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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로 달러 알아?”…美아티스트 월가 퍼포먼스

    미국의 한 아티스트가 ‘0 달러’를 제작해 위기에 빠진 미국 경제를 꼬집었다. 로라 길버트라고 불리는 이 아티스트는 지난 8일(한국시간) 직접 제작한 제로 달러를 1만장을 들고 뉴욕 월스트리트에 나섰다. 길버트가 손수 제작한 제로 달러의 모습은 1달러 지폐의 디자인과 거의 똑같다. ‘1’ 대신 ‘0’라고 적힌 숫자를 빼면 말이다. 길버트는 자신의 손 글씨가 쓰인 제로달러를 직접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달러의 가치는 날로 추락하고 미국 경제는 손쓰기 힘들 정도로 몰락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이런 퍼포먼스를 생각하게 됐나”라는 질문에 길버트는 “추락하는 미국 경제 상황에 대해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고 예술가적인 접근을 하고 싶었다.”며 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편 현재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가 월가의 거품이 터지면서 미국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을 위기로 번지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손톱으로 글씨 써지는 ‘메모장 피부’ 여성 화제

    “펜, 종이 없어도 메모할 수 있어요.” 자신의 손톱과 피부를 각각 펜과 수첩처럼 사용할 수 있는 여성이 ‘차이나데일리’ 등 중국 언론에 보도되어 화제에 올랐다. 중국 청두지역에 사는 후앙 샹지는 일명 ‘인공 두드러기’(artificial urticaria)라고 불리는 증세를 오히려 이용해 50세가 되도록 자신의 피부를 노트처럼 사용해 왔다. 일반적인 피부 두드러기와 다른 점은 자신이 원할 때만 매우 세밀하게 두드러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 매우 독특한 증세이지만 정작 후앙 본인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후앙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피부에 손톱으로 글씨를 쓰면 그 부분이 부어올라 한동안 글씨가 유지된다. 부어오르는 굵기가 매우 얇아 복잡한 글씨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 후앙은 자신의 피부에 대해 “나는 늘 내 몸을 메모지로 사용해왔다.”며 “편리한 ‘신체적 장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어릴 때부터 별도의 메모지 없이 팔에 쇼핑목록을 적어서 시장에 나가곤 했다.”고 덧붙였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박성조 기자 voicechord@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수원 영통구에 ‘3종 박물관’ 개관

    수원 영통구에 ‘3종 박물관’ 개관

    경기 수원시에 3개의 박물관이 동시에 문을 열었다. 수원시는 영통구 이의동 경기대와 수원외고 사이 언덕 3만 9135㎡에 243억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6535㎡의 ‘수원박물관’을 준공해 1일 개관식을 가졌다. 박물관은 ‘수원역사박물관’,‘한국서예박물관’,‘사운 이종학 사료관’ 등 3개로, 그동안 기증받거나 구입한 유물 3만 30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수원역사박물관에는 논밭과 들판이 펼쳐진 1950∼70년대 수원 풍경 사진들과 중앙극장, 공설목욕탕, 수원 갈비의 원조 화춘옥이 있던 1960년 무렵 영동시장 거리를 재현한 전시장이 눈길을 끈다. 수원화성 화홍문이 도안된 1909년 발행 1원권 지폐와 남문이 그려진 성냥갑 등도 전시돼 있다. ‘한국서예박물관’은 서예가 양택동 선생으로부터 기증받거나 구입한 유물을 중심으로 건립된 지방자치단체 최초의 서예전문 박물관이다. 어필(御筆) 중 조선 영조의 7세 때 글씨와 정조의 동궁시절 서첩, 명필로는 퇴계 이황의 초서가 눈에 띈다.‘이종학 사료관’에는 17세기초 문인·학자들의 미공개 시 40여편이 담긴 시첩 ‘조천증행록’, 일제 조사보고서 유일본과 금강산 채색지도 등 이종학 선생이 기증한 유물 1만 9000여점이 전시된다. 박물관에는 어린이체험관과 문화교육관도 운영된다. 어린이 체험관에서는 화성모형 만들기, 옛날 살림살이 등을 체험하고 화성 축조에 사용한 거중기와 정조의 안경을 소재로 한 안경의 역사에 대해 공부할 수 있다. 수원박물관은 개관을 기념해 올해말까지 ‘근대수원 100년’ 기획전을 연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간판 예쁘다고 블로그에도 떴어요”

    “간판 예쁘다고 블로그에도 떴어요”

    인천 중구청 앞길에서 공예품점을 운영하는 송혜경(여·48)씨는 간판을 새로 만들면서 머리를 한껏 짜냈다. 바탕에는 여러가지 꽃무늬를 깔고 좌측에는 자신의 가게에서 취급하는 크리스털 20여개로 목걸이형 장식을 만들었다. 가게 명칭은 작지만 바탕과 조화를 이루는 글씨체로 오른쪽 밑에 배치했다. 돌출간판은 쇠로 만든 대문 형상으로 유럽식 엔틱 분위기를 연출했다. 공예품을 만드는 점포라는 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간판 때문에 그녀의 가게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간판이 너무 예쁘다.”면서 들어와 얘기를 나누다 물건을 사는가 하면 간판만 보러 오는 이들도 생겨났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견학을 오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점포 사진을 찍은 뒤 인터넷 블로그에 올려놓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우리 가게가 인터넷에 나온 것을 보니 신기하면서도 제품도 잘 만들어야겠다는 책임감이 들더군요.” 그녀는 제대로 된 간판을 만들기 위해 디자인 서적과 인터넷을 수없이 뒤졌다고 한다. 간판 형상을 그렸다 지우기를 수십번 반복하다 구청 관계자들과 협의 끝에 지금의 간판을 만들어냈다. “전에는 가게 앞길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았는데 일대가 아름다운 간판 거리로 조성된 이후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어요.” 그녀는 “간판의 힘이 느껴진다.”면서 “덩달아 점포 내부도 우아하게 꾸미게 된 것이 당연한 결과인지 부대효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듣는 신문 ‘해피송파’ 발행

    송파구가 구정소식지 해피송파를 시각장애인을 위한 ‘들리는 신문’으로 발행한다고 25일 밝혔다. 들리는 신문은 인쇄물 글씨를 음성으로 바꾸는 바코드인 음성변환출력코드를 넣어, 이곳에 음성변환출력기를 대면 수록된 정보가 소리로 변환되도록 만든 것이다. 송파는 시범발행을 거쳐 본격적으로 발행하기로 했다. 소식지에 적용한 음성변환출력코드에 각 지면의 내용을 모두 담아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계층, 고령자, 이주외국인 등도 구정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음성변환출력기는 구청 사회복지과, 보건소, 석촌동, 삼전동 주민센터 등 4곳에 비치돼 있다. 한편 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송파N 인터넷방송과 IPTV 프로그램을 자막으로 방송하고, 사회복지과에서 자체 개발한 ‘눈으로 듣는 초인등’을 무료로 설치하는 등 소수층을 위해 다각도로 지원하고 있다.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우리 역사 속 ‘삼국지’ 이야기

    우리 역사 속 ‘삼국지’ 이야기

    동서양 고전을 통틀어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삼국지’. 삼국지에는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의 정사(正史)인 삼국지(진수 지음)와 명대의 소설 삼국지연의(나관중 지음)가 있다. 이 중 조선시대 뒤늦게 들어온 삼국지연의는 민초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며 우리 역사 문화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우림)은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삼국지연의 관련 자료 150여점을 한데 모은 ‘우리의 삼국지 이야기’전을 마련했다. 오는 11월9일까지 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서 주목되는 작품은 삼국지의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그림으로 형상화한 삼국지도(三國志圖).19세기 조선후기의 지본채색화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139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삼국지연의 간본으로 추정되는 17세기 ‘신간교정고본대자음석삼국지전통속연의’(선문대 소장)와 석봉 한호의 글씨인 ‘촉한제갈무후출사표’ 등도 감상할 수 있다.‘도원결의’ ‘단기천리’ ‘삼고초려’‘적벽대전’ 등을 그린 민화, 유비·관우·장비·제갈량 등 민간의 무속신앙 관련 자료 등도 만날 수 있다. 이밖에 만해 한용운의 신문 연재본, 박태원의 월간지 연재본, 방기환·박종화·정비석·이문열·황석영·장정일의 번역본, 김용환과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도 전시돼 소설 삼국지연의 변화상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02)724-0153.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길섶에서] 메리골드/함혜리 논설위원

