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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 2년생 자살/일열도 떠들썩/3년간 동료에 맞고 돈 빼앗겨

    ◎학교당국 무관심… 사회문제로/“괴로워서 자살… 가족들엔 감사” 유서남겨 아이치현 니시오시 도부중학교 2년생인 오코우치 기요테루가 집 뒤뜰 나무에 목을 매 짧은 삶을 마감한 것은 지난 11월말.「흔히 있는 사건」으로 관심을 끌지 못하던 그의 죽음은 그러나 1일 그의 책상서랍에서 발견된 유서를 통해 이제 겨우 13살인 기요테루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연과 그간의 번뇌가 드러나면서 일본열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펜글씨로 빽빽이 적은 노트 4장 분량의 유서는 「언제나 4명이 돈을 뺏아갔다」는 말로 시작된다.기요테루는 동급생들에게 소학교(국민학교) 6학년부터 3년동안 이지메(특정인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집단학대행위)를 당했다.그들은 심심하면 기요테루를 때리고 괴롭혔다.기요테루는 이들에게 1백만엔 이상을 뺏겼다고 적고 있다.이지메같은 단어는 일본어말고 다른 언어에는 별로 없을 것이다.탈출구없는 그 이지메에 기요테루가 걸려든 것이었다. 유서 뒷부분에는 『오늘도 4만엔을 빼앗겼다.이제 정말 죽어야겠다』면서 『왜 일찍 죽지못했는가.가족들이 잘 해주었기 때문이다.가족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중학교 입학 때 입학생 대표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입학결의」까지 했던 기요테루였지만 실제는 반대였다. 부친 요시하루씨는 지갑에서 돈이 없어지곤 해서 『이지메당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지만 기요테루는 자살 전날까지도 부인하기만 했다.요시하루씨는 아들의 일이 걱정돼 11월에는 호주로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기요테루도 유서와 함께 발견된 「여행일기」에서 『아버지,호주여행 정말 고마왔습니다』라고 감사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여행일기는 괴로운 생활 가운데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가족 여행을 어렸을 때부터 회상해 가면서 적은 것이어서 심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가여운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문제는 학교.그동안 몇차례 기요테루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도 있었고 이지메당하고 있음이 확인되기도 했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해지지 않았다. 일본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0∼19살 학생 1백13명이 이지메 등 교내문제로 자살한 것으로 나타났다.이지메의 주된 표적은 성적이 우수하거나 신체부자유 학생,또 외국에서 생활한 학생과 재일외국인 자녀 등.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5일 뒤늦게 참의원에서 유사사건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역설했지만 「약자를 끝까지 괴롭혀 망가뜨리는」 이지메가 당하기도 하고 가하기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본사회에서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
  • 일서 종이절약운동 확산/백화점 등 앞장 산림자원 보호나서

    ◎물건포장 않거나 가능한한 줄여/한번 쓴 복사지 글씨지워 재사용/펄프종이 사탕수수 종이로 대체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일본에서 최근 삼림자원의 보호를 위한 종이 절약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23일 휴일인 「근로감사의 날」을 맞아 한국인 K씨는 번화가인 긴자에 위치한 장난감가게 토이 파크를 찾았다.5천엔 정도의 물건을 산 뒤 계산을 치르는 동안 점원이 묻는다.『포장을 해 드려야 하나요』라고.K씨는 다소 놀랐다.예전에는 싸고 또 싸서 최대한 손님에게 만족을 드리는 것을 최고의 상술로 여기지 않았던가. 포장을 부탁하자 포장지 단 한겹으로 끝낸다.이어 바로 옆의 미쓰코시백화점.여기서도 포장은 한결 간단해졌다.요즘 일본의 백화점 등에서는 겹겹이 포장하는 관행이 많이 줄어들었다.물론 경기후퇴도 한 몫 하기 때문이지만 종이에 관한 한 환경의식도 꽤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 지난 24일 후지제록스사와 쇼와전공은 「페이퍼 재사용(Reuse)시스템」을 공동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시스템은 쇼와전공이 개발한 잉크가 할로겐광을 쐬면 색이 지워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즉 보통 복사기에 특수 잉크가 들어있는 전용 토너를 부착,복사한 뒤 나중에 종이에 담긴 정보가 필요없게 되면 「소색기」에 걸어 인쇄내용을 지운 뒤 다시 사용한다는 것이다.보급의 확대에 따라 기술의 개발과 가격 인하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학습지 발행으로 일본 최대를 자랑하는 오사카의 공문교육연구회(이하 공문)는 목재 펄프로 제작된 종이 학습지를 최근 「설탕을 제조하고 남은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든 종이」로 바꿨다.공문이 연간 사용하는 학습지는 A4크기의 20억장.일본이 자랑하는 후지산의 40배 높이이다. 사탕수수 종이로 바꿀 경우 공문이 추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연간 5천만엔이나 되지만 목재 펄프는 5백t이나 절감된다.공문은 비용증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육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공문의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다른 학습지 학원 등에도 번져나갈 기미를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 쪽이라도 재생용지를 사용한 교과서는 전체 1천45종 가운데 올해에는 4.3%에 머물렀지만 내년부터는 전체 1천4백24종 가운데 17.2%인 2백45종류로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일본 문부성은 밝히고 있기도 하다.
  • 신강위구르 성도 우루무치/허세욱(서역 문화기행:2)

    ◎동쪽 1백㎞ 천산중턱의 천지 장관/만년설 녹은 물 담겨… 설봉·수해와 함께 “한폭 그림”/시 한폭판에 호랑이모양 홍산 “우뚝”… 벼랑위엔 진요탑 남고 우루무치의 금석 청나라때 유명한 소설가였던 기윤(1724∼1805)이 1768년부터 1771년까지 우루무치에 유배되었을 때 쓴 「오로목재잡시」1백60편은 2백20여년전의 우루무치를 사생활처럼 볼 수 있었다. 「독차력록만장가 화수은화대대배. 무수홍군란초수, 유인습득봉황혜」 (오로목재잡시·유람) (삐걱 삐걱 달구지소리 거리를 누비고, 불빛 나무 은빛 꽃들,쌍쌍이 줄을 섰네. 빨간 치마들 몰려나와 왁자지껄한데, 구경꾼들은 그녀들 벗겨진 봉황신을 줍네) 정월 대보름에 불놀이하던 풍물을 그렸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우루무치엔 송아지나 노새들이 끄는 달구지나 손수레가 많았었다. 이보다 옛적인 당나라시대에는 우루무치를 윤대라 불렀다.지금 우루무치교외의 오랍박댐 근처를 말하는데 그때 변새시인이었던 음참(715∼770)이 754년부터 3년이나 안서절도사 판관으로 이곳에 주재했었다.그때에 쓴 윤대군사에는 우루무치 당시의 풍물 풍속이 생생하다. 「윤대풍물이, 지시고단우. 삼월무청초, 천가진백유. 번서문자별, 호속어음수. 수견류사북, 천서해일우」 (윤대의 풍물이 달랐다, 옛날 흉노의 땅이라서. 삼월에도 풀이 돋지 않고, 집집마다 하얀 느릅나무. 오랑캐 글씨라 글도 다르고, 오랑캐 말이라 소리도 달랐네. 사막 북녘을 망연히 보면, 하늘은 로부노오르 저편에) 1천2백년이 지났어도 별로 변함이 없다.어디를 가도 느릅나무요,거리마다 위구르 문자에 들리는 것은 낯선 언어들,다만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뒤,비록 1954년 신강성을 「위구르족자치구」로 선포하고 소수민족의 풍습과 문화의 고유성을 보호한대지만 우루무치같은 대도시를 비롯,북로의 연도도시엔 한족들의 이주가 늘어 지금 한족대 소수민족의 인구비율은 거의 반반을 형성한 것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서왕모의 전설 간직 우루무치에서 시인묵객의 붓끝에 자주 오르던 명승으로는 천지와 홍산이 있었다.천지는 우루무치 동쪽 1백여㎞ 지점의 천산산맥에안긴 호면 해발 1천9백28m의 반월형 호수요,홍산은 우루무치시의 한복판에 선 해발 9백10m의 호랑이 형상을 한 적갈색의 바위산이었다. 천산산맥의 제2주봉인 해발 5천4백45m의 보고다(박격달),그 서북쪽 음지의 능선 아래로 설수의 모임이다.그 동남에 웅장한 만년설의 병풍을 두르고 그 품안에 길이 3.4㎞ 너비 1.5㎞의 호수와 호수에 누운 설봉의 그림자를 안았기로 그 천지의 절경은 백두산의 천지에,그 배경은 스위스의 몽블랑에 견줄만했다. 오죽해야 중국 최초의 허구적인 전기요,허구적인 여행기인 「목천자전」에서 주나라 목왕이 서역 선녀의 수령격인 서왕모를 만난 무대로 여기를 골랐던 것이다.그로부터 천지는 요지 용담 천경 신지등으로 미화되었다. 필자가 탄 버스가 부강현을 지나 두시간뒤에야 천산산맥으로 접어들었는데 그 첫번째 경관은 아무래도 해발1천5백m 높이서 만난 석문이었다.20∼30m 높이의 우람한 바위가 마치 두쪽 대문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그 사이를 뚫고 굽이 굽이 산길을 오르면 파란 전나무의 진하디 진한 바람을 타고 하얀적설이 시야에 부딪는다.다시 가파른 비탈을 오르면서 기우뚱 보이는 시퍼런 호수,그게 「목천자전」에 서왕모가 발을 씻었다는 「서소천지」였다. 버스의 종점부터 필자는 4시간동안 준마 한필에 마부 한사람을 빌리곤,더덩실 안장에 가랑이를 얹고 천산의 가파른 등성이를 향해 고삐를 죄었다. 반달 모양의 천지,그 북쪽 제방을 거드름 피우며 건너가는데 늙은 느릅나무 한그루가 호수쪽으로 누운 채 버티고 있다.목책을 세워서 그 자빠진 나무를 보호했고,그 옆으로 「정해신침」,곧 「서유기」의 한장면을 표시하는 비를 세웠다.호수를 안정시키는 신침이란 뜻.듣건대 여기 산지 사람들은 그 느릅나무와 호수의 간격으로 호수의 저수량을 측정한다고 했다.그보다는 여기에도 서왕모의 전설이 서려 있었다.어느날 서왕모가 벌인 반도회잔치에 훼방을 부리는 도깨비가 있어 자기의 비녀를 뽑아 던졌더니 그 자리서 느릅나무가 돋았다는 비녀의 화신설이다. ○분지는 마치 솥바닥 천지에서 서쪽으로 3㎞쯤 올랐다.고개를 넘자 널찍한 분지,그 뒤로 팽이처럼 꼿꼿한등간산,등간산 꼭지에는 뾰족한 바위 세덩이가 창모양으로 서있다.이름하여 「정천삼석」.등간산 아래로 그 분지는 마치 솥바닥,그래서 서왕모가 밥을 짓던 솥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한때 군마를 사육하고 훈련시켰다던 곳이다. 등간산분지로부터 하산할 때 굽어보는 천지는 절경이었다.하얀 설봉에 파란 수해,거기에 저 아래로 시퍼런 호수,문득 천산의 높이와 천산의 주변을 잊고,천지가 작은 그림엽서로 보였다.청나라 역사학자요 시인이었던 홍량길(1746∼1809)이 1800년 유배길에 쓴 천산가의 한대목이 잘 말해 준다. 「지맥지차단, 천산사포천. 일월하처루, 총괘청송전」(후략) (지맥이 여기서 끊겼고 천산은 벌써 하늘을 안았으니,해와 달은 어디서 살까? 청송 가지끝에 가만 걸렸네) 천지 언저리엔 일찍이 팔대사가 있었다고 한다.그런데도 몽땅 폐허로 남았다.그중에도 천지 서북쪽 7백m 비탈에 남은 철와사가 그 유적만으로도 당시의 장관을 짐작케하는 제일사원이었다.원나라때 칭기즈칸이 유럽 정벌길에 목천자의 전설을 따라 천지를 오르고는 거기다도관을 짓토록 명령했다고.그러나 확실한 연혁은 아무래도 청나라 건륭연간,푸른 벽돌로 벽을 쌓고 쇠 기와로 지붕을 이었대서 「철와사」로 불린 것이다.학교 운동장을 방불케 널따란 폐허에 유적비만 동그마니 서 있었다. ○하사크족 파오 즐비 철와사 유적지 아래로 하사크족들의 파오가 즐비했다.몽골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하얀 모전의 둥근 텐트형의 그 속은 난로에 식탁·침구정도의 간소한 가구지만 초원의 주막이라고 호객도 서슴지 않았다. 이토록 빼어난 경관을 지녔음에도 발길 닿는 곳마다 서왕모의 전설이 얽힌 곳.말하자면 천혜의 상품에다 전설의 포장을 덧붙여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우루무치로 돌아와서 곧장 홍산으로 차를 몰았다.고개를 치켜 들고 하늘로 치솟는 용이나 호랑이의 형국이다.천산에선 청색과 백색을 보았는데 홍산에선 검붉은 바위,그러니까 원색과 원색을 옮겨 다니는 강렬한 대비로 오싹한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홍산은 벼랑,벼랑위로 회청빛 9층탑이 섰다.거기서 우루무치 전경을 굽어 볼 수 있었는데 이름하여 「진요탑」.옛날 해마다 여름이면 범람하는 홍수로 우루무치가 물 바다였다고.그것을 요괴의 장난이라고 믿은 청나라 총독은 드디어 1788년 거기다 탑을 쌓고 요괴의 맥을 끊었던 것이다. 「진요탑」에서 정상으로 한참 오르면 「임칙서시비」가 새로운 초점으로 우뚝 섰다.청나라 아편전쟁때 아편을 금지하였던 항전파의 수령이요 시인이었던 임칙서(1785∼1850)를 기념하는 비다.거기에는 그가 영국 투항파에 쫓겨 신강으로 귀양살이하던 1845년12월4일,이곳 홍산에 올라 단숨에 썼던 「금루곡」,그 명작이 절록되어 있었다. 「임광가,취와홍산취. 풍경처,주린기」 (미친듯 노래하다가 홍산에 누웠노라! 바람 모진곳에 술잔조차 일렁인다.) 한 영웅의 강개가 뭉클하게 표출되었다.더구나 싸늘한 서역의 바위산에서
  • 조창호씨 위패 삭제/이국방에 중위진급 신고/보국훈장받고 오늘 전역

