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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깊이읽기] 문학의 죽음

    [앨빈 커넌지음·최인자 번역] 최근 평론가들이 ‘작가의 죽음’등의 표현을 써가며 ‘문학의 권위가 떨어지고 있다’,‘문학이 변하고 있다’는 공론들을 해왔다.그러나 앨빈 커넌처럼 무자비하며 단정적인 어조로 ‘문학의 죽음’(문학동네 발간)을 선고한사람은 없었다. 그는 방대한 자료들을 인용해가면서 작가의 행적,출판업계의 현황과 사건들을 통하여 문학계에 일어난 비리와 모순들을 폭로하고 문학이 이처럼 쇠퇴한 이유로 문학가들의 실수와 사회의 변모를 열거한다.그에 의하면 페미니즘과 마르크시즘 비평가들은 사회에 뿌리박고 자란 문학작품들을 놓고 단지 자기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남근중심주의니 부르주아 계층의 자기합리화니 하며 재단한다는 것이다.해체주의자 또한 전문 용어를 구사해가며 그럴싸하게꾸며 쇠퇴해 가는 문학을 대학이란 전문체제 속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글을 읽어갈수록 나의 의문은 깊어만 갔다.문학 작품은 인쇄매체 속에 담겨 나오기 때문에 작가가 쓴 글이 순수하게 독자에게 전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그 중간에 출판사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있고 제도가 있다.당연히 그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는 굴절되고 왜곡된다.그리고 그 굴절과 왜곡은하나의 훌륭한 의미로 독자에게 수용된다.또 저작권법 때문에 그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후손들이 벼락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작가의 노고를 몽땅 사회에 환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또 실제 작가와 책 속에 함축된 작가는 엄연히 분리되어야 한다. 커넌이 비난하는 것처럼 폴 드 만이 여자를 버리고 아이를 외면했다 하더라도 그의 문학 이론이 세상에 미친 영향이 빛바래는 것은 아니다.그럼에도 커넌은 왜 이렇게 좌충우돌하면서 작가와 평론가들의 위선과 표절을 캐는 것일까? 문학은 인간이 공유하는 하나의 장(場)으로 작용할 수 있다.‘무정’을 읽고 1910년대 학생들이 교육으로 국가를 발전시킬 결심을 했다면 당시 기생들은 기생 영채의 불운을 자기일 처럼 슬퍼했다.문학은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감정과 세계관을 드러내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훌륭한 공유물이다.페미니즘 비평가가 염상섭의 ‘삼대’에서 가부장의권위에 희생되는 여성들의 모습을 끄집어내며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이며 마르크시즘 비평가가 같은 소설을 읽고 부르주아 지식인의 나약함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이 모든 것중 어떤 것도 문학의 나약함을 설명해줄 수 없다. 커넌의 말대로 문학은 새로운 환경에서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이야기는영상매체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 영화와 TV 속으로 스며들었고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 둥지를 틀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변화를 ‘문학은이제 수많은 의사소통의 양식들 중에서 단지 글을 통한 의사소통을 위한 하나의 테크닉일 뿐’이라며 비장하게 설명하고 있다.커넌이야말로 그동안 문학의 정전성(正典性)을 믿었던 문학 연구가였는지 모른다.자기가 사랑하던것에 대한 배반감이 이리도 사무친 것일 줄이야.그의 분노와 고뇌에 의해 이 시대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 제주도 日관광객 유치 ‘리조트의 섬’ 판촉 나서

    제주도가 일본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리조트의 섬,제주’ 라는 관광상품을 내놓고 한국관광공사를 통해 판촉에 나섰다. 도는 일본에서 3∼4일씩 쉬는 연휴가 7월부터 내년 봄까지 6차례에 이르는점을 감안,2박3일 일정의 ‘리조트의 섬,제주’ 상품을 통해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기로 했다. 이 상품은 남성의 경우 골프 등 레저스포츠,여성은 미용과 휴양을 중심으로 일정이 마련됐고 남녀공통으로 기생화산인 오름 트래킹과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해안 절경지 탐방 등으로 코스가 짜여졌다.코스에는 말고기 요리와 전복죽 등 제주 전통음식을 즐기는 일정도 포함돼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사설] ‘젊어진 검찰’의 과제

    법무부는 검사장급 검찰 고위간부 39명 전원에 대한 승진 및 전보 인사를 6일자로 단행했다.이번 인사의 특징은 사시 8회 출신 박순용(朴舜用)씨가 총장에 임명됨에 따라 선배기수 6명이 퇴진한 데 이어 동기생 7명이 옷을 벗는 등 모두 13명의 고위간부가 대거 퇴진하고,사시 11회가 고검장에 승진하는가 하면 12회가 검찰요직을 맡게 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검찰사상 가위 ‘혁명적’이라고 할만한 이번 인사를 두고 이러저러한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동기생이 검찰총수가 되면 나머지 동기생들이 용퇴하는것은 신임 총장의 지휘권을 강화해주고 후배들에게 기회를 넘겨준다는 의미에서 검찰조직의 미덕(美德)으로 평가하는가 하면,선배 고위간부들이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경륜을 사장(死臧)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모두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어느쪽을 정책노선으로 삼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인사권자의 선택이다.법무부와 검찰 수뇌부는 검찰조직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쪽을 선택한 것 같다.그 결과 이번 인사가 검찰의 파격적인 세대교체로 나타난 것이다.그같은 선택의 배경에는 검찰조직을 새롭게 재편함으로써 검찰에 국정운영의 중요한 몫을 맡기려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구상도 일정한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번 인사를 통해 획기적으로 ‘젊어진’ 검찰조직에 대해 몇가지당부하고자 한다.첫째가 후속 인사를 앞두고 동요하고 있는 검찰조직을 하루빨리 안정시키라는 것이다.다음은 검찰의 의식개혁이다.현재 검찰은 지나치게 특권화됐다는 게 국민 일반의 인식이다. 검찰 개개인이 그같은 특권의식을 버리고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야 한다.다음으로,검찰은 ‘정치권력의 시녀’라는 오명(汚名)을 벗어나 정치적 중립성을 확립해야 한다.검찰의 중립성은 정치권력이 하사(下賜)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노력을 통해 확립하는 것이다.국민들이 ‘젊어진 검찰’에 기대를 거는 것도 이제야말로 역대 정권의 ‘사슬’에서 벗어나 중립성을 확립할수 있다는 바람 때문이다. 검찰은 국민들이 인정할만큼 충분히 중립성을 확보한 다음,우리 시대의 최대 과업인 개혁에나서야 한다.특히 정치인·고위공직자·재벌 등 사회지도층의 비리 척결이 그것이다.검찰이 사정의 칼을 높이 치켜들면 야당탄압이라느니 표적사정이라느니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흔들림 없이 엄정한 사정에 앞장서야한다.검찰 사정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정성 여부는 여권에 대한 검찰의태도에 달려있다.검찰이 깊이 명심해야 할 사실이다.
  • 대변을 보면 건강이 보인다

