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글씨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 카드사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 특허청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 연장전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 고용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343
  • [지역플러스] 청계천 벽면타일 선착순 접수

    서울시는 26일 ‘참여와 화합의 벽(가칭)’을 조성해 청계천복원사업에 전국민의 참여를 유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직접 그린 그림이나 글씨가 새겨진 가로·세로 10㎝의 자기질 타일을 청계천 하천 벽면에 붙이는 것으로 청계천 황학동 지역,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조성된다. 국민은 물론,해외동포·외국인 등이 가족 및 단체로 참여할 수 있으며 2만명을 선착순 접수한다.다음달 1일부터 서울시 홈페이지(www.seoul.go.kr) 또는 우편으로 신청할 수 있으며 청계천복원추진본부나 청계천 홍보관을 방문하면 현장에서 바로 접수할 수 있다.비용은 2만원.문의 (02)2171-2537,2461∼2.˝
  • “희생자 더 없길…” 사흘째 촛불시위

    촛불집회다,빈소분향이다,방식은 십인십색이지만 고 김선일씨를 추모하는 마음은 같았다.시민들은 김씨를 기리며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추가파병은 철회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24일 서울을 비롯한 부산,울산,전주 등 전국 곳곳에서 추도의 물결은 이어졌다. ●촛불집회,추모빈소,핸드프린팅 참여연대 등 365개로 구성된 이라크 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은 이날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 사흘째 ‘故 김선일씨 추모촛불집회’를 열었다.2000여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추가로 파병하면 제2,제3의 김선일씨가 나올 수 있다.”고 외치면서 정부의 이라크 추가파병철회를 촉구했다. 광화문 한편에 이날 오전부터 설치된 김씨의 분향소에는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묵념을 마친 김선분(80·여) 할머니는 “따지고 보면 내 손주뻘이다.지금 김씨의 가족들 심정이 얼마나 애절하고 분통 터지겠느냐.”면서 “파병을 강행한다고 정부가 발표했을 때 김씨 부모 가슴에 피맺힌 한이 생겼을 것이다.이들이 이제 정부를 신뢰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빈소를 찾았다는 임성신(31·여·회사원)씨는 “모든 국민이 김씨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이다.지금은 추가 파병을 감정적으로 판단할 때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판단해 파병 철회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중국비자를 받으러 광화문에 나왔다가 빈소를 찾은 이목은(21·대학생)씨는 “이전에는 이라크 사람들의 피해를 별로 생각해 보지 못했다.무고한 민간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이라크 민간인들의 심정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슬픔을 또다시 만들 수는 없다” 파병에 반대하는 여성단체 모임인 반전평화 여성행동도 오전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씨를 추모하고,파병 철회를 주장했다.이들은 ‘파병반대’라고 손도장으로 글씨를 만들기도 했다.이 단체는 “우리 여성들은 한 인간으로서,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으로서 김씨의 죽음을 초래한 노무현 정부의 반인륜적 태도와 파병강행 결정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보수단체들은 김씨를 추모하면서도 파병은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북핵저지시민연대는 이날 오후 용산 미8군 기지 앞에서 ‘살인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제2,제3의 무장테러단체가 인질극을 벌이기 전에 원칙대로 파병하고 더 강력한 부대를 보내 교민을 보호하고 테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한편 김씨의 빈소가 마련된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에 열린우리당 이은영 의원이 분향하러 왔으나 학생 20여명이 ‘추가파병철회청원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절만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논술 비타민] 시작이 반인데…/노병곤 문학박사·’글과 생각’ 송파캠퍼스 원장

    (가)와 (나)의 지문을 읽고 사이버 세계의 유용성에 관한 글쓴이의 입장을 정리한 후,이에 대해 가능한 반론을 제시해 보시오.(이화여자대학교 2004학년도 논술 모의시험 문제,인문·자연계열 공통) ●제시문(가) 인간은 새로운 우주론 덕택에 무지의 암흑에서 진리의 찬란한 빛으로 진보했다.우주의 진정한 체계가 발견됨에 따라,인간은 마침내 자신이 우주 내의 어느 곳에 서있는지 알게 되었다.태양이 지구를 대신하여 행성체계의 중심에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로,과학 역시 신학을 물리치고 인간의 지식체계의 중심을 차지했다.이제 인간의 정신이 진정한 빛의 근원을 탐구하게 되면서,진리를 향한 끝없는 도약이 미래를 가득 채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대 우주론의 엄청난 성과에도 불구하고,서구는 철저한 물리주의의 길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을 또한 잃어버렸다.현대 우주론이 성공을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공간의 동질화로 인해 영혼 또는 정신의 공간이 우리의 세계관에서 추방되어버린 것이다.동질적인 공간은 오직 한 종류의 실재만을 수용할 수 있었다.즉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물질의 물리적 실재만이 존재했다.중세 우주론에서 육체와 영혼은 공간이 비동질적이라는 믿음 때문에 공존할 수 있었다.반면에 근대의 우주론자들은 지구 공간과 천체 공간의 중세적 구분을 폐기함으로써 실재를 고전적인 육체-영혼 이항체계의 절반으로 축소시켰다.게다가 물질 공간이 무한으로까지 일단 확장되어버린 다음에는,어떠한 형태로든 영혼 공간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좀더 적나라하게 말해서,근대 우주론의 무한 공간에는 ‘영혼’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들이 존재할 장소가 전혀 없었다.중세의 우주에서 영혼의 장소는 항상 ‘너머’였다.중세에는 우주가 유한하다고 믿었으므로,적어도 비유적으로라도 물질세계의 바깥에 영혼의 자리가 충분히 남아 있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그러나 물질의 세계가 무한한데 영혼의 세계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물질세계의 한계가 없어짐으로써 기독교적인 영혼의 세계는 우주로부터 삭제되었다.이러한 삭제는 서구를 정신적 위기에 빠뜨렸으며,우리는 그 여파 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다. ●제시문(나) 사이버공간은 빅뱅에 견줄 만한 기하급수적인 힘으로 현재 우리 눈앞에서 폭발하고 있다.우주론자들은 우주의 물질 공간이 약 150억 년 전에 무에서 폭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데,사이버공간도 역시 무에서 시작되었다.현재 우리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새로운 영역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다.서로 연결된 전 지구적 컴퓨터 네트워크 공간은 이전과 다른 영역으로 팽창하고 있다.물질공간처럼,이 새로운 사이버공간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면서,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매일 수천 개에 달하는 새로운 노드 혹은 ‘사이트’들이 인터넷과 관련 네트워크에 추가되고 있으며,이러한 새 노드를 통해서 사이버공간의 전체 영역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모든 사이트들은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는 웹의 복잡한 미로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1998년 중반 현재,정기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의 수는 1억 명에 이르고 있다.그리고 다음 10년 동안에는 10억 명에 근접할 것으로 추정된다.이미 3억 페이지가 등록되어 있는 월드와이드웹은 최근 들어 하루에 백만 페이지씩 성장하고 있다.무에서 시작한 지 약 30년 만에 사이버공간은 인간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영토’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매우 중대한 의미에서 새로운 디지털 공간은 물리학이 탐구해온 공간 ‘너머’에 있다.왜냐하면 사이버 세계는 물질의 소립자나 힘이 아니라 비트와 바이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데이터 패킷은 사이버공간의 존재론적 토대이며,전 지구적 현상이 ‘출현하는’ 근원이 된다.사이버공간은 물질의 소립자나 에너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좀더 명확하게 말해서,그것은 한마디로 혁명적인 공간이다.사이버공간은 존재론적으로 물리적 현상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물리학 법칙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그러한 법칙의 한계에 의해 제한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어떤 의미에서 실리콘 칩은 우리를 형이상학적 통로로 이끈다.한 웹사이트에서 다른 웹사이트로 여행하는 나의 ‘운동’은 어떠한 역학 방정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고,내가 활동하는 온라인 공간은 어떠한 물리적 미터법으로도 측정할 수 없다.여기에서 ‘공간’의 개념 자체는 지금까지 거의 이해된 바 없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역설적이게도,사이버공간은 물리학적 과학기술의 부산물이다.실리콘 칩,광섬유,액정화면,원격통신위성,심지어는 인터넷에 동력을 공급하는 전기까지,이 모두가 과학의 부산물이다.하지만 사이버공간이 물리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그것은 순전히 물리주의적인 실재관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소위 ‘과학의 시대’에 우리들은 철저히 물리적인 공간의 개념에 길들여져서,사이버공간을 진정한 ‘공간’으로 받아들이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그러나 내가 사이버공간에 ‘들어갔을 때’,나의 몸은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지만,‘나’는 자체적인 논리와 지형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세계로 송신된다.분명히 그것은 내가 물질세계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종류의 지형이지만,그것이 물질적이지 않다고 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즉,어떤 것이 물질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물질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사이버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다.나는 거기에 있다.우리는 사이버공간을 순전히 물리주의적인 세계상에서 거부당한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을 부분적으로나마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사이버공간은 정신을 위한,특히 상상력을 위한,새로운 영역이 되었다. 1.