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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대도 온전한 노동자… 권리 배우는 노동교육 제도화 급선무”

    “10대도 온전한 노동자… 권리 배우는 노동교육 제도화 급선무”

    전문가 3인 ‘청소년 노동’ 진단과 대안 서울신문은 ‘10대 노동 리포트: 나는 티슈 노동자입니다’ 시리즈를 통해 뽑아 쓰고 버리면 그뿐인 만만한 존재로 전락한 10대의 노동 현실을 고발했다. 정규 교육과정은 물론 그 누구도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지 않았고, 10대가 바라본 세상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민망하지 않은 일이 되려면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 전문가들은 10대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노동인권교육을 제도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진단했다. 대담에는 이원희 노무사, 송태수 한국기술교육대 고용노동연수원 교수, 송하민 청소년유니온 위원장이 참석했다. -10대의 노동 현실은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 송하민 10대가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로 어렵다. 그러다 보니 정말 힘들거나 최저임금 이하로 임금을 주는 등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에서 일하게 된다. 택배 상하차, 웨딩홀 뷔페 등은 일용직 개념이다. 말 그대로 한번 쓰면 끝인 일자리다 보니 휴식시간 미보장, 오후 10시 이후 근무, 수습기간 임금 공제 등 법을 어기는 건 다반사다. 이원희 10대가 일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특히 웨딩홀 뷔페 아르바이트에서 수수료 3.3%를 떼는 것은 용역 계약의 일종이고, 배달대행도 10대를 자영업자 신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법 위반을 넘어 법의 사각지대로 청소년을 내몰고 있다. -일터에서의 노동권 침해는 10대만의 일은 아니다. 유독 10대라서 정도가 더 심하다고 봐야 하나. 또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송태수 노동시장은 기본적으로 경제논리에 맞춰 돌아간다. 10대라 할지라도 노동력이 필요해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어리기 때문에 이 정도의 돈만 받아도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덩달아 가장 기본적인 근로계약서를 써서 나눠 주는 것조차 지키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쓰면서 단지 10대라는 이유만으로 불합리하게 대한다. 하지만 일자리 경험이 처음인 10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원희 학생,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면이 분명히 있다. 고용주들은 알바자리를 구하러 간 10대들에게 “얼마나 오래 할 거야”, “잠깐 하고 그만두려면서 무슨 근로계약서야”라고 한다. 또 어리니까 일이 미숙할 것이고, 제대로 일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과정이라는 시각으로 10대의 노동을 바라본다. 그렇다 보니 권리는 지켜지지 않는다. 송하민 그런 면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단순히 10대만의 문제라기보단 10대가 주로 종사하는 직종이 단순노무직, 서비스직인 점도 감안해야 한다. 저숙련, 고강도, 장시간, 저임금으로 점철된 일자리에 10대들이 주로 투입되는 것이다. -10대의 노동은 ‘용돈벌이나 하려고 하는 일’이라는 취급을 당한다. 송하민 ‘용돈벌이’라는 규정은 불쾌하다. 그리고 동의하지 않는다. “청소년은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 “부모 덕에 생계가 보장되고 용돈도 받는데 왜 일을 하냐”는 이야기를 실제로 많이 듣는다. 하지만 모든 청소년이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10대도 많다. 송태수 고등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 됐다. 서울교육청 실태조사에서도 10명 중 2명 정도가 알바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나왔다. 어떤 이유에서든 노동력을 제공하는 ‘경제 주체’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에게 경제 주체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고 있는 것인지 되짚어 봐야 한다. -10대는 일에 임하는 자세가 불량하다는 불만도 있다. 송태수 유독 10대만 업무에 임하는 자세가 불량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설사 그렇다 해도 원인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10대들이 주로 하는 단순노무나 서비스직에 대해 여전히 낮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냥 쓰고 버려도 되는 일자리로 인식한다. 게다가 사장으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10대들이 일 자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책임감이 떨어지게 된다. 부속품 정도로 여겨지는 노동을 경험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송하민 사업주는 10대 노동자를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먼저 짚어야 한다. 현장실습만 봐도 실습생을 받은 업체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조차도 몰라서 커피를 타게 한다. 그게 아니라면 사업장 안에서 위험해서 누구에게도 잘 맡기지 않는 업무를 맡긴다. 제대로 된 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10대가 일을 게을리한다는 것은 오래된 편견이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송하민 실습을 하던 현장에서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해도 학교로 돌아오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학교로 돌아오면 깜지(흰 종이에 글씨를 빽빽이 써넣어 흰 공간이 보이지 않도록 글을 쓰는 체벌)를 쓰게 하거나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업체를 선택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현장실습을 나가기 전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교육도 이뤄져야 한다.이원희 과거에는 취업률 기준으로 특성화고를 평가해 문제가 발생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제도 폐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전 보호 규정을 강화하면 업체들이 실습생을 뽑지 않는 식으로 대응하다 보니, 노동의 가치를 알고, 적성을 살릴 수 있는 현장실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제도를 유지하려면 일과 학습을 병행하고, 기술을 배워 산업현장에서 곧바로 활용한다는 현장실습의 근본적인 취지를 살려야 한다. -2007년 노사정위원회(현재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노동교육의 제도화를 권고한 바 있다. 10대 노동 현실을 바꾸고 인식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교육이 거론된 지 이미 10년이 넘었는데. 송태수 ‘학교에서 파업을 가르친다.’ 이런 프레임을 보면서 우리사회의 노동인권 교육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이 나쁘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모양새다. 이런 인식은 학교에서 노동교육이 어려운 이유기도 하다. 노동교육은 이념적으로 채색된 교육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마치 투쟁의 전사를 양성하는 것이라는 인식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원희 노동교육에 색깔을 씌우는 시도도 안고 가야 할 과제 중 하나다. 노사 관계나 노동자, 노동조합을 갈등으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노동이나 파업이 무엇인지 또 왜 하는지에 대해 배우는 기회가 필요하다. 진로교육만 봐도 적성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내가 가서 일해야 할 곳에서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인식 개선과 함께 10대들이 겪는 부조리를 털어놓을 수 있는 창구를 확대하는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 송하민 학교에서의 노동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청소년들이 일하는 이유가 생계유지를 위해서인 경우도 많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노동시장에 10대가 왜 진출해야 하는지부터 짚어 봐야 한다는 의미다. 학생 신분 혹은 10대가 밑바닥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사회안전망 구축도 필요하다. 또 이미 노동시장에 진출한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감독을 강화하거나 불합리한 일을 당했을 때 호소할 수 있는 센터가 좀더 늘어나야 한다. 처음 노동시장에 진출한 10대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우리 모두의 페미니즘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우리 모두의 페미니즘