    오랜만에 집 뒤의 매봉산에 올랐다. 정상까지 30분도 채 안 걸리는 낮은 산이지만 운동삼아 산책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정상을 지나 산을 끼고 내려오는 길 양 옆으로 주황색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팻말에는 서툰 글씨로 ‘메리골드’라고 쓰여있다. 몇 달전 산에 올랐을 때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한 할아버지가 모종판을 들고 다니며 열심히 꽃을 심고 계셨다. 한뼘 정도 되는 높이의 모종들을 길을 따라 심고는 땅을 다독여 주었다. 목에 걸쳤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그 할아버지는 “메리골드는 꽃 피는 기간이 아주 길어요.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줄기차게 피니까 4개월 정도는 예쁜 꽃을 볼 수 있을 게야.”라고 하셨다. 그 모종들이 이렇게 튼실하게 자라 예쁜 꽃을 피울 줄이야. 초가을의 스산한 바람 탓에 잠시 가라앉았던 기분이 메리골드를 보니 금세 밝아졌다. 꽃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냥 피어있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주는 꽃…. 산을 찾는 사람들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려고 정성들여 꽃을 심고 가꾸신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붓 5개로 동시에 붓글씨 쓰는 中달인 화제

    5개의 붓으로 동시에 붓글씨를 쓰는 사람이 있다? 최근 중국에 살고 있는 ‘붓글씨 기인’이 매스컴에 소개되면서 네티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태어난 예건유(葉根友)는 양 손에 각각 2개의 붓을, 입으로 한 개의 붓을 들어 총 5개의 붓으로 동시에 붓글씨를 쓸 수 있는 기인이다. ‘오필동서’(五筆同書·다섯 개의 붓으로 동시에 글씨를 쓰는 서법)의 세계 최초 창시자로도 알려진 그는 지난 2002년 17시간 13분 동안 쉬지않고 7659자의 공심자(空心字·탁본 위에 투명한 종이를 대고 글자 윤곽을 그대로 옮기는 서법)를 쓰는데 성공해 기네스 기록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 21일 중국의 한 매체에 소개된 예씨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총 5개의 붓을 들고 ‘春江花月夜’(춘강화월야)다섯 글자를 동시에 써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예씨가 다섯 글자를 모두 쓰는데 걸린 시간은 40초 내외. 그는 “‘오필동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의 한자 결합구조를 잘 이해하는 것”이라며 “아무리 어려운 한자들의 조합이라도 다섯 글자를 쓰는데 39초~42초면 충분하다.”며 자신있게 말했다. 7 세 때부터 서예를 시작한 예씨는 3년간의 연습 끝에 왼손으로도 자유자재로 글씨를 쓸 수 있게 됐다. 이후 고된 훈련을 통해 1996년부터는 입으로도 서예가 가능해졌으며 2002년에는 정식으로 ‘오필동서’ 서법을 창시했다. 또 최근에는 유명 배우 류더화(劉德華·유덕화)를 위해 999종의 각기 다른 사인을 만들어 선물해 관심을 끌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고마운 그 신사(紳士)는 10대만 꺾는 늑대

    고마운 그 신사(紳士)는 10대만 꺾는 늑대

    “깡패가 따라온다” 말 걸곤 이력서 쓰자며 여인숙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빌딩」가의 골목길. 방범등(燈)이 매달려 있긴해도 불쑥 깡패들이 나타날듯한 불안한 밤길을 한 소녀가 총총걸음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등뒤에서 갑자기 사나이들의 구두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녀는 감히 뒤돌아 볼 염도 없이 몸을 움츠리고 발길만 재촉했다. 어느새 신사복차림의 중년 사나이가 다가 왔다.『깡패들이 너를 잡으려고 뒤쫓고 있지 않나』점잖게 말을 건네며 소녀의 등을 감쌌다. 지난달 27일 밤8시쯤 대구시 태평로4가 골목길에서 있었던 일. 바로 이 신사복 차림의 사나이가 막 피어나려는 꽃잎을 마구 짓밟아 온 색마일 줄이야. 『얼마나 무서운 골목인데 다 큰 가시나가 혼자 다니노. 직장에 다니는 것 같은데 그래 직장이 어디길래 이렇게 늦게 다니노』막 골목길을 빠져 나오자 신사는 가엾다는 듯 나무랐다. 소녀는 시내의 H학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집에 돌아 가던 중. 『기술배울라꼬 학원에 다녀예. 보통 7시에 끝나는데 오늘은 좀 늦었어예』 신사가 아버지처럼 마음 든든하게 느껴져 소녀는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직장여성이 아니라 학원생이구만. 돈을 벌어야지 배우기만 하면 뭘하노』『취직이 어디 돼야지예』『내가 시켜 줄까. 전매청 여직공자리가 한 두개 비어 있는데…』 「취직」이란 말에 눈이 번쩍 뜨인 소녀는 흥분이 가슴을 메웠다. 신사와 소녀는 다정한 부녀인 듯 대화를 나누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달에 2만원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취직시켜 준다는 바람에 소녀는 미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달래가며 통금(通禁)만 기다려 신사는 당장 이력서를 쓰라며 문방구점에 들어가 용지까지 사들고 오지 않는가. 소녀는 저도 모르게 신사를 따라 여인숙에 들어 갔다. 이 아버지같은 신사는 지난1일 동대구경찰서에 강간치상혐의로 구속된 백상복(白祥福)(39·경북 영천군 영천읍). 욕을 보기 직전에 구출됐던 소녀는 조(趙)모양(17). 조양은 백의 하숙집이라는 평원여인숙에 미처 간판도 보지 못한채 들어 섰다. 바로 백의 글씨로 이력서가 쓰여졌다. 『부양가족이 많아야 연말에「보너스」가 많다』며 가족사항을 캐 묻기도 했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아저씨도 있었던가. 그러나 이 고마운 아저씨가 이렇게 하여 꺾어 버린 꽃송이들이 경찰의 조사로만도 5명이나 될 줄이야. 백은 이러한 수법으로 소녀들의 신상을 파악, 일단말썽이 없으리라고 판단되면 차차 이리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람둥이가 아닌가 보자』며 소녀의 손톱을 검사한다고 손을 주물럭거리다가 다음에는「스토킹」을 벗기고 발톱을 검사한다. 소녀들은 만에 하나 이 고마운 아저씨를 의심할수 없다. 어찌 감히 저항하랴. 건강을 진단한다며 뼈마디를 쓰다듬고 옷속에 손을 넣을 때쯤에는 소녀의 마음에 의심이 고개를 든다. 백은 여기서 일단 후퇴, 소녀만을 방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간다. 10분쯤뒤에 마실것과 먹을 것을 사들고 들어온다. 이력이나 건강이나 모두 합격이기 때문에 취직이 된거나 다름 없으니 축하한다고 수작을 부린다. 통금시간이 코앞에 닥쳤지만 소녀들은 잠시라도 의심을 한게 더욱 죄스러워 초조하면서도 백의 호의를 뿌리칠 수 없다. 어느덧 통금이 되어 소녀의 발이 묶이게 되면 백은 전기를 끄고 덮친다. 조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인숙 방에 들어 가자 이력서가 쓰여지고 손발을 매만지던 백은 밖으로 나갔다가 이윽고 마실것과 먹을 것을 사왔다. 그리고는 통금이 지나고 조양의 경계가 풀릴때쯤해서 전깃불을 끈 그는 어린 소녀의 몸을 덮쳤다. 아슬아슬한 그 순간에 문을 벌컥 열고 경관이 들이닥친 것이다. 경찰은 역시 백의 제물이 됐던 임(林)모양(18)의 고발로 백을 미행했던 것. 쇠고랑을 찬 백은 일절 여죄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으나 경찰의 조사결과만으로도 같은 방에서 송(宋)모양(15) 김(金)모양(17) 신(申)모양(19)등 모두 5명의 소녀가 피해를 입었다는 것. 요(要)조심! “교활 잔인한 이 사나이의 수법” 이 소녀들은 시골에서 대구로 나와 자취하거나 친척집에 의지하고 있는 가난한 처지들. 구직이 절실한 처녀들이었다. 백을 고발한 송모양은 극장 매표원을 시켜주겠다는 바람에 덫에 걸렸다. 지난 11월26일밤 11시쯤 언니(20), 남동생(16)등 3자매가 자취하고 있는 신천동집에 백이 찾아왔다. 언니와 백은 잘 아는 사이인 듯. 『너를 취직시켜 줄 분이 찾아왔다. 나가 보아라』며 잠든 송양을 깨워 백을 만나게 했다. 백은 임양을 데리고 거리를 한 바퀴 돌면서 대구극장앞에 이르자『저 극장 매표소가 네가 일할곳』이라며 일러주기도 했다. 결국 여인숙으로 끌려간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저항을 하다 호되게 매를 맞고 두 번 욕을 당하고 심한 국부 파열상을 입었다. 이 사실은 곧 언니에게 알려졌고 자매간에『언니때문』이라며 말다툼을 하다 전직 검찰청서기였던 아저씨 임모씨 귀에 들어 갔다. 임씨는 두자매의 말다툼을 듣고 단박 백이 『인간이랄 수 없는 치한』임을 알아채고 『어떤 망신을 당해도』그냥 둘 수 없다고 결심, 경찰에 고소토록 한 것이다. 경찰조사에 의하면 백은 2남1녀의 아버지. 4년전 아내 유(兪)모여인(34)이 도망쳐 버려 홀아비신세. 처음 대구에 와서는 D이발소등에서 이발사를 했다. 그가 소녀들을 꾀기위해 이력서용지,「콜라」, 과자봉지등을 사들인 돈과 숙박비등 생활비를 어떻게 염출해 냈는지는 그가 입을 열지 앟아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구=배기찬(裵基燦) 기자> [선데이서울 71년 12월 12일호 제4권 49호 통권 제 166호]
  • [시론] 다문화,다문화 가정,다문화 교육/권성자 ‘책 만들며 크는 학교’ 대표

