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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지성, 신곡 ‘동, 화’ 손글씨 티저 이미지 공개 “기억할 거야”

    윤지성, 신곡 ‘동, 화’ 손글씨 티저 이미지 공개 “기억할 거야”

    가수 윤지성이 손글씨 가사 티저 이미지를 깜짝 공개했다. 윤지성은 오늘(16일) 0시, 공식 SNS를 통해 신곡 ‘동,화(冬,花)’의 가사가 담긴 리릭 티저 이미지를 게재했다. 공개된 사진에는 검은색 배경으로 윤지성의 신곡 ‘동, 화’의 포인트 가사가 적혀있어 눈길을 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상징하는 듯한 노랫말이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윤지성의 손글씨로 작성된 이번 티저는 ‘저기 반짝이던 너 / 소중했었던 그날의 우리를 / 난 기억할 거야 언제까지나’라며 팬을 향한 윤지성의 진심 가득한 마음을 대변한 곡임을 예고해 눈길을 끈다. 윤지성은 신곡 ‘동,화’를 통해 끝이 보이지 않는 연습생 생활의 불안함을 청산하고, 자신을 믿고 한결같이 지지해준 팬들을 위한 고마운 마음을 담으며 남다른 팬사랑을 드러내 훈훈함을 안긴다.신곡 ‘동,화’는 윤지성이 연습생 시절 큰 위로를 받았던 가수 커피소년이 작곡에 참여한 노래로, 항상 팬들을 생각하는 윤지성의 따뜻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는 곡이다. 한편, 윤지성은 19일 팬들을 위한 봄날 선물 같은 신곡 ‘동,화’를 발표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흥미진진 견문기] 김광석·백남준·박수근의 삶·사랑에 가슴이 먹먹

    [흥미진진 견문기] 김광석·백남준·박수근의 삶·사랑에 가슴이 먹먹

    사람들로 붐비는 흥인지문 앞에서 엄태호 해설사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해설로 탐방을 시작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등 이 땅에 민주화를 위해 생명을 바친 열사들과 가족들의 아픔이 서린 생활 공동체 한울삶이었다. 문 앞에 그들의 뜻을 담은 시비와 어우러진 꽃들을 보며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와 다림질하는 하얀 연기가 여기가 봉제거리임을 알려 주었다. ‘메이드 인 창신동’과 다리미를 들고 있는 재미있는 모나리자 그림을 지나 봉제박물관 이움피움에 도착했다. 박물관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으로 봉제 역사 이야기를 듣고 4층 바느질 카페에 도착해 알싸한 생강차를 마시며 바라본 창신동 절개지의 모습은 앗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옷감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를 이리저리 피하며 김광석이 살았던 다세대 주택 앞에 이르렀다. 해설사가 준비해 온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래를 들으며 30년 전 학전소극장에서 만났던, 삶을 사랑을 열정적으로 노래하던 김광석이 떠올라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김광석의 49제를 올렸다는 안양암에 도착했다. 거대한 바위 위 비석에 새겨진 ‘일제의 밀정’ 배정자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김광석이 유년시절 다녔던 창신초등학교와 골목골목의 추억을 뒤로하고 백남준이 생전에 가장 오고 싶었다던 고향집터에 이르렀다. 사라질 뻔했던 백남준의 생가가 주민들의 의견으로 재생돼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으로 다시 태어난 이야기와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 시대를 앞서간 천재 아티스트 백남준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왕십리 똥파리’ 궤도 전차가 다니던 길을 지나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동신교회에 이르렀다. 이 교회 신자였던 화가 박수근의 ‘빨래터’ 작품도 감상하고 “가진 것은 붓과 팔레트뿐이지만 행복하게 해주겠소”라며 아내에게 보낸 박수근의 구애편지를 들으며 봄 햇살과 같이 마음이 따뜻해졌다. 박수근과 그의 가족이 10여년 살았던 집터를 찾았으나 지금은 홈통과 그 위에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라는 글씨만이 남아 있어 아쉬웠다. 황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
  • 5·18 유혈 진압 작전에 전두환 “굿 아이디어” 문건 나와

    5·18 유혈 진압 작전에 전두환 “굿 아이디어” 문건 나와

    5·18 민주화운동의 최후 유혈진압 작전인 ‘충정작전’을 보고 받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굿 아이디어’라고 칭찬했다는 내용의 문건이 나왔다. 15일 공개된 1980년 당시 2군 사령부가 작성한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 따르면 그 해 5월 23일 당시 진종채 2군 사령관이 대구와 서울, 광주 등을 방문해 충정작전 계획을 건의·보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진 사령관이 방문한 지역 가운데 ‘서울’에 동그라미가 있고, ‘閣下(각하)께서 “Good idea”(굿 아이디어)’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다. 여기서 ‘각하’는 진 사령관의 작전을 보고 받은 전두환씨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이날 2군 사령부는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충정작전’이라는 이름의 광주 재진입 작전계획을 건의했다. 2군 사령부는 5·18 진압 작전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20사단 등이 배속된 광주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의 상급부대로 군 작전을 지휘했다. 2군 사령부는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직후부터 재진입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1995년 검찰 수사에 따르면 진 사령관이 최종 진압 작전 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비롯해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씨도 참석했다. 해당 문건 5월 21일자 기록에도 ‘자위권 발동’이 결정된 회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같은 필체로 “전 각하: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적혀 있다. 회의 이후 누군가가 전두환씨의 반응이나 지시사항을 추가한 것이다. 전두환씨가 유혈 진압 작전의 최종 승인권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인 셈이다. 이 작전에는 외곽도로 봉쇄도 포함됐고, ‘제파식 공격’ 즉 특정 공격 정면에 공격제대를 연속적으로 투입해 공격하는 전술로, 파상공세를 벌이도록 했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지 이틀 만에 확정된 ‘충정작전’ 계획대로라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을 보고받은 전두환씨는 “굿 아이디어”라면서 흡족해하며 이를 승인한 것이다. 2군 사령부는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시 외곽으로 철수한 21일 이미 진압 작전을 마련하고 23일 오전 2시 작전을 수행하겠다는 계획을 육군본부 회의에서 건의했다. 그러나 참모총장은 한·미간 협의 등을 이유로 24일까지 작전을 연기할 것을 지시해 작전은 미뤄졌다. 군사행동에 반대한 미국의 요청으로 국방부에 의해 제동이 걸린 것이다. 해당 문건에는 “국방부 장관 지침. 5월 25일 오전 2시 이후까지 작전 연기”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계엄군은 결국 5월 27일 새벽, 광주 재진입작전이 실행됐고, 옛 전남도청 등이 무력 진압됐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우리둘은1학년]휴가의 질을 개선한다는 자율휴업일, 불편한 건 왜일까

