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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연평해전 희생 뒤에… 유도탄고속함 도입, 전사자 보상 신설

    제2연평해전 희생 뒤에… 유도탄고속함 도입, 전사자 보상 신설

    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 해군 참수리 고속정 357호정 정장(대위)이었던 윤영하 소령은 253편대 기함인 358호정과 함께 기습도발을 감행하던 북한 경비정 차단 작전에 투입됐습니다. 북한 경비정은 북방한계선(NLL)을 1.1㎞가량 침범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25분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속도를 줄이면서 참수리 357호정과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고, 참수리호의 좌현이 노출됐습니다. 이때 북한군이 갑자기 85㎜포로 기습공격을 했습니다. 150m 거리에서 날아든 포탄에 순식간에 357호정 조타실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함교에 올라와 있던 윤 소령은 즉각 대응사격 명령을 내렸지만 연이어 날아든 총탄에 피격돼 안타깝게 산화했습니다. 당시 참수리호 함교는 지붕과 벽면이 없었기 때문에 윤 소령의 위치가 그대로 노출됐고 적의 집중적인 사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함교 아래 조타실에서는 조타장 한상국 상사가 치열한 교전 과정에 가슴에 흉탄을 맞았습니다. 그는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 끝까지 키를 놓지 않은 상태로 숨을 거뒀습니다.적의 포화는 20㎜ 벌컨포 사격을 맡은 병기사 황도현 중사에게도 집중됐습니다. 그는 포탄 파편이 머리 쪽으로 날아드는 순간에도 몸을 피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고, 그 모습 그대로 발견돼 동료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습니다. 40㎜ 함포로 적함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던 병기사 조천형 중사도 좌석에서 화재로 숨지는 순간까지 함포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M60 기관총으로 사격하던 서후원 중사는 적함의 저격수에게 희생됐습니다.●희생 장병들 방아쇠 놓지 않고 끝까지 응전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병장은 한 명의 전우라도 더 살리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내달렸고 서 중사가 쓰러지자 직접 M60 기관총을 붙들고 응사하는 투혼을 보였습니다. 그에게 다시 총탄이 쏟아졌고 온몸에서 100여개의 총탄과 파편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과다 출혈로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인공호흡기와 수많은 의료기기를 단 상태로 사투를 벌인 박 병장은 결국 84일 만에 숨을 거뒀습니다. 북한 경비정은 함께 반격하는 358호정은 그대로 두고 집요하게 357호정만 공격해 6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윤 소령을 포함한 모든 장병이 목숨을 걸고 반격해 적 경비정을 NLL 북쪽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권기형 상병은 왼손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간 상태에서도 한 손으로 소총 탄창을 갈아 끼우며 대응 사격을 했다고 합니다. 황창규 중사는 적의 기습공격으로 40㎜ 함포의 전원 장치가 손상되자 수동 사격으로 전환해 적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당시 부장(중위)이었던 이희완 중령은 지휘관인 윤 소령이 전사하자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는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이들의 분전으로 적함도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갑판이 대부분 부서진 채 NLL 북쪽으로 퇴각했습니다. 참수리 357호정은 적과의 교전에서 큰 상처를 입고 결국 침몰했습니다. 조타장 한 상사가 바닷속에 가라앉은 357호정 조타실에서 발견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함정 추진 방식 프로펠러→워터제트로 당시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오후 8시에 열리는 터키와의 한일월드컵 3·4위전에 쏠려 있었습니다. 이날 갑작스러운 비보가 전해지자 국민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정부는 6용사의 투혼을 기리는 뜻에서 각각 1계급 특진을 추서하고 윤영하 소령, 박동혁 병장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을, 한상국 상사와 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을 서훈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여러분이 뉴스로 보거나 영화로 봤던 ‘제2연평해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분전과 헌신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유산’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전 당시 북한 경비정 대응지침(교전수칙)은 ‘경고방송 →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5단계였습니다. 이것이 ‘경고방송→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 등 3단계로 단순화됐습니다. 단계별 조치를 취하다 기습공격을 받은 참수리호의 교훈을 되새기는 의미였습니다.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서해 NLL의 경비는 130t급의 참수리 고속정(PKM)이 맡았지만, 지금은 400t급 유도탄고속함(PKG)과 검독수리(230t)급 신형 고속정(PKMR)이 맡고 있습니다. 검독수리급 고속정은 76㎜ 함포와 130㎜ 유도로켓을 장착해 원거리에서 북한 경비정을 타격할 수 있게 했습니다. 특히 함교를 함 구조물 내부로 넣어 정장이 비바람은 물론 적의 표적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외관 구조를 대폭 개선했습니다. 또 윤영하함(400t)급 유도탄고속함은 레이더에 잘 탐지되지 않는 스텔스 선체에 76㎜ 함포와 대함유도탄을 장착했습니다. ‘프로펠러’로 기동하던 함정의 추진 방식도 ‘워터제트’로 바꿔 기동력을 높였습니다. 새로 건조된 유도탄고속함에는 윤 소령을 포함한 6용사의 이름이 차례로 붙여졌습니다.●16년 지난 작년에야 특별법으로 전사자 예우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일반순직’으로 처리됐습니다. ‘전사자’를 전사자로 부르지 못하고 ‘순직자’로 규정해버린 것입니다. 당시 ‘군인연금법’에는 ‘전사’에 대한 보상규정이 없었고, 분노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공무상 사망’ 보상기준에 따라 1인당 3000만~6000만원의 보상금을 제공하는데 그쳤습니다. 정부에서 돈을 줄 근거가 없다 보니 성난 국민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으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후 2004년 법 개정을 통해 군인연금법에 ‘전사’에 대한 보상기준을 신설했지만 정작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는 소급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16년이 지난 지난해 7월에야 ‘제2연평해전 전사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이에 따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6명의 유족에게 추가 보상금(1인당 1억 4400만~1억 8400만원)을 지급하게 됐습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가 이제야 도리를 다하게 됐다”며 국방부 장관에게 유족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한 해군 관계자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희생으로 보상제도 등 군 체계가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이라며 “군은 피를 흘리면서 발전하지만, 한편으로 그때 전사하신 분들의 아픔이 너무 컸다”고 토로했습니다. 제2연평해전 직전 윤 소령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경기장에 갈 수는 없지만 온 국민과 함께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남긴 갚진 유산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스툴/조항록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스툴/조항록

    스툴 / 조항록 시야에 안개가 끼고 다리는 갈대처럼 흔들린다. 백기를 목에 두르고 나에게 손짓하는 자 누구인가? 피의 맛과 땀의 맛이 입안에 고인다. 미각으로 느끼는 야릇한 혼돈이 머릿속에 피안의 무늬를 그린다. 오래 단련한 근육은 수수깡같이 허무하고, 여차하면 숨이 까맣게 막히는 지옥이 있다. 누가 나에게 박수와 야유로 가학적 희망을 논하는가? 납덩이를 동여맨 발목이 흐느낀다 전 생애를 비틀거려 주저앉는 외딴섬 헐떡이는 심장을 가까스로 올려놓는 자그만 섬. 저기, 남은 라운드가 적적하다. ***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링 위에 외롭게 선 권투선수와 같다.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를 괴롭히고 일본은 등 뒤에 야비한 방식으로 칼을 꽂는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의 기관총에 맞서 장태(대나무로 엮어 볏짚을 채운 통)를 굴리며 죽창으로 싸웠다. 패전 뒤 동학 부역자라는 명목으로 살육을 당한 흰옷 입은 사람들의 피로 반도의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당신은 지금 권투선수의 스툴(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그날의 비극을 답습할 것인가. 마우스피스를 다시 끼고 벌떡 일어나 싸우자. 다시는 야만족에게 우리의 생목숨을 건네지 말자. 곽재구 시인
  • 이탈리아, 극우세력 압색 중 미사일 발견