    [시론] 다문화,다문화 가정,다문화 교육/권성자 ‘책 만들며 크는 학교’ 대표

    몇년 전 영국의 선진교육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공립초등학교 1학년 수업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교사와 학생간의 수업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실 한쪽에 전시되어 있는 아이들의 작품이었다. 이슬람 사원의 책 모양에는 라마단 이야기가, 코끼리 모형의 책에는 힌두 문화 이야기가, 절 모양의 그림에는 전통 복장의 예쁜 중국 아이의 웃는 그림이 삐뚤빼뚤한 글씨와 함께 정성스럽게 그려져 전시되어 있었다. 영국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필자는 아이들의 작품을 통해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 그리고 불교 문화를 먼저 접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했다. 다양한 출신 나라만큼이나 다양한 나라의 전통문화를 학교 교육 현장인 교실 안에서 눈으로 볼 수 있어서 내심 놀라웠다.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아이들이 모여 함께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수업을 합니다.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축제를 즐기며, 어떤 풍습을 지키며 생활하는지 이해시킴으로써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존중하도록 교육시키는 것이죠.” 각기 다른 문화를 보고 배우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출신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업을 가장 먼저 한다는 교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학교 현장에서의 살아 있는 생생한 다문화 교육이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면서 화합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해 이민자 나라인 영국의 국가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나라도 체류 외국인이 100만명 시대에 들어섰다. 그중 결혼 이민자수는 약 10만명에 이르고 출신 국가도 베트남, 중국, 러시아, 일본, 필리핀 등 점차 다양화되고 있다. 또한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가족, 유학생, 이주민 가족 등 다문화 가정이 늘면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져 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교육은 미미한 실정이라고 한다.“하루빨리 한국 사람이 되라고 재촉하는 듯, 한국 정착을 위한 지원에만 관심을 가질 뿐 이주민 각 나라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전무한 실정”이라고 다문화 가정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에게도 그들만의 명절이 있고 풍습이 있기 마련인데 그들의 문화와 전통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귀를 열어 왔는지 우리의 최대 명절인 추석을 계기로 한번쯤 생각해 보고 자라나는 2세들과의 공존과 화합을 이끌어 낼 체계적인 다문화 교육 프로그램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피부가 다르고 머리색과 눈동자가 다르면 편견을 가지고 대한다. 또한 생활습관이나 문화가 다르고 의사소통이 잘 안 되면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마저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는 경향이 있다. 편견에 가득 찬 시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리도 영국처럼 교실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해 주는 교육을 시키면 다문화 가정의 2세와 우리 아이들이 함께 어깨를 맞잡고 화합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권성자 ‘책 만들며 크는 학교’ 대표
  • 조선왕조실록 원본 전주한지에 베낀다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전주한지로 다시 태어난다. 16일 전주시에 따르면 올해부터 2010년까지 조선왕조실록을 전주한지에 복본화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복본화 작업은 전주사고에 보관됐던 태조에서 명조까지 614책 5만 3102면의 이미지 파일을 규장각으로부터 확보해 전주한지에 모양, 크기, 글씨 등을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올해부터 내년까지 1차로 태조실록, 정종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문종실록, 세조실록 등 275책 2만 1846면을 복본한다. 2010년에는 예종실록과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인종실록, 명종실록 등 339책 1256면을 재현한다. 시는 조선왕조실록 복본사업이 마무리되면 박물관, 학교 등에 홍보용으로 배포하고 전주 경기전 유물전시관에도 전시할 방침이다. 시는 이 사업의 추진으로 전주한지의 산업화 계기가 마련되고 전통문화도시 전주의 위상이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 월, 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것이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경찰, 신영복 작품 게시 돌연 취소

    경찰, 신영복 작품 게시 돌연 취소

    경찰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여년을 감옥에서 보냈던 신영복(67)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서예작품 ‘처음처럼’을 서각(書刻·글씨를 써서 나무에 새기는 것)으로 만들어 일부 경찰 지구대에 내걸기로 했다가 돌연 취소해 그 배경에 궁금증이 쏠리고 있다. 16일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신 교수가 1995년 개인 서예전에 출품했던 ‘처음처럼’을 서각으로 제작해 올해 말까지 관할 지구대 7곳과 역전 파출소 1곳에 걸 계획이었으나 내부 검토과정에서 취소했다. 이철성 영등포서장은 “신 교수의 허락을 받아 ‘경찰관으로서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하는 뜻으로 이 작품을 일선 지구대에 걸기로 했으나 내부검토 과정에서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취소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른 관계자는 “신 교수의 작품을 건다는 얘기가 나오자 경찰 안팎에서 무기징역까지 받은 사람의 글씨를 경찰이 활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됐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다시 만나는 ‘천상병 시인’

    노원구가 현대 서예작가들의 작품과 천상병 시인의 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를 연다. 노원구는 오는 18일부터 11월15일까지 갤러리 테마청사에서 ‘2008 한국서예대전 및 천상병 시인 유품전’을 연다고 10일 밝혔다. 전시회는 2m 규모의 초롱등에 실제 붓글씨를 써보이는 라이브 서예 퍼포먼스와 천상병 시 낭송회, 테이프 커팅 등을 진행한다. 현대 서예작가 40명의 작품 60여점과 노원서예협회 작가들의 작품 20점, 천상병 시인이 사용하던 유품 70점이 전시된다. ‘천상병 시인 유품전’에는 시인이 평소 사용하던 안경과 펜, 라디오, 찻잔, 맥주잔, 테이블, 의자 등 일상 용품을 비롯해 친필 원고, 책자, 시화, 그림 작품 등 70점의 유품이 선보인다.1층 갤러리카페노원에서는 시인의 부인이 운영하는 전통 찻집 ‘귀천’의 모습을 재현한다. 인터뷰와 육성 노래 등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도 상영된다. 관람료는 무료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 공휴일에도 관람할 수 있다. 구 관계자는 “이번 전시회는 우리 붓글씨의 아름다움과 천상병 시인의 문학 세계를 새롭게 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말했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사도세자 향한 정조의 애틋함이…

    사도세자 향한 정조의 애틋함이…

    조선시대 정조 임금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왕의 글이 있는 그림전’(12월4일까지, 미술관 1회화실)에서는 어제(御製·임금이 지은 글)가 담긴 회화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온궁영괴대도’(溫宮靈槐臺圖)‘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사현파진 백만대병도’(謝玄破秦百萬大兵圖) 등 3점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조선 후기의 그림인 ‘온궁영괴대도’는 사도세자가 활을 쏘던 온양행궁의 영괴대를 그린 작품. 사도세자는 이곳에 회화나무를 세 그루 심었는데, 그가 불행하게 죽고난 뒤 30여년이 흘러 나무가 울창하게 자랐다. 이를 본 정조는 ‘영괴대’라는 글씨를 직접 쓰고 비명(碑銘)을 지었다. 이 글에는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심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을 그린 ‘제갈무후도’에는 숙종의 어제가 들어 있다. 제갈량과 같은 충신을 얻어 나라를 다스리고 싶은 군왕의 뜻을 내보임으로써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냈다.‘사현파진 백만대병도’는 중국 동진(東晉)의 장수 사현이 8만의 병사로 전진(前秦)의 왕 부견의 100만대군을 물리친 ‘비수전투’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그림에는 역사적 사건에서 얻은 교훈을 적은 숙종의 어제가 담겨 있다. 이밖에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은 1744년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과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 입소 행사를 기념해 제작한 화첩으로, 영조의 어제가 3편 실려 있다. 박물관은 전시회에 맞춰 작품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소도록’도 펴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아빠가 너무 좋아 「도깨비」가 된 새댁