    김영삼대통령은 25일 하오 북한을 43년만에 탈출,지난달 조국으로 돌아온 조창호씨(64)를 청와대로 초청,오찬을 같이하며 격려한뒤 보국훈장 통일장(1등급)을 수여했다. 보국훈장 통일장은 「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올해 국군의 날 해·공군참모총장 및 육군 2군 사령관에게 수여됐었다. 조씨는 이에 앞서 이날 상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호국영령들에게 헌화·분향한뒤 자신의 위패를 제거하고 국방부에서 이병태국방장관에게 중위 진급신고를 가졌다. 조씨의 진급신고는 26일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릴 전역식에 앞서 이루어진 것으로 조씨는 43년만에 소위에서 한 계급 진급한 중위신분으로 군을 떠나게 됐다. ○…북한탈출 후 첫 외출을 나온 조창호씨는 이날 상오10시 소위 계급장을 단 정복차림으로 국립묘지에 도착.조씨는 장태완 재향군인회장등 관계자와 모교인 경기상고 학생등 1백여명과 함께 의장대 사열을 받은뒤 현충탑에 「조창호 소위」라고 적힌 대형 화환을 헌화하고 묵념. 조씨는 이어 현충탑 지하영현봉안관실 검은 대리석에 흰 글씨로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준비해간 검은 테이프로 가리는 것으로 위패삭제식을 대신.
  • 남정 박노수(이세기의 인물탐구:63)

    ◎세속과 거리먼 대쪽기상… 한국화의 대가/노송­여인의 머리결등 한국적 비감의 정서 관조/여백­색채 절묘한 조화… 관념­실경산수 넘나들어/내년 열번째 개인전 계획… 신품의 경지 기대 남정 박노수의 간원화실은 어느 듯 스산한 초동이다.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잡고 있으나 인왕산자락에 파묻혀 마치 심산유곡인 듯 산새소리 바람소리만이 유랑한다.대문에서 작업실에 이르는 긴 길목은 가으내 진 낙엽이 산처럼 쌓여있고 화사의 화숙다운 청한한 적요가 사방에 깃들 뿐이다. 봄이면 진달래 철쭉이 지천을 이루고 여름은 울창한 수목,나목한천의 백색겨울등 간원에 머무르는 사계절의 변화는 눈에 닿는 풍경마다 살아있는 명화가 아닐수 없다.간원은 그의 옥인동집에서 보면 동북방에 위치한 동산이란 뜻이다. 남정은 아침 9시반에 집에서 나와 주로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하루종일 별반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따로 시중을 드는 이도 없다.쉬고 싶으면 혼자서 마당에 나가 물을 뿌리거나 수석을 돌본다. 남정의 화실은 처음은 원효로에 있었고 70년대 후반에 비원앞 가든타워, 그후 사직동의 한 아파트로 옮겼다가 이곳에 정착했다.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는 세속과 도무지 화통하는 법없이 그림에만 전념하는 화가다.대쪽같고 겨울강처럼 차가운 성격은 아무하고나 쉽게 만나지도 않을뿐더러 만나더라도 무슨 이야기든지 부담없이 나눌수 있는 친밀감을 주지도 않는다. 본인은 그런 소리가 나오면 수원시화중의 한구절을 들어 「가슴속이 탁 터지고 온화한 품격을 가진 이면 일자불식이라도 참 시인일것이요, 성미가 빽빽하고 속취가 분분한 자라면 비록 종일 글을 깨물거나 글씨를 씹고(교문작자) 쓸데없이 문장이 장황해도(연편누독) 시인이 될수없다」고 한것처럼 만약 소방하지 않다면 어찌 좋은 화가일수 있느냐고 반문한다.그러나 논리는 정연하고 음성은 따뜻할지라도 차고 냉정할 때가 오히려 그답다고 할 수 있다.그만큼 원칙을 중히 여기고 순리적인 흐름을 수용하는 주의다. ○목선이 긴 비마등 이채 옛선비의 의지가 몸에 밴 그의 기상은 지금도 내일모레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짐작되지 않는다.그림의 격에 대한 식을줄 모르는 정열과 큰 그림을 그릴 때의 현완직)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아 보는 이로 하여금 범접 할 수 없는 위엄을 준다.그의 성격의 일면은 60년대 중반 일본 중국화풍을 모방한 국적불명의 그림들이 쏟아져나오자 이를 한심하게 여긴 나머지 한 신문에 기고한 글만으로도 알수 있다.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의 나라에서 시도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모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망국족자 상선자망기문화」,즉 「나라와 민족을 망치는 자는 언제나 먼저 스스로 그 문화를 망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이는 화단의 경각심을 촉구하여 지식있는 많은 층의 호응을 받았었다. 그림도 그렇다.누구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그것이 남정화인줄을 한눈에 알아본다.한국적인 노송과 강안의 야트막한 산들,청결하게 빗어넘긴 여인의 머릿결과 잔잔히 치켜올라간 눈매,소년의 외로운 등모습과 목선이 긴 비마는 한국적인 비감의 정서를 무위로 관조하고 있다. 돛단배의 돛과 선비의 취월창의,멀리 지나는 여인의 치맛자락을 바탕색인 군청 비취록과는 달리 호박색이나 산호색으로 점을 찍어 청색 비단보에 싸인 별빛같은 효과를 내는 것도 그만의 채색기교라 할수 있다. 그의 색조는 초기에는 물기가 마르기전에 발묵 채색하는 선염법을 쓰다가 피카소에 심취했던 젊은 시절을 되살려 검푸른 청남과 여명으로 영롱한 운기를 살려낸다.이른바 오채가 깃든 먹과 쪽빛 섞인 청화색은 광활한 하늘로 배분하고 준열한 한 획의 선은 산의 기개로 과시된다.이때 강을 사이에 둔 언덕은 부세의 영욕을 적멸한 피안이며 인물들의 표정에는 상락이 깃들여 정중동의 관념산수와 동중정의 실경산수의 요소를 자연스럽게 함축시키고 있다. 「여기에 무한감을 수반하지 못하면 살아있는 그림이 될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는 화면에다 우주로 통하는 공간을 설정하고 먹과 선으로 공간을 공략하여 여백과 색채가 어울린 기운생동을 성취해낸 것이다. ○28세때 대통령상 받아 이런 측면으로 추적한다면 그림속의 주인공들은 그의 소년시절의 시심을 간직한 것처럼도 보인다.혹은 언덕에 기대어 앉거나혹은 범주에 몸을 실은채 먼 강산을 우러른 소년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그 시선은 어디에 두고 있는가. 그는 충남 연기의 한학자(부친 박상래)집안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외조모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부친에게 붓글씨를 익히는 어린시절을 보냈다.청주상고에 다닐 때는 문학지망을 꿈꾸기도 했으나 부친은 그림 그리는 것을 말리진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 있는 청전 화실에 드나들면서 초기엔 인물화를 그렸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자 「근원수필」로 유명한 김용준과 심산 노수현 월전 장우성을 사사, 일찍이 청전은 고귀한 품성을 지닌 이 미소년의 범상치 않은 재질을 보고 이미 「일총한 화가탄생」을 주변에 일러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학재학 시절에는 그림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상명여고 동흥중 성동고등에 시간강사로 출강,당시 상명여고 교감으로 있던 문학평론가 곽종원씨가 전임을 맡기려하자 그림 그리는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강직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기엔 학교 숙직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서책들을 난독하면서 인생에 대한 무상에 빠져 술로 밤을 지새는 경우가 많았다.가슴속에 이유 모를 비감이 가시지 않아 그림의 소재도 유랑극단의 곡예사나 피리불며 정처없이 떠도는 소년의 방황에 그쳤다.그러다가 인생을 극도로 비관하는 염세주의와 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한 폐인이 되고 말리라는 자책끝에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고 다시 화폭과 대좌했다. 28세때 제4회 국전에서 「선소운」이란 인물화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비로소 독자적인 채색과 여백의 미를 화면에 전개해 나갈수 있었다. 지금도 그는 골프나 바둑이나 술과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그림에 방해가 되는 일은 일체를 삼간다.그의 취미는 일요일 등산하는 것과 난과 수석뿐이다.난은 섬세하고 유연한 동양화의 선을 감춘데다가 순수한 향기로 정신을 수려하게 정화시킨다는 차원에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는 듯 하다. 그외 그의 일상생활은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국전 대통령상 수상기념으로 그에게 남정이란 아호를 지어준 소전 손재형 소설가 유주현과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들은 고인이 된지 오래이고 지금은 서울대 시절의 스승인 월전과 시인 김춘수 정병욱등과 담소를 즐긴다.가족은 부인 장신애여사와 큰자녀들은 출가하고 두딸이 있다. ○“품격 높은 예술” 극찬 그의 결벽한 일면은 그의 개인전 팸플릿에 반드시 이경성의 서문만을 고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화단일각에서는 이를 섭섭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이경성과는 이대교수로 함께 재직하면서 그의 제작의 내부까지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평론가의 넘치거나 치우치지 않는 「남정화론」을 굳게 믿는 것 같다. 이경성은 남정의 작품을 「한마디로 격조의 예술」로 천명한다.「품격이 높고 예술적으로 성숙되어 정신과 기술을 아울러 갖췄을 뿐만 아니라 북화적인 큰 스타일과 남화적인 정신세계가 어울려 새로운 한국화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색채를 화면에 부여함으로써 남정은 그곳에 반드시 존재돼야할 바위나 산이나 사람을 만들어낸다.이른바 모든 사물의 전화가 그의 날카로운 붓끝에서 창조되고 그렇게 창조된 사물은 영원한예술로서 존속된다.인위와 조작이 없는 「순도높은 인품이 담긴 작품」,그리고 세련되고 치밀하게 계산된 공간처리와 평면감각을 극도로 추구하여 회화의 본질을 회복시키고 있다.이렇게하여 그는 한국 현대회화사상 우뚝한 봉우리중의 하나로 서게 되었다. 내년은 그의 열번째 개인전이 잡혀있다.그러나 변화추구보다 신운이 깃든 절제의 필치로서 그는 진실하게 화면을 지휘하는 시기다.따라서 능란한 능품이나 기교적인 묘품,뛰어난 절품을 지나 화가 최고의 영예인 신품의 화경에서 명품절색을 경이로 펼칠 것에 틀림없다. ▷연보◁ ▲1927년 충남 연기출생 ▲1949년 국전 제1회부터 81년까지 30회출품 ▲1952년 서울대미대 회화과졸업 ▲1953년 국전 특선및 국무총리상 ▲1954년 대한미협전서 공보실장상 ▲1955년 국전 대통령상,대한미협전 국무총리상 ▲1956년부터 이대미대교수 ▲1957∼79년 국전초대작가,국립현대미술관초대전 심사위원·초대작가 선정위원,국전심사위원및 심사분과위원장,국전 운영위원 ▲1958년 첫 개인전 ▲1960년 묵림회 창립회원 ▲1962년부터 서울대미대 교수 ▲1964년 청토회 창립회원 ▲1964∼81년 「19 10년이후의 한국미술」「해방이후의 한국화」「오원 장승업연구」「신벽화 연구」등 논문발표 ▲1965년 도쿄 일동화랑 개인전 교토 토교화랑 개인전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 기록화(역진개척도)제작 ▲1976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인전(그라피오 테케트 화랑) ▲1977년 개인전(현대화랑),중앙미술대전 심사위원 ▲1980년 개인전(현대화랑) ▲1981년 3·1문화상,서울시 문화상심사위원,유럽및 미국의 미술관 박물관 미술교육시설 시찰 ▲1982년 일본서「한·일·중 동양화3인전」(주일 한국문화원),한미수교 1백주년기념 사절단으로 도미 ▲1983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이후 해마다 예술원회원전 ▲1986년 이대대학원 교수 ▲1987년 예술원상,박노수미술전(백악미술관),하와이 동서문화협회 초청전시 ▲1989년 서울미술전 추진위원장 ▲1991년 예술원미술분과회장,이대정년퇴직,현대미술초대전추진위원 ▲1994년 5·16민족상 학예부문상,예술원 개원40주년 기념전 ▲ 대한민국 예술원정회원
  • 고전도 바뀐다(외언내언)

