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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2019년, 김남주를 다시 기억할 때/박록삼 논설위원

    [서울광장] 2019년, 김남주를 다시 기억할 때/박록삼 논설위원

    1994년 유독 이름 짜한 이들이 많이 떠났다. 1월 문익환 목사가 황망히 떠나더니 다음달 시인 김남주가 떠났다. 그해 봄과 여름엔 얼터너티브 록밴드 ‘너바나’의 리드 보컬 커트 코베인과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김일성 북한 주석이 잇따라 갔다. 긍정·부정 평가를 떠나 각자 자리에서 한 시대의 굵은 획을 그은 거목들의 절명이었다. 상실의 시대였다. 한국사회 변혁을 꿈꾼 청년들에게 김남주(1946~1994)의 빈자리는 유독 컸다. 1980년대 청춘들은 그가 번역한 ‘네루다’를 읽으며 사랑을 배웠고, 그의 시에 담긴 혁명의 서슬 퍼런 결기를 따라하려 몸부림쳤다. 문청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1980~1990년대 그를 읽지 않고선 펄펄 끓던 스물 남짓의 삶을 건널 수 없었다. 학교와 공장의 정문 앞, 그리고 거리 곳곳의 불심검문을 피해 은밀히 김남주를 읽는 건 학살과 저항의 시대를 사는 청춘의 의무였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다. 하지만 김남주는 거추장스러운 수사가 필요 없는 혁명가이자 시인 그 자체였다. 1972년 유신시대와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두 차례에 걸쳐 10년 넘도록 감옥을 집으로 삼았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치열하게 시를 썼다. 그가 남긴 시 500여편 중 400여편은 감옥에서 쓴 것들이다. 시집 ‘진혼가’(1984),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등은 그렇게 빛을 봤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청년들의 가슴을 두방망이질치게 했다. 아니다. 더 솔직히 말해야 한다. 김남주를 제대로 읽기에는, 김남주의 삶을 따라하기에는 몹시 버거웠다. 두려웠다. 많은 청춘들이 홍역을 겪듯 통과의례처럼 김남주를 거쳤고, 자신의 삶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 김남주 바깥으로 멀리 벗어나려 애썼다. 시인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붕괴했고, 혁명의 좌표는 사라졌다. 시의 시대는 끝났으며, 민중문학은 유행에 뒤처진 것으로 취급받았다. 그가 떠난 이후 한국 사회 전체가 그로부터 도망쳐 간 이유이기도 했다. 멀리 달음박질친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최근 정치인들 한 무리는 ‘전두환은 구국의 영웅’, ‘5·18 폭동’ 등 망언을 내뱉으며 ‘학살의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표했고, 그 당의 대표라는 자 또한 “(5·18 망언과 관련) 역사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면서 그들을 사실상 두둔하고 동조했다. 군사독재 정권의 후예임을 남들이 몰라줄까 걱정스러웠나. 과감한 커밍아웃이다. 뿐만 아니다. 남북 정상이 만나 포옹하는 시대에 제 역할을 잃은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두 눈 부릅뜨고 있다. 그가 남겨 놓고 떠난 문학판은 또 어떤가. ‘문학의 위기’라는 명제가 무색하게 4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문학상이 범람하는 세상 속이지만 ‘김남주문학상’은 없다. 민중문학의 최정점에 있던 김남주는 가난한 몇몇 시인의 기억 속에만 머물며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고, 다양성을 표방하는 새로운 문학 사조에 떠밀려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에두름 없는 그의 시어들이 너무 거칠고, 너무 전투적이라는 상투적 비판과 함께였다. 출소 뒤 자신에게 쏟아진 비판에 대해 “오늘의 현실이 어제와 다르다고 어제의 역사적인 실천과 문학적 대응을 오늘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저의마저 감지케 한다”고 직접 항변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다음달 그의 모교 전남대에 김남주기념홀이 만들어진다. 그의 선후배 작가들과 그와 함께 혁명을 꿈꿨던 선후배들이 십시일반해서 4억원 가까운 돈을 만들었다.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여전히 허전하다. 김남주의 생애와 문학은 한반도 평화의 시대에 더욱 주목해야 할 가치를 담고 있는 사회적 자산이다. 2019년 김남주를 호명하는 일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김남주문학상’ 같은 것 하나 만들어서 민중시인 송경동에게 주거나, 거스를 수 없는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 낸, 혹은 만들어 낼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는 것도 통일을 염원했던 김남주의 뜻과 맞을지 모르겠다. 김남주에게 부채를 진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의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김남주기념사업회 김경윤 회장은 “문학상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오랜 바람이지만 현실적인 문제 탓에 아직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가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시 ‘사랑은’ 중) 2월 13일은 ‘사랑의 시인’ 김남주가 췌장암으로 떠난 지 25년 되는 날이다. 2019년 다시 그의 시를, 그의 삶을 기억할 때다. youngtan@seoul.co.kr
  •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옥중 투쟁을 하다 잔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열사가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역이었음도 분명하다. 유관순은 3·1운동과 동일시되고 있고 항일의 표상이다. 그러나 유독 유 열사만 부각된 데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연구 논문이 여러 편 있다. 친일·우익 인사들이 광복 직후 자신들의 과거를 정화하여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찾으려고 열사를 ‘한국의 잔다르크’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항거는 이화여중 동문 박인덕과 교장 신봉조 등이 기념사업회를 발기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일제에 저항했다가 친일로 돌아선 인물로 광복이 되자 자신들의 행적을 덮으려고 유관순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우익 인사들의 유관순 기념사업이다. 미 군정하인 1947년 9월 결성된 유관순기념사업회는유관순 기념비, 영화를 만들고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제목의 전기를 간행했다(정상우, ‘3·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그중에는 유관순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은 조병옥이 있다. 조병옥은 광주학생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3년 동안 복역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친일 의혹도 함께 받고 있다. 조병옥은 유관순과 두 집 건너 살던 이웃으로 그의 아버지 조인원도 아우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대한민국 정부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은 정부의 정통성을 찾는 방편으로 유관순을 한국의 잔다르크, 해방의 여전사로 부각시켰다(전해주,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네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 이런 연유로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한 다른 인물들의 공적은 거의 파묻혔다. 실제 주동자로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진 김구응 의사(義士)도 그런 사람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는 아우내 만세운동을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 박종만이 주도했음을 밝히고 특히 모친까지 학살당한 김 의사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천안군 병천시(川市·아우내장터)에서 의사 김구응이 남녀 6천4백인을 소집하야 독립을 선언할 새 일경이 아민(我民)의 기수(旗手)를 자(刺)코져 하거늘 기수는 적수(赤手)로 검도(劍刀)를 집(執)하니 유혈이 임리(淋·뚝뚝 흘러 흥건하게 떨어짐)할 시에…” 김병조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사략’에 이렇게 씌어 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도 거의 똑같이 서술하면서 주모자를 김구응이라고 했다.