사오정 고민하다 오늘은 저팔계가 사오정에게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기로 한 날.‘얼른 공부하고 놀아야지.’ 둘은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대입 논술시험이 가까워진 터라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사오정의 답안지를 읽어 내려가던 삼장 선생의 얼굴색이 변했다.“사오정! 너 정신이 딴 데 가 있구나.그러고보니 잔뜩 멋을 부리고 왔구나.무슨 일이냐.” 사오정은 소개팅을 하는 날이라 좀 멋을 부렸다고 했다.“허허! 이 녀석이….” 이어 저팔계의 답안을 받아 본 삼장 선생은 “사오정아,밖에 나가서 저팔계의 답안을 자세히 읽어 보고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라.” 2.저팔계,함께 고민하다 밖으로 나간 둘은 풀이 죽어 있었다.‘빨리 끝내고 가야 하는데….’ 저팔계가 한숨을 쉬었다.“삼장 선생님이 왜 화를 내셨는지 좀 보자.” 둘은 답안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전체 방향이나 내용은 별로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저팔계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아! 알 것 같다.서론 때문에 화가 나셨나 봐.왜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썼니? 본론에서 다룰 내용을 제시했네.” “왜? 할 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어차피 그 얘기를 하려는 거잖아.급한 마음에 할 얘기만 쓰자고 생각하기는 했지만,그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 어차피 서론이나 결론은 형식적인 거잖아.” 사오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이러지 말고 삼장 선생님께 가서 여쭤 보자.” 팔을 잡아끄는 저팔계를 따라 사오정은 삼장 선생에게 갔다. 3.논달선생 삼장 꾸짖다 “그래 뭐가 문제인지를 알아냈느냐?” 사오정과 저팔계는 서론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정확히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제대로 찾기는 했구나.사오정아! 네가 오늘 이렇게 멋을 낸 이유가 뭐지?” “여자친구에게 첫인상을 좋게 보이려고….” “왜 첫인상을 좋게 보이려고 하지?” “그야 첫인상이 좋아야 호감도 생기고,나중에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도 들고….” 사오정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삼장 선생은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느냐? 사오정아! 네가 오늘 쓴 답안은 첫인상이 나쁜 답안이다.여자 친구에게 좋은 첫인상을 주는 것만큼이나 논술 답안도 첫인상이 중요하다.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논술의 첫인상은 어떻게 결정되나요? 글씨를 잘 써야 하나요?” 다소 엉뚱한 사오정의 물음에 삼장 선생은 껄껄 웃으시면서 “이 녀석이 옷차림에 신경을 쓰더니 외적인 형식만 생각을 하는구나.하긴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글씨도 첫인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하지만 역시 논술 답안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부분은 서론이다.그런데 오늘 너의 서론은 좋은 인상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나쁜 인상을 주고 있으니 없느니만 못하다.서론은 눈에 가장 잘 띄는 답안의 첫 부분에 위치하고 있고 누구나 가장 먼저 읽어보는 부분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참신하고 매력적으로 작성해야 한다.네가 여자 친구에게 호감을 사고 나중에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려는 것처럼,서론도 네가 작성한 본론을 호감을 갖고 읽고 싶게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고 여자친구만 신경 쓰지 말고 네 논술의 첫인상을 좋게 하도록 해라.” 4.삼장 핵심을 찌르다 일반적으로 글의 서두는 독자의 주의를 끌어들이고,그 글의 내용을 예견하게 하며,주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부분이다.특히 논술 답안에 국한시켜서 말하면 서론은 읽는 이의 관심이나 호기심을 논제로 모을 수 있도록 하고 글쓴이의 문제 의식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논술의 서론은 일반적으로 관심 유발,문제 설정,문제 제기의 3부분으로 구성하면 무난하다.서론의 첫 부분에서는 읽는 사람의 관심과 주의를 끌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하고,둘째 부분에서는 앞에 서술한 내용의 요점과 핵심을 추출하여 문제의 범위나 방향을 한정하고,셋째 부분에서는 앞 부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논제나 쟁점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면 무난한 서론 구성이라 할 수 있다.물론 형식적으로 꼭 구분돼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용적으로는 세 가지 면에서 모자란 점이 없는 것이 바람직하다.아래의 예를 보자. 사이버캐릭터,사이버머니,이른바 사이버 공간이 만들어낸 신조어들이다.현대인들은 이러한 공간 속에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과학기술 발달의 절정 속에 컴퓨터가 개발되고 인터넷의 보급 등을 비롯해 새로운 공간으로 사이버 세계가 등장하였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새로운 영토에 집을 짓고 이웃과 교류하며 최대한 이용하게 됨으로써 기하급수적인 성장과 거대한 영토확장을 이루어냈다.그렇다면 사이버공간이 형성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듯 유례없는 빠른 성장을 이루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에 따르는 문제점은 없는지,사이버공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한 때이다. 이 글은 이화여대 논술 모의고사에서 우수 답안으로 예시한 답안의 서론이다.앞 부분에서 사이버 공간이 만들어낸 신조어를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해 사이버 공간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현상을 제시하여 읽는 이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하였고,그 배경이 무엇인지,문제점은 없는지 등에 관한 문제의 설정 및 논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첫 부분의 최근 사이버 공간의 확대 양상이 다른 부분에 비해 길게 서술되고 있고,둘째와 셋째의 문제 설정과 방향 제시가 아우러져 제시되고 있는 경우이다.다소 부족한 면이 있지만 서론이 갖춰야 할 성격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킨 예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좀더 나은 논술 답안이 되려면 위의 것보다도 더욱 매력적이고 참신하면서도 적절한 서론을 작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위의 서론의 경우 첫 부분에서 좀더 흥미로우면서도 참신한 내용으로 작성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이버 세계나 사이버 공간이라고 하면 인터넷만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와는 다소 다른 관점인 사이버머니,사이버캐릭터 등을 제시한 것이 참신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문제의 설정 및 논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사이버 공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한 때이다.’와 같은 서술에서 볼 수 있듯이 논지가 모호하게 제시되고 있는 부분도 서론의 적절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서론 작성시 특히 유의해야 할 사항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느낌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서론이 ‘관심 유발-문제 한정-문제 제기’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다 보니 수험생들은 이런 이론적인 내용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문제를 보고 금방 떠올리게 되는 내용들은 남들도 다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답변을 작성한다면 내용이 남들과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따라서 예화나 속담 하나를 들더라도 남들이 잘 생각해 내지 못하는 참신한 예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저기에 서론을 쓰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데,중요한 것은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 서론 작성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든지 결과적으로 앞서 얘기했던 서론이 담당해야 할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충분한 것인가 하는 점이 관건임을 명심하도록 하려무나.알겠느냐? 5.사오정 깨닫다 “말씀을 듣고 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서론이 본론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제가 크게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장 선생은 “사오정이 오늘 잔뜩 멋을 부리고 왔으니 좋은 첫인상을 줄 수 있을 거야.그렇다고 논술 답안의 첫인상이 지닌 중요성을 잊어먹으면 안 된다.” 다음주에는 ‘뚝배기보다 장맛이다.’라는 주제로 강의가 이어집니다.논술과 심층면접 지상강의 내용에 대해 이해가 안 되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http:///cafe.daum.net/seoulinseoul로 문의하면 선생님들의 조언과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 [논술 비타민] 시작이 반인데…/노병곤 문학박사·’글과 생각’ 송파캠퍼스 원장

    [논술 비타민] 시작이 반인데…/노병곤 문학박사·’글과 생각’ 송파캠퍼스 원장