    「고전을 읽자」는 말처럼 우리에게서 일상화된 사회적 구호는 없다.그런가 하면 무엇이 고전이고 왜 고전을 읽자는 것인가에 대해 우리처럼 또 막연한 나라도 드물다.그저 책은 읽어야 하는 것이고 책중엔 옛책이 좋은 것이라는 정도의 순박한 상식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고전도 바뀌고 고전도 파괴된다.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는 미국문학의 대표작이다.하지만 70년대부터 미전역의 학교도서관에서 이 소설은 추방됐다.이 시대에 성장하고 있는 젊은 학생에게 유효한 어떤 지혜나 메시지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도서선정 위원회의 판정이었기 때문이다.같은 이유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도 밀려났다. 80년대초 하버드대학의 중핵교육안에서도 교양교육의 목표는 바뀌었다.「교육받은 사람은 우주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얻는 과정에 비판적 안목을 가져야 하며」 「교육받은 사람은 편협하거나 지역적이어서는 안되며」 「교육받은 사람은 윤리적 문제에 있어 분별의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새로 정리한 교양교육의목표다.물론 새목표에 맞는 도서목록이 새로 마련됐다. 우리 사회의 고전도서목록은 무엇인가.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일본사회가 만들어낸 목록을 기초로 하고 있다.그 뒤 한번도 제대로 된 검토를 한 일이 없다.그런가 하면 책을 권하는 사람은 늙은 세대가 됐다.그저 옛기억을 더듬어 말하고 있을 뿐이다.여기에 70년대이후 시대를 뛰어넘어 진보주의적 도서목록이 집중적으로 교양도서목록에 뛰어들었다.편협한 사태가 피할 수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이 역시 다시 들여다본 바 없다. 서울대 인문·사회계열에서 지난해부터 고전강독강좌를 시작했다.그 반응이 좋아 앞으로는 전계열에 확대할 것이라는 원칙을 세웠다.이 시도는 바람직하다.그러나 더 호소력을 얻으려면 그 의도를 설명할 수 있는 새 목록이 나와야 한다.현재 쓰는 목록은 사실상 20세기 전반부의 목록이기 때문이다.
  • 의약품 안전대책 강화하라(사설)

    의약품 안전성 대책을 강화해야 한다.한가지 질환치료에 특효약으로 써온 약품이 엉뚱하게 다른 증상을 유발한 사례가 이즈음 자주 드러나고 있다.또 선진국 개발 효과만 믿고 써온 의약품이 효과가 없거나 인체에 심한 부작용을 가져온 예도 보고되고 있다. 최근 젊은 층이 쉽게 사서 많이 복용해온 여드름 치료약이 각막염을 초래하며 중성지방 수치가 높은 사람에게는 췌장염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고 밝혀진 것과 먹는 무좀약도 50세이상 여성이나 간질환 병력자등에게 치명적인 간독성을 일으킬수 있는 것으로 확인된 것은 너무 뒤늦은 경고이다.시판중인 고혈압 협심증 치료제가 시각장애 정신병등 광범위한 부작용을 유발할수 있다고 뒤늦게 확인된 것도 충격이 아닐수 없다. 의약품은 모두 양날의 칼과 같이 효능과 부작용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말들 하지만 정제된 원료로 검증을 거쳐 만들었다는 의약품을 약국에서 파는 대로 병의원서 처방하는 대로 믿고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소비자들이다.의약품 행정 당국과 병의원 약국이 전문지식과 계통정보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의약품 안전성 문제는 전적으로 책임지고 대처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최근 보사부는 이런 의약품 부작용 사례를 의약관계 전문인들이 보는 의약품 안전성 정보지에만 밝혔다고 한다.부작용이 확인된 약품 제조업체에 대해선 부작용 내용을 약품사용 안내서에 추가한뒤 판매토록 지시했다고 한다.너무 소홀하고 소극적인 조치이다.의약품의 부작용 주의 사항은 어느 약이나 바로 눈에 띄지 않게 작은 글씨로 인쇄돼 있는 것이 보통이다.의사나 약사가 일러주지 않는 이상 소비자는 부작용사례를 생각하지 않고 사용하게 된다. 당국이 좀더 국민보건에 신경을 써서 소비자가 약품의 부작용 사례를 보다 잘 알고 대처할수 있게해야 한다. 병의원 제약사도 치료 판매 약품에 대한 책임의식을 좀 더 높여야 한다.최근 미국에서 최상의 난치성 간염치료약으로 선전되어 임상실험되던 약이 5명의 간장병 환자를 숨지게 한 사건이나 일본에서 특효약으로 암환자에게 사용한 신약이 환자에게 치명적인 부작용을 가져와 큰 문제가 된 것은 선진국에서 개발되어 환자에게 사용하는 약도 바로 믿고 도입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다. 우리 의약원료 개발 수준이나 검증 수준이 아직 미흡하여 외국의 개발제품을 그대로 믿고 쓸 수 밖에 없다해도 그쪽에서 충분히 검증되지않은 것을 성급히 쓰는 것이나 늦게야 부작용을 알게되는 것은 더 이상 양해할수 없다.보사부는 국내외 의약품 정보를 좀더 신속하게 입수,조치하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
  • 택시번호판 색깔 바꾼다/내년2월부터

    ◎주황색바탕 검정·녹색 글씨로 교통부는 내년 2월쯤 전국의 택시번호판을 주황색 바탕에 녹색이나 검정색 글씨가 쓰여진 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오명 교통부장관은 26일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현재 흰색 바탕에 짙은 녹색으로 숫자가 적힌 번호판은 식별이 잘 안돼 범죄예방차원에서 문제가 있다』며 『한꺼번에 모든 번호판을 바꾸면 무적차량의 운행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장관은 또 사업면허가 취소된 차량의 번호판은 시·도지사가 강제 회수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내년중 모범택시에 무선호출망을 갖춰 승객이 전화로 모범택시를 부를 수 있게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 「조선조 화원전」/「근대 고서화전」/전통회화의 다양한 화풍 한눈에

    ◎화원전/안견·김홍도등 당대 걸작 60점 선봬/30일까지 간송미술관/서화전/개화·척사파­근대 10대가 작품 진열/28일부터 학고재 화랑 조선조 대표적인 화원화가들의 작품만을 모은 고미술전과 개화기 전후 근대미술의 10대가 작품을 중심으로한 고서화전이 잇따라 열려 눈길을 끈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소장 전영우)부설 간송미술관은 47회째 정기전으로 「조선시대 화원화가전」을 열고있으며(30일까지) 학고재화랑(대표 우찬규)은 5회째 「고서화 소품전」으로 「근대로 오는 길목」주제의 고미술전(28일∼11월13일)을 연다.이 전시회들은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회화양식의 변천과정과 다양한 화풍을 들여다 볼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라는 데서 주목된다. 「화원 화가전」은 도화서 소속의 내로라하는 조선조 화가 46명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로 특히 화원 그림만을 소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화원은 도화원(도화원:나중에 도화서로 개칭)에 소속돼 왕실에서 필요한 장식용 그림과 국가행사의 기록화 등을 맡았던 직업화가.조선시대에는 사대부작가들이 일부 그림을 남기기는 했으나 그림 그리는 일 자체를 천시해 이 화원들이 남긴 그림이 회화의 대부분을 차지할뿐 아니라 회화사의 중심을 이룬다.따라서 이번 전시는 화원 그림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 같다.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그림도 여러점 포함된 이 전시에는 조선 초기 안견에서부터 조선조 최고의 솜씨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구한말 도화서의 마지막 화가로 산수 인물 화조에 두루 능했던 소림 조석진,그리고 심전 안중식등의 작품 60여점이 선보인다.남아있는 작품이 드문 조선초기의 작품으로 안견을 비롯,그의 제자인 석경·이상좌·이정근·유성업·이정 등의 그림도 소개돼 더욱 눈길을 모은다. 「고서화 소품전」은 이른바 개화파들의 글씨와 근대미술 10대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꾸며질 예정이다.「난」그림과 활달한 글씨 솜씨로 이름난 흥선대원군을 포함,오경석,김옥균,유길준,박영효,김홍집 등 개화파들의 글씨와 황현,최익현 등 위정척사파 선비들의 글씨,그리고 그 뒤를 잇는 윤용구,지운영등의 서화가 소개되는 것.또 춘곡고희동을 비롯,묵로 이용우,심산 노수현,청전 이상범,이당 김은호,소정 변관식,의재 허백련 등 근대미술,특히 동양화 10대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근대미술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이들의 작품에는 글씨건 그림이건 작가마다 강한 개성과 대담한 변형이 많이 나타나며 전체 분위기가 세련미 추구에 있다는 점이 공통된 특징이다. 작품 1백51점의 가격을 일일이 공개,이채를 띠게될 이 전시에는 근대 이전의 전통회화중 현재 심사정과 표암 강세황 등의 작품도 곁들여 비교감상의 길을 마련하며 김용준,청계 정종여 등 최근 해금작가의 작품도 함께 내놓을 계획이다.
  • 전국 교량156곳“즉각 보수SOS”/“위험한 다리들”지역별실태점검