    대변은 건강상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중의 하나이다.대변의 양과 모양,색깔,점성도 등에 따라 몸의 이상유무를 알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요즘은 대부분 수세식 화장실을 쓰고 있어 자신의 대변상태를 관찰하기가 용이하다.대변을 통한 자가 건강진단법을 알아본다. 대변의 양과 횟수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식생활 습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하루 한번,200∼250g 정도면 정상이다.반면 섬유질이 적은음식을 주로 먹는 서구인은 1주일에 3번 이상이면 정상으로 간주한다.아프리카인들은 하루 2번 이상,500g 정도면 정상이라고 한다.한림대의대 강동성심병원 해부병리과 신형식 교수는 “대변 횟수가 이틀에 한번꼴로 적더라도 변 상태가 좋고 규칙적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반대로 하루 3∼4차례 화장실을 들락거린다면 장기능이 지나치게 활발해진 상태이므로 의사의처방에 따라 적절한 약을 먹어야 한다. 대변의 점성도도 건강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점성이 강한 진득진득한 대변은 좋지 않다.섬유질 성분이 적을 때 점성이 높아지기때문인데 섬유질이 많은 야채를 충분히 먹어두는 것이 좋다. 변이 지나치게 딱딱한 변비도 잘못된 식습관 때문이다.그러나 다른 원인질환 일 수도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서울대병원 내과 송인성 교수는 “변비는당뇨병이나 갑상선 기능저하증 때문에 오기도 하며,특히 장년층에서 갑자기생기는 변비는 대장암과 같은 악성질병에 의한 것 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설사의 원인은 다양하다.급성 설사는 대부분 식중독을 유발하는 세균이나약물 복용에 의해 일어나는데 감염성 세균이나 바이러스,원충,기생충 등이주범이다.다이어트용 하제 등 설사를 일으키는 약도 많으므로 약 복용시 꼼꼼하게 챙겨봐야 한다.만성설사는 궤양성 대장염 등 염증성 장질환이나 허혈성 장질환 등에 의해 잘 일어나기 때문에 정밀검사가 필요하다. 피가 섞여 나오는 혈변은 원인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중년기를 넘은 사람이 혈변을 반복적으로 보면 장암(腸癌)의 가능성이 높다.아이 변에 딸기잼 같은 혈액이 나타나면 장이 꼬이는 장중첩증(腸重疊症)의 가능성이 높으므로 바로 응급실로 달려가야 한다.자장면의 자장같은 변은 위나 십이지장 등에서 출혈이 일어나 직장까지 내려가는 동안 변색된 경우가 많다.대변 혈액검사를 받아 원인을 밝혀야 한다. 대변이 물위에 뜨고,기름방울이 많을 때는 지방변 가능성을 의심해봐야 한다.지방변은 담낭염이나 췌장염에 의해 많이 생기므로 전문의 진찰이 필요하다.또 눈으로 구별이 될 만큼 가는 대변이 계속 나오면 대장 및 직장 벽에암종양이 생긴 신호일 수 있다.장벽의 돌출된 종양이 대변 통로를 막아 가늘어진 대변이 나오기 때문이다. 신형식 교수는 “대변에 이상이 있을 때 가끔 대변잠혈반응(大便潛血反應)검사 등 대변검사를 통해 건강상태를 점검한다면 중년이후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임창용기자 sdragon@
  • 법정관리인 양성과정 개설 붐

    부도기업이 급증하면서 이를 떠맡을 법정관리인 양성교육이 경제단체 및 기관사이에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단체들이 이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부도기업의 증가말고도 부도기업 처리가 시장논리에 맡겨지는 추세에 따라 위기관리 등 경영노하우를 갖춘 법정관리인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부도기업 회생을 정부의 공적 자금투입에 의존했던 관치금융시대에는 채권은행단의 일방적 추천으로 경영을 모르는 금융기관 관계자가 법정관리인에선임돼 자금관리 등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게 고작이었다.대법원이나 서울지법은 이같은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최근 예규나 법정 관리인 선정기준을 마련,법정관리를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후보자 추천기관에 경제단체를 포함시켰다. 전경련 국제경영원은 이달초 ‘기업회생 전문경영인 양성과정’을 개설했다.기업체 및 금융기관 전·현직 간부 35명이 교육받고 있다.판사,교수,변호사,컨설팅회사 사장,회계사 등을 강사로 초빙,기업회생을 위한 경영기법을 비롯,인수합병 회사정리 채권단과의협상 노사관계 등 실무중심의 교육을 하고 있다.오는 9월 2기 수강생을 모집하는 등 반기별로 한차례씩 모집할 방침이다. 97년 가장 먼저 이 사업에 뛰어들어 25일 4기 수료식을 갖는 경총은 지금까지 모두 200여명을 배출했다.이 가운데 30여명이 ㈜건영,경기화학,아남전자등 부도기업에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돼 활동중이다. 경총 관계자는 “이 과정을 들으려는 신청자들이 몰려 평균 5대1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라면서 “㈜낫소 등 몇몇 법정관리 기업에서 매출이 호전되는 등 성공사례도 나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국생산성본부도 지난해 11월부터 7주코스의 ‘법정관리인 및 파산관재인양성과정’을 만들어 1기생 55명을 배출했고 현재 2기생 54명을 교육중이다.
  • 서울대병원 송인성교수가 말하는 식중독 예방법

    더위가 다가오면서 식중독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학교급식이나 결혼식 피로연 음식에 의한 집단식중독사고도 일어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송인성 교수는 “계절상 식중독을 크게 우려할 시기가 아니지만 안일한 음식관리로 대형 식중독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이러한 식중독은 세균,바이러스,기생충에 오염된 음식을 먹고 설사,복통,구토 등의 증상을 보이는데 원인균을 제대로 알면 예방하기 쉽다. 포도상구균류의 세균에 의한 식중독은 음식섭취후 수시간내에 일어나고 2∼3일 안에 대부분 저절로 낫는다.이 세균들은 음식물에서 자라면서 독소를 내놓아 식중독을 일으킨다.이 독소는 음식을 끓여도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상한 음식은 끓여먹어도 식중독을 막을 수 없다.살모넬라 식중독은 계란,우유등에 의해 잘 일어난다.계란껍질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면 닭똥 속의 세균이 들어가 계란을 오염시켜 식중독 원인이 된다.심한 설사,발열 등을 있으켜 장티푸스로 오인하기 쉽다. 비브리오 식중독은 생선,굴,낙지 등을 날로 먹은 뒤 일어난다.비브리오균은 민물과 바닷물이 합치는 곳에 많아,이런 곳에서 잡은 생선을 그대로 먹으면 식중독에 걸리기 쉽다.높은 염도에서도 죽지 않아 젓갈도 안심할 수 없다. 이 균에 감염되면 온 몸에서 피부가 물집과 괴사를 일으켜 치사율이 매우 높다.바다장어나 오징어를 날로 먹었을 때 일어나는 심한 복통과 구토 등은 아니사키스란 기생충에 의한 것이다.명주실 모양의 이 기생충은 위벽을 파고들어 식중독을 일으킨다. 송교수는 식중독을 예방하려면 물을 항상 끓여먹고,손을 자주 씻어야 하며,의심이 가는 음식을 무조건 버리고,특히 굴,낙지,조개 등은 날로 먹지 말라고 충고한다. 임창용기자
  • [발언대] 국민 불이익 구제 행정심판委에 박수를