    어울리지 않게 대학원 박사과정 전공이 페미니즘이었다. 1990년대 중반경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얼떨결에 발을 담갔다가 결국 페미니즘 이론에 매료된 것이다. 페미니즘에 혹했던 이유는 여성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평등한 세상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학위를 포기하고 공부를 중단하기는 했지만, 그때 접한 페미니즘 세계관이 지금껏 내내 내 시각을 잡아 주고 삶을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일 흥미로웠던 주제가 ‘언어’다. 세계가 유럽ㆍ백인ㆍ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언어는 유럽ㆍ백인ㆍ남성이 지배하고 그 나머지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지배자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문학작품 속에서 여성이 (남성의 언어를 도구로)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고 또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살폈다. 자크 라캉에 따르면 언어란 개별 인간 이전에 존재하고 개별 인간은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사회화한다. 여성은 스스로의 언어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성의 언어를 체득하며 사회화하므로 곧바로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고 만다. 남성 중심 언어에서 남성은 기준이 되고, 여성은 배제되거나 부차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남성 성기의 결여’에서 찾고(기준은 늘 남성이다),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 ‘우먼’(woman)은 남성 ‘맨’(man)에 의존해서만 존재한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김승섭 교수는 “과학에서 여성의 몸이 사라진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과학적으로 정했다는 사무실 적정 온도 21도는 몸무게 70㎏의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한다. 불면증 치료제 졸피뎀의 기본 처방 용량 10㎎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부작용 가능성이 크다. 새 신부에게 남편 식구들을 ‘서방님’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예법은 누가 만들었을까. 명절에 시집부터 찾는 풍습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부모 재산은 왜 남자들이 다 가져갈까. 우리는 왜 이런 불평등들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까. 남성의 몸에 맞게 만든 옷이 여성에게 편할 리가 없다. 페미니즘 문화 이론가이자 철학자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은 히스테리, 거식증, 분열성 정체성 장애 등 여성 특유의 질병이 남성 주도적 문자 사회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한다. 남성의 상징체계가 여성의 몸에 강제적으로 이식되면서 여성들이 끊임없이 고통을 겪어 왔다는 것이다. 20대 남성 70%가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뉴스를 접했다. 군대 문제를 비롯해 오히려 역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한다는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느 통계를 보아도 남성은 이 불평등 사회의 수혜자다. 20대라고 다를 바 없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여성이 부당하게 취급받는 게 아니라 그걸 당연시하고 고착화하려는 사회 분위기다. 페미니즘에 주홍글씨 낙인을 찍고 심지어 페미니즘을 남녀의 성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정당도 있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싸우자는 이론이 아니다. 기득권, 주도권을 빼앗겠다는 싸움도 아니다. 우리 어머니, 누이, 연인이 겪고 있으며 또 미래의 아내, 딸이 겪어야 할 질병과 고통에 대한 얘기다. 지금까지의 가부장적, 남성주도적 세계관을 잠시 내려놓고 어머니의 눈으로, 아내와 여동생, 딸의 입장에서 세상을 이해해 보자는 운동이다. 경쟁자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바로 내 가족을 위한 노력이고 운동이다. 나는 여전히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녀가 평등한 사회여야 남녀가 모두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스웨덴의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 카롤린스카도 2015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면 남성도 살기 좋아진다. 남성의 어깨에 있는 짐을 일부 내려놓으면 남성도 편해진다. (페미니즘이) 한국을 구할 것이다.” 페미니즘이 우리 모두의 페미니즘이어야 하는 이유다.
  • ‘미쓰코리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집 공개 “유럽 가정집은 처음”

    ‘미쓰코리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집 공개 “유럽 가정집은 처음”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집이 공개돼 화제다. 28일 방송된 tvN ‘미쓰코리아’에서는 멤버들이 새 호스트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매일 찾아와 글을 쓴다는 수영장이 겸비된 호텔로 멤버들을 불렀다. 한국말로 반갑게 인사하며 등장한 베르나르와의 첫 만남에 박나래는 “생전에 이 분을 뵐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는데”라며 놀라워했고, 장동윤은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구나”라고 감탄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미쓰코리아’의 집-밥 교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사연에 대해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저의 제 2의 조국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한식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에 처음 갔을 때 마치 내 집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제가 전생에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라며 한국을 향한 특별한 애정을 전했다. 이들은 프랑스 파리 관광 후 저녁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집으로 향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집은 몽마르트 근처. 사크레쾨르 성당 옆 골목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집이 나왔다. 신현준은 “유럽 가정집은 처음 가 본다”며 놀라워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신현준은 “뭔가 동양적이다”며 또 놀랐다. 곳곳에 다양한 개미 그림과 모형들이 그의 소설 ‘개미’를 연상시켰다. 개미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행운의 상징이라고. ‘개미’ 뿐만 아니라 ‘뇌’ ‘파피용’ 등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소품들과 한국어 붓글씨, 징 등 한국식 소품도 눈길을 모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체조를 한다는 테라스에 침실도 공개돼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성현아 부친상 “결국 읽히지 못한 말..”[종합]

    성현아 부친상 “결국 읽히지 못한 말..”[종합]

    배우 성현아(44)가 부친상을 당했다. 성현아는 27일 자신의 SNS를 통해 “저의 친아버지께서 새벽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부고 소식을 전했다. 성현아는 전날 아버지에게 남긴 카카오톡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성현아는 ‘사랑해’ ‘우리한테 잘못한 거 없어’ ‘걱정마요’ 등의 메시지를 남겼다. 성현아는 “결국 아버지께 읽히지 못한 말, 낳아주신 우리 아빠 사랑한다”라며 부친상을 암시한 바 있다. 이에 일부 매체는 성현아가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 해 작성한 글이라고 오보를 냈다. 성현아는 이를 두고 “제발 오버들 하지 말아달라. 함부로 있지도 않은 남의 감정 지어내지 말아달라”고 분노하기도 했다. 한편 성현아는 1994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통해 데뷔했으며, 영화 ‘할렐루야’, ‘남과 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주홍글씨’, ‘애인’, ‘손님은 왕이다’, 드라마 ‘어느날 갑자기’, ‘시간’, ‘나쁜 여자 착한 여자’, ‘이산’, ‘욕망의 불꽃’ 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연기활동을 펼쳤다. 2013년 불거진 성매매 혐의에 대한 법정 공방과 2017년 남편의 사망 등으로 긴 공백기를 가졌다. 지난해 7년 만에 ‘파도야 파도야’로 복귀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당신은 어릴 적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당신은 어릴 적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란 삶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일임이 분명하다.’(김현 ‘누군가 창문에 입김을 불어 쓴 글씨’ 중) 어떤 시절을 거쳐 시인은 어른이 될까. 혹은 어른이 되지 못했을까. 열두 명의 시인이 10대 시절과 지금에 대해 시와 산문을 겹쳐 쓴 ‘교실의 시’(돌베개)를 펴냈다. 201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 1980년대생인 열두 명의 시인은 ‘교실’이라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10대 시절의 기억·감각·감정,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에 관해 들려준다. 서효인 시인은 폭력이 대물림된 중학교 교실에서 ‘나는 죽었다’고 썼다.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의 구타가 일상화된 교실에서 위 학년은 아래 학년을, 강한 학생은 약한 학생을 때렸다. 시인은 1996년 그곳에서 함께 했던 동년배들이 사회 곳곳으로 나가 혐오가 혐오인지 모르고,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는 무뢰배가 됐을까 우려한다. ‘척’이라는 이름의 시에서 ‘내 이름은 척’이라던 오은 시인은 무수한 척을 거쳐 어른이 됐으나, 어른이 돼도 ‘척할 일’은 도처에 널려 있으며 난생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늘 당황한다고 고백한다. ‘어른’이라는 말의 정의에 대해서는 김현 시인의 언술이 가장 명징한 것 같다. ‘타인의 얼굴에서 시간을, 시간에 힘입어 온 기쁨과 슬픔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됐을까. 꼭 어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과연 어드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반문하게 하는 책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비밀정원’ 성락원 200년 만에 문 열다