    ◎상판 곳곳 균열… 덧포장 공사로 눈가림/이음새 벌어져도 손못쓰고 예산타령/“통행제한” 경고에도 대형차량 유유히 질주 전국의 다리들이 흔들거리고 있다.대부분 다리들이 한치앞을 내다보지 못한채 허술하게 만들어 진데다 사후관리 또한 겉치레로 일관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이미 「빨간불」이 켜진 다리조차 대부분 「조심」이라는 팻말하나만 세워둔채 방치돼 불안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구태여 외국의 사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다리는 분명 더이상 두고 볼 수없는 중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내무부가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실시한 자체안전검점 결과 각 시도가 관리하는 전국의 7천5백80개 다리가운데 전체의 2%에 해당하는 1백56개가 불안전한 것으로 나타났다.이번 서울 성수대교의 붕괴 대참사를 계기로 전국의 위험교량을 지역별로 점검해본다. ○육안점검에 그쳐 ▷충청◁ 충청지역 최대규모의 다리이면서도 사경을 헤매고 있는 공주의 금강교.일제때인 지난 32년 폭 6m 길이 5백13.5m로 세워진 이 다리는 이미 10년전인 84년 한국건설안전협회로부터 다리로서 암 선고를 받고 4.5t이하의 차량만 통과하도록 통행이 제한됐다. 이같은 중증진단에도 불구하고 올 3월 7천6백여만원을 들여 교량신축 이음장치,난간보수공사를 했지만 통과차량의 통행을 제한하는 선에서 미봉책으로 일관되고 있다.결국 지난해 대전산업대학 구조기술안전연구소팀은 정밀검진에 나선 결과 버스 4대와 트럭 6대가 함께 통과할 경우 무너지게 된다고 경고했다.다급한 나머지 승용차만으로 금강교 통행차량을 제한했고 하루 한차례씩 도보점검으로 하루 2만여대의 통행차량안전을 담보하고 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와 규암리를 잇는 8백13m의 백제대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백마강을 가로질러 68년에 세워진 이 다리는 현재 상판 26개마다 손바닥만한 웅덩이가 파인데다 상판이음새 또한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벌어졌다. 또 상판밑의 23개 교각들도 대부분 백마강물살에 깎여 하루 이곳을 지나는 1만4천∼1만5천여대의 차량들을 위협하고 있다.급기야 당국에서는 다리 양쪽에 「21t이상 차량 통행금지,차간거리 40m확보,주행속도 시속 40㎞이하」라는 통행제한 표지판을 세웠다.그러나 이에 아랑곳 하지않고 대형트럭들이 질주,다리의 피로도를 가중시키고 있다.이곳 주민들은 새로운 백제대교가 건설되는 앞으로 5년동안은 목숨을 걸고 백마강을 건너다녀야 될 형편이라고 하소연한다.충남지역에만 이같은 아슬아슬한 크고 작은 다리가 무려 12개에 이른다고 충남도는 밝히고 있다. ○교각은 들쭉날쭉 ▷호남◁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나주교는 호남의 「성수대교」로 꼽힌다.나주시 삼도동과 나주군 금천면을 잇는 나주교는 구태여 지난 92년의 한국건설기술안전협회등의 진단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육안으로도 온통 멍든 모습을 한눈에 보여준다.78년에 건설된 하행선 나주교는 네번째와 다섯번째 상판이음새 부분이 30∼40㎝가량 틈새가 벌어져 영산강물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이에앞서 57년에 세워진 상행선은 더하다.상판이음새 20여군데가 균열돼 틈새가 벌어지고 상판을 묶어주는 철판은 시뻘겋게 녹슨채 그위는 아스팔트로 덧씌워져 말그대로 눈가림투성이다. 30t이상의 대형트럭을 포함,4만여대의 차량이 질주하는 나주교는 건설당시 통과하중이 18t으로 하루 1만2천대가 통과되도록 세웠으니 불과 16년여만에 흐물거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이같은 형편에도 보강공사는 커녕 보수관리및 사고에 대한 안전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다.25일에도 전남의 12개 시·군과 광주를 연결하는 폭 16m,길이 6백20m의 영산교 양쪽에는 공사중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지만 차량 통제관이나 공사관계자는 볼 수없었고 과적차량들이 1백㎞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이곳 나주교로부터 남쪽 10㎞쯤 떨어진 구 영산교는 당국의 관리부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지반이 내려앉아 교각들이 들쭉날쭉 서있고 상판을 받치는 철골빔이 녹슬어 휘었다.지난해 대한토목학회의 정밀진단결과 「다리기능상실」을 진단을 받았다.그렇지만 32년 지금의 나주시 이창동과 영산동을 잇기위해 길이 3백84m로 만들어진 이다리에는 1t이상의 화물트럭과 12인승이상의 승합차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고도제한 구조물이 설치돼 있지만 1t이상 화물차량등 하루 5천여대가 천연덕스럽게 지나고 있다. 전남도 관계자는 『지금까지 수차례 이리지방국토관리청에 다리 보수에 필요한 예산지원을 요청했으나 도로법상 교량은 지방자치단체의 소관사항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며 『1천2백64개의 다리 가운데 23%에 달하는 2백81개가 노후다리로 보수등 안전관리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안전불감증 노출 ▷영남◁ 서울 성수대교 붕괴사고 이후 대구의 대표적 노후교량인 팔금교와 노곡잠수교,제2아양교를 건너다니는 자동차 운전자들의 불안은 고조되고 있다. 대구∼영천간 산업도로및 경부고속도로 동대구톨게이트 진입도로에 연결되는 제2아양교는 하루 6만∼7만대의 차량이 오가는 대구지역의 요충다리이다.지난 70년 PC빔 공법으로 금호강을 가로질러 노폭 17.5m,길이 2백75m로 세워진 이후 이미 지난 87년 상판에 직경 2m가량의 구멍이 난데 이어 91년에 또다시 상판균열이 생겨 「위험다리」로 지목돼 왔다. 대구시는 이같이 제2아양교에 뻥뻥 구멍이 뚫리자 92년 교량안전진단검사를 실시했고 그결과 총중량 32t이상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그러나 다리양쪽에는 이같은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조차 없다.성수대교 붕괴사고가 터지자 부랴부랴 도심 진입로쪽에 직원 한명을 배치,과적차량의 우회를 유도하고 나서 당국의 「안전불감증」을 노출시켰다. 또 팔거천을 가로질러 구안국도와 대구시 북구 사수동을 잇는 팔금교 역시 교각부분이 20㎝이상 침하돼 길이 72m인 다리 전체가 활처럼 휘었다.지난 72년 설계하중 13.5t으로 건설된 이래 여기저기 이상징후가 가시화되자 4.5t이상트럭의 통행제한 입간판이 세워졌다.그러나 트레일러,덤프트럭등 과적차량이 통제없이 통행하고 있다. 대구시 사수동의 이모씨(46·회사원)는 『92년초부터 팔금교의 침하현상이 심화되었지만 당국이 실효성 있는 대책을 시행하지 않아 지역주민들은 매일 곡예를 하는 기분으로 이 다리를 지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길이 2백88m,폭 4.6m로 76년에 만들어진 노곡잠수교는 수많은 균열을 시멘트 덧포장공사로 눈가림식 땜질공사를 해온 케이스.지난해 7월 북구청이 실시한 정밀안전진단에서도 12개 상판중 5개에 균열이 발견되는등 교량의 안전도가 최악으로 판정됐다.90년들어서부터 상판과 교각 이음새부분에 3㎝가량의 틈새가 벌어지는등 붕괴위험을 안고 있다. 주민들은 다리가 계속 방치되자 교각틈새에 흰글씨로 『교각에 틈이 벌어졌으니 통행에 주의할 것』이라는 위험 표지를 써붙이기에 이르렀다. 경북 군위군 봉황교,고령군 안림교,경산군 와촌교등 5개는 최근 안전진단결과 붕괴위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으나 이들 교량에 대한 전면보수 계획은 예산부족을 이유로 95년이후로 미루지고 있다. 이같은 「흔들다리」는 경남지방에도 적지 않다.함안군 칠원면 유원교는 상판 곳곳이 균열돼 있고 난간이 심하게 부식된 다리위로 차량이 지날때마다 심하게 흔들려 전문가아닌 누구라도 붕괴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실정이다. 칠원면에서 창원으로 출퇴근하는 서모씨(50·경남경찰청)는 『유원교에 차량이 통행하면 교각부터 흔들리고 있으나 당국은 차량통행제한외에 지금까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면서 『이마저 통행제한 조치도 심야에는 지켜지지 않아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같은 불안은 밀양시 내일동과 삼문동을 잇는 밀양교도 마찬가지로 대형차량이 하루 7천5백여대씩 통과하면서 수명을 단축시킨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그러나 밀양교는 사업비 43억원을 제때 확보하지 못해 지난 8월에야 뒤늦게 우회도로 건설에 착공,이제 겨우 5%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근시안적 설계와 건설,무분별한 남용과 예산타령에서 비롯된 사후관리 부재등이 복합돼 빚어진 전국 대형교량들의 중증은 지금 당장 치유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남대 김경찬 명예교수(토목학)는 『교량은 도로의 「관절」격으로 부실공사추방,지속적인 과적차량 단속,실효성있는 사후관리등 3박자가 함께 이뤄지지 않는 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다보성 고미술관/17세기 관서팔경 화첩 첫 공개

    ◎북 원전건설로 사라질 「영변 약산동대」 생생/사도세자 8살때 쓴 「동몽선습」서문도 발견 북한 영변의 약산동대등 우리나라 관서팔경을 그린 17세기 화첩과 사도세자(사도세자 1735∼1762)가 8세때 쓴 동몽선습 서문 등 사료적 가치가 큰 문화재들이 공개됐다. 다보성 고미술전시관(대표 김종춘)은 오는 22일부터 11월 5일까지 개최하는 개관 10주년 기념 고미술 특별기획전을 앞두고 20일 이들 문화재를 공개했다. 관서팔경 화첩은 평양·의주 주변의 여덟곳의 경치를 그린 그림으로 모두 18폭으로 구성됐다.화첩은 세로 64㎝,가로 44㎝ 크기로 채색이 매우 화려하고 필치가 매우 세심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관서팔경은 단지 지명만이 전해 내려져 왔으나 구체적인 풍광을 묘사한 그림이 발견,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특히 북한의 핵발전소가 건설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영변 약산 주변의 경관이 마치 지도를 대하듯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돼 있어 핵발전소 건설로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될 이곳의 옛모습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된다. 다보성 고미술관측은 그림에 나타난 건물들의 풍광·필체나 기법,종이의 지질등을 감안할 때 조선조 중반인 17세기 관아에 속한 화원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서팔경은 강계 인풍루,의준 통군정,선천의 동림폭,안주의 백상루,평양의연광정,성천의 강선루,만포의 세검정,영변의 약산동대 등을 지칭한다. 사도세자 친필 글씨는 영조가 지은 어제 동몽선습 서문을 28면에 걸쳐 베껴 쓴 붓글씨.습작형식의 이 글은 가로 36㎝,세로 57㎝ 크기의 종이에 단정한 해서체로 써 내려갔으며 모두 28면에 이르고 있다. 글씨만으로는 사도세자의 친필이라는 점이 드러나지 않으나 당시 사도세자의 시강(교사)을 지냈던 유언호가 이 글의 입수경위를 쓴 발문이 첨부돼 있으며 발문의 내용이 영조실록 18년의 기술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사도세자의 친필로 인정된다고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 시인 미당 서정주(이세기의 인물탐구:61)