    최근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회는 지난 1월에 실시된 제54회 한의사 국가시험 불합격처분 취소 청구사건과 관련,‘국가시험에서 수험자가 OMR카드에수험번호를 잘못 표기하였더라도 시험관리기관은 다른 방법으로 수험자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 수기 채점 등의 방법으로 채점한 뒤 점수를 부여하여야하고 따라서 이를 게을리한 채 불합격 처분한 것은 잘못이다’는 결정을 하였다. 오래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실시된 기능사 2급시험에서 OCR카드 작성 실수로 불합격된 경험이 있는 필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결정이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넘는 동안 각 분야에서 개혁을 진행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부당한 행정처분에 따른 불이익을 구제하는 데에는 다소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한다.최근의 이러한 결정은 늦은 감은 있지만 국민의 권리구제를 위하여 한걸음 나아간 용기있는 것이며,국민의 정부임을 실감케 하는 모처럼의 쾌거라고 생각한다. 행정심판위원회에서는 작년 한해 7,500여건을 심리·의결하여 그중 2,500여건을 시정함으로써 위법·부당한 행정처분으로 인한 국민의 불이익을 구제하였다고 한다.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이미 이루어진 행위를 취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며 번잡스러운 일이다.특히 과거의 권위적인 정부에서는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답안지를 다 작성하고서도 실수로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수많은 수험생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마땅히 시정되었어야 했을 것이다.이러한 조치들이 계속될 때 비로소 말만이 아닌 참다운 ‘국민의 정부’가 되는 것이아닐까. 동기생들 거의 모두 합격하는 기능사 시험에서 불합격되었을 때,그것도 실력이 아닌 전산용 답안지상의 표기 오류로 간단히 0점 처리된 사실을 알았을 때 필자가 당시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어찌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실망이얼마나 컸던지 천직(天職)으로 생각하던 기능직 공무원 신분을 버리고 법과대학에 가서 검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정도다.그때 만약 지금과같이 국민의 권익보장에 앞장서는 ‘국민의 행정심판위원회’가 있었다면…. [盧明善 서울지검 검사]
  • 폐에 자궁세포 기생…‘폐자궁내막증’ 환자 발견

    폐에 자궁세포가 기생하며 생리때마다 출혈을 일으키는 ‘폐자궁내막증’환자가 발견됐다.영동세브란스병원 흉부외과 이두연 교수는 생리때마다 입으로 피를 토하는 증세로 고생하다 병원을 찾은 정모씨(25·회사원)를 전산화단층촬영 및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한 결과 우측 폐 아랫부위에 자궁내막세포가 기생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이 환자는 최근 이 병원에서 절제수술을 받고 완치된 상태다. 폐자궁내막증은 자궁세포가 혈관 등을 타고 이동해 흉막에 붙거나 폐 속으로 들어가 기생하다가 생리때가 되면 출혈을 일으키는 병.즉 자궁에서 배란때마다 자궁내막세포가 떨어져나가며 출혈을 일으키는 현상이 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이런 경우는 세계적으로 20례,우리나라에선 3례만 보고됐을 정도로 희귀한 질환이다. 폐자궁내막증은 성선자극호르몬 촉진제를 투여하거나 절제수술을 통해 치료하는데 호르몬 요법은 평생동안 매월 주사를 맞아야 하는 불편이 뒤따른다. 임창용기자
  • [인터뷰] SBS ‘은실이’ 서울의원 원장 가수 김창완

    흔히 김창완을 ‘무공해 연기자’라고 말한다. SBS ‘은실이’에서 서울의원 김원장은 김창완이 아니라면 누가 해낼 수 있겠느냐는 말도 방송가에선 과장이 아니다.따지고 들면 분명 조역에 지나지않지만 화산땅에서 일어나는 일의 맥을 분명하게 짚어내는 인텔리로서 그가 내뱉는 대사에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어 김창완이 연기도 하네!’란 말을 들으며 시작한 연기생활이 경력 10년을 넘어섰다.그러나 그의 연기에선늘 아마추어의 풋풋함이 묻어난다.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신선한 연기는 왜소한 현대인과 지식인의 역할에 딱 들어맞아 이런 역이라면 캐스팅 0순위에꼽힌다. 비결은 여유와 자연스러움이다.실제로는 엄청나게 고민하지만 여유로 포장한 그의 연기는 극중인물과 김창완을 따로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는 경력 20년을 넘어선 가수다.올해초 ‘산울림’의가요업적을 기린 ‘헌정앨범’에 국내 록과 포크가수들이 대거참여,그의 음악세계와 한국 록의 역사를 중간정리했다.확실한 ‘성공’의 이유를 그는‘엉뚱한 프로정신’으로 설명한다. “실력없는 프로도 있을 수 있고,프로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진 아마추어도있어요.실력이 이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느냐,도중에 그만 두느냐로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해야죠.그렇다면 전 실력은 부족하지만 한계에부딪혀도 또 일어서서 끝까지 해내는 프로 가수이고,프로 연기자입니다” 그의 어수선한 머리는 가발이다.머리카락이 빠져서 쓴 가발이 아니라 오른쪽 머리의 흉터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가사를 써온 제 입장에선 연기란 시어(詩語)를 골라내는 작업과 비슷해요.코믹은 과격한 언어(연기)도 괜찮지만 정통 드라마는 자제하며 대사 뉘앙스를 잘 전달하도록 섬세해야지요” ‘은실이’의 녹화장에서도 ‘지난 시대의 향기’를 맡느라 세트의 벽면에붙어 있는 ‘쥐박멸포스터’부터 약광고,소품 하나하나를 재미있게 들여다보는 그에게선 실제의 김창완과 김원장의 구별이 불분명하다. “엄청나게 고민하고,오히려 걱정이나 근심이 없으면 ‘너답지 않다’고 걱정하는 것이 제 삶의 자세입니다”‘즐겁게고민해야 한다’는 화두는 그의노래와 연기를 이해하고 더불어 ‘성공’을 푸는 열쇠인 것같다. 허남주기자
  • [역경을 딛고…]고대에 10억기증 崔丙順할머니 육필수기(4)

    순탄할 듯 보였던 인생을 풍비박산낸 것은 이념과 전쟁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작은아버지가 경기고녀에 입학한 딸을 나에게맡겼다.나는 이 때 하숙집을 남자하숙으로 바꾸었는데 기생들의 생활이 조카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이것이 화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얼마쯤 뒤 숙부가 사업자금을 부탁해왔다.집을 70만원에 팔아 20만원으로전세를 얻고 남은 돈을 드렸다.마침 남자들 하숙이 불편한 점이 많아 장사를 해보려던 참이었다. 48년 겨울 어느날이었다.갑자기 순사들이 들이닥치더니 ‘빨갱이 주모자를숨겨주었다’면서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다.순사들은 “빨갱이를 먹여살리더니 집을 팔아 정치자금을 댔다”며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다.황당했다.게다가 있지도 않은 정치자금 150만원과 권총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그런 일이 없다고 버티자 순사들은 악질을 만났다며 회유를 하기도 했다.40여일간 취조를 하더니 트럭을 태워 춘천으로 보냈다.차에는 나 말고도 수십명의 ‘빨갱이’들이 타고 있었다.몹시도 추웠던 그해겨울,잠도 못자고 가는동안 내내 차멀미를 했다.춘천에 도착해 철창에 기대어 졸았더니 간수는 그엄동설한에 나에게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사찰계 주임이라는 사람에게 불려나가 취조를 당했다.십수일간 취조를 당한 뒤 무죄석방이 됐다.내가 빨갱이를 하숙으로 받았는 데다 그 남자의 부인이 ‘최진순’이었는데 이름이 비슷해 내가 부인의 동생쯤 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너무도 억울해 유치장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집에 돌아와보니 다 도둑맞고 집은 아수라장이었다.서럽고 분한 마음에 조카딸만 나무랐다.장사라도 해보려고 숙부에게 돈을 되받아 가게를 얻으러 다니다 알고 지내던 순사를 만났다.예전에 인사동 집 근처에 파출소가 있어 평소 순사들을 잘 대해 주었고 식구처럼 가깝게 지냈다.그 순사가 목이 좋은가게가 있다길래 60만원에 계약을 했는데 알고보니 사기였다.실제 점포 주인이 나타나 명도 소송을 낸 것이다. 쌀 한말이 몇푼 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엄청나게 큰 돈을 날릴 판이어서나도 이의신청을 내고 법적 절차를 밟았다. 돈도 날리고 가게도 낼 수 없던 터라 마포로,자하문 밖으로 돌아다니며 장사로 생계를 꾸리고 있던 중 6·25가 터졌다.서울이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고모두들 숨죽여 살고 있는데 몇개월 지나니 국군이 되돌아왔다.경찰은 공산치하에서 부역을 했다며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내가 또 끌려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순사가 와서는 다짜고짜 동대문서에 가두었다.몇주 뒤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는데 감방은 콩나물시루 같았다. 지하실에 끌려갔는데 “누구 순사를 아느냐”고 물었다.나에게 사기를 친 순사이길래 “안다”고 했더니 즉석에서 사형을 언도했다.그 순사를 밀고했다는 게 이유였다.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소용이 없었다. 공산군이 다시 밀고 내려오면서 대전으로,부산으로 이감됐다.이송되는 나흘 동안 물 한방울 먹지도 못하고 화물차에 실려갔다.열차에는 죄수만 탔다.사람을 포개고 포개 한 열차에 다 태웠다.굶어 죽고,깔려 죽고 정차역마다 죽은 시체만 한무더기였다.특히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 끼니로 주는 한 움큼의 생쌀도 못얻어먹었지만 나는 목숨이 질긴지 살아남았다.‘죽어서는 안된다’는 의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최고승부사’ 김태환감독