    (가)와 (나)의 지문을 읽고 사이버 세계의 유용성에 관한 글쓴이의 입장을 정리한 후,이에 대해 가능한 반론을 제시해 보시오.(이화여자대학교 2004학년도 논술 모의시험 문제,인문·자연계열 공통) ●제시문(가) 인간은 새로운 우주론 덕택에 무지의 암흑에서 진리의 찬란한 빛으로 진보했다.우주의 진정한 체계가 발견됨에 따라,인간은 마침내 자신이 우주 내의 어느 곳에 서있는지 알게 되었다.태양이 지구를 대신하여 행성체계의 중심에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로,과학 역시 신학을 물리치고 인간의 지식체계의 중심을 차지했다.이제 인간의 정신이 진정한 빛의 근원을 탐구하게 되면서,진리를 향한 끝없는 도약이 미래를 가득 채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대 우주론의 엄청난 성과에도 불구하고,서구는 철저한 물리주의의 길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을 또한 잃어버렸다.현대 우주론이 성공을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공간의 동질화로 인해 영혼 또는 정신의 공간이 우리의 세계관에서 추방되어버린 것이다.동질적인 공간은 오직 한 종류의 실재만을 수용할 수 있었다.즉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물질의 물리적 실재만이 존재했다.중세 우주론에서 육체와 영혼은 공간이 비동질적이라는 믿음 때문에 공존할 수 있었다.반면에 근대의 우주론자들은 지구 공간과 천체 공간의 중세적 구분을 폐기함으로써 실재를 고전적인 육체-영혼 이항체계의 절반으로 축소시켰다.게다가 물질 공간이 무한으로까지 일단 확장되어버린 다음에는,어떠한 형태로든 영혼 공간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좀더 적나라하게 말해서,근대 우주론의 무한 공간에는 ‘영혼’이니 ‘정신’이니 하는 것들이 존재할 장소가 전혀 없었다.중세의 우주에서 영혼의 장소는 항상 ‘너머’였다.중세에는 우주가 유한하다고 믿었으므로,적어도 비유적으로라도 물질세계의 바깥에 영혼의 자리가 충분히 남아 있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그러나 물질의 세계가 무한한데 영혼의 세계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물질세계의 한계가 없어짐으로써 기독교적인 영혼의 세계는 우주로부터 삭제되었다.이러한 삭제는 서구를 정신적 위기에 빠뜨렸으며,우리는 그 여파 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다. ●제시문(나) 사이버공간은 빅뱅에 견줄 만한 기하급수적인 힘으로 현재 우리 눈앞에서 폭발하고 있다.우주론자들은 우주의 물질 공간이 약 150억 년 전에 무에서 폭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데,사이버공간도 역시 무에서 시작되었다.현재 우리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새로운 영역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다.서로 연결된 전 지구적 컴퓨터 네트워크 공간은 이전과 다른 영역으로 팽창하고 있다.물질공간처럼,이 새로운 사이버공간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면서,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매일 수천 개에 달하는 새로운 노드 혹은 ‘사이트’들이 인터넷과 관련 네트워크에 추가되고 있으며,이러한 새 노드를 통해서 사이버공간의 전체 영역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모든 사이트들은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는 웹의 복잡한 미로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1998년 중반 현재,정기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의 수는 1억 명에 이르고 있다.그리고 다음 10년 동안에는 10억 명에 근접할 것으로 추정된다.이미 3억 페이지가 등록되어 있는 월드와이드웹은 최근 들어 하루에 백만 페이지씩 성장하고 있다.무에서 시작한 지 약 30년 만에 사이버공간은 인간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영토’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매우 중대한 의미에서 새로운 디지털 공간은 물리학이 탐구해온 공간 ‘너머’에 있다.왜냐하면 사이버 세계는 물질의 소립자나 힘이 아니라 비트와 바이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데이터 패킷은 사이버공간의 존재론적 토대이며,전 지구적 현상이 ‘출현하는’ 근원이 된다.사이버공간은 물질의 소립자나 에너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좀더 명확하게 말해서,그것은 한마디로 혁명적인 공간이다.사이버공간은 존재론적으로 물리적 현상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물리학 법칙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그러한 법칙의 한계에 의해 제한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어떤 의미에서 실리콘 칩은 우리를 형이상학적 통로로 이끈다.한 웹사이트에서 다른 웹사이트로 여행하는 나의 ‘운동’은 어떠한 역학 방정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고,내가 활동하는 온라인 공간은 어떠한 물리적 미터법으로도 측정할 수 없다.여기에서 ‘공간’의 개념 자체는 지금까지 거의 이해된 바 없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역설적이게도,사이버공간은 물리학적 과학기술의 부산물이다.실리콘 칩,광섬유,액정화면,원격통신위성,심지어는 인터넷에 동력을 공급하는 전기까지,이 모두가 과학의 부산물이다.하지만 사이버공간이 물리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그것은 순전히 물리주의적인 실재관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소위 ‘과학의 시대’에 우리들은 철저히 물리적인 공간의 개념에 길들여져서,사이버공간을 진정한 ‘공간’으로 받아들이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그러나 내가 사이버공간에 ‘들어갔을 때’,나의 몸은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지만,‘나’는 자체적인 논리와 지형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세계로 송신된다.분명히 그것은 내가 물질세계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종류의 지형이지만,그것이 물질적이지 않다고 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즉,어떤 것이 물질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물질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사이버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다.나는 거기에 있다.우리는 사이버공간을 순전히 물리주의적인 세계상에서 거부당한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을 부분적으로나마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사이버공간은 정신을 위한,특히 상상력을 위한,새로운 영역이 되었다. 1.사오정 고민하다 오늘은 저팔계가 사오정에게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기로 한 날.‘얼른 공부하고 놀아야지.’ 둘은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대입 논술시험이 가까워진 터라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사오정의 답안지를 읽어 내려가던 삼장 선생의 얼굴색이 변했다.“사오정! 너 정신이 딴 데 가 있구나.그러고보니 잔뜩 멋을 부리고 왔구나.무슨 일이냐.” 사오정은 소개팅을 하는 날이라 좀 멋을 부렸다고 했다.“허허! 이 녀석이….” 이어 저팔계의 답안을 받아 본 삼장 선생은 “사오정아,밖에 나가서 저팔계의 답안을 자세히 읽어 보고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라.” 2.저팔계,함께 고민하다 밖으로 나간 둘은 풀이 죽어 있었다.‘빨리 끝내고 가야 하는데….’ 저팔계가 한숨을 쉬었다.“삼장 선생님이 왜 화를 내셨는지 좀 보자.” 둘은 답안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전체 방향이나 내용은 별로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저팔계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아! 알 것 같다.서론 때문에 화가 나셨나 봐.왜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썼니? 본론에서 다룰 내용을 제시했네.” “왜? 할 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어차피 그 얘기를 하려는 거잖아.급한 마음에 할 얘기만 쓰자고 생각하기는 했지만,그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 어차피 서론이나 결론은 형식적인 거잖아.” 사오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이러지 말고 삼장 선생님께 가서 여쭤 보자.” 팔을 잡아끄는 저팔계를 따라 사오정은 삼장 선생에게 갔다. 3.논달선생 삼장 꾸짖다 “그래 뭐가 문제인지를 알아냈느냐?” 사오정과 저팔계는 서론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정확히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제대로 찾기는 했구나.사오정아! 네가 오늘 이렇게 멋을 낸 이유가 뭐지?” “여자친구에게 첫인상을 좋게 보이려고….” “왜 첫인상을 좋게 보이려고 하지?” “그야 첫인상이 좋아야 호감도 생기고,나중에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도 들고….” 사오정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삼장 선생은 갑자기 껄껄 웃으면서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느냐? 사오정아! 네가 오늘 쓴 답안은 첫인상이 나쁜 답안이다.여자 친구에게 좋은 첫인상을 주는 것만큼이나 논술 답안도 첫인상이 중요하다.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논술의 첫인상은 어떻게 결정되나요? 글씨를 잘 써야 하나요?” 다소 엉뚱한 사오정의 물음에 삼장 선생은 껄껄 웃으시면서 “이 녀석이 옷차림에 신경을 쓰더니 외적인 형식만 생각을 하는구나.하긴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글씨도 첫인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하지만 역시 논술 답안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부분은 서론이다.그런데 오늘 너의 서론은 좋은 인상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나쁜 인상을 주고 있으니 없느니만 못하다.서론은 눈에 가장 잘 띄는 답안의 첫 부분에 위치하고 있고 누구나 가장 먼저 읽어보는 부분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참신하고 매력적으로 작성해야 한다.네가 여자 친구에게 호감을 사고 나중에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려는 것처럼,서론도 네가 작성한 본론을 호감을 갖고 읽고 싶게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고 여자친구만 신경 쓰지 말고 네 논술의 첫인상을 좋게 하도록 해라.” 4.삼장 핵심을 찌르다 일반적으로 글의 서두는 독자의 주의를 끌어들이고,그 글의 내용을 예견하게 하며,주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부분이다.특히 논술 답안에 국한시켜서 말하면 서론은 읽는 이의 관심이나 호기심을 논제로 모을 수 있도록 하고 글쓴이의 문제 의식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논술의 서론은 일반적으로 관심 유발,문제 설정,문제 제기의 3부분으로 구성하면 무난하다.서론의 첫 부분에서는 읽는 사람의 관심과 주의를 끌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하고,둘째 부분에서는 앞에 서술한 내용의 요점과 핵심을 추출하여 문제의 범위나 방향을 한정하고,셋째 부분에서는 앞 부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논제나 쟁점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면 무난한 서론 구성이라 할 수 있다.물론 형식적으로 꼭 구분돼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용적으로는 세 가지 면에서 모자란 점이 없는 것이 바람직하다.아래의 예를 보자. 사이버캐릭터,사이버머니,이른바 사이버 공간이 만들어낸 신조어들이다.현대인들은 이러한 공간 속에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과학기술 발달의 절정 속에 컴퓨터가 개발되고 인터넷의 보급 등을 비롯해 새로운 공간으로 사이버 세계가 등장하였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새로운 영토에 집을 짓고 이웃과 교류하며 최대한 이용하게 됨으로써 기하급수적인 성장과 거대한 영토확장을 이루어냈다.그렇다면 사이버공간이 형성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듯 유례없는 빠른 성장을 이루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에 따르는 문제점은 없는지,사이버공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한 때이다. 이 글은 이화여대 논술 모의고사에서 우수 답안으로 예시한 답안의 서론이다.