    ◎팔순에도 샘 솟는 시정… 문단의 거봉/새로운 언어­독특한 깊이로 감동의 운율빚어/어릴적 가난­방랑 벽이 창작욕이 밑거름으로/“내 숨결 그칠 때까지 시어 더듬고 또 더듬겠다” 1948년 선문사가 발행한 미당의 두번째 시집 「귀촉도」에서 김동리 발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나의 유일한 정신상의 재보로서 쌓아왔다. 그의 뇌락불기한 인격과 자유분방한 시혼은 그 처녀시집 「화사집」을 통하여 이미 세상에 그「비늘을 번득인」바 있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적어도 이 땅에서 시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오늘날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이 혹성의 찬연한 광망과 위치에 등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평자들이 미당을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용되는 명평이다. 「뇌락불기」란 「마음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남에게 구속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미당의 문학적 족적은 광활하고 높고 깊다. 그리고 훨훨 나는 그의 두루마기 차림처럼 시에 관한한 무장무애하고 무소불위하다. 지금은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서 있지만 미당의 지난 세월은 가난과 슬픔과 방황과 방랑벽으로 그 인생의 절반이 혹독하게 얼룩져 있었다. 어릴 때는 당시를 배울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만14세 되던해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해서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적이 있고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했다가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으로 또 한번 퇴학을 당했다.다시 서울로 올라와 극예술연구회 연극배우노릇, 마포 도화동 빈민촌에 입주하여 넝마주이 행색으로 쓰레기를 줍기도 했고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교장이며 존경하는 스승인 석전 박한영을 만나 안암동 개운사에서 능엄경을 공부하게 되었다. ○어릴때는 당시배워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만주로 건너가 만주곡량주식회사 연길지점에서 경리과직원이 되는가 하면 김좌진장군과 이승만대통령의 전기집필,「옥루몽」등 옛소설 번역으로 생계를 잇다가 인촌 김성수 집안과의 인연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 학예부장을 지내는 등 그의 인생역정은 파란이 깊고 다양하기만 했다. 이토록이나곡절이 심한 방만한 생활덕분에 한때는 자살을 기도하다 미수에 그치고 생명의 존엄을 체험하고 나서야 미당은 비로소 삶에 대한 의욕과 생명의 활기가 몸속에 용솟음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광주 무등산 자연속에서 「난생 처음 보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조우하게 되었고 이무렵 「무등을 보며」「학」「상리과원」같은 명품을 연달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의 시들은 끊일줄 모르는 시심과 계류와도 같은 운율의 감동을 자아내면서 마치 가을 한낮 거문고 소리처럼 청랑한 운기로 흥취와 운치를 자아내는 것이 일품이다. 그의 탁월한 시업은 과거로의 관념적 도피나 신비주의에 탐닉한 시절이 있었고 영원의 생명에 대한 명상으로 온자하고 정밀한 내면을 구축하면서 「육체적 인간의 본원적 충동을 순화시켜 어느 순간엔가 숭고한 정신적 표현의 극에 도달」한 것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최근 「시와 시학」지에서 시인들이 「교과서에 실리고 싶은 시」로 추천한 「무등을 보며」는 명편중의 명편으로 미당이 아직 38세이던 19 53년 「현대공론」에 발표한 것이다. 그때 이 시를 읽은 젊은 이들은 「구구절절 감명을 사로잡는 명구」라든지 「화살처럼 꽂히는 충격」으로 이를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저 눈부신 햇빛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여름 산같은/우리들이 타고난 살결/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수 있으랴/청산이 그 무릎아래 지란을 기르듯/우리는 우리의 새끼들을 기를 수 밖에 없다…」 미당의 주옥같은 시들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다. 단지 그가 낳는 시마다 절륜의 절창으로 평가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평론가 유종호는 「창의성 있는 언어구사와 독특한 깊이와 지혜, 상당량의 시편이 그릇 큰 시인의 구비조건이라면 20세기 우리 시인 가운데서 이러한 조건을 가장 보기좋게 구비한 이로 미당」을 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과연 언어를 부리는 장인적 기술에서나 직관과 상상의 능력에 있어서나 만인이 칭송하는 대가의 반열에 선 그는 한국적 릴리시즘의 탁월한 정형을 만들어냈고 안주를 모르는 시정신으로 한국의 운치와 위엄을 어느 시에서나 감동적으로 증명해 왔다. 해인사 체류시절 미당을 사로잡은 소쩍새 울음소리는 그에게 불치의 슬픔을 느끼게 하는 음향으로 다가와 저 유명한 「귀촉도」와 「국화 옆에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에 벌써 일본여선생을 흠모하는가 하면 불혹의 나이때도 때때로 여난을 겪게 되어 「나 바람나지 말라고/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는/삼천 사발의 냉숫물」은 미당을 엿보게 하는 낭만시인의 일면이기도 하다. ○속과 선을 아는 성품 만년의 그는 인생을 관조하는 허허로운 마음과 가족을 거느린 가부장적 자세를 빌리고 있으나 「속도 알고 선도 아는 복합적인 성격」과 대체로 괴팍과 까다로움이 승한 편이다. 그 한 예로 70년대 초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청으로 영국시인 스티븐 스펜더가 한국에 왔을때 그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미당은 취중이었는지 한국의 정상다운 자존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팡이를 휘둘러 「TS 엘리엇이 아니면 돌아가라」고 외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시인 고은이 한때 주란과 폭소버릇으로 위아래없이 오만방자하게 굴자 처음에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어지로운 헛웃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가족회의끝에 그를 공덕동에서 추방하고 「고은출입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다. 그의 풍류는 나무와 돌과 침향(심향)과 글씨 그림외에도 난취미가 으뜸이다. 지난 70년 25년간 살아온 공덕동을 떠나 관악산밑 사당동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택호를 쑥 봉자 마늘 산자를 따서 봉산산방으로 붙여놓고 그는 한동안 나무심기와 난수집에 주력했다. 시암 배길기와의 광동보세며 삼중당 일력에 자필 시를 써주고 받은 제주한란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여류시인 김양식과의 중국춘란에 얽힌 대화는 난향같은 일화다. 당시만도 그가 지닌 서른분쯤의 난들은 「겨우 여중 2학년 정도의 잎만 여남은게 솟아올린채 꽃필날이 아득하기만 한데」 난화부재의 겨울날 김양식이 불쑥 전화를 걸어 「대만에서 구해온 중국춘란이 아주 썩좋게 한송이 피었다」고 자랑삼았던 모양이다.이때 미당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웃하나가 명주바지를 입으면 여러 가호가 두루 따뜻한거라는데 나도 그 푼수니 염려말고 잘 만끽하시라」고 했다. 그러자 김양식은 가족들과 휴가를 가게되니 「그 사이 며칠만 돌보아주시며 즐겨보시는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미당은 그제서야 눈이 번쩍 띄게 반가워했고 비록 빌렸을 망정 책상위에 난을 놓고 보고 또 보고 난향을 맡으며 「시의 감동이란 것도 내 생애에서 항용 이런 식으로 일어났다. 내가 소유하는 것에서보다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감동으로 시를 쓴 것이 많았다」고 한 산문에 적고있다. ○커피보다는 맥주 즐겨 그의 정열과 의욕은 식을 줄을 몰라 한때는 영어단어를 하루에 수십개씩 외는가 하면 70년 초반부터는 세계를 두루 일주하며 끝없는 여행길에 오르더니 최근엔 세계의 산봉우리를 높이순으로 1천6백여개나 줄줄이 기억해내는 독특한 취미를 보이고 있다. 미당은 올해 팔순이지만 아직도 그 시작은 그의 방창앞에 심은 소나무처럼 청청한 천뢰의 소리를 잃지 않는 기상이다.요즘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커피보다는 맥주」를 권하고 제자들이 마련한 시낭독회나 남을 축하하는 자리에 자주 모습을 나타낸다. 지난 9일에는 송파문화원에서 열린 국선문학회에 나와 「국선(국선)」이란 모임이름을 지어주고 후배들의 회장추대를 극구 사양하여 주변을 송구스럽게 했었다. 이제 자기자신을 홀연히 내쳐버리는 무집착의 상태에서 그의 최근의 시들은 글맛이 한층 무르익어「아무 말이나 붙들고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다. 산다는 것이야말로 사변의 연속이었던 시대를 거치면서 일찍이 김동리가 지적했듯이 미당은 지금도 「내 숨결이 아주 내 육신을 떠날 때까지는 더듬어보고 또 더듬어」 새로운 시에 대한 분방한 광망을 접어두거나 조금도 늦추려들지 않는다. ▷연보◁ ▲1915년 5월18일 전북고창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출생.서광한씨와 김정현여사의 2남2녀중 장남 ▲1929년 부안 줄포보통학교 졸업.서울 중앙고보 입학 ▲1931년 전북 고창고보2학년 편입,권고자퇴,서울 상경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입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 「벽」당선 ▲1936년 시전문지 「시인부릭」편집인겸 발행인 ▲1941년 처녀시집 「화사집」(남만서고)1백부 한정판 출간 ▲19 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 및 학예부장,문교부산하 예술과 초대과장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 ▲1952년 광주 조선대학 부교수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초대회원 ▲1955년 미국아세아재단 자유문학상 ▲1960년 동국대 부교수 ▲1961년 제1회 5.16문예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5년 서울 신문회관서 회갑연 ▲1976년 미당시를 주제로한 시화전 서울서 제주까지 6개월간 전시 ▲1977년 한국문인협회 회장 ▲1979년 동국대 정년퇴임,대우교수로 대학원 강의 ▲1980년 동아일보 문화대상 개인상부문 본상 「귀촉도」「서정주시선」「신라초」「동천」「질마재 신화」「안 잊히는 일들」「늙은 떠돌이의 시」「산시」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전5권) 「서정주 시선집」(전2권)등 시 8백여수와 「서쪽으로 가는 달처럼」등 산문집과 여행기가 있음.
  • 10년만에 개인전/승려화가 김원학스님(인터뷰)

    ◎“그림에의 몰두는 수행정진의 또다른 길” 승려화가 세석 김원학스님이 10년만에 세상구경을 나왔다.불교신문 지령1500호기념 초대전(15∼25일 ·서울 공평아트홀)에 내놓을 역작의 서화 31점을 들고 바깥 출입을 한 것이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번뇌가 없겠습니다.그럴때면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는 그림에 몰두했지요.그림이 곧 수행이 되었다고나 할까요.또 달리 생각하면 수행의 결과가 그림으로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두리봉 아래 한적대로 떠올라서 매화봉으로 지는 달보기가 천하일품이라는 관월암이 그림의 산실.지난 84년 개인전 이후 단 한점의 그림도 세상에 내놓지 않았으니까 10년만에 갖는 개인전이다.그런 탓에 그림속에는 한가닥의 속기도 어리지 않았다. 『부처님 모셔놓아 끼니 굶는 일 없고,그림 계속 그려서 좋습니다.오른팔을 잃을뻔한 고비를 넘기고 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도 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지요.그 보은은 수행정진하고 그림 그리는 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승랍 29년.교통사고를 당해 오른팔을 못쓰는 수난의 세월도 살았다.해인승가대를 거쳐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스님은 우계 오우선으로 부터 한국화를,청남 오제봉으로부터는 글씨를 사사했다.이어 한국전통남종화(남종화)의 산실인 해남 대흥사에서 수련을 쌓았다.그래서 화풍은 남종선이 추구한 이상,문득 깨치는 돈오의 경지처럼 맑고 시원한 산천경계로 살아났다.
  • 로마/카타콤베(아랍서 지중해까지:18)

    ◎기독교도 숨던 지하무덤… 미로수백㎞/「쿼바디스」의 아피아가도 주변에 산재… 땅굴 곳곳 교인들 수난 흔적 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가게를 구경하다 깜박 카메라를 놓고 나왔는데 두어 블록이나 걷고 있을때 『시뇨레! 시뇨레!』하면서 주인이 쫓아왔다.베네치아에서 만들어와 판다는 세라믹 액세서리들의 그 담백한 아름다움에 잠깐 정신을 놓았었던 것 같다.자리까지 비운 채 여기까지 유실물을 갖다주러 오다니 싶어 얼굴이 붉어진 것은 비단 그 가게주인이 예쁜 아가씨였던 때문만은 아니다.잊은 물건 으레 찾으러 들이닥치겠지 싶어 필자 같았으면 오불관언 그냥 버티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아무 것도 아닌 이런 사소한 일이 실은 한 나라의 민도랄까 문화적 수준을 제풀에 측정케 만들고 절감케 한다.이탈리아 사람들은 너무 친절해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 곧잘 나서기 때문에 골탕을 먹는 수가 있다고도 하지만(하긴 필자도 그 때문에 엉뚱한 길을 헤맨 적이 한번 있기는 하다),이 아가씨의 친절은 여태까지도 쉬이 잊혀지지가 않는다.남의 얼굴에다 제 얼굴 디미는 간판들이나 판을 치는 대도시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미덕이요 소양이다.피곤한 신경으로 거리를 걷다보면 간판들의 그런 번잡스러움 같은 것까지가 그 나라의 수준을 금세 헤아리게 만든다. ○친절한 시민 인상적 소위 앞서간다는 나라들의 그것은 대체로 그저 눈에 뛸 정도의 글씨로 숨듯이 얌전한 반면 후진 나랄수록 그 요란함과 새치기는 극성스럽다.TV나 신문·잡지의 광고 역시 예외일 리가 없다.잠자리에 들기전 하다못해 잠깐이라도 TV를 켜는 새버릇이 이번 여행중에 붙은 것도 순전히 그 탓이었을 것이다.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책광고·상품광고 같은 것이 우리처럼 허풍스럽고 요란한 나라가 또 있을 것 같지 않아 겸연쩍고 창피했다.2등은 쓰레기처럼 잊혀지는 존재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1이어야 한다느니,「정복할 것이냐 당할 것이냐」하는 따위 히틀러의 발악이 무색할 지경의 광고까지 태연히 횡행하는 사회이니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로마 국립공원 뜰은 장식삼아 여기저기 놓인 세계 유명인사들의 대리석 흉상들로도유명한데 관광온 이쪽의 원로 하나가 이승만 대통령의 흉상도 있을지 모른다는 농담을 듣고 열심히 그것을 찾아다녔다는 얘기가 있다.결국 찾지 못하자 귀국해서는 그 얘기를 글로까지 썼다는 것이다.이런 얘기의 우스꽝스러움은 「유명인사」라는 그 개념상의 차질에 있다.독재를 했건 뭘 했건 유명하기만 하면 「문화적 인물」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이 원로는 착각을 한 것이다.인도의 간디수상도 신청을 했다가 거절을 당했는데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일까보냐는 개탄이 나올 법도 하다.이 얘기를 해준 것은 60년대에 이주해서 30여년째 로마에서 살고있는 H씨이다.문청(문청)시절 어울려 다니던 친구로 이번에는 10여년 만의 해후인데 불혹의 연치가 완연한데도 그 유머러스하고 직재적인 사고방식은 여일했다.그 무렵의 친구들이 모르는 새 모두 소원해졌는데도 이 H씨만은 예 그대로 와락 반가운 느낌부터 앞선 것도 그 탓이었을 것이다.끝내 로마에다 뼈를 묻을 작정이냐는 농담에,집과 차와 가재도구를 다 정리해 귀국해봤자 강남에서 몇달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되레 역습이다.자녀들이 장성하자 사위만은 모국청년으로 골라야겠다 싶어 몇 차례나 기회를 만들었으나 돈 타령,땅타령,줄리어드다 하버드다 하고 외국유학 얘기만 나오다 대화가 끊겨 끝내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사돈될 사람들 간에도,당사자들 새에서도 대화가 그 모양으로 단절돼 내심으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데이트 몇번하면 으레 제 소유물로 알고 자질이야 있건 없건 유학물 먹은 일이나 자랑삼으면서 연애 따로,결혼 따로를 당연한 듯이 생각하는 이쪽 젊은이들의 그런 사고방식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근교의 아파트단지 식당에서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모처럼 배불리 먹여주고 그녀가 차로 데겨간 곳은 카타콤베 앞이었다.로마에 와서 뭘 봤느냐는 물음에 실은 아무 것도 보고싶지 않았다는 필자의 동문서답이 마음에 걸려서 였을까.카타콤베는 옛 로마 서민들의 지하무덤이다.왜 아무 것도 보고싶지 않았느냐고 이번에는 그녀도 묻지 않았다.숙소에서 확인한 TV채널만도 20여개가 넘고 인근 지방의 유선방송까지 합하면 천여 채널이 넘는다는 각종 정보홍수에 에워싸여 살다보면 문명이니 문화적인 혜택이니 하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온갖 빤히 눈에 보이는 세계가 되레 지겨워질 나이에 그녀 역시 이르른 것같다.정부 각 기관과 문화관과 대기업의 본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 로마의 신시가지 에우르 구역을 도중에 거치면서 필자는 과천을 제풀에 연상하고 있었는데,카타콤베들은 그 너머 구아피아가도 인근에 흩어져 있었다. ○10만명 매장된 곳도 로마제국 때 닦여진 길이다.붉은 언덕과 짙은 색깔의 나무들이 갑자기 사방을 에워싸면서 차량마저 끊기다시피해 한적한 시골을 연상시키는 이 가도는 아닌게 아니라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속담을 역으로 연상시켰다.지금은 관광자원이 돼버린 옛 제국의 영화가 하층민들의 무덤까지도 그냥 버려두고 있지 않는 것이다.물론 이 무덤들이 특별히 유명해진 것은 박해를 받던 그 무렵 기독교도들의 지하 은신처요 포교활동의 근거지였다는 까닭이 더 크다.도망을 치던 베드로가 예수의 환영을 만나 저 유명한 대사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읊조리던 데가 아피아가도였고 그때 남은 예수의 발자국모형이 보존된 도미네 쿼 바디스교회가 이 인근에 있다.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쿼 바디스」나 「성의」 같은 것에도 물론 카타콤베가 나온다.지하 2·3층,어떤 것은 5층까지 파내려간 이 부근의 수십기 카타콤베들은 복잡한 미로와도 같아서 혼자서는 들어갈 수가 없고,10만여명이나 매장된 곳도 있으며,그 길이를 합하면 수백㎞에 이른다고 한다. 입구에서는 각국 언어별의 가이드들이 여남은명씩 되는 관광객들의 조를 짜고 있었다.어쩌다 네덜란드어 가이드를 무심코 따라들어가 설명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구태여 그런 것이 필요한 것같지도 않았다.사람 하나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만한 흙벽의 좁다란 통로와 역시 흙으로 된 계단을 몇번이나 꼬부라지며 내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가이드의 랜턴불빛에 기괴하고 참담한 낙서와 그림들이 홀연히 벽에서 나타나는가 하자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를 샛길들이 곁으로 불쑥불쑥 들이닥치곤 했다. 이런지하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돼버린다는 제풀의 상상은 기묘한 것이었다.나는 왜 여기 있는가,이번 여행은 뭐땜에 떠나왔는가 하는 따위 상투적인 의문들이 그제야 근거를 찾고 입지를 얻은 듯한 느낌이랄까,갑자기 천지가 막막했다.초기 기독교도들의 그것뿐 아니라 중세의 여러 종교적인 박해에도 이곳은 피난처가 됐던 모양으로 지상으로 올라오는 중간중간의 작은 방들에는 그 수난의 표상들과 기념물들이 흔적이나 조각들로 새겨지거나 놓여 있거나 했다.화살에 목이 꿰인 성 아무개,칼로 순교당한 누구 하는 식의 그런 전시물들 역시 숭엄한 분위기이기는 해도 청량한 느낌은 아니다.로마시내에는 4천여 승려들의 해골을 수백년에 걸쳐 모아놓은 해골사원이라는 으스스한 곳도 있지만,이런데를 특별히 찾는 사람들 역시 일반적인 심성의 그런 관광객들은 아닐 것도 같다. ○중세에도 피난처로 겨우 한시간 남짓이나 머물다 나온 지하에서 로마라는 한 도시의 허상을 통째로 별견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하면 아마 과장일 것이다.사람사는 세상에는 으레 있게 마련인 그 말할 수 없이 구질구질한 거래와 아귀다툼들이 이를테면 로마라 해서 어떻게 이런 지하세계 같은데로 깨끗이 모두 매몰될 수가 있겠는가.필자가 카타콤베 속에서 저절로 떠올린 로마의 그 허상이란 것도 실은 숙소근처의 가게에서 사흘째 눈독을 들이고 있던 싸구려 골동품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우리 돈으로 2만여원쯤 되는 그 놋쇠물병은 연륜이랄 것도 쓸모도 별로 없어 보이는 얄팍한 물건 같았으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어떤 곡선형태라는 그 한가지 점만으로도 어딘가 정답고 신선하게 느껴져 값을 깎자느니 안된다느니 하고 며칠째 줄다리기를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도무지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는 가게의 뚱보주인은 필자가 들를 때마다 『적당하고 좋은 값』이라면서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이쪽 역시 기어이 에누리를 해서 그것을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들떠 있었다는 것도 아니다.구태여 따지기라도 한다면 한계가 빤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눈곱 정도로나 허용된 소위 그 「자유」라는 명제나 「자유스럽고 싶다」는 감정을 두고 필자도,그도 사실은 줄다리기흉내를 즐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멸망의 원인(백제를 다시본다:30·끝)

