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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용 민자의원의 IPU총회 참가기/평양 8박9일:4·끝

    ◎“평양 위해 북한 있는듯”… 지역불균형 극심/주재 2년 외국기자,일반 가정에 못 가봐/웅장·신묘한 금강산에도 곳곳 「붉은 구호」 『도시는 사람을 위해 편리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평양은 사람들의 생활과는 관계없는 공간과 건축물만 있는 이상한 도시이다』 이번 IPU총회에 참석했던 칠레 대표단 가운데 건축전문가인 한 의원의 말이다. 평양의 도로는 넓고 깨끗했다. 특히 중심가에 들어선 각종 공공건물은 주로 석조에다 대형건물이었다. 내부에는 최신식 에스컬레이터와 호화스러운 샹들리에까지 설치해 있어 아주 멋있었다. 그러나 도시 안에서 숨쉬고 움직여야 할 사람이 없었다. 드넓은 차도에는 차량통행이 드물어 마치 서울에서 민방위 훈련을 실시할 때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마술에 걸린 평양이라는 거대한 성 안에는 백설공주 대신 주민들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거리나 건물 곳곳에 똑같은 붉은 글씨체로 주문처럼 나붙어 있는 각종 대형 구호들. 「속도전」 「주체사상만세」 「우리는 부러움이 없읍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합니다」 「위대한 어버이 김일성 수령만세」. 살아있는 신인 김일성의 주술에 걸려 주민들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남쪽에서 불어 올라가고 있는 통일의 봄바람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민들이 안타까웠다. 현재 평양인구는 약 2백만명인데 원주민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함경도 등지에서 「평양주거령」에 따라 뽑혀 이주해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모든 재원을 평양에만 투자,극심한 지역 불균형 현상을 빚고 있으며 주민들 사이에는 『북조선은 평양을 위해 존재한다』는 유행어가 나돈다고 한 외국 특파원이 귀띔했다. 평양의 교통수단은 지난 1일부터 개통한 궤도버스와 종전의 무궤도버스 및 지하철이 주종이고 그 밖에 일반버스와 택시가 있다고 했으나 필자가 체류하는 동안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은 물론 택시 자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더욱 이상한 점은 시내 곳곳에 고층 아파트가 한창 건설되고 있었으나 우리와는 달리 대부분의 아파트가 일반 주택지를 가로막아 마치 앞울타리를 친 형태로 들어서고 있었다. 초라한 주택가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짓는 것으로 느꼈다. 평양에는 또 지체장애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필자는 안내원에게 『평양에는 소아마비환자나 선천적인 심신장애자들이 왜 안 보이느냐』고 물었다. 『예방약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소아마비환자가 없다. 선천성 불구자들이 있긴 해도 학교에서 선생들이 잘 가르쳐 문제가 없다』고 안내원은 대답했다. 『그러면 장애자들을 위한 특수학교가 있느냐』고 또 묻자 안내원은 『잘 모르겠다. 조사해서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겉으로는 잘 정돈된 도시처럼 보이는 기형적인 도시 평양에는 불구자가 살 수 없다고 했다. IPU총회 때 만나 친해진 서방공산국의 한 통신특파원으로부터 필자는 1시간30분쯤 평양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2년간 체류하고 있다는 이 특파원은 『북한 당국이 싫어하는 기사를 쓰거나 함부로 말을 하면 당장 쫓겨나기 때문에 말조심을 해야 한다』면서 무척 신경을 썼다. 