    이탈리아, 극우세력 압색 중 미사일 발견

    이탈리아 당국이 극우 인사들의 근거지를 수색하던 중 공대공 미사일과 전쟁용 무기들을 대거 적발했다. 15일(현지시간) AFP통신에 따르면 이탈리아 경찰은 네오 파시스트 정당인 포자 누오바당 후보였던 파비오 델 베르기올로 등 3명을 체포했다. 경찰은 베르기올로의 집 등을 급습한 결과 245㎏짜리 만트라 공대공 미사일과 기관총, 로켓발사기 등 전쟁무기를 무더기로 압수했으며, 네오나치 용품과 히틀러 기념품도 다량 발견했다. 경찰은 “공대공 미사일은 카타르 군이 쓰던 것으로 사용이 가능한 최상의 상태로 발견됐다”면서 “현장에서 압수한 무기 중엔 최신형 돌격 소총도 있다”고 밝혔다.이탈리아 언론은 베르기올로가 길이 3.54m에 달하는 이 미사일을 47만 유로(약 6억 2400만원)에 판매하려 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미사일 탄두에 폭발물은 없었지만 전쟁에 특화된 세력은 얼마든지 이를 재무장해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 미사일 전문가는 AFP통신에 “사용 가능성은 낮지만 공대공 미사일 용도를 지대공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면서 “하지만 좋은 기술자와 장비가 없으면 이는 극히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번 급습은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반군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극단주의자들을 경찰이 내사하던 중 베르기올로가 미사일을 판매하기 위해 와츠앱 메신저로 사진을 보낸 것을 확인했다. 경찰은 급습에서 스콜피온 기관총 등 총기류 26정, 306개의 화기 부품, 총검 20자루 등을 발견했다. 경찰은 베르기올로 이외에도 파비아 지방에서 미사일을 소지하고 판매한 혐의로 용의자 2명을 체포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글로벌 In&Out] 한국사가 잊어버린 한인 영웅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한국사가 잊어버린 한인 영웅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1941년 6월 22일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유럽 대륙을 정복하고 새로운 ‘생활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동맹국 독일이 소련의 자원을 빼앗고 ‘불필요한 인구를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독일 침략에 맞서 싸운 소련의 붉은 군대는 4년 동안 피를 흘려 가면서 나치독일 침략자들을 패배시켰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1945년 8월 대일전쟁에 참여해 한반도 북부를 해방했다. 전 세계를 나치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전쟁에 소련에 거주하던 한국인들도 참전해 불멸의 공로를 세웠다. 2011년에 신 드미트리, 박 보리스, 최 발렌틴 등 연구자들이 방대한 분량의 사료를 분석한 ‘1941~1945년 위대한 소련 조국전쟁 고려인들의 참전록’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독소전쟁 한인 참전자 372명과 관련된 사료, 회고록, 신문기사 등이 수록됐다. 소련에서 나치독일과 싸워 유럽과 아시아 해방에 크게 기여한 한국인들의 참여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자료는 ‘붉은 군대 훈장수여증명서’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제116사단 제246반전차대대 부대장 지(池 또는 智) 대위가 1942년 4월 22일 오전 5시에 예정된 아군 보병부대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용감성을 발휘해 최전방 정찰부대가 위치한 곳에 44㎜ 대포를 설치했다. 새벽이 되자 측면사격으로 적군 중기관총 5대와 토목화점 2개를 파괴한 것으로 ‘용맹’ 훈장을 수여받았다. 제4돌격군 소속 함 니콜라이는 1943년 8월 6일 독일군 방어선을 공격할 때 돌파구에서 분산된 부대들을 통합해 지휘관으로서 전투를 계속했다. 198.5 고지 전투에서 함 대위는 전차들을 위해 교량과 도로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면서 누구보다 먼저 고지에 돌격해 독일군 장병 3명을 직접 제거했다. 함 대위는 1944년 1월 6일 벨라루스를 해방하면서 영웅적으로 전사했다. 유럽 해방에 공로를 세운 한인도 있다. 예컨대 제233 붉은 깃발 사단에 속한 김 니콜라이 중좌는 전쟁 첫날부터 제3우크라이나 전선의 일원으로 헝가리 수도인 부다페스트 공세작전에 참전해 1급 조국전쟁 훈장을 수여받았다. 살벌한 방어전을 치른 후 김 중좌가 지휘한 연대는 1945년 3월 20일 공격을 개시해 적군을 격파하고 시몬토르냐라는 마을을 점령했고 카포시 수로를 건너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3월 23일에 김 중좌의 정확하고 능숙한 지도로 적을 패주시켜 약 500명의 독일군 장병을 제거했다. ‘소련의 영웅’이라는 최상위의 칭호이자 가장 높은 훈격을 수여받은 한인 민 알렉산드르도 있다. 만 26세의 청년인 그는 1941년에 입대해 가장 어려운 전투를 감당한 전선군 중 하나인 브랸스크 전선군에 파견됐으며 대위 계급을 수여받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1944년 7월 9일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훈장수여증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볼린 주 전투에서 민 동무는 그 부대의 전장으로 가서 직접 대대를 지휘하면서 적군 5개의 반격을 퇴치하고 전진할 수 있었다. 스타리예 코샤르 마을 전투에서 민 동무와 그 대대는 용감하게 우회작전을 실시해 마을을 해방했다. 육박전이 된 이 전투에서 민 동무는 직접 그 대대를 지휘했다. 그 후 파로두브 마을 전투 때에도 민 동무는 전장에 직접 섰으며 부대를 지휘하다가 영웅적으로 전사했다. 용감성과 영웅의 기질을 발휘한 민 동무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독소전쟁의 거의 모든 큰 전투에 한인들이 참여했다고 확인됐다. 모스크바 전투에 적어도 2명, 레닌그라드 방어전에 21명,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16명, 쿠르스크 전투에는 8명, 베를린 공세작전에 11명 그리고 1945년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첫 승리 퍼레이드에는 한인 2명이 참가했다.
  • 美, 대만에 미사일 등 2조원대 무기 판매… 中 “난폭한 내정간섭”

    에이브럼스 전차 등 장비 훈련까지 지원 中 “엄정 교섭 제기에도 주권 침해” 반발 美상무부, 중국산 구조용 철강 관세 부과 의회는 “스파이 네트워크” 화웨이 때리기 미국 정부가 대만이 요청한 22억 달러(약 2조 6000억원) 규모의 무기 판매 계획을 승인했다. 미중 무역 전쟁에 따른 양국 갈등은 안보 부문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 국방부 국방안보협력국(DSCA)은 8일(현지시간) 보도자료를 통해 대만에 M1A2 에이브럼스 전차 108대와 스팅어 휴대용 방공 미사일 250기, M88A2 허큘리스 구난전차, M1070A1 중장비 수송차, M2 중기관총 등을 판매하는 계획을 국무부가 승인했다고 밝혔다. 미 정부는 이들 장비 운용과 훈련에 필요한 지원활동도 할 예정이다. DSCA는 “대만은 군대 근대화와 방어력 유지를 위해 계속 노력을 하고 있다”며 “이를 지원하는 것은 미국의 국가 안보는 물론 경제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만에 무기 판매가) 역내 기본적인 군사적 균형 관계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미 정부는 해당 무기의 대만 수출 방안을 미 의회에 통보했다. 이번 무기 판매 계획안은 미 의회 통과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 의회는 표결을 통해 무기 판매를 거부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미 하원은 지난 5월 미국이 대만 국방전력 강화를 지원하고 대만 국제기구 활동을 지지하는 내용의 ‘2019 대만 보증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미국은 이와 함께 중국산 구조용 철강을 겨냥해 보복관세를 부과했다. 미 상무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중국이 불공정한 보조금을 지급해 제조업체들이 이득을 봤다”며 “연방 세관국경보호국(CBP)에 철강 수입업체들로부터 현금 예치금을 거두도록 지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상무부의 예비조사 결과 중국은 30.3~177.4%의 정부 보조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무부는 오는 11월 최종 판정을 내릴 예정이다. 미국이 지난해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구조용 강재는 8억 9750만 달러에 이른다.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에 대한 미 의회의 견제도 계속되고 있다. 더힐에 따르면 마샤 블랙번 상원의원은 폭스뉴스에 출연해 중국이 화웨이를 통해 세계 각국에 스파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그들(중국)이 뭐라고 말하든 화웨이는 국영이며 우리는 이 기업이 국영이고 스파이 활동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우리는 이런 위험 때문에 화웨이가 우리는 물론 동맹국들의 차세대 이동통신(5G) 네트워크 구축에 참여토록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9일 브리핑에서 “미국은 중국의 내정에 난폭하게 간섭했고 중국의 주권과 안보 이익을 훼손했다”며 “중국은 강렬한 불만과 반대를 표시했다. 이미 미국에 엄정한 교섭을 제기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엄수하고 3개 공동성명을 준수하며, 즉각 무기 판매 계획을 취소하고 대만 군대와의 연락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한국사가 잊어버린 독소전쟁의 한인 영웅들

