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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 도자기 축제」 눈길/30일 개막…「장작가마 불지피기」공개

    ◎제작 체험코너 마련… 50% 할인판매 1백40여 도자기 가마가 밀집,한국 제1의 도예촌을 자랑하는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 축제」가 열린다. 오는 30일 화려한 개막식을 시작으로 다음달 9일까지 계속될 도자기 축제는 「흙과 불의 잔치」를 주제로 주행사장인 이천읍 안홍리 야외광장(미란다 호텔 건너편)을 비롯,도예촌·해강 도자미술관 등 이천군일대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각 행사장을 도는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이번 행사는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문화체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내 고장 문화관광 상품화」 계획의 시발로 앞으로 지역축제의 모델이 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행사장에서는 60개 도자기요장이 참가하는 도자기 시장이 열려 도자기를 50% 할인판매한다. 또 도공이 직접 도자기 제작 4단계 과정을 실연하고 관광객들로 2만∼5만원선의 초벌구이한 도자기를 구입,그림이나 글씨를 그려넣는 「체험코너」도 마련된다. 특히 도예촌 9개 요장에서는 전통 도자기 제작 비법인 장작가마 불지피기가 공개된다. 이와함께 신라 고려 조선 편대 등 시대별 차 시연과 손님을 맞는 「접빈다례」가 선보이며 해강도자기 미술관에서는 토기부터 고려청자·분청사기·백자에 이르는 「한국의 잔」 특별전이 열린다. 전야제가 열리는 29일부터 1일까지는 「서편제」「투캅스」「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3편의 영화가 주무대에 올려진다. 볼거리와 함께 먹거리 시장도 들어서 다양한 전통음식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으며 이천쌀로 빚은 「재래식 떡방아 재현코너」도 바련돼 잔치분위기를 한껏 돋우게 된다.
  • 「국제 현대 미술전」에 관람객 “만원”/광주비엔날레 개막하던 날

    ◎아마추어 사진작가 몰려 국제행사 실감/입장객 직접 참여하는 천인탑 제작 시작 ○동백나무 기념 식수 ○…20일 상오11시부터 중외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개막식은 시종일관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진행.야외공연장 뒤쪽 팔각정까지 가득 메운 참석자들은 송언종광주시장의 대회사와 주돈식문화체육부장관의 축사에 이어 비엔날레 수상작이 발표되자 수상자들을 큰 박수로 축하. 개막식 후 주장관과 송시장등 내빈들은 광주비엔날레 신축전시관 전시실 정문에서 개관식을 갖고 이봉우 전시기획실장의 안내로 20여분에 걸쳐 전시관을 둘러본 뒤 전시관 1층 현관 옆에 동백나무 한그루를 기념식수. ○…전시실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자마자 신축전시관 정문은 입장객들로 장사진을 형성.내빈들의 테이프커팅이 끝나면서 동시에 전시실로 들어가려는 입장객들로 전시장 입구가 한때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운영요원들의 안내로 곧 정돈. ○…이날 중외공원 야외공연장과 문예회관 대극장을 비롯한 광주시내에서는 하루종일 경축공연이 이어져 비엔날레 관람객과 광주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한편 축제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도. 중외공원 야외공연장에서는 개막식이 끝난 뒤 서울가무예술단,남사당패,시립국극단,현대무용단등이 참가하는 대규모 축하공연이 생방송되는 가운데 1시간동안 진행됐고 이어 유명 연예인,인도민속단들이 하오9시까지 공연. ○개막 경축공연 열기 가득 ○…이날 하오7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퍼포먼스는 광주비엔날레의 전위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축공연.황병기씨의 가야금 연주로 시작돼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피아노앞에 앉으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백씨는 무대 후면에 설치된 스크린 앞의 피아노에 앉아 직접 연주를 하면서 비디오 카메라를 작동,자신의 머리카락과 이빨 턱수염 등 얼굴 부분을 확대해 비추면서 독특한 영상이미지를 창출. 백씨는 자신의 공연에 이어 바이올린 음악연주와 인간 삶의 이미지를 기묘하게 조화한 아이슬란드 출신 비디오 아티스트 스타이너 바쉴카스를 소개.이날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 리투아니아 초대 대통령 란스베르기스는 자신의 「민주투사」경력을 살려 암울했던 시절의 리투아니아 포크송 「당신은 나의 숲 변주」 등 심금을 울리는 피아노 연주와 관객들과의 대화로 개막축하 공연의 대미를 박수로 장식. ○…개막일인 이 날 중외공원에는 시상식과 개막식에 참여하는 국내외 예술인과 시민 등 수천여명이 몰리고 시립민속박물관 주변에는 사진을 찍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북새통을 이뤄 이번 행사가 국제 축제임을 실감케 했다. ○…관람객이 직접 만드는 「비엔날레 천인탑」도 개막식과 함께 제작이 시작됐다.전시관 입구에 마련된 천인탑은 높이 11m에 한 변의 길이가 2·5m인 피라미드식 탑 2개를 세우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무등산 모형을 얹어 놓은 모습. 관람객들이 원하는 그림이나 글씨를 새긴 가로·세로 각 21㎝ 크기의 네모 흙판 1천4백장을 피라미드 표면에 모두 붙이면 완성된다. ◎입장료 얼마나 되나/하루 관람료 어른 7천원·어린이 3천원 광주비엔날레의 본전시와 6개 특별전을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입장료는 어른 7천원,청소년 5천원,어린이 3천원이다. 그러나 30인 이상 단체입장권은 각 5천원,3천원,2천원으로 할인된다.토요일과 일요일 및 공휴일에는 할인이 되지 않는다. 행사기간 내내 볼 수 있는 입장권은 어른 4만원,청소년 3만원,어린이 2만원이다. 입장권은 매일 개관(상오 9시) 30분 전부터 폐관(하오 6시) 1시간 전까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정문·시립민속박물관 앞 굴다리·중외공원 정문과 후문·무지개다리 앞 등에서 판다.
  • 황해도 안악 고구려고분 여인화(한국인의 얼굴:43)

    ◎큰 귀에 실한 턱… 전형적 귀부인/얼굴은 풍만한데 눈·코·입 작은편/한국 초상화의 시원… 팔자수염 남편그림과 나란히 고대인은 무덤의 벽화를 통해서도 사람의 얼굴을 그려냈다.이들 그림은 밀폐된 무덤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필치를 거의 다 간직했다.고대 벽화에서 얼굴그림은 옛 고구려 강역의 고분에 많이 남아 있다.고구려의 도읍지를 따라 압록강유역과 대동강유역에 주로 분포되었다.그리고 고구려 도읍지로부터 떨어진 황해도와 더 멀리는 경상북도 북부지역 고분에서도 더러 얼굴그림이 나왔다.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 안악3호 무덤 널방(묘실)벽에는 유명한 부부상 그림이 있다.이 무덤 벽화에는 「동수」라는 사람 이름과 서기 357년에 해당하는 중국 동진의 연호 「영화13년」을 먹글씨로 쓴 묵서명(묵서명)이 보인다.그래서 인악3호 무덤 말고 이른바 동수묘(동수묘)라는 이름이 더 붙어 있거니와 무덤을 축조한 시기도 명확히 밝혀졌다. 인악3호 무덤은 석회암으로 축조한 돌방무덤(석실분)이다.남쪽인 앞으로부터 널길(선도),앞방(전실),널방인 주실로 연결되었고 주실 좌우에 옆방(측실)이 1간씩 달렸다.이들 각 방의 벽에는 부엌,외양간,말갖춤 곳간(마패고)등을 그리고 맨 앞에는 집을 지키는 위병상을 그려넣었다.무덤에 묻힌 주인공 부부가 생전 살던 주택을 재현한 것이다.여기에는 물론 고구려인의 내세관도 깃들여 있다. 부부상은 주실 오른쪽 옆방 벽에 그렸다.부인은 매우 후덕한 모습을 했다.후덕한 느낌을 주는 까닭은 우선 얼굴이 풍만한 데 있다.사람의 외양을 대표하는 오관중에 귀를 빼놓고 눈·코·입은 작다.눈섭도 그리 길지 않으나 귀는 풍만한 얼굴과 걸맞게 크다.턱 역시 얼굴과 귀 못지 않게 실하다.헤어스타일은 검은 머리를 높이 올린 고계다.그리고 머리꾸미개(수식)를 늘어뜨렸다. 부인의 얼굴은 고대인이 선호한 귀부인상에 틀림없다.특히 얼굴과 턱·귀는 고대인이 평가하는 귀인 기준과 맞아떨어진다.인악3호 무덤이 축조된 4세기 중반에는 상법이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을 것이다.그러한 가능성은 중국의 상고시대인 주대에 이미 얼굴의 골격을 근거로 사람의 품성과 장래의 길흉을 가늠하는 상법을 퍼뜨렸다는 학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부인상의 얼굴은 옆에서 그린 측면화다.얼굴과 옷매무새가 세련된 필치로 묘사되었다.그래서 인물화로서는 주인상 남자얼굴보다 부인상이 더 성공을 거둔 작품인 것이다.주인상 남자는 묵서명 기록대로 해석하면 요동지방에서 스스로 고구려를 찾아온 연의 무장 동수다.비단관을 쓰고 손에 부채를 잡은 주인공 남자상은 팔자 수염을 길렀는데,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했다. 이 부부상 벽화를 간직한 인악3호분을 동수묘가 아닌 고구려 미천왕릉에 초점을 맞춘 견해도 있다.그러나 누구의 무덤이라는 논란을 떠나 인물상 채색벽화는 우리나라 초상화의 시원이라는 점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 화염경 베낀 신라종이뭉치 발견/화엄사 5층탑서

    ◎청자양이병도 함께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 서쪽 5층탑(보물133호)에서 통일신라시대때 종이에 쓴 화엄경 사경으로 추정되는 종이뭉치와 청자의 기원을 파악할 수 있는 청자양이병이 발견됐다. 문화재관리국이 지난 18일 5층석탑 보수를 위해 해체공사중 1층탑신의 장방형 홈(가로 33·세로 10㎝) 사리장치에서 발견,20일 공개한 종이뭉치는 두께 6∼7㎝,길이 27㎝의 크기로 되어 있다.이 종이뭉치는 두루마리 형태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붓글씨로 쓴 사경의 흔적이 현미경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강우방 실장은 『화엄사가 신라 10대 화엄사찰중 하나이고 인쇄본인 무구정광다라니경에 비해 두께가 두꺼워 사경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통일신라시대때의 종이류는 지난 66년 불국사 석가탑 보수공사때 나온 국보 제126호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일제시대때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 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등 2종류에 지나지 않았다.이번 발견된 종이뭉치가 화엄경 사경으로 확인될 경우 출처가 분명한 신라때의 불경 사경으론 최초의 것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원형 홈(깊이 35㎝) 사리장치에서 금동 뚜껑이 덮인 채로 발견된 청자병은 고려청자의 시원을 다시 밝힐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었으며 그 안에서 22과의 사리가 담긴 녹색사리병이 함께 나왔다.이밖에도 청동합 2점,수정옥 1점,목제장식류 1점,유리구슬등이 수습되었다.
  • 경주 감산사/석조보살상(한국인의 얼굴:40)