필자가 『북한 주민들의 생활의 질이 어느 정도냐』고물었으나 『주민들은 취재하려면 사전에 질문요지서를 제출하고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일반가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외국특파원들이 살고 있는 기자촌은 철저히 감시·통제받고 있어 아주 제한적인 취재활동만 해야한다』 『혹시 길을 가다 주민을 붙잡고 몇마디 말을 꺼내면 언제 나타났는지 통제원이 나타나 가로 막는다』고 설명하며 『한 마디로 무서운 사회』라고 덧붙였다. 이 특파원은 필자와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질 때 『이런 얘기들을 내가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얼마 전 소련의 이즈베스티야 기자처럼 추방된다』면서 비밀로 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번 북한 방문에서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것을 직접 체험했지만 금강산 관광은 참으로 인상깊은 일 중의 하나였다. 지난 3일 하오 7시에 우리 일행은 원산을 거쳐 금강산 입구인 온정리에 도착,구룡포 입구에 있는 「금강산려관」에 들었다. 이 여관은 그 일대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했으나 시설은 우리의 장급 여관 수준이었고 우리 일행 외에는 재일교포 2명만이투숙해 관광지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옥류동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았고 오랜 세월 물에 하얗게 씻긴 바윗돌이 봄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찾는 사람이 적은 탓인지 어디에서도 전혀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고 쓰레기통도 안 보였다. 높이 94m의 구룡폭포의 웅장함,마치 거대한 에메랄드 8개로 목걸이를 만든 것 같은 팔담,희끗희끗한 잔설을 안고 열은 구름에 가리워진 비로봉,기기묘묘한 형태로 보는 각도에 따라 온갖 모습을 보여주는 만물상. 금강산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신묘하고 아름다웠다. 필자를 비롯한 동료의원들은 모두 넋이 나간 듯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강산에 새겨진 붉은 구호들,「위대한 수령…」. 나는 빼어난 금강산과 조국통일을 한꺼번에 훼손시키고 있는 거짓된 허언들을 두 손바닥으로 피나도록 문질러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미스터리 표석”… 금석학자 임창순씨가 규명

    ◎청와대 경내 「천하…」 암각은 남송의 오거 글씨/중국명승 금산사 「제일강산」 현관과 동일 추정/풍화정도 미뤄 1백50년전 탁본해와 새긴 듯 청와대 경내에 새로 신축된 대통령관저 부근에서 지난 2월 발견돼 화제를 모았던 「천하제일 복지」라는 암각(본보 2월23일자 보도)의 미스터리가 풀리고 있다. 발견 당시 이 암각(암벽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은 지금부터 3백∼4백년 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었을 뿐 그 정확한 연대나 글씨를 쓴 「연릉 오거」에 대한 의문이 규명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암각을 자세히 살펴보았던 우리나라 금석학의 대가 청명 임창순 옹은 최근 글을 새긴 연대는 지금부터 1백50년 정도밖에 안되었고 오거는 지금부터 8백년 전인 12세기 중국 남송시대의 명필이라고 밝혔다. 임 옹은 『비록 암각이 경사면에 지면과 수직으로 있어 정면으로 노출된 것보다는 풍화가 덜 된다 하더라도 화강암에 음각한 획의 풍화 정도가 깨끗하다고 할 만큼 매우 낮다』고 말하고 『화강암의 석질이 본래 비바람에 약한 점을 고려할 때 1850년 전후 연대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암각의 제작연대를 1백50년 전 이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려우며 우리의 고려후기와 같은 시대사람인 남송의 오거가 6백50년 뒤에 조선에 와서 글을 썼을 리는 없다는 말이다. 