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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검으로 돌아온 나리양 영결식 이모저모

    ◎유괴없는 하늘나라 예쁜천사 되거라/영정앞엔 좋아하던 곰인형·원피스 가지런히/마지막 피서갔던 대천앞바다서 한줌의 재로 유괴된지 14일 만에 숨진채 발견된 박나리양은 국민들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고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다에 뿌려졌다.13일 상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강남병원에서 거행된 나리양의 영결식에는 가족과 친지,급우들이 참석,하늘나라에서 잘 살아줄 것을 기원했다. ○…이날 서울강남병원 영안실 나리양의 영정 앞에는 평소 좋아했던 붉은색 원피스와 분홍색 곰인형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같은 반 친구 한지영양(8)은 “나리야,하늘나라에서도 곰인형과 즐겁게 놀아야 한다”며 울음을 터뜨려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안타깝게 했다. ○…나리양의 시신이 운구차로 옮겨지자 어머니 한영희씨는 관을 부여잡고 “나리야,어서 일어나”라고 외치며 한때 실신. 나리양의 시신은 가족들의 뜻에 따라 성남에서 화장을 한 뒤 충남 대천 앞 바다에 뿌려졌다.나리양의 아버지 박용택씨(40)는 “나리가 유괴되기 일주일전 함께 피서갔던 곳에재를 뿌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날 상오 원촌초등학교 2학년5반 교실 나리양의 책상에는 흰 국화꽃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급우들은 나리양의 책상 주위에 모여 국화꽃을 매만지며 나지막이 “나리야,나리야…”를 되뇌었다. 현도희양(8)은 “지난번 고무줄놀이를 하다 나리와 다툰 적이 있는데 아직까지 화해를 못했다”며 “나리가 돌아와 준다면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울먹였다.칠판에는 ‘나리야,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아다오.우리 친구들은 모두 너를 잊지않고 영원히 기억할 거야’라는 글씨가 씌여 있었다. ○…급우들은 나리양을 위해 추모의 글을 올렸다.장이슬양(8)은 ‘나리야,하늘나라에서 잘살아.그리고 우리도 도와줘’라고 적었고 홍지연양(8)은 ‘나리야,하늘나라에서도 예쁜 아가씨가 되길 바래’라고 편지를 썼다. ○…안정을 되찾은 범인 전현주씨(29)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13일 새벽 1시까지 조사에 순순히 응한뒤 잠자리에 들었다.그러나 12일 저녁 식사로 나온 된장찌개는 거의 먹지 않았으며 목이 마른듯 음료수를 자주 요구.
  • 중국 최북단 막하현 사람들(흑룡강 7천리:4)

    ◎조선·만주·몽골족 등 어우러져 ‘공생’/여름 짧고 지루한 겨울 길어/하지전후 백야때 되면 광장 모여 노천무도회 즐겨 대흥안령 북쪽 자락의 낮은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흑룡강성 막하현은 중국 최북단의 현이자 중국에서 가장 작은 현이기도 하다.인구 6만2천명에 넓이라야 1만8천233㎡에 지나지 않았다.그리고 해발 1천129m의 고한지대라서 여름은 시원했다.7월 평균기온이 18.4도고 보면 말이 여름이지 가을 날씨였다.겨울은 지독하게 추워 1월 평균기온 영하 30.6도를 기록하고 있다. 막하현은 1917년에 생겼난 현이다.그러다 1947년에는 호마현에 편입되었다가 1981년에 다시 막하현으로 홀로 섰다.그리고 나서 대흥안령에 큰 불이 일어나 일대의 산은 물론 현정부 소재지 막하시까지 쓸어버렸다.오늘의 막하시는 화재뒤 새로 건설한 도시인 것이다.막하시 시가지는 마치 비행장 활주로처럼 곧고 넓은 도로를 갖추었다.양쪽에는 2층 이상의 집들이 즐비했다.사람들이 늘 붐비는 영화관앞 광장은 제법 넓었다. ○1월 평균기온 영하 30도 흥안령 대화재때 민둥산이 되었던 도시 주변 산에도 지금은 잣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막하시는 아담하고 깨끗한 인상을 주었다.그 도시에도 조선족이 운영하는 한국맛식당(한국풍미식당)이 있다.수소문 해서 찾아간 식당에는 예상했던 대로 막하에 사는 조선족들이 자주 모이는 만남의 장소였다.주인은 윤용왕씨(48),자신의 말마따나 젊어서는 꽤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을 법 해보였다.아직도 곱살한 그녀는 조선족 미인이 분명했다. 그립던 친정식구를 오랜만에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갑게 맞아주었다.그녀는 흑룡강성 상지 태생으로 목단강시에서 학교를 나왔다.지난 1971년 의사인 남편 최상진씨(50)를 따라 막하로 이사했는데,남편은 현립병원 의사다.낮시간만 현립병원에 근무하고 퇴근후에는 식당 건너쪽 아파트에 차린 자신의 개인병원에서 일하고 있다.2층 창문에 ‘성병·피부병 진료소’라는 글씨가 보였다.이 한적한 도시에도 성병환자가 많으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동안 저녁때가 되었다.조선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현의 기술감독국 박청천 국장과 앞서 국경지대로 들어갈 때 소개장을 써주었던 국경경비대 김광일 중위도 찾아왔다.일행중에 어떤 이는 식당주인 윤용왕씨에게 고모라고 했고,어떤 나이 어린 처녀는 이모라고도 했다.친척 사이로 착각하기 딱 좋았다.그러나 알고 보면 남남이다.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먼 북쪽 변방에 사는 이들은 남남을 떠나 이웃사촌 이상의 정을 나누고 사는 것이 분명했다. ○조선족식당 사랑방 구실 “조선족이 워낙 적다보니 서로 혈육이나 다름없이 살디요.봄이 오면 모여서 들놀이도 하고 애경사가 있으면 다가 모임네다.막하시내에 있는 세군데 조선족식당은 조선족 집합소고,또 연락처가 되고 기래요.한족들은 저녁이 되면 광장에 가서 사교춤들을 추지만,우리 조선족들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면서 낮 같은 여름밤을 보낸다 이겁네다.” 한족들의 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한족은 어울리기만 하면 춤을 추었다.하지를 앞뒤로 백야가 시작하면,도시인들은 영화관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그들은 긴 겨울을 집안에 틀어박혀 살것을 미리 염두에 두어 여름을 한껏 즐기려는듯 춤을 즐겼다.작가 방장국 선생은 막하의 여름밤을 이렇게 묘사했다. ‘노천무도회는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녘이면 으레 광장에서 열렸다.지팽이를 잡은 노인에서 현 당위원회서기,현장은 물론 노동자도 나오고 부녀자들도 춤판에 끼어들었다.영화관 지붕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대로 탱고를 추고 디스코도 추었다. 이 시각이면 도시 언저리의 붓나무며 낙엽송이 푸른 치마를 흔들며 광장으로 뛰어오는듯 싶다.수림속의 빨간 여우며 꼬리 긴 다람쥐,오소리도 광장으로 달려드는 환각에 사로잡혔다.사람들 얼굴에는 미소가 담기고 눈에는 아름다운 마음이 어렸다.’ ○“이지역 첫사람은 동명” 이 북변의 막하현 사람들 가운데 조선족만이 소수민족은 아니다.오늘날 한족속에 섞여 살기는 몽골족,만주족,후이족이라는 회족,다우르족(Daur·달간이족),오로촌족,에빈키족,허저족,러시아인들도 마찬가지다.흑룡강유역 원주민은 허저족과 에빈키족,오로촌족,다우르족이고 나머지는 이주민들이다.몽골족은 징기스칸 시대에 들어왔다.징기스칸이 일어난 땅은 막하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흑룡강 발원지인 내몽골 어얼구나하가 바로 징기스칸의 발흥지다.그리고 러시아인은 제정러시아 황제 차르1세때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들 소수민족은 러시아인을 빼고 모두가 우랄알타이 어계민족이다.토템 역시 공통점을 지닌 부분이 많다.더구나 흑룡강유역은 ‘한단고기’에 나오는 최초의 고조선 강역이 아니던가.우리민족 고대사 내용을 담은 ‘한단고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동남동녀 팔백이 흑수·백산땅에 내려왔다.뒤에 환웅씨가 일어나서 천신의 뜻을 받들어 흑수·백산 사이에 자리잡았다.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배달이라 했다.’ ‘한단고기’는 물론 신화요소가 강한 기록임에는 틀림이 없다.그래서 ‘한단고기’는 덮어 두더라도 흑룡강유역과 그 이남이 북부여판도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오늘날 흑룡강성이 내놓은 ‘흑룡강성정’에도 그렇게 기록했다. ‘이 지역의 첫 사람은 동명이다.전국 혹은 서한초의 사람으로 부여 건국자며 부여의 첫 국왕이다.활쏘기에 능한 그는 부족 수령들의 질투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그는 화를 피해 눈강을 건너 맥지로 갔다.거기서 예맥 사람들을 모아 부여국을 세웠다.’
  • ‘한산도가’ 원본추정 문건 공개

    ◎이종학씨 69년 입수… 작시 400돌 맞아/한문시 형태… ‘정유중추 이순신’ 적혀 ‘한산섬 달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이순신 장군의 우국시 ‘한산도가’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문건이 공개됐다. 서지학자 이종학씨(70·독도박물관장)가 지난 1969년 입수해 오는 추석 이장군이 이 시를 지은지 400년이 되는 날을 앞두고 10일 공개한 이 문건은 가로 20.5㎝,세로 26.5㎝ 크기의 삼(마)으로 만든 마지위에 한문 초서체로 쓴 ‘한산도가’라는 제목의 시로 시 끝에 ‘정유중추 이순신’이란 글씨와 함께 낙관이 찍혀있다. 이 문건이 원본인 것으로 확인되면 기록으로만 전하던 이 시의 실재함과 지어진 연대(1597년)와 날짜(추석),한문시로 지어졌다는 사실 등이 새롭게 밝혀지게 됐다.지금까지 학계에선 이 시가 원래 한산도에서 언문으로 지어진 것을 뒤에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추정해 왔으나 정유년은 1597년으로 이미 한산도가 왜군에 빼앗긴 뒤이며 당시 이장군은 한산도에서 동쪽으로 80㎞ 떨어진 전남 보성의 한 정자에서 한산도를 바라보면서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 서양화가 김형근(이세기의 인물탐구:144)

