공사를 안하는게 남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하도급 업체들은 원청업체의 이 같은 횡포를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감수하며 저가 수주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하도급업체들은 “원청업체에 한번 ‘찍히면’ 다시는 공사를 수주할 수 없다.”고 한 목소리를 낸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석탄일 648명 가석방

    법무부는 부처님 오신날(24일)을 맞아 모범 수형자 648명을 23일 가석방한다고 22일 밝혔다.이번 가석방에는 장기수형자 48명과 수형 생활이 어렵다고 판정을 받은 고령자·환자·장애인 등 74명이 포함됐다. 법무부는 또 각종 기능경기대회 입상자 11명과 산업기사 등 기능자격 취득자 237명, 고졸 검정고시 등 학력 검정고시 합격자 41명, 외부통근작업자 51명도 가석방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건교부 “분당급 신도시 1곳 건설”

    ‘분당급’ 신도시의 개수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주무부처인 건설교통부는 1곳만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종대 건교부 주거복지본부장은 21일 “분당급 신도시 후보지는 5∼6곳으로 압축된 상태”라면서 “6월에 이 가운데 1곳만을 선정해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서 본부장의 이같은 언급은 재정경제부 관계자가 “정부는 분당급 신도시를 2곳으로 한다는 데 부처간 의견을 모았으며, 발표 시기를 보고 있다.”며 ‘신도시 복수 후보지’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서 본부장은 “건교부는 최적의 지역을 찾기 위해 여러 후보지를 검토하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2곳을 동시에 발표하는 방안은 전혀 검토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분당급 신도시는 강남 수요를 흡수할 수 있는 곳을 위주로 검토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위치를 추측할 수 있는 강남과의 구체적인 거리 등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이와 관련, 이용섭 건교부 장관이 지난 1월 한 방송에서 강남과 멀지 않은 곳으로 정할 것임을 시사했다. 서 본부장은 “건교부는 투기수요 유입과 시장 불안 등을 우려해 신도시와 관련해서는 일절 대응하지 않았으나 재경부 관계자의 발언으로 혼란이 초래되고 있어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메디컬 라운지] 대한산부인과학회 ‘여성건강의 날’ 선포

    대한산부인과학회(회장 구병삼, 이사장 남주현)는 최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창립 60주년 기념 ‘여성건강의 날’선포식과 기념식을 가졌다. 앞서 학회가 창립 60주년을 맞아 실시한 표어 공모에서 김기수씨의 ‘산부인과! 여성건강의 중심’이 최우수작에 선정됐다. 당선작은 ‘여성건강의 날’ 선포식을 비롯, 학술대회 등 학회 주관 행사의 포스터 및 캐치프레이즈로 사용된다. 문의:대한산부인과학회 사무국(www.ksog.org),02)3445-2262.
  • [교정 대상 본상] 성실상 강순기 진주교도소 교위

    불우 수용자 자매결연을 주선하고 수용자 직업훈련 운영 업체를 유치해 세입을 증대시켰다. 수용자들이 교정위원들과 자매결연을 맺어 생활용품과 영치금을 지원받게 했다. 병을 얻어 형집행이 정지됐지만 의탁할 곳이 없는 수용자들을 지역 복지원에 입주하도록 도와 치료받게 했다. 야간근무를 하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노역수형자를 응급조치해 생명을 구했다. 결핵을 앓으며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무기수에게 상담을 통해 삶의 희망을 일깨우는 등 소외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수용자를 위해 애썼다.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8) 절두산 천주교 순교 성지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8) 절두산 천주교 순교 성지

