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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 장군 정신을 부산정신으로...27일 부산대첩 기념사업회 창립 총회 개최

    부산에서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승화시키고자 다양한 사업이 펼쳐진다. 부산대첩기념사업회는 이순신 장군 탄생일인 이달 28일을 하루 앞둔 27일 오전 11시 30분 부산롯데호텔 3층 크리스털 볼륨에서 창립총회를 연다고 17일 밝혔다. 이날 창립총회에는 준비위원장인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 부산대첩 기념사업회 고문단,서병수 부산시장,오거돈 전 해양부장관 및 회원 2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부산대첩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지금의 부산항 북항 앞바다에서 왜선 140여 척을 격파한 부산대첩의 정신을 되살리고 부산정신으로 승화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 부산대첩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21세기 동북아 해양수도 부산을 대첩 청신으로 되살리고 이순신 정신을 부산정신으로 승화시키고자 시민 주도의 다양한 사업을 전개한다 또 부산시민의 날인 10월 5일(양력 기준)이 부산대첩 승전일임을 알리고 부산대첩 지역 및 유적지를 역사문화 공간으로 복원하는 사업도 펼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시대정신을 조명하고 동북아 해양수도 부산의 미래가치를 제시할 방침이다. 앞서 기념사업회는 지난해 9월 27일 승전 425주년을 기해 발기인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 1회 부산대첩 기념행사를 가졌다.오는 27일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부산대첩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부산대첩은 1592년 음력 9월 1일 470여 척의 왜선과 군인 8000여 명이 포진한 부산포에 이순신 장군이 육·해군을 이끌고 나타나 치밀한 전략으로 왜선 140여 척과 왜군 5000여 명을 격파한 전투이다.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승전장궤에도 “장수의 공을 말할 때 부산대첩 만한 것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당시 임진왜란 전사에 중요한 승전이다. 이를 기념해 부산시는 1980년 이순신 장군의 부산대첩 승전일인 10월 5일(양력 기준)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해 매년 이를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부산대첩 정신이나 가치는 퇴색한 채 시민을 위한 축제일 정도로 인식되고 부산대첩의 역사적 의의와 이를 조명하는 작업이 미진했다는 지적이다. 김종대 창립위원장은 “부산시민의 날은 나라를 지켜낸 자랑스럽고 역사적인 날이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부산대첩의 역사적 의미를 공유하기 바란다”며 “부산대첩을 자랑스러운 역사적 문화유산으로 복원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일제 만행 폭로한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 48주기 추모식 열려

    일제 만행 폭로한 ‘34번째 민족대표’ 스코필드 박사 48주기 추모식 열려

    3·1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면서 ‘34번째 민족대표’로 알려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박사의 48주기 기념식이 12일 열렸다. 스코필드 박사는 독립운동에 이바지하는 등의 공로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다. 서울대 주최로 수의과대학 스코필드홀에서 진행된 추모기념식에는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명예회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성낙인 서울대 총장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기념식에 앞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스코필드 박사 묘역에 참배했다. 정 명예회장은 “3·1운동의 기록자와 홍보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스코필드 박사를 한국사회는 민족대표 33인에 이어 34번째 민족대표라 부른다”면서 “약자에 대한 배려, 정의감, 불의와 부패에 대한 투쟁은 3·1운동을 겪으며 스코필드 박사가 다듬어 온 소중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성 총장은 “이번 추모기념식은 스코필드 박사의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나누는 자리”라고 말했다. 성 총장은 관악구에 사는 중학생과 서울대 수의과 재학생들에게 스코필드 장학증서를 전달했다. 김 위원장은 ‘21세기의 스코필드를 향하여-공정거래위원회의 역할과 과제’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펼쳤다. 1916년 선교와 교육을 위해 한국에 온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탑골공원과 시청 앞에서 벌어진 3·1운동과 경기 화성시 제암리 학살현장을 사진으로 담아 전 세계에 알렸다. 1958년 한국에 돌아온 박사는 1970년 서거할 때까지 서울대 수의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고아와 어려운 학생을 돌보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사설] 새 광화문광장, 교통·녹지 문제 깊이 고민해야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어제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의 차도를 없애고 광화문광장을 지금보다 4배 가까이 확장하는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기본계획안’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광화문 앞 월대(月臺·궁전 앞에 놓고 각종 의식을 치르던 넓은 단)를 복원해 경복궁의 역사성을 복원하고 광장을 차량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광화문광장 확장 방안은 서울시가 2015년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다 교통난과 청와대 경호 문제로 주춤했다가 지난해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청와대 집무실 광화문 이전과도 맞물려 있다. 확장 방안은 지난해 대선 직전인 4월 초 박원순 서울시장이 영국에서 언론에 공개했었다. 그 뒤 잠잠하다 지방선거를 불과 두 달 앞두고 3연임에 도전하는 박 시장이 직접 발표한 것은 개운치 않다. 야당에서 즉각 선거용이라며 비판할 만하다. 역사를 살리고 시민들에게 광장을 되돌려 주겠다는 취지와 계획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2015년부터 줄곧 제기됐던 교통 체증과 그로 인한 시민 불편에 대한 우려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새로운 광화문광장이 진정한 시민들의 광장이 되려면 다음 몇 가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먼저 교통 체증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서울시는 기존의 세종대로 10차로를 6차로로 줄이는 대신 새문안로5길을 왕복 2차로에서 6차로로 확장해 통행량을 우회시키겠다고 밝혔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노선에 광화문을 추가하는 방안을 정부에 제안하겠다고도 한다. 하지만 실현 여부가 불투명하고 근본적인 대책이 되겠느냐는 지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광화문광장과 세종대로와 같은 수도 서울의 대표 거리의 ‘리모델링’은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신중하게 추진돼야 한다. 현재의 광화문광장은 오세훈 시장 때인 2009년 예산 722억원을 들여 완성됐다. 불과 10년 전 일이다. 8월 설계공모 전까지 토론회와 주민설명회를 갖겠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여론 수렴이 충분히 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또한 녹지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시멘트 광장의 조성이 아니라 시민들이 쉴 공간이 돼야 한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계획과도 충분히 조율해 일을 두 번 해 예산을 낭비하는 사태는 없어야 한다.
  • 운암 김성숙선생 49주기 추모재

    운암 김성숙선생 49주기 추모재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의 49주기 추모재가 오는 12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회장 함세웅) 주최로 오전 11시 열린다. 이번 추모재에서는 운암선생 유족, 관련단체장, 회원 등 500여명이 참석하며 개식, 국민의례, 운암 김성숙 선생 약사보고, 내빈추모사, 합창단 추모곡, 헌화 및 분향, 조총발사 및 묵념, 그리고 운암 김성숙 선생 묘소 참배 순서로 진행되며 군악대 반주에 맞춰 부천 석왕사합창단의 추도곡, 역사어린이합창단의 공연으로 진행되며 국방부의장대, 수도방위사령부 군악대가 참여한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나 19세에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했으며, 1919년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의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운암 김성숙선생은 조선의용대, 일제 주요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의열단에 가입하고 ‘반역사’(反逆社)라는 이름의 학생단체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을 배후 조종하며 항일투쟁 선봉에 서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기념사업회에 전달한 추도사에서 “다툼을 그치고 서로를 존중하며 대한민국의 앞길을 여는 일이야말로 운암 선생의 고귀한 뜻을 받드는 길일 것입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는 이 봄에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한길을 걸으셨던 선생의 가르침이 우리와 늘 함께하길 바라는 절실함으로 삼가 분양합니다”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동백꽃이 고결하고 어여쁘니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동백꽃이 고결하고 어여쁘니