    ‘비밀정원’ 성락원 200년 만에 문 열다

    북한산 자락 ‘조선 후기 별서정원’ 연못 암벽엔 추사 김정희 글씨도 70% 복원… 내년 가을 정식 개방 높다랗게 솟은 철제 대문으로 들어섰다. 졸졸졸, 북한산을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가 청량했다. 새소리, 바람소리, 자연의 소리로 그득했다. 23일 2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성락원’(城樂園)은 도심 속 별세계였다. 대문과 담을 경계로 시끌벅적한 속세와 담을 쌓고 산중 고요한 계곡 정원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성락원은 서울 시내 유일한 조선후기 별서정원(別墅庭園·별장에 딸린 정원)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전남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과 함께 ‘한국 3대 전통 정원’으로 일컬어진다. 조선 전통 정원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덕분이다. 성락원은 짙은 회색빛 철제 대문과 검은색 벽돌담으로 둘러쳐졌다. 대문 옆 벽면에 성락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지만 이곳에 도심 속 딴 세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지금까지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사유지였기 때문이다. 1년에 한두 차례 지역 행사 등을 위해 잠시 문이 열린 적은 있지만 일반에 개방되는 건 처음이다. 성락원은 1790년 조성됐다. 조선 철종(1849~1863)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이 별장으로 썼다. 이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0년 넘게 별궁으로 사용했고 심상응의 후손인 고(故) 심상준 제남기업 회장이 1950년 4월 매입했다. 1992년 대한민국 사적 378호로,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5호로 지정됐다. 성락원이라는 이름엔 서울 도성의 자연미를 즐길 수 있는 정원이라는 뜻이 담겼다. 총면적은 1만 4407㎡(약 4360평)다. 전원(前園·앞뜰), 내원(內園·안뜰), 후원(後園·바깥뜰)으로 이뤄져 있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쌍류동천(雙流洞天)이 감싸고 도는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앞뜰과 안뜰을 나눈다. 바깥뜰엔 1953년 지어진 정자 송석정(松石亭)이 있다. 정원 안엔 송석지(松石池), 영벽지(影碧池) 등 연못 2개가 있다. 영벽지 서쪽 암벽에 행서체로 쓴 ‘장빙가’(檣氷家·고드름 매달린 집)라는 글자는 추사 김정희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박중선 한국가구박물관 이사는 “장빙가라는 글씨는 복원 공사 과정에서 나왔는데 완당(阮堂)이라는 낙관이 함께 새겨져 있어 추사가 쓴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2008년 복원 공사를 시작, 현재 7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아직 완공되지 않아 6월 11일까지 한시적으로 문을 연다. 매주 월·화·토요일, 하루에 일곱 번씩 단체 관람을 할 수 있다. 내년 가을쯤 정식 개방될 예정이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왕이 후궁 처소를 찾을 때 썼던 이 물건,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왕이 후궁 처소를 찾을 때 썼던 이 물건, 아시나요”