    [우리둘은1학년]휴가의 질을 개선한다는 자율휴업일, 불편한 건 왜일까

    [편집자주]올해 초등학교에 딸을 보낸 워킹맘의 우여곡절을 연재합니다. 딸만큼이나 서툰 것투성이인 엄마도 ‘학부모 1학년’입니다. 아는 동네 엄마 하나 없고, 사교육에도 문외한인 아웃사이더 엄마는 ‘인싸’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과 ‘학교에 가면 안 되는 날’이 있다. 이 두 날의 차이는 ‘학생 선택권’에 있다. 내가 개인체험학습과 자율휴업일(학교장 재량휴업일)을 구분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육청이나 학교 관계자들은 틀렸다고 지적할 게 분명하다. 원칙적으로 자율휴업일에도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율휴업일을 ‘자율’로 느끼는 학부모는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수업하지 않기로 한 날은 부모에겐 강제로 쉬어야 하는 날과 다름없다. 자율휴업일 등교 희망 조사서가 가정통신문으로 온 순간부터 조바심이 난다. 조사서에는 굵은 글씨로 ‘부모님 두 분 모두 출근하실 경우’ 신청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급식실도 운영하지 않기에 자율휴업일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는 점심 도시락과 간식을 싸 들려 보내야 한다. 학교는 자율휴업일엔 ‘나 홀로 학생’을 중심으로 보육하겠다고 공지했다. 누가 자식을 나 홀로 학생으로 만들고 싶겠는가. 휴가를 써서라도 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않으려는 게 부모 마음일 것이다. 오늘은 지난 4월과 5월에 처음 경험한 초등학교 개인체험학습과 자율휴업일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지난달 친구네 가족들과 함께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딸은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간 학교를 빠져야 했지만 학교에 출석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개인체험학습으로 처리한 덕분이다.세상 참 좋아졌다. 1980년대생인 나는 6년간 하루도 결석하지 않아 초등학교 졸업식날 개근상을 탔다. 학교는 심하게 아프지 않은 한 빠져선 안 되는 곳이었다. 가족여행은 여름방학에나 가능했다.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동해로 떠나는 것 같았던 7월 말과 8월 초, 찜통더위와 교통체증, 바가지요금은 휴가의 ‘필수 옵션’이었다. 요새 아이들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 학기 중간 가족 여행을 위해 학교를 빠져도 문제가 없다. 연차 사용이 의무화되고 국외여행 문턱이 낮아지는 등 사회 변화상에 맞춰 교육정책에서 개인체험학습의 출석 인정 필요성이 커진 것이다. 2007년 3월 도입된 개인체험학습은 전체 수업 일수의 10% 이내에서 출석을 인정한다. 애초 1회당 연속 5일까지 체험학습을 쓸 수 있었는데 2017년 3월부터 연속 10일로 늘어났다. 이때 토·일요일과 공휴일, 재량휴업일, 개교기념일 등 공식적으로 쉬는 날은 제외된다. 쉽게 말해 개인체험학습의 앞과, 중간, 뒤에 주말을 끼워 넣으면 최대 17일 여행을 갔다 올 수 있다. 딸이 다니는 학교는 1년 동안 최대 19일까지 개인체험학습을 허용하고 있다. 다만 출석 처리를 받으려면 미리 학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최소 일주일에서 3일 전, 학교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체험학습신청서를 내려받아 작성한 뒤 담임교사에게 제출한다. 여행을 다녀와서 결과보고서를 제출하거나 면담을 통해 체험 여부를 확인받아야 출석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학교에 따라 신청서와 보고서를 학생 스스로 작성해야 하는 일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만약 허락받은 일수를 초과해서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무단결석으로 처리될 수 있다. 서울시교육청의 개인체험학습지침을 보면 체험의 예시로 ▲농촌체험학습 ▲시골 친척방문 ▲친척 애·경사 참석 ▲문화 유적지 탐방 ▲현장 답사 ▲조사활동 ▲유적 탐방 ▲문학기행 ▲우리문화 및 세계문화 이해 체험 ▲국토순례 ▲자연탐사 ▲직업체험 등이 열거돼 있다. 보다 보니 단순한 가족여행에도 교육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 느껴졌다. 그럴싸한 단어를 총동원해 딸의 체험학습 신청서에 ‘제주 토속문화 체험 및 특산물(흑돼지, 해산물 등) 시식, 해양생물 관찰’이라고 적어 넣었다. 솔직하게 휴식이 목적이라고 적었다면 부끄러움은 학교장 결재를 받아야 하는 담임 선생님 몫이 될 테니까. 제주 바다에서 잡힌 고등어도 구워 먹고, 흑돼지도 실컷 먹고 바닷가에서 미역도 한 아름 채취했으니 과장은 아니었다. 출석 인정을 받기 어려운 체험학습도 있다. 학교교육과정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학생 사이의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는 불법 어학연수, 상업적 체험학습 등은 자제해달라는 게 교육당국의 당부다. 또 교외 대회 참가 준비를 위한 개인체험학습 역시 불허 대상이다. 학교장은 개인체험학습 승인 전에 학생의 안전 확보를 위해 보호자가 동행하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학습 중에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학부모와 학생이 책임진다. 또 학기 초, 학기 말, 학년 말 등 특정 기간에는 체험학습이 허락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사전에 학교에 문의할 필요가 있다. 딸의 개인체험학습 덕분에 여유로운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비성수기여서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교통, 숙박을 해결한 점이 만족스러웠다. 하반기에도 체험학습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다.제주 여행을 갔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딸의 첫 자율휴업일을 경험했다. 자율휴업일, 학교장 재량휴업일, 단기방학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이날은 말 그대로 학교 수업이 없는 날이다. 휴업일은 학교장이 매 학년도가 시작되기 전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정한다. 보통 개교기념일, 공휴일 연휴 전후 등 1년에 4~5번 정도다. ‘가족 간 유대를 증진하고… 효도와 관련한 활동을 체계적으로 경험할 기회’라고 설명하면서 이를 ‘효도방학’이라고 부르는 학교들도 있었다. 그런데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효도방학이 아니라 ‘불효방학’이라는 푸념이 나오기도 했다. “재량휴업일을 폐지해 달라”는 맞벌이 부모들의 민원도 끊이지 않는다. 딸 학교의 올해 자율휴업일은 모두 4일이다. 이 가운데 이틀이 5월에 몰렸다. 5월 1일(수요일) 근로자의 날과, 어린이날 대체공휴일 다음 날인 7일(화요일)이다. 다음 달 현충일 다음날인 7일(금요일)도 자율휴업일로 지정됐다. 개천절 다음 날인 10월 4일(금요일) 역시 자율휴업일이다. 공휴일과 주말 사이 샌드위치 휴일을 자율휴업일로 지정한 것은 합리적이지만, 5월에만 자율휴업일을 이틀 지정해 곤란을 겪은 학부모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율휴업일은 전년도 11~12월쯤 결정돼 학교가 학기 초에 배포하는 학사일정에 적혀 있다. 자율휴업일 시행 일주일 전쯤 가정통신문을 통해 휴업일 등교 희망 여부를 조사한다.학사 달력을 장식장에 넣어두곤 펴 보지 않고, 가정통신문 대충 보는 ‘덤벙이 엄마’(참고기사: [우리둘은1학년]애증의 가정통신문)인 나는 두 번째 자율휴업일 때문에 ‘멘붕’(정신적 충격)을 겪었다. 금요일이었던 지난 3일, 학교를 마친 딸과 놀이터에서 나눈 대화다. 딸: 엄마, 선생님이 수요일(8일)에 학교 오래.나: 무슨 소리야. 어린이날이 일요일이어서 월요일(대체공휴일)에 하루 더 쉬고 화요일에 학교 가는 거겠지.딸: 아닌데, 수요일에 오라는데…. 주변에 시원한 답을 해줄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최근에 알게 된 학부모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엄마, 헷갈려서 그러는데, 대체공휴일 끝나고 애들 등교하는 거죠?○○엄마: 아이고, 모르셨구나. 7일이 자율휴업일이에요.나: 1일에 자율휴업일 하고 또 요? 멘붕이네요. ㅠㅠ○○엄마: 저 또 휴가 냈잖아요. 7일은 남편이 휴가 내기로 했는데, 바쁜 일이 생겨서 못 쉰대요. 그래서 제가 또. ㅠㅠ 자율휴업일을 위해 휴가를 낸 또 다른 워킹맘이 합류해 학교에 가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자율휴업일이 졸지에 ‘공동육아의 날’이 된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놀이터엔, 학교에 가지 않은 초등학생들과 엄마들로 북적였다. 아빠들은 보이지 않았다.엄마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자율휴업일에 대한 불평으로 이어졌다. △△엄마: 돌봄교실 보내고 출근할까 하다가 그냥 관뒀어요. 그런 날 애들 보내면 괜히 눈치 줄 것 같아서 불안해요.나: 이름은 자율휴업일인데 전혀 자율이 아닌 기분…. 누구를 위한 자율휴업일인가요?엄마 일동: 선생님들을 위한 휴업일이죠. 생각해보면 선생님도 휴식이 필요하다. 지난달 제주 여행에 동행한 팀 중에 초등교사 부부가 있었다. 육아휴직 중인 부인은 목요일 오후 아기와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탔지만, 남편은 하루 뒤 금요일 수업을 모두 마친 뒤 늦은 저녁에야 숙소에 도착했다. 담임교사는 학기 중에 자유롭게 휴가를 쓰기 어렵다. 한해 고작 4일, 자율휴업일을 지정해 교사들에게 재충전과 휴식의 기회를 주는 것이 그리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다. 교육당국은 자율휴업일의 목적 중에 하나로 휴가를 질적으로 개선해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백번 옳은 말이다. 현실과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삶,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삶이 보장된다면 자율휴업일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지는 좋지만 현실에는 그렇게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자율휴업일도 그런 부분이 있다. 자율휴업일이 엄마의 ‘의무휴업일’이 돼버리는 현실이다. 아빠들도 상사 눈치 안 보고 휴가를 쓸 수 있다면 제도의 취지를 확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자율휴업일에 대한 맞벌이 부모들의 불만과 고충에 대한 기사를 뒤져보니 2005년 즈음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불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개인체험학습을 생각하면 세상 참 좋아진 것 같은데, 자율휴업일을 보면 세상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다음주 주제는 ‘아이의 친구관계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까’ 입니다.
  • [길섶에서] 말러/이두걸 논설위원

    몇 해 전 이맘때,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그린칭 공동묘지를 찾았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부인 알마 말러, 그의 큰딸 마리아가 함께 누워 있는 곳이다. 십자가나 별다른 장식도 없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우뚝 서 있는 묘비. 상단에는 ‘GUSTAV MAHLER’라는 굵은 고딕체의 글씨만이 새겨져 있다. 그는 19세기가 20세기로 넘어 가던 시기 빈에서 가장 각광받던 음악가였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빈 국립오페라단 상임감독을 역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빛과 어둠의 이중주로 점철돼 있다. 그는 잇달아 혁신적인 작품들을 내놨지만 당대 비평가나 청중과 불화를 겪었다. 대규모 편성과 1시간을 훌쩍 넘는 곡 구성에 보헤미아 민요와 익살스럽고도 기괴한 선율이 뒤섞인 그의 음악은 한 세기 전에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보헤미아 지역의 유대인 출신이라는 ‘극단의 변방성’이 발목을 잡았다. 장녀 마리아의 죽음, 그에 이은 심장병과 우울증의 악화, 그리고 아내의 외도는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기쁨과 비통함이 쌍둥이처럼 함께한다. 죽기 직전 미완성으로 남긴 교향곡 10번이 대표적인 예다. 마침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공교롭게도 5월 18일이다. douziri@seoul.co.kr
  • PC·스마트폰 끼고 산다면, 505 습관으로 노안 늦추기