김 의사는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의 12대손으로 1887년 7월 27일 천안 병천면 가전리 99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학을 깨우친 의사는 청신의숙, 장명학교를 거쳐 병천 진명학교 훈도(교사)로 일하며 제자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유관순의 오빠 유관옥과 조인원의 아들 조만형은 그의 제자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충청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김 의사는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다 3월 13일 고향 병천에 내려온 유관순과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조인원 등과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치밀하게 짰다. 유관순과 지역의 학생, 교인들은 진명학교와 교회 등에서 밤낮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이 어린 유관순에게 최일선 연락 책임을 맡긴 것도 김 의사였다. 그는 천안 동부 6개 면과 오창, 청주, 진천, 연기 등 각지와 비밀 연락망을 짜고 봉화 신호에 맞추어 일제히 총궐기하도록 밀령을 전달했다. 유관순이 연락과 봉화 책임자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의사는 전체 계획을 짠 리더였다. 조인원은 현장에서 군중을 이끈 행동대장 격이었다. 김 의사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도 장년층과 노년층을 설득하고 부녀자를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그믐날 밤 유관순은 매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렸다. 이를 필두로 천안 주변의 총 24개 봉우리에서 봉화가 타올랐다. 거사 일로 정한 4월 1일 아침 아우내장터에는 전날 밤 타오른 횃불을 보고 장꾼을 가장한 군중 3000여명이 모여들었다. 군중은 점점 불어나 오후 1시가 넘어가면서 6000명을 넘어섰다. 김 의사는 두루마리로 된 독립선언문을 펴 낭독했고 유관순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불과 50보 거리의 지척에 헌병주재소가 있었다. 만세운동은 극히 평화적이었다. 군중이 점점 늘어나고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할 정도로 커졌다. 오후 2시쯤 천안헌병분대에서 헌병들이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헌병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유중권을 포함해 여러 사람이 사망했다. 발포에 놀라 군중은 일단 흩어졌지만, 오후 4시쯤 발포와 살인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져 1500여명이 주재소로 몰려갔다. 김 의사는 독립선언문을 말아 들고 대열의 선두에 섰다. 헌병들은 깃발을 들고 있던 기수를 칼로 찌르려 했고 기수가 맨손으로 칼을 잡자 그대로 찔러 숨지게 했다. 의사는 그들의 잔인무도함을 비난하며 꾸짖었다. 황망한 중에도 정연한 논리로 대응했다. 일본 헌병은 논리에서 밀리자 김 의사를 총으로 쏴 쓰러뜨리고는 총검으로 머리를 짓이겼다. 의사는 시신이 되어서도 독립선언서를 손에 말아 쥐고 있었다. 오후 6시쯤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아들이 참살당한 말을 들은 의사의 어머니 최 여사가 달려왔다. 여사는 헌병의 멱살을 잡아채며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을 찾겠다고 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헌병은 사정없이 총을 쏘아 즉사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총검으로 마구 찔렀다. 김 의사의 나이 32세, 최 여사의 나이 66세였다. 아우내장터 시위로 김 의사 등 19명이 죽고 적어도 30명 이상이 크게 다쳤다.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병천면 가전리 뒷산에 의사의 시신을 묻었다. 김 의사의 사후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선생의 손자 김운식(70)씨에게 들은 가족사는 비극적이다. 김 의사는 아들 셋을 뒀는데 맏아들이 열 살이었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김 의사의 부인, 즉 김씨의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 안성 친정으로 갔다고 한다. 의사의 맏아들은 그 후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돌아와 인천에서 조선기계제작소라는 작은 공장에 취업했다. 광복 후에는 좌익 활동을 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친일파들은 위세를 떨치고 김원봉 같은 독립운동가는 도리어 빨갱이로 내몰리는 현실에 대한 저항감에 좌익 사상에 빠졌다”고 말했다. 맏아들은 6·25가 터진 후 공장 인민위원장이 됐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공산주의와는 다르다고 판단해 9·28 수복 후 국군에 자수했다. 자수했지만 방면되지 않고 인천감옥에 수감됐다. 몇 달 뒤 1·4후퇴 때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천감옥의 좌익사범들을 총살했는데 그때 희생되고 말았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다른 후손들도 천안을 떠나 곳곳을 전전하며 가난에 시달렸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 아우내장터를 찾았다. 두 개의 내(川)를 아우른다(竝)는 뜻인 아우내를 일본인들이 병천(竝川)이라는 한자어로 지명을 바꿨다. 근처엔 유관순기념관도 있고 해마다 만세운동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만세운동 현장임을 알려주는 표지도 없고 순댓집 간판만 즐비했다. 단지 시장 입구 헌병주재소가 있던 곳엔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이 있다. “아우내에는 순대만 있고 역사는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5·18단체 “제명 때까지 국회 농성”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이 5·18 민주화운동을 두고 망언한 데 대해 5·18단체와 광주 시민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유공자 단체들은 해당 의원들의 제명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5·18민중항쟁구속자회와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는 11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당 김진태·김순례·이종명·백승주·이완영 의원 등 5명에 대한 의원직 제명을 요구했다.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농성을 이어 가겠다는 방침이다. 또 망언이 불거진 지난 8일 ‘5·18 공청회’ 발언을 모두 분석해 주최자와 발언자 전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고발하기로 했다. 이들은 “한국당 의원들과 지만원은 피 흘려 민주화를 일궈 낸 민주화운동과 현대사를 폄훼하고 민주화 주역인 국민을 우롱하고 모독하는 범죄적 망언을 쏟아냈다”며 “이미 법원의 판결,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충분히 인정받은 5·18의 숭고한 뜻을 짓밟은 자유한국당의 역사 후퇴, 역사 쿠데타를 좌시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흥철 5·18민중항쟁구속자회 사무처장은 “백승주, 이완영 등 공청회에서 축사한 의원들도 발언 수위가 낮았을 뿐 5·18을 폄훼한 것은 똑같아 제명을 요구한 것”이라고 밝혔다. 광주 지역 여론도 들끓고 있다. 5·18기념재단과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는 이날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대책회의를 갖고 한국당 의원들의 발언을 규탄했다. 광주진보연대 등 30여개 광주·전남 시민사회단체도 5·18 당시 최후 항쟁지였던 동구 광산동 옛 전남도청 별관에서 대책회의를 갖고 망언을 비판했다. 전남대생 이모(22·여)씨는 “제1야당 국회의원 수준이 이 정도인 줄 몰랐다”며 “이번 사건을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충북범도민위원회 출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충북범도민위원회 출범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충북 범도민위원회’가 8일 출범했다. 도내 보훈, 종교, 시민사회, 장애인, 여성, 문화, 노동, 농민 등 각 분야 150여개 단체가 참여했다. 서상국 광복회 충북도지부장, 곽동철 충북민주화운동 계승사업회 이사장, 음태봉 충북기독교연합회장, 유철웅 충북민간사회단체 총연합회장, 정승희 충북여성연대 대표, 이화련 충북새마을회 회장, 임승빈 충북예총 회장 등 33명이 상임공동대표로 추대됐다.이들은 과거 기록, 현재의 성찰과 기념, 새로운 미래 100년 비전제시 등을 활동목표로 잡았다. 이를 위해 다음달 1일 청주 일원에서 만세행진과 도민대회를 개최한다. 오는 4월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식을 갖는다. 역사바로세우기 운동, 새로운 100년 실천방안 시군 순회 토론회, 3·1 운동 역사순례도 진행한다. 3·1운동 자료 발굴 및 지역 만세운동 역사기록 편찬, 기록화 작업, 청주장터 만세공원 조성과 기념조형물 건립, 독립투사 추모제도 추진한다. 이들은 도민들의 폭넓은 참여를 위해 오는 4월까지 참여단체 및 추진위원을 모집한다. 개인추진위원은 1만원 이상, 단체 회원은 3만원 이상 회비를 내야 한다. 정지성 공동대표는 “100주년이라 100개 단체 참여를 목표로 했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뜨겁다”며 “개인회원은 1000명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2·8 독립선언서’ 5개 언어로 부활한다… 서울시, 100주년 기념 번역 배포

