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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한국 세계평화작가,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친필 현판휘호 제작

    한한국 세계평화작가,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친필 현판휘호 제작

    한한국 세계평화작가가 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현판 친필 휘호를 제작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김홍걸 국회의원실에서 공개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번 현판 휘호는 가로 2m 30cm, 세로 50cm 크기 대형한지에 김대중의 ‘대’자 (ㅐ)는 서로 손을 잡고 화합, 화해하고 있는 듯한 평화적인 서체느낌을 형상화해 붓글씨로 썼다. 기념사업회 현판은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가인 한석봉의 후예이며, UN세계평화지도 작가로도 국내외 주목을 받고 있는 연변대 예술대학 한한국 석좌교수의 친필휘호로 제작됐다. 김홍걸 의원은 “기념사업회의 현판 휘호작품을 만들어준 한한국 세계평화작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며, “현판 휘호작품에 담긴 의미처럼 여러분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기념사업회가 되도록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 작가는 “김대중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2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에 두 분의 정신과 뜻이 계승되길 바라는 의미에서 국민 모두에게 희망과 평화를 주는 기념사업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현판 휘호 작품은 오는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국난극복 함께하는 대한민국 ‘2020 세계평화작가 한한국 국회특별전’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다. 한 작가는 세계유일 세계평화지도 작가로 유엔 22개국 대표부에 기증해 전시돼 있어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는 26년에 걸쳐 6종의 한글서체를 개발해 수백만 자의 한글 세필 붓글씨로 세계 39개국의 ‘세계평화지도’ 작품 등을 제작 발표해 ‘세계최고기록인증서’를 받았다. 한편 한 작가는 한글로 5년간에 걸쳐 수 만자로 제작한 ‘한반도 평화지도’를 북한에 전달해 북한 문화성으로부터 감사서한을 받는 등 ‘세계평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친 점을 인정받아 통일부장관 표창 등 70여 차례나 수상한 바 있다. 더불어 경기도청에서 가장 명예롭고 가장 높은 상인 제4회 경기도를 빛낸 자랑스러운 도민상 수상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대한철인3종협회 강등 면하자, 고 최숙현 선수 아버지 “휴” 안도의 한숨

    대한철인3종협회 강등 면하자, 고 최숙현 선수 아버지 “휴” 안도의 한숨

    故 최숙현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선수 사망 사건 이후 대한체육회가 이사회를 열고 대한철인3종협회를 관리단체로 지정했다. 대한체육회는 29일 오전 10시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제36차 이사회를 열고 긴급 안건으로 대한철인3종협회를 관리 단체로 지정하는 안건을 심의했다. 대한철인3종협회 기존 임원은 모두 해임하고 대한체육회가 구성하는 관리위원회가 대의원·이사회 등 협회 실무를 운영한다. 대한체육회는 이날 대한철인3종협회를 관리단체로 지정하거나 준회원 가맹단체로 강등하거나 회원단체에서 제명하는 안도 선택지로 함께 놓고 심의했다. 이 경우 체육회 인정단체인 대한철인3종협회가 준가맹단체로 강등되면 인건비, 경기력 향상지원금이 크게 줄어들며 그 피해가 선수들에게 갈 가능성이 컸다.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고 최숙현 선수의 아버지 최영희 씨, 경주시청 가해자들로부터 피해를 당한 선수들과 부모들, 전국 각지에서 훈련하고 있는 실업팀, 동호인 등 30여명은 이날 오전 8시쯤 이사회가 열리는 올림팍파크텔 앞에 모여 “살려달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선수들은 “운동할 기반이 사라져 당황스럽다. 최숙현 선수의 죽음, 국회에서 피해 선수들이 용기를 내서 증언한 의미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며 “피해를 입은 선수들을 두 번 죽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2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도 김예지 미래통합당 의원이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대한철인3종협회가 준가맹단체로 강등될 때 트라이애슬론 선수들이 받을 2차 피해를 우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박석원 철인3종협회 회장이 사퇴한 뒤 회장직무대행을 맡고 있던 오장환 부회장은 이날 이사회에 소명 자료를 제출하기 전 선수들을 만나 “동호인이자 선배로서 미안하다”고 말했고, 이기흥 대한체육회장도 최 선수의 아버지 최영희 씨를 만나 악수를 나눴다. 대한체육회는 이사회 시작에 앞서 이 회장이 사과하는 모습과 큰 글씨로 ‘통렬하게 반성하겠다’는 자막이 담긴 영상을 틀었다.이사회가 끝난 뒤 이 회장은 “철인3종협회를 체육회 관리 단체로 지정하기로 했다. 고 최숙현 선수 사안으로 인해 (폭행 사건 등의) 책임 소재를 더 분명히 하자는 의미”라며 “선수에게 2차 피해가 있을 수 있서 관리 단체로 지정해 철인3종협회 내부의 문제점을 소상히 살피고 정비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이 회장은 “준가맹단체가 되면 선수들이 여러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선수들의 진로 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고심했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대한체육회를 자성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올해가 대한체육회 100주년이다. 조직 문화를 바꿔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겠다”며 체육회가 자체적으로 내놓을 엘리트 체육 폭력 방지 대책에 대해서는 “논의하고 있다. 기다려 달라”고 답했다. 이사회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선수들과 부모들은 “준가맹단체로의 강등이 불발됐다”는 결과를 듣고 “다행”이라며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송파강 일부 석촌호수·새벽배송 원조 송파장… 원래 강북에 속했대요

    송파강 일부 석촌호수·새벽배송 원조 송파장… 원래 강북에 속했대요

    같은 길을 걸어도 누구에게나, 언제나 같은 세상은 아니다. 서울의 과거를 찾아 색다른 미래를 바라보게 만들어 주는 서울미래유산 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그 말이 실감 나게 다가온다. 몰랐던 역사를 알고 나니 같은 거리도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9회 ‘잠실의 추억’ 편이 지난 25일 잠실 일대에서 진행됐다. 장마철 비구름이 잠시 숨을 고르는지 신기하게도 해가 반짝하고 맑은 바람이 불어 걷기 좋은 날이었다. 이날 답사의 출발지점인 잠실 지역은 지상 123층, 높이 554.5m로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인 롯데월드타워를 비롯해 초고층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서울의 마천루를 상징한다. 그런데 잠실의 현재 지형이 불과 반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예전의 그림과 사진 자료 등 물증들을 보고 또 봐도 참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이다. 이 지역은 원래 뚝섬과 연결된 강북에 속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잠실 쪽 한강은 ‘잠실도’라는 섬이었고, 그 섬을 에워싸며 한강의 샛강인 신천강과 송파강이 흘렀다.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시민들의 쉼터가 된 석촌호수는 송파강의 일부였다.‘잠실’이라는 지명은 조선 초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잠실도회가 설치돼 있던 데서 유래한다. 1930년대만 해도 잠실섬에는 온 섬에 뽕나무가 무성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채소밭이 됐다가 1971년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으로 물막이 공사를 하면서 육지로 변했다. 이때 송파강의 일부가 남고, 그 유로가 바뀌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가 석촌호수다.면적 21만 7850㎡, 평균 수심 4.5m 깊이의 호수는 송파대로를 기준으로 동서로 같은 모양의 동호와 서호로 나뉘었다. 1981년 호수 주변에 산책로와 쉼터 등 공원이 조성됐다. 동호는 새벽 조깅코스와 주변 시민들의 휴식처, 산책로로 이용되고 서호에는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와 서울놀이마당이 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호숫가를 산책하는 가족, 건강 달리기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도심공원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 준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됐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바로 이를 두고 한 얘기일 것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린 ‘송파진’을 보면 사람들이 모래사장에서 강 건너편 송파진을 바라보고 있다. 저 멀리 남한산성도 보인다. 나루터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고, 나룻배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건너고 있다. 그림 속 유유자적한 한강이 지금의 석촌호수가 된 것이다. 잠실역 3번 출구에 서서 바라보면 예전엔 그 풍경일 테지만 저 멀리 보이는 산 말고는 그림 속 송파진을 상상하기 어렵다. 눈앞에는 서울미래유산 석촌호수가 있을 뿐이다.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걷다 보면 피할 길 없는 치욕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삼전도비(三田渡碑·사적 제101호)다. 삼전도는 1439년(세종 21년) 신설된 나루터로 한강나루, 노들나루와 함께 경강삼진(京江三津)의 하나였다. 원래 삼밭나루로 불렸던 삼전도는 한양에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고 영남로를 지나는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교통의 요지였다. 1636년 12월 청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거하다가 결국 청나라 군대가 머물던 한강가의 나루터인 삼전도로 나와 항복의식을 행했다. 항복의 조건은 청과 조선이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내고, 통혼하며,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등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들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 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적은 비석을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다. 인조 17년 세운 삼전도비는 제목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비석 앞면의 왼쪽은 몽골글자, 오른쪽은 만주글자, 뒷면은 한자로 쓰였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비의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침략국 황제를 칭송하는 비문의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임금의 명에 의해 글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백헌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게 천추의 한이라며 피를 토하듯 괴로워했다고 한다. 높이 3.95m, 폭 1.4m의 한 덩어리로 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비석을 매일 바라봤을 백성들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삼전도비의 수난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 임금이 항복했던 나루터인 삼전도에 비석을 세웠지만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이 지배권을 상실하자 더는 굴욕적인 비석을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며 사람들은 이 비석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 민족의 굴욕을 상기시키기 위해 건져다 다시 제자리에 세웠다. 해방 후 주민들은 청나라가 만들게 하고 일본이 도로 세운 치욕적인 비석을 나라를 되찾은 마당에 그냥 둘 이유가 없다며 땅속에 묻어 버렸다. 1963년 홍수로 삼전도비가 드러나자 사적으로 지정하고 석촌동으로 옮겼으며 1981년 문화재 명칭을 ‘삼전도비’로 바꿨다. 석촌호수 주변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은 2010년이다.삼전도가 조선 전기에 교통의 요지로 역할을 했지만 조선 후기 들어서는 송파나루가 더 중요해진다. 송파나루는 한양에서 강원도, 광주, 이천으로 가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다. 서울 외곽을 지키는 송파진(松坡鎭)을 설치할 정도로 중요한 이곳은 사람의 왕래뿐만 아니라 한강을 타고 물자의 이동도 활발했던 곳이다. 궁궐이나 집을 짓는 데 사용되는 굵고 튼튼한 나무들이 강원도에서부터 뗏목으로 송파나루까지 왔다. 송파나루 옆에 있는 송파장은 조선 후기 전국 15대 향시에 꼽힐 정도로 번성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한양 내에 있던 시전을 위협할 정도였다. 서울 주변의 일반 상인들이 시전 상인들의 독점을 피해 삼남지방이나 관동지방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을 이곳에서 미리 사들여 많은 이익을 남기는 도가의 근거지가 됐기 때문이었다. 전국의 산해진미가 모이는 송파장에서는 우시장이 특히 유명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즐겼다는 ‘효종갱’은 송파장에서 그날 잡은 소의 고기와 삼남에서 올라온 전복 등 해산물, 각종 채소를 넣어 끓인 해장국이다. 밤새 푹 끓인 효종갱을 독에 담아 식지 않도록 명주에 싸서 품에 안은 채 말을 타고 달려 사대문이 여는 시간에 맞춰 당도한 뒤 주문한 사대부 집에 배달했다고 하니 이게 바로 새벽 배송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송파장에서는 한양과 경기의 유명한 연희자들을 초청해 큰 규모의 산대놀이를 공연하곤 했다.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는 서울놀이마당 전수회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루터 기능은 1960년대까지 뚝섬과 송파를 잇는 정기선이 운항돼 명맥을 유지하다가 강남 개발과 샛강 매립으로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석촌호수 동호 남단 송파대로 쪽에 ‘송파나루터’가 새겨진 표석으로 남겼다. 번성했던 송파장과 관련해 경기도 암행어사 이건창의 활약이 전해 오고 있다.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활동하던 시절 송파에 들러 신분을 속인 채 장터의 장사꾼들을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듣고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가 떠나고 난 뒤 이건창의 신분을 알게 된 상인들이 그의 공덕과 행적을 기려 1883년 5월 장터 입구에 비석 ‘이건창영세불망비’를 세웠다. 비석은 을축년(1925년) 홍수로 유실됐다가 1979년 발견돼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 그 옆에는 을축년대홍수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을축년 대홍수는 1925년 7월 16일부터 3일간 계속돼 수도권 지역에 300~500㎜의 많은 비를 뿌렸다. 이 폭우로 한강과 임진강이 범람해 647명의 사망자와 당시 조선총독부 예산의 58%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냈다.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은 한강변의 이촌동, 뚝섬, 송파, 잠실, 신천리, 풍납동 일대였다. 송파나루터 일대는 특히 피해가 극심해 송파장터 마을이 다 떠내려가고 마을 주민 전체가 지금의 송파동 일대로 이주했다. 수마의 무서움을 체험한 송파 나루터 주민들은 홍수 이듬해에 홍수 피해를 잊지 말고 대비하자는 의미로 기념비를 세웠다. 가락로에 있는 석촌동 고분군은 가락동·방이동 무덤과 함께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조사가 실시됐으나 270여개에 이르는 돌무덤은 이미 원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 가장 큰 규모의 기단식 돌무지무덤인 3호분이 그나마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었으나 1983년 절반이 잘려 나가는 등 보존과는 거리가 멀었다. 뒤늦게나마 역사적 가치를 깨닫고 발굴 작업이 이뤄지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잠실과 송파나루 길 답사를 마무리한 곳은 2013년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된 가락시장이다. 을축년 대홍수로 가락동으로 옮겨간 옛 송파시장의 의미를 되살리는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서는 수산, 축산, 청과 등 전국 최고의 식재료가 거래된다. 특히 싱싱한 수산물이 자랑이다. 펄펄 뛰는 참돔을 회로 떠서 먹으니 쫄깃한 식감이 지극히 훌륭하다.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삼전도비를 보며 찝찝했던 기분도 어느새 사라지고 입안에는 진한 바다향이 감돈다. 글 함혜리 칼럼니스트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10회 삼청동 ●출발 일시 : 8월 1일 오전 10시 출발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이용수 할머니에 “냄새 난다” 배후설 제기 김어준 경찰 조사(종합)