    한국사가 잊어버린 독소전쟁의 한인 영웅들

    한국에서 6월말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십중팔구 6·25남침이라는 대답이 들릴 것이다. 그것은 물론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이며 그 상처들은 아직도 완치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9년 3일 전인 1941년 6월 22일에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바꿀 또 한 가지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이 선전포고도 없이 소련을 침략한 것이다.유럽 대륙을 정복하고 새로운 ‘생활권’(Lebenstraum)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동맹국 독일이 유발한 이 전쟁은 소련의 자원을 빼앗고 ‘불필요한 인구’를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만약 독일이 성공했다면 전 세계가 몇 개의 민족들이 강제 지배하는 암흑시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의 해방도 없었을 것이고 한국 문화가 일제에 의해 완전히 말살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1941년 6월 22일 독일 침략에 맞서 싸운 소련의 붉은 군대는 4년동안 피를 흘려 가면서 나치독일 침략자들을 패배시켰으며, 1945년 8월에 미국의 요청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하였고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북부를 해방하였다. 물론 이 전쟁은 단순히 러시아인들과 독일인들 간의 전쟁이 아니라 러시아족을 비롯한 소련의 모든 민족들이 참여한 전쟁이었으며, 그 중 침략 당시에 소련에 거주한 한인, 소위 ‘고려인’들도 있었다. 이 기사에서 유럽, 나아가 전 세계를 나치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전쟁에서 불멸의 공로를 세운 한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문서보관소의 폐쇄 등으로 제2차 세계대전 한인 참가의 연구는 오랫동안 큰 제약을 받고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러시아의 문서보관소가 개방되면서 일반 연구자들도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2011년에 신 드미트리, 박 보리스, 최 발렌틴 등 연구자들이 방대한 분량의 사료를 분석한 ‘1941년~1945년 위대한 소련 조국전쟁 고려인들의 참전록’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독소전쟁 한인 참전자 372명과 관련된 사료, 회고록, 신문기사 등이 수록되었다.1941년 당시 소련에 거주하는 한인에게 붉은 군대에 입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37년 국가안보의 이유로 극동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소련의 한인들은 신뢰할 수 없는 민족으로 간주되어 붉은 군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온 전문군인들도 강제 전역되었다. 1937~1938년 대숙청이 끝난 후 그 일부는 군대에 복귀되었지만, 많은 한인에게 붉은 군대 입대권은 여전히 거부되고 있었다. 하지만 1941년 6월 22일, 독일 침략의 소식이 알려지자 각각 도시와 농촌의 군사동원부 앞에서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고 나치즘이라는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 붉은 군대에 지원하려는, 애국열과 투쟁열에 불타오르는 소련 모든 민족 젊은이들의 기나긴 줄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한인들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당시 군대에 입대하면 전선에서 나치침략자들과 싸우는 전선군대와 후방에서 전선부대들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노동군대 등 2가지의 길이 있었다. 물론, 입대에 성공한 많은 한인은 전선에 가지 못해 노동군대에 파견되어 무기생산이나 방어시설 건설 등에 전선부대들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역사 앞에서의 책임을 자각하는 많은 한인 젊은이들은 전선에 가는 것을 꿈꾸고 이를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였다. 입대지원서에 출신지, 민족에 대하여 위조한 사실을 신고하고 입대하는 경우가 제일 많았고 이름을 바꾸고 입대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보다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41년 노동군대에 동원된 차가이 씨가 전선에 가기 위해 3번이나 탈영 시도했고 결국 성공하여 고리키 시에 도착하고 노동자로 일하다가 다시 동원되어 전선에 파견되었다. 1941년 8월 노동군대에 동원된 황동국은 스탈린에게 “소비에트 조국의 원수들과 직접 싸우게 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 1942년 9월에 입대했으며 중사라는 계급을 수여받고 대전차포의 지휘성원으로 베를린 공세작전에서 참여하였다.우리에게 나치독일과 싸워 유럽과 아시아 해방에 크게 기여한 한인들의 참여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지는 자료는 그 공로의 기록이 나오는 붉은 군대 훈장수여증명서이다. 러시아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훈장수여 관련 자료는 너무 방대해서 연구가 완료되어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 중 대표적인 예들을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제116사단 제246 반전차대대 부대장 지(池 혹은 智) 대위가 1942년 4월 22일 오전 5시에 예정된 아군 보병부대의 공격을 지원하지 위해 용감성을 발휘하여 최전방 정찰부대가 위치한 곳에 44㎜ 대포를 설치하였다. 새벽이 되자 측면사격으로 적군 중기관총 5대와 토목화점 2개 파괴한 것으로 ‘용맹’ 훈장을 수여받았다. 제4돌격군 소속 함 니콜라이는 1943년 8월 6일 독일군 방어선을 공격할 때 돌파구에서 분산된 부대들을 통합시킨 후 그 지휘관으로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198,5 고지 전투에서 함 대위는 전차들을 위해 교량과 도로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면서 누구보다 먼저 고지에 돌격하여 독일군 장병 3명을 직접 제거하였다. 함 대위는 1944년 1월 6일 벨라루스를 해방하면서 영웅적으로 전사하였다.유럽 해방에 공로를 세운 한인도 있다. 예컨대, 제233 붉은깃발사단에 속한 김 니콜라이 중좌는 전쟁 첫날부터 참전하였으며 제3우크라이나전선의 일원으로 헝가리 수도인 부다페스트 공세작전에 참여하여 1급 조국전쟁 훈장을 수여받았다. 살벌한 방어전 후 김 중좌가 지휘한 연대는 1945년 3월 20일 공격을 개시하여 적군 부대들을 격파시키면서 시몬토르냐라는 마을을 점령하였으며 카포시 수로를 건너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3월 23일, 김 중좌의 정확하고 능숙한 지도 하의 그 연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패주시켜 약 500명의 독일군 장병을 제거하였다. 소련의 영웅이라는 최상위의 칭호이자 가장 높은 훈격을 수여받은 한인 민 알렉산드르도 있다. 만 26세의 청년인 그는 1941년에 입대해 가장 어려운 전투를 감당한 전선군 중에 하나인 브랸스크 전선군에 파견되었으며 대위 계급을 수여받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1944녀 7월 9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러시아문서보관소에서 보관되어 있는 그의 훈장수여증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볼린 주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민 동무는 그 부대의 전장으로 가서 직접 대대를 지휘하면서 적군 5개 반공격을 퇴치하고 전진할 수 있었다. 스타리예 코샤르 마을 전투에서 민 동무와 그 대대는 용감하게 우회작전을 실시하여 마을을 해방하였다. 육박전이 된 이 전투에서 민 동무는 직접 그 대대를 지휘하였다. 그 후 파로두브 마을 전투 때에도 민 동무는 전장에 직접 섰으며 부대를 지휘하다가 영웅적으로 전사하였다. 용감성과 영웅의 기질을 발휘한 민 동무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독소전쟁의 거의 모든 큰 전투에 한인들이 참여했다. 모스크바 전투에 적어도 2명, 레닌그라드 방어전에는 21명,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는 16명, 쿠르스크 전투에는 8명, 베를린 공세작전에는 11명, 그리고 1945년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첫 승리 퍼레이드에는 한인 2명이 참가했다. 전선에 나가 파시즘과 싸운 한인 중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은 소련의 다른 민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나치 독일을 막음으로써 그 희생과 공훈이 한국 해방으로의 길을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람들을 기념하는 한국 영화는 아직 한 편도 없다. 최근에 나온 영화 중에 독소전쟁과 관련이 있는 유일한 것은 ‘마이웨이’이라는 영화이지만, 그는 냉전 시대에 할리우드로부터 들어온 선입견에 사로잡혀 독소전쟁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풍자화를 그리고 있다. 1941년에 발발하고 1945년 5월 9일에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식된 이 전쟁은 한민족을 비롯한 그 전쟁에 참여한 모든 민족들의 공동 공로이며, 한인들의 독소전쟁 참전 역사를 연구하고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 영원토록 남게 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들의 중요한 과제이며 거룩한 임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국내 기술로 개발된 감시정찰용 무인수상정 ‘해검’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국내 기술로 개발된 감시정찰용 무인수상정 ‘해검’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해군사관학교가 위치한 진해에서는 2019 창원 해양방위산업전이 열렸다. 2박 3일간 펼쳐진 일정은 국제 해양방산 전시회 및 기술 교류행사, 방산기업 수출상담회, 국제학술포럼과 컨퍼런스 등으로 구성됐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LIG 넥스원이 개발한 해검의 해상시연모습이 일반에게 최초 공개되었다.2015년 12월 방위사업청 및 민군협력진흥원이 지원하는 민군기술적용 연구사업을 통해 감시정찰용 무인수상정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LIG 넥스원이 개발 주관기관으로 선정되어 '해검(海劍)'이 탄생된다. 이후 해검은 2017년 해군 주관으로 감시정찰 및 해양 재해‧재난 현장 투입 등에 대한 군 운용개념과 작전 요구 성능 정립을 위한 시범운용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해검은 길이 8m에 무게 3t으로 디젤엔진을 동력으로 워터제트(Water Jet) 추진방식을 사용한다. 최고 속력은 40노트로 해상 상태 4 상황에서도 항해가 가능하다. 최대 운용시간은 15노트로 항해 시 8시간으로 항속거리는 12㎞에 달한다.선체는 FRP 즉 섬유강화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국내 개발된 전자광학(EO/IR) 및 레이더가 탑재되어있다. 레이더의 최대 탐지거리는 5㎞로 알려져 있으며, 전자광학장비는 주간 6㎞, 야간 3㎞까지 탐색이 가능하다. 이밖에 자율운항 제어, 통신 모듈 및 임무장비 등을 탑재하였으며, 전자‧IT‧인공지능과 선박선형 플랫폼 등의 기술을 융합해 제작되었다. 또한 경로를 설정하면 무인으로 해역을 감시‧정찰할 수 있는 자율주행 이동이 가능하며, 이외에도 스스로 해상 장애물 회피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주요 임무로는 불법 어선 등의 특정 이동물체 추적과 위험지역 감시정찰 등을 수행한다. 정찰 및 감시 임무 외에 공격임무도 가능하다. 해검의 선체 앞부분에는 무장을 장착할 수 있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무장으로는 K6 12.7㎜ 중기관총이 장착된 원격사격통제체계가 사용된다. 또한 LIG 넥스원이 만든 현궁 대전차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으며, 현궁 대전차 미사일의 최대 사거리는 3㎞에 달하며 발사 후 망각 방식을 사용한다. 이밖에 해상방제 및 소방에 사용할 수 있는 원격통제 소화포도 장착이 가능하다. LIG 넥스원은 해검에 이어 스텔스 성능과 무장운용능력을 향상한 해검 2를 개발 중이다. 지난 2018년 11월 14일 개최된 ‘기계의 날’ 기념행사에서 LIG 넥스원이 개발한 ‘감시정찰용 무인수상정’ 기술이 ‘2018 올해의 10대 기계기술’로 선정됐다. LIG넥스원은 2017년에도 ‘위성용 안테나 경량화 기술’이 올해의 10대 기계기술로 선정된 바 있다. ‘올해의 10대 기계기술’은 국내 기계분야의 우수 기술·제품 개발자의 노고를 치하하고 우수성을 대외에 알리자는 취지로 한국기계기술단체총연합회가 2013년부터 선정 및 시상하고 있다. 김대영 군사평론가 kodefkim@naver.com
  • [밀리터리 인사이드] ‘제2연평해전’의 유산…잊지 않겠습니다