    ‘2·8 독립선언서’ 5개 언어로 부활한다… 서울시, 100주년 기념 번역 배포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인 유학생 수백명이 목숨을 걸고 선포한 조국 독립의 의지가 온라인에서 5개 언어로 부활했다.서울시는 ‘2·8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교육청,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와 손잡고 ‘2·8독립선언서’를 번역해 모두 5개 언어로 전 세계에 배포한다고 8일 밝혔다. 기존의 국한문체로 쓰여진 선언문은 시민들에게 쉽게 와닿을 수 있도록 풀어쓰고, 이를 다시 영어, 일본어, 중국어, 에스페란토어 등 4개 언어로 번역했다. 영어는 전승희 하버드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교수, 중국어는 임금복 중국석가장 대학 교수, 일본어는 재일한국YMCA, 에스페란토어는 한국 에스페란토협회에서 각각 번역을 맡았다. 번역본은 이날 오후 2시부터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 공식 홈페이지와 반크가 운영하는 ‘독립운동가의 꿈’ 누리집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반크는 전 세계에 있는 한글학교와 해외 한인단체에, 서울시교육청은 서울시내 전 학교에 공문 형식으로 선언문을 각각 배포할 예정이다. 한편 2·8독립선언은 일제강점기에 대한민국이 일제의 심장부에서 전 세계를 향해 일제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자주 독립의지를 밝힌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후 기미독립선언서와 3·1운동 등의 기폭제가 됐다. 2·8독립선언서는 같은달 1일 중국 만주 지린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독립선언서의 초안 작성에 참여한 조소앙 선생이 도쿄에 파견돼 유학생들을 도왔고, 당시 와세다대학교 학생이었던 이광수가 초안을 작성했다. 이들은 당시 국한문체의 선언문을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리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현재 번역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선언서는 ‘우리 민족은 43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오랜 역사동안 독립을 유지했다’는 선포로 시작해 본문에서는 일제가 한국을 침략한 정황과 폭력성에 대해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의지를 밝힌다.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한다’는 약속으로 마무리된다. 황치영 서울시 복지정책실장은 “3·1운동에 영향을 미친 2·8독립선언이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선언문 번역 배포를 통해 알리고자 했다”라면서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선언서가 우리 조상의 독립정신과 의지를 세계로 전파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2·8선언과 3·1운동 혼동” 100년 전 NYT의 오보?

    “2·8선언과 3·1운동 혼동” 100년 전 NYT의 오보?