    ◎한시대의 미감 바꾼 ‘은백의 화가’/사물을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내면 터치’/한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도 지낸 ‘화단의 리더’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퇴색한 과녁에 박힌 세개의 화살,나뭇결이 선명히 드러난 과녁에 두개의 화살은 힘차게 박혀있으나 하나는 과녁을 맞추고도 힘에 부친듯 사선으로 그 끝을 떨어뜨리고 있다. 지난 70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한 김형근의 ‘과녁’은 싱싱한 박진감과 치열한 묘사력으로 인해 당시 이 작품을 뽑은 원로화가들은 “이는 일찍이 우리 화단사상 보지 못했던 현장감”이며 “한 시대의 미감을 바꾸어 놓았다”고 찬사해 마지 않았다.한장의 그림에 담긴 만감이 엇갈리는 진한 메시지는 작품의 의취를 일순간에 짐작할수 있게 하는 명작이기 때문이다.과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는가.그러나 실패와 좌절의 되풀이속에서도 낙선의 고배를 패배로 치부하지 않았고 시련은 아프지만 오히려 치솟는 힘이 되었다. ○70년 국전서 대통령상 수상 만일 김형근의 ‘여인상’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단적인 미추구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영롱한 보석타래와도 같은 그의 여인상은 눈부신 치장과 황홀감으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하는 혼도직전의 전율을 던져준다.미적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색채와 조형적인 균제·비례와 조화와 함께 장미향기와 라일락바람이 넘나들고 어느 때는 오베른 언덕같은 천상의 노래가 가슴을 후비기도 한다.여인과 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재현하기 위해 극사실적인 표현기법으로 독특한 미감을 절묘하게 살리면서도 작가의 천부적 감수성은 실제에서 지각할 수 없는 내면의 지성미까지도 붓끝으로 일궈놓고야 만다.그래서 여인의 볼에서는 발그레한 생명감이 피어나고 실크처럼 고운 살갗은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가 날듯 섬세하고 연연하다.여기에 그치지 않고 극미와 화미에 다다르기 위해 보일듯 말듯한 미소에 귀족적 기품과 첨단적인 세련미를 담아내어 평자들은 “테크닉을 극복한 지점에 작가 자신을 세우고 있다”고 표현한다.‘사물을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읽는 관조미의 극치’가 그것이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은 ‘김형근의 은백색 공간’이란 한 미술평론에서 “엄격한 의미에서 한국 사실주의 회화는 김형근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단정한 바 있다.“지금까지의 사실적인 표현양식이 순수미와 자연주의를 재현하는데 그쳤다면 김형근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극사실적인 작품을 통해 작가적 입지를 구축했다”고 했다. 이러한 평가를 받는데는 남보다 특이한 환경에서 자라나 전혀 뒤늦게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의 고향은 산자수명한 경남 통영.한의사이던 하범 김전수씨의 무녀독남으로 다섯살때부터 글씨를 쓰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그러나 통영수산고에 다닐때까지 학교에 바래다주고 데리러 오던 부친은 외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부친의 뜻과는 달리 그림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상 그는 지금까지 예상치 못했던 혹독한 고독과 고생스러운 수련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70년대 미 화단과 인연 그는 군인대학인 정치대 법정과를 나왔고 10년간 장교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화가를 지망했으며 화단에 인맥이나 학맥이 닿을 리 없었다.오죽하면 대통령상 수상이후 그는 “심사위원들의 아집과 편견과 독선으로 인해 15년간의 국전도전시대는 까마득한 험난준급”이었으나 혼자서 어둠속을 걸어가는 듯한 극한 상황에서도 “그림을 그릴때만은 언제나 행복에 넘쳐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그가 ‘은백의 화가’로 불리는 이유는 ‘동양의식의 세계화’를 목표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불생불사’의 세계를 형상화한데 있다고 할 수 있다.은백색과 흔적의 무한성,화면을 장식하는 꽃과 여인에서 그는 직선의 유리화병에 꽂힌 백합다발과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동자,다른 한쪽엔 남색 유리컵과 옛날의 종을 등장시키기도 한다.여기에 아득한 시간속에 가리워진 옛날을 현대에 용해시켜 유구하게 이어져온 역사와 생의 긍정과 환희를 절묘하고도 신비롭게 연출해낸다. 대통령상 수상이후 그는 미국 아메리칸 아트스쿨에 다니면서 70년대 이후 미국화단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오랜 작업실이던은평구 녹번동을 떠나 석촌 올림픽선수촌아파트로 옮기는가 하면 경기도 양평과 일본의 지바(천엽),뉴욕에 각각 대작을 위한 아틀리에를 둔 국제적 화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이김복여사와의 사이에 딸만 넷,모두 출가했고 그의 그림의 모델이던 차녀(성희씨)가 중년에 접어들자 최근에는 손자들을 데려다 모델로 삼고 있다. ○그의 그림선 숨결과 향기가… 시각적인 포만감뒤에 은은히 감도는 절제미는 특유의 긴장감을 극으로 끌어올리면서 그의 여인은 순정적인 정령의 서조를 당당하게 지켜나간다.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반드시 이겨내고 슬픔이나 분노보다 작가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부여한 빛나는 화면을 성취한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다이아몬드같은 흰빛을 뿌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상화된 현실을 만끽하기에 이른다.그를 아끼고 깊이 연구하는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심신을 정화시키는 미의 공간에 우리가 들어서고 있다”고 표현한다.미의 사절인 김형근의 세계는 그림에서의 숨결과 향기와 음악과 함께 황폐한 현대인들로 하여금미의 극치앞에 감탄을 금치못하게 하고 결국 행복과 사랑을 깨닫게 하는 구원의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 □연보 ▲1930년 경남 통영 출생 ▲1955년 국전 입선 ▲1968년 국전 특선 ▲1969년 국전 문공부장관상 ▲1970년 국전 대통령상 ▲1971년 도미기념전(신세계미술관) ▲1972년 아메리칸 아트스쿨수학 ▲1975년 역대국전 대통령수상작가 초대전, 김형근초대전(부산호텔화랑) ▲1977년 현대화랑초대 개인전 ▲1978∼81년 수도여사대교수 ▲1979년 김형근도화전(선화랑) ▲1981년 서독미술전초대전 ▲1983년 국전 심사위원 ▲1988년 뉴욕 웰리F 화랑 전속,알파인화랑초대전 ▲1991년 시가 있는 그림전(서림화랑) ▲1993년 현대미술 100년의 열정전 초대(현대화랑) ▲1995년 대한민국미술대전심사위원장 ▲1996년 현대리얼리즘회화 초대전(한국 포스코갤러리) ▲1997년 현대작가 1호전(선화랑) ▷수상◁ 경상남도문화상(68년) 서울시문화상(81년) 통영시문화상(95년) ▷작품소장◁ ‘과녁(관혁)’ ‘우리의 슬기’ ‘영원의 장’(청와대) 벽화 ‘여명의 비상’(한국외환은행) ‘한려수도’(경남도청)외 다수
  • 방문 여로(경수로 착공 방북취재기:상)

    ◎북 도선사 “자주 봐야 정들죠”/항구 썰렁… 인적 드물고 낡은 선박 10여척 정박 북한 땅 신포는 그곳에 있었다.우리가 다가갔다.92년 9월 평양 남북 고위급회담 이후 정부대표단과 한국기자단의 첫 북한방문이었다.남북교류의 새 장을 여는 경수로 착공식 취재는 단 하루,함남 신포의 양화라는 외곽항구와 금호지구 경수로 건설부지 등 제한적인 지역에서 제한된 북한주민들을 만나는 것이었다.방북단의 취재내용을 ‘북한 방문 여로’ ‘1997년 북한 사람의 생활’ 등으로 나눠 두차례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 주〉 닫혀 있는 땅 북한 함경남도 신포로 향하는 뱃길은 잔잔했다. 18일 저녁 7시.강원도 동해항에서 경수로 관련 한·미·일 정부대표단,원전건설 합동시공단 대표단,한·미·일 3국 공동취재단을 태운 한나라호는 조용한 밤바다를 헤쳐 나갔다. 19일 새벽 1시 30분.조타실 항로계기판의 점멸 등이 깜박였다.이른바 알파지점.북한이 군사경계지역으로 부르는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이제부터 북한 영역이었다.깜깜한 밤바다에 북한측 경비정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7시 간간이 내리는 비와 바다안개속에 드디어 북한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함남 신포 금호지구 경수로 부지와 12㎞정도 떨어진 양화항.북한측 도선사의 안내로 한나라호는 한때 북한 동해안의 가장 큰 어항이었다는 양화항에 접안했다.한참 붐빌 아침시간의 부두였지만 북측 사람들은 안전요원,세관원 등 불과 십수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두에는 길이 1백여m되는 시멘트 건물 어판장이 있었지만 ‘경애하는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를 사수하자’라는 오래된 페인트 글씨만 쓰여있을뿐 인적은 없었다.항구에도 녹슨 철선만 10여척 정박해 있을 뿐이었다. 배에서 내려 단층 블럭 건물인 양화항 입국세관에 들어섰다.경수로 건설공사 때문에 임시로 설치된 세관은 다섯 명의 북측 세관원외에는 아무도 없었다.일부 취재진의 망원카메라 등 취재 장비의 통관에 대한 실랑이가 있었지만 비교적 입국 수속은 쉽게 끝났다.세관을 통과한 뒤 만난 첫 북한 주민은 음료와 담배 등을 파는,세관에 설치된 외화벌이 상점 ‘양화카운트’ 점원이었다.평양에서 왔다는 북한 여점원은 ‘안녕하십니까,반갑습니다’라는 인사로 대표단을 맞았다. 이어 대표단은 최근 경수로 부지공사를 위해 급히 만든 진흙탕길 비포장 도로를 30분정도 달려 경수로 부지인 신포 금호지구에 도착했다.부지는 정리가 안된 넓은 들판과 어인봉이라는 야산만 가로놓여 있는 허허벌판이었다.내리는 빗속에 경수로 예정부지는 온통 진흙밭이었다.그러나 막상 부지 착공식이 시작되자 한미일 정부대표들과 북한측 대표들의 표정은 역사적인 대사업의 의미를 되새기듯 밝으면서도 장엄했다. 하오2시30분.드디어 금호지구에 폭발음이 들렸다.경수로 부지 왼편에 가로놓인 어인봉 마지막 능선 6부지점 정도에 설치된 발파현장에서 폭발음과 함께 오색연기가 피어 올랐다.부지 한쪽에서는 국산 굴착기가 북한 땅에 최초로 삽을 꽂았다.남북간 대규모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착공식 후 우리 근로자들의 임시숙소인 강상리 게스트 하우스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남북대표와 미·일 대표들은 서로 ‘축하한다’며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부지착공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양화항으로 돌아오는 밤길에도 비가 내렸다.취재단을 태운 미니버스는 양화항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마주오는 트럭을 피하려다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옆 옥수수밭 도랑에 빠져 전복위기를 맞기도 했다.일행들은 비에 젖고 진흙투성이가 됐지만 경수로 착공의 의미를 되새기며 웃는 모습이었다. 다른 일행을 태웠던 버스로 갈아타고 양화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마친 시간은 밤11시.일행은 “야간은 출항이 안되니 아침에 떠나라”는 북한측의 지시에 따라 양화항에 접안한 배에서 1박했다. 20일 아침 10시.북측 도선사의 안내로 양화항을 떠났다.8㎞ 떨어진 파일러트 스테이션(도선지점)에서 북한측 도선사는 배에서 내려 돌아갔다.북측 도선사는 “자주 봐야 정들지요,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했고 우리측 대표단은 “이제 자주 오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 노신의 소흥(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8)

