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옷’ 짓는 그녀… 엘리자벳 비극을 되살리다
뮤지컬과의 만남英서 ‘오페라의 유령’에 빠져 입문 “감동 주는 그런 옷 만들고 싶었다”2012년 ‘엘리자벳’ 초연부터 맡아‘엘리자벳’은 어떤 옷을 입나여성 의상 한 세트만 10가지 넘어깃털 100개로 만든 날개 두 달 제작고딕 장엄함과 절제된 세련미 섞어
인터뷰 내내 그의 손은 쉬지 않고 날개 표본과 디자인화를 매만졌다. “이런 디테일은 다 수작업이거든요. 한 땀 한 땀. 이 ‘한 땀’이라는 말의 무게가 지금은 더 무거워졌어요.” 수십년을 함께한 봉제 장인들이 80대에 가까워진 탓이다. 한정임(57) 의상 디자이너는 그 무거워진 한 땀들을 모아 새 옷을 짓고 있다.
오는 8월 16일 서울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엘리자벳’은 출연진부터 무대, 의상까지 대폭 바꾼 새 프로덕션이다. 2012년 국내 초연부터 의상을 책임져온 그는 그해 뮤지컬 어워즈 의상상을 안긴 자신의 옷들을 허물고 ‘죽음과 삶’이라는 콘셉트에 맞춰 다시 짓는 중이다.
변화의 중심에는 토드(죽음)가 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을 조명한 이 작품에서 토드는 자유를 갈망하는 엘리자벳을 맴돌며 죽음으로 유혹한다. 한 디자이너에게 토드는 답답한 황실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엘리자벳의 내면이기도 하다. 그 존재감을 또렷이 하고자 로맨틱한 결을 걷어내고 고딕의 장엄함에 절제된 세련미를 섞었다. 코트는 검은 색조로 어둠을 강조하고, 얇게 비치는 오간디에 어두운 그러데이션을 입혀 깃털을 빚었다. 깃털 조각 100여개를 모아 날개 하나를 만들면서 부피와 무게 실험에만 두 달이 걸렸다.
엘리자벳을 암살하고 극을 이끄는 해설자 루케니는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에 놓인” 경계인이다. 그간 체포 당시의 줄무늬 재킷을 고증했지만 이번엔 가죽으로 거친 면모를 살렸다. 토드(카이·서경수·고은성)와 루케니(박은태·강홍석·노윤)는 배우별 체형과 스타일에 따라 셔츠 깃과 앞섬 노출, 바지통을 달리했다. “루케니만의 독립적인 색을 줘서 엘리자벳, 토드와 각자의 콘셉트가 명확해지게 했다”는 설명이다.
물량도 상당하다. 여성 의상 한 세트는 속바지부터 페티코트, 드레스, 모자와 신발까지 10가지가 넘고, 엘리자벳 역은 15~16벌을 갈아입는다. 페티코트조차 시대별 버슬(여성복의 치마를 부풀리는 기능성 속옷) 변화에 맞춰 6종을 직접 짓는다. 페티코트가 좌우하는 실루엣의 변화가 곧 황후의 일대기이기 때문이다.
일본 문화패션대학을 나와 입사 2년 반 만에 수석 디자이너에 올랐지만, 매출에 쫓기는 삶에 회의를 느껴 사표를 내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만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인생을 바꿨다. ‘저런 무대의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2008년 ‘실연남녀’로 무대의상에 입문한 뒤 ‘모차르트!’, ‘레베카’, ‘프랑켄슈타인’, ‘벤허’까지, 잘나간다는 작품 대부분에 그의 옷을 입혔다.
세상이 급변하는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손수 염색하고 도안과 문양을 직접 그린다. 봉제 장인은 줄고 젊은 세대는 이 ‘중노동’판에 들어오지 않지만, 그런 속에서도 품질에 관한 한 타협은 없다. “내가 이곳에 발을 들인 이유가 있잖아요. 관객의 기대감, 내 책임감, 그게 계속 붙들어요.”
그는 그래서 이 세계를 ‘늪’이라 불렀다. “하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음악이 나오면 가슴이 뛰어서 놓질 못한다”며 웃었다. 다 쏟아부으니 작품이 끝나면 허탈함도 크다. 그 구멍을 메우려 백스테이지를 유화로 그리며 남기고 있다.
옷을 짓기까지 고되고, 공연 중엔 마음을 졸이고, 종연하면 허탈한 삶을 이야기하며 그는 “생명이 줄어든다”고 했다. 그러나 좋은 피팅을 마친 날은 다르다. “배우한테 입혔는데 정말 예쁘고 잘 맞으면, ‘야, 오늘 생명이 늘었다’ 느껴요.” 죽음의 옷을 짓는 사람은, 그렇게 매일 조금씩 생명을 늘려가며 8월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