    PC·스마트폰 끼고 산다면, 505 습관으로 노안 늦추기

    눈은 신체 중 가장 빨리 노화가 찾아오는 기관이다. 하루에 평균 2만번 눈을 깜박이고 눈 근육은 10만번 이상 움직인다. 심장이 하루에 10만번 이상 뛴다고 하니 눈은 심장만큼이나 쉴 새 없이 노동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은 20대부터 노화가 시작된다. 40대가 되면 홍채의 조절력이 떨어져 서서히 노안 증상이 시작된다. 어느 날부터 멀리 있는 물체뿐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물체도 잘 안 보이고 눈이 쉽게 피로해지면서 자주 침침하고 초점이 흐려진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사용이 늘면서 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20~30대 초반에도 노안 증상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동아대병원 등 3개 병원 환자 800명을 조사한 결과 36~40세의 ‘젊은’ 노안환자가 2006년 3%에서 2011년 7%로 2배 넘게 뛰었다.노안은 수정체의 탄력이 떨어질 때 온다. 자동카메라로 초점을 맞추면 렌즈가 자동으로 나오거나 들어가는 것처럼 눈도 사물의 거리에 따라 수정체의 두께가 변해 자동으로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수정체를 지탱해 주는 근육의 힘이 떨어져 가까운 곳을 볼 때도 수정체가 두꺼워지지 못하고 길쭉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렇게 되면 가까운 곳의 사물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이를 ‘노안’이라고 한다. 마치 카메라에 녹이 슬어 줌 렌즈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루 8시간 이상 컴퓨터를 보고 퇴근 뒤에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몸은 40대라도 눈 나이는 이미 50대 문턱을 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잠잘 때 말고는 컴퓨터와 TV, 스마트폰을 보며 쉴 틈 없이 눈을 혹사하기 때문에 노화가 그만큼 빨리 찾아온다. 전문가들은 “본인이 노안인지 궁금하다면 10㎝ 테스트를 해보라”고 조언한다. 눈앞 10㎝ 거리에서 신문을 봤을 때 잘 안 보여 신문을 멀리 밀어내야 한다면 노안을 의심해 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40대 노안 환자는 10~15㎝, 50대 환자는 30㎝ 거리 안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어두운 곳에서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고 책을 조금만 읽어도 눈이 피로하고 뻑뻑해 두통까지 오니 삶의 질이 확연히 떨어진다. 김병엽 건양의대 감안과병원 교수는 12일 “노안의 대표적인 증상은 가까이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눈이 쉽게 피로하고 침침해지는 것, 가까운 물체뿐 아니라 멀리 있는 물체도 잘 안 보이게 되는 것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며 “가까운 거리의 물체가 잘 보이지 않다 보니 눈의 피로감이 커지고 어지럼증이 오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40대 이후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해서 스스로 노안으로 단정 짓는 것도 위험하다. 시력이 떨어지는 동시에 주위가 뿌옇게 보이거나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복시, 낮에 잘 안 보이는 주맹 등이 나타나면 백내장 증상이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고 즉시 안과를 찾아가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침침하던 눈이 갑자기 좋아져도 백내장일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백내장이 진행되면 수정체가 딱딱해지면서 크기가 점점 커져 도톰해진다. 이때 일시적으로 가까운 곳이 잘 보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간혹 근시가 있는 사람 가운데 일부는 수정체의 두께 조절력이 떨어지는 나이가 돼도 가까운 곳이 잘 보인다며 눈 건강을 과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원래부터 가까운 곳을 잘 보고 먼 곳을 잘 보지 못하는 근시 증상이 노안 증상을 상쇄한 것뿐이지 눈이 좋아졌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주천기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안과 교수는 “근시로 안경을 착용했던 사람도 노안을 완전히 피하진 못한다”며 “근시인 사람도 (근시용) 안경을 쓴 상태에서는 가까운 물체가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사실상 노안”이라고 말했다. 노안 증상을 조금 늦게 느낄 뿐이라는 얘기다. 주 교수는 “근시인 사람에게 노안이 오면 오목렌즈를 착용한 채로 볼록렌즈인 돋보기를 또 착용해야 한다. 차라리 먼 거리를 잘 보려고 쓰던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보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반대로 원시 환자는 노안 증상을 더 빨리 느낀다. 원시는 물체의 상이 망막 뒤쪽에 맺히는데, 수정체의 두께까지 도톰하게 조절되지 않아 원래 상이 맺히던 곳보다 더욱 뒤쪽에 맺히게 돼서다. 근거리를 잘 보지 못하는 노안 현상은 50대까지만 진행된다. 정태영 삼성서울병원 안과 교수는 “노안은 40대 중반부터 시작돼 나이가 들수록 조절력이 감소해 볼록렌즈의 도수가 점점 높아질 수 있지만, 대개 50대 후반이 되면 더는 노안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안은 질병이라기보다 자연스런 노화 현상이다. 노안을 예방할 방법은 없다. 다만 평소 꾸준한 눈 관리로 노안이 오는 시기를 늦출 수는 있다. 드물지만 70세 가까운 나이에도 상당한 근거리 시력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우선은 컴퓨터나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의 정보기술(IT) 기기의 화면을 보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을 장시간 보면 수정체가 가까운 곳을 보는 데 적합하도록 고정돼 수정체의 두께를 조절하는 근육이 피로해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수정체 조절 기능도 약해진다. 게다가 무의식적으로 화면에 집중하는 동안 눈 깜빡이는 횟수도 현저하게 줄어 안구 건조증이 올 가능성도 크다. 업무로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떼어놓을 수 없다면 습관을 바꿔야 한다. 50분간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봤다면 적어도 5분간 먼 곳을 보거나 눈을 감고 쉬어야 한다. 먼 곳을 보기 어렵다면 주변의 식물이라도 보는 게 좋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바깥 풍경을 본다거나, 밥을 먹거나 잠자리에 들고자 할 때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보지 않으면 눈의 피로가 한결 줄어든다. 어두운 곳에서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안 좋은 것은 조명도 켜지 않은 어두운 실내에서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빛을 보는 것이다. 가시광선 가운데 380~495나노미터(nm)의 푸른색을 띠는 ‘블루라이트’를 낮추는 것도 중요하다. 안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눈 건강에 치명적인 블루라이트 차단 기능을 안경에 넣고, PC 모니터에 차단 필름을 붙이거나 스마트폰 기능 설정을 통해 블루라이트를 제거해도 된다. 실내에서 일할 때는 조명을 밝게 하고, 전체 조명으로도 부족하면 탁상 조명을 활용해도 좋다. 다만 어두운 곳에서 근거리를 비추는 탁상 조명만 활용하면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 쉴 때는 눈이 부신 전체 조명 대신 은은한 간접 조명으로 바꾸어 눈의 피로를 덜어 줘야 한다. 또 실내가 건조하면 안구건조증이 심해지므로 실내 습도는 45~55% 정도로 유지하고, 난방기나 냉방기는 바람이 눈에 직접 닿지 않는 곳에 둔다. 누워 있을 때는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눈에 온찜질을 해준다. 수정체의 노화는 자외선과도 연관이 있으므로 자외선에 눈이 직접 노출되는 것을 피한다. 검은콩 등 항산화 성분이 많이 든 음식을 먹는 것도 도움이 된다. 망막에는 시신경에 빛의 신호를 전달하는 로돕신이라는 게 있는데, 이 물질이 감소하면 눈에 피로가 쌓인다. 이때 안토시아닌이 든 블루베리 등을 먹으면 로돕신 재생에 도움을 줘 눈에 쌓인 피로가 빨리 제거된다. 피로가 풀리면 그만큼 눈도 활력을 찾아 노안이 오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양파와 홍삼도 눈에 쌓인 노폐물을 청소해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월드피플+] 벼락스타가 된 ‘거지 철학자’ 다시 대중 앞에 나서다

    [월드피플+] 벼락스타가 된 ‘거지 철학자’ 다시 대중 앞에 나서다

    행방이 묘연했던 중국의 ‘거지 철학자’가 깔끔한 모습으로 다시 대중 앞에 섰다. 26년간 거리에서 생활한 노숙자 선웨이(沈巍·52)는 지난 3월 단 한번의 온라인 방송으로 벼락 스타가 됐다. 옷깃만 스쳐도 눈살을 찌푸리던 사람들은 선웨이를 ‘유랑대사’(流浪大師)라 부르며 쫓아다녔고 손짓 하나에도 열광했다. 그가 머무는 상하이의 금융 중심지 푸둥신구(浦東新區)의 양가오난루(楊高南路) 지하철역은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인민일보를 비롯한 중국 관영언론은 물론 워싱턴포스트와 BBC 등 외신도 그를 주목했다. 입고 있는 옷은 언제 빨았는지 냄새가 진동을 하고, 5년 전 마지막으로 자른 머리카락은 비듬투성이였지만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젊은 여성들도 줄을 이었다.선웨이는 지난 3월 중국의 한 ‘왕홍’(网红, 웨이보 등 SNS에서 최소 50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온라인 스타)의 권유로 인터넷 생방송을 진행했다. 1986년 상하이 쉬후이구(徐汇区) 회계감사국 공무원으로 일했던 선웨이는 사실 중국 명문대학교 푸단대(复旦大学) 출신이다. 그는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도 폐지 판 돈을 모아 책을 사 읽었다. 인민일보에 따르면 선웨이는 공자가 쓴 춘추(春秋)의 해설서 좌전(左传)과 진한 말기 전국시대 전략가들이 책략이 담긴 유향의 집필서 전국책(战国策) 등에 정통하다. 그만의 철학이 담긴 영상이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선웨이는 하루아침에 새로운 ‘왕홍’으로 떠올랐다.그런 그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은 지난 4월 초. 깔끔해진 그를 목격했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웨이는 방송을 중단한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주목을 받게 된 선웨이는 앞서 베이징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나를 원숭이 취급한다는 것을 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가 유명해진 뒤 여자친구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며, 그가 쓴 붓글씨는 경매에서 약 1500만 원에 판매됐다. 언론은 그가 머물던 지하철역에 ‘지친 정신과 육체를 이끌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 고맙다’는 쪽지만이 남아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한 달 여 만에 선웨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와 수염을 깎고 깨끗한 옷을 입은 그는 현지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얼마간 신장(新疆) 지역을 여행하고 왔다고 밝혔다. 선웨이는 “협업을 제안한 사업가의 초대를 받고 신장을 방문했다. 사업 파트너와 친구들, 그리고 팬들의 도움으로 호텔에 머물며 목욕도 하고 머리도 깎고 깨끗한 옷도 입었다”고 설명했다. 선웨이는 한 달 간 호텔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호사를 누렸다. 매일 고급 세단을 타고 파티에 참석했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수행원들이 따랐다. 며칠간 묵었던 호텔은 그가 다녀간 뒤 상호를 ‘온라인 유명인사 호텔’로 바꾸기도 했다. 그는 펑파이뉴스(澎湃新闻)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거나 사인을 요청할 때마다 놀라곤 한다. 내가 그렇게 사랑스러운가”라고 웃어보였다. 또 갑작스러운 인기에 대한 솔직한 심정도 드러냈다. 선웨이는 “내가 얻게 된 명성에 엇갈린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서 “스타가 되어 피곤한 것도 맞지만 물질적 풍요를 얻었다는 측면에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9일(현지시간) 선웨이가 공무원으로 일하던 2002년 재활용 쓰레기를 가져오는 습관 때문에 정신병을 의심받아 강제 병가 처리됐고 살던 아파트에서도 더럽다고 쫓겨나 노숙자 생활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선웨이는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지만 집이 가난해 책을 살 돈이 없었다. 책을 읽기 위해 재활용 쓰레기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이제 그는 인터넷 생방송으로 번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펑파이뉴스에 따르면 선웨이는 지난달 10만 위안(약 1,500만 원)의 수입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이 순간 곁에 둘 자식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선웨이는 말했다. 부친은 2012년 세상을 떠났고 결혼을 하지 않아 동생 2명 외에는 가족이 없는 그는 “여자에는 관심이 없지만 자식을 갖지 못한 것이 유일한 후회”라고 밝혔다. 노숙자 생활을 청산했지만 침대에는 적응하지 못하겠다고도 덧붙였다. 선웨이는 “거리를 떠돌 때는 잔디밭이나 다리 밑에서 잠을 잤다. 그래도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침대는 다리 밑보다 푹신하지만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김훈 문장을 솎아내는 그녀…하정우가 미팅 청하는 그녀