    [밀리터리 인사이드] ‘제2연평해전’의 유산…잊지 않겠습니다

    제2연평해전 17주년…北 기습도발로 발발윤영하 소령 등 희생으로 軍보상제도 개선비바람조차 못 피하던 ‘고속정’ 신형 투입‘6용사’ 포함 고속정 대원 헌신 늘 기억해야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 해군 참수리 고속정 357호정 정장이었던 윤영하 소령은 253편대 기함인 358호정과 함께 기습도발을 감행하던 북한 경비정 차단 작전에 투입됐습니다. 북한 경비정은 북방한계선(NLL)을 1.1㎞ 가량 침범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윤 소령은 북한 경비정에 차단기동을 하면서 경고방송을 했습니다. 오전 10시 25분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속도를 줄이면서 참수리 357호정과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고, 참수리호의 좌현이 노출됐습니다. 이 때 북한군이 갑자기 기습공격을 했습니다. 357호정 좌현을 향해 85㎜ 전차포를 발사한 것입니다. 150m 거리에서 날아든 포탄에 순식간에 357호정 조타실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함교에 올라와 있던 윤 소령은 즉각 대응사격 명령을 내렸지만 연이어 날아든 총탄에 피격돼 안타깝게 산화했습니다. 당시 참수리호 함교는 지붕과 벽면이 없었기 때문에 윤 소령의 위치가 그대로 노출됐고 적의 집중적인 사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함교 아래 조타실에서는 조타장 한상국 상사가 치열한 교전 과정에 가슴에 흉탄을 맞았습니다. 그는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 끝까지 키를 놓지 않은 상태로 숨을 거뒀습니다.적의 포화는 20㎜ 벌컨포 사격을 맡은 병기사 황도현 중사에게도 집중됐습니다. 그는 포탄 파편이 머리 쪽으로 날아드는 순간에도 몸을 피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황 중사는 이후 그 모습 그대로 숨진 채 발견돼 해군 동료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습니다. 40㎜ 함포로 적함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던 병기사 조천형 중사도 좌석에서 화재로 숨지는 순간까지 함포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M60 기관총으로 사격하던 서후원 중사는 적함의 저격수에게 희생됐습니다. ●방아쇠 놓지 않고…적 격퇴하려 끝까지 응전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병장은 한 명의 전우라도 더 살리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내달렸고 서 중사가 쓰러지자 직접 M60 기관총을 붙들고 응사하는 투혼을 보였습니다. 분전하는 그에게 다시 총탄이 쏟아졌고 온 몸에서 100여개의 총탄과 파편이 발견됐다고 합니다.과다 출혈로 국군수도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인공호흡기와 수 많은 의료기기를 단 상태로 사투를 벌인 박 병장은 결국 84일 만에 숨을 거뒀습니다. 북한 경비정은 함께 반격하는 358호정은 그대로 두고 집요하게 357호정만 공격해 357호정에서 6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윤 소령을 포함한 모든 장병이 목숨을 걸고 반격해 적 경비정을 NLL 북쪽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권기형 상병은 왼손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간 상태에서도 한 손으로 소총 탄창을 갈아끼우며 대응 사격을 했다고 합니다. 황창규 중사는 적의 기습공격으로 40㎜ 함포의 전원 장치가 손상되자 수동 사격으로 전환해 적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이희완(당시 중위·현 해군 중령) 부장은 지휘관인 윤 소령이 전사하자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는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이들의 분전으로 적함도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갑판이 대부분 부서진 채 NLL 북쪽으로 퇴각했습니다.참수리 357호정은 적과의 교전에서 큰 상처를 입고 결국 침몰했습니다. 조타장 한 상사가 바다 속에 가라 앉은 357호정 조타실에서 발견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당시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오후 8시에 열리는 터키와의 한일월드컵 3·4위전에 쏠려 있었습니다. 이 날 갑작스러운 비보가 전해지자 국민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정부는 6용사의 투혼을 기리는 뜻에서 각각 1계급 특진을 추서하고 윤영하 소령, 박동혁 병장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을, 한상국 상사와 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을 서훈했습니다. ●위대한 헌신보다 ‘더 갚진 유산’ 남긴 그들 여기까지가 여러분이 들었거나 영화, 언론을 통해 접했던 ‘제2연평해전’입니다. 이후 17년이 흘렀고 일부는 영화로, 일부는 기록으로 그들을 기억할 뿐입니다. 남북 관계가 ‘대립’에서 ‘공존’으로 바뀌면서 제2연평해전을 애써 멀리하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언급 자체가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분전과 헌신 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유산’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전 당시 북한 경비정 대응지침(교전수칙)은 ‘경고방송 →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5단계였습니다. 이것이 ‘경고방송→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 등 3단계로 단순화됐습니다. 단계별 조치를 취하다 기습공격을 받은 참수리호의 교훈을 되새기는 의미였습니다.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서해 NLL의 경비는 130t급의 참수리 고속정(PKM)이 맡았지만, 지금은 400t급 유도탄고속함(PKG)과 검독수리(230t)급 신형 고속정(PKMR)이 맡고 있습니다. 구형 참수리 고속정은 20㎜ 벌컨포와 40㎜ 함포로만 무장해 화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됐습니다. 반면 새로 해군에 인도된 검독수리급 고속정은 76㎜ 함포와 130㎜ 유도로켓을 장착해 원거리에서 북한 경비정과 공기부양정을 타격할 수 있게 했습니다. 특히 함교를 함 구조물 내부로 넣어 정장이 비바람은 물론 적의 표적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외관 구조를 대폭 개선했습니다. 또 윤영하함(400t)급 유도탄고속함은 레이더에 잘 탐지되지 않는 스텔스 선체에 76㎜ 함포와 대함유도탄을 장착했습니다. 스크루로 기동하던 함정의 추진 방식도 워터제트로 변경해 더 빠르고 자유자재 기동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새로 건조된 유도탄고속함에는 윤 소령을 포함한 6용사의 이름이 차례로 붙여졌습니다. ●‘전사자’를 ‘순직자’로…뒤늦게 특별법으로 예우 제2연평해전 전사자는 2002년 사망 당시 ‘일반순직’으로 처리됐습니다. ‘전사자’를 전사자로 부르지 못하고 ‘순직자’로 규정해버린 것입니다. 당시 ‘군인연금법’에는 ‘전사’에 대한 보상규정이 없었고, 곧바로 분노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공무상 사망’ 보상기준에 따라 1인당 3000만~6000만원의 보상금을 제공하는데 그쳤습니다. 정부에서 돈을 줄 근거가 없다보니 성난 국민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으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후 2004년 법 개정을 통해 군인연금법에 ‘전사’에 대한 보상기준을 신설했지만 정작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는 소급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16년이 지난 지난해 7월에야 ‘제2연평해전 전사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이에 따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6명의 유족에게 추가 보상금(1인당 1억 4400만~1억 8400만원)을 지급하게 됐습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가 이제야 도리를 다하게 됐다”며 국방부 장관에게 유족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한 해군 관계자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희생으로 보상제도 등 군 체계가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이라며 “군은 피를 흘리면서 발전하지만, 한편으로 그 때 전사하신 분들의 아픔이 너무 컸다”고 토로했습니다.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기 전 윤 소령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경기장에 갈 수는 없지만 온 국민과 함께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을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남긴 갚진 유산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씨줄날줄] 北 관련 가짜뉴스/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北 관련 가짜뉴스/박록삼 논설위원

    2013년 8월 29일자 조선일보는 ‘김정은 옛 애인 등 10여명 음란물 찍어 총살돼’라는 기사를 6면 톱으로 실었다. 당일 새벽 포털사이트에 단독 기사임을 표시해 게재했음은 물론이다. 또 조선일보는 그해 12월 10일 문화일보 보도를 재인용하며 ‘김정은 포르노 추문 옛 애인 현송월 기관총으로 공개처형…국정원 확인’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현송월 단장은 2015년 12월 모란봉악단 단장으로서 버젓이 베이징에 등장했고, 2018년 1월에는 평창올림픽 예술공연 사전 점검을 위해 공개적으로 한국 땅까지 밟았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어떤 해명도, 사과도 없이 그저 ‘오보 해프닝’처럼 지나갔다. 명백한 ‘북한 관련 가짜뉴스’다. 한국 사회 일부 세력들은 남북 관계 경색을 호시탐탐 노린다. 이를 목적으로 삼거나 아니면 배경으로 삼는다. 꽉 막혀 있는 남북 관계 속에서 이른바 ‘중국 내 대북 소식통’ 등 어설픈 전언이 쏟아지며 진실의 자리를 가로채곤 한다. 과거 ‘김일성 암살’, ‘성혜림 망명’, ‘금강산 폭파’ 등 어이없는 가짜뉴스는 한반도 긴장 완화를 바라지 않는 보수언론과 정보기관의 합작품이었다. 이는 먼 과거가 아니다. 지난해 5월 19일에도 TV조선은 ‘북, 미 언론에 풍계리 폭파 취재비 1만 달러 요구’라는 ‘가짜뉴스’로 남·북·미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다. 남북 교류협력이 활발하던 때는 달랐다. 시민사회단체, 중소기업인, 농민, 종교인, 청년·학생 등 남북을 오가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진 덕분이었다. 이른바 휴민트(human+intelligence)가 풍성해졌다. 과거의 조작된 북한 정보의 통용은 제한됐고, 휴민트를 통한 현실에 기반한 정보들이 남쪽으로 넘나들며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됐다. 북한에 대한 가짜뉴스는 상대적으로 설 땅이 적었다. 조선일보가 지난달 31일자 1면 기사로 ‘숙청’됐다고 보도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지난 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군부대 공연을 관람하는 사진이 나왔다. 이 보도는 정용기 자유한국당 정책위원장의 어처구니없는 막말의 배경이 됐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정치적 폐해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줬다. 문재인 정부 들어 어렵사리 이뤄 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꽉 막힌 틈을 타 보수언론 등의 ‘고약한 버릇’이 다시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단순한 정쟁이나 오보가 아니라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발버둥처럼 여겨진다. 오랜 세월 동안 보수언론이 이념 대립을 부추기며 내놓는 ‘아니면 말고식’ 북한 관련 가짜뉴스의 무책임함은 매우 심각하다. 남북 화해협력의 창달자 역할은 못 돼도 최소한 걸림돌은 되지 않아야 한다. youngtan@seoul.co.kr
  • “한국전쟁 때 경찰들이 확실하게 중공군 저지”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중공군이 격돌한 장진호 전투에서 우리나라 경찰부대인 ‘화랑부대’가 활약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경찰청은 오는 6일 현충일을 앞두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화랑부대의 활약상을 발굴했다고 3일 밝혔다. 경찰청에 따르면 6·25전쟁 초기인 1950년 11~12월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미국 해병 로버트 태플릿 중령은 2002년 발간한 자신의 수기 ‘다크호스 식스’에서 “화랑부대는 상대 공격의 예봉을 잡았고 기관총 대원들의 영웅적인 희생은 대대 지휘본부 지역으로 진격하던 중공군을 확실하게 저지했다”고 서술했다. 미국 해병 마틴 러스의 저서 ‘브레이크 아웃’(2004년)에서도 장진호 전투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책에서 “전초에는 미 해병에 의해 훈련된, 군기가 있고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한국경찰 기관총 부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장진호 전투에 경찰부대가 참전한 사실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지만, 화랑부대원들의 활약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는 게 경찰청의 설명이다. 당시 미 해병의 통역장교였던 변호사 이종연(91)씨는 지난 4월 경찰청 관계자와의 면담에서 “한국 경찰은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전투를 했다”며 “경찰관들이 전투 전문인 해병과 함께 싸우면서 주공격을 맡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회고했다. 6·25전쟁 당시 경찰은 1만 5000여명이 유엔군에 배속돼 활동했다. 특히 미군에게 특별훈련을 받고 별도로 편제된 경찰관들은 ‘화랑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경찰청이 1957년 작성된 ‘유엔 종군기장 수여대상자 조사명부’ 등을 통해 확인한 장진호 전투 참전 경찰관은 모두 18명이다. 전체적으로는 40여명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시대의 야만에 맞서는 영화와 책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시대의 야만에 맞서는 영화와 책