    ‘명장’김태환감독(49)이 다시 한번 ‘최고의 승부사’임을 뽐냈다-. 김감독은 6일 끝난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에서 중앙대를 무패행진으로 8년만에 패권을 탈환,3개대회 연속 우승과 17연승을 일궈냈다.지난해 5월 1일중앙대 사령탑을 맡은 뒤 2개월여만에 열린 대학연맹전과 98농구대잔치를 거푸 제패한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17승1패의 경이적인 승률을 올리고 있는 것.유일한 패배는 데뷔전인 대학연맹전 1차전에서 고려대에 당했다.더구나 이번 대회 우승은 지난해말 본의 아니게 ‘특기생 선발비리’에 휘말리는 바람에 잠시 퇴색했던 명성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더욱 뜻이 깊다.사실상의 무혐의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엄청난 고통을 치른 김감독은 “든든한 신뢰와 성원을 보내 준 학교 관계자와 팬들에게 조금은 빚을 갚은 것 같다”고 우승소감을 밝혔다. 화계초등학교에서 지도자로 출발해 무학여고 선일여고 국민은행 등을 거치며 숱한 우승을 엮어낸 김감독은 뚝심과 지략,통솔력을 두루 갖춰 대표적인‘실전형 사령탑’으로 꼽힌다.농구명문대 출신이아니면 좀처럼 명함을 내밀기가 어려운 농구판에서 김감독이 정상에 우뚝 서고 대학 최강팀의 지휘봉까지 잡은데는 “그가 손을 대면 팀이 달라진다”는 인식이 코트 주변에 폭넓게 퍼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대문상고 졸업이 최종 학력인 김감독은 ‘고졸감독’ ‘농구계의 잡초’등 달갑잖은 수식어를 떼내기 위해 지난해 중앙대 대학원에 등록하기도 했다. 오병남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20) 요동치는 軍:下

    장면(張勉)정부 국방정책의 큰 줄기인 ‘감군(減軍)’은 처음부터 장벽에부닥쳤다.장면이 민의원 첫 시정연설에서 밝혔듯이 군 병력을 줄이려는 이유는 경제적인 데 있었다.국정목표로 내건 ‘경제제일주의’를 실현하려면 국방비를 줄여 그 돈을 경제건설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방비 규모는 국가예산의 40%를 넘을 정도였다.장면정부는 국방비가예산의 20% 수준으로 줄 때까지 지속적으로 병력을 감축할 계획이었다.모자라는 병력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장비 현대화,화력 증강 등으로 보완할 생각이었다.주한미군이 있는 한 국가안보에는 이상이 없으리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에 따라 장면정부는 집권하자마자 ‘10만 감군’을 발표했다.그러나 이는 한국군과 미국 양쪽의 반발에 직면한다.장면이 새로 임명한 최경록(崔慶祿)육군참모총장부터가 앞장섰다.최총장은 민의원에서의 취임인사에서 “감군은 전투능력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것”이라면서 정부의 계획에 “원칙적으로반대한다”고 밝혔다.주한 유엔군사령부와 미대사관,미 국방부 등에서도 완곡한 반대 의사를 잇달아 흘렸다. ‘정군(整軍)’을 주장하는 영관급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전력 약화’라는 측면 말고도 그들이 감군을 거부하는 까닭은 또 있었다.그것은 인사적체에 따른 불만이었다. 예컨대 육사1기생은 절반쯤이 입대 5년 만에 별을 달았는데 그들보다 4년늦게 시작한 8기생들은 12년이 지나도록 준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대령 숫자도 10%가 채 안됐다.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상태에서 감군으로 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이들이 달가워할 리 없었다. 섣불리 감군을 발표한 장면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렸다.그렇다고 정책의 정당성과 목표를 홍보하고 설득하려는 노력도 별로 없었다.1960년 9월14일 열린군수뇌회의가 감군 규모를 5만명으로 줄여달라고 건의하자 장면정부는 이를받아들였다. 11월 초 권중돈(權仲敦)국방장관은 “일부 감군이 있지만 한국군 병력은 60만명을 유지한다”고 공식발표해 감군정책을 포기한다.국가정책의 전체적인틀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 시도조차 못된 채 무너져 내린 것이다. 감군의 무산과 함께 장면정부는 군인사에서도 실책을 거듭한다.어느 정부건 정권유지에 핵심이 되는 요소가 군을 통제할 수 있는 자체 인맥을 형성하는 일이다.그런데도 장면정부는 이를 경시했다. 장면이 총리가 되자 허정(許政)과도정부 수반은 그에게 “국방장관만은 이종찬(李鍾찬)을 계속 기용하라”고 권유한다.민주당에서 국방전문가로 통하는 이철승(李哲承)도 똑같이 이종찬을 추천한다.그같은 격변기에 군에서 두루 존경받는 이종찬이야말로 적임자라 할 만했다. 그렇지만 장면은 이종찬 대신 현석호(玄錫虎)에게 장관을 맡긴다.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을 앉힌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최경록도 이종찬처럼 이승만(李承晩)의 정치적인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한 꿋꿋한 군인이었다.특히장면이 부통령으로 출마한 ‘3·15부정선거’때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서경호를 도맡는 등 모든 일을 은밀하게 도와준 충실한 장성”(鄭一亨 당시 외무장관 회고록에서)이었다. 장면과 최경록은 그러나 처음부터 어긋난다.최경록은 감군정책을 공개리에반대했고,미 국방부 군원국장인 파머대장이 ‘정군 반대’를 밝히자 정면으로 반박해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장면정부를 난처하게 만든다. 최경록은 61년 2월17일 육참총장에서 물러난다.임기는 2년이지만 실제로는반년도 못 채우고서였다.그가 해임되자 국회는 ‘총장 경질을 둘러싼 상황’을 전면조사하겠다고 나섰다.장면은 “최총장을 바꾼 이유는 공공연하게 반미감정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장면과 최경록의 갈등은 군정책에 관한 이견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한편에서는 장면내각의 핵심세력과 수석 국무위원인 정일형 외무장관 사이의 다툼 때문이라고도 풀이한다.최경록은 가족관계로 정일형·이태영(李兌榮)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최경록의 후임에는 장도영(張都暎)중장이 취임한다.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한 것은 장면정부의 군 인사 중에서도 최악이었음이 석달 뒤 5·16쿠데타 때 드러난다.그는 쿠데타가 추진돼 성공을 거두는 전과정에서 쿠데타군과 장면정부에 ‘양 다리를 걸쳐’ 쿠데타 저지를 가로막은 장본인이었다. 사실 ‘장도영 육참총장’은 누가봐도 이해하기 힘든 선택이었다.장도영은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자유당정권의 2인자인 이기붕(李起鵬)국회의장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그를 ‘아버지’로 모셨다.3·15부정선거 때는 2군사령관으로 후방 군부대의 부정선거에 큰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도영은 60년 9월17일 최경록 육참총장에게 예편신청서를 제출하지만 되돌려받는다.그는 참모총장 자리를 통보받았을 때 “내가 총장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당황했고 사양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장도영 총장 취임을 누가 주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5·16 이후 나온 관계자들의 증언은 한결같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변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단지 영어에 능통한 장도영 부부가 미8군 장성들과 아주 가깝게 지냈으므로 미군쪽 추천이 강력하지 않았나 추측될 뿐이다. 감군 추진에 따른 군부의 반발과 잘못된 인사로 장면정부는 군 통제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이승만정권에서는 군 출신을 각료의 10%쯤 배정한 것과는 달리 장내각은 군 출신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심지어 국방부의 장·차관 자리마저 배려하지 않았다. “장면정부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조직력이 강한 군부를 소외시켰다”는 어느 정치학자의 지적처럼 군에 무심(無心)했던 정부는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용원기자 ywyi@
  • [제2공화국과 張勉](19)-요동치는 軍(上)