    ◎중국명주 소흥주의산지… 월의 수도/생가·서당·기념관·소설속의 주점 원형 그대로/명대시인 왕수인·수필가 장대 등 10여명 배출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춘추때 월나라의 서울 회계가 오늘의 소흥인줄 아는 사람은 많지않지만 월왕 구천(?∼465 BC)을 모르는 이도 많지않을 것이다.소흥은 바로 구천이 와신상담하던 곳.그런가 하면 천하의 명주로 알려진 소흥주의 산지로 알려졌다. 명주가 있는 곳에 명인들이 배출되었다.위진때 죽림칠현의 하나였던 혜강을 비롯,동진때 최고의 산수시인 사령운,남송때 최고의 애국시인 육유,원나라 시단의 수령 양유정,명나라때 양명철학의 완성자요 시인인 왕수인,명말의 수필가 장대,청말의 교육자요 비평가인 채원배,청말의 혁명가요 여류시인인 추근 등이 모두 여기 사람이다. ○명주있는 곳에 명인 배출 중국 현대문학의 개조일 뿐 아니라 아직도 최고의 작가로 꼽히고 있는 노신을 비롯,그의 아우요 수필가였던 주작인,최고의 수필가로 칭송받는 주자청,소설가 위금지,시인 손대우·수필가 가령 등이 모두 여기 사람이다.뿐만 아니다.동진때 서성으로 불린 왕희지같은 사람은 산동사람임에도 그가 잠시 회계내사를 지낼때 썼던 ‘난정집서’라는 글과 글씨때문에 그의 이름은 오히려 소흥에서 영원했다. 문학 유적으로 왕희지의 ‘난정’과 육유의 ‘심원’이 재현된 외로 채원배·추근·노신 등의 생가와 왕수인의 무덤이 고작이지만 이만 하면 풍작이다. 소흥시 남단에 자리한 탑산은 아담한 동산,하지만 응천탑의 꼿꼿한 용태가 구천의 기품을 풍기고 있다. 그 남쪽 기슭엔 추근의 옛집.‘감호여협’으로 불린 항청의 혁명가요,여권운동의 선구였던 추근은 지금 정부의 성역화로 다섯채나 되는 생가 외에도 기념관까지 세워졌지만 그녀가 청군에 잡혀 투옥될때,관군의 고문에도 끝내 입을 다문채 그 여린 손끝으로 쓴 시 ‘추우추풍수쇄인’(가을비 가을바람이 사람을 못견디게 한다)한 귀절 만큼 감동이 깊진 못했다. 탑산의 동쪽,도창방이란 마을엔 중국 현대문학의 개조 노신의 생가.노신이 어려서 술래잡기하던 채전­백초원,노신이 어려서 공부했던 서당­삼미서옥,그리고노신 일대의 자료와 저서를 전시한 노신기념관,거기다가 노신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술집­함형주점,노신의 대표작 ‘아큐정전’의 주인공 아큐의 생활 근거지였던 토곡사 등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노신 생가에서 동쪽으로 잠깐 걷다보면 학교 운동장 크기의 원림을 만난다.그것은 벌써 송나라때 일구어진 ‘심원’심씨의 원림이란 뜻이다.그러나 심원이 이름을 떨친 것은 소동파와 함께 송나라 양대시인으로 불리는 육방옹의 사 ‘차두봉’과 시 ‘심원’에서 연유했다. ○왕희지의 ‘난정’이곳에 육방옹(육유의 호)은 평생 여진족에 항거,북정을 주장,그 넓은 실지를 회복키로 싸웠지만,‘소태백’으로 불릴 만큼 낭만도 있었다.그는 20세때 그의 외종 누이 당완을 끔찍히 사랑해서 가마를 탔지만 당완이 시어머니의 환심을 얻지 못해 끝내 생이별했다.그들은 서로 재혼했지만 서로 연연불망.10년뒤 어느날 그들은 여기 심원에서 해후,서로 품었던 옛정을 ‘차두봉’으로 써서 원림의 담벽에 새겼는데 봄날의 무상과 세정의 야박함을 한한 이 글이 비련의 명작으로 남을 줄이야.뒷날 당완은 방옹을 그리다 병사했고,방옹은 늙도록 당완을 절절히 그리다가 시 ‘심원’을 남겼다. 소흥에서 서남쪽 12㎞의 난저산아래,1천600여년전 왕희지를 비롯한 시단의 모임이 있었던 ‘난정’은 그 유서에 비해 그 자리가 원지가 아닌데다 우리의 흥미거리인 유상곡수마저 인공적이어서 입맛을 쓰게 했지만 난정에서 다시 3㎞ 남하하여 난정중학 뒷산,아흔여덟 계단을 높이 올라 소나무그늘에서 만난 왕양명의 묘는 필자를 뭉클하게 했다.
  • 허종 북 대사 “핵동결 철저 이행”다짐/북 경수로 착공­이모저모

    ◎30여발 축포속 발파… 참석자들 기립 환호/북 안내원 농작물 작황 등 취재에 과민반응/세관원 남측의 옥수수 전달소식 듣고 당황 한반도 평화정착의 염원아래 추진된 경수로 착공식이 19일 하오 2시 함경남도 신포 금호지구 경수로 부지에서 열려 역사적인 첫 삽질이 시작됐다. ○촉촉한 단비속에 시작 ▷착공식◁ ○…‘KEDO원전부지공사 착공식’은 촉촉한 단비가 내리는 가운데 2시 정각에 개최됐다.남북한대표단 뿐만 아니라 미국,일본 등 KEDO회원국 대표들도 우여곡절 끝에 맺은 결실인지라 감회에 젖은 듯 엄숙하고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보스워스 KEDO사무총장은 인사말을 통해 “착공식은 이제 시작임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경수로가 완공될 때까지 숱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상호애정과 협력으로 극복하자”고 강조하자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북관계 계속 강조 ○…북한측에서는 허종 순회대사,이제선 원자력총국장,김병기 경수로사업대상국장 등이 착공식에 참석했으며 허대사는 인사말을 통해 “미북 제네바 기본합의서와 경수로 제공협정이 이제 실질적인 이행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북한도 고도의 인내력을 발휘해 핵동결을 완전무결하게 이행할 것”이라고 다짐.그러나 허대사는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미북관계 틀속에서만 경수로 부지공사 착공의 의미를 찾는 듯한 말을 거듭 밝혀 눈길. 반면 한국의 장선섭 경수로기획단장은 “남과 북의 건설인력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오랫동안 같이 일한 전례는 분단이래 처음있는 일”이라며 경수로 사업이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파식◁ ○…착공식은 장단장 등 각국 대표들의 연설에 이어 진행된 기념발파식에 이르러 분위기가 절정. 보스워스 총장을 비롯한 KEDO총장단 3명과 집행이사 3명,이종훈한전사장과 북한측 대표 3명 등 총10명이 연단옆에 준비된 발파대에서 동시에 발파스위치를 누르자 원자로가 들어서는 어인봉 정상에서는 폭발음과 함께 오색의 화약 연기가 솟아올랐다.뒤이어 30여발의 축포가 신포 하늘로 울려퍼지자 착공식에 참석했던 3백여명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치며 박수. ○…공식행사를 마친 후 북한 허종대표는 “경수로 협정이 드디어 실제 이행단계에 들어서게 돼 매우 만족한다”면서 “앞으로 경수로사업이 잘 진행되기를 기대한다”고 소감을 피력.허대사는 그러나 공사장 현장순시에는 참석하지 않은채 자신의 벤츠 승용차편으로 착공식 현장을 떠났다. KEDO총장단 등 착공식에 참석했던 50여명은 공식행사후 경수로가 들어설 신포 금호지구 어인봉 일대를 둘러보는 등 공사현장을 순시.박영철 한전 금호원전건설본부장은 진흙땅을 헤치고 전망대에 오른 행사관계자들에게 공사개요와 경수로 1·2호기가 들어설 위치 등에 대해 설명. ○…착공식이 열리기전 가진 대표단 오찬에서는 KEDO대표단이 오찬장에 도착하자 허종 북한외교부 순회대사,이제선 원자력총국 총국장,김병기 경수로대상사업국장 등이 반갑게 이들을 맞으며 오찬장으로 안내.첫 대면한 장단장과 허대사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교환했고 장단장은 “앞으로 공사가 본격화되면 자주 신포를 방문,우리 기술자들이 작업하는것을 보고 허대사와 이총국장도 자주 뵙길 바란다”고 인사. ○…북한측의 중앙방송,중앙통신,노동신문 등 언론매체는 입북한 한국 및 외국기자단과 함께 취재경쟁에 나서 경수로사업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북한측은 경수로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경수로사업대상국의 요원들을 대거 착공식행사에 투입해 남쪽 대표단을 비롯한 행사 참석자 대부분의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는 모습이 역력. ▷기념리셉션◁ ○‥KEDO대표단은 착공식을 마친후 하오6시부터 2시간여동안 경수로 기술자 숙소인 ‘게스트 하우스’ 근처 평양 옥류관 신포 금호지구 분점에서 허종 대사 등 북측대표단을 초청한 가운데 착공기념 리셉션을 개최. 리셉션에는 남북한 대표단과 경수로 관계자들은 물론 남북한 기자단 등도 함께 어울려 음식을 나누며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는게 참석자들의 한결같은 얘기. 경수로 기획단의 한 관계자는 “김일성 배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남북한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다”면서 “앞으로 경수로사업이 본격화되면 이와같은 화합과 교류의 분위기는 더욱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라고 언급. ○KEDO대표 건강검진 ▷양화항 도착◁ ○…이에 앞서 인공기를 게양한 북측 선박 ‘0­수­3963’호의 선장과 검역의사 2명,세관원 3명은 이날 상오7시50분쯤 한나라호에 승선한 후 승무원들과 접안절차 및 세관통관문제를 논의하고 KEDO대표단 전원에 대한 건강검진을 실시. 빨간 바탕에 노랑색 글씨로 ‘검역의사’라고 쓰인 완장을 찬 의사2명은 대표단이 모여있는 세미나실에 들어오면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넨후 대표단들의 맥박과 체온을 체크했다. 양화항 위생검역소에서 나왔다는 북측 의사 2명은 짙은 회색의 약간 두툼한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아무런 의료기계나 기구없이 자신의 오른쪽 손으로 대표단의 손목부분을 짚은뒤 자신의 왼손에 찬 손목시계 초침을 보며 맥박회수를 확인.이 의사는 일부 대표단원에게 “고혈압이군요.기름진 음식은 피하는게 좋아요” “혈압이 약하군요”라고 조언하는가 하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 사람에게는 환한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하기도. ○…도선안내지점에서 접안절차를 모두 마친 한나라호는 상오9시30분쯤 양화항으로 이동하기 시작해 10시20분쯤 양화항에 접안. 양화항 부두에는 근무를 서고있는 군인 1명과 KEDO대표단을 마중나온 KEDO,한전 및 시공회사 관계자 10여명과 북한 세관원 10여명이외에는 거의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적한 모습.부두에서 좀 먼 곳에는 북한 노동자들이 선박을 수리하거나 한나라호를 구경하는 모습이 간혹 보였고 짐을 실어나르는 우마차가 눈에 띄기도.지난 4월 방북했던 KEDO관계자는 “지난번에는 이처럼 인적이 드물지는 않았다”면서 “KEDO대표단이 북한 일반주민들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 북한당국이 상당히 신경을 쓴 것 같다”고 언급. ○나무없는 민동산 많아 ○…양화항에서 부지부근의 오찬장까지 가는 도로는 최근 KEDO용역에 따라 보수했음에도 불구,전날과 이날 상오 내린 비로 완전 진흙탕 길이었고 이곳저곳 깊이 패여 있었다.또 긴급히 도로복구작업을 벌이는 북한 노동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으나 노동자들은 한결 같이 무덤덤한 표정들.북측 안내원들은 한국 취재진들이 양화항 주변과 도로변의 옥수수,민가 등을 촬영하려 하자 “경수로에 관련된 것만 취재하라”고 고압적인 태도로 제재. 도로주변 산은 나무들이 거의없는 민둥산이었으며 산꼭대기 부근까지 심은 옥수수는 심한 가뭄으로 인해 자라지 못해 제대로 영글은 옥수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에 반해 민가옆 텃밭은 콩,옥수수로 무성했으며 여기저기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와 양,염소 등이 쉽게 발견되기도. 양화항에서 만난 북한 세관원은 “경수로사업에 남한이 많은 돈을 내고 있다는 것을 일반주민들도 다 알고 있다”면서 “동포끼리 만나는 자체만으로도 좋게 생각한다”고 언급.또 젊은 세관원은 “남북적십자대표 합의에 따라 한적이 옥수수 5만t을 지원한데 이어 추가로 5만t을 지원하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처음 듣는 얘기인듯 당황해했다.
  • 이집트 룩소르(세계 문화유산 순례:40)