    고미술 수집 40년 최형술씨가 말하는 골동품“이 향난로는 아마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약재를 가루로 만드는 약연과 한약을 달이는 약탕기, 약주전자, 약탕관 등 한약과 관련된 모든 도구가 한 세트입니다. 약주전자와 약맷돌에 새겨진 이 문양을 보세요. 용, 불로초, 사슴, 잉어가 보이죠. 그리고 이번에 청자철제귀면종에 대해 문화재 등록신청을 했습니다.” 골동품 가게 앞에 5층 8각 석탑 두기 서 있어“14세기 청자철제귀면종, 문화재 등록 신청해”서울에서 가장 큰 고미술점을 운영했다는 최형술(81)씨를 인터뷰하려고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청계8가 한국도자기 뒤에 있는 골동품점 갤러리 미(취강당)을 지난 17일 찾았다. 철물점 상가들 사이에서 두 기의 8각형 5층 석탑이 가게 앞을 지키고 섰다.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의 가게에 들어서자 세월의 더께에 쌓인 갑옷과 놋그릇, 제사용품과 서화, 가구 등이 가득했다. 그는 처음엔 골동품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사진이 나가면 짝퉁이 나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사화 하려면 사진이 필요하다고 설득한 끝에 촬영을 허락받았다. 사진을 찍으러 공예품 먼지를 털자, 먼지도 털지 못하게 했다. 최씨는 가리킨 약주전자에는 뚜껑은 용이 똬리를 튼 특이한 모양새다. 물이 나오는 주구 부분 역시 특이하다.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었다. 이 주전자를 끓일 아궁이 역시 커다란 돌덩이로 만들어졌다. 그 옆에는 향난로가 놓여있었다. 사각형의 돌상자에는 다시 작은 돌상자를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구멍이 2개에서 4개씩 나 있었다. 들어보니 아주 묵직했다. “장수곱돌로 만든 거예요. 이게 옛날에 임금님이 어느 후궁 처소로 가겠다고 하면 상궁들이 이것을 미리 그 후궁방에 두고 방을 따뜻하게 데우면서 향기롭게 하는 기능을 했다고 합니다. 저도 용도를 몰라 궁금해했는데 수년 전 한 스님이 이렇게 설명해 줬습니다만 좀 더 정확한 용도와 고증이 필요합니다.” 기자가 이 사진을 한의사에 보여줬지만 그 한의사 역시 처음본다고 했다. 이렇게 한약방과 관련된 도구가 100여 점에 이른다. “장수곱돌로 만든 한약방 도구 100여점용 무늬, 불로초, 잉어 등의 그림 새겨져충청도 대갓집에 3년간 공들여 수집해”- 한약 도구세트, 어떻게 소장하게 됐나. “1980년대에 충청도의 한 가문으로부터 수집했습니다. 99칸에 이를 정도의 대갓집이었는데 그 집 할아버지로부터 사들였습니다. 처음엔 안 팔겠다고 했는데, 한번 내려갈 때마다 술, 고기 등을 사들고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팔아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설득하면 그 할아버지가 한꺼번에 팔지 않고, 한점 팔고, 몇 달 뒤에 또 내려가면 3점 팔고…. 이렇게 해서 다 사모는데 한 3~4년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이 한약방 도구들의 출처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지 않고, 집안에 내려오는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현재 소장한 가장 비싼 미술품은. “글쎄, 가격을 다 매겨보지 못해 잘 몰라요. 그런데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은 있습니다. 고려시대인 14세기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가마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철제귀면종’은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있어요. 청자로 만든 종의 사금파리는 전하고 있지만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청자 종(鐘)으로는 아마 국내에서 유일할 겁니다. 사찰에서 쓰였을 것 같은데, 전문가들의 감정을 받아보면 가치와 용도를 알 수 있겠지요. 또 한가지 백자대호(달항아리)는 다음 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한 달간 전시할 생각입니다. 18세기 전후에 광주 분원리에서 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고가품은 분청사기…신사동 땅값 100배골동품 안목 수업료로 집 몇 채 값 날아가”- 그러면 최고가 수집품은. “미련을 갖지 말아야지요. 박수근·김환기·이수근의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단원 김홍도 그림도 제 손을 거쳐 간 것이 제법 됩니다. 한번은 평당 강남 땅값의 100배로 샀던 것도 있습니다. 1976년인가에 분청을 그때 돈 2000만원에 샀습니다. 그때 허허벌판의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비포장이었지만 도로 옆에 붙은 좋은 땅은 평당 2만~3만원이었고, 안쪽 구석에 있던 것은 5000원도 안 되었습니다. 분청사기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 그 분청 아직도 갔고 있나. “벌써 임자를 만나 나갔지요. 비싸게 매입한다고 다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골동품과 관련해 수업료로 집 몇 채 값은 날아갔습니다. 수십년 골동품을 거래한 저도 사람의 손때를 탄 물건, 어찌 보면 혼이 담긴 물건이기에 알기가 무척 어려워요. 살 때 분명히 진품으로 보였는데, 가게에 와서 보면 다르게 보이고 해서….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일반인도 아닌 전문 장사꾼이라 무를 수도 없고 집 한 채 값 그냥 날아가지요.” - 그 분청사기 누가 사갔나. “이름은 말할 수 없지요. 의사와 변호사, 교수 등이 우리 집에서 물건 많이 사갔습니다. 예술품이나 골동품은 소장자가 누구냐에 따라 가치가 또 확 달라집니다. 같은 분청사기라도 골동품상인 제가 가진 가치와 유명 교수나 학자가 소장한 것의 가치가 다르다는 거죠.” - 현재 보유한 고미술품 수는. “고미술품과 민예품 등을 합쳐서 아마 1만 점이 넘을 겁니다. 중간 상인이 차로 100점~200점 갔고 옵니다. 그중에서 서너 점이 마음에 들면 차떼기로 전부 다 샀던 겁니다. 중간 상인도 값나가는 서너 점을 알거든요. 좋은 것만 사고, 나머지를 사지 않으면 다음엔 거래하러 오지 않아요. 그 서너 점으로 본전을 뽑고, 나머지를 팔아서 이익을 내는 구조입니다. 많을 때 10만 점가량 보유했습니다. 다 보관을 할 수가 없어서 팔기 시작한 겁니다. 가구와 같은 목제품, 그림이나 글씨와 같은 서화는 비바람을 맞아 곰팡이가 피면 안 되잖아요. 여기 가게에도 있지만 개운사 옆 카페 봄에도 삼국시대의 토기 등을 전시하고 있지요. 창고에도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자개 농과 같은 나무 제품은 공간도 많이 차지합니다. 사람이 쓰는 물건이 3만가지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을 다루어봤을 겁니다.” “50~90년대 광장시장서 복지점으로 돈 벌어1970년대 우리 민예품 해외 마구 팔려나가남아있는 게 없겠다는 생각에 수집 시작박물관 생각에 마구 수집…여건 달라져 포기수집품 한때 10만점쯤 …지금은 1만점가량 보유”- 고미술 수집엔 돈이 엄청 든다. “동대문과 광장시장에서 양복을 짓는 데 쓰는 옷감인 복지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1958년부터인가 시작했는데, 그 당시 신랑이 장가갈 때 양복 한 벌 맞춰 입으려면 쌀 10가마의 돈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매와 소매를 겸해서 전국에 거래상을 두고 팔았지요. 그때 돈을 제법 만졌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닥친 1998년 복지 가게는 다 정리했습니다.” - 왜 고미술에 빠졌나. “1970년대에 보니깐 우리 공예품이 외국으로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심지어 수석까지 미국 일본 필리핀 이탈리아 등으로 팔려가가더군요. 소련에도 팔려나갔습니다. 이래서는 우리 것이 남아있지 않겠다는 생각에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좋은 것을 사 모아야겠다는 사명감에 보이는 대로 사서 모았지요. 그러다가 우리 공예품, 민예품을 보는 눈도 생기고, 알게 되니깐 더 애착이 가더라고요. 어느 순간 더 이상 보관할 수가 없게 되어서 골동품 가게를 열었습니다. 매장 면적이 170평으로 전국은 몰라도 서울에서는 가장 컸습니다. 18~19년간 하다가 땅 주인이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해서 여기로 이사해 소일거리로 하는 겁니다.” - 아무리 고미술에 빠져도 그렇게 사모을 수 있나. “처음엔 박물관을 하나 운영할까 생각했습니다. 서울에다 박물관 하나 하려다 보니 땅값이 엄청나게 올라 있고, 박물관 운영비 마련도 쉽지 않아 보여서, 그냥 나자빠진 거죠. 결국, 이렇게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게 된 거죠. 한창때는 귀하거나 없는 물건을 보면 안 사고는 못 배겼어요.” - 고미술 수집과 복지점 운영하면 물려받은 게 많았겠다. “저는 1939년생으로, 고향이 전남 해남인데, 그때 꿈이 교사였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해남고등학교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집안이 어려워 진학 대신 농사일을 도우며 서당에 3년가량에 다녔습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싶어서 무작정 상경해서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해서 돈을 아끼고 모으고 해서 복지점을 낸 겁니다. 복지점을 낸 지 3년 만에 해남에서 농사짓는 아버지한데 논 20마지기(4000평)와 기와집을 사드렸습니다.” “아파트 거주공간에 고미술 둘 공간 없어져조상 손때 묻은 골동품, 갈수록 가치 올라”- 고미술 대신 강남에 땅을 샀다면. “강남에 땅을 샀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잖아요. 잘 되었을 거라는 보장이 없지요. 신사동의 좋은 땅이 평당 2만원할 때 고려대 뒤 개운사 옆에 7500만원을 들여 큰 한옥을 지어 살았습니다. 그동안 건강하게, 화목하게 살았으니, 강남에 땅을 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어요. 남들은 뭐라 생각하든 우리 고미술 보존에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 고미술 찾느라 전국 많이 다녔겠다. “복지점을 할 때 전국 거래처를 다녔지만, 고미술을 할 때는 가지 않습니다. 골동품도 수십년 거래한 믿는 중간 상인들이 있습니다. 중간 상인들은 지역별로 골동품을 모아두는 사람들을 두고 있었지요. 그래야 탈도 없고, 외상거래도 떼어먹는 일도 없지요. 집안에서 대대로 쓰던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정말 돈이 급하잖아요. 그래서 언제든지 현금으로 지불할 준비는 해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속은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그 또한 제 안목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엔 곁눈질로 한번 보면 10가지 이상이 파악됩니다. 그리곤 가격이 바로 매겨집니다. 수십년 경험이지요.” - 문제는 없었나.“무슨 문제요? 아~, 한번도 경찰에 조사받은 일이 없습니다. 수십년 거래한 중간 상인들이라도 의심스러우면 거래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골동품이라는 것들이 무겁고, 부피도 커고 해서 귀금속과는 많이 달라요. 이 부근 한자리에서 20년가량 장사를 하는데 손님을 속이고 그렇게 운영해서는 오래 못가요. 손님들이 수년 지나서 찾아와 물러달라거나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고 하면, 손님들 요구대로 다 해줬습니다.” - 요즘 고미술 인기는. “한때 한국화가 잘 나갔습니다만 아파트가 못도 박지 못하게 하잖아요. 소품의 유화라도 그림을 걸어둘 곳도 없어졌습니다. 동양화는 액자나 족자를 하게 되면 무겁고 공간도 넓게 차지하는 단점이 있지요. 병풍을 쳐 놓을 공간도 없고, 조상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같아요. 고미술을 사려는 사람도 적지만, 수요는 꾸준히 있습니다. 하지만 고미술, 골동품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워졌습니다. 가격도 비싸졌고…. 동묘에도 골동품상이 한두집 밖에 없어요. 요즘엔 물건이 안 나오니깐 못하는 거지요. 그래도 조상들의 혼이 담긴 골동품, 갈수록 가치가 올라갈 겁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전통과 현대 넘나든 근대 서화가들의 붓