앞 부분에서 사이버 공간이 만들어낸 신조어를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해 사이버 공간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현상을 제시하여 읽는 이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하였고,그 배경이 무엇인지,문제점은 없는지 등에 관한 문제의 설정 및 논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첫 부분의 최근 사이버 공간의 확대 양상이 다른 부분에 비해 길게 서술되고 있고,둘째와 셋째의 문제 설정과 방향 제시가 아우러져 제시되고 있는 경우이다.다소 부족한 면이 있지만 서론이 갖춰야 할 성격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킨 예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좀더 나은 논술 답안이 되려면 위의 것보다도 더욱 매력적이고 참신하면서도 적절한 서론을 작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위의 서론의 경우 첫 부분에서 좀더 흥미로우면서도 참신한 내용으로 작성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이버 세계나 사이버 공간이라고 하면 인터넷만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와는 다소 다른 관점인 사이버머니,사이버캐릭터 등을 제시한 것이 참신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문제의 설정 및 논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사이버 공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한 때이다.’와 같은 서술에서 볼 수 있듯이 논지가 모호하게 제시되고 있는 부분도 서론의 적절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서론 작성시 특히 유의해야 할 사항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느낌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서론이 ‘관심 유발-문제 한정-문제 제기’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다 보니 수험생들은 이런 이론적인 내용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문제를 보고 금방 떠올리게 되는 내용들은 남들도 다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답변을 작성한다면 내용이 남들과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따라서 예화나 속담 하나를 들더라도 남들이 잘 생각해 내지 못하는 참신한 예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저기에 서론을 쓰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데,중요한 것은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 서론 작성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든지 결과적으로 앞서 얘기했던 서론이 담당해야 할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충분한 것인가 하는 점이 관건임을 명심하도록 하려무나.알겠느냐? 5.사오정 깨닫다 “말씀을 듣고 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서론이 본론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제가 크게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장 선생은 “사오정이 오늘 잔뜩 멋을 부리고 왔으니 좋은 첫인상을 줄 수 있을 거야.그렇다고 논술 답안의 첫인상이 지닌 중요성을 잊어먹으면 안 된다.” 다음주에는 ‘뚝배기보다 장맛이다.’라는 주제로 강의가 이어집니다.논술과 심층면접 지상강의 내용에 대해 이해가 안 되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http:///cafe.daum.net/seoulinseoul로 문의하면 선생님들의 조언과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 남북 해군함정 14일 ‘충돌방지’ 시험교신

    남북 해군 함정이 14일 오전 9시부터 2시간 가량 서해 북방한계선(NLL) 해상에서 국제 공용주파수를 이용해 시험교신을 실시한다. 지난 10∼12일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개최한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실무대표접촉 합의에 따른 것이다. 남북한 함정이 직접 교신을 하는 것은 분단 후 처음으로,향후 서해 NLL 부근에서의 군사적 긴장완화에 큰 도움을 줄 전망이다. 남북은 이번 실무대표접촉에서 NLL과 군사분계선(MDL) 일대에서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주 내용으로 하는 ‘6·4 합의서’의 구체적인 이행을 위한 부속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에 따르면 서해상의 우발적인 충돌 방지를 위해 양측 경비함정에 국제상선공통망을 운용하고 무선통신 주파수를 통일시키며,쌍방간 호출 부호는 남측 ‘한라산’,북측 ‘백두산’으로 각각 결정했다.공통망 사용이 어려운 상태에서 기관 고장이나 조난 등으로 양측 함정이 접근할 경우 깃발·발광신호를 보조 통신수단으로 활용키로 했다. 불업조업 선박에 대한 정보를 서해지구 통신선로를 이용해 매일 오전 9시와 오후 4시 등 2차례 교환하고 이달 중 통신선로 및 통신연락소 설치·운영 방안에 대해서도 추가 협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군사분계선상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를 위해 15일 0시부터 군사분계선에서 방송과 게시물,전광판,전단 등을 통한 선전활동과 풍선,기구를 이용한 각종 물품 살포를 중지키로 했다.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상대측을 향한 체제 선전 및 비방,중상,선동을 위한 확성기와 돌글씨,입간판,전광판,전단,선전그림,선전구호 등 모든 선전수단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도록 8월15일까지 모두 제거키로 합의했다. 대형 불상과 크리스마스 트리 등 종교시설물도 후방으로 옮겨진다. 양측은 선전물의 단계별 제거 완료 7일 이전에 대상 목록을 교환하고 이를 근거로 제거 결과를 확인한 뒤 언론에 발표토록 하는 등 검증 절차도 마련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꼬불 꼬불 뒷골목] 광주 금남로 예술의거리

    경기침체로 화랑가들이 된서리를 맞으면서 예술의 거리를 찾는 발걸음도 뚝 끊어졌다.요즘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는 화랑 주인들의 푸념이 허튼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부르는 게 그림값,눈먼 돈을 마구 챙길 때가 있었다.개발독재가 서슬퍼렇던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말,5월 광주의 상징인 금남로 뒤편 화랑골목에는 돈이 넘쳐났다. 지난 87년 예술의 거리로 지정된 광주시 동구 궁동 동부경찰서 앞에서 중앙로를 잇는 300여m.남도의 멋과 끼가 배어 있어 ‘예향’ 광주를 찾은 이방인들이 꼭 들러가는 곳이다.표구점과 화랑,갤러리(전시관),화방과 필방(서양화와 수묵화 재료상),골동품 공예품점,미술 서점,전통찻집,소극장 등 53개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토요일이면 차 없는 거리가 되고 개미장터가 열린다.고서예품·엽전·떡살·비녀·놋그릇·민화·향로·연적·목각품 속에는 쓸 만한 물건도 있다.야외 전시대에는 학생들의 창작품이 선보이고 매달 한차례는 음악회,빛의 축제 등으로 열기가 더해진다. 예술의 거리는 원래 50∼60년대에 막걸리 골목이었다.이후 여고생들의 수예표구가 유행하면서 광주여고,전남여고,조대부여고 등 이들 학교의 중간지점인 지금의 장소로 표구점들이 모여들면서 화랑가로 변모했다. 이후 70년대 후반 80년대 말까지 호황기를 구가하다 90년대 들어 극심한 불황에 빠져 있다.자유당 때는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직접 내다팔아 호구지책으로 삼았다.한 화랑주인은 “당시 힘이 세던 검사 명함 뒤편에다 ‘잘 부탁한다.’는 검사 사인을 받아서 기관에 들러 그림을 팔았다.”고 말했다. 그림값은 경기침체와 정비례한다.이 골목이 내리막길로 들어선 것은 95년 민선단체장 시대부터.또 문민정부 때 공직자 선물 안주고 안받기로 대못이 질러졌다.그림값을 결정하던 진급용이나 선물용 구입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주 고객은 90%가 건설업자들이나 이들이 그림 대신 현찰 박치기로 관행을 바꾸었다.송림화랑 양원호(52)씨는 “80년대 후반 소나무 몇개만 그려놔도 없어서 못 팔 때가 있었다.”고 호시절을 회고했다. 또 그림값은 권력자들의 눈치를 본다.붓글씨를 잘 썼던 박정희와 JP,5공의 실세인 전경환은 의제 허백련 그림을 선호했다.전씨가 광주에 뜨면 광주 화랑가에 그림이 동났다고 한다.DJ는 남농 허건의 조부인 소치 허유의 산수화를 좋아했다. 이 골목에서 남종화(시·서·화를 겸함)의 일맥인 남농 허건의 그림은 전지 크기(40호·1호는 엽서크기) 산수화가 7년 전 10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떨어졌다.표구값은 30년 전보다 2만원 오른 12만원.30∼40년 된 중견화가들의 산수화는 같은 크기에 80만∼100만원이다.이마저 팔리지 않아 “입에 풀칠하려면 공사판이라도 나가야 할 상황”이라고 화가들이 말한다.반면 의제의 그림은 희귀성으로 수요가 높아 전지 1장에 3000만∼4000만원을 호가한다. 70년대 그림 전시회는 다방.Y다방,희다방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큰’ 낭만도 있었다.제자 전시회에 스승이나 선·후배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찬조 출품했다.전시자의 그림을 사면 수백배 비싼 유명인사의 찬조작품을 추첨해 덤으로 나눠줬다. 예술의 거리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터줏대감이 있다.한국화와 고미술품 감정가인 박당화랑 박환승(66)씨.정확히 50년에 이쪽에 뛰어들었으니 올해로 만 54년째다.의제와 남농의 어깨너머로 눈썰미를 익혔다.그는 “가짜에도 솜씨에 따라 등급이 있다.요즘에는 인쇄술 발달로 정교하게 인쇄된 가짜가 많지만 돋보기로 보면 인쇄지는 그물망이 나온다.”고 웃었다.가짜는 현금과 맞교환이 가능한 유명인사의 것이 많다고 했다. 가짜중에는 남농의 것이 많다.범인은 대개 제자들로 드러났다.수요자들이 작품 내용보다는 유명화가의 그림만을 선호하기 때문에 가짜 시비가 줄지 않는다.설경(雪景) 작가로 일본인 고객들이 많은 영창필방화랑 안재홍(56) 화백은 “손님들이 표구해 달라고 가져온 유명한 작품 중에 가짜도 있었다.하지만 그림을 판 상대가 있기 때문에 절대 가짜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나이 든 화가들은 가짜와 뒤섞인 자신의 작품도 분간해 내지 못해 가짜를 양산하는 빌미를 주기도 한다.한때 다방이나 여관 등에 내걸렸던 그림은 무명화가들이 판화찍듯이 개수치기로 그린 것들이다.건달들이 유명화가들을 여관방에 가둬두고 억지로 그림을 그리게 한 뒤 이를 강매해 활동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오늘의 눈] 노르망디의 적과 동지들/함혜리 파리 특파원

    6일(현지시간) 노르망디 해변 아로망슈에서 거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은 자유와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보기 드문 행사였다. 프랑스는 이국땅에서 값진 희생을 치른 병사들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한편 이들의 희생 덕분에 되찾은 자유의 소중함을 한껏 부각시켰다.과거 적과 동지였던 16개국 지도자 20여명이 전쟁과 피로 얼룩진 역사를 뒤로 한 채 한 자리에 모인 것 자체가 명실상부한 화해의 상징이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오늘날 위험에 직면한 세계는 1944년 6월6일 자유를 위해 목숨바쳐 싸운 전사들의 뜻을 너무 쉽게 잊고 있다.”며 “인류애의 발로에서 상륙작전에 참가했던 이들의 유산과 희생에 충실하자.”고 촉구했다.그는 패전국 독일과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전후 화해에 대해 “유럽은 새 역사의 장을 펼쳤다.”며 “과거의 적과 동지들이 함께 공동의 현재를 만들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식에 초대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국가로서 역사적 책임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유럽은 역사를 통해 값진 교훈을 얻었으며 독일인은 이를 잊지 않고 있다.”며 “유럽 시민과 각국 정상은 유럽과 다른 국가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기념행사는 전쟁의 참혹함과 병사들의 희생,되찾은 자유와 평화를 상징적으로 증언,전쟁의 참혹함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잊지 말고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스펙터클 ‘D-데이’로 마무리됐다.같은 시각 노르망디 해변에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만든 인간띠 글씨 ‘자유’,‘노르망디’,그리고 감사하다는 뜻의 ‘메르시(MERCI)’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함혜리 파리 특파원 lotus@seoul.co.kr˝