    ◎고대 애 최대신전 ‘아몬라’ 우뚝/길이 260m 탑문너비 65m ‘거대한 궁전’/1천개의 스핑크스 좌우로 3㎞ 행렬 ‘장관’ 고대 이집트의 부와 영화는 기원전 1600년부터 기원전 1100년 사이의 신왕조때 절정에 이르렀다.이 번영기때 이집트의 영토는 북으로 유프라테스강에서 남으로는 지금의 북수단에 이르렀다.그리고 람세스왕조 때처럼 걸물의 파라오들이 등장해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불세출의 파라오 람세스 2세도 이 기간중인 기원전 1279년부터 기원전 1212년까지 67년을 재위했다.그래서 아부 심벨 신전을 비롯한 숱한 신전과 기념물들을 남길수 있었다. 이 1천여년동안 왕조의 수도는 바로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테베이다.그리스의 작가 호머도 람세스 2세의 배려로 이집트에 머물렀다.호머는 대서사시 ‘일리야드’에서 테베를 ‘1천개의 출입문을 가진 도시’라고 묘사했다.파라오들은 공들여 신전을 지었다.외부의 적으로부터 왕국을 지키고 왕권을 넘보며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는 내부의 적들로부터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그래서 파라오들은 신전건축을 가장 중요한 국사중 하나로 삼았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해가 솟는 동쪽은 생명과 번영의 땅이었다.대신 해가 지는 서쪽은 죽음의 땅으로 여겼다.풍요와 재생의 상징인 신들의 거처를 나일강 동쪽에 세웠던 까닭도 여기 있다.파라오들의 최후의 안식처인 ‘왕들의 계곡’,‘왕비들의 계곡’,피라미드는 나일강 서안에 세웠다.수도 카이로에서 나일강 동안을 따라 남쪽으로 700㎞에 위치한 테베는 운하로 양분돼 있다.그 운하 북쪽에 신전들의 도시 룩소르가,남쪽에는 역시 신전들로 들어찬 카르낙이 자리했다. 오늘의 현대 도시 룩소르에서도 지난날 영광의 흔적을 볼 수 있다.가장 대표적인 곳은 ‘신들의 왕’인 태양신 아몬 라의 신전이다.고대 이집트인들이 ‘아몬신의 남쪽 궁전’이라고 불렀던 곳이다.출입문에서 뒷편 끝까지의 길이가 260m에 달하는 고대 이집트의 최대 신전인 것이다. 신전 출입문은 필론이라는 탑문으로 장식됐다.탑문 좌우의 너비는 65m에 달한다.탑문에는 람세스 2세를 기리는 그림과 글씨가 들어 있다.히타이트인들을물리친 유명한 카데슈 전투장면을 릴리프로 처리하면서 그의 전공을 상형문자로 새겼다.출입구 좌우에는 높이 25m의 쌍동이 오벨리스크를 나란히 세웠는데 지금은 왼편 것 하나만 남았다.1833년 나폴레옹군대가 뺏아간 오른쪽 오벨리스크는 지금 파리의 콩코드광장 중앙에 서있다.탑문 앞쪽에는 역시 람세스 2세의 거대한 대리석 석상을 세웠다.왕비 네페르타리와 공주 메리타몬의 석상도 세웠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오벨리스크가 서있는 신전 입구에서 북쪽 카르낙의 신전에 이르는 3㎞는 ‘스핑크스의 길’이다.사자의 몸에 양의 머리를 한 1천개의 스핑크스들이 좌우로 늘어섰다.양은 신들의 왕인 아몬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다.지금 이 스핑크스 거리에 나온 유물은 먼저 출토한 일부 출토품에 지나지 않는다. 카르낙의 신전도 태양신 아몬 라에 바쳐진 것이다.테베에 있는 신전들 중 가장 오래된 신전이다.거대한 돌기둥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카르낙 신전은 모두 3부분으로 구분됐다.주신전은 신들의 왕인 아몬 라의 신전,왼편으로 그의 아들 혼슈,맞은편 것은 아몬의 부인 무트신의 신전이다.고대 이집트의 주신들은 이후 탄생한 기독교 교리의 성부·성자·성신처럼 성가족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카르낙 대신전은 기둥의 숲이다.세계 최대의 기둥 신전이기도 한 카르낙 대신전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보다도 더 큰 규모다.그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길이 102m,너비 53m에 달하는 홀에는 높이 23m에 이르는 사암 돌기둥 134개가 서있다.활짝 핀 파피루스 꽃모양의 기둥머리 장식을 한 돌기둥들인데 기둥머리 위쪽에는 대형 돌 원판을 얹어놓았다.기둥의 웅장함과 기둥 사이를 통해 간간히 들어오는 햇빛,그리고 그 햇빛이 만들어내는 돌기둥의 그늘이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해낸다.파라오 세티 1세때 증축을 시작해 그의 아들 람세스 2세때 완성한 신전으로 8만여명이 넘는 석공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신전의 돌기둥과 벽면을 장식한 그림들은 매우 독특한 기법으로 처리됐다.신체를 그릴때 이집트 화가들은 상형문자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신체 각부분을 하나의 독립된 상형문자처럼 그렸다.그리고신체 각부분은 화가 자신들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쪽에서 그렸다.머리는 측면,어깨와 상반신은 전면,신체는 허리에서 약간 틀어져 배꼽이 보이도록 했다.다리와 발은 측면에서 바라본 행태로 그렸다.신체 각부분을 여러 면에서 보이는대로 그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매우 신비스런 인상을 안겨주었다. 돌기둥의 숲 옆에는 신들의 호수를 만들었다.한변의 길이가 120m에 달하는 인공호수는 창조주 아몬신이 소유한 ‘영원의 대양’을 상징한 것이다.매일 아침 신관들은 이 신들의 호수에 몸을 담그고 제의를 올렸다.신전을 축성하는데도 이 호수물을 썼다.이집트는 신들이 다스리는 왕국이었고 파라오는 신의 대리인이자 살아있는 신이었다. ◎여행 가이드/나일강변 유적 즐비… ‘왕들·왕비들의 계곡’ 볼만 나일강 상류 일대에는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유적들이 산재돼 있다.수도 카이로에서 아부 심벨사원이나 카르낙·룩소르로의 여행은 항공편을 이용하는 게 좋다.카이로 공항에서 카르낙을 왕복하는 항공편이 수시로 있다. 소요시간은카이로 공항에서 아스완까지 약 1시간 30분.다시 남으로 30분쯤 내려가면 아부 심벨이다.아부 심벨 공항에서는 약 1시간 정도 기착하는데 이 시간을 이용해 아부 심벨 신전을 구경한다.기다리는 비행기를 타고 다시 40분 정도 올라가면 룩소르 공항에 도착한다.룩소르에서는 각자의 여행 사정에 따라 주변에 산재한 유적들을 돌아보면 된다.카르낙에서 나일강 건너편 사막지대로 들어가면 ‘왕들의 계곡’ ‘왕비들의 계곡’등 수많은 무덤들이 있다.투탄카멘왕의 무덤,네페르타리 왕비의 무덤 등이 도처에 분포됐다. 여유가 있으면 아스완 하이댐과,이 댐으로 생겨난 인공호수 낫세르호의 위용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 Math Baseball(활용인터넷 아동교육 사이트:20)