    이용수 할머니에 “냄새 난다” 배후설 제기 김어준 경찰 조사(종합)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출신인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대한 각종 문제를 제기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2차 기자회견 직후 “냄새가 난다”며 대필 의혹 등 ‘배후설’을 제기한 방송인 김어준씨가 경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김씨는 ‘아직도 이용수 할머니에게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묻자 아무런 대답 없이 경찰서를 빠져나갔다. 金 “회견문 이 할머니가 안 쓴 게 명백”이 할머니 “내가 치매냐. 거든 사람 없었다” 사준모 “형법상 명예훼손” 김씨 고발 서울 마포경찰서는 27일 오후 2시부터 김씨를 피고발인 신분으로 불러 3시간가량 조사했다. 김씨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 할머니의 2차 기자회견 다음날인 5월 26일 자신이 진행하는 tbs 라디오 프로그램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할머니가 이야기한 것과 최용상 가자인권평화당 대표의 주장이 비슷하다”, “기자회견문을 읽어보면 이 할머니가 직접 쓴 게 아닌 것이 명백해 보인다.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할머니는 이틀 뒤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나는 백 번 천 번 얘기해도 저 혼자 밖에 없다”면서 “내가 바보냐. 내가 치매냐. 누구도 거드는 사람이 없었다”며 김씨의 배후설을 반박했다. 이 할머니는 “내가 썼는데 글씨가 꾸불꾸불해 수양딸에게 이걸 보고 그대로 써달라 했다”고 강조했다. 이 할머니의 수양딸 곽모씨도 지난 5월 28일 자신이 이 할머니의 구술을 글로 정리했다면서 “오만한 생각”이라고 강하게 반박했었다. 이후 사법시험준비생모임(사준모)은 이러한 김씨의 발언이 정보통신망법 내지는 형법상의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서울서부지검에 고발장을 냈다. 검찰은 해당 고발 사건을 마포경찰서에 보내 수사 지휘했다.김어준 “집도 없으면서” 방송 발언에 방심위 “문제 없다”…13명 중 10명 민주당 법안 반대자들에 ‘서민 비하 논란’ 방심위 방송자문특별위, 회부 않기로 한편 일명 ‘전·월세 무기한 연장법’(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라디오 방송에서 “집도 없으면서”라고 말해 서민 비하 논란이 제기된 방송인 김어준씨 발언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날 방심위에 따르면 이달 초 열린 방송자문특별위원회는 지난달 사법시험준비생모임이 김씨의 발언과 관련해 제기한 진정서에 대해 이렇게 결정하고 방송심의소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참석자 13명 중 10명이 ‘문제없음’에 동의했다. 앞서 김씨는 지난달 16일 교통방송(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전·월세 무기한 연장법’으로 불리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대화하던 도중 법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집도 없으면서”라고 말하면서 웃어 논란이 됐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Focus人] 영화 ‘똥파리’ 이후 11년, 강단으로 돌아온 양익준 감독