    아빠가 너무 좋아 「도깨비」가 된 새댁

    밤마다 장독대에 오물이 뿌려지고 『이사 가지 않으면 가족을 몰살 하겠다』는 협박장이 날아 들었다. 때로는 고무신짝이 가위로 싹독 잘려 있기도 하고. 여느 협박사건과는 달리 목적마저 뚜렷치 못한 이 도깨비 장난은 누구의 짓일까? 경찰의 수사 결과는 놀랍게도 범인이 바로 그집 주부라는 것. “이사 안가면 가족을 몰살” 밤마다 협박장 사건의 무대는 충북 청주시 문화동의 한식집. 기성복 행상을 하는 홍(洪)모씨(51) 가족과 공무원인 윤(尹)모씨(30) 가족등 두집이 세들어 사는 이집에 도깨비가 처음 나타난 것은 지난달 26일 밤. 고추장, 된장독에 개똥이 들어 있고 뜰에 벗어놓은 고무신짝이 가위로 잘려 있는데다가 울타리에는 「노트」쪽지에 적힌 협박장이 꽂혀 있었다. 협박 내용은 『술도 못마시는 놈이 이 동네에 살 자격이 없다. 이사가지 않으면 집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겠다』는 것. 처음 홍씨와 윤씨는 동네 불량배들의 못된 장난질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다음날 밤에도 또 그 다음달 밤에도, 그러니까 28일밤까지 비슷한 협박편지가 마루에 까지 날아들고 장독대에는 오물이 뿌려져 있지 않은가. 결국 소문은 마을에 퍼졌고 두집 식구들 뿐만아니라 온마을 사람들이 이 불길한 협박장때문에 떨었다. 마을사람들의 신고로 경찰에서 수사에 착수하자 29일밤부터는 이 도깨비장난이 딱 그쳐버렸다. 경찰은 처음 형사를 잠복시켜 현장에서 범인을 잡으려 했지만 범인이 눈치를 챘는지 나타나지 않아 실패, 다른 각도에서 수사를 다시 시작했다. 홍씨와 윤씨집에선 각각 사나운 개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으례 짖어야할 이 개들이 짖은 일이 없었다고 했다. 수상한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협박장 울타리에만 꽂아놓았다면 몰라도 마루에 까지 가져다 놓았고 고무신을 가위로 잘라놓은 것을 보면 여유있게 한 일. 경찰은 도깨비의 정체가 이집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거나 집안사람일 것이라는 심증을 굳힐수 밖에는 없었다. 우선 집안 사람들과 이웃주민들 10여명의 필적을 받아내어 국립 과학수사연구소에 협박장 글씨와의 대조를 의뢰했다. 이것이 지난 4일의 일. 신혼의 단꿈 침입 안받고 행복한 보금자리 꾸미려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협박장이 그쳤다곤 하지만 협박장을 받은 사람의 심정이 편안할 리는 없었다. 사건의 해결을 못본채 홍씨는 협박장의 명령대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또 이날밤 도깨비가 나타났다. 협박장과 함께 홍씨집에서 이사가면서 남겨놓고 간 「프라이·팬」으로 이번에는 마룻바닥에 사람의 똥까지 퍼붓고 새로 사 신은 윤씨네 고무신을 또 싹독 싹독 잘라 놓았다. 온동네에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은 다시 불안에 떨었다. 횟가루부대 종이에 쓴 협박장등 현장검증을 하던 경찰은 참고삼아 윤씨네 방안을 살피다가 다락에서 「노트」 1권을 발견했다. 「노트」는 22장 가운데 16장이 찢겨있었다. 울타리와 마루에 던져졌던 협박장 용지와 대조해본 결과 지질이 같은 것. 경찰은 도깨비가 윤씨 가족, 그 중에서도 윤씨의 아내 신(申)모여인(27)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이 그런 눈치를 보이려하면 신여인이 펄쩍 뛰는데다가 윤씨마저 『협박당하는 것도 분해 죽겠는데 내 아내를 범인으로 몰아 세우느냐』고 화를 내곤하여 확증이 될 필적감정결과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10일 마침내 과학수사연구소에서 회신이 왔다. 윤씨의 입회하에 개봉해본 결과 협박편지 필적의 주인은 신여인. 경찰이 예측한 대로지만 윤씨나 이웃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필적 감정나자 “아빠 용서하세요” 흐느껴 왜 그녀는 자기집에 도깨비장난을 했어야만 했던가? 필적감정결과를 보고는 체념한 듯 눈물을 흘리며 범행을 순순히 자백한 그녀의 진술에 따르면 - 청주 S국민학교를 졸업, 집안 일을 도우다 지난 3월 윤씨와 결혼했다. 결혼후 지금 사는 집에 방2간을 18만원에 전세들어 신혼 살림을 차렸다. 딸까지 낳았다. 그지없이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고민거리는 시갓집이 이웃이어서 불편할뿐 아니라 한집에 세든 홍씨가 술이 고래라 윤씨에게도 술을 먹이는 것이었다. 홍씨는 술이 취하면 남편을 데려가 술을 먹일 뿐만아니라 걸핏하면 소주병을 차고 신혼의 보금자리를 침범하기 일쑤였다는 것. 술이 취하면 자기 부인에게 마구 욕설을 퍼붓기도 하여 남편이 닮지않을까 두렵기도 했다는 것. 신여인은 홍씨가 그지없이 미웠다. 그래서 궁리끝에 결국 도깨비 노름을 생각해냈다는 것인데 좀 「드릴」있게 연극을 꾸미기 위해 장독에다 개똥을 퍼붓고 고무신을 가위질 했다는 것. 여기까지가 제1막. 과연 홍씨는 그녀의 뜻대로 이사를 가 버렸는데 남편은 이사갈 꿈도 꾸지 않는게 아닌가. 사실 그녀는 홍씨와 떨어지는것도 문제였지만 실은 이웃에 사는 시가에서도 멀리 떠나고 싶었던 것. 그래서 홍씨네가 이사간 날 밤에 제2막을 연출했다. 11일 협박·재물손피혐의로 구속이 집행된 그녀는 『아빠 용서하세요』라며 후회의 눈물을 뿌렸지만 시댁의 식구들은 경찰에 달려가 『너때문에 아들 망쳤다』고 아우성을 치기도. <청주(淸州)=황규호(黃圭鎬) 기자> [선데이서울 71년 11월 28일호 제4권 47호 통권 제 164호]
  • [아름다운 간판 2008]디자인 ‘명품도시’ 성큼