    1960년 8월27일 민의원에서 총리 취임후 첫 시정연설에 나선 장면(張勉)은긴급과제 6가지에 관한 정부 방침을 역설했다.마지막 항목에서 장총리는 “경제건설과의 균형상 과중한 국방비를 줄이고자 감군(減軍)을 하겠으며 이에 대비해 중장비를 도입하는 계획을 이미 수립했다”고 밝혔다.이어 “국군의 군기를 확립하고 일부에서 있었던 부패를 숙청하는 동시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고 군내 파벌 조성을 방지하기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다짐했다. 장총리가 제시한 군 관련 정책의 큰 줄기는 ‘감군’과 ‘개혁’이었다.또그가 지적한 군의 문제점들은 국민도 충분히 공감하는 것들이었다.이승만(李承晩)정권 아래서 군은 정치에 심하게 오염된 상태였다[별도기사 참조].4월혁명이 일어난 뒤 군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다른 어느 분야에 관한 것 못잖게 높았다. 4월혁명 공간에서 국민과 군의 만남은 충돌 없이 이루어졌다.4월19일 이승만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해 군이 서울 등 대도시에 진주했지만,경찰과는 달리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송요찬(宋堯讚)계엄사령관은 계엄군에게 “민가에 들어가지 말고 절대 음식을 얻어먹지 말 것,어떤 일이 있어도 총을 쏘지 말며 발포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계엄군인 15사단의 조재미(趙在美)사단장은 19일 고려대를 찾아가 강당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절대 연행하지 않겠다”는약속을 해 해산시키기도 했다. 60년 4월 중립을 지킨 군의 엄정한 자세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다행스러운일이었다.가령 군이 유혈진압에 나섰다면 그 비극적 결말은 상상하기에도 두려울 정도였을 테고,계엄사태를 빙자해 직접 권력 장악에 나섰더라도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타격이 됐을 것이다. 4월혁명 과정에서 군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초연한 듯이 보였다.다만 장총리의 연설에서 지적받은 자체 문제점들을 처리하려는 움직임이 내부에서일어났다.그것이 바로 정군(整軍)운동이다. 허정(許政)과도정부 시절인 5월2일 군수기지사령관인 박정희(朴正熙)소장은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편지를 보낸다.“군의 최고 명령자로서 ‘3·15부정선거’에책임을 지고 용퇴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5월8일에는 김종필(金鍾泌)중령 등 육사 8기생인 중령 8명이 김중령 집에서모였다.이들은 정군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으고 ▲3·15 부정선거를 방조한 군 장성들의 책임 추궁 ▲부정축재한 장성 처단 ▲무능·파렴치한 지휘관제거 ▲파벌 요인 제거와 군의 정치적 중립 보장 ▲군 처우개선 등을 목표로 정했다. 이들은 연판장을 돌려 군내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했지만 즉시 발각돼 김종필 최준명(崔俊明) 김형욱(金炯旭) 옥창호(玉昌鎬) 석창희(石昌熙)등 5명이구속됐다.그러나 여론 악화를 우려한 송요찬은 이들을 바로 석방하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송요찬의 후임으로는 역시 정군대상으로 꼽히는 최영희(崔榮喜)중장이 임명됐다. 장면내각이 구성되면서 국방장관은 현석호(玄錫虎),정무차관은 박병배(朴炳培)의원(무소속)이 각각 맡았다.장·차관 모두 군이나 국방에 관해서는 백지나 다름없었다.다만 현석호에게 육사 2기생인 현석주(玄錫朱)라는 동생이 있어 그를 통해 군 내부사정을 알아보는 정도였다.장면은 국방부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공보비서관인 고 송원영(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장총리는 나이가 지긋한 민간인을 국방장관에 앉힌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그러나 국방부의 모든 일은 한계가 있다고 본 것 같다.미군에서 작전권을 가진 이상 국방장관 자리는 한계가있다고 보았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는 최경록(崔慶祿)중장을 앉혔다.최중장은 이승만정권에서 정치에 물들지 않은,몇 안되는 고위장성 가운데 하나였다.최영희는 합참의장으로 승진했다. 장면정부 출범후 영관급 장교들의 정군운동이 다시 떠올랐다.9월10일 김종필 김형욱 등 중령 11명이 현석호 국방장관을 방문해 전군을 상대로 정군을 단행할 것을 청원했다.현장관도 필요한 정화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이틀뒤 국방장관이 현석호에서 민주당 구파인 권중돈(權仲敦)으로 바뀐 뒤 권장관은 정화조치의 첫 단계로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를 조사하는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한다. 9월20일 엉뚱한 곳에서 정군운동에 불똥이 튀었다.최영희 합참의장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국방부 군원국장인 윌리스턴 파머 대장이 한국을 떠나면서 정군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한국군 고위장성들이 최근의 사태에큰 불안과 초조를 느끼니 더 이상 조직을 흔들어 군사력을 약화시키지 말라”는 요지였다. 파머의 성명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최경록 육참총장이 즉각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9월24일에는 육사 7·9·10기 대표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파머를 불러들여 자리를 보존하려고 했다”면서 사임을 요구했다.‘하극상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태의 결과로 김종필·석정선(石正善) 두 중령이 61년 2월 예편당한다.배후로 지목된 박정희는 육군본부작전국장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된다. 이후 정군운동은 사라지지만 주동자들은 결국 쿠데타 음모로 돌아선다. 이용원기자ywyi@李承晩정권하의 軍실태 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동안 군은 외형상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대한민국 출범 당시 국군은 육군·해군을 합해 5만 병력 규모였다.‘6·25’발발직전에 10만명을 넘어섰고 1954년에는 65만명에 이른다.이후 다소 줄어 50년대 중반부터는 통칭 ‘60만 대군’으로 자리잡는다. 반면 이 시대는 군이 정치적인 사건에 자주 동원되고 그 영향으로 분파(分派)가 극심해지는 등 정치에 오염된 기간이기도 했다. 창군(創軍)이후 60년대 초까지 한국군 상층부를 이룬 장성과 고급장교들은출신에 따라 네 부류로 나뉜다.광복군 또는 중국 정규군 출신을 비롯해 ▲일본군 장교·하사관 ▲일본이 창설한 만주군 ▲공산통치를 피해 내려온 이북피난민 출신 들이다. 육군의 전신으로 46년 창설된 조선경비대에서는 광복군의 유동열(柳東悅)송호성(宋虎聲)장군이 초대,2대 사령관을 맡는다.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김구(金九)를 지지하는 광복군·중국군 출신들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이승만은 초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참모총장(49년 폐지됨)에 일본군 출신 이응준(李應俊) 채병덕(蔡秉德)을 각각 임명한다.일군 출신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해 초기 국군이 기틀을 잡는 데 나름대로기여한다. 그러나 일군 출신들도 52년이면 ‘실권’에서 멀어진다.‘발췌 개헌’때 이승만이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2개 전투사단을 부산으로 보내라고 명령하지만 거부당한 일이 계기가 됐다.일본 육사를 나온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개입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만만치 않은’일군 출신들을 배제한 이승만은 후임에 ‘젊고 경험이 부족한’만주군 출신들을 선택한다.대표적인 인물이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정일권(丁一權)과 백선엽(白善燁)이다.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공하려고 관동군 보조병력으로 창설한 만군은 그 위상이 독특했다.정규전 훈련보다는 독립군이나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필요한 반란진압 전술을 주로 배웠다.독립운동가·공산주의자를 상대하는 바람에 그업무도 상당히 정치적이었다.그래서 흔히 “만군 출신의 많은 장교들은 군내(軍內) 분파주의와 음모의 원천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승만은 정일권과 백선엽을 교대로 중용하며 충성경쟁을 부추긴다.정일권이 51년 34살에 국군 최초로 중장에 오르지만 대장 계급장은 그보다 3살 아래인 백선엽이 53년 먼저 단다.육군참모총장도 정일권(50년)-백선엽(52년)-정일권(54년)-백선엽(57년)으로 왔다갔다한다.두 사람의 선두다툼은 군부 내에 함경도파(정일권)와 평안도파(백선엽)라는 두 파벌이 형성되는 원인이 된다. 군부내 파벌을 조장해 충성경쟁을 시킨 것 말고도 이승만은 여러 면에서 군을 정치에 악용한다.대통령·국회의원 선거 때 부정투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헌병총사령부(사령관 元容德)와 특무대(대장 金昌龍)를 시켜 군 내부를 감시하는 한편 이들을 정적 제거에도 동원했다.‘서민호(徐珉濠)의원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자금도 군비에서 조달했다.군은 당시 국가예산의 40%이상을 썼고 매년미국으로부터 4억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받고 있었다.군에서 정치자금을 끌어쓰는 행태는 필연적으로 군 내부에 부패를 불러왔다.군수물자를 빼돌려 사복(私腹)을 채우고 위로는 상납하는 구조가 심해졌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군은 자유당·관료층에 버금가는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라 정군(整軍)운동을 불러왔다. 이용원기자ywyi@
  • [정직한 역사 되찾기 34] 친일의 군상