  • 노대통령 글씨 501만원 낙찰, 박정희대통령 휘호는 2100만원

    지난 4일 인터넷 경매에 나왔던 노무현 대통령과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가 나란히 고가에 팔렸다. 6일 인터넷경매 사이트 옥션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친필 휘호 ‘사람 사는 세상’이 5일 마감된 경매에서 시작가보다 1만원 높은 501만원에 낙찰됐다.이 휘호는 노 대통령이 89년 국회의원때 경기도 남양주시의 한 음식점을 방문해 즉석에서 쓴 것이다. 고 박 대통령의 친필 휘호도 경매 시작가에 100만원이 더해진 2100만원에 팔렸다.79년 고 박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을 위해 ‘총화유신민족중흥(總和維新 民族中興)’이라고 써준 휘호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휘호는 본인의 글씨가 아닌 것으로 밝혀져 경매가 중단됐다. 그러나 옥션측은 인터넷 경매의 특성상 낙찰받은 사람이 물건을 사지 않는 경우가 있고,또 두 친필 모두 입찰자가 각각 2명에 그쳐 실제 구매로 이어질지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대통령 글씨 인터넷 경매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한 전·현직 대통령들의 친필 글씨가 인터넷 경매업체 옥션에 매물로 나왔다. 노 대통령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 쓴 글씨는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채식(53)씨가 내놓은 것이다.노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1989년 6월 이씨의 식당에 식사를 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즉석에서 쓴 글씨다. 판매자 이씨는 “노 대통령이 당시 청문회 스타로 인기가 많아 기념이 될 만한 친필을 부탁했다.”면서 “처음에는 붓글씨에 재주가 없다며 거절하였으나 붓과 벼루를 가져와 계속 부탁하자 글씨를 썼다.”고 밝혔다. 이씨는 경매 시작가를 50만원으로 책정했으며,5000만원이면 즉시 살 수 있다.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총화유신 민족중흥(總和維新 民族中興)’이라고 쓴 글씨도 2000만원에 매물로 나왔다.대통령 박정희라는 낙관 옆에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을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대구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김형철(40)씨가 내놨으며 당시 대통령을 선출하는 국민회의 대의원이었던 김씨의 아버지가 청와대 축하 만찬에 참석,박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김씨는 “아버지 생전에 비싼 값에 사려는 사람이 많았으나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판매를 거부했다.”면서 “이제는 작품의 가치를 알고,박 대통령을 존경하는 사람에게 제품을 넘기고 싶다.”고 말했다. 10대 대통령이었던 최규하 대통령이 직접 ‘사도청정(師道淸正)’이라고 쓴 글씨도 매물로 나와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조광조를 동방사현이라고 불렀던 이율곡은 평생 조광조를 존경하여 자신이 세운 은병정사내의 주자사(朱子祠)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았을 정도였다.그는 또한 조광조의 묘지명을 직접 썼으며 그 묘지명에서 이율곡은 ‘저 울창한 용인땅 산 서리고,물굽이 긴대,빛나는 그 덕업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는 감탄사로 조광조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선조 원년에는 당시 백인걸을 비롯하여 태학생 홍인헌 등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부제학이던 박대립은 관작을 증수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주장하자,선조는 경연에서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에 관해 물었다.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는 성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동시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다하였습니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남곤·심정 등을 모함하고 구신들을 물리치려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조광조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인 이퇴계가 내린 조광조에 대한 평가야말로 단연 최고봉일 것이다.이퇴계는 자신이 직접 조광조의 행장기(行狀記)를 썼으며,이 행장기에서도 이퇴계는 조광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뜻이 너무 속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잘못됨을 면치 못하여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조급하게 굴어서 장황하고 과격하며 또는 나아가 젊고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유행에 뜻이 맞아 함부로 날뛰는 자가 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고,늙은 신하들이 새 시의(時議)에 배척당하여 이에 따라 공박(攻駁)을 당한 자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퇴계는 자신이 조광조의 행장기를 짓는 이유를 ‘황(滉)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선생의 문하에 공경히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 적지 않게 많은데,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가 또 행장마저 짓지 않으면 더 어찌 정(情)이 지극하니 일(事)이 따른다고 하겠는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조광조에게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조광조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원래는 깊은 심산유곡이었는데 산기슭까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고 중턱으로는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묘역은 야산으로 변해있었다. 묘역으로 들어간 산자락에는 소나무와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그 나뭇가지에도 용인 땅의 수원편입을 결사반대한다는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언덕으로 오르는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漢陽趙公靜菴趙光祖先生墓域” 그 표석을 보자 나는 마침내 조광조의 무덤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던가. “이승은 짧다.무덤은 기다린다.무덤은 배고프다.” 배고픈 무덤.보들레르의 절창처럼 누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조광조의 무덤.옛말에 무덤을 ‘백골청태(白骨靑苔)’라 하였다.죽은 후 500년이 흘렀으므로 이미 흰 뼈와 푸른 이끼로만 남아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지러운 난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기다리는 조광조의 무덤을 마침내 오늘 내가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조광조를 동방사현이라고 불렀던 이율곡은 평생 조광조를 존경하여 자신이 세운 은병정사내의 주자사(朱子祠)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았을 정도였다.그는 또한 조광조의 묘지명을 직접 썼으며 그 묘지명에서 이율곡은 ‘저 울창한 용인땅 산 서리고,물굽이 긴대,빛나는 그 덕업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는 감탄사로 조광조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선조 원년에는 당시 백인걸을 비롯하여 태학생 홍인헌 등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부제학이던 박대립은 관작을 증수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주장하자,선조는 경연에서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에 관해 물었다.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는 성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동시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다하였습니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남곤·심정 등을 모함하고 구신들을 물리치려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조광조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인 이퇴계가 내린 조광조에 대한 평가야말로 단연 최고봉일 것이다.이퇴계는 자신이 직접 조광조의 행장기(行狀記)를 썼으며,이 행장기에서도 이퇴계는 조광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뜻이 너무 속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잘못됨을 면치 못하여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조급하게 굴어서 장황하고 과격하며 또는 나아가 젊고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유행에 뜻이 맞아 함부로 날뛰는 자가 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고,늙은 신하들이 새 시의(時議)에 배척당하여 이에 따라 공박(攻駁)을 당한 자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퇴계는 자신이 조광조의 행장기를 짓는 이유를 ‘황(滉)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선생의 문하에 공경히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 적지 않게 많은데,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가 또 행장마저 짓지 않으면 더 어찌 정(情)이 지극하니 일(事)이 따른다고 하겠는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조광조에게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조광조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원래는 깊은 심산유곡이었는데 산기슭까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고 중턱으로는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묘역은 야산으로 변해있었다. 