    ◎살짝 뜬 눈가에 웃음… 온유한 인상/야트막하고 실한 코… 친근감 더 해 신라에서 8세기는 불교미술이 한껏 만개한 시기다.그 꽃봉오리를 8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미 터뜨렸는데,바로 성덕왕(702 ∼ 736년)시대다.특히 화강암을 소재로 한 불상조각은 이 시대의 대표적 조형미술이다.도처에 널린 화강암을 불상으로 다듬어 보려는 신라인들의 불심은 불후의 명작 불상조각들을 남겼다.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이 8세기 초반의 작품이다.경북 경주시 대동면 신계리 감산사에 본래있던 것을 지난 1915년 서울로 옮겨왔다.대좌와 보살상 뒤쪽을 막아준 광배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2.57m에 이른다.보살상 자체의 키를 재도 1.83m가 나온다.그러고 보면 꽤나 큰 키를 기준한 등신대의 보살상인 것이다. 이 보살은 얼핏 익살스러워 보인다.그리고 눈을 꼭 감지않고 슬며시 웃음 그려내어 눈에도 장난기가 들어있다.그럼에도 온유한 까닭은 보살이기 때문일 것이다.코가 높지는 않으나 콧방울이 실한 보살은 안광이 꺼지지 않아 친근감을더 해준다.작은 입을 다물고 웃는 통에 입가의 주름 법령이 유난히 깊다.그래서 외래적 요소가 없는 신라인일 수 있고,또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할 것이다. 얼굴은 풍만하고 몸매는 육감적이다.어깨는 넓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면서 둥글고 통통한 팔뚝으로 이어졌다.특히 육감적 느낌을 주는 부분은 허리와 두 다리의 굴곡을 강조하듯 표현한 옷주름에 있다.허리부분에서 겹친 치마에 띠장식을 매어 가랑이께로 늘어뜨렸다.그리고 탄력있는 다리에 달라붙은 치마가 잔주름을 이루었다.치마의 주름을 두 다리 사이로 모아 허리쪽으로 끌어올려 몸매를 한껏 자랑했다. 이러한 표현은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유행한 양식이라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어딘가 인도 굽타시대의 불상을 닮았다.그 인도의 불상이 당나라에 흘러들어와 더욱 발전한데 이어 이를 신라의 것으로 수용했다. 보살은 머리에 화려한 화관을 썼다.구슬이 달린 머리띠 한 가운데 화불이 있으니 관세음보살이 분명하건만 어인 일로 미륵보살이 되었다.그 연유는 뒷면에 선각으로 길게 새긴 글씨(명문)에 미륵보살이라고 밝힌데 있다.새김글씨 명문에 의하면 이 보살상의 조상주는 김지성으로 되어있다.그는 통일신라시대 중아찬(신라 17관등 중의 제6위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67살에 관직을 떠나 서기 719년에 자신의 땅 감산장전을 바쳐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그 절이 바로 보살상을 세웠던 감산사다.보살상 새김글씨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은 「삼국유사」남월산조에도 나온다.「삼국유사」는 또 이 보살상이 감산사 금당에 봉안되었다고 기록했다.그러니까 감산사의 주존이 미륵보살이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기록이다.미륵보살을 주존으로 모시는 당시 신라의 법상종신앙이 엿보인다.
  •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

    ◎총독부 작성 서울전도 등 희귀자료 “눈길”/명성황후 시해·고종 독살기도사건 판결문 선보여/4·19혁명 당시 계엄선포­공민권 제한기록 첫 공개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소장 이수기)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오는 10일부터 12월10일까지 3개월간 계속되는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에서 공개하는 각종 자료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권회복운동 판결문 영인집◁ 1895년 8월20일 일어난 명성황후시해사건,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1898년 일어난 고종 독살기도사건,갑오개혁정부 붕괴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유길준이 주도한 혁명정부 기도사건,한용운의 임제종 창립을 통한 일본 조동종 반대운동,양기탁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이동령 안명근 김구등이 주도한 서간도 독립군기지 건설운동등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다.지금까지 국내에 알려진 판결문은 19 06년 통감부 설치 이후 의병판결문과 일제시기의 판결문등이 대부분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자 판결문=18 95년 11월13일 고등재판소에서 작성된 것으로 주모자는 군부협판(지금의 차관급에해당)인 이주회이며 직접 시해한 인물은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있었던 박선으로 되어 있다. ▲서간도 독립군기지 건설사건 판결문=19 07년 이후 양기탁 이동령 김구등이 신민회를 결성,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이주할 대상자를 모집하기 위해 도 단위 책임자를 전국적으로 임명하는등 비밀리에 전개된 운동이지만 매우 광범위하게 추진되었음이 새로 밝혀졌다. ▷조선총독부 작성 서울 전도◁ 이 지도는 1915년에 측도해 6년 뒤인 1921년 다시 수정 측도하고 이듬해인 1922년 7월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축척 1만분의 1로 제작한 지도다.뒷면에는 붉은 글씨로 「용산군용지일반도」라고 부기되어 있다. 조선조 당시 도성의 성저 10리까지의 지경을 제작한 듯 오늘날의 서울시 일대를 지도 한장으로 축소해 치밀하게 작성했다. 부착물로 여의도도가 인쇄물이 아닌 채색도면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지도가 여기에 부착된 것은 당시 여의도가 군용지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밤섬의 위치와 도로를 나타내고 이 지역이 일본인의 개인 소유지로 되어 있음도알 수 있다. ▷일제의 조선군사령부 배치도◁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고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 내지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전국 요소요소에 군사시설을 갖추어 나가면서 작성한 것이다.당시 용산 일대는 일본군 주둔지 내지 병참기지화한 데 따른 각종 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기밀문서로 분류되었던 지도다. 이에따라 총독부에서 「육군성 관리 국유재산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를 생산했는데 이 문서 가운데는 1931년 4월10일 조선총독부 관리대상 재산을 군부측이 사용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소관 토지건물차입조서」가 들어 있다.이 조서에 따르면 당시 조선주둔 일본군 헌병대사령부및 각 지방별 수비대와 부속 숙영지,연병장,수도급수시설지등과 도별 군부대의 작전범위는 다음과 같다. ○군부대 작전범위 기록 ▲제52연대=경기 일원 ▲제1연대=경북 일원 ▲제29연대=황해도 일원 ▲제3여단=황해도 일원 ▲제14연대=경기·경북 ▲제60연대=충남 일원 ▲제50연대=서울·강원·충북·경북·경기·함남 ▲제51연대=서울·충북 ▲제47연대=강원·경기·경북▷미곡·면화공출문서·징용자명부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에서 발견된 1930년대말 전시상황에서 조선총독부의 군단위 일선기관이 작성한 문서들이다. 경기도 부천군이 1936년 작성한 「소사농업창고 관련서류」 「부천군관내도」등에는 부천군의 산업별 인구,경작면적,품목별 수확량 등이 거의 완벽하게 파악되어 있다. 「징용자명부」에는 태평양전쟁때 일본으로 징용당한 전국의 약 40만명의 명단과 인적 사항이 적혀 있다. ▷수양동우회 판결문◁ 일제의 집요한 강요로 민족운동가로서의 지조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이광수를 비롯한 41명의 항일활동이 수록되어 있다.이 판결문에는 이광수 주요한등이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한 이래 흥사단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수양동우회사건이 일어난 1938년까지 「통속교육보급회」를 조직하는등 각종 민족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음이 기록되어 있다.수양동우회는 안창호의 지시로 이광수가 서울 서대문에 있는 자택에서 1922년 결성했는데 1926년 김성수 최린등 민족운동지도자들을 대거 영입해 발전시킨 민족주의계열의 대표적인 운동단체다.그동안 학계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활동만을 가지고 개량주의 단체로 평가해 왔지만 이 판결문은 수양동우회의 활동방식을 당국을 속이기 위한 교묘한 술책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수립 직후 국무회의록◁ 1949년 2월4일 금요일 하오 2시 개최된 제16회 국무회의는 중앙청의 부통령실에서 16명의 국무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의 사회로 개회되었다.이 회의의 의사록 가운데 「반민족특별위원회법 제5조 해당자 조사보고에 관한 건」에는 이승만대통령이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비밀히 조사해 선처하라」고 내무부장관에게 친전으로 직접 지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반민법 제5조는 총독부 고위관료및 경찰관을 지낸 자는 공직에 임명될 수 없다는 규정이다.이 때문에 이 기록은 공식 문서를 통해 이승만대통령이 총독부 관료를 조사는 하되 선처해 그대로 임용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4·19혁명시 비상계엄 및 공민권제한 심사기록◁ 이번에 4·19관련 정부문서가 처음 공개되었다.첫째는 1960년 4월 19일 1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계엄의 건」 원본문서이다.이 문서는 대통령과 국무위원인 내무부장관 홍진기,국방부장관 김정렬등 10명이 함께 서명한 것으로 계엄선포의 목적을 「교란된 질서를 회복하고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4월 19일 하오 1시부터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실시하며 계엄사령관은 육군중장 송요찬으로 임명하였다. 둘째는 1960년 4월 25일 상오 5시부터 사태의 호전에 따라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꾼다는 「계엄종류 변경의 건」이다.그런데 대상지역은 부산 대구 광주 대전지역에 한하며 서울은 제외되어 있다. 셋째는 4·19혁명 후 각 시도별로 구성된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대상자 심사위원회가 작성한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 심사기록」을 공개했다.이 문서는 4·19혁명 후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을 발표하여 3·15부정선거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작성된 것이다.이 문서에는 3·15부정선거를 모의하거나 주도적으로 참여한 자유당 정권 말기의 부패한 정치인 관료 재계인사 종교인사 학계인사들이 총망라되어 있다.이 문서들의 공개로 이승만정권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작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 관계철및 포항제철 관련문서◁ 우리나라 경제개발계획안은 19 59년 3월 당시 부흥부 산하에 있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된 경제개발3개년계획안(1961∼1963)이 정부가 마련한 최초의 것이다.그러다가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직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을 수립하고 사회·경제적 악순환을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19 62년 1월 6일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제 10호로 공표되었다.여기에는 5개년 계획수립의 의의,목표와 기본방침,전반적 내용,부문별 내용,수행에 따른 제정책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역사적인 육필원고 담화문이 내각수반 송요찬의 명의로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육군대장 박정희의 명의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정 승인하고 이를 집행하는데 따른 제반조치사항을 지시한 일자 역시 공표일과 동일함으로써 추진의 신속성을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는 3급 비밀로 분류되어 오다가 1963년 2월2일 「경제 402호」에 의거해 일반문서로 재분류되었다.
  • 우랄산맥을 넘어(시베리아 대탐방:22)