    ◎“수학에 흥미없는 어린이 오세요”/덧셈·곱셈문제 야구게임식 해결 공부하는 것이 노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다면 공부를 싫어할 어린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Math Baseball(www.gold­pages.com/math/index.html)은 수학을 야구게임식으로 흥미있게 배울수 있도록 고안된 사이트다. 어린이는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기 위해 책상앞에 앉아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방망이를 들고 멋진 홈런을 날리기 위해 그라운드에 선 타자다.컴퓨터가 내미는 수학문제는 상대팀의 투수가 던지는 공인 셈이다. 맞서 싸울 상대팀은 덧셈팀과 곱셈팀이 있다.덧셈팀과 싸우려면 Addition을 곱셈팀과 싸우려면 Multiplication을 체크한다. 그리고 같은 덧셈팀이나 곱셈팀 가운데서도 쉬운 팀과 어려운 팀을 골라 싸울수 있다.화면 아래 레벨을 선택하는 상자의 화살표를 클릭하면 6과 10과 25의 세종류의 숫자가 나온다.6을 선택하면 초급,10은 중급,25는 고급팀이 된다.처음 접속하면 기본적으로 초급인 6이 선택되어 있다. 팀을 선택했으면 이제 방망이를 들고 그라운드로 나가보자.등급 선택박스 옆의 플레이볼 단추를 클릭하면 운동장의 모습과 함께 문제가 제시된다.알맞은 답을 생각해냈으면 마우스로 대화상자안을 클릭하여 입력하고 스윙버튼을 누른다. 정답을 맞추면 컴퓨터가 각 문제의 난이도에 따라 1루타(Single),2루타(Double),3루타(Triple),홈런인지 결정해 맨위 전광판에 빨간 글씨로 표시해준다. 틀린 답을 쓰면 아웃으로 퇴장을 당한다.정답을 화면 맨위로 띄워 알려주기 때문에 자신이 쓴 답과 비교해볼수 있다. 팀의 득점과 아웃당한 선수의 수도 전광판에 표시되기 때문에 자신의 성적을 수시로 점검하며 학습의 성취도를 만끽할 수 있다. 3개의 문제를 틀리면 스리아웃에 해당하기 때문에 게임이 끝난다.물론 팀을 다시 선택해 재도전할 수 있다.
  • 위로하라 위로하라 위로하라(송정숙 칼럼)

    머리를 남정네처럼 깎고 남방 계열사람들이 그렇듯 피부빛깔이 갈색이 된 ‘훈’할머니는 먼곳에 넋을 두고온 사람처럼 김포공항 청사 한 복판에 망연히 서서 ‘아리랑’을 불렀다.그것만이 생소한 고국의 관문을 통과하는 의례이기라도 하듯 ‘아리랑’을 불렀다.본래 이름도,고국말도 못하는 그가 한국인임을 입증받을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것 뿐이라는듯 부르고 있는 그의 아리랑은 처연했다. 언론들은 그렇게 부른 그의 아리랑이 “또렷한 발음”이었다고 묘사했지만 그의 ‘아리랑’은 “발음”보다는 가락이 분명했다.구성지고 청승스런 가락.‘아리랑’을 그렇게 흘려내듯 한숨섞어 부르는 것이 ‘조선사람’식이다. 우리민족 특유의 것이라는 ‘한(한)’의 정서를 말할때 우리는 ‘아리랑’을 인용한다.아리랑은 그 감수성을 대변할 수 있는 전형이다.집을 떠나 먼 외국을 돌다가도 이국땅에서 문득 아리랑의 가락을 만나면 우리는 금방 다리에서 힘이 빠지며 ‘고국’이 서리서리 그리워 그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진다.억지로 보내진 여행도 아니고 호강스런여행을 하다가도 공연히 서러워지게 하는 가락이 아리랑이다.‘애국가’가 울리면 저절로 손이 가슴에 올려질지언정 그렇게 눈물이 나지는 않는데 ‘아리랑’은 듣는 순간 가슴을 파고들어 그립고 서럽고 따뜻함이 엉겨진 뜨끈한 덩어리를 명치끝에 솟게 한다. ○그녀가 부른것은 아리랑 남방땅에서 얻은 가무잡잡한 혼혈의 손녀들을 동반하고 너무도 이국적이어서 망연할 뿐인 고국땅을 찾은 ‘훈’할머니에게서 저절로 흘러나온 한숨같은 노래.그것이 아리랑인 것은 당연하다.다른것은 다 망각의 피안으로 사라지고 ‘아리랑’만이 그렇게 체내에 박혀있다는 것은 그가 틀림없는 조선여인임을 말해준다.그리고 그 시대에 ‘남양군도’로 끌려가서 살아남은 조선여인이라면 그것은 일본이 강제로 동원했던 일본 군대위안부인 것이다. ‘훈’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이 ‘나미’라고 했다.그의 이름이 ‘나미’라는 것은 어쩐지 좀 안 어울린다.가요를 약간 혀짧은 소리로 부르던 어떤 여가수를 연상시키는 ‘나미’라는 이름은 ‘훈’할머니시대의 ‘조선의 딸들’의이름은 아니었다.너무 ‘현대티’가 나는 것이다.아리랑이 신음이나 한숨처럼 몸에 밴 조선여인인 그가 간직해온 이름이므로 틀림이 없을 터인데 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 것일까. 혹시 ‘나미’가 아니고 ‘남이’인 것은 아닐까.‘남이’일수도 있고 ‘남이’일수도 있다.또는 끝자가 ‘남’으로 끝나는 이름일수도 있다.‘정남’‘후남’‘영남’‘순남’으로 사내 남자를 붙여 ‘남’으로 끝나게 한 이름이 우리의 딸들에게는 많았었다.“사내동생을 보아라”는 주술적 효력의 기대로 붙여준 이름들이다. ○그 소원만은 풀어주어야 끝자가 ‘남’일 경우 집안에서는 “남이야!”하고 불렀을 것이다.“남이야!”는 “나미야!”와 같은 발음이다.그러고보면 ‘나미’라는 박래품 냄새나는 이름의 숙제도 풀린다. “내이름은 나미,가족을 찾아주세요”‘아리랑’을 부르며 그는 서툰 글씨로 쓴 분홍색 청원서를 내보였다.그 소원만은 풀어줄 수 있어야 우리는 ‘조국’의 자격을 운위할 수 있다.천만명의 이산도 찾아준 우리다.온갖 기법도 터득한 처지고모든 사회적 정보의 전산망 자료화작업도 거의 완성했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그런 우리가 ‘훈’할머니의 가족도 못찾아준다면 전산망이 아무리 잘되어있다해도 허망한 것일 뿐이다. ○‘훈’할머니가 던지는 잠언 황량하기가 사막처럼 되어가는 우리를 한탄하는 자리에서 한 종교 목회자가 자신이 발견한 경전 귀절을 소개한 일이 있다.그의 신이 가르치는 ‘말씀’중에서 “위로하라.위로하라.위로하라”는 말을 찾아냈다고 했다.잠재의식에서 “아리랑가락”을 발굴하여 들고 우리를 찾아온 ‘훈’할머니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름을 확인해주고 가족을 찾아주는 일이다.그러는 것이 “위로하고 위로하고 위로하는 길”이다.증오와 비난과 험구로 상처만 증폭되어가는 우리의 어리석은 오늘을 반성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다. 할수 있는대로 우리서로 위로하고 위로하고 위로하자.
  • 희곡·소설가·시인 이어의 난계(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6)