    [아름다운 간판 2008]디자인 ‘명품도시’ 성큼

    “예쁘고 좋은 간판을 뽑아주세요.” 대전시가 ‘좋은 간판상’을 만들었다. 자치단체에서는 처음이다. 대전환경운동연합과 손 잡고 올해 말 최우수상 1곳을 선정한다. 간판문화 개선에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도입했다. 김영수 대전시 광고물개선 담당계장은 “시민이 간판만 보고 업소 수준을 판단하고 업소들은 ‘좋은 간판이 영업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이 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시민 ‘간판탐사대´ 운영 시는 지역 대학생과 시민 등 30명을 선발해 ‘간판탐사대’를 운영한다. 이들은 시내 곳곳을 훑으면서 좋은 간판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 간판상 홈페이지에 올린다. 매년 말 심사위원회에서 사진을 심사한다. 친환경적이고 예술미와 소박함 등이 기준이다. 대전시는 지난해 1월부터 옥외광고물 개선사업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현수막 디자인 개선사업은 다른 곳에서 하지 않는 것이다. 글씨 크기와 들쭉날쭉한 디자인 등을 규격화했다. 현수막 크기는 가로 6m 세로 0.7m, 글자는 가로 34㎝ 세로 40㎝로 각각 제한했다. 현수막 가장자리에 10∼15㎝의 여백을 두게 했다.3∼4줄에 달하던 글자는 2줄로 한정했다. ●불법광고물단속 인센티브 도입 이런 현수막 게시대는 상업용 172개와 행정용 27개 등 모두 199개가 있다. 가로 디자인도 2단으로 규제했다. 도로변이 한결 정리된 느낌이 났다. 예전의 난삽한 풍경은 사라졌다. 동구 삼성동 주민 신상순(34·회사원)씨는 “예전에는 길을 걷다 현수막을 보면 정신이 사나웠는데 요즘은 깔끔하고 정돈이 된 느낌이 들어 기분까지 한결 차분해진다.”고 말했다. 대전시는 지난 3월 불법 광고물 제어시스템을 도입했다. 관할 구청이 옥외광고물 인·허가를 내주지만 시에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다. 내부행정망을 통해 5개 구청에 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뒤 현장점검까지 벌인다. 지난해에는 자치구를 상대로 불법 광고물단속 인센티브제를 도입했다. 매달 한차례 불법 광고물에 대한 정비와 특수시책, 현장평가를 통해 연말에 최고 자치구를 선정,1억원을 주고 있다. 구청간 경쟁을 통해 불법 간판을 강력 단속해 도시 디자인을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첫해는 서구가 1등을 했다. 대전시는 지난해 13만 3210개의 광고물을 전수 조사, 불법 광고물 5만여개를 적발해 철거했다. 신도시는 이 같은 제도와 엄격한 사전 건축심의위원회를 통해 불법 간판을 방지하고 규격화를 유도하고 있다. 지난 5일 찾은 유성구 관평동 대덕테크노밸리 상가 건물의 벽마다 규격화된 돌출 광고판이 주종을 이뤄 깔끔한 분위기다. 재질이 다른 간판도 크기가 일정했다. 건물 층마다 뒤덮는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초기에 고객의 눈길을 끌려고 내건 플래카드가 더러 거슬릴 뿐이다. ●곳곳서 간판개선 사업 구도심 2곳에서도 간판 개선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대전대 등이 있어 캠퍼스타운이 조성될 동구 대동5거리∼동아공고4거리간 자양로 1.2㎞와 중구 대흥동 외환은행∼중구청간 문화예술의 거리 0.5㎞ 구간이다.2010년 12월 완공되며 총사업비는 16억 7000만원 들어간다. 주민 부담도 있지만 국비와 지방비 지원이 더 많다. 김 계장은 “업주들을 설득하려고 번질나게 찾아갔다.”며 “테마거리의 정체성과 업소별 특색이 드러나는 간판을 걸도록 정비하겠다.”고 말했다. 이곳 업소들은 3개까지 허용되는 간판수가 1∼2개로 제한된다. 자양로에는 334개 업소에 869개, 문화예술의 거리에는 150개 업소에 447개의 간판이 걸려 있다. 대전시는 업소들마다 작고, 소박하고, 깔끔하고, 예쁜 간판을 달도록 규제할 계획이다. 시는 지난 7월 도시디자인과를 신설, 건축과로부터 불법 간판 단속 업무를 가져와 대전을 ‘명품 도시’로 만들기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 중이다. 김 계장은 “광고물은 시민들이 스스로 개선해야 한다.”면서 “앞으로 음식점, 부동산 등 협회와 손 잡고 이를 적극 유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靑 ‘국민과 대화’ 패널선정 압력 논란

    이병순 KBS 사장이 취임한 지 5일로 열흘째에 접어드는 가운데, 청와대가 9일 생방송 예정인 ‘대통령과의 대화 질문 있습니다’ KBS 제작진에게 특정 패널 출연을 요구하는 등 벌써부터 프로그램 제작 자율성이 침해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대해 4일 청와대는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안했을 뿐”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3일 열린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사원행동’ 전국사원총회 자리에서 처음 밝혀졌다. 김현석 사원행동 대변인은 이날 “청와대가 ‘대통령과의 대화’ 지정토론자로 촛불집회 진압 경찰과 토지공사·주택공사 합병 찬성자를 선정해줄 것을 요구했고, 장미란 선수와 이용대 선수도 섭외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제작진이 거부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청와대 박형준 홍보기획관은 4일 오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주관사가 KBS이기 때문에 준비차원에서 사전 협의를 하지 않을 수 없으나, 마치 일방적으로 KBS에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또 패널로 금메달리스트, 전경 참여 등을 요구했다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아이디어 차원에서 이야기했을 뿐이며, 최종 결정은 전적으로 KBS에 맡겨놓고 있다.”고 말했다. KBS 사원총회에서는 제작자율성 침해에 대한 또다른 고발이 잇따랐다. 한 기자는 “종교편향 항의 불교계 법회를 다룬 KBS 1TV 9시 뉴스에서 불자들이 들고 있던 ‘어청수 경찰철장 퇴진’ 손팻말의 글씨가 컴퓨터그래픽으로 지워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필모 1TV 뉴스제작팀장은 “뉴스 효과 담당 직원이 본인 판단에 따라 지운 것으로 확인됐으며, 데스크 검열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자율성 침해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강아연 윤설영기자 arete@seoul.co.kr
  • [심재억 기자의 짧은 몽골 체류기](하편)

    [심재억 기자의 짧은 몽골 체류기](하편)