    1만명에서 많게는 2만명의 순교자를 냈다는 이 땅의 천주교 역사는 그야말로 처절한 박해의 점철이다.‘박해의 역사’란 말 그대로 곳곳에는 목숨을 던져 신앙을 지켜낸 천주교 선구들의 외침을 소리없이 전하는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휘광이´(천주교에서 망나니를 부르는 말)의 칼날 아래 피를 뿌리며 스러져간 숱한 순교자들 가운데 지금까지 성인 품에 오른 이는 103위이다. 지난 1984년 시성(諡聖)되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들 103위의 영혼은 뒤늦게나마 위로받은 채 빛을 발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 순교자들은 부지기수다. 전국의 천주교 순교터 가운데 절두산 성지(서울 마포구 합정동 96의1·사적 399호)는 이름 나지 않은 무명의 초기 신자들이 가장 많이 피를 흘린 성지이다. ‘절두산’(切頭山).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순교 터이다. 수천명(3000∼7000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신원이 파악된 순교자는 고작 29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24명만 이름과 행적이 확인됐고 나머지 5명은 이름만 겨우 알 수 있을 뿐이다. ●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참배 지난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한국에 온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공항에서 곧바로 직행해 참배했던 곳도 이곳이다. 이 땅에선 어떤 험한 일이 있었을까. 옛 양화진 일대를 포함하여 사적지로 지정된 이 순교 성지는 지금의 이름과는 달리 원래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했던 곳. 양화진 동쪽 봉우리의 절두산은 ‘동국여지승람’이며 ‘세종실록’등에 ‘머리를 높이 든 형상’, 혹은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형세’라 하여 ‘가을두(加乙頭)’니 ‘잠두봉(蠶頭峰)’의 이름으로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 강희맹은 그 형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호는 도성에서 10리도 안 되게 떨어져 있는데, 산이 푸르고 물이 푸러 형승이 나라에서 제일 간다. 호수 남쪽에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형상이 큰 자라 머리 같으며 혹은 잠두라고 불린다.” 그 말마따나 늘상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루손들이 그늘을 찾던 평화로운 곳으로, 중국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유람선을 띄웠다고 한다. 그렇듯 한가롭게 명승을 이루던 양화나루와 잠두봉이 피비린내 나는 ‘절두’의 극형지로 변한 것은 바로 병인년인 1866년의 병인양요 때문이다. 그해 두차례의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온 배경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음을 확인한 대원군과 조정이 박해의 칼을 들었다.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온 바로 그 양화진을 보란 듯이 사형지로 삼은 것이다. 당시 절두산에서 처형을 하기 전 내건 포고문에서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의 배로 더럽혀졌다.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는 내용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교회사연구소와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조사한 대로라면 이곳에서 휘광이의 칼이 피를 뿌렸던 시기는 1866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였다. 황해도 출신으로 시흥 봉천동에서 잡혀온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아내 김엇분(마리아), 아들 붕익(바오로)이 순교한 것을 시작으로 수천명이 9개월간 차례로 목숨을 잃어간 것이다.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는 동안 천주교 신자들의 주 처형지였던 새남터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선 형이 집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 얼마만큼 절두산 처형을 집요하게 진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에도 재판의 형식과 절차가 있었을 터이지만 절두산의 처형은 무지막지한 선참후계(先斬後啓)였다. ● 순례성당·박물관 등 웅장하게 세워져 “일단 먼저 머리를 자르고 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은 29명만 빼놓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곳을 성지로 삼은 천주교계는 1962년 ‘가톨릭 순교성지’ 기념탑을 세웠다가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은 1966년 기공식을 갖고 그 이듬해에 종탑과 순례성당, 박물관으로 구성된 절두산 기념관을 웅장하게 세워놓았다. 사제관을 겸한 순교성인시성기념관을 지나 야외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오른쪽에 3층의 기념관이 우뚝 섰다. 순교자기념상을 쳐다보면서 오른쪽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가장 먼저 ‘절두산’이라 새긴 바윗돌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계단과 소로를 조금 더 올라 꼭대기에 닿으면 형 집행 때 썼던 형구들을 전시해놓은 진열장이 당시 처형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진열장 정면에 박물관, 그 오른쪽에 성당 출입문이 따로 나 있다. 기념관은 잠두봉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채 순교자들의 정신을 오롯이 담았다고 한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전통 갓의 모양을 한 돔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중앙 제대와 독서대, 해설대, 감실을 환히 비춘다. 양쪽 벽을 두른 14처며 천장에서 제대 앞으로 내리건 십자고상, 부활절에만 밝힌다는 제대옆 부활초, 죄인이 목에 쓰는 칼을 형상화한 독서대의 모습이 독특하다. ● 순례객들 발길 끊이지 않아 신자석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성해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가장 먼저 찾은 공간으로 순교 성인 27위와 무명 순교자 1위가 모셔져 있다. 왼쪽 위에는 빈 공간이 마련된 채 앞으로 봉안될 순교자 6위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옆 박물관은 그야말로 한국 천주교 박해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공간. 절두산 순교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초대 교회 창설을 보여주는 이벽, 이가환, 정약용의 유물과 순교자 유품, 형구(刑具)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한국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 일대기 31점을 포함해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도 들어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야외전시장으로 내려서면 병인박해 때 교수형을 집행하던 형구들이며 희생자들의 행적을 재현해 놓은 갖가지 전시물들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김대건 신부 동상을 비롯해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가 순례객들을 차례로 맞는다. 한 집안 열여섯명이 한꺼번에 희생된 박순집 일가의 이야기를 새긴 비석 앞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순교 성지를 다지기 위한 작업이 한창일 무렵 “너무 많은 사람의 목을 잘라 절두산으로 부른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계기로 이름이 붙여졌다는 ‘절두산 성지’. 무명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위로하기 위해 천주교계가 어렵사리 마련해 놓았지만 그 형세는 마치 칼을 쓰고 처형을 기다리는 순교자의 모습을 닮아 있어 순례객들을 안타깝게 한다. 기념관과 사제관 앞쪽을 가로지르는 당산철교와 성당 아래쪽 강변북로, 일산 방향으로 뻗은 지하차도가 ‘ㄷ자’ 모양으로 성지를 옥죄고 있다. 한국 천주교 사상 가장 혹독했다는 ‘병인박해’의 순교자들은 지금도 신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kimus@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정확한 순교 위치는 어디? 수천명 천주교 신자의 목숨을 빼앗은 절두산 순교 성지. 그 많은 순교자들이 희생된 처형장의 위치를 놓고 천주교계는 엇갈린 견해를 보이고 있다. 정확한 처형 장소는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처형장은 절두산 잠두봉 꼭대기인 지금의 순례성당 제대 뒤쪽의 이른바 ‘치명터’. 어차피 신자들의 처형장면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을 택했다면 한강에 인접한 봉우리 꼭대기였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천주교계가 성지 조성을 하면서 접촉한 주민들은 “절두산 꼭대기에서 칼로 신자들의 목을 쳐서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 “한 오랏줄에 여러 명의 교우들을 결박하여 산 채로 낭떠러지 밑 강물로 밀었다.”는 말을 들은 것으로 증언했다고 한다. 이같은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 기념탑을 절두산 꼭대기에 세웠고, 나중에 이 탑을 헐고 마련한 기념관과 성당도 그 자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선 많은 사람들이 올라 형을 집행하기엔 절두산 꼭대기가 비좁고, 각종 기록과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양화나루 앞 길가 평지가 처형지였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같은 입장은 정부측의 관련자료나 교인들의 증언집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치명일기’에서 모두 처형지를 절두산 꼭대기가 아닌 ‘양화진두’ ‘양화진 진터’ ‘양화진 진’ ‘양화진’ 등으로 밝히고 있다는 근거를 들고 있다. “양화진두에서 군민을 많이 모아놓고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베어 머리를 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다.”라는 정부측 기록의 ‘진두’와 천주교회측 자료의 ‘양화진 진터’ ‘양화진 진’ ‘양화진’이 일치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근거로 미루어 순교 장소는 당산철교로 인해 순교기념관에서 성지가 분할된 동쪽의 꾸르실료 건물, 즉 세계성체대회기념교육관과 잠두봉의 중간 어느 지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 [박기철의 플레이볼] 팀 순위 결정 방식 새로운 제안