    ◎300여년전 재사 기려 차·이어로 지금도…/별장 3곳서 수십명의 가족극단 거드리며 다작/팔괘촌 본뜬 이웃 제갈공명 사당이 명말·청초를 누비다 간 재사요 낭인이 있었다.그는 재기 발랄한 떠돌이.희곡가요 희곡 평론가,소설가요 수필가,거기다 시인이던 이어(1611∼1680),그는 그의 호 ‘입옹’,‘호상입옹’대로 삿갓 쓰고 강호를 떠돌던 사람.그냥 떠돈 것이 아니라 가족 극단을 거느리고 권문세가의 주머니를 털던 사람.그런가하면 경개 좋은 승지에 별장을 짓고 풍류를 한 몸에 모으다가 끝내 빈털터리로 인생을 끝냈다. 그의 고향은 금화시에서 서쪽으로 약 25㎞ 지점의 난계시 근교 하리촌,곧 이씨들의 집성촌이었다.이어는 한의를 하는 아버지 밑에 강소성 여고에서 출생,부유한 환경속에 소년을 보냈지만 아버지가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다.19세에서 40여세까지 그는 고향에서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별장에 살면서 여유로운 세월에 많은 저작을 남겼다. ○희곡·소설·수필·시 남겨 그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오페라의 연출·각색·무대·화장·발성·효과로부터 각본의 구성·주제·스토리등 그 실제와 이론을 다룬 본격적인 희곡평론집 〈한정우기〉를 비롯,대체로 남녀 애정의 애환을 그린 희곡 〈비목어〉·〈황구봉〉·〈풍쟁오〉 등의 10종 희곡과 단편집 〈무성희〉·장편소설 〈합금회문전〉외에도 시와 수필을 모은 〈입옹일가언〉 등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난계시는 이어를 그 간판으로 삼았다.난계에서 생산하는 술을 ‘개자주’,차를 ‘이어차’,거기다 간선도로 하나를 ‘이어로’로 명명했다. 그는 만년,비록 돈 한푼 없는 백수 건달로 항주에서 죽었지만 일생동안 별장 세군데에 수십명에 달하는 가족극단과 책을 제작 판매하는 서점 한개를 거느렸다. 그 별장 세군데란 나이에 따라 거처를 달리했던 난계·남경·항주 세곳이었다.19세때부터 40여세까지 살았던 고향의 것은 이산의 기슭에 지었다 하여 ‘이원’,그 안에는 연우당·정가·완전교·완재정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의 시문집에 보인다.또 하나의 것은 그가 4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인 1675년까지 살면서 일구었던 남경의 ‘개자원’이다.개자는 겨자씨를 말한다.그러니까 몹시 작은 것을 뜻한다.그럼에도 그 별장안에는 연못·가산·석교·화원 등은 물론 책을 간행하고 판매했던 ‘개자원서포’를 두었고 더구나 이어의 처첩·자녀·서질 등 가족만으로 꾸며진 가족극단을 거느렸던 곳이다.그 극단의 감독·연출·제작자요 공연물의 원작자이기도 했다.그래서 이어는 중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면서 돈도 쓸어 모았던 것으로 안다. ○극단 감독·연출·제작까지 필자가 장풍교수와 함께 난계에 당도하던 날,‘이어연구회’의 사무국장이요 난계시 문화재관리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서 이어의 12대손인 이채표의 안내를 받았다.나에게는 부뚜막의 소금을 만난 격이었다. 이씨는 필자의 계획대로 앞장을 섰다.물론 관심의 초점은 ‘이원’이었다.난계시를 벗어나 서쪽으로 달리다가 횡산옆 어떤 비원으로 보이는 큼직한 문궐앞에 차를 멈추었다.웬걸 하얀 목판에 까만 글씨의 ‘개자원’.정말 반가웠다.최근에 낙성한듯 아직도 목공들이 들락거렸다.하지만 그속에는 작은 다리,굽이굽이 물 줄기.거기다 가산과 연못에 연극 무대.마침 귤이 영글고 국화가 만발하여 이어의 한정이 물씬했다. 우리 일행이 서둘러 금화로 돌아가는 길인데 이씨가 ‘제갈촌’을 아느냐고? 필자가 물었다.제갈공명(181∼234)의 후예들의 집성촌이 바로 여기서 멀지 않은 제갈진 팔괘촌에 있다고 했다.눈이 번쩍 뜨였다.제갈량은 촉나라의 정승이요 장수였지만 〈출사표〉라는 천하 명문을 남긴 문인이 아니었던가? ○고색창연한 제갈 집성촌 맹호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과연 고색창연한 제갈씨 집성촌이 있었다.여덟개의 작은 동산에 둘러싸인 여덟개의 방사선모양의 골목,곧 외팔괘와 내팔괘로 이룩된 마을.그 복판에는 제갈량의 사당이 좌정한 채 벌써 1천280년,남송이 멸망하면서부터 벌써 7백년이 넘게 4천의 제갈씨들이 살고 있었다.
  • 정연·수연씨 몸무게 고 총리 국회답변과 일치/병적기록표 사본확인

    병역면제 의혹을 불러일으킨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의 두 아들의 보충대 입영당시 몸무게는 고건 총리의 국회 본회의 답변과 일치하는 45㎏과 41㎏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국방부가 30일 국민회의 천용댁 이성재 의원과 자민련 이재선 의원에게 제출한 이대표의 장남 정연씨와 차남 수연씨의 병적기록표 사본을 검토한 결과,확인됐다. 국방부 제출자료에 따르면 정연씨의 병적기록카드에는 83년3월18일 신체검사때 키 179㎝에 체중 55㎏으로 갑종 1급 판정을 받았다가,91년2월11일 입영 당시 신체검사에서는 같은 키에 체중 45㎏으로 5급 판정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수연씨 카드에는 85년10월10일 첫 징병검사에서 키 164㎝ 체중 51㎏으로 1급판정을 받았으나,89년 신검에선 키가 1㎝ 늘어난 165㎝에 41㎏으로 4급판정을 받았다.그후 수연씨는 90년1월11일 수도통합병원에서 실시된 정밀 신검에서 키와 체중에 대한 기록없이 5급판정을 받은 것으로 적혀 있다. 두 아들에 대한 면제판정을 내린 군의관은 정연씨의 경우 육군 백일서 대위,수연씨는수도통합병원 신검과장 공군 도송준 소령과 진료부장 육군 나현재 중령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국방부 자료를 검토한 이성재 이재선 의원은 기자들에게 병적기록카드 부모성명란 옆에 카드 글씨체와 다른 필체로 ‘대법원판사’라고 적혀 있는 점으로 미뤄 병적기록카드 사본의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 현대시인 애청의 금화(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5)

    ◎생가어귀엔 수령 500여년 느티나무가…/절강성 중심부에 위치한 비산비야/대시인 기리는 3층높이 방려 이채 이제 발걸음을 강소성에서 훌쩍 절강성으로 옮겼다.옛날 춘추때 같으면 오나라에서 월나라로 건너온 것이다. 금화는 절강성의 중부,그 수도인 항주에서도 남쪽으로 약 170㎞.그토록 멀리 깊숙이 나래를 편 것은 거기가 매력적인 작가로 명말 청초의 희곡가요,소설가인 이어와 중국 현대시 80년사에 가장 많은 독자를 지녔던 공산당 당적을 가진 시인 애청(1910∼1996·중국발음 아이칭)을 낳았기에 말이다. 애청은 필자가 맨처음 해후했던 사회주의 시인이다.아직도 냉전시대였던 83년1월,싱가포르정부가 주최한 제1회 세계중국어작가회의에서 만난뒤,우리는 여러차례 감격의 회동이 있었음에도 막상 그의 고향을 찾은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65년간 시집 20여권 남겨 금화는 비산비야였다.금화시에서 북으로 30여㎞를 달렸을때 작은 소읍 부성을 만났다.부성에서 애청의 생가가 있는 반전장으로 좌회전할때 난데없이 하늘을 뚫을듯 커다랗게세워진 방려을 보고 나를 동행하던 아동문학가요,전 절강사대 총장이었던 장풍씨는 내 어깨를 쳤다. 과연 놀랍도록 높았다.족히 삼층 높이였다.필자가 문학기행하는 동안 처음 보는 시인을 위한 방려다.사실 애청이 이 나라 이 체제에 끼친 문학적인 지위는 이 방려의 높이에 상당했다.1932년부터 지난해까지 65년동안 벌써 스물몇권의 시집에,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란 감투도 그러했다.그러나 그의 외형적인 간판보다는 중국이 가장 암울했던 30년대와 40년대,50년대를 겪는 동안 중국인에게 민족의 긍지와 광명의 추구를 절규함으로써 중국인의 정서를 비장하게 무장시켰던 시인이다.특히 30년대,그의 출세작인 ‘따옌허,나의 유모여!’를 비롯해 ‘북방’‘횃불’‘태양에게’‘눈은 중국의 대지에 내리고 있다’‘거지’‘나는 이땅을 사랑한다’‘나팔수’ 등 중일전쟁때의 작품들은 모든 중국인에게 눈물없이는 읽을수 없었던 민족의 감동이었다. 방려에서 서쪽으로 5리 남짓.편편한 농촌으로 차를 돌렸다.여기가 ‘반전장’이다.애청의 본명 장해징대로 여기는 장씨의 집성촌이다. 그는 여기 장씨 마을에서 대농이요,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1928년 항주의 국립미술대학에 진학하기까지 18년동안 살았다. ○대농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차가 이윽고 마을 복판에 있는 공터에 닿았다.바로 그 앞 2층집 하얀 흙벽 까만 대문위에 ‘애청고거’라는 글씨가 붙어있다.필자는 왈칵 치미는 감개에 목이 메었다.우선 생전에 깊었던 교분때문이요,다음은 최근 10년동안 그는 매년 10월마다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던 석패의 주인공이었다는 점, 거기다가 그는 지방 토호의 아들이요,전위적인 화가였고,애국적인 당원이었지만 한 평생 울분과 불우속에 살다 간 비국의 화신이었다.사실 필자는 그의 뜨거운 눈물을 여러차례 보았다.다만 그의 만년이 순풍이었지만 그것은 욕된 안일이었다. 애청은 출생과 함께 미신의 희생물이었다.그의 명줄이 짧아서 남에게 출양해야 오래 산다는 점쟁이 말대로 그는 장씨 마을에서 10리쯤 떨어진 따옌허(대언하)’라는 빈촌,거기서 빈농으로 살아가는 조(1878∼1924)씨라는 아낙네에게 4년을 입양,다섯살때에야 부모의 슬하로 돌아왔다. 또 한번의 울분,1932년,그가 상해에서 ‘중국좌익미술가연맹’에 가입,‘춘지예술사’를 조직했다가 국민당 정부에 체포,4년이나 옥살이한 것이다.그는 비록 옥중에서 그의 출세작 ‘따옌허­나의 유모’등 많은 명작을 썼지만 국민당에 대한 설원이 깊어 그의 필명을 ‘애청’으로 정했는데 바로 애자는 국민당의 수령인 장개석의 장씨 그 초두를 가위표로 부정한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4년동안 옥살이도 또 한번은 중공이 건국한 뒤,‘중국문학예술가연맹’을 발족하고 중국 대표적인 문학지인 ‘인민문학’이나 ‘시간’ 등을 창간하고 그를 편집하는 등 활동을 펴던 1957년 뜻밖에 우파로 몰려 1978년 복권되기까지 20여년 흑룡강·신강 등 변방지역에서 강제노동을 당했던 것이다. 필자는 문안으로 들어섰다.목조 2층,약 80평의 생가는 입구자 구조,작은 마당 복판에는 우물,우물가 건넌방이 애청의 공부방이란다.그때 쓰던 홍목 책상과 걸상이 당년의 부잣집 흔적임이 역연했지만 벌써 70여년전 소년 장해징의 쓸쓸한 휘파람 소리가 어디선지 들리는 듯했다. 애청의 생가를 나와 뒷 터로 나갔다.거기는 커다란 연못에 500∼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수호신인양 서있다.애청의 시집속에 나오는 ‘두그루 나무’나 애청의 그림속에 자주 나오는 고목이 바로 여기서부터 얻은 시상이요,화상임을 확인했다. ○무덤엔 황량한 풀더미만… 실상 필자가 애청의 생가를 찾은 것은 애청 문학의 발화점인 따옌허를 찾기 위해서였다.따옌허는 애청 유모가 살던 고을 이름이요,동시에 애청 유모의 이름이기도 했다.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시집온 아낙네를 그 친정 고을로 부르는 택호를 썼기 때문이다. 그 따옌허는 농촌 개조로 원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현지의 말때문에 그만 두고 그대신 따옌허의 무덤이 생가에서 불과 5리 떨어진 논가 작은 언덕에 있다는 것이다.귀가 번쩍 트였다.사실 말이지 따옌허같은 여인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애청은 없었을지 모른다.애청이 그녀의 젖을 먹고 그녀의 두꺼비같은 손으로 지어준 밥을 먹고 자랐기에 겨레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이다. 그 무덤은 황량한 풀더미였다.하지만 그의 ‘대연하지묘’라는 묘표와 ‘따옌허는 나의 유모입니다.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하는 비명이 모두 당대 최고의 시인 애청의 친필로 세워졌다는 사실도 필자를 감동시켰다.
  • 신촌 세브란스 도서대여 자원봉사/서울여대 3학년 박진희양