    “2·8독립선언 ‘43세기 역사’ 문구 3·1운동 소개하는 기사에 실려” 日교토대 연구자 세미나서 밝혀 오늘 서울·도쿄서 2·8선언 100주년 행사3·1운동이 일어나기 20여일 전인 1919년 2월 8일, 일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이뤄졌던 ‘2·8독립선언’. 8일로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3·1독립선언서의 일부라고 초기 미국에 소개됐던 부분이 사실은 2·8독립선언서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나왔다. 7일 재일본한국YMCA에 따르면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소속 연구자인 오노 야스테루(37)는 2017~2018년 6차례에 걸쳐 개최한 2·8독립선언 공개 세미나에서 1919년 3월 13일 뉴욕타임스에 처음으로 다뤄졌던 3·1운동 관련 기사의 독립선언 내용이 2·8독립선언서을 토대로 작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한국인들, 독립을 선언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 이상으로 시위가 퍼져 나갔고, 수천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소개한 AP통신 기사를 전재해 3·1운동을 구미 각국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오노 연구자가 주목한 부분은 이 기사에 나오는 ‘우리는 천한 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독립국가로서 43세기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대목이다. 여기에 나오는 ‘43세기의 역사’라는 표현이 2·8독립선언서에만 나온다는 것이다. 2·8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4300년의 유구한 역사’라고 썼다. 이에 비해 3·1독립선언서는 ‘반만년 역사의 권위’라는 표현을 썼다.그는 “영어로 번역된 2·8독립선언서가 미국에서 3·1독립선언서로 읽혔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는 2·8독립운동이 한국의 독립 의지를 적극적으로 해외에 퍼뜨리는 전략성을 갖췄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3·1독립선언서가 조선어로만 쓰여졌던 것과 달리 2·8독립선언서는 선언서를 작성했던 춘원 이광수(당시 와세다대 재학) 등에 의해 영어와 일어로 번역됐다. 이는 선언서 내용을 해외에 적극적으로 알림으로써 폭넓은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선언서는 2월 8일 거사가 있기 직전 일본 제국의회 의원과 각국 주일대사관, 내외신 언론사 등에 보내졌다. 하지만 영어권 국가로 퍼져 나갔을 2·8독립선언서의 영문판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독립선언 장소가 일본이었던 데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2·8독립선언에 대한 사료 수집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8일 오전 11시 서울 YMCA와 도쿄 재일본한국YMCA에서 기념식이 개최된다. 도쿄에서 열리는 기념식에는 피우진 보훈처장과 한완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 등 250여명이 참석한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서울·도쿄서 동시 2·8독립선언 기념식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도화선이 됐던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가 일본 도쿄와 서울에서 동시에 개최된다. 국가보훈처는 6일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기 위한 기념식을 8일 일본 도쿄 재일본한국 YMCA와 서울 YMCA에서 동시에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재일본한국 YMCA 주관으로 열리는 도쿄 현지 기념식에는 피우진 보훈처장과 한완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이종걸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이수훈 주일대사, 광복회원, 애국지사 유가족 등 250여명이 참석할 계획이다. 보훈처는 기념식 하루 전날인 7일에는 오성규(97) 애국지사를 찾아 보훈처에서 추진하는 국외 독립유공자 및 후손 초청행사 초청장을 전달하고 오 애국지사의 자택에는 감사를 표하고자 ‘독립유공자 명패’를 부착할 계획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대구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2~3월 집중 추진

    대구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2~3월을 기념사업 집중 추진 기간으로 정해 다채로운 시민 참여 행사를 펼치기로 했다. 2 ~ 3월에 추진될 주요 사업과 행사는 일본군위안부 주제 연극 ‘할머니의 방‘이 남구 소극장 함세상에서 2월 19일에서 2월 23일 사이 무료 공연한다. 국채보상운동과 2?28 민주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월 21일부터 2월 28일까지 동성로와 2·28기념공원 등에서 ‘2019 대구시민주간’ 행사를 개최하며, 2월 22일에는 기념 뮤지컬 갈라공연이 동성로 야외무대에서 진행된다. 2월 26일에는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대구시립교향악단의 ‘100주년 기념 음악회’를, 2월 28일에는 3?1절 전야행사인 대구YMCA 주관의 대구만세운동길 걷기 행사 ‘떨리는 밤, 함성전야’를 선착순 1000명 모집, 무료참가 행사로 개최된다. 3월 1일에는 100주년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9시에서 10시 30분 사이 달성공원 1000명, 청라언덕 2000명, 반월당 보현사 2000명 등 총 5000명이 3개 경로에서 출발하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집결하는 만세재현 거리행진을 펼친다. 이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화합의 광장에서 10시 30분 100주년 3·1절 기념식을 개최하며, 12시에는 국채보상기념공원 종각에서 타종식이 이어진다. 이와 함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일원에서는 17시까지 민족영웅 VR가상체험, 근대 대구풍경사진과 태극기역사 전시,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운동 교육·홍보관, 독립선언서 탁본·태극기 바람개비 만들기 독립운동가 의상과 음식 체험, 대구여성 플래시몹, 서예 퍼포먼스 등 시민참여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를 통해 대구시는 시민에게 우리지역 역사·문화 전통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또 중구를 제외한 7개 구·군에서도 관내 지정 장소에서 만세재현 거리행진 등 기념행사를 개최하며, 두류공원 일원에서는 100주년 기념 마라톤대회를, 대구스타디움 일원에서는 장애·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어울림 자전거대회를 개최한다. 3월 이후에도 우국시인 현창 문학제, 상설문화관광프로그램, 명사초청 강연회,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포럼, 대구청년상화학교, 청년도시탐험대, 시민토론회, 호국보훈대상 시상 등의 다양한 기념사업이 시민 참여를 기다린다. 대구시는 앞으로 더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념사업 추진을 홍보하여 시민 참여를 확대하고 3?1운동 및 임정수립 100주년을 시민과 함께 기려 대구의 시민정신을 드높이고 시민에게 애국애족, 애향심을 고취할 계획이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올 한 해가 뜻 깊은 3?1운동 및 임정수립 100주년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시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자발적인 참여를 부탁한다”며,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잘 관리하여 지역사랑, 나라사랑운동과 지역공동체 통합과 화합의 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지혜와 역량을 모아 나가 대구 역사의 전통을 대구시민이 인식할 수 있게 관련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조소앙 선생 ‘대한독립선언서’ 육필 초고 공개

    조소앙 선생 ‘대한독립선언서’ 육필 초고 공개

    조소앙 선생 후손인 조인래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 대한독립선언 100주년을 하루 앞둔 31일 서울도서관 서울기록문화관에서 조소앙 선생의 대한독립선언서 육필 초고를 공개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로 삼균주의를 제창한 조소앙 선생(1887~1958)의 대한독립선언서는 우리 겨레의 첫 번째 독립선언서다. 연합뉴스
  • ‘독도 지킴이’ 김성도씨 사위 독도 이주

    독도 거주 민간인이 곧 3명으로 증가한다. 31일 경북 울릉군과 ‘김성도독도기념사업회’(가칭)에 따르면 독도 서도 주민숙소 리모델링이 끝나는 오는 4월쯤 옛 독도 이장이었던 김성도(2018년 10월 작고)씨의 둘째 사위 김경철(53)씨 부부가 독도로 주민등록을 옮겨 생활할 계획이다. 공무원이었던 김경철씨는 장인 별세 뒤 부인과 함께 독도에 들어가 유일한 거주민인 장모 김신렬(82)씨를 모시고 살기 위해 지난해 말 울릉군 지역공동체경제팀장을 마지막으로 명예 퇴직을 신청했다. 울릉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김복동 할머니 별세] 평균 91세… 남은 23명 시간이 없다,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언제쯤