    전통과 현대 넘나든 근대 서화가들의 붓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던 혼돈의 시대에 근대 서화가들이 남긴 유산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된다. 16일 개막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올해 첫 특별전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는 근대 화단을 이끌었던 화가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의 100주기를 맞아 마련한 전시다. 안중식을 비롯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대에 화단을 이끌었던 근대 서화가들과 안중식 사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과정을 아우른다. 서예와 산수·인물·화조도에 두루 능했던 안중식은 1880~1890년대 중국과 일본에서 머무르다 1901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제작에 함께 참여한 소림(小琳) 조석진(1853~1920)과 함께 국내 화단을 이끌면서 191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안중식의 화려한 청록산수화나 근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명절지도는 당시 젊은 서화가들에게 계승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악산과 경복궁을 묘사한 ‘백악춘효’, 전남 영광의 풍경을 현장감 있게 그려낸 ‘영광풍경’, 녹색과 분홍색으로 화려하게 무릉도원을 나타낸 ‘도원행주’ 등 안중식의 대표작과 근대 서화가들이 남긴 그림, 글씨, 사진, 삽화 등 작품 100여건이 소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뿐만 아니라 삼성미술관 리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안중식의 걸작을 비롯해 일본 사노시 향토박물관의 소장품인 김옥균 친필 글씨도 공개된다. 전시는 오는 6월 2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이어진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유족·잠수사 등 100권 구술집… 76명 참여 시집

    유족·잠수사 등 100권 구술집… 76명 참여 시집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아 출판계가 추모 저작물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피해자 가족과 잠수사 등의 생생한 목소리를 100권으로 묶은 구술집을 비롯해 유명 시인과 손글씨 화가 76명이 참여한 추모 시집도 나왔다. 세월호 참사를 기록해온 민간단체 연합 4·16기억저장소의 구술 증언록 ‘그날을 말하다’(한울)는 무려 100권에 이른다. 1명당 1권의 책으로 피해자 가족 88권, 잠수사 4권, 동거차도 어민 2권, 유가족 공동체 단체 6권으로 구성했다. 피해자 가족 구술집 30권을 우선 16일 출간하고 나머지를 이어 낸다. 구술집은 2015년 6월부터 4년 동안 진행한 결과물이다. 공통 질문지를 사용해 매회 2시간씩 3회에 걸쳐 음성 녹음과 영상 촬영을 병행했다.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창비)는 미류, 박희정 등 작가 5명이 희생자 유가족 53명과 생존자 가족 4명을 6개월 가까이 만나면서 정리한 책이다. 참사 이후 달라진 피해자 가족의 변화를 따라간다. 4·16연대 공동대표 박래군, 엄기호 교수 등이 각각 세월호를 둘러싼 한국사회 움직임을 사회운동 관점에서 해석한 글을 덧붙였다. 김기택, 나희덕, 백무산, 신경림, 함민복 등 38명의 시인과 손글씨 화가 38명이 참여한 ‘언제까지고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걷는사람)는 시인들이 추모 시를 쓰고, 화가들이 시의 한 구절을 붓글씨로 적어 나란히 수록했다. 선장 출신인 오선덕 작가가 쓴 ‘더 세월’(이야기마을)은 기록물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워‘ 교민 손편지에 문대통령 “뭉클”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워‘ 교민 손편지에 문대통령 “뭉클”

    3일간의 미국 공식 실무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문재인 대통령이 현지 교민으로부터 받은 손편지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문 대통령은 12일 오후 귀국 직후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워싱턴에서 손글씨로 적어준 엄마의 편지와 태극기가 그려진 어린 딸의 편지를 받았다”며 편지 사진을 찍어 올려 그 내용을 소개했다. 교민은 편지에 “외국인으로 타국에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대통령 덕분에 한국 사람인 것이 자랑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적었다. 이 교민은 “이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문 대통령의 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겠다”고 말했다.편지와 함께 올라온 또 다른 한장의 사진은 이 교민의 딸이 태극기 그림과 함께 손글씨로 적은 편지였다. 편지에는 “문재인 대통령님,김정숙 여사님,아프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다. 문 대통령은 두 통의 편지를 소개하며 “누군가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에 뭉클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감사합니다.큰 힘이 되었다”며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승려 범렴 다녀감”… 울진 성류굴서 1200년 전 글씨 발견

    “승려 범렴 다녀감”… 울진 성류굴서 1200년 전 글씨 발견

    신라시대 화랑·승려가 작성한 것 추정천연기념물 제155호 경북 울진 성류굴에서 1200여년 전인 신라 원성왕 14년(798)에 화랑과 승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지난 3월 21일 울진군이 성류굴 종합정비계획 수립을 위해 동굴을 조사하던 중 입구에서 23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각석(刻石) 명문 30여개를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동굴 내부에서 명문이 발견된 것은 국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명문 발견 지역은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장소로, 명문 중 하나는 ‘정원십사년 무인팔월이십오일 범렴행’(貞元十四年 戊寅八月卄五日 梵廉行)이었다. 정원 14년 8월 25일에 승려 범렴이 다녀갔다는 의미로, 정원(貞元)은 중국 당나라 황제 덕종(재위 779∼805)이 785년부터 사용한 연호다. 이 명문 근처에서는 ‘임랑’(林郞), ‘우’(牛) 등 화랑 이름으로 추정되는 글자도 발견됐다. 명문은 석주, 석순, 암벽에 오목새김돼 있고, 글자 크기는 다양했다. 대부분 자형이 똑바른 해서체로 쓰였지만, 약간 흘려 쓴 행서체도 일부 발견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성류굴이 신라시대 화랑이나 승려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수련 장소로도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면서 “동물 이름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화랑들이 동굴에서 의례를 치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성류굴에서는 이외에도 ‘신유년’(辛酉年)과 ‘경진년’(庚辰年) 같은 간지, 통일신라시대 관직 명칭인 ‘병부사’(兵府史), 조선시대 율진현령을 지낸 인물인 ‘이복연’(李復淵)이라는 글자도 확인됐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천연기념물인 울진 성류굴에 낙서한 이들의 정체...1200년전 화랑