    올해 제주 4·3이 70주년을 맞는다. 그날의 공포와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생존자들도 사실상 마지막 생애 주기를 맞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래서 70주년을 맞아 제주 4·3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증언 본풀이 마당, 캘리그래퍼 특별전, 네트워크 프로젝트, 4·3 평화기행 등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있다. 특히 ‘동백꽃을 달아주세요’라는 행사를 통해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 간 4·3 영혼들을 기억하기 위해 동백꽃을 디자인해 만든 4·3 배지를 다는 의미 있는 릴레이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필자도 애월고등학교 미술부 학생들이 디자인한 4·3 동백꽃 배지를 4ㆍ3 희생자 및 유족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가슴 한편에 소중하게 달고 있다. 제주도 동백꽃은 맵찬 제주 특유의 겨울바람을 견뎌내선지 어느 섬의 것보다도 붉다. 그런데 옛 어른들은 이 동백꽃이 봄에 한 번에 다 피면 풍년이 들고, 두 번에 나누어 피면 평년작이고, 세 번 이상 피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70년 전 제주 섬에서는 무고한 양민 3만여명이 죽어갔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동백꽃이 세 번 이상 계속 피면서 피로 젖은 세월을 예고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즘 성당에 갈 때마다 천주교 제주교구 주보에 실린 강우일 주교님의 ‘4·3을 생각하다’라는 연재물을 읽는다. 주교님은 1944년과 1946년의 제주도 인구가 일본에서 귀향한 도민들 때문에 21만명에서 27만명으로 급등했지만 1944년에 26만석이던 보리 수확이 대흉년으로 1946년에 8만석밖에 안 되었던 것도 4·3을 야기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로 미루어 당시 제주 섬에는 동백꽃이 세 번 이상 피었음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을 동백꽃이 갑자기 떨어지는 일과 닮았다고 하여 춘사(椿事)라고 한다. 그래서 동백꽃은 불길함과 급사(急死)를 상징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유배인들이 가장 싫어했던 꽃이 동백꽃이기도 했고, 어떤 유배인은 유배지 주변의 동백나무를 모두 잘라 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제주 4·3이야말로 춘사였음이 틀림없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규모 학살로 3만여명이 죽어갔으니 춘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기에 제주 4·3의 상징으로 동백꽃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동백꽃은 불길함과 급사의 상징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전통 혼례식에서는 동백나무를 대나무와 함께 항아리에 꽂아 놓는데 동백나무 모양이 단정하고 열매가 많이 열려 가문과 자식의 번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임신이 어려운 여성의 볼기를 동백나무 가지로 치면 아기를 낳는다는 속신도 있었고, 귀한 사람을 맞이할 때는 동백꽃으로 꽃꽂이를 한다고도 했다. 한편 꽃이 시들지 않고 통째로 떨어지기 때문에 동백꽃은 절조와 의지를 상징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제주 4·3의 상징을 동백꽃으로 삼은 이유가 비단 불행했던 춘사(椿事)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제주 도민의 절조와 의지를 말하고 싶고 나아가 자손만대 제주도의 번창을 천명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4·3 동백꽃은 제주 4·3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일찍이 성삼문은 동백꽃을 두고 ‘고결하기는 매화와 나란히 하고(高潔梅兄行) 어여쁘기는 더러 그보다 낫구나(嬋娟或過哉)’라고 했는데 70주년을 맞는 제주 4·3의 의미와 정신 또한 상징인 동백꽃처럼 그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여순사건, 4·3사건 처럼 풀어지나

    여순사건 발발 70주기인 올해 여순사건 지원 조례가 여수시의회에서 통과됐다. 제주도 4·3사건 처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등을 위한 위령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지 주목된다. 3일 여수시에 따르면 여순사건 위령사업 지원 조례는 지난달 29일 제184회 여수시의회 임시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정식명칭은 ‘한국전쟁 전후 지역민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다. 시는 1억 46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해 지역민의 명예회복과 상생·화합을 위한 7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기념사업은 모든 유가족과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가칭 여순사건 명예회복사업 시민추진위원회’가 주관한다. 매년 개최되는 추모행사도 민간인 희생자 유족과 군·경 희생자 유족이 용서와 상생의 분위기 속에서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방침이다. 이날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광장에 마련된 ‘제주4·3과 여순항쟁 희생자 70주기 합동분향소’에 김유화 여수시장 예비후보가 찾아 영령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전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여수지부가 설치해 시민들을 맞고 있다. 김 후보는 “여순사건도 ‘4·3사건’처럼 풀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며 “그동안 국회에서 수차례 무산됐던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돼 희생자와 가족들의 아픔이 조속히 치유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중현 민예총 여수지부 사무처장은 “지역의 수많은 정치인과 지도자들이 여전히 여순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밝혔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편히 쉬세요”…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 영면

    “편히 쉬세요”…위안부 피해자 안점순 할머니 영면

    지난달 30일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안점순(90) 할머니의 발인이 1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불교식 발인제는 가족과 친지,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진행됐다. 이후 수원 승화원 추모의 집에 안치된 안 할머니는 한 많은 생을 뒤로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지난달 30일 세상을 떠난 안 할머니는 1928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1941년 중국으로 끌려가 1945년까지 위안부 피해를 봤다. 1946년 귀국한 안 할머니는 강원도와 대구 등에서 살다가 58세이던 1986년부터 수원에서 거주했다. 1993년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안 할머니는 2002년부터 본격적인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피해를 증언했다. 수원시는 할머니의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주고자 할머니의 삶을 다룬 헌정 영상 ‘안점순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제작,지난 8일 공개하기도 했다. 안 할머니는 당시 영상에서 “억만금을 우리한테 준들 내 청춘이 돌아오지 않는데,가해자(일본 정부)는 자신의 죄를 모른 채 당당하고,피해자인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다”며 일본의 직접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올해 안 할머니와 1월 5일 임 모 할머니,2월 14일 김모 할머니 등 3명이 별세했다. 이제 등록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9명으로 줄었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올 들어 벌써 세 분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떠나보내게 되어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라며 “여성가족부는 고(故) 안점순 할머니를 포함한 모든 피해자분들의 상처치유와 편안한 노후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명예와 존엄회복을 위해 기념사업을 확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4·3은 진행형”… 치유 버스킹 열다

    동백꽃 배지 달기 캠페인 역사박물관 4·3 역사전 개최 제주 4·3사건 70주년이 임박하면서 제주도는 물론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전시회, 버스킹(길거리 공연) 등 관련 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제주도(지사 원희룡) 서울본부는 30~31일 양일간 ‘제70주년 제주 4·3 사건 알리기 버스킹’을 여의도와 반포한강시민공원에서 각각 하루씩 개최한다고 29일 밝혔다. 서울본부 관계자는 “4·3사건은 제주도민이 화해와 상생으로 과거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평화와 인권의 미래 가치를 키워나가는 현재진행중인 역사”라면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작은 행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버스킹에서는 민요·국악·연기자 등 10~15명이 가야금, 대금, 피리 연주와 타악연기를 함께 선보인다. 주제는 ‘다시 피는 동백꽃’으로 잡았다. 동백꽃은 4·3사건 당시 희생된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갔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4·3사건의 상징이다. 이날 공연과 함께 서울본부는 동백꽃 배지도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다. 서울본부는 ‘동백꽃 배지 달기 릴레이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까지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김덕룡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 1000여명이 참여했다. 서울본부 관계자는 “잊혀져가는 4·3사건을 기억하려는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30일부터 아름다운 섬 제주에 서린 아픔과 상처를 느낄 수 있는 특별전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를 개최한다. 정부에서 채택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의 내용과 기초자료에 근거해 기획한 이번 전시에서는 4·3사건 관련 사료, 희생자 유품, 회화, 판화, 설치작품 등 200여점이 전시된다. 특히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마산형무소 수용자 신분장’, ‘군법회의 명령’, ‘제주 4·3 특별법 대통령 서명문’ 등 국가기록물 원본 9건을 볼 수 있다. 기록물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새달 10일까지만 원본을 전시하고 11일부터는 복제본으로 대체된다. 6월 10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그날, 잊으려 할수록 붉게 피어난다