    “우리가 위로금이나 받으려고 싸웠나” 화해치유재단 해산 등 목소리 높여 여가부 “위안부硏 독립성 확보 총력”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김복동(93)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2명이 지난 28일 한날 세상을 뜨면서 남은 생존자는 23명으로 줄었다. 피해자들이 바라는 건 한 가지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인데 이 상식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여정이 험난하다. 29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평균 나이는 91세로 초고령화됐다. 85~89세가 7명, 90~96세가 15명이다. 최고령인 102세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 4명과 함께 경기 광주 나눔의집에 거주 중이다. 정부가 위안부 피해 생존자 등록을 받기 시작한 1993년 이후 최대 240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한 명씩 숨져 이제 20여명만 생존해 있다. 최근 두 달 새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는 김 할머니 등 4명이다. 김 할머니는 일본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가장 앞장서 요구했던 인물이다. 암 투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수요집회(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해 매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집회) 주최 측을 통해 “아베(일본 총리)는 사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고령을 무릅쓰고 사력을 다해 수요집회 현장에 나와 일본 정부에 끝까지 사죄를 요구하다 숨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진정 어린 사과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5년 12월 한·일 정부가 위안부 문제 봉합을 위해 ‘화해치유재단’ 설립에 합의하며 이듬해 일본이 낸 10억엔으로 화해치유재단이 출범했지만 되레 피해단체들의 격한 항의를 받았다. 당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며 책임을 통감한다”고 표현했지만 이를 진정성 있는 사과로 느낀 피해자는 없었다. 할머니들은 “피해 당사자 의견을 묻지도 않고 정부가 위로금을 받는 조건으로 화해치유를 언급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반발했다. 김 할머니도 생전에 “우리가 위로금을 받으려고 이때까지 싸웠느냐. 위로금을 1000억원을 준다 해도 우리는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장대비가 쏟아지던 지난해 9월 3일 서울 외교부 청사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당시 암 수술을 받아 거동이 어려운 상태였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21일 장관 직권으로 화해치유재단 허가를 취소했다. 여가부 관계자는 “법인 허가를 취소하고 재단에도 이를 통보했다”면서 “이제 법원에서 청산인을 선임하면 본격적인 청산 과정을 밟게 된다”고 말했다. 약 58억원인 재단 잔여 기금 처리 등 청산 절차 완료까지 길게는 1년가량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위안부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자 여가부는 지금까지 진행한 위안부 피해자 관련 연구사업과 기념사업을 재정비할 계획이다. 여가부 관계자는 “기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 사업을 분야별로 추진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사업이 일본군 위안부 연구소”라며 “연구소를 통해 전 세계, 전국에 흩어진 위안부 관련 사료를 수집해 열람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안부 문제를 외교적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과거사 진실 규명에 초점을 맞춰 공신력 있는 자료를 모아 가는 사업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는 여가부가 산하 기관인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위탁해 지난해 8월 출범했다. 그러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별도 조직과 예산이 없는 민간 재단이어서 여가부는 독립성 확보를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서훈 조정 안되고 ‘깜깜이’ 심사… “허점 많은 상훈법 손질해야”

    서훈 조정 안되고 ‘깜깜이’ 심사… “허점 많은 상훈법 손질해야”

    유관순 상향 검토 계기로 개선 목소리 “사회적 공감대 땐 등급 변경할 수 있게” 국회도 공감… 관련 개정안 잇단 발의 행안부 “심판·챙기기 수단 악용 우려 유 열사 특별법 제정이 현실적” 소극적 회의록 미공개… 객관·타당성 확인 못해 ‘국가안전에 관한 죄’ 취소 규정도 모호정부가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유관순(1902~1920) 열사의 독립유공 서훈을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문제점이 드러난 현행 상훈법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상훈법에는 서훈을 확정·취소할 수 있지만 등급을 조정할 조항이 빠져 있다. 또 서훈을 심사하는 공적심사위원회의 회의록 공개 규정도 없어 ‘밀실 심사’가 가능한 구조다. 2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인 상훈법 개정안은 모두 19건이다. 대부분 현행 상훈법이 놓치고 있는 법령상 미비점을 개선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현재 유 열사의 서훈 등급은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다. 일부 독립운동 연구가들은 “유 열사의 서훈 등급이 국민적 인지도에 비해 지나치게 낮다”고 지적한다. 국민들은 서훈 등급이 결정된 뒤라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면 서훈 등급을 재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회도 이런 주장에 공감하고 있다. 이혜훈 바른미래당 의원과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각각 2017년 4월, 9월에 이런 내용을 담은 상훈법 개정안을 냈다. 지난해 7월에도 홍문표 자유한국당 의원이 개정안을 냈다. 그러나 이들 법안은 지금껏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담당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상훈법 개정에 소극적이다. 서훈 재조정이 자칫 지난 정권 관련 인사를 심판하거나 현 정권 인사를 챙겨주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행안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에도 ‘선대 어르신의 상훈을 높여 달라’고 요구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부지기수”라면서 “상훈법이 개정돼 서훈 등급을 바꿀 수 있게 되면 변경 요청이 쇄도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으로서는 여야 합의로 유 열사 단 한 명의 서훈만 승격시키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형평성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등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서훈을 심사하는 공적심사위원회 심사가 ‘깜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법상 회의록 공개 규정이 없어 서훈을 새로 받거나 취소되는 이유가 과연 타당한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강창일 민주당 의원 등은 회의록을 공개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지난해 6월 발의했지만 국회에 계류 중이다. 류정우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회장은 “현재 누가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심사를 담당하는지 알기 어렵다”면서 “위원을 선정할 때 객관성을 담보해야 하고 회의록도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훈 취소 규정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훈 대상자가 공적을 거짓으로 꾸몄거나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저질렀을 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안전에 관한 죄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아 이를 명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경남도,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기념 슬로건 공모