    김훈 문장을 솎아내는 그녀…하정우가 미팅 청하는 그녀

    김훈 작가 육필 컴퓨터로 옮기며 인연 지우개 가루 속에서 단단한 글 만들어 하정우 미팅만 20번 하는 ‘열혈 작가’ 교정지 직접 제본… 새 아이디어 추가김훈 작가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 하나. 원고지에 꾹꾹 눌러쓴 저 글씨는 누가 타이핑해 컴퓨터에 옮겼을까. 지난해 11월 출간 이래 11만부가 발행된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는 정말 배우 하정우가 쓴 게 맞을까. 6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연실(35) 문학동네 편집부 국내5팀장은 이들 책 뒤에 있는 사람이다. 명함에 빼곡히 적힌 책들은 다 그가 편집한 것들이다. ‘북 디렉터’를 자처하는 그가 기획하고, 원고를 수정하고, 책과 엮인 사람과 소통한 흔적이다. 7년 차 비교적 ‘신참자’였던 이 팀장이 김훈 작가와 연을 맺은 것은 2015년 출간된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부터다. 작가의 육필 원고를 컴퓨터에 옮기는 일은 경기 고양시 일산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진다. 오자를 낼까 무서워서, 즉시즉시 저자에게 확인하기 위함이란다. 처음에는 못 알아보는 글자가 너무 많아 ‘자꾸 물어보다 편집자가 바뀌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지금은 척 하면 척이다. “선생님이 연필로 글을 쓰시면서 문장이 더 단단해져 가는 걸 느껴요. 조사 하나 쓰는 것도 ‘헉’ 하게 될 때가 많아요. 지우개 가루 속에 계시는 걸 보면 감동적이기도 하고요.” 편집자의 역할 중 하나는 날것 그대로의 원고를 받고 고언을 하는 일. 김훈 같은 거장에게는 무슨 말을 어찌 전할까. “저자 교정지 여백에 편지를 써요. ‘이 문장은 이러이러한 연유로 없으면 더 잘 읽힐 것 같습니다’ 하는 식으로요. 처음에는 ‘안 된다’고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셨더라고요. ‘빼라 빼!!’” 원고를 받으러 가느라 만나는 횟수만큼, 아니 그보다 더 김 작가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다. 작가는 이 팀장 언니의 결혼식에도 소리 소문 없이 참석했다. ‘두 딸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한테 인사드리는 게 맞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머니가 학교 교육을 못 받으시고, 홀몸으로 저희를 키우셨거든요. 선생님이 늘 ‘너희 엄마는 성인이시다, 엄마 앞에서 까불지 말고 깊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어요.” 어머니가 직접 농사지어 선물한 흙 묻은 풋마늘을, 손에 들고 활보하는 작가를 두고 이 팀장은 “이 세상 스웨그가 아니시다”라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적었다. 다음 질문. 배우 하정우는 정말 책을 직접 썼을까. 편집자 보증 ‘100%’다. “책을 내고 싶다”며 ‘작가 하정우’가 건넨 원고 뭉치에서 ‘걷는 사람’이라는 주제를 뽑아낸 사람이 이 팀장이다. 하루 3만보씩, 많게는 10만보까지도 걷는다는 이야기가 와닿았기 때문이다. 하 작가는 교정지를 직접 제본해 들고 다니며 빼곡히 새로운 아이디어로 채워 넣는 ‘열혈 저자’다. 길게는 4~5시간, 미팅만도 20번을 했다. 육필 원고를 받아치는 일, 너무 힘들지 않냐고 넌지시 물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나 이제부터 컴퓨터로 쓰고 이메일로 보내겠다’고 하시면 너무 서운할 거 같아요. 선생님 글쓰기의 최종 단계를 제가 못 보게 되는 거라서….” 17세 청년 마리오가 유명 시인 네루다의 우편을 배달하면서 자신 또한 시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책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좋아한다는 이 팀장. 그의 꿈은 저자들의 ‘할머니 우체부’가 되는 것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전남도의회 ‘약무호남 시무국가’ 충무공 친필 검증 요구

    전남도의회 ‘약무호남 시무국가’ 충무공 친필 검증 요구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을 것이다)’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부하들에게 자주 강조했던 말이다. 이 글은 1593년(선조 26년) 충무공이 사헌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다. 이순신 장군의 문집 ‘이충무공전서’(1960년 이은상 저)의 끝 부분 서간문 모음집에 실려 있다. 이 충무공 서간첩은 국보 76호로 현재 충남 아산 현충사에 전시돼 있다. 하지만 최근 이순신 장군의 친필로 공개되고 있는 ‘약무호남 시무국가’에 대한 사실 여부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전남도의원 11명으로 구성된 ‘전남도의회 임진왜란 연구회’는 지난 3월 현충사에서 이충무공전서와 아산 현충사에 보관 중인 국보 76호 서간첩 간에 서로 큰 차이점이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고 6일 밝혔다. 이들은 충무공 친필 확인을 위한 객관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연구회에 따르면 이충무공전서에는 서한 6편과 잡문 3편, 1593년 7월 16일자 편지 추신이 있다고 돼 있지만 서간첩에는 서한 8편은 있지만 잡문 3편은 없고, 편지 추신도 없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약무호남 시무국가의 ‘국’자가 한자 서식에 맞춰 상단에 있지만, 서간첩에는 ‘국’자가 하단에 있고 글씨체도 옥편에 등재된 초서체가 아니다. 이들은 “서간첩에 수록된 충무공이 조카에게 보낸 편지는 종이 질감이 갈대 잎처럼 거칠고 뿌리와 줄기·잎이 섞여 거칠했다”며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문구가 쓰인 1593년 편지는 두껍지만 매끄럽고 질감이 월등하게 동일해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종이인데도 서로 감촉이 아주 다르다”고 지적했다. 임종기 도의원은 “충무공이 현덕승에게 보낸 약무호남 시무국가 문구가 쓰인 편지가 400여년 전 임진왜란 당시의 종이인지 의문스럽다”며 “과학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돼 지난 2일 문화재청장에게 확인을 요구한 공문을 보냈다”고 말했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과거시험 보듯 정성스럽게

    과거시험 보듯 정성스럽게

    어린이날인 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8회 대한민국 서당문화한마당 휘호대회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정성을 담아 붓글씨를 쓰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허허벌판이 인구 33만명 첨단도시로… ‘행정수도 세종’ 성큼