    그날, 잊으려 할수록 붉게 피어난다

    흰 눈 위로 피 한 방울이 뚝 떨어집니다. 피는 얼음 결정을 따라 빠르게 번져 갑니다. 그 모습이 모가지 꺾어 떨어진 동백꽃을 닮았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흰 눈 위에 떨어진 피에서 혹독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길어 올렸습니다. 동백꽃은 그렇게 ‘제주 4·3 사건’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지요. 한 설문조사에서 4·3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3분의1, 관심 없다는 이는 절반을 넘었다고 합니다.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더욱 기억에서 멀어진 것이 4·3 사건입니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과거가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사과할 건 사과하고 청산할 건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사악하고 검은 아가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번 여정은 4·3 사건을 따라가는 것으로 꾸렸습니다.모처럼 제주까지 갔는데 상처의 흔적만 보듬고 오라는 말이냐고 힐난할 수 있겠습니다. 한데 앞서 결론을 밝히자면 손해 볼 일은 전혀 없습니다. 단언컨대 처음 제주를 방문한 이라도 그렇습니다. 4·3의 무대는 아름다운 제주의 또 다른 면일 뿐입니다. 우리가 무심했을 뿐 명소라 알려진 곳에, 혹은 그 주변에 없는 듯 있었습니다. 제주의 4월을 두고 흔히 ‘침묵의 봄’이라고 합니다. 북촌리 ‘아이고 사건’에서 보듯 눈물마저 죄가 된 시절엔 누구나 말을 아껴야 했으니까요. 피 끓는 포한과 바닥 모를 체념의 끝은 침묵이었던가 봅니다. 그러니 입은 있으되 말하지 못했고, 기억은 선연하되 한사코 떨어내려고만 했겠지요. 제주엔 진작 제비가 왔습니다. 반팔 옷차림으로 훌훌 싸돌아다닐 만큼 기온도 포근해졌습니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시립니다. 물론 스스로 삭이겠지요. 그래도 주변의 위로가 더해지면 생각보다 빠르게 녹을 수도 있을 겁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제주 4·3 평화기념관’에서 본 한 장의 지도였다. 제주 전체를 행정 구역에 따라 나눈 뒤 색을 입혔다. 공통적인 건 붉은빛 일색이라는 것. 구역에 따라 빨강과 분홍 등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체가 붉었다. 이는 ‘제주 4·3 사건’ 당시의 피해 정도를 표시한 지도다. 붉은빛일수록 더 많은 주민이 희생됐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4·3의 광풍에서 온전했던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는 게 지도에 담긴 의미다.●섬뜩한 진실과 마주한 ‘4·3 평화기념관’ 4·3 여정의 첫걸음은 제주 4·3 평화기념관이다. 4·3 사건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실 제주 사람들은 ‘4·3 사건’이란 이름 자체에 불만이다. 지나치게 ‘사실’(史實)에만 충실해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처럼 의미와 가치가 담긴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념관의 관람 동선 첫 코너에 ‘백비’(白碑)를 뉘어 놓은 건 그 때문이지 싶다. 백비는 아무것도 적지 않은 비석이다. 제주 사람들의 뜻은 간명하다. 언젠가 4·3 사건이 가치와 의미에 부합하는 이름을 얻게 될 때 이 비석에 새겨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다. 기념관 안엔 4·3 사건과 관련된 각종 기록과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육지부’에서 ‘관광차’ 온 이들이라면 담기 버거울 정도의 섬뜩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기념관 밖은 평화공원이다. ‘비설’(飛雪)이란 이름의 모녀상과 제단, 1만 4000여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각명비 등이 조성돼 있다. 공원 가장 위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석은 꼭 찾길 권한다. 4·3 희생자 중 행방불명인 3800여명의 이름을 새겨 표석으로 세웠다. ‘육지부’의 형무소로 끌려가 못 돌아온 이도 있고, 바다에 수장됐거나 여태 제주 땅 어딘가에 묻혀 있는 이도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살아서 어머니의 품에 안기지는 못했지만, 이름이나마 한라산 아래 산담(무덤을 둘러친 돌담)에 안겼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이념으로 시작해 희생으로 끝난 섬의 눈물 이쯤에서 4·3 사건에 대해 개략적이나마 살피자.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제주 시내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집회였다. 경찰이 탄 말의 발굽에 어린아이가 차였다. 한데 기마경찰은 무심히 지나갔고, 이를 본 군중이 돌을 던지며 경찰을 쫓았다.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미 군정에서 사태파악에 나섰다. 미 군정의 조사 보고서는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적었다. 제주가 ‘레드 아일랜드’(빨갱이의 섬)라 규정되는 순간이다. 이어 좌익 색출을 명분으로 서북청년회와 공권력의 탄압이 자행됐다. 이에 맞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에 나섰다. 이후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제주는 아비규환의 공간이 됐다. 물론 4·3 사건의 성격을 두고 여태 논란은 있다. 중요한 건 당시 제주도민의 9분의1에 달하는 희생자다. 최대 3만명에 이르는 희생자 가운데 목숨을 걸 만큼 정치적 신념을 가졌던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희생자 가운데 33%는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였다. 충돌의 배경은 이념이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었던 셈이다. 제주 4·3 사건을 이념보다 인권과 인간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3 여정에서 가장 흔히 접하는 단어는 ‘예비검속’이다. 일종의 블랙리스트다. 사상이 의심스러운 이들의 목록을 작성한 뒤 전쟁 등 유사시에 잡아들이거나 상황에 따라 즉결처형했다.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인근의 섯알오름이 대표적이다. 1950년 250여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총살당한 곳이다. 군이 출입을 통제한 탓에 1956년에야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132구의 시신은 인근의 백조일손 묘역에 안장됐다. 묘역의 이름은 누군지 알 수 없는 백여명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한날한시에 올려 한 자손이 된다는 뜻이다.●아이의 작은 묘탑에 놓인 애달픈 장난감 북촌리 너븐숭이를 찾으면 코끝이 찡해진다. 어린아이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봉분은 작다. 면적도 작고, 봉분을 둘러싼 산담도 작다. 봉분은 모두 20여기 정도 되는데, 그중 최소 8기는 4·3 때 목숨을 잃은 아이의 묘라고 한다. 묘지 앞엔 검은 돌로 만든 작은 탑이 세워져 있다. 돌과 돌 사이엔 동백꽃 등을 꽂아 뒀다. 미니어처 자동차도 눈에 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타요 버스’다. 4·3 당시 비운의 별이 된 아이가 타요 버스를 알 리 없다. 그래도 아이는 아이일 것이다. 늦은 밤이면 봉분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꽂아 둔 사탕을 먹고 장난감도 갖고 놀 것 같다.●비행기 소리로 덮인 최대 학살터 ‘정뜨르’ 북촌은 이른바 ‘아이고 사건’이 벌어진 곳이다. 1954년 1월, 너븐숭이 주민 가운데 일부가 4·3 사건을 추모하며 설움에 북받쳐 울다가 경찰에 치도곤을 당했다. 이게 ‘아이고 사건’이다. 당시엔 이처럼 울음마저 죄가 됐다. 정뜨르는 어딜까. 4·3 당시 최대 학살터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4·3 지도에도 틀림없이 나와 있다. 한데 도두항 주변을 오가는 주민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고개를 외로 꼬기 일쑤다. 정뜨르는 지금의 제주공항이다. 바로 눈앞에 두고도, 너무 커서 보이지 않았던 거다. 손바닥 선인장 군락(천연기념물 429호)으로 이름난 월령리엔 고 진아영 할머니 집이 있다. 진 할머니는 ‘무명천 할머니’로 더 잘 알려져 있다. 4·3 당시 총탄에 턱을 다쳐 평생 무명천으로 턱 주변을 두르고 살았다. 작은 단칸방 한 켠에 진 할머니의 영정이 남아 있다. 글 사진 제주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4) →가는길:4·3 사건 70주기를 앞두고 제주 곳곳에서 동백 배지달기 등 다양한 추념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이번만은 올레길에서 벗어나 4·3길을 따라 걸어 보는 것도 좋겠다. 6~7㎞에 이르는 코스를 2시간 정도 걸으며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추천한 코스는 모두 4개다. 제주를 동서남북으로 나눠 돌아볼 수 있게 했다. 미리 신청하면 ‘4·3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면서 걸을 수 있다. 4·3 콘텐츠 관련 내용은 제주관광공사 홈페이지(www.visitjeju.net)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4·3 길을 걷다’란 지도도 꼭 챙기는 게 좋다. 길잡이로 큰 도움이 된다.→맛집 : 도두 해녀의 집(743-1500)은 전복미역국 등을 잘한다. 주방의 손길보다 신선한 재료가 맛을 낸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음식에 별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담백하고 깊은 맛이 난다. 정뜨르(제주공항) 인근에 있다. 커피 한 잔 마시겠다면 쉴만한 물가(796-3808)가 괜찮다. 월령리 무명천 할머니집 앞에 있다. 커피 맛은 옅은 편이어도 업소 앞 풍경은 매우 짙다. 명진전복(782-9944)은 전복돌솥밥 등으로 소문난 집이다. 식사 때가 아니더라도 15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명소 반열에 올랐지만 맛은 여전히 예전처럼 좋은 편이다. 다랑쉬 오름과 가깝다.
  • “리멤버 1987”…이한열 티셔츠로 선배 기리는 후배들