    경남도,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기념 슬로건 공모

    경남도는 26일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슬로건을 공모한다고 밝혔다. 슬로건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경남미래 100년의 비전을 제시하는 내용이면 된다. 형식은 구호형태의 짧은 문구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고 간결해야 하며 기호도 사용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응모할 수 있으며, 슬로건과 슬로건 의미를 적어 오는 2월 6일까지 경남도 홈페이지나 우편 등을 통해 참여하면 된다. 도는 이번 공모를 통해 선정되는 슬로건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때 핵심 홍보 메시지로 활용할 계획이다. 한사람이 2건 이내로 응모할 수 있고 응모작은 심사를 거쳐 최우수 1편 50만원, 우수 1편 30만원, 장려 1편 20만원의 상금을 시상한다. 당선자에게는 경남도에서 주관하는 기념사업에 참석기회도 우선으로 줄 계획이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3·8의거는 4·19혁명 잇는 징검다리”

    “3·8의거는 4·19혁명 잇는 징검다리”

    “대구 2·28과 마산 3·15 학생의거 사이에 대전 3·8 학생의거가 있죠. 3·8의거가 4·19혁명을 잇는 징검다리인 셈입니다.” 김용재(75)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장은 24일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4개 학생의거와 광주 5·18항쟁, 6·10 전국반독재투쟁을 포함한 6대 민주화운동 중 지난해 11월 가장 늦게, 충청권 첫 국가기념일 지정을 받았다”며 이렇게 밝혔다. 이날 3·8기념탑을 세운 대전 서구 둔산동 둔지미공원 명칭이 국가지명위원회 가결을 거쳐 ‘3·8의거둔지미공원’으로 변경되자 “잊혀졌던 대전 학생의거가 자리를 좀 잡아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3·8의거는 1960년 3월 8일 촉발됐다. 대전고 학생 1000여명이 ‘이승만 독재정권 물러나라’, ‘학원 자유를 달라’고 외치며 1㎞ 떨어진 한밭운동장까지 행진했다. 당시 대전고 2학년 진급을 앞뒀던 김 회장은 “대통령 선거 때인데 가정방문 온 교사로부터 자유당을 찍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돌아봤다. 사복경찰이 학교에 상주했다. 운동장 앞에서 행진을 막는 경찰과 육탄전이 벌어졌고 학생 80명과 이들을 선동했다는 빌미로 교사 2명을 붙잡아 갔다. 김 회장은 “기마부대와 학생을 잡아갈 트럭 100여대가 출동했고 소방차로 물을 뿌리며 진압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보문고, 호수돈여고 등 대전 8개 고교 학생들이 합동시위에 나서려고 했으나 사전 발각돼 봉쇄됐다. 학교마다 강제로 9일과 10일 시험일정을 잡아 학생들을 묶어 놓았다. 낙제제도 때문에 시험을 앞두곤 학생들이 꼼짝도 못했다. 그러나 집단적 학생시위는 대전역 주변에서 사흘이나 계속됐다. 교장이 각서를 쓰고 검거된 학생들을 데려왔다. 대전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고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으로 일하는 김 회장은 “3·8의거 참여 후 자유, 민주, 정의를 새기며 살아 왔다”며 “시민 모두 3·8의거를 알 수 있도록 계속해서 알리고 우리나라 민주화의 꽃도 더 필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입을 앙다물었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강동원, 이한열기념사업회에 2억원 기부 뒤늦게 알려져

    강동원, 이한열기념사업회에 2억원 기부 뒤늦게 알려져

    배우 강동원(38)이 이한열기념사업회에 2억원을 기부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3일 이한열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강동원은 지난해 3월 2억원을 특별후원회비로 전달했다. 강동원은 2017년 개봉한 영화 ‘1987’에서 고 이한열 열사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사업회 관계자는 “강동원씨가 기부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아 익명으로 기부했으나 2018 연말 결산 이사회에서 특별후원회비 내역을 설명하면서 기부 사실이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채광석 시인, 두 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 출간

    채광석 시인, 두 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 출간

    채광석 시인이 27년 만에 두 번째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를 출간했다.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는 시집 출간 일주일 만에 예스24 신간 시집/희곡 분야 1위를 기록했으며 2쇄에 돌입했다. 현재 신간문학 5위 및 시집/희곡 TOP 20에 진입했다. 이번 시집에는 잠시 시단을 떠나 있던 채광석 시인의 삶과 철학이 녹아 있다. 30대, 40대를 지나 50대에 들어선 현재까지, 시인의 삶이 현실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언어로 담겨 있다. 특히 3.8.6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그래서 386세대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안, 죄책감, 체념 그리고 새롭게 살아나는 희망과 기대까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전적 시들이 가득하다. 관계자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리얼리즘 시학의 귀환’이라고 평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방민호(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채광석 시인의 시집은 내가 걸어온 모든 것을, 상처와 고통과 죄책감과 새롭게 일어나는 꿈까지도 함께 나누어 갖도록 한다. 이 새로운 시적 자서전이 우리들로 하여금 가슴 깊이 도사린 슬픔과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타인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해설했다. 시집 ‘꽃도 사람처럼 선 채로 살아간다’는 총 4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 90 그리고 서른’은 20대 후반과 30대의 삶이 담겨 있다. ‘제2부 마흔, 무늬 몇 개’에 담긴 40대의 삶은 슬픔과 회한으로 가득하다. ‘제3부 쉰 즈음’에 실린 시를 통해서는 세상을 바꾸고자 했으나 스스로 선(善)이 되지 못한 동료들과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 마지막 ‘제4부 역사의 바깥’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이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담았다. 한용운의 아내 전정숙, 기미년의 기녀들, 중국과 러시아 등 이국 땅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애도한다. 특히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시 ’역사의 바깥32 과꽃‘은 故채광석 시인의 유작 시로 잘못 알려져 회자되기도 했는데, 본 시집의 출간을 계기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편 27년 만에 리얼리즘 시학으로 귀환한 채광석 시인은 현재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종로, 김상옥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