묘역으로 들어간 산자락에는 소나무와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그 나뭇가지에도 용인 땅의 수원편입을 결사반대한다는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언덕으로 오르는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漢陽趙公靜菴趙光祖先生墓域” 그 표석을 보자 나는 마침내 조광조의 무덤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던가. “이승은 짧다.무덤은 기다린다.무덤은 배고프다.” 배고픈 무덤.보들레르의 절창처럼 누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조광조의 무덤.옛말에 무덤을 ‘백골청태(白骨靑苔)’라 하였다.죽은 후 500년이 흘렀으므로 이미 흰 뼈와 푸른 이끼로만 남아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지러운 난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기다리는 조광조의 무덤을 마침내 오늘 내가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 儒林(10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채마밭을 지나자 다시 옛길이 나타났다.간신히 차 두세대가 엇갈려 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도로였다.도로 옆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한옥들이 자리잡고 있었고,허름한 상점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작업 차에서 풍기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나는 상점에 들러서 말린 건어물과 소주 한 병을 사들었다.지난 겨울 능주로 갔을 때 향을 피운 분향만을 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점 주인에게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위치를 묻자 그는 턱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언덕길을 내려가시면 큰 도로 입구 변에 있을 것입니다.잠깐이면 됩니다.” 비닐봉지에 물건을 싸들고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거리 곳곳에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도로뿐만 아니라 야산의 나뭇가지 위에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이곳의 땅이 수원으로 편입되는 것을 반대한다는,페인트로 조잡하게 쓰여진 글씨였다.한결같이 붉은 페인트였으므로 얼핏 보면 붉은 피로 쓰여진 혈서처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가벼운 마음이었으나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무거웠다.그것은 조광조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 때문이었다.나는 지난 6개월 이상 조광조에 대한 추적을 계속해 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조광조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 과연 그는 누구인가. 영웅인가,역적인가.아는 자인가,모르는 자인가.‘하늘의 도’와 ‘제왕의 법’을 알았던 성현인가,나라를 어지럽힌 괴수인가.지식인인가,지성인인가.도덕주의자인가,위선자인가.개혁적인 정치가인가,과격한 극단주의자인가.현실적인 인물이었던가,이상적인 몽상가였던가.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인가,아니면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인가. 그 순간 나는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태사혜의 신발을 마지막으로 선물하였던 갖바치의 참위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조광조는 여전히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가죽신을 신고 있는 것이다.500년이 흐른 세월 뒤에도 그는 여전히 짝짝이의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조광조는 검은 사람인가,아니면 흰 사람인가. 오늘날 우리들 중 자신이 검은 신을 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광조 역시 검은 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다.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광조 역시 진보주의자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조광조를 과격한 극단주의자로 폄하하고 있을 것이다.이렇듯 자신의 이념이나 이기주의에 의해서 조광조는 아직도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한 밤의 숙청극은 계속되고 있다.아직도 권력의 신무문에서는 쿠데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끊임없이 정적에게 사약이 내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은 권력을 장악하려는 추악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그 어디에도 백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으로 몽골제국의 초기 공신이었던 야율초재(耶律楚材)가 떠올랐다.역사상 가장 강력하였던 몽골제국의 세조 쿠빌라이의 뛰어난 정치고문이었던 야율초재는 때문에 인류사상 최고의 정치가로 손꼽히고 있다.그는 요나라의 왕족 출신으로 대대로 금나라를 섬겼으나,몽고군이 요나라를 점령하자 칭기즈칸에게 항복한 인물로,군정과 민정을 분리하여 군관이 민중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세제를 정비하여 제국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였던 대정치가였던 것이다.˝
  • 남북합작 ‘온라인 쇼핑몰’ 개장

    북한이 처음으로 상품 포장과 공급,판매,사후관리 등 쇼핑몰 운영의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북한상품 전문 온라인 쇼핑몰이 생겼다. 남북교역 사업을 인터넷으로 추진하는 북남교역주식회사(대표 현성주)는 최근 ‘북한상품 인터넷 쇼핑사이트’(www.nkmall.com)를 공식 개장했다.현재 nk몰에서 파는 상품은 송홧가루 등 북한의 일반적인 농림수산물에서 차,음료,주류,건강식품,예술공예품,토산품에 이르기까지 100여점에 달한다. 상품은 북한의 ‘조선민족경제협력련합회’와 ‘개선무역총회사’,‘광명성총회사’,‘삼천리무역총회사’에서 제공한다.상품들은 포장부터 우리의 관련법 규격에 맞춰 제작,북한 남포항에서 인천항으로 직접 수송된다. 현성주 대표는 “소비자 판매가 등 쇼핑몰 운영의 전과정을 북한측과 인터넷으로 협의해 결정한다.”면서 “북한측이 가격의 투명성과 상품 신뢰도를 전적으로 보장하고 나서 판매가가 현재 시판되는 북한상품 사이트의 10∼30% 정도 싸졌다.”고 밝혔다.북한측은 또 직접 우리 소비자들의 호응도까지 인터넷으로 점검,품질의 사후관리에도 나설 계획이다. 북남교역의 박영복 기획이사는 “북과 남이 힘을 합쳐 일하는 좋은 전례를 만들겠다.”면서 “쇼핑몰 상품의 표기만 봐도,우리는 북한이 개발한 글씨체인 ‘갈필체’를 그대로 수용했고,북측은 우리측의 상품표기 표현을 그대로 받아주었다.”고 말했다.현 대표는 “무상으로 북한을 지원하는 것도 좋지만 북한이 스스로 자본주의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 ‘고기잡는 법’을 익힐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양자 모두 이익이 되는 남북교류방식”이라고 개장 의의를 설명했다. 유영규기자 whoami@˝
  • 儒林(10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채마밭을 지나자 다시 옛길이 나타났다.간신히 차 두세대가 엇갈려 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도로였다.도로 옆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한옥들이 자리잡고 있었고,허름한 상점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작업 차에서 풍기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나는 상점에 들러서 말린 건어물과 소주 한 병을 사들었다.지난 겨울 능주로 갔을 때 향을 피운 분향만을 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점 주인에게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위치를 묻자 그는 턱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언덕길을 내려가시면 큰 도로 입구 변에 있을 것입니다.잠깐이면 됩니다.” 비닐봉지에 물건을 싸들고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거리 곳곳에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도로뿐만 아니라 야산의 나뭇가지 위에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이곳의 땅이 수원으로 편입되는 것을 반대한다는,페인트로 조잡하게 쓰여진 글씨였다.한결같이 붉은 페인트였으므로 얼핏 보면 붉은 피로 쓰여진 혈서처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가벼운 마음이었으나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무거웠다.그것은 조광조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 때문이었다.나는 지난 6개월 이상 조광조에 대한 추적을 계속해 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조광조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 과연 그는 누구인가. 영웅인가,역적인가.아는 자인가,모르는 자인가.‘하늘의 도’와 ‘제왕의 법’을 알았던 성현인가,나라를 어지럽힌 괴수인가.지식인인가,지성인인가.도덕주의자인가,위선자인가.개혁적인 정치가인가,과격한 극단주의자인가.현실적인 인물이었던가,이상적인 몽상가였던가.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인가,아니면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인가. 그 순간 나는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태사혜의 신발을 마지막으로 선물하였던 갖바치의 참위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조광조는 여전히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가죽신을 신고 있는 것이다.500년이 흐른 세월 뒤에도 그는 여전히 짝짝이의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조광조는 검은 사람인가,아니면 흰 사람인가. 오늘날 우리들 중 자신이 검은 신을 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광조 역시 검은 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다.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광조 역시 진보주의자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며,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조광조를 과격한 극단주의자로 폄하하고 있을 것이다.이렇듯 자신의 이념이나 이기주의에 의해서 조광조는 아직도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전히 한 밤의 숙청극은 계속되고 있다.아직도 권력의 신무문에서는 쿠데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끊임없이 정적에게 사약이 내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은 권력을 장악하려는 추악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그 어디에도 백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으로 몽골제국의 초기 공신이었던 야율초재(耶律楚材)가 떠올랐다.역사상 가장 강력하였던 몽골제국의 세조 쿠빌라이의 뛰어난 정치고문이었던 야율초재는 때문에 인류사상 최고의 정치가로 손꼽히고 있다.그는 요나라의 왕족 출신으로 대대로 금나라를 섬겼으나,몽고군이 요나라를 점령하자 칭기즈칸에게 항복한 인물로,군정과 민정을 분리하여 군관이 민중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세제를 정비하여 제국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하였던 대정치가였던 것이다.