    친일파 가운데는 부자,형제,부부,사돈간 등 일가족이 집단으로 친일대열에섰던 경우가 더러 있다. 부자간에 친일을 했던 인물로는 ‘조선어 전폐론’을 폈던 현영섭과 그의 부친 현헌(중추원 참의),일진회 회장으로 ‘병합청원서’를 제출했던 이용구와 그의 아들 이석규,그리고 부자가 모두 일제하 고급관리를 지낸 손지현-손영목 부자가 대표적인 예다. 형제로는 고급관리 출신의 송문화-송문헌 형제,‘밀정형제’로 유명한 선우순-선우갑 형제 등이 있으며 부부간에는 만주에서 일본군 밀정을 지낸 이종형-이취성 부부와 초기 애국부인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변절,밀정을 지낸 오현주-강낙원 부부가 유명하다. 또 사돈간에 친일을 한 집안으로는 매국노 송병준과 을미사변의 주역으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구연수가 서로 사돈간이며 구연수의 아들 구용서는 일제하의 은행원 출신으로 해방후 초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을사5적’의 하나인 이하영은 한일병합후 중추원 고문을 지냈는데 그의 손자 이종찬은 일본육사 49기생으로 나중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부자간에 친일을 한 경우로는 민병석-민복기(전 대법원장) 부자도 빼놓을수 없다.민병석(閔丙奭·1858∼1940)은 여흥 민씨 출신으로 명성황후의 척족이다.좌찬성 민영휘의 손자이며 민경식의 아들로 충남 회덕에서 태어났다.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오른 그는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를 호위한 공로로 척족 가운데서는 일찍부터 권력의 핵심에 든 사람이다. 1884년 성균관 대사성에 이어 승정원 도승지,예조참판,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89년 11월 평안감사로 임명돼 1894년까지 재직하였는데 이때 당오전 발행을 남발,민중들로부터 원성을 샀다.평양시절 그는 대원군 계열로 몰려 당시 평남 순천에 유배중이던 우범선(禹範善)을 알게 돼 그를 장위영 영관으로 천거하였다.우범선은 나중에 친일훈련대 대대장으로 ‘명성황후시해사건’,즉 ‘을미사변’의 주역이 되었는데 그를 추천한 사람이 민씨 집안의 척족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1895년 일본 낭인집단의 손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민씨 척족의 정치세력은 급격히 쇠퇴하였다.그러나 그만은 여전히 지위를 보전하였다.이듬해2월 그는 정2품 궁내부 특진관(칙3)에 임명됐으며,1898년 이후 농공상부·궁내부·학부·내부대신 등 요직을 두루거쳤다.처세술에 비범한 재간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친일·친러정권을 넘나들며 승승장구하였다.이런 그를 두고 고종은 “민병석은 짐이 부르려고 할 때는 이미 와 있고,내치려고 할 때는 이미 떠나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민병석의 대표적인 친일은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으로서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에 앞장선 사실이다.‘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앞서 그는 조정의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伊藤博文)를 초빙해왔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 공로로 그는 육군부장·표훈원총재·시종원경 내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7년 10월 대훈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綬章)을 수여받았다.1909년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되자 그는 궁내부 대신으로 정부측 조문사절로 도일,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1912년에는이강공(李堈公)을 수행하여 일왕 메이지(明治)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도 있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그는 궁내부 대신으로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직에 있었다.당시 청와대 경호실장격인 시종원경은 낙선재 윤비(순종의 황후)의 백부 윤덕영(尹德榮)이었는데 이 둘은 이완용(李完用)과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의 회유와 사주를 받고 ‘병합반대론’을 무마,조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정부 대신담당이 이완용이었다면 이 둘은 궁중담당이었다.‘한일병합’의 1등공신인 이들은 병합후 모두 일왕으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으로 매국공채를하사받았다.이때 민병석은 훈1등 자작(子爵)과 매국공채 10만엔(현 시가 10억원 정도)을 받았다. 일제치하 1911∼19년까지 이왕직 장관을 지낸 그는 1925년 7월부터 14년 3개월동안 중추원 고문을 지내다가 1939년에 중추원 부의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사망 직전까지 그는 일생을 친일로 일관했다.공직 이외에 그는 틈틈이 친일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중일전쟁 직후 귀족·고급관리 부인들의금비녀 수집을 목적으로 결성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가하기도 했고,조선사편수회 고문·왕공족심의회 심의관·조선귀족세습재산 심의회원을 지내기도 했다.또 서예,특히 행서에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선전(鮮展)의 심사위원도 지냈다.사망 직전 종2위 훈1등까지 올랐던 그는 1940년 8월 6일 도쿄 스가모(巢鴨)의 강락(康樂)병원에서 설암(舌癌)으로 사망하였다.그의 나이 82세 때였다.그의 자작 작위는 동년 11월15일 장남 민홍기(閔弘基)가 습작하였다. 역대 정권에서 법무차관·장관,검찰총장,대법원 판사,대법원장(5·6대 연임)을 지낸 민복기(閔復基·창씨명 岩本復基·1913∼생존)는 민홍기의 동생이다.1937년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38년 3월 사법관 시보로 법조계에 몸을 담았다.이후 40년 5월 경성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해방 직전인 45년 6월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승진하였다.평소 얘기할때 입가에 거품이 생겨 ‘민(閔)사이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는 해방전후를 통틀어 법조계에서 가장 관운이 좋은 사람으로 불린다. 그는 법조계 내외에서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의 소지자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사법부의 수장(首長)으로서는 그의 말대로 ‘제삿상의 대추·밤’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대에 걸친 친일집안은 이제 역사속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이 집안이 명문가로 불리는 것이 마땅한지는 후세의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 원주 의료기기 산업단지 조성 착수