    “리멤버 1987”…이한열 티셔츠로 선배 기리는 후배들

    李 열사 옷 문구만 바꿔 제작 50장 완판… 전액 장학금 기부 “6월 항쟁 때 역할 기억했으면” “영화 ‘1987’로 6월 민주항쟁과 이한열 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노란 리본’을 보며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듯, 이 열사를 기리는 아이템을 제작하면 추모 열기가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연세대 경영학과 학생 제갈송(20)씨는 지난해 12월 ‘1987’을 본 순간부터 1987년 6월 9일 민주화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과 선배 이한열 열사를 기리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창업에 큰 관심이 없었던 새내기였지만 영화를 보자마자 학내 창업동아리 ‘연희동장사꾼’의 회장 유창현(22)씨에게 곧바로 연락했다. 유씨는 수익 창출보다는 사회공헌에 방점이 찍힌 후배의 아이디어가 기존 동아리 활동과는 다르다는 점에 흥미를 느끼고 의기투합했다. 이렇게 탄생한 프로젝트가 바로 ‘리멤버 1987 맨투맨 프로젝트’다. 이 열사가 사고 당시 입었던 ‘맨투맨 티셔츠’(팔목이나 허리 부분을 신축성 있는 원단으로 처리한 티셔츠)를 판매해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한다. 유씨는 “이 열사를 오랫동안, 그리고 가까이서 기릴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물품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이한열기념사업회에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수익금을 이한열 장학금에 기부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사업회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난 14일 주문 신청을 받기 시작한 맨투맨 티셔츠는 일주일 만에 애초 계획한 50장이 판매됐고, 마감 기한인 25일까지 30장이 추가로 예약됐다. 프로젝트는 학내외에서 주목을 받으며 성공리에 마무리됐지만, 두 사람은 주문 제작을 위한 최소 수량인 50장도 맞추지 못할까 걱정했다. 30년 전 연대 경영학과 과티(단체복)였던 맨투맨 티셔츠가 지금의 감각과는 맞지 않아 ‘과연 요즘 학생들이 사서 입고 다닐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 열사가 입었던 티셔츠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오되, 문구만 ‘YONSEI UNIV. BUSINESS ADMINISTRATION’(연세대 경영학과)에서 ‘WE STAND BY YOUR SIDE remembering 1987’(1987년을 기억하며 당신과 함께하겠다)로 바꾸기로 했다. 제갈씨는 “이 열사가 최루탄에 맞고 동료의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은 아직도 국민의 뇌리에 각인돼 있을 뿐만 아니라, 6월 민주항쟁과 민주화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며 “이를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사진 속 티셔츠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유씨는 “처음에는 주로 연대생들이 주문했지만, 점차 다른 대학 재학생과 고등학생, 일반인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분들이 공감해줘 뿌듯함을 느꼈다”면서 “의미 있는 리멤버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사업회와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부고]이원범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별세

    ▲이원범(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태화물산 명예회장)씨 별세 병세(전 한국델파이 부사장)씨 부친상, 김성진(샘터 고문)씨 장인상=23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5일 오전 8시 (02)3410-6905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평생 ‘울울한 삶’을 산 지식인… 생육신으로 절개를 지키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평생 ‘울울한 삶’을 산 지식인… 생육신으로 절개를 지키다

    생후 8개월 만에 글을 알고 세 살에 시를 짓고 다섯 살 때 ‘중용’, ‘대학’에 통달해 신동으로 불렸던 사람. 이런 기이한 재주를 세종 임금이 전해 듣고 직접 불러 시험하고 ‘뒷날 크게 쓰겠노라’ 다짐했던 사람. 그러나 평생 울분과 방랑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충청도 허름한 절간에서 생을 마감했던 사람. 우리 한문소설의 명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다.그가 쓸쓸한 삶을 살게 된 계기는 거듭된 가정사의 참극으로 지쳐 가던 중 접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이었다. 불의의 소식을 들은 젊고 순수했던 21세 김시습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몇 날 며칠을 통곡했다. 그러다 돌연 서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나서 승려의 행색으로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영월로 쫓아 보낸 뒤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의 반인륜적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던 끝자락,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한동안 지내며 금오신화를 지었다. 그리고는 “뒷날 반드시 나, 김시습을 알아줄 자가 있으리라”면서 그 책을 석실에 감췄다. 당대 현실과 화해할 수 없던 자신의 고뇌, 그리고 한번도 펼쳐보지 못했던 자신의 꿈을 기이한 이야기에 은밀하게 담아두었음을 짐작게 하는 일화이다. 그런 점에서 금오신화는 울울한 삶을 살아간 한 중세 비판적 지식인의 소설적 독백이라 일컬을 만하다. 우리는 지금 그의 바람처럼, 그의 이름과 삶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산사를 전전하던 자의 자기 초상 평생 전국을 전전하며 지내던 김시습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런 최후는 자신이 젊은 시절 썼던 ‘금오신화’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너무도 닮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도 모두 깊은 산속으로 홀연 자취를 감춰 버리거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는데, 김시습은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궁벽한 산사에 몸을 의탁하고 지내며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직접 그림으로 그린 뒤, 거기에 다음과 같은 찬시를 적어두기도 했다. 나의 초상에 쓰다(自寫眞贊) 俯視李賀(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 볼 만큼 優於海東(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譽(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의이치지) 너를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구학지중) 이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흔히 이백을 ‘적선’(謫仙)으로 부르듯, 당나라 시인 이하는 ‘귀재’(鬼才)로 불리던 천재 시인이었다. 김시습은 찬시 첫머리에서 당시 사람들이 자신을 ‘오세 신동’으로 부르며, 그런 이하와 견주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아름다운 과거였다. 하지만 이하가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처럼 그 자신도 뛰어난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세상에 한번도 쓰이지 못한 자신의 현실에 몸서리치고 있다. 깊은 자괴, 아니 자조와 자기 경멸이 뼛속까지 배어들었다. 실제로 김시습의 문집 ‘매월당집’에는 이런 소외된 자의 울울한 심경을 담아낸 작품이 많다.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이라고는 오로지 시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의 “마음이 세상살이와 어긋나기만 하니, 시를 빼놓으면 즐길 것이 없다네(心與事相反, 除詩無以娛).”라는 고백은 결코 허투가 아니었다. 불의에 영합하지 않고 평생 방외인, 곧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는 것은 혹독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대가를 치러낸 덕분에 지금 우리는 그를 생육신(生六臣)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서울로 복귀한 또 다른 삶의 면모 김시습을 기억하는 우리 대부분은 머리를 깎고 승려의 복색을 한 채, 평생 산사를 전전했던 행적만을 주목한다. 그러나 김시습은 삶의 가장 중요한 장년기에 서울의 저잣거리를 누비며 다니기도 했다. 그가 38세 때인 성종 3년(1472년)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 49세 때인 성종 14년(1483년) 다시 관동으로 떠날 때까지다. 이 12년 동안 수락산에 거처를 정해 놓고 종종 도성으로 내려와 당대 인물들과 교유했다. 어린 시절 교분이 있던 서거정, 김수온과 같은 고관대작도 만났지만, 진정 마음으로 교유한 부류는 자기보다 스무 살쯤 어린 젊은 선비들이었다. 그들 중 가장 절친했던 남효온은 그런 사실을 ‘사우명행록’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사람들은 김시습의 행동을 위태롭게 여기고는 교유하던 자들이 모두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자 홀로 저잣거리의 미치광이 같은 자들과 놀다가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자기도 하고, 바보처럼 웃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뒤에 설악산에 들어가기도 하고 춘천 산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에 일정함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 종말을 알지 못했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이정은, 우선언, 안응세 그리고 나 남효온이다.” 남효온은 김시습이 영의정 정창손의 행차를 만나자 길거리에서 “너 같은 놈은 벼슬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소리쳤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모두 위태롭게 여겨 절교할 만하지만, 이정은, 우선언, 안응세, 남효온 등과는 절친하게 지냈다. 이들은 모두 20대의 젊은이들이다. 수양대군 왕위 찬탈을 용납할 수 없어 서울을 떠났던, 바로 그 혈기 왕성한 나이들이었다. 김시습은 그런 맑고 순수한 그들에게 자신이 20대 때 목도한 반인륜적인 비화를 들려줬다. 성종대의 젊은 신진사류들이 세조대의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분투를 시작하는 결정적 계기도 생겼다. 김시습보다 스무 살 어린 남효온은 성종 9년(1497년) 스물다섯 나이에 단종의 생모인 소릉을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모두 침묵하고 있던 세조의 행태를 역사 무대 위로 끄집어냈다. 또한 역적의 이름으로 죽어간 인물들을 충절의 인물로 복권하기 위해 ‘육신전’을 짓기도 했다. 그 대가로 남효온 또한 김시습처럼 평생 전국을 떠돌며 울울한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김시습은 승려의 행색으로 산사에 숨어 살며 은둔의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아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대정신을 당대 젊은이들과 함께 벼려가기도 했다. 뒷날, 선조 임금의 분부를 받아 ‘김시습전’을 지은 율곡 이이는 그런 면모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는 절의를 세우고 윤기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을 듣는 이는 나약한 사람도 용동하게 되니, ‘백세의 스승’이라 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애석한 것은 김시습의 영특한 자질로써 학문과 실천을 갈고 쌓았더라면, 그가 이룬 것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율곡은 김시습을 미친 자가 아니라 ‘백세의 스승’으로 마음에 간직했다. 실제로 김시습은 서울로 복귀해 지내다 환속해 머리를 기르고 결혼도 하며, 유자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굳게 다짐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김시습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승려의 행색으로 관동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꼿꼿한 삶의 자세 덕분에 그가 서울을 떠났다 해도 결코 감춰질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많은 지식인이 그를 추모했던 까닭이다.#마음은 유자, 자취는 불자(心儒跡佛) 율곡은 김시습의 삶을 ‘심유적불’(心儒跡佛)이라는 네 글자로 집약했다. 마음은 유자였지만, 불자의 행적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실제로 김시습은 승려 생활을 하면서도 머리는 깎았지만, 수염은 깎지 않았다. 그 이유를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을 남겨둔 것은 장부의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김시습은 유교와 불교의 삶을 함께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도교의 세계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불·도에 정통했기에 많은 사람이 그를 다양한 사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자유인으로 치켜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김시습의 그런 삶은 그 어디에도 심신을 잠시도 누이지 못했던, 극심한 방황의 흔적으로 읽는 게 올바른 독법일 것이다. 정출헌 한국고전번역원 밀양분원장·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매월당집’은 김시습 사후 이자가 첫 유고 수집…선조의 명으로 총 23권 9책 발간 남효온은 ‘사우명행록’에서 “그가 지은 시문은 수만 편이 되는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바람에 거의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선배들이 혹 그의 글을 절취해 마치 자신의 작품인 양 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작품을 도적질해 갔던 것이다. 실제로 김시습의 시문을 그의 사후, 그를 존중하던 이자가 중종 16년(1521년) 여기저기 흩어진 유고를 수습해 겨우 3권으로 묶을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박상, 윤춘년 등이 꾸준히 모아 가며 정식 간행했다고 하는데, 현재 그 매월당집은 사라지고 없다. 지금 전해지는 매월당집은 선조 16년(1583년) 임금의 명을 받아 경진자 활자로 간행한 중간본이다. 분량은 총 23권 9책으로, 시집이 15권이고 문집이 8권이다. 매월당집 서두에는 이산해가 쓴 서문과 이이가 쓴 ‘김시습전’이 실렸다. 1927년 후손이 김시습 관련 기록을 부록으로 덧붙여 신활자로 간행하기도 했다. 1979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5책으로 번역·출간했다.
  • 추모하는 제주 “4·3특별법 개정안 통과돼야”