    [Focus人] 영화 ‘똥파리’ 이후 11년, 강단으로 돌아온 양익준 감독

    “가족 안에서 어떤 답답함들이 팽창되고, 그 안에서든 밖에서든 제가 받았던 폭력적인 이미지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데 그런 기억들이 저한테는 연기적인 요소가 되더라고요. 특강이나 강의를 할 때도 배우들의 감정에 제일 우선적으로 있어야 하는 건 ‘분노’라고 얘기해요. 그 분노의 감정을 꺼내는 작업이 끝나면 웃음이나 다른 어떤 건강한 것도 그것으로부터 연결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올해부터 한국영상대(구 공주영상대) 연기과 초빙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는 양익준(45) 감독. 2009년 독립영화 ‘똥파리’로 12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독립영화계의 영원한 스타다. 똥파리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가히 당대의 똥파리 신드롬은 눈부셨다.  모교로 돌아온 그가 똥파리 이후 11년의 공백을 학생들과 함께한 65분짜리 비공식 장편영화, ‘병신들의 향연’으로 채워 지난 9일 시사회까지 마쳤다. 비록 전문 영화 스태프들과의 작업은 아니었지만 본인과 학생 포함 제작인원 8명, 하루 제작비 9만 원, 총 7회 차 촬영치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명색이 감독이고 연출하는 놈인데 교실에서 카메라 실습만 하는 게 자존심도 상했고 학생들과 일주일에 몇 신 씩 써서 한 번 찍어보자고 했죠. 이 친구들이 어떤 아픔들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많은 얘기들을 나누면서 조금씩 시나리오를 쓰면서 찍었죠. 그냥 수업 실습으로 시작했는데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이 친구들이 프로듀서, 조감독 1인 3역, 4역까지 했어요. 이렇게 촬영 7회 차 만에 장편 영화가 나왔다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죠.” 틈틈이 예능에도 출연하고, 2017년에는 일본 감독 키시 요시유키의 영화 ‘아, 황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에서도 활발한 연기 활동을 펼치고 있다. 늘 연기와 연출에 대한 본능의 끈을 더 강하게 당기며 살고 있는 양감독을 한국영상대 푸른 잔디밭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Q) 아직도 알아보는 분들 있는지중고등학교 때 제 영화를 본 친구들이 있어요. 그 친구들이 20대 후반이 돼서 알아보기도 해요. 근래는 SBS 불타는 청춘이란 예능에 나왔더니 50~60대 연령대 분들께서 많이 알아보시더라고요. (Q) 연기는 어쩌다 입문하게 됐는지상업고등학교를 나왔어요. 특별한 기술은 없고 펜글씨 자격증 3급 있는 게 전부였죠. 3학년 2학기 때 취업을 나갔는데 아이들 장난감 파는 외판원, 용산전자상가에서 세탁기, 냉장고 배달하는 일 등을 했어요. 아버지가 가구점을 해서 가구배달을 중학교 때부터 했기 때문에 100kg 이상 되는 물건들도 아저씨들이랑 같이 나르고 했죠. 공사현장 막노동은 특별한 이유없이 제 몸을 소진시키는 게 저한테는 굉장히 필요했던 일이었던 거 같아서 했나 봐요. 중학교 때 친구들이 SBS 창사특집 꾸러기 콘테스트에서 춤으로 연말결산 2등을 한 거예요. 부러운 마음에 ‘너희들이 가수를 하니깐 나는 탤런트를 하겠다’라는 말을 친구들에게 했죠. 그렇게 내뱉은 말이 영화나 연기 등을 해나가게 한 거 같아요. 바보 같은 저의 어떤 부족한 공간을 채우고 싶다는 열의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Q) 영화 ‘똥파리’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기타노 다케시가 ‘가족은 누가 보고 있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들이란 얘기를 했거든요’ 피를 나눈 사이들이지만 그 안에는 타인들보다 더 심각한 오류와 갈등 속 환경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 부분들이 서른이 넘어도 빠져나가지 않더라고요. 막말로 뭔가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속 ‘악’이 생겼죠. 그렇다고 제가 누군가를 때려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런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 걸 연기로 해갈하고 싶었는데 연기로는 좀 어려웠던 거 같고 연출로 내가 글을 써서 내 안에 있는 어떤 응어리나 악 같은 것들을 한 번 내놓아보자 했던 것이 똥파리란 영화를 연출하고 연기하게 됐죠.(Q) ‘똥파리’ 완성 후, 가족이란 단어에서 오는 심적 부담이 사라지고 비로소 소통이 생겼다고 했는데어렸을 때부터 앞집, 건넛집, 옆집 다 시끄러웠던 거 같아요. 당시가 전두환, 노태우 시대였는데 시대적인 억눌림이나 꼭두각시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서민들이 영향을 받으면서 어떤 답답함을 뱉을 길이 없다보니깐 그게 가족 안에서 풀어 헤쳐졌던 거 같아요. 그 모순이 저한테도 성장하면서 제일 큰 영향을 끼쳤고 그 힘들고 아픈 부분이 저한테 지금 연기뿐만 아니라 감독이라는 직업을 갖게 만든 아이러니하고 재밌는 상황 같아요. (Q) 각 종 국제영화제 38여 개의 상을 휩쓸었는데이 영화가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줄도 몰랐죠. 하여튼 엄청 많이 보셨어요. 공식적으로는 12만 명 넘게 보셨는데 비공식적으로는 주변에서 똥파리란 영화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안 본 사람은 없다 싶을 정도로 온라인 쪽으로 많이 보셨죠. 새로운 배우들도 여럿 등장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환영해 주셨어요. 가족이란 테마는 전 세계적이잖아요. 해외 영화제에서도 영화가 끝난 후에 저한테 다가오셔서 꼭 끌어안아 주셨던 분들도 계셨죠. 정말 많은 나라들의 영화제에 갔었고 그곳에서 가족에 대한 많은 얘기들을 나눴던 거 같아요.(Q) 제작사가 돈을 싸들고 찾아왔다는데돈을 싸들고 온 적은 없고요. 시나리오는 3~4백 편 받았어요. 엄청난 작업을 하자고 제의를 받기도 했었죠. 근데 똥파리 딱 끝내고 나서 2009년 개봉 후 하순부터 정신이 나가더라고요. 공황장애가 온 거죠. 인간이 쓸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하니깐 머리의 퓨즈가 딱 끊어지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제작비 1000억 원에 연출비 100억 원을 줘도 못하겠다고 하고 지금까지 10년 정도 이렇게 있었죠. 예능 출연 요청도 엄청 왔어요. SBS 정글의 법칙, tnN 더 지니어스, 별게 다 들어왔는데 못하겠더라고요. 하지만 틈틈이 일본 영화에는 3~4편 정도 출연했어요. 연출 제의받은 작품도 4~6개 되는데 거절했더니 대신 연기해달라고 요청해서 연기하러 해외로 나갈 예정입니다.(Q)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했는지CJ에서 1500만 원, 영화진흥위원회에서 3500만 원, 아버지한테 3500만 원, 요즘 핫하게 뜨고 있는 오정세란 배우한테 350만 원 그리고 친구들한테 얼마씩 모아서 만들었죠. 똥파리 여자 주인공 집이 제가 7년간 살던 집인데 돈이 정말 없어서 그 집 전세보증금 빼서 찍었죠. 마지막엔 정말 돈을 구할 데가 없어서 촬영 35회 차(총50회 차)때 모든 스태프들을 내보냈어요. 나머지 15회 차는 친척들, 친구들 불러 스태프도 하고 연기도 하게 하면서 마무리했죠. 지원받은 5천만 원 제외하고 1억 3천만 원 빌려 준 사람 이름을 집 벽에다 1~2년 적어 놨죠. 극장 돈이 좀 늦게 들어왔지만 순차적으로 하나씩 갚으면서 지웠죠. 수익이 크지 않아서 이자를 주지는 못했어요. (Q) 수중에 있던 15만 원으로 눈물젖은 삼겹살 파티돈이 없어 더 이상 촬영할 수 없게 됐어요. 35회 차 찍기 전날 팀을 해산하려고 했죠. 당시 PD하고 저하고 끌어 모은 돈이 15~20만 원 정도 왰어요. 그날 촬영 끝나고 값싼 삼겹살 먹으면서 ‘자, 오늘부터 여러분 삶의 1순위는 똥파리가 아닙니다. 다시 여러분들 삶의 1순위로 돌아가십시오’라고. 조감독은 펑펑 울고, 화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냥 슬펐어요. (Q) 당시의 풋풋했던 스태프들에 대한 기억은폭력적인 장면이 많이 나온 영화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촬영장 분위기가 어두운 건 아니었어요. 저도 피에로 기질이 있어서 ‘텔미텔미’하면서 춤도 추고 그랬죠. 연기는 연기일 뿐이니깐요. 당시 유행했던 싸이월드에 제가 같이 영화할 사람 찾는다는 글을 올리자, 제 팬이었던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같이 도와주기도 했어요. 한 번은 가짜 망치를 만들어 오라고 요청했더니, 사비 15만 원을 들여 강도 80%의 진짜 망치를 만들어 온 거예요. 예상치 못한 거였지만 너무나 고마웠죠. 이런 얘기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등신 같고, 없는 놈들끼리 만드는 건데 화날 일도 짜증 날 일도 없었죠. 연기하면서 현장에서 배웠던 건 따뜻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영화도 결국은 인간이 만드는 거니깐요. 당시 영화에 참여했던 모든 스태프들, 아직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Q) 빚쟁이 짜장면 남자로 나왔던 오정세, 어떤 사람인지고속도로도 길이 나뉘잖아요. 같은 고속도로지만 오정세가 한쪽 길로 열심히 가고 있다면 저는 다른 한쪽 길로 열심히 가고 있는 거죠. 한동안은 엄청 많이 만났었죠. 서로의 길을 가다 결국 다시 만날 거 같아요. 어쨌든 도로는 연결돼 있을테니깐요. 사실 오정세는 똥파리 전에 43분짜리 ‘바라만 본다’(2005)라는 제 영화에 출연했어요. 제가 너무 존경할 정도로 훌륭한 배우예요. 이 친구는 자신의 연기를 뛰어넘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노력하는 친구예요. 영화 준비할 때, 항상 도서실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연구할 정도로 제가 본 배우 중에 제일 노력을 많이 하는 친구죠. 햄버거 CF도 나와서 기분이 좋습니다. (Q) <똥파리>에서 본인(상훈)을 죽인 여주인공의 남동생은 영화 <박화영>의 이환 감독이환 감독은 독립영화를 만드는 감독들과 교류를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은 거 같아요. 배우에게 어떤 캐릭터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든가 하면 연기적인 한계를 느끼거든요. 그러면서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연출이에요. 이완 감독도 그런 수순을 밟았다고 보고 훌륭한 감독이라고 생각해요. 두 번째 영화도 이미 끝났다고 들었어요. 코로나19 사태로 개봉이 좀 늦어지는 거 같은데, 에너지가 많이 있는 만큼 앞으로 영화를 계속 잘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어요.(Q) ‘불타는 청춘’에선 보인 끼는 어디서 나온 건지예능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원래 그렇게 놀아요. 빨리 친해지려면 제가 장난도 많이 쳐야하고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야지 빨리 친해질 수 있잖아요. 가끔씩 이렇게 출연하면 시골 바람도 쐬고 누나 형들하고 같이 밥도 해먹고 그러는 게 마음이 좀 편안한 부분도 있죠. (Q) 학생들에게 연기에 있어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면‘액션’하는 순간, 카메라 밖의 세상과 카메라 안의 세상이 분리가 되고 스태프들은 절대 그 차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죠. 카메라는 거짓도 빨아들이고 진심도 바로 빨아들이거든요. 마치 거울처럼 말이죠. 사는 게 거짓이면 거짓말하는 사람인 거잖아요. 연기를 하면서도 거짓말하지 말자. 진심으로 하자. 그게 제 모토죠. (Q) 자신의 DNA를 후세에 남기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 있는데과거엔 저의 DNA를 갖고 있는 다음 세대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장가가고 싶어요. 상황이 되면 아이도 낳고 싶고. 한 번은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 같아요. (Q) 나에게 꿈이란초등학교 때 대통령, 박사가 되고 싶었었던 것 외엔 꿈이 거의 없었어요. 똥파리라는 영화가 혹시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의 꿈은 아니었을까, 이 녀석이 이렇게 현실화됐는데 그렇다면 내 꿈은 이뤄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요. 꿈을 구체적으로 갖느냐 안 갖느냐는 각자의 판단이고 개인적으론 꼭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글 박홍규 기자 gophk@seoul.co.kr 영상 박홍규, 문성호, 김민지 기자 sungho@seoul.co.kr
  • [한 컷 세상] 그 마음, 참 예쁘다

    [한 컷 세상] 그 마음, 참 예쁘다

    봄, 꽃, 달, 해, 별, 사랑, 친구, 가족, 선물, 축하, 바다, 행복. 그리고 ´참 예쁘다´. 유린원광종합사회복지관의 한글 수업에 참석한 한 어르신의 공책 뒤 서투른 글씨체로 적힌 단어들. 한글을 배우면 제일 먼저 쓰고 싶었던 단어였을까. 어르신의 만학을 응원한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한 컷 세상] 그 마음, 참 예쁘다

    [한 컷 세상] 그 마음, 참 예쁘다

    봄, 꽃, 달, 해, 별, 사랑, 친구, 가족, 선물, 축하, 바다, 행복. 그리고 ´참 예쁘다´. 유린원광종합사회복지관의 한글 수업에 참석한 한 어르신의 공책 뒤 서투른 글씨체로 적힌 단어들. 한글을 배우면 제일 먼저 쓰고 싶었던 단어였을까. 어르신의 만학을 응원한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시조시인 김상옥 유품 200여점, 유족 등이 통영시에 기증