    서울 종로구는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김상옥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21일 밝혔다. 김 의사의 후손, 의열단 후손, 3·1운동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구성된 서울시 ‘시민위원 310’위원 등이 참석한다. 기념식은 김 의사 의거일인 22일 대학로 36-4 인근 지역에서 펼쳐진다. 이곳은 김 의사가 생을 마감하기 전 일본 군경 1000여명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아울러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회는 김 의사 의거 현장 기념 조형물 설치 구상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조형물 디자인은 김 의사가 맞은 총 11발을 상징하는 구멍 11개와 김 의사가 일본 군경들과 싸운 장면이 담긴 구본웅 화백의 시화첩 ‘허둔기’를 활용한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우리 겨레에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김 의사의 행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공권력의 피해자들] “전향 안 한다고 찍힌거죠… 고문한 수사관도 배상책임 지게 해야”

    [공권력의 피해자들] “전향 안 한다고 찍힌거죠… 고문한 수사관도 배상책임 지게 해야”

    남들 다하는 전향서와 준법서약서를 거부하고, 남들 다하는 보안관찰 신고를 하지 않은 강용주(56)씨는 어떤 사람일까. ‘심지가 굳다’, ‘고집이 세다’, ‘악바리다’ 이런 말이 떠올랐다. 강씨는 스스로를 “몸이 편한 것보다는 마음이 편한 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강씨는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14년을 복역했다. 강씨는 감옥에 있을 때, 특별사면으로 출소할 때, 출소하고 나서도 남들과 다르게 살아 왔다.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두 번째로 기소된 사건에서 지난해 2월 무죄를 선고받았다.지난 9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자리한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강씨는 “나는 늘 싸움을 피해 다녔다”며 “보안관찰법 위반 소송도, 그전에 국가보안법 위반 재판도 내가 건 적은 한번도 없었고 그들이 나를 재판이라는 링 위에 올리길래 싸웠을 뿐”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강씨는 2012년 8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초대 센터장을 맡아 5·18 피해자와 유족의 트라우마를 치유했다. →법무부가 지난달 보안관찰처분 면제 결정을 내렸는데 기분이 어땠나요. -보안관찰이랑 싸우기 시작할 때만 해도 감옥에서 산 14년보다 더 길게 싸워야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출소하고 19년을 보안관찰과 싸웠네요. 국가가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것, 우리 사회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징역 3년 이상 받거나 형법상 내란죄나 반란죄로 징역 3년 이상 받으면 보안관찰 대상이에요. 그런데 12·12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이나 노태우는 왜 아닌가요.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행위를 합법화해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까지 됐잖아요.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말로 명백하게 재범의 우려가 있는 거 아닌가요. 저처럼 착실하게 생활하는 사람을 잡아넣을 게 아니라 전두환을 보안관찰 대상에 집어넣어야죠. 저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서 ‘넘버4’로 기소됐어요. ‘넘버1’부터 ‘넘버3’까지는 모두 면제하면서 나만 보안관찰 대상인 이유는 딱 하나죠. 재범 우려는 핑계고 그냥 국가에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감옥에서부터 전향서와 준법서약서를 거부했으니까요. 한마디로 찍힌 거죠.→남들처럼 전향서나 준법서약서에 사인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전향하면 몸은 편하겠지만 제 마음은 불편하죠. 그냥 내가 편하게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어서 전향하지 않았어요. 사건 이름이 ‘구미유학생간첩단´이고, ‘구미’(歐美)는 유럽이랑 미국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미국, 유럽은 물론 북한도 안 가 본 사람이에요. 사건이 벌어진 1985년에는 광주에서만 살던 사람이었어요. 전향할 내용이 없어요. 조작한 것에 내가 굴복할 수 없죠. 안기부에서 한 달 넘게 고문받고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거기 출연해서 안기부가 시킨 대로 주절거렸어요.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만약 전향을 하지 않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강기정 정무수석이 저와 전남대 82학번 동기예요. 강 의원이 2016년 필리버스터 연설 때 ‘지금처럼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가 있었으면 폭력의원이라고 낙인 찍히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며 울었잖아요. 저도 전두환이 저를 고문한 뒤 조작해서 사형을 구형하지 않았다면 전향을 거부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간첩단 사건 대부분이 재심을 청구해서 무죄를 받았는데 왜 재심 청구를 하지 않았나요. -재심을 한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해요. 남산 안기부에서 고문당하던 순간으로요. 트라우마적 상황으로 돌아가는 거죠. 과거의 기억을 다 일깨워야 돼요. 어떻게 잡혔다가 어떻게 고문당했고 그런 일 모두를요. 트라우마를 재경험한다는 건 정말 힘들어요. 회피하고 도망가고 싶죠. 제가 광주 사람인데 서울에서 개업했잖아요. 광주에서 도망 나오고 싶어서예요. 게다가 한창 다들 재심을 신청할 때 저는 인턴, 레지던트여서 시간이 정말 없었어요. 최근 들어서는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기소돼서 시간적, 감정적 여력이 없었죠. 근본적으로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회복을 하는 건 개별적 구제가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은 어떻게 맡으셨나요. -2008년 6월 전문의를 땄는데 한국에서 과거사 진실규명 관련 재심 등이 많이 진행되던 상황이었어요. 기념관을 짓거나 기념사업회를 만드는 경우는 많은데 정작 고통당한 인간의 내면과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소홀하더라고요. 한국의 과거 청산은 물신주의적 과거청산이에요. 고통당한 피해자의 아픔이 도외시된 과거 청산이죠. 인권활동가와 인권변호사들 권유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문요한씨와 강남 봉은사에서 고문피해자치유모임을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고문피해자지원센터를 만든다고 광주시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 분야를 알거나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와 달라고요. 당시에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개인병원을 하고 있어서 못 간다고 했어요. 무엇보다도 저는 5·18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서 광주에서 도망친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광주에 내려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러 사람이 저를 설득하더라고요. 결국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의대 다니고, 전문의 따고, 개원해서 통증 전문으로 일한 것이 결국 국가폭력 피해자, 고문 피해자를 만나기 위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광주로 가게 됐죠. 나는 결국 광주와 같이 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달까요. →광주트라우마센터는 어떤 일을 하나요. -5·18을 비롯한 국가폭력 생존자와 가족들을 치유하는 기관이에요. 단순 치유뿐만 아니라 이분들이 사회 속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재활 사업도 해요. 결과적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인권옹호 활동도 하고요. 단순한 의료기관하고는 달라요. ‘전두환이 민주주의 아버지다´는 망언을 듣거나 육군사관학교 사열을 받는 걸 보면 트라우마적 상황이 다시 옵니다. 전두환이 군인을 이용해서 광주시민을 학살했는데, 군인을 양성하는 육사에서 사열을 받는 모습을 보고 ‘세상이 변하지 않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럼 트라우마센터를 찾아오는 거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트라우마센터에서 응급지원팀을 꾸려서 상담을 해요. 국가 폭력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진실규명이에요. 어떻게 죽었고, 왜 죽었냐는 거죠. 5·18도 진실이 다 드러나지 않았어요. 전두환과 노태우가 5·18로 처벌받지 않았잖아요. 첫 번째가 진실규명이라면 다음으로는 가해자가 처벌받아야죠. 그래야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죠. 정의가 실현된 뒤에는 피해자와 생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상이 이뤄져야 하고요. 그걸로만 끝나면 그런 일이 또 생길 수 있으니까. 국가가 사과하고 재발 방지책을 세워야 해요. 재심에서 무죄를 받으면 고문한 수사관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하잖아요. 국가에서 수십억원을 배상하는데 정작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책임을 안 져요. 고문한 수사관도 공동배상해야 돼요. 나쁜 짓 해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당연히 되풀이되죠. →본인의 트라우마는 어떻게 이겨 냈나요. -트라우마는 이겨 내는 게 아니에요. 극복하는 것도 아니에요. 넘어져서 무릎 까지면 상처가 아물어도 흉이 남잖아요. 그냥 그렇게 견디며 사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바윗돌 같던 게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조금씩 천천히 작아지거든요. 서로 상처를 보듬고 껴안고 살아가는 거죠. 그걸 어떻게 이기고 극복하고 살 수 있겠어요. 저는 광주트라우마센터에 가서 다른 분들을 치유하면서 도리어 제가 치유받는 경험을 했어요. 제 상처가 둥글둥글해지더라고요. 아픔도 조금 작아지고요. 그게 저한테는 치유였던 것 같아요.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김기중 기자의 책 골라주는 남자] 임정 수립 100주년 역사서 옥석 가리기