    추모하는 제주 “4·3특별법 개정안 통과돼야”

    추념기간 선포… 전국에 분향소 道, 지방공휴일 공식 지정 촉각 올해 70주년을 맞은 제주 4·3사건 희생자와 유족, 지역 기관장들이 한목소리로 제주 4·3특별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호소했다.원희룡 제주지사, 이석문 제주도교육감, 고충홍 제주도의회 의장, 양윤경 4·3유족회장과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70주년 범국민위원회 관계자들은 21일 제주도청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4·3추념 기간(3월 21일~4월 10일)을 선포하며 이같이 촉구했다. 추념 기간에는 70주년 범국민위에 참여한 전국의 시민사회단체 등과 연계, 전국에 4·3희생자 추모 분향소가 설치, 운영된다. 이들은 현재 국회 계류 중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특별법 전부 개정법률안’ 통과 등에 국민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더불어민주당 오영훈(제주시 을) 의원이 대표 발의한 4·3 특별법 개정안에는 피해자 보상과 불법 군사재판 무효화 등이 담겼다. 원 지사는 “4·3 추념일 이전에 4·3 특별법 개정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국회와 정치권에 호소한다”며 “4·3의 완전한 해결, 4·3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바라는 제주도민의 기대와 열망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양윤경 유족회장은 “제주 4·3은 현재 진행형으로 4·3 특별법 개정은 제주 4·3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반드시 선결돼야 할 과제”라며 “문재인 대통령과 각 정당 대표,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권의 모든 분들에게 간곡히 호소드린다”고 특별법 개정을 역설했다. 도는 이날 ‘제주 4·3희생자추념일의 지방공휴일 지정에 관한 조례’에 따라 4월 3일을 처음으로 지방공휴일로 지정했다. 제주 4·3 특별법은 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했으며 당시 2만 50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가족은 6만여명에 이른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경기천년 맞아 ‘경기 밀레니엄 투어’ 개발

    경기천년 맞아 ‘경기 밀레니엄 투어’ 개발

    경기도가 ‘2018 경기천년의 해’를 맞아 도 전역을 ‘원’ 형태로 일주하는 새로운 유형의 역사문화체험 관광코스를 개발한다.도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가칭)경기 밀레니엄 투어’ 개발계획을 마련하고, 오는 10월 시범운영을 목표로 관광코스 개발에 들어갔다고 21일 밝혔다. 경기도의 밀레니엄 투어 개발 계획은 역사문화체험을 좋아하는 외국인관광객의 특성을 관광코스에 반영해 경기도 방문을 유도하자는 취지다. 실제로 2016 외래관광객 실태조사에 따르면 구미국가 관광객들은 한국 방문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역사문화체험을 꼽았다. 그 비율은 프랑스 81.5%, 독일 76.7%, 미국 53.9%, 호주 50.1%에 달했다. 도는 이에 따라 경기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관광코스를 통합해 이를 밀레니엄 투어루트로 선정하고, 도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밀레니엄 투어코스는 수원화성 등 권역별 시·군 관광자원이 골고루 포함된 ‘원’ 형태의 경기도 일주 투어루트로 개발될 예정이다. 대상은 역사, 문화유적 등 볼거리와 지역축제, 현지체험 등 즐길거리와 전통 맛 집, 향토음식 등 먹을거리, 민담, 고사 등 이야기 거리가 있는 곳이다. 도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스토리를 소개함으로써 잠재 관광객을 유인할 계획이다. 도는 10월 예정된 경기천년 축하 행사에 맞춰 1차 상품개발을 끝내고 경기 밀레니엄 투어 시범운영에 들어갈 계획이다.또 서울에서 출발하는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대중교통, 렌터카, 공유차, 외국인 자유여행객 전용 셔틀관광버스인 EG셔틀을 확충하고, 장기적으로 장애인도 편리하게 관광할 수 있도록 ‘무장애관광지’를 선정, 시범추진할 계획이다.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 서울의 외곽지역을 경기(京畿)라고 부르기 시작한 기록에 따라 도는 올해를 ‘경기천년의 해’로 정해 각종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홍덕수 도 관광과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이나 남한산성 같은 곳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적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관광코스”라며 “이런 역사문화체험 관광지를 밀레니엄 투어로 묶어 외국인 관광객과 학생 교육체험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박종철 부친 찾은 첫 검찰총장 “사과 늦어 송구”

    박종철 부친 찾은 첫 검찰총장 “사과 늦어 송구”

    입원한 박정기씨 “와 줘 고맙다” 형 종부씨 “아버님 생전 사과 다행” 문무일 “과거 잘못 되풀이 않겠다”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된 1987년 6·10 항쟁의 이념을 헌법 전문에 명시한 문재인 정부의 개헌안이 공개된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6·10 항쟁의 상징적 존재인 박종철 열사의 부친을 만나 검찰의 과오를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한 것은 처음이다. 너무 늦은 발걸음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문 총장은 이날 부산 수영구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박 열사의 부친 박정기(90)씨를 찾아가 “사과 방문이 늦어진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방문은 대검찰청 과거사 진상조사단이 활동을 시작한 지난달 초 문 총장이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에 요청해 이뤄졌다. 문 총장은 지난 2월 3일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박씨를 찾기도 했다. 문 총장은 “1987년의 시대정신을 잘 기억하고 있다. 당시 민주주의냐 독재냐를 놓고 사회적 격론이 이뤄졌고 대학생들의 결집된 에너지가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이 됐다”며 “그 시발점이자 한가운데 박종철 열사가 있었고 그 후 부친께서 아들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평생의 노력을 다해 오셨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며 “1987년에는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이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를 어떠한 방식으로 운영하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성숙된 시민민주주의로 완성해 국민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문 총장은 끝으로 “과거의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고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겠다”며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기원드린다”고 말했다. 박씨는 “와 줘서 고맙다”고 답했지만 노환으로 기력이 약해진 탓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박 열사의 형 종부(59)씨는 “(검찰총장 방문은) 2009년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사과하라고 권고한 지 10년 만”이라며 “아버님 생전에 사과를 받게 돼 다행이다. 고맙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6·10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법무부 산하 과거사위원회에서 인권침해 및 검찰권 남용 의혹을 규명해야 할 과거사로 분류돼 사전조사가 진행 중이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문무일 총장, 박종철 열사 부친에게 과거사 사과