    ◎유럽·아시아의 분수령… 정상엔 경계비 우뚝/모스크바 떠난지 30여시간만에 첫 기착/140만 인구 에카테린부르크에 여장 풀어/2차대전뒤 군수공장 대거 이전… 산업 중심지로 우랄의 역사는 곧 옛날 러시아 정복자들의 침략사다.침략은 15세기에 시작돼 16세기에 마무리됐다.철길 대신 카마강의 물길을 따라 동진해온 러시아 정복자들은 페름주와 스베르들로프주의 경계지대인 우랄 산자락까지 와서 그곳에서 산맥을 넘었다.그리고 우랄북쪽에서부터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도시는 카마강변의 솔리캄스크.「카마강의 소금채취장」이란 뜻을 가진 마을이다.우랄산맥을 넘어 에카테린부르그 북쪽에 베르하투라가 두번째로 건설됐다.「투라강 상류의 마을」이란 뜻.정복자들은 이후 투라강을 따라 동남진하며 70∼80여개의 도시를 건설해나갔다.피터대제는 메탈 매장량이 많은 이곳에 작은 금속공장을 계속 만들었다.튜멘주의 수도 튜멘은 투라강이 시베리아철도와 교차하는 지리적 요건 덕분에 융성한 대표적 도시가 됐다. ○피터대제 부인 이름 따 도시건설은 두 갈래 방향에서 추진됐다.하나는 메탈공장 건설이고 다른 하나는 상업중심지를 만드는 것이었다.1720년대에만 17개의 새 공장이 우랄에 건설됐다.스베르들로프스크주의 두번째 도시 니즈니타길도 이때 건설됐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페르보우랄스크도 이때 세워졌다.그러다가 드디어 1723년 모든 우랄공장의 총괄본부로 에카테린부르그가 건설됐다.정숙한 피터대제의 부인 에카테리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에카테린부르그로 진입하기 전 만나게 되는 명물은 페르보우랄스크의 유럽·아시아 분수령에 서 있는 대리석 경계비. 우랄의 산정역 베르시나역을 지난 뒤 5㎞,모스크바에서 1천7백77㎞ 떨어진 지점에 이 오벨리스크는 서 있다.철로에서 불과 10여m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높이 7∼8m의 수수한 돌조각물 상단에 「아시아·유럽」이라고 쓰인 선명한 글씨가 두 대륙의 경계를 알린다.승객들은 차창가에 몰려 이 역사적 기념물을 카메라에 담느라 법석이다. 러시아인들도 이 산정 경계를 우리와 똑같이 「바다라즈젤(분수령)」로 부른다.산정에서 물이 한쪽은 유럽으로 다른 한쪽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말뜻 그대로 분수령인 것이다.추사바야강은 왼편 유럽으로 흘러들어가고 타길·네바·살바·투라강 등은 아시아로 흘러들어간다. 페르보우랄스크에는 유난히 금속튜브공장이 밀집돼 있는데 1920년대 우랄에서 첫번째 튜브생산품이 이곳에서 나오자 이를 기념해 「페르보우랄스크(우랄에서 첫번째)」라고 부른 것이 그대로 도시이름이 됐다. ○금속튜브 공장들 밀집 이곳에서 50㎞를 더 나아가 마침내 스베르들로프주의 수도 에카테린부르그역에 도착했다.모스크바를 출발한지 꼭 29시간30분만에 처음으로 짐을 꾸려 기차에서 내렸다.이웃들이 모두 복도로 몰려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91년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에카테린부르그로 바꾸면서 주이름은 그대로 두어 다소 혼란을 일으킨다.이름을 바꾼 이유는 스베르들로프가 볼세비키의 이름을 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혁명 뒤 볼셰비키들의 총애를 받아 번창한 전형적 사회주의 행정·산업중심지이다.현재 인구가 1백40여만명에 이르는 우랄의 비공식 수도이다.1723년 이셰치강변의 작은 메탈공장으로 도시가 출범한 이래 우랄지역 각종 광산들의 관리소가 이곳에 들어섰다.그러나 혁명 전까지 우랄의 행정·지리적 수도는 페름이었고 이곳은 단순한 산업도시 기능만 했다.이를 볼세비키들이 혁명 뒤 모든 행정·문화중심을 이곳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그것은 옛 전통을 끊고 프롤레타리아의 새 전통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이곳은 반혁명부대인 체코백군의 본거지가 됐던 곳이다.혁명 뒤 23년 이곳을 우랄의 행정수도로 정하면서 볼셰비키들은 그 이듬해 도시이름을 스베르들로프로 바꾸었다.그 뒤 극장·박물관·대학·과학아카데미·연구소 등이 줄이어 들어서기 시작했다.2차 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 등 유럽쪽에 있던 군수공장들이 대거 이곳으로 피난와 본격적 산업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소비예트 시절 시베리아에는 크게 두가지 타입의 도시가 존재했다.하나는 오랜 학문·예술전통을 가진 도시들로서 페름·옴스크·톰스크 등이 바로그들이다.이들은 혁명 뒤 볼세비키정권에 의해 무대 뒷전으로 밀려나 과거의 명성을 잃게 된다.다른 하나는 새로 각광받은 노동자 도시들이다.에카테린부르그·노보시비르스크·이바노바 등이 단적인 예이다.오랜 정치·문화·학문전통을 억누르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전통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거역할 수 없는 판도의 역전이었다. ○옐친이 태어난 곳 지금 크렘린의 안방을 차지한 사람들은 「스베르들로프 마피아」들이다.옐친 대통령을 비롯해 일본의 옴진리교로부터 뒷돈을 받고 이들을 러시아로 진출시켜주었다는 로보프 안보위서기와 부르불리스 장관 등이 그 멤버들.이외에 15∼20명의 이곳 출신 인사가 현재 옐친 주위에서 일을 하고 있다.옐친 대통령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동쪽으로 1백㎞ 떨어진 스탈리차에서 출생해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에카테린부르그시당 제1서기,주당 제1서기를 거친 다음 고르바초프가 불러올려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에카테린부르그는 예부터 돈많은 광산주들이 많았던 탓에 대부호의 저택들이 유난히많이 남아 있다.또 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들도 곳곳에 보존돼 있다.이들 전통가옥들이 스탈린시대 때 건설된 웅장한 대리석 건물들과 조화를 이뤄 매우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만들고 있다.전형적인 우랄 통나무집은 보통 2층인데 1층은 반지하로 만들어 시멘트,돌 등으로 아주 견고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겨울에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지반이 흔들리는데 대비하기 위함이다.거기다 창문주위에 갖가지 문양을 새긴 나무장식을 해놓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우랄사람들은 이 창문장식을 「날리치니키(얼굴)」라고 부른다.집의 얼굴이라는 뜻. 쨍쨍 내리쬐는 5월의 햇살 속에 거리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갔다.우리가 「여우비」라고 부르는 이 자연현상을 우랄사람들은 「버섯비」라고 불렀다.이 비가 지난 뒤면 숲의 버섯이 쑥쑥 자라기 때문이다.
  • 우랄의 옛도시­페름시(시베리아 대탐방:21)

    ◎인구 1백만… 우랄 최대의 문화중심지/「러」 3대 발레극장·베르샤긴 미술관이…/실바강 따라 1시간동안 절경 펼쳐/별장 지붕위 “매물” 페인트 표시 눈길끌고 페름시에 도착하면서 여행출발 이후 처음으로 인구 1백만명이 넘는 대도시를 밟아보게 된다.이곳은 프리 우랄 최대의 문화중심지로 혁명전까지 우랄의 행정수도는 에카테린부르크가 아니라 페름이었다.우랄의 공장지대에서 생산된 각종 물품들은 육로로 이곳까지 와서 배로 카마강∼볼가강을 따라 러시아중부의 각 도시로 운반돼 나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발레단(키로프발레단의 새이름),모스크바의 볼쇼이와 함께 러시아 3대 발레극장으로 꼽히는 페름발레단이 이곳에 있다.그러나 너무 추운 환경탓에 우수한 발레리나들이 서쪽도시로 빠져나가 지금은 그 명성이 많이 바랬지만 전유럽에 명성을 날렸던 발레학교는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그리고 20세기초 화가 베르샤긴의 작품 60여점을 소장한 베르샤긴미술관을 자랑한다.특히 이 도시는 카마강변의 언덕위에 건설돼 체코의 프라하 같이 언덕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정경이 일품이다. ○5㎞ 얼음동굴로 유명 페름은 또한 역대 소련 외상들 중 가장 유명했던 몰로토프가 이곳에서 혁명운동을 한 인연으로 40년부터 57년까지 시 이름이 몰로토프였다.러시아 전역에는 유명한 볼셰비키라면 어김없이 그의 이름을 딴 도시·대학이 5∼6개는 되는 게 보통이다.57년 도시 이름이 페름으로 바뀐 것은 몰로토프가 카가노비치·쉬필로프등과 함께 반흐루시초프 음모에 가담했다가 실각했기 때문이다.카가노비치는 스탈린 때 철도상을 지낸 스탈린의 최고 심복중 한명으로 이름난 킬러.러시아인들은 지금도 그를 가리켜「아이언(철혈) 카가노비치」라고 부른다. 페름역을 출발해 조금 나아가면 실바강이 나오고 강과 철길이 만나는 지점에 쿵구르역이 있다.쿵구르인들은 러시아에서도 손재주가 좋기로 이름난 사람들이다.쿵구르 구두·쿵구르 케이크·쿵구르 악기등 손재주가 필요한 정교한 제품들로 이름난 도시다.1759년까지는 우랄전체자보드(공장)의 행정본부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던 도시였으나 이후 시베리아철도가 건설돼 다른 도시가 커지며 상대적으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이곳을 제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쿵구르스키 리제나야 피쉐라(쿵구르 얼음동굴)」라는 지하동굴이다.길이 5㎞가 넘는 동굴안에 60여개의 호수가 서로 연결돼 있는데 항상 영하의 기온으로 얼어 있는 곳이다. ○야생능금꽃 눈부셔 길이 5백㎞의 실바강을 따라 1시간여 동안 그림같은 우랄의 절경이 펼쳐진다.강,강안의 바위,그위의 나무숲….페름주에서 우랄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베르들로프스크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 역은「코르간」이다.입산신고대란 뜻의 이름인데 숲이 많은 우랄지대라 이런 마을 이름이 유난히 많다. 왼편 차창밖으로 맑게 내리쬐는 5월 햇살아래 폭 1백여m의 실바강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우랄산맥의 정점에 있는 유럽·아시아 분수령에서 발원해 유럽쪽으로 흘러내리는 강이다.시베리아횡단열차구간중 최고로 꼽히는 절경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강변에는 잎이 갓 돋아나 연두색을 띤 베료자와 겨울을 지나 검붉게 뻗은 소나무·옐나무들이 같은 비율로 뒤섞여 고도로 세련된 색의 하모니를 연출해내고 있다.강변에 늘어선 별장 지붕에 흰 페인트로 커다랗게 「프로다유(팔겠다는 뜻)」라고 써놓은 글씨가 눈길을 끈다. 기차가 산정을 향해 숨가쁜 행진을 계속해 본격적으로 우랄의 수중으로 들어서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새로운 수종들이 나타났다.야생능금꽃이 눈꽃을 덧씌운 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1시간여를 달린 뒤 스베르들로프 경계를 넘어 첫번째 역인 샬랴역을 지나갔다.갑자기 잎을 달지 못한 베료자나무들이 나타나 산 곳곳이 민둥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우랄은 아직 봄의 첫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우랄산맥은 서쪽으로는 페름주의 쿵구르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에카테린부르크시 직후 산세가 끝이나며 동서거리의 최장은 2백㎞,남북길이는 2천㎞에 이른다.전체적으로 완만한 산세를 보이지만 북쪽 코미공화국에 있는 최고봉 나로드나야산은 해발 1천8백95m에 이른다. 페름에서 에카테린부르크로 연결되는 현재의 직선노선은 1905년에 건설됐다.그 전에는 1875년에 건설된 북쪽 우회도로가있었을 뿐이다.이 직선노선이 건설되기전 우랄과 모스크바를 잇는 노선은 에카테린부르크에서 남으로 첼리야빈스크를 경유해 서쪽으로 사마라를 거쳐 모스크바로 연결됐다.따라서 시베리아횡단열차노선도 첼리야빈스크에서 동쪽으로 쿠르간∼페트로파블로프스크(카자흐영토)∼옴스크로 이어졌다. 현재 이 북부 카자흐경유 노선은 매우 아름다운 절경을 지나긴 하지만 승객들이 기피하는 노선이다.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양국 국경세관에서 거의 1시간 이상씩 짐검사를 해 승객들을 귀찮게 굴기 때문이다.러시아인들은 노비자이지만 외국승객의 경우 이 노선을 이용하자면 미리 카자흐정부로부터 통과비자를 얻어야한다. ○희귀금속 무진장 매장 마침내 러시아 최대 산업지구 우랄지구로 들어섰다.우랄은 최대 공업지대이면서 메탈·희귀금속의 최대 매장지다.이 금속들을 발달된 기계공업기술로 묶어 아주 밀접한 단일 경제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현재 우랄로 통칭되는 이 산업지대에는 페름주·코미자치공·스베르들로프주·첼리야빈스크주를 비롯해순수농업지대인 쿠르간주·바시코르토스탄주·우드무르티공화국등이 속한다. 우랄의 가장 큰 자랑은 역시 무궁무진한 금속이 매장돼 있다는 것이다.지질학적으로 오래된 산은 완만하지만 희귀석·메탈·알루미늄 등 귀중한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고 반면 지진대로 분류되는 신생 산맥은 산세가 가파르고 아름다운 반면 자원이 매장돼 있지 않다.우랄은 전자의 전형적인 예이다.
  •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세기의 인물탐구:77)