    허허벌판이 인구 33만명 첨단도시로… ‘행정수도 세종’ 성큼

    “그때(세종시 출범 시)는 마을에 노인만 많아 내가 막내였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길거리에 돌아다니고 뛰어놀고 북적북적합니다. 한마디로 ‘천지개벽’한 것이죠.” “도시에 활력이 넘칩니다. 내가 한솔동에 사는데 복합커뮤니티센터가 좁아 제2센터를 짓는다니까요.” 임재긍(63) 한솔동 통장은 1일 서울신문과 만나 “옛날 군 시절처럼 이웃과 정을 많이 나누며 살지 않지만 활력이 넘쳐 나름대로 사람 사는 맛이 난다”고 말했다. 임씨는 세종시가 출범하기 전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에서 대대로 살았던 토박이다. 2012년 7월 1일 특별자치시로 출범한 지 7년이 된 세종시가 엄청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대형 건물과 아파트 등이 허허벌판이던 땅을 갈수록 채워 가고 인구와 학교 등이 급격히 늘면서 하루가 다르게 첨단도시다운 면모를 갖춰 가고 있다. 게다가 행정안전부 등이 내려오고 국회 분원에 대통령 세종 집무실 등도 추진돼 당초 꿈꿨던 ‘행정수도’에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보람동 시청사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인구수를 알리는 입간판이 보인다. 이날 오후에 본 입간판에는 빨간 전자글씨로 ‘4월 30일 32만 9703명’이라고 써 있다. 전날 인구 숫자를 매일 알린다. 시가 출범한 날 인구 10만 751명의 3배를 훌쩍 넘는다. 김덕중 정책기획관은 “매일 인구를 집계한 숫자를 문자로 보고받는데 하루 100명씩 증가한다”면서 “연초나 7~8월 중앙부처 인사가 있을 때는 200~300명씩 늘고 지난 2월 행안부 이전이 한창일 때도 그랬다. 특히 아파트 입주 시기에는 하루 400~500명이 늘어나기도 한다”고 했다. 김 기획관은 “몇 년 전만 해도 신도시 주거환경이 좋지 않아 아파트 입주를 미뤄 아파트마다 입주 개시 후 열 달이나 지나서야 완료가 됐는데 요즘은 편의시설 등 도시 생활 인프라가 꽤 갖춰져 2~3개월이면 입주가 모두 끝난다”고 전했다. 세종시로 이사 오는 외지인은 주로 젊은층이다. 대전, 청주, 공주 등 인근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서울, 부산, 제주 등 전국에서 몰려온다.●싱싱장터 개장되자 신·구도심 주민 갈등 사라져 그런 만큼 세종시는 시도 중 가장 젊다. 지난해 말 평균연령이 36.7세이다. 전국 평균연령 41.5세보다 다섯 살 가까이 젊다. 신도시 동 지역만 하면 33세에 불과하다. 당연히 출산율도 높다. 지난 한 해 1.57명으로 전국 평균 0.98명을 크게 웃돈다. 아파트 건설과 신규 입주민이 집중된 신도시 덕이다. 중앙부처와 시청, 교육청이 있는 신도시만 따지면 지난 3월 기준으로 23만 1021명이 살아 시 전체 인구의 70%가 넘는다. 시가 출범한 2012년 7월에는 신도시에 한솔동 첫마을만 있었고 인구는 고작 8351명에 그쳤다. 전체 19개 읍·면·동 중 신도시 동 지역은 9개로 절반이 안 되지만 인구 점유율은 더욱 높아질 게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발전이 더딘 읍면 주민들은 “왜 신도시만 발전시키느냐”, 신도시 주민은 “우리가 낸 취득세 등 세금을 왜 읍면 지역에 집중 투자하느냐”고 서로 날 선 불만을 쏟아냈다. 시는 이 부분을 해소하려고 애썼다. 가장 눈에 띄는 게 로컬푸드 개장이다. 2015년 9월 도담동에 1호점이 문을 열었다. ‘싱싱장터’라는 이름처럼 신선한 농산물에 시민들이 몰렸다. 농사짓는 원주민이 새벽에 수확해 바로 매장에 내놓는 데다 이웃 농민이 직접 길러 믿을 수 있다는 점이 어필했다. 도담점 주임 신이정(32)씨는 “주말에는 시민들이 줄 서서 딸기와 상추 등을 사간다”면서 “평일 점심이나 저녁을 준비하기 전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월수입 300만원이 넘는 농민들이 속출하면서 신도시와의 갈등도 줄었다. 여기에 신도시 동과 구도심 읍면 간 자매결연을 해 주고 통장과 이장을 함께 연수 보내는 등 화합하도록 적극 지원한다.지난해 아름동에 2호점을 낸 시는 내년 새롬동에 3호점, 2021년 소담동에 4호점을 열겠다고 했다. 1, 2호점 참여 농민이 1000명에 이르고 누적 매출액이 500억원을 넘은 데다 시민들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신도시 주민 간 교류에도 관심을 쏟는다. 이른바 ‘팔도’ 사람이 모여 동질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다. 이들을 묶는 게 복합커뮤니티센터다. 동사무소와 어린이집, 꽃꽂이 등 취미교실, 작은 도서관, 수영장 등을 한데 모아 놓은 곳이다. 대부분 무료다. 이용석 기획조정실장은 “아파트단지 몇 개를 묶어 ‘가락마을’, ‘호리울마을’ 등 옛 지명을 따거나 한글 이름으로 자연부락처럼 만들고 중앙에 지어 공동체 의식을 다지게 한다”며 “멀어도 센터까지 1㎞가 안 돼 주민들이 자주 찾아 정을 쌓고 이들을 중심으로 사회 참여가 활발하다”고 말했다. 김 기획관도 “주민들이 센터를 통해 이웃과 교류하면서 처음에 가졌던 ‘유배’왔다는 느낌을 지우고 있다”면서 “현재 10개가 있고 앞으로 22개 마을에 모두 설치하겠다”고 덧붙였다. ●신도시 학생수 1669명→4만 1099명으로 급증 인구가 늘고 공동체의식이 두터워지면서 사회참여 활동도 활발하다. 특히 학부모들의 활동은 대단하다. 인터넷 카페를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어 시교육청 정책을 비판하고 미세먼지 대책 등 각종 요구 사항을 쏟아낸다. 시 출범 시 신도시에 초·중·고교를 합쳐 4개에 불과하던 게 현재 62개로 급증했으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신도시 학생수는 1669명에서 4만 1099명으로 대폭 늘었다. 유치원생 역시 300여명에서 6200명 정도로 폭증했다. 세종시교육청 관계자는 “전국의 어떤 도시, 어떤 신도시도 이처럼 학교나 학생이 급증한 곳은 없었다”며 “교육열도 엄청나 걸핏하면 전화하고 어떤 때는 교육부를 통해 개선을 요구하기도 해 애를 먹기도 한다”고 귀띔했다.●8월까지 중앙부처 18개 중 12개 이사 완료 오는 8월에는 행안부에 이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까지 내려온다. 중앙행정기관이 43개로 늘어난다. 중앙부처만 보면 18개 중 12개가 옮겨온다. 신도시 중앙공무원이 1만 7000여명에 이른다. 게다가 국회 세종분원이 가시화됐고 대통령 세종 집무실도 검토에 나서 ‘행정도시’ 수준을 벗어나고 있다. 김 기획관은 “국회 분원과 대통령 집무실까지 설치되면 행정수도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인구가 급증하고 도시 인프라 건설이 빨라지면서 세종시가 충청권 부동산 경기를 리드한다. 세종시 공무원이나 시민이 아니면 세종시 아파트를 분양받는 건 언감생심이고 이 바람에 주변 도시 부동산까지 들썩인다. 평(3.3㎡)당 분양가 1000만원을 약간 웃돌던 대전에 최근 1500만원이 넘는 아파트가 등장했다. 세종시민의 삶의 만족도도 크게 높아진 것으로 조사됐다. 김 기획관은 “퇴근길이 멀어 직원들과 자주 회식하던 서울·과천청사 시절과 달리 대부분의 세종시 공무원들은 가족들과 외식을 한다”고 전했다. 이춘희 세종시장은 “세종에 국회 분원과 대통령 집무실을 설치하는 것은 국정운영 효율과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며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원활하게 집무할 수 있도록 보좌진과 비서진 등이 일할 공간도 만들 수 있도록 적극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세종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10대도 온전한 노동자… 권리 배우는 노동교육 제도화 급선무”

    “10대도 온전한 노동자… 권리 배우는 노동교육 제도화 급선무”