    ■몽골에서 우리의 옛 모습을 보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오고바흐타의 진단은 몽골에 체류하는 동안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몽골 입성 4일째 되는 날,의료봉사를 마친 일행은 초원으로 야유를 나섰다.말이 야유지 그것은 또다른 고행의 체험이었다.워낙 햇볕이 따가워 일행들은 함부로 초원에 나서기를 꺼려했다.그냥 차안에서 너른 초원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투였다.그래도 몽골이라는 나라가 그리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은가.필자는 작심하고 시원한 차량을 나섰다.더운 바람이 턱 하고 숨길을 막았고,발바닥에 밟히는 초원의 감촉은 뜨겁고 푹신했다.뜨거움은 태양에 달궈진 대지의 체온이고,푹신한 것은 빠삭하게 마른 모래흙이 밟히는 감촉이었다.걸음을 뗄 때마다 풀풀 먼지가 일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몽골과 역사·문화적 뿌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흔적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어워’였다.초원을 가로 질러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이어진 길(나중에 지도를 보고 그 길이 러시아령 바이칼 호수 쪽으로 이어지는 간선 국도임을 알았다.)을 따라가자니 길가에 익숙한 돌무더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바로 어워였다.우리 식으로 보자면 성황당이다.모양도 성황당과 너무 닮았다.몽골인들은 길을 오가다 어워를 만나면 돌을 세개 쌓거나 주위를 세번 돈 뒤 기원을 하고 지나간다.의례까지도 우리의 성황당 의식과 너무 비슷해 놀랐다.요즘엔 차량 이용자가 많아지면서 예전처럼 돌이 많이 쌓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 몽골에는 토템이나 샤먼적 요소가 우리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다.예컨대 차량 운전자도 아워 앞을 지나칠 때면 경적을 세번 울리거나 아예 차로 아워 주변을 세번 돌고 지나가는 식이다.우리에게 익숙한 ‘삼세번 문화’와 흡사한 의식의 발현이다. 우리와 다른 점도 있었다.종교든 생활 관습이든 주어진 환경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정 부분의 원형 이탈은 불가피한 것이다.우리의 경우 큰 나무에 영성(靈性)이 깃들었다고 보고 그걸 성황당으로 삼는 데 비해 그들은 그냥 평지에 돌무더기를 쌓아 어워로 삼았다.삼림지대가 아닌 망망대해 같은 초원지대에는 나무가 거의 없어 우리처럼 노거수를 토템의 대상으로 삼기가 쉽지 않은 탓일 것이다.이 때문에 우리는 나무 등걸에 색색의 천을 걸거나 금줄과 유사한 기능의 새끼줄을 걸쳐 공간의 신성성을 표시하는데 몽골에서는 돌무더기 가운데 통나무를 박아 장소성을 나타냈다.그들은 이 나무에 예외없이 파란 천을 친친 두른다.물론 다른 색의 천도 걸려있지만 주종은 파란색 천이다. 파란 색 천은 옛적부터 몽골인들이 외경의 대상으로 삼았던 하늘을 뜻한다.그러고 보니 우리가 탄 버스의 운전석 위에도 씨름 샅바처럼 만 파란 천이 가로로 걸쳐져 있다.이런 습속은 일반인의 생활에도 깊숙히 자리잡아 게르나 현대식 주택엘 들어서도 거의 예외없이 출입문 위에 가로로 걸쳐 놓은 파란 천을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하늘을 외경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충분히 이해됐다.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태양이 터를 잡은 곳이 하늘이고,철궁으로도 뚫지 못하고,천마를 달려도 다다를 수 없으니 어찌 그들이 하늘을 경외하지 않았겠는가.비록 지상에서는 동과 서,남과 북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는 대제국을 일궜을지라도 하늘 만큼은 그들의 발아래 꿇릴 수 없었을테니…. 그들이 하늘을 외경의 대상으로 삼은 흔적은 까마귀를 신성시하는 것에서도 확인됐다.그들도 우리처럼 까마귀를 ‘태양의 사자’라고 믿는다.그래서 사냥에 나설 때도 까마귀는 건드리지 않는다.만약 누군가가 까마귀를 해쳤다면 전쟁터로 가는 길이든,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이든 모두 포기하고 돌아온다고 한다.까마귀의 영성을 대하는 이들의 시각은 이 정도다. 이런 의식은 우리와도 닮았다.지금이야 까치는 길조이고,까마귀를 그냥 기분 나쁜 새로 여기지만 이는 근대 이후 우리나라에 이입된 서구적 의식의 영향 탓일 뿐 예전 우리 조상들은 까마귀를 영물(靈物)로 여겼다.몽골과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들도 까마귀를 ‘하늘의 사자’라고 여겼으며,이는 우리 신화 속에 깃든 삼족오(三足烏)의 전설이 입증해 준다.혹 어렸을 적에 할머니로부터 이런 얘기 들을 기억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아,글씨 이 망할 구미호(여우)가 어찌나 신통방통한 둔갑술을 가졌는지 도저히 어찌 해볼 요량이 없는게야.그래 그 사람이 이젠 죽었구나 하고 아예 땅바닥에 다릴 풀고 퍼질러 앉았지.그러고는 조상께 하직인사를 올렸지 뭐야.‘인자 죽게 돼 조상님들께 제사도 못 올리게 되었다고….’그랬더니 눈앞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게야.‘이 눔아,게서 죽으면 못써.얼렁 내가 일러준 주문을 외워봐.그러면 삼족오허고 삼족구가 와서 널 구해줄게다.’ 그래 정신이 퍼뜩 든 이 사람이 그대로 주문을 외았드니 금시 삼족오허고 삼족구가 와서 그 구미홀 쫓아내는거야.” 여기서 삼족오는 다리가 셋인 바로 그 까마귀이고,삼족구는 다리가 셋인 개를 말한다.이처럼 우리 의식 속에서는 둘 다 잡귀를 물리치고 주인을 지켜주는 신성한 영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삼족오를 일본이 잽싸게 건져내 자국의 축구 국가대표팀 문장으로 만들었다.사실 우리 축구대표팀의 문장에 넣은 호랑이는 애당초 우리 의식 속에 늘 있었던 것이어서 놀랄 일이 아니었으나 일본이 삼족오를 내미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 때 내 속으로는 “저들이 언제 우리 할머니 이바구까지 훔쳐 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무척 아까웠었다.생각은 그렇더라도 까마귀에 대한 이런 의식이 동양문화의 중추를 관통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이로써 대륙의 문명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확인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다른 문화의 유사성은 씨름에도 있었다.아워도 그렇지만 씨름도 우리 민족이 중국의 한족과 전혀 다른 문화적 혈통을 가졌음을 확인시키는 결정적 근거가 아닐까.씨름의 민속 벨트가 몽골-러시아 극동지역-한국-일본으로 이어져 중국이 배제되고 있다.인류문화사적으로도 중국은 우리와 전혀 다른 언어 및 인종적 경로를 갖고 있다. 몽골에서 ‘부흐’라고 부르는 씨름은 샅바를 이용하는 우리의 것과 형식적으로는 약간 차이가 있다.그러나 두 사내가 서로 맞붙어 힘과 기술을 겨룬다는 점에서는 똑같다.승패를 가르는 방식,즉 넘어뜨리면 이기는 승패 규칙도 매우 흡사하다.해마다 7월 11∼13일에 몽골 최대의 나담축제가 열리는데,이 축제의 3대 행사가 바로 부흐와 말타기,마상 활쏘기이다.여기에서 그들에게 부흐가 생활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몽골 역사상 올림픽 첫 금메달리스트가 된 유도의 투브신바야르 나이단도 원래는 부흐 선수였다.현지에서 듣기로는,그가 부흐를 배우다가 ‘세상이 바뀌어 이제는 부흐로 먹고 살기 어려우니 유도를 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유도선수가 되었단다.하기야 유도나 씨름이나 근본적인 역동의 원리는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는다. 몽골 체류 중 일행은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가장 큰 곳 중 하나라는 재래시장을 찾았다.소액(50토그르기)이지만 입장료도 내야 했다.뙤약볕 아래 제법 널찍하게 펼쳐진 재래시장은 예의 인파로 북적였다.갖가지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이 보도를 점령한 것도 우리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특히 냉차를 파는 노점은 옛날의 우리 모습을 다시 보는 듯 했다.온갖 잡화가 진열된 그곳은 생각과 달리 잘 정리되어 있었고,풍성했고,사람들의 표정도 밝아 보였다.이 시장은 울란바토르에서도 중산층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또다른 익숙한 광경도 눈에 띄었다.식료품 가게에는 감자와 마늘,양파가 즐비했다.현지 안내원에게 물으니 몽골인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식품들이라고 했다.우리와 다른 점은 어물전이 없다는 거였다.하기야 고비사막을 깔고 앉은 내륙도시 울란바토르에 신선한 생선이 있을리 만무했다.일행중 누군가가 우스개소릴 던졌다.“어디 가서 싱싱한 회나 한 접시 했으면 좋겠구만.” 이 시장이 매력적인 것은 몽골인들의 삶을 가감없이 드러낸다는 점이었다.시장 입구에 들어서니 ‘거리의 악사’가 눈길을 끌었다.초로의 여인이 짙은 화장을 하고 뙤약볕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아들인 듯 싶은 젊은이는 반주가 담긴 카세트를 켜들고 그 뒤에 물끄러니 서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의 옛날들이 스쳐 지나갔다.일제에 의해 전통적인 우리의 권번이 해체되면서 수많은 기생들이 거리로 내몰렸다.이를테면 그 이전의 관기(官妓)가 중심이었던 ‘공창 시스템’을 자본주의식 ‘사창 시스템’으로 전환시킨 조치였다.하루 아침에 일자리에서 내몰린 기생들이,그것도 ‘애기기생’들을 모두 떠나보내야 하는 늙수그레한 노털 기생들은 천상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그들은 전국을 떠돌며 잔치집을 전전하거나 노상에서 술과 웃음을 파는 들병이로 전락했다.이 몽골 여인의 삶의 내력을 알 수는 없었으나 길거리에서 기예를 파는 처지가 딱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양 한마리를 해치우는데 고작 20여분. 몽골을 떠나기 이틀 전,몽골 현지 ACC 책임자가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몽골의 자연형 국립공원인 테일지 초원의 게르로 나가 양고기 오찬을 대접하겠다는 것이었다.정중한 초청이었기에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일행 대부분은 이미 여러번의 현지식에서 양고기의 누린 맛에 적잖이 질린 터라 서로 마주보고 눈만 꿈벅거렸다.그때 일행중 한 명이 나섰다.“너무 양고기에 기죽은 표정들 하지 맙시다.이미 초청을 받았는데 안 간다는 것도 결례이고 하니 그냥 가볍게 초원으로 산책 나간다는 생각으로 갔다 옵시다.” 