결국 조선조 말기인 1850년 전후 누군가 중국에 가서 오거의 글씨를 탁본해와 이 자리에 새긴 것으로 추측된다. 오거가 쓴 글씨 가운데 「천하제일 복지」라고 쓴 것은 없지만 「천하제일 강산」이라고 쓴 대형횡액은 지금 중국 남경부근 명승지 진강 어귀에 있는 금산사에 남아 있다. 지난 25일 준공된 대통령관저 별채 뒤편으로 30여m 떨어진 비탈진 언덕에 있는 「천하제일 복지」 암각의 크기는 가로 2m50㎝,세로 1m20㎝이고 글씨 한자의 크기는 가로 세로 50㎝,획의 굵기는 9㎝이며 글씨체는 해서와 행서의 중간서체이다. 「천하제일」이라는 네 글자는 금산사의 이 글씨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3월 기자가 중국에 갔을 때 상해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상해∼남경 일대 전문관광 가이드 왕대쇄 씨(54ㆍ상해시 해구국제여행사 관광통역사)는 『금산사에는 여러번 가보았는 데 「천하제일 강산」이라고 쓴 글씨는 매우 유명하다. 글자 한자가 승용차 문짝만하고 획의 굵기는 손바닥만 하다. 글씨크기 등에 비추어 한국에 새겨져 있는 것과 같은 글씨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왕씨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복」자와 「지」자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점에 대해 임창순 옹은 『오거가 남겨 놓은 서첩이나 비문글씨 등에서 두 글자를 찾아내 집자(필요한 글자를 모아 사용하는 것)하여 글씨를 새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경우 과연 같은 크기의 오거 글씨를 착기가 쉽지 않을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복」자와 「지」자가 오거의 글씨가 아니라면 바위에 글을 새길 당시 조선의 서예가가 두 글자만 오거의 서체로 모사해 끼워넣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천하제일복지」라고 쓴 왼편 아래 낙관자리에는 작은 글씨로 「연릉 오거」라고 씌어있는데 연릉은 오거의 아호가 아니라 오거의 본관이 중국의 연릉 오씨이기 때문이며 옛 중국에서는 흔히 자신의 출신본관을 이름 앞에 썼다는 것이다. 상해박물관이 지난 88년 처음 펴낸 중국서적대관 제6권 오거편에 보면 그의 호는 운학이며 생졸년은 미상이나 남송의 소흥(고종)에서 경원(영종)간에 살았던 사람으로 돼 있다. 오거의 글씨는 「험하고 가파르고 갑자기 꺾어지는」 형세를 보이면서도 「글씨의 맺음이 정교하고 원숙해 보는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평가되고 있다. 「1백50년전」 추정의 오차를 20∼30년으로 본다면 1860년대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착수하여 완공을 한 시기와 일치한다. 대원군은 당시 피폐한 재정사정에 비추어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상징조작을 했다. 그중 하나는 경회루 주춧돌 아래에 「왕궁조영 국조무궁」이라는 글자를 새긴 옥반을 묻어두었다가 우연히 발견해낸 것처럼 하여 경복궁 중건이 선인들의 뜻이라는 식으로 합리화시키려 하기도 했다. 지금의 청와대 주변 터는 본래 경복궁의 후원이었고 암각의새겨진 시기가 경복궁 중건시기와 엇비슷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천하제일 복지」를 새긴 것은 대원군의 작풍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 봄직하다. 지난 25일 준공식이 있던 날 다과회석상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신축공사를 하기 전에는 이 주변이 바위와 계곡으로 돼 있어 과연 집터가 나오겠느냐고 생각했는데 다 짓고 보니 집터가 훌륭하다』면서 『「천하제일복지」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발견될 때만 해도 집터로서 정말 모양이 갖춰지겠느냐고 의아해 했다』고 술회했다.