  • [그곳에 가고싶다]山 올랐더니 城을 돌았네

    산성산(山城山·603m)은 이름 그대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산이라기보다는 옛 성터로 보는 게 좋을 듯하다.삼국시대부터 축성돼 온 금성산성(金城山城)이 사면을 두르고 있어 ‘산성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외지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곳은 전남 담양벌판 북쪽에서 전북 순창군 팔덕면에 걸쳐 항아리형 분지를 이루고 있다.동쪽으로는 지리산,서쪽으론 추월산이 마주 서 있다.남으로는 무등산이 건너다 보이고 북으론 ‘소금강’이라 불리는 강천산·회문산 등과 맞닿아 있다. 산성산은 여러 봉우리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1894년 동학군이 이곳을 지키는 관군과 혈전을 벌이기도 했으며,6·25때는 빨치산들의 주요 거점지였다. 담양군 금성면 원율리 진입로에서 차량으로 잠시 가다보면 주차장이 나온다.차를 세우고 조금 가파른 소로를 따라 정상으로 향한다.순창의 강천사쪽에서 오르는 길을 제외하면 이곳이 외길이다.짙푸른 녹음과 찔레향이 코끝을 찌른다.등산로 주변엔 제철을 맞은 산딸기들이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새소리도 청량제처럼 시원하다. 2㎞쯤 올라가면 10여m 높이의 석축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외남문(보국문·輔國門)이 우뚝 솟아있다.오른쪽으로는 이천골이 깊게 패어있다.정유재란때 성을 방어하다가 죽은 시체가 2000구에 이르러,이들을 남문 아래 협곡에 옮겨 태웠다.그래서 이 계곡을 이천골이라 하는데 골짜기 ‘골’이 아니라 뼈 ‘골(骨)’자를 쓴다고 한다. 외남문에서 왼쪽으론 담양호가 한눈에 들어온다.드넓은 호수 뒤로는 추월산·병풍산이 병풍처럼 이어져 담양골을 감싸 안는다.외남문에서 50m쯤 더 올라가면 내남문(충용문·忠勇門)이 나타난다.문루에 올라 잠시 땀을 훔치고 내려다보면 발아래 절경이 펼쳐진다. 이곳부터 좌우로 깍아내린 듯한 직벽 능선을 따라 돌을 쌓아 만든 성(城)이 이어진다.어떻게 이토록 가파른 경사면에 초석을 깔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을 쌓았을까.성의 웅장함에 대한 경이로움에 앞서 민초들의 수고로움에 절로 숙연해진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있었고,고려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고려사 절요 기록).성은 시루봉(504.3m)을 정점으로 남문∼노적봉∼철마봉∼서문과,동문∼운대봉(603m,이 산의 최고봉)∼북문∼서문으로 연결된다.정상 일대 분지를 감싸는 포곡형 산성이다.이 구간의 전체 길이는 7345m로,어른 걸음으로 두시간쯤이면 족하다.이들 봉우리 사이사이엔 망루와 화포를 설치한 흔적들도 보인다. 가장 쉬운 등산코스는 남문∼보국사터∼서문∼철마봉∼남문에 이르는 구간.남문에서 100m 남짓 걸으면 왼쪽으론 보국사터,오른쪽으론 동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뉜다. 성곽 안 분지는 30여만평 규모로 곳곳에 민가터와 관아터,화약·식량 보관소,절터 등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남문에서 계곡을 따라 1㎞쯤 걸어 내려갔다.보국사터란 안내표지판과 함께 허름한 토담집이 보인다.토담집 방문 앞에 ‘휴당산방(休堂山房)’이란 나무 간판이 걸려 있다.문을 두드렸으나 인기척이 없다.그대신 흙담 벽면에 자필로 쓴 시(詩)가 눈에 들어온다.‘금성산이 어디메뇨’란 시엔 이곳 산성의 위치와 역사를 가늠케 하는 내용의 문구들이 깨알만한 글씨로 씌어 있다.저자는 ‘도림(道林)’.어느 기인(奇人)이 자연과 더불어 도를 닦으며 살고 있을 거라는 추측을 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민가터인지 다른 용도의 건물터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물길이 제법 세찬 계곡 옆엔 평지와 대나무 숲,뽕나무 등 심산유곡에선 보기 힘든 생활용 나무들이 보였다.바윗돌을 파내 절구통으로 사용했을 법한 물건도 간간이 눈에 띈다. 원시림이 빼곡한 계곡을 따라 담양호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서문이 우뚝 솟아 있다.적이 침투하기 쉬운 서문(계곡)은 옹성으로 축성됐으며,평석으로 쌓은 옹성중에는 유일하게 남은 유적이기도 하다. 서문에서 왼쪽 사면을 가파르게 가로질러 철마봉∼노적봉에 이르면 막혔던 숨이 탁 트인다.성벽 돌담길을 따라 남문까지 되돌아오는 데는 쉬엄쉬엄 가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이 코스는 아이들이나 노약자를 동반해도 무리는 없다.남문∼동문∼북문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가파르고 험준한 구간이 많다.동문쪽에서 강천사로 내려가는 코스는 곳곳이 암벽이어서 피하는 게 좋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볼거리·먹을거리 죽향(竹鄕)담양은 대나무를 테마로 한 음식과 생활용품들이 즐비하다.또 광주호(담양군 남면) 일대 가사문화권을 놓치면 안 된다.담양읍에서 광주쪽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타고가다가 망월동(광주5·18묘지 인근) 3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광주호 쪽으로 올라가면 한국가사문학관이 나온다.읍내에서 이곳까지는 승용차로 20분 소요.문학관 주변엔 소쇄원,환벽당,식영정,송강정 등 조선조 가사문학 유적지가 산재한다.읍내에는 한국대나무 박물관(061-380-3223∼4)이 있으며,이곳에서 각종 대나무 용품을 구입할 수 있다. 먹을거리는 대통밥과 대통 토종닭찜,죽순 나물 등으로 유명한 죽림원(061-383-1292,월산면) 귀빈관(061-383-5800,읍내) 등을 찾으면 된다.현미·찹쌀·검은콩·수수·밤·대추·버섯 등 12가지 잡곡 등을 대통에 넣어 쪄 내는 밥으로 1인분 8000원,자연부화한 토종닭 대통찜 3만 5000원. 등산로 바로 입구에 최근 개장한 담양온천과 그에 딸린 관광호텔(061-380-5000)이 있다.주변에 민박집은 거의 없어 읍내 숙박시설을 이용해야 한다. ●가는길 수도권에서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를 막 지나 88고속도로로 진입,담양읍으로 들어오면 된다.읍내에서는 메타세쿼이어 가로수가 전북 순창까지 이어지는 24번 국도를 따라 금성면 원율리 삼거리까지 간다.이곳에서 담양호쪽으로 난 101번 지방도를 따라 2㎞쯤 가다 보면 담양온천 앞에 금성산성 안내판이 보인다.여기서 오른쪽으로 2.5㎞쯤 오르면 등산로와 이어지는 작은 주차장이 나온다.˝
  • 儒林(100)-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씁쓸한 느낌이었다.원래 심곡서원에는 치사재(治事齋)란 건물이 있어 원생들이 기거하며 공부를 하였다. 서원은 원래 지방 사림세력의 구심점이며,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던 중요한 거점이었다.따라서 서원은 학문 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해서 사림에 의해 건립된 사설 교육기관임인 동시에 향촌의 자치 운영기구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원은 성리학 보급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조선조 최고의 학당이었으며,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그런데 원생들은 사라지고 장서각에 보존되었던 귀중한 교재들은 도난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나는 강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원생들이 모여서 화합과 학문에 정진하던 강당 안에는 문화재급에 해당하는 중요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특히 송시열이 쓴 ‘심곡서원강당기(深谷書院講堂記)’와 숙종대왕이 조광조의 문집이 간행됨을 축하하며 쓴 ‘어제(御製)’의 두 현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송시열은 평생 조광조를 흠모한 성리학자로 직접 능주에 있는 ‘적려유허비문’을 썼을 뿐 아니라 1637년 10월에는 심곡서원을 방문하고 그 기문을 목판에 새겨 강당 천장에 내걸었다. 과연 송시열의 강당기는 빼곡히 채운 문장으로 천장에 걸려 있었다.그보다 내 눈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숙종대왕이 직접 지은 어제였다. 민진원(閔鎭遠)은 왕비였던 인현왕후의 동생으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문신이었는데 숙종이 죽은 후 ‘임금은 돌아가셨으나 신하인 자신은 아직도 살아 있다.’하여서 미사신(未死臣)이란 겸사(謙辭)로써 자신을 칭하고 몸소 숙종의 뜻을 받들어 어제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민진원은 우선 정암집을 읽고 난 후 감탄한 숙종이 직접 쓴 시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났었는데, 지금 선생의 글을 읽어 보니 더욱더 도덕이 밝았음을 알겠도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공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랐고,시골의 노파들도 존경하였다네. 부수적으로 예(藝)에 노닐며 굳센 필세(筆勢) 또한 아름답도다.” 숙종의 어제에 나오는 ‘시골의 노파들도 역시 존경하였다네(野亦尊敬)’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연보에 의하면 조광조에게 사명이 내리자 아우 숭조(崇祖)가 분망히 길을 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산 가운데로부터 슬피 울며 나오면서 묻기를 “무슨 일로 곡을 합니까.”하였다.숭조가 대답하기를 “저는 형이 죽었기 때문에 곡을 합니다만 할머니는 어째서 곡을 합니까?”하니,할머니는 대답하였다.“나라에서 조광조를 죽였다고 하니,어진 사람이 죽으면 백성들은 도대체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하였다고 전하고 있고,강령현(康翎縣),지금의 인천시 옹진군에서는 한 농부가 마침 닥친 가뭄의 원인을 두고 조광조를 죽인 탓이라 했다가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까지 전하고 있다.민진원은 숙종의 어제를 간행한 뒤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히고 있다. “숙종 어제가 간행된 뒤에는 제생들이 비로소 이를 볼 수 있었다.감모의 정성을 감당치 못하여 장차 서원의 벽에 걸어서 영구히 교훈을 남기고자 하여 나에게 부탁하여 베껴 쓰게 하였다.내 삼가 완미하고 엄숙히 읽어 보니 우리 성고(聖考:숙종)께서 유학을 높이고 도를 귀중히 여기셨으며,세상에 드문 상감(相感)의 지극한 뜻을 엿볼 수 있었다.한번 읊조리고 세 번 탄식하며 감동하여 눈물이 절로 솟아나왔다.삼가 엎드려 절하여 눈물을 씻고 이를 쓴다.” 나는 ‘서원의 벽에 걸어서 영구히 교훈을 남기고자 썼다.’는 민진원의 현판을 강당 천장에서 찾아내 이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 儒林(10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씁쓸한 느낌이었다.원래 심곡서원에는 치사재(治事齋)란 건물이 있어 원생들이 기거하며 공부를 하였다. 서원은 원래 지방 사림세력의 구심점이며,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던 중요한 거점이었다.따라서 서원은 학문 연구와 선현제향을 위해서 사림에 의해 건립된 사설 교육기관임인 동시에 향촌의 자치 운영기구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원은 성리학 보급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조선조 최고의 학당이었으며,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그런데 원생들은 사라지고 장서각에 보존되었던 귀중한 교재들은 도난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나는 강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원생들이 모여서 화합과 학문에 정진하던 강당 안에는 문화재급에 해당하는 중요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특히 송시열이 쓴 ‘심곡서원강당기(深谷書院講堂記)’와 숙종대왕이 조광조의 문집이 간행됨을 축하하며 쓴 ‘어제(御製)’의 두 현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송시열은 평생 조광조를 흠모한 성리학자로 직접 능주에 있는 ‘적려유허비문’을 썼을 뿐 아니라 1637년 10월에는 심곡서원을 방문하고 그 기문을 목판에 새겨 강당 천장에 내걸었다. 