    전국 최대 규모의 원주의료기기 산업단지 조성 사업이 다음달 1일 입주업체 모집과 함께 시작된다. 강원도 원주시(시장 韓尙澈)는 23일 태장농공단지내 대지 9,984평 건평 3,142평의 옛 유니온전자 건물에 조성하는 윈주의료기기 산업단지 입주 신청 안내문을 전국 269개 의료기기 생산업체에 발송했다. 산업단지는 개보수비 15억원과 부지매입비 32억원 등 모두 47억원을 들여오는 8월초쯤 개장할 예정이며 모두 23개업체의 입주가 가능하다. 의료기기생산업체나 신규창업자 가운데 분공장 설치나 이전을 원하는 국내업체에는 연간 평당 7만8,000원의 저렴한 임대료로 5∼20년,외국인투자기업에는 최고 50년까지 임대한다.입주업체에는 공장시설 저가 임대를 비롯,원스톱 행정서비스,연세대 의공학연구소의 기술지도,중소기업육성자금 지원,세제지원등 다양한 혜택을 줄 계획이다.
  • [金三雄 칼럼] 민주와 개혁은 양립되는가

    우리는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안고 있다.대표적으로는 고려시대의 묘청과신돈,조선 건국기의 정도전,중기의 조광조·율곡·정조,후기의 전봉준·대원군·고종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한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그러나 불행하게도 개혁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이들 중에는 국왕을 비롯한 권력자도 있고 학자와 개혁사상가도 포함된다. 개혁의 추진에 있어서 가장 무난한 방법은 권력자가 스스로 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다.이 경우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가능하다.두번째는 개혁사상가들의 뜻을 받아 권력자가 추진하는 옆으로부터의 개혁이다.상당한 불안과 정쟁의 요인이 따르는 방법이다.마지막은 개혁운동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혁명적 방법이다.자칫하면 내란 또는 정변으로 이어지고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①은 정조와 대원군,고종의 개혁정치를 들 수 있고 ②는 신돈,정도전,조광조,율곡 ③은 묘청과 전봉준의 경우를 든다. 묘청은 서경천도·칭제건원 등 획기적인 자주국가 건설을 주창하다가,신돈은 무신란과 원(元) 간섭기를거치면서 득세한 권문세족에 맞서 개혁작업을시도하다가,정도전은 신권론(臣權論)으로 집약되는 국정쇄신을,조광조는 훈구세력의 특권과 비리를 혁파하고 합리적이고 기능 위주의 관료체제 확립과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율곡은 10만 양병설 등 국방강화와 왕도정치를,‘탕평 군주’ 정조는 정치개혁을 총론으로 사회개혁과 경제개혁을 각론으로 하는 국정개혁을,전봉준은 척왜척양과 12개 폐정개혁,대원군은 서원철폐와 부패척결 등 갑오경장,고종은 황제권과 자위군대의 강화에 역점을 둔 광무개혁을 각각 추진했으나 대부분이 실패하거나 좌절되었다. 토인비는 문명이 발생-성장-쇠퇴-해체의 과정을 밟는다고 주장했다.왕조나국가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다.쇠퇴기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개혁이나 경장을 서둘러야 해체의 비극을 겪지 않게 된다. 고려가 신돈의 개혁정치를,조선조가 조광조와 율곡의,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봉준의 개혁요구만이라도 수용했다면 ‘해체’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30여년의 군사통치유산과 김영삼 정부가 남긴 국가부도위기 그리고 남북대결과 지역갈등구조 등 그야말로 쇠퇴 또는 해체기의 국정을 맡아 ‘제2의 건국’의 개혁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사 대부분의 개혁작업이 기득권 보수세력의 도전에 의해 좌절되었듯이DJ개혁도 이들에 의해 크게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현재의 기득세력은 친일세력으로부터 시작하여 역대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했거나 정경,정언유착을 통해 수혜를 받은 계층이다.이들은 국가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더 연연한다.때문에 개혁에 도전적이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 보수 기득세력은 또 그렇다 치자.입만 열면 개혁과 통일,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언론인·지식인,노동계는 어떤가.국난극복과 개혁의 당위보다는 지역,파벌,계층,집단이기주의를 우선한다.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쉽고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비판은 도덕성과 정당성에서 비롯된다.독재·부패정권에 협력하거나 기생해온 지식인·언론인들의 오늘의 비판자세는 어떠한가.최근 칼럼 미게재에 항의하면서 신문사를 떠난 한 언론인은 “포악한 정권에겐 비굴하고 온건한 정권 아래선 교활하다”고 토로하면서 “과거 정권 아래선 능동적으로 나쁜 짓 하던 언론이 이제는 매사를 트집잡고 비판해.집권세력을 보는잣대는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해.하고 있는 것의 ‘동기’,집권자의 ‘능력’을 정확히 판단해야지”라고 말했다.이런 언론인이 ‘국민의 정부’ 아래서도 설 땅이 없는 것이 우리 언론풍토이고 지성계이며 개혁의 딜레마이다. 민주주의와 개혁이 공존하기는 쉽지 않다.4·19후 장면 정권과 독일 바이마르 공화정이 이를 말해준다.DJ정부의 개혁작업이 주춤거리는 것도 반개혁 세력의 도전과 자율에 대한 악용에서 비롯된다. ‘자율’을 존중하되 악용·남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개혁이 요구된다.남한 180만 실업자,북한 300만 아사자를 둔 민족적 재앙과 문명사적 쇠퇴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의 네트워크가 시급하다.우리에겐 실패한개혁의 역사를 되풀이할 여지가 없다. 김삼웅 주필
  • 김형곤 모노드라마…”이번엔 정공법으로 권력풍자”