    ◎비학과 첩학을 접목한 온자한 서풍/우리 전통서예 존중,「옛것」 부활 노력/동방연서회 설립… 후학 7천명 양성/보통학교때 붓글씨 시작… 단 1점의 타작도 안써 「고졸하나 우둔하지 않고 활달하나 법도가 있고 염미하나 속되지 않고 웅혼하나 패도하지 않아 강과 유가 서로 돕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다」,즉 『글자마다 생동미 넘치는 운필은 자연스러운 리듬과 균형미에 따라 「중화의 기」가 흐른다』는 뜻이다.이는 여초 김응현 서법에 대한 종명선 교수(서안교대)의 평이다.종교수는 현재 중국서협 학술위원이며 평론가,중국서법대가의 한 사람이다.지난 92년 한·중건교기념 김응현서법전에 붙여진 이 찬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북경사범대 교수이며 당대 명서법가로 명성을 떨치는 계공은 여초의 서법을 전대의 대가인 추사와 비유하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다.우선 두 사람이 모두 「금석고고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비학과 첩학의 접목을 중시하여 자재로운 천취를 얻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단지 추사의 글씨가 「바람을 끼고 비를 몰고오듯 유유자적하게 걸어나오는 데 비해 여초의 서법은 유고유아한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70년대 북경서 초대전 널리 알려지다시피 여초는 우리 서예계에서 옛것을 존중하여 전통을 부활시키며 이를 연구하여 마침내 새로운 것을 이뤄내는 데 전생애적 노력을 기울여온 원로다. 그는 일찍이 국제무대로 눈을 돌려 70년대 중반에 대북과 도쿄에서 각각 초대전을 가졌고 80년대말에는 본격적으로 중국본토에 진출하여 북경의 계공,상해의 사치유·왕북악등과 교분을 트면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북경 천안문광장 혁명기념관에서 개인전을 개최,연변·장춘·심양등을 순회하여 그곳 서예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특히 중국여행중 발표한 「당대의 해서가 동국에 미친 영향」 「안진경이 한·일서법에 끼친 영향」제하의 논문은 「중원시대의 문자와 단군시대의 문자,중원서법과 고구려의 인연관계」를 정밀하게 파헤쳤고 「동방의 금석은 자발적으로 진전됐으며 서체 또한 중국 영향권에만 있어왔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여 한·중 학자간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그러나 「심도 있는 견해와 견실한 입론,광활한 사로로 펼쳐진 그의 문장은 추호의 빈틈 없는 치학태도」로 평가되어 오히려 중국 서법가들의 공감과 호감을 산 바 있다. 여초의 초기의 서법은 주로 진의 왕희지,당의 구양순,원의 조맹부에 영향을 받아 「새벽바람 속의 잔월(효풍잔월) 같은 청려,대해파도 같은 웅호,뜬구름 스치듯한 표일,고하고 졸하며 기하고 위한 여러 글씨체를 지나」비학을 통한 광개토왕비체와 훈민정음체를 탐구하면서 「화려와 아첨(유미)을 몰아낸 강건한 주경을 성취」한 것으로 대찬되고 있다. 그는 18대째 서울에서 살고 있는 사대부명가의 후손이다.그의 증조부는 구한말 종일품벼슬을 지내다 경술국치때 순국한 김석진 학자이며 조부는 비서원승직을 지낸 동강 김영한,창문여고 설립자인 김윤동씨의 5남3녀중 3남으로 태어나 숭인보통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벌써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휘문중시절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율곡의 격몽요결 등 옛명현의 시문에 접근해 있었다.그러다가 1944년 아무 연고없이 일경에 연행됐다가 풀려나온 데 대한 후유증으로 도봉동 초가에 묻혀 그때부터 법첩으로 독학한 것이 친형인 김충현·창현 등과 함께 서예의 길을 걷게 된 동기다. ○불의에 타협않는 성품 성품이 꼿꼿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그는 50년대 중반 「평론 없는 분야는 독립된 분야로 성립될 수 없다」는 자각에서 60년대초까지 스스로 필봉을 휘둘러 「붓에 먹을 찍어서 종이에 긋기만 하면 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문의 뜻도 모른 채 쓰거나 글씨를 그림그리듯 하거나 남의 글씨를 임서하거나 손끝의 재주로 숙달된 필체」가 아닌,「오랜 서법에 의해 연마되고 탁마된 고매한 인격에서 우러나온 작품」을 주장해왔고 국전 서예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선현의 가언경구나 명문장을 선택하여 민족의 나갈 바를 열어주는 진취성 있고 주체적인 내용」,그리고 「아무리 원로라도 공부하지 않는 원로」는 심사위원으로 추대할 수 없으며 「추호의 사정이 깃들이지 않은 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심사원 선출」을 역설하여 서예계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서예계의 난맥상을 쇄신한다는 차원에서 56년 체계적인 서예연구와 보급을 위해 지금의 동방연서회를 창립,전예해행초 오체의 철저한 연구와 훈련끝에 그동안 배출한 서예인만도 7천여명,서예전문지 「서통」을 지난 30년간 개인의 힘으로 꾸준히 발간해오고 있다. 그가 평생을 두고 신조로 삼는 것은 노자의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라는 글귀다.「스스로의 만족됨을 알게 된다면 부끄러움이 있지 아니하고 그칠 바를 알아서 위태롭지 아니하여 오랠 수 있다」는 경구다. 그런 그에게 사욕이란 있을 수 없다.더구나 지난 91년 봄 손위 형인 창현씨가 「대화도중 갑자기 쓰러져 타계」하는 것을 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인생」에 무상을 절감한 나머지 그해 여름 자신의 사재 18억원을 출연,「사람은 사라져도 세상에 무엇인가 의미있는 것」을 남긴다는 취지와 함께 동방연서회를 재단법인으로 재출범시켰다. 그는 지금도 새벽이면 도봉동에 있는 그의 집을 나와 아침 8시 서실이 있는 동방연서회에 도착,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서실은 글씨를 쓰는 책상외에 방안 가득히 서법에 관한 서적이 산적해 있고 행길가인데도 난향과 수석과 녹차향 때문일까,온자한 서풍이 감도는 속에서 그는 「오늘은 심선이 그려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엄숙히 자문해본다.낙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그는 한점의 타작도 용납치 않으려는 주의다.그래서 한평생 붓을 잡으면서도 지금까지 아무 때나 기분내키는대로 가볍게 붓을 잡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심기가 평화롭고 사방이 청결하고 날씨가 화창하면 그날은 왠지 일점일획에도 오차가 없는 「정수」가 탄생될 것을 기대해 볼 뿐이다. ○세속적 취향과는 멀어 전보다 많이 옳은 말을 줄이고 일체의 세속적 취향에 타협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골프를 하고 싶어도 「자연을 훼손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같아 철저히 외면한다.물론 서예와 관련된 모든 잡사에도 끼어들지 않는다.하오에는 문중 사람을 더러 만나지만 특별히 친분 있는 사람도,그렇다고 서로 소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시기다.다만 그의 개인전을 집중적으로 주선해온 동방화랑의 서정철사장과는 30여년간 난향 같은 청교를 나눈다.가족은 부인 강영순 여사와 5남매,서예를 잇는 자녀는 없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안되는 것이 글씨다.서법은 쓰는 사람의 내면의 성숙과 외율의 조화이기 때문에 천질만으로도 부족하고 노력만으로도 미치지 못한다.따라서 서예는 미숙만이 있을 뿐 영원한 프로는 있을 수 없다」.이는 여초의 변이다. 그러나 그 서체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어 「천외천,예술외 예술」로 찬사되고 있는 시점에 서 있다.명지대 진태하 교수의 평처럼 「고희를 내년으로 앞둔 여초의 세계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넘치는 가운데 원숙과 창로의 경지에 들어 혼연천성하고 묘합자연하여 자신만의 서법언어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이제 그로서는 「예술이상과 예술도에 이른 자신의 지음을 눈부신 지면에 향기로 뿌리는 일만이 남았다. □연보 ▲1927년 서울 출생 ▲46년 휘문중 졸업 ▲51년 고려대 졸업 ▲50∼61년 국회보 주간,국회도서관 창설참여 ▲56년 동방연서회 창립멤버 ▲60년 국전 추천작가 ▲69년동방연서회 이사장 ▲70년 숙대·홍대·성균관대 강사 ▲71년 동방연서회 회장 ▲74년 방화전(중국국립 고궁박물원) ▲75년 국전 초대작가,한중 서법학대회 대회장 ▲76년 현대화랑초청 개인전 ▲78년 동방화랑초청 개인전 ▲79년 국제서도연맹초청 개인전(도쿄),중국국립 역사박물관 초청 개인전(대북) ▲80∼현재 한국전각학회 회장 ▲82년 동방화랑초청 개인전 ▲83년 신가파 중화서화협회고문 ▲84년 이마미술관 초청 개인전 ▲86년 중앙일보사 초청 개인전 ▲89∼현재 사단법인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동방연서회 서법교류 방중단단장 ▲90년 김응현서법전(중국북경 천안문광장 혁명기념관),신가파 제1회 국제서법교류대전 ▲91년 염황예술관이사회 명예이사,절강성박물관·서호서원 명예원장,서안 중국서법예술박물관·종남인사 예술고문,서안서학원 특격원위 ▲92년 김응현·김종길시화전,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의전(추모의전),김응현서법전(서안 중국서법예술박물관 및 상해) ▲93년 산동대학 동방서화연구원 고문겸 교수,김응현서법전(정주 하남성서화원),하남성서화원 고문 ▲94년 김응현·계공서법전(북경 영보재) 김응현서법전(서울 동방화랑) ▲95년 7월3일부터 8월7일까지 한·중·일 산경 서법전(한국 김응현·중국 계공·일본 임금동 일본 동경 선샤인문화회관)예정
  • 최고의 백제 목간 발굴/부여서/행정구역·인명 등 농업 관련기록