    돔 구장 설립 구체화, 해외 진출 선수들의 복귀,10년 만에 최단 경기 100만 관중 돌파 등 프로야구에 희소식이 쏟아진 지난주 말, 서울여대에서는 작지만 의미있는 모임 하나가 열렸다. 전국의 통계학과, 체육학과를 중심으로 스포츠 통계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모여 가진 연구발표회였다. 이 가운데 원광대 수학정보통계학부의 김혁주 교수가 제안한 팀 순위 결정 방식 중 가장 간단하고 이해가 쉬운 것을 하나 소개한다. 프로야구의 순위 결정 방식에서 항상 초점이 되는 문제는 무승부다. 현재의 방식은 무승부를 제외하고 승을 승패의 합으로 나누어 승률로 하고 이 순서로 순위를 정한다. 프로야구는 출범이후 계속 이 방식을 채택해오다 1987년부터는 무승부에 0.5점을 주는 방식으로 바뀌기도 하고 2003년에는 다승제를 채택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거쳐 원래 방식으로 돌아왔다. 무승부를 제외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이 방식은 무승부 경기를 승패가 결정된 경기의 승률로 인정한다. 14일 현재 1위 SK는 31경기를 치러 18승11패2무로 승률 .621이다. 여기서 무승부인 두 경기의 승률을 18승11패를 올린 승률과 같다고 보는 방식이다. 무승부 경기를 인정하지 않는 메이저리그에서는 순위 결정 방식을 두고 논란이 일지 않는다. 심한 경우 한 시즌에 10경기 이상의 무승부가 나오는 한국과 일본에서만 가끔 소란의 주범이 된다.극단적인 예로 3승7무를 한 A팀과 9승1패를 한 B팀이 있다면 지금 방식은 A팀이 승률 1.000이고 B팀은 .900으로서 A팀의 순위가 앞선다.B팀이 더 상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의 무승부 제외 순위 결정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의 핵심이다. 두 팀이 똑같이 3연패를 당했을 때 A팀은 3승7무3패,B팀은 9승4패가 된다는 사실을 보면 현재의 방식이 불합리하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다. 김 교수가 제안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승을 승패의 합이 아니라 경기의 합으로 나누는 것이다. 현재 승률 계산 방식의 분모인 승+패에 무승부를 추가한 방식이다. 이 방식이라면 A팀은 승률 .300,B팀은 .900으로 B팀이 앞선다.A팀의 승률은 엄청 줄어들지만 사실 이것이 스포츠적인 정서나 자연 섭리에는 어울린다. 이 방법을 쓰면 다른 장점도 있다. 다승제를 채택할 때 가장 큰 문제가 팀 간에 서로 치른 경기수가 다르면 승점에 따른 순위는 시즌 종료 뒤에 나타날 순위와는 괴리가 생긴다.100경기를 치른 팀의 승점이 150이고 90경기를 치른 팀의 승점이 145라면 승점이 적은 팀이 오히려 모든 경기를 마쳤을 때 승점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새 방식은 치른 경기수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럴 염려도 없다. 하지만 이 방법도 약점은 있다. 전체적으로 승률이 낮아진다.1위 SK의 승률은 .621에서 .581로,7위 삼성은 .444에서 .414로 낮아진다. 그럼에도 이 제안은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스포츠투아이’ 전무이사 cobb76@gmail.com
  • ‘눈덩이 이자’ 서민들 속탄다