    문무일 총장, 박종철 열사 부친에게 과거사 사과

    문무일 검찰총장이 20일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90) 씨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 관련 피해자를 직접 만나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문 총장은 이날 오후 공식 일정으로 부산 수영구 ‘남천 사랑의 요양병원’을 방문해 박 씨를 만났다. 문 총장은 상체를 숙여 병상에 누운 박 씨와 눈을 맞추며 “그동안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켜드려서 죄송하다”며 “저희가 너무 늦게 찾아뵙고 사과 말씀을 드리게 돼 정말 죄송하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긴 세월 고생 많았다.(검사) 후배들이 잘 가꾸어서 제대로 된 나라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문 총장의 사과에 박 씨는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까 (괜찮다)”고 답했다. 척추 골절로 수술을 받고 지난해 2월 요양차 입원한 박 씨는 거동이 불편해 온종일 누워 지내는 상태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던 박 열사의 대학 1년 후배이자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인 이현주(52·여) 씨는 눈물을 쏟았다. 문 총장은 20여 분 간의 병문안 뒤에 병원 1층으로 내려와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었다. 문 총장은 “저희는 1987년의 시대정신을 잘 기억하고 있다.당시는 민주주의냐 독재냐를 놓고 사회적 격론이 이뤄졌고 대학생의 결집된 에너지가 사회 에너지가 됐다”며 “그 시발점이자 한가운데 박종철 열사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 후 (박 열사의) 부친께서 아들이 꿈꾸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평생 노력을 다 해왔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오늘 저희는 새로운 다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 왔다”며 “과거의 잘못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고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 사명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이날 현장에는 대검찰청 관계자를 비롯해 박 열사의 형인 종부(59) 씨와 누나인 은숙(55·여) 씨를 비롯해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김세균 회장과 변종준·이강원 이사, 김치하 박종철 30주년 기념행사 추진위원회 기획팀장 등이 함께했다.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 박 열사는 사회사상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1월13일 자정 무렵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용산구 남영동)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됐다. 당시 경찰수사관들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운동권 선배인 박종운씨의 행방을 추궁하며 전기고문과 물고문으로 숨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인터뷰 플러스] “감사 나눔으로 행복한 공동체 만들기…그게 진정한 사회변혁”

    [인터뷰 플러스] “감사 나눔으로 행복한 공동체 만들기…그게 진정한 사회변혁”

    2010년부터 전국의 기업, 병원, 학교, 부대, 지자체 등을 돌면서 900회 이상 감사 강연과 워크숍을 진행해온 남자가 있다, 그는 2013년부터 짧지만 강렬한 감사 메시지를 작성해 출근 시간에 SNS로 세상 사람들과 공유했다. 이 감사 메시지가 아들의 군 입대를 계기로 2015년부터 60만 장병이 보는 국방일보에도 연재되고 있다. 올해부터는 고령자 어르신들의 짤막한 자서전을 지역신문에 게재하고 후손들이 감사편지로 화답하는 ‘은빛자서전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정지환 감사경영연구소 소장(53)이 ‘감사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정 소장은 10년 전만 해도 언론계에서 ‘싸움꾼 기자’의 1세대로 불리며 필명을 날렸던 인물이다. 그는 1990년대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활동하며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1998년부터 조선일보 사주일가의 비리 의혹을 추적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2004년에는 ‘한국판 롤콜’을 표방하며 국회·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해 정치권과 언론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저널리스트로서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정 소장이 감사에 주목한 계기는 사회적 좌절 때문이었다. 너무 앞서나간 선택이었는지 2009년 여의도통신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좌절은 이 싸움꾼 기자로 하여금 ‘감사’라는 새로운 희망에 눈뜨게 해주었다. 2009년 12월 당시 손욱 농심 회장과 김용환 감사나눔신문 대표를 만나면서 사단법인 행복나눔125(1주1선행, 1월2독서, 1일5감사) 창립과 감사나눔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했다. 그때부터 정 소장은 스스로 감사를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감사일기와 함께 감사 메시지를 써왔다. 감사 나눔을 통해 공동체가 행복해질 수 있고 그것이 진정한 사회변혁이라고 말하는 그는 현재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싸움꾼 기자’가 ‘감사 아이콘’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젊은 시절 시사지 기자로 일하면서 논쟁적인 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그때 붙었던 별명이 ‘싸움꾼 기자’였지요. 당시 나름대로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정작 내면의 풍요와 가족의 행복은 돌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아들이 당시 저를 ‘잠만 자고 가는 하숙생’ 같다고 했을까요. 준비 기간을 포함해 10년 동안 열정을 불태웠던 여의도통신의 폐간이 저에게 안겨준 정신적 충격도 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족마저 제게 냉랭하게 대했지요. 그런 절망의 벼랑 끝에서 만난 것이 바로 ‘감사’였습니다. →감사와 만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무엇이었나요? -감사일기를 쓰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자로 20년 가까이 살아오다 보니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마저 못 하면 아예 그만두자’는 심정으로 마지막 도전에 나섰지요. 우선 작은 노트를 마련하고 100일 동안 무조건 하루 100번씩 “감사합니다”라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감사’ 두 글자만 대충 쓰는 등 요령을 피웠지만 나중에는 “감사합니다”라고 다섯 글자를 또박또박 온전하게 썼습니다. 며칠 후부터는 그 밑에다 ‘그 날의 감사한 일’ 세 가지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세 가지가 나중에는 다섯 가지로 자연스럽게 늘어났지요. 이 훈련은 작은 노트 세 권을 채우고서야 100일 만에 끝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100일 동안 중요한 변화를 체험했습니다.→어떤 변화였습니까? -23일째 어머니에게 문자메시지로 문안인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51일째 중학교 3학년 아들에게 잠언을 읽어주기 시작했고, 64일째 평생 금연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84일째 되던 날 저만 보면 복수 하고 싶다던 아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채소 샐러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98일째 되던 날에는 저를 피하기만 하던 아들에게서 “행복해요”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변화가 참 신기했습니다. 그저 노트에 두 글자, 다섯 글자, 세 가지 감사, 다섯 가지 감사를 적었을 뿐인데, 제2의 인생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이 기간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사일기 쓰기를 일상적 습관으로 만드는 일에 성공하면서 제 삶은 완전히 뒤집어졌지요. 저의 심경 변화는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 대하는 태도마저 변하게 했습니다. →SERICEO 동영상 강연 ‘아빠의 감사가 아들의 얼굴을 바꾼다’를 계기로 유명 강사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내용인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의 켈트너와 하커 교수는 밀스여대의 1960년도 졸업생 141명을 대상으로 독특한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졸업 앨범에서 환한 미소를 지은 사람을 가려낸 다음 30년 동안 이들의 결혼이나 생활 만족도를 추적 조사한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졸업사진에서 환한 미소를 지은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더 건강하고, 더 성공하고, 더 행복한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보고 저는 군 입대를 위해 휴학을 신청한 아들의 졸업앨범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숙생 아빠’였던 시절 아들은 중학교 앨범에서 ‘우수에 젖은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지만 제가 감사생활을 시작하고 3년이 흐른 뒤에 찍은 고교 앨범에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대조적인 두 장의 사진을 목격한 순간, 저는 감격 또 감격했습니다. 매일 아침 머리맡에서 잠언을 읽어주고 잠들기 전에 감사일기 쓰는 뒷모습을 보여줬을 뿐인데 엄청난 선물을 받은 셈이었죠. 이 사연이 SERICEO를 통해 알려진 후 여기저기서 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감사 나눔은 결국 가정의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봐야겠군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감사 나눔을 조직문화로 도입한 기업의 직원들과 만날 때마다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밥상이 달라졌어요.” “닭살 부부가 됐어요.” “결혼 16년 차 아내와 손잡고 거리를 다녀요.” “아이가 현관까지 나와서 인사를 해요.” “아이가 먼저 공부하고 싶다며 독서실 티켓을 끊어달라고 하네요.” 이런 말도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출근할 때 콧노래가 절로 나와요.” “일터에서 반원들과 사이가 좋아졌고 갈등이 해소되었어요.” 실제로 감사 나눔은 가족에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가정에서 감사 나눔으로 충전된 행복 에너지가 기업의 소통과 성과 창출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가정의 변화가 회사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면, 사회에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군요? -실제로 회식문화에도 신선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포스코ICT의 한 직원은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추진하던 발주업체, 하도급업체 직원들과 함께 하는 회식 자리에서 건배 제의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먹고 죽자!’ ‘위하여!’ 그동안 회식 자리에서 흔히 해왔던 건배사였죠. 회사에서 감사경영을 실행하던 분위기에 힘입어 그 직원은 용기를 냈습니다. “한 사람씩 일어나 나머지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선정해 그에게 감사한 일 3가지 이상 말하고 앉는 것은 어떨까요?” 처음에는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지요. 하지만 굴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한 사람에게 감사와 칭찬을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쭈뼛거리며 일어나 감사와 칭찬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과 사뭇 다른 회식 분위기에 사람들은 어색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다음 날 아침 다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이 다른 때와 전혀 달랐습니다. 서로에게 커피를 권하며 다시 감사를 표시했던 겁니다. 물론 당시 함께 추진하던 프로젝트는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합니다. →충북의 옥천신문과 손잡고 추진하는 ‘은빛자서전 프로젝트’의 취지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자체가 역사이고 작은 박물관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80세 이상 어르신들의 구술(口述)을 풀어낸 자서전을 신문에 게재하고, 자녀와 손주 등 후손들이 감사편지로 화답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콘텐츠는 해당 어르신이 별세하면 ‘조문보(弔問報)’로 변신해 장례식장에 비치할 예정입니다. ‘풀뿌리 언론개혁의 성지’로 불렸던 옥천에서 ‘감사가 넘치는 건강한 장례문화 조성’이라는 또 하나의 작은 실험이 시작됐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7명을 인터뷰했는데, 인생스토리 하나하나가 다큐영화 ‘워낭소리’를 연상케 했습니다. 후손들이 감사편지를 빠짐없이 보내와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세대 간 대화로서의 감사나눔운동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날 선 비난과 냉소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저변에선 감사와 사랑의 마음도 용암처럼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더 꿈꾸고 있는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죠. -어느 정도 분위기가 조성되면 지역 내 어르신은 물론이고 출향한 자녀까지 참여하는 ‘자서전 글쓰기 교실’과 ‘부모님께 감사편지 쓰기운동’도 추진할 구상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역의 청소년들과 함께 어르신을 찾아뵙는 ´구술 생애사´ 동아리를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겁니다. 기업사회공헌(CSR) 예산이나 독지가의 기부가 이런 곳에 쓰인다면 참 좋겠습니다. 인구 5만의 옥천에서 이 실험이 성공하면 5천만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 250여개 지자체로도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서원호 객원기자 guil@seoul.co.kr ■정지환 감사경영연구소 소장은 1965년 경기 여주 출생 현 감사경영연구소 소장 현 경희대학교 객원교수 서울시립대 영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 졸업 / 1987년 서울시립대 총학생회장, 전대협(1기) 의장권한대행 / 1994년 월간 말 기자(2000년 한국잡지협회 ‘올해의 기자상’ 수상), 오마이뉴스 기자 / 2003년 시민의신문 취재부장, 여의도통신 편집국장 / 2010년 감사나눔신문 편집국장, 사단법인 행복나눔125 홍보실장 / 기업, 병원, 학교, 부대, 지자체 등에서 900회 이상 감사 강연, 워크숍 진행 /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 동영상 강연 5회 출연(‘아빠의 감사’편 주간베스트 1위) / 한전인재개발원, 새마을금고연수원,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 사외강사 / 시사인 ‘싸움꾼 기자, 감사와 나눔의 마력에 빠지다’ 보도 / 월간 아버지 ‘감사를 말하다 삶이 바뀐 가족 이야기’ 보도 / CBS 변상욱의 이야기쇼 ‘이 사람이 사는 법’ 출연 / 국방TV ‘여러분이 대한민국의 자랑입니다’ 출연 / 2015년 7월 1일부터 국방일보에 미니칼럼 ‘30초 감사’ 연재 / 인간개발연구원 편집위원, 허임기념사업회 이사,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 /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저서 10권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99세 철학자’의 건강한 노년… “100을 할 수 있으면 90에서 멈추세요”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99세 철학자’의 건강한 노년… “100을 할 수 있으면 90에서 멈추세요”

