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 불발」이 교계에 남긴 교훈/정진홍(특별기고)
◎종교적 이기주의 벗고 자성계기로/경직된 신앙추구가 맹종·비상식 초래
이른바 휴거의 시한이 지났다.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우려하던 현상들도 나타나지 않았다.다행한 일이다.
물론 이 사건의 여진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다.특히 휴거의 일어나지 않음을 신비스러운 유예로 설명하든,자신들의 잘못된 예견으로 설명하든,준비되지 못했음에 대한 신의 또 한번의 은총으로 설명하든 그 집단 구성원이 경험했을 허탈과 절망,그리고 그 안에 잠재했을지도 모르는 분노의 정서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그들의 찢긴긴 가슴을 위로해주는 일이 그들의 가족·친구·이웃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새로운 책무가 되고 있다.
사회도 이제는 이 현상 때문에 일었던 긴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그 집단에 대한 질책과 정죄,호기심과 이상스러운 기대를 지니고 혼란스럽게 대응하던 분위기도 차츰 가라앉을 것이고,어쩌면 곧 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개개인의 미성숙,사회의 불안,그리고 종교의병리현상에 대한 성찰을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극히 당연한,그러나 이 시점에서 더할 수 없이 새삼스러운 과제에 봉착하고 있음을 단단히 유념하지 않으면 안된다.이 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한 많은 진단들이 유의미한 것들이었다면 이제 그 진단에 대한 처방을 신중하게,그리고 구체적으로 펴야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그 진단들 중에서 개개인의 인성과 관련지어 이 사태를 설명하려는 것은 그것이 집단적인 현상과 아울러 생긴 것임을 간과하는 위험이 있고,사회불안이 원인이라는 원론적인 진단은 책임주체를 모호하게 하는 알리바이 조작의 위험이 있다.그렇기 때문에 차제에 우리가 구체적으로,그리고 현실적으로 관심갖고자 하는 것은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의 자성과 새로운 자기개혁의 기대이다.
이를 위하여 다음의 몇가지를 들어 그 기대 내용의 일부를 담아보고자 한다.
우선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그 가르침 속에 담겨있는 반지성적 분위기를 지적할 수 있다.신비나 초월로 개념화될 수 있는 종교다움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순수한 또는 돈독한 신앙의 강조가 맹목성이나 편집증적인 태도를 부추기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을 언급하려는 것이다.양태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한 경향성은 기독교의 보수,진보 어느 진영에서도 감지될 수 있는 현상이다.아니,도대체 종교란 늘 그럴 수 있는 위험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음을 자의식으로 지니고 있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지상주의적인 태도의 심각성을 지적할 수 있다.물론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는 신학의 주장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현실적으로 오늘 우리 사회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로 등식화되고 있고,신에게 봉헌한다고 하는 것은 그대로 교회를 위한 봉헌과 등가화 하고 있다.이것은 신도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생활규범일 수도 있다.그러나 그것이 결과적으로 신과 교회의 우선순위를 도치시킨다든지 교회자체의 창조적 혁신을 불가능하게 하는 억압기제가 된다면 문제는 의외로 심각하다.
이밖에도 사랑이라든가 희생이라든가 하는 실천적 덕목이 자기집단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집단이기주의적인덕목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교회간의 경쟁,정통과 이단의 논의,타종교간의 갈등,자기집단의 이해와 관련된 사회문제에의 선택적 반응등은 그러한 문제가 빚는 우려할 만한 조짐들이다.
무릇 종교는 문제정황에서 비롯하는 것이다.그리고 해답의 상징체계로 사회와 문화 안에 현존한다.그러므로 종교는 의미의 원천으로,희망의 출구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종교도 예외없이 살을 에는 자기아픔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끊임없이 자신을 참회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기독교는 그럴 수 있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보여준 교회의 태도 곧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차별화 의도나 인색한 자기성찰이 불식되면서 이른바 휴거이후가 한국기독교의 새로운 태어남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