    시조시인 김상옥 유품 200여점, 유족 등이 통영시에 기증

    경남 통영출신 시조시인인 초정 김상옥(1920∼2004)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유품 200여점이 고향 통영시로 돌아온다. 통영시는 21일 김상옥 선생 장녀인 김훈정씨 부부가 이날 통영시를 방문해 이들 부부를 비롯한 유족 등이 소유하고 있던 김상옥 선생의 유품과 서화를 포함한 예술작품 등 200여점을 시에 기증했다고 밝혔다.김씨 부부는 유족과 김상옥 선생의 제자인 고(故) 김재승 박사의 유족이 소장한 유품 등을 조건없이 모두 통영시에 내놨다. 김훈정씨는 “고향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따라 유품과 작품들을 고향인 통영시와 통영시민께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며 “유품 기증이 아버지와 아버지의 문학, 예술을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강석주 통영시장은 “유족 뜻을 받들어 유품을 잘 보존하고 앞으로 초정 기념관이 건립되면 전시하겠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통영시는 오는 8월 5일과 21일 두차례로 나누어 유품을 인수한다고 밝혔다.유족 등이 기증한 유품은 김상옥 선생의 시집·시조집·동시집·산문집 초판본,서화전 도록, 친필편지, 육필 원고, 통영 출신 예술인 윤이상·박경리선생이 써 보낸 친필편지, 사진 자료, 직접 쓴 글씨와 그림, 직접 만든 도자기 등 종류가 다양하다. 통영시 항남동에서 태어난 김상옥 선생은 1939년 시조 ‘봉선화’가 ‘문장’(文章)지에 가람 이병기의 추천을 받고, 동아일보 시조 공모에 ‘낙엽’(落葉)이 당선돼 등단했다. 그는 삼절(三絶)로 불릴만큼 시 창작 외에 붓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해방 이후에는 윤이상과 함께 동아대학교, 욕지중학교 등 학교 교가 지어주기 운동을 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20여년간 마산고, 경남여고, 통영중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박재삼, 이제하, 김병총, 송상옥 등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통영 시내에는 그가 창작한 ‘봉선화’ 시비가 있고 그를 기념하는 초정거리, 초정좌상 등이 있다. 해마다 김상옥 시조문학상도 시상한다. 통영시는 2008년 김상옥 선생 생가가 있는 항남 1번가 골목을 초정거리로 명명하고, 생가를 구입해 기념관으로 활용하는 계획을 세워 추진한다. 통영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병원에서만 86일, 내가 코로나19에서 살아돌아오기까지

    병원에서만 86일, 내가 코로나19에서 살아돌아오기까지

    바박 코스로샤히(61)가 코로나19 증상으로 입원한 지난 3월 22일(이하 현지시간)은 영국의 어머니 날이었다. 그로부터 86일 뒤 퇴원했다. 그가 입원한 동안 영국에서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사람은 4만명이 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들과 달리 오랜 투병 끝에 퇴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BBC가 석달 가까이를 돌아본 그의 육필 체험담을 실어 눈길을 끌었다. 솔직히 난 어떻게 코로나19에 감염됐는지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매우 조심했다. 손을 열심히 씻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도 않고 늘 내 차를 탔다. 그러나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는 알고 있다. 그달의 13일은 정말 13일의 금요일이었다. 내 파트너가 날 보러 왔는데 난 조금 뭔가 잘못 됐다고 느끼게 됐다. 돌아보면 약간의 열이 났는데 체온이 낮아서겠거니 생각했다. 그냥 느낌 뿐인가 했다. 늘 코로나를 의식했기 때문에 파트너와의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다음날 온도계로 체온을 쟀더니 섭씨 38.5도가 나왔다. “뭔가 심각해지는구나” 싶었다. 상담 전화를 걸었더니 앰뷸런스를 부르기 전에 일주일만 버텨보라고 했다. 그 시간에 열이 펄펄 끓고 몸은 더 나빠졌다. 이제 방에서 방으로 옮겨가는 일조차 힘겨워졌고 아침에 뭘 먹으러 주방에 가는 일조차 힘들어졌다. 죽을 맛이었고 결국 한 친구가 999에 전화를 해줬다. 웨스트 미들섹스 대학병원에 입원했는데 3월 22일이었다. 새벽 4시에 날 데리러 온 것이 놀라웠다. 입원하자마자 간호사가 닭 요리를 건넸는데 먹질 못했다. 그 방과 마지막 음식만 기억나곤 나머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취되기 전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문자를 보냈으며 의사와 얘기도 했다는데 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3주 반이 지난 뒤 깨어났는데 중환자실이었다. 마취를 한 것은 기관을 절개해 호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산소 치료를 받았다. 왼쪽 폐가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깨어난 뒤에도 내가 왜 그곳에 있는지 질문할 수조차 없었다. 그냥 거기 있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내 안경이 어디 있는지 궁금했지만 말할 수가 없었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간호사들이 내게 종이 뭉치를 건네며 뭐라도 써보라고 했다. 물을 달라고 적기 시작했는데 내 글씨는 삐뚤빼뚤해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글자판을 건네며 글자를 짚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W를 짚으면 그 옆 글자가 짚혔다. 하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짚을 수가 없었다. 며칠 뒤에야 글씨를 쓸 수 있었다. 물리치료사가 중환자실에서 내게 “걸어서 이 병원을 나갈 거야”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어 보라고 했다. 몸 움직임을 늘리는 것이 재활의 초점이었다. 처음에 의료진은 날 보고 침대 끝에 앉아보라고 했다. 그 뒤는 일어나 걸어서 의자에 앉아보라고 했다. 결국 난 보행기에 의지하고 산소를 제공받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잘하시네요. 당신은 마라톤을 하신 거나 진배 없어요”라고 격려해줬다. 난 “내 나이 예순하나야. 내가 왜 마라톤을 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농으로 대꾸해줬다. 그렇게 30일이 지나자 물리치료사가 일어서보라고 했는데 일어설 수가 없었다. 더 나아지긴 할 수 있을까 혼잣말을 했다. 호흡이 가빴다. 기계에 딱 달라 붙어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설 수 있었다. 물리치료사는 그보라고 했다.그 때부터 목표가 생겼다. 걸어서 이 병원을 나간다는 것이었다. 치료사가 그렇게 말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입원한 지) 약 50일 뒤에 난 일반병동으로 옮겨 퇴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며칠 뒤 다시 오한이 들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오한이 인다며 간호사를 불렀다. 몇 초 만에 네 명의 의사가 보러 왔고, 30분 만에 내 병상을 밀고 정밀 진단을 받게 했는데 감염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오래 입원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목 근육들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었다. 의료진은 내개 근육을 강화하는 훈련법을 일러주고 내가 얼마나 해내는지 테스트를 했다. 물을 여러 번 마시게 해 그때마다 목 근육을 강화하게 했다. 결국 의료진은 내 기도 삽입관을 빼도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말은 어떤 줄도, 튜브도 붙이지 않은 자유인으로 집에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감동 받은 것은 딱 둘, 국민건강서비스(NHS)와 우리 가족이었다. NHS의 도움이 없었다면 난 여기 있지 못했다. 그들은 정말 대단했다. 우리는 늘 불평해왔는데 필요한 일을 했고, 어떤 지출도 낭비되지 않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내 목숨을 구했다. 퇴원하는 기분을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가 없다. 나무들이 황량했을 때 입원했는데 퇴원할 때는 신록이 무성하다. 정말 대단한 감정이다. 물론 지금 난 서서히 회복하는 단계에 있다. 난 직원들에게 금방 돌아올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반쯤 은퇴했다고 보고 있다. 바이러스가 내 몸에서 나간 것은 분명하지만 입원했던 후유증은 한동안 날 힘들게 할 것이다. 짧은 거리를 걸어도 호흡이 가팔라지고 퇴원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아주 부드러운 음식만 먹고 있다. 집에 온 뒤 2~3㎏ 체중이 불었다. 하지만 진짜 이란식 케밥을 맛있게 먹고 싶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추사와 다산, 김환기가 숨쉬는 곳… 현세의 ‘무릉도원’속으로