    ‘눈덩이 이자’ 서민들 속탄다

    지난해 11월 경기도 일산의 33평형 아파트로 ‘갈아타기’를 한 최모(39·회사원)씨. 지난 주 새 집을 사기 전 갖고 있던 21평형대 아파트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서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지난해 말보다 4000만원이나 낮은 1억 6000만원에 팔아 넘겼다. 한시적 1가구 2주택자였던 최씨는 올 연말까지만 집을 팔면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연말까지 기다리면서 더 나은 조건의 매수자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일산 아파트를 사면서 받은 2억 5000만원의 주택담보대출 이자가 월 133만원에서 155만원으로 올라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태였다. 최씨는 “매매대금으로 주택대출의 일부라도 갚아 ‘이자 수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 놓았다. ●1억원 대출 1년새 이자 100만원 올라 최근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주택대출 금리가 대출자들의 목을 짓누르고 있다. 주택대출 금리의 기준인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가 급등하면서 최근 한달 동안 1%포인트 가까이 뛰었다. 14일 은행권에 따르면 국민은행의 이번 주 주택대출금리는 연 5.73∼7.33%. 지난주보다 0.02%포인트 또 올랐다. 신한과 하나은행 금리도 각각 6.02∼7.12%,6.12∼6.82%로 0.02%포인트 높아졌다. 우리은행은 이날 CD금리가 0.03% 급등한 것을 반영,15일부터 5.93∼7.43%로 높인다. 특히 국민은행의 주택대출 금리는 지난 달 22일 5.65∼7.25%에서 최근 4주 동안 0.08%포인트 급상승했다. 시장금리가 상승세로 돌아서기 시작한 2005년 8월 말 5.50%에 비해서는 대출 최고 금리가 1.83%포인트 급등했다. 이에 따라 1년 전 우리은행에서 1억원의 주택대출을 받은 대출자는 연 이자로 506만∼636만원을 내야 했지만 지금은 593만∼743만원으로 뛰었다.1년 사이에 87만∼107만원의 이자를 더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싸게 팔더라도 이자부담 벗자’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타는 주택대출 금리와 함께 최근 정부가 부동산 소유에 대해 과세 대상을 확대하면서 아예 아파트를 팔아 넘기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대출 6000만원을 끼고 두 채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김모(39)씨는 최근 국세청에서 종합소득세를 신고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1가구 2주택자이거나,6억원 이상 초과인 주택을 가진 자가 월세를 받고 있다면 과세 대상’이라고 알려온 것이다. 김씨가 두 채의 주택을 소유한 것은 지난 2004년. 당시 주택 경기가 갑자기 경색되면서 ‘한시적 1가구 2주택자’가 된 경우다. 김씨는 “30만원 월세를 받아서 28만원의 대출이자를 겨우 갚고 있다.”면서 “종합소득세를 내느니 월세를 전세로 돌리거나 지난 3년 동안 별로 오르지 않은 소형 아파트를 싸게라도 처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대출이자에 허덕이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지난해 7월 경기도 수원 동탄지구에서 3억 8000만원을 주고 32평형 아파트 마련에 성공한 회사원 홍모(33)씨. 그러나 내집 마련의 기쁨은 ‘족쇄’로 둔갑했다. 월급통장에서 한 달에 120만원 가까이 빠져 나가는 이자를 보면 속이 터진다. 월급의 3분의 1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다. 홍씨가 내집 마련을 위해 빌린 주택대출금은 2억원. 원래 금리는 5.2%였지만 지금은 6.07%로 뛰었다. 김씨는 “그동안 시세는 고작 4000만원 올랐지만 요즘은 이마저도 사려는 사람이 없다.”면서 “오는 7월부터 원금까지 갚아 나갈 생각을 하면 잠이 안 온다.”고 하소연했다. 문소영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찾아가는 미술 감상교실’