    천연기념물인 울진 성류굴에 낙서한 이들의 정체...1200년전 화랑

    520년대 간지에 공랑·임랑도 등장…명문 30여개 발견천연기념물 제155호 울진 성류굴 안에서 낙서가 발견됐다. 1200년 전인 신라 원성왕 14년(798)에 화랑과 승려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명문 30여개가 확인됐다. 성류굴은 지난 2015년 입구 위 바위에 신라시대 금석문 수십 자가 새겨졌다는 사실이 소개됐으나, 동굴 내부에서 명문이 발견되기는 국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울진군 관계자들이 지난 3월 21일 성류굴 종합정비계획 수립을 위해 동굴을 조사하던 도중 입구에서 230여m 떨어진 지점 주변에서 각석(刻石) 명문 30여 개를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불영사 계곡 부근에 있는 성류굴은 전체 길이가 약 800m인 석회암 동굴로, 글씨는 일반인 접근이 제한된 지역의 석주·석순·암벽에 음각 형태로 새겼다. 글자 크기는 다양하며, 대부분 정자체인 해서(楷書)이고 일부가 약간 흘려서 쓴 행서(行書)로 조사됐다. 명문 중 하나는 ‘정원십사년 무인팔월이십오일 범렴행’(貞元十四年 戊寅八月卄五日 梵廉行)으로, 정원 14년 8월 25일에 승려 범렴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정원(貞元)은 중국 당나라 황제 덕종(재위 779∼805)이 785년부터 사용한 연호다. 이 명문 근처에는 화랑 이름으로 생각되는 ‘공랑’(共郞), ‘임랑’(林郞)과 소를 뜻하는 ‘우’(牛)라는 글자도 존재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성류굴이 신라시대 화랑이나 승려들이 찾아오는 명승지였으며, 수련 장소로도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며 “동물 이름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화랑들이 동굴에서 의례를 치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신유년’(辛酉年)과 ‘경진년’(庚辰年) 같은 간지, 통일신라시대 관직 명칭인 ‘병부사’(兵府史), 조선시대 율진현령을 지낸 인물인 ‘이복연’(李復淵)이라는 글자도 확인됐다. 이 가운데 ‘신유년’과 ‘경진년’은 국보 제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에 있는 글자인 ‘을사년’(乙巳年, 525년 추정)과 비슷한 시기에 새긴 것으로 보이며, 524년에 제작한 것으로 짐작되는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 해서와 동일한 서체도 있다. 또 모래시계 모양으로 표현한 다섯 오(五)자도 3개가 발견됐고,장천(長川)이라는 글자도 나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연합뉴스를 통해 “고려 후기 문인인 이곡이 1349년에 쓴 동유기(東遊記)에 처음 등장하는 ‘장천’이라는 말은 그동안 ‘긴 하천’으로 해석했는데, 성류굴에서 ‘장천’ 글자가 확인되면서 울진에 있는 하천인 왕피천의 옛 이름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성류굴 명문은 신라시대 이후 정치·사회사와 화랑 제도 연구에 도움이 되는 사료로 보인다”며 “각석 명문을 실측하고 기록화 작업을 벌이는 한편, 연차별 정밀 학술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문화마당] 익숙한 봄, 낯선 하루/강의모 방송작가

    [문화마당] 익숙한 봄, 낯선 하루/강의모 방송작가

    서둘러야 했다. 여행지에서 맞는 첫날 아침처럼. 허나 늦었다. 내 방 내 침대였으므로. 설렘으로 잠을 설친 탓이기도 했다. SNS를 가득 채운 여행 사진들이 눈물나게 부럽던 차, 하루 일을 비우고 길을 나서기로 했다. 멀고도 가까운 도심으로. 여행지에선 보통 평소에 가지 않는 곳을 찾는 법. 이날의 주제는 미술관 산책으로 잡았다. 미술은 내게 너무 먼 영역임에도 뇌운동과 신체운동, 보는 것과 걷는 것의 비중을 같이 둔 선택이었다. 최근 만난 책에서 이런 문장이 격려의 글로 읽힌 덕분이기도 했다. ‘예술에서는 느끼는 게 중요하고, 예술은 느낌으로 말하고, 느낌을 통해 말하며, 느낌에 관해 말합니다.’ (조경진, ‘느낌의 미술관’) ‘데이비드 호크니 전’을 보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갔다. 평일 오전인데도 관람객이 꽤 많았다. 그림은 많이 보았으되 솔직히 무엇을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한 사람의 오랜 생애를 작품의 변화로 보는 게 좋았다. 순간의 느낌에 집중하고 노력해 온 장대한 세월을 압축해 하나의 세계로 만날 수 있다니. 전시장 복도 작은 공간에선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있었다. 좁고 불편한 자리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그의 젊은 날이 어떠했든 내겐 고향 들판에 이젤을 세우고 슥슥 풍경을 그려 내는 주름 가득한 그의 손이 가장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는 말했다. ‘시각을 재충전하려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내 손이 오래된 기술이고 거기에 신기술을 더한다’고. 한 시간 가까이 다큐멘터리에 집중하느라 점심시간을 놓쳤다. 여행자답게 맛집을 검색하고 30여분을 헤맨 끝에 슴슴한 이북식 만둣국으로 배를 채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다시 힘을 내서 성곡미술관까지 씩씩하게 걸었다. 환경운동가 크리스 조던의 ‘아름다움 너머’ 전을 보았다. 그가 만든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진은 실체를 감추고 있다. 사진을 확대하면 수십 수만 개의 비닐봉지, 페트병 뚜껑, 농약을 먹고 죽은 새들이 보인다. 끔찍한 반전이다. 이 전시회의 마지막 동선도 다큐멘터리 감상이었다. 8년 동안 촬영했다는 ‘앨버트로스’ 상영 시간이 1시간 30분 남짓, 꼼짝도 못하고 영상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해변을 가득 채운, 세상에서 가장 긴 날개를 가졌다는 앨버트로스.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환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잡아챈 먹이가 플라스틱 잡동사니인 줄 모르고 새끼 입에 넣어 주는 부모새. 뱉어 내지 못한 그 쓰레기들 때문에 때가 돼도 날지 못하고 죽어 가는 어린 새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부끄럽고 처연한 심정으로 전시관을 나오다 이 글 앞에 멈췄다. ‘애도는 슬픔이나 절망과는 다르다. 애도는 사랑과 같다. 애도는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또는 이미 잃은 것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애도에 마음의 자리를 내준다면, 이는 우리를 진정한 생명의 근본으로 이끌 것이다.’ 애도를 채워 촉촉해진 마음으로 뒷마당을 바라보니 하얀 목련이 활짝 웃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뻐근한 다리를 주무르며 하루의 느낌을 노트에 적었다. 왠지 이날만큼은 컴퓨터를 켜지 않고 손글씨로 적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짧은 나들이였지만, 거장의 80여년 삶을 따르고, 앨버트로스의 우아한 날개에 얹혀 태평양을 건넌, 넓고도 깊은 여정이었다. 잠자리에 들며 기도했다. 오늘의 느낌들이 순간의 감상에 그치지 않고 더욱 진중한 생각으로 여물어지기를.
  • 팔도 ‘괄도네넴띤’ 대박 났다

    팔도 ‘괄도네넴띤’ 대박 났다

    팔도는 ‘팔도비빔면’에 젊은 세대의 놀이문화를 접목해 출시한 한정판 ‘괄도네넴띤’ 500만개가 한 달 만에 모두 팔렸다고 8일 밝혔다. 팔도는 지난달 1020세대를 겨냥해 팔도비빔면 글씨체를 비슷한 모양의 글자로 바꾼 ‘괄도네넴띤’을 선보였다. 멍멍이를 ‘댕댕이’로 표기하는 것처럼 기존에 있던 단어를 비슷한 모양의 글자로 변형하는 방식이다. 매운맛도 기존 비빔면보다 5배 강화했다. 출시되자마자 각종 포털에선 괄도네넴띤이 인기 검색어 톱10에 꾸준히 올랐고, 준비했던 일주일치 판매 물량 1만 7만 5000개가 23시간 만에 전부 팔렸을 정도였다. 연일 화제가 되자 “한글을 파괴한다”는 한글문화연대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팔도 관계자는 “‘괄도네넴띤’에 대한 관심은 원조 제품인 ‘비빔면’ 판매 증가로도 이어졌다”며 “‘비빔면’ 월 판매량은 출시 이후 최고치를 경신 중으로 3월에는 계절 성수기가 아닌데도 월 판매량 1000만개를 돌파했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에서까지 제품을 경험하지 못한 소비자의 재판매 요청이 늘어나고 있어 추가 생산을 준비 중”이라고 덧붙였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김영록 전남지사, 섬마을 초등생 소망 편지에 직접 답장