    추사와 다산, 김환기가 숨쉬는 곳… 현세의 ‘무릉도원’속으로

    한양도성 순성이 도성 안팎으로 확대될 무렵 많은 사람들이 찾은 곳이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으로 둘러싸인 부암동이다. 인왕산 북벽 기슭 청계동천과 북악산 북벽 기슭 백석동천은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 동천복지(洞天福地)를 꿈꾼 곳이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다. 어지러운 세상 잠시 잊고 꿈꾸듯 무릉도원을 걷는다.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고 상명대 앞 삼거리에서 내렸다. 버스 정류장 앞 건널목을 지나면 석파랑(石坡廊)이 나온다. 대원군 이하응의 호 ‘석파’를 딴 이름이다. 1958년 소전 손재형이 석파정에 있던 일곱채 건물 중에서 별당 석파랑만을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 1819년 대과에 급제한 추사 김정희는 아버지 유당 김노경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에 나선다. 1820년 1월 추사는 보소재 석묵서루에서 담계 옹방강(1733~1818)을 만난다. 스승 초정 박제가가 세 차례 연행하면서 옹방강과 교류했던 것에 비춰 보면 아마도 초정이 만나라고 권고한 듯하다.추사는 청나라 금석학의 대가 담계 옹방강을 깊이 흠모하면서 당호를 보담재(寶覃齋)라고 짓는다. 전국에 있는 비석을 탁본해 첩을 만든다. 원형을 간직한 우리나라와 중국 비석 글씨를 연구한다. 그 과정에서 북한산에 있는 비석이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힌다. 스승 옹방강은 한나라 훈고학과 송나라 성리학을 서로 보완해 경학을 한다.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이다. 추사는 스승을 좇아 성리학과 청나라 고증학을 절충함으로써 북학의 틀을 확고히 하고 개화를 준비한다. 그러나 또 한 번 북청 유배길에 오르면서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진다. 대신 유배지에서 붓 천 자루를 몽당붓을 만들고 벼루를 열 개나 밑창 내고서 추사체를 완성한다. 추사를 찾아 나룻배를 타고 서귀포까지 온 사람이 있다. 제자 이상적이다. 제자 이상적의 절개에 감복한 추사는 자신의 심경을 한 장 그림으로 표현한다. ‘세한도’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집은 김흥근의 부암동 별서 삼계동산정 별당 월천정(三溪洞山亭 別堂 月泉亭), 즉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의 석파정 석파랑(石坡亭 石坡廊)이다. 송백은 석파정 정원수다. 추사와 이상적이다. 서울미래유산인 석파랑의 주인 소전 손재형은 22세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7회나 입선 또는 특선을 한다. 1933년부터 선전 심사위원 연 3회, 광복 후 국전(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연 8회 역임한다. 홍익대 미대 교수를 지냈다. 1944년 미군의 공습이 연일 계속되는 도쿄로 가서 세한도를 되찾아 온다. 세한도에 등장하는 석파정 별당을 옮겨 짓고 석파랑이라 부른다.석파랑에서 다시 도로를 건너 직진하면 도롯가에 멋진 정자, 세검정이 나타난다. 광해군은 어머니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시킨다. 또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배 보내고 사실상 살해한다. 폐모살제(廢母殺第)한 광해의 패륜을 응징하기 위해 1623년 인조반정을 단행한다. 김류·이귀·심기원·김경징 등 반정공신들은 세검정에 모여 반정을 모의한 후 칼을 씻으면서 결의를 다진다. 반정군은 모화관에서 심기원의 병사와 합류한 후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을 점령한다. 광해군은 역모의 기미를 알았지만 적극 대처하지 않았는데 이는 김개시라는 상궁 때문이다. 실록은 상궁 김개시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가 많았다. 춘궁의 옛 시녀로서 왕비를 통하여 나아가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인하여 비방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 실록에서는 보기 드물게 여자의 용모와 잠자리 비방 등을 직접 거론한다. 김개시는 광해의 총애를 받는다. 그런데도 그냥 상궁으로 머물렀다. 세검정에는 남인 다산 정약용의 흔적도 남아 있다. 목멱산(남산) 아래 명례방(명동) 집에서 벗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1791년 신해년 여름 어느 날 다산이 말을 타고 창의문 밖으로 냅다 달린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세검정에 올라 자리를 벌이니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 물이 사납게 들이친다. 그날 다산이 세검정에서 벗들과 노닐었던 기록, ‘유세검정기’에서 세검정을 이렇게 즐기라고 일러 준다. “세검정의 빼어난 풍광은 오직 소낙비에 폭포를 볼 때뿐이다. 그러나 막 비가 내릴 때는 사람들이 옷을 적셔 가며 말에 안장을 얹고 성문 밖으로 나서기를 내켜 하지 않는다. 비가 개고 나면 산골 물도 수그러들어 버린다. 이 때문에 정자가 저편 푸른 숲 사이에 있는데도 성중의 사대부 중에 능히 이 정자의 빼어난 풍광을 다 맛본 자가 드물다.” 세검정에서 하천을 따라 걸어가다가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면 별서 터가 나온다. 그야말로 서울 시내에 있는 보물이다. 별서 터에는 사랑채와 안채 등 두 채 집터와 연못 두 개와 정자 한 개 그리고 우물 등이 있다. 처음 별서정원을 가꾼 사람은 연객 허필(1709~1768)이다. 표암 강세황과 절친했다. 두 사람 다 시서화에 능했기 때문에 연객이 그린 그림에 표암이 시를 짓기도 하고 표암이 그린 그림에 연객이 찬하기도 했다. 연객 허필이 이곳에 별서를 조영했을 때는 그저 소박한 띠집이었다. 사랑채와 안채, 연못과 정자를 조영한 사람은 추사의 생부 유당 김노경이다. 연객과 유당에 이어 이곳 백석동천에 별장을 소유했던 사람은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아들 박종채(1780~1835)다. 한 가지 궁금하다. 1935년까지도 멀쩡하던 연못 정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나?별서 터에서 산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 길가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 각자한 바위가 나온다. 백석동천에서 말하는 백석은 열선도(列仙圖)에 등장하는 신선 백석생(白石生)이 들어가 살았던 백석산(白石山)이다. 백석생은 백석을 삶아 식량 삼아 먹으면서 백석산에서 살았다. 하늘로 오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늘 위 신들의 세계라고 해서 인간세계보다 반드시 즐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돼지 살 돈도 없었던 백석생은 양을 사서 십여 년 길렀다. 많은 돈을 벌어 내단약 금즙(金液)을 사서 먹고 백석산으로 들어갔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보다 오래 사는 것을 더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노불사의 신선이 노니는 동천복지(洞天福地)를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동천이라 했다. 산속 깊은 곳에 있다고 믿었던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를 일컬어 동천복지라 한다. 일반적으로 속세와 격리된 산속 살기 좋은 땅을 뜻한다. 백석과 동천을 서로 엮으면, 백석산 깊은 곳 백석생이 사는 동천복지와 같은 별천지가 된다. 그야말로 신선이 노니는 도교적 이상향, 백석동천이 바로 이곳이다. 백석동천의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커피프린스’를 촬영한 카페가 나온다. 북악산 성곽과 인왕산 성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른쪽 골목길 아래로 돌아들면 환기미술관이다. 김환기는 1913년 2월 27일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태어났다. 김환기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는 광복부터 한국전쟁까지다. 1948년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한다. 서울대 미술학부를 만든 동양미술사학자 근원 김용준과 교유하면서 우리 고미술과 한국미를 새롭게 발견한다. 산 중턱에 걸린 달, 길게 날아가는 학, 매화 긴 가지 등 한결같이 예서를 방불케 한다. 파리 시기를 통해 오히려 한국미를 확신한다. 김환기에게는 기좌도도, 서울도, 파리도 작았다.전환점은 1963년부터 1974년까지 뉴욕 시기다. 파리가 아닌 뉴욕에서 정점을 찍는다. 1969년 김환기는 뉴욕에서 절친 김광섭 시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진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주제로 마지막 시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제목으로 전면점화(全面點畵)를 그린다. 환기미술관에서 김환기 그림을 다시 본다. 김환기의 점화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가득 메운 고구려 사람들이 입은 땡땡이 옷이다. 도교사원 운주사를 가득 메운 석탑과 석상이다. 김광섭의 시를 가득 메운 별이다. 김환기, 그림, 별, 김광섭 그리고 시! 한양성곽 4소문 중 하나로 북소문 창의문을 만든 것은 1396년이다. 임진왜란 때 타고 없는 문루를 1741년 중수하기는 했으나 4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원래 위치를 지키는 문이다. 사람들이 창의문을 기억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이 이 문을 지나 창덕궁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광해군 15년 1623년 세검정에서 결의를 다진 반정군과 능양군(훗날 인조)의 친정군이 합류해 창의문을 깨고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광해는 역모의 상소를 읽었지만 무시했다. 반정군이 창의문 밖에 모여 있다는 밀고까지 받았지만 반정군에 합세한 훈련대장 이흥립의 소극적인 대처로 이 또한 무효였다. 어머니 인목왕후를 폐위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게 반정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광해의 가장 큰 실책은 ‘왕기(王氣)가 있다’는 이유로 동생 정원군(인조의 친부)의 아들 능창군(인조의 동생)을 유배 보낸 것이다. 유배지 강화에서 능창군은 목매 자결한다. 결국 광해가 능창군을 죽인 셈이다.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가만히 있다면 그게 패륜이다. 둘째는 이곳의 유명한 치킨집과 연관시켜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 때문이다. 분명 봉황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닭이라고 한다. 봉황 모가지를 닭 모가지처럼 그리기도 했다. 창의문 밖에서 바라본 부암동 형상이 마치 지네와 같아 지네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지네의 천적인 닭을 길렀다. 그래서 부암동에는 독특한 맛으로 유명한 치킨집이 많다. 글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그 외 부암동 일대의 서울미래유산 세이장 1974년 지어진 주택이며, 건축가 김수근이 직접 살기도 한 건물 체부동 성결교회 벽돌 쌓기 방식으로 1920년대 건립된 교회 서촌 한옥밀집지역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들로 구성된 독특한 경관이 형성돼 있는 마을 통인시장 각 점포의 개성과 이야기를 담은 작품 전시 등 문화와 예술이 함께하는 재래시장 김봉수 작명소 1958년쯤 개업해 같은 지역에서 2대째 가업을 이어 오고 있는 작명소 이상의 집 시인 겸 소설가 이상이 1912년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기거했던 가옥의 터 ●다음 일정 : 제9회 잠실의 추억●출발 일시 : 25일 오전 10시 출발●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여기는 남미] ‘다 훔쳐갔습니다’…도둑들에 안내문 내건 초등학교 사연