    5월이 지나가고 있다. 올해 5월은 유난히도 많은 회고와 재발견, 각별한 분노와 슬픔이 있었다. 과거의 5월에 발생한 역사와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담론과 관점이 생성되기도 한다. 39년 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가공할 폭력과 학살, 야만에 대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새로운 증언과 자료가 제시됐다는 점,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이했다는 사실 등이 이러한 분위기를 만든 요인이리라. 한여름 같은 오월의 마지막 주말에 심한 몸살감기를 겨우 견디며 한 편의 영화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우선 오월 광주를 참신한 시선으로 접근한 강상우 감독 영화 ‘김군’에 대해 얘기해 보자. 깊은 여운과 먹먹한 충격을 준 영화였다. ‘김군’은 보수 논객 지만원에 의해 ‘북한군 광수 1호’로 지목됐던 인물, 즉 기관총이 설치된 가스차 위에서 옆을 매섭게 응시하던 사진 속의 시민군 ‘김군’의 존재를 집요한 탐사와 면밀한 추적을 통해 규명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무엇보다 당시 김군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그와 함께 항쟁에 참여했던 무장 시민군을 직접 탐문 인터뷰하며 그들의 뜨거운 내면과 억눌린 마음을 생생하게 복원한 점이 돋보인다. 영화는 김군을 목격한 시민의 증언에 의해 그가 당시 광주 학동 원지교 아래에 살던 고아이자 넝마주이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김군은 1980년 5월 24일 송암동 순찰 과정에서 계엄군에게 사살당했다. 그러하기에 사진 속의 김군은 영원히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처연한 사실이 김군의 최후를 목격한 시민군 최진수씨를 통해 언급된다. 끝부분에서 ‘김군’ 주위에 있거나 그와 함께했던 시민군 세 사람이 38년 만에 만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김군’의 집요한 사실 추적은 북한군 투입설을 비롯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가짜뉴스를 일순간에 잠재우도록 만든다. 이를 광주를 새로운 시선으로 접근한 다큐멘터리 영화 서사의 승리라 부를 만하다. ‘김군’은 시민군의 무장과 저항이 학살과 폭력에 대한 순수한 분노에서 출발한 것임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이걸 그냥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은데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시민군의 담담한 증언은 오월 광주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바라보는 왜곡된 관점에 대한 통렬한 반론으로 기능한다. ‘김군’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 영화를 보기 직전에 읽었던 책 ‘다시 책으로’의 주장과 자연스럽게 접맥된다. 최근에 번역된 ‘다시 책으로’의 저자 메리앤 울프는 배경지식과 비판적 분석력의 결여가 어떻게 공인되지 않은 정보나 거짓 정보에 취약하게 되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는 “가짜 뉴스든 날조 뉴스든 불확실한 정보의 희생물로 전락하기” 쉬운 이 시대의 현실이 독서의 퇴조, 다양한 정보 분석 능력의 상실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책의 끝부분에서 인용한 “책이 없다면, 실로 문해력이 없다면 좋은 사회는 사라지고 야만주의가 승리한다”는 스티븐 워서먼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여러 가짜 뉴스에 대한 통렬한 일침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특정한 정치적 관점이나 사회적 의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각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왜곡되거나 편향된 정보에 의해 생성된 견해를 진실이라 우기는 경우다. 이런 추세가 강화되면 명확한 진실조차 가려지며 오만과 편견이 득세하게 된다. 영화 ‘김군’과 메리앤 울프의 ‘다시 책으로’는 이즈음 한국 사회 곳곳에 편재한 새로운 야만주의를 향한 엄중한 경고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1980년 5월 광주를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 역으로 그때의 광주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메리앤 울프의 표현에 따르면 “진실을 찾는 고된 훈련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영화 ‘김군’과 ‘다시 책으로’를 권하고 싶다.
  • 검찰, 전두환 재판 헬기사격 관련 시민 6명 추가증언 듣기로

    다음달 10일 이어지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에서 헬기사격과 관련 6명의 시민이 추가로 증언대에 선다. 광주지검은 25일 5·18민주화운동 기간에 헬기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재판에 추가로 증언할 시민들과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추가 증언자 가운데 신모씨는 당시 동생과 함께 대인시장 인근에서 자취하면서 5·18 기간동안 수차례 도청 집회에 참가하면서 금남로 일대에서 헬기사격을 봤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배모씨도 1980년 5월21일 도청 인근에 나갔다가 같은날 오후 동구 불로동 다리에서 사격을 하며 자신을 향해 선회하는 헬기를 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들의 증언이 정확하다고 판단, 추가 증인으로 채택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와 함께 전직 5월단체 회장도 추가 증인으로 신청했다. 검찰은 앞서 지난 13일 재판에서 자체 선정한 증인 21명 가운데 5명을 선정해 1차 증언을 들었다. 검찰은 또 국회 등에서 5·18 당시 전두환씨의 광주행 등을 밝혔던 김용장씨의 증언을 법정에서 듣기 위한 방안을 마련 중이다. 미 육군 방첩부대인 501정보여단 광주파견대 군사정보관으로 재직했던 김씨는 지난 17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광주지검에 참고인으로 나가 80년 5월21일 전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로 내려와 회의를 주재했다는 정보를 미군에 보고한 일이 있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또 80년 5월21일 낮 광주에서 계엄군이 UH-1H 소형 헬기를 타고 M60 기관총을 쐈고, 27일 광주천 상류에서도 헬기에서 위협사격을 했다는 사실도 미군에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김씨의 증언 내용에 대해 사실 관계를 밝히기 위해 김씨를 증인으로 신청할 지 여부를 검토 중이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씨줄날줄] ‘여자’ 경찰 말고 여자 ‘경찰’!/황수정 논설위원

    [씨줄날줄] ‘여자’ 경찰 말고 여자 ‘경찰’!/황수정 논설위원

    ‘여경 논란’이 뜨겁다. 서울 구로구 대림동에서 술 취한 남성을 제압하지 못한 여성 경찰관이 시민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무기력한 모습이 동영상으로 공개되면서 삽시간에 ‘여경 무용론’이 퍼졌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여경을 없애라”는 요구까지 등장했다. 영상 속 여성 경찰관은 동료 남성 경찰관이 주취자들에게 뺨을 맞자 무전으로 다른 경찰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비판이 쏟아진 것은 수갑을 채우는 대목. 여성 경찰관은 “남자분 한 명 빨리 나와 달라”고 외쳤고, 한 남성이 “(수갑을) 채워요?”라고 묻자 “빨리 채우세요”라며 다급한 목소리로 답했다. 민망한 비판들이 꼬리를 문다. “여경은 공무원 월급 받는 치안조무사냐?”, “대통령은 시장에 가면서도 기관총 경호원을 대동하면서 시민 치안은 여경한테 맡겨?” 등. ‘천조국(‘미국’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 여경’도 유튜브에서 새삼 인기다. 건장한 흑인 남성을 제압하는 미국 여경의 단련된 모습에 “클래스(수준)가 다르다”는 비아냥이 섞인다. 여경 논란은 건드리면 터지는 화약고가 됐다. 지난해 10월에는 부산의 교통사고 현장에서 여경들이 “어떡해, 어떡해” 하며 발을 구르는 동영상이 인터넷을 달궜다. 전복된 차량 안의 부상자를 남자들이 구출했던 동영상은 엉뚱하게 성대결로 치달았다. 그때나 이번이나 경찰은 “매뉴얼대로 했으니 문제없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반박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번 일은 단순한 여혐(여성혐오) 논란이 아니라 경찰 신뢰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경찰 2만명 증원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2022년까지 여경 비율을 1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정부 방침에 지난해 순경 공채에서는 여경 비율이 25%로 높아졌다. 이 비율이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니 한편에서는 우려의 여론이 커지는 것이다. “여경 동료와의 순찰이 부담스럽다”는 남자 경찰관, “여경 혐오에 도매금으로 넘어가기 싫다”는 여자 경찰관. 이게 엄연한 현실이라면 숫자만 맞추려는 요령부득의 정책은 심각하게 돌아볼 문제다. 한국 여경 시험의 팔굽혀펴기 체력검사가 도마에 올랐다. 일본은 정자세 팔굽혀펴기 15회 이상 해야 합격인데, 우리는 무릎 대고 팔굽혀펴기 방식으로 10회가 과락이라는 것. 당장 어느 야당 의원은 여경의 체력 시험만이라도 아시아권의 보편적 수준으로 강화하자고 나섰다. 영 허튼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구구한 불신에 노출되느니 그깟 팔굽혀펴기 제대로 하고 말겠다는 여경 지원자들이 많을 것 같다. “‘여자’ 경찰 말고 여자 ‘경찰’을 뽑으라”는 어느 네티즌의 훈수 한마디. 쾌도난마다.
  • 5·18민주화운동 때 고문·성범죄 처벌할 法이 없다

    5·18민주화운동 때 고문·성범죄 처벌할 法이 없다

    ‘특별법’에 공소시효 배제 조항 없어 “발포 병사 가해 인정 땐 사면 건의 공소시효 불분명한데 ‘용서’는 모순 양심선언 처벌 완화 등 더 보완해야”#61항공대 지휘관 A씨는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5시 30분 광주 동구 금남로 전남도청 진압작전 이전에 UH1H 헬기조종사 B씨에게 도청과 바로 이웃한 전일빌딩 옥상에 설치된 시민군 기관총 제압을 명령했다. B씨는 사격을 가했고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는 이를 공식 확인했다. #같은 해 5월 23일 오전 9시쯤 광주~전남 화순 간 도로 봉쇄를 맡은 11공수여단 지휘관 C씨는 병사 D씨 등에게 광주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 앞 도로를 지나던 미니버스를 총격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10여명이 사망했고, 일부 남성 부상자들은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이런 사실이 향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진실로 밝혀지면 A·B·C·D씨에 대해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16일 김재윤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가능하다. 그는 최근 공익인권 세미나에서 ‘헌정질서 파괴범죄 공소시효 배제를 통한 정의 회복’이란 발제에도 문제를 제기했다.김 교수는 “1995년 12월 제정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해 5·18 내란사건에 참여한 이들을 처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껏 검찰 수사와 대법원 판결 등을 통해 ‘5·18 내란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등 군 간부 16명에 대한 처벌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들의 명령을 받고 양민 학살이나 시민에 대한 발포를 수행한 사람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김 교수는 “내란목적 살인 등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참여한 병사 등도 형사소송법과 군사법원법의 공소시효를 적용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들의 범죄가 입증될 경우 수괴급인 신군부 핵심 간부들과 똑같은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란죄 등에 해당하지 않은 고문, 성범죄 등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 여부는 논란이 예상된다. 이번에 제정된 ‘진상규명법’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법안 제48조(가해자를 위한 사면 등)에는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내용이 진실에 부합할 경우 위원회가 사면을 건의할 수 있도록 했다. 가해자의 범죄 행위에 대한 공소시효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사면 건의’ 조항을 둔 게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 데도 용서하는 모순점을 품었다는 지적이다. 또 위원회가 가해자나 참고인 등이 소환에 응하지 않을 경우 동행명령장을 발부하고, 또 불응하면 과태료 3000만원을 물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직접 형사책임을 묻는 강제성이 없어 실효성이 의문시된다. 실제로 최근 광주지검이 전두환씨 사자명예훼손 사건 수사과정에서 헬기조종사 등 40여명을 소환했으나 대부분 버텼다. 김정호 변호사(민변 광주전남지부장)는 “내란·집단살인 등 헌정질서 파괴범이 아니라면 공소시효 배제를 적용할 수 없고 소급입법도 불가능하지만 진상은 규명돼야 한다. 위원회를 꾸리기 전에 강제조사권 강화, 공익제보나 양심선언에 대한 처벌 완화 등 시행령을 통해 보완해야 할 게 많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일본군, ‘호주 여성 간호사 학살’ 성범죄 또 드러나