    올해는 3·1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부에서 지난해부터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분위기를 띄우고 있습니다. 출판계도 최근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관련 서적이 간간이 보이더니, 최근에는 인문·사회 분야뿐 아니라 어린이 책과 소설 분야에서 활발히 책이 나옵니다. 관련 정보는 물론 일제강점기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직접 좇은 책, 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소설 등이 눈에 띕니다. 책을 접하면 우선 반갑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히 지난해까지만 해도 다들 별 관심 없었으니까요. 다양성 측면에서 이런 책은 많이 나와야 합니다. 다만, 최근 경향에 맞춰 이벤트성으로 낸 책들도 눈에 보입니다. 역사는 역사가만 다루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불분명한 사실을 마치 사실인 양 기술하거나 왜곡하는 일,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자료를 마구 짜깁기해 책으로 내놓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런 책일수록 재미가 없고 구성도 투박합니다. 이벤트에 맞춰 급하게 내놓으려면 자료 조사도 미흡했을 것이고, 당연히 재미가 떨어질 겁니다. 기본적인 사실이 어긋나고 주장을 내세우면서 결국 엄숙하고 비장하라고 강요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독자들은 이런 분야 자체에 등을 돌릴 가능성이 큽니다. 지난주 읽었던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반비)은 역사를 어떻게 다루느냐를 보여 준 책이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예술관이라 불리는 독일 베를린시의 역사 기억 방식을 보여 주는 조형물들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조형물, 광고물 하나에도 오랜 기간을 들인 까닭에 굉장히 세련된 느낌을 줍니다. 버스 광고 형식으로 소개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한 정보라든가, 2700여개가 넘는 유대인 추모비 등은 직접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100주년이어서, 그저 광풍처럼 한 번 쓸고 가는 게 아니라 오래 노력하고 공들인 책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행히 출판사 몇 곳이 이런 책을 준비 중이라 하니, 책골남이 옥석을 골라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gjkim@seoul.co.kr
  • [단독] 靑, 3·1절 김정은 서울 답방 추진한다

    [단독] 靑, 3·1절 김정은 서울 답방 추진한다

    金 안되면 고위급 대표단 초청 검토 평화 가속화·관계 진전 동력 살리기 북·미정상회담 개최 일정 ‘최대 변수’청와대가 올해 3·1절을 계기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지난해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남북이 공동으로 기념하고, 그를 위한 실무적 방안을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고 합의한 바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16일 “문 대통령이 ‘선(先) 2차 북·미 정상회담-후(後) 답방’ 프로세스를 밝힌 만큼 북·미 회담 일정이 최대 변수지만, 3·1절 답방이 이뤄진다면 북한 최고지도자의 첫 방문이라는 의미에 100주년을 남북이 함께 기념한다는 역사적 무게를 더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북 정상이 함께 3·1절 기념식에 선다면 답방 자체도 역사상 처음이지만 3·1절에 양 정상이 함께 기념사를 밝히는 것도 초유의 일이란 점에서 의미가 배가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강조하고 지난해 대통령 직속기구로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켰다. 정상회담 당시 3·1운동 공동기념 구상을 적극 설득한 것도 문 대통령이었다. 북한도 ‘3·1 민중봉기’로 부르며 역사적인 날로 기념하고 있다. 청와대로선 북·미 관계와 남북대화의 보폭을 맞춘다는 대전제에는 변화가 없지만, 남북관계를 한 단계 진전시키고 불가역적 평화 기반을 다지려면 답방의 동력이 소실돼서는 안 된다는 판단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답방은 그 자체로 남북관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대전환의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직까지 남북 간 구체적 협의는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17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워싱턴행 등 최근 무르익는 북·미 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답방 추진을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3·1절 답방 성사 여부는 북·미 정상회담 일정과 맞물려 있다. 북한의 제한적 대남·대미관계 인력풀, 특히 의전·경호에 어느 때보다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미 회담과 답방을 동시에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북·미 정상회담이 2월 중순 이후라면 답방도 늦춰질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이 관계자는 “북·미 회담이 늦춰져 3·1절 답방이 여의치 않더라도 ‘플랜B’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 고위급 대표단이 내려온다면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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