    김영록 전남도지사가 섬마을 초등학생들의 다리를 설치해 달라는 소망 편지에 “하루빨리 만들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직접 답장을 해 눈길을 끌고 있다. 8일 전남도에 따르면 지난달 10일 여수 개도의 화정초등학교 학생들이 여섯 통의 손 편지를 김지사에게 보내왔다. 편지에는 “학교 급식이 참 맛있다”는 자랑부터 “개도 막걸리가 유명하다. 꼭 와서 먹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들어있었다. 학생들은 또 “섬 주민들이 겪는 불편을 없애달라”며 “육지와 연결된 다리를 놓아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전했다. 이에 김 지사는 정성스럽게 답장을 써 보냈다. 김 지사는 “저도 섬에서 나고 자라, 섬 주민이 겪는 불편과 간절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며 “개도와 화태도, 개도와 제도, 제도와 백야도를 잇는 다리가 2020년 착공해 2028년 완공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튼튼하고 멋진 다리가 하루빨리 만들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김 지사는 “어린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쓴 편지를 보니 너무 흐뭇했다”며 “글씨는 조금 삐뚤지만 안에 담긴 순박하고 반듯한 마음을 보고 학생들에게 작은 용기와 희망이나마 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도 어린이를 비롯한 도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도민 행복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고흥군에 있는 4억 6900만원짜리 윤봉길 의사 유묵 ‘가짜’로 밝혀져

    고흥군에 있는 4억 6900만원짜리 윤봉길 의사 유묵 ‘가짜’로 밝혀져

    고흥군이 분청문화박물관에 전시할 목적으로 구입한 윤봉길 의사 유묵이 법정에서 가짜로 판결됐다. ‘진위 여부’로 세간에 관심을 받았던 윤봉길 의사의 유묵(장부출가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은 저명한 감정평가사 3인이 감정한 결과 전원일치로 ‘가짜 판정’을 받았다. 광주지방법원 재판부도 3인의 감정평가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2018년 11월 가짜로 판결했다. 군은 전임군수 시절인 2015년 11월 유물 매도자 L모씨와 윤봉길, 안중근, 안창호, 김구 선생 등 항일 애국지사 6인의 글씨, 족자 등 6점을 10억원에 매매계약했다. 대금은 3회 분할 지불하되 계약 당시인 2015년 11월 30일까지 4억원을 지불하고, 잔금 6억원은 2016년 3월에 3억원, 2017년 3월에 3억원을 각각 지불하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다수의 군민들로부터 군의 열악한 재정형편에 지역 특성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유묵들을 거액을 들여 구입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센 비판과 함께 가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차 잔금 3억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유묵 매도자는 2016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 유묵 매도대금 지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군은 전임군수 임기말인 2018년 6월까지 별다른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지루한 법정 다툼만 계속 됐다. 민선 7기 들어 군은 당초 유물매매계약서에 명시된 ‘계약취소 및 반환 조건’을 들어 6점의 유묵들이 진품인지 여부를 밝혀내기 위해 재판부에 재감정을 신청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2018년 9월 유물감정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윤봉길 유묵 1점은 만장일치로 ‘가짜 판정’을 받았다. 광주지방법원은 2018년 11월 윤봉길 의사 유묵은 ‘진품이 아니라고 봄이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군은 계약 당시 유묵 매도자 L씨에게 지급했던 4억원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별도로 제기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고흥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박봄, ‘4:44’ 신곡 발표 암시? 의미심장 티저(feat. 용감한 형제)

    박봄, ‘4:44’ 신곡 발표 암시? 의미심장 티저(feat. 용감한 형제)

    박봄이 4월 4일 새벽 자신의 SNS를 통해 신곡 발표를 암시하는 듯한 의미심장한 티저 이미지를 기습 게재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게재된 이미지에는 붉은 글씨로 “4:44”라는 숫자가 기재되어 있고, #디네이션 #용감한형제라는 해시태그까지 더해지며 팬들의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3월 새 앨범 ‘Spring(봄)’과 함께 8년 만에 솔로로 전격 컴백한 박봄은 타이틀곡 ‘봄(Feat. 산다라박)’으로 각종 음악방송 1위 후보 및 국내 주요 음원사이트 실시간 차트와 아이튠즈 11개국 K-POP 송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오랜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성공적인 컴백 행보를 펼쳤다. 약 3주간의 짧은 솔로 활동이었지만 의미있는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며 다음 스텝에 기대를 높여왔던 터라 신곡을 예고하는 듯한 이번 소식에 호기심이 실로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디네이션 관계자는 “지난 3월 복귀 이후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주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한 시간이었고,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아티스트 역시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기 위해 준비 중으로, 곧 새로운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먹는샘물? 혼합 음료? 10월부터 구분 쉬워진다

    먹는샘물? 혼합 음료? 10월부터 구분 쉬워진다

    오는 10월부터 ‘먹는샘물’(생수) 제품 앞면에 라벨이 붙고 품목명이 표시된다. 그동안 제품 뒷면 라벨에 성분과 유통 기한 등이 작은 글씨로 표기돼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뒷면 라벨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먹는샘물 이름에 따라 혼합 음료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환경부는 이런 내용의 ‘먹는샘물 등의 기준과 규격 및 표시기준 일부 개정안’을 고시했다고 2일 밝혔다. 개정안은 6개월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10월부터 모든 먹는샘물 생산업체에 적용된다. 소비자시민단체는 그동안 먹는샘물과 혼합 음료를 확실히 구별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에서 판매하는 먹는샘물 ‘휘오제주’ 제품은 이름만 들어서는 혼합 음료로 오해하기 쉽다. 반면 한국알칼리수에서 판매하는 혼합 음료 ‘에이수’는 먹는샘물로 인식하기가 쉽다. 게다가 지금은 품목명이 제품 뒷면 라벨에 작은 글씨로 표기하도록 해 제품을 구입할 때 소비자들이 먹는샘물인지, 혼합 음료인지 한눈에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환경부는 라벨뿐 아니라 제품 뚜껑에도 품목명을 표기하도록 먹는샘물 생산업체에 권고할 예정이다. 다만 완제품으로 수입된 먹는샘물은 뚜껑을 교체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뚜껑에 품목명을 표기하는 것을 의무화하지 않기로 했다. 혼합 음료는 먹는샘물과 달리 지금처럼 제품 뒷면 라벨에 품목명을 표기하면 된다. 환경부 관계자는 “종류가 다양한 혼합 음료보다 먹는샘물의 품목명 표기를 의무화해 소비자들이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세종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보고도 속았던 먹는샘물...환경부 “표기 확실히 한다”

    보고도 속았던 먹는샘물...환경부 “표기 확실히 한다”