    일본군, ‘호주 여성 간호사 학살’ 성범죄 또 드러나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때 호주 여성들을 상대로 저질렀던 잔학한 성범죄 진상이 새롭게 드러나면서 일본 정부의 대응이 주목된다. 역사 전문가들은 한국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와 같은 그릇된 태도를 버리고 일본 정부가 적극적인 검증과 사죄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BBC는 1942년 2월 호주의 종군 여성 간호사 21명이 일본군 병사들에게 집단총살을 당한 ‘인도네시아 방카섬 학살사건’에서 희생자들이 죽기 전 일본군들에게 잔인한 성폭행을 당했음이 새롭게 드러났다고 군사 사학자 리넷 실버의 조사를 인용해 지난 18일 보도했다. 기존에는 희생자들이 단순히 총살된 것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성폭행까지 있었던 사실이 추가로 드러난 것이다. 싱가포르에 종군해 있던 호주 간호사들은 1941년 12월 일본군이 침공해 들어오자 배를 이용해 본국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폭격으로 배가 침몰하면서 표류하다 방카섬에 상륙했고, 결국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은 간호사들을 바다로 걸어 들어가게 한 뒤 등쪽에서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 가운데 한 명이었던 비비안 불윙클은 총상을 입은 뒤 바다 위에 죽은 척 하고 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이후 전쟁포로가 돼 귀환했다.일본군들이 저지른 성폭행 범죄는 희생자들과 가족들의 명예훼손 등을 우려한 호주 군당국에 의해 그동안 비밀에 부쳐져 왔다. 실버는 “당시 호주군 간부들은 슬픔에 잠겨 있는 유족들에게 가족이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불명예를 안기고 싶지 않아 했다”며 “여기에는 성폭행 피해는 죽음보다 더 가혹한 운명으로 여겼던 당시 분위기가 있다”고 설명했다. 생존자 불윙클은 성폭행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 군당국에 의해 금지됐다. 그러나 2000년 사망한 불윙클은 생전에 당시의 참상을 한 방송국 관계자에게 전했다. 그는 “대부분 간호사가 총살되기 전에 성폭행을 당했다. 나는 이 사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너무 괴로웠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성폭행을 저지를 때의 상황은 당시 방카섬에서 말라리아 치료를 받고 있던 일본군 병사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29일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이번 보도에 대해 “개별 사안을 정부가 검증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야시 히로후미 간토가쿠인대 교수는 도쿄신문에 “일본 정부가 여성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방카섬 사건을 제대로 검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피해자나 관계자에 사죄 및 보상을 해야 한다”면서 “국제적으로 두번 다시 성폭력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검증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쟁범죄사 전문가인 다나카 도시유키는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서 한국과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성폭력을 포함한 전쟁범죄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래서는 영원히 국제적인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일본군, 호주 간호사 21명 성폭행·학살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때 호주 여성들을 상대로 저질렀던 잔학한 성범죄 진상이 새롭게 드러나면서 일본 정부의 대응이 주목된다. BBC는 1942년 2월 호주의 종군 여성 간호사 21명이 일본군 병사들에게 집단총살을 당한 ‘인도네시아 방카섬 학살사건’에서 희생자들이 죽기 전 일본군들에게 잔인한 성폭행을 당했음이 새롭게 드러났다고 군사 사학자 리넷 실버의 조사를 인용해 지난 18일 보도했다. 싱가포르 종군 호주 간호사들은 1941년 12월 일본군이 침공하자 배를 이용해 본국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배가 침몰하면서 표류하다 방카섬에 상륙했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은 간호사들을 바다로 걸어가게 한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 중 한 명인 비비안 불윙클은 총상을 입은 뒤 바다 위에 죽은 척하고 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이후 전쟁포로가 돼 귀환했다. 일본군의 성폭행 범죄는 희생자들과 가족들의 명예훼손 등을 우려한 호주 군당국에 의해 그동안 비밀에 부쳐져 왔다. 생존자 불윙클은 성폭행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 군당국에 의해 금지됐다. 그러나 2000년 사망한 불윙클은 생전에 당시의 참상을 한 방송국 관계자에게 전했다. 그는 “대부분 간호사가 총살되기 전에 성폭행을 당했다. 나는 이 사실을 밝히지 못해 너무 괴로웠다”고 털어놨다. 29일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이에 대해 “개별 사안을 정부가 검증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야시 히로후미 간토가쿠인대 교수는 “일본 정부가 여성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방카섬 사건을 제대로 검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사죄 및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범죄사 전문가 다나카 도시유키는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서 한국과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성폭력을 포함한 전쟁범죄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래서는 국제적인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1980년 옛 전남도청 계엄군 사살명령 담긴 상황일지 공개

    5·18 당시 첫 집단 발포가 이뤄진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에서 시민 사살을 명령을 하고, 실제 사살 시범을 보였다는 내용의 군 상황일지가 공개됐다. 이는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가 이뤄졌다’는 신군부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김희송 연구교수가 26일 공개한 11공수특전여단 상황일지에는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 사격 과정이 기록돼 있다. 일지를 보면 ‘오후 1시: 폭도(시민) 1명이 버스를 몰고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나가려는 의도를 알고 00(판독 불가)을 지시 그 자리에서 사살, 폭도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음’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 폭도들은 감히 도청을 향해 돌진해오지 못했다. 500m 이격된 가운데 APC(장갑차)를 이용, 강습돌파작전을 감행할 의도임을 인지하고 폭도 APC가 움직일 때마다 계엄군 APC의 CAL50(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실시했음’이라고 기록했다. ’35대대가 동시에 공포를 사격, 주춤한 폭도들 앞에서 61·62·63대대는 즉각 전열 재정비, 기관총 사격토록 지시했다’는 기록도 나왔다. 그러나 군이 ‘5공 청문회’ 등을 앞두고 1985년과 1988년 새로 작성한 11공수 상황일지엔 계엄군 사격 내용이 모두 삭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새롭게 확인된 11공수 상황일지는 계엄군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집단 발포는 물론 위협 사격과 확인 사살까지 자행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 “이는 특정 시기 군 기록이 체계적으로 은폐·조작된 정황으로 확인된 만큼 철저한 진상 규명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명품 소총’ 꿈 이대로 접어야 하나

    [밀리터리 인사이드] ‘명품 소총’ 꿈 이대로 접어야 하나

    K11 균열·성능 부실 문제로 사업 중단침묵하는 정부…허약한 총기개발 기반좌절 대신 명품 총기 개발 의지 보여야 군 복무, 특히 육군에서 복무한 분들에게 가장 관심있는 분야라고 하면 아마 ‘소총’일 겁니다. 예비역들이 모이면 술자리 안주로 “100% 명중률을 기록한 특등 사수였다”는 자랑 한번쯤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 자부심의 중심엔 우리가 개발한 ‘국산 총기’가 있습니다. 1973년 처음으로 우리 힘으로 면허 생산한 M16 소총을 시작으로 반세기 동안 K1A·K2 소총, K6 중기관총, K7 기관단총, K12 기관총, K14 저격총, K2 개량형인 K2C와 K2C1 등이 잇따라 개발됐습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우울한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명품 무기’라고 군이 홍보했던 ‘K11 복합소총’은 사격통제장치 균열 등의 결함이 드러났습니다. 감사원 감사에서 공중폭발탄의 살상력과 명중률이 목표치에 미달했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2014년 11월까지 914정만 납품됐고 현재는 보급물량 대부분이 창고에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창고 신세’ 복합소총 K11…대안도, 의지도 없다 방위사업청은 올해 예산에서 K11 개발비 34억 2500만원을 편성했지만, 지난해 국회에서 33억 6900만원이 삭감됐습니다. 총기 양산을 위한 예산은 5600만원, 연구개발비는 33억 6900만원이었는데 연구개발비를 전액 삭감한 것입니다. ‘불량총기’라는 멍에를 썼지만 정부가 아랑곳하지 않고 거액의 연구개발비를 편성한 점이 국회에서 ‘괘씸죄’로 걸렸다고 합니다. 정치권에서는 ‘몰래 편성’이라는 직설적인 표현까지 쓰며 방사청을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국방기술품질원이 최근 “총기 균열 문제를 개선하려면 20㎜ 공중폭발탄 발사 모듈의 설계를 바꾸고 사격통제장치(FCS) 재료를 고강도 알루미늄 합금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개발 예산도 없는 상황에서 사업을 더 끌고 갈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이 시점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K11 개발 실패 여부가 아닙니다. ‘허약한 총기 개발 기반’이 더 큰 문제입니다. 총기류를 개발하는 방산업체는 연구개발과 매출의 대부분을 정부의 발주 물량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독자 개발은 차치하고 정부에서 도입 물량을 보장하지 않으면 업체 생존조차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명품 총기 개발은 커녕 아이디어 구상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업 중단을 앞두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새로운 총기를 개발하거나 설계 구조를 완전히 뜯어 고치는 등의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빈 손’뿐입니다. 방법은 당분간 기존 총기를 그대로 쓰는 것 뿐입니다. 국산 명품 총기 개발을 바란 많은 국민이 이런 현실에 분노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총기 개발은 ‘실패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첫 술에 배부른 사업이 없습니다. 특수전 부대에서 사용하는 ‘K7 기관단총’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XK9 기관단총’은 양산 단계에 이르지 못 했습니다. 불펍(화기 작동이 방아쇠 뒤쪽에서 이뤄지는 총기) 형식으로 화제를 모았던 ‘XK8’ 소총도 개발만 이뤄졌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실패 과정을 통해서 명품 무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헛된 노력’이라고 폄훼하는 국민은 없습니다. ●총기 수입 확대…멀어지는 총기 개발의 꿈 그러나 한편으로 명품 총기 개발의 꿈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특수전 부대를 중심으로 해외에서 개발한 총기를 도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데다 앞으로도 소총 개발 예산이 전무하다시피한 것이 문제입니다. 2021년까지인 국방 중기예산 226조원 중 총기 구입과 개발 예산은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몸통인 총기 개발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데 ‘워리어 플랫폼’이라는 거창한 구호만 들립니다. 일본이 미국이나 유럽의 고성능 소총 대신 성능은 떨어지고 가격은 훨씬 비싼 자국산 ‘89식 소총’ 구입을 고집하는 것을 단순히 ‘애국심’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요. 방산업체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답답한 나머지 2016년 한 총기 생산 업체 직원들이 국회 앞에서 “소총 구매 예산을 확보해달라”며 집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기업이라면 5년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습니다. 이들은 “예산이 전액 삭감되는 바람에 군 전투력 향상을 위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호소했지만 정부나 정치권의 응답은 없었습니다. 이 업체는 ‘살기 위해’ 자동차 부품 제작 등 다른 분야에도 많은 여력을 쏟아붓고 있다고 합니다. “잘 만들어서 수출하면 되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분들도 있지만, 수출은 세계 각국의 정치적 상황을 모두 고려해야 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A, B라는 나라가 긴장 관계라면 어느 한 나라도 무기 수출은 쉽지 않게 됩니다. A에 수출하려면 B 시장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고민이 깊어집니다. ●실패, 폄훼만 하는 국민 없어…다시 도전해야 적절한 개발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지만, 첨단·대형무기 예산이 차지한 자리를 밀어내고 예산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국민들의 국산 명품 총기 개발 열망을 받들어 조금 늦더라도, 여러 번 실패하더라도 차근차근 절차를 밟는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한 국방전문가는 “일단 해보고 조금씩 보완해 가는 것이 중요한데 단번에 끝내려는 조급증이 문제”라며 “국가 차원에서 국산화에 대한 의지도 보여줘야 하는데 아쉬운 측면이 많다”고 토로했습니다. 지금은 마냥 좌절하거나 분노할 때가 아닙니다. 그 감정을 다시 의지로 바꿔 도전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식인까지 강요한 광기… 아프리카, 독재는 살아있다