    [여기는 남미] ‘다 훔쳐갔습니다’…도둑들에 안내문 내건 초등학교 사연

    남미의 한 시골학교에 내걸린 친절한(?) 안내문이 언론에 소개돼 화제다. 콜롬비아 북중부 산탄데르주의 오카냐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 '라셀바'. 스페인어로 '밀림'이라는 의미의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이 학교는 최근 정문 옆에 손글씨로 쓴 커다란 안내문을 내걸었다. 안내문엔 "이제 훔쳐갈 만한 가치 있는 물건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발 들어오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다. 물건을 훔치려고 애써서 들어가 봤자 헛수고만 할 따름이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는 친절한(?) 내용인 셈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전교 학생이 11명에 불과한 이 시골학교는 최근에만 4번 도둑을 맞았다. 교사 예이니 파체코는 "가장 마지막 도둑이 가져간 건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사용하던 데스크탑 컴퓨터와 태블릿 2대였다"고 말했다. 절도가 반복되면서 참다못해 안내문을 내건 건 바로 이 교사였다. 파체코는 "컴퓨터 등 값이 나가는 물건은 물론 학생들이 사용하는 책과 공책, 교사가 사용하는 교육자료까지 모두 도둑을 맞았다"며 "진짜로 이젠 도둑이 탐낼 만한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도둑이 들면 훔쳐갈 물건을 찾기 위해 기물을 파손하곤 한다"며 "이런 피해라도 막기 위해 안내문을 써서 설치한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콜롬비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막기 위해 봉쇄조치를 발동 중이다. 현장수업이 중단되면서 교사와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긴 학교는 절도범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현지 언론은 "빈 학교를 노리는 도둑이 늘어나고 있다"며 "특히 시골에선 학교들이 완벽한 무방비 상태로 절도에 노출돼 있다"고 보도했다. 파체코는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면 언젠가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냐"며 "그때를 위해서라도 사회가 학교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학교에 안내문이 설치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지역 경찰은 뒤늦게 라셀바 학교 절도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지만 아직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英노팅검 우편배달원이 남긴 메모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英노팅검 우편배달원이 남긴 메모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영국 노팅검에 사는 여교사 엘리자베스 포클링턴은 검정색 현관 문 색깔을 바꿔야 할지, 바꾼다면 어떤 색깔로 바꿀지 결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열흘이 후딱 지나갔다. 그녀는 마음을 못 정한 채 여러 색깔 페인트를 문짝 오른쪽에 조금씩만 칠해봤다. 그러면 마음을 정할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그러고 나서도 쉽게 색깔을 골라내지 못했다. 지난 14일(이하 현지시간) 외출했다 돌아오니 현관 문에 1516년에 설립된 우편 및 택배 회사 ‘로열 메일’의 배달원이 보통 이웃 집에 소포를 전달했다고 알리는 메모를 배달함에 넣어둔 것이 눈에 띄었다고 17일 셀레브리티스 메이저 닷컴과 19일 BBC가 전했다. 그 배달원은 ‘이웃의 누구에게 소포를 맡겼어요’란 미리 인쇄된 문장에 X 표를 친 뒤 전달한 시간과 물품 수 등을 적는 빈칸에 “아래에서 두 번째 녹색이 최고(의 선택으)로 보이네요”라고 손글씨로 적어 두었다.포클링턴은 감명을 받았다. 별것 아닌 일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코로나19로 봉쇄돼 이웃 간에 소통도 쉽지 않은 마당에 배달원이 보여준 인간적 온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데워지는 것 같았다. 해서 트위터에 사진 두 장을 올려 알렸더니 좋아요!가 8만개가 달렸다. 물론 “좋은 취향”이라며 배달원의 조언을 따라야 한다고 강권(?)하는 이도 있었다. 포클링턴은 “그 여성 배달원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녀는 마냥 부끄러워만 하더라”고 전했다. 이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보여준 놀라운 반응은 확실히 우리가 봉쇄 상태에 있으며 이런 작은 얘기로도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로열 메일도 문과 메모 사진을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뒤 ‘여러분이 정문 색깔을 고르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여러분 근처의 배달원이 도와줄 겁니다!’라고 익살을 부렸다. 그러자 1만개의 이모티콘과 5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댓글은 “그 배달원은 분명히 밝은색 톤을 골랐다! 여자라면 그럴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댓글을 둘러싸고도 찬반 양론이 제법 그럴 듯하게 대립했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포클링턴이 최종 선택한 색깔은 가운데, 조금 더 밝고 화사한 느낌의 색깔이었다. 그러면서도 포클링턴은 배달원의 메모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행복한 느낌은 분명 그날을 자신의 날로 만들었다고 돌아봤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경기지역 재개발구역에 무질서한 ‘빨간 글씨’ 사라진다

    경기지역 재개발구역에 무질서한 ‘빨간 글씨’ 사라진다

    경기도가 재개발 등 정비사업으로 주민들이 이주한 후 방치된 건물의 미관 개선에 나선다. 경기도는 정비구역 내 방치 건물에 스프레이 표시를 금지하고 현수막과 디자인 스티커를 활용해 미관을 개선하는 방안을 시행한다고 19일 밝혔다. 이주가 완료된 빈 건물 외벽이나 담에 빨간색 스프레이나 스티커, 비닐 테이프 등으로 ‘철거 예정지’ 또는 ‘공가’라고 적힌 글씨들이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도 관계자는 “수원·안양지역 7개 정비구역의 현장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주완료 건물에 ‘철거’, ‘공가’ 등을 적색스프레이나 스티커, 비닐테이프 등으로 무질서하게 표시해 도시미관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또 대문이 훼손되거나 출입구 폐쇄조치가 미흡해 슬럼화를 가속화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도는 정비사업 인가기관인 시군에 이런 내용의 정비구역 미관 훼손방지 대책을 사업 시행계획 및 관리처분 인가조건으로 부여할 것을 요청했다. 또 빈 건물임을 표시하는 스티커나 현수막의 디자인을 개선해 시군에 배포하기로 했다. 이런 인가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시정명령, 처분 취소, 공사 중지 등 조치할 방침이다. 이미 이주가 진행된 지역은 시군을 통해 사업시행자에게 빈 건물의 미관이 훼손되지 않도록 협조를 요청하고 훼손된 곳은 대로변을 중심으로 선별적으로 도비를 지원해 현수막으로 건물 외관을 가리는 등 조치할 계획이다.아울러 ‘경기도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 조례’에 규정된 기존건축물 철거계획서에 이주 완료 건물의 철거 전 관리계획을 포함하도록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홍지선 경기도 도시주택실장은 “재개발 등 정비구역에 남아있는 주민, 특히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동네분위기가 안타까워 개선대책을 수립했다”며 “이번 대책으로 도내 이주 진행 중인 정비구역의 미관을 개선하고 나아가 치안의 사각지대가 되지 않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편 현재 도내에는 관리처분인가 후 미착공 정비구역이 수원, 안산, 남양주 등 14개 시군에 총 40곳 있으며 관리처분계획 인가 후 착공까지 이주기간은 평균 2년이 소요되고 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끝까지 당당한 ‘답안지 유출’ 숙명여고 쌍둥이…실형 구형(종합)

    끝까지 당당한 ‘답안지 유출’ 숙명여고 쌍둥이…실형 구형(종합)

    쌍둥이에 각 장기 3년·단기 2년 구형 숙명여고 시험 정답 유출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쌍둥이 자매에게 검찰이 각 실형을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 송승훈 부장판사는 17일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쌍둥이 자매 H양 외 1명의 결심 공판을 진행했다. 이날 검찰은 쌍둥이에 각 장기 3년에 단기 2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대한민국 입시를 치러본 사람이면, 수험생 자녀를 키워본 사람이면 학부모와 자녀들이 석차 향상 목표에 공들이는 것을 알 것”이라며 “H양 등은 숙명여고 동급생 친구들과 학부모의 19년 피와 땀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H양 등은 대한민국처럼 교육열이 높은 나라에서 동급생들과 숙명여고 교사들에게 상처를 주고, 공교육 시스템 전반에 대한 국민 신뢰 추락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 성적 투명성에 관한 근본적 불신이 확산됐다”고 말했다. 또 검찰은 “H양 등은 1년6개월간 5차례 정기고사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뤄진 이 사건 범행의 직접 실행자들이고, 성적상승의 직접 수혜자”라며 “그런데 H양 등은 여전히 범행을 부인하고 아무런 반성의 기색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동생 H양은 수사기관을 조롱하는 태도를 보이고, 수사 과정에서 성인 이상의 지능적인 수법으로 대응했다. H양 등이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거짓말에 반드시 대가가 따르고,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고 강조했다.쌍둥이에 실형 구형…검찰 “대가 치러야” 검찰은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전에 답안이 모두 적힌 메모와 포스트잇이 H양 집에서 압수된 점, 답안이 적힌 기말 시험지도 발견된 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영어시험 출제 서술형 구문이 동생 휴대전화에 저장된 점을 대표적 증거로 제시했다. 또 화학서술형 교사가 제출한 오답을 동생이 유일하게 답으로 낸 점, H양 등이 화학·수학·물리 과목에서 풀이 과정 없이 정답을 맞춘 점, H양 등은 정기고사와 모의고사 성적 차가 문·이과에서 가장 크다는 점 등도 대표 증거라고 설명했다. 쌍둥이 언니는 최후진술에서 “저는 장래희망이 역사학자였고, 이유는 무언가를 잊고 사라진다는 충격을 스스로 참을 수 없기 때문”이라며 “학교생활 내내 정확한 기록, 정밀한 언어, 정당한 원칙이 있었고 모든 일을 겪었지만 제 신념은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다”고 말했다. 이어 “검사님이 말한 정의가 무엇인지 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이런 일을 겪고 어떤 분이 저한테 괜찮냐고 했을 때마다 저는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괜찮지 않고 한 번도 괜찮았던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괜찮다는 말도, 괜찮지 않다는 말도 저에게는 없다. 그런데도 저는 이 자리에 살아있다. 저는 인형도 아니고 이야기 속 등장인물도 아니다. 이걸 기억해주면 한다”고 강조했다. 쌍둥이 동생도 “이제까지 모든 사실을 종합해 현명한 판단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쌍둥이 측 변호인은 “이 사건의 유죄를 증명할 직접 증거는 없고, 간접 증거만 있을 뿐”이라며 “간접 증거 정황들이 과연 이 사건 공소사실을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지 매우 의문이다. 여기 앉은 H양 등은 대입 시험을 마치고 신입생의 꿈을 펼칠 나이인데, 이 사건으로 아버지는 중형을 선고받고 보금자리인 가정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 사건이 H양 등에게 평생 주홍글씨가 되는 게 아닐지 안타깝다”고 말했다.쌍둥이에 대한 선고 공판은 다음달 12일 오전 10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쌍둥이 자매는 숙명여고에 재학 중이던 2017년 2학기부터 2019년 1학기까지 교무부장이던 아버지 A씨로부터 시험지 및 답안지를 시험 전 미리 받는 등 숙명여고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애초 검찰은 아버지 A씨를 지난 2018년 11월 구속기소하면서 쌍둥이 자매는 미성년자인 점을 고려해 소년보호사건으로 송치했다. 하지만 심리를 맡은 서울가정법원 소년3단독 윤미림 판사는 형사 재판 진행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사건을 돌려보냈고, 검찰은 쌍둥이 자매를 불구속 기소했다. 한편 아버지 A씨는 지난 3월 쌍둥이 자매에게 시험지 및 답안지를 시험 전에 유출한 혐의 상고심에서 징역 3년을 확정받았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반성 없고 원망만”…‘시험지 유출’ 숙명여고 쌍둥이 실형 구형