    ◎한강유역 뺏긴뒤 서남부에 고립/의자왕,초기 전승에 자만 실정 거듭/대당외교 실패… 많은 충신 귀향보내/18만 나당연합군 침공때 동원가능 병력은 5천명 부소산성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노라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이 마냥 평화롭게만 느껴진다.1천3백년 전 이곳에서 망국의 통한을 품은 3천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서기 660년 당의 침략군이 신라와의 사전협약에 따라 서해로부터 금강 하구에 소리없이 진입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한 뒤 사비도성을 유린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백제는 왜 멸망했는가.이 수수께끼를 속시원히 풀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란 없다.백제 멸망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다.역사적 인과관계에서 볼 때 우리들은 많은 멸망원인을 열거할 수 있으나 이를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삼국항쟁이 격화된 6세기 후반 이래 백제는 경쟁국가인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그 입지랄까 행동반경이랄까가 매우 좁았다.즉 한강유역을 송두리째 신라에 빼앗긴 뒤로부터 백제는 줄곧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백제가 기대를 건 잠재적인 동맹세력은 고구려였으나,양국은 다만 해상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을 뿐 이었다.그런 까닭으로 백제는 자신을 ㄱ자 모양으로 포위하고 있는 신라와의 군사경계선을 돌파하기 위해 몸부림쳤다.그것은 한 때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하지만 백제는 결코 신라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백제가 신라와의 국경전쟁에서 헛되이 국력을 소모하는 동안 내부사정은 차츰 악화되어 갔다.의자왕이 641년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을 때만 해도,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다.그는 인간적으로 나무랄데 없는 성품이었고,국가중흥의 열망에 불타 있었다.왕태자 시절 지극한 효성으로 해동의 증자라는 평까지 듣던 의자왕이었다. ○신라 포위 못벗어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 결행한 신라 침공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마침 642년 평양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군국의 대권을 장악했는데,의자왕은 그와 손잡고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백제군은 중국으로 통하는 신라의 서해 관문인 당항성(경기도 화성군)의 목을 죄는 한편 신라의 낙동간 방면 전선사령부가 위치한 대야성(경북 합천군)을 함락하여 경주를 가까이서 위협했다.이같은 전과는 의자왕의 경탄할 만한 기민성과 결단력에 힙입은 바 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의자왕의 인간적인 약점이 노출되었다.전투에 잇따라 승리한 의자왕은 어느 덧 자만심에 빠져 만기를 독재하는 통치스타일로 기울어졌다.사태를 더욱 악화시긴 것은 왕비 은고의 지나친 권력욕이었다.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부여 정림사탑에 전승을 기념하는 글을 새기도록 했는데,거기에는 멸망 당시 백제의 정치상황을 설명하여 『의자왕이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아낙네(왕비)를 너무 믿어 형벌이 오로지 충양한 사람에게 미쳤다』고 했다.양심적인 재상인 성충이 옥사하고 흥수가 귀양을 간 것도 이같은 난정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또한 해방 직후 부여에서 우연히 탑비가 발견됨으로 해서 그 실재가 확인된 대좌평 사택지적의 정계은퇴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충신들이 밀려난 자리에는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임자 같은 인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왕비 권력욕 지나쳐 무엇보다도 의자왕이 범한 큰 과오는 백제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이다.당은 신라측의 끈질긴 한반도 개입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와 화평관계를 꾀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의자왕은 이같은 권고를 거듭 묵살했다.652년 이후 백제는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당과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다.백제를 치기로 한 신라와 당 양국간의 비밀협상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절박한 때에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외교적 실책이었다.바야흐로 백제 상공에는 잔뜩 먹구름이 닥쳐오고 있었으나,의자왕은 전혀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서기 660년 여름 신라와 당 연합군의 침공은 백제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백일하의 날벼락이었다.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대군이 국경선 깊숙이 나타났을 때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결사대 5천명이 고작이었다.이 결사대는 사흘동안 황산벌(충남 연산)에서 신라군과 처절하게 싸운 끝에 전원 옥쇄했다.한편 13만명에 달하는 당나라 군대는 금강 동쪽 기슭에 상륙,7월 11일 신라군과 합세했다. 드디어 12일에는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 공격에 나섰다.연합군은 도성 동쪽 20여리쯤 떨어진 곳에서 백제군의 소규모 저항을 받았으나 이를 단숨에 격파하고 염창리에서 능산리로 이어지는 나성을 통과,순식간에 도성 안으로 진입했다.적군의 강습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북쪽 웅진성(공주)으로 달아났다.이에 왕의 둘째 아들 부여태가 왕권을 대행했으나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이윽고 연합군이 시가지를 가로질러 부소산성을 포위하자 절망에 빠진 지배층과 백성들이 떼지어 성에서 내려와 항복했다.그리하여 부소산성 정상에는 나당 연합군 깃발이 나부끼게 되었다. ○부흥운동 무위로 그러나 백제는 그 뒤 3년간 더 살아 꿈틀거렸다.국왕의 항복결정을 거부한 지방주둔 병력이 왕족 복신의 지휘 아래 총집결하여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벌인 것이다.이들은 한때 사비도성을 포위한 일까지 있었다.주류성(서천 한산 혹은 부안으로 짐작됨)과 임존성(예산 대흥)이 당시 부흥운동군의 일대 거점이었다. 663년 가을 백제와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이 부흥운동군을 돕기 위해 3만대군을 보냈다.그러나 왜군은 백강하구에서 신라·당 연합군에 포착되어 네차례의 접전 끝에 섬멸되고 말았다.당시 불에 탄 왜선 4백척에서 뿜어대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중 양국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왜군 격파로 사기가 오른 연합군의 일제 공격으로 주류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백제부흥운동은 그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처럼 백제는 가고 말았으나 그들이 창조한 문화의 가지는 신라와 일본 등지에 이식되어 그뒤 오랜 세월 생명력을 유지했다.지난해말 세상에 공개된 금동향로는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정화로,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망국의 군주/의자왕 중국 북망산에 묻힌듯/패망후 당나라에 끌려가 병사 우리가 고대사에서 만날 수 있는 큰 비극을 꼽자면백제패망을 다룬 AD660년의 기사가 그 하나일 것이다.궁녀들이 꽃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옛 이야기와 더불어 아련히 들려오는 사비도성의 황급스러운 말발굽소리는 백제사가 간직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때에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했던 의자왕도 결국 나·당연합군에 붙잡혀 2만여 백제유민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그러나 이 망국의 군주는 생몰연대도 전해지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당에서 병사한 것으로만 되어있다.이는 의자왕과 휩쓸려 포로가 된 왕자 부여릉(AD615∼682년)이 당에서 남긴 비교적 소상한 활동기록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이 물음에 해답을 던져줄 가능성은 있다.의자왕의 신하로,또 왕자 부여릉과 백제부흥운동을 통해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흑치상지(AD630∼689년)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중국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1929년에 발굴된 이 묘지명은 현재 남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흑치상지의 묘지명은 왕자 부여융이 주군으로 받들어지고 있음을 표현했다.또 묘지명은 AD677년 부여융이 당으로부터 「웅진도독 대방왕」에 임명되었을 때 흑치상지는 속관의 직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다만 41줄 1천6백4글자나 되는 묘지명 새김글씨에 의자왕 기록이 전혀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사학계는 당나라 왕후장상들의 묘역 북망산을 계속 주시하는 입장이다.북망산에서는 백제유민 흑치상지 부자의 묘지명 말고도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고구려유민인 천생의 묘지명이 출토되었다.이로 미루어 의자왕의 무덤도 북망산 묘역 어딘가에 존재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백제 최후의 군주 의자왕의 무덤을 찾는 일은 한·중학계의 협력에 따라 성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래서 학계는 북망산 한쪽에 묻혀있을 의자왕 묘지명을 찾아야할 큰 역사숙제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 유출 명단에 의원·장차관 많아 눈길/지존파 수사 이모저모