    식인까지 강요한 광기… 아프리카, 독재는 살아있다

    아프리카에는 독재자들이 유난히 많았고 여전히 적지 않은 독재가 진행 중이다. 그중에서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장베델 보카사와 적도기니의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아프리카 독재 3인방’으로 통한다. 하지만 악명과 달리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 대사를 지낸 외교관 출신이 펴낸 이 책은 그 이면을 샅샅이 들춰 흥미롭다.●보카사·아민·응게마 ‘아프리카 독재 3인방’ 독재자 연구로 유명한 준 스티븐슨은 일갈한 바 있다.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수치와 무력감을 느끼며 자란 아이가 권력을 쟁취했을 때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연배로 모두 45세에 권좌에 올라 8~13년간의 통치 끝에 1979년 권력을 잃은 ‘아프리카 독재 3인방’은 그 일갈에 딱 맞는다. 소외된 변방의 볼품없는 집안 출신인 3인방은 불우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공통으로 갖고 있다. 보카사의 아버지는 사소한 일로 프랑스 관리에 의해 살해됐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자살했다. 졸지에 고아가 된 뒤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보카사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군 입대를 택했다. 가봉의 비천한 출신인 응게마는 부모를 거의 만나지 못한 채 삼촌 손에서 늘 불안감을 느끼며 자랐다. 그 불안증 탓에 지성인과 과학, 기술을 극도로 혐오했다고 한다. 천민 계급에 속했던 일자무식의 이디 아민은 신분의 굴레를 벗기 위해 식민지 군대의 취사병으로 입대했다. ●유럽 국가 비호 아래 승승장구한 그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권력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이들은 어떻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까. 오랜 세월 서방 통치하에 있었던 아프리카 식민 국가에서 변변한 인재가 양성될 리 만무했을 터. 독립 후에도 이들 나라에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려는 유럽 국가들이 택한 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기존의 충성파들이었을 것이다. 유럽 강국들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한 3인방은 결국 정상 자리에 오르게 됐다. 이들의 정권 유지법은 측근 정치와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보카사 옆에는 주눅 든 가신과 권력을 탐하는 아첨꾼들이 있었고 응게마에게는 일가친척, 씨족이 있었으며 아민에게는 외국 용병들이 있었다.” 보카사에게 국가를 잘 통치하는 건 자신을 칭찬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에 불과했다.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제복 차림의 대형 사진을 관공서, 기업의 모든 사무실에 달게 하는 칙령을 발표할 만큼 개인적인 판타지의 실현을 최우선 목표로 삼은 탓에 기묘하고 비생산적인 정책이 양산됐다. 부하들을 주기적으로 총살했고 1979년 학생 반란사건 때는 잡혀 온 학생들을 직접 고문, 살해했다. ●폭정으로 30만명 죽고 200만명 난민 신세 적도기니에선 응게마가 정권을 잡은 지 1년 만에 정부조직이 와해됐고 일관성 있는 정책은 모두 실종됐다. 수도는 그야말로 유령의 도시가 됐다. 응게마는 훗날의 정적까지 체포해 숙청했다. 반식민운동으로 명망 높았던 대부분의 명사들이 독립 수개월 만에 모두 잔인한 죽음을 맞이했다. 아민은 측근에 둘러싸여 맥주를 마시며 정책을 논의했지만 이들이 내놓는 정책이나 아이디어는 그저 몽상에 불과했다. 아민은 수감된 죄수가 망치로 다른 죄수를 죽여 먹도록 했으며 마을주민 전체를 기관총으로 몰살, 악어에게 던져 주기도 했다.이 3인방이 남긴 상처는 엄청나다. 최소 30만명이 죽고 200만명이 난민, 실종자가 됐다. 이들이 정권에서 물러난 지금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군부 동요, 부족 분쟁이 판을 치며 아프리카의 가장 낙후된 국가로 남아 있다. 적도기니에선 주기적인 체포며 무자비한 구타, 숙청이 행해지고 있다. 우간다에는 선거부정과 부패의 만연, 인권 유린, 국가부채 문제가 겹겹이 쌓여 있다. 현재 아프리카에는 20년 이상 장기 집권 중인 독재자가 7~8명이나 된다. 여전히 ‘독재의 온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다당제가 확립되고 언론의 비판 기능이 강화되는 추세를 볼 때 아프리카에서 무소불위의 독재자를 찾아볼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아프리카는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희망의 길을 걸어온 저력을 갖고 있다. 아프리카의 저력이 발휘될수록 독재자들이 설 땅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봉오동전투의 잊혀진 영웅, 최운산 장군을 아시나요”