    한국은 전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다. 앞으로 7~8년 뒤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전망이다. 국가와 사회 차원의 대책 못지않게 개인도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시대다. 한국 1세대 철학자이자 명수필가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올해 백수(白壽·99세)를 맞았다. 100세가 코앞인 요즘도 일주일에 두어 번 강연을 하고, 신문사 두 곳에 칼럼을 연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팡이도 아직은 필요 없고, 보청기의 도움도 받지 않는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면서 일도 계속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건강한 노년의 삶을 영위하는 비결이 궁금했다. 최근 출간한 산문집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를 핑계로 인터뷰를 청했다.-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시나요. “아침 6시쯤 일어나서 신문 읽고, TV뉴스 보다가 집 뒤 야산으로 산책을 갑니다. 한 50분쯤 걸으면서 원고나 강연 내용을 구상해요. 동네 주민들이 내가 걷는 산책로를 ‘철학자의 길’이라고 부른다더군요(웃음). 점심 먹고 오후에는 책을 읽고, 원고를 씁니다. 저녁에는 강연을 하거나 강연이 없는 날엔 책을 읽어요. 그리고 밤 11시쯤 잠자리에 듭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영도 하고요. 30여년 전 정년퇴직하기 전이나 똑같아요.”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대 철학과를 졸업한 김 교수는 1947년 월남해 서울 중앙고 교사를 거쳐 1954년부터 1985년까지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2남4녀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노모, 병석에 누운 아내와 셋이 살다 두 여인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나선 17년째 연희동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가장 행복했던 때는 70대 중반이었죠” -남다른 건강 비결이라도 있으신가요. “신체적인 건강은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평소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운동과 일이 있어야 해요. 50대까지는 바빠서 운동을 못 하다가 50대 후반에서야 가벼운 운동 하나 해야겠다 싶어서 시작한 게 수영이에요. 아무리 피곤해도 수영을 하고 나면 다 풀려요. 그래도 무리는 안 합니다. 좀더 하고 싶을 때 그만두는 게 철칙이죠. 일을 사랑하고 즐기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하고, 건강은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일도 무리해서 하지는 않아요. 100을 할 수 있으면 90 정도에서 멈춥니다. 항상 여유를 두는 게 내 생활의 특징이라고 할까요.” 어릴 적 그는 유난히 몸이 약했다. 모친은 “우리 장손이 스무 살까지만 사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며 노심초사했다. 건강에 자신이 없다 보니 과로나 무리를 하지 않았다. 매사 절제하고 조심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십 년, 이십 년을 살다 보니 어느덧 100세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번 산문집 제목이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90이 넘으니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 심지어 후배와 제자들도 먼저 보내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제는 남은 게 세월이 아니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시간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요. 어머니와 아내가 떠났을 땐 외로움과 서글픔 속에서도 두 분에게 받은 사랑을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새 출발을 했어요. 50년 지기인 김태길 교수와 안병욱 교수, 두 친구가 옆에 있어서 힘이 됐죠. 그런데 두 친구마저 떠나고 나니 세상이 비어 버린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에는 산문 25편이 실렸다. 표제작 ‘남아있는 시간을 위하여’는 새로 쓰고, 나머지는 지금까지 쓴 글 가운데 골랐다. 김 교수는 1960~70년대 김태길(1920~2009) 서울대 교수, 안병욱(1920~2013) 숭실대 교수와 함께 ‘철학자 겸 수필가’ 트로이카로 불렸다. 첫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과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당대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통했다. 재작년 출간한 ‘백년을 살아보니’는 13만부가 팔렸다. -인생에서 어느 시기가 가장 좋으셨나요. “가장 행복했던 때는 70대 중반이에요. 내가 나를 믿어 줄 수 있는 성숙한 시기였죠. 김태길, 안병욱 교수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시절이 언제인지 얘기한 적이 있는데 60세에서 75세 사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봤어요. 사람은 누구나 노력하면 75세까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아요. 우리 사회는 일찍 성장을 포기하고, 빨리 늙어 버립니다. 우리 셋은 90이 다 돼서도 늙었다는 얘기를 안 했어요.”●“항상 여유 두는 게 내 생활의 특징” -어떻게 하면 덜 늙을 수 있나요. “감정이 풍부해야 합니다. 안 교수는 공부, 여행, 연애 3가지를 하면 늙지 않는다고 했는데 마찬가지예요. 예술가들이 상대적으로 젊게 사는 이유도 정서적으로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젊을 때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세요.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예술적 정서를 모르는 사람은 어딘가 비어 있어요. 잘 쓴 글이라도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읽고 싶은 마음이 안 생깁니다.” -행복의 정의나 기준은 무엇인가요. “행복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백 사람이 백 가지 행복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죠. 개인적으론 일이 즐겁고, 항상 여유를 갖고 사는 게 행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버스 기사에게도 먼저 인사합니다” -노년의 지혜라고 할까요, 인생 선배로서 팁을 주신다면요. “나이 들어서 가까운 사람들이 멀리하면 큰일입니다. 그렇게 안 되려면 뭐든 주변 사람보다 나은 점을 보여 줘야 합니다. 나는 가족들과 외식할 때 식당 종업원에게 꼭 고맙다고 인사를 해요. 손자들이 그걸 보고 놀랍니다. 버스 기사에게도 먼저 인사를 건네요. 젊은이들이 버릇없다고 불평하는데 우리가 모범을 보여 주지 못한 잘못도 큽니다. 사회생활 여러 분야에서 좀더 나이 든 사람들이 후배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모범은 얼마든지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 결혼, 출산 등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고 있습니다.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싶으신가요. “우리가 병을 만들고, 우리가 앓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치가 풀 수 있는 부분은 적극 해결하고, 개인도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충분히 고민해야 합니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으신가요. “6년 전쯤인가 자다가 문득 깨서 이런 메모를 남겼어요. ‘나에게는 두 개의 (길잡이) 별이 있었다. 하나는 진리에 대한 그리움, 다른 하나는 겨레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지만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건 남는 게 없어요. 돈, 명예 다 남지 않지만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은 남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행복합니다. 이웃과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아직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1시간 40분 동안 쉼 없이 얘기를 하고서도 김 교수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인터뷰 내내 잔잔한 미소와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김 교수는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모범이 되는 원로의 존재가 많아질수록 고령사회는 재앙이 아닌 축복에 더 가까워지리라. coral@seoul.co.kr ■김형석 교수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 출생 ▲1943년 일본 조치대 철학과 졸업 ▲1947년 월남 ▲1947~54년 서울 중앙중·고 교사 ▲1954~85년 연세대 철학과 교수 ▲1990년 제1대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회장 ▲2011년 한림대 일송기념사업회 일송상▲2016년 제12회 유일한상 ▲주요 저서: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현대인의 철학’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백년을 살아보니’
  • 작가회의 “고은 성폭력 묵인·은폐 반성”