    전문가 3인 ‘청소년 노동’ 진단과 대안 서울신문은 ‘10대 노동 리포트: 나는 티슈 노동자입니다’ 시리즈를 통해 뽑아 쓰고 버리면 그뿐인 만만한 존재로 전락한 10대의 노동 현실을 고발했다. 정규 교육과정은 물론 그 누구도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지 않았고, 10대가 바라본 세상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민망하지 않은 일이 되려면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 전문가들은 10대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노동인권교육을 제도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진단했다. 대담에는 이원희 노무사, 송태수 한국기술교육대 고용노동연수원 교수, 송하민 청소년유니온 위원장이 참석했다. -10대의 노동 현실은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 송하민 10대가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로 어렵다. 그러다 보니 정말 힘들거나 최저임금 이하로 임금을 주는 등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에서 일하게 된다. 택배 상하차, 웨딩홀 뷔페 등은 일용직 개념이다. 말 그대로 한번 쓰면 끝인 일자리다 보니 휴식시간 미보장, 오후 10시 이후 근무, 수습기간 임금 공제 등 법을 어기는 건 다반사다. 이원희 10대가 일하는 것을 ‘노동’이라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특히 웨딩홀 뷔페 아르바이트에서 수수료 3.3%를 떼는 것은 용역 계약의 일종이고, 배달대행도 10대를 자영업자 신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법 위반을 넘어 법의 사각지대로 청소년을 내몰고 있다. -일터에서의 노동권 침해는 10대만의 일은 아니다. 유독 10대라서 정도가 더 심하다고 봐야 하나. 또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송태수 노동시장은 기본적으로 경제논리에 맞춰 돌아간다. 10대라 할지라도 노동력이 필요해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어리기 때문에 이 정도의 돈만 받아도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덩달아 가장 기본적인 근로계약서를 써서 나눠 주는 것조차 지키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쓰면서 단지 10대라는 이유만으로 불합리하게 대한다. 하지만 일자리 경험이 처음인 10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원희 학생,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면이 분명히 있다. 고용주들은 알바자리를 구하러 간 10대들에게 “얼마나 오래 할 거야”, “잠깐 하고 그만두려면서 무슨 근로계약서야”라고 한다. 또 어리니까 일이 미숙할 것이고, 제대로 일하는 게 아니라 배우는 과정이라는 시각으로 10대의 노동을 바라본다. 그렇다 보니 권리는 지켜지지 않는다. 송하민 그런 면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단순히 10대만의 문제라기보단 10대가 주로 종사하는 직종이 단순노무직, 서비스직인 점도 감안해야 한다. 저숙련, 고강도, 장시간, 저임금으로 점철된 일자리에 10대들이 주로 투입되는 것이다. -10대의 노동은 ‘용돈벌이나 하려고 하는 일’이라는 취급을 당한다. 송하민 ‘용돈벌이’라는 규정은 불쾌하다. 그리고 동의하지 않는다. “청소년은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 “부모 덕에 생계가 보장되고 용돈도 받는데 왜 일을 하냐”는 이야기를 실제로 많이 듣는다. 하지만 모든 청소년이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10대도 많다. 송태수 고등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 됐다. 서울교육청 실태조사에서도 10명 중 2명 정도가 알바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나왔다. 어떤 이유에서든 노동력을 제공하는 ‘경제 주체’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에게 경제 주체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고 있는 것인지 되짚어 봐야 한다. -10대는 일에 임하는 자세가 불량하다는 불만도 있다. 송태수 유독 10대만 업무에 임하는 자세가 불량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설사 그렇다 해도 원인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10대들이 주로 하는 단순노무나 서비스직에 대해 여전히 낮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냥 쓰고 버려도 되는 일자리로 인식한다. 게다가 사장으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일하는 10대들이 일 자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책임감이 떨어지게 된다. 부속품 정도로 여겨지는 노동을 경험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송하민 사업주는 10대 노동자를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먼저 짚어야 한다. 현장실습만 봐도 실습생을 받은 업체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조차도 몰라서 커피를 타게 한다. 그게 아니라면 사업장 안에서 위험해서 누구에게도 잘 맡기지 않는 업무를 맡긴다. 제대로 된 일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10대가 일을 게을리한다는 것은 오래된 편견이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송하민 실습을 하던 현장에서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해도 학교로 돌아오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학교로 돌아오면 깜지(흰 종이에 글씨를 빽빽이 써넣어 흰 공간이 보이지 않도록 글을 쓰는 체벌)를 쓰게 하거나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업체를 선택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현장실습을 나가기 전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교육도 이뤄져야 한다.이원희 과거에는 취업률 기준으로 특성화고를 평가해 문제가 발생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제도 폐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전 보호 규정을 강화하면 업체들이 실습생을 뽑지 않는 식으로 대응하다 보니, 노동의 가치를 알고, 적성을 살릴 수 있는 현장실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제도를 유지하려면 일과 학습을 병행하고, 기술을 배워 산업현장에서 곧바로 활용한다는 현장실습의 근본적인 취지를 살려야 한다. -2007년 노사정위원회(현재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노동교육의 제도화를 권고한 바 있다. 10대 노동 현실을 바꾸고 인식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교육이 거론된 지 이미 10년이 넘었는데. 송태수 ‘학교에서 파업을 가르친다.’ 이런 프레임을 보면서 우리사회의 노동인권 교육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이 나쁘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모양새다. 이런 인식은 학교에서 노동교육이 어려운 이유기도 하다. 노동교육은 이념적으로 채색된 교육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마치 투쟁의 전사를 양성하는 것이라는 인식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원희 노동교육에 색깔을 씌우는 시도도 안고 가야 할 과제 중 하나다. 노사 관계나 노동자, 노동조합을 갈등으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노동이나 파업이 무엇인지 또 왜 하는지에 대해 배우는 기회가 필요하다. 진로교육만 봐도 적성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내가 가서 일해야 할 곳에서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인식 개선과 함께 10대들이 겪는 부조리를 털어놓을 수 있는 창구를 확대하는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 송하민 학교에서의 노동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청소년들이 일하는 이유가 생계유지를 위해서인 경우도 많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노동시장에 10대가 왜 진출해야 하는지부터 짚어 봐야 한다는 의미다. 학생 신분 혹은 10대가 밑바닥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사회안전망 구축도 필요하다. 또 이미 노동시장에 진출한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감독을 강화하거나 불합리한 일을 당했을 때 호소할 수 있는 센터가 좀더 늘어나야 한다. 처음 노동시장에 진출한 10대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우리 모두의 페미니즘

    [조영학의 번역과 반역] 우리 모두의 페미니즘

    어울리지 않게 대학원 박사과정 전공이 페미니즘이었다. 1990년대 중반경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얼떨결에 발을 담갔다가 결국 페미니즘 이론에 매료된 것이다. 페미니즘에 혹했던 이유는 여성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평등한 세상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학위를 포기하고 공부를 중단하기는 했지만, 그때 접한 페미니즘 세계관이 지금껏 내내 내 시각을 잡아 주고 삶을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일 흥미로웠던 주제가 ‘언어’다. 세계가 유럽ㆍ백인ㆍ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언어는 유럽ㆍ백인ㆍ남성이 지배하고 그 나머지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지배자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문학작품 속에서 여성이 (남성의 언어를 도구로)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고 또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살폈다. 자크 라캉에 따르면 언어란 개별 인간 이전에 존재하고 개별 인간은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사회화한다. 여성은 스스로의 언어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성의 언어를 체득하며 사회화하므로 곧바로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고 만다. 남성 중심 언어에서 남성은 기준이 되고, 여성은 배제되거나 부차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남성 성기의 결여’에서 찾고(기준은 늘 남성이다),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 ‘우먼’(woman)은 남성 ‘맨’(man)에 의존해서만 존재한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김승섭 교수는 “과학에서 여성의 몸이 사라진 현상”에 대해 언급한다. 과학적으로 정했다는 사무실 적정 온도 21도는 몸무게 70㎏의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한다. 불면증 치료제 졸피뎀의 기본 처방 용량 10㎎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부작용 가능성이 크다. 새 신부에게 남편 식구들을 ‘서방님’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예법은 누가 만들었을까. 명절에 시집부터 찾는 풍습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부모 재산은 왜 남자들이 다 가져갈까. 우리는 왜 이런 불평등들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까. 남성의 몸에 맞게 만든 옷이 여성에게 편할 리가 없다. 페미니즘 문화 이론가이자 철학자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은 히스테리, 거식증, 분열성 정체성 장애 등 여성 특유의 질병이 남성 주도적 문자 사회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한다. 남성의 상징체계가 여성의 몸에 강제적으로 이식되면서 여성들이 끊임없이 고통을 겪어 왔다는 것이다. 20대 남성 70%가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뉴스를 접했다. 군대 문제를 비롯해 오히려 역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한다는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느 통계를 보아도 남성은 이 불평등 사회의 수혜자다. 20대라고 다를 바 없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여성이 부당하게 취급받는 게 아니라 그걸 당연시하고 고착화하려는 사회 분위기다. 페미니즘에 주홍글씨 낙인을 찍고 심지어 페미니즘을 남녀의 성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정당도 있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싸우자는 이론이 아니다. 기득권, 주도권을 빼앗겠다는 싸움도 아니다. 우리 어머니, 누이, 연인이 겪고 있으며 또 미래의 아내, 딸이 겪어야 할 질병과 고통에 대한 얘기다. 지금까지의 가부장적, 남성주도적 세계관을 잠시 내려놓고 어머니의 눈으로, 아내와 여동생, 딸의 입장에서 세상을 이해해 보자는 운동이다. 경쟁자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바로 내 가족을 위한 노력이고 운동이다. 나는 여전히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녀가 평등한 사회여야 남녀가 모두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스웨덴의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 카롤린스카도 2015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면 남성도 살기 좋아진다. 남성의 어깨에 있는 짐을 일부 내려놓으면 남성도 편해진다. (페미니즘이) 한국을 구할 것이다.” 페미니즘이 우리 모두의 페미니즘이어야 하는 이유다.
  • ‘미쓰코리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집 공개 “유럽 가정집은 처음”

    ‘미쓰코리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집 공개 “유럽 가정집은 처음”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집이 공개돼 화제다. 28일 방송된 tvN ‘미쓰코리아’에서는 멤버들이 새 호스트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매일 찾아와 글을 쓴다는 수영장이 겸비된 호텔로 멤버들을 불렀다. 한국말로 반갑게 인사하며 등장한 베르나르와의 첫 만남에 박나래는 “생전에 이 분을 뵐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는데”라며 놀라워했고, 장동윤은 “스케일이 장난이 아니구나”라고 감탄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미쓰코리아’의 집-밥 교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사연에 대해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저의 제 2의 조국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한식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에 처음 갔을 때 마치 내 집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제가 전생에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라며 한국을 향한 특별한 애정을 전했다. 이들은 프랑스 파리 관광 후 저녁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집으로 향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집은 몽마르트 근처. 사크레쾨르 성당 옆 골목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집이 나왔다. 신현준은 “유럽 가정집은 처음 가 본다”며 놀라워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신현준은 “뭔가 동양적이다”며 또 놀랐다. 곳곳에 다양한 개미 그림과 모형들이 그의 소설 ‘개미’를 연상시켰다. 개미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행운의 상징이라고. ‘개미’ 뿐만 아니라 ‘뇌’ ‘파피용’ 등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소품들과 한국어 붓글씨, 징 등 한국식 소품도 눈길을 모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체조를 한다는 테라스에 침실도 공개돼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성현아 부친상 “결국 읽히지 못한 말..”[종합]

    성현아 부친상 “결국 읽히지 못한 말..”[종합]