    ‘장군의 손녀’ 최성주가 말하는 잊혀진 장군 ‘최운산’“99년 전 봉오동전투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빛나는 전과입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 특히 홍범도(1868~1943)·김좌진(1889~1930) 같은 영웅이 화승총으로 매복을 잘 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독립군이 체계적으로 훈련받고 무기와 군장비를 잘 갖췄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잊혀진 영웅 최운산(崔雲山·1885~1945)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당시 사진사를 동원해 전쟁 현장을 촬영했던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이유이지요.”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61) 이사를 최근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자신이 장군의 손녀라며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의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학교에서 익히 배웠던 ‘홍범도·김좌진 장군의 영웅담’과는 결이 달랐다. 기자만 최운산 장군에 대해 모르나 싶었지만 최 이사는 “역사학자조차 최운산 장군의 역할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기에 지난 22일 서울신문사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최 이사는 노트북을 들고와 현장에 다녀왔던 사진과 관련 서류들을 보여줬다. 이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은 그의 형인 최진동(崔振東·1883~1941), 참모장은 최운산이고, 홍범도·김좌진은 그 부대의 연대장이었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서는 봉오동 전투 현장이 수몰됐다고 했지만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봉오저수지를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이라고 말했다. 최 이사는 거의 해마다 전투지를 답사한다고 했다. “봉오동전투 사진사 동원한 준비된 전쟁전투 모습 3장…임정에 보냈다는 기록만”- 봉오동전투 당시 현장을 촬영했다고?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최진동이 국민회에 보낸 공문(‘기안104’)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전해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기록을 보면 ‘봉오동전쟁 전황 촬영사진 3매, 상해를 보낼 예정.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지방의 박준재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 바란다.’고 적혀 있습니다. 번역해서 문서로 남아있는 것을 역사자료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최운산 장군은 당시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사진사를 동원해 기록을 남기도록 했던 겁니다. 그만큼 준비가 철저했던 거지요.” - 당시 돈이 있다고 무기를 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우리 독립군이 어떻게 무장했을까. “최운산 장군이 러시아와 무역거래를 하고 있던 관계로 지속적으로 무기를 구입해 왔습니다. 그러나 뒷거래로 수천명이 무장할 무기를 확보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소련에 배속됐던 체코 군의 무기로 무장한 겁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은 체코군을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시킵니다. 이들이 장기간에 걸쳐 러시아 대륙을 횡단해 1918년 말에 동쪽 끝에 도착합니다. 체코군은 무기는 필요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반면 우리 독립군은 대량의 무기 확보가 절실한 상태였습니다. 무기가 있어도 돈이 없었거나, 돈이 있어도 무기를 파는 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요. 하늘의 뜻인지 최운산 장군에게 재력이 있었고, 체코군은 무기보다 현금이 더 필요했지요. 체코군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산 무기로 무장했다고 하니 우리 독립군도 당시로서는 최신의 미국 무기를 갖췄다고 봅니다.” “독립군들, 귀향하는 체코군 무기로 무장독립군들의 무기 구매 대금 출처는 최운산1920년 토지 팔아 5만원 마련… 무기 매입”- 막대한 무기 구입 대금은 어디에서 나왔나. “이 부분이 만주 무장독립운동 연구에서 가장 미진한 부분입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최운산 장군이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의병 수준의 독립군 통합 부대원들을 훈련하고 무장시키기 위해 1920년 1월 최운산 장군이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에 팔아 그 돈으로 대한북로독군부 부대원 전원을 완전무장시켰습니다. 당시 5만원은 전투기 한대 가격이라 합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인 김성녀(金性女·1894~1975) 할머니가 1969년 남편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면서 밝힌 장비를 보면 ‘대포 10여문, 기관총 수십정, 수류탄 수천개, 장총 천여정, 권총 수백정, 실탄 수만 발’을 갖췄다고 합니다. 당시 훈련소 격인 사관연성소 병사 1인당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 1정, 실탄 500발, 수류탄 1개, 좁쌀 6되, 짚신 1족이었다’는 일제의 밀정보고서도 있습니다.” - 최운산 장군, 얼마나 부자였나. “간도 제1의 거부였죠. 부를 일군 배경으로 중국이 토지 정리사업을 할 때 엄청난 규모의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았습니다. 이를 조선 동포들과 함께 개간해 옥토로 바꿔 신한촌(新韓村)을 만들었습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생전에 말씀하시길 ‘우리 땅은 사흘을 둘러봐도 다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1960년대 우리가 부산에 살 때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부하 한 사람이 국제시장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할머니께 인사와 우리에게 이야기하길 ‘최운산장군의 땅 면적이 이 부산의 6배였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콩기름공장·국수공장·주류공장·성냥공장·비누공장·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수의 생필품 기업을 운영했습니다. 또 대곡상이자 축산업자로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소를 창춘이나 훈춘으로 몰고 가서 팔았답니다. 이 소떼와 곡물은 러시아 군대 식량으로 들어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게 연결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최재형(1858~1920) 선생이 소고기를 러시아군에 공급했다고 하는데 두 분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겠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오늘날 삼성과 비견 되는 재벌이었지만 40여년에 이르는 무장 독립운동으로 그 막대한 재산을 거의 다 소진했습니다. 말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살고 있던 집과 그에 딸린 수남촌 토성리 일대의 땅 뿐이었습니다.” “최운산… 간도 최고의 갑부이자 대지주부산 6배 넓이 땅 소유…무장투쟁에 소진”- 최운산 장군, 정확한 이름은 어떻게 되나. “일본군의 눈을 속이자면 변장이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여러 개를 썼습니다. 어릴 때는 최명길(崔明吉),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崔豊),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최빈(崔斌)·최운산(崔雲山)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 최복(崔福)을 사용했습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복잡다단한 삶을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 장작림 군벌서 군사지식 습득중국군 이직시 자위대 조직…私兵 100여명” - 무법천지 만주에서 대규모 재산 지키자면 자위대가 필수였겠다. “최운산 장군은 청년 시절, 중국 동북3성 지배세력인 장작림(張作霖·1875~1928) 군벌에 들어갔습니다.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 장작림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때 형 최진동, 동생 최명순과 함께 3형제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군사 지식과 군조직 운영을 익히며 만주군벌과 혈맹의 관계를 맺은 겁니다. 최운산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양쪽의 신뢰를 다졌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최운산 장군이 중국군을 이직하고 마적떼로부터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 명목으로 자위부대 구성하겠다고 했을 때 장작림이 기꺼이 허락해준 겁니다. 그가 사병(私兵)을 모집할 때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따라 나왔다 합니다. 100명이 넘는 규모라 처음부터 정규 군대와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몇 명의 중국 사병이 포함된 이 자위부대가 대한민국 국군의 작은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도독부(都督府)의 복장은 중국군과 같은 색깔이어서 잘 구별되지도 않았답니다. 독립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1915년엔 봉오동 산중턱을 벌목하고 개간해 연병장과 막사를 지어 독립군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때가 500명이 넘었습니다.” “3·1운동 후 열혈청년들 간도로 몰려 들어6개월 과정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도 창설안무·홍범도 등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과정은.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운영하던 670명의 자위부대를 대한민국 첫 정식 군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로 재창설합니다. 그때 중국 지방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최진동, 최치홍 두 사람도 대한군무도독부에 합류합니다. 사령관인 부장(府長)에 형인 최진동 장군을 추대했습니다. 자신은 참모장으로 재정 등 군대 운영의 전반을 책임졌지요. 병참을 맡은 겁니다. 동생 최치홍도 참모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에 대한북로군정서를 창설합니다. 3·1운동 이후 간도로 들어오는 열혈 청년들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들을 모두 받아들여 다음해에 6개월 과정의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십리평에 설립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북로군정서 무장과 사관연성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군자금으로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소진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언했습니다. 일본군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치르려면 대군단을 이루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 장군은 만주의 독립군 모두에게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제공하기로 약조하여 본격적인 대통합을 이뤄냈습니다. 북만주의 대소 독립군부대가 모두 합류했고 최종적으로 안무(1883~1924)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최씨 형제의 군대를 합쳐 독립군 통합부대를 만들었습니다. 명칭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였고, 통합 서약서에 서명 날짜는 대한민국 2년 즉 1920년 5월 19일이었습니다. 국민회, 신민회, 광복단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독립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 기치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의 신분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 봉오동전투 상황은.“통합을 이룬 대한북로독군부는 두만강을 건너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며 실전 훈련을 쌓아갔습니다. 봉오동을 중심으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기에 당시 일제는 독립군 토벌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보전으로 이를 파악한 우리 독립군은 마을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연대별로 각 산에 주둔하고 산능선을 따라 참호를 파고 매복했습니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봉오동전투 현장에 가면 낙엽이 가득 차있는 참호를 볼 수 있습니다. 1920년 6월 7일 새벽 일본군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봉오동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봉오동을 둘러싼 산에서 맹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어서 봉초봉 아래에선 백병전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돌멩이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뿌연 안개가 앞을 가렸던 거죠. 우리 독립군이 짙은 안개와 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승세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후퇴하던 일본군이 지원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서로 총격전을 가해 더욱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봉오동전투서 적군 500여명 사살…기존보다 많아청산리전투는 봉오동전투 연장… 6일간 교전”- 봉오동 전투 전과는. “전과에서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차이가 많이 납니다. 김성녀 할머니가 낸 진정서를 보면 ‘적군 사살이 500여명, 중상자 700여명, 경상자 1000여명입니다. 노획물자는 대포 4정, 기관총 수십 정, 장총 500여정, 탄환 수만 발에 수류탄 다수’라고 기록합니다. 홍범도 일지에도 일본군 사망자가 5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는 여전히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명으로 축소돼 있습니다. 우리의 피해가 거의 없다고 했지만 독립군도 사망자 수십명과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고 김성녀 할머니가 증언합니다. 총상 환자 치료를 위한 의사가 부족해 애를 태웠고, 용정 제창병원에 의사를 보내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 지도부는 주민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고, 더 많은 독립군이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합니다. 4000여 명에 이른 독립군들이 부대별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이 그해 10월 21일 청산리에서 따라 잡아 전투를 벌인 게 청산리전투입니다. 청산리전투는 하루 전쟁이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의 여러 부대가 6일 동안 치른 전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청산리전투가 별개의 전투가 아니라 봉오동전투의 연장전이라 생각합니다.” “최운산, 6차례 옥고…이름 8개 사용광복 40일 전 평양 장남 집에서 사망”- 최운산 장군, 역할에 비해 많이 잘못 알려졌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이 몇몇의 영웅담 위주로 신화화 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파르티잔들이 겨우 화승총으로, 청나라 및 러시아에도 이긴 세계 최강의 일본군에 승리했다는 것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학계도 언론도 처음의 잘못된 기록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논문을 낸 역사학자를 직접 만나 물어보면 ‘앞선 논문을 인용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역사학계가 정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운산 장군 그 뒤 어떻게 됐나. “연해주에서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무장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나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일명 최치영·1922~2001)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고향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장례나 치르라며 내주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최봉우가 평양으로 숨어들자, 아버지 최운산장군이 아들을 보러 왔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 40일 전인 1945년 7월5일 평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최운산장군은 1924년~1926년 3년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 거부 등으로 10개월간 감옥에 갇힌 것까지 일생동안 모두 6번 옥고를 치렀는데, 매번 심하게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습니다. 가족들도 그가 언제 감옥에 갔다 왔는지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유공자 인정 조건 뒷돈 요구에 주먹 날려1977년 서훈…동생 최치홍은 여태 안 돼”- 정부는 최운산 장군의 역할 일찍 인정해줬나. “1961년 1월 최운산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정부로부터 받고 총무처로 아버지 최봉우가 갔더니 담당공무원이 ‘뒷돈’을 요구하더랍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모든 가산을 독립군 무장에 썼는데….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아버지가 그 공무원에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그 이후론 독립유공자 선정에 번번히 밀려났습니다. 십수년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게지요. 아버지는 생전에 ‘내가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가렸다’며 후회하곤 했습니다. 그 후 할머니가 1969년에 진정서를 냈지만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뒤인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습니다. 같이 독립운동한 동생 최치홍은 100년이 지난 올해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김성녀 할머니도 큰 역할을 했다. “저도 할아버지의 삶을 살펴보다보니 할머니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할머니는 독립운동가를 내조한 차원을 넘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남편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낸 진정서를 보면 독립운동을 내조한 정도에서는 알 수 없는 당시 북로독군부의 조직 현황과 봉오동전투의 전과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봉오동전투를 바로 앞두고 최운산 장군이 집에 계시지 않을 때 도착한 중요한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산속의 본진으로 올라가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또한 군사들이 없을 때 집으로 쳐들어 온 마적들을 향해 직접 총을 쏘고 일꾼들을 독려해 무장 강도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물론 주민 부녀자들을 동원해 군복제작과 세탁 등 의복을 조달하고 식사를 준비했지만, 한 끼에 3000명분의 식사를 마련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해 김성녀 할머니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부인 김성여도 무장독립운동 한 축무장독립운동사, 영웅담서 벗어나야 할 때”-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우리 5남매는 만주 무장독립 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후손들의 주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가들의 연구가 깊어지면 언젠가 역사가 바로 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 바로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잘 못된 기록이 반복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희가 직접 일제 문서를 찾고,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삶을 역사학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반가워하면서 학술적 재조명이 필요한 일이니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셋째인 제가 60대입니다. 독립전쟁의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일 것입니다. 우리 남매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자 뜻이 맞는 분들을 중심으로 2016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집안 자랑이 아니라 수많은 독립군들이 함께 지켜낸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의 진실을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영웅담 위주의 독립운동사를 넘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이 봉오동전투 100주년이다. 계획한 행사는. “사실 최운산 장군이 잘 알려진 분이 아니라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5남매가 비용을 갹출해서 학술세미나 개최나 봉오동 답사 등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손주들도 나이가 들어 경제활동에서 물러나 있으니 기념사업회 활동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이 어려워 필요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올해는 당시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를 살펴보는 학술세미나를 열고 7월 5일 국립현충원에서 순국 74주기 추도식을 개최합니다. 100주년이 되는 내년엔 봉오동전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행사와 최운산 장군을 연구한 책을 한 권 펴내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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