  • 청와대 경내 대통령 관저 신축지/“천하명당” 4백년전 표석 발견

    ◎공사중 우연히 드러나 「풍수설」 화제로/화강암 암벽에 「천하제일 복지」 음각/글씨크기 가로ㆍ세로 50cm… 해서체로/정도전도 “명당” 지목… 낙관자리 「연릉 오거」 규명이 열쇠 청와대 구내 대통령관저 신축공사장 바로 뒷산 암벽에 천하 명당자리라는 표석이 최근 발견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표석은 수직으로 된 화강암 암벽을 깍아 가로 2m50cmㆍ세로 1m20cm의 암벽면에 「천하제일복지」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글씨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50cm,획의 굵기는 9cm인데 해서체로 씌어있다. 낙관자리에는 가로 세로 12cm 크기로 「연능 오거」라고 새겨져 있어 이 표석의 글을 쓴 사람이 아닌가 여겨진다. ○획 굵기는 9cm 정도 청와대측은 지난 20일 우리나라 금석학의 태두인 청명 임창순옹을 초빙,1차 감정한 결과,글을 새긴 연대는 지금부터 3백∼4백년전인 조선조 중기쯤으로 추정되며 글씨체로 미뤄 중국 청대의 서체 영향을 받은 것같다는 의견을 들었다. 「연능오거」의 인적사항이 규명되면 더 정확한 내용이 밝혀질 것으로 보이나조선조때 서예대가로 오거라는 인물이 없는것 같고 연능이 아호인지 아니면 연능에 사는 오거인지도 불확실하다. 오거가 명필이 아니라면 조선초기나 중기의 풍수지리에 밝은 역학가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대통령 관저를 신축하는 터에 「천하제일복지」라는 선인들이 새긴 표석이 기초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은 무언가 길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표석이 발견된 암벽은 현 청와대 본관에서 동북쪽으로 계곡을 지나 1백50m 떨어진 가파른 지역인데 암벽 전면이 나무로 가려져 있는데다 이 쪽에는 길이 없어 그동안 전혀 눈에 띄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작년 5월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으로서 총독관저로 사용해온 현 청와대 건물 대신에 대통령 집무실(현 본관의 서북쪽 1백50m)과 함께 관저를 이곳에 새로 착공하면서 최근 공사를 위한 배수로를 치다가 이를 발견한 것이다.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는 북악의 언저리는 본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이태조가 서울로 천도할때부터 궁터로 점지되었던 곳이다. 한양천도 당시 무학대사는 지금의 인왕산 자락에 동향으로 도읍을 정하자고 한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중심으로 남향으로 도읍을 정하자고 주장,이태조가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결국 지금처럼 북악산의 정남쪽에 경복궁을 창건하게 된 것이다. 한양천도 당시 풍수지리에 따른 주산(터를 등지고 있는 산) 결정과 도읍의 좌향 논의는 차천로의 오산설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학이 한양의 세를 보며 인왕산을 진산(주산)으로 삼고 백악(북악)과 남산으로 좌우의 청룡ㆍ백호를 삼으라고 하니 정도전이 자고로 제왕은 남면하여 다스리는 것이지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따라서 궁궐은 임(서북서)좌병(남쪽)향하여 백악현무,인왕백호,낙산청용으로 해야 한다』 청와대 주변 터는 한양천도 이전인 이미 고려 숙종때 지기가 쇠해가는 송도의 왕업을 연장하기 위한 이궁터로 선택됐다. 지금부터 9백28년전인 숙종9년(1062)에 이궁을 지었으나 1백50년이 채 못된 고종19년(1210)에는 강화천도와 더불어 폐기되었다. 조선조에 들어 이 자리가 경복궁 후원으로 단장된 것은 세종8년(1426)이었으며 서현정ㆍ취로정ㆍ관전ㆍ충순당ㆍ융문당ㆍ융무당ㆍ경농제ㆍ연무장ㆍ과거장 등을 설치했다. 