    충남 부여군 부여읍 궁남리 사비시대(서기 538∼660년)백제의 궁원 유적 궁남지에서 행정구역·지명·인명등을 먹글씨로 적어 놓은 농업관계 기록 목간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문화재관리국 부여문화재연구소가 갈수기를 이용한 궁남지 연못바닥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한 이 목간은 백제시대의 목간 유물 가운데 기록내용을 읽을 수 있는 최초의 것으로도 밝혀졌다.크기는 길이 35㎝,너비 4·5㎝,두께 1㎝정도로 위쪽에 구멍을 뚫어 줄에 꿰게 되어있다.
  • 6세기 백제때 행정구역 확인/충남 부여 궁남지 목간 유물발견 의미

    ◎삼국시대 초기 논 개간·관개시설 설치/짚신등도 발굴… 벼농사의 보편화 입증/「법리원주민사달사」먹글씨로 기록 백제의 사비성 옛터전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궁남리 궁남지(사적 135호)에서 발견된 벼농사와 관련한 목간은 1천4백여년전 유물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이 목간에는 논을 개간했다는 사실과 함께 고대사서에 나타난 백제 행정구역을 확인시키거나 새롭게 밝히는 내용이 담겼다.지명으로는 백제의 행정단위 5부에 속하는 서부와 중부,그리고 중국의 역사책 「수서」에 나오는 부아래 5항의 하나인 후항이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삼국사기」 잡지에 보이는 매라성과 역시 당시의 지명으로 생각할 수 있는 법리원과 사람 이름이 분명한 사달사등이 먹글씨로 적혀있다. 이 기록들을 종합하면 「서부 후항에 사는 사달사라는 사람등이 만라성 법리원의 논을 개간했다」는 내용이다. 목간 발굴현장 바로 이웃에서 물길로 추정되는 남북을 연결한 수로 2군데와 이들 수로 사이의 관개시설로 여겨지는 나무 구조물도확인되었다.나무 구조물은 길이 11.2m,너비 1.6m 규모로 뻘층을 파고 그 안에 통나무와 가공목을 3∼4단 정도로 가로로 쌓고 안팎에다 지름 15㎝의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이들 시설물 바깥 쪽에는 1백20㎝ 간격으로 말뚝을 박아 수로와 목구조물을 보호한 흔적을 남겼다.특히 수로에는 나뭇가지와 씨앗,곡물등의 유기물이 쌓여 퇴적층을 이룬 것으로 미루어 오랫동안 농사물을 댄 관개유적임이 드러났다. 이와 더불어 목간이 발견된 장소에서는 갈대를 엮어만든 자리,볏짚으로 만든 짚신,나무를 깎아만든 용도미상의 긴 막대자루,백제시대 토기편등이 나왔다. 이에 앞서 지난 93년12월 궁남지유적과 맞물린 지역에서 국립부여박물관이 백제 농경유적인 논(수전)유구를 비롯 관개시설,민속적으로 농사와 관련이 깊은 나무를 새겨만든 목각의 새,나무말뚝,나무배 조각,볏짚,과일씨앗등을 발굴한 바 있다. 이번에 발견한 목간은 이들 논과 수로등의 관개시설,볏짚을 이용한 제품등과 더불어 당시 백제의 벼농사가 보편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특히 목간은 논을 개간했다는 기록을 뚜렷이 남김으로써 최근 잇따라 발굴된 벼농사 관련 유구와 유물의 존재를 더욱 사실로 굳혀주었다.
  • 부여 정림사지 출토 흙인형(한국인의 얼굴)

    ◎둥근얼굴… 살짝 다문입에 조용한 미소/인물상 머리모양으로 성 구별/남자농관·쌍상투 여자는 곱슬하거나 단발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정림사 절터가 있다.정림사라는 이름이 후세에 알려진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1942년 일본인학자(등택일부)의 학술조사 이후다.당시까지만해도 무명의 절터였는데 학술조사에서 발견한 기왓장의 글씨 「대평팔년술진정림사대장당초」를 통해 본래의 가람 이름을 알게 되었다.「대평팔년」은 중국 요의 연호로,고려시대인 AD 1208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연호가 있는 기왓장은 고려시대의 가람 재건을 의미할 뿐 정림사는 백제의 절이었다.이는 현존하는 백제시대 5층석탑에서 입증할 수 있지만 지난 1979년 충남대박물관의 전면발굴에서는 더욱 뚜렷한 백제의 절로 확인되었다.특히 출토유물 가운데 소조불상은 백제의 색깔이 진하다.그리고 소조불상과 함께 무더기로 나온 흙인형들은 백제인들이 자기네 공간에서 재창조한 사비시대 인물상이다. 이들 흙인형은 오랜 세월을 땅속에서 잘 견디어냈다.그래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 앞에 온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내밀었다.모두가 옛 모습대로 웃는 얼굴이다.머리에 관을 썼거나 쌍 상투를 틀어올린 점잖은 남자상도 웃는다.생머리를 한 여인상과 곱슬머리의 여인상까지 따라 웃는데,까까머리 동자승인들 어찌 웃음을 참겠는가.정림사 절터에서 나온 백제 흙인형들은 다 웃고 있다. 이들 흙인형의 성과 역할은 손질한 머리 모양새를 빌려 구분했다.그러나 웃음들은 한결 같다.전부가 입을 다문채 빙그레 웃음을 지어 한껏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이른바 농관이라는 관을 쓴 남자 인물상은 얼굴이 둥글다.반달모양 눈썹에 눈이 가늘고 입술은 도타운데 작다.눈과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턱 밑으로 3줄의 목주름(삼도)이 잡혀있다.머리의 농관을 옆에서 보면 얇은 널빤지(판장)처럼 조각되었다. 이렇듯 농관을 쓴 2점의 남자인물상 이외에 쌍상투를 튼 다른 남자인물상 1점이 더 나왔다.여자인물상의 하나는 머리카락이 내려와 귀를 가렸다.요즘의 퍼머머리 모양을 한 또 다른 여자인물상에서는 서역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그리고 아주앳된 얼굴의 인물상은 삭발을 했기 때문에 동자승이 분명하다. 얼굴이 온전한 흙인형은 9점이고 나머지 5점은 얼굴이 망가진채 발굴되었다.4∼7㎝ 크기의 이들 인물상은 절터 회랑자리 서남쪽에서 진흙으로 빚은 불상파편들과 함께 나왔다.한 구덩이에 쓸어묻은 흔적이 역력했다.여기서도 백제의 비극이 보였다.그러니까 AD660년 정림사가 사비성과 운명을 같이 한뒤 쓸어묻은 유물일 것이다.19 89년 발굴조사때 건물자리에서 확인한 넓은 면적의 불탄 흙바닥(소토층)은 정림사 최후를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웃고있는 얼굴들,아련한 백제문화의 잔영이다.중국의 남북조시대 북위와의 교류과정에서 눈여겨 보아두었던 문물을 백제땅에서 다시 꽃피운 걸작의 예술이기도 하다.
  • 문화홍보(세계화 이렇게 하자:14)