    개그맨 김형곤(39)에게 올해는 뜻깊은 한 해이다.숱한 유행어를 낳은‘회장님’이나 ‘탱자’시리즈 등으로 ‘시사 풍자’라는 독특한 장을 연 그는 올해 연기생활 20년째를 맞았다.그는 지난 세월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여부가 있겠습니다?!’라는 모노드라마를 16일부터 대학로 컬트홀 무대에 올린다. “모노 드라마라기보다는 ‘폭소 인생강좌’성격입니다.살면서 느낀 점을모아 방송에 못나간 내용을 중심으로 엮었습니다” 1,2교시로 나뉜 이 드라마의 1교시 주제는 ‘인생’이다.‘우리는 이런 대통령을 갖고 싶다’‘이혼하고 싶습니까?’등 6개 코너로 짜여졌다.2교시는주제인 ‘웃음’의 원리와 역사를 설명하면서 웃음이 건강의 지름길임을 알려준다. “정치와 성(性),웃음이 주된 이야기입니다.우리나라와 미국의 ‘전직 대통령 문화’를 비교하는 대목에선 철저히 비꼬고 하루에 251쌍이 이혼하는 결혼풍속도를 언급할 때는 적당히 야한 개그도 곁들일 겁니다” 늘 권력 풍자 코미디를 하면서도 ‘언저리’만 맴돈다는 평가가 있다고 지적하자 “이번엔 정공법을 구사하겠다”고 잘라 말한다. 이어 “다양한 통계자료와 과학적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 근거있는 웃음을 제공할 계획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웃음의 과학성을 이렇게 설명했다.“사람 몸에는 650여개의 근육이 있는데 인상을 찡그릴 때 50개가 사용되고 웃을 때는 231개의 근육을 움직입니다.결국 웃음은 ‘전신 운동’인 셈이지요” 김형곤은 르포작가 이근미에게의뢰해 이같은 관련자료를 뽑아 전부 섭렵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무대에 김형곤이 쏟는 공은 특별하다.대사를 코팅해 사우나에도 들고가 외웠다는 것이다. “7월11일까지의 서울공연이 끝나면 마차를 타고 3달 동안 전국 투어에 나설 겁니다.20명 정도가 모일 수 있으면 울릉도건 산골이건 가리지 않고 웃음을 ‘전도’하러 다닐 겁니다”.
  • 감귤·사과·배잎 진드기 기관지천식 유발

    감귤이나 사과,배의 잎에 기생하는 응애(진드기)가 기관지천식이나 알레르기성비염 등 알레르기 질환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서울대병원 내과 김유영 교수팀이 지난 97년 8월부터 감귤배 사과 농사 종사자들과 제주도 남제주군 초중고생 1만3,000여명에 대해 실시한 역학조사 결과 밝혀졌다.남제주군 초중고생의 경우 알레르기 원인으로귤응애가 집먼지진드기에 이어 두번째로 많았으며,그중 고등학생은 귤응애가 가장 많았다.또 기관지천식을 앓고 있는 배과수원 주변 거주자중 원인이 불분명한 사람의 상당수는 배에 기생하는 잎응애(점박이응애)때문이었으며,사과농사를 짓는 사람들중 천식과 만성비염 증상을 호소하는 주민중에서도 약30% 정도는 잎응애가 원인이었다.유럽에서 귤농장 주민들이 응애에 의한 알레르기 질환을 앓고 있다는 보고가 나온 적은 있으나 대규모 역학조사를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김유영 교수는 “수십만의 과수농사종사자와 과수원 주변의 일반인이 잎응애에 의한 알레르기 질환에 노출돼 있어 이에 대한 새로운 치료와 예방법 연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임창용기자
  • 50~60년대 한국멜로영화 회고전

    제2회 서울여성영화제의 개막을 앞두고 사전행사의 하나로 7∼9일 서울 예술의 전당 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국 멜로영화 회고전’이 열린다.회고전에는 50∼60년대의 한국멜로영화 6편이 상영된다.상영작은 ‘귀로’(감독이만희·67년작) ‘단발머리’(김수동·67년작) ‘애와 사’(최경옥·70년작) ‘자매의 화원’(신상옥·59년작) ‘성녀와 마녀’(나한봉·69년작) ‘속,벽속의 여자’(박종호·70년작) 등이다. 이어 영화제 기간인 18∼23일에는 행사장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학사기생’(김수용·66년작) ‘자유부인’(한형모·56년작) ‘김약국 집의 딸들’(유현목·63년작) ‘남편’(조문진·69년작) ‘미워도 다시 한번’(김수용·66년작) 등 5편이 추가 상영된다. 이들 멜로영화에는 문정숙(귀로),문희(애와 사),최은희(자매의 화원),남정임 및 고은아(성녀와 마녀) 등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들이 나온다. 영화상영 일정은. 영상자료원 7일 오후 2시 단발머리,4시 귀로 8일 오후 2시 자매의 화원,4시 애와 사 9일 오후 2시 (속)벽속의 여자,4시 성녀와 마녀 동숭홀 18일 오전 11시 김약국집의 딸들 19일 오후 6시30분 자유부인 20일 오후 1시30분 미워도 다시 한번 21일 오후 4시 학사기생 23일 오후 1시30분 남편 (02)-3476-0663
  • 윤석화 300회 장기공연 작품

    2일 산울림소극장 연습실에는 장문의 편지가 낭독되고 있었다.정통 연출을고집해온 임영웅씨와 스타 연극배우 윤석화가 다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고치고 다듬고 있다. 윤석화(44)는 시종 낮은 톤으로 ,철없지만 딸사랑은 남다른 35세 여가수 멜라니를 연기하고 있다.복잡다기한 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톤이다. “일부러 대사 다듬는 수준으로 절제하고 있습니다.다음 주부터 피치를 올릴겁니다”. ‘딸에게…’는 윤석화가 못잊을 작품.92년 3월 초연이후 신들린 연기로 화제를 몰고다니며 12월까지 300여회 장기공연했다.유학까지 미뤘다.우리 관람풍토에서는 이례적으로 ‘전원 기립박수’를 받은 감흥도 맛보았다. “‘신의 아그네스’지방공연이 지난 주에 끝나 녹초가 된 상태에서 평소에도 ‘혀가 돌돌 말릴’ 정도로 힘이 필요한 모노드라마를 옮기느라 힘이 듭니다.특히 나긋한 읊조림과 휘몰아 치듯 빨리 내뱉는 장면의 반복,멜라니의‘감정의 내재율’에 빠져드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거든요”. 얼굴엔 피곤기가 역력하다.하지만 그에겐프로에게서만 뿜는 특유의 근성이 묻어난다.세트로 돌아가 금새 일희일비하는 철없는 엄마 멜라니가 된다.편지를 읽다 눈물을 글썽거리는가 하면 어느새 경쾌하고 멋들어지게 한 곡을뽑아낸다. 무대생활 25년을 맞은 그는 이번 공연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배우 윤석화가 아니라 ‘인간 윤석화’로서 관객과 호흡한다는 기분으로편안하게 연기할 겁니다.25년이라면 연기생활의 한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번 무대로 ‘아직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 말없음표보다는 느낌표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놀드 웨스커가 쓴 이 작품은 가슴이 커져와 아프다고 호소하는 11세 딸에게 들려주는 인생이야기다.초연때와는 달리 이제 가정을 갖고 ‘거울 앞에돌아온’ 윤석화가 들려줄 편지에 임영웅씨가 거는 기대도 크다.“‘노래할수 있는 여배우를 위한,노래가 있는 다섯 대목의 연극’이란 작가의 설명이아니더라도 이 작품은 마치 윤석화를 위해 태어난 듯하다.어린 엄마가 아닌삶의 원숙미가 묻어날 것이다”.9일부터 7월4일까지.(02)334-5915李鍾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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