그후 국운의 흥망에 따라 성쇠를 함께해 임진왜란 이듬해(1593) 경복궁의 소실로 황폐화되었으며 고종8년(1868)에 경복궁이 재건되자 이곳 또한 과거ㆍ열무ㆍ근농의 행사 등이 치러지는 후원으로 옛 영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일제의 본격적인 조선왕실 유린으로 이곳도 훼손돼 융문당ㆍ융무당 할것 없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조선조때 건물도 남아있는 것은 약간 자리를 옮겨 일부 복원된 것이긴 하지만 별채와 같은 20평 남짓한 침유각과 2평 가량의 오운정이 옛날의 향취를 다소나마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 건물은 일제 식민통치의 제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남차랑)가 착공,중일전쟁으로 한차례 공사를 중단하는 곡절을 겪으며 착공 2년반만인 1939년 9월 준공을 했다. 당시 미나미는 남산의 왜성대,용산의 사택,현 적십자병원 자리의 임시사택 등을 옮겨가며 식민통치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사택 신축 부지를 물색하던 중 경복궁의 후원으로 경복궁이 눈아래 보이는 이곳을 택했다. ○청대 서체 영향 받아 일제는 조선 주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리기 위해 그 전면에 총독부 청사(현 국립박물관ㆍ구 중앙청)를 지은데 이어 그 후면에 총독관저를 지어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에 있어 용맥을 끊어 놓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항설에 의하면 일제는 경성부 청사(현 서울시청)­총독부 청사­총독관저로 이어지는 남향축이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할 당시 북악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 왕궁을 건설한 풍수의 맥을 압살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공중에서 보면 경성부 청사건물이 「대」자형,총독부 청사가 「일」자형이고 총독관저 건물 구조가 「본」자형으로 돼있어 동대문쪽에서 서대문쪽을 바라보면서 이를 읽어보면 「대일본」으로 읽혀진다는 항담도 있다. 그러나 풍수에 밝은 술가들 사이에는 당시 일제의 총독관저 자리 물색에 징발되었던 조선인 풍수지관이 본래 「임좌병향」의 북악의 용맥과는 약간 비켜나 있는 현 위치를 잡아주어 그 건물에 기거하게 되는 총독들이 망하도록 했다는 구전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알수 없지만 이번에 발견된 표석이 북악의 혈(풍수에 있어 음양이 합해지고 산수의 정기가 응결된 곳)에 해당되는 곳이라면 그럴법도 하다. 청와대 당국이 현재의 이 본관건물을 역사의 전면에서 퇴진시키고 새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짓기로한 결정적인 동기도 이 건물이 지난 반민족적 역사성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독립한지 45년이 되고 전인류의 축제인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세계 10대 무역국가로 부상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식민통치의 채찍을 휘두르던 일제 총독의 사택을 집무실겸 거처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민족자존을 국정의 제1 지표로 내건 6공화국 정부의 이념에는 물론 민족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 집무실의 건물은 영빈관쪽 출입문과 직선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본관 건물 서쪽 뒤편 구릉에 신축되고 있으며 한옥지붕 양식의 2층으로 총건평은 현재 본관 건물(1층 집무실ㆍ2층 대통령 살림집)의 9백평 보다 약간 적은 8백평 규모이다. 완공시기는 내년 상반기쯤으로 잡고 있어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후반부 1년반을 이곳에서 집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관저는 명당표석이 발견된 곳으로 부터 남쪽 아래로 50여m 떨어진 곳에 동향인 본채와 남향인 별채로 나뉘어 지어지고 있는데 역시 한옥 양식의 단층으로 건축되며 총건평은 8백평 가량 된다. 