그렇게 해서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1시간 쯤을 달려 테일지 자연공원에 도착했다.그곳은 아름드리 삼림이 있고 바이칼호수에서 발원했다는 맑은 강물이 흐르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산의 능선을 타고 펼쳐진 바위가 마치 금강산의 풍광 한 폭을 뚝 떼어다 옮겨놓은 듯 아름다웠다.안타까운 것은 거기에도 개발 바람이 불어 그 울창한 원시의 수림대가 차차 망가지고 훼손된다는 사실이었다.테일지로 가는 길목 곳곳에 베어넘긴 거목의 시체들이 즐비했다.그곳에서 말등에 올라타고 두개의 야트막한 하천을 건너 한참을 가니 광활한 초원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상상해 보라.인공이 가해지지 않은 원시의 초원을 눈앞에 두고 선 나그네의 가슴 울렁거리는 희열을. 말인 즉 인공이 가해지지 않았다고 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그곳에는 양과 말,야크떼를 거느린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양털과 젖이 그들의 주수입원이었지만 가끔 게르에서 하루,이틀 묵으며 초원을 체험하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그곳 유목민들은 땟국에 절은 입성 말고는 어떤 문명의 티도 내지 않았다.예약된 게르에 들어서자 주인 사내가 딱딱하게 말린 양젖 버터를 권했다.마치 고구마 절편처럼 딱딱했다.맛을 보려고 입으로 가져가니 예의 누린내가 확 끼쳐 슬그머니 내려놓고 말았다. 게르 뒷편에서는 젊은 유목민 사내가 때맞춰 능숙한 솜씨로 양을 잡고 있었다.그걸 지켜보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살아있는 양의 네 다리를 잡고 땅바닥에 누인 뒤 고작 연필만 한 주머니칼을 꺼내 명치 부위에 10㎝ 가량의 칼집을 냈다.그때까지 양은 멀쩡하게 살아 맴맴거리고 있었다.이윽고 사내는 칼집으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검지를 대동맥에 걸어 뚝 하고 잡아뗐다.그걸로 끝이었다.양은 이내 목을 축 늘어뜨렸다.양의 숨이 끊어지자 사내는 손바닥을 밀어 익숙하게 가죽과 몸통을 분리했다.칼은 발목과 목을 분리할 때만 썼다.다음은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내는 일.가슴을 갈라 내장을 들어내고,흉곽에 그득한 피를 준비한 그릇에 담아 선지 순대를 만들었다.그의 아내인 듯 보이는 여성이 들어낸 내장을 익은 솜씨로 손봐냈다.순대와 내장,적당한 크기로 나뉜 몸통은 그대로 통속으로 들어가 삶겼다.양 한마리를 잡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여분 정도,그러는 동안 땅바닥엔 피 한방울이 흐르지 않았다.일을 마친 사내는 풀섶에 쓱쓱 문대 손의 피를 닦았다.양 한마리를 그렇게 잡도리했다. 일행이 담소하는 동안 삶은 양고기가 가득 든 통을 든 사내가 게르로 들어섰다.건장한 사내는 순박하게 웃어보이며 통 속에서 막 삶긴 뜨거운 양고기를 꺼내 칼질을 시작했다.익숙한 솜씨였다.통속에는 양고기와 함께 돌과 감자도 들어있었다.게르에 차려진 간이 식탁위에는 금세 맛있게(?) 삶긴 양고기가 그득했다.다릿살이며 내장에 양의 선지를 채운 양순대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술도 나왔다.말젖을 발효시킨 마유주였다.맛을 보니 시금털털해 아무래도 비위가 얇고 술에도 약한 필자가 감당하기엔 무리였다.일행 중 한 명이 “내 이럴 줄 알고 준비했지.”라며 술 한병을 꺼내 식탁에 올려놨다.몽골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칭키즈칸 보드카였다.독한 술이 돌자 처음엔 양고기 누린내에 고개를 모로 꺾던 사람들이 하나,둘 달려들어 안주 삼아 양고기를 맛보기 시작했다.더러는 “생각보다 먹을만 한데….”라는 후평을 내놓기도 했으나 준비해 간 고추장 맛으로 몇 점 먹어본 것이 고작이었다.30여명이 먹은 양고기가 너댓근에 불과해 보였다.남은 고기가 먹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맞았다.벌써 며칠째 밥 다운 밥 꼴을 못 본 필자는 그걸로라도 면허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고기덩이 속에서 삶은 감자를 골라냈다.그러나 양고기와 같이 삶긴 터라 감자든 고기든 누리기는 매 한가지였다.양고기와 양순대,간 등이 있었지만 누린내 때문에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그런 필자의 옆구릴 쿡,찌르며 귀엣말을 건넸다.“아직 배가 덜 고팠구만….” ■애들아,말 달리자.저 땅 끝까지. 오찬을 마친 일행은 초원으로 나섰다.초원에서 몽골 말을 타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말을 타려니 연전 터키의 한 시골에서 말을 타다가 엉덩이 꼬리뼈 부위가 벗겨져 곪는 바람에 며칠 혼쭐이 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말안장에 쓸린 상처 부위가 덧나 나중에는 차를 타건 비행기를 타건 한시도 의자에 바로 앉지 못했던 그 끔찍한 여행의 기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그걸 아는 필자로서는 말등에 올라서도 말이 제 멋대로 달리게 할 수가 없었다.말은 과천 경마장에서 내달리는 유럽형 경주마처럼 크지 않았다.키가 작달막해 보였는데 그래도 가까이 다가가니 등이 어른 키높이만 했다.바로 이 말이 옛날 몽골 전사들이 타고 세계를 아우른 그 말이라고 했다.순식간에 내달리는 속도는 유럽산 경주마에 뒤지지만 지구력이 좋아 오래 달린다고 했다.또 먹성도 까탈스럽지 않고 병에도 잘 견딘다니 전쟁터에 타고 나갈 기마용으로는 그만인 듯 했다.그러니 유난히 말을 사랑했다는 당태종이 이곳에서 명마를 골라 준마도,백마도(百馬圖)를 그리고 그 유명한 당삼채로 완성해내지 않았을까. 그렇든 말았든 꼬리뼈의 추억 때문에 고삐를 바짝 당겨쥐어 말이 뛰지 못하게 한 뒤 게르 주변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끝냈다.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나중에 보니 엉덩이 가운데 꼬리뼈 끝이 빨갛게 쓸려 있었지만 예전처럼 곪지는 않았다. 농사 유전자를 가진 한국인에게 말을 타는 일이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았다.거북하고 어색한 몸짓이 우스꽝스러웠는지 그곳 아이들이 바라보며 키득거렸다.태어나 걸음을 떼면서부터 말등을 떠나지 않은 그곳 아이들 아닌가.아닌게 아니라 고작 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잽싸게 말등으로 뛰어오르더니 ”츄∼츄∼”하는 입소리를 내며 가죽 고삐로 뱃골을 치자 말은 순식간에 초원 저편으로 질풍처럼 내달려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때 누군가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저 꼬마녀석들에게 뭔가 선물을 줘야 할텐데 그냥 주기도 뭐하니 말타는 모습을 좀 보여달라면 어떨까?” 그런 뜻을 게르 주인에게 전했더니 주인 사내는 한 술 더 떴다.“이 마을(마을이라야 게르 서넛이 멀찍이 자리잡은 것에 불과했다.)에 저 또래 아이들이 모두 여섯인데 그들에게 목표를 정해 말타기 경주를 시켜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모두가 동의했다.하는 김에 5달러씩 걸어 이긴 사람이 본전을 제하고 나머지를 애들 시상금으로 주자고 제안했다.주인이 제안한 터라 딱히 그 사람들이 기분 나쁘게 여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자고 동의하자 주인이 초원을 향해 높은 톤으로 소릴 질렀다.멀리 있는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였다.잠시 후 여기저기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그들 뿐이 아니었다.아낙들,젖먹이들도 모두 눈을 반짝이며 게르 앞으로 모여 들었다.꼬마들은 제각각 아끼는 말을 골라타고는 고삐를 바투잡고 나란히들 섰다.그들은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듯 했다.우리야 한번 말등에 오르내리려면 기를 써야했지만 걔들은 가볍게 말등을 오르락거렸다.말에 올라탄 꼬마들은 뭐라고 주문을 외며 우리가 든 게르 주변을 천천히 열바퀴 돌았다.몽골의 전통적인 출정의식이라고 했다.이윽고 목표가 정해지고 모두 출발선에 섰다.목측으로 2000m쯤 되는 거리였다.사내가 신호를 하자 고삐를 꼬나쥔 꼬마들이 초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옛날의 몽골 전사들이 저렇게 내달려 도버해협과 북해의 거친 해안까지 다다랐던 것은 아닐까.그들의 모습에서 영화로웠던 칭키즈칸과 그의 아들 오고타이,손자인 쿠빌라이칸의 시대를 보는 것 같았다.그 모습은 시공을 초월해 그들이 말(馬)을 매개로 엮어진 불가분의 의식공동체임을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애들이 말을 몰아 목표를 돌아오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얼굴이 발그레 상기된 아이들은 사내의 지시에 따라 마상에서 뭐라고 몇 번 고함을 지른뒤 훌쩍,훌쩍 뛰어내렸다.그들이 마상에서 내지른 소리 역시 무사히 말을 타게 해 줘 감사하다는 일종의 주문이라고 했다.논의 결과 아무리 애들이 수고는 했지만 직접 돈을 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여겨 사내에게 모은 돈을 한꺼번에 건넸다.그렇게 모은 돈이 한 40 달러쯤 됐다.사내는 한 켠으로 아이들을 불러모은 뒤 뭐라고 얘기를 나눴다.아이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잠깐 말 타는 것을 보여줬을 뿐인데 돈은 무슨 돈이냐는 투였다.거기까진 우리가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황무지 제국에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구름 한점 없는 하늘 한 켠이 마치 불길이라도 이는 듯 선홍빛으로 타들었다.대륙의 장엄한 노을이었다.타드는 것이 하늘 뿐만은 아니었다.하늘과 맞닿은 대지도 붉게 달아올랐다.그 노을 속으로 누군가가 말등에 지친 몸을 싣고는 하염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그의 뒤를 키 작은 양떼들이 따랐다.유목의 사내일 것이다.그 모습에서 문득 몽골의 전사들을 이끌고 천하를 휘저을 때 남긴 칭키즈칸의 말이 떠올랐다.“성벽을 쌓는 자는 망하고 이동하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랬다.비록 그 말이 옛적 유목의 부정형 삶을 두둔하고 옹호하는 의미였을지라도 우리는 지금 그 의미를 결코 백안시할 수도,도외시할 수 없다.오늘날에도 그 교조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몽골의 거친 황무지,그 황무지와 하늘을 가장 단순하게 구획하는 일획의 지평선 위로 비장하게 물드는 노을.뜨겁게 달아 올랐다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스러져 가는 그 노을에서 장대했던 몽골의 옛 제국을 보았다.