    서울시립미술관은 11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 미술 강좌를 여는 ‘찾아가는 어린이 미술 감상 교실’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시립미술관 관계자는 “문화예술에서 소외된 어린이를 위한 예술지원정책의 하나로, 아이들이 그림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넓히고 흥미를 길러 주기 위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올해는 관악·은평·강서·강북·중랑·노원구 등 6개구를 대상으로, 이달부터 11월까지 14회에 걸쳐 진행된다. 감상수업인 명화교실과 실기수업인 표현교실로 구성했다. 수강료와 재료비는 무료. 서울에 살고 있는 초등학생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신청은 해당 지역 주민자치센터에서 받는다. 신청 기간은 추후 공지할 예정이다. 서울시립미술관 교육홍보과(02)2124-8924.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토요영화]

    ●각설탕(KBS2 밤 12시25분) 자신과 함께 자란 말과 헤어진 소녀가 기수와 경주마로 재회하는 내용을 그린 국내 첫 경마소재 영화.“말을 움직이는 건 채찍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영화 속 대사가 말해주듯 동물과 사람이 주고받는 애틋한 교감이 따뜻한 시선으로 전해진다. 등장인물의 선악구조가 지나치게 명확해 이야기 구성이 상투적이라는 점이 단점. 하지만 감동적인 줄거리와 후반부의 드라마틱한 경마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 출연했던 말 ‘천둥이’는 영화 촬영 뒤 인기스타가 됐으나 3월 갑작스러운 산통(배앓이)으로 폐사돼 팬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사이버분향소가 마련돼 있다. 가족영화답게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도 좋은 편이다. 네이버 네티즌 평점 8.84(10점 만점). 각설탕처럼 동물과 인간과의 교감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로는 다코타 패닝이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드리머’(2005년작)가 있다. 이 영화는 13일 오후 10시 OCN에서 방영된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란 시은(임수정)은 어려서부터 말을 좋아한다. 특히 어려서 엄마를 잃은 탓인지 태어나면서 어미를 잃은 말 천둥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시은에게 천둥이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 시은은 천둥이가 가장 좋아하는 각설탕을 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천둥이는 한 웨이터에게 팔려가 나이트클럽 홍보마로 전락한다. 한편 시은은 과천경마장에서 여자기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꿈을 접는다. 그러나 이 둘은 우연히 그리고 운명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며 감격적인 재회를 한다. 다시 제주도에 내려와 함께 지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시은과 천둥이. 이들은 각별한 노력으로 다시 경마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과연 경마장에서 기적을 일궈낼 수 있을까.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지성 “집밥이 회복에 더 도움”

    무릎 연골 재생수술을 받고 영국 맨체스터에서 재활할 것으로 알려졌던 박지성(26·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고향 수원에 돌아와 재활기간을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주목된다. 박지성은 최근 ‘시즌을 마감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8월 재검사 전까지 물리치료 등 재활에 주력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구단에 전달한 것으로 10일 알려졌다.영국 일간 ‘더 타임스’도 이날 “박지성은 맨유의 아시아투어에 합류할 것 같다. 다만 홍보대사 역할에 그쳐야 할 것 같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7월2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맨유-FC서울전 때 박지성의 모습을 국내 팬들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구단은 19일 FA컵 결승전 이후 박지성의 재활 일정을 최종 통보할 계획이며 그의 주변에선 구단이 아시아투어 일정에 맞춰 박지성의 고향집 휴식을 배려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미 박지성은 경기 용인시 삼성 스포츠과학 지원실에서 재활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고, 구단이 허락하면 수원 집과 수지를 오가며 재활할 계획을 구상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팀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그에게 주어지는 우승 보너스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으로 예측됐다.맨유가 주위의 기대보다 훨씬 작은 돈보따리를 풀 것이라고 영국의 대중일간지 ‘더 선’이 보도했기 때문.신문에 따르면 맨유 선수들은 100만파운드(약 18억원)를 출전 경기수에 따라 나누게 돼 두 차례의 부상 공백에도 14경기에 나선 박지성은 2만 8000파운드(5100만원)의 보너스를 받게 된다. 그러나 박지성 소속사인 JS리미티드는 맨유가 다른 보너스 배분 방식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주전급 18명만을 추려 균등하게 나눠주는 이 방식을 좇을 경우 출전시간이나 골·도움 순위에서 18명 안에 들 것이 분명한 박지성은 100만파운드의 18분의1 정도인 5만 5000파운드(1억원)를 손에 쥘 것으로 보인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무슨영화볼까]