    오는 10월부터 ‘먹는샘물’(생수) 제품 앞면에 라벨이 붙고 품목명이 표시된다. 그동안 제품 뒷면 라벨에 성분과 유통 기한 등이 작은 글씨로 표기돼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뒷면 라벨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먹는샘물 이름에 따라 혼합 음료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환경부는 이런 내용의 ‘먹는샘물 등의 기준과 규격 및 표시기준 일부 개정안’을 고시했다고 2일 밝혔다. 개정안은 6개월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10월부터 모든 먹는샘물 생산업체에 적용된다. 소비자시민단체는 그동안 먹는샘물과 혼합 음료를 확실히 구별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에서 판매하는 먹는샘물 ‘휘오제주’ 제품은 이름만 들어서는 혼합 음료로 오해하기 쉽다. 반면 한국알칼리수에서 판매하는 혼합 음료 ‘에이수’는 먹는샘물로 인식하기가 쉽다. 게다가 지금은 품목명이 제품 뒷면 라벨에 작은 글씨로 표기하도록 해 제품을 구입할 때 소비자들이 먹는샘물인지, 혼합 음료인지 한눈에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환경부는 라벨뿐 아니라 제품 뚜껑에도 품목명을 표기하도록 먹는샘물 생산업체에 권고할 예정이다. 다만 완제품으로 수입된 먹는샘물은 뚜껑을 교체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뚜껑에 품목명을 표기하는 것을 의무화하지 않기로 했다. 혼합 음료는 먹는샘물과 달리 지금처럼 제품 뒷면 라벨에 품목명을 표기하면 된다. 환경부 관계자는 “종류가 다양한 혼합 음료보다 먹는샘물의 품목명 표기를 의무화해 소비자들이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세종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이틀 후면 ‘익산 4·4만세운동’ 100주년이 된다. 전북 익산 지역민들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의 수탈을 규탄한 만세운동이다. 그 중심인물인 문용기 열사를 취재하러 익산을 찾았다. ‘익산4·4만세운동기념사업회’ 전영철 회장이 마중을 나왔다. 만세운동 현장에서는 100주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만세운동의 전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전 회장은 “문 열사와, 함께 순국한 다섯 분의 열사들은 긴 세월 묻혀 있었다”면서 “기념공원이나 기념관 하나도 없는 현실이 죄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솜리장터를 돌아보고 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한 남전교회를 방문했다. 남전교회는 산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박종규 장로는 “살아남은 주동자들도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어 만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최근 재판기록을 통해서야 김치옥 열사 등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했다. 차를 타고 왠지 쓸쓸한 겨울 벌판을 달리니 문 열사의 고향 마을인 관음마을이 나타났다. 열사의 생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듯 마치 폐가처럼 보였다. 생가임을 알려 주는 표지판도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전북 지역에는 19세기 말부터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일찍이 교회가 들어섰다. 남전교회는 1897년 문 열사의 고향 이웃마을인 익산 오산면 남전리에 미국인 선교사 전킨이 세운 교회다. 오산면의 위치는 익산 도심의 서쪽, 호남평야의 북쪽이며 아래로 만경강과 접해 있다. 기름진 옥답을 일제가 가만둘 리 없었다. 궁벽한 농촌이었던 익산을 일제는 신도시로 만들어 수탈 기지로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빼앗은 토지에 농장을 세워 한국인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착취했다. 문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해 서당에서 훈장을 하던 열사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기독교 귀의였다. 남전교회 평신도로 교회 일을 돕다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이때 나이가 24세였다. 훈장 경력을 인정받아 한문 교사를 겸했다. 30세 되던 해에는 목포 왓킨스 중학교에 진학해 늦깎이로 신학문을 공부했다. 열사는 이승만과 인연이 있다. 선생보다 세 살 위인 이승만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YMCA 활동을 하면서 지방 강연을 다녔는데 이때 열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여관방에서 시국을 토론했으며 이승만의 강연에 열사는 찬조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광복 후 익산으로 가서 열사를 찾았지만, 순국한 사실을 알고 몹시 애통해하면서 일필휘지로 순국열사비 비문을 썼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열사는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됐다. 함경도 갑산의 미국인 금광에 취직해 통역사로 일한 것도 영어 실력 덕이었다. 열사는 8년 동안 근무하며 받은 적지 않은 보수를 만주와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냈다. 금광에서 열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사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왔다. 독립운동을 돕던 그가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모의한 것은 당연했다. 남전교회 집사 김치옥과 박성엽이 열사를 찾아왔다. 기다렸던 일이었다. 두 집사는 거사를 조직화하는 일을 맡았고 열사는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 젊은 교인들과 재학생들을 설득했다. 익산 인근의 교회에도 연락해 동참하겠다는 응낙을 받았다. 거사일은 솜리(이리·裡里) 장날인 4월 4일로 정했다. 사흘 밤낮을 뜬눈을 새우다시피 하며 수천 개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 드디어 1919년 4월 4일 오전. 남전교회에 교인과 마을 사람들 150여명이 모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묶음씩 받아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숨기고 솜리장터로 향했다. 먼발치서 지켜보았던 아낙네는 뭉게구름이 들녘을 하얗게 뒤덮는 듯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고 증언했다. 몇 시간 후 정오. 장터 네거리에 빨간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펄럭였다. 교회 교인들, 천도교 지도자, 민족운동지도자들도 참가했다. 도남학교 등 수백명의 어리고 젊은 학생들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여든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었다. 군중은 금세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낮 12시 30분쯤.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기골이 장대한 40대 남성이 군중 앞에 섰다. 문용기 열사였다. 오른손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있었다. 열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열사는 시위대를 이끌고 수탈의 핵심부 대교농장으로 향했다. 군중은 순식간에 1만여명으로 불어났다. 농장을 지키던 헌병대는 군중이 정문으로 접근하자 공포를 쏘았다. 급기야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던 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인 소방대와 농장원 수백명도 칼과 곤봉, 갈고리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고 찍어댔다.군중은 일시 흩어지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사는 군중을 독려하며 더 큰 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칼을 빼 들더니 태극기를 들고 있던 열사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순간 비명을 질렀으나 열사는 왼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왼팔마저 자르고는 가슴과 복부를 찔러 열사를 숨지게 했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고 힘겹게 외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열사의 나이 41세였다. 일제도 보고서에 “수모자(首謨者)의 1인이 절명에 이르기까지 만세를 창(唱)했다”고 적시했으니 그가 문 열사였다.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지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과 남전교회 청년 신도 장경춘이 총에 맞아 “억” 하면서 쓰러졌다. 54세로 춘포면의 어른이었던 ‘박참봉’ 박도현과 서정만도 총탄에 맞았다. 이충규도 순국했다. 20여명은 크게 다쳤고 39명이 체포됐다. 유족들은 일경이 방해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도둑처럼 시신을 거둬 거적에 말아 묻었다. 살아남은 주모자 가족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유랑생활을 하다시피 했다.“나물 많이 캐 오세요.” 거사일 아침, 집을 나서는 노모와 아내에게 열사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망 소식을 들은 부인 최정자 여사는 남편의 시신을 거둬 뒷산에 묻었다. 피로 얼룩진 한복 저고리와 두루마기는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 후 멍석에 펴 놓고 가족들과 예를 올리고 대성통곡했다. 열사가 최후의 순간에 입었던 이 혈의(血衣)는 며느리 정귀례 여사가 기증해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옷소매가 잘린 흔적이 없다. 양팔이 잘렸다는 내용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주명준 전주대 명예교수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할복하여 내장을 꺼내어 던지고 순국했다는 말과 동일한 경우”라면서 “과장 어린 표현을 써서 민족감정을 불러일으켰으니 터무니없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어쨌든 여러 군데를 난자당해 숨진 것은 분명하다. 김치옥, 박동근, 전창여, 강성원 등 주동자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법정에서 “우리가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는가”라고 부르짖었다. 김치옥은 잔인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석방됐지만,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됐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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