과연 송시열의 강당기는 빼곡히 채운 문장으로 천장에 걸려 있었다.그보다 내 눈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숙종대왕이 직접 지은 어제였다. 민진원(閔鎭遠)은 왕비였던 인현왕후의 동생으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문신이었는데 숙종이 죽은 후 ‘임금은 돌아가셨으나 신하인 자신은 아직도 살아 있다.’하여서 미사신(未死臣)이란 겸사(謙辭)로써 자신을 칭하고 몸소 숙종의 뜻을 받들어 어제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민진원은 우선 정암집을 읽고 난 후 감탄한 숙종이 직접 쓴 시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났었는데, 지금 선생의 글을 읽어 보니 더욱더 도덕이 밝았음을 알겠도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공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랐고,시골의 노파들도 존경하였다네. 부수적으로 예(藝)에 노닐며 굳센 필세(筆勢) 또한 아름답도다.” 숙종의 어제에 나오는 ‘시골의 노파들도 역시 존경하였다네(野亦尊敬)’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연보에 의하면 조광조에게 사명이 내리자 아우 숭조(崇祖)가 분망히 길을 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산 가운데로부터 슬피 울며 나오면서 묻기를 “무슨 일로 곡을 합니까.”하였다.숭조가 대답하기를 “저는 형이 죽었기 때문에 곡을 합니다만 할머니는 어째서 곡을 합니까?”하니,할머니는 대답하였다.“나라에서 조광조를 죽였다고 하니,어진 사람이 죽으면 백성들은 도대체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하였다고 전하고 있고,강령현(康翎縣),지금의 인천시 옹진군에서는 한 농부가 마침 닥친 가뭄의 원인을 두고 조광조를 죽인 탓이라 했다가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까지 전하고 있다.민진원은 숙종의 어제를 간행한 뒤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히고 있다. “숙종 어제가 간행된 뒤에는 제생들이 비로소 이를 볼 수 있었다.감모의 정성을 감당치 못하여 장차 서원의 벽에 걸어서 영구히 교훈을 남기고자 하여 나에게 부탁하여 베껴 쓰게 하였다.내 삼가 완미하고 엄숙히 읽어 보니 우리 성고(聖考:숙종)께서 유학을 높이고 도를 귀중히 여기셨으며,세상에 드문 상감(相感)의 지극한 뜻을 엿볼 수 있었다.한번 읊조리고 세 번 탄식하며 감동하여 눈물이 절로 솟아나왔다.삼가 엎드려 절하여 눈물을 씻고 이를 쓴다.” 나는 ‘서원의 벽에 걸어서 영구히 교훈을 남기고자 썼다.’는 민진원의 현판을 강당 천장에서 찾아내 이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 [儒林 속 한자이야기](20)

    筆 붓 필 (力힘 력·13획) 勢 형세세(竹대나무 죽·12획) →형세글씨에 드러난 힘,문장의 힘 유림 91에 筆勢가 나온다.筆은 聿(마침내 율)에서 나왔는데 聿은 손으로 붓을 잡고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나‘이에’라는 뜻으로도 쓰이자 본 뜻을 유지하기 위해 聿자에 竹자를 붙인 것이다.筆에서 대나무를 본뜬 竹자는 붓의 재질(材質)을 나타낸 것이다.竹자가 들어간 한자는 第(차례 제),筵(대자리 연),箸(젓가락 저),篇(책 편)처럼 뜻은 竹과 관련됐으며 음은 나머지 부분이 된다. 글 쓰는 데 필수적인 문방사우(文房四友)에는 紙(종이 지),墨(먹 묵),硯(벼루 연)에 筆(붓 필)이 들어있는데 붓은 쓰는 도구이므로 ‘쓰다.’라는 뜻도 있다.후산담총(後山談叢)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紙筆을 가리지 않는다.묘한 솜씨는 손에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저수량(遂良)이라는 사람이 좋은 붓과 먹이 없으면 글을 안 쓰려 했는데 어느 날 우세남에게 자신의 글씨를 보여 주며 구양순(歐陽詢)의 글씨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잘 썼는지 물었다.이에 우세남이 ‘구양순은 일체 불평없이 어떤 붓이나 종이로도 썼는데,자네는 아직도 종이와 붓에 관심이 큰 것을 보면 구양순을 당할 수 없을 것이네.’라고 한 말과 관련된 말이다. 勢는 ‘권세,형세,위세,세력’등을 뜻한다.대나무를 세로로 쪼개는 듯한 기세,즉 세력이 강하여 막을 수 없는 모양을 파죽지세(破竹之勢)라 하는데 이는 다음 일화에서 나왔다.진(晋)나라의 두여(杜予)는 왕준(王濬)의 군사와 함께 오(吳)나라의 무창(武昌)을 빼앗은 후 여러 장수와 함께 작전을 의논하였다.한 장수가 봄도 반이 지나 강물도 불어나고 있어,이 곳에 오래 주둔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겨울에 다시 쳐들어오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이에 두여가 ‘지금 우리 군사의 세력은 대나무를 쪼갤 때와 같다.두세 마디를 쪼개 나가다 보면 칼날이 지나감에 따라 저절로 쪼개지는 것과 같으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그 후 3월에 오나라의 서울 남경(南京)을 함락시켰다. 형세와 관련한 예로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즉 호가호위(狐 여우호,假 빌릴 가,虎 범 호,威 위엄 위)’도 들 수 있다.초(楚)나라 선왕(宣王)이 신하들에게 여러 나라가 우리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한다는 게 사실인지 물었다.이때 위나라 출신 강을(江乙)은 소해휼을 질시하고 있었기에 일화를 통해 그렇지 않음을 설명했다. 호랑이가 여우를 잡았는데 여우가 호랑이에게 나는 천제(天帝)가 명한 사자(使者)이니 나를 잡아먹으면 나를 백수(百獸:모든 짐승)의 王으로 한 천제의 명을 어기는 것으로 너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실제로 호랑이가 여우의 뒤를 따라가 보니 모든 짐승들이 달아나는 것이었다.여우 뒤의 호랑이 때문이었는데 호랑이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많은 나라들이 소해휼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뒤에 있는 선왕(宣王)의 강한 군사력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볼 때 筆勢는 필력(筆力)과 함께 글씨에 드러난 힘,문장의 힘을 뜻한다.言心聲也(언심성야:말은 마음의 소리)요,書心畵也(서심화야:글씨는 마음의 그림)라 했다.전산화 시대라 해도 글씨는 매우 중요함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박교선 ˝
  • [깔깔깔]

    ●백수가 성질부리고 싶을 때 *실컷 자고 일어났는데도 어두컴컴한 새벽일 때. *명절날 친척들이 아직도 그 생활에 충실하냐고 뜬금없는 소리할 때. *실업률이 조금씩 회복된다는 뉴스를 봤을 때. *비디오대여점서 나보다 먼저 신프로 비디오 빌려간 사람이 있을 때. *날이 갈수록 혈색이 좋아진다는 소리를 들을 때. *친구들이 “시간날 때 와라!” “바쁘지 않으면 놀러와!”할 때. *분위기로 살아온 나에게 다양한 유머 겸비한 라이벌이 생겼을 때. *공짜 술자리서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희한하고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요즘 아이 못 말려 아이 : 아빠는 불 끄고 글씨 쓸 수 있어? 아빠 : 응,물론이지. 아이 : 그럼,불 끄고 여기 성적표에 사인 좀 해주세요.˝
  • 儒林(9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두루마기 바깥으로 흰색 버선을 신은 조광조의 두발이 삐죽이 나와 있었다.그 발을 보자 나는 문득 갖바치가 직접 만들어 보냈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태사혜의 신발이 떠올랐다.전해 내려오는 야사에 의하면 조광조는 죽기 직전 양팽손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 신발을 신겨 달라고 유언하였으며,양팽손은 이를 지켜 그대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저 흰색 버선발 위에 신겨졌던 한 짝은 검고,한 짝은 흰 짝짝이의 비단신.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천년의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조광조가 죽어 이미 500년이 흘렀음에도 갖바치가 마지막으로 쓴 참위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영정 앞에는 붉은 색 제단이 놓여 있었고,제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나는 그 물건을 감싸고 있는 뚜껑을 밀어 올려 내용을 확인하여 보았다.그 나무 조각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贈領議政文正公靜菴趙先生神位” 이것인가. 나는 그 초라한 신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조광조의 신위인가.신위라면 죽은 조광조의 영혼이 의지하여 머물러 있는 자리.이 한갓 초라한 나무막대기 위에 조광조의 영령이 머물러 있단 말인가. 사당 안 동쪽으로 또 하나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다.그곳에는 영정도 보이지 않고 다만 붉은 색으로 칠하여진 또 하나의 신위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나는 다시 그 나무상자의 겉면을 벗겨 보았다.그 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진 또 하나의 신위가 놓여 있었다.“學圃梁先生神位”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조광조의 시신을 고향 앞 골짜기에 가매장하여 들짐승의 밥이 되지 않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듬해 봄 조광조의 시신을 이곳까지 운구하였던 은인이었다.두 사람이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1506년 중종원년 양팽손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였다. 그 무렵 조광조는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는데,도가 지나쳐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고 어떤 사람은 재앙의 근원이라 칭하여 친구들이 간간이 끊어지기도 했으나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친구들마저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학문에 열중하던 조광조에게 그러나 여섯 살이나 어린 양팽손은 소문을 듣고 조광조를 찾아간다.이때의 기록이 양팽손의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선생이 개연(慨然)히 도를 구할 뜻이 있어 의리를 연구하고 경제(經濟)에 마음을 두었으나 지식을 개척해 나가지 못함을 허물로 여겨 드디어 정암 선생을 찾아가 더불어 경지(經旨)를 강구하고,사물을 토론하니,정암도 그 깊이 있는 학식과 재능을 인정하여 세상에 필요한 큰 그릇이라 하였다.” 이처럼 양팽손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조광조를 불원천리하고 능성에서 용인으로 찾아간 붕우였으며,마침내 조광조가 진사시험에 방수(榜首)되고,양팽손이 생원시험에 1등으로 합격한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강론하고 질의하여 빠진 날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의 기록이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정암이 일찍이 ‘내가 양팽손과 더불어 이야기함에 마치 지초(芝草)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다.’하였고,또 그 기상을 일컬어 ‘비갠 뒤의 가을하늘이요,구름이 막 걷힌 직후의 밝은 달이다.인욕이 깨끗이 다 없어졌다.’ 하였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