    “반성 없고 원망만”…‘시험지 유출’ 숙명여고 쌍둥이 실형 구형

    시험문제를 유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숙명여고 교무부장의 쌍둥이 딸들에게 검찰이 실형을 구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 송승훈 부장판사 심리로 17일 열린 업무방해 혐의 재판에서 검찰은 현모 쌍둥이 자매에게 단기 2년에 장기 3년의 징역형을 각각 구형했다. 검찰은 “쌍둥이 자매는 숙명여고 동급생들과 학부모들의 19년간의 피와 땀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며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불명예로 인해 숙명여고 교사들에게도 허탈감을 줬다”고 말했다. 이어 “이 사건으로 학교 성적의 투명성에 대해 근본적 불신이 확산했다”며 “쌍둥이 자매는 입시정책을 뒤흔들었고, 수시를 폐지하자는 청와대 청원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현실적으로 강남 8학군에 있는 학교에서 중위권 학생이 불과 몇 개월만에 성적이 대폭 상승해 압도적으로 전교 1등을 한 사례는 수많은 사실조회에서도 한 차례도 발견되지 않은 기적같은 일”이라며 “한 사람이 이러더라도 믿기 어려운데 두 딸이 동시에 성적이 올랐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중위권에 있던 자매가 다른 학생을 단기간에 제치고 최상위권으로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유출된 답안을 암기해서 시험을 치렀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또 “1년6개월간 5차례 지속해서 이뤄진 범행을 직접 실행했고, 자매들은 범행의 수혜자”라며 “쌍둥이 자매는 미성년자이고 시간이 지나면 뉘우칠 것이라 기대해 소년부에 송치됐지만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고 아무런 반성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고 실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음모의 희생양이라는 취지로 원망하고 억울해한다.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은 수사기관을 조롱하는 태도를 보였다”며 “피고인들에게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거짓말에는 대가가 따르고 정의는 살아있음을 보여달라”고 강조했다. 반면 쌍둥이 자매는 재판 내내 실제 성적이 올랐을 뿐 유출한 답안을 보고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쌍둥이 자매 언니는 최후진술에서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들어왔던 저 같은 사람이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건 제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면서 “검사가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고 항변했다. 변호인은 최후변론에서 “이 사건에는 직접 증거가 하나도 없이 간접 증거만 있다”며 “관련 사건에서 자매의 아버지가 이미 유죄 판결을 확정받았기에 이 사건에서 무죄 변론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자매들이 절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자매들은 대입시험을 마치고 신입생의 꿈을 펼칠 나이지만 이 사건으로 아버지는 중형을 선고받았고 자매들 역시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 당했다”며 “이 사건이 자매에게 평생 주홍글씨 되는 게 아닐지, 감당못할 굴레가 되는 건 아닐지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한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다른 변호인은 “검찰이 실형을 구형할 때 놀랐다”며 “아버지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딸들까지 실형을 살아야만 정의가 구현된다고 생각하는 자비가 없는 사회냐”고 말했다. 쌍둥이 자매는 2017년 1학년 1학기 기말고사부터 2018년 2학년 1학기 기말고사까지 총 5차례 교내 정기고사에서 아버지 현씨가 시험 관련 업무를 총괄하면서 알아낸 답안을 받아 시험에 응시, 학교의 성적평가 업무를 방해한 혐의를 받는다. 1학년 1학기 때 각각 문과 121등, 이과 59등이던 쌍둥이 자매는 2학기엔 문과 5등, 이과 2등으로 성적이 크게 올랐다. 2학년 1학기엔 문과와 이과에서 각각 1등을 차지하는 급격한 성적 상승을 보여 문제유출 의혹 대상이 됐다. 자매에 대한 선고 공판은 다음 달 12일 열린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노 마스크’ 고집녀, 스타벅스 직원에 팁 답지하자 “절반은 나 줘”

    ‘노 마스크’ 고집녀, 스타벅스 직원에 팁 답지하자 “절반은 나 줘”

    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스타벅스 매장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버틴 여성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은 바리스타에게 응원의 팁 10만 달러 이상 답지한 것은 국내 언론에도 널리 소개됐다. 그런데 문제의 여성이 그 돈의 반만 내놓으라고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고 인사이더 닷컴이 16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앰버 가일스라고 당당히 이름과 얼굴을 공개한 그녀는 ABC 계열사인 KGTV 인터뷰를 통해 목소리를 높였다. 바리스타 레닌 구티에레스에게 오히려 명백한 차별을 당한 것은 자신이라며 고펀드미 닷컴을 통해 답지한 성금 가운데 절반을 받기 위한 소송을 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일스는 지난달 22일 구티에레스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 주문을 받지 않은 스타벅스 직원 레넨(‘Lenin’을 ‘Lenen’으로 표기했다)을 만나보시라. 다음번에는 (마스크를 안 써도 된다는) 의료 면제 서류를 가져가서 경찰을 기다릴 것”이라고 적었다.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압박을 가한 것이다. 뒤에 삭제됐지만 일부가 퍼날라 많은 이들이 보고 가일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오렌지 카운티의 맷 코완이란 사람이 고펀드미 계정에 팁 보태기 캠페인을 벌여 일주일 전에 마감했는데 10만 5450 달러가 걷혔다. 가일스는 변호사들과 상의하고 있다며 변호사 비용이 너무 비싸 고펀드미 닷컴에 자신을 도울 사람들의 모금 페이지를 만들 계획이라고도 했다. 인사이더 닷컴은 가일스의 계정이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전했다.샌디에이고 카운티의 점포들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됐는데 다만 의료적 이유로 면제받은 경우는 예외로 하고 있다. 가일스는 KGTV에 서류 둘을 보여줬다. 2015년 골반 검사를 통해 난소낭종을 진단 받은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와 지압사가 손글씨로 적은 문서였다. 문서에는 가일스가 “마스크나 어떤 형태의 얼굴 가리개도 쓰면 안될 정도로 호흡기 관련 기저질환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방송국 사람이 언제, 왜 지압사가 의료 면제 문서를 작성했느냐고 묻자 “개인 돌봄 치료와 시술을 헌신적으로 했던 사람들”이라며 “그들은 진짜 의사들”이라고 답했다. KGTV는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지압사들과 접촉했는데 그들은 가일스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편 구티에레스는 이미 고펀드미 측로부터 모금된 팁을 전달 받았다고 방송은 전했다. 그는 모금 페이지에 올린 동영상을 통해 캘리포니아주립대학 풀러턴 캠퍼스에서 신체동학을 공부하는 데 돈을 쓰고 무용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는 데 쓰겠다면서도 일부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씨줄날줄] 디지털 교도소/임병선 논설위원

    [씨줄날줄] 디지털 교도소/임병선 논설위원

    ‘디지털 교도소-성범죄자 앤드 싸이코패스 신상정보 알림e’란 게 있다. 이 웹사이트를 만든 이들의 취지에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동 성착취 동영상을 유포한 손정우(24)가 징역 1년 6개월 형을 마쳤다는 이유로 풀려나고 더 엄중한 처벌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으로의 범죄인 인도가 거부된 것에 충격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박사방’과 ‘N번방’ 같은 것을 개설해 아무렇지 않게 성폭력과 성착취를 부추긴 이들의 신상정보마저 공개되지 않으니 답답함을 느끼는 이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성범죄자, 아동학대, 살인자 등으로 분류해 106명의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 등을 공개하고 있다. 철인경기 국가대표였던 고(故) 최숙현 선수에 위해를 가한 이들까지 신상정보가 탈탈 털렸다. 사진 아래 댓글을 달도록 해 999건까지 달린 이도 찾아볼 수 있다. 선의라고 해도 사이트를 소개하는 글은 수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악성 범죄자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웹사이트다. 범죄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처벌, 즉 신상 공개를 통해 피해자들을 위로하려 한다. 모든 범죄자들의 신상 공개 기간은 30년이다. 동유럽권 국가 벙커에 설치된 방탄 서버에서 강력히 암호화돼 운영되므로 대한민국의 사이버 명예훼손, 모욕죄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친다. 재판 일정과 수배 정보를 공개한 것도 눈에 띈다. 아울러 웹사이트가 많이 알려져 하루 30만명 이상 찾는 날도 있다고 했다. 배너 광고 제안이 들어오지만 부득이 거절하고 운영진의 사비와 방문자들의 후원으로 교도소를 운영하겠다고 호언한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는 재판 결과에 낙담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이들 범죄자의 얼굴 등을 공개해 옭아매는 방법으로도 갑갑함이 해소되지 않으면 다음에는 어떤 방법을 찾을지 묻게 된다. 외국 영화들에서나 봤던 자경단, 사적 감옥(chamber) 같은 것들이 등장해 사적 보복을 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5월 텔레그램 성착취물 유포 범죄자들의 신상을 공유하는 대화방 ‘주홍글씨’를 운영해 온 20대 남성 송모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송씨는 자경단 활동을 목적으로 가짜 대화방을 개설해 이용자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범죄자를 유인하기 위해 범죄를 기도하는 문제가 있었다. 사이트가 문을 연 지 넉 달이 됐다. 어제서야 대구경찰청에서 전담해 개설자와 운영자를 검거하기로 했다. 방송통신위원회도 유해 사이트 여부를 빨리 판단해 차단에 나서든지 해야 할 것 같다. bsnim@seoul.co.kr
  • [월드피플+] 코마 상태 코로나19 임신부, 깨어보니 ‘아기+청혼’ 감동 선물

    [월드피플+] 코마 상태 코로나19 임신부, 깨어보니 ‘아기+청혼’ 감동 선물

    코로나19에 걸려 중태에 빠졌던 콜롬비아 여성이 감동의 깜짝 선물을 받고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됐다. 코로나19에 걸려 지난달 콜롬비아 칼리에서 병원에 실려 간 디아나 파올라 앙골라가 흐뭇한 스토리의 주인공. 지난달 병원에 들어갈 때 앙골라는 임신 21주차였다. 코로나19 중증 환자였던 그를 본 의사들은 태아를 살리기 위해 앙골라를 코마 상태로 유도하기로 했다. 코마 상태에 들어간 앙골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제왕절개로 아들을 출산했다. 19주나 앞당겨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었다.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한 미숙아 대부분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의사 파올라 벨라스케스는 “중증 코로나19 환자가 출산한 미숙아 대부분이 사망했다는 통계가 있어 막상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전망은 비관적이었다”고 말했다. 병원은 아기를 인큐베이터에서 돌보는 한편 산모를 치료하는 데 전력했다. 의료진의 노력에 하늘이 감동한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엄마가 된 앙골라는 증상이 호전되면서 코마 상태에서 깨어났다. 코마 상태로 유도된 지 정확히 21일 만이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아기도 다행히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의사들은 “중증의 산모가 코로나19에서 회복된 것이나 아기가 사망하지 않은 것 모두 기적”이라며 박수를 쳤다.경사가 겹치자 아기의 아빠이자 앙골라의 남자친구인 제퍼슨 리아스코스는 중대 결심을 했다. 이참에 앙골라에게 청혼하기로 작정한 것. 두 사람은 올해로 사귄지 지 13년째가 되는 커플로 이제 아들까지 두게 됐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정식 부부가 아니다. 리아스코스는 병원에 “여자친구에게 청혼을 하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의사와 간호사들은 선뜻 “청혼을 돕겠다”며 이벤트를 준비했다. 드디어 다가온 D데이. 리아스코스는 방호복을 입고 앙골라가 입원해 있는 병동을 찾았다. 휠체어 앉아 있는 앙골라에게 꽃과 선물을 내밀며 청혼을 하는 순간 의사와 간호사 십수 명이 떼를 지어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곤 앙골라를 향해 큰 글씨로 쓴 종이를 펼쳐 들었다. “나랑 결혼해줄래?”라고 적힌 종이가 펼쳐지는 순간 앙골라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앙골라는 “언젠가는 결혼을 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청혼을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건강한 아기와 청혼이라는 깜짝 선물을 받아 너무 황홀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나와 아기의 목숨을 살려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며 “신의 축복이 의료진과 그들이 돌보는 모든 환자에게 충만하길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는 대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日, 코로나 사태 편승한 ‘자숙경찰’ 활개… 되살아난 국가주의