    ◎○·△·×는 천씨애인이 사업용으로 표기/“억울해서 자수” 이길현씨 진술 오락가락 ○…「지존파」사건을 수사중인 서초경찰서는 백화점고객 명단을 넘겨준 천미선·강성자·김민경씨 등 사건관련 주요인물의 신병이 속속 확보됨에 따라 이제까지의 공범여부수사에서 고객명단 유출경로쪽으로 수사방향을 일단 급선회. 경찰출두 초기만 해도 『무기브로커로 보도된 것이 억울해 자수를 결심했다』며 무죄를 극구 주장하던 이주현씨는 계속된 밤샘조사에서 시시각각 진술을 번복. 이씨는 지존파 일당으로부터 온라인송금으로 5백만원을 받은 것 외에는 한푼도 더 받은 일이 없다고 진술했다가 계속된 추궁에 지난달 중순에도 2백만원을 받았다고 실토하는 등,허위진술로 일관. ○…이씨의 거주지인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다세대주택 주민들은 이씨가 그렇게 끔찍한 범행과 연루돼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 한집에 세든 30대 주부는 이씨의 방을 가리키며 『최근 방주인이 보이지 않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며 『그러나 무척 온순해 보였던이씨가 흉악범들에게 무기를 공급했다니 소름이 끼친다』고 말하기도. ○…지존파사건을 계기로 살인·실종 등의 미제사건을 갖고 있는 전국의 각 경찰서는 서울 서초경찰서에 지존파 일당이 개입됐는지 여부에 대해 공조수사를 의뢰. 충남 논산경찰서는 지난해 8월 논산군 두마면 남선리의 계룡대 골프장입구에서 다방 여종업원 박정숙씨(28·대전 유성구 장대동)가 살해된 사건에 대해 지존파 관련 여부를 의뢰. 강릉경찰서도 지난 4월 강릉시 안목해수욕장에서 발생한 30대 여자의 토막살인사건에 대해 수사협조를 요청했고 미군범죄수사대(CID)도 지난 5월 의정부에서 생긴 미8군소속 여군 총기살해사건에 대해 합동수사를 요구하는 등 공조수사 대상은 모두 4건. ○…지존파에게 무기를 구입해준 브로커가 김현양과 같은 마을 후배인 이씨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영광군 백수읍 양성리 주민들은 지존파의 끔찍한 범행을 보고 놀랐던 가슴을 다시 쓸어내리며 또한번 충격에 휩싸인 분위기. 주민들은 『이씨가 추석이 지나 고향에 내려온 것을 보고 성묘하러 온것으로 알았다』며 『서울서 착실하게 돈을 버는 줄만 알았지 이같은 일에 연루된 줄은 몰랐다』며 한숨. ○…지존파의 범행대상으로 지목된 현대백화점 고객명단이 신용판매부 여직원 김민경씨에 의해 흘러나온 것으로 밝혀지자 백화점 관계자들은 일손을 놓고 허탈해 하는 모습. 대다수 직원들은 『김씨가 24일까지 아무런 내색없이 정상적으로 근무한데다 이날 퇴근때도 다음날 대체휴가를 간다고 깍듯이 인사했다』며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 ○…현대백화점에서 유출된 우수고객명단에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경제부처의 장·차관,대기업과 언론사 간부등 사회 지도층이 다수 포함. 이 백화점 신용판매부가 93년 12월6일 작성한 이 명단에는 지난 연말 한달동안 이 백화점에서 가장 많은 물품을 구입한 사람 순서로 모두 1천3백65명이 기재. 이들이 이 백화점에서 물품 구입에 쓴 금액은 1인당 평균 4백만원선으로 모두 60억원대에 이르러 이 백화점의 월평균 매출액 2백억원의 3분의 1을 기록. 물품구입 순위 1위인 정모씨(서울 서대문구)는 한달동안 8백90만9천6백원어치를 썼고 3위인 모출판사 대표는 5백76만여원을 의류 구입등에 지출. 한 국영기업체 사장은 3백90여만원을,경제기획원차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한 인사는 2백여만원을 사용. ○…백화점 고객 명단에 있었던 ○△× 표시는 지존파가 범행을 위해 고액순으로 체크한 것이 아니라 천씨의 애인 K모씨(28)가 전화마케팅 과정에서 적어놓은 것으로 밝혀졌다. 유통회사에 다니던 K씨는 천씨로부터 고객명단을 넘겨받은 뒤 전화마케팅을 위해 고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고객으로 거래할 가능성이 있는 정도에 따라 다르게 표시했다는 것. ◎명단유출 김민경씨 일문일답/“이면지로 사용위해 보관해 오던것”/선배언니 줬는데… 지존파 모른다” ­언제 어디서 명단을 넘겨주었나. ▲지난 4월 중순쯤 현대백화점 신용판매과 사무실에서 예전에 함께 일했던 선배언니(강모씨)에게 주었다. ­명단은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나. ▲이면지통에 보관했다. ­회사규정에 3개월뒤에는 폐기해야하는 규정이 있는데. ▲뒷면이 깨끗한종이는 버리지않고 이면지로 사용해 왔다. ­고객명단은 유출해서는 안된다는 회사규정을 몰랐나. ▲안다.그러나 남편의 DM홍보자료로 쓴다며 수차례 부탁하고 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아 별 쓸모가 없을 것 같아 주었다. ­금품을 받고 명단을 넘겨주었나. ▲돈같은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돈을 받은 것은 절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유출시켰나. ▲그런 일은 전혀 없다. ­고객명단이 브로커등을 통해 유통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 ▲전혀 모른다. ­명단을 건네주는 것을 본 사무실직원이 있나. ▲다른 직원들은 있었지만 보았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지존파와 관련된 보도가 나간뒤 본인이 유출한 자료라는 것을 알았나. ▲오래된 일이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언제 알았나. ▲25일 아침에 선배언니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야 알았다. ◎고객명단 유출 5명 어떤 처벌받나/직원김씨 3년징역 가능/전산망관련법 적용… 배임·절도도 가능/백화점선 해고·손해배상 청구할수도 「지존파」가 입수한 「우수고객명단」이 현대백화점 신용판매과 김민경씨로부터 유출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이 명단 유출에 관련된 김씨등 5명에 대한 사법처리여부가 관심을 끌고 있다. 현행법상 적용가능한 법규는 개인정보유출에 전산망을 이용했을 경우에만 「전산망 보급 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있다.그밖에는 절도죄나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할 수가 있다. 고객명단이 애인 K씨의 부탁을 받은 천미선씨가 친구 강모씨에 의해 연결된 백화점 여직원 김씨로부터 유출된뒤 지난 8월 「지존파」조직원 김현양의 친구 이주현씨에게 건네진만큼 이들 5명은 「우수고객명단」의 유출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경찰은 우선 명단을 빼낸 백화점 여직원 김씨에게는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이나 업무상 배임죄·절도죄를 적용할 방침이다. 특히 백화점측은 김씨를 상대로 회사의 명예실추등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나 해고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이주현씨등 4명에 대해서는 검찰과 협의해 법적용을 한다는 입장이다. 「전상망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법률」 제25조에 따르면 전산망에 의해 처리·보관·전송되는 타인의 비밀을 침해하거나 누설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전산망 관련 종사자가 이같은 정보를 빼돌렸을 때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 독서와 시력(최선록 건강칼럼:37)

    ◎1시간 독서후 10분정도 눈을 쉬게하는 습관 바람직/결명자·구기자·홍차 매일 마시면 눈 피로회복에 효과 날씨가 서늘한 가을철에 접어들면서 책을 읽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그러나 마음의 양식을 풍요롭게 해주는 독서를 1∼2시간 정도 하고나면 눈이 피로하고 어지러워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을 때가 흔히 있다.이처럼 독서는 우리의 눈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평소에 적절한 시력관리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먼거리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어떤 크기의 활자로 된 책을 편안하게 독서하려면 사람의 원근교정시력이 0.7이상 되어야 한다.또 40세이상 중년기에 들어선 사람은 눈속의 수정체가 노화현상으로 점차 탄력을 잃게 됨에 따라 노안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때문에 30㎝의 가까운 거리에서도 독서가 어려워지고 해가 지는 저녁무렵이나 방안의 조명이 어두울 때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독서하는 시간은 사람의 시력과 기능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눈과 책과의 거리를 30∼40㎝ 유지하면서 1시간 정도가 알맞는다.몇시간동안책을 계속 보게되면 으레 눈의 피로와 함께 머리가 아프고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안정피로가 생긴다. 그러므로 1시간 독서후 반드시 10분 정도 눈을 쉬게 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독서방법이 된다.눈을 쉴때 창밖에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나 나무 및 건물 등을 바라보면 눈의 조절능력과 복주기능이 멈추게 되므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눈은 인간공학적으로 서 있는 자세에 알맞게 되어 있으므로 바로 앉아 독서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흔히 엎드리거나 누워서 책을 보면 눈의 굴절에 이상이 생겨 시력이 나빠지거나 근시의 눈이 될 수 있다.더욱이 흔들리는 버스나 지하철·택시 및 어둠침침한 방안에서 책을 계속 보는 것은 시력을 해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독서에 가장 알맞는 방안의 조명은 사전이나 제도 등의 작은 글자나 그림·시계수선등 미세정밀의 근거리 작업을 할때 1천룩스(조명의 국제단위),장시간 독서나 노인들은 5백룩스,정상적인 사람은 3백룩스,큰문자나 짧은 시간의 독서에는 2백룩스가 이상적인 밝기가 된다. 특히대학입시생이나 기타 시험공부를 하는 사람의 서재 조명시설은 전체조명과 부분조명으로 나누어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전체 조명은 형광등,부분조명은 백열등을 이용하는 것이 학업능률에 큰 도움을 준다. 형광등은 방안의 중심이 되는 곳의 천장에 설치,방안의 그림자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또 부분조명을 설치할 경우 직사광선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등갓을 꼭 씌우도록 한다.이때 백열등은 책상 왼쪽에 설치해야 어두운 그림자가 책에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글씨 쓸때 매우 편리하다. 한번 잃은 눈의 시력은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그러므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매일 결명자차·구기자차·홍차등을 몇차례 마시면 큰 효과가 있다.또 찹쌀·쇠간·냉이·콩·해바라기씨 등은 눈의 피로회복에 좋은 식품이 된다.
  • 범죄의 특성(신세대범죄 왜 흉악해지나:중)

    ◎거의 반인륜·충동적 범행/공동체의식 없고 「극단적 이기」 팽배/이유­대상 불분명… 막연하게 분풀이 최근들어 발생하는 20대 범죄는 크게 「패륜범죄」「사회저항형 범죄」「충동범죄」「보복범죄」등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이들 범죄 가운데 80년대 중반부터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 사회저항형범죄다.이유나 대상도 없는 「분풀이식 사회저항형 살인」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번에 발생한 연쇄납치살인사건도 똑같은 유형이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사회의 교육기능과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패륜범죄」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핵가족화로 전통적인 효자상이 무너지고 가족간의 불화에서 발생하는 대표적 범죄유형이다.평등사상이 잘못 반영돼 부모 형제도 이해타산 관계로 변질되면서 가족의 살상도 서슴지 않는 패륜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5월 19일 새벽 서울 강남에서 발생한 대한한약협회 서울지부장 박순태씨부부를 살해한 장남 한상씨(23)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박씨는 93년 8월 미국유학을 떠나 어학연수를 받던 도중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2천만원을 잃고 승용차 구입등으로 돈에 쪼들리자 귀국,1백억원대에 달하는 재산상속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했다. 살해방법이 너무나 끔찍해 경찰이 박씨를 진범이라 발표했을때 많은 국민들이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부모와 자식간의 신뢰붕괴,물질만능의 비뚤어진 의식등이 어이없는 폐륜범죄로 이어졌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92년 10월 24일 거실에서 잠자고 있던 아버지(50)를 공기총으로 살해하고 시체를 묶어 시멘트벽돌 4장과 함께 쌀자루에 넣어 한강에 내다버린 김진태씨(26·무직·절도등 전과9범)의 경우도 무너진 가족관계에서 빚어진 범죄로 분류된다.중3때 절도를 저질러 소년원에 갔다온 김씨는 이후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하고 술만 먹으면 어머니를 때려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놓았다. 「사회저항형 범죄」는 그러나 불특정 다수등을 상대로 자신들의 그릇된 한풀이를 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이번 「지존파」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사회에 대한 비뚤어진 불만,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잘못된 인식이 얼마나 인간을 잔혹한 범죄꾼으로 만들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이러한 범죄는 범의와 범행간에 아무런 인과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돼 사회불안의 원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91년 10월 훔친 프라이드 승용차로 서울 여의도 광장을 질주,2명을 숨지게 하고 21명의 어린이에게 부상을 입힌 김용제씨(21)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사례다. 선천적으로 시력이 나빠 국민학교 다닐 때 칠판글씨가 안보여 공부를 못했고 졸업뒤에도 직장마다 취직한지 한달도 채 못돼 내쫓겨 세상이 싫어졌다는 김씨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자전거를 타며 행복하게 노는 모습을 보니 다 죽여버리고 싶었다』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었다. 김씨는 『국민학교때 어머니만 가출하지 않았으면 아버지가 음독자살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전문가들은 어릴때부터 상처받은 영혼이 성년이 되어서도 치유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회의 교육기능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충동범죄」는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경쟁심리가 이들의 인내력을 빼앗아간데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팽배와 윤리교육의 부재등이 복합돼 감정폭발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8월21일 서울 송파구 잠실본동 모식당에서 이모씨(23·방위병)등 친구들과 술을 마신 김지훈씨(21·종업원)는 자리를 끝내고 택시를 잡으려다 정우진씨(20·재수생)를 칼로 찔러 숨지게 했다.먼저 택시를 잡으려 나와 있었는데 정씨가 가로채려 했다며 인근 포장마차에서 흉기를 들고와 휘두른 것이었다. 공중전화를 오래 건다고 시비가 붙어 생기는 「공중전화 살인」,술집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 일으키는 「우발적 살인」등 이러한 충동범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밖에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에서 발생한 영등포 「불출이파」행동대장 오일씨(23)피살사건에서 드러나듯 다른 조직과 이권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조직간 보복살인」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이처럼 20대 범죄가 빈번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공격적·폭력적인 것이 적극적이고 「사내답다」는 우리사회에 퍼져있는 잘못된 문화적 풍토와 무관치 않다고 한결같이 지적한다.실제로 지난해 발생한 1천20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20대가 저지른 사건이 3백57건(35%)으로 가장 많았다.또 같은 기간동안 살인을 포함한 강력범죄도 전체 1만4천5백27건 가운데 20대의 범죄가 5천5백30건(38%)으로 가장 많아 20대 범죄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사회인으로 나서는 20대들에게 가족구성원들과 사회 주변의 모두가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갖고 건전한 가치관을 갖도록 지도하는 길만이 그들과 사회를 범죄에서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제언한다.
  • 서울장안동 안상택씨/우리집에선:10(녹색환경가꾸자:78)