    ◎해외 문화원 대폭 늘려 전초기지로/전문인력 보강… 체계적인 국제교류등 시급/체류 외국인이 한국어 배울 학원 많이 설립 아침 출근시간의 지하철 3호선.옆자리에 앉은 노란 머리의 외국인이 무언가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살짝 훔쳐 보니 서툰 글씨로 쓴 한글 옆에 영어로 토를 단 공책을 읽고 있는 참이었다. 지하철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이런 외국인들의 모습을 최근엔 종종 볼 수 있다.한국문화의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세계화 추세를 뒷받침해야 할 문화정책은 그러나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다.한국 체류 외국인이 급증하고 있음에도 그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방안이 적극적으로 수립되지 않고 있으며 몇몇 대학의 어학원들이 그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오는 97년부터 국민학교 3학년에게 영어교육을 실시하도록 한 교육개혁안이 나올만큼 영어 배우기 붐이 일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한국어를 세계화하는 정책은 너무 빈약한 셈이다.어문학자들은 『어학원이 없는 대학이라도 강의실 한두군데만 있으면 한국어 강좌를 시작할 수 있다』면서 이같은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사물놀이포함 극소수 현재 우리문화 내지 문화상품의 세계화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지난 10여년간 5백여회의 해외공연을 가진 「사물놀이」등 몇몇 분야만이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을 뿐 영화,문학,연극,무용 등 많은 장르에서 아직도 진정한 세계성을 갖춘 상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문화가 나름의 보편적인 예술가치를 획득하고 미학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문화예술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알리는 전략적 문화홍보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일환으로 우선 우리 문화 세계화의 전초기지라 할 해외 한국문화원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현재 한국문화원이 설립돼 있는 곳은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프랑스 파리,일본 도쿄 등 3개국 4개 도시에 불과하다.이같은 숫적 열세는 84개국에 1백45개의 문화원을 두고 있는 영국이나 68개국에 1백52개의 문화원을 갖고 있는 독일의 경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가까운 일본의 경우만해도 우리의문화원에 해당하는 광보관이 31개국에 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경희대 영문과)교수는 『그나마 설치돼 있는 해외 한국문화원도 전문인력 부재와 보잘 것 없는 예산 등으로 해외문화교류의 다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문화원 증설과 함께 기존 대사관의 문화담당관(CulturalAttache)등도 크게 보강,보다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문화외교에 나서야할 때』라고 진단한다. ○영상산업등 집중지원 한국문화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기 전에 우선 우리 문화를 정보화사회의 변화된 미학과 기술적 발전에 걸맞는 방식으로 표현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관광상품을 만드는 식의 방안은 싸구려 문화상품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훼손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후기산업사회의 관건은 바로 소프트웨어산업이다.문화 자체가 생산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이 가운데서도 특히 영상산업은 부가가치 창출효과가 큰만큼 산업적 측면에서의 세계화전략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영화진흥공사 이무상 차장은 『영상산업 중에서도 비교우위가 예상되고 지원효과도 조기에 극대화될 수 있는 만화영화나 게임소프트웨어 분야를 「전략적 선도부문」으로 선정,집중 육성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보였다.상품으로서의 한국영화 세계화와 관련해서는 「서편제」의 예에서 볼수 있듯이 차별화된 틈새시장(니치마켓)전략이 역시 가능성있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수출영화에 대한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고 합작영화 제작에 대한 허가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올해 국내 미술계에는 1백억원의 경비가 투입될 광주 비엔날레를 비롯,각종 대형 국제전 창설붐이 일고 있다.특히 최근 들어서는 대기업의 미술문화 투자사업이 부쩍 활기를 띠며 「젊은 작가지원」을 표방한 미술관들이 늘어나고 있어 우리 미술 세계화의 전망을 한층 밝게 하고 있다.젊은 작가 육성은 그동안 미술계의 가장 시급한 과제중의 하나인 만큼 미술계에서는 이번 기회에 공공적 성격의 미술관들은 물론 인기작가들만 선호하는 상업화랑들도 적극적인 작가육성 방안을 마련,우리 미술의 토양을 가꿔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가는 프로야구팀보다 더 많은 표를 판다고 한다.그만큼 연극저변이 두텁다.그러나 우리의 경우 세계화에 앞서 국내기반 조차 허약하기 이를데 없다.이같이 피폐한 무대예술 현실을 감안할때 「사랑의 티켓」등 관객지원제도를 보다 활성화,연극인구를 늘리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문화창조자를 돕기보다 문화수요자를 돕는 것이 문화정책의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서울 ITI총회 활용 오는 97년 서울에서 열리는 ITI(국제극예술협회)총회에는 세계 90개국 3백50여명의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다.이를 한국연극 세계화의 한 계기로 활용할 만하다. 한국연극협회 정진수(정진수) 이사장은 『ITI총회에 맞춰 세계 공연예술페스티벌을 개최,한국이 일방적인 문화소비국이 아닌 공연예술의 주요거점임을 부각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민속춤 위주의 해외공연 정책을 펴온 한국은 필리핀이 「대나무춤의 나라」로 기억되고 있듯이 「부채춤의 나라」 정도로 인식돼온 측면이 강하다.그런만큼 우리 무용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기존의 민속공연과 별개로 창작분야에 좀 더 힘을 쏟아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 시인 박두진(이세기의 인물탐구:75)

    ◎신·자연·인간을 노래한 “해의 시인”/불의·적당주의·시속과 타협 단호히 거부/독학으로 인생행로 개척한 극기의 인물/등산·수석채집 30여년… 붓글씨·서화에도 능해 「해야 솟아라.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넘어 산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혜산 박두진의 「해」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우리나라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인 그를 일컬어 문단은 「해의 시인」으로 부르고 있다.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인환(고대교수)은 『밤과 밤을 몰아내는 해와의 대조위에 전개되는 「해」에는 혜산이 희망하는 세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그 세계는 꽃과 새와 사슴과 칡범과 인간이 한 자리에 앉아 앳되고 고운 동심을 이루고 있지만 과연 현실이 기다림만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그의 시적 변모는 이러한 질문에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혜산 박두진의 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한 줄기 정신은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신앙의 영향은그로하여금 인간중에서 가장 많이 고통받고 가장 위대하게 사랑한 예수의 생애를 통해 언덕과 하늘과,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집단이 감동속에 결속되고 있음을 「갈보리의 노래」로 절규하고 있다. ○“위선과 탐욕 버려야” 「마지막 내려덮는 바위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같은 치욕을,불붙는 분노를,에어내는 비애를,물새같은 고독을,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꽝꽝 쳐 못을 박고,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우주의 생명과 우주의 질서」에 눈을 돌려 「이제 사물과 인간은 우주적 무도에 참여하는 하나의 과정,하나의 사건이 되고,가식과 위선과 탐욕을 버리기만 하면 누구나 생명의 환희를 체험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의 특징은 작품에서 개인적인 감상을 추구하지 않는 점이다.86년 한 신문에 발표한 칠순기념 특별기고에서 「가난이라든가 개인적인 슬픔,사람에 대한 배반감이나 기쁨을 시로 승화시킬 수는 있다.그러나 문학은 인간 누구나가 느끼는 인류공동의 문제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로 천착하여 진실에 대한 투시력을 보여야 한다」고 논한 바 있다.즉 「시의 사상,시의 윤리,시의 심미적 창조가치는 언제나 그 창조의 주체인 시인에 의해서만 시적 진실이 획득된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쓰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개탄하면서 「나이든 사람은 젊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젊은 사람은 나이든 사람을 업고 나와 학연·지연을 앞세워 설쳐대는 것은 문학의 권위와 문학인의 자존심을 잃는 일」이라고 우려해 마지않았다. 혜산의 생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일컬어 「극기의 인물」로 평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앙상하리만큼 야윈 체구에 오랜 등산과 수석채집으로 다져진 강단은 일상생활에서도 불의에 굴하거나 적당주의나 시속의 타협이 없이 무엇을 하든 정의감과 선비적 자세를 지켜왔고 그의 시의 소재들은 이런 다양한 지란을 이겨낸 심혼의 결정으로 해석되고 있다. 시인 신대철은 팔순을바라보는 나이에도 언제나 꼿꼿한 자세와 순수무결한 시심을 잃지 않는 혜산을 향해 『자기초월의지를 가진 인격과 고고한 학자의 기풍과 시인의 기상을 흐트리지 않아 문단에서는 물론 대학에서도 제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고 자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경기도 안성 「고장치기」로 불리는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청렴한 선비이던 선친으로부터 일찍이 한문과 붓글씨를 배우고 안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 외엔 그는 혼자서 독학으로 인생행로를 개척해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4세때 「문장」지에 등단 24세에 「문장」지의 시 추천을 거쳐 문학활동을 전개하기 이전까지 그는 측량소·경성부청·금융조합원 생활을 전전했고 45년 해방과 함께 그 당시 유일한 출판사이던 을유문화사에 입사한 것이 조지훈·박목월과 만나 「청록집」을 출간하는 계기가 된다.이후 자연과 신을 주제로 하는 시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더니 60년대말부터 수석취미에 침몰하여 「돌」 하나만을 주제로 하는 「수석열전」시리즈를 「현대문학」지에 수년간 연재,지금은 「돌의 시」로써 시인만의 청복을 누리는 시기다. 서대문구 창천동 그의 집에 가보면 마당과 거실과 서재와 베란다는 「뇌뢰낙락하고 고하고 괴하면서 관용자수 한 명석」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고 그의 돌에 대한 사랑은 3천여편 이르는 시작 외에도 서화나 수필에 넘치도록 표현되어 있다. 「작은 한개의 돌이 갖는 형태미와 색채미는 어떤 조각품에도 견줄 수 없는 묘막한 조형미가 갖춰져 있다.난이 정의 극치라면 수석은 의 극치,난이 부드러우면서 의연하다면 수석은 웅혼섬세하고 표일 불기이면서 차라리 성자롭다」등,그리고 「시를 쓸 때의 사무사의 맑은 마음,맑은 눈만이 석격이 심웅하고 석품이 우귀」한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혜산의 취미는 다양하다.시를 쓰는 것과 동시에 30년남짓 등산을 하고 난을 키웠으나 그는 이를 굳이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붓글씨와 서화에 능하여 앞을 향해 질주하는 듯 한 아름다운 필체는 「혜산체」로 일가를 이루고 있으나 서도를 감히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어떤 것은 너무 높은 경지라그렇고,어떤 것은 나 자신이 족히 미치지 못해 모자라는 것을 취미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시를 좋아하면서 산을 좋아했는지 산을 좋아하다가 시를 좋아했는지는 모르나 산은 심약한 그를 「의지적 인간」으로 바꾸어놓았고 일목일초에 기울이는 정서적·감각적 운치를 알게 했으며 「한개의 돌에 얽힌 정신적 파동」은 그의 시심을 한층 심화시켰다고 돌아본다. 문단의 교분은 다양하진 않지만 월탄이 생존해 계실 때는 종로구 충신동 월탄댁에 가끔 모여 「문주반생기」의 무애 양주동,「명정사십년」의 수주 변영로,공초 오상순,연포 이하윤등 문단의 주호들과 맥주 두잔의 술실력으로 「도도한 무애의 웅변,월탄의 호통,공초의 무언,수주의 독설속에서 시를 주고받고 휘호를 치면서 철저하게 밤을 새운 이야기」는 문단사의 향기로운 추억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수석에 물을 뿌리고 돌보면서 가슴속에 들끓는 정열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그럼에도 자신을 「시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렇게 의식해 본 일이 없다」고 끝내 도도하다.다만 「시는 한낱 감상이 아닌 인간이 신의 손길에 의해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덕윤과 경외의 념」이라는 한 평자의 말에 공감할 뿐이다.언제나 쓸 것이 밀려 있고 생각에 쫓겨 「한없이 즐겁고 한없이 탄력을 느끼면서 고양된 감정,맑은 생각,투지와 저항,여유와 절박감이 뒤섞인 속에서」 그는 총체적으로는 어떤 즐거움과 보람같은 것을 느껴왔다고 수필집 「돌과 사랑」에서 밝히고 있다. 연세대 교수 정년퇴직후엔 일주일에 두번 추계예술대 강의,그외엔 2박3일정도로 수석채집을 위한 여행길에 오르고 수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면 수석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데 지루해 하지 않는다.가족은 동화작가인 이희성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만 4형제. 『시인은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기꺼워하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내부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은 그를 두고 적절하다.혜산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성 속에는 시가 있고 시를 상실한 사람은 인간의 순수성을 상실한 사람이며 시는 본질적으로 진실이며 선이며 아름다움이며 신의말씀」이라는 그의 시론을 시로써 실천해냈고 마지막 붓끝까지도 신과 자연과 인간의 결속을 불후의 명시로 성취할 이 시대 진정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연보 ▲19 16년 경기도 안성출신,호 혜산 ▲39년 「향현」「묘지송」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에 추천 ▲46년 첫시집 조지훈·박목월등과 「청록집」(을유문화사)출간 ▲48년 한국청년문학협회 시부위원장,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49년 제2시집 「해」(청만사)출간,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51∼81년 연세대 교수 ▲65년 우석대 조교수 ▲70년 이화여대 부교수 ▲81년 단국대 초빙교수 ▲86∼현재 추계예대 전임대우교수 시집 「오도(오도)」(54년)「박두진 시선」(56년),수필집 「시인의 고향」(58년),시론집 「시와 사랑」(60년),시집 「거미와 성좌(성좌)」(61년)「인간밀림(인간밀림)」(63년)「하얀날개」(67년)「청록집·기타」「청록집 이후」(68년),시론집 「한국현대시론」,수상집 「생각하는 갈대」(70년),영역시선집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역 「Sea of Tomorrow」(71년),수상집 「언덕에 이는 바람」,시집 「고산식물」「사도행전」「수석열전」,시론집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한국현대시문학대계 「박두진」(73년),시집 「속·수석열전」(76년)「야생대」(77년),시선집 「예레미야의 노래」,시집 「포옹무한」「하늘까지 닿는 소리」「박두진 전집」(범조사 81년)「나 여기에 있나이다,주여」(82년)「청록시집」(83년),수상집 「돌과의 사랑」「그래도 해는 뜬다」,시선집 「일어서는 바다」(86년) 「불사조의 노래」(87년),시집 「빙벽을 깬다」(90년),산문전집 「햇살,햇볕,햇빛」(91년)「박두진 전집」(신원문화사 95년) 아세아자유문학상(56년) 서울시문화상(63년) 3·1문화상 예술상(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76년) 인촌(인촌)상(88년) 지용문학상(89년)
  • 김 대통령,일본인은사 가족 해후