    日, 코로나 사태 편승한 ‘자숙경찰’ 활개… 되살아난 국가주의

    지난 4월 코로나19 긴급사태 발령 이후 일본에서는 ‘자숙경찰’이라는 이름의 민간 자경단이 정부·자치단체의 방역수칙에 따르지 않는 사람과 업소들을 찾아다니며 경고와 위협 등 사적 통제를 가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법적 근거에 따라 경찰 등 공권력이 외출과 이동의 통제에 나섰던 미국, 유럽 등과 달리 아무런 권한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남에게 강요하며 곳곳에서 살풍경을 연출해 냈다. 아베 신조 총리 집권 이후 뚜렷해진 보수우경화 흐름과 맞물려 과거 국가주의를 연상시키는 자숙경찰의 횡포는 가뜩이나 가라앉은 일본 사회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전쟁을 겪었던 세대 가운데 일부는 어릴 적 ‘국민정신총동원’과 ‘국민의용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지금 일본에는 초유의 바이러스 위기에 편승해 등장한 과거의 망령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이 늘어 가고 있다. #1. ‘빨리 가게 문 닫고 긴급사태 종료 때까지 집에서 얌전히 잠이나 주무세요. 다음에 또 (영업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면 경찰에 신고합니다.’ 지난 5월 13일 저녁 일본 오사카시 주오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고이즈미 유히(34)는 이런 종이가 가게 입구 유리문에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고이즈미는 아베 총리가 4월 7일 코로나19 긴급사태를 선언했을 때에는 바로 휴업에 들어갔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월말에 영업을 재개했다. 그랬더니 자숙경찰의 협박장이 날아온 것이다. 고이즈미는 “미용실은 당국이 지정한 휴업 대상 업종이 아닌데도 이런 일을 당했다”며 “자기만의 도덕률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2. 기후현에 사는 30대 여성 A씨는 슈퍼마켓에서 식료품을 사서 자기 차에 싣고 가다가 봉변을 당했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낯선 남자가 다가와 창문을 두드렸다. 창을 열자 그는 “아이치현에서 온 차량이네. 이렇게 (우리 지역으로) 놀러 오면 안 돼”라고 윽박질렀다. 자숙경찰이었다. A씨는 그에게 “아이치현에 살다가 2년 전 기후현으로 이사하면서 차 번호판을 바꾸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남자는 “그럼 번호판을 빨리 바꿔라.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했다. A씨는 “그날 집으로 가면서 창문에 돌이라도 날아오는 건 아닐까 싶어 벌벌 떨면서 운전했다”고 말했다. #3. 일본에서 가장 큰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차이나타운의 여러 음식점에 지난 3월 중국인을 비방하는 우편물이 일제히 발송됐다. 발신자가 없는 봉투에는 빨간 글씨로 ‘중국인은 쓰레기다! 세균이다! 악마다! 빨리 일본을 떠나라!’라고 적힌 A4 용지가 들어 있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코로나19 감염자가 한 명도 안 나온 상태였다. 상점가 관계자는 “생명의 위협에 대한 공포가 일부 일본인들의 밑바탕에 있는 차별적 감정을 끌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긴급사태 발령이 이어지는 동안 자숙경찰들이 곳곳에서 행사한 ‘거짓 공권력’과 ‘거짓 정의’,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는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수십만, 수백만명의 코로나19 대량 감염을 막을 수 있었다며 ‘일본식 모델’을 자화자찬하는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나오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강제’가 아닌 ‘자제’, ‘명령’이 아닌 ‘요청’, ‘지시’가 아닌 ‘부탁’에 의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차이나타운 중국인 비방 우편물 발송도 다노 다이스케 고난대 교수(역사사회학)는 “권위에 대한 복종과 이단에 대한 배척을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 구조야말로 파시즘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자숙경찰의 행동은 파시즘과 근본적으로 맥이 닿아 있다”고 아사히신문에 말했다. 고자이 도요코 불교대 교수(의학사)는 “정치가와 언론이 코로나19 감염방지 대책을 ‘바이러스와의 싸움’ 등 전쟁에 빗대면서 싸워야 할 상대도 싸울 방법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의 적개심을 높였고, 이것이 지나친 상호 감시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고 진단했다.전체를 따라야 한다는 강박증이 커지면서 정부 방침을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이는 사례도 나타났다. 지난 5월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의 시립중학교는 정부가 가구당 2장씩 배포한 이른바 ‘아베노마스크’의 착용을 학생들에게 사실상 강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학교 측은 등교 준비물 알림장에서 ‘아베노마스크 착용 확인’, ‘아베노마스크를 잊은 학생은 별도의 교실에 남는다’고 통보했다. 국가 정책인 만큼 좋든 싫든 무조건 따르라는 의미였다. 아베노마스크를 다른 곳에 기부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설치됐던 수집함이 ‘당초 마스크 배포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곳곳에서 철거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피해는 경제적 약자와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집중됐다. 도쿄의 최대 환락가 중 한 곳인 신주쿠 가부키초는 코로나19 확산 취약 지역으로 지목돼 집중적인 감시 대상이 됐지만, 고급 음식점들은 영업을 해도 멀쩡했고 규모가 작은 음식점, 주점들이 자숙경찰의 타깃이 됐다. ●“정치가와 언론이 사람들 적개심 높여” 재일 한국인 등 외국인에 대한 차별도 두드러졌다. 사이타마현에 있는 조선초중급학교·유치부에는 지난 3월 이후 한동안 “여기가 싫으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앞으로 가만두지 않겠다” 등 협박성 전화와 이메일이 빗발쳤다. 사이타마시가 관내 유치원과 보육원 등 어린이 관련 시설에 비축해 두었던 마스크를 나눠 주면서 조선학교는 제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조선학교 측이 “마스크 지급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 행위”라며 항의하자 일부 일본인들이 헤이트 스피치로 반격했다. 당시 사이타마시의 한 공무원은 “조선인에게 마스크를 주면 다른 곳에 팔아먹을지도 모른다”는 모욕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는 당국의 대응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오사카부 등 일부 자치단체들이 휴업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친코점들의 명단을 공개한 게 대표적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곳이니 사적인 제재를 당해도 싸다”고 당국이 공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TV프로그램에 나온 유명인사들은 거친 언사로 파친코점들을 비난하며 ‘공공의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는 “자숙경찰이라는 현상이 이번에 비로소 처음 나타난 게 아니라 일본 사회에 잠재해 있던 소수자 차별 등 추악한 부분이 코로나19 위기를 통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마이니치신문에 말했다.●日사회 잠재해 있던 소수자 차별 수면 위로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논픽션 작가 가토 나오키는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이 어떤 대상을 찍어서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상태로 변하는 것은 일본 역사에서 자주 나타난 현상이었다”며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이와테현 이시노마키시에서 “중국인들이 강도짓을 한다” 등 유언비어가 돌자 실제 도쿄에서 현지로 무기를 들고 달려간 우익단체의 사례를 들었다. 자숙경찰이 만들어 낸 현상이 과거 전시 체제의 ‘국민정신총동원’ 시절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정신총동원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본 정부가 국민들에게 ‘국가를 지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국민정신’을 요구하며 시작한 국가주의 캠페인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사치는 적이다’, ‘석유 한 방울은 피 한 방울’ 등 구호를 내걸고 국민들에게 ‘멸사봉공’을 강요했다. 저명한 원로목사 다이라 오사무는 “전체와 다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엄하게 다그치는 현재의 분위기에서 국민정신총동원의 기치 아래 영혼의 자유 없이 무조건 국가에 따를 것만을 강요받았던 전쟁 때 기억이 떠오른다”며 “가치관이나 입장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인어공주가 ‘인종차별주의 물고기’?…수난 겪는 동화 속 주인공

    인어공주가 ‘인종차별주의 물고기’?…수난 겪는 동화 속 주인공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항구에 있는 유명 조각상인 ‘인어공주 조각상’이 수난을 겪고 있다. 영국 가디언 등 해외 언론의 3일 보도에 따르면, 이날 아침 해당 조각상 받침 부분에 ‘인종차별주의 물고기’라는 낙서가 써 진 것을 확인하고는 현지 경찰이 조사를 시작했다. 페인트를 이용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낙서는 인어공주 조각상을 바치는 바위부분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글씨였으며, 멀리서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짙고 두꺼운 글씨체였다. 인어공주 동상은 덴마크 조각가 에르바르드 에릭센이 같은 나라 작가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기념해 1913년 세운 조각상이다. 올해로 107년 된 이 조각상은 코펜하겐 항구 입구에 있는 돌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이미 여러차례 문화재나 공공기물을 파괴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의 표적이 돼 시련을 겪었다. 지난 1월에는 인어공주 조각상이 놓인 돌에 빨간색 페인트로 ‘자유 홍콩’이라고 써 놓은 것이 발견됐고, 당시 경찰은 주변을 수색하는 등 수사에 나섰지만 용의자를 찾지 못했다. 과거에는 인어공주 동상을 놓인 자리에서 떼어놓거나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 있었고, 심지어 동상의 목을 자른 경우도 있었다. 로이터는 이 조각상을 보기 위해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았으며, 특히 중국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다고 전한 바 있다.한편 백인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이후 전 세계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 및 반달리즘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 전 미국 초대 대통령의 조각상이 ‘핏빛’ 페인트로 물드는 일이 발생했다. 현지시간으로 지난달 29일, 뉴욕 경찰은 맨해튼의 워싱턴 스궤어 공원 입구에 서 있는 아치 기둥의 조지 워싱턴 대형 조각이 붉은 페인트로 범벅 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현지 언론은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참가하는 일부 시위대가 조지 워싱턴 전 대통령도 과거 노예를 거느렸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며 조각상이나 동상을 파손하고 있다고 전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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