    스파이더맨3 감독 샘 레이미 주연 토비 맥과이어·커스틴 던스트 베놈, 뉴고블린, 샌드맨 등 가장 많은 악당들과의 지리한 싸움, 연인 메리 제인과의 구태의연한 애정다툼. 시간은 길어지고 이야기는 빈약해졌다. 그러면 어떠하리.3억달러짜리 검은 옷을 입고 뉴욕 빌딩숲을 누비는 스파이더맨은 여전히 볼거리인 것을. 이대근, 이댁은 감독 심광진 주연 이대근 돈이면 뭐든지 사는 세상, 가족이라고 못살까. 그런 가족도 피보다 진할 수 있을까? 가벼운 겉모습과 달리 꽤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다. 하지만 반전의 타이밍을 놓쳐버린 게 흠. 아들 감독 장진 주연 차승원·류덕환 아들을 만나기 위해 단 하루 특별한 휴가를 얻은 무기수 강식.15년만에 만난 아들과의 만남은 어색하기만 하다. 아들의 손을 잡은 이별의 순간, 진실이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은 논란거리. 마이 베스트 프렌드 감독 파트리스 르꽁트 주연 다니엘 오테유 당신은 진정한 친구가 있나? 친구라는 존재는 때론 부와 명예처럼 한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질문을 받은 골동품 딜러 프랑수아, 친구찾기에 나선다. 캐쉬백 감독 숀 엘리스 주연 숀 비거스태프·에밀리 폭스 대형 할인매장에서 야간근무를 하면서 시간을 멈추는 상상을 하게 된 벤. 그렇게 멈춰진 순간, 새로운 사랑 샤론을 발견한다. 사랑을 하려거든 잠시라도 멈춰설 것!
  • 어머니와 함께 한 900일간의 소풍/왕일민·유현민 지음

    어머니와 함께 한 900일간의 소풍/왕일민·유현민 지음

    중국 최북단인 헤이룽장성 타허부터 티베트 라싸고원까지 무려 3만㎞. 이 길을 자전거 수레를 끌고 걸었다. 그 수레에는 100세의 노모가 있었고, 수레를 끈 이는 74세의 아들이었다.900일간의 소풍이 끝나자 103세 생일을 며칠 앞둔 노모는 하얼빈에서 세상을 뜬다. 아들은 이제 ‘티베트(시짱·西藏)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두 번째 여행에 나선다. ‘어머니와 함께 한 900일간의 소풍(왕일민·유현민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은 인구 13억의 중국 대륙을 울린 이 시대 마지막 효자의 이야기이다.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답게 ‘효자왕’으로 불린 왕일민씨는 고향 타허에서 평생을 산 노모가 ‘죽기 전에 세상 구경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길을 떠난다.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티베트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땅이다. 산골에 붙박혀 살아온 노모가 대체 어떻게 티베트란 곳을 알았는지 연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들은 어쨌든 떠나기로 한다. 자신도 없었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란 생각에 자전거 수레를 직접 만들었다. 수레는 어머니가 겨우 누울 수 있는 크기였다. 언덕이라 자전거가 오를 수 없는 곳은 밧줄을 어깨에 메고 수레를 끌었다. 피가 흐르는 것은 예사였다. 중국 가장 북쪽인 타허에서 최남단인 하이난다오까지 자전거 수레는 내려왔다. 여행 중간에 방송에 출연하고, 신문에도 보도되면서 이들의 여행은 중국 전역의 화젯거리가 됐다. 고급호텔에서 서로 모셔가 편안한 잠자리와 식사를 대접했다. 여비로 쓰라며 돈을 던져넣고 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왕일민씨는 하이난다오에서 길을 멈춘다. 티베트의 라싸까지 가기에는 어머니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여행 중간에 “내가 100년된 인삼”이라며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지만, 바지를 버려놓고 소변을 보지 않았다고 우기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의 성정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아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이 될 어머니의 여행이 최대한 편안하도록 노력했다. 글을 쓴 작가 유현민씨는 신문보도를 통해 왕씨의 소식을 접한 뒤 여행 중인 그를 찾아다니려 2년 동안 노력한 끝에, 어느 추운 겨울날 하얼빈에서 결국 그를 만났다. 책을 펴내고 싶지 않다는 왕씨의 진지한 뜻을 설득해 일주일간 동고동락하며 마침내 글을 완성했다.98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폐기비용 수천억 ‘덤터기’ 우려