    ◎“투병 환자들에 작은 힘 됐으면…”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고 싶어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도서대여 자원봉사를 하는 박진희양(21·서울여대 생물학과3년). 박양은 병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를 돌보기 위해 지난 6월말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곧바로 이곳을 찾았다. 박양은 “백혈병과 소아암으로 고생하는 어린이 모습을 TV에서 보고 무척 가슴이 아팠다”면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이곳으로 달려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양은 어린이를 돌보는 간병인은 전문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박양이 먼저 시작한 일은 책정리.5백여권의 책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사무실을 청소하고 찢어진 책은 테이프로 붙여 책꽂이에 정리했다.소설과 비소설,어린이 동화책 등은 나누어 분류했다.그리고 문앞에 큰글씨로 ‘무료로 책을 빌려가세요’ 안내문도 내붙였다. 박양의 노력으로 지금 이곳에서 책을 빌려 가는 사람은 하루 20여명. 장기 입원환자와 병원직원,장시간 치료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이찾아온다.환자들이 주로 찾는 책은 소설과 잡지,시집 등이다. 박양은 “환자들이 내가 빌려준 책을 보고 잠시나마 아픔을 잊을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보람을 느낀다”며 밝게 웃었다.
  • “한성판윤 납셨다”/서울시 관련자료 265점 특별전시

    ◎내일∼새달10일 경희궁터 기념관서 지금의 서울특별시와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한성부와 한성판윤 관련자료를 모아 보여주는 ‘한성판윤전’이 22일부터 8월10일까지 서울 경희궁터내 서울600년기념관에서 열린다. 서울시가 국·공·사립박물관,대학박물관,개인소장 유물 가운데 한성부·한성판윤과 직접 관련된 유물만을 대여받아 보여주는 이채로운 자리로 강세황의 영정 등 보물 4점을 비롯해 모두 265점이 나온다. 전시는 주제별로 크게 여섯개로 나누어 구성된다.‘한성부와 판윤의 역사’에서는 한성판윤의 기능·명칭의 변경과 한성부 청사모습·위치,역대 한성판윤의 명단을 패널과 사진자료를 이용해 보여준다.‘한성부와 판윤의 기능과 역할’에서는 한성부와 한성판윤의 각 업무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며 ‘판윤열전’에선 한성판윤 임명교지,행장,비문,주요 판윤의 가계와 저술 예술작품 등 관련자료를 통해 한성판윤의 삶과 학문·예술적 면모를 보여준다.‘판윤의 얼굴’에서는 한성판윤을 역임한 인물들의 영정 및 사진자료를 통해한성판윤의 모습을 전시하며 ‘판윤·시장의 수결과 인장’은 한성판윤의 수결 및 인장과 역대시장의 서명을 모아 패널로 만들어 양자를 비교해보는 흥미있는 자리로 꾸민다.또 ‘서울의 뿌리찾기’에서는 ‘서울600년 인물사’ CD롬을 통해 관람객들이 서울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모습과 행적을 직접 찾아보고 비디오 영상물을 통해 서울의 옛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 특별전에는 1395년부터 1910년까지 800여명의 한성판윤 가운데 200여명의 한성판윤 관계자료가 망라되는데 한성판윤 임명교지 등 고문서 140점,도성대지도’ 등 고지도 8점,강세황·윤순 등 판윤들이 남긴 글씨 20점,‘황화집’‘만취집’ 등 전적 44점,홍진 박규수 등 판윤의 모습을 담은 영정 9점,‘도봉서원도’등 회화자료 7점,기타 탁본·형구류·사진자료·서울의 인물과 옛 모습을 살펴볼수 있는 영상물 등 37점이 포함돼 있다.
  • ‘다라니경’은 신라전통 필체/청주대 김성수 교수 확인

    ◎기존 ‘서기750년 제작설’보다 44년 앞서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은 그 제작년대가 지금까지 알려진 석가탑 건립시기인 서기 750년경보다 최소한 44년 빠른 서기 706년 이전인 것으로 추정되며 글자체는 일부 중국학자들의 다라니경 중국제작설과 달리 신라전통의 필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이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경주 구황동삼층석탑(국보37호) 사리함 명문을 비교 분석한 결과 글자체가 매우 흡사,제작자가 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연구결과 나타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청주대 김성수 교수(문헌정보학)에게 의뢰,연구한 성과에 따르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권말에 찍힌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아홉글자는 706년 제작된 경주 구황동삼층석탑의 사리함 명문중에도 똑같이 나오는데 두 유물의 같은 글자끼리 대조 분석한 결과 ‘정’‘광’자 등 대부분의 글씨체가 거의 비슷해 동일인의 서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그러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구황동삼층석탑 사리함의 명문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까닭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주술적이고 신비적 경지에서 제작된 반면 사리함 명문은 망자의 명복을 비는 엄숙한 경지에서 제작됐기 때문이라는 것.결국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서체와 격식의 역사적인 추이로 보아 구황동삼층석탑 사리함의 제작시기와 동일하거나 다소 이른 시기에 제작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신세대 취향(외언내언)

    재키모에 주라기공원의 그림이 들어간 T셔츠,스누피 배낭에다 달마시안 슬리퍼를 신는다.반드시 외제상품이 아니더라도 10대들이 즐겨입는 옷들의 상표이름은 거의가 외래어 일색이다.월트디즈니 파코라반 행텐과 네슬리쎄레락 조다쉬와 캘빈클라인에다 ‘TooToo’,‘Let’sGo’,‘Good Friend’,‘Mickey Mouse’,‘Tina Crecker’등 구체적인 글씨나 이름을 새겨넣기도 한다.그러나 그것도 간소화되어 요즘은 AB.F.Z,VIKI,INVU,ZOOC,ZED 등 의미없는 영문표기도 많다.이국적인 이미지를 풍기면서도 임팩트하고 부르기 쉽고 또 글로벌브랜드같은 느낌이 연출되기 때문에 십대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음식은 빨리 가볍게 먹을수 있는 햄버거 치킨 피자를 좋아하고 떡볶이 김밥 라면에다 콜라나 쥬스를 마신다.여름철 한창 인기상품인 빙과류나 과자류의 상표만 봐도 그들의 취향을 알수 있다.이른바 ‘빙빙’‘주물러’‘싱싱’‘통통’‘와삭꽁꽁’에서 ‘막땡겨’‘뽕따’등 세련과는 거리가 먼 이름들이 많고 ‘아이셔’‘트키너(특히너)’‘누네띠네’ 등등도 눈에 띈다.이 역시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향토성이 있고 부르기 쉽다는 것이 장점일 뿐 다른 의미는 부여하지 않는다.80년대의 ‘쭈쭈바’나 ‘맛기차바’도 마찬가지다. L제과 ‘빙빙바’의 경우 빙글빙글 돌아가는 십대취향에 맞아 떨어져 출시와 함께 월평균 40억원 이상의 매출액을 올린다고 한다.세련된 것을 좋아하는 신세대들이 빙과류에서만은 왜 하필 촌스러운 이름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그들 자신이 알송달송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신세대는 언제나 양보다는 질,질보다는 패션을 중시하는 세대이며 이성보다는 감성에 맞는 상품을 우선으로 꼽는다는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말하는 세대들과는 달리 우리것 남의 것을 가리지 않고 좋은 것을 좋다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퓨전(Fusion)세대’인 신세대들의 합리적인 문화의식일 뿐이다.
  • 7·7사변 60돌…중“일은 반성하라”/북경 이석우(특파원 수첩)

    중·일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는 7일.관영 신화통신은 ‘황당한 역사관을 경계한다’는 평론을 발표,과거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인들에 대해 강경 어조로 경고했다.역사를 왜곡하는 우익세력들의 힘과 영향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경계론도 강조했다. 신화통신은 과거사의 바른 인식은 중·일 정치관계의 기초라면서 3천5백만명의 중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침략전쟁의 책임을 부인하고,정당성을 강변하는 우익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인민일보등 신문과 방송들도 신화사의 평론을 전재하고 ‘역사를 잊지 말자’는 특집란을 마련하는 등 일본의 우익·군국주의 세력에 대한 경계를 높였다. 60년전 일본군의 공격으로 8년간 중·일전쟁의 막을 열었던 북경 남쪽 노구교(마르코폴로 브리지)옆에 우뚝선 ‘중국항전 기념관’에선 이날 류화청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정관근 당 선전부장 등이 참석,“다시는 치욕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결의속에서 전쟁발발 60주년 기념식과 기념관 확장식이 치뤄졌다.강택민 주석이 써보낸 ‘과거를 잊지말자’는 내용의 글씨도 동판으로 만들어져 기념관에 놓여졌다.중국 국가문서보관소도 이날부터 중·일전쟁 직후 일본인 등 전쟁범죄자에 대한 중국측의 군사재판및 처형기록과 사진을 공개하는 등 일반의 역사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오는11일 중·일 전쟁관련 국제학술대회를 여는것을 비롯,각 학술단체들도 일본의 침략전쟁의 만행과 영향을 평가하는 학술대회를 이달말까지 계획하고 있다.북경의 중·고등학생들의 ‘중국항전 기념관’ 단체관람으로 기념관은 만원 상태다.대학살을 당했던 남경의 ‘남경학살기념관’과 피해자 위령비등에도 젊은세대들이 눈물을 흐리면서 줄을 잇고 있다.북경의 여름이 홍콩반환 축하란 국민적 축제 물결속에 시작됐다면 7월과 8월은 ‘과거를 잊지말고 군국주의 부활을 경계하자’는 ‘애국주의’란 주제로 익어가고 있다.
  • 전주 전통부채/단아한 선비의 멋 부채살마다 가득