    ◎“와타나베선생은 한인존중한 참스승/미래지향의 한·일관계 표본 삼고싶다” 김영삼 대통령은 25일 낮 모처럼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일본에서 온 「특별한 손님」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 청와대에 초대된 사람들은 김대통령의 통영중학 시절 일본인 교감이었던 은사 와타나베 다쓰미(도변손)선생의 장남 고야(공야·53·일본 사카이시 농수산과장)씨 일가 4명으로 부인 지히로(천심),여대생인 두딸 마유코(진유자)와 에미(혜실)양.지난 78년 작고한 와타나베 선생의 부인 히로미(광미)씨는 86세 고령으로 요양중이어서 함께 오지 못했다. 김 대통령은 오찬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면서 『두 따님은 정말 와타나베선생님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고 말하고 『해방된지 50년이 됐지만 지금도 동창생들이 모이면 와타나베 선생님 얘기를 많이 한다』고 소개했다.김 대통령은 이어 『와타나베 선생이 중풍으로 쓰러진뒤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친필 엽서를 보내왔었다』고 선생을 회고했다. 고야씨는 『대통령께서 아버님에 대해 깊은 마음을가지고 우리를 초청까지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감격의 인사를 했다. 김 대통령이 식민지 시절 은사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시 와타나베 교감의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태도가 진실해 많은 존경을 받았었기 때문.그는 특히 한국학생들을 멸시했던 기타지마 교장과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이 통영중 3년생이던 시절 이 고약스런 기타지마교장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밉살스런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나르게 된 김영삼소년은 이삿짐 가운데 설탕부대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 당시에는 대단한 귀중품이던 설탕이 절반가량 길거리에 흘러버리게 했다.화가 난 기타지마교장은 와타나베교감에게 「범인 색출」과 「엄벌」을 지시했다.김소년은 자신이 했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와타나베 교감은 이 한국인 학생의 심경을 헤아려 어떻게든 징계의 정도를 낮추며 감싸주려했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와타나베선생은 한국학생을 아꼈던 진정한 스승』이라고 회고하면서 『이런 인물을 미래지향의 한·일관계구축의 표본으로 삼고 싶다』고 피력한 바 있다. 한편 오찬이 끝난 뒤 김 대통령은 이들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했고 와타나베 선생의 초상화를 답례로 받았다. 김 대통령과 이들의 만남은 지난 4일 김 대통령이 한국주재 일본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와타나베 선생 유족들을 수소문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 6세기 고구려 금동여래입상(한국인의 얼굴:28)

    ◎웃음 머금은 입가… 너그러운 모습/갸름한 얼굴… 두 눈은 살며시 내리깔아/“두려움 없이 소원 말하라”포용의 손짓 불교미술에서 조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불교도들의 직접적인 숭배대상이 되는 불상이 조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불상은 불교와 함께 들어왔다.「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AD372년 불교를 처음 수용할때 승려 순도가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왔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순도가 가져왔다는 불상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다만 발상지 인도의 불상이 아니고 중국에서 변형된 양식의 불상이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현재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고구려 불상은 국보 제119호 금동여래입상이다.이 불상 뒷면에는 「연가7년기미」라고 쓴 새김글씨(명문)가 들어있어 불상을 만든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연가」는 고구려의 독자적 연호로 여겨지는데 연가7년의 기미년은 AD539년(안원왕 9년),또는 AD599년(영양왕 10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가 되면 중국의 것을 전적으로 모방한 불상양식에서 벗어난다.불교가 뿌리를내리고 조각술이 발전하면서 고구려의 특성을 지닌 불상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그래서 이 고구려의 불상은 당시 6세기쯤 중국 북위불상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북위의 불상에 비해 훨씬 갸름한 얼굴을 한 고구려 불상은 날렵해진다.불상은 물론 불심으로 만든 조각이긴 하지만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얼굴을 닮을 수 밖에 없다. 이 불상의 전체 높이는 16·2㎝에 불과한 작은 키다.그 키에 들어있는 얼굴인들 어찌 크겠는가 만은 표정 만큼은 정교하다.아래로 살며시 내리깔은 눈매와 꼭 다문 입가의 엷은 웃음이 신비롭다.그래서 여래임을 일러주거니와 특색있는 곱슬머리(나발)며 크게 흘러내린 귀에서도 부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부처의 얼굴(상호)이 가늘고 길다(세장)고는 하나 결코 빈약하지 않다. 이 불상의 특징은 날렵해 보이지만 빈약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든 조각솜씨에 있다.목주름(삼도)쪽도 당당해서 어깨에 걸친 옷(통견의)이 목을 유난히 드러내 보인다.옷소매는 길게 내려와 홀목을 덮었다.그런데 두 손은 중생들에게 의미가 큰 사인을 보내고 있다.오른쪽 손은 두려워 말라는 의미의 시무외(시무외)를,왼쪽 손은 소원을 받아들인다는 여원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불상양식을 고스란히 지닌 이 금동여래입상은 엉뚱하게도 지난 1963년 경남 의령군 대외면 하촌리에서 출토되었다.고구려 불상이 어떤 경로를 통해 가야의 고토로 흘러들어왔는지 모르나 불교문화가 남류했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이 금동여래입상은 평양에서 발견된 금동미륵반가상(국보 제118호),금동보살입상(보물 제333호)과 더불어 몇점 안되는 고구려 불상의 하나다. 이 금동여래입상에 주목할 이유는 불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시기와 가장 가까이 물려있기 때문이다.그리고 불상을 통해 만난 고구려인의 얼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불상을 한번 더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 참화현장 온정 “밀물”/대구가스참사 수습현장

    ◎“이 시련 한마음 극복”… 뜨거운 동포애/“한방울의 피라도…“줄잇는 헌혈/주민들,김밥 챙겨 복구반 격려/민·관·군 현장수습 구술땀… 전국서 성금 【대구=특별취재반】 참혹했던 참화를 극복하려는 국민의 온정이 뜨겁다. 28일 일어난 대구지하철 참사현장과 부상자주변에는 한 방울의 피라도 보태려는 헌혈의 발길이 전국에서 줄을 잇고 있고 복구작업에 작은 정성이라도 함께 하려는 시민의 따뜻한 마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사고직후 망연자실하던 대구시민은 희생자가 늘어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북 적십자 혈액원 등 시내 3곳의 혈액원으로 발길을 모았고 서울등 전국 곳곳의 주민·공무원·군인 등도 기꺼이 팔뚝을 걷어붙였다. 대구시 새마을봉사단원 1백여명은 28일에 이어 29일에도 김밥과 빵 등을 준비,병원 등을 돌며 부상자와 희생자가족을 위로했고 복구현장에도 들러 복구반원들을 격려했다. 대구모범운전자회 소속 개인택시운전사 70여명도 이틀째 사고현장근처에서 교통정리에 나서고 있다. 한국응급구조단원 15명은 사고직후 40명을병원에 긴급후송한데 이어 추가사망자 발견 등에 대비,현장에서 밤을 새웠다. 인천·광주·대전 등 지역에서도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성금을 전달하는가 하면 헌혈운동을 펴 대구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동참하고 있다. 재계등의 동참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에 힘입어 이날 상오부터 민·관·군 합동의 현지 복구작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사고대책본부(단장 이종주 대구시장)는 이날부터 군·경찰·공무원 등 5천여명의 인력과 크레인 17대 및 양수기 30대 등 2백40여대의 각종 중장비를 사고현장에 투입했다. 전날 철야작업으로 지하철공사장에 괸 물을 모두 뽑아낸 데 이어 이날 상오7시부터 파손된 복공판을 들어내는 등 오는 30일까지 현장을 치우기로 했다.그 다음 지하철공사용 토류판과 버팀보를 보강하고 복공판을 다시 설치해 다음달 6일부터는 교통소통에 지장이 없도록 할 계획이다. 수돗물이 끊긴 월배동 1만5천가구를 위해 30일까지 6백㎜ 상수도관 5백m를 별도로 설치(우회관로),1일부터는 수돗물을 정상적으로 공급한다. 상신동일대 8천여가구의 전기와 상인동지역 1만회선의 전화는 이날 모두 복구됐으나 상인·진천·화원지역에 대한 도시가스공급은 안전을 위한 정밀진단 등으로 2∼3일후 재개될 전망이다. 대책본부는 또 사고지역의 교통체증을 덜기 위해 복구가 끝날 때까지 22번과 30번 등 14개 버스의 노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등 임시소통대책을 마련하고 시민의 협조를 당부했다. 대책본부 이종주 단장은 『각계의 도움으로 복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피해를 최소로 줄이기 위해 1주일 안에 복구를 마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건희 삼성그룹회장과 구본무 LG그룹회장·김만제 포항제철회장은 29일 희생자위로금으로 각각 10억원·5억원·3억원씩 대구 사고수습대책본부에 전달했다. 최종현 선경그룹회장도 위로금 3억원,선경그룹 대주주인 한국이동통신의 서정욱 대표는 1억원을 전달했다.장수홍 청구그룹회장은 2억원을 냈다. 포항제철에 원료탄을 공급하는 캐나다 러스카사의 피터그린회장도 29일 5천달러(약 3백80만원)를 위로금으로 내놓았다. 그린회장은 이날 김종진포철사장과 면담,위로금을 전달했다. ◎영남중 10명 갸륵한 선행/급우 잃은 아픔딛고 “자원봉사”/병원서 청소·심부름… 유족 잡일 도맡아/“저희가 효도 할께요”친구 어머니 위로 『민철아,근호야 어데 갔노…』 10여명의 까까머리 꼬마들은 낯익은 친구의 웃는 모습 영정 앞에 고개를 떨구고 할 말을 잊었다.흰색 천에 급하게 쓴듯 삐뚤어져 보이는 「자원봉사자」라는 글씨가 졸지에 친구를 잃은 이들의 아픔을 아는 듯 했다.대구가스폭발사고 이틀째인 29일 하오 29구의 시신이 안치된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 보훈병원에서는 영남중학교 학생들이 아직도 앙증맞기만 한 손으로 생사를 달리한 친구들에게 국화꽃을 건네고 있었다. 『사고전날 민철이와 사소한 말다툼을 한게 자꾸 마음에 걸려요』 애써 울음을 참던 키작은 홍성준(13·1학년 4반)군은 차가운 영안실 바닥에 떨어진 닭똥같은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냈다.평소보다 5분가량 일찍 등교해 화를 면한 홍군은 한반 친구 5명을 한꺼번에 잃은 충격 때문에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밤을 꼬박 세웠다. 『그래도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원망스러웠어요』 이날 아침 학교에 나간 홍군은 같은 반 친구들과 서로 부둥켜 안고 울다가 『민철이를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다』고 되뇌었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고 민철이를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더 큰 충격을 받고 있을 친구 동생의 얼굴도 아른거렸다.홍군보다 두살 많은 나형진(3학년9반)군도 이날 후배들과 발걸음을 같이 했다.단짝처럼 지내온 근호를 「빼앗긴」 터에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친어머니 같은 친구의 어머니를 그냥 안아드리고 싶었습니다.근호도 그걸 바랄 겁니다』 눈물도 말라버린 듯 망연자실해 있던 어머니는 아들 친구의 손을 붙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깔깔대며 함께 뛰놀아야 할 친구들이 「영정」과 「자원봉사자」로 만나야 하는 기막힌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영안실에 있던 다른 유가족들도 어린 학생들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연신 두 눈을 닦아냈다. 『새아들을 얻은 셈 치세요.우리가 대신 효도할께요』 때마침 눈물같은 하얀 꽃가루가 영안실앞마당 가득히 흩날리고 있었다.
  • 통영/천혜의 해양경관 휴양지로 탈바꿈