    한·미 양국이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해 국내에 비축하고 있는 미군 전쟁예비물자(WRSA·War Reserve Stocks for Allies)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달말 첫 협상에 돌입한다. WRSA는 1974년 체결된 한·미단일탄약보급체제(SALS-K) 협정에 따라 한국정부가 보관·관리 책임을 맡게 된 전쟁예비물자다.99%가 탄약이며 규모는 60만t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경제가 발전해 독자적으로 병참물자를 조달할 능력을 갖췄다는 이유로 2000년대 초부터 WRSA 프로그램의 폐기를 추진해 왔다. 국방부는 3일 “2008년 말 WRSA 프로그램 종결을 목표로 이달 31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서울에서 최초 협상을 갖기로 했다.”면서 “첫 만남인 만큼 협상로드맵과 절차가 주로 논의될 것”이라고 밝혔다. WRSA 처리 방법과 관련, 현재 미국은 노후탄약의 폐기비용을 한국정부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전량을 한국에 무상양도하는 방안을 타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WRSA 탄약의 90% 이상이 20년 이상 장기보관된 것이며 정비(폐기처리) 대상인 탄약만 전체의 3분의1인 20만t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미국측 요구를 수용할 경우 수천억원대의 폐기비용을 ‘덤터기’ 쓰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이와 관련, 이기수 국방부 탄약팀장은 “최대한 국익과 안보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협상하겠다.”면서 “아직까지 미국측은 어떤 구체적 제안도 하지 않은 상태”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성능이 양호한 신형탄약만 구매하는 것과 전량을 무상으로 양도받되 노후탄약 폐기비용을 부담하는 방안 가운데 어느 것이 경제적인지 판단한 뒤 구체적 협상전략을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한 시민단체의 정보공개청구에 국방부가 답변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매년 WRSA 탄약 관리비용으로 924억원을 지출하고 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프렌치 리포트] (26) 사회 흐름도 바꾼 출산 장려정책