    ◎쌀뜨물·구정물 걸러 화초 거름으로 활용 서울 동대문구 장안3동 안상택씨(50·회사원·장안시영아파 49동 403호)가정은 이 일대 아파트단지에서 「환경가족」으로 소문이 나 있다.부부는 물론 자녀 3남매 모두가 「환경은 가정에서부터」라는 덕목을 가훈처럼 실천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안씨 가족은 3년전부터 가정에서 나오는 쌀뜨물과 구정물을 정화시켜 찌꺼기는 화분 밑거름으로,채소쓰레기는 잘게 썰어 퇴비로,폐식용유는 무공해비누로 만들어 재활용하고 있다. 또 우유팩은 8개를 두줄로 붙여 다목적 소도구 통으로,플라스틱콜라병은 반을 잘라 작은 화분,신문및 광고지는 자녀의 붓글씨 연습장으로 쓰는등 어느것 하나 버리는 것이 없다. 안씨가 이처럼 온가족을 「환경가족」으로 만든데는 그의 직업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안씨는 현재 대기오염관리사 2급자격증을 갖고있는 그린맨. 『생활폐수나 음식찌꺼기는 거름이나 퇴비를 만들어 쓰는 방법으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으나 폐품등 생활쓰레기는 정말 처치가 어렵더군요.그래서 생각해 낸것이이같은 「재활용」방법이었습니다.물건을 담는 그릇과 같은 소도구나 장식품은 폐품을 활용해 사용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는 『주위에서 한 가정이 실천한다고 환경보호가 되느냐며 비아냥거릴 때는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으나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릴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며 이 때문에 단지내 아파트주민들과 말다툼도 여러차례 했었다고 지난날을 돌이켰다. 그러나 요즘엔 아파트단지내 주민들도 이 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서울신문사가 벌이는 깨끗한 산하지키기운동에 환경감시위원으로 동참하고 있는 안씨는 『환경보호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생활주변의 이러한 작은 일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것』이라며 이 운동이 확산되면 우리사회,우리국가는 자연적으로 공해없는 깨끗한 환경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익산의 유적들(백제를 다시본다:27)

    ◎무왕 익산에 새도읍 건설 추진한듯/미륵사와 왕릉 추정의 쌍릉 이웃에/왕궁리 4∼5㎞ 주변 토성·산성 산재/중국문헌에 “무광왕 천도” 기록… 출토유물도 문헌과 일치 삼국시대의 문화유적은 주로 도읍지와 그 도성 밖 가까운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요즘 개념으로 말하면 수도와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고구려와 백제는 몇 차례에 걸쳐 수도를 옮기면서 그 이웃에 귀족문화흔적을 펼쳐놓았다.수도를 단 한번도 바꾸지 않은 신라 역시 경주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형의 문화를 영조했다. 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 과정에는 대개 몇가지의 공통적 특징이 나타난다.그 하나가 화려한 왕궁을 건설하는 일이다.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문화현상인 것이다.이어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게 되는데,사찰은 국가가 관장하는 국립사찰형태로 창건했다.불교는 사회문화발전에도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전제왕국의 호국이념으로도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도성을 지척에 둔 자리에는 반드시 왕릉이 축조되었다.삼국시대의 왕릉은 규모도 물론 컸거니와 묘제를 적용한 방법이나 껴묻거리(부장품)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이들 왕릉을 통해 당대의 문화상이 어떠했는가는 백제의 경우 공주 무령왕릉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증거하고 있다.이렇듯 수도로서의 도읍을 경영하는데 왕릉이 수반된다는 사실 이외에 왕도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성의 경영도 필수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기록엔 없어 이들 삼국의 도읍지는 모두 역사기록에 나오는 수도들이다.그런데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왕도의 모습이 보인다.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데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 어렴풋이나마 왕도로 떠오르는 땅은 바로 오늘날 전북 익산군 금마면과 왕궁면일대다.그래서 일찍부터 이른바 「백제 익산천도설」이 제기되었다.익산을 왕도로 볼 수 있는 정황은 고고학적 발굴이나 현존하는 유적을 통해 여러군데서 발견된다. 이 지역 금마면 기양리에는 우선 백제 최대의 가람규모를 자랑하는 그 유명한 미륵사터가 남아 있다.5층석탑의 잔영을 겨우 전하고 있지만,미륵사터에 대한 장기적인 고고학발굴에서 찬란한 백제불교문화상을 속속 파헤쳐냈다.그리고 미륵에서 2㎞ 떨어진 금마면 연동리에는 백제불상광배가 갖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석불이 남아 이 지역에 융성했던 불교의 실상을 가늠케 해주고 있다. 우리가 「백제 익산천도설」을 어느정도 수용하고 익산지역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이를테면 왕궁면 왕궁리 왕궁평도 그러한 지역의 하나다.여기에는 왕궁이 있었다는 구전의 전설이 전해내려오고,실제 백제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현재 5층석탑 1기가 남아 있고,그 이웃에서 제석사라는 새김글씨가 든 백제기와가 출토되었다.제석사가 세워졌던 자리로 추정되는 절터에서는 목탑의 주춧돌이 발굴되기도 했다. ○「궁려사」 기와 출토 이 왕궁리에서는 고고학발굴결과 사구석유구와 함께 관궁사라고 새긴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익산천도설에 더 가까이 접근한 바도 있다.어떻든 왕궁리유적은 백제의 왕궁이 자리한 가운데 왕실의 원찰로서의 제석사가 창건되었으리라는 추론을 뒷받침한다.이 왕궁리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유적은미륵사다.왕궁평에서 3㎞에 불과한 미륵사는 도성 이웃의 대가람으로 창건되어 미륵하생의 이상향적 불국토를 염원하는 불심을 담았을 것이다. 왕궁리를 중심축으로 한 반경 4∼5㎞ 안에는 백제시대의 여러 성곽이 있다.미륵산성을 비롯,왕궁리토성,익산토성 등이 그것이다.왕궁평을 왕궁이 세워졌던 자리로 본다면,북쪽으로 국립사찰격의 미륵사와 주변 성곽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그래서 8·15이전에 이미 익산일대의 유적배치상을 통해 중국 낙양의 수도경영형식과 근사하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뿐이 아니라 익산지역에는 백제왕릉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존재함으로써 고대국가 수도 경영형식과 꼭 맞아떨어진다.이에 따라 「백제 익산천도설」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다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우리 사서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이를 전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했다.문헌사학과 현존 유적및 고고학발굴성과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익산천도설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얼마전에 소개되었다.일본인학자 목전체량이 중국문헌에서 백제천도 사실을 적은 기사를 발견한 것이다.9세기경에 찬술된 이 자료는 「백제무광왕천도 지모밀지 신영정사 이정관십삼년… 천대뢰우 수재제석정사」라고 기술하고 있다.여기서 우선 정관13연은 AD639년으로 백제 무왕40년에 해당한다.그리고 무광왕으로 표기한 왕은 무왕을 가리킨 것이 틀림없다. 이 중국문헌에 나오는 지모밀지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다.그러나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겨 새로 지은 절이 제석정사라고 기술함으로써 「제석사」라는 새김글씨가 들어 있는 익산 왕궁리 출토 명문기와의 절이름과 일치한다.또 제석사가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후 목탑에서 꺼낸 유물들을 일일이 예로 든 대목도 눈길을 끈다.왜냐하면 현존하는 왕궁리 5층석탑을 해체복원할 때 발견한 김판금강반약경·사리함·사리병 등이 목탑속에서 꺼냈다는 불구유물기록과 똑같기 때문이다. ○사비와 별군 추정도 그렇다면 중국 문헌자료에 나오는 제석정사와 오늘날 절터만이 남아 있는 제석사는 같은 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또 제석사 목탑에서 꺼냈다는 불구들과 왕궁리 5층석탑에서 나온 불구유물 역시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다.이로 미루어 지모밀지는 오늘날 익산 왕궁면 왕궁리일대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이다.특히 정관13년은 백제 무왕의 재위 연간이고,익산 미륵사를 무왕때 창건했다는 「삼국유사」기록을 신빙성을 가지고 다시 떠올려볼 수도 있다. 이들 문헌자료나 고고학자료들은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한 사실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인지 모른다.그러나 학계는 대체로 사비도성의 별도로 익산지역을 수도로 경영했을 것이라는 쪽과 천도를 준비한 단계로 보는 쪽도 있다.백제 익산천도의 꿈이 실현되었는지 아니면 끝내 실현을 못보았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는 앞으로 풀릴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정부가 현재 이 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 국책발굴사업을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무왕이 왜 익산으로의 천도계획을 구체화했는가를 짚어볼 차례다.거기에는 광활한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는데 필요한 거점확보정책이 깔려 있을 것이다.또 한편으로는 무왕 때까지도금마일대에 활거한 마한의 세력집단을 융합 내지 통합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내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석왕동 쌍릉/능산리고분과 같은 굴식돌방무덤/“무강왕릉” 구전… 무왕부부묘 가능성 무왕(?∼641년)은 사비시대 백제의 지위를 한껏 격상시킨 정복군주다.불교문화를 꽃피우면서 신라를 위협,낙동강유역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는데도 크게 공헌했다.특히 익산천도의 꿈을 키운 군주로도 유명하다. 무왕의 익산천도가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는 떠나 그가 묻힌 지역도 익산지방이라는 설이 제기되어왔다.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 전북 이리시 석황동에 있는 쌍릉을 무왕의 능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무강왕릉이라는 전설을 지닌 이 쌍릉은 북쪽의 것을 대왕묘,남쪽의 것을 소왕묘로 부르고 있다.1915년 일본인 다니이(곡정제일)에 의해 백제말기인 7세기경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밝혀졌다. 대왕묘는 지름 30m,높이 5m 정도이고 소왕묘는 지름 24m,높이 3.5m정도인데 모두가 원분이다.내부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부여 능산리고분 돌방과 같은 형식의 널돌(판석)을 사용했다.대왕묘의 경우 널방(현실)을 남북 장축의 장방형 편면을 이루었다.남벽 중안에 널길(선도)이 나 있고 널길은 널돌로 막았다.4면의 벽과 바닥·천장은 다듬은 널돌로 조립한 형태다. 그리고 바닥 중앙에는 한 단이 높은 석재 한장을 가지고 널받침을 마련해 놓았다.조사당시 유물은 이미 도굴되었으나 널만은 그냥 남아 있었다.이 나무널은 복원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이 널에는 관못과 관고리가 달렸다.관고리에는 여덟 잎사귀의 연꽃형 밑동쇠(좌금구)가 달려 호사스럽다.널의 크기는 길이 2.4m,너비 0.76m,높이 0.7m로 되어 있다. 이 능묘는 무왕이 창건한 미륵사 등의 유적이 이웃에 산재한 사실을 감안하면 무왕과 왕비의 무덤일 가능성도 엿보인다.특히 무왕의 익산천도의지와 연관해볼 때 그 가능성은 더욱 짙다.설령 익산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장차 꿈을 실현시킬 염원을 가지고 무왕 스스로가 생전에 이 지역에 묻히길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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