관저는 빠르면 금년 9월께 완공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집무실과 관저가 모두 한국전통의 청기와 지붕형태로 건축되기 때문에 이미 사용하고 있는 영빈관 건물,그리고 오는 7월쯤 완공되는 보도관(프레스 센터)건물 등이 한데 어우러져 현 청와대 경내는 우리 고유의 전통건축미로 조화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청와대측은 앞으로 집무실과 관저가 완공되면 현재의 청와대 본관 건물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부터 윤보선ㆍ박정희ㆍ최규하ㆍ전두환 전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에 관한 자료를 보관,전시하는 기념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길조로 받아들여” 대통령 관저의 신축장소가 명당표석이 발견된 지점과 일치된데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청와대 주변지반은 대부분이 암반이어서 공사하기에 쉽게 좀 넒은 터를 찾아보니 이곳이 눈에 띄었을 뿐』이라며 『전적으로 우연이었다』고 설명했다. 「천하제일복지」라고 새긴 표석의 역사적인 고증은 앞으로 전문가들의 조사와 검토가 더 있어야 밝혀지겠지만 현 본관건물 2층에서 기거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뒤끝이 별로 좋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풍수지리설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새 관저 신축을 계기로 대통령의 임기가 평화롭게 끝나고 물러나서도 국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전직대통령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 미8군 부지에 「자연사 박물관」/문화부 업무보고 내용

    ◎전국을 문화공간화… 서울ㆍ지방간 문화벨트 조성/1백만 문화가족운동ㆍ사랑의 편지보내기도 추진 문화부가 12일 올해 업무보고에서 밝힌 주요사업계획의 항목별 추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화적 동질성회복◁ 가,원형발굴과 보존화 작업=자연사 박물관을 용산 미8군 이전부지내에 건립추진(90∼98년),상해임시정부 청사등 역사적 기념물의 복원검토,한국상징신화사전 편찬및 문화지도 제작,역사적 문화현장 되가꾸기. 나,표준화 작업=한국어 표준어법의 기준화,산업화에 따른 한글 글씨체 연구개발,우리고유의 색상및 색명정하기,전통 기본음의 표준화,생활습성의 변화에 따른 기준제시. 다,남북한 문화의 동질성회복=분단이전의 민족공동체로서의 민속문화교류등 문화교류 원칙제정,통일탑 건립및 통일민속잔치 개최(정월대보름ㆍ단오절ㆍ추석),어문ㆍ학술자료의 교환과 문화재 등 교류전시. ▷문화향수권 신장◁ 가,전국토의 문화공간화=서울및 지방에 문화벨트 조성,기존시설의 문화공간화,아름다운 도시,밝은 도시 가꾸기의 일환으로 환경문화 시장제도신설및 고지대등 문화소외지역에 쉬어갈 수 있는 「쌈지공원」과 50∼1백평 규모의 유휴지에 놀이시설을 갖춘 「쌈지마당」만들기. 나,문화의 지방화=지방의 폐교된 국민학교 시설등을 활용한 시범문화마을 가꾸기,문화사랑방운동을 통한 내고향문화 일으키기,지역문화시설 확충및 공공문화시설의 연계. 다,기업문화육성=시범기업 문화조성등 기업문화의 모형을 만듦. ▷문화참여권 유도◁ 가,까치소리전화운영 적극 추진. 나,1백만 문화가족운동=문화가족 자원봉사자 구성,좋은 문화프로그램 참여유도,「멋진 생활,신나는 생활」운동 전개. 다,문화그림엽서 보내기=청소년에게 「사랑의 편지」「희망의 편지」보내기 운동 적극 전개. ▷창작지원정책◁ 가,창작지원공동시설 조성=충남 아산 외암리등 6개 민속마을을 예술창작마을로 활용,예술인의 집(서울 동숭동 홍릉 90∼92년),종합영화촬영소(경기도 남양주군 45만평 90∼92년),무대미술지원회관(경기도 고양군 2천3백평 90∼91년)건립. 나,예술인 창작활동 지원=엘리트 예술인 조기발굴 지원,유명예술인지원 제도화,문화예술인 연금제도 운영. ▷한국문화의 세계확산◁ 가,교민주축 한국문화의 세계화=「한민족 문화대축제」순회개최,중소거주 교민대상 예술단 파견,해외동포 예술가의 활동지원,해외 지역별 소수민족 문화행사 참가지원. 나,한국문화의 세계화=왜곡사례 수집등 「우리문화 바로잡기 운동」전개,한국어의 세계적 보급확대,전통문화 상품의 국제적 보급확대,90북경아시안게임,93대전무역박람회 등 주요 국제행사를 계기로한 한국문화 수출 추진. 다,국제화의 시각을 통한 민족문화의 새로운 조명=광복절등 민족절을 세계적인 문화이벤트로 승화,91년중 대합창등 각종 공연및 이벤트 창출. 라,비동양인 대상 국제전 신설추진=서양인을 대상으로 동양화 서예 도예 국제전 등을 개최,한국이 동양문화의 중심국이 되도록 함. 마,뉴미디어시대의 문화적 대응=한글 어문소프트웨어 개발,전산화 통한 문화예술정보 전달체계 확립,과학화시대의 놀이문화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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