    [프렌치 리포트] (26) 사회 흐름도 바꾼 출산 장려정책

    지난 1월 프랑스국립통계청(INSEE)은 2006년 프랑스에서 83만 900명의 아기가 태어나 전년도에 비해 2.9% 증가했으며, 합계출산율(가임여성 한 명이 평생 낳는 아기수) 2.0명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는 “프랑스가 유럽 출산율 리그에서 아일랜드를 제치고 우승했다.”고 보도했다.2005년까지 줄곧 유럽출산율 최고치를 기록한 나라는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1.99명)였다. 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출산율 저하와 인구 고령화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는 예외적으로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저출산 국가였던 프랑스가 ‘마(魔)의 2명벽’을 깨면서 유럽 최고의 출산율을 기록하게 된 비결은 정부가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인 출산 장려정책 덕분이다. ●저출산 국가서 10년째 ‘제2베이비 붐´ 68혁명 이후 불어닥친 성해방 운동은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부추겼고, 동시에 출산기피 풍조를 심화시켰다. 베이비붐 세대는 전통적인 가톨릭 문화에서 많은 자녀를 갖고 가사에 헌신적이었던 앞 세대 여성들과는 달리 사회활동을 중시했다. 그 결과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져 이미 1970년대부터 출산율 저하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지난 1995년 출산율이 1.71명까지 떨어지자 정부는 이대로 가다간 인구 감소가 불가피하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특단의 출산장려 정책을 수립하기로 했다. 프랑스 정부가 제안한 출산장려 정책은 단기적 처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인구 정책의 테두리에서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으로 이뤄졌다. 기본적인 사회보장 시스템에 추가해 출산과 육아와 관련한 각종 수당과 보조금, 세금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사회당 정권에서 수립된 가족지원 정책은 우파 정권으로 바뀐 뒤에도 꾸준히 확대됐다.2005년부터 중도우파 정부는 ‘3자녀 갖기운동’을 주도하면서 3자녀 가정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했다. 출산율을 인구감소를 막을 수 있는 수준인 2.07명까지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혜택은 결혼한 가정이나, 동거중인 가정이나, 사회적연대조약(PACS)을 맺은 가정이나 차별이 없이 돌아간다. 집요하고, 연속성 있는 출산장려 정책을 펼친 결과 출산율은 1996년을 고비로 상승세로 돌아섰다. 프랑스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10년째 ‘제2의 베이비붐’이 계속되고 있다. 출산율은 2004년 1.92,2005년 1.94에 이어 2006년 2.0까지 높아졌다. 유럽평균 출산율은 1.5. 낮은 출산율은 인구 고령화, 성장 잠재력 하락, 연금부담 증가 등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높은 출산율을 다른 유럽 국가들이 부러워하는 이유다. ●가족정책에 GDP 3% 투자 출산 및 육아와 관련한 정책은 프랑스가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프랑스에서는 여성이 임신을 하면 7개월째에 840유로(약 100만원)의 임신수당이 나온다. 물론 임신기간 중이나 출산을 위한 병원비는 무료다. 첫 아이를 낳으면 855유로의 격려금이 나온다. 모든 국민에게 지급되는 가족 수당(알로카시옹 파밀리알)은 가족 수가 많을수록 더 많이 나온다. 직장근무 경력이 1년 이상인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6개월 동안 유급 육아휴직을 갖는다. 아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무급휴가를 낼 수 있다. 이 경우 월 512유로(65만원)의 보조금을 받는다. 지난해 7월부터는 셋째 아이를 낳고 1년 동안 무급휴직을 하면 매달 750유로의 보조금이 나온다.6세 미만 자녀 보육비용은 세액공제된다. 대학까지 무상교육이니 교육비에 대한 부담이 없다. 매년 9월 아이들이 개학할 때에는 학용품 구입하라고 개학수당(268유로)이 나오고 방학이 되면 자연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도록 여행을 시켜 준다. 세 자녀 이상 가족에게는 영화관람이나 음악회 입장료 할인, 공공교통 요금 할인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대가족 카드’가 지급된다. 이미 수만개나 되는 전국의 유아원을 2008년까지 매년 1만 5000곳씩 추가로 세울 계획이다. 각종 지원제도를 보면 “이래도 아이를 낳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하는 것 같다. 물론 국가의 부담은 크다. 프랑스는 출산·육아·모성보호 등 가족정책에 국내총생산(GDP)의 3%에 해당하는 410억유로를 투자한다. 국방비 지출보다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장기적인 발전전략 차원에서 필수적인 투자라고 생각한다. 도미니크 드 빌팽 장관은 “정부는 모든 가정에서 원하는 만큼 아이를 갖도록 더 많은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직장 1년 이상 여성 6개월 유급육아 휴직 프랑스 출산지원 정책의 핵심은 아이의 양육비용은 낮춰 주고, 여성의 사회활동은 장려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경제활동에 참여하도록 매우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첫아이를 낳으면 최소 20주, 셋째 아이를 낳으면 최소 40주를 유급휴직으로 쓸 수 있으며 이때 ‘휴직 후 원직복귀’가 보장된다. 정책은 완벽하게 성공해 유럽에서 가장 높은 여성고용률과 출산율을 기록하게 됐다. 실제로 프랑스에는 많은 자녀를 키우면서 일하는 여성들이 많다.25∼49세 프랑스 여성의 81%가 직장을 갖고 있고 이중 3분의2가 자녀 두 명 이상을 키우고 있다. 파리 시내나 공원에 가보면 유모차를 끌고 산보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것에 놀라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다른 아이가 둘이나 있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다. 세 자녀 가구인 셈이다. 이렇듯 여성들의 출산기피 풍조는 사라진 지 오래이며 오히려 늦은 나이에 셋째 아이를 갖는 여성이 늘고 있는 추세다. 프랑스의 출산장려 정책은 정책이 사회 흐름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유럽 국가 전체가 고민하고 있는 인구의 고령화 문제도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종릉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이웃한 효종릉은 차분하기만 하지요. 세종릉과 남한강 건너 신륵사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종의 영릉이 예종 원년(1469년) 지금의 서울 대모산 기슭에서 여주로 옮겨진 뒤 신륵사는 세종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이 되었으니까요. 효종의 영릉 또한 여주군청에서 가까운 시내에 있는 대로사(위 사진·大老祠)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효종릉이 현종 14년(1673년) 여주로 천장(遷葬)되지 않았다면 대로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로사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아래·1607∼1689)의 사당입니다. 정조 9년(1785년) 왕명으로 지어졌지요. 우암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대학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당쟁의 참화를 이끈 편벽한 소인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입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정조가 그의 사당을, 그것도 효종의 영릉을 바라보도록 서향으로 지은 데에는 ‘효종의 죄인’이라는 ‘혐의’를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효종이 종종 ‘대왕’으로 받들어지는 것은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은 효종의 신임을 받아 북벌론의 기수로 지목된 이가 우암입니다. 우암의 북벌론은 그러나 양병보다는 민생의 안정, 무력보다는 군왕으로 덕을 쌓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는 점에서 효종의 실천적인 북벌론과 달랐습니다. 그의 존명배청 감정은 한족의 나라는 높이고 오랑캐는 물리친다는 유교경전 ‘춘추(春秋)’의 원리에 따라 관념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우암은 1659년의 유명한 기해독대에서 효종이 구체적인 북벌계획을 제시했을 때도 “제왕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말뿐이었다고 합니다. 효종은 우암과 독대한 지 불과 두달 만에 급서하는데, 우암은 국상의 예법을 조언합니다. 이때 관이 시신보다 작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요. 장지 역시 수원부가 길지라는 지관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경기도 구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곁으로 정했지만, 불과 15년 만에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여주의 세종릉 곁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반대파인 남인들이 이 모두를 우암의 탓으로 돌린 것은 물론입니다. 우암은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효종의 죄인으로 지탄받은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로 양성된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산림의 정치참여를 억제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초반기에는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고자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닦은 노론 중심의 산림(山林)을 중용했습니다. 정조가 대로사를 세운 데 이어 우암의 세 번째 회갑년인 1787년에는 북벌대의론을 칭송하는 비문을 직접 지어 대로사비를 세운 것도 노론을 향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뜻입니다. 건축사적으로 대로사는 18세기 익공집의 기준이 될 만큼 부재를 짜올린 수법이 완벽하다고 합니다. 나아가 대로사는 조선 후기 권력투쟁의 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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