참으로 비장했던 제국의 영화와 끝.그 노을을 응시하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문을 닫았다.자연이 연출한 그 무위의 파노라마 앞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전율 말고 무슨 영탄이 필요할 것인가.몇몇은 풀섶에 가만히 주저앉아 술병을 땄다.보드카였다.독한 술이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 순식간에 흉금을 적셨다.노을에 함뿍 적신 얼굴 위로 서서히 술기운이 돌았다.노을과 사람이 함께 익어드는 것 같았다.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한 노래가 거친 풀섶으로 나즈막히 흘렀다.“천등사안 바악딸째를 울고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노래는 다시 이어졌다.“아아∼∼ 신라의 바아암이이이여 불국사의 종소리가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아그네에에여어 거∼얼음을 머어엄추어라 고오오요오하안 다아알빛아래….” 그 노래가 그 시각,그 자리에서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따지지 않았고,또 생각하지도 않았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장대한 자연의 섭리를 앞에 두고 터져나온 노래야말로 가장 진솔한 정서의 토로 아니었겠는가. 이윽고 맞은 저녁.몽골의 밤하늘은 별들의 천국이었다.장관이었다.요요한 풀섶에서 쳐다보는 밤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하게 박혀 형용할 수 없는 자태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휘∼ 손을 내저으면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았다.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았던 그 광경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그 모습이 고스란히 몽골의 초원에서 재현되고 있었다.아주 오랫동안 뒤로 고개를 꺾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가슴이 울렁거렸다.기대하지 않았던 만남이 주는 설레임 때문이었다. 그 싱싱하고 영롱한 별들이 어느 새 술병 속에 떨어져 잠겼는지 몇 잔을 마신 보드카가 이내 목에 턱턱 걸렸다.그렇게 술과 함께 삼킨 초원의 별들이 훗날 내 속에서 어떻게 되살아날까. 봉사단원들은 모처럼 가진 초원에서의 휴식에 모두 흡족해 했다.ACC 김종구 총재가 일행과 함께 하며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꽃향기는 황홀해 보여도 산 하나를 넘지 못하지만 남에게 베푸는 봉사의 향기는 국경도 넘는다.” 사실 일상에 쫓기며 살아야 하는 갑남을녀가 ‘봉사’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그러나 김 총재의 말마따나 “봉사는 마약”인지도 모를 일이다.그렇지 않고서야 선뜻 사재를 털어 빈민에게 새 게르를 지어주기는 쉬울 것이며,자신의 직장일을 뒤로 하고 1년에 몇 차례씩 해외 봉사활동을 나서기는 또 쉬울 것인가.봉사활동 말미에 가진 한·몽 ACC 자평모임에서 김 총재는 이런 말을 했다.“재산이 많아 하는 봉사는 자선일 수는 있어도 엄밀한 의미의 봉사는 아니다.봉사는 자신의 여건을 초월해 나서는 것이다.세상에 아무 것도 잃지 않고서 할 수 있는 봉사란 없다.” 일행을 이끈 아시아 사랑나눔의 배용민씨는 현지에서 정을 나눈 안내원들과 따로 어울리며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눴다.그가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고생할 때는 두번 다시 몽골엔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초원에서 밤을 맞으니 그 생각이 틀린 것 같습니다.이걸 보고 몽골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랬다.사실 몽골에서의 체험은 매우 특이했다.그러나 누린 먹을거리에 곤죽이 되고,태양에 주눅이 들었어도 그것이 잘 사는 나라에서 항용 겪는 무관심이나 비하와 모욕의 체험은 아니었다.사람들은 순박했고,지혜로웠다.손님을 대하는 태도도 정성스러웠다.그런 정성이 양고기의 역겨운 노린내를 지우고도 남았다. 애당초 봉사하자고 나선 길에 무슨 호의호식을 바라겠는가.그런 생각이 봉사의 취지를 훼손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지며 더 많은 땀을 쏟지 못한 아쉬움이 가슴으로 잔잔하게 배어들었다.밤이 지나면 다시 저 망망한 대지 위로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그리고 그 태양의 순환처럼 이 황무지에도 연대와 공유의 찬란한 세상이 다시 열릴 것이다.그렇게 기원했다. 글·사진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첫날밤 신부처럼 긴장되고 떨려”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이 벌렁벌렁거렸습니다. 마치 첫날밤 보내는 신부처럼 긴장이 되기도 하고….”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시집 ‘허공’(창비)을 펴낸 고은(75) 시인은 1일 기자들과 만나 “등단 반세기가 지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제 막 시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1958년 현대문학에 ‘봄밤의 말씀’이 추천돼 등단한 시인은 시는 물론 소설, 산문, 평론 등 장르를 넘나드는 전방위적 글쓰기 작업을 벌여왔다. ●후반기 詩作도 질풍노도 될 것 표제시를 비롯해 ‘추억 하나’‘여생’‘응애응애’ 등 107편이 실린 이번 시집에는 시작활동 반세기를 정리하는 시점에서 시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시인의 초심이 그대로 녹아 있다.“나의 미래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예측할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시작 활동은 이제 후반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죠. 이 후반기가 아마도 내겐 또 다른 질풍노도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그 같은 맥락에서 시인은 허공과도 같은 시의 시원(始原)으로 되돌아가려는 재출발의 의지를 불태운다.“보게/저 지긋지긋한 시대의 거리 지나왔거든/보게/찬물 한모금 마시고 나서/보게/그대 오늘 막장떨이 장사 엔간히 손해보았거든/보게 백년 미만 도(道) 따위 통하지 말고/그냥 바라보게/거기 그 허공만한 데 어디 있을까보냐”(‘허공’ 중에서) 허공의 텅빈 충만, 그것은 정형화된 것은 죄다 거부하고 모든 것을 근원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이내 백지처럼 하얀 공간에서 새 출발의 몸짓을 취한다. 시적 후반생을 시작한 시인의 다음 시집 제목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시인은 직접 ‘멧비둘기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라는 이름을 붙였다.“여름에 많이 우는 멧비둘기 소리는 처음엔 너무 듣기 싫었어요. 소리가 탁하고 뭔가를 토해내는 것같아 찝찝했던 거지요. 그런데 여러번 들어 보니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게 되더군요. 어머니의 소리 같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남긴 뜻 같기도 하고…. 향토의 피가 녹아들어 있다고 할까요.” 멧비둘기가 울 때마다 글이 잘 써져 그냥 다음 시집 제목을 그렇게 정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림에도 도전… 4일부터 전시회 시인은 시작활동 외에 그림 그리는 일에도 본격적으로 도전해 볼 참이다. 그 첫 무대가 바로 4일부터 서울 순화동 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그림전 ‘동사를 그리다’다. 시인이 직접 그린 그림 35점과 글씨 19점이 출품된다.“그동안 화가 ‘천경자론’과 이중섭 평전 등을 써왔는데, 어느 순간 내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더군요. 사실 어릴 때 나의 꿈은 화가였어요. 그림을 통해 모든 끼를 발산하고 싶었던 거지요. 지난 여름 그림의 포로가 돼 17일동안 정신없이 그린 것을 이번에 선보이는 것입니다.” 시인은 1986년 첫 출간한 한국문학 최대의 연작시집 ‘만인보’도 내년초 30권 분량으로 완간할 예정이다. 문필활동에 그림작업까지, 그 멈출 줄 모르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느냐는 물음에 노(老)시인은 이렇게 답했다.“한마디로 ‘신명’이지요.”신명이 나면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한 것 아닌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등단 50주년 고은 시인 화가 변신

    등단 50주년 고은 시인 화가 변신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는 고은(75) 시인이 화가로 변신한다. 시인은 새달 4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순화동 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등단 50주년 기념 그림전 ‘동사를 그리다’를 통해 그림 솜씨를 선보인다. 고은문학50년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도종환)가 주관하는 이 그림전에는 시인이 직접 그린 회화 35점과 글씨 19점 등 모두 54점이 출품된다. 군산중 2학년 때부터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기 전까지 학교 미술반에서 활동하는 등 그림에 남다른 애착을 보여온 시인은 이번 전시를 위해 조각가 구성호씨의 작업실에서 17일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앞으로 작업실을 마련해 본격적으로 유화를 그리고 싶다는 뜻도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8일에는 시인의 문학세계를 돌아보는 ‘고은 문학 심포지엄’이 중앙대에서 열리고, 각국 대사들이 주축이 된 주한 외교사절단의 고은 시 낭송회와 문학밴드 ‘북밴’의 고은 시 노래 공연 등 시인을 조명하는 부대 행사도 함께 열린다. 시인은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 등이 추천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연작시편 ‘만인보’, 서사시 ‘백두산’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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