    배우 성현아(44)가 부친상을 당했다. 성현아는 27일 자신의 SNS를 통해 “저의 친아버지께서 새벽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 부고 소식을 전했다. 성현아는 전날 아버지에게 남긴 카카오톡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성현아는 ‘사랑해’ ‘우리한테 잘못한 거 없어’ ‘걱정마요’ 등의 메시지를 남겼다. 성현아는 “결국 아버지께 읽히지 못한 말, 낳아주신 우리 아빠 사랑한다”라며 부친상을 암시한 바 있다. 이에 일부 매체는 성현아가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 해 작성한 글이라고 오보를 냈다. 성현아는 이를 두고 “제발 오버들 하지 말아달라. 함부로 있지도 않은 남의 감정 지어내지 말아달라”고 분노하기도 했다. 한편 성현아는 1994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통해 데뷔했으며, 영화 ‘할렐루야’, ‘남과 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주홍글씨’, ‘애인’, ‘손님은 왕이다’, 드라마 ‘어느날 갑자기’, ‘시간’, ‘나쁜 여자 착한 여자’, ‘이산’, ‘욕망의 불꽃’ 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연기활동을 펼쳤다. 2013년 불거진 성매매 혐의에 대한 법정 공방과 2017년 남편의 사망 등으로 긴 공백기를 가졌다. 지난해 7년 만에 ‘파도야 파도야’로 복귀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당신은 어릴 적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당신은 어릴 적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란 삶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일임이 분명하다.’(김현 ‘누군가 창문에 입김을 불어 쓴 글씨’ 중) 어떤 시절을 거쳐 시인은 어른이 될까. 혹은 어른이 되지 못했을까. 열두 명의 시인이 10대 시절과 지금에 대해 시와 산문을 겹쳐 쓴 ‘교실의 시’(돌베개)를 펴냈다. 201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 1980년대생인 열두 명의 시인은 ‘교실’이라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10대 시절의 기억·감각·감정,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에 관해 들려준다. 서효인 시인은 폭력이 대물림된 중학교 교실에서 ‘나는 죽었다’고 썼다.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의 구타가 일상화된 교실에서 위 학년은 아래 학년을, 강한 학생은 약한 학생을 때렸다. 시인은 1996년 그곳에서 함께 했던 동년배들이 사회 곳곳으로 나가 혐오가 혐오인지 모르고,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는 무뢰배가 됐을까 우려한다. ‘척’이라는 이름의 시에서 ‘내 이름은 척’이라던 오은 시인은 무수한 척을 거쳐 어른이 됐으나, 어른이 돼도 ‘척할 일’은 도처에 널려 있으며 난생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늘 당황한다고 고백한다. ‘어른’이라는 말의 정의에 대해서는 김현 시인의 언술이 가장 명징한 것 같다. ‘타인의 얼굴에서 시간을, 시간에 힘입어 온 기쁨과 슬픔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됐을까. 꼭 어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과연 어드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반문하게 하는 책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비밀정원’ 성락원 200년 만에 문 열다

    ‘비밀정원’ 성락원 200년 만에 문 열다

    북한산 자락 ‘조선 후기 별서정원’ 연못 암벽엔 추사 김정희 글씨도 70% 복원… 내년 가을 정식 개방 높다랗게 솟은 철제 대문으로 들어섰다. 졸졸졸, 북한산을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가 청량했다. 새소리, 바람소리, 자연의 소리로 그득했다. 23일 2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성락원’(城樂園)은 도심 속 별세계였다. 대문과 담을 경계로 시끌벅적한 속세와 담을 쌓고 산중 고요한 계곡 정원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성락원은 서울 시내 유일한 조선후기 별서정원(別墅庭園·별장에 딸린 정원)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전남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과 함께 ‘한국 3대 전통 정원’으로 일컬어진다. 조선 전통 정원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덕분이다. 성락원은 짙은 회색빛 철제 대문과 검은색 벽돌담으로 둘러쳐졌다. 대문 옆 벽면에 성락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지만 이곳에 도심 속 딴 세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지금까지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사유지였기 때문이다. 1년에 한두 차례 지역 행사 등을 위해 잠시 문이 열린 적은 있지만 일반에 개방되는 건 처음이다. 성락원은 1790년 조성됐다. 조선 철종(1849~1863)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이 별장으로 썼다. 이후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0년 넘게 별궁으로 사용했고 심상응의 후손인 고(故) 심상준 제남기업 회장이 1950년 4월 매입했다. 1992년 대한민국 사적 378호로,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5호로 지정됐다. 성락원이라는 이름엔 서울 도성의 자연미를 즐길 수 있는 정원이라는 뜻이 담겼다. 총면적은 1만 4407㎡(약 4360평)다. 전원(前園·앞뜰), 내원(內園·안뜰), 후원(後園·바깥뜰)으로 이뤄져 있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쌍류동천(雙流洞天)이 감싸고 도는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앞뜰과 안뜰을 나눈다. 바깥뜰엔 1953년 지어진 정자 송석정(松石亭)이 있다. 정원 안엔 송석지(松石池), 영벽지(影碧池) 등 연못 2개가 있다. 영벽지 서쪽 암벽에 행서체로 쓴 ‘장빙가’(檣氷家·고드름 매달린 집)라는 글자는 추사 김정희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박중선 한국가구박물관 이사는 “장빙가라는 글씨는 복원 공사 과정에서 나왔는데 완당(阮堂)이라는 낙관이 함께 새겨져 있어 추사가 쓴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2008년 복원 공사를 시작, 현재 7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아직 완공되지 않아 6월 11일까지 한시적으로 문을 연다. 매주 월·화·토요일, 하루에 일곱 번씩 단체 관람을 할 수 있다. 내년 가을쯤 정식 개방될 예정이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왕이 후궁 처소를 찾을 때 썼던 이 물건, 아시나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왕이 후궁 처소를 찾을 때 썼던 이 물건, 아시나요”