    ◎「충무 마리나」 개장… 요트·윈드서핑 즐겨/사천공항서 무료셔틀버스… 한산도까지 보트로 30분 「동양의 나폴리」「남해안의 백진주」 등으로 불리는 항구도시 경남 통영시(종전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영시로 통합)가 관광휴양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 곳은 쪽빛바다와 풋풋한 바다냄새,뱃고동과 갈메기가 어우러져 남해안의 정취가 가득한 한려수도의 중심지인데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을 이룩한 한산섬을 비롯,해수욕장·낚시터 등이 인접해 천혜의 해양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더욱이 지난해 국내 최초로 문을 연 「충무마리나」가 올해 콘도 등 각종 부대시설을 잇따라 보강,개장해 수상스키·제트스키·윈드서핑 등 각종 해상레포츠가 본격화 될 전망이다. 통영시 도남동 도남항에 위치한 충무마리나 리조트는 경남도 도남관광개발 계획에 따라 (주)금호개발이 오는 97년 완공을 목표로 총 1천4백50억원을 들여 건립하는 12만3천여평규모의 육·해상 레저타운. 지난해 육·해상 계류장과 요트클럽하우스가 개장된 데 이어 지하 1층 지상 15층에 16·27·60평형의 객실 2백72실과 회의실,한·양식당,전자오락실,사우나,노래방 등의 부대시설을 고루 갖춘 콘도미니엄(70% 분양)이 지난 9일 개장됐다.또 오는 97년초 스포츠센터,육·해상 놀이공원,야외 체육시설,충무공 전승기념관,상가 등이 들어서게 돼 해상리조트로서의 제모습을 갖추게 된다. 마리나는 요트를 정박시킬 수 있는 계류시설과 요트클럽하우스,요트수리·급유소 등을 갖춘 요트전용항구.이 곳은 현재 8∼18인승 모터요트 15척과 돛을 단 세일요트 5척 등 20척을 보유하고 있다.비회원이 4가족 18인승 모터요트를 이용할 경우 비용은 40만원선이다. 또 관광유람선 선착장이 이웃한 곳으로 이전해 와 한산도·해금강·매물도 등을 수시로 운행하고 있어 주변 명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도남항에서 모터보트로 30분거리의 한산도는 요즘 만개한 동백꽃으로 온통 붉게 물들어 있다.이 곳에는 이충무공이 한산대첩의 공훈으로 3도 수군통제사가 된 뒤 지은 제승당(제승당·사적 113호)과 수루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분 거리의 비진도해수욕장은 1백년이상 된 소나무숲이 바다와 잘 어우러져 연간 6만여명이 해수욕을 즐기는 호젓한 해변이다.또한 통영에서 27㎞ 떨어진 소매물도는 경관이 아름다워 해금도라고도 불리어지며 섬의 대부분이 70여m의 아찔한 절벽이다.글씨가 새겨져 있는 강정이란 뜻의 「글씽이강정」과 암수바위가 유명하다. 이밖에 추도·사량도·연화도 등은 낚시터로 유명한데 감성돔·노래미·도미 등이 많이 낚이며 특산물로는 돌미역·멸치·나전칠기·통영갓 등이 있다. 승용차로는 대구∼구마고속도로∼마산∼통영으로 가면되고 비행기를 이용할 경우 진주 사천공항에 도착,충무마리나까지 운행되는 무료셔틀버스를 타면된다.충무마리나(02­758­8764) 도남관광단지 유람선(0557­645­2307)
  • 김 대통령­중 교석 상무위장 대화록

    ◎“한­중 관계 모든 분야에서 급속 발전”/북경­상해 등 활기찬 모습 감명/김 대통령/한반도 평화수호 최대한 노력/교 위원장 김영삼대통령은 18일 상오 청와대에서 중국의 교석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예방을 받은뒤 1시간동안 오찬을 함께하며 북핵문제등 동북아정세와 양국관계 증진방안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다음은 윤여전 대변인이 전한 대화요지. ▲김 대통령=수교후 3년이 채 안된 기간동안 양국은 경제·통상관계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급속한 관계발전을 이뤄 왔습니다.특히 지난해 12월 직항로 개통으로 두나라는 보다 가까운 이웃이 되었습니다. ▲교 위원장=수교이후 두나라 주요 인사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경제협력관계도 신속하게 발전되어 왔습니다.이러한 관계는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김 대통령=미·북 제네바 합의가 철저히 이행되어 북한의 핵의혹이 해소돼야 합니다.남북한 관계개선과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이 보다 적극적인 대북한 설득노력을 기울여 주기 바랍니다. ▲교 위원장=한반도의 평화가 아시아는 물론 세계평화에 매우 중요한 만큼 중국으로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김 대통령=지난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북경 상해 천진의 활기찬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교 위원장=우리 경제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만큼 어려움도 있습니다.가능한 한 거품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우리도 경제 주체들의 노력으로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어 성장률을 낮추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지난해 중국을 방문한 한국인 여행자수가 24만명으로 급속히 늘어났는데 관광객 1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동차 3대를 수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는 것이라고 하는 만큼 한국이 중국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교 위원장=한국을 찾는 사람보다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사람의 수가 훨씬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중국사람도 해외여행을 하고 싶어 하지만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김 대통령=이번 전인대 회의에서 국정운영의 안정이 강조됐다고 하는데 성장과 안정의 조화문제는 어느 나라에서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교 위원장=성장과 안정의 조화가 이상적이므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할 것입니다. 이날 오찬에는 계공 중국서법가협회 명예주석겸 북경사범대 교수와 장정연 주한대사 등이 배석했는데 김 대통령은 계공교수에게 『중국에서 붓글씨를 제일 잘 쓰는 분이니 결국 세계에서 제일 잘쓰는 분』이라고 한데 이어 장 대사에게도 『한국말을 너무 잘하고 한국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중국대사가 아니라 한국대사』라고 말해 좌중에 웃음이 일기도 했다.
  • 김성동씨 대하소설「국수」1부 집필 끝내

    ◎“1세기전 조선인의 정신·마음 재조명”/예인들의 삶·당시 풍속 실감나게 묘사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씨(48)가 대하소설 「국수」(국수)1부(5권)의 집필을 끝냈다.그동안 「만다라」「길」 등의 자전적인 작품을 주로 써왔던 김씨에게 자신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이 소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비로소 응어리진 것을 정리하고 자유로와진 느낌입니다.구한말 서세동점의 시기를 배경으로 쓰러져간 조선의 정신과 마음을 되살려보고자 했습니다』 국수는 바둑은 물론 판소리·글씨·그림·의술 등 자기분야에서 1인자의 경지를 구축한 예인(쟁이)들을 총칭하는 말.소설「국수」는 이들 쟁이들의 삶과,문명이 바뀌는 어름인 당시의 풍속을 통해 전통적 가치를 재조명해 보이고 있다.당시의 풍속을 실감있게 그리려 사건위주의 정치사보다는 풍속사·생활사를 중심으로 하고 전통어를 철저히 구사한 점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언어는 사유의 총화이므로 일본화·서양화된 말로는 당대의 진실에 육박하기 힘들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따라서 가능한한 당시 사람들의 사유에 근접하기 위해 전통어를 철저히 가려 썼다고 작가는 밝힌다. 김씨는 이같은 입장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가족」,「부부」,「형제」라는 말들이 일본말이라고 주장했다.그것들의 조선적 표현은 「식구」,「내외」,「동기」 등.서열이나 위계의 나눔에 따라 만들어진 일본말과 달리 우리의 전통말은 주역의 음양이치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는 또 『1세기 전의 이야기를 소설에서 다뤘지만 당시의 상황은 지금의 혼란된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면서 『역사에 대한 예인의 영향력은 예나 지금이나 크지 않지만 이같은 중심밖의 삶을 통해 한 시기의 사회상을 올바로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금까지 쓴 것은 밑그림에 불과하다.2·3부를 거치며 일제시대 선조들의 사유까지도 본격적으로 파헤쳐 보이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솔출판사에서 현재 4권까지 출간된 「국수」는 총 15권으로 완성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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