    ◎한해 합죽선 5만·태극선 50만개 생산/살 많고 고른것이 좋아… 가격 천차만별 ‘단오 선물은 부채,동지 선물은 책력(24절기가 표시된 지금의 달력에 해당됨)’ 단오가 되면 더운 여름철이 가까워지는 만큼 부채가 선물로 제격이고 동지가 가까워오면 새해에 쓸 책력이 선물답다는 뜻의 옛말이다. 부채가 다른 어느것보다 친근한 성하의 계절이 돌아왔다. 에어컨과 선풍기 등 냉방기기의 폭발적인 증가로 부채시장이 크게 위축됐지만 ‘전주 전통부채’가 나름대로 활로를 찾고 있다. 워낙 멋과 품위가 있는데다 옛 것을 되찾자는 최근의 복고적인 분위기도 부채사용 인구를 점차 늘리는데 한몫하는 셈이다. 부채와 관련된 기록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사기다.이 책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왕건에게 공작선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흥미로운 것은 당시 후백제의 수도가 지금의 전주인 완산이란 점이다. 조선시대에도 전주는 국내의 부채산업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당시 전라도 전역을 관할하던 최고행정기관인 전라감영에 부채를만드는 선자방을 별도로 두고있었으며 최고행정책임자인 관찰사는 해마다 여름이 되면 최고품질의 부채를 궁중에 진상해 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전주의 부채가 옛부터 전국적으로 높은 성가를 얻어온 것은 이 지역의 특산품인 한지와 질좋은 대나무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인 냉방기기가 폭넓게 보급되면서 부채산업은 지난 80년대 이후 한동안 판매량이 절반이하로 뚝 떨어지며 쇠락했다. 결국 전북도와 전주시는 지난 90년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전통문화보존대책의 하나로 전주지역의 부채 제작자들이 한 곳에 모일수 있도록 공예품협동화단지를 주선해주고 조합도 결성했다.공예품을 전시,판매할 수 있는 70여평규모의 공간도 지원했다. 현재는 전주지역에서 합죽선과 태극선을 수십년씩 제작해온 장인 8명이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전주∼남원간 국도변의 협동화단지에 보금자리를 틀고 부채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 단지에서 연간 생산되는 부채는 합죽선이 4만∼5만개,태극선을 비롯한 각종 부채는 40만∼50만개에이른다.합죽선은 국내 유통량의 거의 전부가 이곳에서 생산되고 태극선 등은 국내전체시장의 80∼90%에 해당되는 물량이다. 이밖에 남원지역과 전남 담양지역에서 태극선 등이 약간 생산되고 있으나 미미한 양이다. 다만 요즘엔 값싼 중국산 대나무로 만들어진 부채들이 국내에 상당량 유입되고 있으나 대와 종이의 질,접착상태등 전반적인 솜씨가 전주의 전통부채를 따라가진 못한다. 지난 90년부터 협동화단지에 입주해 작업중인 국내합죽선제작의 1인자 이기동씨(68·전북도 무형문화재)는 “에어컨과 선풍기 등 냉방기기 보급이 늘어났다고 해서 부채의 용도가 완전히 페기된 것은 결고 아니다”면서 “일부에서는 냉방병 걱정도 없고 전력도 아낄수 있는 부채사용을 적극 권장하고있으며 어떤 이들은 아예 부채를 장식용으로 구입해 수요는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단선과 접선으로 나눠 ▷종류◁ 부채는 모양이 둥근 단선과 접었다 펼 수 있는 접선으로 나뉜다.단선은 모양이나 크기에 따라 오엽선과 연엽선·태극선·까치선·공작선·파초선·대금선·중원선·대원선 등이 있다.또 접선에는 합죽선과 백선·칠선 등이 있으며 아동들을 위한 아동선과 민화가 그려진 민화선도 있다.물론 전통 전주부채로는 태극선과 합죽선을 제일로 친다. ○손잡이 재질은 소나무 ▷제작 과정◁ 태극선과 합죽선의 제작과정은 다소 다르다.우선 태극선은 2년이상 묶은 왕대나무를 겨울철에 베어내 1㎜ 두께로 부채살을 만든다.이어 고급비단인 양단을 부채살에 잘 붙여 떨어지지 않도록 응달에서 24시간 가량 말리고 각종 모양으로 끝을 오려낸 뒤 한지로 테두리를 친다.소나무를 재질로 하는 손잡이를 끼우면 마무리된다.합죽선은 이보다 제작과정에 훨씬 복잡하다.합죽선은 대나물를 양잿물에 삶아 진을 뺀 뒤 약 보름정도 말리고 칼로 부채살을 만든다.부채살의 아랫부분에 인두를 이용해 그림을 그려넣는 낙죽과정을 거친뒤 종이를 부채살에 붙이고 그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음 부채살의 끝을 고리로 꿰어 사용한다. ○살 많고 간격 일정해야 ▷좋은부채 고르는 법◁ 일반적으로 부채는 대나무살의 간격이 고르고 가급적 살의 수가많을수록 좋다.태극선은 살 위에 붙은 태극무늬가 정교하고 옆에서 봤을때 구김이 없고 반듯해야 한다.또 부채의 두께가 너무 두껍지 않고 한지를 이용한 모서리의 마감상태가 좋아야 한다.합죽선은 대살이 가급적 많고 가지런해야 하고 대나무와 한지의 접착상태를 잘 보고 구입하면 된다. ○합죽선 최소 2만원선 ▷가격과 구매방법◁ 태극선은 크기나 모양등에 따라 2천원부터 약 5만원까지 매우 다양하다.합죽선은 이보다 비싸 최소 2만원선이며 크기나 부채안에 그려진 그림·글씨에 따라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전주시 완산구 중앙동을 비롯한 시내 중심가의 화랑에 가면 유명화가나 서예가들의 그림이나 글씨를 붙인 각종 크기의 합죽선과 태극선을 손쉽게 구할수 있다.전주∼남원간 도로변인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의 전주공예품특산단지(0652­87­7975)에 가면 전국최고의 장인들이 만든 진품전주부채를 안심하고 구입할 수 있다.
  • 천안문광장 10만명 환호성/북경 표정

    ◎0시정각에 특구시대 개막 타종/국영TV 72시간동안 연속 중계/밤새 불꽃놀이… 전대륙이 불야성 ○…북경 혁명역사박물관 앞 대형 홍콩반환 시계탑의 대형전자시계가 마침내 ‘0’을 가리키는 순간,천안문광장과 시계탑 앞에 모여있던 10만명의 북경시민은 환호성을 울렸다.동시에 북경 대종사의 종탑과 전보대루의 종탑도 새로운 홍콩특구시대가 열렸음과 식민지 치욕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을 타종했다. 이들의 만세와 환호성은 곧 주위에 펄럭이는 오성홍기속에서 국가의 합창으로 바뀌었고 장내 분위기는 더욱 고조돼갔다. ○…자정이 지나자 불꽃놀이가 시작됐고 천안문광장 상공엔 홍콩특구의 새로운 상징인 자형꽃과 홍콩의 중심가인 센트럴의 모습이 불꽃으로 아로놓였다. 천안문광장과 교통이 통제된 천안문앞 광장에 몰려있던 별도의 수만명의 시민들은 손에손에 오성홍기와 홍콩특구의 새로운 상징기발을 들고 흔들며 환호성이었다. 천안문광장 주위로는 대형전광판을 통해 홍콩주권이양 의식이 생중계되고 있었고 영국의 유니온잭기가 내려오고 오성홍기가 내걸리는 순간,천안문의 10여만 군중들은 하나같이 중국의 국가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일어나라,일어나라,노예됨을 원치않는 이들이여∼”. 이들은 상오 2시18분 세번 째 불꽃놀이가 끝난 뒤에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동이 터온 상오 4시47분 천안문과 광장사이 큰길 옆의 국기게양대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장엄한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대형 오성홍기가 천안문광장에 걸리자 10만여명의 관중들은 또다시 환호하며 국가를 따라 불렀다. ○…전날 천안문의 주제는 용들의 승천이었다.10만여명이 그득한 광장가운데로 대형북과 징소리에 맞춰 용춤과 사자춤등 전통 놀이가 진행됐고 북경시장의 축사와 함께 천안문광장에 설치된 가장 큰 무대라는 1천2백㎡의 무대위에 서 연예인과 음악가들이 홍콩의 반환을 축하했다. ○…이에 앞서 30일 중국국민들은 전국에서 국영 중앙(CC)TV를 통해 중국인민해방군 선발대가 오성홍기를 앞세우고 심천의 록마치우 항을 출발,39대의 무장트럭을 타고 홍콩의 섹콩 군사기지로 입성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날 5백9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는 39대의 무장트럭을 타고 홍콩으로 들어갔다.중국인들은 이날 하오에도 홍콩에서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턴이 총독집무실에서 떠나는 장면과 영국정청이 홍콩철수 행사를 갖는것도 위성을 통해 동시에 방안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이날 자정 홍콩에서 거행됐던 주권이양·정권교체 의식과 심야에 천안문에서의 불꽃놀이도 밤을 잊은채 브라운관을 통해 같은 시간에 볼 수 있었다. 국영 중앙TV는 이날 상오5시59분 국가를 시작으로 7월2일 정규프로그램이 시작되는 상오6시까지 72시간동안 단 1초도 쉬지않는 연속방송 체제로 들어갔다. ○…북경에서는 홍콩 반환행사에 중국대표로 참석한 강택민 국가주석의 위상이 보다 확고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1일 북경 공인체육관에서 거행되는 축하행사에서 강주석이 쓴 ‘환경향항회귀(홍콩귀속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라는 대형 붓글씨가 스타디움 정 중앙에 내걸렸다.또 모택동에 이어 강주석이 주창한 구호가 8만 관중의 열렬한 환호속에 울려퍼지도록 한 점 등이 강주석의 위상을 등소평과 같은 반열로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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