    고미술 수집 40년 최형술씨가 말하는 골동품“이 향난로는 아마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약재를 가루로 만드는 약연과 한약을 달이는 약탕기, 약주전자, 약탕관 등 한약과 관련된 모든 도구가 한 세트입니다. 약주전자와 약맷돌에 새겨진 이 문양을 보세요. 용, 불로초, 사슴, 잉어가 보이죠. 그리고 이번에 청자철제귀면종에 대해 문화재 등록신청을 했습니다.” 골동품 가게 앞에 5층 8각 석탑 두기 서 있어“14세기 청자철제귀면종, 문화재 등록 신청해”서울에서 가장 큰 고미술점을 운영했다는 최형술(81)씨를 인터뷰하려고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청계8가 한국도자기 뒤에 있는 골동품점 갤러리 미(취강당)을 지난 17일 찾았다. 철물점 상가들 사이에서 두 기의 8각형 5층 석탑이 가게 앞을 지키고 섰다.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의 가게에 들어서자 세월의 더께에 쌓인 갑옷과 놋그릇, 제사용품과 서화, 가구 등이 가득했다. 그는 처음엔 골동품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사진이 나가면 짝퉁이 나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사화 하려면 사진이 필요하다고 설득한 끝에 촬영을 허락받았다. 사진을 찍으러 공예품 먼지를 털자, 먼지도 털지 못하게 했다. 최씨는 가리킨 약주전자에는 뚜껑은 용이 똬리를 튼 특이한 모양새다. 물이 나오는 주구 부분 역시 특이하다.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었다. 이 주전자를 끓일 아궁이 역시 커다란 돌덩이로 만들어졌다. 그 옆에는 향난로가 놓여있었다. 사각형의 돌상자에는 다시 작은 돌상자를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사방으로 구멍이 2개에서 4개씩 나 있었다. 들어보니 아주 묵직했다. “장수곱돌로 만든 거예요. 이게 옛날에 임금님이 어느 후궁 처소로 가겠다고 하면 상궁들이 이것을 미리 그 후궁방에 두고 방을 따뜻하게 데우면서 향기롭게 하는 기능을 했다고 합니다. 저도 용도를 몰라 궁금해했는데 수년 전 한 스님이 이렇게 설명해 줬습니다만 좀 더 정확한 용도와 고증이 필요합니다.” 기자가 이 사진을 한의사에 보여줬지만 그 한의사 역시 처음본다고 했다. 이렇게 한약방과 관련된 도구가 100여 점에 이른다. “장수곱돌로 만든 한약방 도구 100여점용 무늬, 불로초, 잉어 등의 그림 새겨져충청도 대갓집에 3년간 공들여 수집해”- 한약 도구세트, 어떻게 소장하게 됐나. “1980년대에 충청도의 한 가문으로부터 수집했습니다. 99칸에 이를 정도의 대갓집이었는데 그 집 할아버지로부터 사들였습니다. 처음엔 안 팔겠다고 했는데, 한번 내려갈 때마다 술, 고기 등을 사들고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팔아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설득하면 그 할아버지가 한꺼번에 팔지 않고, 한점 팔고, 몇 달 뒤에 또 내려가면 3점 팔고…. 이렇게 해서 다 사모는데 한 3~4년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이 한약방 도구들의 출처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지 않고, 집안에 내려오는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현재 소장한 가장 비싼 미술품은. “글쎄, 가격을 다 매겨보지 못해 잘 몰라요. 그런데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은 있습니다. 고려시대인 14세기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가마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철제귀면종’은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있어요. 청자로 만든 종의 사금파리는 전하고 있지만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청자 종(鐘)으로는 아마 국내에서 유일할 겁니다. 사찰에서 쓰였을 것 같은데, 전문가들의 감정을 받아보면 가치와 용도를 알 수 있겠지요. 또 한가지 백자대호(달항아리)는 다음 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한 달간 전시할 생각입니다. 18세기 전후에 광주 분원리에서 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고가품은 분청사기…신사동 땅값 100배골동품 안목 수업료로 집 몇 채 값 날아가”- 그러면 최고가 수집품은. “미련을 갖지 말아야지요. 박수근·김환기·이수근의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단원 김홍도 그림도 제 손을 거쳐 간 것이 제법 됩니다. 한번은 평당 강남 땅값의 100배로 샀던 것도 있습니다. 1976년인가에 분청을 그때 돈 2000만원에 샀습니다. 그때 허허벌판의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비포장이었지만 도로 옆에 붙은 좋은 땅은 평당 2만~3만원이었고, 안쪽 구석에 있던 것은 5000원도 안 되었습니다. 분청사기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 그 분청 아직도 갔고 있나. “벌써 임자를 만나 나갔지요. 비싸게 매입한다고 다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골동품과 관련해 수업료로 집 몇 채 값은 날아갔습니다. 수십년 골동품을 거래한 저도 사람의 손때를 탄 물건, 어찌 보면 혼이 담긴 물건이기에 알기가 무척 어려워요. 살 때 분명히 진품으로 보였는데, 가게에 와서 보면 다르게 보이고 해서….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일반인도 아닌 전문 장사꾼이라 무를 수도 없고 집 한 채 값 그냥 날아가지요.” - 그 분청사기 누가 사갔나. “이름은 말할 수 없지요. 의사와 변호사, 교수 등이 우리 집에서 물건 많이 사갔습니다. 예술품이나 골동품은 소장자가 누구냐에 따라 가치가 또 확 달라집니다. 같은 분청사기라도 골동품상인 제가 가진 가치와 유명 교수나 학자가 소장한 것의 가치가 다르다는 거죠.” - 현재 보유한 고미술품 수는. “고미술품과 민예품 등을 합쳐서 아마 1만 점이 넘을 겁니다. 중간 상인이 차로 100점~200점 갔고 옵니다. 그중에서 서너 점이 마음에 들면 차떼기로 전부 다 샀던 겁니다. 중간 상인도 값나가는 서너 점을 알거든요. 좋은 것만 사고, 나머지를 사지 않으면 다음엔 거래하러 오지 않아요. 그 서너 점으로 본전을 뽑고, 나머지를 팔아서 이익을 내는 구조입니다. 많을 때 10만 점가량 보유했습니다. 다 보관을 할 수가 없어서 팔기 시작한 겁니다. 가구와 같은 목제품, 그림이나 글씨와 같은 서화는 비바람을 맞아 곰팡이가 피면 안 되잖아요. 여기 가게에도 있지만 개운사 옆 카페 봄에도 삼국시대의 토기 등을 전시하고 있지요. 창고에도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자개 농과 같은 나무 제품은 공간도 많이 차지합니다. 사람이 쓰는 물건이 3만가지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을 다루어봤을 겁니다.” “50~90년대 광장시장서 복지점으로 돈 벌어1970년대 우리 민예품 해외 마구 팔려나가남아있는 게 없겠다는 생각에 수집 시작박물관 생각에 마구 수집…여건 달라져 포기수집품 한때 10만점쯤 …지금은 1만점가량 보유”- 고미술 수집엔 돈이 엄청 든다. “동대문과 광장시장에서 양복을 짓는 데 쓰는 옷감인 복지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1958년부터인가 시작했는데, 그 당시 신랑이 장가갈 때 양복 한 벌 맞춰 입으려면 쌀 10가마의 돈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매와 소매를 겸해서 전국에 거래상을 두고 팔았지요. 그때 돈을 제법 만졌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닥친 1998년 복지 가게는 다 정리했습니다.” - 왜 고미술에 빠졌나. “1970년대에 보니깐 우리 공예품이 외국으로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심지어 수석까지 미국 일본 필리핀 이탈리아 등으로 팔려가가더군요. 소련에도 팔려나갔습니다. 이래서는 우리 것이 남아있지 않겠다는 생각에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좋은 것을 사 모아야겠다는 사명감에 보이는 대로 사서 모았지요. 그러다가 우리 공예품, 민예품을 보는 눈도 생기고, 알게 되니깐 더 애착이 가더라고요. 어느 순간 더 이상 보관할 수가 없게 되어서 골동품 가게를 열었습니다. 매장 면적이 170평으로 전국은 몰라도 서울에서는 가장 컸습니다. 18~19년간 하다가 땅 주인이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해서 여기로 이사해 소일거리로 하는 겁니다.” - 아무리 고미술에 빠져도 그렇게 사모을 수 있나. “처음엔 박물관을 하나 운영할까 생각했습니다. 서울에다 박물관 하나 하려다 보니 땅값이 엄청나게 올라 있고, 박물관 운영비 마련도 쉽지 않아 보여서, 그냥 나자빠진 거죠. 결국, 이렇게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게 된 거죠. 한창때는 귀하거나 없는 물건을 보면 안 사고는 못 배겼어요.” - 고미술 수집과 복지점 운영하면 물려받은 게 많았겠다. “저는 1939년생으로, 고향이 전남 해남인데, 그때 꿈이 교사였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해남고등학교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집안이 어려워 진학 대신 농사일을 도우며 서당에 3년가량에 다녔습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싶어서 무작정 상경해서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해서 돈을 아끼고 모으고 해서 복지점을 낸 겁니다. 복지점을 낸 지 3년 만에 해남에서 농사짓는 아버지한데 논 20마지기(4000평)와 기와집을 사드렸습니다.” “아파트 거주공간에 고미술 둘 공간 없어져조상 손때 묻은 골동품, 갈수록 가치 올라”- 고미술 대신 강남에 땅을 샀다면. “강남에 땅을 샀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잖아요. 잘 되었을 거라는 보장이 없지요. 신사동의 좋은 땅이 평당 2만원할 때 고려대 뒤 개운사 옆에 7500만원을 들여 큰 한옥을 지어 살았습니다. 그동안 건강하게, 화목하게 살았으니, 강남에 땅을 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후회는 없어요. 남들은 뭐라 생각하든 우리 고미술 보존에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 고미술 찾느라 전국 많이 다녔겠다. “복지점을 할 때 전국 거래처를 다녔지만, 고미술을 할 때는 가지 않습니다. 골동품도 수십년 거래한 믿는 중간 상인들이 있습니다. 중간 상인들은 지역별로 골동품을 모아두는 사람들을 두고 있었지요. 그래야 탈도 없고, 외상거래도 떼어먹는 일도 없지요. 집안에서 대대로 쓰던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정말 돈이 급하잖아요. 그래서 언제든지 현금으로 지불할 준비는 해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속은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그 또한 제 안목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엔 곁눈질로 한번 보면 10가지 이상이 파악됩니다. 그리곤 가격이 바로 매겨집니다. 수십년 경험이지요.” - 문제는 없었나.“무슨 문제요? 아~, 한번도 경찰에 조사받은 일이 없습니다. 수십년 거래한 중간 상인들이라도 의심스러우면 거래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골동품이라는 것들이 무겁고, 부피도 커고 해서 귀금속과는 많이 달라요. 이 부근 한자리에서 20년가량 장사를 하는데 손님을 속이고 그렇게 운영해서는 오래 못가요. 손님들이 수년 지나서 찾아와 물러달라거나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고 하면, 손님들 요구대로 다 해줬습니다.” - 요즘 고미술 인기는. “한때 한국화가 잘 나갔습니다만 아파트가 못도 박지 못하게 하잖아요. 소품의 유화라도 그림을 걸어둘 곳도 없어졌습니다. 동양화는 액자나 족자를 하게 되면 무겁고 공간도 넓게 차지하는 단점이 있지요. 병풍을 쳐 놓을 공간도 없고, 조상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같아요. 고미술을 사려는 사람도 적지만, 수요는 꾸준히 있습니다. 하지만 고미술, 골동품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워졌습니다. 가격도 비싸졌고…. 동묘에도 골동품상이 한두집 밖에 없어요. 요즘엔 물건이 안 나오니깐 못하는 거지요. 그래도 조상들의 혼이 담긴 골동품, 갈수록 가치가 올라갈 겁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전통과 현대 넘나든 근대 서화가들의 붓

    전통과 현대 넘나든 근대 서화가들의 붓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던 혼돈의 시대에 근대 서화가들이 남긴 유산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된다. 16일 개막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올해 첫 특별전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는 근대 화단을 이끌었던 화가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의 100주기를 맞아 마련한 전시다. 안중식을 비롯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대에 화단을 이끌었던 근대 서화가들과 안중식 사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과정을 아우른다. 서예와 산수·인물·화조도에 두루 능했던 안중식은 1880~1890년대 중국과 일본에서 머무르다 1901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제작에 함께 참여한 소림(小琳) 조석진(1853~1920)과 함께 국내 화단을 이끌면서 191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안중식의 화려한 청록산수화나 근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명절지도는 당시 젊은 서화가들에게 계승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악산과 경복궁을 묘사한 ‘백악춘효’, 전남 영광의 풍경을 현장감 있게 그려낸 ‘영광풍경’, 녹색과 분홍색으로 화려하게 무릉도원을 나타낸 ‘도원행주’ 등 안중식의 대표작과 근대 서화가들이 남긴 그림, 글씨, 사진, 삽화 등 작품 100여건이 소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뿐만 아니라 삼성미술관 리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안중식의 걸작을 비롯해 일본 사노시 향토박물관의 소장품인 김옥균 친필 글씨도 공개된다. 전시는 오는 6월 2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이어진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유족·잠수사 등 100권 구술집… 76명 참여 시집

    유족·잠수사 등 100권 구술집… 76명 참여 시집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아 출판계가 추모 저작물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피해자 가족과 잠수사 등의 생생한 목소리를 100권으로 묶은 구술집을 비롯해 유명 시인과 손글씨 화가 76명이 참여한 추모 시집도 나왔다. 세월호 참사를 기록해온 민간단체 연합 4·16기억저장소의 구술 증언록 ‘그날을 말하다’(한울)는 무려 100권에 이른다. 1명당 1권의 책으로 피해자 가족 88권, 잠수사 4권, 동거차도 어민 2권, 유가족 공동체 단체 6권으로 구성했다. 피해자 가족 구술집 30권을 우선 16일 출간하고 나머지를 이어 낸다. 구술집은 2015년 6월부터 4년 동안 진행한 결과물이다. 공통 질문지를 사용해 매회 2시간씩 3회에 걸쳐 음성 녹음과 영상 촬영을 병행했다.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창비)는 미류, 박희정 등 작가 5명이 희생자 유가족 53명과 생존자 가족 4명을 6개월 가까이 만나면서 정리한 책이다. 참사 이후 달라진 피해자 가족의 변화를 따라간다. 4·16연대 공동대표 박래군, 엄기호 교수 등이 각각 세월호를 둘러싼 한국사회 움직임을 사회운동 관점에서 해석한 글을 덧붙였다. 김기택, 나희덕, 백무산, 신경림, 함민복 등 38명의 시인과 손글씨 화가 38명이 참여한 ‘언제까지고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걷는사람)는 시인들이 추모 시를 쓰고, 화가들이 시의 한 구절을 붓글씨로 적어 나란히 수록했다. 선장 출신인 오선덕 작가가 쓴 ‘더 세월’(이야기마을)은 기록물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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