    국립 3·15묘지에도 ‘고은’ 지우기 ‘우리는 기억해야…’ 작품 등 가려 고은(85) 시인이 성추행 논란에 휩싸이면서 그의 작품이 교과서를 비롯해 곳곳에서 퇴출되고 있는 가운데 경남 창원시 국립 3·15민주묘지 등에서도 고은 시인 흔적 지우기가 진행되고 있다. 고은은 연작 시집 ‘만인보’에서 3·15 의거와 관련된 시 47편을 써 마산 3·15 의거와 관련 인물 등을 알렸다. 이에 3·15기념사업회와 3·15민주묘지 측은 만인보 가운데 3·15 의거 관련 작품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를 2015년 기념관 내 벽에 게시하고 고은의 시 ‘김용실’을 돌에 새긴 시비도 민주묘지 안에 설치한 바 있다. 13일 서울신문 확인 결과 민주묘지 관리소 측은 최근 각계에서 고은 흔적 지우기 작업이 벌어지자 3·15 의거기념관 1층 1관 벽면에 새겨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와 ‘김용실’을 종이와 철판 등으로 가려 놓았다. 관리소 관계자는 “성추행 논란으로 고은 시인의 작품이 퇴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작품을 게시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임시로 가리게 됐다”며 “올해 3·15 의거 기념식이 끝나고 나면 3·15기념사업회 및 유족회 등과 논의해 시비를 아예 철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내 대표 문인단체 한국작가회의가 고은 시인의 성폭력을 묵인·은폐한 걸 반성하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작가회의는 이날 “고은 시인은 오랫동안 본회를 대표하는 문인이었기에 당사자의 해명과는 별개로 그와 관련한 문제 제기에 본회는 답변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입장을 신속히 밝히지 못했고 그로 인해 피해자의 고통과 시민사회 구성원들의 실망에 어떠한 위로도, 희망도 드리지 못했다”며 “이는 ‘동지’와 ‘관행’의 이름으로 우리 안에 뿌리내린, 무감각한 회피였다. 반성한다”고 밝혔다. 또 “이른바 ‘문단 내 성폭력’ 사건과 문화계 미투(#Me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에 관해 많은 질타를 받았다. 표현의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 계승을 선언하고 활동해 왔지만 젠더 문제에 관해 그동안의 대처가 미흡하고 궁색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했다. 작가회의는 지난 10일 열린 이사회에서 극작 부문 회원이었던 이윤택 연출가를 제명했지만 고은 시인은 스스로 탈퇴해 제명 조치도 이뤄지지 못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서울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용인 3대 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 ‘고향 안주 꿈’ 이뤘다

    ‘용인 3대 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 ‘고향 안주 꿈’ 이뤘다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는 경기 용인 출신 ‘3대 독립운동가‘ 오희옥(92·여) 지사가 꿈을 이뤘다.용인시는 3.1절인 1일 원삼면 죽능리 527-5번지에 오 지사가 거처할 1층 단독주택을 완공해 준공식을 가졌다.‘독립유공자의 집’으로 명명된 이 주택은 438㎡ 대지에 방 2개와 거실, 주방을 갖췄다. 주택 입구에는 ‘독립유공자의 집, 지사님의 고귀한 희생에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라는 글이 새겨진 나무 문패가 걸렸다. 이날 준공식에는 정찬민 용인시장, 오 지사의 가족, 시민, 정해주 경기동부보훈지청장, 김중식 시의회 의장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오 지사는 “동포들이 목숨을 바쳐 독립만세운동을 한 3.1절에 아름다운 집이 완공돼 너무 감격스럽다. 집을 짓는 데 도움을 주신 용인시민과 시에 감사하다”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용인시는 준공식에서 오 지사의 고향집 건립을 위해 애쓴 14개 기업과 단체에 감사패와 표창장을 전달했다. 오 지사의 고향집은 용인시 공무원·시민의 성금, 해주오씨 종중의 땅 기부, 용인시 관내 기업들의 재능기부가 하나로 합쳐 지은 ‘용인의 집’이기도 하다. 정부가 아닌 기초지방자치단체에서 시민들과 함께 독립유공자를 위한 집을 마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오희옥 지사 고향정착 프로젝트’는 지난해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원의 보훈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오지사가 여생을 고향인 용인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고 이를 들은 용인시민들이 집 마련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며 시작됐다. 주택 건립을 위해 오 지사의 집안인 해주오씨 종중에서 고향인 원삼면 죽능리에 집터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정시장과 용인시 공무원들도 가세해 건축비로 2133만원의 성금을 모아 전달했다.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원삼면기관단체장협의회에서도 각각 100만원, 500만원을 후원했다. 용인지역 기업들도 힘을 보태 건축설계와 골조공사, 토목설계와 시공, 조경, 붙박이장과 거실장 등을 무료로 재능 기부했다.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과 소파·식탁 등 생활물품도 들어왔다. 정 시장은 축사에서 “독립지사와 애국지사에게 감사하고 보살피는 것은 우리의 도리이자 의무”라면서 “오 지사님을 고향에 모실수 있게 도움을 준 모든 용인시민에게 감사하다. 오 지사께서 고향에서 즐겁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오 지사는 용인 원삼이 고향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독립운동을 벌였다. 할아버지 오인수(1867∼1935) 의병장은 1905년 한일병탄조약 체결 이후 용인과 안성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아버지 오광선(1896∼1967) 장군은 1915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독립군단 중대장, 광복군 장군으로 활약했다. 1927년 만주에서 태어난 오 지사도 두살 터울인 언니 오희영(1925∼1970) 지사와 함께 1934년 중국 류저우(柳州)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첩보수집과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등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오 지사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현재까지 생존한 여성독립운동가는 오희옥, 유순희, 민영주 지사 등 3명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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